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단 지파와 레위 청년의 타락 [사사기 18:1-20]
18장은 단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이 아닌 라이스를 정복하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기업을 정복하지 못하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을 정탐하러 다니다가 라이스를 발견하고 이곳을 정복하려고 출발한다. 이 과정에서 미가 집안의 신상들과 에봇과 드라빔을 무력을 빼앗고, 제사장 역할을 하던 레위인에게 단 지파의 제사장 자리를 제안하고 이 레위인은 기쁘게 단 지파의 제안을 수락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차지하라고 분배 받은 땅은 힘에 밀려 차지하지 않고 자신들보다 약한 한 집안과 평온하게 살고 있던 라이스 지역 사람들의 것은 빼앗는다.
단 지파의 신앙과 삶이 전혀 일치 되지 않는 이 당혹감을 어떻게 할까? 어쩌다 이렇게 무너졌을까?
1. 레위 청년
18:30에서는 이 청년을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인 요나단”이라고 소개한다. 기막힐 일이다. 모세의 손자라면 가나안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이다. 이렇게 급속히 무너지다니…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레위 지파에게 분배되지 않은(민 35장, 수 21장) 베들레헴에서 살았다. 그나마 그곳에서 다시 살 곳을 찾아 나섰다. 레위인들의 삶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인 십일조와 예물을 제대로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니 레위인들이 굶어 죽게 된 것이다. 이에 레위인들은 사명 따라 살아가야 할 분배 받은 도시를 떠나 이곳 저곳을 방황하게 된 것이다.
‘요나단’은 에브라임 산지의 미가의 집에 고용 되어 한 집안의 제사장이 되었다. 여기에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단 지파를 따라 다시 이동한다(4, 20절). 레위인으로서 살아내야 할 하나님의 계명을 쉽게 무시하고, 만들어 놓은 우상을 섬기도록 방관하는 그의 모습이 고통스럽다. 이때 당시 성막은 에브라임 지파안의 ‘실로’에 있었다. 같은 지파의 땅 안에 ‘성막’이 있었음에도 그곳까지 가는 것이 싫어서 미가는 집안에 제단을 만든 것이다. 레위 청년 요나단은 그 제단에서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가의 제사장”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단 지파의 정탐꾼의 앞 길을 축복한다(6절).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완전히 저버리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 없는 삶을 살면서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이들과 다를 바 무었인가!
2. 단 지파
단 지파가 거주할 땅을 구하는 중이었다(1절)고 이 에피소드는 시작되었다. 언뜻 이해하기로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본래 단 지파에게 분배된 땅에는 아모리 족속이 자리잡고 있었고 남서쪽으로는 블레셋 족속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을 몰아내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차지 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용맹한 다섯명의 정탐꾼을 보내 아모리 복속과 블레셋 족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을 찾던 단 지파는 마침내 갈릴리 호수 북쪽에서 “라이스”라는 지역을 찾아 낸다. 이 지역은 “한가하고 평화롭게, 안전하게 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권력을 쥐고 해치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시돈 사람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 어느 누구와도 접촉이 없었다(새번역_7절).”
그야말로 “한가하고 평화로우며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땅”을 발견한 것이다. 다섯명의 정탐꾼들은 지체하지 않고 돌아와 “이렇게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며, 망설이지 말고 빨리 쳐들어 가서 그 땅을 차지하자(새번역_9절)”고 하였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그 땅을 하나님이 넘겨 주셨다(10절)고 주장한다.
이윽고 600명이 정탐 보고를 따라 라이스를 취하기 위해 출정한다. 그 길에 미가의 집에 있는 신상들과 우상 단지들을 취하여 간다. 레위 청년에게는 한 집안의 제사장이 될 것인지, 지파의 제사장이 될 것인지를 선택하라 한다.
단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은 매우 좋은 지역이었다(수 19:40-48). 하지만 남쪽으로 접해있는 블레셋과 싸우기를 꺼려하고 버거워 하여 그 좋은 땅을 포기하고 만 것이다. 또한 레위 지파 요나단을 지파의 제사장으로 삼을 때, 공식적으로 우상숭배를 채택하는 불명예를 감수한다. 사사시대의 종교적 혼합주의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단 지파의 폭력과 살인의 죄악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600명의 군사가 미가의 집을 둘러 싸고 저지른 약탈과, 평화로운 라이스 성을 무자비하게 살육한 살인의 죄를 반드시 물으실 것이다.
*단 지파는 제일 처음 우상숭배의 길에 들어선다(30-31절). 이 사회는 법, 기준, 사사, 장로,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정처 없이 떠돌며 거할 곳을 찾던 레위인(17:8)처럼, 기업을 받았으나 정복하는 데 실패하고 도리어 아모리인에게 쫓겨난(1:34) 단 지파도 자신들이 살 곳을 찾고 있다(1절). 어쩌면 단 지파에게 필요한 것은 ‘땅’이 아니라 ‘왕’어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방황의 종식’은 안전한 땅을 찾는 데서 끝나지 않고 참된 왕이신 하나님을 아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미가의 집에 제사장으로 고용된 레위 청년은 단 지파 정탐꾼들의 질문에 자신이 미가에게 고용된 자임을 밝히며, 후한 보수를 따라 선택한 자신의 의도는 숨기고 더 나은 대우를 따라 얼마든지 떠날 수 있는 속내를 비춘다(2~6절). 그리고 형통을 묻는 그들에게 그들이 기대하는 평안을 빌어준다. 신앙의 형식만 있을 뿐 모두 욕심과 야심으로 가득찼다. 사리사욕을 위해 진리를 이용하고 상업적 이득의 도구로 종교를 이용하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다.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면 누구든 어디서든 이런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단 지파는 기업으로 받은 땅을 되찾기보다 좀 더 안전한 땅을 넘보기 시작한다(2절). 그리고 그들이 찾아낸 성읍이 바로 ‘라이스’다. 레위 청년의 격려를 받고 길을 나선 그들은 세상과 고립된 채 염려 없이 사는 그곳을 ‘탐내며’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확신한다(7~10절). 그들은 그 땅을 점령하여 거주하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변조한다.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 남의 평안을 짓밟는 그들에겐 언약 백성의 인자와 자비도 배려도 없고 오직 비열한 탐심만 가득 차 있었다.
-단 지파 600명의 군사들이 미가의 집 앞에서 무력시위를 하는 사이, 정탐꾼들은 종교 기물들을 약탈하고 레위 청년에게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될 것을 제안한다. 돈과 출세에 눈먼 그는 흔쾌히 수용한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이들의 직분과 직책이 거래의 대상이 되었고, 부름받은 사역자들은 돈과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매우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임에 틀림없었다.
-미가 집의 제사장인 레위 청년은 단 지파가 가는 길에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 계신다고 축복의 말을 전해 주었다.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들려 준 것이다. 단 지파 정탐꾼들도 근거도 없는 이 말을 확신하고는 평화롭게 사는 동네 라이스를 침공하기로 한다. 하나님이 그 땅을 자기드 손에 넘겨주셨다고 맹목저긍로 믿고 전쟁을 감행하고 만다. 사사시대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듣고 싶은 대로 들었고, 믿고 싶은 대로 믿었다.
-미가는 훔친 돈으로 하나님 신상을 만들었고,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세웠다. 단 지파는 그 신상을 다시 훔쳤고 그 레위인마저 위협과 회유를 통해 자기 제사장으로 영입한다. 레위인은 한 집안의 제사장에서 한 지파의 제사장으로 변신한다.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 아니라, 돈이었다.
-총체적 난국이다. 사사기의 비극은 하나님을 떠난 사사들의 악행에 대하여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 지파도, 그를 따라나선 배신자 레위 사람도 그 악한 목적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단 지파의 신앙과 삶이 전혀 일치 되지 않는 이 당혹감을 어떻게 할까? 어쩌다 이렇게 무너졌을까?
1. 레위 청년
18:30에서는 이 청년을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인 요나단”이라고 소개한다. 기막힐 일이다. 모세의 손자라면 가나안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이다. 이렇게 급속히 무너지다니…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레위 지파에게 분배되지 않은(민 35장, 수 21장) 베들레헴에서 살았다. 그나마 그곳에서 다시 살 곳을 찾아 나섰다. 레위인들의 삶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인 십일조와 예물을 제대로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니 레위인들이 굶어 죽게 된 것이다. 이에 레위인들은 사명 따라 살아가야 할 분배 받은 도시를 떠나 이곳 저곳을 방황하게 된 것이다.
‘요나단’은 에브라임 산지의 미가의 집에 고용 되어 한 집안의 제사장이 되었다. 여기에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단 지파를 따라 다시 이동한다(4, 20절). 레위인으로서 살아내야 할 하나님의 계명을 쉽게 무시하고, 만들어 놓은 우상을 섬기도록 방관하는 그의 모습이 고통스럽다. 이때 당시 성막은 에브라임 지파안의 ‘실로’에 있었다. 같은 지파의 땅 안에 ‘성막’이 있었음에도 그곳까지 가는 것이 싫어서 미가는 집안에 제단을 만든 것이다. 레위 청년 요나단은 그 제단에서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가의 제사장”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단 지파의 정탐꾼의 앞 길을 축복한다(6절).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완전히 저버리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 없는 삶을 살면서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이들과 다를 바 무었인가!
2. 단 지파
단 지파가 거주할 땅을 구하는 중이었다(1절)고 이 에피소드는 시작되었다. 언뜻 이해하기로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본래 단 지파에게 분배된 땅에는 아모리 족속이 자리잡고 있었고 남서쪽으로는 블레셋 족속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을 몰아내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차지 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용맹한 다섯명의 정탐꾼을 보내 아모리 복속과 블레셋 족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을 찾던 단 지파는 마침내 갈릴리 호수 북쪽에서 “라이스”라는 지역을 찾아 낸다. 이 지역은 “한가하고 평화롭게, 안전하게 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권력을 쥐고 해치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시돈 사람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 어느 누구와도 접촉이 없었다(새번역_7절).”
그야말로 “한가하고 평화로우며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땅”을 발견한 것이다. 다섯명의 정탐꾼들은 지체하지 않고 돌아와 “이렇게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며, 망설이지 말고 빨리 쳐들어 가서 그 땅을 차지하자(새번역_9절)”고 하였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그 땅을 하나님이 넘겨 주셨다(10절)고 주장한다.
이윽고 600명이 정탐 보고를 따라 라이스를 취하기 위해 출정한다. 그 길에 미가의 집에 있는 신상들과 우상 단지들을 취하여 간다. 레위 청년에게는 한 집안의 제사장이 될 것인지, 지파의 제사장이 될 것인지를 선택하라 한다.
단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은 매우 좋은 지역이었다(수 19:40-48). 하지만 남쪽으로 접해있는 블레셋과 싸우기를 꺼려하고 버거워 하여 그 좋은 땅을 포기하고 만 것이다. 또한 레위 지파 요나단을 지파의 제사장으로 삼을 때, 공식적으로 우상숭배를 채택하는 불명예를 감수한다. 사사시대의 종교적 혼합주의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단 지파의 폭력과 살인의 죄악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600명의 군사가 미가의 집을 둘러 싸고 저지른 약탈과, 평화로운 라이스 성을 무자비하게 살육한 살인의 죄를 반드시 물으실 것이다.
*단 지파는 제일 처음 우상숭배의 길에 들어선다(30-31절). 이 사회는 법, 기준, 사사, 장로,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정처 없이 떠돌며 거할 곳을 찾던 레위인(17:8)처럼, 기업을 받았으나 정복하는 데 실패하고 도리어 아모리인에게 쫓겨난(1:34) 단 지파도 자신들이 살 곳을 찾고 있다(1절). 어쩌면 단 지파에게 필요한 것은 ‘땅’이 아니라 ‘왕’어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방황의 종식’은 안전한 땅을 찾는 데서 끝나지 않고 참된 왕이신 하나님을 아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미가의 집에 제사장으로 고용된 레위 청년은 단 지파 정탐꾼들의 질문에 자신이 미가에게 고용된 자임을 밝히며, 후한 보수를 따라 선택한 자신의 의도는 숨기고 더 나은 대우를 따라 얼마든지 떠날 수 있는 속내를 비춘다(2~6절). 그리고 형통을 묻는 그들에게 그들이 기대하는 평안을 빌어준다. 신앙의 형식만 있을 뿐 모두 욕심과 야심으로 가득찼다. 사리사욕을 위해 진리를 이용하고 상업적 이득의 도구로 종교를 이용하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다.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면 누구든 어디서든 이런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단 지파는 기업으로 받은 땅을 되찾기보다 좀 더 안전한 땅을 넘보기 시작한다(2절). 그리고 그들이 찾아낸 성읍이 바로 ‘라이스’다. 레위 청년의 격려를 받고 길을 나선 그들은 세상과 고립된 채 염려 없이 사는 그곳을 ‘탐내며’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확신한다(7~10절). 그들은 그 땅을 점령하여 거주하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변조한다.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 남의 평안을 짓밟는 그들에겐 언약 백성의 인자와 자비도 배려도 없고 오직 비열한 탐심만 가득 차 있었다.
-단 지파 600명의 군사들이 미가의 집 앞에서 무력시위를 하는 사이, 정탐꾼들은 종교 기물들을 약탈하고 레위 청년에게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될 것을 제안한다. 돈과 출세에 눈먼 그는 흔쾌히 수용한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이들의 직분과 직책이 거래의 대상이 되었고, 부름받은 사역자들은 돈과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매우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임에 틀림없었다.
-미가 집의 제사장인 레위 청년은 단 지파가 가는 길에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 계신다고 축복의 말을 전해 주었다.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들려 준 것이다. 단 지파 정탐꾼들도 근거도 없는 이 말을 확신하고는 평화롭게 사는 동네 라이스를 침공하기로 한다. 하나님이 그 땅을 자기드 손에 넘겨주셨다고 맹목저긍로 믿고 전쟁을 감행하고 만다. 사사시대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듣고 싶은 대로 들었고, 믿고 싶은 대로 믿었다.
-미가는 훔친 돈으로 하나님 신상을 만들었고,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세웠다. 단 지파는 그 신상을 다시 훔쳤고 그 레위인마저 위협과 회유를 통해 자기 제사장으로 영입한다. 레위인은 한 집안의 제사장에서 한 지파의 제사장으로 변신한다.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 아니라, 돈이었다.
-총체적 난국이다. 사사기의 비극은 하나님을 떠난 사사들의 악행에 대하여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 지파도, 그를 따라나선 배신자 레위 사람도 그 악한 목적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사사 시대의 종교적 혼란과 미가의 집 이야기 [사사기 17:1-13]
17-21장은 사사기의 에필로그다. 그런데 배경은 사사시대 초기이다. 가나안 땅 분배가 이루어지고 여호수아가 죽은지 얼만 되지 않은 시대를 배경으로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혼란이 어느 정도 였는지를 보여준다. 17~18장 미가의 집과 단 지파 이야기, 19~21장 레위인의 첩 이야기와 베냐민 지파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저마다 자기 뜻에 맞는 대로(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사사시대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연속적으로 배치 되어 있다. 참담하게도 모든 에피소드가 레위인과 관련되어 진행된다. 레위인다운 레위인의 부재가 불러온 사사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요지경 속 사사시대… 어느 정도 였을까?
미가는 어머니에게서 훔쳤다가 돌려드린 은으로 우상을 만들고 에봇과 드라빔까지 만들어서 집에 신당을 차리게 된다. 그런데 그때 마침 떠돌던 레위인이 미가으 ㅣ집에 오게 되었고 미가는 이 레위인을 자신의 집 제사장으로 삼는다. 미가가 이런 일을 한 이유는 모두 여호와께 복을 받기 위한 것이었지만,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행동한 것이었다.
1. 미신으로 전락한 여호와 신앙(1-6절)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미가라는 사람의 한심한 집안 이야기로 시작한다.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혼란의 단면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일단 미가의 집은 매우 부자이다. 자신이 어머니의 거액의 돈을(은 1,100) 훔쳤다가 저주 받는 것이 두려워 다시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고, 어머니는 아들이 훔쳤다가 솔직하게 돌려 주는 것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더 나아가 그 돌려받은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집에 둔다. 심지어 미가는 이미 집에 신당을 만들어 놓았고 그곳에 에봇과 드라빔 신상도 있었다. 가관인 것은 레위인도 아닌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워 놓기도 했다.
가관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들은 어떤것이든 자기 마음대로 행하였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이미 안중에도 없고 관심조차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미가와 그의 어머니는 하나님을 만홀히(무심하고 소홀히, 문득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버릇 없이) 여기는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말씀에 통치 받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어떻게 혼란스러워 지는지를 분명하게 경고한다. 미가의 삶은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 돈을 훔친 자녀를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고 여호와께 은을 바친다면서 신상을 만든다. 무엇보다 “내 아들을 위하여(3절, 나의 아들이 저주를 받지 않도록_새번역)”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상을 만들어서 “내가 섬겨야 할 하나님”이 아닌 “나를 섬기는 하나님”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이런 모습을 미가는 그대로 이어 받았다. 이미 집안에는 신당이 있고, 그곳에 에봇과 드라빔이 자리 잡고 있었다(5절). 내가 좋으면, 나에게 이익이 있다면 하나님을 얼마든지 부르고 만날 수 있다고 여겨 에봇을,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도 나의 복을 빌어 주는 것이 좋다고 여겨 드라빔을 만들어 함께 섬기고 있었다.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한 하나님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러나 형식은 갖추고 싶어서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이 감당해야 할 제사장의 자리에 아들을 않혔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복을 위해 하나님이 자신을 섬겨주어야 한다는 모습이 역력하다. 가나안 땅에 이제 정착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급속도로 나타난 황망하고 참담한 모습들 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2. 레위인의 방황, 이스라엘의 방황(7-13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급속히 떠나간 원인을 두고 쫓아내지 못한(혹은 않은) 가나안 민족들의 농경문화와 종교에 영향을 받아서, 혹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해서,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력의 부재로… 등등 여러가지 원인들을 거론한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과 비슷하다.
하지만 사사기 저자는 17장부터 21장의 에피소드를 전개하면서 “레위인” 혼란스러운 상황을 각각의 에피소드의 주요 소재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레위인”의 타락한 삶을 사사시대의 혼란스러움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한다. 특히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6절)”는 해석을 언급함으로서 이스라엘의 왕 되신 하나님의 통치력이 백성들의 삶에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성막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 백성이 살아내야 할 가치인 율법(말씀)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말씀으로 살아내다 혹 실수했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제사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말씀(율법)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고 오는 세대에게 가르쳐 지지 못했기 때문이고, 미가의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선명하게 나타났듯 부모세대가 말씀을 따라 오롯이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녀들은 부모의 입술의 말을 듣고 사는 것이 아니라 ‘등’을 보고 산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떤 분석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레위인”의 사명따라 순종하며 사는 삶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에 살았던 한 레위인 청년의 방황이 언급된다. 그가 ‘거주할 곳을 찾아서’ 베들레헴을 떠났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분배 받아 각각 정착할 때, 가나안 주요 48개 성읍에 분산되어 배치 되었다. 목적은 단 하나, 그 성읍에 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율법을 따라 온전히 삶이 정비되도록 돕는 역할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레위인의 삶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 48개 성읍에 속한 밭을 경작하며 살도록 정하여 주었다.
문제는 이 레위인 청년이 베들레헴을 떠나 살 곳을 찾을 정도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는 사사시대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명의 삶을 사는 레위인에 대한 율법이 얼마나 무시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먹고 살기 어려워 방황하다가 미가라는 부자를 만나 그 집안 제사장으로 취직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겨야 할 레위인이 뒤죽 박죽 여러 신들을 섬기는 한 가정의 제사장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재산을 훔친 미가가 저주가 두려워 실토하자 어머니는 아들의 죄를 책망하지 않고 축복하며 그를 위해 신상 둘을 만들어 준다(1~5절). 죄에 대한 참회도, 징계도 없다. 그 집에는 ‘복’을 위한 신당과 신상, 에봇과 드라빔만 가득하다. 참 신앙을 잃어버린 시대가 남긴 것은 이처럼 이기적이고 기복주의적인 ‘맹신’과 ‘미신’뿐이다. 빗나간 ‘자기 사랑과 자식 사랑’이 빚어낸, 욕망에 감춰진 허울뿐인 종교만 남았다. 우리가 귾임없이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것도 하나님 ‘같은’ 것을 너무 많이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잃어버린 은 천백, 잃어버린 참된 신앙… 미가의 어머니는 은 천백을 잃어버렸다. 범인은 아들이었다. 절도범에 대한 어머니의 무서운 저주를 듣고 아들이 실토한다. 그러자 곧 어머니는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아들에 대한 책망도 없다. 자신이 저주하면 하나님이 저주하고, 자신이 축복하면 하나님이 축복할 거라고 믿는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다. 미가의 어머니는 하나님마저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인듯하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비단 그녀 뿐일까?
-‘왕’이 부재한 자리에 남는 것은 탐욕에 물든 ‘자아’밖에 없었다(6절). 미가가 ‘자기를 위해’ 우상을 만들던 사사 시대에는 ‘왕’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신의 소견과 소욕’을 따라 행하던 시대다. 그리고 그 끝은 방호아과 방탕, 혼돈과 공허’뿐이다. 옳고 그른 것을 말하고 듣는 것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불편함을 다른 관점과 시각으로만 치부하는 이 시대가 잃어버린 참된 권위와 기준이 과연 무엇일까?
-미가 어머니의 자기 마음대로의 모습이 민망하다. 아들이 훔친 돈을 돌려 받아 아들을 위해 신상을 새기고는 여호와께 거룩하게 드린다고 고백한다. 자기 마음대로다. 하나님의 계명은 안중에도 없으면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쭌이다. 미가의 집에는 하나님이 왕이 아니라, 각각 자기 자신이 왕이었다. 자기 마음대로다!
-고향을 떠나 에브라임 산지로 이동하던 레위인은 미가가 제시한 조건에 만족하여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7~11절).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레위인이 사람에게 고용되어 성전이 아닌 한 집안의 제사당이 된다. ‘어떻게든 복을 받으려는’ 미가와 어떻게든 성공하려는 레위인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물질만능주의와 성공지상주의를 시대정신과 인생의 목표로 삼는 이 시대의 자화상 아닐까? 욱신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신앙과 양심, 신븐과 본분, 심지어 공동체와 하나님마저 저버리는 이들의 전철이 아쉽다.
-레위인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의지하여 제사로 섬겨야 했다. 그런데 그 이름 모를 레위인은 자기 맘대로 여기저기를 다닌다. 미가는 자기 맘대로 그 레위인을 개인 산당의 제사장으로서 세운다. 그러고도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복 주실 줄 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뜻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생각한 대로, 바라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줄로 안다. 제 멋대로 자기도취의 신앙이 아닐 수 없다.
-미가에게 레위인은 신앙을 가르쳐줄 영적 아비가 아니라 그저 복을 빌어주는 ‘우상지기’에 지나지 않고, 하나님은 절대의존과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 자기 만족과 행복을 위해 부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우상일 뿐이다. 자기 부정과 절대순종을 요구하는 신앙이 ‘욕심’ 때문에 자기 맘대로 하려는 기복주의로 전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16장부터 21장까지는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는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은 부르지만, 나타나시지 않는다. 이 끔찍한 이야기들 속에 저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은 나타나시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의 말씀, 뜻 이런 것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선택하여 결정하는 삶이 이어졌다. 하나님의 이름이 입술에 베여 있지만, 삶은 그 말씀과 상관 없이 살았다. 사사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사사시대는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는 시대가 아니었다. 다른 우상들의 이름도 함께 불렀다. 완연한 “종교놀음”의 시대였다. 하나님은 다른 우상들과 함께 ‘나를 위하여, 내게 복을 주실” 도구에 불과하다. 레위인은 이를 이루어 줄 고용된 종교인에 불과하다…
*참담한 사사시대의 모습이 깊은 함숨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때의 모습이 지금 이 시대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종교놀음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모습이 사사시대의 미가의 집안과, 레위인의 모습에서 동일하게 보인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사유화 하여 내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복을 빌어 주셔야 왜곡된 신앙이 나만을 위한 신상, 나만을 위한 제사장을 세우게 했다.
*신앙과 사역자를 사유화하여 우리만의 교회, 우리만의 제사장을 추구하려는 미가의 집과 다름 없는 유혹을 분별하고 경계해야 겠다. 하나님 나라 복음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공동체여야 하겠다. 종교놀음에 빠지지 말아야지…
*신앙이 변질되고 타락한 증거가 본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징계와 회개가 없는 삶, 하나님처럼 되려는 삶, 물질적인 복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삶 등이다. 이 모든 모습 속에 담겨 있는 “복을 숭배하는 삶의 가치”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하나님 자체를 복으로 여기지 않고 손에 쥐고, 삶 속에서 누릴 그 어떤 것이 있어야 안심하는 저열한 복 의식이 언제나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까운 대적이 아니겠나!
미가는 어머니에게서 훔쳤다가 돌려드린 은으로 우상을 만들고 에봇과 드라빔까지 만들어서 집에 신당을 차리게 된다. 그런데 그때 마침 떠돌던 레위인이 미가으 ㅣ집에 오게 되었고 미가는 이 레위인을 자신의 집 제사장으로 삼는다. 미가가 이런 일을 한 이유는 모두 여호와께 복을 받기 위한 것이었지만,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행동한 것이었다.
1. 미신으로 전락한 여호와 신앙(1-6절)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미가라는 사람의 한심한 집안 이야기로 시작한다.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혼란의 단면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일단 미가의 집은 매우 부자이다. 자신이 어머니의 거액의 돈을(은 1,100) 훔쳤다가 저주 받는 것이 두려워 다시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고, 어머니는 아들이 훔쳤다가 솔직하게 돌려 주는 것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더 나아가 그 돌려받은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집에 둔다. 심지어 미가는 이미 집에 신당을 만들어 놓았고 그곳에 에봇과 드라빔 신상도 있었다. 가관인 것은 레위인도 아닌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워 놓기도 했다.
가관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들은 어떤것이든 자기 마음대로 행하였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이미 안중에도 없고 관심조차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미가와 그의 어머니는 하나님을 만홀히(무심하고 소홀히, 문득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버릇 없이) 여기는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말씀에 통치 받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어떻게 혼란스러워 지는지를 분명하게 경고한다. 미가의 삶은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 돈을 훔친 자녀를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고 여호와께 은을 바친다면서 신상을 만든다. 무엇보다 “내 아들을 위하여(3절, 나의 아들이 저주를 받지 않도록_새번역)”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상을 만들어서 “내가 섬겨야 할 하나님”이 아닌 “나를 섬기는 하나님”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이런 모습을 미가는 그대로 이어 받았다. 이미 집안에는 신당이 있고, 그곳에 에봇과 드라빔이 자리 잡고 있었다(5절). 내가 좋으면, 나에게 이익이 있다면 하나님을 얼마든지 부르고 만날 수 있다고 여겨 에봇을,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도 나의 복을 빌어 주는 것이 좋다고 여겨 드라빔을 만들어 함께 섬기고 있었다.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한 하나님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러나 형식은 갖추고 싶어서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이 감당해야 할 제사장의 자리에 아들을 않혔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복을 위해 하나님이 자신을 섬겨주어야 한다는 모습이 역력하다. 가나안 땅에 이제 정착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급속도로 나타난 황망하고 참담한 모습들 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2. 레위인의 방황, 이스라엘의 방황(7-13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급속히 떠나간 원인을 두고 쫓아내지 못한(혹은 않은) 가나안 민족들의 농경문화와 종교에 영향을 받아서, 혹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해서,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력의 부재로… 등등 여러가지 원인들을 거론한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과 비슷하다.
하지만 사사기 저자는 17장부터 21장의 에피소드를 전개하면서 “레위인” 혼란스러운 상황을 각각의 에피소드의 주요 소재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레위인”의 타락한 삶을 사사시대의 혼란스러움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한다. 특히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6절)”는 해석을 언급함으로서 이스라엘의 왕 되신 하나님의 통치력이 백성들의 삶에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성막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 백성이 살아내야 할 가치인 율법(말씀)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말씀으로 살아내다 혹 실수했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제사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말씀(율법)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고 오는 세대에게 가르쳐 지지 못했기 때문이고, 미가의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선명하게 나타났듯 부모세대가 말씀을 따라 오롯이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녀들은 부모의 입술의 말을 듣고 사는 것이 아니라 ‘등’을 보고 산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떤 분석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레위인”의 사명따라 순종하며 사는 삶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에 살았던 한 레위인 청년의 방황이 언급된다. 그가 ‘거주할 곳을 찾아서’ 베들레헴을 떠났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분배 받아 각각 정착할 때, 가나안 주요 48개 성읍에 분산되어 배치 되었다. 목적은 단 하나, 그 성읍에 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율법을 따라 온전히 삶이 정비되도록 돕는 역할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레위인의 삶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 48개 성읍에 속한 밭을 경작하며 살도록 정하여 주었다.
문제는 이 레위인 청년이 베들레헴을 떠나 살 곳을 찾을 정도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는 사사시대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명의 삶을 사는 레위인에 대한 율법이 얼마나 무시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먹고 살기 어려워 방황하다가 미가라는 부자를 만나 그 집안 제사장으로 취직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겨야 할 레위인이 뒤죽 박죽 여러 신들을 섬기는 한 가정의 제사장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재산을 훔친 미가가 저주가 두려워 실토하자 어머니는 아들의 죄를 책망하지 않고 축복하며 그를 위해 신상 둘을 만들어 준다(1~5절). 죄에 대한 참회도, 징계도 없다. 그 집에는 ‘복’을 위한 신당과 신상, 에봇과 드라빔만 가득하다. 참 신앙을 잃어버린 시대가 남긴 것은 이처럼 이기적이고 기복주의적인 ‘맹신’과 ‘미신’뿐이다. 빗나간 ‘자기 사랑과 자식 사랑’이 빚어낸, 욕망에 감춰진 허울뿐인 종교만 남았다. 우리가 귾임없이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것도 하나님 ‘같은’ 것을 너무 많이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잃어버린 은 천백, 잃어버린 참된 신앙… 미가의 어머니는 은 천백을 잃어버렸다. 범인은 아들이었다. 절도범에 대한 어머니의 무서운 저주를 듣고 아들이 실토한다. 그러자 곧 어머니는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아들에 대한 책망도 없다. 자신이 저주하면 하나님이 저주하고, 자신이 축복하면 하나님이 축복할 거라고 믿는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다. 미가의 어머니는 하나님마저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인듯하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비단 그녀 뿐일까?
-‘왕’이 부재한 자리에 남는 것은 탐욕에 물든 ‘자아’밖에 없었다(6절). 미가가 ‘자기를 위해’ 우상을 만들던 사사 시대에는 ‘왕’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신의 소견과 소욕’을 따라 행하던 시대다. 그리고 그 끝은 방호아과 방탕, 혼돈과 공허’뿐이다. 옳고 그른 것을 말하고 듣는 것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불편함을 다른 관점과 시각으로만 치부하는 이 시대가 잃어버린 참된 권위와 기준이 과연 무엇일까?
-미가 어머니의 자기 마음대로의 모습이 민망하다. 아들이 훔친 돈을 돌려 받아 아들을 위해 신상을 새기고는 여호와께 거룩하게 드린다고 고백한다. 자기 마음대로다. 하나님의 계명은 안중에도 없으면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쭌이다. 미가의 집에는 하나님이 왕이 아니라, 각각 자기 자신이 왕이었다. 자기 마음대로다!
-고향을 떠나 에브라임 산지로 이동하던 레위인은 미가가 제시한 조건에 만족하여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7~11절).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레위인이 사람에게 고용되어 성전이 아닌 한 집안의 제사당이 된다. ‘어떻게든 복을 받으려는’ 미가와 어떻게든 성공하려는 레위인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물질만능주의와 성공지상주의를 시대정신과 인생의 목표로 삼는 이 시대의 자화상 아닐까? 욱신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신앙과 양심, 신븐과 본분, 심지어 공동체와 하나님마저 저버리는 이들의 전철이 아쉽다.
-레위인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의지하여 제사로 섬겨야 했다. 그런데 그 이름 모를 레위인은 자기 맘대로 여기저기를 다닌다. 미가는 자기 맘대로 그 레위인을 개인 산당의 제사장으로서 세운다. 그러고도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복 주실 줄 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뜻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생각한 대로, 바라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줄로 안다. 제 멋대로 자기도취의 신앙이 아닐 수 없다.
-미가에게 레위인은 신앙을 가르쳐줄 영적 아비가 아니라 그저 복을 빌어주는 ‘우상지기’에 지나지 않고, 하나님은 절대의존과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 자기 만족과 행복을 위해 부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우상일 뿐이다. 자기 부정과 절대순종을 요구하는 신앙이 ‘욕심’ 때문에 자기 맘대로 하려는 기복주의로 전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16장부터 21장까지는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는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은 부르지만, 나타나시지 않는다. 이 끔찍한 이야기들 속에 저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은 나타나시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의 말씀, 뜻 이런 것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선택하여 결정하는 삶이 이어졌다. 하나님의 이름이 입술에 베여 있지만, 삶은 그 말씀과 상관 없이 살았다. 사사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사사시대는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는 시대가 아니었다. 다른 우상들의 이름도 함께 불렀다. 완연한 “종교놀음”의 시대였다. 하나님은 다른 우상들과 함께 ‘나를 위하여, 내게 복을 주실” 도구에 불과하다. 레위인은 이를 이루어 줄 고용된 종교인에 불과하다…
*참담한 사사시대의 모습이 깊은 함숨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때의 모습이 지금 이 시대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종교놀음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모습이 사사시대의 미가의 집안과, 레위인의 모습에서 동일하게 보인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사유화 하여 내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복을 빌어 주셔야 왜곡된 신앙이 나만을 위한 신상, 나만을 위한 제사장을 세우게 했다.
*신앙과 사역자를 사유화하여 우리만의 교회, 우리만의 제사장을 추구하려는 미가의 집과 다름 없는 유혹을 분별하고 경계해야 겠다. 하나님 나라 복음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공동체여야 하겠다. 종교놀음에 빠지지 말아야지…
*신앙이 변질되고 타락한 증거가 본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징계와 회개가 없는 삶, 하나님처럼 되려는 삶, 물질적인 복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삶 등이다. 이 모든 모습 속에 담겨 있는 “복을 숭배하는 삶의 가치”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하나님 자체를 복으로 여기지 않고 손에 쥐고, 삶 속에서 누릴 그 어떤 것이 있어야 안심하는 저열한 복 의식이 언제나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까운 대적이 아니겠나!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삼손의 실패와 하나님의 회복하시는 은혜 [사사기 16:15-31]
세 번의 실패에도 들릴라는 포기할 생각이 없다. 반대로 세 번의 경고(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분별하지 못하고 자신을 들릴라의 품에 방치한 삼손은 결국 힘이 빠져나가 붙잡히고, ‘가사’의 깊은 감옥에서 놋줄에 묶여 맷돌을 갈다가, 자신을 웃음거리로 즐기는 다곤 신전에 모인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최후를 맞는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스라엘에게 사사들을 보내 무수한 기회와 경고를 주었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곧 삼손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 속에서 무수한 각성의 기회를 제공함에도 돌이켜 거룩한 삶을 추구하지 않는 성도의 모습, 나의 모습과도 다를 바 없다.
에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무리 들릴라를 사랑했기로서니, 자신의 약점을 캐물으며 ‘끈질기게 졸라대는’ 것에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니… 삼손은 들릴라에게 진심이었지만, 들릴라는 자신에게 막대한 부를 약속한 블레셋 방백들에게 진심이었다. 참 딱하다… 그런데 삼손의 이런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내가 집착하고 연연하는 것이 나를 옭아매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줄도 모르고,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들릴라는 치밀하게 준비했다. 삼손은 들릴라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녀의 무릎베개에서 이내 잠들었다. 그 순간만은 진심으로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들릴라는 사람을 불러 “일곱 가닥으로 땋은 그의 머리털을 깎게 한 다음 일부러 괴롭혀 보기까지(새번역_19절)” 하며, 블레셋 방백들이 주기로 한 은 5,500세겔을 위해 ‘진심’으로 행한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들이닥쳤어요!”라는 들릴라의 외침에 깨어나 “전과 같이” 하려 했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했다(20절)”. 결국 붙잡혀 눈이 뽑히고, 놋줄에 묶여 ‘가사’의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되었다. 조롱과 멸시 속에서, 하나님이 떠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감각하게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는 삶이 맞이하게 될 ‘조롱과 멸시’의 비참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세상의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 버린 교회, 하나님이 떠난 교회가 맞이하게 될 모습이 분명하기에 두렵기까지 하다. 두 눈이 뽑히고 놋줄에 묶여 맷돌을 돌리는 노역을 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삼손의 모습이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인 듯하여 고통스럽다.
*암울한 조선에 들어와 의식을 깨우고 삶을 변화시켰던 개화기 한국교회의 능력은 보이지 않고, 지탄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 버린 교회의 모습이 고통스럽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듯하다는 사실이다. 정말 그럴까?
1. 부끄럽고 민망하고 송구하고 송구하지만…
삼손은 돈을 향한 들릴라의 진심 때문에, 자신이 진심이었던 사랑에 배신당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우리 땅을 망쳐 놓은 원수, 우리 백성을 많이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셨다(새번역_24절)”며 삼손을 구경거리, 멸시거리로 삼았다. 이를 고스란히 당하는 삼손의 마음에 뒤늦은 후회와 울분이 넘쳐나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큰 제사를 드리려고 블레셋 사람들이 모인 다곤 신전에 끌려 나갔을 때, 자신을 향해 모욕과 비웃음을 던지며 유흥을 즐기는 이들의 소리를 들으며 “그 때에 삼손이 주님께 부르짖으며 간구하였다. ‘주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의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하여 주십시오.'(새번역_28절)”라고 외쳤다.
삼손은 끝까지 자기 생각만 했다. 자신을 태에서부터 불러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으로 삼으신 하나님 앞에서, “원수”를 갚으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었다. 사사로서의 사명을 위해, 나실인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려고 부르짖은 것이 아니었다. “나의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하여 달라고” 애원했을 뿐이었다. 여인을 보고 즐기는 삶을 산 결과로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 사사로 20년을 보냈지만 자기 마음대로, 자기 힘을 따라 막무가내로 살아온 것을 도무지 돌아보지 못한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이들에게 원수를 갚고 싶을 뿐이었다.
*민망하고 부끄럽고, 송구하고 송구하다…
2. ‘그러나 다시’ 그냥…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22절)
“그러나 깎였던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였다(새번역_22절).” 삼손은 머리털이 깎였다. 그런데 들릴라에게 자기 힘의 원천에 관한 비밀을 진심으로 털어놓았을 때(17절), 이미 하나님의 영은 그에게서 떠나가셨다. 눈앞의 정욕 때문에 하나님과의 소중한 약속을 가볍게 여기고 만 것이다. 정욕에 눈이 먼 그는 들릴라의 의도도 간파하지 못한 채 나실인의 언약조차 내팽개쳤다. 머리털은 깎였고, 두 눈은 뽑혔다. 지난 20년 동안 그에게 있던 힘은 사라져 버렸다. 완전히 끝난 듯 보인다.
하지만 사사기 저자는 의미심장한 복선을 깔았다.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삼손이 자신의 회복을 위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무력하게 맷돌을 돌릴 뿐이었다. 그마저도 없어진 힘으로 인해 버겁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무력해졌다. 그 상태에서 회복을 위한 어떤 몸부림도 사치였다.
*우리의 구원 얻음이 이와 같지 않겠나!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머리털을 다시 자라게 하심으로써 구원의 여망을 심어 주신다. 나의 욕망과 집착으로 철저하게 실패한 삶을 회복하기 위해 내가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머리털을 다시 자라게 하시는 분이시다. 삼손은 머리털을 자라게 해 달라고 간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머리털은 자연스레, 그냥 자라났다.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은 이와 같다. “그냥 자라나는 머리털”처럼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이다.
*어쩌다 망할 수도 있다. 아니, 반복된 실수가 큰 죄를 짓게 하고, 큰 죄가 쌓여 재앙을 만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이 큰 재앙이 몰려와 비참하게 되었어도 기억해야 한다. “머리털은 그냥 다시 자라난다.” 하나님의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다. 회복과 구원의 싹이 그냥 다시 자라난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고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어느덧 자라난 머리털을 보고 ‘아… 머리가 길었구나’ 느끼듯,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은 아무리 실패한 듯 보이고 완전히 무너진 듯 보여도 그곳에서 다시 자라난다. 머리털이 밀렸어도 다시 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을 어찌 측량할 수 있을까! 바다를 먹물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는 고백이 맞다! 완전한 실패에서도 다시 자라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요 사랑이다.
3. 부르짖으며 간구하되(28-31절)
그냥 자라나는 머리털, 그 희미한 복선(희망)만 바라보아야 할까? 아니다. 삼손의 최후는 결코 무기력하게 바라보기만 한 모습이 아니다. 비록 개인의 원수를 갚기 위한 행동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약속하신 대로(13:5) 삼손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서 최후를 맞게 하신다. 안타까운 것은 정작 삼손 자신은 죽는 순간까지 개인의 욕심을 따라 하나님께 철없이 부르짖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철없는 삼손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통해 “약속하신 대로” 이루셨다.
*어떤 동기에서든 삼손은 하나님을 찾았다. 평생 하나님을 찾은 적이 없던 그였지만, 최후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았다. 이처럼 “그냥 다시 머리털을 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세이다.
*사사기의 기록에서 삼손은 딱 한 번 하나님을 찾았다. 그리고 딱 한 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딱 한 번 찾고 구한 부르짖음의 응답으로 자신도 죽어 갔다. 이런 삼손의 모습을 반드시 반면교사로 삼아야겠다. 늘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하며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왜 그래야 할까? 늘 하나님을 찾고 도우심을 구하는 삶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기 때문이다. 사사 시대는 이것을 잃어버린 시대였다. 삼손은 아이러니하게도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삶이었지만, 정작 살아 있는 동안 한 번도 하나님을 찾거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죽음 직전 최후의 순간에 딱 한 번 부르짖어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했을 뿐이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하는 삶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나는?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기회를 주신다. ‘이번만’을 외치며 부르짖는 삼손을 외면하지 않으신다(22, 28~31절). 적에게 밀린 머리를 다시 자라게 하시고 잃어버린 힘을 되찾게 하신다. 하지만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명’을 위해 허락하신다. 대적의 성문(16:3)에 이어 신전까지 무너뜨리고, 그들의 축제의 날을 심판의 날이 되게 하신다. 내 맘대로 내 생의 마침표를 찍기 전에 주의 은혜를 바라야 하리라. 진정한 ‘은혜’는 다시 시작하게 하는 거룩한 능력이다.
-들릴라의 끈질긴 추궁에 삼손은 하나님의 언약인 ‘나실인의 비밀’을 털어놓고 만다(15~18절). 삼손의 눈먼 사랑은 그에게 번뇌와 고통만 안겨 주고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치닫는다. 한순간의 쾌락이 낳는 결과와 죄의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 주는 것 같지 않은가? 이제 이 세상을 향한 구애를 멈추고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또 인간의 정욕을 부채질하는 ‘사탄의 기만’과 자기 부정으로 이끄는 ‘주님의 권능’을 분별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해야 하리라.
-달콤한 잠에서 깨어났지만 이미 하나님이 그를 떠나신 후였다(19~21절). 하나님이 떠나시자 삼손은 힘을 잃고 무기력하게 대적에게 끌려가 두 눈이 뽑히고 대적의 노예와 노리개(25절)로 전락한다. 힘의 원천은 그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전부라면, 그분을 떠나서는 생명도 능력도, 내 생의 의미와 목적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을까?
-블레셋 방백과 백성은 두 눈이 뽑힌 삼손을 희롱하고 자신들의 신을 찬양하며 승리를 만끽한다. 그러나 삼손을 향한 대적들의 조롱은 이스라엘을 향한 조롱이자 하나님을 향한 조롱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사사(구원자)가 삼손이 아닌 하나님이시요, 삼손과 이스라엘을 그들에게 넘긴 것이 ‘다곤’이 아니라 ‘여호와’이심을 알지 못했다. 삼손 이야기는 연약한 인간의 허점과 허물, 어리석은 인간의 욕망과 배신, 변절과 반역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왕으로서 그 뜻을 이루어 가심을 웅변한다.
-포기할 줄 모르는 들릴라의 집요한 요구와, 이 여인의 불온한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삼손의 얼빠진 안일함이 어우러져 결국 힘의 비밀이 드러나고 만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은 나실인 서약이 끝나고서야 가능했는데, 삼손은 들릴라에 의해 강제로 머리카락이 잘린 채 원수의 품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깊은 영적 잠에 빠져든 것이다.
-삼손은 힘을 잃고 눈이 뽑힌 채 놋줄에 매여 가사로 끌려가, 짐승처럼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다. 가사는 일전에 삼손이 성문을 떼어 가 엄청난 힘을 과시하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곳이다. 그런데 이제 그곳에서 무력하게 치욕을 당한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짝사랑하는 인생은 ‘이성 없는 짐승’에 불과하다.
-삼손은 다곤 신의 축제에 웃음거리로 끌려온다. 하지만 그의 머리카락은 자라고 있었고, 그는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신전에서 죽을 마지막 한 번의 기회를 구한다. 삼손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 삼손은 기둥을 무너뜨려 신전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최후를 맞이한다.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 사사의 역할을 감당하고 떠난 셈이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자존심이 상한다. 각종 사건 사고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현장에는 어김없이 그리스도인이 등장한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사(목사)다… 화가 난다. 이 사회를 향해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악영향만 끼치고 있다. 어쩌면 코로나 시대에 드러난 그리스도인의 민낯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작금의 교회는 그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곧 회복의 길이 아닐까 싶다. ‘인간적으로’ 뭘 하려고 하지 마라.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이 눈이 뽑히고 놋줄에 묶여 맷돌을 돌리며 온갖 조롱과 수치, 모욕을 받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의 한국교회가 그런 것 같다. 이것이 현실이자 현주소이다. 그럼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그저 무력하게 무너져 가야 할까?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삼손의 부르짖음이 우리의 부르짖음이 되어야 한다. “주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새번역_28절)” 우리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십시오!
에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무리 들릴라를 사랑했기로서니, 자신의 약점을 캐물으며 ‘끈질기게 졸라대는’ 것에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니… 삼손은 들릴라에게 진심이었지만, 들릴라는 자신에게 막대한 부를 약속한 블레셋 방백들에게 진심이었다. 참 딱하다… 그런데 삼손의 이런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내가 집착하고 연연하는 것이 나를 옭아매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줄도 모르고,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들릴라는 치밀하게 준비했다. 삼손은 들릴라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녀의 무릎베개에서 이내 잠들었다. 그 순간만은 진심으로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들릴라는 사람을 불러 “일곱 가닥으로 땋은 그의 머리털을 깎게 한 다음 일부러 괴롭혀 보기까지(새번역_19절)” 하며, 블레셋 방백들이 주기로 한 은 5,500세겔을 위해 ‘진심’으로 행한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들이닥쳤어요!”라는 들릴라의 외침에 깨어나 “전과 같이” 하려 했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했다(20절)”. 결국 붙잡혀 눈이 뽑히고, 놋줄에 묶여 ‘가사’의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되었다. 조롱과 멸시 속에서, 하나님이 떠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감각하게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는 삶이 맞이하게 될 ‘조롱과 멸시’의 비참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세상의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 버린 교회, 하나님이 떠난 교회가 맞이하게 될 모습이 분명하기에 두렵기까지 하다. 두 눈이 뽑히고 놋줄에 묶여 맷돌을 돌리는 노역을 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삼손의 모습이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인 듯하여 고통스럽다.
*암울한 조선에 들어와 의식을 깨우고 삶을 변화시켰던 개화기 한국교회의 능력은 보이지 않고, 지탄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 버린 교회의 모습이 고통스럽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듯하다는 사실이다. 정말 그럴까?
1. 부끄럽고 민망하고 송구하고 송구하지만…
삼손은 돈을 향한 들릴라의 진심 때문에, 자신이 진심이었던 사랑에 배신당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우리 땅을 망쳐 놓은 원수, 우리 백성을 많이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셨다(새번역_24절)”며 삼손을 구경거리, 멸시거리로 삼았다. 이를 고스란히 당하는 삼손의 마음에 뒤늦은 후회와 울분이 넘쳐나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큰 제사를 드리려고 블레셋 사람들이 모인 다곤 신전에 끌려 나갔을 때, 자신을 향해 모욕과 비웃음을 던지며 유흥을 즐기는 이들의 소리를 들으며 “그 때에 삼손이 주님께 부르짖으며 간구하였다. ‘주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의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하여 주십시오.'(새번역_28절)”라고 외쳤다.
삼손은 끝까지 자기 생각만 했다. 자신을 태에서부터 불러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으로 삼으신 하나님 앞에서, “원수”를 갚으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었다. 사사로서의 사명을 위해, 나실인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려고 부르짖은 것이 아니었다. “나의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하여 달라고” 애원했을 뿐이었다. 여인을 보고 즐기는 삶을 산 결과로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 사사로 20년을 보냈지만 자기 마음대로, 자기 힘을 따라 막무가내로 살아온 것을 도무지 돌아보지 못한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이들에게 원수를 갚고 싶을 뿐이었다.
*민망하고 부끄럽고, 송구하고 송구하다…
2. ‘그러나 다시’ 그냥…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22절)
“그러나 깎였던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였다(새번역_22절).” 삼손은 머리털이 깎였다. 그런데 들릴라에게 자기 힘의 원천에 관한 비밀을 진심으로 털어놓았을 때(17절), 이미 하나님의 영은 그에게서 떠나가셨다. 눈앞의 정욕 때문에 하나님과의 소중한 약속을 가볍게 여기고 만 것이다. 정욕에 눈이 먼 그는 들릴라의 의도도 간파하지 못한 채 나실인의 언약조차 내팽개쳤다. 머리털은 깎였고, 두 눈은 뽑혔다. 지난 20년 동안 그에게 있던 힘은 사라져 버렸다. 완전히 끝난 듯 보인다.
하지만 사사기 저자는 의미심장한 복선을 깔았다.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삼손이 자신의 회복을 위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무력하게 맷돌을 돌릴 뿐이었다. 그마저도 없어진 힘으로 인해 버겁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무력해졌다. 그 상태에서 회복을 위한 어떤 몸부림도 사치였다.
*우리의 구원 얻음이 이와 같지 않겠나!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머리털을 다시 자라게 하심으로써 구원의 여망을 심어 주신다. 나의 욕망과 집착으로 철저하게 실패한 삶을 회복하기 위해 내가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머리털을 다시 자라게 하시는 분이시다. 삼손은 머리털을 자라게 해 달라고 간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머리털은 자연스레, 그냥 자라났다.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은 이와 같다. “그냥 자라나는 머리털”처럼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이다.
*어쩌다 망할 수도 있다. 아니, 반복된 실수가 큰 죄를 짓게 하고, 큰 죄가 쌓여 재앙을 만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이 큰 재앙이 몰려와 비참하게 되었어도 기억해야 한다. “머리털은 그냥 다시 자라난다.” 하나님의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다. 회복과 구원의 싹이 그냥 다시 자라난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고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어느덧 자라난 머리털을 보고 ‘아… 머리가 길었구나’ 느끼듯,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은 아무리 실패한 듯 보이고 완전히 무너진 듯 보여도 그곳에서 다시 자라난다. 머리털이 밀렸어도 다시 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을 어찌 측량할 수 있을까! 바다를 먹물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는 고백이 맞다! 완전한 실패에서도 다시 자라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요 사랑이다.
3. 부르짖으며 간구하되(28-31절)
그냥 자라나는 머리털, 그 희미한 복선(희망)만 바라보아야 할까? 아니다. 삼손의 최후는 결코 무기력하게 바라보기만 한 모습이 아니다. 비록 개인의 원수를 갚기 위한 행동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약속하신 대로(13:5) 삼손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서 최후를 맞게 하신다. 안타까운 것은 정작 삼손 자신은 죽는 순간까지 개인의 욕심을 따라 하나님께 철없이 부르짖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철없는 삼손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통해 “약속하신 대로” 이루셨다.
*어떤 동기에서든 삼손은 하나님을 찾았다. 평생 하나님을 찾은 적이 없던 그였지만, 최후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았다. 이처럼 “그냥 다시 머리털을 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세이다.
*사사기의 기록에서 삼손은 딱 한 번 하나님을 찾았다. 그리고 딱 한 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딱 한 번 찾고 구한 부르짖음의 응답으로 자신도 죽어 갔다. 이런 삼손의 모습을 반드시 반면교사로 삼아야겠다. 늘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하며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왜 그래야 할까? 늘 하나님을 찾고 도우심을 구하는 삶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기 때문이다. 사사 시대는 이것을 잃어버린 시대였다. 삼손은 아이러니하게도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삶이었지만, 정작 살아 있는 동안 한 번도 하나님을 찾거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죽음 직전 최후의 순간에 딱 한 번 부르짖어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했을 뿐이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하는 삶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나는?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기회를 주신다. ‘이번만’을 외치며 부르짖는 삼손을 외면하지 않으신다(22, 28~31절). 적에게 밀린 머리를 다시 자라게 하시고 잃어버린 힘을 되찾게 하신다. 하지만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명’을 위해 허락하신다. 대적의 성문(16:3)에 이어 신전까지 무너뜨리고, 그들의 축제의 날을 심판의 날이 되게 하신다. 내 맘대로 내 생의 마침표를 찍기 전에 주의 은혜를 바라야 하리라. 진정한 ‘은혜’는 다시 시작하게 하는 거룩한 능력이다.
-들릴라의 끈질긴 추궁에 삼손은 하나님의 언약인 ‘나실인의 비밀’을 털어놓고 만다(15~18절). 삼손의 눈먼 사랑은 그에게 번뇌와 고통만 안겨 주고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치닫는다. 한순간의 쾌락이 낳는 결과와 죄의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 주는 것 같지 않은가? 이제 이 세상을 향한 구애를 멈추고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또 인간의 정욕을 부채질하는 ‘사탄의 기만’과 자기 부정으로 이끄는 ‘주님의 권능’을 분별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해야 하리라.
-달콤한 잠에서 깨어났지만 이미 하나님이 그를 떠나신 후였다(19~21절). 하나님이 떠나시자 삼손은 힘을 잃고 무기력하게 대적에게 끌려가 두 눈이 뽑히고 대적의 노예와 노리개(25절)로 전락한다. 힘의 원천은 그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전부라면, 그분을 떠나서는 생명도 능력도, 내 생의 의미와 목적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을까?
-블레셋 방백과 백성은 두 눈이 뽑힌 삼손을 희롱하고 자신들의 신을 찬양하며 승리를 만끽한다. 그러나 삼손을 향한 대적들의 조롱은 이스라엘을 향한 조롱이자 하나님을 향한 조롱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사사(구원자)가 삼손이 아닌 하나님이시요, 삼손과 이스라엘을 그들에게 넘긴 것이 ‘다곤’이 아니라 ‘여호와’이심을 알지 못했다. 삼손 이야기는 연약한 인간의 허점과 허물, 어리석은 인간의 욕망과 배신, 변절과 반역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왕으로서 그 뜻을 이루어 가심을 웅변한다.
-포기할 줄 모르는 들릴라의 집요한 요구와, 이 여인의 불온한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삼손의 얼빠진 안일함이 어우러져 결국 힘의 비밀이 드러나고 만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은 나실인 서약이 끝나고서야 가능했는데, 삼손은 들릴라에 의해 강제로 머리카락이 잘린 채 원수의 품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깊은 영적 잠에 빠져든 것이다.
-삼손은 힘을 잃고 눈이 뽑힌 채 놋줄에 매여 가사로 끌려가, 짐승처럼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다. 가사는 일전에 삼손이 성문을 떼어 가 엄청난 힘을 과시하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곳이다. 그런데 이제 그곳에서 무력하게 치욕을 당한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짝사랑하는 인생은 ‘이성 없는 짐승’에 불과하다.
-삼손은 다곤 신의 축제에 웃음거리로 끌려온다. 하지만 그의 머리카락은 자라고 있었고, 그는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신전에서 죽을 마지막 한 번의 기회를 구한다. 삼손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 삼손은 기둥을 무너뜨려 신전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최후를 맞이한다.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 사사의 역할을 감당하고 떠난 셈이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자존심이 상한다. 각종 사건 사고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현장에는 어김없이 그리스도인이 등장한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사(목사)다… 화가 난다. 이 사회를 향해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악영향만 끼치고 있다. 어쩌면 코로나 시대에 드러난 그리스도인의 민낯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작금의 교회는 그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곧 회복의 길이 아닐까 싶다. ‘인간적으로’ 뭘 하려고 하지 마라.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이 눈이 뽑히고 놋줄에 묶여 맷돌을 돌리며 온갖 조롱과 수치, 모욕을 받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의 한국교회가 그런 것 같다. 이것이 현실이자 현주소이다. 그럼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그저 무력하게 무너져 가야 할까?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삼손의 부르짖음이 우리의 부르짖음이 되어야 한다. “주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새번역_28절)” 우리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십시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삼손의 실패와 하인리히 법칙 [사사기 16:1-14]
엔학고레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회복을 경험한 삼손이 다시 옛 습관으로 돌아간다. 20년 동안 사사로 지냈지만 특별히 한 일은 없다. 더구나 자기 눈에 좋을 대로 “보고” 행동하는 모습도 변함이 없다. 삼손에게는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 연약함이 있었다. 결국 이것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삼손의 사사로서의 활동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다른 사사들과 달리 철저히 홀로 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싸움이 “여인”과 관련되어 있다. 딤나의 여인으로 인해 무수한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엔학고레를 외치며 시작했다면, 20년간 이어진 사사로서의 활동의 마지막도 가사의 창기와 소렉 골짜기의 여인 ‘들릴라’로 인해 마무리되었다.
1. 삼손과 여인
삼손이 20년 동안 사사로서 남긴 기록은 전무하다. 본격적인 시작은 “엔학고레”였지만, 그 이후로는 뚜렷한 흔적이 없다. 딤나의 여인이 눈에 “보기”에 좋아서 결혼하려 했던, 나실인으로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삶의 태도는 고쳐지지 않았다.
위험이나 타락은 단번에 곧장 찾아오지 않는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점점 타락으로 빠져든다. 삼손의 삶이 딱 그랬다! 더구나 삼손은 자신이 나실인이라는 것을 결코 간과한 적이 없다. 약점을 알려 달라는 들릴라의 끈질긴 요청에 결국 머리카락을 밀면 힘이 없어진다고 말했다(17절).
이는 그가 나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온전히 지키는 삶을 살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외적으로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다는 가장 형식적인 규례만큼은 지키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고 부정한 것을 접하지도 먹지도 않아야 한다는 규례들은 무시했어도, 머리카락은 자르지 않았다는 것을 자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자신이 나실인임을 결코 잊지 않았다는 증거다. 하지만 사랑하는 들릴라의 말에 이마저도 포기해 버린 것이다.
*삼손은 자기 눈에 보기 좋은 여인을 만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먼 거리도 불사한다. 가사(가자_Gaza)는 블레셋 지역의 주요 성읍 다섯 곳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한 해안 도시로, 삼손의 출생지 소라에서 60km 떨어진 곳이다. 블레셋의 가장 깊숙한 지역에 위치한 도시까지 들어가 거리의 여인과 즐기다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이중 삼중으로 포위한 블레셋 사람들의 포위망을 뚫고, 가사의 힘과 안전의 상징인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유유히 사라져 버린다.
*가사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가사에서 헤브론까지는 64km가 넘는다. 그 먼 거리를 뽑은 성 문짝들을 가지고 가서 헤브론 앞산 꼭대기에 갖다 놓았다! 가사 사람들에게는 공포였을 것이다. 블레셋의 자존심을 완전히 구겨 놓았다. 블레셋은 어떻게 해서든지 삼손을 죽이려고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자신들은 전쟁에 출정하지도 않았지만 홀로 싸워 이긴 삼손의 승리를 알게 한 사건이었다.
*삼손이 자신의 욕정을 채우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이를 통해 여전히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블레셋에게 두려움이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삼손 한 명을 처리하지 못한 좌절감뿐 아니라, 자신들에게 가장 안전한 지역으로 인식하고 가장 안전을 보장한다고 여겼던 가사 성읍이 뚫리고 그 성 문짝들이 한 사람 삼손에게 뽑혀 버렸을 때, 그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인을 찾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괴롭히고 돌아왔다. 그렇다고 사사로서의 활동이 삼손의 방탕한 삶을 합리화해 주지는 못한다.
2. “밤(의 여인)”을 사랑한 “작은 태양”(4-14절)
1-3절은 단순한 성욕이었지만, 들릴라와의 관계는 진지했다. “들릴라”는 “밤의”라는 뜻이다. “삼손”은 “작은 태양”이라는 뜻이니, 이름 풀이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꽤 크다. 빛이 어둠에 감싸여 버렸다. 빛의 자녀인 삼손이 밤의 여인 들릴라에게 감싸여 버렸다. 빛의 백성 이스라엘이 여전히 죄의 밤에 잠식되어 있다.
삼손의 상황이나 이스라엘의 상황이나 매한가지이다. 평생을 ‘나실인’으로 살아 내며 하나님께 속한 백성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주었어야 할 삼손은 도리어 블레셋 여인들의 외모에 빠져 버렸다. ‘밤의’ 여인 들릴라의 아름다움에 빛 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도 다를 바 없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는 백성이어야 했지만, 이스라엘은 이방의 우상들도 사랑하고 말았다. 빛의 백성들이 밤의 우상에 마음이 홀려 버렸다. 밤의 여인이 작은 태양의 빛을 감춰 버렸다.
*보통 인간의 능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던 삼손은 블레셋의 압제라는 흑암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빛 된 자녀로 다시 회복시켜야 했음에도, 소렉 골짜기의 한 여인 “들릴라”에게 마음을 빼앗겨 이 사명을 완전히 망각해 버렸다.
*들릴라는 호리는 말과 취하게 하는 포도주로 삼손의 약점을 알아내기 위해 유혹했다. 삼손은 자신을 파멸로 내몰기 위해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과 거래한 여인이 그저 좋아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밝히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없었다.
*호리는 말과 취하게 하는 포도주의 힘은 삼손의 강력함에 틈이 생기게 했다. 집요하게 묻는 들릴라의 의도를 충분히 알아차렸어야 했지만, “밤의 여인에게 푹 빠진 작은 태양” 삼손에게는 최소한의 분별력마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3. 무엇으로?(5, 6, 10, 13절)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괴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도무지 당해 낼 수 없는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 근원을 알아내어 해결하고자 몸부림친다. 본문에서 블레셋 방백들과 들릴라는 “무엇으로” 그 큰 힘이 생기는지, 혹은 무엇으로 결박할 수 있을지를 끈질기게 반복하여 묻는다(5, 6, 10, 13절).
삼손은 나실인이다. 겉으로 보면 그가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임을 긴 머리카락만 보아도 선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삶을 보면 도무지 그가 나실인인지 헷갈린다. 만약 그가 육신의 쾌락을 따라 살아가는 방탕한 모습이 아니라 절제하고 구별된 거룩한 모습으로 살았다면, 그리고 홀로 싸우는 전사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러 모으는 진정한 사사로서의 삶을 살았다면,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정말 몰랐을까?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괴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끝내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 나실인답게 살지 못했다는 결정적이고도 역설적인 증거가 된다. 삼손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괴력으로 승리를 거둘 때마다 사람들이 그의 힘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지 헷갈렸다면, 삼손은 사사로서의 진정한 사명, 곧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그랬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이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여리고 성과 가나안 땅 주민들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 우리가 들었음이라”(수 2:10)
*삼손은 20년 동안 사사로 살면서 자신의 괴력은 소문이 났지만, 그 괴력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은 드러내지 못했다.
*나는 어떨까? 내 삶 속에서 사람들의 평판은 있는데, 그 평판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의 이름이 과연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을까?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으로 이렇게 하였는가?”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너의 하나님이 정말 대단하시다”라고 감탄하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회자되면 좋겠다!
나는?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드려진 삼손이 다시 기생의 품에 안긴다(1~3절). 욕망에 붙잡힌 바 되었다. 거룩함이 아닌 육체적 본능에 사로잡힌(가다, 보다, 들어가다) 삼손은 블레셋이 호시탐탐 자기 생명을 노리는 것도 모른 채 ‘밤’에 취한다. 그의 힘은 ‘대적의 문’을 취하나, 여인에게 빼앗긴 마음 때문에 그의 생명은 위태롭기만 하다. 나는 지금 무엇에 마음을 빼앗겨 있을까? 그것이 내 마음을 무디게 하고 사명을 더디게 한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편안하고 익숙한 것에만 안주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삼손은 ‘꿀보다 달고 사자보다 강한(14:18)’ ‘밤의 여인’ 들릴라와 사랑에 빠진다. 그는 ‘눈'(1절)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빼앗긴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아내기 위해 돈으로 들릴라를 매수한다. 그리고 들릴라는 사랑을 이용하여 돈을 번다(4~6절). 욕망에 이끌린 삶은 내가 제어할 수 없다. 욕망에 이끌려 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욕망이 빚어낼 결과를 예측할 수는 있어도 통제할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며,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 삼손처럼 보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경계할 뿐이다.
-블레셋 방백들은 삼손이 가사에 왔을 때 사로잡으려 했으나, 그의 괴력을 보고 군사력으로는 제압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들은 힘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들릴라와 거래한다(5~6, 9절). 이전에는 동족(15:9)을 협박하더니 이제는 여인을 이용한다. 하지만 그들은 힘의 근원을 알아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배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삼손의 허물 속에서도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삼손이 하나님의 시선에서 떠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서 멀어질 때, 악한 세력은 삼손에게 남은 힘마저 빼앗아 갈 것이다.
-돈으로 매수된 밤(들릴라)의 유혹은 집요하다. 삼손은 그녀가 돈 때문에 사랑을 배반한 것도 모른 채, 교활한 그녀의 교태 속에 농담 섞인 대답으로 ‘힘의 비밀’을 누설하려 한다. 이처럼 우리를 넘어뜨리기 전까지 ‘지칠 줄 모르는 죄의 달콤함과 집요함’을 경계해야 한다. 또 하나님의 말씀과 사명에는 눈감게 하고 내 욕망만 자극하는 유혹이 무엇인지 잘 살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하인리히 법칙(1:29:300의 법칙)이 있다. ‘작은 일이 반복되어 발생하다 보면 큰일이 생겨나고, 그 큰일이 반복되다 보면 대재앙이 찾아온다’는 법칙이다. 300번의 작은 일들이 발생하는 동안 29번의 큰일이 생기고, 결국 1번의 대재앙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작은 일들이 반복되는 것에 무감각하여 제어하지 않으면 결국 큰일이 터지고 말고, 큰일을 제어하지 못하면 재앙이 일어난다. 삼손의 삶이 딱 이렇다.
-블레셋 딤나의 여인을 잃고도 삼손은 다시 압제의 나라 블레셋의 여인을 탐한다. 자기 생각에만 함몰되어 동족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오로지 자신을 보호하고 자기 분노를 해소하는 데만 쓴다. 블레셋은 삼손을 제거하려고 호시탐탐 노린다. 하지만 그들의 힘을 다 합쳐도 삼손 하나를 이겨 낼 수 없었다. 삼손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삼손은 들릴라를 사랑했다. 그런데 들릴라는 돈을 사랑했다. 그래서 삼손의 힘의 근원과 그를 제어할 방법을 알아내 달라는 블레셋 방백들의 요구를 막대한 물량 공세에 금방 수락했다. 하지만 그들은 삼손을 이길 수 없다. 군사력도, 돈도 삼손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삼손은 스스로 자신을 무너뜨린 꼴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도 마찬가지 아닌가! 세상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 스스로가 무너질 수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들릴라는 막대한 돈을 벌기 위해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아내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삼손은 태평하기만 하다. 그 여유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안일함이었다.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른 채, 들릴라의 유혹이 거듭될수록 점점 진실에 가까운 말을 한다. 삼손은 들릴라의 마음을 얻으려고만 했고, 들릴라는 돈만 벌려고 했다. 에휴… 삼손아…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나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도 같은 의미로 통할 것이다.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합당하지 않은 작은 잘못들을 아무런 감각 없이 무수히 반복함으로써 큰 죄를 짓게 되었고, 그 큰 죄들에서 돌아서지 않고 매여 있다 보니 인생의 재앙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한두 번 범하는 것을 제어하지 못하니,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형식만 빼고 반드시 지켜야 했던 계명들을 범하는 죄를 반복하게 되었고, 그런 삶이 결국 삼손을 파멸로 이끌었다.
-나실인 규정을 습관적으로 범하는 것에서 돌이키지 않으니, 딤나와 가사의 여인을 취하였고, 소렉 골짜기의 여인 들릴라의 유혹을 분별하지 못하여 스스로 자신의 약점을 드러냄으로써 두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재앙을 만나게 된 것이다. -지금 반복되는 죄를 끊지 않으면 더 큰 죄의 유혹에 직면하고, 그 큰 죄들의 결과로 인생의 재앙을 만나게 된다.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에는 순간순간 죄의 유혹이라는 틈이 무수히 반복하여 생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몸과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물질, 명예, 게으름, 열등감, 분노 등의 틈을 타고 하나님 앞에서 노골적으로 범죄하라는 유혹이 찾아올 것이다. 이 작은 틈을 메우지 않으면 큰일을 지나 재앙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삼손에게는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추구하는 약점(틈)이 있었다. 사사로 세움을 받고 20년 동안 이 틈을 메우지 않았다. 메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 메우지 않았다. 더 나아가 그 틈을 타서 더욱 즐기며 살았다. 딤나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서 겪었던 일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됐지만, 금세 망각하고 60km가 넘는 거리를 기꺼이 이동하여 “가사”로 달려가 자기 눈에 “보이는” 창기와 쾌락을 즐겼다. 삼손은 자신이 재앙에 휩쓸릴 수 있는 그 틈을 결코 메우지 않았다.
*또 시간이 지나 이번에는 가까운 소렉 골짜기에 사는 한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사랑에 빠졌다. 블레셋의 방백들은 삼손이 들릴라에게 푹 빠졌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와 들릴라와 거래했다. 삼손의 약점을 알아내기만 하면 각각 1,100세겔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자그마치 5,500세겔(약 63kg)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들릴라는 자신을 사랑하는 삼손을 그저 거래의 대상, 이익의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들릴라는 포기하지 않았고, 삼손은 이를 오락거리로 치부했다. 비슷한 실랑이가 반복될 때 들릴라의 본심을 알아챘어야 했지만, 삼손은 육적인 쾌락에 눈이 멀어 거짓된 사랑에 스스로 빠져 버렸다.
*나의 삶에 남은 여러 은혜의 흔적들을 보며 사람들이 “무엇으로(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나?”를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하나님은 대단하시다!”라고 인정하는 고백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구별되게” 살아야 함을 잊지 않겠다.
삼손의 사사로서의 활동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다른 사사들과 달리 철저히 홀로 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싸움이 “여인”과 관련되어 있다. 딤나의 여인으로 인해 무수한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엔학고레를 외치며 시작했다면, 20년간 이어진 사사로서의 활동의 마지막도 가사의 창기와 소렉 골짜기의 여인 ‘들릴라’로 인해 마무리되었다.
1. 삼손과 여인
삼손이 20년 동안 사사로서 남긴 기록은 전무하다. 본격적인 시작은 “엔학고레”였지만, 그 이후로는 뚜렷한 흔적이 없다. 딤나의 여인이 눈에 “보기”에 좋아서 결혼하려 했던, 나실인으로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삶의 태도는 고쳐지지 않았다.
위험이나 타락은 단번에 곧장 찾아오지 않는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점점 타락으로 빠져든다. 삼손의 삶이 딱 그랬다! 더구나 삼손은 자신이 나실인이라는 것을 결코 간과한 적이 없다. 약점을 알려 달라는 들릴라의 끈질긴 요청에 결국 머리카락을 밀면 힘이 없어진다고 말했다(17절).
이는 그가 나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온전히 지키는 삶을 살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외적으로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다는 가장 형식적인 규례만큼은 지키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고 부정한 것을 접하지도 먹지도 않아야 한다는 규례들은 무시했어도, 머리카락은 자르지 않았다는 것을 자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자신이 나실인임을 결코 잊지 않았다는 증거다. 하지만 사랑하는 들릴라의 말에 이마저도 포기해 버린 것이다.
*삼손은 자기 눈에 보기 좋은 여인을 만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먼 거리도 불사한다. 가사(가자_Gaza)는 블레셋 지역의 주요 성읍 다섯 곳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한 해안 도시로, 삼손의 출생지 소라에서 60km 떨어진 곳이다. 블레셋의 가장 깊숙한 지역에 위치한 도시까지 들어가 거리의 여인과 즐기다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이중 삼중으로 포위한 블레셋 사람들의 포위망을 뚫고, 가사의 힘과 안전의 상징인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유유히 사라져 버린다.
*가사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가사에서 헤브론까지는 64km가 넘는다. 그 먼 거리를 뽑은 성 문짝들을 가지고 가서 헤브론 앞산 꼭대기에 갖다 놓았다! 가사 사람들에게는 공포였을 것이다. 블레셋의 자존심을 완전히 구겨 놓았다. 블레셋은 어떻게 해서든지 삼손을 죽이려고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자신들은 전쟁에 출정하지도 않았지만 홀로 싸워 이긴 삼손의 승리를 알게 한 사건이었다.
*삼손이 자신의 욕정을 채우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이를 통해 여전히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블레셋에게 두려움이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삼손 한 명을 처리하지 못한 좌절감뿐 아니라, 자신들에게 가장 안전한 지역으로 인식하고 가장 안전을 보장한다고 여겼던 가사 성읍이 뚫리고 그 성 문짝들이 한 사람 삼손에게 뽑혀 버렸을 때, 그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인을 찾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괴롭히고 돌아왔다. 그렇다고 사사로서의 활동이 삼손의 방탕한 삶을 합리화해 주지는 못한다.
2. “밤(의 여인)”을 사랑한 “작은 태양”(4-14절)
1-3절은 단순한 성욕이었지만, 들릴라와의 관계는 진지했다. “들릴라”는 “밤의”라는 뜻이다. “삼손”은 “작은 태양”이라는 뜻이니, 이름 풀이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꽤 크다. 빛이 어둠에 감싸여 버렸다. 빛의 자녀인 삼손이 밤의 여인 들릴라에게 감싸여 버렸다. 빛의 백성 이스라엘이 여전히 죄의 밤에 잠식되어 있다.
삼손의 상황이나 이스라엘의 상황이나 매한가지이다. 평생을 ‘나실인’으로 살아 내며 하나님께 속한 백성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주었어야 할 삼손은 도리어 블레셋 여인들의 외모에 빠져 버렸다. ‘밤의’ 여인 들릴라의 아름다움에 빛 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도 다를 바 없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는 백성이어야 했지만, 이스라엘은 이방의 우상들도 사랑하고 말았다. 빛의 백성들이 밤의 우상에 마음이 홀려 버렸다. 밤의 여인이 작은 태양의 빛을 감춰 버렸다.
*보통 인간의 능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던 삼손은 블레셋의 압제라는 흑암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빛 된 자녀로 다시 회복시켜야 했음에도, 소렉 골짜기의 한 여인 “들릴라”에게 마음을 빼앗겨 이 사명을 완전히 망각해 버렸다.
*들릴라는 호리는 말과 취하게 하는 포도주로 삼손의 약점을 알아내기 위해 유혹했다. 삼손은 자신을 파멸로 내몰기 위해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과 거래한 여인이 그저 좋아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밝히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없었다.
*호리는 말과 취하게 하는 포도주의 힘은 삼손의 강력함에 틈이 생기게 했다. 집요하게 묻는 들릴라의 의도를 충분히 알아차렸어야 했지만, “밤의 여인에게 푹 빠진 작은 태양” 삼손에게는 최소한의 분별력마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3. 무엇으로?(5, 6, 10, 13절)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괴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도무지 당해 낼 수 없는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 근원을 알아내어 해결하고자 몸부림친다. 본문에서 블레셋 방백들과 들릴라는 “무엇으로” 그 큰 힘이 생기는지, 혹은 무엇으로 결박할 수 있을지를 끈질기게 반복하여 묻는다(5, 6, 10, 13절).
삼손은 나실인이다. 겉으로 보면 그가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임을 긴 머리카락만 보아도 선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삶을 보면 도무지 그가 나실인인지 헷갈린다. 만약 그가 육신의 쾌락을 따라 살아가는 방탕한 모습이 아니라 절제하고 구별된 거룩한 모습으로 살았다면, 그리고 홀로 싸우는 전사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러 모으는 진정한 사사로서의 삶을 살았다면,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정말 몰랐을까?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괴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끝내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 나실인답게 살지 못했다는 결정적이고도 역설적인 증거가 된다. 삼손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괴력으로 승리를 거둘 때마다 사람들이 그의 힘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지 헷갈렸다면, 삼손은 사사로서의 진정한 사명, 곧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그랬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이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여리고 성과 가나안 땅 주민들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 우리가 들었음이라”(수 2:10)
*삼손은 20년 동안 사사로 살면서 자신의 괴력은 소문이 났지만, 그 괴력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은 드러내지 못했다.
*나는 어떨까? 내 삶 속에서 사람들의 평판은 있는데, 그 평판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의 이름이 과연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을까?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으로 이렇게 하였는가?”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너의 하나님이 정말 대단하시다”라고 감탄하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회자되면 좋겠다!
나는?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드려진 삼손이 다시 기생의 품에 안긴다(1~3절). 욕망에 붙잡힌 바 되었다. 거룩함이 아닌 육체적 본능에 사로잡힌(가다, 보다, 들어가다) 삼손은 블레셋이 호시탐탐 자기 생명을 노리는 것도 모른 채 ‘밤’에 취한다. 그의 힘은 ‘대적의 문’을 취하나, 여인에게 빼앗긴 마음 때문에 그의 생명은 위태롭기만 하다. 나는 지금 무엇에 마음을 빼앗겨 있을까? 그것이 내 마음을 무디게 하고 사명을 더디게 한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편안하고 익숙한 것에만 안주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삼손은 ‘꿀보다 달고 사자보다 강한(14:18)’ ‘밤의 여인’ 들릴라와 사랑에 빠진다. 그는 ‘눈'(1절)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빼앗긴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아내기 위해 돈으로 들릴라를 매수한다. 그리고 들릴라는 사랑을 이용하여 돈을 번다(4~6절). 욕망에 이끌린 삶은 내가 제어할 수 없다. 욕망에 이끌려 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욕망이 빚어낼 결과를 예측할 수는 있어도 통제할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며,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 삼손처럼 보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경계할 뿐이다.
-블레셋 방백들은 삼손이 가사에 왔을 때 사로잡으려 했으나, 그의 괴력을 보고 군사력으로는 제압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들은 힘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들릴라와 거래한다(5~6, 9절). 이전에는 동족(15:9)을 협박하더니 이제는 여인을 이용한다. 하지만 그들은 힘의 근원을 알아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배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삼손의 허물 속에서도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삼손이 하나님의 시선에서 떠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서 멀어질 때, 악한 세력은 삼손에게 남은 힘마저 빼앗아 갈 것이다.
-돈으로 매수된 밤(들릴라)의 유혹은 집요하다. 삼손은 그녀가 돈 때문에 사랑을 배반한 것도 모른 채, 교활한 그녀의 교태 속에 농담 섞인 대답으로 ‘힘의 비밀’을 누설하려 한다. 이처럼 우리를 넘어뜨리기 전까지 ‘지칠 줄 모르는 죄의 달콤함과 집요함’을 경계해야 한다. 또 하나님의 말씀과 사명에는 눈감게 하고 내 욕망만 자극하는 유혹이 무엇인지 잘 살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하인리히 법칙(1:29:300의 법칙)이 있다. ‘작은 일이 반복되어 발생하다 보면 큰일이 생겨나고, 그 큰일이 반복되다 보면 대재앙이 찾아온다’는 법칙이다. 300번의 작은 일들이 발생하는 동안 29번의 큰일이 생기고, 결국 1번의 대재앙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작은 일들이 반복되는 것에 무감각하여 제어하지 않으면 결국 큰일이 터지고 말고, 큰일을 제어하지 못하면 재앙이 일어난다. 삼손의 삶이 딱 이렇다.
-블레셋 딤나의 여인을 잃고도 삼손은 다시 압제의 나라 블레셋의 여인을 탐한다. 자기 생각에만 함몰되어 동족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오로지 자신을 보호하고 자기 분노를 해소하는 데만 쓴다. 블레셋은 삼손을 제거하려고 호시탐탐 노린다. 하지만 그들의 힘을 다 합쳐도 삼손 하나를 이겨 낼 수 없었다. 삼손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삼손은 들릴라를 사랑했다. 그런데 들릴라는 돈을 사랑했다. 그래서 삼손의 힘의 근원과 그를 제어할 방법을 알아내 달라는 블레셋 방백들의 요구를 막대한 물량 공세에 금방 수락했다. 하지만 그들은 삼손을 이길 수 없다. 군사력도, 돈도 삼손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삼손은 스스로 자신을 무너뜨린 꼴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도 마찬가지 아닌가! 세상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 스스로가 무너질 수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들릴라는 막대한 돈을 벌기 위해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아내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삼손은 태평하기만 하다. 그 여유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안일함이었다.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른 채, 들릴라의 유혹이 거듭될수록 점점 진실에 가까운 말을 한다. 삼손은 들릴라의 마음을 얻으려고만 했고, 들릴라는 돈만 벌려고 했다. 에휴… 삼손아…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나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도 같은 의미로 통할 것이다.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합당하지 않은 작은 잘못들을 아무런 감각 없이 무수히 반복함으로써 큰 죄를 짓게 되었고, 그 큰 죄들에서 돌아서지 않고 매여 있다 보니 인생의 재앙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한두 번 범하는 것을 제어하지 못하니,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형식만 빼고 반드시 지켜야 했던 계명들을 범하는 죄를 반복하게 되었고, 그런 삶이 결국 삼손을 파멸로 이끌었다.
-나실인 규정을 습관적으로 범하는 것에서 돌이키지 않으니, 딤나와 가사의 여인을 취하였고, 소렉 골짜기의 여인 들릴라의 유혹을 분별하지 못하여 스스로 자신의 약점을 드러냄으로써 두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재앙을 만나게 된 것이다. -지금 반복되는 죄를 끊지 않으면 더 큰 죄의 유혹에 직면하고, 그 큰 죄들의 결과로 인생의 재앙을 만나게 된다.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에는 순간순간 죄의 유혹이라는 틈이 무수히 반복하여 생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몸과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물질, 명예, 게으름, 열등감, 분노 등의 틈을 타고 하나님 앞에서 노골적으로 범죄하라는 유혹이 찾아올 것이다. 이 작은 틈을 메우지 않으면 큰일을 지나 재앙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삼손에게는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추구하는 약점(틈)이 있었다. 사사로 세움을 받고 20년 동안 이 틈을 메우지 않았다. 메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 메우지 않았다. 더 나아가 그 틈을 타서 더욱 즐기며 살았다. 딤나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서 겪었던 일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됐지만, 금세 망각하고 60km가 넘는 거리를 기꺼이 이동하여 “가사”로 달려가 자기 눈에 “보이는” 창기와 쾌락을 즐겼다. 삼손은 자신이 재앙에 휩쓸릴 수 있는 그 틈을 결코 메우지 않았다.
*또 시간이 지나 이번에는 가까운 소렉 골짜기에 사는 한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사랑에 빠졌다. 블레셋의 방백들은 삼손이 들릴라에게 푹 빠졌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와 들릴라와 거래했다. 삼손의 약점을 알아내기만 하면 각각 1,100세겔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자그마치 5,500세겔(약 63kg)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들릴라는 자신을 사랑하는 삼손을 그저 거래의 대상, 이익의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들릴라는 포기하지 않았고, 삼손은 이를 오락거리로 치부했다. 비슷한 실랑이가 반복될 때 들릴라의 본심을 알아챘어야 했지만, 삼손은 육적인 쾌락에 눈이 멀어 거짓된 사랑에 스스로 빠져 버렸다.
*나의 삶에 남은 여러 은혜의 흔적들을 보며 사람들이 “무엇으로(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나?”를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하나님은 대단하시다!”라고 인정하는 고백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구별되게” 살아야 함을 잊지 않겠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라맛레히에서 엔학고레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사사기 15:1-20]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워지게 된 “라맛레히와 엔학고레” 사건이다. 결혼식 이후 삼손은 다시 처가를 방문하여 아내를 찾지만, 장인은 딸을 삼손의 친구에게 주었으니 그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한다. 이에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달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에 풀어 놓는다. 이로 인해 이미 거두어 쌓은 곡식 단을 비롯해 베지 않은 곡식, 포도원과 감람나무까지 불에 탔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블레셋 사람들은 화가 나서 삼손의 장인과 아내를 불에 태워 죽인다. 이를 빌미로 삼손은 다시 블레셋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무찌르고 에담 바위 동굴에서 쉰다(새번역_8절).
블레셋 사람들은 이런 삼손의 행동에 화가 나서 유다를 침공하여 ‘레히(턱뼈)’에 진을 친다. 이를 알게 된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동굴로 몰려가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에게 넘긴다. 그때 갑자기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고,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를 손에 쥐고 천 명을 죽인다. 그리고 그곳을 “라맛레히(나귀 턱뼈 언덕)”라고 부른다.
삼손이 몹시 목이 말라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삼손을 구원해 주신다. 삼손은 그 샘의 이름을 “엔학고레(부르짖는 사람의 샘)”라고 불렀다. 이 사건 이후로 삼손은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낸다.
1. 혼자서? 하나님께서 함께!!
삼손은 철저히 홀로 움직인다. 이전의 사사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을 연합하여 함께 싸웠지만, 삼손은 홀로였다. 외롭게 블레셋과의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싸움의 원인은 개인적인 복수였다. 아내를 만나러 갔을 때, 장인은 이미 딸을 다른 친구에게 시집보내 놓고 천연덕스럽게 아내의 동생을 소개했다. 삼손은 이런 장인의 처사에 화가 나서 복수했고, 이 복수로 피해를 입은 블레셋 사람들이 장인과 아내를 불에 태워 죽이자 이를 빌미로 또 복수하여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블레셋은 이런 삼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유다를 침공했고, 유다는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삼손을 붙잡아 블레셋에게 넘겨 버린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복수가 배신을 불러왔다. 이 모든 과정에서 삼손은 홀로 싸웠다. 블레셋의 40년 압제에 눌려 있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어느 누구도 삼손과 연합하여 블레셋에 대적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삼손을 붙잡아 넘긴다.
*삼손 한 명을 붙잡기 위해 무려 3천 명이 동원됐다. 그 마음으로 블레셋에 대항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동족 한 명을 붙잡아 블레셋에게 넘기는 데 쓸데없는 힘을 모았다. 이스라엘은 이미 블레셋화되어 버린 것이다.
*삼손은 그렇게 홀로 싸웠다. 그런데 정말 홀로였을까? 아니다. 개인적인 복수로 개인적인 싸움을 했던 그였지만, 하나님의 때가 이르자 “갑자기”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14절). 새 밧줄 둘로 단단히 묶여 블레셋에게 넘겨지는 찰나에 임한 여호와의 영은 삼손의 눈에 “나귀의 새 턱뼈”(15절)가 보이게 하시고, 그것을 집어 들게 하셔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그 자리에서 죽이게 하신다.
*너무도 맹렬하게 싸웠기에, 삼손은 천 명을 죽이고 나서 “라맛레히(나귀 턱뼈 언덕)”라고 이름을 붙이고는 “심히 목이 말라” 탈진하게 된다.
*놀라운 사실은 삼손이 홀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고 있을 때, 삼손을 붙잡아 간 삼천 명의 유다 지파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삼손은 동족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며 홀로 싸웠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외면당했어도 “여호와의 영”은 함께 계셨다.
*삼천 명은 삼손의 싸움에 함께하지 않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하셨다. 사람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삼손의 손을 들어 쓰셨다! 레히(턱뼈)가 라맛레히(턱뼈 언덕)가 되기까지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하시며 멈추지 않으셨다.
*동족들은 삼손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블레셋 사람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삼손은 동족들에게서 소외되어 홀로 싸웠지만,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함께 싸웠다!
2. 라맛레히가 엔학고레로!
삼손이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고 이를 기념하여 ‘라맛레히’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천 명을 죽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감격적인 승리를 선포했지만, 이내 심한 갈증과 탈진이 찾아온다. 그리고 곧바로 깨닫는다. 자신이 천 명을 죽이기는 했지만 이것이 한계이며,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즉,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천 명을 죽인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극심한 탈진과 함께 죽음의 두려움이 찾아들고 나서야, 삼손은 이 싸움을 자신이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을 깨닫고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삼손은 목이 너무 말라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께서 친히 이 크나큰 승리를 주님의 종의 손에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목이 타서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붙잡혀 죽어야 하겠습니까?'”(새번역_18절)
천 명을 나귀 턱뼈 하나로 죽였지만, 자신의 목마름(갈증)조차 해결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임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수를 터뜨려 주시지 않으면, 대적들을 죽였어도 결국 대적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 의지하고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삼손은 지체하지 않고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도 지체하지 않으시고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그의 갈증을 풀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늘 함께 계셨기에, 삼손이 외롭게 싸운 후 곤란한 상황 가운데 부르짖을 때 즉시 응답해 주신 것이다. “엔학고레”는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하고 외친 신앙의 고백이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그가 버려지는 순간에도 함께 계셨다. 가장 위기의 순간에도, 목이 말라 탈진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삼손과 함께 계셨다. 함께 계셨기에 나귀의 새 턱뼈를 손에 들게 하셨고, 그것을 휘두를 때 블레셋 사람들의 시체가 쌓이게 하셨다. 또 갈증이 극에 달하여 부르짖을 때 즉각 응답하신 것이다. “엔학고레”는 부르짖는 이에게 응답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언제나 그와 함께하셨음을 증명하는 샘이 된 것이다.
*삼손이 이제껏 홀로 힘겹게 싸워 스스로 승리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힘을 주셨기에 승리할 수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걷는 삶의 길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하여 주심으로”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실 것이다.
*특히 “부르짖는 사람의 샘”이라는 뜻의 “엔학고레”가 의미심장하다.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압제를 받는 사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히 블레셋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블레셋 사람들과 교류하며 통혼까지 자연스럽게 했기에, 그들에게 압제받으며 고통을 당하고 있어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다.” 오히려 블레셋의 압제를 자연스레 받아들여, 고통을 주는 존재를 블레셋이 아닌 삼손으로 여기고 장정 3천 명을 모아 그를 붙잡아 넘기기까지 했다. 철저히 블레셋화된 것이다.
*그런데 죽음에 이를 만큼 고통스러운 갈증이 비로소 삼손을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였고”, 하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즉각 응답해 주심으로 “부르짖음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신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삼손은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다스리게 되었다. 즉, 삼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승리의 샘물을 터져 나오게 하셔서 지독한 죽음의 갈증으로부터 그를 구원해 주셨다.
*사사기의 구원 사이클이 다시 회복될 기미가 보인다. 범죄-심판-부르짖음-구원-평화의 사이클에서, 40년 동안 압제(심판)를 당하고도 부르짖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엔학고레”에서 삼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증거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삼손은 부르짖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르짖지 않는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다”(새번역_20절). 삼손만 홀로 부르짖고 말았다. “엔학고레”는 삼손의 부르짖음에 머물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을 찾으며 부르짖지 않는다. 그래서 삼손이 골칫덩이이기는 했지만, 블레셋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홀로 싸운 삼손, 함께 싸워 주신 하나님, 부르짖는 삼손, 갈증을 해결해 주신 하나님…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블레셋화되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구원에 대한 갈망이 없다. 엔학고레가 삼손에게는 하나님의 증거가 되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 기막힌 현실이 마지막 사사 삼손의 시대가 시작된 이스라엘의 현주소였다.
나는?
-급하고 무모해 보이는 삼손의 분노와 사사로운 보복을 통해,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관계를 흔들어 놓을 틈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1~19절). 아내를 잃은 삼손은 장인의 궁색한 변명과 제안을 거절하고, 그에 대한 분노를 블레셋에게 돌린다. 그리고 그들의 야비한 보복(6절)은 블레셋을 향한 삼손의 증오와 복수심을 더욱 자극한다. 그런데 블레셋과 공존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더 이상 그들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갈등하지도, 싸우지도 않고, 심지어 하나님께 호소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주도하셔서 그들의 부정한 연합을 깨뜨리신다.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 자신들의 구원자인 삼손을 대적의 손에 넘기는 굴욕을 보인다. 심지어 블레셋의 압제를 두둔하기까지 한다(9~13절). 가장 먼저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 승리한(1:1~3) 유다 지파가 지금은 그 전의(戰意)는 온데간데없고, 오랜 압제에 체념한 듯 거짓 평화와 안전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삼손이 싸워야 할 대상은 블레셋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안에 내재된 집요하고 끈질긴 ‘노예근성’ 혹은 ‘사대주의’가 아닐까 싶다.
-여호와의 영으로 대승을 거둔 삼손의 노래에는 하나님은 없고 내가 했다는 자랑만 보인다(14~17절). 그는 나귀 턱뼈로 천 명을 죽일 수는 있어도 갈증을 이길 수 없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또 이 전쟁이 지도자 위에 지도자가 계신 거룩한 전쟁임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이렇듯 보이는 대적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내 안에 있는 자만과 허영이 아닐까?
-대승을 거둔 삼손이 극심한 목마름으로 부르짖자, 그를 살리기 위해 샘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 갈증을 통해 자기 한계를 깨닫게 된 삼손은 비로소 승리의 공을 하나님께 돌린다. ‘라맛레히’를 자랑하는 삼손에게 하나님은 ‘엔학고레’를 허락하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고, 승리할 수도, 사명을 이룰 수도 없음을 깨우치신다. 큰 승리의 개가보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오늘의 내가 없고 내일도 보장할 수 없다는 나의 고백이다.
*”엔학고레”가 필요한 시대다. 나는 특히 더온누리교회가 “엔학고레”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사 시대와 다름없는 이 시대 속에서 누구든지 언제든지 나아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응답의 샘물이 터져 나오는 바로 그곳이 우리 공동체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 삶의 거처가 어디든 그곳이 “엔학고레”가 되기를 바란다. “부르짖음”이 쇠퇴해 버린 시대다. 오히려 “부르짖음”이 더욱 간절하게 터져 나와야 할 시대이기도 하다. 사회 전반에 드러나는 분열과 혼란, 직접 체감하는 기후 위기, 양극화의 그림자, 교회 공동체의 쇠락 등 지금이 부르짖어야 할 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스스로 입을 닫아 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며, “부르짖음”이 회복되기를 갈망한다.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압제를 당하면서 도리어 블레셋화되어 버린 나머지, 잉태될 때부터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이었던 삼손조차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블레셋 여인과 자연스레 결혼할 정도였다. 이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하여 마음이 고통스럽다.
*한편 “부르짖음”을 잊어버렸을 때 “부르짖음”을 일깨워 주셔서 구원을 갈망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삼손을 살렸듯이, 하나님의 제한 없는 사랑의 은혜가 우리로 “부르짖음”을 토해 내게 하셔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는다.
*화려한 승리의 장소인 라맛레히보다 부르짖어 응답받은 샘인 엔학고레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화려한 승리의 라맛레히에 취해, 부르짖을 때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엔학고레”를 간과한다면 비참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의 삶을 “엔학고레”에서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라맛레히처럼 홀로 자기 힘에 취해 살았겠지만, 엔학고레를 통해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알았기에 비로소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섬길 수 있었다. 그에게 엔학고레의 경험이 없었다면 어찌할 뻔했는가!
블레셋 사람들은 이런 삼손의 행동에 화가 나서 유다를 침공하여 ‘레히(턱뼈)’에 진을 친다. 이를 알게 된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동굴로 몰려가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에게 넘긴다. 그때 갑자기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고,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를 손에 쥐고 천 명을 죽인다. 그리고 그곳을 “라맛레히(나귀 턱뼈 언덕)”라고 부른다.
삼손이 몹시 목이 말라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삼손을 구원해 주신다. 삼손은 그 샘의 이름을 “엔학고레(부르짖는 사람의 샘)”라고 불렀다. 이 사건 이후로 삼손은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낸다.
1. 혼자서? 하나님께서 함께!!
삼손은 철저히 홀로 움직인다. 이전의 사사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을 연합하여 함께 싸웠지만, 삼손은 홀로였다. 외롭게 블레셋과의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싸움의 원인은 개인적인 복수였다. 아내를 만나러 갔을 때, 장인은 이미 딸을 다른 친구에게 시집보내 놓고 천연덕스럽게 아내의 동생을 소개했다. 삼손은 이런 장인의 처사에 화가 나서 복수했고, 이 복수로 피해를 입은 블레셋 사람들이 장인과 아내를 불에 태워 죽이자 이를 빌미로 또 복수하여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블레셋은 이런 삼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유다를 침공했고, 유다는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삼손을 붙잡아 블레셋에게 넘겨 버린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복수가 배신을 불러왔다. 이 모든 과정에서 삼손은 홀로 싸웠다. 블레셋의 40년 압제에 눌려 있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어느 누구도 삼손과 연합하여 블레셋에 대적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삼손을 붙잡아 넘긴다.
*삼손 한 명을 붙잡기 위해 무려 3천 명이 동원됐다. 그 마음으로 블레셋에 대항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동족 한 명을 붙잡아 블레셋에게 넘기는 데 쓸데없는 힘을 모았다. 이스라엘은 이미 블레셋화되어 버린 것이다.
*삼손은 그렇게 홀로 싸웠다. 그런데 정말 홀로였을까? 아니다. 개인적인 복수로 개인적인 싸움을 했던 그였지만, 하나님의 때가 이르자 “갑자기”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14절). 새 밧줄 둘로 단단히 묶여 블레셋에게 넘겨지는 찰나에 임한 여호와의 영은 삼손의 눈에 “나귀의 새 턱뼈”(15절)가 보이게 하시고, 그것을 집어 들게 하셔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그 자리에서 죽이게 하신다.
*너무도 맹렬하게 싸웠기에, 삼손은 천 명을 죽이고 나서 “라맛레히(나귀 턱뼈 언덕)”라고 이름을 붙이고는 “심히 목이 말라” 탈진하게 된다.
*놀라운 사실은 삼손이 홀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고 있을 때, 삼손을 붙잡아 간 삼천 명의 유다 지파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삼손은 동족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며 홀로 싸웠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외면당했어도 “여호와의 영”은 함께 계셨다.
*삼천 명은 삼손의 싸움에 함께하지 않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하셨다. 사람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삼손의 손을 들어 쓰셨다! 레히(턱뼈)가 라맛레히(턱뼈 언덕)가 되기까지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하시며 멈추지 않으셨다.
*동족들은 삼손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블레셋 사람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삼손은 동족들에게서 소외되어 홀로 싸웠지만,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함께 싸웠다!
2. 라맛레히가 엔학고레로!
삼손이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고 이를 기념하여 ‘라맛레히’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천 명을 죽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감격적인 승리를 선포했지만, 이내 심한 갈증과 탈진이 찾아온다. 그리고 곧바로 깨닫는다. 자신이 천 명을 죽이기는 했지만 이것이 한계이며,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즉,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천 명을 죽인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극심한 탈진과 함께 죽음의 두려움이 찾아들고 나서야, 삼손은 이 싸움을 자신이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을 깨닫고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삼손은 목이 너무 말라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께서 친히 이 크나큰 승리를 주님의 종의 손에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목이 타서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붙잡혀 죽어야 하겠습니까?'”(새번역_18절)
천 명을 나귀 턱뼈 하나로 죽였지만, 자신의 목마름(갈증)조차 해결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임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수를 터뜨려 주시지 않으면, 대적들을 죽였어도 결국 대적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 의지하고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삼손은 지체하지 않고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도 지체하지 않으시고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그의 갈증을 풀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늘 함께 계셨기에, 삼손이 외롭게 싸운 후 곤란한 상황 가운데 부르짖을 때 즉시 응답해 주신 것이다. “엔학고레”는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하고 외친 신앙의 고백이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그가 버려지는 순간에도 함께 계셨다. 가장 위기의 순간에도, 목이 말라 탈진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삼손과 함께 계셨다. 함께 계셨기에 나귀의 새 턱뼈를 손에 들게 하셨고, 그것을 휘두를 때 블레셋 사람들의 시체가 쌓이게 하셨다. 또 갈증이 극에 달하여 부르짖을 때 즉각 응답하신 것이다. “엔학고레”는 부르짖는 이에게 응답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언제나 그와 함께하셨음을 증명하는 샘이 된 것이다.
*삼손이 이제껏 홀로 힘겹게 싸워 스스로 승리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힘을 주셨기에 승리할 수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걷는 삶의 길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하여 주심으로”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실 것이다.
*특히 “부르짖는 사람의 샘”이라는 뜻의 “엔학고레”가 의미심장하다.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압제를 받는 사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히 블레셋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블레셋 사람들과 교류하며 통혼까지 자연스럽게 했기에, 그들에게 압제받으며 고통을 당하고 있어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다.” 오히려 블레셋의 압제를 자연스레 받아들여, 고통을 주는 존재를 블레셋이 아닌 삼손으로 여기고 장정 3천 명을 모아 그를 붙잡아 넘기기까지 했다. 철저히 블레셋화된 것이다.
*그런데 죽음에 이를 만큼 고통스러운 갈증이 비로소 삼손을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였고”, 하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즉각 응답해 주심으로 “부르짖음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신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삼손은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다스리게 되었다. 즉, 삼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승리의 샘물을 터져 나오게 하셔서 지독한 죽음의 갈증으로부터 그를 구원해 주셨다.
*사사기의 구원 사이클이 다시 회복될 기미가 보인다. 범죄-심판-부르짖음-구원-평화의 사이클에서, 40년 동안 압제(심판)를 당하고도 부르짖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엔학고레”에서 삼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증거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삼손은 부르짖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르짖지 않는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다”(새번역_20절). 삼손만 홀로 부르짖고 말았다. “엔학고레”는 삼손의 부르짖음에 머물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을 찾으며 부르짖지 않는다. 그래서 삼손이 골칫덩이이기는 했지만, 블레셋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홀로 싸운 삼손, 함께 싸워 주신 하나님, 부르짖는 삼손, 갈증을 해결해 주신 하나님…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블레셋화되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구원에 대한 갈망이 없다. 엔학고레가 삼손에게는 하나님의 증거가 되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 기막힌 현실이 마지막 사사 삼손의 시대가 시작된 이스라엘의 현주소였다.
나는?
-급하고 무모해 보이는 삼손의 분노와 사사로운 보복을 통해,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관계를 흔들어 놓을 틈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1~19절). 아내를 잃은 삼손은 장인의 궁색한 변명과 제안을 거절하고, 그에 대한 분노를 블레셋에게 돌린다. 그리고 그들의 야비한 보복(6절)은 블레셋을 향한 삼손의 증오와 복수심을 더욱 자극한다. 그런데 블레셋과 공존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더 이상 그들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갈등하지도, 싸우지도 않고, 심지어 하나님께 호소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주도하셔서 그들의 부정한 연합을 깨뜨리신다.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 자신들의 구원자인 삼손을 대적의 손에 넘기는 굴욕을 보인다. 심지어 블레셋의 압제를 두둔하기까지 한다(9~13절). 가장 먼저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 승리한(1:1~3) 유다 지파가 지금은 그 전의(戰意)는 온데간데없고, 오랜 압제에 체념한 듯 거짓 평화와 안전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삼손이 싸워야 할 대상은 블레셋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안에 내재된 집요하고 끈질긴 ‘노예근성’ 혹은 ‘사대주의’가 아닐까 싶다.
-여호와의 영으로 대승을 거둔 삼손의 노래에는 하나님은 없고 내가 했다는 자랑만 보인다(14~17절). 그는 나귀 턱뼈로 천 명을 죽일 수는 있어도 갈증을 이길 수 없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또 이 전쟁이 지도자 위에 지도자가 계신 거룩한 전쟁임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이렇듯 보이는 대적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내 안에 있는 자만과 허영이 아닐까?
-대승을 거둔 삼손이 극심한 목마름으로 부르짖자, 그를 살리기 위해 샘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 갈증을 통해 자기 한계를 깨닫게 된 삼손은 비로소 승리의 공을 하나님께 돌린다. ‘라맛레히’를 자랑하는 삼손에게 하나님은 ‘엔학고레’를 허락하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고, 승리할 수도, 사명을 이룰 수도 없음을 깨우치신다. 큰 승리의 개가보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오늘의 내가 없고 내일도 보장할 수 없다는 나의 고백이다.
*”엔학고레”가 필요한 시대다. 나는 특히 더온누리교회가 “엔학고레”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사 시대와 다름없는 이 시대 속에서 누구든지 언제든지 나아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응답의 샘물이 터져 나오는 바로 그곳이 우리 공동체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 삶의 거처가 어디든 그곳이 “엔학고레”가 되기를 바란다. “부르짖음”이 쇠퇴해 버린 시대다. 오히려 “부르짖음”이 더욱 간절하게 터져 나와야 할 시대이기도 하다. 사회 전반에 드러나는 분열과 혼란, 직접 체감하는 기후 위기, 양극화의 그림자, 교회 공동체의 쇠락 등 지금이 부르짖어야 할 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스스로 입을 닫아 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며, “부르짖음”이 회복되기를 갈망한다.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압제를 당하면서 도리어 블레셋화되어 버린 나머지, 잉태될 때부터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이었던 삼손조차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블레셋 여인과 자연스레 결혼할 정도였다. 이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하여 마음이 고통스럽다.
*한편 “부르짖음”을 잊어버렸을 때 “부르짖음”을 일깨워 주셔서 구원을 갈망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삼손을 살렸듯이, 하나님의 제한 없는 사랑의 은혜가 우리로 “부르짖음”을 토해 내게 하셔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는다.
*화려한 승리의 장소인 라맛레히보다 부르짖어 응답받은 샘인 엔학고레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화려한 승리의 라맛레히에 취해, 부르짖을 때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엔학고레”를 간과한다면 비참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의 삶을 “엔학고레”에서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라맛레히처럼 홀로 자기 힘에 취해 살았겠지만, 엔학고레를 통해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알았기에 비로소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섬길 수 있었다. 그에게 엔학고레의 경험이 없었다면 어찌할 뻔했는가!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삼손의 제멋대로인 삶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 [사사기 14:1-20]
삼손이 블레셋의 딤나에 사는 한 여인과 결혼하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자란 삼손, 여호와의 영이 움직이시던(13:24-25) 삼손의 모습이 맞나 싶다. 참담한 것은 블레셋의 40년 통치 아래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는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1. 삼손에게서 보이는 이스라엘의 상태(1-4절)
삼손의 부모는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인을 아내로 삼겠다는 아들의 말에 낙담한다(2-3절). 삼손은 부모의 마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라고 조른다. 그러고서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가 ‘상견례’를 한다.
딤나의 포도원에서 어린 사자 한 마리가 달려들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세차게 내리덮치자 그는 아무런 도구 없이 맨손으로 사자를 염소 새끼 찢듯이 찢어 죽인다. 하지만 이 일을 부모에게 말하지 않는다(5-6절). 삼손은 딤나의 여인을 무척이나 좋아했다(7절).
시간이 지나 결혼식을 하기 위해 다시 딤나로 내려가는 길에, 자신이 찢어 죽인 사자의 주검에 벌 떼가 있고 꿀이 고여 있었는데(8절), 삼손은 이를 떠먹는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모에게도 가져다준다(9절).
*삼손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다. 하지만 삼손도 피 끓는 청춘이다. 이성에 대한 마음도 감출 수 없다. 문제는 블레셋 여인을 마음에 두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하려는 이방 결혼을 부모님께 끝까지 고집한다. 당시 세계관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인데도 부모의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 충격적이다. 아버지의 권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삼손은 사사로 부름받은 과정이 앞의 11명과 다르다. 그들은 모두 성인이 되었을 때 세워졌지만, 삼손은 잉태되기도 전에 부모의 특별한 준비로 구별된 나실인으로 길러졌다. 그런데 실망스럽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따라 결정하고 움직였다. 나실인의 본분은 저버리고 정욕을 따라 행동한다. 딤나의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그 지역으로 들어가 7일 동안 잔치까지 벌이며 그 지역 청년들과 어울렸다. 사사로서의 구별된 모습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나 자랐지만, 경건의 모양은 몸에 배어 있지 않다. 나실인으로서의 가치와 철학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대로” 기분과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즉흥적인 사람이었다.
*사사였지만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함께 연대하지 않았고, 그저 홀로 기분 따라 움직였다. 이런 이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라니…
*그런데 40년 동안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의 상태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는 온데간데없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구별됨은 찾아볼 수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결정하고 추구한다. 삼손이나 이스라엘이나 다를 바 없다.
*나는 과연 어떨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께 떼쓰며 구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뜻과 방법은 상관하지 않고 그저 내 마음대로 행하는 것은, 블레셋 여인을 좋아해서 딤나까지 가서 결혼하는 삼손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유구무언이다… 삼손이나 이스라엘이나 나나…
2. 그런데…(4절)
그런데 성경은 삼손의 이런 행동에 대하여 “이 일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해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한 것”이라고 했다. 이 구절만 본다면 삼손은 블레셋을 치기 위해 결혼식을 가장하여 블레셋 땅 딤나로 내려간 것이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삼손은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럭비공처럼 톡톡 튀는 삼손의 삶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진행하셨다는 의미다. 만약 삼손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결혼식을 이용해 틈을 만들었다면, 아내로 맞이한 여인을 이스라엘의 가족으로 데리고 왔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옳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처럼 말이다. 이런 계획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하지만 삼손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자신과 결혼한 여인은 “…그의 친구에게”(20절) 주어지고 만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삼손의 됨됨이는 결코 경건하지 않다. *그렇다면 삼손의 이런 막무가내 됨됨이를 통해서라도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시려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사조차 이처럼 엉망인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구원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삼손이 엉망진창인 삶을 살고 있어도, 그러한 삶이 하나님의 역사를 가리거나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드러나지 않지만 흔들림 없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또 삼손은 철없이 딤나 여인과 결혼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틈을 타서 블레셋을 치실 것이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작당에 이리저리 몰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에게 배신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그 “틈”을 타서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블레셋에게 보복하신다.
*무엇보다 심각하게 우려스러운 이스라엘의 블레셋화, 그 상징과도 같은 삼손의 이방 결혼이라는 제멋대로의 계획을 오히려 블레셋을 깨뜨리시는 “틈”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제멋대로인 삼손의 럭비공 같은 삶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하셨다.
나는?
-삼손은 사사로서의 첫 사역을 딤나의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결혼식에서 낸 수수께끼 때문에 잔치 내내 아내와 갈등하다가, 마침내 아내의 배신으로 내기에 지고 만다. 그는 사사로서, 그리고 나실인으로서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연달아 벌이고 있다.
-이방 블레셋 여인에게 사로잡힌 그는 자신이 언약 백성이라는 것도, 자신의 사명도, 이방인과의 통혼이 결국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을 수용하는 위태로운 일이라는 것도 모두 잊은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눈에 좋은 대로(3, 7절)’ 행동하는 삼손은 ‘자기 소견(소욕)에 옳은 대로(21:25)’ 살아가는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을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 본분을 잊는 순간, 나도 이 세상에 쉽게 동화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자란 삼손,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살아간 삼손… 그런데 그 삶은 나실인으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그분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 애굽에서 탈출했다. 그렇게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으로 세워졌지만, 지금은 제멋대로다. 황당하기 그지없다.
-삼손이 포도원을 찾고, 사체를 만져서 꿀을 먹은 것은 ‘나실인’ 서약을 어기는 일이었다(5-9절). 그는 사자보다 강했지만, 꿀에는 약했다. 대적들은 물리쳤으나 이방 여인의 유혹은 이기지 못했다. 그들의 삶의 방식을 버리지 못했다. ‘꿀에 약한’ 삼손의 모습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이방인처럼 살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이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삼손처럼 “제멋대로”다. 거룩하게 구별되는 데 마음을 쏟기보다, “내 마음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에 더 심취한다. 삼손과 다를 바 없는 삶이다. 어이가 없다. 하지만 이런 제멋대로의 삶을 사용해서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블레셋에게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사랑이 놀랍다.
-삼손이 수수께끼를 내자, 블레셋 사람들은 내기에 질까 두려워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여 답을 알아낸다. 블레셋의 기만적인 행동에 분노한 삼손은 ‘그 틈을 타서(4절)’ 블레셋 사람 30명을 쳐 죽인다. 그는 힘을 과시하려다가 아내를 잃고, 블레셋은 손해를 두려워하다가 동족을 잃는다. 죄를 더하는 관계보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황당하고 어이없기는 나의 삶도 매한가지 아니겠나… 한량없는 은혜로 부름받아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제멋대로 살아가니, 삼손을 뭐라 할 수 없다. 삼손처럼 “틈” 많은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황당하고 어이없는 “틈”을 놀라운 은혜로 메우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신다!
*삼손의 이야기는 그의 제멋대로인 삶을 감상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 제멋대로의 “틈”을 “기묘하게(신비스럽게)” 메우시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를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삼손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신 약속(13:5)을 이제 하나하나 이루어 가신다. 적의 여인을 사랑한 삼손, 그 삼손을 통해 적을 궤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이제 앞으로 펼쳐질 삼손의 생애 한 장면 한 장면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각본과 연출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무대 위의 그 누구도 그 기이한 섭리를 깨닫지 못한다(4절). 하나님은 결국 신자의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 모든 일을 통제하고 경영하실 것이다. 신앙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담는 신비의 그릇을 마련하는 일이다.
1. 삼손에게서 보이는 이스라엘의 상태(1-4절)
삼손의 부모는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인을 아내로 삼겠다는 아들의 말에 낙담한다(2-3절). 삼손은 부모의 마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라고 조른다. 그러고서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가 ‘상견례’를 한다.
딤나의 포도원에서 어린 사자 한 마리가 달려들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세차게 내리덮치자 그는 아무런 도구 없이 맨손으로 사자를 염소 새끼 찢듯이 찢어 죽인다. 하지만 이 일을 부모에게 말하지 않는다(5-6절). 삼손은 딤나의 여인을 무척이나 좋아했다(7절).
시간이 지나 결혼식을 하기 위해 다시 딤나로 내려가는 길에, 자신이 찢어 죽인 사자의 주검에 벌 떼가 있고 꿀이 고여 있었는데(8절), 삼손은 이를 떠먹는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모에게도 가져다준다(9절).
*삼손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다. 하지만 삼손도 피 끓는 청춘이다. 이성에 대한 마음도 감출 수 없다. 문제는 블레셋 여인을 마음에 두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하려는 이방 결혼을 부모님께 끝까지 고집한다. 당시 세계관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인데도 부모의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 충격적이다. 아버지의 권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삼손은 사사로 부름받은 과정이 앞의 11명과 다르다. 그들은 모두 성인이 되었을 때 세워졌지만, 삼손은 잉태되기도 전에 부모의 특별한 준비로 구별된 나실인으로 길러졌다. 그런데 실망스럽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따라 결정하고 움직였다. 나실인의 본분은 저버리고 정욕을 따라 행동한다. 딤나의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그 지역으로 들어가 7일 동안 잔치까지 벌이며 그 지역 청년들과 어울렸다. 사사로서의 구별된 모습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나 자랐지만, 경건의 모양은 몸에 배어 있지 않다. 나실인으로서의 가치와 철학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대로” 기분과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즉흥적인 사람이었다.
*사사였지만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함께 연대하지 않았고, 그저 홀로 기분 따라 움직였다. 이런 이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라니…
*그런데 40년 동안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의 상태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는 온데간데없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구별됨은 찾아볼 수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결정하고 추구한다. 삼손이나 이스라엘이나 다를 바 없다.
*나는 과연 어떨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께 떼쓰며 구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뜻과 방법은 상관하지 않고 그저 내 마음대로 행하는 것은, 블레셋 여인을 좋아해서 딤나까지 가서 결혼하는 삼손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유구무언이다… 삼손이나 이스라엘이나 나나…
2. 그런데…(4절)
그런데 성경은 삼손의 이런 행동에 대하여 “이 일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해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한 것”이라고 했다. 이 구절만 본다면 삼손은 블레셋을 치기 위해 결혼식을 가장하여 블레셋 땅 딤나로 내려간 것이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삼손은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럭비공처럼 톡톡 튀는 삼손의 삶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진행하셨다는 의미다. 만약 삼손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결혼식을 이용해 틈을 만들었다면, 아내로 맞이한 여인을 이스라엘의 가족으로 데리고 왔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옳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처럼 말이다. 이런 계획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하지만 삼손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자신과 결혼한 여인은 “…그의 친구에게”(20절) 주어지고 만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삼손의 됨됨이는 결코 경건하지 않다. *그렇다면 삼손의 이런 막무가내 됨됨이를 통해서라도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시려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사조차 이처럼 엉망인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구원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삼손이 엉망진창인 삶을 살고 있어도, 그러한 삶이 하나님의 역사를 가리거나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드러나지 않지만 흔들림 없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또 삼손은 철없이 딤나 여인과 결혼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틈을 타서 블레셋을 치실 것이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작당에 이리저리 몰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에게 배신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그 “틈”을 타서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블레셋에게 보복하신다.
*무엇보다 심각하게 우려스러운 이스라엘의 블레셋화, 그 상징과도 같은 삼손의 이방 결혼이라는 제멋대로의 계획을 오히려 블레셋을 깨뜨리시는 “틈”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제멋대로인 삼손의 럭비공 같은 삶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하셨다.
나는?
-삼손은 사사로서의 첫 사역을 딤나의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결혼식에서 낸 수수께끼 때문에 잔치 내내 아내와 갈등하다가, 마침내 아내의 배신으로 내기에 지고 만다. 그는 사사로서, 그리고 나실인으로서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연달아 벌이고 있다.
-이방 블레셋 여인에게 사로잡힌 그는 자신이 언약 백성이라는 것도, 자신의 사명도, 이방인과의 통혼이 결국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을 수용하는 위태로운 일이라는 것도 모두 잊은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눈에 좋은 대로(3, 7절)’ 행동하는 삼손은 ‘자기 소견(소욕)에 옳은 대로(21:25)’ 살아가는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을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 본분을 잊는 순간, 나도 이 세상에 쉽게 동화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자란 삼손,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살아간 삼손… 그런데 그 삶은 나실인으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그분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 애굽에서 탈출했다. 그렇게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으로 세워졌지만, 지금은 제멋대로다. 황당하기 그지없다.
-삼손이 포도원을 찾고, 사체를 만져서 꿀을 먹은 것은 ‘나실인’ 서약을 어기는 일이었다(5-9절). 그는 사자보다 강했지만, 꿀에는 약했다. 대적들은 물리쳤으나 이방 여인의 유혹은 이기지 못했다. 그들의 삶의 방식을 버리지 못했다. ‘꿀에 약한’ 삼손의 모습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이방인처럼 살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이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삼손처럼 “제멋대로”다. 거룩하게 구별되는 데 마음을 쏟기보다, “내 마음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에 더 심취한다. 삼손과 다를 바 없는 삶이다. 어이가 없다. 하지만 이런 제멋대로의 삶을 사용해서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블레셋에게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사랑이 놀랍다.
-삼손이 수수께끼를 내자, 블레셋 사람들은 내기에 질까 두려워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여 답을 알아낸다. 블레셋의 기만적인 행동에 분노한 삼손은 ‘그 틈을 타서(4절)’ 블레셋 사람 30명을 쳐 죽인다. 그는 힘을 과시하려다가 아내를 잃고, 블레셋은 손해를 두려워하다가 동족을 잃는다. 죄를 더하는 관계보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황당하고 어이없기는 나의 삶도 매한가지 아니겠나… 한량없는 은혜로 부름받아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제멋대로 살아가니, 삼손을 뭐라 할 수 없다. 삼손처럼 “틈” 많은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황당하고 어이없는 “틈”을 놀라운 은혜로 메우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신다!
*삼손의 이야기는 그의 제멋대로인 삶을 감상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 제멋대로의 “틈”을 “기묘하게(신비스럽게)” 메우시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를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삼손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신 약속(13:5)을 이제 하나하나 이루어 가신다. 적의 여인을 사랑한 삼손, 그 삼손을 통해 적을 궤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이제 앞으로 펼쳐질 삼손의 생애 한 장면 한 장면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각본과 연출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무대 위의 그 누구도 그 기이한 섭리를 깨닫지 못한다(4절). 하나님은 결국 신자의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 모든 일을 통제하고 경영하실 것이다. 신앙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담는 신비의 그릇을 마련하는 일이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삼손의 출생과 기묘하신 하나님 [사사기 13:15-25]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에게 음식을 준비하지만, 사자는 이를 거절한다. 마노아는 또 그의 이름을 묻지만, 사자는 ‘어찌하여’ 이름을 묻느냐며 ‘기묘자’라고 대답한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가 준비한 음식은 거절하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번제물을 드리자,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일어나 하늘로 올라가고 여호와의 사자는 그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다. 이를 본 부부는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깨닫는다. 마노아는 하나님을 보았으니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이지만, 아내는 오히려 담대하게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렇게 삼손을 출산하고,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의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였다.
1. 기묘자(신비로우신) 하나님
고대인들은 인간이 신의 이름을 알면 그 신을 자유자재로 부르면서 그가 가진 힘을 이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당시 가나안 종교들에서 흔한 사고방식이었다. 블레셋의 40년 압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방식을 이방인과 다름없이 변모시켜 놓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로 특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본문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묘자”라고 표현한다. 이는 실제 이름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속성”을 표현한 것이 틀림없다. “비밀, 신비”라는 뜻을 가진 기묘자(필리)는 “비밀스럽고 놀라운 것”을 뜻한다. 이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쓰인 것으로,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사 9:6). 결국 하나님의 이름은 알려 주지 않았지만, 인간의 이해로는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지금 일어나는 일을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신다.
블레셋의 압제를 받는 40년 동안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조차 잊어버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을 준비하시는 신비로운 하나님이시다. 당장 상황을 반전시킬 기적을 행하시거나 인물을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잉태될 아기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감추어져 있어 반응할 수 없지만, 구원의 계획을 착착 진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인간의 이해 능력으로 모두 받아들이기가 벅찬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묘자”이시다. 인간의 상식과 이해를 넘어서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렇다. 인간의 상식과 이해로는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이루셨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신 위대한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본문은 마노아의 신앙보다 그의 아내의 신앙을 도드라지게, 자세히 묘사한다. 자신이 구하여 만난 이가 하나님의 천사였음을 깨달은 마노아는 죽음의 공포로 두려워하지만, 정작 그의 아내는 “만약 하나님께서 죽이려 하셨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라며 오히려 더욱 담대해진다(23절). 마노아보다 아내가 훨씬 성숙하다.
2. 아이의 이름은 삼손(빛나는!)
삼손이라는 이름의 뜻은 “작은 태양”이다. 직역하면 “빛나는”이라는 의미도 있다. 여호와의 천사가 나타나 수태고지까지 했지만, 이름을 어떻게 지으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름은 마노아가 지었을 것이다. 아마도 제단의 제물에서 불꽃이 일어나고 그 불꽃을 타고 올라간 천사의 모습을 본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천사가 알려 준 이 아이의 사명, 곧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5절)”는 말씀을 기억하고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블레셋의 압제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소망의 빛을 비추는 사람이 되라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이름의 의미가 “작은 태양”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죄의 영향 아래 묶여 있고 이로 인해 블레셋의 압제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조차 잊어버린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마노아 부부는 소라 땅에 살았다(2절). 삼손은 구원의 하나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도록 “주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받으면서 잘 자랐다(새번역 24절).” 그리고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여 그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다”라는 말은 “휘젓다, 소란케 하다”라는 뜻이다. 삼손이 자라면서 블레셋의 압제에 눌려 굳어진 이스라엘의 마음을 휘젓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도록 소란케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은 겉으로 보기에 평탄한(?) 삶을 흔드는 격동에서부터 시작된다. 죄에 무감각해진 마음을 흔들고,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깨뜨려 생동하는 말씀을 집어넣으신다. “여호와의 영”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구원의 여명을 비추실 때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다면 편안하다고 여기는 일상에서 마음이 격동되고 삶이 소란해지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그 “소동”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나아가야 한다.
나는?
-여호와의 사자는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 이름을 묻는 마노아에게 자신의 이름을 ‘기묘’라고 밝힌다. 이를 통해 이제부터 일어날 모든 일(이적, 출생, 구원)이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사건이 될 것을 예고하신다(15~18절). 그의 무지를 일깨우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기대하게 하신다. 믿음은 모든 것이 다 해명되어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23절). 신비와 여백을 품고 신뢰 속에서 주의 역사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마노아가 드린 제물을 제단에서 나온 불로 태우는 이적을 통해 자신이 ‘기묘(18절)’임을 증명하시고, 그분이 주신 약속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게 하신다(19~23절). 이를 통해 흔들리는 그의 믿음을 세워 주신다. 그러니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다. 자기 백성을 돌이키고 새롭게 하실 그분의 지혜를 아무도 헤아릴 수 없고, 그분의 결심을 아무도 꺾지 못할 것이다.
-약속대로 아들을 주시고, 하나님의 영으로 그를 움직이셔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라게 하신다(24~25절). 이름(작은 태양, 빛나는)처럼, 태어날 아이는 암울한 한 가정과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펼칠 ‘희망의 빛’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으로 이 땅에 오신 ‘참 빛’ 예수님으로 인해, 죄와 흑암과 사망 가운데 살던 우리도 생명의 빛으로 나아와 참 자유와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 이 은혜를 망각한 채 옛 삶을 넘나들기도 하지만, 오늘도 말씀 앞에 이렇게 머리를 조아릴 수 있는 것도 이 자비로운 은총의 빛 때문이다.
-아이에게 ‘복을’ 더하셨다는 것은 이 아이의 인생 주도권이 부모나 세상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한 삼손은 부모와 이스라엘의 기대 속에서 성장한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주의 복과 영이 임하여, 그들을 통해 교회와 세상에 이루실 주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불임인 아내가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하였고, 그 아이가 나실인으로 부름받았다고 했는데도 마노아는 그렇게 말한 이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몰라본다. 그만큼 하나님 신앙이 약화된 시대였음을 보여 준다. 마노아는 그를 대접하고 그의 이름을 존귀하게 해 드리고 싶은 좋은 마음으로 그의 정체를 알려고 했으나 좀처럼 깨닫지 못했다. 그만큼 어둡고 어두운 시대였다.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가고 다시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나타나지 않자, 비로소 마노아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였음을 깨닫는다. 동시에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기드온 시대가 떠오른다. 하지만 마노아의 아내는 침착한 말로 남편을 안정시킨다. 죽이실 것이었다면 번제와 소제도 받지 않으셨을 것이며, 이 모든 일을 보이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한다. 마노아의 아내는 어둠의 시대에 ‘작은 태양’ 삼손을 낳을 만한 믿음의 여인이었지 싶다.
1. 기묘자(신비로우신) 하나님
고대인들은 인간이 신의 이름을 알면 그 신을 자유자재로 부르면서 그가 가진 힘을 이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당시 가나안 종교들에서 흔한 사고방식이었다. 블레셋의 40년 압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방식을 이방인과 다름없이 변모시켜 놓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로 특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본문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묘자”라고 표현한다. 이는 실제 이름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속성”을 표현한 것이 틀림없다. “비밀, 신비”라는 뜻을 가진 기묘자(필리)는 “비밀스럽고 놀라운 것”을 뜻한다. 이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쓰인 것으로,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사 9:6). 결국 하나님의 이름은 알려 주지 않았지만, 인간의 이해로는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지금 일어나는 일을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신다.
블레셋의 압제를 받는 40년 동안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조차 잊어버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을 준비하시는 신비로운 하나님이시다. 당장 상황을 반전시킬 기적을 행하시거나 인물을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잉태될 아기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감추어져 있어 반응할 수 없지만, 구원의 계획을 착착 진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인간의 이해 능력으로 모두 받아들이기가 벅찬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묘자”이시다. 인간의 상식과 이해를 넘어서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렇다. 인간의 상식과 이해로는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이루셨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신 위대한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본문은 마노아의 신앙보다 그의 아내의 신앙을 도드라지게, 자세히 묘사한다. 자신이 구하여 만난 이가 하나님의 천사였음을 깨달은 마노아는 죽음의 공포로 두려워하지만, 정작 그의 아내는 “만약 하나님께서 죽이려 하셨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라며 오히려 더욱 담대해진다(23절). 마노아보다 아내가 훨씬 성숙하다.
2. 아이의 이름은 삼손(빛나는!)
삼손이라는 이름의 뜻은 “작은 태양”이다. 직역하면 “빛나는”이라는 의미도 있다. 여호와의 천사가 나타나 수태고지까지 했지만, 이름을 어떻게 지으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름은 마노아가 지었을 것이다. 아마도 제단의 제물에서 불꽃이 일어나고 그 불꽃을 타고 올라간 천사의 모습을 본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천사가 알려 준 이 아이의 사명, 곧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5절)”는 말씀을 기억하고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블레셋의 압제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소망의 빛을 비추는 사람이 되라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이름의 의미가 “작은 태양”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죄의 영향 아래 묶여 있고 이로 인해 블레셋의 압제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조차 잊어버린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마노아 부부는 소라 땅에 살았다(2절). 삼손은 구원의 하나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도록 “주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받으면서 잘 자랐다(새번역 24절).” 그리고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여 그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다”라는 말은 “휘젓다, 소란케 하다”라는 뜻이다. 삼손이 자라면서 블레셋의 압제에 눌려 굳어진 이스라엘의 마음을 휘젓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도록 소란케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은 겉으로 보기에 평탄한(?) 삶을 흔드는 격동에서부터 시작된다. 죄에 무감각해진 마음을 흔들고,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깨뜨려 생동하는 말씀을 집어넣으신다. “여호와의 영”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구원의 여명을 비추실 때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다면 편안하다고 여기는 일상에서 마음이 격동되고 삶이 소란해지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그 “소동”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나아가야 한다.
나는?
-여호와의 사자는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 이름을 묻는 마노아에게 자신의 이름을 ‘기묘’라고 밝힌다. 이를 통해 이제부터 일어날 모든 일(이적, 출생, 구원)이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사건이 될 것을 예고하신다(15~18절). 그의 무지를 일깨우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기대하게 하신다. 믿음은 모든 것이 다 해명되어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23절). 신비와 여백을 품고 신뢰 속에서 주의 역사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마노아가 드린 제물을 제단에서 나온 불로 태우는 이적을 통해 자신이 ‘기묘(18절)’임을 증명하시고, 그분이 주신 약속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게 하신다(19~23절). 이를 통해 흔들리는 그의 믿음을 세워 주신다. 그러니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다. 자기 백성을 돌이키고 새롭게 하실 그분의 지혜를 아무도 헤아릴 수 없고, 그분의 결심을 아무도 꺾지 못할 것이다.
-약속대로 아들을 주시고, 하나님의 영으로 그를 움직이셔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라게 하신다(24~25절). 이름(작은 태양, 빛나는)처럼, 태어날 아이는 암울한 한 가정과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펼칠 ‘희망의 빛’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으로 이 땅에 오신 ‘참 빛’ 예수님으로 인해, 죄와 흑암과 사망 가운데 살던 우리도 생명의 빛으로 나아와 참 자유와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 이 은혜를 망각한 채 옛 삶을 넘나들기도 하지만, 오늘도 말씀 앞에 이렇게 머리를 조아릴 수 있는 것도 이 자비로운 은총의 빛 때문이다.
-아이에게 ‘복을’ 더하셨다는 것은 이 아이의 인생 주도권이 부모나 세상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한 삼손은 부모와 이스라엘의 기대 속에서 성장한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주의 복과 영이 임하여, 그들을 통해 교회와 세상에 이루실 주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불임인 아내가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하였고, 그 아이가 나실인으로 부름받았다고 했는데도 마노아는 그렇게 말한 이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몰라본다. 그만큼 하나님 신앙이 약화된 시대였음을 보여 준다. 마노아는 그를 대접하고 그의 이름을 존귀하게 해 드리고 싶은 좋은 마음으로 그의 정체를 알려고 했으나 좀처럼 깨닫지 못했다. 그만큼 어둡고 어두운 시대였다.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가고 다시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나타나지 않자, 비로소 마노아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였음을 깨닫는다. 동시에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기드온 시대가 떠오른다. 하지만 마노아의 아내는 침착한 말로 남편을 안정시킨다. 죽이실 것이었다면 번제와 소제도 받지 않으셨을 것이며, 이 모든 일을 보이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한다. 마노아의 아내는 어둠의 시대에 ‘작은 태양’ 삼손을 낳을 만한 믿음의 여인이었지 싶다.
선교편지 ㅣ
정동준 선교사
정동준 우한나 선교사 기도편지(53)
안녕하세요? 더워지는 한국에서 기도편지를 보내면서 우간다 인사말이 아니라 한국말로 인사드립니다. 우리들의 삶이…
외부보도 ㅣ
노컷뉴스
2026년 05월 16일
‘럭키비키’ 말고 ‘홀리빛키’…전주 교회 축제에 가족 몰렸다
그동안 EP앨범 1개와 10개의 싱글 앨범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예배 찬양곡을 만들어…
외부보도 ㅣ
투데이N
2026년 05월 16일
“행운 대신 거룩한 은혜를”… 전주 더온누리교회, 다음 세대 위한 ‘홀리 빛키’ 페스티벌 성료
그동안 EP앨범 1개와 10개의 싱글 앨범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예배 찬양곡을 만들어…
외부보도 ㅣ
VERITAS-a
2025년 12월 24일
전주대, 더온누리교회로부터 발전기금 1,000만원 전달받아
그동안 EP앨범 1개와 10개의 싱글 앨범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예배 찬양곡을 만들어…
외부보도 ㅣ
노컷뉴스
2025년 10월 22일
전주필그림·밴쿠버합창단 자매결연, 더온누리교회서 연합공연
그동안 EP앨범 1개와 10개의 싱글 앨범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예배 찬양곡을 만들어…
외부보도 ㅣ
노컷뉴스
2025년 10월 22일
‘복음과 교사’ 주제 ‘넥스트교사컨퍼런스’ 더온누리교회에서 열려
그동안 EP앨범 1개와 10개의 싱글 앨범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예배 찬양곡을 만들어…
외부보도 ㅣ
기독일보
2025년 07월 03일
향기로운 제물, ‘보좌에 앉으신 주님’ 싱글 발매
그동안 EP앨범 1개와 10개의 싱글 앨범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예배 찬양곡을 만들어…
외부보도 ㅣ
기독일보
2025년 06월 26일
향기로운 제물, 열한 번째 앨범 ‘살아도 죽어도’ 발매
전주지역에서 목요모임을 이끌고 있는 ‘향기로운 제물’의 열한 번째 앨범 ‘살아도 죽어도’가 발매됐다….
2026년 10월 4일 주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합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백성답게 빚어주는 거룩한 습관이기도
2026년 9월 27일 주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합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백성답게 빚어주는 거룩한 습관이기도
2026년 9월 20일 주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합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백성답게 빚어주는 거룩한 습관이기도


더온누리교회 전임 및 파트 교역자 청빙 공고
2026년 05월 23일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갈 동역자를 기다립니다. 전주 더온누리교회(www.theonnuri.org)에서 함께
더온누리의 새로운 가족이 되신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더온누리의 새로운 가족이 되신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더온누리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은혜를 함께 나눠요. instagram에서 "#더온누리교회"를 태그해 주세요:)
검증된 Instagram 보존 화면을 표시할 수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