매일성경 묵상
두아디라, 이세벨과 처음 것 사이에서 [계 2:18-29]
 – 2025년 07월 05일
– 2025년 07월 05일 –

계 2:18-29 두아디라, 이세벨과 처음 것 사이에서

두아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다.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 이세벨의 교훈으로 위기에 처한 교회다. 두아디라는 소아시아 경제의 중심지였는데, 바알의 경제사상이 어떻게 공동체를 파괴하는지를 보여준다. 두아디라 교회는 경제적 풍요와 성장을 추구하다가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렸다.

 

1.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칭찬과 책망(18~21절)
18절은 수신자와 발신자를 언급하는데, 요한계시록 안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른다. 이는 두아디라의 수호신 아폴로가 ‘하나님의 아들’로 불렸다는 점과 26~27절에 인용된 시편 2:9의 영향이다. 두아디라는 다른 교회들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산업의 중심지였다.

매우 노동집약적인 산업 중심이었는데, 주석을 제련하여 로마 군대의 철모를 제작하여 납품하였고, 각종 섬유 산업의 중심지였다. 무엇보다 이 산업을 강력한 상업 조직인 “길드”의 수호신인 아폴로가 돌봐준다고 믿었다. 또, 주후 83년에 죽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아들이 별이 되어 제우스의 아들이 되었다고 믿었다. 당시 주화였던 일곱 별로 둘러싸인 장갑위에 앉아있는 형상의 데나리온이 두아디라에서 주조되었다. 이런 환경 속에 살고 있는 두아디라 교회에 주님은 “눈이 불꽃 같고,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등장한다. 이는 두아디라의 신 도미티안의 아들과 그리스도 예수 가운데 누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인가?에 대한 논쟁을 유발하려는 의도 엿보인다.

19절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이다. 행위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처음보다 더 좋아졌다는 말을 듣는 것은 고무적이다. 에베소 교회는 정반대로 처음 사랑이 식어 버렸지 않은가?.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으로 처음보다 더 좋은 포도주를 제공하심으로 잔치를 섬기셨는데(요 2:10), 이처럼 두아디라의 신앙이 처음보다 더 좋아졌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칭찬이었다. 대개 신앙생활은 용두사미로 끝나는 경우가 꽤 많다. 신앙의 진보가 있다는 것은 근성이나, 내공이 만만치 않다는 의미다. 두아디라에게 이런 영적 근성이 있었다.

20~21절은 그런 신앙성장의 이면을 언급하는 듯 하다. 두아디라 교회는 핍박을 받았다는 언급 자체가 없다. 사탄이 교회 공동체를 공격할 때 직접적인 타격보다는 여러 가지 유혹의 미끼를 던지기 마련이다. 강한 전투력을 가진 신앙인이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는 사탄의 여러 유혹에 넘어가기 때문이다. 두아디라 교회는 성장을 추구하다가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렸다. 퇴보가 아닌 진보, 쇠퇴가 아닌 성장은 좋다. 하지만 진보와 성장에 집착하다가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렸다.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했다. 이세벨은 발람, 니골라당을 주관하는 목자이며 거짓 선지자다. 어떤 교훈을 했는지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세벨은 악성 바이러스와 같았다. 한 번 들어오면 몸 전체를 망가뜨린다. 구약에서 이세벨이 등장하는 아합의 시대로 돌아가면 그 영향력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아합과 결혼하여 북이스라엘에 바알 숭배가 가득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극심하게 핍박하였다. 종교는 사회 경제를 통해 그 본성을 드러낸다.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 경제는 분리될 수 없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다. 이세벨은 바알 종교와 다불어 당시 페니키아의 경제 제도를 도입했다. 이스라엘이 전통적으로 견지하던 경제관은 희년 경제법이었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으로, 사고 팔 수 없는 유업이다. 하지만 바알의 경제관은 전혀 다르다. 토지는 사고팔수 있는 상품이다. 유업은 하나님이 주신 기본소득의 본질이다. 토지는 그 핵심이었다. 토지를 매매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면, 삶의 터전을 잃은 사회적 약자는 영구적으로 취약 계층으로 내몰리게 된다. 불평등이 극심화 되는 것이다. 이렇게 북이스라엘에 이세벨의 영향으로 도입된 바알의 경제법은 오므리 왕조가 멸망하고 개혁을 이끈 예후 왕조에서도 그대로 존속된다. 심지어 여로보암 2세때는 그 영향력이 극대화 되었다. 그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들이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등이었다. 특히 미가는 바알 경제관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의 죄악을 경고할 때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의 집으로 예법을 지키고 그들의 전통을 따른다(미 6:16)”라고 책망했다. 이것이 북 왕조의 멸망의 이유였다. 한편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남 유다의 여호람과 혼인하여 6년간 통치하면서 남 유다도 희년 토지법을 붕괴시키고 만다. 그 결과도 역시 남 유다의 멸망이었다. 이세벨의 문제는 우상숭배만이 아니라 경제의 근간을 붕괴 시키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였다.

두아디라는 소아시아에서 경제적 허브 역할을 하였다. 대부분 무역 길드들은 세마포와 자주색 염색 산업(지배층을 위한 물품), 동과 주석 산업, 노예무역으로 번성했다. 모두가 길드에 가입하여 경제활동을 했다. 그리고 모든 길드는 수호신을 숭배했다. 두아디라 교회는 유대교와 동일하게 길드의 수호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헌물 봉헌에 참여할 것을 요구받았다. 수호신을 섬기는 도시의 축제에는 부도덕한 행동들이 동반되었다. 이세벨의 가르침은 종교과 경제를 분리시킨다. 우상숭배만 하지 않으면 경제 문제는 타협해도 무방하다. 영과 육을 분리 시킨다. 성령을 경험한 사람은 육체적으로 무슨 짓을 해도 전혀 영향이 없다는 식이다.

버가모와 두아디라는 비슷한 환경속에 있었다. 그런데 버가모는 거짓 교사가 침투할 발판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나 두아디라에서는 교두보를 확보하고 견고한 성을 만들 정도로 번성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2. 주님의 경고와 약속(22~28절)
22~23절에서 주님은 이런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신다.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큰 환난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환난의 때가 되면 하나님이 자신들의 모든 영적 간음을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안에서 경제적 동기로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을 향하여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9~10)”라고 예언했다.

두아디라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단순하다. 경제적 동기 때문이다. 주님은 “모든 교회는 내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살피는 분임을 알게 될 것이다(23절).” 라고 경고하심으로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신다. 그러므로 두아디라 교회는 지속적으로 이세벨의 죄에 참여할지, 회개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으면 이세벨이 당한 결말을 똑같이 당할 것이다.

24~28절을 통해 주님은 공동체가 신앙적 성장을 이뤄가는 가운데 교회를 무너뜨리는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은 사탄과 깊은 교제에 참여한 자들임을 선언하신다. 이들은 이미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남은 자들은 깨어 있어야 한다.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다른 짐은 질 필요가 없다(24절).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남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기는 것이다.

“이기는 자”는 정복이나 전쟁에서 승리한 자가 아니라 이세벨의 교훈을 극복한 자들이다. 약속의 유업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두아디라 교회는 이미 진보를 이루고 있다. 더 잘하려고 하지 말고 현재를 잘 관리해야 한다. 주님은 “다만 내가 올 때까지,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굳게 붙잡고 있어라(25절_새번역).”고 권면 하신다. 더 잘하기보다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다. 과유불급이다.

이세벨의 교훈을 극복한 자들은 두 가지 약속을 받는다. 첫째, 시편 2편과 이사야 11장에 예언된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는 특권이다. 목자 되신 그리스도의 목양에 참여하게 한다. 주님은 이것을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그들을 다스릴 것이고, 민족들은 마치 질그릇이 부수어지듯 할 것이다(26b~27절_새번역) 라고 표현하셨다. 둘째, 새벽 별을 주신다. 새벽 별은 여명의 상징이다. 어둠의 시대를 걷어내고, 밝음을 가져오는 자가 된다.

 

나는?
-주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지가 우리 신앙의 강도와 내용을 결정한다.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살피시고 이세벨을 추종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신다. 두아디라 성도들은 신격화된 로마 황제의 아들이나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을 믿어야 했다. 지금 당장의 현실 속에서 나라와 개인의 운명을 좌우할 권세를 가진듯이 보일지라도 그것이 우상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만 섬기는 교회와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세벨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가난할 수밖에 없었기에 성도들이 우상숭배 요구에 굴복하고 만다. 맘몬 신의 거대한 압력에 맞서기 위해 가난할 각오를 하지 않고, 나의 부요를 다 누리지 않을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이세벨의 경제적인 유혹에 쉽게 타협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들에게 주님의 심판은 단호하다.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손을 부끄럽게 하는 이들을 그 행위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회개하지 않고 변명할 수 있는 죄악은 없다. 회개만이 살 길이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경제적인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이세벨에게 굴복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돈의 세력이 목을 조여와도 그들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의 삶을 막을 수는 없었다. 도리어 박해가 더 심해져갔지만, 그들의 나중 행위는 처음보다 더 나아졌다. 그런 두아디라 성도들에게 주님은 더 이상 요구하지 않으시고 다만 주 오실 그날까지 그 선한 믿음의 행위를 굳게 잡으라고만 하신다.

-살기 어렵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 신앙을 제쳐버린 이유를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그 가운데서도 더 성숙해질 수 있고, 주님 오실 때까지 굳게 붙잡을 수 있을 만큼의 환난을 주셨다. 이미 하나님 나라 왕 노릇에 참여하게 하셨고(5:10), “새벽 별” 즉,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영광을 약속해 주셨다.


*주님께서 분명히 칭찬하시는 행위들이 있다. 믿음, 사랑, 인내… 오늘도 내가 붙잡고 순종해야 할 것들이다. 겉으로 보기에 부흥하고 성장하며,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런 저런 사역들이 풍성하게 일어나 북적대는 교회가 얼마나 좋을까? 목회자에게는 이런 꿈이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교회가 절대 놓치면 안될 것, 그것은 분별력이다.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는 것, 좋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가 중요하다.

*바울의 고백이 생각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강력한 경제체제에서 그럴수도 있겠다 싶은 것 마저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지금껏 붙잡고 왔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니라면 충분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그 영혼이 살 수 있다. 나의 만족, 나의 기준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시다!

*요즘 “적당하게…” 라는 미묘한 혼합주의가 참 많다.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지켜야 할 선들의 기준이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경험, 관계, 처한 상황이 더 많다. 그러니 기준이 늘 변하고 변명이나 합리화도 점점 더 완고(?)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런 모든 것보다 말씀이 기준이어야 한다. 그 말씀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 기준이어야 하되, 사랑의 가치를 가장 우선 순위에 두고 행하여야 한다. 두아디라의 모습이 오늘날 나의 모습일 수 있고 교회의 모습일 수 있겠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타협을 정당화 하고 있는가!

*거짓 선지자 이세벨의 가르침이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는 목사보다 더 영향력을 끼친다! 이유는 다른데 없다. 나도 잘 모르는 나의 본성을 사틴이 정확히 꿰뚫고 그녀를 통해 유혹하기 때문이다. 아… 어떻게 이에 대응하고 방어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간절하다.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분이시니까!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발본색원의 달인은 하나님이시다! 특히나 사람의 마음을 발본색원 하시는데 능통하다! 그래서 감사하다.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으로 혹시라도 두아디라처럼 헤메는 나의 삶을 이처럼 말씀으로 발본색원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나를 치료하신다! 말씀이 나를 하나님의 뜻대로 이끄실 것이다.

*결국 처음 사랑, 처음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이 이기는 삶이다. 나의 구미에 맞는 상황, 여건들이 제시되더라도 말씀의 판단 앞에 늘 내려놓아야 하겠다! 천천히 가더라도 그것이 빨리 가는 삶이고 제대로 가는 삶이리라!

*”처음 것을 굳게 붙잡아라!” 얼마나 간절한 주님의 외침인가! 그만큼 교회들이 처음것을 변질시키거나 퇴색시켰다는 것 아닌가! 나의 목회는 “늘 처음처럼”, “늘 예수님처럼”, “더 예수님처럼”의 가치를 곱씹고 곱씹는 목회이기를 기도한다.

 

*주님, 처음보다 더 진보와 성숙을 이룬 교회여서 도전이 됩니다. 우리 더온누리교회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그런데 이세벨의 유혹에 물든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여 고통스럽습니다. 처음 것을 굳게 붙잡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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