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아비아달이 추방되고 요압이 처형되다 [왕상 2:26-35]
 – 2023년 09월 07일
– 2023년 09월 07일 –
왕이 되려고 했던 아도니야의 마지막 시도는 실패했다. 이제 솔로몬의 분노는 그의 지지자들에게 향한다. 먼저 아도니야를 지지하던 대제사장 아비아달을 파면한다. 그리고 브나야를 보내 성소로 도망간 요압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결국 요압은 성소에서 브나야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다윗의 유언을 하나씩 성취하면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해나갔다.
 
 
 
1. 대제사장 아비아달을 파면하다(26~27절)
솔로몬은 아도니야가 아비삭을 요청한 것을 반역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이 일에 아비아달과 요압의 공모 가능성을 의심했다(22절). 그런데 이들에 대한 소명과정은 기록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솔로몬의 결정이 정당한지에 대한 의구심도 들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미래의 역모 가능성이 미연에 방지 되었다.
 
솔로몬은 먼저 아비아달을 파면하고 고향 아나돗으로 추방한다. 이는 그의 종교적인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비아달의 고향인 아나돗은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지역이다. 아비아달의 가족은 이곳에서 계속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솔로몬은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한 죄를 물어 그를 대제사장직에서 파면하고 고향으로 보낸 것이다. 요압과 아도니야와 달리 그를 살려둔 이유는 하나님의 제사장을 죽이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아비아달은 “마땅히 죽을 자”(‘죽음의 사람’)였지만 솔로몬은 오늘 죽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26절). 그러나 그는 다윗을 섬기며 여호와의 궤를 메었던 충실한 제사장이었다. 특히 “다윗 앞에서”(26절) 라는 표현은 그만큼 충성스러운 제사장이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압살롬의 난에 법궤를 간수하고 다윗의 명을 따랐다(삼하 15:24~29). 또, 아비아달은 다윗의 고난에 참예한 헌시적인 신하였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아비아달의 아버지였던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찾아 왔었고, 자초지종도 모른 채 다윗을 도왔다. 하지만 사울은 이 일을 반역으로 몰아 아히멜렉과 놉의 제사장 85명과 주민, 가축까지 진멸 했다(삼상 22장). 이때부터 아비아달은 사울에게 도망다니는 다윗을 내내 도왔다. 압살롬의 반역 때도 사독과 함께 다윗을 위해 첩자가 되어 그의 안전을 도모했다(삼하 15:36; 17:15).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윗의 노년에 아도니야를 따르며 다윗을 배반했다.
 
그런데 아비아달의 파면은 엘리 제사장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비로소 완료된 것을 놓치면 안된다. 제사장은 레위인 중 아론의 자손에게만 위임되는 특별한 직분이다. 아론은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나답과 아비후,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있었다. 이중에서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가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분향하여 죽었다(레 10:1~2). 이후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자손만이 제사장직을 맡아왔다. 세월이 흘러 사무엘의 시대에 이르러 이다말의 자손인 엘리가 대제사장으로 섬겼다. 그런데 그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직분을 망각한 채 제사를 업신여기고 성소 봉사자 여인들과 온갖 죄를 저질렀다. 그런데 엘리는 그들을 말로만 꾸짖고 그들은 훈계를 귀담아듣지 않았다(삼하 2:12-25).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엘리 가문의 몰락과 직분의 박탈을 예고하셨다(삼상 2:27~34). 결국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 전투에서 죽었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엘리도 즉사했다(삼상 4:11, 18~22).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달아나며 피했던 놉의 살육 사건은 엘리 가문의 자손 아히멜렉이 포함 되었었다. 이제 아비아달이 솔로몬에 의해 제사장직에서 파면 되었으니 엘리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섭리 안에서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아비아달 이후에는 엘르아살의 자손인 사독 계열이 제사장 직을 담당하게 된다(35절).
 
 
 
2. 요압의 죽음(28~34절)
아비아달을 파면 시킨 솔로몬은 “지혜대로 행하여 요압을 처리하라”(5~6절) 다윗의 유언을 실행한다. 요압은 아비아달의 소식을 듣고 다음 차례가 자신임을 직감한 듯 아도니야가 했던 방법을 따라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쳐서 제단 뿔을 잡는다. 아도니야처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요압이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쳐서 붙잡은 제단 뿔은 “우발적” 살인을 저질렀을 때(민 35:11~12) 재판 절차 개시까지 목숨을 보장받는 제도였다. 요압은 “고의로”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였기에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는 도피처로 도망하여도 목숨을 보장 받지 못한다.
 
28절은 요압이 여호와의 장막으로 피신한 이유를 반역에 가담한 것으로 기록한다. “이런 소문이 요압에게 들렸다. 비록 그는 압살롬의 편을 들지는 않았으나, 아도니야의 편을 들었으므로, 주님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뿔을  잡았다.” (새번역_28절) 솔로몬은 요압이 장막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도니야 때처럼 브나야를 불러 장막에 가서 요압을 치라고 명령한다. 솔로몬의 명을 따라 장막에 간 브나야는 요압에게 나오라고 명령하지만 그는 거기서 죽겠다고 거절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둔 거룩한 처소에서 피 흘리는 일은 삼갔으므로(왕하 11:15) 요압이 이를 악용한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의 요압에 대한 처형 의지는 단호했다.
 
솔로몬은 요압의 살인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고의적인 것이므로 이를 심판하지 않으면 그 책임이 다윗과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 설명한다.  “31 왕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가 말한 대로,  그를 쳐서 죽인 뒤에 묻어라. 그리하면 요압이 흘린 죄 없는 사람의 피를, 나와 나의 가문에서 지울 수 있을 것이다. 32 주님께서, 요압이 흘린 그 피를 그에게  돌리실 것이다. 그는 나의 아버지 다윗께서 모르시는 사이에, 자기보다 더 의롭고 나은 두 사람, 곧 넬의 아들인 이스라엘 군사령관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인 유다의 군사령관 아마사를, 칼로 죽인 사람이다. 33 그들의 피는 영원히 요압과 그의 자손에게로  돌아갈 것이며, 다윗과 그의 자손과 그의 왕실과 그의 왕좌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영원토록 있을 것이다.”(새번역_31~33절)
 
브나야는 지체하지 않고 요압을 처형하고 광야에 있는 집 매장지에 묻었다. 솔로몬은 요압이 그보다 의롭고 선한 아브넬과 아마사를 “쳤으므로” 동등한 피의 형벌을 요압에게 내리는 것이 여호와의 뜻과 심판이라고 선언한다. 요압의 처형은 살인의 죗값을 치른 것만이 아니라 다윗 집안의 아브넬과 아마사의 죽음에 대한 무죄를 확증한 것이었다. 또한 다윗의 유언을 성취하고(6절), 요압의 악을 갚아달라고 기도한 다윗(삼하 3:39)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되었다.
 
 
 
3. 브나야와 사독의 임명(35절)
솔로몬은 이 모든 일을 마친 후 아비아달과 요압의 자리에 사독과 브나야를 세움으로써 왕권을 재정비한다. 사독과 브나야는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신진 세력이 된 후에 압살롬이나 아도니야를 좇지 않고 다윗과 솔로몬에게 충성했다. 사독은 엘르아살의 후손으로 젊은 용사로(대상 11:28) 다윗의 무리에 합류했다. 후에 제사장이 되어 기브온의 성막을 담당하고 있었다(대상 16:39). 그는 압살롬의 반역 당시 다윗의 정보원으로 그를 위기에서 구했다(삼하 15:24~29; 17:15~18:8). 압살롬이 죽은 후에는 유다 백성을 다윗에게 돌아오도록 도왔다(삼하 19:11~15).
 
브나야는 여호야다의 아들로서 다윗의 군사령관 열 두명 중 하나였다. 다윗의 군 조직의 셋째 달 반장이자 시위대 장관으로 사독과 마찬가지로 다윗의 충실한 신하였다(삼하 23:20~23; 대상 27:5). 
 
 
 
나는?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 아비아달의 추락은 이를 증언한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분을 충성되이 감당해야 함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됨을 바라보게 하는 아비아달의 삶이다.
 
-아비아달의 추락이 놀랍다. 그는 다윗에게 충실한 신하였다.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받을 때, 하나님의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신할 때 법궤 운반을 책임지며 다윗에게 충성을 다했다. 하지만 다윗이 나이 많아 쇠약해졌을 때 아도니야의 반란 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솔로몬은 아비아달의 목숨을 살려두는 대신 제사장 직분을 파면하고 그의 고향 아나돗으로 추방한다.  그이 파면과 추방이 엘리 제사장 가문에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의 성취이기도 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곁을 끝까지 지키지 않고 정치적 야심에 본분을 망각한 사람의 최후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을 두지는 않는가? 오늘날 교회 사역자들이 말씀을 준비하는 시간보다 여기 저기 정치적인 행보에만 힘을 쏟는 것을 볼 때 심히 두렵다. 나는 파면당하고 쫓겨나야 마땅한 사역자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고 순종하는 사역자여야 하겠다.
 
-어떤 유혹이나 시련이 일어나도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을 끝까지 감당하는 사역자여야 하겠다.
 
 
-제단 뿔을 잡은 채 목숨을 구걸하는 요압의 모습은 다윗의 명령까지 무시할 정도로 안하무인이었던 맹장 요압의 위용을 찾아볼 수 없다. 다윗이 자신에게 충성한 군대장관을 죽이라고 유언한 것은 그의 충성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한데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이루기 위해 그 충성을 발판 삼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철저하게 정치적인 실리만을 쫓아 움직였다. 그래서 다윗의 말년에 자신의 이해관계가 어긋나자 주저없이 다윗을 배반한 것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따라서만 결정하고 판단하는 영역은 없을까? 하나님께 외면 당하면 내가 살기 위해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늘 잊지 않아야 하겠다.
 
-하나님 대신 자신의 힘을 믿고 충성 대신 충성을 포장한 실리를 택했던 그의 진심이 드러났다. 명예로운 충신이기 보다 자기 실리를 택한 사람의 당연한 결과이다. 주님을 위해 사역하는 길에서 이 교훈을 잊지 않아야 겠다. 끝까지 충성하리라.
 
 
-솔로몬은 아비아달과 함께 아버지 다윗의 최측근 요압의 죄를 묻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윗의 명을 무시하고 읭니의 피를 흘린 한 요압을 처형한다. 이로써 하나님 나라를 정의와 공의위에 굳게 세운다. 그리고나서 사독과 브나야를 새로운 제사장과 군대장관으로 삼는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적으로 충성되고 유능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충직하게 지키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나는 그 나라의 일꾼으로 합당한 삶을 살고 있을까? 내 야망을 위해 교회와 성도들을 괴롭게 하는 삭꾼이 되지 않기 늘 경계해야 겠다.
 
-솔로몬이 세우려는 나라는 자기 야망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유능한 장군이 지키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굳게 세우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께 충성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나라이다.
 
 
*나도 그러고 싶다. 자기 유익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이용하는 성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진심으로 진실하게 반응하고 주의 말씀을 따라 이를 순종해 내는 공동체를 이루고 싶다. 더디 가더라도 차근 차근 말씀으로 쌓아 올리고 싶다. 
 
*솔로몬이 율법에 따라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죄값을 요압에게 물음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세웠다(출 21:14; 민 35:33). 이처럼 이 나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주행하는 정의로운 지도자를 세워 주실 것을 갈망하는 아침이다. 개인의 야망 때문에 희생당한 억울함을 풀어주고 다시는 그런 악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돌보는 지도자여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지도자가 있는가? 앞으로 이런 지도자가 출현할까?
 
 
 
***묵상하면서 생각이 깊어진다.
제사장 아도나야와 군사령관 요압을 숙청하는 솔로몬 즉위 초기의 기록을 이처럼 자세하게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하게 새로운 정권이 시작되었으니 이전 정권에 대한 심판과 부역자들을 숙청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정치적인 모델을 제시하는 것일까? 왕권의 강화를 위해 본보기를 보이는 기록으로만 보아야 할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를 바 없다. 인류 역사에서 부정적으로 군림한 제국주의, 사회주의, 여타 독재자들의 정치와 다를 바 없다. 거기에다 정치 보복과 숙청, 숙적의 제거등이 성경적이다고 제대로 오해하게 만든다.
 
솔로몬이 아도인야와 아비아달과 요압을 처리한 것은 불의한 자들에 대한 분명한 조치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을 통해 이루어가고 싶은 나라가 어떤 나라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으로 다스리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런 사랑 이전에 잘못된 죄악에 대한 분명한 해결이 먼저라는 것이다. 불의한 일에 상응한 심판이 먼저라는 것이다.
 
즉, 공의를 먼저 세우는 것이다. 공의는 “잘잘못이 분명하게 정리되는 것”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숨겨진 불의함을 들춰내시고, 이전에 선포한 심판을 끝까지 완성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세워가야 할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공의와 사랑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세워지는 나라여야 한다. 그렇기에 이 본문을 정치 보복과 숙청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면 안된다. 정작 주님이 꿈꾸시는 나라가 공의와 사랑의 나라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일깨워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세워가야 할 나라도 다르지 않다. 나라와 공동체의 리더를 세우는 것에 있어 민주국가의 주인인 국민에 대하여 깊은 애민의 마음과 개인적인 정치적 야욕을 채우는 인물이 아닌 소외되고 어려운 국민을 위하여 일해 온 사람, 그런 삶의 여정이 투명하게 비춰지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워야 할 것이다.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적 가치를 충분히 알고 그대로 살아온 언행일치의 삶을 산 지도자라야 한다. 그래야 지나간 역사 속에서 이어져온 불의한 세력들이 잡은 부정부패의 온상들을 청산하고 공의로운 나라를 향항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먼저 가정과 교회공동체를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사랑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모델로 세워야 한다. 이와같은 삶의 가치를 세상속에서 살아낼 때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책임을 감당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지혜롭게 분별하고 판단하여 행하여야 하겠다.
 
최근 우리의 조국이 몸살을 앓고 있다. 세워진 지도자들이 정통성 없고 명분 없으며, 자신들의 부정부패를 가리기 위해 역사 왜곡과 극우 정치를 마다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동안 이어져온 불의한 자신들의 역사를 부끄러워 하지 않고 있다. 개탄스럽다. 그런데 절망적인 것은 이 모든 일에 아비아달처럼 우리의 교회들이 이용 당하고 있다. 기독교는 이런 시국에서 방조를 넘어 일부 교회들의 적극적인 동조와 왜곡의 선두에 서 있다. “뉴 라이트”라는 극우적인 선동을 마다하지 않는다. 탐욕스러운 교계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버젓이 불의하고 불법한 일을 자행하고 있다.
 
교회공동체는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행하며 살아내는 것을 세상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오염수를 방류하는 것을 앞서서 거드는 잘못된 결정에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가장 공정해야 할 법을 법대로 집행하지 않는 불법에 눈만 감은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면 성경의 가르침이 누구를 통해 이 땅에 세워지겠는가!
 
그래서 두렵고 두렵다. 엘리 제사장 가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이후 80여년이 흐른 후 성취되었다는 성경의 기록만으로도 경고가 되기에 충분하다.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하신대로 행하시고, 불의하고 불법한 죄악을 행한 이들을 처형하신다. 우리의 역사에서 20세기 중반부터 21세기 초반의 한국의 기독교는 어떻게 기록될까? 공의와 사랑의 모델일까? 불의와 부정과 불법에 부역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모델일까? 아비아달과 요압의 길을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말씀으로 깨닫고 마음을 지켜 불의하고 불법한 이들과 동조하고 그들을 위해 부역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 제게 맡겨주신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직분을 충성되이 감당하겠습니다. 나의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충성하겠습니다. 나의 고집이 아니라 말씀이 가르치는대로 우직하게 순종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주님, 말씀의 가치를 구현하는 정의와 공의의 지도자를 보내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공의와 사랑이 늘 함께 균형을 맞춰야 함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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