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입다의 등장과 길르앗 장로들과의 협상 [사사기 11:1-11]
10:18에서 암몬 족속과의 전투에 선봉으로 설 자를 찾는 장면에 이어, 갑자기 입다에 대한 소개가 등장한다. 여덟 번째 사사인 입다를 ‘큰 용사’, ‘기생이 낳은 아들’, ‘잡류(건달류)의 우두머리’ 등으로 소개할 수 있겠다. 그는 큰 용사로 불렸지만 기생의 아들이어서, 기업을 잇지 못하게 하려는 이복형제들에게 쫓겨나 “돕 땅”에 거주하며 세력을 키워 나갔다.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아서, 시간이 흘러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올 때(10:18) 길르앗 사람들이 장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강성한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길르앗 사람들은 입다를 세우는 데 모두 동의할 정도였다. “큰 용사(힘의 용사)”라는 소개는 천사가 기드온을 부를 때 쓴 표현과 같다(6:12). 그가 누가 봐도 탁월한 용사였다는 사실은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1. 입다라는 인물
당시 사회적 관습의 시선으로 볼 때 입다의 약점은 ‘기생의 아들'(1절)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여인의 아들’이기에 상속 자격을 운운하며 쫓겨났다. 또 하나는 ‘잡류(건달류)’의 우두머리였다는 점이다(3절). 형제들에게 쫓겨나 정착한 “돕” 땅에 거주하면서 “힘”으로 살았을 것이다. 자연스레 “비류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그가 “힘”, “주먹”, “칼”로 살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큰 용사”로서의 자질이 단단히 잘못 쓰이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길르앗의 장로들이 장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게 된 원인은 “힘의 용사”로서 입다가 가진 명성 때문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리더를 세우지 않는다. 족벌, 학벌, 혈연, 지연 등 인간적인 조건으로 리더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 곧 리더의 자리로 부름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질수록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긍심은 사라지고, 입다의 이복형제들처럼 인간적인 조건으로 편을 가른다.
*입다는 하나님과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가족과 공동체에게 버림받았다는 깊은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 길르앗 장로들은 처음에 입다에게 암몬 족속과의 전쟁을 이끌 “장관”이 되어 달라고 제의한다(6절). 하지만 입다는 자신이 길르앗의 이복형제들에게 쫓겨난 일을 언급하며 “쫓아낼 때는 언제고, 환난을 당하니 찾아왔느냐”며 거절한다(7절). 이에 장로들은 자신들과 함께 암몬 족속과 싸우면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될 것이라며 다시 요청한다(8절). 그러자 입다는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신다면 나를 길르앗의 진정한 지도자로 인정하겠는가?”라고 확인한다(9절).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입다 사이에 맺은 약속의 증인”이심을 고백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답한다(10절). 이렇게 거래는 끝났다. 입다는 길르앗의 머리와 장관이 되었다(11절).
*그에게 암몬 족속과의 전쟁은 지긋지긋한 18년의 압제를 끊는 하나님의 전쟁이기보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전쟁이었다. 적어도 길르앗 장로들과의 협상 초반에는 그랬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다면 길르앗의 지도자로 삼겠다고 약속하는 장로들의 말에 요청을 수락한다. “수치스럽게 쫓겨난” 자신이 이 일로 “명예롭게” 귀향하기를 마음에 품은 듯하다.
암몬과의 전쟁에 맞서기 위해 미스바에 도착한 입다는 가장 먼저 “(돕에서 장로들과 나눈) 모든 말을 주님께 아뢰었다(새번역_11절 하).” 협상의 과정과 약속을 하나님 앞에서 공증했다는 것이다. 추방당하고 이방 땅에서 비류들과 함께 살아온 그의 인생 이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는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그를 이처럼 치밀한 사람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한편으로는 그가 하나님께 아뢴 모든 말이 “암몬 족속과의 전쟁 계획”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12절부터 펼쳐지는 전면전에 앞서 암몬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고증을 앞세운 외교전의 모습을 보면, 입다가 결코 힘만 앞세우는 장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암몬의 침략이 얼마나 명분 없는 억지인지를 치밀하게, 조목조목 전달한다.
2. 그런데…
입다나 길르앗 장로들이나, 암몬 족속이 쳐들어온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먼저 부르짖지 않는다. 그것참 희한하다. 암몬의 18년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부르짖고, 우상까지 제거하며 배수의 진을 치고 매달렸는데, 정작 암몬 족속이 쳐들어오자 그토록 부르짖던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 전쟁을 이끌 적임자가 누구인가? 누가 우리의 머리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로 탁상공론에 빠져 있다. 그리고 이제까지 전혀 안중에도 없던 인물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가 “큰 용사”였기 때문이다. 그의 출생 이력과 집안 내력, 심지어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그를 추방한 일도 상관없었다. 출중한 “큰 용사”로서의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식이다.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회의 탁자에서 이미 결론을 내리고 행동한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더니… 이게 웬… 허허허
나는?
-입다는 ‘버림받은’ 사생자, 추방자, 유랑자였다. ‘큰 용사’로 불리기에는 그의 태생과 신분이 매우 비천했다. 기생의 아들이기에 유산도 받지 못하고 이복형제들에게 쫓겨난 비참한 신세였다. 하지만 그는 버림받은 곳에서 시대적 요청(10:18)에 대한 ‘대안’으로, 자신을 버린 자들의 ‘구원자’로 준비된다(1~3절). 마치 오늘날의 사회상과 비슷하지 않은가? 주님께서는 기독교를 향한 세상의 태생적인 혐오 앞에서, 교회가 비난과 비방의 대상이 아닌 ‘대안’이 되도록 준비시키시고 이끄신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가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암몬의 침략에 속수무책이던 장로들은 돕 땅의 입다를 찾아가 ‘장관직(비상임 통솔자)’을 제안하며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입다가 그들이 찾아온 동기를 의심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이번에는 길르앗의 ‘머리(상임 통치자)’로 추대하겠다며 한 걸음 더 다가간다(4~8절). 정치적 약자인 입다를 충분히 이용하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폐기 처분하려던 장로들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사 시대의 어두운 단면이자 비정한 이 세상의 민낯이 아니겠나! 자기 유익을 따라 속보다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값을 매기는 세상 풍조를 담대하게 거슬러 살아내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어야 하겠다.
-한편, 동족에게서 ‘버림’받은 입다가 동족에게 ‘부름’을 받는 모습에는 묘한 통쾌함이 있다. 아버지의 기업을 잇기에도 ‘부적격자’였던 그가 곤경에 빠진 동족을 구원할 ‘적임자’로 인정받은 것 자체가 역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처럼 세상에서 받는 거절과 소외가 내가 걷는 인생길의 결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 내 삶의 주권이 있음을 알고 믿는다면, 남모를 상처와 상실도 또 다른 보복을 낳는 ‘가시(9:15)’가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향기’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입다의 협상력이 대단하다. 이전에는 버림받았지만, 이번에는 이용당하지 않는다. 도리어 지금의 심각한 상황을 출세의 기회로 역이용한다. 승리 이후의 지위를 법적으로, 신적으로 재가받는 데만 여념이 없어 보인다. 이기적인 야망만 보일 뿐, 동족에 대한 일말의 동정도, 하나님을 향한 한 줌의 믿음도 보이지 않는다. 협상에는 능했으나 야심을 버리지 못한다. 이런 입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일에 대한 열정보다 마음의 동기를 먼저 살피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하겠다.
-입다의 등장 에피소드에 담긴 당시 사회상이 낯설지 않다. 지금 이 시대에 더하면 더했지, 결코 생소하지 않은 모습들이다. 우선 하나님의 나라임에도 공정하지 않다. 출생 이력, 혈연, 지연의 고리가 견고하다. 특히 입다가 본처 소생의 형제들에게 추방당한 것은 그의 어머니가 기생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입다에게 몰려들었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건달들”이었지만…
-사사 시대이기에 그러려니 하면 곤란하다. 이와 비슷한 불공정한 모습이 현대에도 늘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태도와 가치, 익숙한 관습에 직면할 때 쉽게 예전의 방식대로 선택하고 결정해서는 곤란하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것인지 먼저 묻고 확인해야 할 것이다.
-입다 아버지의 문란한 삶으로 인해 그의 자녀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입다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머지 이복형제들은 옛 가치, 세상의 가치대로 출신을 따지고 자신들의 유익을 먼저 따졌다.
-한편, 입다를 찾아온 장로들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힘을 겨루며 계산하는 모습은, 모양과 내용이 달랐을 뿐 입다의 이복형제들과 다를 바가 없다. 입다와 장로들의 협의 속에 하나님은 아예 없고, 오직 자신들의 입장만 반복될 뿐이다.
*피택선거를 앞두고 있는 우리 공동체에게 본문은 매우 중요한 점을 깨우친다. 길르앗의 장로들이 그들의 지도자를 찾아 다니는 조건은 오로지 “힘”이었다. 그 힘이 어떤 힘이든 상관 없었다. 비류들의 힘이라도 암몬 자손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상관하지 않았다. 우리 공동체는 겉으로 보기에 ‘힘’있는 일꾼이 아니라,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철저히 의뢰하는 일꾼을 분별하는 영적 감수성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투표라는 제도는 개인이 한 표만을 행사하지만, 성도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과 성령께서 분별하고 깨우쳐 주시는 은햬를 따라 행사하면 겉으로 보이는 ‘힘’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합당한 일꾼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장 본이 되어야 할 교단 선거에서조차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추잡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현실은 어쩌면 입다를 찾은 길르앗 장로들과 같은 수준의 지도자들이 세워진 것이 하나의 원인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의 교회이기에 철저히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분별하여 세우는 지도자여야 하리라.
*길르앗의 장로들만 이런 모습인가? 아니다. 사사로 세움받는 입다 또한 그의 저급한 사명의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다는 장로들이 자기와 맺은 약속을 하나님 앞에서 확증하려 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넘겨 주시면”이라는 그의 고백이 왜 이리 낯설까? 그의 걸어온 삶의 흔적이 이런 고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서슴치 않는다. 어려움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하려는 마음보다, 자기 야망을 실현하는 것에 더 비중을 보인 것이다.
*이런 입다의 모습에서 나도 역시 ‘주님의 뜻, 사명, 비전’ 등등의 종교적 언어로 포장하여 결국 나의 욕심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여 채워가려는 모습이 있지 않을까 싶다. 목사라는 이미지를 십분활용하여 혹세무민하는 이 땅의 거짓 지도자가 얼마나 많은지 혼란스러운 사회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두려운 마음으로 내 자신조차 혹하는 종교적 언어에 무조건적으로 종속하지 않고, 길고된 말씀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분별하며 나아가리라.
*지금 한국 사회가 몇몇 언론과 영향력 있는 언론인들, 여기에 야합하는 정치인들의 콜레버가 한창이다. 이에 따른 결과는 극심한 혼란이다. 실망과 분노가 판을 친다. 이런 시대일수록 진실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것일수록 더욱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는 그저 혼탁해진 흙탕물이 맑은 물로 정화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무성한 말들이 오히려 더 혼탁을 부를것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언어가 절제되는 지혜로운 시기여야 할 것이다.
*안식년 선교지 방문 마지막 일정으로 일본에 들어와 있다. 임장백 선교사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주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섬세한 손길을 만끽 중이다. 어제는 후쿠오카에서 “노조미가 오카 그리스도 교회(직역하면 소망의 언덕 교회)”를 섬기시는 김민구 선교사님 사역지를 방문하고 교제했다. 교토에서 후쿠오카를 오가며, 좀 더 치밀하게 동선을 구성했었더라면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래도 김민구(김수경) 선교사님을 처음뵙고 교제하며 이렇게라도 만나뵐 수 있는 감사가 넘쳤다. 주님을 위하여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곳에서 묵묵히 섬기시는 선교사님들의 성실함이 나의 달려갈 목회 여정에도 큰 빛이 되었다. 여정과 비용에 큰 부담이 되었고 몸은 피곤하지만 참으로 후쿠오카를 방문한 것은 잘한 결정이라고 내 자신에게 칭찬해주었다.
*8만이 넘는 우상의 나라, 겉으로 보이게 친절하나, 철저히 메뉴얼로 움직이기에 일말의 유연성도 허락하지 않는 일종의 차가움이 공존하는 나라…어제 하루를 보내며 이런 저런 체감이 확연하게 드는 시간들이었다. 확실히 선교지는 “가보면 안다”
*한편으로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일본의 교통비였다. 교토에서 후쿠오카 왕복 신칸센 운임은 상식을 초월했다. 웬만한 거리의 항공료를 뛰어넘었다. 말이 안되는 금액이었다. 선교사님과 대화중에 그렇게 오래도록 일본에서 사역했으나 현재 주거지 근처에만 주로 계셨다는 이유가 교통비 때문이라는 말에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제 하루 톡톡히 실감됐다. 이런 환경 속에서 고분분투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사역이 참으로 도전되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교통체계와 비용이 참 감사했다. 철도, 대중교통은 절대로 민영화 하면 안되는 것을 실감했다.
1. 입다라는 인물
당시 사회적 관습의 시선으로 볼 때 입다의 약점은 ‘기생의 아들'(1절)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여인의 아들’이기에 상속 자격을 운운하며 쫓겨났다. 또 하나는 ‘잡류(건달류)’의 우두머리였다는 점이다(3절). 형제들에게 쫓겨나 정착한 “돕” 땅에 거주하면서 “힘”으로 살았을 것이다. 자연스레 “비류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그가 “힘”, “주먹”, “칼”로 살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큰 용사”로서의 자질이 단단히 잘못 쓰이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길르앗의 장로들이 장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게 된 원인은 “힘의 용사”로서 입다가 가진 명성 때문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리더를 세우지 않는다. 족벌, 학벌, 혈연, 지연 등 인간적인 조건으로 리더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 곧 리더의 자리로 부름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질수록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긍심은 사라지고, 입다의 이복형제들처럼 인간적인 조건으로 편을 가른다.
*입다는 하나님과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가족과 공동체에게 버림받았다는 깊은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 길르앗 장로들은 처음에 입다에게 암몬 족속과의 전쟁을 이끌 “장관”이 되어 달라고 제의한다(6절). 하지만 입다는 자신이 길르앗의 이복형제들에게 쫓겨난 일을 언급하며 “쫓아낼 때는 언제고, 환난을 당하니 찾아왔느냐”며 거절한다(7절). 이에 장로들은 자신들과 함께 암몬 족속과 싸우면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될 것이라며 다시 요청한다(8절). 그러자 입다는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신다면 나를 길르앗의 진정한 지도자로 인정하겠는가?”라고 확인한다(9절).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입다 사이에 맺은 약속의 증인”이심을 고백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답한다(10절). 이렇게 거래는 끝났다. 입다는 길르앗의 머리와 장관이 되었다(11절).
*그에게 암몬 족속과의 전쟁은 지긋지긋한 18년의 압제를 끊는 하나님의 전쟁이기보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전쟁이었다. 적어도 길르앗 장로들과의 협상 초반에는 그랬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다면 길르앗의 지도자로 삼겠다고 약속하는 장로들의 말에 요청을 수락한다. “수치스럽게 쫓겨난” 자신이 이 일로 “명예롭게” 귀향하기를 마음에 품은 듯하다.
암몬과의 전쟁에 맞서기 위해 미스바에 도착한 입다는 가장 먼저 “(돕에서 장로들과 나눈) 모든 말을 주님께 아뢰었다(새번역_11절 하).” 협상의 과정과 약속을 하나님 앞에서 공증했다는 것이다. 추방당하고 이방 땅에서 비류들과 함께 살아온 그의 인생 이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는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그를 이처럼 치밀한 사람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한편으로는 그가 하나님께 아뢴 모든 말이 “암몬 족속과의 전쟁 계획”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12절부터 펼쳐지는 전면전에 앞서 암몬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고증을 앞세운 외교전의 모습을 보면, 입다가 결코 힘만 앞세우는 장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암몬의 침략이 얼마나 명분 없는 억지인지를 치밀하게, 조목조목 전달한다.
2. 그런데…
입다나 길르앗 장로들이나, 암몬 족속이 쳐들어온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먼저 부르짖지 않는다. 그것참 희한하다. 암몬의 18년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부르짖고, 우상까지 제거하며 배수의 진을 치고 매달렸는데, 정작 암몬 족속이 쳐들어오자 그토록 부르짖던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 전쟁을 이끌 적임자가 누구인가? 누가 우리의 머리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로 탁상공론에 빠져 있다. 그리고 이제까지 전혀 안중에도 없던 인물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가 “큰 용사”였기 때문이다. 그의 출생 이력과 집안 내력, 심지어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그를 추방한 일도 상관없었다. 출중한 “큰 용사”로서의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식이다.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회의 탁자에서 이미 결론을 내리고 행동한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더니… 이게 웬… 허허허
나는?
-입다는 ‘버림받은’ 사생자, 추방자, 유랑자였다. ‘큰 용사’로 불리기에는 그의 태생과 신분이 매우 비천했다. 기생의 아들이기에 유산도 받지 못하고 이복형제들에게 쫓겨난 비참한 신세였다. 하지만 그는 버림받은 곳에서 시대적 요청(10:18)에 대한 ‘대안’으로, 자신을 버린 자들의 ‘구원자’로 준비된다(1~3절). 마치 오늘날의 사회상과 비슷하지 않은가? 주님께서는 기독교를 향한 세상의 태생적인 혐오 앞에서, 교회가 비난과 비방의 대상이 아닌 ‘대안’이 되도록 준비시키시고 이끄신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가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암몬의 침략에 속수무책이던 장로들은 돕 땅의 입다를 찾아가 ‘장관직(비상임 통솔자)’을 제안하며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입다가 그들이 찾아온 동기를 의심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이번에는 길르앗의 ‘머리(상임 통치자)’로 추대하겠다며 한 걸음 더 다가간다(4~8절). 정치적 약자인 입다를 충분히 이용하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폐기 처분하려던 장로들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사 시대의 어두운 단면이자 비정한 이 세상의 민낯이 아니겠나! 자기 유익을 따라 속보다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값을 매기는 세상 풍조를 담대하게 거슬러 살아내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어야 하겠다.
-한편, 동족에게서 ‘버림’받은 입다가 동족에게 ‘부름’을 받는 모습에는 묘한 통쾌함이 있다. 아버지의 기업을 잇기에도 ‘부적격자’였던 그가 곤경에 빠진 동족을 구원할 ‘적임자’로 인정받은 것 자체가 역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처럼 세상에서 받는 거절과 소외가 내가 걷는 인생길의 결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 내 삶의 주권이 있음을 알고 믿는다면, 남모를 상처와 상실도 또 다른 보복을 낳는 ‘가시(9:15)’가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향기’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입다의 협상력이 대단하다. 이전에는 버림받았지만, 이번에는 이용당하지 않는다. 도리어 지금의 심각한 상황을 출세의 기회로 역이용한다. 승리 이후의 지위를 법적으로, 신적으로 재가받는 데만 여념이 없어 보인다. 이기적인 야망만 보일 뿐, 동족에 대한 일말의 동정도, 하나님을 향한 한 줌의 믿음도 보이지 않는다. 협상에는 능했으나 야심을 버리지 못한다. 이런 입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일에 대한 열정보다 마음의 동기를 먼저 살피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하겠다.
-입다의 등장 에피소드에 담긴 당시 사회상이 낯설지 않다. 지금 이 시대에 더하면 더했지, 결코 생소하지 않은 모습들이다. 우선 하나님의 나라임에도 공정하지 않다. 출생 이력, 혈연, 지연의 고리가 견고하다. 특히 입다가 본처 소생의 형제들에게 추방당한 것은 그의 어머니가 기생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입다에게 몰려들었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건달들”이었지만…
-사사 시대이기에 그러려니 하면 곤란하다. 이와 비슷한 불공정한 모습이 현대에도 늘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태도와 가치, 익숙한 관습에 직면할 때 쉽게 예전의 방식대로 선택하고 결정해서는 곤란하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것인지 먼저 묻고 확인해야 할 것이다.
-입다 아버지의 문란한 삶으로 인해 그의 자녀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입다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머지 이복형제들은 옛 가치, 세상의 가치대로 출신을 따지고 자신들의 유익을 먼저 따졌다.
-한편, 입다를 찾아온 장로들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힘을 겨루며 계산하는 모습은, 모양과 내용이 달랐을 뿐 입다의 이복형제들과 다를 바가 없다. 입다와 장로들의 협의 속에 하나님은 아예 없고, 오직 자신들의 입장만 반복될 뿐이다.
*피택선거를 앞두고 있는 우리 공동체에게 본문은 매우 중요한 점을 깨우친다. 길르앗의 장로들이 그들의 지도자를 찾아 다니는 조건은 오로지 “힘”이었다. 그 힘이 어떤 힘이든 상관 없었다. 비류들의 힘이라도 암몬 자손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상관하지 않았다. 우리 공동체는 겉으로 보기에 ‘힘’있는 일꾼이 아니라,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철저히 의뢰하는 일꾼을 분별하는 영적 감수성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투표라는 제도는 개인이 한 표만을 행사하지만, 성도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과 성령께서 분별하고 깨우쳐 주시는 은햬를 따라 행사하면 겉으로 보이는 ‘힘’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합당한 일꾼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장 본이 되어야 할 교단 선거에서조차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추잡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현실은 어쩌면 입다를 찾은 길르앗 장로들과 같은 수준의 지도자들이 세워진 것이 하나의 원인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의 교회이기에 철저히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분별하여 세우는 지도자여야 하리라.
*길르앗의 장로들만 이런 모습인가? 아니다. 사사로 세움받는 입다 또한 그의 저급한 사명의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다는 장로들이 자기와 맺은 약속을 하나님 앞에서 확증하려 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넘겨 주시면”이라는 그의 고백이 왜 이리 낯설까? 그의 걸어온 삶의 흔적이 이런 고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서슴치 않는다. 어려움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하려는 마음보다, 자기 야망을 실현하는 것에 더 비중을 보인 것이다.
*이런 입다의 모습에서 나도 역시 ‘주님의 뜻, 사명, 비전’ 등등의 종교적 언어로 포장하여 결국 나의 욕심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여 채워가려는 모습이 있지 않을까 싶다. 목사라는 이미지를 십분활용하여 혹세무민하는 이 땅의 거짓 지도자가 얼마나 많은지 혼란스러운 사회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두려운 마음으로 내 자신조차 혹하는 종교적 언어에 무조건적으로 종속하지 않고, 길고된 말씀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분별하며 나아가리라.
*지금 한국 사회가 몇몇 언론과 영향력 있는 언론인들, 여기에 야합하는 정치인들의 콜레버가 한창이다. 이에 따른 결과는 극심한 혼란이다. 실망과 분노가 판을 친다. 이런 시대일수록 진실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것일수록 더욱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는 그저 혼탁해진 흙탕물이 맑은 물로 정화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무성한 말들이 오히려 더 혼탁을 부를것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언어가 절제되는 지혜로운 시기여야 할 것이다.
*안식년 선교지 방문 마지막 일정으로 일본에 들어와 있다. 임장백 선교사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주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섬세한 손길을 만끽 중이다. 어제는 후쿠오카에서 “노조미가 오카 그리스도 교회(직역하면 소망의 언덕 교회)”를 섬기시는 김민구 선교사님 사역지를 방문하고 교제했다. 교토에서 후쿠오카를 오가며, 좀 더 치밀하게 동선을 구성했었더라면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래도 김민구(김수경) 선교사님을 처음뵙고 교제하며 이렇게라도 만나뵐 수 있는 감사가 넘쳤다. 주님을 위하여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곳에서 묵묵히 섬기시는 선교사님들의 성실함이 나의 달려갈 목회 여정에도 큰 빛이 되었다. 여정과 비용에 큰 부담이 되었고 몸은 피곤하지만 참으로 후쿠오카를 방문한 것은 잘한 결정이라고 내 자신에게 칭찬해주었다.
*8만이 넘는 우상의 나라, 겉으로 보이게 친절하나, 철저히 메뉴얼로 움직이기에 일말의 유연성도 허락하지 않는 일종의 차가움이 공존하는 나라…어제 하루를 보내며 이런 저런 체감이 확연하게 드는 시간들이었다. 확실히 선교지는 “가보면 안다”
*한편으로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일본의 교통비였다. 교토에서 후쿠오카 왕복 신칸센 운임은 상식을 초월했다. 웬만한 거리의 항공료를 뛰어넘었다. 말이 안되는 금액이었다. 선교사님과 대화중에 그렇게 오래도록 일본에서 사역했으나 현재 주거지 근처에만 주로 계셨다는 이유가 교통비 때문이라는 말에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제 하루 톡톡히 실감됐다. 이런 환경 속에서 고분분투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사역이 참으로 도전되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교통체계와 비용이 참 감사했다. 철도, 대중교통은 절대로 민영화 하면 안되는 것을 실감했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사사 돌라와 야일 그리고 입다의 등장 배경 [사사기 10:1-18]
아비멜렉 사후에 ‘돌라(잇사갈 지파)’가 사사로 세워져 에브라임 산간지방 사밀에서 23년 동안 활동했다. ‘야일(길르앗 사람/므낫세 지파)’은 22년 동안 사사로 활동했고, 길르앗에 ‘하봇야일(야일의 촌락들)’을 형성하며 살았다.
그리고 입다가 사사로 세워지기 전, 그의 출현 배경을 먼저 설명한다. 극심한 종교적 타락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요단 동편 길르앗 지역에서 시작된 암몬 족속의 억압이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역까지 확대된다. 무려 18년 동안의 압제였다. “그때에야(새번역_10절)”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시며, 자신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긴 백성에게 신물이 나셨음을 드러내신다. “지금 너희가 선택한 신들에게나 부르짖고 구원해 달라고 하라(13-14절)”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장 자신들의 죄악을 인정하며 “그러나 오늘만은 우리를 구출하여 주십시오(새번역_15절)”라고 간청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섬겼던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주님만 섬기겠노라고 행동으로 옮긴다. 이 모습을 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고만 계실 수 없었다(새번역_16절).
하지만 겉모습은 그렇게 변했을지 몰라도, 오랜 세월 하나님을 떠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백성과 지도자들은 “누가 먼저 암몬과 싸우겠는가? 그 사람이 길르앗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라고 외친다(17-18절).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으나 끝까지 신뢰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계획으로 암몬을 물리치려 한다. 이처럼 변화는 참 어려운 것이다.
1. 점점 더 무너져 가는 이스라엘(1-5절)
돌라와 야일에 대한 기록은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무난하게 사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역은 그렇게 했더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로서 과연 합당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먼저 ‘돌라’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분명한 업적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잇사갈 지파’ 사람이었음에도 ‘에브라임 지파의 산지 사밀’에서 거주하다 그곳에 묻힌다(1-2절). 각기 지파별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이 분명히 있는데, 그는 왜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서, 그것도 산지에서 살았을까? 사사기 후반부에 등장하는, 하나님께 분배받은 땅을 이방 민족에게 빼앗기고 자신들이 거주할 땅을 찾아 나선 ‘단 지파’ 이야기를 예고하는 듯하다.
반면 ‘야일’은 사사로서의 업적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단지 아들 30명을 두었고, 그들이 어린 나귀 30마리를 탔으며, 30개의 성읍(하봇야일_야일의 마을들)을 가졌다고 기록한다. 마치 기드온처럼 많은 부인을 두고, 왕이 누릴 법한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렸음을 암시한다. 특히 사사들 중에서 성읍을 소유하였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돌라는 분배받은 기업을 떠나 살았고, 야일은 하나님의 땅을 자기 것인 양 소유하고 축재하며 살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사사”였다. 혹자는 이들의 사사로서의 업적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항변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사사기 저자는 그들의 삶을 축약하면서 사사로서의 업적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았는가?’에 더 초점을 두었을 수도 있겠다. 돌라와 야일은 사사로서 특출한 업적이 없다. 그만큼 평안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가장 성실하게 지켜져야 할 “가나안 땅” 분배의 의미, 즉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주인이시며 어느 곳이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따라 살겠노라 선언하였던 가나안 땅 정복 전쟁 초입의 “세겜 언약”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맞게, 상황에 따라, 자신의 지위(직분)에 걸맞은 스스로의 기준을 따라 삶의 열매를 남겼다. 내가 생각하는 삶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맺힌 열매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다음 세대가 산다!
1. 사사 ‘입다’의 등장 배경(6-18절)
입다가 등장하는 시대는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활동하던 시기와 비교하여 분명한 변화가 있었음을 먼저 언급한다. 그것은 사사기의 전형적인, 하나님을 떠난 징조인 “다시(또)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을 저질렀다”는 고발이다. 더욱이 구체적인 죄의 대상인 우상이 바알과 아스다롯에 국한되지 않고 확대되었다. 죄는 반드시 전염되고 불어난다. 영향력은 축소되지 않는다. 확대 재생산된다.
먼저 우상의 종류가 그저 바알 신들과 아스다롯에 머문 것이 아니라, 아람(시리아)과 시돈(가나안 북부)의 신들, 모압과 암몬(가나안 동부), 블레셋(가나안 남서 해안) 사람의 신들을 섬겼다고 기록한다. 가나안 땅을 중심에 놓고 사방의 이방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거침없이 따라 섬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새번역_7절)”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셨다.
지리적으로 보면 동쪽과 서쪽 양쪽에서 이스라엘을 핍박하게 하신 것이다. 무려 18년 동안이나 말이다. 그런데 18년 동안 억압하고 학대당한 일을, 암몬 족속이 요단강 동쪽 길르앗 지방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한다. 블레셋의 억압은 향후 삼손을 통해 일하실 것이다(13:1).
또 암몬 족속의 억압은 단지 요단 동편에 머문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너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파가 분배받은 가나안 중앙에서 남단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어 그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7-9절).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9절).” “곤고(야차르)”는 “매다, 갑갑하다, 비좁다, 곤란하다”라는 뜻이다. 매우 쓰라린 고통 중에 있음을 드러낸다.
특히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파는 남서쪽의 블레셋과 요단 동편에서 침략하는 암몬 족속의 억압을 함께 받아 그 고통이 배나 되었기에 더욱 그랬다. 개역개정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10절은 ‘그때에야(새번역)’로 시작해도 무방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그때에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 기간이 18년이나 지난 “그때에야” 부르짖었다.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있을 때 누린 45년의 평화 이후에 18년 동안 하나님 목전에서 우상을 섬기다가, 암몬 족속에게 심한 곤고를 당한 “그때에야”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슬프셨다. 벌써 몇 번째인가? 너무도 괴로우셨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곧바로 구원을 행하시지 않는다. 출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사사들을 세워 구원하여 주셨던 것을 먼저 상기시키신다(11-12절). 그리고는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13절). 너희가 그토록 섬긴 이방 신들에게 가서 구해 달라고 하라(14절)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들이 18년 동안 섬겨 오던 이방 신상들을 깨뜨리며 “오직 주님만 우리를 구하실 수 있으니 구해 주십시오!” 매달리는 이스라엘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근심(고심)하지 않을 수 없으셨다(15-16절).
*염치 불고하고 이 길밖에 없음을 외치며 우상을 제거하는 모습이 하나님을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방으로 둘러싼 이방 우상들을 애초에 쫓아냈어야 했다. 애초에 진멸했어야 했다. 자초한 곤고함에 하나님의 고민이 깊어 간다.
나는?
-사사 돌라와 야일은 아비멜렉의 폭정이 가져온 위기와 혼란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45년 동안 안정된 통치를 이룬다(1~5절). 하지만 다른 사사들과 달리 3대에 걸쳐 돌라의 가문이 소개되고, 야일의 아들들이 어린 나귀를 타며 성읍을 소유하는 모습은, 기드온 가문에서 대두된 ‘통치 세습’의 문제가 끝나지 않았고 그들이 ‘부와 권력’을 지향하는 지도자임을 암시한다. 오히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조건에서도 자발적인 가난과 그로 인한 불편함을 자청하며, 물질이 우상이 된 이 세상 방식대로 살지 않아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사사 돌라가 다스릴 때 이스라엘이 누린 평화는 고작 23년이었다. 타락이 반복되고 심해질수록 그들이 누린 평화의 기간은 짧아졌다. 사사 야일은 아들 30명에 나귀 30마리, 성읍 30개를 가졌다. 그가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마치 기드온 시대를 연상하게 한다. 이는 하나님이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권력 집중이었다.
-이스라엘의 고질병은 어김없이 터졌다. 여호와를 버리고 참 많은 신들을 섬겼다. 여호와는 그 수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 하나님은 그들을 파셨다. 18년 동안이나 그들의 고통에 침묵하셨다. 암몬은 강성해졌고 이스라엘은 악화되었다. 그들이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을 버리고 섬기지 않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다(6~9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떠나 더 많은 우상들을 섬기면 더 자유롭고 더 풍요로울 줄 알았는데, 도리어 더 비참한 이방의 노예가 되어 곤고함이 더할 뿐이다. 하나님을 밀어내고 이방의 헛된 우상들(신 7:4)을 섬기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더욱 가중된다. 하나님은 가나안의 물질적인 풍요와 쾌락의 달콤함 때문에 자신들의 구원자도, 성민이라는 신분도, 제사장 나라의 사명도 모두 망각한 그들을 향해 분노하신다(17~18절). 하지만 그 불타는 분노가 질투하시는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전부를 드리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은 것이 주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다시” 악을 행한 이스라엘을 향해 ‘다시는’ 구원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시지만, 자기 백성이 처한 곤경을 외면하지 못하신다(10~16절). 번번이 잘못을 뉘우쳤다가 또다시 죄를 범하는 백성이지만, 못난 자식을 둔 아비처럼 또 받아 주시고 들어주신다. 하지만 용서하신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돌아와 관계를 회복하기 전에는 용서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빠른 구원을 바랐지만, 하나님은 더 진실한 회개를 바라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자신들이 범죄하였다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고 실토한다. 그리고 구원을 호소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택한 신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이방 신들을 제거한 후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마음에 근심하신다. 기억해야 한다. 회개 공식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만이 여호와를 움직인다.
-명백하다.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있을 때의 평화는, 하나님만 온전히 섬길 때 그 백성의 삶이 얼마나 평탄한가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원하는 왕이 없어도 평화로울 수 있음을 알게 하신다.
-돌라와 야일의 업적이 없는 것은 도리어 그만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분명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돌라가 분배받은 땅이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에 거하며 살다가 죽어서도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은, 그 평화가 제한된 평화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 야일의 “왕 같은 삶”을 보면,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신 평화를 누리면서도 다시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다 간 사사의 모습이어서 씁쓸하다. 기드온이 이렇게 살다가 아비멜렉이 출현하지 않았던가!
-자녀들에게 풍족한 삶을 남겨 주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남겨 주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넘치도록 풍성한 삶은 아비멜렉과 같은 이단아를 낳을 수도 있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들어 다시 이방 우상들에게로 넘어가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평화로움도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누릴 때 변질되지 않는다.” 지키라 하신 명령을 꿋꿋하게 지켜 살아낼 때, 지금 누리는 평화가 다음 세대에게도 평화가 된다. 나의 자녀들에게 남겨 줄 세상이 지금 내가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사는가에 따라 그 향방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입다가 사사로 세워지기 전, 그의 출현 배경을 먼저 설명한다. 극심한 종교적 타락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요단 동편 길르앗 지역에서 시작된 암몬 족속의 억압이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역까지 확대된다. 무려 18년 동안의 압제였다. “그때에야(새번역_10절)”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시며, 자신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긴 백성에게 신물이 나셨음을 드러내신다. “지금 너희가 선택한 신들에게나 부르짖고 구원해 달라고 하라(13-14절)”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장 자신들의 죄악을 인정하며 “그러나 오늘만은 우리를 구출하여 주십시오(새번역_15절)”라고 간청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섬겼던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주님만 섬기겠노라고 행동으로 옮긴다. 이 모습을 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고만 계실 수 없었다(새번역_16절).
하지만 겉모습은 그렇게 변했을지 몰라도, 오랜 세월 하나님을 떠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백성과 지도자들은 “누가 먼저 암몬과 싸우겠는가? 그 사람이 길르앗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라고 외친다(17-18절).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으나 끝까지 신뢰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계획으로 암몬을 물리치려 한다. 이처럼 변화는 참 어려운 것이다.
1. 점점 더 무너져 가는 이스라엘(1-5절)
돌라와 야일에 대한 기록은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무난하게 사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역은 그렇게 했더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로서 과연 합당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먼저 ‘돌라’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분명한 업적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잇사갈 지파’ 사람이었음에도 ‘에브라임 지파의 산지 사밀’에서 거주하다 그곳에 묻힌다(1-2절). 각기 지파별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이 분명히 있는데, 그는 왜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서, 그것도 산지에서 살았을까? 사사기 후반부에 등장하는, 하나님께 분배받은 땅을 이방 민족에게 빼앗기고 자신들이 거주할 땅을 찾아 나선 ‘단 지파’ 이야기를 예고하는 듯하다.
반면 ‘야일’은 사사로서의 업적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단지 아들 30명을 두었고, 그들이 어린 나귀 30마리를 탔으며, 30개의 성읍(하봇야일_야일의 마을들)을 가졌다고 기록한다. 마치 기드온처럼 많은 부인을 두고, 왕이 누릴 법한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렸음을 암시한다. 특히 사사들 중에서 성읍을 소유하였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돌라는 분배받은 기업을 떠나 살았고, 야일은 하나님의 땅을 자기 것인 양 소유하고 축재하며 살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사사”였다. 혹자는 이들의 사사로서의 업적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항변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사사기 저자는 그들의 삶을 축약하면서 사사로서의 업적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았는가?’에 더 초점을 두었을 수도 있겠다. 돌라와 야일은 사사로서 특출한 업적이 없다. 그만큼 평안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가장 성실하게 지켜져야 할 “가나안 땅” 분배의 의미, 즉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주인이시며 어느 곳이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따라 살겠노라 선언하였던 가나안 땅 정복 전쟁 초입의 “세겜 언약”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맞게, 상황에 따라, 자신의 지위(직분)에 걸맞은 스스로의 기준을 따라 삶의 열매를 남겼다. 내가 생각하는 삶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맺힌 열매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다음 세대가 산다!
1. 사사 ‘입다’의 등장 배경(6-18절)
입다가 등장하는 시대는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활동하던 시기와 비교하여 분명한 변화가 있었음을 먼저 언급한다. 그것은 사사기의 전형적인, 하나님을 떠난 징조인 “다시(또)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을 저질렀다”는 고발이다. 더욱이 구체적인 죄의 대상인 우상이 바알과 아스다롯에 국한되지 않고 확대되었다. 죄는 반드시 전염되고 불어난다. 영향력은 축소되지 않는다. 확대 재생산된다.
먼저 우상의 종류가 그저 바알 신들과 아스다롯에 머문 것이 아니라, 아람(시리아)과 시돈(가나안 북부)의 신들, 모압과 암몬(가나안 동부), 블레셋(가나안 남서 해안) 사람의 신들을 섬겼다고 기록한다. 가나안 땅을 중심에 놓고 사방의 이방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거침없이 따라 섬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새번역_7절)”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셨다.
지리적으로 보면 동쪽과 서쪽 양쪽에서 이스라엘을 핍박하게 하신 것이다. 무려 18년 동안이나 말이다. 그런데 18년 동안 억압하고 학대당한 일을, 암몬 족속이 요단강 동쪽 길르앗 지방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한다. 블레셋의 억압은 향후 삼손을 통해 일하실 것이다(13:1).
또 암몬 족속의 억압은 단지 요단 동편에 머문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너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파가 분배받은 가나안 중앙에서 남단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어 그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7-9절).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9절).” “곤고(야차르)”는 “매다, 갑갑하다, 비좁다, 곤란하다”라는 뜻이다. 매우 쓰라린 고통 중에 있음을 드러낸다.
특히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파는 남서쪽의 블레셋과 요단 동편에서 침략하는 암몬 족속의 억압을 함께 받아 그 고통이 배나 되었기에 더욱 그랬다. 개역개정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10절은 ‘그때에야(새번역)’로 시작해도 무방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그때에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 기간이 18년이나 지난 “그때에야” 부르짖었다.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있을 때 누린 45년의 평화 이후에 18년 동안 하나님 목전에서 우상을 섬기다가, 암몬 족속에게 심한 곤고를 당한 “그때에야”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슬프셨다. 벌써 몇 번째인가? 너무도 괴로우셨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곧바로 구원을 행하시지 않는다. 출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사사들을 세워 구원하여 주셨던 것을 먼저 상기시키신다(11-12절). 그리고는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13절). 너희가 그토록 섬긴 이방 신들에게 가서 구해 달라고 하라(14절)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들이 18년 동안 섬겨 오던 이방 신상들을 깨뜨리며 “오직 주님만 우리를 구하실 수 있으니 구해 주십시오!” 매달리는 이스라엘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근심(고심)하지 않을 수 없으셨다(15-16절).
*염치 불고하고 이 길밖에 없음을 외치며 우상을 제거하는 모습이 하나님을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방으로 둘러싼 이방 우상들을 애초에 쫓아냈어야 했다. 애초에 진멸했어야 했다. 자초한 곤고함에 하나님의 고민이 깊어 간다.
나는?
-사사 돌라와 야일은 아비멜렉의 폭정이 가져온 위기와 혼란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45년 동안 안정된 통치를 이룬다(1~5절). 하지만 다른 사사들과 달리 3대에 걸쳐 돌라의 가문이 소개되고, 야일의 아들들이 어린 나귀를 타며 성읍을 소유하는 모습은, 기드온 가문에서 대두된 ‘통치 세습’의 문제가 끝나지 않았고 그들이 ‘부와 권력’을 지향하는 지도자임을 암시한다. 오히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조건에서도 자발적인 가난과 그로 인한 불편함을 자청하며, 물질이 우상이 된 이 세상 방식대로 살지 않아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사사 돌라가 다스릴 때 이스라엘이 누린 평화는 고작 23년이었다. 타락이 반복되고 심해질수록 그들이 누린 평화의 기간은 짧아졌다. 사사 야일은 아들 30명에 나귀 30마리, 성읍 30개를 가졌다. 그가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마치 기드온 시대를 연상하게 한다. 이는 하나님이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권력 집중이었다.
-이스라엘의 고질병은 어김없이 터졌다. 여호와를 버리고 참 많은 신들을 섬겼다. 여호와는 그 수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 하나님은 그들을 파셨다. 18년 동안이나 그들의 고통에 침묵하셨다. 암몬은 강성해졌고 이스라엘은 악화되었다. 그들이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을 버리고 섬기지 않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다(6~9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떠나 더 많은 우상들을 섬기면 더 자유롭고 더 풍요로울 줄 알았는데, 도리어 더 비참한 이방의 노예가 되어 곤고함이 더할 뿐이다. 하나님을 밀어내고 이방의 헛된 우상들(신 7:4)을 섬기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더욱 가중된다. 하나님은 가나안의 물질적인 풍요와 쾌락의 달콤함 때문에 자신들의 구원자도, 성민이라는 신분도, 제사장 나라의 사명도 모두 망각한 그들을 향해 분노하신다(17~18절). 하지만 그 불타는 분노가 질투하시는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전부를 드리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은 것이 주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다시” 악을 행한 이스라엘을 향해 ‘다시는’ 구원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시지만, 자기 백성이 처한 곤경을 외면하지 못하신다(10~16절). 번번이 잘못을 뉘우쳤다가 또다시 죄를 범하는 백성이지만, 못난 자식을 둔 아비처럼 또 받아 주시고 들어주신다. 하지만 용서하신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돌아와 관계를 회복하기 전에는 용서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빠른 구원을 바랐지만, 하나님은 더 진실한 회개를 바라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자신들이 범죄하였다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고 실토한다. 그리고 구원을 호소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택한 신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이방 신들을 제거한 후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마음에 근심하신다. 기억해야 한다. 회개 공식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만이 여호와를 움직인다.
-명백하다.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있을 때의 평화는, 하나님만 온전히 섬길 때 그 백성의 삶이 얼마나 평탄한가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원하는 왕이 없어도 평화로울 수 있음을 알게 하신다.
-돌라와 야일의 업적이 없는 것은 도리어 그만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분명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돌라가 분배받은 땅이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에 거하며 살다가 죽어서도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은, 그 평화가 제한된 평화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 야일의 “왕 같은 삶”을 보면,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신 평화를 누리면서도 다시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다 간 사사의 모습이어서 씁쓸하다. 기드온이 이렇게 살다가 아비멜렉이 출현하지 않았던가!
-자녀들에게 풍족한 삶을 남겨 주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남겨 주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넘치도록 풍성한 삶은 아비멜렉과 같은 이단아를 낳을 수도 있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들어 다시 이방 우상들에게로 넘어가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평화로움도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누릴 때 변질되지 않는다.” 지키라 하신 명령을 꿋꿋하게 지켜 살아낼 때, 지금 누리는 평화가 다음 세대에게도 평화가 된다. 나의 자녀들에게 남겨 줄 세상이 지금 내가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사는가에 따라 그 향방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아비멜렉의 최후 [사사기 9:46-57]
요담의 저주가 성취되었다. 아비멜렉은 가알의 농간에 넘어간 세겜 사람들을 진멸하고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렸다. 세겜 망대에 피해 있던 나머지 주민들은 엘브릿 신전의 보루(은밀한 곳)로 피신했다. 하지만 아비멜렉은 그 보루의 입구에 불을 질러 천 명을 몰살시켰다. 이복형제 70명을 몰살시키며 왕에 오른 그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세겜 사람들마저 진멸한 것이다(46-49절).
세겜 사람들의 불의함에 대해 요담이 선포한 대로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20절)” 하신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아비멜렉의 불이 세겜을 불살랐다.
아비멜렉의 분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세겜과 동맹 관계였던 데베스까지 공격한다. 데베스 주민들은 밀리고 밀려 “어느 견고한 망대”로 도망하여 결사 항전을 벌였다. 아비멜렉은 여기에서도 주민들이 가득 피신해 있는 망대를 불사르려고 했다. 그때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던져 두개골을 깨뜨린다. 여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치욕을 견딜 수 없어, 그는 무기를 든 청년에게 자신을 찔러 죽이라고 하여 최후를 맞이했다. 아비멜렉을 따라 세겜을 몰살하고 데베스를 살육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광기가 비로소 멈췄다(50-55절).
1. 갚으셨고, 갚으셨으니(56-57절)
사사기 저자는 이 일에 대하여 분명한 해석을 내린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자기 형제 일흔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저지른 죄의 값을 이렇게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죄악도 그들에게 모두 갚으셨다.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이렇게 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새번역_56-57절).” “하나님께서 이같이 갚으셨고… 갚으셨으니”라고 분명하게 기록한다. 아비멜렉의 악행을 갚으셨고, 세겜 사람들의 악행을 갚으셨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바울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이 점을 분명하게 일깨웠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7-9).” 나의 삶이 하나님의 때에 심판으로 갚음받는 인생이 아니라, 선을 행하여 은혜의 열매를 거두는 삶이 되기를 결심해 본다. 지금 당장의 명분과 이익을 따라 세겜 사람들처럼 “진실과 의로움”과는 상관없는 선택을 할 때 그것이 어떤 열매로 나타나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으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의를 붙들고 붙들어야 산다!
2. 파멸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아비멜렉은 바알브릿 보루에 피신한 세겜 사람들에 대하여 “내가 하는 것을 보았으니, 너희도 빨리 그대로 하여라(새번역_48절)” 말하며 나무를 찍어다 쌓았다. 백성들은 “아비멜렉을 따라” 나무를 찍어 쌓고 불을 질러 천 명을 죽인다. 형제 70명을 살해했던 아비멜렉은 이제 세겜 사람들을 몰살하는 데 거침이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백성들은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데베스를 점령할 때도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그 주민들은 싸울 능력도 없었다. 그저 “견고한 망대”로 도망가 문만 걸어 잠글 뿐이었다. 어떤 군사적인 대항도 없었기에 아비멜렉은 망대 밑으로 직접 가서 불사르려고 했던 것이다. 방패를 든 자도 따르지 않았다. 주민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그의 두개골이 깨져 버렸다. 망대에서 던진 맷돌 위짝이었는데 즉사하지 않고 숨이 붙어 있었다.
또한 자신에게 돌을 던진 자가 “한 여인”이었고, 여인의 손에 죽을 수 없으니 죽여 달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의식이 또렷했음을 알 수 있다. 의식이 또렷했기에 자신의 명예를 위해 여인의 손에 죽는 치욕을 남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54절)” 이 치욕을 감당할 수 없어 병사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그가 생각한 것은 그저 “한 여인”에게 죽임당했다고 손가락질당할 자신뿐이었다.
그것이 치욕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어쩌면 맷돌에 맞아 두개골이 깨졌어도 숨이 남아 있을 때, 도리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봐야 했다. 요담이 그리심산에서 외쳤던 그 저주를 되돌아봐야 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선언하신 그 저주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자신을 돌아봐야 했다. 그래야 그나마 부끄러워도 “회개”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아비멜렉은 그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린다. 오직 자신의 이름과 명예만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마지막까지 자신의 권력에만 집착하고, 그 권력이 여자에 의해 무너지는 것만 두려워하다니. 마지막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 버릴 정도로 자기 권력에 취한 사람의 말로가 이렇다. “너희도 보았으니… 빨리 따라 하라(48절)”며 자신을 보고 따르라 했던 백성들이 본 그의 최후는, 두개골이 깨진 비참한 시신뿐이었다.
나는?
-세겜 망대 사람들은 잔인한 아비멜렉을 피해 가장 안전하다고 믿은 ‘신전의 보루’에 몸을 숨기지만, 결국 불에 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46~49절). 그들이 세운 지도자에 의해 몰살당하고, 그들이 그토록 따르던 신은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이것이 헛된 우상을 섬기고 불의한 자를 왕으로 옹립한 죄악에 대한 ‘참혹한 대가’였다. 이처럼 심판의 날에는 내가 의지하던 세상의 그 무엇도 나를 지켜 주지 못한다. 도리어 그것은 내 생명을 옭아매는 도구나 나를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피해 선택한 최후의 장소는 엘브릿 신전의 보루였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보호를 받으려고 신전의 은신처로 도망한 것이다. 아비멜렉은 보루에 불을 질러 그곳으로 피한 세겜 사람 약 천 명을 몰살한다. 세겜 사람들은 보호받으려고 들어간 신전 안에서,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세운 왕에게 불타 죽은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섬긴 바알도, 기드온을 배신하고 세운 아비멜렉도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요담의 저주는 곧 하나님의 저주였던 것이다.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은 그 여세를 몰아 ‘영토 확장’을 위해 데베스를 침공한다(50~55절).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데베스까지 침공한 것은 그의 잔학성과 야욕의 끝을 보게 한다. 하지만 자기 욕망 때문에 배반에 배반을, 살인에 살인을 거듭하던 아비멜렉이 무명의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허망하게 죽자, 그를 추종하던 무리도 뿔뿔이 흩어진다. 영원할 것 같던 악인의 위세와 철권통치가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그는 3년 동안(22절) 왕권에 취해 살다가 자기 가문과 함께 영원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사람이다. 내가 추구하고 또 성공이라고 칭송받는 것들이 하나님께도 의미가 있는 것인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한다.
-아비멜렉은 뚜렷한 이유와 명분 없이 전쟁을 확대했다. 세겜만이 아니라 주변의 데베스까지 점령하여 세력을 넓히려고 했다. 그의 폭력적인 본성 그대로였다. 데베스 사람들도 망대 꼭대기로 올라가 숨었지만, 아비멜렉은 세겜과 마찬가지로 불태워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망대를 불사르려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던져 그 머리를 부순다. ‘한 바위’에서 형제 70명을 죽이고 세겜 사람들 천 명을 몰살한 아비멜렉은, 결국 ‘한 여인’이 던진 ‘한 돌’에 맞아 죽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비멜렉을 심판하셨다.
-악인들의 악행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56~57절).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의 배반과 반역, 전쟁과 죽음은 모두 그들이 행한 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다. 그들에 대한 심판은 유예된 것일 뿐(3년, 22절) 철회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침묵이 악에 대한 묵인은 아니다.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시고, 인간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에 심판하신다. 이 땅에 여전히 악인이 득세하는 것도 즉각적인 보응이 없거나 용서를 경박하게 이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내가 죄에 눈감는다고 해서 하나님도 내 죄에 눈감으시는 것은 아니다. 축복이든 심판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실현된다.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고 외쳤던 요담의 질문에 답할 사람들이 모두 죽어 버렸다.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죽어 버렸다. 죽기 직전에라도 이 질문에 답했어야 했다. “내가 행한 것이 진실로 거짓되고 불의하다”고 고백했어야 했다.
*아비멜렉을 따르던 백성들은 요담의 호소가 어떻게 응답되는지 똑똑히 보았다. 세겜 사람들이 불과 연기에 죽어 가는 것도, 아비멜렉이 죽는 것도 보았다. 망대에 숨었다가 불에 타 죽은 이들도 보았고, 두개골이 깨지고 칼에 찔려 비참하게 죽은 아비멜렉의 시체도 보았다.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비참한 결말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과연 백성들이 이것을 보고도 요담의 말대로 행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을까?
*일어난 일을 보고 “무엇을 보는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아침이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 의해 망대로 쫓기고 바알브릿의 보루로 쫓길 때, 요담의 저주가 생각나야 했고 그때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들에게 남은 희망이 바알브릿의 보루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그들은 끝까지 바알만 바라보았다. 요담의 선포를 도무지 생각하지 못했다. 말씀이 잊힌 그들에게 남은 건 비참한 죽음뿐이었다. 말씀이 생각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아침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생각나게 하시는” 은혜가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세겜 사람들도 한 번에 무너지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까지 아주 짤막한 시간이 있었다. 아비멜렉도 마찬가지다. 최후의 순간 직전에 아주 짧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찰나의 시간은 “회개”의 기회였다. 염치없지만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할 순간이었다. 어쩌면 주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의 보루를 택했고, 아비멜렉은 자신의 명예를 택했다. 바알브릿이 자신들을 구해 주리라 믿었고, 쓸데없는 명예에 집착하여 회개의 기회를 날려 버렸다. 적어도 자신들이 행한 악행을 돌아보고, 자신이 저지른 죽음의 행보를 후회라도 했어야 했다.
*”아비멜렉이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다”
*사사기 9장은 결국 배신을 공모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공멸로 끝났다. 이 모든 것은 요담의 저주를 통해 들려주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단호하시다. 왕이라도 악을 행하면 보응하신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고 끝까지 자기 백성을 인도하신다. 하나님을 떠나 치르는 싸움은 끝을 알 수도 없고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다. 내가 바로 서지 못하면 가족과 공동체도 바로 설 수 없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서로 살리고 함께 사는 정결한 싸움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세겜 사람들의 불의함에 대해 요담이 선포한 대로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20절)” 하신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아비멜렉의 불이 세겜을 불살랐다.
아비멜렉의 분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세겜과 동맹 관계였던 데베스까지 공격한다. 데베스 주민들은 밀리고 밀려 “어느 견고한 망대”로 도망하여 결사 항전을 벌였다. 아비멜렉은 여기에서도 주민들이 가득 피신해 있는 망대를 불사르려고 했다. 그때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던져 두개골을 깨뜨린다. 여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치욕을 견딜 수 없어, 그는 무기를 든 청년에게 자신을 찔러 죽이라고 하여 최후를 맞이했다. 아비멜렉을 따라 세겜을 몰살하고 데베스를 살육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광기가 비로소 멈췄다(50-55절).
1. 갚으셨고, 갚으셨으니(56-57절)
사사기 저자는 이 일에 대하여 분명한 해석을 내린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자기 형제 일흔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저지른 죄의 값을 이렇게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죄악도 그들에게 모두 갚으셨다.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이렇게 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새번역_56-57절).” “하나님께서 이같이 갚으셨고… 갚으셨으니”라고 분명하게 기록한다. 아비멜렉의 악행을 갚으셨고, 세겜 사람들의 악행을 갚으셨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바울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이 점을 분명하게 일깨웠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7-9).” 나의 삶이 하나님의 때에 심판으로 갚음받는 인생이 아니라, 선을 행하여 은혜의 열매를 거두는 삶이 되기를 결심해 본다. 지금 당장의 명분과 이익을 따라 세겜 사람들처럼 “진실과 의로움”과는 상관없는 선택을 할 때 그것이 어떤 열매로 나타나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으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의를 붙들고 붙들어야 산다!
2. 파멸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아비멜렉은 바알브릿 보루에 피신한 세겜 사람들에 대하여 “내가 하는 것을 보았으니, 너희도 빨리 그대로 하여라(새번역_48절)” 말하며 나무를 찍어다 쌓았다. 백성들은 “아비멜렉을 따라” 나무를 찍어 쌓고 불을 질러 천 명을 죽인다. 형제 70명을 살해했던 아비멜렉은 이제 세겜 사람들을 몰살하는 데 거침이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백성들은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데베스를 점령할 때도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그 주민들은 싸울 능력도 없었다. 그저 “견고한 망대”로 도망가 문만 걸어 잠글 뿐이었다. 어떤 군사적인 대항도 없었기에 아비멜렉은 망대 밑으로 직접 가서 불사르려고 했던 것이다. 방패를 든 자도 따르지 않았다. 주민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그의 두개골이 깨져 버렸다. 망대에서 던진 맷돌 위짝이었는데 즉사하지 않고 숨이 붙어 있었다.
또한 자신에게 돌을 던진 자가 “한 여인”이었고, 여인의 손에 죽을 수 없으니 죽여 달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의식이 또렷했음을 알 수 있다. 의식이 또렷했기에 자신의 명예를 위해 여인의 손에 죽는 치욕을 남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54절)” 이 치욕을 감당할 수 없어 병사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그가 생각한 것은 그저 “한 여인”에게 죽임당했다고 손가락질당할 자신뿐이었다.
그것이 치욕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어쩌면 맷돌에 맞아 두개골이 깨졌어도 숨이 남아 있을 때, 도리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봐야 했다. 요담이 그리심산에서 외쳤던 그 저주를 되돌아봐야 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선언하신 그 저주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자신을 돌아봐야 했다. 그래야 그나마 부끄러워도 “회개”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아비멜렉은 그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린다. 오직 자신의 이름과 명예만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마지막까지 자신의 권력에만 집착하고, 그 권력이 여자에 의해 무너지는 것만 두려워하다니. 마지막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 버릴 정도로 자기 권력에 취한 사람의 말로가 이렇다. “너희도 보았으니… 빨리 따라 하라(48절)”며 자신을 보고 따르라 했던 백성들이 본 그의 최후는, 두개골이 깨진 비참한 시신뿐이었다.
나는?
-세겜 망대 사람들은 잔인한 아비멜렉을 피해 가장 안전하다고 믿은 ‘신전의 보루’에 몸을 숨기지만, 결국 불에 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46~49절). 그들이 세운 지도자에 의해 몰살당하고, 그들이 그토록 따르던 신은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이것이 헛된 우상을 섬기고 불의한 자를 왕으로 옹립한 죄악에 대한 ‘참혹한 대가’였다. 이처럼 심판의 날에는 내가 의지하던 세상의 그 무엇도 나를 지켜 주지 못한다. 도리어 그것은 내 생명을 옭아매는 도구나 나를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피해 선택한 최후의 장소는 엘브릿 신전의 보루였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보호를 받으려고 신전의 은신처로 도망한 것이다. 아비멜렉은 보루에 불을 질러 그곳으로 피한 세겜 사람 약 천 명을 몰살한다. 세겜 사람들은 보호받으려고 들어간 신전 안에서,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세운 왕에게 불타 죽은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섬긴 바알도, 기드온을 배신하고 세운 아비멜렉도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요담의 저주는 곧 하나님의 저주였던 것이다.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은 그 여세를 몰아 ‘영토 확장’을 위해 데베스를 침공한다(50~55절).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데베스까지 침공한 것은 그의 잔학성과 야욕의 끝을 보게 한다. 하지만 자기 욕망 때문에 배반에 배반을, 살인에 살인을 거듭하던 아비멜렉이 무명의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허망하게 죽자, 그를 추종하던 무리도 뿔뿔이 흩어진다. 영원할 것 같던 악인의 위세와 철권통치가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그는 3년 동안(22절) 왕권에 취해 살다가 자기 가문과 함께 영원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사람이다. 내가 추구하고 또 성공이라고 칭송받는 것들이 하나님께도 의미가 있는 것인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한다.
-아비멜렉은 뚜렷한 이유와 명분 없이 전쟁을 확대했다. 세겜만이 아니라 주변의 데베스까지 점령하여 세력을 넓히려고 했다. 그의 폭력적인 본성 그대로였다. 데베스 사람들도 망대 꼭대기로 올라가 숨었지만, 아비멜렉은 세겜과 마찬가지로 불태워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망대를 불사르려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던져 그 머리를 부순다. ‘한 바위’에서 형제 70명을 죽이고 세겜 사람들 천 명을 몰살한 아비멜렉은, 결국 ‘한 여인’이 던진 ‘한 돌’에 맞아 죽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비멜렉을 심판하셨다.
-악인들의 악행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56~57절).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의 배반과 반역, 전쟁과 죽음은 모두 그들이 행한 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다. 그들에 대한 심판은 유예된 것일 뿐(3년, 22절) 철회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침묵이 악에 대한 묵인은 아니다.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시고, 인간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에 심판하신다. 이 땅에 여전히 악인이 득세하는 것도 즉각적인 보응이 없거나 용서를 경박하게 이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내가 죄에 눈감는다고 해서 하나님도 내 죄에 눈감으시는 것은 아니다. 축복이든 심판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실현된다.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고 외쳤던 요담의 질문에 답할 사람들이 모두 죽어 버렸다.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죽어 버렸다. 죽기 직전에라도 이 질문에 답했어야 했다. “내가 행한 것이 진실로 거짓되고 불의하다”고 고백했어야 했다.
*아비멜렉을 따르던 백성들은 요담의 호소가 어떻게 응답되는지 똑똑히 보았다. 세겜 사람들이 불과 연기에 죽어 가는 것도, 아비멜렉이 죽는 것도 보았다. 망대에 숨었다가 불에 타 죽은 이들도 보았고, 두개골이 깨지고 칼에 찔려 비참하게 죽은 아비멜렉의 시체도 보았다.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비참한 결말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과연 백성들이 이것을 보고도 요담의 말대로 행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을까?
*일어난 일을 보고 “무엇을 보는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아침이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 의해 망대로 쫓기고 바알브릿의 보루로 쫓길 때, 요담의 저주가 생각나야 했고 그때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들에게 남은 희망이 바알브릿의 보루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그들은 끝까지 바알만 바라보았다. 요담의 선포를 도무지 생각하지 못했다. 말씀이 잊힌 그들에게 남은 건 비참한 죽음뿐이었다. 말씀이 생각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아침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생각나게 하시는” 은혜가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세겜 사람들도 한 번에 무너지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까지 아주 짤막한 시간이 있었다. 아비멜렉도 마찬가지다. 최후의 순간 직전에 아주 짧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찰나의 시간은 “회개”의 기회였다. 염치없지만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할 순간이었다. 어쩌면 주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의 보루를 택했고, 아비멜렉은 자신의 명예를 택했다. 바알브릿이 자신들을 구해 주리라 믿었고, 쓸데없는 명예에 집착하여 회개의 기회를 날려 버렸다. 적어도 자신들이 행한 악행을 돌아보고, 자신이 저지른 죽음의 행보를 후회라도 했어야 했다.
*”아비멜렉이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다”
*사사기 9장은 결국 배신을 공모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공멸로 끝났다. 이 모든 것은 요담의 저주를 통해 들려주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단호하시다. 왕이라도 악을 행하면 보응하신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고 끝까지 자기 백성을 인도하신다. 하나님을 떠나 치르는 싸움은 끝을 알 수도 없고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다. 내가 바로 서지 못하면 가족과 공동체도 바로 설 수 없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서로 살리고 함께 사는 정결한 싸움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배신이 배신을 불러왔다 [사사기 9:22-45]
요담이 담대하게 그리심산에서 나무 우화를 선포한 후 3년이 지나, 하나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의 사이를 틀어지게 하신다. 기드온(여룹바알)을 배신한 아비멜렉을 세겜 사람들이 배신한다. 배신을 배신으로 갚게 하신다. 끊이지 않는 살육이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죄의 값을 물으시는 심판이 시작된 것이다.
아비멜렉은 형제들의 핏값을 치르고 3년 동안 왕과 같은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인을 결코 형통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분이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24절은 “갚되… 돌아가게 하심이라(갚으신 것이다)”라는 형식으로, 아비멜렉의 포악함과 그것을 묵인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를 지지한 세겜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분명한 이유를 말씀해 주신다. “…포학한 일을 갚되 …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 그의 형제들을 죽이게 한 세겜 사람들(에게로)…”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어떻게 갚으시는가?
1. 배신은 배신으로(22-29절)
세겜 사람들에게 들어간 “하나님께서 보낸 사악한 영(23절)”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서로 “배반”하게 만들었다. 그 구체적인 경위가 25절부터 설명된다. 먼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괴롭히려고 산마다 매복을 시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강탈하려 하였다(25절). 즉, 아비멜렉의 통치에 불안을 야기하는 것이다. 아비멜렉은 이런 소식을 들으면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또 에벳의 아들 가알이 자기 친족들과 더불어 세겜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그리고 이내 신망을 얻게 된다. 이후 때마침 추수 때가 되어 세겜 사람들은 추수의 기쁨으로 포도주를 만들어 잔치를 베푼다. 신전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하였다고 기록한다. 세겜 사람들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선 것이다. 가알은 이 틈을 타 세겜 사람들을 선동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세겜 백성을 통솔할 권한을 주면 아비멜렉을 처단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선전포고를 하고 만다.
*세겜 사람들의 배신은 의외다. 그러나 놀랄 일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영을 보내셨기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길을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지 않으신다면 결코 평안의 길을 갈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거역하는 방법은 3년 전 아비멜렉이 자신들의 신전의 돈으로 산 ‘비류들’이 한 행동과 다를 바 없다. 악한 영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이토록 추해지고 비겁해져도 깨닫지 못한다.
*세겜 사람들은 여전히 바알브릿 신전에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과 벗하여 즐긴다. 추수 때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키라고 하신 봄의 맥추절(오순절), 혹은 가을의 수장절의 시기와 맞닿아 있는데,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신전에서 방탕하며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수확의 기쁨을 허비한다. 여기에 자신들이 섬기는 아비멜렉을 저주하며 수확의 기쁨을 누린다. 이제 곧 심판받을 줄도 모른 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방자히 행하고 있다.
2. 70명의 형제들도 죽였는데… 배신자들쯤이야…(30-45절)
가알과 세겜 사람들의 투쟁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비멜렉에게 속한 “스불” 장군의 계략으로 세겜은 아비멜렉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포기할 줄 모르는 아비멜렉의 잔인함은 세겜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그 땅에 소금을 뿌려 버린다. 아예 삶의 거처로 삼지 못하도록 죽음의 땅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아비멜렉의 포악함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가알의 선동에 화가 난 스불의 말을 따라 지체하지 않고 밤에 세겜으로 출정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가알이 성문을 나서자 그 틈을 타 가알과 세겜 사람들을 단번에 제압해 버린다. “많은 사상자가 성문 앞까지 널렸(40절)”지만 아비멜렉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다음 날 세겜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그날 종일 그 성읍 사람들과 싸워서 그 성읍을 점령하였다. 그는 성읍 안에 있는 백성을 죽이고 나서, 성읍을 헐고, 거기에 소금을 뿌렸다(새번역_45절)” 세겜 사람들의 배신을 피로 갚는다.
아비멜렉은 멈출 줄 모르는 피의 폭주 기관차다. 멈출 줄 몰랐기에 멈춰야 할 때도 분간하지 못한 것이다. 배신이 배신을 낳고 또 배신을 잉태한다. 소름 끼치도록 악의 화신이 되어 버린 아비멜렉, 그리고 그를 따르는 병사들… 하나님 나라 백성끼리 서로 죽이면서, 하나님께서 제사장 나라로 세우신 뜻이 여지없이 짓밟히고 만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하나님 나라에는 배신과 배신, 피의 향연만 넘칠 뿐이었다.
*죄악이 죄악을 부른다.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을 배신하고 형제들을 배신하며 그 자리를 차지했는데, 자신이 썼던 바로 그 방법으로 세겜 사람들에게 배신당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결코 좌시하지 않으신다. 죄를 반드시 물으신다. 지금 당장 어떤 도전이 없다고 이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범죄함에 대하여 무덤덤해지는 것은 이미 사탄의 궤계에 걸려든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유유상종”일까… 아비멜렉이나 세겜 사람들이나, 가알이나, 스불이나 도긴개긴이다. 더 나아가 서로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듯하다. 스불은 아비멜렉과, 가알은 세겜 사람들과 죽이 잘 맞는다. 서로 마음을 모아 상대를 죽이고 억압하는 데 뜻을 모은다. 하나님 나라 백성답지 않다.
*억압하고 죽이는 것에 몰두하는 지도자를 잘 판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의 지도자든 국가의 지도자든, 백성을 살리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 넘어뜨리고, 짓밟고, 무시하며, 외면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상식에 맞고 정의와 법도를 존중하는 리더를 분별하여 선택해야겠다.
나는?
-악한 영을 악인들 가운데 보내셔서 서로 배반하게 하신다(22~24절). ‘진실과 의로움(16절)’이 없는 악인들의 불의한 연합과 연대가 무너진 것은 예언의 성취(20절)이자 ‘하나님의 보응’이다. 아무리 악이 위세를 떨치고 의와 진실이 무너진 듯 보여도, 모든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까지만 허용된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악인들에게 오늘의 번영은 위장된 심판일 뿐이다. 그러니 불의한 성공을 부러워하지 말고 의로운 패배에 절망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아비멜렉의 통치 3년이 지나자 세겜의 반(反)아비멜렉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급기야 산꼭대기마다 매복하여 지나는 사람들의 것을 강탈하는 불법을 자행한다. 그런데 이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보내신 악한 영이 있었다. 즉, 일부의 일탈 행위가 아니라 아비멜렉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배반은 반역으로 나타났다(25~29절). 반역의 주모자는 세겜 출신 가알이었다. 술에 취한 가알은 아비멜렉의 왕권을 비난하고 비하하며, 세겜인들이 자신의 뜻을 따라준다면 그를 몰아낼 수 있다고 장담한다. 하지만 호기 어린 허세였을 뿐, 그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줄행랑을 친다(39~41절).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 사라지면 우리도 잠깐 있다 사라지는 눈앞의 권력 앞에서 비굴해지거나, 밥줄을 움켜쥔 세상의 눈치를 보며 비겁한 기회주의자처럼 처신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없다.
-첩의 아들 아비멜렉에게 쉽게 동조하여 반역을 지지했던 세겜이, 이제 다시 종의 아들 가알을 지지하여 아비멜렉에게 저항하려고 한다. 가알은 아비멜렉에게 정통성이 없음을 강조하여, 그를 치려 하는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 한다. 아비멜렉처럼 가알도 상대방을 비난하여 지지세를 확보한 것이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이용한 방법으로 저항을 받게 된다.
-스불은 아비멜렉에게 반역의 상황은 물론 대응 전략까지 알려 준다. 이전에는 세겜인들이 아비멜렉을 해하려고 매복하더니(25절), 지금은 아비멜렉이 세겜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매복한다(30~40절). 서로 골육지친이라 부르며 의기투합하던 그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칼을 겨눈다. 의와 진실이 없다면, 즉 하나님 나라와 그 뜻에 어긋난다면, 동맹도 우정도 영원하지 못하며 오늘의 충성이 내일의 배반과 변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아비멜렉은 가알을 공격하고 스불의 도움을 받아 가알을 쫓아낸다. 그러고는 자신을 배신한 세겜을 공격하여 그 백성을 죽이고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린다. 그들은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처단한다. 세겜은 불의한 세력에 동조하여 억울한 목숨을 죽인 대가로, 한때는 자신들이 세운 왕이었던 아비멜렉을 통해 심판을 받는다. 악과 범죄로 맺어진 관계의 말로가 이렇다.
-아비멜렉은 반역의 주동자를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배반한 세겜 성을 철저히 응징하여 또다시 반역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초토화한다(41~45절). 한때 왕으로 추대하던 자들을 향한 잔혹한 보복이다. 이처럼 누군가를 이용하는 관계의 끝에는 비극적인 피의 보복과 파멸만이 남을 뿐이다.
-아비멜렉의 시대에도 이미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백성들의 천태만상이 펼쳐진다. 아비멜렉이 불의하고 교묘하게 왕이 된 지 3년 만에 세겜 사람들이 배신한다. 세겜 사람들이 산에 숨어 있다가 지나는 사람들을 공격한 것이다. 아비멜렉을 속이며 자기 마음대로 불법을 행했다는 것이다. 당시 사회에 공의가 무너졌다는 의미다. 또 세겜 사람들은 ‘가알’이라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그는 세겜 정통주의를 들먹이며 아비멜렉이 세겜과 관련이 없는 존재임을 부각하려 했다. 배반이 배반을 싹틔우고 또 다른 배반을 맺는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 의해 죽임당한 형제들의 피를 기억하신다. 그의 폭력을 또렷하게 기억하신다. 그와 공모했던 세겜 사람들도 벌하시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악령은 지체하지 않고” 목적을 이루어 간다. 악한 영은 머뭇거림 없이 세겜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갔고, 그들은 이내 산을 차지하고 지나는 백성들을 노략한다. 삼 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리신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아비멜렉의 돌이킴을 기다리는 시간이었을 수 있다.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참 어렵다. 쉽게 얻은 마음은 쉽게 떠날 수 있음을 각성하게 된다. 돈으로, 힘으로 살 수 있는 마음의 유통기한은 짧다. 진짜 마음은 꾸준하게 마음을 줄 때 얻을 수 있다.
-혼란한 시대의 특징은 혼탁한 인물들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아비멜렉을 이어 등장한 가알은 아비멜렉 반역의 근거지였던 세겜의 신뢰를 얻고 아비멜렉을 배반하도록 충동질했다. 이 과정에서 순수한 혈통을 내세웠고, 귀가 얇은 세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결국 세겜의 친아비멜렉계 사람들이 가알에게로 돌아선다. 어쩌면 세겜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지도자를 세웠으니 지도자를 교체하는 것도 자기 손에 달렸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들에게 왕(지도자)은 하나님께 권한을 위임받아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는 자가 아니었다. 자기들의 이기적인 관심사에 부합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아무리 끈끈하다 해도 하나님이 배제된 연합은 영원하지 않다. 세겜도, 가알도, 스불도, 아비멜렉도 자신을 위해 하나님 없는 자기 길을 걸었다.
-사람들은 이용당할 줄 알면서 손을 잡고, 책임질 수 없으면서도 호언장담을 일삼는다. 이런 관계는 언제든지 틀어질 수 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탄탄하게 하고, 그것을 기초로 끝까지 믿고 따르는 공동체를 소망하는 아침이다. 얄팍하고 얕은 인간관계보다 깊고 넓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리라.
아비멜렉은 형제들의 핏값을 치르고 3년 동안 왕과 같은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인을 결코 형통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분이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24절은 “갚되… 돌아가게 하심이라(갚으신 것이다)”라는 형식으로, 아비멜렉의 포악함과 그것을 묵인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를 지지한 세겜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분명한 이유를 말씀해 주신다. “…포학한 일을 갚되 …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 그의 형제들을 죽이게 한 세겜 사람들(에게로)…”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어떻게 갚으시는가?
1. 배신은 배신으로(22-29절)
세겜 사람들에게 들어간 “하나님께서 보낸 사악한 영(23절)”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서로 “배반”하게 만들었다. 그 구체적인 경위가 25절부터 설명된다. 먼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괴롭히려고 산마다 매복을 시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강탈하려 하였다(25절). 즉, 아비멜렉의 통치에 불안을 야기하는 것이다. 아비멜렉은 이런 소식을 들으면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또 에벳의 아들 가알이 자기 친족들과 더불어 세겜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그리고 이내 신망을 얻게 된다. 이후 때마침 추수 때가 되어 세겜 사람들은 추수의 기쁨으로 포도주를 만들어 잔치를 베푼다. 신전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하였다고 기록한다. 세겜 사람들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선 것이다. 가알은 이 틈을 타 세겜 사람들을 선동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세겜 백성을 통솔할 권한을 주면 아비멜렉을 처단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선전포고를 하고 만다.
*세겜 사람들의 배신은 의외다. 그러나 놀랄 일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영을 보내셨기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길을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지 않으신다면 결코 평안의 길을 갈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거역하는 방법은 3년 전 아비멜렉이 자신들의 신전의 돈으로 산 ‘비류들’이 한 행동과 다를 바 없다. 악한 영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이토록 추해지고 비겁해져도 깨닫지 못한다.
*세겜 사람들은 여전히 바알브릿 신전에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과 벗하여 즐긴다. 추수 때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키라고 하신 봄의 맥추절(오순절), 혹은 가을의 수장절의 시기와 맞닿아 있는데,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신전에서 방탕하며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수확의 기쁨을 허비한다. 여기에 자신들이 섬기는 아비멜렉을 저주하며 수확의 기쁨을 누린다. 이제 곧 심판받을 줄도 모른 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방자히 행하고 있다.
2. 70명의 형제들도 죽였는데… 배신자들쯤이야…(30-45절)
가알과 세겜 사람들의 투쟁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비멜렉에게 속한 “스불” 장군의 계략으로 세겜은 아비멜렉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포기할 줄 모르는 아비멜렉의 잔인함은 세겜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그 땅에 소금을 뿌려 버린다. 아예 삶의 거처로 삼지 못하도록 죽음의 땅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아비멜렉의 포악함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가알의 선동에 화가 난 스불의 말을 따라 지체하지 않고 밤에 세겜으로 출정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가알이 성문을 나서자 그 틈을 타 가알과 세겜 사람들을 단번에 제압해 버린다. “많은 사상자가 성문 앞까지 널렸(40절)”지만 아비멜렉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다음 날 세겜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그날 종일 그 성읍 사람들과 싸워서 그 성읍을 점령하였다. 그는 성읍 안에 있는 백성을 죽이고 나서, 성읍을 헐고, 거기에 소금을 뿌렸다(새번역_45절)” 세겜 사람들의 배신을 피로 갚는다.
아비멜렉은 멈출 줄 모르는 피의 폭주 기관차다. 멈출 줄 몰랐기에 멈춰야 할 때도 분간하지 못한 것이다. 배신이 배신을 낳고 또 배신을 잉태한다. 소름 끼치도록 악의 화신이 되어 버린 아비멜렉, 그리고 그를 따르는 병사들… 하나님 나라 백성끼리 서로 죽이면서, 하나님께서 제사장 나라로 세우신 뜻이 여지없이 짓밟히고 만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하나님 나라에는 배신과 배신, 피의 향연만 넘칠 뿐이었다.
*죄악이 죄악을 부른다.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을 배신하고 형제들을 배신하며 그 자리를 차지했는데, 자신이 썼던 바로 그 방법으로 세겜 사람들에게 배신당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결코 좌시하지 않으신다. 죄를 반드시 물으신다. 지금 당장 어떤 도전이 없다고 이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범죄함에 대하여 무덤덤해지는 것은 이미 사탄의 궤계에 걸려든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유유상종”일까… 아비멜렉이나 세겜 사람들이나, 가알이나, 스불이나 도긴개긴이다. 더 나아가 서로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듯하다. 스불은 아비멜렉과, 가알은 세겜 사람들과 죽이 잘 맞는다. 서로 마음을 모아 상대를 죽이고 억압하는 데 뜻을 모은다. 하나님 나라 백성답지 않다.
*억압하고 죽이는 것에 몰두하는 지도자를 잘 판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의 지도자든 국가의 지도자든, 백성을 살리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 넘어뜨리고, 짓밟고, 무시하며, 외면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상식에 맞고 정의와 법도를 존중하는 리더를 분별하여 선택해야겠다.
나는?
-악한 영을 악인들 가운데 보내셔서 서로 배반하게 하신다(22~24절). ‘진실과 의로움(16절)’이 없는 악인들의 불의한 연합과 연대가 무너진 것은 예언의 성취(20절)이자 ‘하나님의 보응’이다. 아무리 악이 위세를 떨치고 의와 진실이 무너진 듯 보여도, 모든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까지만 허용된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악인들에게 오늘의 번영은 위장된 심판일 뿐이다. 그러니 불의한 성공을 부러워하지 말고 의로운 패배에 절망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아비멜렉의 통치 3년이 지나자 세겜의 반(反)아비멜렉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급기야 산꼭대기마다 매복하여 지나는 사람들의 것을 강탈하는 불법을 자행한다. 그런데 이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보내신 악한 영이 있었다. 즉, 일부의 일탈 행위가 아니라 아비멜렉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배반은 반역으로 나타났다(25~29절). 반역의 주모자는 세겜 출신 가알이었다. 술에 취한 가알은 아비멜렉의 왕권을 비난하고 비하하며, 세겜인들이 자신의 뜻을 따라준다면 그를 몰아낼 수 있다고 장담한다. 하지만 호기 어린 허세였을 뿐, 그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줄행랑을 친다(39~41절).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 사라지면 우리도 잠깐 있다 사라지는 눈앞의 권력 앞에서 비굴해지거나, 밥줄을 움켜쥔 세상의 눈치를 보며 비겁한 기회주의자처럼 처신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없다.
-첩의 아들 아비멜렉에게 쉽게 동조하여 반역을 지지했던 세겜이, 이제 다시 종의 아들 가알을 지지하여 아비멜렉에게 저항하려고 한다. 가알은 아비멜렉에게 정통성이 없음을 강조하여, 그를 치려 하는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 한다. 아비멜렉처럼 가알도 상대방을 비난하여 지지세를 확보한 것이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이용한 방법으로 저항을 받게 된다.
-스불은 아비멜렉에게 반역의 상황은 물론 대응 전략까지 알려 준다. 이전에는 세겜인들이 아비멜렉을 해하려고 매복하더니(25절), 지금은 아비멜렉이 세겜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매복한다(30~40절). 서로 골육지친이라 부르며 의기투합하던 그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칼을 겨눈다. 의와 진실이 없다면, 즉 하나님 나라와 그 뜻에 어긋난다면, 동맹도 우정도 영원하지 못하며 오늘의 충성이 내일의 배반과 변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아비멜렉은 가알을 공격하고 스불의 도움을 받아 가알을 쫓아낸다. 그러고는 자신을 배신한 세겜을 공격하여 그 백성을 죽이고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린다. 그들은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처단한다. 세겜은 불의한 세력에 동조하여 억울한 목숨을 죽인 대가로, 한때는 자신들이 세운 왕이었던 아비멜렉을 통해 심판을 받는다. 악과 범죄로 맺어진 관계의 말로가 이렇다.
-아비멜렉은 반역의 주동자를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배반한 세겜 성을 철저히 응징하여 또다시 반역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초토화한다(41~45절). 한때 왕으로 추대하던 자들을 향한 잔혹한 보복이다. 이처럼 누군가를 이용하는 관계의 끝에는 비극적인 피의 보복과 파멸만이 남을 뿐이다.
-아비멜렉의 시대에도 이미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백성들의 천태만상이 펼쳐진다. 아비멜렉이 불의하고 교묘하게 왕이 된 지 3년 만에 세겜 사람들이 배신한다. 세겜 사람들이 산에 숨어 있다가 지나는 사람들을 공격한 것이다. 아비멜렉을 속이며 자기 마음대로 불법을 행했다는 것이다. 당시 사회에 공의가 무너졌다는 의미다. 또 세겜 사람들은 ‘가알’이라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그는 세겜 정통주의를 들먹이며 아비멜렉이 세겜과 관련이 없는 존재임을 부각하려 했다. 배반이 배반을 싹틔우고 또 다른 배반을 맺는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 의해 죽임당한 형제들의 피를 기억하신다. 그의 폭력을 또렷하게 기억하신다. 그와 공모했던 세겜 사람들도 벌하시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악령은 지체하지 않고” 목적을 이루어 간다. 악한 영은 머뭇거림 없이 세겜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갔고, 그들은 이내 산을 차지하고 지나는 백성들을 노략한다. 삼 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리신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아비멜렉의 돌이킴을 기다리는 시간이었을 수 있다.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참 어렵다. 쉽게 얻은 마음은 쉽게 떠날 수 있음을 각성하게 된다. 돈으로, 힘으로 살 수 있는 마음의 유통기한은 짧다. 진짜 마음은 꾸준하게 마음을 줄 때 얻을 수 있다.
-혼란한 시대의 특징은 혼탁한 인물들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아비멜렉을 이어 등장한 가알은 아비멜렉 반역의 근거지였던 세겜의 신뢰를 얻고 아비멜렉을 배반하도록 충동질했다. 이 과정에서 순수한 혈통을 내세웠고, 귀가 얇은 세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결국 세겜의 친아비멜렉계 사람들이 가알에게로 돌아선다. 어쩌면 세겜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지도자를 세웠으니 지도자를 교체하는 것도 자기 손에 달렸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들에게 왕(지도자)은 하나님께 권한을 위임받아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는 자가 아니었다. 자기들의 이기적인 관심사에 부합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아무리 끈끈하다 해도 하나님이 배제된 연합은 영원하지 않다. 세겜도, 가알도, 스불도, 아비멜렉도 자신을 위해 하나님 없는 자기 길을 걸었다.
-사람들은 이용당할 줄 알면서 손을 잡고, 책임질 수 없으면서도 호언장담을 일삼는다. 이런 관계는 언제든지 틀어질 수 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탄탄하게 하고, 그것을 기초로 끝까지 믿고 따르는 공동체를 소망하는 아침이다. 얄팍하고 얕은 인간관계보다 깊고 넓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리라.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요담의 우화와 아비멜렉의 악행 [사사기 9:7-21]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형제 70명을 처형할 때 유일하게 탈출한 요담이 그의 잔인함을 세겜 사람들에게 비유로 전한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왕이 되는 대신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자신들의 사명에 집중하겠다며 나무들의 간청을 고사한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달랐다. “자신의 그늘에 들어오라”고 외치면서, 그렇지 않으면 불로 태우겠다고 위협한다(7-16절). 요담은 이 우화를 마치고 격렬하게 외친다.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너희도 이와 같이 될 것이라고…(17-21절).
1. 요담의 용기(7절)
요담은 “스스로 숨어서(숨어 있었으므로_5절)” 살아남았다. 형제들을 바위 위로 끌고 갈 때 이미 숨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담의 은둔은 아비멜렉의 몇몇 비류들에게는 골치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요담을 끝내 찾아내지 못하고 세겜으로 돌아가 즉위식을 거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요담은 은둔을 거듭하다가 사람들을 통해 즉위식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목숨이 두려워 더 깊은 음지로 숨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선다. 세겜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그리심산에 올라 큰 소리로 그 백성들을 향해 외친다.
이런 행동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안에 아비멜렉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이미 세력을 결집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은 “사람들이 요담에게 그 일을 알리매…(7절)”로 시작하는데, ‘스스로 숨은’ 요담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면 이미 아비멜렉에 대항하는 세력이 조직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요담의 용기는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세력이 커서 생긴 것이 아니다. 요담은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7절 하)”라고 외쳤다. 하나님 앞에서 이 소리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력이 조직을 갖추었다 한들 아비멜렉의 세력과는 비교할 수 없었을 테다. 그럼에도 요담은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행한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행하던 아비멜렉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외쳐야 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함을 깨닫는다.
2.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16절)
요담이 용기 있게 그리심산 정상에서 세겜을 향해 외친 말은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16절)”였다. 나무들이 자신들의 왕을 뽑는 이야기를 통해 아비멜렉이 가시나무 같은 자임을 만천하에 고발한다. 나무들에게 먼저 추대된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기름과(9절), 단 것과 아름다운 열매와(11절), 포도주를(13절) 내는 것에 만족하고 기뻐하며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9, 11, 13절)”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왕이 되는 것보다 지금 자신들이 감당하는 본연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더 의미 있고 기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시나무는 기가 찰 “호언장담”을 내뱉는다. ‘너희가 정말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너희의 왕으로 삼으려느냐? 그렇다면, 와서 나의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가시덤불에서 불이 뿜어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살라 버릴 것이다(새번역_15절).’ 기름도 없고 열매도 없으면서 날카로운 가시만 내는 나무 주제에 나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선뜻’ 왕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다.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제안을 받는 그 자리에서 “엄포”를 놓는 모습은 앞으로 가중될 백성들의 고통과, 결국 하나님을 떠나 멸망당할 미래를 내다보게 한다. 세겜 사람들은 가치 없고 고통과 불편만 주는 해악 덩어리인 가시나무 같은 아비멜렉을 선택한 것이다. 요담은 “이 선택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라고 묻는 것이다.
아비멜렉의 삶의 흔적은 왕이 되기 위해 세겜 사람들에게 보여 준 모습 그 자체다. 그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열매도 보여 주지 못했다. 그런 그가 왕이 되고 싶어 시도한 것은 비겁한 “분노 유발”, 망국의 “혈연과 지연” 붙잡기, “폭력으로 억압하기”였다. 왕이 될 수만 있다면 이런 것쯤이야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다. 삶의 열매가 없는 그가 다른 이들의 열매를 짓밟으며 그들의 왕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런 해악 덩어리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세겜 사람들의 선택 역시 악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알이 싸우려는 자’의 아들들을 따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기드온이 미디안으로부터 자신들의 조상을 구원하여 준 것도 잊어버린 채, 미디안에게 비참하게 진멸당할 뻔한 지경까지 몰린 자신들을 구해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이 섬기는 바알의 대적을 따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기드온의 자손이면서 자신들과 혈육인 아비멜렉을 대신 섬기는 것은 좋은 선택지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악함은 문제 되지 않았다. 그는 왕의 재목이 아니었지만 자신들의 구미에 딱 맞았기에, 그들은 “악인과 동행”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모든 백성을 고통 가운데로 몰아가는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3. 진정한 왕,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요담의 우화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왕이 되어 달라는 추대에도 자신들의 사명을 따라 사는 삶에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공교롭게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들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보다 왕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매를 내는 삶을 살고, 그 삶을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사 시대의 고통은 “사명 따라” 사는 삶에는 관심 없고 “욕망 따라” 사는 삶을 추구하다 반복된 열매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 가운데 남겨 둔 이방 민족의 삶의 체계를 눈여겨보게 된다. 이스라엘이 힘이 있었을 때는 상관없었지만, 그들이 세력을 키우고 안정되어 이스라엘을 넘보고 나아가 억압하는 상황이 반복되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왕을 바라보게 된다. 그들의 강성함이 왕의 존재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처럼 우리도” 왕을 세워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셔서 그들의 조상의 삶에 평화를 주셨어도 이를 바라보지 못했다.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가 얼마나 평안한지, “여호와 샬롬”을 누리지 못했다. 세상 왕의 강성함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이스라엘은 “우리도 저들처럼” 왕을 세워 달라는 요청을 반복한 것이다. 특히 이전 네 명의 사사 이야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기드온에게 우리를 다스려 달라고 한 백성들의 간청이 이를 뒷받침한다(삿 8:22).
하지만 요담의 이야기에서는 분명한 하나님의 의지가 돋보인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가 이구동성으로 고백한다.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 내는 일을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새번역_9절)’, ‘내가 어찌 달고 맛있는 과일맺기를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새번역_11절)’,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 내는 일을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새번역_13절)’ “내가 어찌 ~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세상 나라의 삶과 다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사명을 따라 그 안에서 열매 맺고,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고 행복하게 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다.
이 귀한 사명을 버리고 “어찌 세상을 다스린다며 날뛰겠는가?”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은혜와 축복의 산물로 주신 “기름을 내고, 과일을 맺으며, 포도주를 내는” 사명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여기에 행복이 있다. 하나님께서 왕이 되셔서 우리를 통치하시면 된다. 우리는 그의 통치 안에서 사명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기쁨과 행복을 누리면 된다. 인간 왕은 필요하지 않다!
나는?
-본문에서 기드온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요담은 ‘나무 우화’를 통해 아비멜렉 왕권의 부당성과 그를 왕으로 추대한 세겜 사람들의 우매와 불의를 지적한다. 이 비유는 앞으로 이스라엘에 닥칠 일을 예고하는 기능도 있다. 요담은 축복의 산인 그리심산에서 저주를 선언한다. 기름이 나서 유용한 감람나무, 단 열매를 맺어서 유용한 무화과나무, 포도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포도나무는 왕의 자리를 거절한다. 이 나무들은 각자 자기 역할을 소중히 여기며 자족한다. 받은 소명 이상을 넘보지 않는다. 이런 모습이 리더의 참모습이 아닐까?
-요담은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에 그리심산에 올라 세겜 사람들을 비난한다(7절). 야망을 숨긴 채 유화적인 말(2절)로 사람들을 선동하던 아비멜렉과 달리, 요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듯 그들의 악행을 지적한다. ‘축복의 산’에서 들리는 요담의 저주는 악에 눈감고 불의에 동조하는 뒤틀린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처럼 들렸다. 지금 나와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입맛에 맞는 말씀만 골라 듣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말씀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들처럼 우리도 흉측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왕을 세우기 위해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를 찾아가지만, 그들은 자신의 자리와 본분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서 우쭐댈 수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8~13절).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신의 소명과 역할을 더 소중히 여기기에 왕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것이다. 자격 없는 이들(가시나무)은 자리만 탐하지만, 자격을 갖춘 이들은 주어진 자리에서 제 소임을 다한다. 그러니 주님이 부르신 자리와 주신 은사를 서로 견주어 자랑하지도, 위축되지도 말아야 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그 자리가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리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왕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수락하면서 자신의 ‘그늘(통치, 보호)’에 피하라고 말한다. 지키지 못할 공약만 늘어놓으며 허세를 부린다. 또 자기 체제에 복종하지 않으면 불로 태우겠다고 협박까지 한다(14~15절). 왕이 되겠다고 나선 가시나무는 왕이 될 자격과 능력도 없이 왕권을 차지한 아비멜렉을 풍자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상과 인생을 의지하는(4절) 자의 성취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탐욕의 대가를 치르게 하신다(56, 57절).
-요담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것이 ‘진실하지도 의롭지도’ 못한 일이라고 질책한다(16~21절). 그것은 기드온이 이스라엘에 바친 충정을 배신하는 일이었고, ‘온전함과 진실함(수 24:14)’으로 하나님만 섬기기로 한 언약을 저버리는 행위였다. 진리와 진실을 떠난 그들의 불의한 공모는 잠시 뜻을 이룬 듯 보였지만 오래가지 못했다(57절).
*주제도 모르고 왕이 되겠다는 그를 나의 욕망과 일치한다고 해서 지지하고 세우는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사실 이 외침은 아비멜렉의 악함을 고발한다기보다 세겜 사람들의 죄악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자기들의 이익에 맞기만 하면 어떤 악함이나 악인과도 손잡고 합종연횡하는 그들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상태를 성토하는 것이다.
*이런 세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소름 끼치도록 일치하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이 보여 두렵고 떨린다. 너무나도 심각하게 들어맞는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사사기 9장의 이야기가 재현되고 있다. 열매도 없고, 가치도 없으며, 인품도 미천하고, 큰소리치며 호령만 하는 가시나무 같은 이가 “스스로 제왕”이 되겠다고 나서는 이 판에, 세겜 사람들처럼 맞장구치며 추임새를 넣고 있는 이 나라가 개탄스럽다. 과연 이런 현재가 진실하고 의로운가?
*기쁨과 행복의 축제가 되어야 할 지도자 선출 과정에서, “분노와 편 가르기”로 증오와 미움을 양산하며 대립으로 이끌어 가는 “세겜 사람들” 같은 이들의 농락에 반복해서 놀아나야 하겠는가! 과연 이것이 진실하고 의로운가?
1. 요담의 용기(7절)
요담은 “스스로 숨어서(숨어 있었으므로_5절)” 살아남았다. 형제들을 바위 위로 끌고 갈 때 이미 숨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담의 은둔은 아비멜렉의 몇몇 비류들에게는 골치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요담을 끝내 찾아내지 못하고 세겜으로 돌아가 즉위식을 거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요담은 은둔을 거듭하다가 사람들을 통해 즉위식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목숨이 두려워 더 깊은 음지로 숨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선다. 세겜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그리심산에 올라 큰 소리로 그 백성들을 향해 외친다.
이런 행동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안에 아비멜렉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이미 세력을 결집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은 “사람들이 요담에게 그 일을 알리매…(7절)”로 시작하는데, ‘스스로 숨은’ 요담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면 이미 아비멜렉에 대항하는 세력이 조직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요담의 용기는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세력이 커서 생긴 것이 아니다. 요담은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7절 하)”라고 외쳤다. 하나님 앞에서 이 소리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력이 조직을 갖추었다 한들 아비멜렉의 세력과는 비교할 수 없었을 테다. 그럼에도 요담은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행한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행하던 아비멜렉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외쳐야 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함을 깨닫는다.
2.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16절)
요담이 용기 있게 그리심산 정상에서 세겜을 향해 외친 말은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16절)”였다. 나무들이 자신들의 왕을 뽑는 이야기를 통해 아비멜렉이 가시나무 같은 자임을 만천하에 고발한다. 나무들에게 먼저 추대된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기름과(9절), 단 것과 아름다운 열매와(11절), 포도주를(13절) 내는 것에 만족하고 기뻐하며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9, 11, 13절)”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왕이 되는 것보다 지금 자신들이 감당하는 본연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더 의미 있고 기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시나무는 기가 찰 “호언장담”을 내뱉는다. ‘너희가 정말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너희의 왕으로 삼으려느냐? 그렇다면, 와서 나의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가시덤불에서 불이 뿜어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살라 버릴 것이다(새번역_15절).’ 기름도 없고 열매도 없으면서 날카로운 가시만 내는 나무 주제에 나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선뜻’ 왕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다.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제안을 받는 그 자리에서 “엄포”를 놓는 모습은 앞으로 가중될 백성들의 고통과, 결국 하나님을 떠나 멸망당할 미래를 내다보게 한다. 세겜 사람들은 가치 없고 고통과 불편만 주는 해악 덩어리인 가시나무 같은 아비멜렉을 선택한 것이다. 요담은 “이 선택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라고 묻는 것이다.
아비멜렉의 삶의 흔적은 왕이 되기 위해 세겜 사람들에게 보여 준 모습 그 자체다. 그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열매도 보여 주지 못했다. 그런 그가 왕이 되고 싶어 시도한 것은 비겁한 “분노 유발”, 망국의 “혈연과 지연” 붙잡기, “폭력으로 억압하기”였다. 왕이 될 수만 있다면 이런 것쯤이야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다. 삶의 열매가 없는 그가 다른 이들의 열매를 짓밟으며 그들의 왕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런 해악 덩어리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세겜 사람들의 선택 역시 악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알이 싸우려는 자’의 아들들을 따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기드온이 미디안으로부터 자신들의 조상을 구원하여 준 것도 잊어버린 채, 미디안에게 비참하게 진멸당할 뻔한 지경까지 몰린 자신들을 구해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이 섬기는 바알의 대적을 따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기드온의 자손이면서 자신들과 혈육인 아비멜렉을 대신 섬기는 것은 좋은 선택지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악함은 문제 되지 않았다. 그는 왕의 재목이 아니었지만 자신들의 구미에 딱 맞았기에, 그들은 “악인과 동행”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모든 백성을 고통 가운데로 몰아가는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3. 진정한 왕,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요담의 우화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왕이 되어 달라는 추대에도 자신들의 사명을 따라 사는 삶에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공교롭게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들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보다 왕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매를 내는 삶을 살고, 그 삶을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사 시대의 고통은 “사명 따라” 사는 삶에는 관심 없고 “욕망 따라” 사는 삶을 추구하다 반복된 열매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 가운데 남겨 둔 이방 민족의 삶의 체계를 눈여겨보게 된다. 이스라엘이 힘이 있었을 때는 상관없었지만, 그들이 세력을 키우고 안정되어 이스라엘을 넘보고 나아가 억압하는 상황이 반복되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왕을 바라보게 된다. 그들의 강성함이 왕의 존재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처럼 우리도” 왕을 세워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셔서 그들의 조상의 삶에 평화를 주셨어도 이를 바라보지 못했다.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가 얼마나 평안한지, “여호와 샬롬”을 누리지 못했다. 세상 왕의 강성함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이스라엘은 “우리도 저들처럼” 왕을 세워 달라는 요청을 반복한 것이다. 특히 이전 네 명의 사사 이야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기드온에게 우리를 다스려 달라고 한 백성들의 간청이 이를 뒷받침한다(삿 8:22).
하지만 요담의 이야기에서는 분명한 하나님의 의지가 돋보인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가 이구동성으로 고백한다.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 내는 일을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새번역_9절)’, ‘내가 어찌 달고 맛있는 과일맺기를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새번역_11절)’,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 내는 일을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새번역_13절)’ “내가 어찌 ~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세상 나라의 삶과 다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사명을 따라 그 안에서 열매 맺고,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고 행복하게 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다.
이 귀한 사명을 버리고 “어찌 세상을 다스린다며 날뛰겠는가?”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은혜와 축복의 산물로 주신 “기름을 내고, 과일을 맺으며, 포도주를 내는” 사명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여기에 행복이 있다. 하나님께서 왕이 되셔서 우리를 통치하시면 된다. 우리는 그의 통치 안에서 사명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기쁨과 행복을 누리면 된다. 인간 왕은 필요하지 않다!
나는?
-본문에서 기드온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요담은 ‘나무 우화’를 통해 아비멜렉 왕권의 부당성과 그를 왕으로 추대한 세겜 사람들의 우매와 불의를 지적한다. 이 비유는 앞으로 이스라엘에 닥칠 일을 예고하는 기능도 있다. 요담은 축복의 산인 그리심산에서 저주를 선언한다. 기름이 나서 유용한 감람나무, 단 열매를 맺어서 유용한 무화과나무, 포도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포도나무는 왕의 자리를 거절한다. 이 나무들은 각자 자기 역할을 소중히 여기며 자족한다. 받은 소명 이상을 넘보지 않는다. 이런 모습이 리더의 참모습이 아닐까?
-요담은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에 그리심산에 올라 세겜 사람들을 비난한다(7절). 야망을 숨긴 채 유화적인 말(2절)로 사람들을 선동하던 아비멜렉과 달리, 요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듯 그들의 악행을 지적한다. ‘축복의 산’에서 들리는 요담의 저주는 악에 눈감고 불의에 동조하는 뒤틀린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처럼 들렸다. 지금 나와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입맛에 맞는 말씀만 골라 듣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말씀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들처럼 우리도 흉측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왕을 세우기 위해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를 찾아가지만, 그들은 자신의 자리와 본분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서 우쭐댈 수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8~13절).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신의 소명과 역할을 더 소중히 여기기에 왕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것이다. 자격 없는 이들(가시나무)은 자리만 탐하지만, 자격을 갖춘 이들은 주어진 자리에서 제 소임을 다한다. 그러니 주님이 부르신 자리와 주신 은사를 서로 견주어 자랑하지도, 위축되지도 말아야 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그 자리가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리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왕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수락하면서 자신의 ‘그늘(통치, 보호)’에 피하라고 말한다. 지키지 못할 공약만 늘어놓으며 허세를 부린다. 또 자기 체제에 복종하지 않으면 불로 태우겠다고 협박까지 한다(14~15절). 왕이 되겠다고 나선 가시나무는 왕이 될 자격과 능력도 없이 왕권을 차지한 아비멜렉을 풍자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상과 인생을 의지하는(4절) 자의 성취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탐욕의 대가를 치르게 하신다(56, 57절).
-요담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것이 ‘진실하지도 의롭지도’ 못한 일이라고 질책한다(16~21절). 그것은 기드온이 이스라엘에 바친 충정을 배신하는 일이었고, ‘온전함과 진실함(수 24:14)’으로 하나님만 섬기기로 한 언약을 저버리는 행위였다. 진리와 진실을 떠난 그들의 불의한 공모는 잠시 뜻을 이룬 듯 보였지만 오래가지 못했다(57절).
*주제도 모르고 왕이 되겠다는 그를 나의 욕망과 일치한다고 해서 지지하고 세우는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사실 이 외침은 아비멜렉의 악함을 고발한다기보다 세겜 사람들의 죄악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자기들의 이익에 맞기만 하면 어떤 악함이나 악인과도 손잡고 합종연횡하는 그들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상태를 성토하는 것이다.
*이런 세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소름 끼치도록 일치하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이 보여 두렵고 떨린다. 너무나도 심각하게 들어맞는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사사기 9장의 이야기가 재현되고 있다. 열매도 없고, 가치도 없으며, 인품도 미천하고, 큰소리치며 호령만 하는 가시나무 같은 이가 “스스로 제왕”이 되겠다고 나서는 이 판에, 세겜 사람들처럼 맞장구치며 추임새를 넣고 있는 이 나라가 개탄스럽다. 과연 이런 현재가 진실하고 의로운가?
*기쁨과 행복의 축제가 되어야 할 지도자 선출 과정에서, “분노와 편 가르기”로 증오와 미움을 양산하며 대립으로 이끌어 가는 “세겜 사람들” 같은 이들의 농락에 반복해서 놀아나야 하겠는가! 과연 이것이 진실하고 의로운가?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아비멜렉의 야망과 기드온 시대의 비극 [사사기 9:1-6]
기드온이 많은 아들을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났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세겜 첩(필레게쉬: ‘두 번째 아내’라는 의미이지만 정식 아내이다)의 아들이다. 그는 세겜으로 와서 왕이 될 계획을 세우고 주민들의 지지와 후원을 받는다. 그리고 그 후원으로 형제들을 모조리 몰살하고 세겜의 왕이 된다. 이런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게 된다.
*비극의 서막
기드온은 왕이 아니었다. 하지만 왕과 같은 영향력을 끼쳤다. 그렇기에 모세의 당부를 잊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이 말씀을 외면하여 뿌린 불순종의 씨앗이 비극의 열매로 다가왔다. “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신 17:17-20상)”
*아, 밤에라도 순종했고, 순종하려고 증거를 구하며, 여호와의 영으로 덧입었던 그 기드온은 어디로 갔을까? 승전을 확정한 순간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고 겉으로만 평화를 구가하며 자기 이름만을 남긴 것이, 40년 만에 “또” 우상 숭배의 열매를 낳았다.
9장을 시작하면서 사사기 저자는 기드온이라는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다. “바알이 싸우려는 자”라는 의미의 이름인 “여룹바알”만 계속 사용한다. 왜 그랬을까? 세겜 사람들은 이미 바알브릿을 충실하게 섬기고 있었다. “바알브릿”은 “언약의 주, 언약의 신”이라는 의미로, “엘브릿”으로도 불리는 가나안 우상이었다. 세겜 사람들은 이미 언약의 하나님을 떠나 언약의 바알을 충실하게 따르는 다른 민족이 되어 버렸다. 추측건대 세겜에는 기드온이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바알브릿 신전이 있었을 것이다. 세겜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기드온을 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세겜은 에브라임 지파에 속했다. 스스로 가장 강한 지파라고 여기는 그들이 기드온의 40년 동안의 영향력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가질 수는 없었다.
또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아버지는 왕이시다”이다. 여룹바알(바알이 싸우려는 자)을 아버지로 둔 그는 첩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의 고향 세겜을 기반으로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고 찾아온다. 이 서사는 여기서 시작된다. 9장에서 기드온의 이름은 “여룹바알(바알이 싸우려는 자, 바알과 싸우는 자)”로만 사용되었다. 그리고 “세겜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무려 15회나 사용된다. 저자는 아비멜렉이 아버지를 기드온이 아닌 여룹바알로 부름으로써, 바알을 “바알브릿”으로까지 숭배하는 세겜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를 집어넣어 자기 세력을 만들려 한 것을 의도적으로 꼬집는다. 그는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왕이 되고자 했다.
1. 그는 하나님이 아닌 혈연에 호소했다(1-3절).
그는 먼저 “어머니의 친척들과 그들의 외조부의 온 가족”을 찾아가서 말했다. “세겜 성읍의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아 주십시오. 여룹바알의 아들 일흔 명이 모두 다스리는 것하고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하고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물어보아 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여러분과 한 혈육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십시오(새번역_2절).” 이 말을 들은 세겜 사람들은 마음이 기울어 “아비멜렉이 우리 형제(우리의 혈육)”임을 선언한다(3절). 아비멜렉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하나님의 율법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으니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는 외가 친척들을 의지하여 세겜 사람들의 권력욕에 불을 지폈다. 지리적으로도 오브라에 있는 기드온의 70명 아들들보다 아비멜렉이 더 가까웠기 때문에, 세겜 사람들은 그의 말에 현혹되고 말았다.
*혈연, 지연, 학연은 객관적인 시각을 왜곡한다.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고, 결국 분별력을 잃게 만든다. 즉,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의 권력욕을 자극하여 자신의 권력욕을 채운다.
*욕망이 이렇게 무섭다.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위한 객관적인 선택보다 자신의 성향을 따라 독불장군식으로 행동하게 한다.
*왕이 되려는 욕망에 눈먼 자를, 왕의 성읍이 되려는 욕망이 따른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세겜 사람들의 욕망을 건드린다.
2. 그는 우상의 돈으로 리더십을 샀다(4, 6절).
아비멜렉의 편이 되기로 한 세겜 백성들은 바알브릿 신전에서 비자금 은 70개를 꺼내 아비멜렉에게 건넨다. 무심코 흘려보내기 쉽지만, 바알브릿 신전에서 내어 준 ‘은 70개’가 우상에게 드려진 불의한 돈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아비멜렉은 불의한 바알의 돈으로 방탕하게 살았다. 바알이 원하는 대로 산 것이다. 불의한 물질은 사람을 방탕하게 만든다. 그 방탕이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한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이들을 돈으로 사는데, 그들은 바로 “폭력배”들이었다.
*바알에게 바쳐진 불의한 물질로 폭력배들(비류들)을 사서, 폭력으로 자신의 형제들을 없앴다. 또 상수리나무 기둥 앞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우상을 숭배하는 장소에서, 우상 앞에서 왕이 된 것이다. 철저하게 우상에 기대어 산 왕이었다.
3. 거리낌 없이 형제들을 몰살하다(5-6절).
아비멜렉은 폭력배들을 이끌고 오브라로 향한다. 그리고 70명의 이복형제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을 묶어 한 바위 위에 꿇어앉히고서는, 자신이 돈을 주고 산 비류들의 손에 죽임당하게 한다. 이런 폭력과 살인으로 할아버지의 고향 오브라의 주민들이 겁에 질려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40년 전 미디안이 사용했던 “진멸하고자” 한 폭력적 탄압과 다를 바 없다. 권력 욕심에 눈이 멀어 가족 공동체를 완전히 파괴해 버린다. 마을 공동체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이토록 깊고 크다!
나는?
-아비멜렉은 40년간 다스린 기드온에 이어, 사사가 아닌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는다(1절). 왕이 되기 위해 자기 형제를 무참히 살해하고 ‘바알의 힘'(4절)까지 빌린다(6절). 성숙하지 못하고 성화되지 못한 아버지의 야망(8:30)이 아들을 통해 추악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비멜렉은 야망과 욕망을 분별하여 쳐내지 못한 아버지의 길을 떠나지 못했다. 결국 아비의 방심(8:27)이 아들의 방종을 불러오고, 기드온 시대의 종교적 부패(8:33)가 아들 세대의 배역을 낳은 것이다. 부모 된 나, 우리는 지금 나의 자녀, 우리의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첩의 아들이었기에 70명의 자녀 가운데 재산이나 권력을 상속받는 데 매우 불리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어머니의 고향 세겜에 가서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할 이유를 설득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을 때 그들이 당할 불이익을 악의적으로 과장한다. 그는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짓으로 선동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하나님보다 혈연에 기대어 넘보지 말아야 할 자리를 넘봤다.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그의 계략은 주도면밀했다.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에 찾아가 외척들에게 혈연과 지연에 호소하고, 실용적인 명분(한 명의 통치자)을 내세워 사람들을 선동한다(1-3절). 우리 사회는 유난히 정을 강조하고, 유독 ‘혈연, 지연, 학연’ 등의 연을 중시하다가 잘못된 온정주의와 파벌주의의 폐해를 낳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지금 우리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어떤가? 나는 어떤가?
-아비멜렉의 설득에 세겜은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그가 왕이 되면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득만 생각한다. 서로의 욕망이 의기투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왕이 세워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세겜 사람들은 ‘한 형제’라는 그의 호소에 호응하며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70개를 꺼내 정치 자금으로 내어 준다.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용병들을 고용하여 이복형제 70명을 암살한다(3-5절). 욕망의 노예가 된 자에게 사람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이해에 따라 얼마든지 이용하거나 제거할 수 있는 대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지도자의 야망’과, 자기 욕망을 채워 줄 지도자를 거절하지 않고 따르는 ‘맹목적인 추종’은 위태로운 공생이자 공멸을 자초하는 길이다.
-아비멜렉은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바알의 상징)에서 왕으로 추대된다(6절). 이스라엘이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맹세하던 언약의 장소(수 24장)가 이제 ‘바알 숭배’, ‘자아 숭배’의 자리로 전락한 것이다. 인간의 권력을 절대화하면서 하나님을 절대 왕으로 모실 수는 없다.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스스로 자기 멸망을 재촉하는 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비멜렉의 이야기는 기드온 이야기의 연장이다. 기드온에게서 시작된 왕의 모티프가 아비멜렉에게서 실현된다. 즉, 기드온은 말로는 거절했으나 실제로는 왕처럼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아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마음속에 있던 생각을 실제로 실현한 것이다.
*아비멜렉은 정치적 야망을 위해 형제들을 몰살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감행해서라도 그는 왕이 되고 싶었다. 왕이 되려는 그의 길에서 가족과 하나님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가운데 “분노”를 심었다는 점이다. 세겜 사람들이 이방인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그곳은 에브라임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었고, 가나안 정복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께서 언약식을 갱신하신 땅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분노와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개인적 야망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런 모든 행동은 그가 철저히 “하나님을 떠난” 자임을 그대로 보여 준다.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와 땅에서 스스로 인간 왕이 되겠다고, 분노를 이용하고 혈연과 지연을 바탕 삼아 우상의 돈으로 세력을 사서 형제들을 몰살한 것이다. 그것도 “한 바위 위에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보란 듯이 악을 행하였다. 철저하게 힘으로 밀어붙이고 공포로 몰아붙여 무릎 꿇게 만든 것이다. 하나님은 악이 득세하도록 “자기 소견대로” 왕이 되고자 하는 아비멜렉을 지켜보셨다. 이제 곧 그에 대한 심판의 칼을 빼실 것이다. 지금 악을 행하는데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악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의 책임을 물으신다!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벌인 판에서 지금 우리의 판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우리도 여지없이 스스로 뭔가를 이루기 위해 관계의 분노를 이용하고, 혈연과 지연 찬스를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공정을 외치지만, 나에게 혈연과 지연이 없는 것을 한탄한다. 나의 분노에 동조해 주기를 바라며 공동체는 안중에 없는 경우도 꽤 있다. 나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공동체의 구조를 바꾸라고 쉽게 분노하고, 이 분노에 동조자들을 끌어들인다. 아비멜렉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아비멜렉이 벌인 판의 중심에 왕이 되려는 자기 욕심의 우상이 자리 잡고 있듯, 나의 삶의 판에 하나님은 온데간데없고 욕심만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다면, 기회와 여건만 주어질 때 이 시대의 아비멜렉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모습에 내가 투영되는 것을 외면할 수 없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치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을 ‘분노’하게 하여 자기 세력을 키우는 지도자를 경계해야 한다. 혈연과 지연을 강조하며 세력을 모으는 것도 분별할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우상에 기대어 세력화를 꾀하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주변을 이용만 하는 지도자도 분별해야 한다.
*우리의 정치 현실과 너무도 닮은 본문 말씀에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기대하게 된다. 적어도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뜻을 분별하게 하셔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니, 이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을 신뢰한다.
*아무쪼록 철학, 비전, 사명도 없이 “분노, 적개심, 지연, 혈연”에 기대어 지도자가 되려는 이들이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하는 국민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나라의 정치판에 한숨이 나오지만,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갈망하게 되는 아침이기에 소망을 가져 본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시기에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련다!
*비극의 서막
기드온은 왕이 아니었다. 하지만 왕과 같은 영향력을 끼쳤다. 그렇기에 모세의 당부를 잊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이 말씀을 외면하여 뿌린 불순종의 씨앗이 비극의 열매로 다가왔다. “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신 17:17-20상)”
*아, 밤에라도 순종했고, 순종하려고 증거를 구하며, 여호와의 영으로 덧입었던 그 기드온은 어디로 갔을까? 승전을 확정한 순간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고 겉으로만 평화를 구가하며 자기 이름만을 남긴 것이, 40년 만에 “또” 우상 숭배의 열매를 낳았다.
9장을 시작하면서 사사기 저자는 기드온이라는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다. “바알이 싸우려는 자”라는 의미의 이름인 “여룹바알”만 계속 사용한다. 왜 그랬을까? 세겜 사람들은 이미 바알브릿을 충실하게 섬기고 있었다. “바알브릿”은 “언약의 주, 언약의 신”이라는 의미로, “엘브릿”으로도 불리는 가나안 우상이었다. 세겜 사람들은 이미 언약의 하나님을 떠나 언약의 바알을 충실하게 따르는 다른 민족이 되어 버렸다. 추측건대 세겜에는 기드온이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바알브릿 신전이 있었을 것이다. 세겜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기드온을 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세겜은 에브라임 지파에 속했다. 스스로 가장 강한 지파라고 여기는 그들이 기드온의 40년 동안의 영향력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가질 수는 없었다.
또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아버지는 왕이시다”이다. 여룹바알(바알이 싸우려는 자)을 아버지로 둔 그는 첩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의 고향 세겜을 기반으로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고 찾아온다. 이 서사는 여기서 시작된다. 9장에서 기드온의 이름은 “여룹바알(바알이 싸우려는 자, 바알과 싸우는 자)”로만 사용되었다. 그리고 “세겜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무려 15회나 사용된다. 저자는 아비멜렉이 아버지를 기드온이 아닌 여룹바알로 부름으로써, 바알을 “바알브릿”으로까지 숭배하는 세겜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를 집어넣어 자기 세력을 만들려 한 것을 의도적으로 꼬집는다. 그는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왕이 되고자 했다.
1. 그는 하나님이 아닌 혈연에 호소했다(1-3절).
그는 먼저 “어머니의 친척들과 그들의 외조부의 온 가족”을 찾아가서 말했다. “세겜 성읍의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아 주십시오. 여룹바알의 아들 일흔 명이 모두 다스리는 것하고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하고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물어보아 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여러분과 한 혈육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십시오(새번역_2절).” 이 말을 들은 세겜 사람들은 마음이 기울어 “아비멜렉이 우리 형제(우리의 혈육)”임을 선언한다(3절). 아비멜렉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하나님의 율법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으니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는 외가 친척들을 의지하여 세겜 사람들의 권력욕에 불을 지폈다. 지리적으로도 오브라에 있는 기드온의 70명 아들들보다 아비멜렉이 더 가까웠기 때문에, 세겜 사람들은 그의 말에 현혹되고 말았다.
*혈연, 지연, 학연은 객관적인 시각을 왜곡한다.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고, 결국 분별력을 잃게 만든다. 즉,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의 권력욕을 자극하여 자신의 권력욕을 채운다.
*욕망이 이렇게 무섭다.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위한 객관적인 선택보다 자신의 성향을 따라 독불장군식으로 행동하게 한다.
*왕이 되려는 욕망에 눈먼 자를, 왕의 성읍이 되려는 욕망이 따른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세겜 사람들의 욕망을 건드린다.
2. 그는 우상의 돈으로 리더십을 샀다(4, 6절).
아비멜렉의 편이 되기로 한 세겜 백성들은 바알브릿 신전에서 비자금 은 70개를 꺼내 아비멜렉에게 건넨다. 무심코 흘려보내기 쉽지만, 바알브릿 신전에서 내어 준 ‘은 70개’가 우상에게 드려진 불의한 돈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아비멜렉은 불의한 바알의 돈으로 방탕하게 살았다. 바알이 원하는 대로 산 것이다. 불의한 물질은 사람을 방탕하게 만든다. 그 방탕이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한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이들을 돈으로 사는데, 그들은 바로 “폭력배”들이었다.
*바알에게 바쳐진 불의한 물질로 폭력배들(비류들)을 사서, 폭력으로 자신의 형제들을 없앴다. 또 상수리나무 기둥 앞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우상을 숭배하는 장소에서, 우상 앞에서 왕이 된 것이다. 철저하게 우상에 기대어 산 왕이었다.
3. 거리낌 없이 형제들을 몰살하다(5-6절).
아비멜렉은 폭력배들을 이끌고 오브라로 향한다. 그리고 70명의 이복형제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을 묶어 한 바위 위에 꿇어앉히고서는, 자신이 돈을 주고 산 비류들의 손에 죽임당하게 한다. 이런 폭력과 살인으로 할아버지의 고향 오브라의 주민들이 겁에 질려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40년 전 미디안이 사용했던 “진멸하고자” 한 폭력적 탄압과 다를 바 없다. 권력 욕심에 눈이 멀어 가족 공동체를 완전히 파괴해 버린다. 마을 공동체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이토록 깊고 크다!
나는?
-아비멜렉은 40년간 다스린 기드온에 이어, 사사가 아닌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는다(1절). 왕이 되기 위해 자기 형제를 무참히 살해하고 ‘바알의 힘'(4절)까지 빌린다(6절). 성숙하지 못하고 성화되지 못한 아버지의 야망(8:30)이 아들을 통해 추악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비멜렉은 야망과 욕망을 분별하여 쳐내지 못한 아버지의 길을 떠나지 못했다. 결국 아비의 방심(8:27)이 아들의 방종을 불러오고, 기드온 시대의 종교적 부패(8:33)가 아들 세대의 배역을 낳은 것이다. 부모 된 나, 우리는 지금 나의 자녀, 우리의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첩의 아들이었기에 70명의 자녀 가운데 재산이나 권력을 상속받는 데 매우 불리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어머니의 고향 세겜에 가서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할 이유를 설득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을 때 그들이 당할 불이익을 악의적으로 과장한다. 그는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짓으로 선동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하나님보다 혈연에 기대어 넘보지 말아야 할 자리를 넘봤다.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그의 계략은 주도면밀했다.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에 찾아가 외척들에게 혈연과 지연에 호소하고, 실용적인 명분(한 명의 통치자)을 내세워 사람들을 선동한다(1-3절). 우리 사회는 유난히 정을 강조하고, 유독 ‘혈연, 지연, 학연’ 등의 연을 중시하다가 잘못된 온정주의와 파벌주의의 폐해를 낳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지금 우리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어떤가? 나는 어떤가?
-아비멜렉의 설득에 세겜은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그가 왕이 되면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득만 생각한다. 서로의 욕망이 의기투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왕이 세워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세겜 사람들은 ‘한 형제’라는 그의 호소에 호응하며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70개를 꺼내 정치 자금으로 내어 준다.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용병들을 고용하여 이복형제 70명을 암살한다(3-5절). 욕망의 노예가 된 자에게 사람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이해에 따라 얼마든지 이용하거나 제거할 수 있는 대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지도자의 야망’과, 자기 욕망을 채워 줄 지도자를 거절하지 않고 따르는 ‘맹목적인 추종’은 위태로운 공생이자 공멸을 자초하는 길이다.
-아비멜렉은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바알의 상징)에서 왕으로 추대된다(6절). 이스라엘이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맹세하던 언약의 장소(수 24장)가 이제 ‘바알 숭배’, ‘자아 숭배’의 자리로 전락한 것이다. 인간의 권력을 절대화하면서 하나님을 절대 왕으로 모실 수는 없다.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스스로 자기 멸망을 재촉하는 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비멜렉의 이야기는 기드온 이야기의 연장이다. 기드온에게서 시작된 왕의 모티프가 아비멜렉에게서 실현된다. 즉, 기드온은 말로는 거절했으나 실제로는 왕처럼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아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마음속에 있던 생각을 실제로 실현한 것이다.
*아비멜렉은 정치적 야망을 위해 형제들을 몰살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감행해서라도 그는 왕이 되고 싶었다. 왕이 되려는 그의 길에서 가족과 하나님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가운데 “분노”를 심었다는 점이다. 세겜 사람들이 이방인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그곳은 에브라임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었고, 가나안 정복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께서 언약식을 갱신하신 땅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분노와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개인적 야망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런 모든 행동은 그가 철저히 “하나님을 떠난” 자임을 그대로 보여 준다.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와 땅에서 스스로 인간 왕이 되겠다고, 분노를 이용하고 혈연과 지연을 바탕 삼아 우상의 돈으로 세력을 사서 형제들을 몰살한 것이다. 그것도 “한 바위 위에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보란 듯이 악을 행하였다. 철저하게 힘으로 밀어붙이고 공포로 몰아붙여 무릎 꿇게 만든 것이다. 하나님은 악이 득세하도록 “자기 소견대로” 왕이 되고자 하는 아비멜렉을 지켜보셨다. 이제 곧 그에 대한 심판의 칼을 빼실 것이다. 지금 악을 행하는데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악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의 책임을 물으신다!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벌인 판에서 지금 우리의 판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우리도 여지없이 스스로 뭔가를 이루기 위해 관계의 분노를 이용하고, 혈연과 지연 찬스를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공정을 외치지만, 나에게 혈연과 지연이 없는 것을 한탄한다. 나의 분노에 동조해 주기를 바라며 공동체는 안중에 없는 경우도 꽤 있다. 나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공동체의 구조를 바꾸라고 쉽게 분노하고, 이 분노에 동조자들을 끌어들인다. 아비멜렉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아비멜렉이 벌인 판의 중심에 왕이 되려는 자기 욕심의 우상이 자리 잡고 있듯, 나의 삶의 판에 하나님은 온데간데없고 욕심만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다면, 기회와 여건만 주어질 때 이 시대의 아비멜렉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모습에 내가 투영되는 것을 외면할 수 없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치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을 ‘분노’하게 하여 자기 세력을 키우는 지도자를 경계해야 한다. 혈연과 지연을 강조하며 세력을 모으는 것도 분별할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우상에 기대어 세력화를 꾀하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주변을 이용만 하는 지도자도 분별해야 한다.
*우리의 정치 현실과 너무도 닮은 본문 말씀에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기대하게 된다. 적어도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뜻을 분별하게 하셔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니, 이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을 신뢰한다.
*아무쪼록 철학, 비전, 사명도 없이 “분노, 적개심, 지연, 혈연”에 기대어 지도자가 되려는 이들이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하는 국민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나라의 정치판에 한숨이 나오지만,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갈망하게 되는 아침이기에 소망을 가져 본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시기에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련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기드온의 황금 에봇과 이스라엘의 영적 망각 [사사기 8:22-35]
이스라엘을 미디안에서 구원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금세 망각해 버린다. 그리고 기드온에게 자신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한다. 기드온은 당연히 거절했지만, 황금 에봇을 만들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다시 배교의 길로 들어선다. 7년간의 미디안 압제에서 해방되어 평화가 찾아왔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위협은 이미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1. 그때에(22-27절)…… 이와 같이 하여(28절)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완전한 승리를 선언한 그때에 일어난 일이다. 승전 축하의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의 집안이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한다(22절). 기막힌 일이다. 7년 동안의 미디안의 압제가 끝난 그때,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야 하는데, 또다시 사람(기드온)의 통치를 요청하다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어두움이 매우 심각하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를 완곡히 거절한다. 자신의 집안이 다스리지 않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23절)”라고 선언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드온의 분별력이 고맙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두워진 마음과 눈이 마음에 걸린다. 7년 동안의 미디안의 압제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망쳐 놓은 듯하다. 승리로 완결된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기드온에게 찬사를 보낸다. 두고두고 아쉽다.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영적 무감각이 이토록 몰지각하다.
한편 기드온은 왕(통치자)의 자리는 거절했지만, 적어도 이 전쟁의 승리를 기념할 물건을 만들 생각은 있었나 보다. 왕으로서 통치하지는 않을 테니, 전리품 중에서 귀고리를 달라고 요청한다(24절). 백성들은 기꺼이(즐거이) 드리겠다며 겉옷을 펴고 탈취한 귀고리를 그 위에 던졌다(그런데 마치 왕에게 드리는 예물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해서 모인 금의 양은 자그마치 약 20kg(금 1,700세겔)이나 되었다. 뿐만 아니라 초승달 장식들, 패물, 미디안 왕들의 자색 옷들, 낙타 목 장식품 등이 기드온에게 모였다(25-26절). 기드온은 모인 금 귀고리로 “황금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 오브라에 두었다. 하지만 이것이 기드온과 그 집안의 올무가 되어 버렸다(27절).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까지만 좋았다. 딱 여기까지였다. 탈취한 귀고리를 요청하고 그 금으로 제사장의 의복인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에 두었는데, 이것이 가져올 또 하나의 우상숭배, 곧 보이지 않는 영적 배교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 그 에봇을 음란하게 위하였다. 즉 우상으로 숭배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형상이면 무엇이든 만들어 섬겨 버리는 우상 지향적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개역개정에는 “이와 같이 하여”라는 표현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새번역은 28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이와 같이 하여 미디안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복종하게 되었고,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은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나에게는 이 구절이 이렇게 읽힌다. “이와 같이 만든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이스라엘 땅에,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일까? 에봇을 의지한 평화가 아닐까?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온 이스라엘이 그곳에서 그것을 음란하게 섬겨서_새번역)” 누린 평화였다. 이것이 진정한 “여호와 샬롬”일까? 여호와 하나님 없이 황금 에봇을 의지하는 평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을 섬기겠노라며 만든 물건이 도리어 하나님이 되어 버린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나에게도 “하나님처럼” 섬기는 오늘날의 황금 에봇이 과연 없을까?
*가장 큰 영광과 찬송을 드려야 할 승전 축하의 날에 하나님의 이름은 쏙 들어가고, 황금 에봇에 눈길이 가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1~3계명을 어기는 것인 줄 정녕 깨닫지 못했을까? 단 한 사람도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아쉽고 아쉽기만 하다!
2. 기드온의 삶(29-32절)
승전하고 돌아온 기드온을 사사기 저자는 “여룹바알”이라고 부른다(29절). 뭔가 의미심장하다. 저자는 기드온의 삶을 소개하면서, “바알과 싸우는 사람”인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감히 바알을 따르지 못했지만,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바알들을 따라 음행하며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다고 기록한다(33절). “바알브릿”은 “언약의 주”라는 뜻이다. 세겜 지역에서는 “엘브릿(언약의 하나님)”으로까지 불렸다! 언약의 하나님과 비슷한 이름의 신을 자신들이 따르는 “바알들” 중 하나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저자는 이렇게 된 원인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은 것”(34절)과 기드온이 자신들을 위해 베푼 은혜를 아무도 기억하지도, 갚지도 않은 것(35절)을 지적한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세우셨던 기드온도 잊혔다. 기드온에게 받았던 은혜를 아무도 갚지 않았다.
*기드온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30절이다. “그런데 기드온은 아내가 많아, 친아들이 일흔 명이나 되었다(새번역_30절).” 당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승리를 이끈 사람이었으니, 에봇을 만들고 많은 아내를 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일까? 아쉽고 아쉽기만 하다.
*가장 잘나갈 때 가장 절제했더라면 어땠을까? 최대의 승리 이후 자신을 절제하지 못한 기드온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승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의 백지수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이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경거망동과 교만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기가 찰 노릇이다.
3. “또”…… 망각이 망국의 시작이다(33-35절)
기드온과 미디안의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굉장한 자신감을 주었다. 그러나 이 과도한 자신감은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기념비적인 450:1의 승리 이후에는 승리에 도취하는 것보다 그 승리가 의미 있도록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진정한 승리의 삶은 “승리의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겨우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 그리고 목소리만으로 전쟁에 임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승리는 앞서 행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해야 했다. 하지만 이 중요한 사실은 전쟁이 끝난 승리의 현장에서부터 “망각”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위의 모든 적으로부터 자기들을 건져 내신 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새번역_34절).”
*당연히 하나님께 승리의 전리품들을 올려 드리며 영광과 찬양을 드려야 했다. 하지만 “그때” 승리의 현장에는, 승리에 도취되어 자기들만의 기쁨에 휩싸인 채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를 망각한 백성들만 있을 뿐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장면이 없다. 하나님의 이름은 쏙 뺀 채 기드온과 그의 아들, 손자가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하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백성들은 마치 기드온이 승리의 영웅(왕)인 것처럼, 겉옷을 펴고 그 위에 예물을 드리듯 귀고리들과 전리품들을 모아 기드온에게 주었다. 기드온은 말로만 왕위를 거절했을 뿐, 행동으로는 이미 왕의 권위를 누리며 군림하고 있다.
*승리의 현장,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그곳에서 정작 하나님은 잊혔다. 450:1의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끄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망각”의 망령이 겉으로 찾아온 “평화의 시간” 속에서 망국의 길을 닦고 있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22절). 보복과 처형의 과정을 지켜보며(13-21절) 이제는 미디안보다 기드온이 더 두려워졌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입술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감사 대신 기드온에 대한 찬사만 가득하다. 이전에 헛된 우상을 숭배하던 그들이 이제는 인간 기드온을 추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또다시 다른 압제와 공멸로 가는 길인 줄은 몰랐을 것이다.
-기드온은 승리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총 대신 자기 공적을 내세우며 백성에게 자기 몫을 요구한다(22-26절). 그가 진정으로 의지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이런 행동은 결코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기드온처럼 나도 여전히 ‘무시 못 할 존재’이며 대접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려고 안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한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입술과 행함이 일치하도록 절치부심해야 한다.
-왕이 되어 달라는 이스라엘의 요구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실 것이라며 거절했지만, 진심이 아니었다. 왕위는 거절했어도 왕이 아니면 요구할 수도, 누릴 수도 없는 막대한 부는 요구한다.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옷을 받아 입음으로써 그 욕망을 숨기지 못한다. 겉으로는 왕이 아니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왕이었다. 이미 권력욕에 빠져 버린 것이다.
-추앙받던 기드온이 한순간에 추락한다. 전리품으로 만든 승전 기념물인 ‘에봇’은 이스라엘의 올무가 되고 화근이 된다(27-28절). 그는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에 두었다. 에봇은 대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옷이었다. 대제사장만 입던 것을 음란한 방식으로 섬기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그를 따라 배교하는 길을 열어 주고 만다. 아버지 집의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없애면서 시작한 기드온의 사역이, 자기 집에 우상을 세우고 자신과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우상숭배의 죄를 저지르게 하면서 끝나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성공은 가장 치명적인 실패를 가져온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 다스리신다며 왕이 되기를 거부했으나, 행동으로는 자신이 다스리려는 모습을 보였고, 실제로는 우상(에봇)이 다스렸다. 시종일관(始終一貫)이 이토록 어렵다.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무성한 고백이 교회 안에서만 넘쳐나고, 정작 일상에서는 내가 만든 에봇이 나를 장악하여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기드온은 말과 행동이 철저히 달랐다. 왕위를 사양했으나 왕과 다를 바 없는 호사를 누린다. 이방 왕들처럼 많은 아내를 두고 많은 자녀를 낳는다. 특히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내 아버지는 왕이시다)’이라고 지을 만큼 왕이 되고 싶은 자기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29-32절).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데는 철저히 실패한다. 이 같은 이율배반적인 삶은 그의 선언(23절)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런데 기드온과 같은 모습은 유별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모두가 힘을 숭상하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그 힘이 지닌 위험성에 주목하여 경계하는 이들은 드물다. 유능한 지도자나 특정 인물이 모든 상황을 바꿔 주리라는 환상을 경계해야 한다. 주님께서 왕이 되지 않으시면 어디에도 참된 희망은 없다.
-기드온이 죽은 후, 이스라엘 자손은 숱한 대적들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고 다시 이방 우상들을 섬긴다(33-34절). 그들은 기드온처럼(6:13)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으니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선택한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했는지도 모른다(22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도움이 안 되면 언제든 폐기 처분할 수 있는 우상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도 혹시 내게 득이 되어야 하나님을 대접하겠다는 불경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나라가 아니면 많은 자손과 비옥한 땅, 풍요와 번영이 결코 자신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더 나은 삶의 조건을 구하기 전에, 내 삶에 주님을 왕으로 모실 마음의 환경을 마련하는 일이 가장 우선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기드온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기드온의 공적을 기억하지도,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않는다. 그의 죽음은 그들이 그토록 추앙하던 대상이 얼마나 미덥지 못하고 허망한 존재인지를 확인하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장차 다윗과 같은 참된 통치자의 도래를 기대하게 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세상의 모든 지도자와 인생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기드온, 그는 왕관 없는 왕으로 살았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왕이 되어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기드온은 많은 아내와 이방인 첩, 그리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일흔 명이나 되는 아들들을 두었다. 모두 타락한 왕들이 자행하던 일이었다. 완전한 권력과 힘을 행사하는 삶을 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삶에는 하나님이 없다. 자기 자신의 왕 됨을 누리는 이에게는 진정한 왕 되신 하나님을 모실 마음의 공간 자체가 없다.
-그런 기드온이 죽는다. 초기에 용맹하고 지혜로웠던 사사가 죽었다. 그는 왕이 되고 싶었지만 왕은 될 수 없었고, 사실상 왕 노릇을 하다 죽었다. 나라를 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나라를 우상숭배에 빠지게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사사로서 실패의 흔적을 남기고 모든 인생이 가야 할 길로 갔다.
-기드온의 죽음과 함께 여호와 신앙도 죽는다. 아니, 이미 죽어 있었다. 이스라엘이 이제 또다시 여호와를 떠나 바알을 따라 음행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을 기억하지 않고, 심지어 기드온의 집안이 이스라엘에게 베푼 은혜마저 무시한다. 이렇게 잊혀 가는 기드온의 운명이 씁쓸하나, 자초한 일이었다. 그가 우상숭배의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감사할 줄도, 기억할 줄도 모르는 백성을 낳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평화가 꼭 육신의 편안함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평화는 치열한 격전의 현장에서 더 깊이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앞서가시며 해결하시는 모습을 보면 상황은 긴박해도 마음은 잔잔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저 육신이 편안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 오히려 저주다!
-이스라엘이 “또” 망국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고 선언한 기드온의 말과 그의 40년간의 삶이 일치했다면 과연 그랬을까? 세겜 첩에게서 난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내 아버지는 왕이시다)”이라고 지을 정도로 말과 행동이 달랐던 사사 기드온이 “또” 이스라엘을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백성들도 할 말이 없다. 기드온이 승전 기념으로 만든(만들어서는 안 되는) 황금 에봇을 마치 눈에 보이는 하나님처럼 섬기는 영적 음란을 기꺼이 행하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온 이스라엘(27절)”이 그러했다. 미디안 연합군을 상대로 기막힌 승리를 경험했지만, 정작 그 기막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고작 눈에 보이는 황금 에봇과 바꿔 버렸다. 이런 무지함이라니……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이 무지가 결국 “또” 망각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망국으로 치닫는 줄도 모른 채 황금 에봇이 주는 평화에 취했다. 무려 40년 동안 그리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1. 그때에(22-27절)…… 이와 같이 하여(28절)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완전한 승리를 선언한 그때에 일어난 일이다. 승전 축하의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의 집안이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한다(22절). 기막힌 일이다. 7년 동안의 미디안의 압제가 끝난 그때,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야 하는데, 또다시 사람(기드온)의 통치를 요청하다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어두움이 매우 심각하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를 완곡히 거절한다. 자신의 집안이 다스리지 않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23절)”라고 선언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드온의 분별력이 고맙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두워진 마음과 눈이 마음에 걸린다. 7년 동안의 미디안의 압제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망쳐 놓은 듯하다. 승리로 완결된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기드온에게 찬사를 보낸다. 두고두고 아쉽다.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영적 무감각이 이토록 몰지각하다.
한편 기드온은 왕(통치자)의 자리는 거절했지만, 적어도 이 전쟁의 승리를 기념할 물건을 만들 생각은 있었나 보다. 왕으로서 통치하지는 않을 테니, 전리품 중에서 귀고리를 달라고 요청한다(24절). 백성들은 기꺼이(즐거이) 드리겠다며 겉옷을 펴고 탈취한 귀고리를 그 위에 던졌다(그런데 마치 왕에게 드리는 예물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해서 모인 금의 양은 자그마치 약 20kg(금 1,700세겔)이나 되었다. 뿐만 아니라 초승달 장식들, 패물, 미디안 왕들의 자색 옷들, 낙타 목 장식품 등이 기드온에게 모였다(25-26절). 기드온은 모인 금 귀고리로 “황금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 오브라에 두었다. 하지만 이것이 기드온과 그 집안의 올무가 되어 버렸다(27절).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까지만 좋았다. 딱 여기까지였다. 탈취한 귀고리를 요청하고 그 금으로 제사장의 의복인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에 두었는데, 이것이 가져올 또 하나의 우상숭배, 곧 보이지 않는 영적 배교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 그 에봇을 음란하게 위하였다. 즉 우상으로 숭배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형상이면 무엇이든 만들어 섬겨 버리는 우상 지향적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개역개정에는 “이와 같이 하여”라는 표현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새번역은 28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이와 같이 하여 미디안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복종하게 되었고,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은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나에게는 이 구절이 이렇게 읽힌다. “이와 같이 만든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이스라엘 땅에,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일까? 에봇을 의지한 평화가 아닐까?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온 이스라엘이 그곳에서 그것을 음란하게 섬겨서_새번역)” 누린 평화였다. 이것이 진정한 “여호와 샬롬”일까? 여호와 하나님 없이 황금 에봇을 의지하는 평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을 섬기겠노라며 만든 물건이 도리어 하나님이 되어 버린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나에게도 “하나님처럼” 섬기는 오늘날의 황금 에봇이 과연 없을까?
*가장 큰 영광과 찬송을 드려야 할 승전 축하의 날에 하나님의 이름은 쏙 들어가고, 황금 에봇에 눈길이 가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1~3계명을 어기는 것인 줄 정녕 깨닫지 못했을까? 단 한 사람도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아쉽고 아쉽기만 하다!
2. 기드온의 삶(29-32절)
승전하고 돌아온 기드온을 사사기 저자는 “여룹바알”이라고 부른다(29절). 뭔가 의미심장하다. 저자는 기드온의 삶을 소개하면서, “바알과 싸우는 사람”인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감히 바알을 따르지 못했지만,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바알들을 따라 음행하며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다고 기록한다(33절). “바알브릿”은 “언약의 주”라는 뜻이다. 세겜 지역에서는 “엘브릿(언약의 하나님)”으로까지 불렸다! 언약의 하나님과 비슷한 이름의 신을 자신들이 따르는 “바알들” 중 하나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저자는 이렇게 된 원인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은 것”(34절)과 기드온이 자신들을 위해 베푼 은혜를 아무도 기억하지도, 갚지도 않은 것(35절)을 지적한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세우셨던 기드온도 잊혔다. 기드온에게 받았던 은혜를 아무도 갚지 않았다.
*기드온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30절이다. “그런데 기드온은 아내가 많아, 친아들이 일흔 명이나 되었다(새번역_30절).” 당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승리를 이끈 사람이었으니, 에봇을 만들고 많은 아내를 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일까? 아쉽고 아쉽기만 하다.
*가장 잘나갈 때 가장 절제했더라면 어땠을까? 최대의 승리 이후 자신을 절제하지 못한 기드온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승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의 백지수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이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경거망동과 교만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기가 찰 노릇이다.
3. “또”…… 망각이 망국의 시작이다(33-35절)
기드온과 미디안의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굉장한 자신감을 주었다. 그러나 이 과도한 자신감은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기념비적인 450:1의 승리 이후에는 승리에 도취하는 것보다 그 승리가 의미 있도록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진정한 승리의 삶은 “승리의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겨우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 그리고 목소리만으로 전쟁에 임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승리는 앞서 행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해야 했다. 하지만 이 중요한 사실은 전쟁이 끝난 승리의 현장에서부터 “망각”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위의 모든 적으로부터 자기들을 건져 내신 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새번역_34절).”
*당연히 하나님께 승리의 전리품들을 올려 드리며 영광과 찬양을 드려야 했다. 하지만 “그때” 승리의 현장에는, 승리에 도취되어 자기들만의 기쁨에 휩싸인 채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를 망각한 백성들만 있을 뿐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장면이 없다. 하나님의 이름은 쏙 뺀 채 기드온과 그의 아들, 손자가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하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백성들은 마치 기드온이 승리의 영웅(왕)인 것처럼, 겉옷을 펴고 그 위에 예물을 드리듯 귀고리들과 전리품들을 모아 기드온에게 주었다. 기드온은 말로만 왕위를 거절했을 뿐, 행동으로는 이미 왕의 권위를 누리며 군림하고 있다.
*승리의 현장,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그곳에서 정작 하나님은 잊혔다. 450:1의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끄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망각”의 망령이 겉으로 찾아온 “평화의 시간” 속에서 망국의 길을 닦고 있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22절). 보복과 처형의 과정을 지켜보며(13-21절) 이제는 미디안보다 기드온이 더 두려워졌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입술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감사 대신 기드온에 대한 찬사만 가득하다. 이전에 헛된 우상을 숭배하던 그들이 이제는 인간 기드온을 추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또다시 다른 압제와 공멸로 가는 길인 줄은 몰랐을 것이다.
-기드온은 승리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총 대신 자기 공적을 내세우며 백성에게 자기 몫을 요구한다(22-26절). 그가 진정으로 의지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이런 행동은 결코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기드온처럼 나도 여전히 ‘무시 못 할 존재’이며 대접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려고 안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한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입술과 행함이 일치하도록 절치부심해야 한다.
-왕이 되어 달라는 이스라엘의 요구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실 것이라며 거절했지만, 진심이 아니었다. 왕위는 거절했어도 왕이 아니면 요구할 수도, 누릴 수도 없는 막대한 부는 요구한다.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옷을 받아 입음으로써 그 욕망을 숨기지 못한다. 겉으로는 왕이 아니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왕이었다. 이미 권력욕에 빠져 버린 것이다.
-추앙받던 기드온이 한순간에 추락한다. 전리품으로 만든 승전 기념물인 ‘에봇’은 이스라엘의 올무가 되고 화근이 된다(27-28절). 그는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에 두었다. 에봇은 대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옷이었다. 대제사장만 입던 것을 음란한 방식으로 섬기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그를 따라 배교하는 길을 열어 주고 만다. 아버지 집의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없애면서 시작한 기드온의 사역이, 자기 집에 우상을 세우고 자신과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우상숭배의 죄를 저지르게 하면서 끝나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성공은 가장 치명적인 실패를 가져온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 다스리신다며 왕이 되기를 거부했으나, 행동으로는 자신이 다스리려는 모습을 보였고, 실제로는 우상(에봇)이 다스렸다. 시종일관(始終一貫)이 이토록 어렵다.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무성한 고백이 교회 안에서만 넘쳐나고, 정작 일상에서는 내가 만든 에봇이 나를 장악하여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기드온은 말과 행동이 철저히 달랐다. 왕위를 사양했으나 왕과 다를 바 없는 호사를 누린다. 이방 왕들처럼 많은 아내를 두고 많은 자녀를 낳는다. 특히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내 아버지는 왕이시다)’이라고 지을 만큼 왕이 되고 싶은 자기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29-32절).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데는 철저히 실패한다. 이 같은 이율배반적인 삶은 그의 선언(23절)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런데 기드온과 같은 모습은 유별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모두가 힘을 숭상하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그 힘이 지닌 위험성에 주목하여 경계하는 이들은 드물다. 유능한 지도자나 특정 인물이 모든 상황을 바꿔 주리라는 환상을 경계해야 한다. 주님께서 왕이 되지 않으시면 어디에도 참된 희망은 없다.
-기드온이 죽은 후, 이스라엘 자손은 숱한 대적들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고 다시 이방 우상들을 섬긴다(33-34절). 그들은 기드온처럼(6:13)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으니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선택한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했는지도 모른다(22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도움이 안 되면 언제든 폐기 처분할 수 있는 우상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도 혹시 내게 득이 되어야 하나님을 대접하겠다는 불경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나라가 아니면 많은 자손과 비옥한 땅, 풍요와 번영이 결코 자신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더 나은 삶의 조건을 구하기 전에, 내 삶에 주님을 왕으로 모실 마음의 환경을 마련하는 일이 가장 우선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기드온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기드온의 공적을 기억하지도,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않는다. 그의 죽음은 그들이 그토록 추앙하던 대상이 얼마나 미덥지 못하고 허망한 존재인지를 확인하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장차 다윗과 같은 참된 통치자의 도래를 기대하게 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세상의 모든 지도자와 인생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기드온, 그는 왕관 없는 왕으로 살았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왕이 되어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기드온은 많은 아내와 이방인 첩, 그리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일흔 명이나 되는 아들들을 두었다. 모두 타락한 왕들이 자행하던 일이었다. 완전한 권력과 힘을 행사하는 삶을 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삶에는 하나님이 없다. 자기 자신의 왕 됨을 누리는 이에게는 진정한 왕 되신 하나님을 모실 마음의 공간 자체가 없다.
-그런 기드온이 죽는다. 초기에 용맹하고 지혜로웠던 사사가 죽었다. 그는 왕이 되고 싶었지만 왕은 될 수 없었고, 사실상 왕 노릇을 하다 죽었다. 나라를 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나라를 우상숭배에 빠지게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사사로서 실패의 흔적을 남기고 모든 인생이 가야 할 길로 갔다.
-기드온의 죽음과 함께 여호와 신앙도 죽는다. 아니, 이미 죽어 있었다. 이스라엘이 이제 또다시 여호와를 떠나 바알을 따라 음행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을 기억하지 않고, 심지어 기드온의 집안이 이스라엘에게 베푼 은혜마저 무시한다. 이렇게 잊혀 가는 기드온의 운명이 씁쓸하나, 자초한 일이었다. 그가 우상숭배의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감사할 줄도, 기억할 줄도 모르는 백성을 낳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평화가 꼭 육신의 편안함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평화는 치열한 격전의 현장에서 더 깊이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앞서가시며 해결하시는 모습을 보면 상황은 긴박해도 마음은 잔잔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저 육신이 편안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 오히려 저주다!
-이스라엘이 “또” 망국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고 선언한 기드온의 말과 그의 40년간의 삶이 일치했다면 과연 그랬을까? 세겜 첩에게서 난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내 아버지는 왕이시다)”이라고 지을 정도로 말과 행동이 달랐던 사사 기드온이 “또” 이스라엘을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백성들도 할 말이 없다. 기드온이 승전 기념으로 만든(만들어서는 안 되는) 황금 에봇을 마치 눈에 보이는 하나님처럼 섬기는 영적 음란을 기꺼이 행하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온 이스라엘(27절)”이 그러했다. 미디안 연합군을 상대로 기막힌 승리를 경험했지만, 정작 그 기막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고작 눈에 보이는 황금 에봇과 바꿔 버렸다. 이런 무지함이라니……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이 무지가 결국 “또” 망각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망국으로 치닫는 줄도 모른 채 황금 에봇이 주는 평화에 취했다. 무려 40년 동안 그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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