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 5:1-19 느헤미야의 지도력 _ 나부터
느헤미야 5장은 느헤미야를 향해 부르짖는 유다 백성의 호소를 담고 있다. 성벽 재건을 위해 희생할 때 그 곤궁한 상황을 통해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로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느헤미야는 이런 경제적인 불평등으로 인해 일어난 위기 상황에 분노한다. 하지만 그는 즉흥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신중하게 생각한 다음 지혜롭게 처리한다. 먼저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율법에 따라 동족들로부터 이자를 받지 않기로 맹세하게 한다. 느헤미야는 12년의 유다 총독 재임 동안 총독으로서의 특권을 포기하고 백성들을 섬기는 일에 모범을 보였다.
1. 공동체의 내부 위기(1~5절)
5장은 느헤미야와 귀환 공동체가 경험한 또 하나의 위기를 소개한다. 그것은 빈곤으로 인한 공동체 내부의 분열이다. 4장이 공동체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하는 이야기라면, 5장은 공동체 내부의 위협을 극복하는 내용이다.
당시 유다 지역은 몇 가지 이유로 궁핍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 같다. 먼저, 당시 유다 지역의 흉년으로 인한 수확량 감소다(3절). 느헤미야가 귀국할 당시 이미 흉년으로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주위 민족들의 적대감으로 인한 유다 지역의 고립이다. 이에 따라 유다와 인근 지역 간 상거래가 일시적으로 중단되고, 이는 물자 부족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셋째, 공사 진행과 예루살렘 이주 정책(4:22)으로 인해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수확량 감소와 양식 부족 현상을 초래했을 것이다. 문제는 부자들이 이런 상황을 악용하여 부를 증대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하면서 공동체 내부에 갈등이 생기게 된 것이다(1절). “아내들”까지 나선 것은 당시 상황이 매우 심각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형제 유다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 있는 부유한 계층을 가리킨다.
본문에 의하면 원망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부양가족이 많은 백성들의 식량 부족 문제(2절), 둘째, 식량을 구하기 위해 밭과 재산을 저당 잡혀야 하는 경우(3절), 셋째, 세금 때문에 진 빚과 인신매매(4~5절)이다. 이런 것들은 공동체 내부 결속에 심각한 균열이 생기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외부의 압력을 잘 이겨내며 과업을 진행하던 느헤미야에게 공동체 내분이라는 복병이 나타난 것이다. 느헤미야는 이제 사회, 경제적 불평등으로 생긴 내부의 불평, 원망의 문제를 지혜롭게 처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부의 갈등과 분열로 공동체가 큰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2. 느헤미야의 분노와 귀족들과 민장들에 대한 질책(6~10절)
성벽을 재건하는 동안 발생한 예기치 않은 상황에 느헤미야는 지혜롭게 대처하며 오히려 내부의 문제를 돌아보고, 더 나아가 공동체 연합을 도모하는 기회로 삼는다. 느헤미야는 먼저 부자들의 탐욕스러운 행동으로 인해 어려움에 부닥친 백성들의 울부짖음과 동족들 사이에 생긴 위화감에 분노로 반응한다(6절). 그는 거룩한 공동체가 세워져 가는 과정에서 공동체와의 연합을 위협하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행동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느헤미야는 즉각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대신, 조용히 대안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7a절). 즉흥적인 대응보다 계획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그의 성품을 추정하게 한다.
느헤미야는 먼저 지도자들을 불러 그들의 책임을 추궁한다. 여기에서 ‘귀족들과 민장들’은 성벽 공사에 참여한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4:14, 19). 그들의 잘못은 형제들에게서 높은 이자를 취했다는 것이다(7b절). 느헤미야는 그들의 행동을 ‘형제를 파는 행위’로 간주하며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8절).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돈을 빌려주고 이자 받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출 22:25; 레 25:35~38; 신 23:19~20; 24:10~13).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가족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느헤미야는 거듭 귀환민들을 ‘형제’라고 부른 것이다.
여기에 귀환민들이 ‘회복된 이스라엘’이라는 인식도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근거하여 귀환민들은 언약 공동체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은 지금, 이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형제들에게 돈과 양식을 빌려주고 이자 받기를 포기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어 느헤미야는 자신의 사례를 들어 백성들에게 돈과 곡식을 빌려준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보여준다. 느헤미야 자신도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에게 돈과 곡식을 빌려주었지만, 이자를 받지 않았음을 알린다(10절). 느헤미야는 스스로 본을 제시하면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문제 해결에 동참하기를 유도하고 있다.
3. 구체적인 해결책 제시와 총독으로서 모범(11~19절)
11~13절을 통해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11절은 만약 동포들에게 돈을 꾸어주고 부동산을 담보로 잡았으면 즉시 돌려주고 이자(양식이나 새 포도주, 기름의 1/100)도 받지 말라고 한다. 느헤미야가 설명한 이자 1/100은 오늘날의 연 12%의 이자율과 맞먹는다. 느헤미야의 권고에 백성들은 즉각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12a절). 즉, 이자도 받지 않고 담보도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이들이 후에라도 마음이 변해 약속을 어길 것을 염려하여 제사장들을 불러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게 한다(12절). 느헤미야는 그들이 한 약속을 어기면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것을 경고한다(13a절). ‘옷자락을 터는 것’은 이 약속을 어긴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저주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위다. 이에 대해 그 자리에 있는 회중은 모두 “아멘”으로 화답하고 하나님을 찬송한다. 백성들이 자신들이 말한 대로 실천했음을 보여준다(13b절). 이는 느헤미야의 지도력이 빛을 발하는 장면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허물어진 성벽과 함께 금이 갔던 공동체라는 장벽도 보수한 것이다. 에스라-느헤미야서는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집(성전)’을 세우는 일임을 강조한다.
14~19절은 느헤미야가 총독 재임 기간 보여준 지도력을 보여준다. 이 단락은 성벽 재건 동안의 지도력이 아니라 12년 동안 유대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보여준 모습을 소개한다. 이 글은 후에 느헤미야가 앞서 언급한 사건을 회고하며 기록한 부분으로 자신과 백성들이 한 맹세(12절)를 스스로 어떻게 지켜나갔는지를 보여준다.
먼저 14절은 자신이 아닥사스다 왕의 임명을 받은 총독으로서 예루살렘을 찾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언급한다(14절).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20년부터 32년(주전 445~433년)까지 12년 동안을 유다도 총독의 자격으로 사역하게 된다. 당시 페르시아 총독은 많은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이었다. 당시 총독들은 이 세금을 가족들과 종들의 생활비와 외교적인 목적으로 사람을 접대하는 비용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이 기간에 총독으로서 누릴 수 있는 이러한 특권을 기꺼이 포기했음을 밝힌다(14b절). 느헤미야는 자신의 관리들과 함께 온 힘을 기울여 백성들의 성벽 재건을 도왔다. 그리고 백성들이 세금을 못 내거나 빚을 갚지 못할 때 총독의 권한으로 그들의 땅을 사들이지도 않았다(16b절,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느헤미야의 이러한 통치 행위는 이전에 다른 총독들과 큰 대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백성들로부터 양식과 포도주와 은 40세겔(한 세겔은 노동자 나흘 치 품삯)의 세금을 거두었다(15절). 거기다 총독 밑의 신하들마저 백성들을 압제했다. 느헤미야는 이러한 자기 행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임을 밝힌다(15절). 자신이 지도자들에게 밝힌 그대로 본을 보인 것이다.
17절은 당시 느헤미야가 접대를 베푼 사람들을 밝힌다. 그들은 유다 사람들, 민장 150명, 그리고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 중에서 느헤미야에게 내려온 자들이다. 이들을 접대하기 위해서는 매일 상당한 양의 양식이 필요했다(18절). 느헤미야는 이 모든 비용을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18b절) 개인 비용으로 충당했다. 성벽 재건에 힘써야 할 상황에서 세금 부담까지 지는 것은 너무 과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느헤미야의 이런 희생은 한편으로 백성들을 향한 긍휼과 사랑, 그리고 또 한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는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한 인물로 보아도 타당하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이 단락을 마친다(19절).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는 이 기도는 13장 31절에도 유사하게 등장한다. 그의 기도는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한 일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일의 증인이 되신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도 증거하는 바와 같이 자기 뜻을 행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나는?
-주변 대적들의 악한 음모에 한마음으로 희생하며 막아내던 공동체가 먹을 것이 희귀해지자, 가진 것 없고 도와줄 친척(고엘)이 없는 형제를 종으로 삼는 극악한 공동체가 되었다. 가진 자들이 나눔을 그치고 더 자기 배를 채우려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도 유념하여 살펴야 한다. 생존을 위협받는 이 시대의 약자들을 외면한다면 함께 모여 드리는 기도, 예배, 교회의 수적 성장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리 만무하다.
-내부 분열의 문제는 느헤미야 시대의 문제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데 가장 큰 방해는 사탄이 뒤흔들어 놓는 내부의 분열이다. 스스로 무너지도록 교묘하게 개입하는 사탄의 궤계를 분별하여 지도자가 먼저 분별하고 대처할 줄 알아야 한다.
-형제의 종이 된 아픔을 토로하는 말을 들은 느헤미야는 분노했다. 성벽이 올라가는 동안 백성의 마음을 갈라놓는 마음의 장벽도 함께 올라가고 있었다. 느헤미야와 동료들은 바벨론에 유배 중이던 자들을 해방시켜 본국에 들어가게 하려고 갖은 애를 썼는데, 지도자들은 도리어 돌아온 자들을 다시 종으로 삼고 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며, 대적들의 비웃음을 살만한 부끄러운 일이었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우리끼리 사랑하지 못하면서 화평의 복음을 전한다면, 세상이 이를 믿을 리 없다.
-느헤미야는 입술의 회개만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르는 회개를 요구한다. 그 예로 이제 이자 받기를 그치고 받은 이자는 돌려주자고 제안한다. 백성들은 이 제안을 수용하고 제사장은 이 맹세의 증인이 된다. 맹세를 어기면 저주를 받을 것이란 말씀에도 “아멘”으로 화답하여 단호하게 실천을 다짐한다. 이것이 참된 회개다. 하나님을 믿고 그 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은 그분의 부요하심을 의지하겠다는 것이며, 그분이 나보다 내게 필요한 것을 더 잘 아신다고 믿고 맡긴다는 뜻이다. 나의 오욕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키며 살겠다는 뜻이다.
-느헤미야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지도자였다. 권력을 남용하는 이전 총독들과 달리 그는 백성이 질 부담을 염려하여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헌신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 백성의 재건이었지 자기 명성 쌓기가 아니었다. 나는 내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끌라고 주신 권리와 의무를 잘 감당하고 있는가?
-느헤미야는 민장들의 불의를 보았을 때 의분을 발했다. 나는 어떤 경우에 화를 낼까? 함부로 화를 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불의를 보고도 무감각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느헤미야는 화가 난다고 문제를 섣불리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우선 생각하고 나서 귀인과 민장들을 꾸짖는다. 화가 나 있을 동안 깊은 숨 고르기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는다. 화가 나 있을수록 말을 더욱 조심해야겠다. 말을 그치고 먼저 잠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대적들을 물리칠 수 없다. 분열된 마음으로 아무리 힘을 내도 승리할 수 없는 법이다.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균열을 잘 돌보아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은 역시 말씀이다. 말씀 앞에 철저히 삶을 돌아보고 순종하는 것이 공동체를 유지하고 굳건히 다져가는 첩경이다. 느헤미야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이자를 받지 말라 했고, 자기부터 철저하게 본을 보였다.
-그는 말과 생활이 일치한 사람이다. 나아가 자기 권리까지 내려놓고 하나님의 일과 백성에게 헌신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항상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사람의 보상보다 하나님의 상급을 더 크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도 하늘의 상급을 소망하며 이 땅의 가치에 마음과 뜻이 무너지지 않기를 노력하리라.
*주님, 공동체를 위해 나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유연한 태도를 견지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