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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간에 오해가 발생했다. 거짓 선생들이 바울의 교회 방문 약속을 어긴 것을 들어 사역 태도의 불성실함을 성도들에게 이야기하고, 일부 성도들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교회 안에 형성된 분파주의에 영향을 끼쳤다. 바울의 방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교회 분열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렇기에 눈물의 편지를 통해 교회의 심각한 문제들이 회개와 변화로 이어진 것은 큰 위로와 감사였지만, 바울 자신에 대한 오해가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한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분명한 해명과 해결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성도와 지도자 간의 갈등을 어떻게 풀까? 한국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까? 바울이 풀어나간 모습을 바라보며 교회와 복음을 위한 갈등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
1. 하나님의 은혜로 걸어온 길(12절)
바울이 가장 먼저 성도들에게 들려주는 말은, 자신이 약속한 방문 시기와 일정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 “육체(세상)의 지혜” 즉 내 생각과 내 계획의 변경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는 고백이다. 자신은 “하나님의 거룩함(순박함)과 진실함”으로 매 순간을 육체(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걸음걸음을 이어왔다고 힘주어 말한다.
“우리의 자랑거리는 우리의 양심이 또한 증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세상에서 처신할 때에, 특히 여러분을 상대로 처신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순박함(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고, 세상의 지혜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다는 사실입니다.(새번역 12절)” 육체의 지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과 대비된다. 어쩌면 자기 편의를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일 수 있겠다. 바울은 자기 편리한 대로 사역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 순박함(오직 하나님을 위해 마음과 행동을 집중하는 것)과 진실함(이 마음을 이용하지 않고 순박함을 유지하는 것)으로 모든 사역의 길을 걸어왔다고 고백한다.
사실이 그렇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오직 주님만을 위한 길을 걸었다. 자신의 육체를 위한 잔꾀를 부리지 않았다. 만약 그러했다면, 고후 11:23-27에서 고백하는 모든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약속했던 방문을 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이기적인 뜻이나 불성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고백한다. 자신의 육체가 편리한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을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순종함으로 방문이 미루어졌다는 의미다.
2.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18-22절)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신실함을 따라 행한 것에 대한 의미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자신이 원래 계획했던 여정과 하나님의 신실하신 인도하심에 순종한 길을 분명하게 고백한다.
자신이 육신의 생각으로 계획을 세워 일단 고린도 교회를 가기로 했지만, 마음에 변덕이 생겨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변덕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또는, 내가 육신의 생각으로 계획을 세우기를, ‘아니오, 아니오’ 하려는 속셈이면서도, ‘예, 예’ 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겠습니까?(새번역 17절)”
이를 강변하며 결과적으로 방문하지 못하여 생긴 오해를 풀기 위해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변명을 하지만, 예수님 앞에 서는 날 이 모든 오해가 완전히 풀릴 것이라고 기대한다. “우리는 지금 여러분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써서 보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이미 부분적으로는 이해했습니다마는,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여러분이 우리의 자랑거리이듯이, 우리가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새번역 13-14절)”
이미 발생해 버린 오해를 어떻게 풀까?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실하심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임”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즉,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따라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 갈등의 꼬인 실타래를 풀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오늘날 무수한 교회 안의 갈등은 이런 “믿음”의 도전을 사실상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육체의 생각”으로만 서로를 바라본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실하신 성품을 따라 서로 화해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육신의 계획대로, 자기 욕심을 따라, 자기 주장을 위해서만 서로를 바라볼 뿐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성품은 없다. 아…. 하나님의 성품이 사라진 교회가 무슨 거룩과 진실함을 세상에 보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바울은 성도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을 따라 걸어온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들려준다. 그렇게 자신의 편리를 따라 세운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인 걸음이었음을 알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 하면서 동시에 ‘아니오’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와 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도 되셨다가 동시에 ‘아니오’도 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예’만 있을 뿐입니다.(새번역 18-19절)”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의 뜻을 “예”만 하며 순종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 ‘아멘(예)’하며 영광을 돌리는 전도여행을 지금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이 걷고 있는 이 복음전도 여행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여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튼튼히 서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새번역 21절)” 믿음 안에 굳게 세우시고 사명 따라 살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교회의 문제가 아무리 크고 급박한들, 그 모든 환난을 모든 위로로 다루시는 분은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에, 계획은 자신이 세웠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라 방문이 늦어졌음을 알리는 것이다.
또, 어떤 의미로는 지금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는 교회 안의 문제는 바울이 와서 해결될 사안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이런 문제들을 통해 고린도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도시 속에서 거룩하고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다루시는 시간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진실한(12절)” 성품과 “신실하신(18절)” 섭리에 더 의지하였다는 것이다.
교회 안 갈등은 바울이 와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루신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다루시기 위해 구원받은 각 성도의 “마음에 성령을 주신 것(22절)”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의 모든 갈등은 역시 교회를 세우시고 지키시는 거룩하고 진실하며 신실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 해결하심을 믿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도우시는 ‘성령’을 주셨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의 선구자로 예수님의 순종을 보여 주셨다. 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교회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예” 하며 순종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교회다움을 세워나가는 것이다.
우리 교회 안에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갈등은 스스로의 의지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서로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에 나의 “육체의 계획”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려놓고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예” 함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문제는 늘 생긴다. 갈등도 늘 발생한다. 환난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상적인 더온누리공동체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는?
–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기를 자랑한다. 그런데 이는 낯뜨거운 자기 홍보가 아니라 변호였다. 고린도 성도들을 대할 때 거룩하고 진실하게 사역하였음을 당당하게 밝힌다. 육체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음을 양심을 걸고 증언했다. 마땅히 해야 하는 대로 했다고도 고백한다. 남들과 비교하지도 않고, 없는 것을 있다고 과장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양심껏 말할 수 있는 바울의 담대함이 참 대단하다.
– 바울은 자신에 대한 오해가 풀려서 자신이 성도들에게, 성도들이 바울에게 자랑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부분적으로 알고 있어 관계에 얼룩이 남아 있는데, 모든 진실이 말끔히 드러나서 주 예수의 날에 하나님 앞에서 각자에게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이 되는 관계가 되고 싶어 했다. 공동체 안에 서로 오해와 편견이 있어 불편한가? 주님 앞에서 볼 영혼들인데,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직면하여 품어야 할 것이다.
– 바울은 고린도 방문 계획을 변경한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바울의 인격 결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그의 사역의 신실성을 의심받아야 할 것도 아니었다. 가든, 가지 않든, 계획대로 하든, 하지 않든, 바울에게 경솔함을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의 복음 사역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는 일이었다. 성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예수님이 수행하시고, 성령께서 보증하시는 사역에 참여하였다. 진실한 사역자는 그 하나님의 신실한 구원 사역을 경험하게 하는 신실한 통로가 되어야 하고, 그들의 삶 또한 신실해야 한다.
– 따라 하기 쉬워도 살아내기 어려운 말이 ‘아멘’이지 싶다. 진리에 대한 동의만이 아니라 진리를 살아내겠다는 다짐이기 때문이다. 바울을 힘들게 하는 것은 ‘환난(8절)’만이 아니었다. 고린도 교회 방문 계획의 변경에 대한 성도들의 오해와 비방이었다. 그 거센 비난과 의혹에 맞서 바울은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이 편지(고린도후서) 내용을 그대로 믿어달라고 부탁한다. 계획은 언제든지 수정되고 변경될 수는 있다. 문제는 신뢰 관계마저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진실한 삶’이었다. 진실한 삶의 이력보다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더 확실한 것이 있을까.
– 바울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해명하는 이유는 자신의 실추된 명성이나 사도직 때문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의혹이 ‘복음에 대한 의심'(18절)으로 이어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자기의 진심도 모른 채 진리를 떠나는 것을 걱정한 것이다. 바울의 담대함이 여기에 있다. 복음의 진리는 거짓 없는 진심을 따라 흐르고 퍼지고 스며든다는 것을 확신했기에 가능한 담대함이었다.
– 하나님은 모든 약속의 말씀을 ‘아멘’이 되게 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게 하셨고, 성령의 보증으로 주셔서 우리도 하나님의 신실한 삶에 동참하게 하셨다. 두말없이 하나님께 늘 “예”만 되셨던 그리스도처럼, 예수님의 제자를 자처하는 나의 삶은 대가를 감수하는 ‘예’가 구현되고 있을까?
– 진실에 응답하는 것, 진실을 말하는 것도 때로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진실을 일관되게 실천하고 실현하는 것은 더 큰 결단과 지속적인 헌신이 필요하다. 신앙은 입술의 고백을 삶으로 풀어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진리에 마음 다해 아멘으로 화답하고, 아멘을 살아내고, 아멘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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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는 3차 전도여행 중 마게도냐에서 쓴 편지다. 시간을 따져 보면 이미 살핀 고린도전서와 집필 시기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말은 편지를 통해 교회의 아픔과 문제들을 회복시키고자 했지만 이것이 잘 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래서 방문 계획도 세우고 실제 방문도 했지만 이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디도를 통해 ‘눈물의 편지’를 보냈으나 아쉽게도 이 편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뜻밖에도 이 눈물의 편지라고 불리는 서신을 통해 교회에 제시한 여러 해결책과 요구사항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받아들였다. 이에 기쁨과 안도의 마음을 전하고(1-7장), 유대 지역의 극심한 기근으로 어려움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 참여 독려와(8-9장), 교회 안에서 자신을 모함하는 무리들을 향해 사도권을 변호하기 위해(10-13장) 고린도후서를 쓴다.
편지를 시작하면서 디도를 통해 전달받은 교회의 변화가 준 ‘위로’를 가감 없이 표현한다. 본문에만 무려 10회가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다.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지 그대로 느껴진다. 교회의 아픔을 생각하며 고통받는 마음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개입으로 받은 그 위로를 넘치도록 표현한다. 하나님은 교회를 책임지신다. 그 책임지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위로함이 절로 솟는다.
1. 모든 환난 중에서 넘치는 위로(3-7절)
“위로”라는 단어 자체가 참 좋다… 힘이 난다. 더구나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다. “모든 환난” 중에서 위로해 주신다. 그런데…하나님께 위로를 받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께 위로를 받은 사람이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할 수 있다(3-4절).
삶 속에서 당하는 모든 환난은, 모든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위로의 은혜를 입은 성도를 통해,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해 준다. 아! 하나님의 위로의 은혜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도를 통해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에게 위로가 흘러간다.
이 위로는 “넘치는 것”이다. 부족함이 없다. 왜냐하면 고난이 넘치는 곳에는 고난을 능히 덮고도 남을 넘치는 위로가 “위로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넘치는 고난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위로가 이를 능히 덮고도 남기에! 넘치고도 남기에!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5절).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 자(구원받은 자)는 능히 이 위로도 넘치도록 받는다. 그러므로 소망의 길을 지킬 수 있다(7절).
이 위로는 “자비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다.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 위로의 사전적 의미다. 즉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 위로다. 실제적으로 고난을 해결하는 구체적인 조치는 아니다. 환난을 당하는 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특징은 “고난에 잘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환난, 고난”은 모두 슬프고 두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왜 이 환난을 받는지 잘 안다면 그 환난을 잘 대처할 수 있다. 즉 고난에 잘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다.
주님이 대표적이다. 주님은 고난을 아시고 오셨다. 왜 자신이 그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분명히 아시고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잘 참여”하셨다. 그 환난과 고난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고난을 잘 참여하셨다. 분명한 사명과 목적이 고난을 견디게 했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교회와 성도를 대적하는 것을 이미 잘 안다. 왜 성도가 세상에서 고통받는지 이미 알려 주셨다. 주님 때문이다. 그러니 주님처럼 이 고난을 잘 알고 고난에 참여하면 된다. 하나님의 위로는 이것을 잘 하도록 도와주시는 마음의 어루만짐이다. “내가 잘 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조금만 견뎌보자……”
모든 환난이 사라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환난을 견디도록 마음에 격려를 불어넣으신다. 모든 환난을 해결하심으로 위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환난을 감당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으신다. 모든 환난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보게 하신다. 모든 환난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과 마음과 자세를 알게 하신다.
이것을 아는 것이 “산 소망”이다.
2. 위로가 소망이 되어(8-11절)
위로가 마음의 어루만짐이라면 소망은 환난을 견디도록 하는 힘이다. 소망은 주님이 고난 가운데서 이루신 십자가의 은혜가 능력이 됨을 아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죽음의 문턱까지 이른 것이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았던 이유를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고백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새번역 8-9절)”
그러면서 이어지는 10절에서 분명히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위험한 죽음의 고비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고, 지금도 건져 주십니다. 또 앞으로도 건져 주시리라는 희망을 우리는 하나님께 두었습니다.(새번역 10절)”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오직 하나님이 건져 주실 것을, 그 희망(소망)을 하나님께 두었음을 고백한 것이다. 모든 환난은 모든 위로를 경험하게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위로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희망을 견고하게 세우게 한다는 것이다.
즉, 위로 속에서만 사는 성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성도이기를 바라고 있다.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모든 환난 중에 모든 위로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옴을 알아 견디어 이기는 삶을 누리라고 말한다. 이것을 어떻게 누릴까?
바로 기도다. “여러분도 기도로 우리에게 협력하여 주십시오. 많은 사람의 기도로 우리가 받게 된 은총을 두고, 많은 사람이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새번역 11절)” 기도로 함께할 수 있다. 기도가 이 은총(은사)를 누리게 한다. 기도가 고난 중에 감사를 고백하게 한다. 기도가 소망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기는 분명 “모든 환난” 중이다.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도 이 환난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더 나아가 자신이 다시 올 때가 가까울수록 환난은 중해질 것이고, 더욱 노골적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환난, 고난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환난 중에 살아야 한다.
– 그래서 바울의 고백이 힘이 된다. 자신도 환난 중에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겠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의 은혜로 능히 견디고 있으며, 성도들의 중보 기도로 이를 더욱 선명하게 누리고 있다고 고백하며 감사와 찬양을 올리고 있다.
– 이런 영적 메커니즘을 귀로만 듣는 삶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하며 누리는 삶으로 불러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 오늘은 특히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 참 감사하다. 지치고 지칠 복합위기의 시대를 살면서 이 은혜만큼 절실한 것이 또 무엇이랴. 잠시 숨을 고르며 쉬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줄 몰랐던 우리의 삶을 강제로 멈추게 하신 것을 못 견디는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멈춰주심을 기꺼이 누릴 수 있는 마음을 어루만져 주실 “위로의 은혜”가 우리에게 분명히 임할 줄 믿는다.
– 무엇보다 그 위로의 은혜가 기록된 말씀을 통해… 들리는 설교를 통해서도 흐르겠지만, 바울은 분명하게 고백한다. “서로를 위한 기도”를 통해, 그 기도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 은혜를 누림을 당당하게 밝힌다. 우리 공동체도 이와 같기를 간절히 바란다. 기도를 통해 확인되는 하나님의 위로가 풍성한 교회… 그 공동체가 코로나 시대를 충분히 이기게 하는 은혜의 통로가 될 줄 믿는다.
– 그러므로 공동체가 기도하기를, 말씀 앞에 시간 내기를 더욱 사모해야 한다. 비록 함께 모이지 못하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이 “모든 환난” 중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든 위로”를 기도할 때, 말씀으로 구할 때 반드시 넘치도록 베푸실 것을 믿는다.
– 그리스도인은 이 은혜로 산다! 사역의 현장에서 몸과 마음을 채근하며 맞은 오늘 말씀이 “위로”가 된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모든 위로”, “소망”이 없다면 나의 걸음에 어찌 힘이 공급될 수 있겠는가!
* 기도의 자리, 말씀의 자리를 더욱 갈고 닦아 위로와 소망이 감정과 환상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힘으로 실제가 되는 은혜, 바라고 또 바란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혹은 “드러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며(드러내시며, 계시하시며), 이를 통해 인생을 어떻게 도우실까?
1. 창조 세계를 통해 드러내신다(1~6절)
하늘과 궁창이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 알려 준다(1절). 낮은 낮에게, 밤은 밤에게(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말씀하신 대로, 창 1장) 지식을 전한다(2절). 들을 수도, 읽을 수도, 볼 수도 없지만(3절) 하나님의 소리가(말씀이) 온 땅에 통하고 세상 끝까지 이른다(4절). 그것은 마치 “해”와 같다. 해는 늘 찬란하다(5a절). 하나님의 소리, 곧 말씀대로 기쁘게 달린다(순종한다, 5b절). 늘 일관되게, 정하신 대로 끝까지 움직인다(6a절). 그리고 해의 열기를(뜨거움을) 피할 자가 없다(6b절). 그 강렬함이 모든 것을 꿰뚫는다.
마치 다윗이 창세기 1장을 리메이크하여 노래하는 듯하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에 자신을 이렇게 녹여 놓으셨다. 인간은 그 소리를 들을 수도,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지만, 피조물은 하나님의 음성(소리)대로 움직인다. 그 세계에서 인간이 산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풍경을 보며 그저 감탄만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모든 피조물에 깃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본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놓으신”, “어느 누구도 피할 자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솜씨를 본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새번역_3~4절) 인간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음성을 선명히 듣고 그에 순종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씀하신 대로” 움직인다.
2. 인간에게 “율법”으로 드러내신다(7~11절)
하나님은 율법(가르침), 증거(증언), 교훈, 계명(명령), 경외하는 도, 법(심판)을 주심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말씀하신다). 이렇게 드러난 하나님의 가르침(율법)은 완전하여 사람에게 생기를 북돋아(소성시켜) 준다. 그의 증거(증언)는 확실하여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준다(7절). 그의 교훈은 정직하여(올발라서) 마음에 기쁨을 주고, 그의 계명은 순결하여(순수하여) 사람의 눈을 밝혀 준다(8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티 없이 맑아서 영원토록 견고하고, 그의 법은 참되어서(진실하여) 한결같이 바르다(의롭다, 9절).
그러므로 인간에게 주신 율법(하나님의 가르침)은 그 어떤 것보다 귀하고 또 귀하다. 금, 곧 순금보다 귀하고, 꿀, 곧 송이꿀보다 달다(10절). 실제적인 기쁨을 준다. 그러니 이 율법을 지키면 “상”이 크다(11절). 무엇보다 먼저 가치 중심의 삶을 깨닫고 그 안에서 만족하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율법으로 인해 죄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스스로 깨달을 자는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보이신 ‘가르침’ 앞에서는 죄를 감출 수 없다. 율법은 우리를 죄에서 떠나게 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종이 그 교훈으로 경고를 받고, 그것을 지키면, 푸짐한 상을 받을 것이다.”(새번역_11절) 하나님의 풍성한 상급을 받는다. 율법으로 나타내 보이신 하나님을 따라 살아가면 반드시 이렇게 된다.
3. ‘마음의 묵상’에 드러내신다(12~14절)
“나의 반석이시요 구원자이신 주님,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언제나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새번역_14절) 우리는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생각, 노래)을 통해 하나님을 깨닫는다. 말씀하시는(드러내시는) 하나님을 깨닫는다.
여기서 ‘묵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힉가욘(헤기온)’은 중얼거림, 고백함, 곧 “읊조림”을 뜻한다. 시편 1편 2절에서 “묵상하는도다”로 번역된 동사 ‘하가’와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이 ‘마음의 묵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늘 말씀을 읊조리게 하시는 것이다.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마다 거하시는 “성령의 은혜와 역사”로 고백한다.
하나님은 늘 드러내 보이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말씀을 읊조리도록 간섭하신다. 즉, 보이신 말씀대로 삶의 초점을 맞추도록 늘 간섭하신다는 것이다.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말씀을 곱씹는 중얼거림으로 우리를 선하게 이끄신다.
이렇게 마음에 드러나심으로 나타나는 확실한 결과가 있다. 자기 허물을 깨닫게 하고, 숨겨진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신다(12절). 또 죄를 짓지 않도록, 죄가 마음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지켜 주신다(13절). 죄를 구별하여 깨닫고 보게 하는 말씀에 집중하게 하신다. 말씀이 죄를 깨닫게 하고 구별하게 한다. 그리하여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나 어느 누가 자기 잘못을 낱낱이 알겠습니까? 미처 깨닫지 못한 죄까지도 깨끗하게 씻어 주십시오. 주님의 종이 죄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주셔서 죄의 손아귀에 다시는 잡히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 그 때에야 나는 온전하게 되어서, 모든 끔찍한 죄악을 벗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구원자이신 주님,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언제나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새번역_12~14절)
나는?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는 이 시편을 ‘시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시이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서정시 가운데 하나’라고 극찬하였다(『시편 사색』). 하나님 안에서 자연과 율법과 인간의 관계와 영향력을 아름답게 노래한 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만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 인간에게는 “기록된 말씀(율법)”으로 드러내시며, 인간의 마음을 간섭하셔서 “묵상”으로 더 깊이 드러내신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다 푸릇푸릇 돋아난 새순만 보더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느끼는 “감동”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을 느끼고 싶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언어로 기록되지도 않았지만, “때가 차니” 풍성해진다. 하나님의 섭리는 먼 곳까지 가지 않아도 바로 옆 공원의 가로수들에게서 보인다.
-오늘 펼친 말씀에서 하나님이 드러나신다. 기록된 말씀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며, 마음으로 그린다. 하나님의 모습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미 이렇게 허락해 놓으셨다. 읽을수록, 바라볼수록, 그릴수록 더 선명해진다. 확연하다. 하나님은 이미 드러내 보이셨다. 내가 읽지 않고, 보지 않으며, 그리지 않았을 뿐이다.
-하나님은 마음에 드러내신다. 특히 묵상을 통해 풍성하게 깨우치신다. 기록된 말씀이 입술의 말과 마음의 중얼거림으로 늘 머물러 있으면, 하면 할수록 풍성해지고 깨우쳐진다. 중얼거릴수록, 말할수록 단단하게 여며진다. 창조하신 세계를 통해, 기록된 말씀을 통해, 내 마음의 묵상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신다.
*그런데 이렇게 드러내신 중요한 목적이 있다! 그것은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이다. 세상 만물에, 기록된 말씀에, 내 마음에 드러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내 마음도 함께 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마음 따라 나의 마음도 가는” 삶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누리는 삶이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 오늘도 드러내신다. 알려 주신다.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 마음을 따라가도록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그렇게 되도록 말이다. 말을 이끄는 마음의 생각과 의도가 드러내 보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허물’과 ‘죄’에 편승하지 않고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걸음을 걷게 된다.
*마음으로부터 말씀을 따라가는 삶을 살도록 세밀하게 드러내신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도 말씀으로 내 말과 마음의 묵상을 채워 가야 하리라.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하나님, 힘이 되어 주신 하나님, 부르짖을 때 들어주신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고 의지하였다고 노래했다(1~29절). 이제 표제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어떻게” 건지셨는지 노래한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원수들과 싸워 이기게 하신 일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고백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어떻게 이기게 하셨나?
1. “가르쳐” 이기게 하셨다(30~34절)
다윗은 자신의 승리가 하나님의 세밀한 도우심의 증거라고 노래한다. 먼저 하나님께서 그 답답하고 막막한 상황에 직면할 “용기”를 주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시며…”(새번역_32절) 또한 원수들과의 싸움이 거듭될수록 다윗의 능력을 향상시켜 주셨다고 노래한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발을 암사슴의 발처럼 빠르게 만드시고”(새번역_33절) 여기에 싸우는 법(병법)까지 숙달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시니”(새번역_34절)
하나님은 전장에 선 다윗을 먼저 “전사”로서 당당히 맞설 수 있게 “가르치”셨다. 용기, 무술, 검법, 체력, 병법… 전사로서 전장에서 능히 당당하게 맞서는 데 필요한 것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실전에서 이를 더욱 가다듬으셨다. 실제로 실전을 거듭하며 이런 것들이 향상되었겠지만, 더 중요한 의미는 이 모든 행동 속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했다는 것일 게다.
다윗이 평소에 활을 쏘며 연습할 때에도, 실제로 적과 뒤엉켜 싸우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그분의 선하신 권능을 의지하고 또 의지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하나님의 깨우쳐 주심(응답)을 통해 터득한 “가르침”들이었다. 그래서 전장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께서 나를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39절)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2. “보살펴 주셔서” 이기게 하셨다(35~42절)
다윗이 소년에서 용사로, 용사에서 전사로, 전사에서 왕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방패”가 되어 주셨다(30절). 구원의 반석이 되어 주셨고(31절), 안전하게 지켜 주셨고(32절), 높은 곳에 안전하게 세워 주셨다(33절). 다윗은 이를 거듭 구체적으로 고백한다. “주님께서는 나를 지키는 방패를 나의 손에 들려 주셨고, 주님께서는 오른손으로 나를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토록 보살펴 주시니, 나는 큰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새번역_35절)
무기와 방패뿐 아니라 능하신 오른손으로 강하게 붙들어 주셨다고 노래한다. 나는 시위를 진압하는 부대에서 군 복무를 했다. 시위대에 맞서 방패 줄을 세우고 대열을 정비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방패 진압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방패선 뒤 2선에서 뒷받쳐 주는 것이다. 방패를 든 대원의 혁대를 뒤에서 견고하게 붙잡고 밀착하여 대열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지선은 힘없이 뚫려 버리고 만다. 겉으로 보기에는 혼자 방패를 들고 막아선 것 같지만, 반드시 뒤에서 고참들이 허리띠를 붙잡고 한 몸처럼 움직여 주었다. 그러면 쓰러질 일이 없다.
그래서 다윗의 고백이 실감 난다.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위용 있게 나서는 것보다 “강하게 붙들어” 주시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무기가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꿋꿋이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강한 오른손이 승리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다. 결국 전투에는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 날랜 순발력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싸우는 지구력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다윗은 이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내가 힘차게 걷도록 주님께서 힘을 주시고, 발을 잘못 디디는 일이 없게 하셨습니다.”(새번역_36절) 이렇게 “보살펴” 주신 은혜와 힘이 다윗을 전장에서 어떻게 싸우게 했는가?(37~42절) 하나님은 가르쳐 주시고 보살펴 주신 것을 힘입어 다윗이 원수를 “뒤쫓아 가서”(37절), “용기로”(“용기를 북돋우어 주시고”, 새번역_39절) 맞서, 원수를 “완전히”(새번역_40절) 멸하고 “바람 앞에 티끌같이”, “거리의 진흙같이”(42절) 부서뜨리고 쏟아 버려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
3. “전장뿐 아니라 일상에서” 이기게 하신다(43~50절)
하나님의 능력은 전투가 벌어진 전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일상의 통치가 온전히 회복되게 하신다. 반역의 무리가 정리되었고, 이방인들도 회복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두려워하며 복종한다(43~45절).
다윗은 그의 승리가 전장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통치로 이어지는 것을 두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찬양한다. 더 나아가 그 승리가 다윗의 후손에게 이어질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46~50절). 승리가 필요한 곳은 “전장”만이 아니다. 진정한 승리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단순한 문제 해결이 아니다. 그렇기에 형식과 모양이 다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는 늘 필요하다.
다윗의 노래는 나에게 늘 필요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승리”를 확신하게 한다. 예상치 못한 환난과 고통의 전장에서의 승리뿐 아니라,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나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영광(영향력)이 변화(복종)를 가져오는 그 승리가 “늘 고프다.”
처절한 전장에서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다윗을 바라보며 소망이 생긴다. 나 역시 이렇게 이기게 하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내 마음을 즐겁게 한다.
다윗은 “이 하나님이”(47절) 이와 같은 구체적인 승리를 주셨다고 고백한다. “가르쳐 주시고 보살펴 주시며 어느 곳에서든” 이기게 하셨고, 또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노래한다. 아… 얼마나 구체적인 고백이며 노래인가! “이 하나님”은 두루뭉술하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아니다. 저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다. 천둥과 번개로만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시다. “세미한 소리”(왕상 19:12)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나타나셔서 실질적으로 이끄시고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신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며…”(32절)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해 주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해 주시도다”(47절) 이 하나님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기게 하신다.
나는?
-다윗은 승리의 찬가를 이렇게 이어 부른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흠도 없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티도 없다. 주님께로 피하여 오는 사람에게 방패가 되어 주신다. 주님 밖에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밖에 그 어느 누가 구원의 반석인가?”(새번역_30~31절)
-다윗은 “이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전장에서, 그리고 일상을 통치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승리”하게 하셨고 또 하실 것인지 구체적으로 노래했다.
-나이가 들수록 “이 하나님”을 노래하는 구절이 더 많아져야 할 것인데… 소절은 늘지 않고 후렴만 늘어서는 안 될 텐데… 아… 그렇게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노래하고 싶다. 다윗이 구체적으로 노래한 “이 하나님”은 “가르쳐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일상의 하나님이셨다. 그 다윗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다.
-나의 하나님도 지난 삶 곳곳의 전장에서 친히 가르쳐 주시며 싸우게 하셨다. 그저 힘만 잔뜩 주고 휘둘렀던 어설픈 전사를 보호하시고 보살펴 주심으로 우쭐한 승리감을 맛보게도 하셨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우쭐한 승리가 왜 그리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그때 그렇게 우쭐했던 것들이 왜 이리 낯 뜨거운지 모르겠다. 나의 승리가 아니었음에도 나의 승리처럼 자랑하던 그 어리숙함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그러니 다윗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다. 그러니 하나님의 그 성숙하신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르겠다. 세상에나… 그렇구나! 그랬었구나! 그러면 그렇게 하시겠구나!!!
*”가르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그 가르침을 더욱 사모하고 가르쳐 주시는 대로 순종해야겠다.
*”보살펴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해야지… 내 힘의 100%를 다 발휘해도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강하게 붙잡아 주지 않으신다면… 원수들과 이방인들의 마음을 돌리지 않으신다면… 에휴… 그러니 자랑할 것도 요구할 것도 없는 것 같다… 보살핌을 그저 누리며 감사하리라.
*”전장에서뿐 아니라 일상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사실 전장에서의 승리는 일상에서의 승리를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 일상이 더 중요한 게지… 예배의 승리가 결론이 아니라, 예배의 승리가 일상의 승리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거다… 그러니 예배가 승리하지 못하면 일상도 승리하지 못할 것 아닌가! 일상이 곧 예배라는 말이 더욱 깊게 다가온다.
*”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이 일상에서 드러나야 할 것이다. ‘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돌보심이 나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분명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 오늘도 구체적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새번역_롬 8:28) 이 말씀이 떠오른다. 그 협력이 구체적인 순종임을 또 깨닫는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1. 다윗을 구원하신 하나님(16~19절)
사랑하는 하나님, 힘이 되어 주신 하나님, 들으시는 하나님(1~6절)… 다윗의 고백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이어진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그만큼 고된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그가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녔던 시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든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힘든 시간이었다고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그 시간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힘(능력), 긴밀한 대화를 누린 시간이기도 했다.
다윗이 그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하나님은 그의 부르짖음에 지체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많은 물(깊은 물)”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그를 “건져 주셨다”(16~17절). 인생의 재난이 쓰나미처럼 덮쳐 왔지만, 그 거센 기세 속에서도 하나님은 “의지”할 산성과 바위와 요새가 되어 주셨다(2, 18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을 구원해 주신 이유도 당당하게 밝힌다. “나를 기뻐하시므로”(19절), “내 의를 따라”,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20, 24절) 베풀어 주셨다는 것이다. 실제로 다윗은 자신이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하나님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고”,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다”고 당당하게 밝힌다(21~23절).
이런 당당한 고백은 그가 광야 도피 생활 가운데 얼마나 하나님을 찾고 또 찾으며 그분의 구원을 간절히 구하며 살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삶의 가장 곤고한 시기에 그의 영혼은 가장 맑게 빛났던 것이다. 외부의 압박이 큰 고통과 두려움으로 다가왔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 속에서, 죄를 엿보고 죄의 낙을 누리는 것은 사치일 수밖에 없었다. 매 순간이 생명의 보호와 안전에 매달리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여 아무것도 없는 황폐한 광야에서 보낸 시간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선명하게 보며 의지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던 것처럼, 다윗에게는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닌 10여 년이 그랬다. 죄악을 벗할 수 없을 만큼 절박하게 생명의 안전을 구하고 또 구해야 했고, 간절하게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였기에… “지키고 또 지키며” 산 시간이었을 것이다.
2. 다윗의 의를 따라 갚으시는 하나님(20~24절)
그렇다면… 다윗의 이런 당당한 고백은 그가 스스로 “의롭고” “깨끗한” 삶을 온전히 살아 내서 한 고백이 아니다. 하나님께 절박하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고, 제발 살려 달라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생명의 위협과 고통 가운데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이 길밖에” 없었기에 필사적인 매달림이 드러난 것이다. 왕으로 즉위한 이후 다윗이 저지른 범죄(삼하 11장)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다윗은 완전한 신앙으로 고난을 견딘 것이 아니다. 하나님밖에 의지할 것이 없기에 “온전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은혜다. 최소한 사울 왕처럼 악해지지 않으려고, 사울 왕을 따르는 악한 무리처럼 포악해지지 않으려고 하나님 앞에서 발버둥 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긴박한 위협과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탄원”한 것이다.
3. 말씀 따라 사는 다윗, 의와 행위를 따라 갚으시는 하나님(24~27절)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확고하게 고백한다. 하나님은 신실한 자에게는 신실하심으로 대하시고(자비로운 자에게는 자비로우심을…), 흠 없는(완전한) 자에게는 주님의 완전하심을, 깨끗한 자에게는 주님의 깨끗하심을, 간교한(사악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절묘하심(거스르심)을 보이신다(25~26절). 또 곤고한(연약한) 백성은 구원하시지만, 교만한 눈은 낮추신다(27절).
중요한 것은 다윗이 이 모든 것을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유대 광야에서, 아둘람 굴에서(삼상 22:1)… 그는 놀랍도록 정확하게 이 모든 것을 온몸으로 체득했다. 어릴 적부터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긴 다윗의 성실함도 중요했지만, 매 순간 깊이 각인될 만큼 강렬했던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이 그의 영혼과 마음에 빈틈없이 채워지고 새겨졌다. 그래서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 도우시는 사람, 그분의 힘을 보이시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자신의 삶에 각인된 지워지지 않는 증거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이 이 험난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머뭇거림 없이 곧바로 말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경험”했으니 이성과 논리에 맞지 않더라도 “사실”이다. 그 “사실”을 담대하게 외치며 “이렇게 살아야 해. 이런 삶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삶이야!”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은 다윗을 죽음의 위기에서 건지셨을 뿐 아니라 그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셨다(19절). 하나님의 힘으로 원수의 칼과 손에서 건짐을 받고 감사와 찬양을 드렸던 다윗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 것을 다짐했다. 말씀이 곧 능력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도 말씀의 능력을 따라 꿋꿋이 살아 내리라.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져 내셨다, 구원하셨다, 인도하셨다’는 표현을 연거푸 쓴다. 다윗은 자기보다 힘이 센 세상을 자기 힘으로는 당해 낼 수 없음을 인정하고, 더 큰 힘을 키우려 하지 않고 더 힘센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했다. 여호와를 의지하기로 했다. 구원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재앙이 미치지 않도록 환난에서 건지시는 분이시다. 끈질기게 다윗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을 따돌리고 다윗을 건져 주셨다(16~19절). 한 나라의 모든 것을 가진 왕 사울과 가진 것 없이 홀로 쫓겨 다니는 다윗의 힘의 우열은 너무나 확연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윗의 편을 들어 주셔서 그에게 재앙이 미치지 못하게 하시고, 넓은 곳으로 인도하신다. 다윗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신다(24~27절). 힘으로 남을 괴롭히고 미워하는 사울은 버리시고, 악을 선으로 갚은 다윗에게는 더 큰 선으로 복을 주셨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무엇을 심고 있는가?(갈 6:7)
-다윗은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했다.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고, 믿음대로 살았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했고, 날마다 순종했다. 얼마나 많은 상황이 말씀에서 벗어나게 하고, 얼마나 많은 바쁜 일이 말씀을 잊게 하는지 모른다. 그래도 다윗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 다윗은 그가 가는 길에 말씀을 앞세웠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그대로 그를 구원하셨다. 이 말씀이 분명하게 도전한다. 나는 상황에 의존하는가? 말씀에 의존하는가?
-다윗의 고백은 ‘구운몽’ 같은 한낱 꿈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실제로 이런 삶을 살아 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이 베푸신 은혜 앞에서 당당하게 고백한다.
-약한 자를 구원하시고 곤고한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은 그에게 실제였다. 10여 년의 도피 생활을 거치며, 어린 시절 수금을 타며 세련되게 노래하던 그 하나님은 실제로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그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메마른 광야에서 황폐함이 가득 묻은 손을 하늘을 향해 들고, 너무 부르짖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둔탁한 음성으로 부른 하나님이셨다.
-그러니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이 담대함으로 변했다. “참으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서 도와주시면, 나는 날쌔게 내달려서 적군도 뒤쫓을 수 있으며, 높은 성벽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새번역_18:29)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서 도와주시면”이다! 주님께서 함께 계셔서 도와주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다. “의를 따라, 깨끗한 손으로, 도를 지키며, 악을 떠나, 율례를 따라” 충분히 살 수 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달려 나갈 수 있다. 두려움이 변하여 담대함이 되니, 나를 위협하는 세상과 악한 자들을 더 이상 피해 다니지 않고 직면할 수 있다.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를 억누르는 담(한계, 콤플렉스…)도 충분히 뛰어넘는다!
-다윗이 이것을 증명했다! 본문의 고백은 “주를 의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니” 적군(세상, 악)을 향해 내달리고 담(성벽)을 뛰어넘게 하셨다는 증언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의가 완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구원)을 받은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 부족했어도 “의뢰하고 의지하니(의뢰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어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신 것이다.
*이것이 참 은혜가 된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의지하고 의뢰하려는 마음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비록 흔들릴 수는 있어도 없어지지 않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담대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바랄 수 있게 하시니 은혜로다! 은혜로다!
*완전한 이룸이 조건이 아니라 “여전한 의뢰와 의지”가 하나님의 긍휼이 흐르는 통로라 하시니 은혜로다! 나 부족해도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음을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말아야지…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으며 악하고 악한 자들에게 쫓겨 다녀도, 의뢰하고 의지할 하나님, 적을 향해 내달리고 담(성벽)을 뛰어넘게 하실 하나님이 계시니 마음 굳게 먹고 오늘도 살아야지…
*오늘 내가 맞서 내달려야 할 적들이 있고 뛰어넘어야 할 담이 있어도 두렵지 않다! 의뢰하고 의지할 하나님이 계시니까!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다윗은 원수들의 위협으로 죽음과 같은 두려움에 싸여 있다. 그러나 힘과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 왕의 기도를 듣고 원수들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은 하늘에서 전쟁 용사처럼 힘과 빛으로 강림하셨고, 이에 따라 자연세계가 요동하며 하나님의 임재에 화답한다.
다윗의 시편 중에서도 본문은 표제에 그 배경이 이처럼 자세히 담긴 시이다.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이자, 회중들이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이며, 사울왕의 비참한 죽음 이후 복권된 다윗이 삼하 22장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을 노래한 내용과 거의 동일한 내용(평행본문)을 취하여 이를 기념한 시이다. 초점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에 있다. 시편 분류에서는 “제왕시”로 구분하는데,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모든 위협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의 왕이 된 뒤 백성들 앞에서 드린 고백이기 때문이다. 즉, 왕의 감사시라 하여 제왕시이다.
표제에 따르면 본 시편은 다윗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울을 비롯하여 모든 원수를 이기고 승리하여 부른 감사의 노래가 확실하다. 이와 관련된 배경과 내용을 언급하는 곳은 사무엘하 22장이다. 시의 전체 내용은 시간 순서에 따라 ‘왕의 구원 요청-하나님의 응답-하나님의 강림-하나님의 구원-왕의 의로움을 따라 보답하신 하나님 찬양-전쟁 준비-전쟁에서의 승리-전쟁 후 왕의 위상의 변화-왕의 하나님 찬양과 소망’으로 구성된다.
왕이 된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다윗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다윗의 즉위를 바라보는 백성들이 인정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1. 사랑하는 하나님(1절)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닌 그 긴 세월을 “사랑”으로 버텼다. 무려 10여 년이다.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얻은 백성들의 지지는 이내 사울왕의 시기로 이어지고, 거듭되는 죽음의 위협을 피해 도피길에 오른 10여 년을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에 시달렸다. 원인 없는 고난이 무려 10년이다. 그 참담한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견디고 또 견뎠다. 사울에게 쫓기는 내내 “힘”이 되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견디게 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그 기간을 견뎠다. 자신의 인간적인 힘으로 충분히 사울을 죽여서 그 지긋지긋한 상황을 마무리할 수도 있었지만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였다. 사랑했기에 그의 뜻을 따라 어렵고 힘들어도 견뎌냈다. 사랑은 이런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의 뜻대로 살려니 더 힘들고, 더 어려움이 가중되며, 더 복잡해지고, 더 꼬일 대로 꼬여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저 그 길을 담담히 걸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그의 뜻대로 10여 년을 왕으로 세움 받은 사울의 권위를 인정했다. 자신의 힘과 지략으로 충분히 사울의 목숨을 끊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의 권위를 인정하여 그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했다.
사랑하면 이리 될 수도 있다는 거다. 사랑하면 그의 뜻대로 살려 하니 삶이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 사랑하면 그 뜻대로 순종하려 하니 무엇이 그리 이 세상의 가치와 충돌되는 게 많은지… 포기하고… 손해 보고… 멀리 돌아가는 것 같고… 뒤처지는 것 같고… 잊혀지는 것 같고… 막 그렇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렇게 되어지는 것들을 순종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포기했던 것들로 인해, 손해 본 것들로 인해, 멀리 돌아온 것으로 인해, 뒤처진 것으로 인해, 잊혀지는 것 같은 것들로 인해…. 하나님의 “힘”이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하나님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2. 힘이 되신 여호와(1-2절)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사울에게서 내몰린 광야 도피 생활은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힘”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각인되는 시간들이었다. 다윗이 선명하게 경험할 수 있었던 하나님은 그가 “사망의 줄과 불의의 창수(4절), 스올(무덤)의 줄과 사망의 올무(덫_5절)” 속에서 도드라졌다. 죽음의 위협과 불의한 상황 속에서 “구원”을 베푸신 “강력한 능력(힘)”의 하나님이셨다.
다윗의 하나님은 그에게 ‘반석’, ‘요새’, ‘바위’, ‘건지시는 이’, ‘나의 하나님’, ‘방패’, ‘구원의 뿔(힘, 능력)’, ‘산성’…..(2절)이셨다. 시시각각 조여오는 사울의 군대에게서 보호해 주셨던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고백들 앞에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다.
매 순간 이것들을 실제로 경험하며 고백한 것이다. “나의 하나님”…
본문 1-6절에서만 “나의”라는 표현이 10회나 사용된 것을 보아도 다윗의 고백은 상상의 고백이 아니라 실제 상황을 거치며 체험된 고백이었다. 그렇게 경험한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의 힘(능력)을 백성들에게 고백하고 백성들이 이를 따라 고백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는 다윗의 힘과 능력으로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통치되는 “하나님 나라”임을 왕이 된 그 자리에서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왕은 하나님, 우리의 진정한 왕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외치는 이제 막 왕으로 즉위한 왕의 모습이라니… 사울왕과 너무나 비교되지 않는가!
다윗에게 하나님은 “힘”이셨다. 군사적인 영역(2절)에서도 힘이 되셨고, 자신을 죽음의 위협에서도 충분히 구원해 주신(3-6절) “능력(힘)”의 하나님이셨다. 그렇다면 다윗은 이런 하나님의 “힘”을 어떻게 경험하고 누릴 수 있었을까?
3.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3-6절)
‘아뢴다’, ‘부르짖음’과 같은 표현이 4회(3, 6절) 반복하여 나타난다. 다윗은 원수들이 둘러쌀 때(3절), 죽음의 위협이 닥쳤을 때(4-5절), 환난 중에(6절) 어김없이 하나님께 “아뢰고 부르짖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힘(능력)을 경험한 것은 “아뢰고 부르짖는” 다윗의 간절한 믿음의 호소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들어주시는 분이시다.
환난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은 성전에서(아마도 하늘에서) 내 소리를 들으셨고, 그의 귀에 들렸다고 고백한다. 분명히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신한 것이다. 환난에 처했을 때 가장 막막한 것은 ‘누가 나의 이 고통의 소리를 들을까?’라는 소외감이다. 이 세상에서 나의 고통의 소리를 누가 들어줄까라는 상실감이 고통을 배가시킨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들으신다. 사람들은 듣지 못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들으신다.
물리적인 거리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환난의 장소에서 가까이 계셔서 들으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처소(성전, 하늘)에 계셔도 광야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다고 고백한다. “내가 고통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고, 나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그의 성전에서 나의 간구를 들으셨다. 주님께 부르짖은 나의 부르짖음이 주님의 귀에 다다랐다(새번역_6절).”
아!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다!! “아뢰고 부르짖으면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4. 하나님에 대한 땅과 하늘의 반응(7~15절)
다윗의 부르짖는 간구에 하나님의 응답이 구체적으로 시행되고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7~8절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땅의 반응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으셨고 원수들의 불의와 억압에 진노하셨다. 하나님의 코에서 연기가 타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온다는 표현은 그만큼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표현하는 은유다. 다윗의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너무도 커서 하나님이 직접 하늘에서 강림하실 정도였다. 또한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토록 강렬하다. 노하신 하나님이 능력의 용사처럼 하늘에서 강림하시므로 땅과 하늘은 놀라 가지각색으로 반응한다(7~15절).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자연의 반응은 이러하다. 땅은 요동하고 갈라졌으며, 곳곳의 산에서는 그 기초가 흔들려 산사태가 발생하고 화산이 터져 연기와 불을 뿜어냈다. 이런 반응은 자연을 통치하며 자연 질서를 무질서로 바꾸실 수 있는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보여준다.
9~15절은 하늘의 반응이다. 하나님은 창문을 열듯 하늘을 여시고 나타나셔서 그룹을 타고 바람 날개로 움직이듯 신속히 날아 움직이신다. 하늘 아래에는 어두움이 짙게 깔려 있다. 하나님의 그 광채로 인해 먹구름이 지나가고 번쩍이는 번개와 천둥이 온 세상을 진동한다. 분노하신 하나님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과 같고 그의 분노와 음성을 반영하는 수많은 번개와 우박은 하늘에서 활처럼 쏟아져 공중을 날아다닌다.
이 단락에서 묘사된 하나님의 강림은 온 세상의 피조물에게 하나님이 우주의 주권자이며 지존자이심을 드러내고도 남는다. 이처럼 자연세계를 그의 원하는 대로 통치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세상의 인간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겠는가? 또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 이 한 사람, 다윗의 울부짖음에 이렇게 강렬하게 응답하실까?
나는?
-다윗은 하나님을 일곱 가지 은유로 묘사한다(반석, 요새, 건지시는 이,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 2절). 그리고 그 각각에 꼬박꼬박 “나의”라는 소유격을 붙인다. 하나님은 그냥 반석이 아니라 “나의” 반석이시다.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늘어간다고 믿음이 자라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힘의 원천이시다(1, 3~5절).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힘이라고 고백한다. 골리앗과 맞섰을 때도, 사울의 칼을 피해 도망 다닐 때도 하나님은 다윗에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셨고, 또 이길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셨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어느 하나 그분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뿐이다. 내 힘만으로 어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의인의 고난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악인이 당신의 선한 백성을 괴롭히는 것에 크게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6~8절). 그 진노가 어찌나 극심한지 온 천지가 진동하고 악인의 삶이 뒤흔들린다. 다윗의 위급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내 기도를 듣고 계신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들을 담대하게 주님께 부르짖으리라.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로 강림하신다. 그냥 강림이 아니라 온갖 기상 현상과 지질 현상을 동반하시며 내려오신다(9~15절).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실 때처럼, 낙담하고 지친 엘리야를 위로하고 사명을 불어넣으실 때처럼, 우리 삶에 들어오신다. 원수와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건져주시기 위해 몸소 오신다. 우주 전체가 감당치 못하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 내가 감당치 못하는 문제를 해결해주신다.
-다윗의 고백이 나의 고백도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사랑하는 하나님, 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 들어주시는 하나님…. 삶의 굽이굽이마다 얼마나 위로와 소망이 되는지 모른다. 사랑하기에 그의 뜻대로 살고, 힘이 되시기에 염려하지 않으며, 들어주시기에 언제든 부르짖을 수 있는 하나님이 되어 주셔서 감사하다!
-그 모진 시간들을 사랑하는 하나님과 보내고 왕위에 오른 다윗의 그 자리에서의 심정을 상상해 본다. 사랑하며, 부르짖으며 보낸 시간들이었기에 당당하게 고백하고 감사하는 그 모습이 도전된다. 내가 오늘 하루를 살며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내일의 나의 모습이 다윗처럼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으리라. 오늘 하루를 살며 부르짖음을 놓치지 않고 보내야 내일은 들으시는 하나님을 담담하게 드러낼 수 있으리라.
*고통과 환난 속에서 사랑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힘이 되신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푸심으로 반석, 바위, 요새, 산성, 방패… 되어주시는 은혜 안에 보호하실 것이다.
*더온누리교회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힘이 되어 주시고 부르짖음을 들어 주심을 믿는다. 새롭게 시작된 교회의 걸음걸음을 지키실 줄 믿는다. 예기치 못한 코로나의 환난이 교회를 쓰러뜨리지 못할 것이다. “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붙잡으신다. 아멘.
*나라와 민족도 그리 하실 것이다. 코로나 문제가 해결되어 가나 싶더니 세계정치역학에 신냉전이라는 새로운 위협이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우리가 그 둘 사이에 끼였다. 하지만 오늘 말씀이 소망이 된다. 우리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고 그 뜻대로 하루하루 걷다 보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을 하나님이 지키실 것이다.
*우리의 가정도,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공동체에 속한 가정들, 그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형형색색 다르기만 한 상황과 여건이어도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힘”은 분명 우리를 지켜 주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녀들의 삶을 보호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새번역_롬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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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어떤 자세로 해야 할까? 때론 겸손하게, 때론 긍휼을 구하는 자세로, 때론 울고 가슴을 치면서 해야 하겠지만, 자신감을 가지고 담대하게 기도해야 할 때도 있다. 언제 자신 있게 기도해야 하며 자신 있게 기도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할까?
1. 억울한 일을 당하다
시편 17편은 다윗의 기도다. 다윗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을 때 쓴 시인 듯한데, 아마 사울왕에게 쫓겨 다닐 때 쓴 것으로 추정된다.
(시 17:2-3, 새번역) [2] 주님, 친히 “너는 죄가 없다”고 판결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눈으로 공평하게 살펴보아 주십시오. [3] 주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시험하여 보시고, 밤새도록 심문하시며 샅샅이 캐어 보셨지만 내 잘못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내 입에서 무슨 잘못을 발견하셨습니까?
자신 있는 기도의 첫 번째 비결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다. 이 기도에 대해서 다윗이 삶의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깨끗하거나 온전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사울로부터 쫓겨 다니는 그 상황에 대해서 다윗은 억울했던 것이다. 그렇게 쫓겨 다닐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주님께 자신의 무죄함을 호소했다.
다윗이 이렇게 자신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사울과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윗은 자신의 의도와 실제 삶에서 전혀 악을 행한 적이 없고 탐욕을 따른 적도 없고 무엇보다 사울을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일부러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황당하게 쫓기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억울한 그 상태에 대해서 스스로 보복함으로 억울함이 없어지도록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억울함을 당하고 억울한 그 상태를 상대를 공격함으로 상쇄시켜 버린다면 자신 있는 기도를 할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억울함을 품고 하는 기도가 자신 있는 기도가 된다.
즉 상대는 자신에게 피해를 입혔고 앞으로도 피해를 입히고자 하는데 자신은 그에 대해서 보복하지 않고 피해를 겪고 입을 때 자신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다.
2. 기도의 중요성을 알아야
다윗은 기도의 중요성을 알았다. ‘기도’란 주술적인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다. 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받는 행위도 아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다.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있는 그대로 호소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답변을 듣는 것이 기도다.
당연히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자신의 말을 듣는 분이심을, 하나님이 자신의 억울함에 대해 공감하시는 분이심을, 그리고 하나님이 공의에 따라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분이심을 확신하고서야 기도가 가능하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소통을 평소에도 계속 해왔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다윗은 이렇게 자신 있는 기도를 할 수 있었다.
기도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리고 평소에 주님과 인격적인 소통을 하지 않고서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기도가 나오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다른 방향으로 폭발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평소에 이어가고 있음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자신 있고 담대한 기도를 할 수 있는 비결이 될 것이다.
3. 참된 만족의 근거가 남과 다름
다윗이 자신의 존재와 삶 자체가 흔들리는 그토록 억울한 상황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에 힘을 쏟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상황이 역전되어서 사울은 망하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그 상황을 가정하고 상상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다윗이 그런 의도로 기도했다면 다윗은 결코 아름다운 신앙인이 아닐 것이다. 다윗의 가장 큰 관심은 왕위가 아니라, 패배한 상황에서 돌이켜 큰 성공을 거두는 것도 아니라, 오직 주의 얼굴이었다.
(시 17:15, 새번역) 나는 떳떳하게 주님의 얼굴을 뵙겠습니다. 깨어나서 주님의 모습 뵈올 때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떳떳하게 뵙는 것, 그래서 잠에서 깰 때에 자신의 죄로 인해 어둡고 절망스럽고 찝찝한 마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는 자신의 삶이 되는 것이 다윗이 가장 중요하게 소망하는 것이었다. 다윗의 만족이 오직 주의 얼굴이었고, 주님 안에 머물고 거하는 것이었고, 주님 앞에 섰을 때 떳떳한 것이었기에 다윗은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주께 보복을 맡기고 담대하고 자신 있게 기도할 수 있었다.
참되고 진실하고 자신 있는 기도의 비결을 요약하면, 자신의 힘으로 다 보복하지 않아서 억울함이 있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고, 깰 때에 주님 앞에 떳떳한 마음을 갖는 것이 삶의 가장 큰 소망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시인은 쏟아지는 부당한 비방에 대해 하나님께 무죄를 입증해달라고 호소한다. 과거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애굽 군대를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특별한 사랑으로 지켜주신 것처럼 자신을 보호하고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한다.
-다윗은 무죄를 호소한다. 그가 위기에 빠진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순종 때문이었다. 다윗은 자신이 겪는 위기와 관련하여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일을 겪을 만한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호소한다(2~5절, 14절). 이런 다윗의 모습처럼 나도 역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판단해달라고 아뢸 만큼 떳떳하게 행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호소를 들으시는 분이시다. 사냥하는 사자와 같은 이들에게 둘러싸인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처절하게 아뢴다(1, 6절).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들으소서, 주의하소서, 기울이소서, 지키소서, 구원하소서’ 등은 다윗의 절박함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다윗은 기도를 경청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이야기에 근거하여 호소한다. 지금도 변함없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자.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와 대적하신다. 홍해에서 애굽을 심판하셨던 기이한 역사를 다윗을 위해 재현하신다. 원수를 심판하는 동시에, 누구도 돕지 않는 다윗을 안전하게 보호하신다(7, 8, 13절).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에서 비롯된다.
-다윗은 하나님만 충성스럽게 섬겼는데도 모함과 질시를 받는다. 자신을 감시하며 비방거리를 찾는 이들 때문에 견딜 수 없어 죽을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들의 악행을 낱낱이 일러바친다. 그들이 어떤 이들인지 숨기지 않고 아뢴다. 사람과 세상은 우리 억울함을 경청하지 않을뿐더러 억울함을 해결해줄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대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한다.
*시인인 다윗이 당차다. 자기는 의로우니 마땅히 구원받아야 한다고 외친다. 거짓되지 않은 입술로 구하니 응답하셔야 한다고 말한다. 당돌하다. 시험해보라고 요구한다. 당차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올까? 그는 단 한 걸음도 주의 말씀이 가리키는 곳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솔직히 이런 다윗의 모습이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부럽다.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사람만큼 강한 사람은 없다. 진정한 용기는 하나님께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는 마음에서 나오지 않을까?
*다윗은 의인인데도 고난을 당한다. 말씀을 따라 살았는데도 어려움이 닥친다. 정직하게 살았는데도 거짓에게 당한다. 모든 고난은 죄의 결과는 아니다. 그러니 무조건 회개부터 해야 하는 것은 잘못이다. 시인은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보호를 요청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호소하여 구원을 호소한다.
*우리는 값싸고 판에 박힌 회개 기도, 혹은 억지로 죄를 들추어내는 기도로 긍휼을 얻어내려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오직 주님만 신뢰하고 확신하고 있으니 꼭 기도를 들어달라고 요청할 만큼 주님 앞에서 그만큼 투명하고 신실하게 살아보고 싶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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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5일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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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8일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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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re The Haam 💕✨ 2026.10.25 가을 야외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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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더함공동체 예배 🩵 설교 : 김종홍목사님 기도 : 곽효승 부장 집사님 🎉 블레싱 생일 : 27일 이득근 목사님 / 30일 최기훈,최재훈 / 31일 황정택 📢 광고 [더함 성탄 데코TF모집안내]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함께 성탄의 공간을 꾸밀 공동체원을 모집합니다. 꾸미기와 장식 좋아하시는분,아이디어를 나누며 함께 하고싶은분,작은 손길로 기쁨을 더하고 싶은분,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함께 성탄의 기쁨을 만들어가보실까요? 문의 및 신청: 디렉터 [더함 매일성경 11-12월호 책 배부안내] 매일성경 1년 구독 신청자분들의 11-12월호 책이 도착했습니다. 구독 신청하신 분들은 예배 시작 전, 뒤편에서 서명 후 수령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기선교 신청] 2027년 2월에 캄보디아 깜퐁스프와 깜퐁츠낭(스쿤 포함)을 차례로 방문해 의료·미용·어린이 사역으로 섬깁니다. 현지 교회가 세워지고 공동체가 자라는 데 도움이 되는 선교를 목표로 합니다. 신청기간은 11월 30일 까지입니다. 큐알코드를 이용해서 신청해주세요. 일정 – 전일정 참가: 2/3(수) 출발~2/10(수) 귀국, 목요일 도착 – 1진(깜퐁스프): 2/3(수) 출발~2/8(월) 귀국, 화요일 도착 – 2진: 2/6(토) 출발~2/10(수) 귀국, 목요일 도착 – 안과팀: 2/4(목) 출발~2/8(월) 귀국, 화요일 도착 문의 – 이홍기 목사 [세례 신청] 11월 1일 주일에 세례식이 있습니다. 아래의 문답 교육 시간에 꼭 참석 바랍니다. 신청은 3층 로비에서 신청서를 작성하여 신청해주세요. [청장년 : 세례 / 입교 / 학습] 1회차 – 10/22(목) 저녁 7시 30분 2회차 – 10/29(목) 저녁 7시 30분 [청소년 : 세례 / 입교 / 학습] 1회차 – 10/24(토) 오후 3시 2회차 – 10/31(토) 오후 3시 [유아 세례] 교육 – 10/31(토) 오후 3시 * 문답식은 10월 31일(토) 오후 5시부터 세례식 참석자를 대상으로 진행됩니다 [선교사 선물보내기] 연말 성탄절에 맞춰서 우리공동체가 동역하는 25개국 54명의 선교사와 현지 교역자들에게 선물을 보내려고 합니다. 함께 동참해주시겠어요? 보내드리고 싶은 용품(유통기한이충분한)이나 물질을 모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계좌:신협/더온누리134004691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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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윌센터 도즈문화교실 한국어 기초반. . #더온누리교회 #도즈 #굿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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