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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사랑하는 하나님, 힘이 되어 주신 하나님, 부르짖을 때 들어주신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고 의지하였다고 노래했다(1~29절). 이제 표제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어떻게” 건지셨는지 노래한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원수들과 싸워 이기게 하신 일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고백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어떻게 이기게 하셨나?
1. “가르쳐” 이기게 하셨다(30~34절)
다윗은 자신의 승리가 하나님의 세밀한 도우심의 증거라고 노래한다. 먼저 하나님께서 그 답답하고 막막한 상황에 직면할 “용기”를 주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시며…”(새번역_32절) 또한 원수들과의 싸움이 거듭될수록 다윗의 능력을 향상시켜 주셨다고 노래한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발을 암사슴의 발처럼 빠르게 만드시고”(새번역_33절) 여기에 싸우는 법(병법)까지 숙달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시니”(새번역_34절)
하나님은 전장에 선 다윗을 먼저 “전사”로서 당당히 맞설 수 있게 “가르치”셨다. 용기, 무술, 검법, 체력, 병법… 전사로서 전장에서 능히 당당하게 맞서는 데 필요한 것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실전에서 이를 더욱 가다듬으셨다. 실제로 실전을 거듭하며 이런 것들이 향상되었겠지만, 더 중요한 의미는 이 모든 행동 속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했다는 것일 게다.
다윗이 평소에 활을 쏘며 연습할 때에도, 실제로 적과 뒤엉켜 싸우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그분의 선하신 권능을 의지하고 또 의지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하나님의 깨우쳐 주심(응답)을 통해 터득한 “가르침”들이었다. 그래서 전장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께서 나를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39절)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2. “보살펴 주셔서” 이기게 하셨다(35~42절)
다윗이 소년에서 용사로, 용사에서 전사로, 전사에서 왕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방패”가 되어 주셨다(30절). 구원의 반석이 되어 주셨고(31절), 안전하게 지켜 주셨고(32절), 높은 곳에 안전하게 세워 주셨다(33절). 다윗은 이를 거듭 구체적으로 고백한다. “주님께서는 나를 지키는 방패를 나의 손에 들려 주셨고, 주님께서는 오른손으로 나를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토록 보살펴 주시니, 나는 큰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새번역_35절)
무기와 방패뿐 아니라 능하신 오른손으로 강하게 붙들어 주셨다고 노래한다. 나는 시위를 진압하는 부대에서 군 복무를 했다. 시위대에 맞서 방패 줄을 세우고 대열을 정비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방패 진압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방패선 뒤 2선에서 뒷받쳐 주는 것이다. 방패를 든 대원의 혁대를 뒤에서 견고하게 붙잡고 밀착하여 대열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지선은 힘없이 뚫려 버리고 만다. 겉으로 보기에는 혼자 방패를 들고 막아선 것 같지만, 반드시 뒤에서 고참들이 허리띠를 붙잡고 한 몸처럼 움직여 주었다. 그러면 쓰러질 일이 없다.
그래서 다윗의 고백이 실감 난다.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위용 있게 나서는 것보다 “강하게 붙들어” 주시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무기가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꿋꿋이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강한 오른손이 승리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다. 결국 전투에는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 날랜 순발력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싸우는 지구력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다윗은 이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내가 힘차게 걷도록 주님께서 힘을 주시고, 발을 잘못 디디는 일이 없게 하셨습니다.”(새번역_36절) 이렇게 “보살펴” 주신 은혜와 힘이 다윗을 전장에서 어떻게 싸우게 했는가?(37~42절) 하나님은 가르쳐 주시고 보살펴 주신 것을 힘입어 다윗이 원수를 “뒤쫓아 가서”(37절), “용기로”(“용기를 북돋우어 주시고”, 새번역_39절) 맞서, 원수를 “완전히”(새번역_40절) 멸하고 “바람 앞에 티끌같이”, “거리의 진흙같이”(42절) 부서뜨리고 쏟아 버려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
3. “전장뿐 아니라 일상에서” 이기게 하신다(43~50절)
하나님의 능력은 전투가 벌어진 전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일상의 통치가 온전히 회복되게 하신다. 반역의 무리가 정리되었고, 이방인들도 회복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두려워하며 복종한다(43~45절).
다윗은 그의 승리가 전장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통치로 이어지는 것을 두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찬양한다. 더 나아가 그 승리가 다윗의 후손에게 이어질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46~50절). 승리가 필요한 곳은 “전장”만이 아니다. 진정한 승리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단순한 문제 해결이 아니다. 그렇기에 형식과 모양이 다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는 늘 필요하다.
다윗의 노래는 나에게 늘 필요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승리”를 확신하게 한다. 예상치 못한 환난과 고통의 전장에서의 승리뿐 아니라,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나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영광(영향력)이 변화(복종)를 가져오는 그 승리가 “늘 고프다.”
처절한 전장에서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다윗을 바라보며 소망이 생긴다. 나 역시 이렇게 이기게 하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내 마음을 즐겁게 한다.
다윗은 “이 하나님이”(47절) 이와 같은 구체적인 승리를 주셨다고 고백한다. “가르쳐 주시고 보살펴 주시며 어느 곳에서든” 이기게 하셨고, 또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노래한다. 아… 얼마나 구체적인 고백이며 노래인가! “이 하나님”은 두루뭉술하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아니다. 저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다. 천둥과 번개로만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시다. “세미한 소리”(왕상 19:12)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나타나셔서 실질적으로 이끄시고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신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며…”(32절)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해 주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해 주시도다”(47절) 이 하나님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기게 하신다.
나는?
-다윗은 승리의 찬가를 이렇게 이어 부른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흠도 없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티도 없다. 주님께로 피하여 오는 사람에게 방패가 되어 주신다. 주님 밖에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밖에 그 어느 누가 구원의 반석인가?”(새번역_30~31절)
-다윗은 “이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전장에서, 그리고 일상을 통치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승리”하게 하셨고 또 하실 것인지 구체적으로 노래했다.
-나이가 들수록 “이 하나님”을 노래하는 구절이 더 많아져야 할 것인데… 소절은 늘지 않고 후렴만 늘어서는 안 될 텐데… 아… 그렇게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노래하고 싶다. 다윗이 구체적으로 노래한 “이 하나님”은 “가르쳐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일상의 하나님이셨다. 그 다윗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다.
-나의 하나님도 지난 삶 곳곳의 전장에서 친히 가르쳐 주시며 싸우게 하셨다. 그저 힘만 잔뜩 주고 휘둘렀던 어설픈 전사를 보호하시고 보살펴 주심으로 우쭐한 승리감을 맛보게도 하셨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우쭐한 승리가 왜 그리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그때 그렇게 우쭐했던 것들이 왜 이리 낯 뜨거운지 모르겠다. 나의 승리가 아니었음에도 나의 승리처럼 자랑하던 그 어리숙함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그러니 다윗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다. 그러니 하나님의 그 성숙하신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르겠다. 세상에나… 그렇구나! 그랬었구나! 그러면 그렇게 하시겠구나!!!
*”가르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그 가르침을 더욱 사모하고 가르쳐 주시는 대로 순종해야겠다.
*”보살펴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해야지… 내 힘의 100%를 다 발휘해도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강하게 붙잡아 주지 않으신다면… 원수들과 이방인들의 마음을 돌리지 않으신다면… 에휴… 그러니 자랑할 것도 요구할 것도 없는 것 같다… 보살핌을 그저 누리며 감사하리라.
*”전장에서뿐 아니라 일상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사실 전장에서의 승리는 일상에서의 승리를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 일상이 더 중요한 게지… 예배의 승리가 결론이 아니라, 예배의 승리가 일상의 승리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거다… 그러니 예배가 승리하지 못하면 일상도 승리하지 못할 것 아닌가! 일상이 곧 예배라는 말이 더욱 깊게 다가온다.
*”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이 일상에서 드러나야 할 것이다. ‘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돌보심이 나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분명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 오늘도 구체적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새번역_롬 8:28) 이 말씀이 떠오른다. 그 협력이 구체적인 순종임을 또 깨닫는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1. 다윗을 구원하신 하나님(16~19절)
사랑하는 하나님, 힘이 되어 주신 하나님, 들으시는 하나님(1~6절)… 다윗의 고백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이어진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그만큼 고된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그가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녔던 시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든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힘든 시간이었다고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그 시간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힘(능력), 긴밀한 대화를 누린 시간이기도 했다.
다윗이 그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하나님은 그의 부르짖음에 지체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많은 물(깊은 물)”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그를 “건져 주셨다”(16~17절). 인생의 재난이 쓰나미처럼 덮쳐 왔지만, 그 거센 기세 속에서도 하나님은 “의지”할 산성과 바위와 요새가 되어 주셨다(2, 18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을 구원해 주신 이유도 당당하게 밝힌다. “나를 기뻐하시므로”(19절), “내 의를 따라”,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20, 24절) 베풀어 주셨다는 것이다. 실제로 다윗은 자신이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하나님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고”,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다”고 당당하게 밝힌다(21~23절).
이런 당당한 고백은 그가 광야 도피 생활 가운데 얼마나 하나님을 찾고 또 찾으며 그분의 구원을 간절히 구하며 살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삶의 가장 곤고한 시기에 그의 영혼은 가장 맑게 빛났던 것이다. 외부의 압박이 큰 고통과 두려움으로 다가왔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 속에서, 죄를 엿보고 죄의 낙을 누리는 것은 사치일 수밖에 없었다. 매 순간이 생명의 보호와 안전에 매달리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여 아무것도 없는 황폐한 광야에서 보낸 시간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선명하게 보며 의지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던 것처럼, 다윗에게는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닌 10여 년이 그랬다. 죄악을 벗할 수 없을 만큼 절박하게 생명의 안전을 구하고 또 구해야 했고, 간절하게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였기에… “지키고 또 지키며” 산 시간이었을 것이다.
2. 다윗의 의를 따라 갚으시는 하나님(20~24절)
그렇다면… 다윗의 이런 당당한 고백은 그가 스스로 “의롭고” “깨끗한” 삶을 온전히 살아 내서 한 고백이 아니다. 하나님께 절박하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고, 제발 살려 달라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생명의 위협과 고통 가운데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이 길밖에” 없었기에 필사적인 매달림이 드러난 것이다. 왕으로 즉위한 이후 다윗이 저지른 범죄(삼하 11장)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다윗은 완전한 신앙으로 고난을 견딘 것이 아니다. 하나님밖에 의지할 것이 없기에 “온전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은혜다. 최소한 사울 왕처럼 악해지지 않으려고, 사울 왕을 따르는 악한 무리처럼 포악해지지 않으려고 하나님 앞에서 발버둥 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긴박한 위협과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탄원”한 것이다.
3. 말씀 따라 사는 다윗, 의와 행위를 따라 갚으시는 하나님(24~27절)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확고하게 고백한다. 하나님은 신실한 자에게는 신실하심으로 대하시고(자비로운 자에게는 자비로우심을…), 흠 없는(완전한) 자에게는 주님의 완전하심을, 깨끗한 자에게는 주님의 깨끗하심을, 간교한(사악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절묘하심(거스르심)을 보이신다(25~26절). 또 곤고한(연약한) 백성은 구원하시지만, 교만한 눈은 낮추신다(27절).
중요한 것은 다윗이 이 모든 것을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유대 광야에서, 아둘람 굴에서(삼상 22:1)… 그는 놀랍도록 정확하게 이 모든 것을 온몸으로 체득했다. 어릴 적부터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긴 다윗의 성실함도 중요했지만, 매 순간 깊이 각인될 만큼 강렬했던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이 그의 영혼과 마음에 빈틈없이 채워지고 새겨졌다. 그래서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 도우시는 사람, 그분의 힘을 보이시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자신의 삶에 각인된 지워지지 않는 증거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이 이 험난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머뭇거림 없이 곧바로 말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경험”했으니 이성과 논리에 맞지 않더라도 “사실”이다. 그 “사실”을 담대하게 외치며 “이렇게 살아야 해. 이런 삶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삶이야!”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은 다윗을 죽음의 위기에서 건지셨을 뿐 아니라 그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셨다(19절). 하나님의 힘으로 원수의 칼과 손에서 건짐을 받고 감사와 찬양을 드렸던 다윗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 것을 다짐했다. 말씀이 곧 능력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도 말씀의 능력을 따라 꿋꿋이 살아 내리라.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져 내셨다, 구원하셨다, 인도하셨다’는 표현을 연거푸 쓴다. 다윗은 자기보다 힘이 센 세상을 자기 힘으로는 당해 낼 수 없음을 인정하고, 더 큰 힘을 키우려 하지 않고 더 힘센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했다. 여호와를 의지하기로 했다. 구원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재앙이 미치지 않도록 환난에서 건지시는 분이시다. 끈질기게 다윗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을 따돌리고 다윗을 건져 주셨다(16~19절). 한 나라의 모든 것을 가진 왕 사울과 가진 것 없이 홀로 쫓겨 다니는 다윗의 힘의 우열은 너무나 확연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윗의 편을 들어 주셔서 그에게 재앙이 미치지 못하게 하시고, 넓은 곳으로 인도하신다. 다윗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신다(24~27절). 힘으로 남을 괴롭히고 미워하는 사울은 버리시고, 악을 선으로 갚은 다윗에게는 더 큰 선으로 복을 주셨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무엇을 심고 있는가?(갈 6:7)
-다윗은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했다.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고, 믿음대로 살았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했고, 날마다 순종했다. 얼마나 많은 상황이 말씀에서 벗어나게 하고, 얼마나 많은 바쁜 일이 말씀을 잊게 하는지 모른다. 그래도 다윗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 다윗은 그가 가는 길에 말씀을 앞세웠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그대로 그를 구원하셨다. 이 말씀이 분명하게 도전한다. 나는 상황에 의존하는가? 말씀에 의존하는가?
-다윗의 고백은 ‘구운몽’ 같은 한낱 꿈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실제로 이런 삶을 살아 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이 베푸신 은혜 앞에서 당당하게 고백한다.
-약한 자를 구원하시고 곤고한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은 그에게 실제였다. 10여 년의 도피 생활을 거치며, 어린 시절 수금을 타며 세련되게 노래하던 그 하나님은 실제로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그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메마른 광야에서 황폐함이 가득 묻은 손을 하늘을 향해 들고, 너무 부르짖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둔탁한 음성으로 부른 하나님이셨다.
-그러니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이 담대함으로 변했다. “참으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서 도와주시면, 나는 날쌔게 내달려서 적군도 뒤쫓을 수 있으며, 높은 성벽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새번역_18:29)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서 도와주시면”이다! 주님께서 함께 계셔서 도와주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다. “의를 따라, 깨끗한 손으로, 도를 지키며, 악을 떠나, 율례를 따라” 충분히 살 수 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달려 나갈 수 있다. 두려움이 변하여 담대함이 되니, 나를 위협하는 세상과 악한 자들을 더 이상 피해 다니지 않고 직면할 수 있다.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를 억누르는 담(한계, 콤플렉스…)도 충분히 뛰어넘는다!
-다윗이 이것을 증명했다! 본문의 고백은 “주를 의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니” 적군(세상, 악)을 향해 내달리고 담(성벽)을 뛰어넘게 하셨다는 증언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의가 완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구원)을 받은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 부족했어도 “의뢰하고 의지하니(의뢰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어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신 것이다.
*이것이 참 은혜가 된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의지하고 의뢰하려는 마음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비록 흔들릴 수는 있어도 없어지지 않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담대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바랄 수 있게 하시니 은혜로다! 은혜로다!
*완전한 이룸이 조건이 아니라 “여전한 의뢰와 의지”가 하나님의 긍휼이 흐르는 통로라 하시니 은혜로다! 나 부족해도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음을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말아야지…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으며 악하고 악한 자들에게 쫓겨 다녀도, 의뢰하고 의지할 하나님, 적을 향해 내달리고 담(성벽)을 뛰어넘게 하실 하나님이 계시니 마음 굳게 먹고 오늘도 살아야지…
*오늘 내가 맞서 내달려야 할 적들이 있고 뛰어넘어야 할 담이 있어도 두렵지 않다! 의뢰하고 의지할 하나님이 계시니까!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다윗은 원수들의 위협으로 죽음과 같은 두려움에 싸여 있다. 그러나 힘과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 왕의 기도를 듣고 원수들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은 하늘에서 전쟁 용사처럼 힘과 빛으로 강림하셨고, 이에 따라 자연세계가 요동하며 하나님의 임재에 화답한다.
다윗의 시편 중에서도 본문은 표제에 그 배경이 이처럼 자세히 담긴 시이다.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이자, 회중들이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이며, 사울왕의 비참한 죽음 이후 복권된 다윗이 삼하 22장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을 노래한 내용과 거의 동일한 내용(평행본문)을 취하여 이를 기념한 시이다. 초점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에 있다. 시편 분류에서는 “제왕시”로 구분하는데,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모든 위협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의 왕이 된 뒤 백성들 앞에서 드린 고백이기 때문이다. 즉, 왕의 감사시라 하여 제왕시이다.
표제에 따르면 본 시편은 다윗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울을 비롯하여 모든 원수를 이기고 승리하여 부른 감사의 노래가 확실하다. 이와 관련된 배경과 내용을 언급하는 곳은 사무엘하 22장이다. 시의 전체 내용은 시간 순서에 따라 ‘왕의 구원 요청-하나님의 응답-하나님의 강림-하나님의 구원-왕의 의로움을 따라 보답하신 하나님 찬양-전쟁 준비-전쟁에서의 승리-전쟁 후 왕의 위상의 변화-왕의 하나님 찬양과 소망’으로 구성된다.
왕이 된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다윗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다윗의 즉위를 바라보는 백성들이 인정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1. 사랑하는 하나님(1절)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닌 그 긴 세월을 “사랑”으로 버텼다. 무려 10여 년이다.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얻은 백성들의 지지는 이내 사울왕의 시기로 이어지고, 거듭되는 죽음의 위협을 피해 도피길에 오른 10여 년을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에 시달렸다. 원인 없는 고난이 무려 10년이다. 그 참담한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견디고 또 견뎠다. 사울에게 쫓기는 내내 “힘”이 되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견디게 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그 기간을 견뎠다. 자신의 인간적인 힘으로 충분히 사울을 죽여서 그 지긋지긋한 상황을 마무리할 수도 있었지만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였다. 사랑했기에 그의 뜻을 따라 어렵고 힘들어도 견뎌냈다. 사랑은 이런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의 뜻대로 살려니 더 힘들고, 더 어려움이 가중되며, 더 복잡해지고, 더 꼬일 대로 꼬여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저 그 길을 담담히 걸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그의 뜻대로 10여 년을 왕으로 세움 받은 사울의 권위를 인정했다. 자신의 힘과 지략으로 충분히 사울의 목숨을 끊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의 권위를 인정하여 그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했다.
사랑하면 이리 될 수도 있다는 거다. 사랑하면 그의 뜻대로 살려 하니 삶이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 사랑하면 그 뜻대로 순종하려 하니 무엇이 그리 이 세상의 가치와 충돌되는 게 많은지… 포기하고… 손해 보고… 멀리 돌아가는 것 같고… 뒤처지는 것 같고… 잊혀지는 것 같고… 막 그렇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렇게 되어지는 것들을 순종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포기했던 것들로 인해, 손해 본 것들로 인해, 멀리 돌아온 것으로 인해, 뒤처진 것으로 인해, 잊혀지는 것 같은 것들로 인해…. 하나님의 “힘”이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하나님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2. 힘이 되신 여호와(1-2절)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사울에게서 내몰린 광야 도피 생활은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힘”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각인되는 시간들이었다. 다윗이 선명하게 경험할 수 있었던 하나님은 그가 “사망의 줄과 불의의 창수(4절), 스올(무덤)의 줄과 사망의 올무(덫_5절)” 속에서 도드라졌다. 죽음의 위협과 불의한 상황 속에서 “구원”을 베푸신 “강력한 능력(힘)”의 하나님이셨다.
다윗의 하나님은 그에게 ‘반석’, ‘요새’, ‘바위’, ‘건지시는 이’, ‘나의 하나님’, ‘방패’, ‘구원의 뿔(힘, 능력)’, ‘산성’…..(2절)이셨다. 시시각각 조여오는 사울의 군대에게서 보호해 주셨던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고백들 앞에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다.
매 순간 이것들을 실제로 경험하며 고백한 것이다. “나의 하나님”…
본문 1-6절에서만 “나의”라는 표현이 10회나 사용된 것을 보아도 다윗의 고백은 상상의 고백이 아니라 실제 상황을 거치며 체험된 고백이었다. 그렇게 경험한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의 힘(능력)을 백성들에게 고백하고 백성들이 이를 따라 고백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는 다윗의 힘과 능력으로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통치되는 “하나님 나라”임을 왕이 된 그 자리에서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왕은 하나님, 우리의 진정한 왕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외치는 이제 막 왕으로 즉위한 왕의 모습이라니… 사울왕과 너무나 비교되지 않는가!
다윗에게 하나님은 “힘”이셨다. 군사적인 영역(2절)에서도 힘이 되셨고, 자신을 죽음의 위협에서도 충분히 구원해 주신(3-6절) “능력(힘)”의 하나님이셨다. 그렇다면 다윗은 이런 하나님의 “힘”을 어떻게 경험하고 누릴 수 있었을까?
3.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3-6절)
‘아뢴다’, ‘부르짖음’과 같은 표현이 4회(3, 6절) 반복하여 나타난다. 다윗은 원수들이 둘러쌀 때(3절), 죽음의 위협이 닥쳤을 때(4-5절), 환난 중에(6절) 어김없이 하나님께 “아뢰고 부르짖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힘(능력)을 경험한 것은 “아뢰고 부르짖는” 다윗의 간절한 믿음의 호소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들어주시는 분이시다.
환난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은 성전에서(아마도 하늘에서) 내 소리를 들으셨고, 그의 귀에 들렸다고 고백한다. 분명히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신한 것이다. 환난에 처했을 때 가장 막막한 것은 ‘누가 나의 이 고통의 소리를 들을까?’라는 소외감이다. 이 세상에서 나의 고통의 소리를 누가 들어줄까라는 상실감이 고통을 배가시킨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들으신다. 사람들은 듣지 못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들으신다.
물리적인 거리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환난의 장소에서 가까이 계셔서 들으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처소(성전, 하늘)에 계셔도 광야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다고 고백한다. “내가 고통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고, 나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그의 성전에서 나의 간구를 들으셨다. 주님께 부르짖은 나의 부르짖음이 주님의 귀에 다다랐다(새번역_6절).”
아!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다!! “아뢰고 부르짖으면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4. 하나님에 대한 땅과 하늘의 반응(7~15절)
다윗의 부르짖는 간구에 하나님의 응답이 구체적으로 시행되고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7~8절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땅의 반응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으셨고 원수들의 불의와 억압에 진노하셨다. 하나님의 코에서 연기가 타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온다는 표현은 그만큼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표현하는 은유다. 다윗의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너무도 커서 하나님이 직접 하늘에서 강림하실 정도였다. 또한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토록 강렬하다. 노하신 하나님이 능력의 용사처럼 하늘에서 강림하시므로 땅과 하늘은 놀라 가지각색으로 반응한다(7~15절).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자연의 반응은 이러하다. 땅은 요동하고 갈라졌으며, 곳곳의 산에서는 그 기초가 흔들려 산사태가 발생하고 화산이 터져 연기와 불을 뿜어냈다. 이런 반응은 자연을 통치하며 자연 질서를 무질서로 바꾸실 수 있는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보여준다.
9~15절은 하늘의 반응이다. 하나님은 창문을 열듯 하늘을 여시고 나타나셔서 그룹을 타고 바람 날개로 움직이듯 신속히 날아 움직이신다. 하늘 아래에는 어두움이 짙게 깔려 있다. 하나님의 그 광채로 인해 먹구름이 지나가고 번쩍이는 번개와 천둥이 온 세상을 진동한다. 분노하신 하나님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과 같고 그의 분노와 음성을 반영하는 수많은 번개와 우박은 하늘에서 활처럼 쏟아져 공중을 날아다닌다.
이 단락에서 묘사된 하나님의 강림은 온 세상의 피조물에게 하나님이 우주의 주권자이며 지존자이심을 드러내고도 남는다. 이처럼 자연세계를 그의 원하는 대로 통치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세상의 인간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겠는가? 또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 이 한 사람, 다윗의 울부짖음에 이렇게 강렬하게 응답하실까?
나는?
-다윗은 하나님을 일곱 가지 은유로 묘사한다(반석, 요새, 건지시는 이,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 2절). 그리고 그 각각에 꼬박꼬박 “나의”라는 소유격을 붙인다. 하나님은 그냥 반석이 아니라 “나의” 반석이시다.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늘어간다고 믿음이 자라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힘의 원천이시다(1, 3~5절).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힘이라고 고백한다. 골리앗과 맞섰을 때도, 사울의 칼을 피해 도망 다닐 때도 하나님은 다윗에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셨고, 또 이길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셨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어느 하나 그분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뿐이다. 내 힘만으로 어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의인의 고난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악인이 당신의 선한 백성을 괴롭히는 것에 크게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6~8절). 그 진노가 어찌나 극심한지 온 천지가 진동하고 악인의 삶이 뒤흔들린다. 다윗의 위급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내 기도를 듣고 계신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들을 담대하게 주님께 부르짖으리라.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로 강림하신다. 그냥 강림이 아니라 온갖 기상 현상과 지질 현상을 동반하시며 내려오신다(9~15절).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실 때처럼, 낙담하고 지친 엘리야를 위로하고 사명을 불어넣으실 때처럼, 우리 삶에 들어오신다. 원수와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건져주시기 위해 몸소 오신다. 우주 전체가 감당치 못하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 내가 감당치 못하는 문제를 해결해주신다.
-다윗의 고백이 나의 고백도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사랑하는 하나님, 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 들어주시는 하나님…. 삶의 굽이굽이마다 얼마나 위로와 소망이 되는지 모른다. 사랑하기에 그의 뜻대로 살고, 힘이 되시기에 염려하지 않으며, 들어주시기에 언제든 부르짖을 수 있는 하나님이 되어 주셔서 감사하다!
-그 모진 시간들을 사랑하는 하나님과 보내고 왕위에 오른 다윗의 그 자리에서의 심정을 상상해 본다. 사랑하며, 부르짖으며 보낸 시간들이었기에 당당하게 고백하고 감사하는 그 모습이 도전된다. 내가 오늘 하루를 살며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내일의 나의 모습이 다윗처럼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으리라. 오늘 하루를 살며 부르짖음을 놓치지 않고 보내야 내일은 들으시는 하나님을 담담하게 드러낼 수 있으리라.
*고통과 환난 속에서 사랑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힘이 되신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푸심으로 반석, 바위, 요새, 산성, 방패… 되어주시는 은혜 안에 보호하실 것이다.
*더온누리교회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힘이 되어 주시고 부르짖음을 들어 주심을 믿는다. 새롭게 시작된 교회의 걸음걸음을 지키실 줄 믿는다. 예기치 못한 코로나의 환난이 교회를 쓰러뜨리지 못할 것이다. “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붙잡으신다. 아멘.
*나라와 민족도 그리 하실 것이다. 코로나 문제가 해결되어 가나 싶더니 세계정치역학에 신냉전이라는 새로운 위협이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우리가 그 둘 사이에 끼였다. 하지만 오늘 말씀이 소망이 된다. 우리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고 그 뜻대로 하루하루 걷다 보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을 하나님이 지키실 것이다.
*우리의 가정도,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공동체에 속한 가정들, 그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형형색색 다르기만 한 상황과 여건이어도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힘”은 분명 우리를 지켜 주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녀들의 삶을 보호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새번역_롬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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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어떤 자세로 해야 할까? 때론 겸손하게, 때론 긍휼을 구하는 자세로, 때론 울고 가슴을 치면서 해야 하겠지만, 자신감을 가지고 담대하게 기도해야 할 때도 있다. 언제 자신 있게 기도해야 하며 자신 있게 기도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할까?
1. 억울한 일을 당하다
시편 17편은 다윗의 기도다. 다윗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을 때 쓴 시인 듯한데, 아마 사울왕에게 쫓겨 다닐 때 쓴 것으로 추정된다.
(시 17:2-3, 새번역) [2] 주님, 친히 “너는 죄가 없다”고 판결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눈으로 공평하게 살펴보아 주십시오. [3] 주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시험하여 보시고, 밤새도록 심문하시며 샅샅이 캐어 보셨지만 내 잘못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내 입에서 무슨 잘못을 발견하셨습니까?
자신 있는 기도의 첫 번째 비결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다. 이 기도에 대해서 다윗이 삶의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깨끗하거나 온전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사울로부터 쫓겨 다니는 그 상황에 대해서 다윗은 억울했던 것이다. 그렇게 쫓겨 다닐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주님께 자신의 무죄함을 호소했다.
다윗이 이렇게 자신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사울과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윗은 자신의 의도와 실제 삶에서 전혀 악을 행한 적이 없고 탐욕을 따른 적도 없고 무엇보다 사울을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일부러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황당하게 쫓기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억울한 그 상태에 대해서 스스로 보복함으로 억울함이 없어지도록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억울함을 당하고 억울한 그 상태를 상대를 공격함으로 상쇄시켜 버린다면 자신 있는 기도를 할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억울함을 품고 하는 기도가 자신 있는 기도가 된다.
즉 상대는 자신에게 피해를 입혔고 앞으로도 피해를 입히고자 하는데 자신은 그에 대해서 보복하지 않고 피해를 겪고 입을 때 자신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다.
2. 기도의 중요성을 알아야
다윗은 기도의 중요성을 알았다. ‘기도’란 주술적인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다. 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받는 행위도 아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다.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있는 그대로 호소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답변을 듣는 것이 기도다.
당연히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자신의 말을 듣는 분이심을, 하나님이 자신의 억울함에 대해 공감하시는 분이심을, 그리고 하나님이 공의에 따라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분이심을 확신하고서야 기도가 가능하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소통을 평소에도 계속 해왔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다윗은 이렇게 자신 있는 기도를 할 수 있었다.
기도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리고 평소에 주님과 인격적인 소통을 하지 않고서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기도가 나오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다른 방향으로 폭발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평소에 이어가고 있음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자신 있고 담대한 기도를 할 수 있는 비결이 될 것이다.
3. 참된 만족의 근거가 남과 다름
다윗이 자신의 존재와 삶 자체가 흔들리는 그토록 억울한 상황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에 힘을 쏟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상황이 역전되어서 사울은 망하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그 상황을 가정하고 상상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다윗이 그런 의도로 기도했다면 다윗은 결코 아름다운 신앙인이 아닐 것이다. 다윗의 가장 큰 관심은 왕위가 아니라, 패배한 상황에서 돌이켜 큰 성공을 거두는 것도 아니라, 오직 주의 얼굴이었다.
(시 17:15, 새번역) 나는 떳떳하게 주님의 얼굴을 뵙겠습니다. 깨어나서 주님의 모습 뵈올 때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떳떳하게 뵙는 것, 그래서 잠에서 깰 때에 자신의 죄로 인해 어둡고 절망스럽고 찝찝한 마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는 자신의 삶이 되는 것이 다윗이 가장 중요하게 소망하는 것이었다. 다윗의 만족이 오직 주의 얼굴이었고, 주님 안에 머물고 거하는 것이었고, 주님 앞에 섰을 때 떳떳한 것이었기에 다윗은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주께 보복을 맡기고 담대하고 자신 있게 기도할 수 있었다.
참되고 진실하고 자신 있는 기도의 비결을 요약하면, 자신의 힘으로 다 보복하지 않아서 억울함이 있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고, 깰 때에 주님 앞에 떳떳한 마음을 갖는 것이 삶의 가장 큰 소망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시인은 쏟아지는 부당한 비방에 대해 하나님께 무죄를 입증해달라고 호소한다. 과거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애굽 군대를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특별한 사랑으로 지켜주신 것처럼 자신을 보호하고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한다.
-다윗은 무죄를 호소한다. 그가 위기에 빠진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순종 때문이었다. 다윗은 자신이 겪는 위기와 관련하여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일을 겪을 만한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호소한다(2~5절, 14절). 이런 다윗의 모습처럼 나도 역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판단해달라고 아뢸 만큼 떳떳하게 행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호소를 들으시는 분이시다. 사냥하는 사자와 같은 이들에게 둘러싸인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처절하게 아뢴다(1, 6절).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들으소서, 주의하소서, 기울이소서, 지키소서, 구원하소서’ 등은 다윗의 절박함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다윗은 기도를 경청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이야기에 근거하여 호소한다. 지금도 변함없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자.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와 대적하신다. 홍해에서 애굽을 심판하셨던 기이한 역사를 다윗을 위해 재현하신다. 원수를 심판하는 동시에, 누구도 돕지 않는 다윗을 안전하게 보호하신다(7, 8, 13절).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에서 비롯된다.
-다윗은 하나님만 충성스럽게 섬겼는데도 모함과 질시를 받는다. 자신을 감시하며 비방거리를 찾는 이들 때문에 견딜 수 없어 죽을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들의 악행을 낱낱이 일러바친다. 그들이 어떤 이들인지 숨기지 않고 아뢴다. 사람과 세상은 우리 억울함을 경청하지 않을뿐더러 억울함을 해결해줄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대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한다.
*시인인 다윗이 당차다. 자기는 의로우니 마땅히 구원받아야 한다고 외친다. 거짓되지 않은 입술로 구하니 응답하셔야 한다고 말한다. 당돌하다. 시험해보라고 요구한다. 당차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올까? 그는 단 한 걸음도 주의 말씀이 가리키는 곳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솔직히 이런 다윗의 모습이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부럽다.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사람만큼 강한 사람은 없다. 진정한 용기는 하나님께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는 마음에서 나오지 않을까?
*다윗은 의인인데도 고난을 당한다. 말씀을 따라 살았는데도 어려움이 닥친다. 정직하게 살았는데도 거짓에게 당한다. 모든 고난은 죄의 결과는 아니다. 그러니 무조건 회개부터 해야 하는 것은 잘못이다. 시인은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보호를 요청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호소하여 구원을 호소한다.
*우리는 값싸고 판에 박힌 회개 기도, 혹은 억지로 죄를 들추어내는 기도로 긍휼을 얻어내려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오직 주님만 신뢰하고 확신하고 있으니 꼭 기도를 들어달라고 요청할 만큼 주님 앞에서 그만큼 투명하고 신실하게 살아보고 싶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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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담’의 뜻을 정확하게 해석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개역개정도 ‘믹탐’을 그저 ‘믹담’으로 음역하여 처리했다. 그러나 칠십인역을 비롯한 고대 역본들은 ‘믹탐’을 ‘비명(碑銘, 비석에 새긴 글)’으로 번역한다. 곧 다윗이 죽음을 앞두고 영원한 생명의 확신을 돌에 새겨 남긴 글, 혹은 인생의 어떤 특별한 사건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여 비석에 새긴 시로 이해한 것이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이러한 풍습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시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의 이방 제의나 헬라 시대의 혼합주의적 우상숭배라는 강력한 유혹에 직면했던 포로기 이후 시기(주전 5~2세기경)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불렀던 고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다윗의 믹담은 어떤 내용일까? 내 삶에 새길 내용은 무엇이 될까?
시인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그 순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구원을 간구한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철저히 헌신했고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고백하고 찬양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구원을 간청한다. 그의 고백과 찬양은 후반으로 갈수록 다음과 같이 구체화되고 내면화된다. ‘우상을 섬기는 무리와 비교한 고백’, ‘이스라엘에게 주신 기업의 은유를 통한 고백’, ‘자신의 멘토가 되어 주신 하나님과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자신의 관계를 통한 고백’,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생명을 누리며 사는 관계를 통한 고백’이다.
1. 나의 보호자(1~4절)
다윗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는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1절)라고 외친다. 하나님은 형상에 불과한 우상이 아니라 실제로 “피할” 수 있는 살아 계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피할 만한 다른 곳이나 사람도 많았겠지만, 다윗은 “주 밖에는” 자신의 복이 없다고 고백한다(2절).
하나님만이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능히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는 고백이다. 고백뿐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다윗은 늘 하나님께 가장 먼저 피했다(나아갔다). 하나님을 가장 확실하게 신뢰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나더러 주님에 대해 말하라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내게 행복이 없다’ 하겠습니다.(새번역_16:2)”라고 할 정도였다.
다윗의 인생에서 보호자는 진정 “하나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백성이 자신의 기쁨이 되었다(3절). 그러니 다른 신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4절).
2. 나의 힘(5~8절) 하나님은 나의 “산업”과 “잔의 소득”이시며, 나의 “분깃”을 지키신다(5절). 나에게 아름다운 기업(땅)을 주셨다(6절). 또한 나를 “훈계”하시고, 밤마다 내 양심을 통해 “교훈”하신다(7절). 다윗은 그 하나님을 “항상 내 앞에 모셨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외친다(8절).
산업과 분깃과 기업을 주시는 하나님을 항상 앞에 모시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늘 채워 주시니까!
그런데 “훈계(조언, 권면)와 교훈”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송축)한다니…
아! 다윗은 물질을 공급하시는 하나님뿐 아니라 훈계하시고 충고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삶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물질이 채워져서가 아니라 마음이 채워져서다. 마음이 “주의 교훈과 훈계”(엡 6:4)로 가득 채워져야 흔들리지 않는다.
마음이 “주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곧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신 것”이다. 마음속에서 “주의 말씀”이라는 나침반이 작동하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주의 말씀이 힘이다!
3. 나의 기쁨(9~11절)
“이러므로” 삶에 기쁨이 넘친다. 삶의 안전함을 누린다(9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않으시고 책임지시기 때문이다(10절). 베드로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말씀으로 인용하기도 했다(행 2:25~31). 그래서 주께서 내게 생명의 길을 보이시니, 주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11절). 결국 주의 말씀으로 가득한 삶은 기쁘다! 그것도 넘친다(충만하다). 영원하다(지속된다).
인생의 믹담.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경험한 그 감격과 기쁨을 고스란히 새겼다.
누구나 위기를 만난다. 그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확실하게 드러난 구원 경험의 짜릿함을 잊지 않으려고 비문을 새긴다. 위기의 순간을 넘긴 직후뿐 아니라 돌 위에 한 자 한 자 새길 때마다 온몸을 흐르는 감사와 감동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위기를 만날 때 아로새겨진 믹담은 소망이 되었을 게다. 지워지지 않는 돌에 새겨진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에, 위기는 고통이 아니라 기쁨을 기대하게 하는 소망이 되었을 게다. 이미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확실한 구원하심의 흔적(믹담)은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시인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한다. 그는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죽음을 걱정할 만큼 큰 고난 가운데 빠져 있다(10~11절).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거나 예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을 살려 줄 유일한 주님이심을 고백하며(1~2절)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확신하고 찬양한다. 하나님은 어려울 때 나 몰라라 하는 세상의 다른 주인들과 달리, 내가 다급한 일을 당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할 때 피하고, 숨고, 안길 수 있는 분이시다. 나는 내 삶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마주할 때 시인처럼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가?
*시인은 주님을 피난처로 삼을 만큼 세상에서 쫓겨 다니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은 복이 있다고 고백한다. 오직 주님과 주님을 신뢰하는 성도들이 시인의 복이었다(2~3절). 그들이 있기에 고난 중에도 즐거움이 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모시는 공동체가 된다면, 이 험한 세상도 살아 볼 만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런 공동체마저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디서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시인은 대적자들에게 쫓겨 방황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 기업이 있다고 믿는다. 여호와께서 그의 산업과 잔의 소득이 되시고 분깃을 지키신다(5절). 그분이 자격도 없는 이들에게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셨으니, 지금은 비록 쫓겨 다닐지라도 주님의 때가 되면 언젠가 그 땅을 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시인은 믿음을 지켰다. 그는 하나님과 이방 신에게 동시에 도움을 청하는 혼합주의 신앙의 유혹을 뿌리치고, 오직 하나님만을 한 주인으로 인정하며 간구한다(4~9절).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고통에 빠뜨린다. 그들이 흘린 피로 즐거워하고, 그것을 신에게 예물로 드린다. 그 신들이 그런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잠시 기쁠지 모르나 텅 빈 쾌락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람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괴롭히지 않고, 남을 살리기 위해 나를 희생한다. 그것이 생명의 길이고, 생명으로 가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나의 ‘복’이시다.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가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이든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내게 기업을 주실 뿐 아니라 풍성하게 하신다(5~8절). 하나님이 내게 주신 온갖 복을 세어 보라. 그리고 앞으로 주실 복을 기대하며, 복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시인은 생각을 지킨다(7~8절). 숨이 넘어갈 듯 고달픈 상황에 처하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게 된다. 그런 생각은 마침내 나의 전부를 집어삼킨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을 온전히 다스리자 죽음의 그늘이 사라지고 생명의 길이 보인다. 말씀으로 내 생각을 지키라.
*시인은 기뻐할 수 없는 환경에서 기뻐했고, 불안한 조건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훈계하시는 말씀을 들었고, 주께서 인도하시는 생명의 길을 따라 걷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쁨은 역사의 흔적에서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과거의 흔적이 현재의 고난 속에서 미래를 바라보게 한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내 삶의 기쁨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이런 의미에서 내 삶의 믹담은 이미 믿음의 선조들의 기록을 통해 내게 주어졌다. 이것이 미래 세대에게도 훼손하지 않고 물려주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의 역사가 오늘의 힘이 되고 내일의 소망이 된다. 오늘도 열심히 묵상 기록을 남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나의 보호자, 나의 힘, 나의 기쁨… 어디 이뿐이겠는가? 삶의 굽이굽이마다 내 마음에 아로새겨진 수많은 단어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오늘도 그 하나님을 마음에 새긴다! 오늘도 나의 믹담을 새긴다!
-누구나 일생에 한두 번쯤은 숨넘어갈 듯한 위기를 경험한다. 달리 피할 곳도, 마땅한 방도도 없고, 감당하기 버거워 쩔쩔맨다. 이런 상황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시인도 그랬다. 그도 안절부절못하다가 마침내 주께 피한다. 그리고 위기를 돌파했을 뿐 아니라 살아났고, 주의 길을 걸어 마침내 주님의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린다.
-힘든 상황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한다. 도움이 될 만한 것이면 무엇이라도 붙잡으려 한다. 다급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지푸라기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헛된 희망일 뿐이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붙들수록 남는 것은 허탈감뿐이다. 시인은 결심한다. 다른 신에게 예물이나 예배를 드리지 않겠다고 스스로 굳게 다짐한다(4절). 이런 고백과 결심 자체가 그 역시 흔들렸다는 방증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우상에게 바치는 예물과 피의 전제는 재산만 축낼 뿐이다. 살리는 것이 아니라 실컷 이용만 당하는 것이다. 참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것이나, 아무 사람이 아닌, 살아 계신 나의 주님께 나아가야 하리라.
-거짓 신은 인간에게 희생 제물을 요구하나, 참 신은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신다. 탕자의 유일한 해결책이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이었듯이(눅 15:18~20), 하나님이 내 삶의 전부이고 ‘복 중의 복’임을 알기에 그것이 주님께 돌아가야 할 단 하나의 이유이리라.
-시인은 헛된 신과 꿈을 좇던 삶에서 돌이켜 주님께 피했다. 이제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다. 특히 두 가지를 결심한다. 내적으로는 자기 생각을 지키고(7~8절), 외적으로는 이웃의 삶을 지켜 준다(3~4절). 말씀 묵상의 삶이 이런 삶을 가다듬어 준다. 위기에 처했을 때는 불안과 무력감, 미움과 분노가 가득했으나, 이제는 나를 가르치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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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난당할 때, 즐거워할 때(13절)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새번역_5:13)”
고난과 즐거움은 삶의 어떤 순간에든 찾아온다. 극심한 고난도, 최고의 기쁨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살다 보면’ 누구나 직면하게 되는 고통과 기쁨이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일상의 모든 순간에 세상에 속한 이들과 달리, 고통과 기쁨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기도와 찬송을 하라고 권면한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의식하며 살라는 의미겠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일들을 만날 때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말과 행동으로 보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고난과 기쁨의 상황에서 세상처럼 사람이나 제도에 하소연하거나 환호성을 지르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내어놓아야 한다. 삶의 모든 정황을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기도는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고난에 맞설 힘을 구하는 겸손이고, 찬송은 기쁨이 넘치고 넘칠 때 기쁨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는 기도와 찬송이 늘 먼저여야 한다.
2. 병들었을 때(14~18절)
육신의 병이 찾아올 때 절망과 외로움, 당혹감 같은 마음의 불청객도 함께 찾아온다. 사실 이런 마음이 육신의 질병보다 더 큰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육신의 질병과 함께 어느새 마음을 잠식한 불안과 염려, 절망과 외로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먼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권면한다(14절). ‘장로’로 번역된 단어(프레스뷔테로스)에는 “연장자, 연륜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직분상의 ‘장로’라기보다 공동체 안에서 영육 간에 연륜이 있는 “어른”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낫다. 15절의 “믿음의 기도”와 16절의 “간절히 비는 기도”가 지닌 능력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이들을 “기도의 용사”, “믿음의 용사”로 이해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주목되는 것은 “청하라(부르라)”는 말이다. 믿음의 방법, 믿음의 시도를 먼저 하라는 것이다. 용한 의원을 찾도록 도와주라거나 신박한 약재를 구해 주라는 식의 권면이 아니라, “믿음으로 함께 기도해 줄 공동체의 어른”을 찾으라는 것이다. 당시에 기름은 상처와 병을 다스리는 일반적인 치료제였다(눅 10:34). 그런 일반적인 의술과 약재를 사용하는 것(기름을 바르고, 14절)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주의 이름으로… 그를 위하여 기도할” 사람을 찾으라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믿으라는 의미다. 세상의 방법보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믿음의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할 구체적인 근거로 “엘리야의 기도”를 예로 든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인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하자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자 하늘이 해갈의 단비를 내렸음을 상기시킨다(17~18절; 왕상 17:1, 18:42~45).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새번역_5:16)” “서로” 공감하고 이해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서로”… 한국 교회에는 이와 관련해 매우 부적절한 모습이 있다. 병이 나면 “죄의 결과”로 생긴 것이라며 당사자에게 과도하게 “회개”를 촉구하는 모습이다. 발병의 원인을 그의 죄로 단정하고 “회개하면” 치유해 주실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병이 낫는 은혜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 임하는 것이지 “회개의 기도”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면 결코 치유될 수 없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기도에는, 혹시 죄를 범하였더라도 사죄의 은혜가 베풀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15절). 이를 보면 무조건 회개의 기도만이 치유의 열쇠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기도”다.
하나님의 치유하심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공동체의 장로들을 청할 수 있고, “간절히 비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여기에 그 병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을 “서로” 공감하고 어루만지며 “서로를 위하여” 기도할 때 낫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병들었을 때는 어떤 기도보다 “믿음의 기도”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의 기도는 기도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이고,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이다. 또한 서로 마음을 나누고 소통하며 함께 드리는 기도이기도 하다.
3. 공동체(지체)를 포기하지 않는(19~20절)
공동체 안에서 “진리”를 떠난 지체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도 구체적인 믿음의 행동이다. 하나님은 지체를 포기하지 않는 그를 극찬하신다. “…누구든지 그를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이 사실을 알아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새번역_5:19하~20)”
두말해서 무엇하겠나…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 고난 중에 혹 신앙을 저버릴 수 있다.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는 연약함이 그를 잠시 떠나게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연약해진 이들이 다시 용기를 내어 주의 진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스스로 그 길을 찾고 용기를 내어 다시 문을 두드리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힘든 일이다. 먼저 문을 열어 주고, 들어오도록 손을 잡아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그 어떤 믿음의 행동에도 뒤처지지 않는 가치 있는 행동이다.
나는?
-무조건 기도하라는 명령인 듯하지만, 곱씹어 볼수록 소통과 공감,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행하라는 명령이다.
-고난을 만날 때나 즐거워할 인생의 순간에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라는 것이다.
-병듦에 지친 영혼과 고통을 나누고 공감하는 최고의 방법은 함께 듣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최고, 최선의 소통과 공감은 나눔과 기도이다.
-1세기 성도들의 삶은 곤고하기 짝이 없었다. 여러 해 이어진 흉년(행 11:28)으로 늘 배고팠고, 유대인들의 핍박은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로마 제국 아래에서 신생 종교로서 늘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핍박은 점점 노골화되어 갔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겨도 사회와 제도, 정부가 그 억울함을 지켜 주지 않았다. 세상의 눈에 그리스도인들은 이단아였기에 당해도 싸다고 여겨졌다.
-세상은 그렇게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을 조리돌림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끝까지 함께하셨다. 친히 함께 조리돌림당하셨다. 그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기대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전적 의지”였다. 기도와 찬송은 전적 의지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나의 일상에서도 이런 “전적 의지”의 열매가 사그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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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이런 성도들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들을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있을까? 믿음의 삶을 응원해 주고 싶은데 무엇이 좋을까? 그 고민들이 야고보서에 담겨 있다.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말씀으로 권면한다. 무조건 믿고 기다리라 하지 않고 “믿음의 행동, 사랑의 실천”을 권면한다. “말씀”이라는 생명의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우기 마련이니 “기다리라”고 한다. 본문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애잔하게 다가온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며” 살아가야 할까?
1. 열매를 바라보며 “길이 참아” 기다려라(7~8절)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은 나의 시간표에 따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시는 그때를(마 24:36)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 인내의 동기와 에너지는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 5:7)”
교회 공동체 안팎에서 “여러 가지 시험”과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외부에서 오는 “핍박”뿐 아니라 내부의 “차별”로 인한 분열의 문제도 있었다. 이런 갑갑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바라보며 길이 참고 인내해야 한다. 마치 농부가 수확의 열매를 바라보며 인내로 농사를 짓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이와 같이 다시 오실 주님과 함께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성실하게 인내해야 한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8절)” 두 절 안에서 “길이 참음”을 세 번이나 반복하는 것은 인내의 상황이 계속될 것을 암시한다.
*신앙은 길이 참음의 시간들로 채워지는 듯하다.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재깍재깍 이루어지기보다, 믿음이 거듭 확인되고 나서야 누리게 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한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현실감이 세상 속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것이 두렵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마음이 희미해질수록 신앙이 메말라 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길이 참고 기다리는” 신앙은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과 함께 간다. 나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사모하는 마음이 메말라 가지 않기를 소망한다.
2. 서로 원망하지 말라(9~10절)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서로 원망하고 책임을 묻는 일이 비일비재해질 것이다. 스스로 책임지기보다 할 수만 있다면 떠넘기고 외면하는 풍조가 거세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런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아야 한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9절)”
“원망하다(스테나조)”는 본래 “탄식하다, 신음하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돌리며 계속해서 불평과 불만을 쏟아낸다”는 의미로 쓰였다.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린다”는 뉘앙스도 함께 담겨 있다.
교회 안에 차별의 문제뿐 아니라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불평과 불만을 쏟아 내는 일이 있다는 것은, 교회가 그만큼 분열되어 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는 믿음을 지키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 시작은 “서로 원망하지 않는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새번역_5:10)”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예언을 듣고 돌을 던지며 무시하고 외면하는 이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바라보았기에 백성들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처럼 흔들리는 믿음의 위기 속에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굳게 바라보며, “원망(불평과 불만)”하지 않고 “길이 참아” 기다리자…
3.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보라(11절)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11절)”
끝까지 인내한 욥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알고 있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빌 2:8)을 보고 믿었기에, 하나님 나라 백성도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해야 한다.
욥이 고난당할 때 외면하지 않으시고, 길이 참고 기다린 그에게 갑절로 회복시켜 주신(욥 42:10)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욥과 선지자들에게 앞서 이런 삶을 살게 하셨음을 상기시키면서, 이제 우리도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응원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먼저 살아간 선진들이 있다. 히브리서는 그들을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 12:1)”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주어진 삶도 믿음의 후손들에게 남겨질 것이다. 그때 “증인”으로 남아야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믿고, 오늘을 “길이 참고 원망하지 않으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지… 인내하는 자가 복되다!
나는?
-“기다림”… 삶을 살다 보면 무수한 기다림을 경험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때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어땠을까?” 하고 후회하는 순간이 꽤 많다. 이런 이불킥할 만한 상황은 놀랍게도 대부분 “나의 성급함” 때문에 일어났다. 좋게 말하면 “결단력”이지만, 그 대가가 꽤 오래가는 경우도 있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기다림”은 어떨까? 오히려 너무 안이하다 싶을 정도로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의식하지 않으니 “기다림”의 믿음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더구나 이단들의 단골 메뉴가 “계시록, 재림” 같은 것이다 보니 되레 더 무감각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부끄럽게도 주님의 강림보다 이 세상에서 더 간절히 기다리는 것들이 많다. “성공, 명예, 재물, 취업, 승진, 성취…” 주님의 재림보다 이런 것들을 더 간절히 기다린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고 여겨 성취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커질수록, 주님의 다시 오심을 망각하는 지수는 더 높아진다. 말씀이 경고하는 그대로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새번역_요일 2:15, 17)”
-기다릴 만한 것을 “길이 참으며” 제대로 기다려야지… 이 세상에서 잠깐 지나갈 욕망을 기다리다가 정작 기다려야 할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되지… 그럼, 그렇고말고…
-믿음의 길에서 곤고함에 지친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는 사라질 세상의 허상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야 함을 다짐해 본다.
-한편으로는 성급함이 신앙을 망치는 경우도 있음이 생각난다. 나 자신부터 “지긋한 기다림”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는 삶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실상 그렇지 못한 부분을 감출 수 없다. 성도들이 거쳐야 할 “성숙해 가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섣불리 개입하고 어리석은 가르침을 앞세우다가, 되레 부담을 주어 믿음의 생명이 꺼져 버리게 한 경우가 왜 없었을까? 메주를 만들자마자 장을 담그는 격이다.
-나의 성급함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생명의 호흡을 막고 있지는 않은지… 기다림이 없으면 성숙할 수 없음을 늘 기억해야 하겠다. 좋은 장맛을 내려면 충분한 발효에 꼭 필요한 시간을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이 좋은 장맛을 가져온다. 기다림이 성숙한 신앙을 영글게 한다.
-나의 성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을 더 신뢰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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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5일 주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합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백성답게 빚어주는 거룩한 습관이기도
2026년 10월 18일 주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합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백성답게 빚어주는 거룩한 습관이기도
2026년 10월 11일 주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합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백성답게 빚어주는 거룩한 습관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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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5 더함의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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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re The Haam 💕✨ 2026.10.25 가을 야외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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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더함공동체 예배 🩵 설교 : 김종홍목사님 기도 : 곽효승 부장 집사님 🎉 블레싱 생일 : 27일 이득근 목사님 / 30일 최기훈,최재훈 / 31일 황정택 📢 광고 [더함 성탄 데코TF모집안내]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함께 성탄의 공간을 꾸밀 공동체원을 모집합니다. 꾸미기와 장식 좋아하시는분,아이디어를 나누며 함께 하고싶은분,작은 손길로 기쁨을 더하고 싶은분,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함께 성탄의 기쁨을 만들어가보실까요? 문의 및 신청: 디렉터 [더함 매일성경 11-12월호 책 배부안내] 매일성경 1년 구독 신청자분들의 11-12월호 책이 도착했습니다. 구독 신청하신 분들은 예배 시작 전, 뒤편에서 서명 후 수령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기선교 신청] 2027년 2월에 캄보디아 깜퐁스프와 깜퐁츠낭(스쿤 포함)을 차례로 방문해 의료·미용·어린이 사역으로 섬깁니다. 현지 교회가 세워지고 공동체가 자라는 데 도움이 되는 선교를 목표로 합니다. 신청기간은 11월 30일 까지입니다. 큐알코드를 이용해서 신청해주세요. 일정 – 전일정 참가: 2/3(수) 출발~2/10(수) 귀국, 목요일 도착 – 1진(깜퐁스프): 2/3(수) 출발~2/8(월) 귀국, 화요일 도착 – 2진: 2/6(토) 출발~2/10(수) 귀국, 목요일 도착 – 안과팀: 2/4(목) 출발~2/8(월) 귀국, 화요일 도착 문의 – 이홍기 목사 [세례 신청] 11월 1일 주일에 세례식이 있습니다. 아래의 문답 교육 시간에 꼭 참석 바랍니다. 신청은 3층 로비에서 신청서를 작성하여 신청해주세요. [청장년 : 세례 / 입교 / 학습] 1회차 – 10/22(목) 저녁 7시 30분 2회차 – 10/29(목) 저녁 7시 30분 [청소년 : 세례 / 입교 / 학습] 1회차 – 10/24(토) 오후 3시 2회차 – 10/31(토) 오후 3시 [유아 세례] 교육 – 10/31(토) 오후 3시 * 문답식은 10월 31일(토) 오후 5시부터 세례식 참석자를 대상으로 진행됩니다 [선교사 선물보내기] 연말 성탄절에 맞춰서 우리공동체가 동역하는 25개국 54명의 선교사와 현지 교역자들에게 선물을 보내려고 합니다. 함께 동참해주시겠어요? 보내드리고 싶은 용품(유통기한이충분한)이나 물질을 모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계좌:신협/더온누리134004691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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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윌센터 도즈문화교실 한국어 기초반. . #더온누리교회 #도즈 #굿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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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윌센터 도즈문화교실. 탁구반 나들이. . #더온누리교회 #굿윌센터 #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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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윌센터 도즈문화교실 토픽반 . #더온누리교회 #굿윌센터 #토픽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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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10월 25일 더원공동체 예배사진입니다! 야고보가 그린 교회 [야고보서 5:13-20] #더원공동체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청년부 #전주청년부 #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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