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요셉이 드디어 자신을 밝힌다. 유다의 진실한 탄원을 듣고 더 이상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이 민족으로 태동하기 위한 요람을 준비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도단의 들에서 비극적인 생이별을 해야 했던 형제들이 22년만에 얼굴을 직면한다. 형들은 난감함과 당황스러움이, 요셉은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처음온 그때부터 지금까지 참고 억눌렀던 재회의 기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특히나 요셉은 “한 사람의 아들들”이 “함께”하는 형제들인가를 주시하며 점검했다. 그들이 말한대로 “한 사람의 아들들”임을 진실하게 증명하는 시험에 시험을 진행했다. 이 시험에 형제들은 그들의 ‘범죄’를 스스로 고백함으로, 시므온을 구하기 위해 돌아옴으로,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 은잔으로 도붇으로 몰릴 때 공동 연대의 책임을 표명함으로, 결정적으로 유다가 베냐민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간절히 간구함으로 “증명” 되었다.
형제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난 22년동안 암묵적으로 묻어 둔, 절대 꺼내지 말아야 할 도단 사건이 자연스레 소환되고 이에 대해 직면하는 시간들이었다. 22년동안 외면하고 속이며, 감추었던 그 범죄에 “진실”하게 직면함으로서 이 시험들을 통과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시험”은 진실함으로 인도하는 지렛대가 틀림없다. 스스로 진실에 대면할 수 없다. 예상치 못한 시험이 진실에 직면하게 했다. 시험이 진실을 직면할 기회가 되었다. 이 순간이 없었다면 여전히 그렇게 아버지와 서로를 속이며 뻔뻔스럽게 살아갔을 것이다. 믿음의 가족이라고 했으니 이렇게 속이면서도 예배도 드리고, 사역들도 했을 것이다.
요셉을 통해 형제들에게 던져진 이 시험은 그야말로 은혜였다. 형제들은 이 시험 속에서 자신들을 돌아보고, 아버지 야곱과 베냐민의 관계도 진지하게 목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거쳐 회복에 이르게 하셨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은혜다.
1.한참 동안 울었다(1-4절)
달리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22년동안의 세월이 담긴 통곡이었다. “한참 동안 울었다. 그 울음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으로 물러난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바로의 궁에도 들렸다(새번역_2절).” 그의 통곡소리가 총리 관저와 바로의 궁에 울려 퍼졌다. 22년만의 재회의 기쁨은 이렇게 우렁찼다.
반면 형제들은 놀랐다. 요셉의 통곡 소리 만큼이나 마음이 놀랐다! “….놀란 형제들은 어리둥절하여, 요셉 앞에서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새번역_3절 하).” 유구무언. 말문이 탁 막혔다! 어찌할 줄 모르는 형들을 일일히 안으며 한참을 운다. 막내 베냐민을 꼭 끌어 안고 한참을 운다. 형제들은 함께 달려들어 요셉을 끌어안아야 하지만, 22년전 도단에서 저지른 일이 그들의 마음을 붙잡는다. 그들은 말문도 막히고 몸도 굳어져 버렸다.
한참 동안 울고 있는 요셉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베냐민을 부둥켜 안고 우는 그 모습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을 일일이 부둥켜 안고 우는(15절) 요셉에게 어찌 할 바를 몰랐다.
2.똑같은 사건… 다른 해석…(5, 7, 8절)
형제들은 얼어붙었고, 요셉은 기쁨의 통곡이 터졌다. 22년만의 형제 상봉의 현장이 왜 이리 어색할까? 당연하다. 형제들은 22년전 그 사건을 늘 감추고, 덮으며 외면하고 살아왔다. 울며 불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동생 요셉을 뒤돌아 보지 않고 노예로 팔아버렸다. 그렇게 하고 아버지 야곱에게 들짐승에게 죽었다고 속이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런데 그 요셉이 살아있다! 더구나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니…. 요셉을 만난 지금 형제들에게 22년 도단의 들이 소환 되었다. 그 때의 일이 해결되지 않은 형들의 마음은 딱딱한 경직함이… 이미 이 일을 해결한 요셉은 기쁨의 통곡으로 형들을 끌어안는다.
요셉은 이 22년전 도단 들의 사건을 성숙하게 해석한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새번역_5절).” ”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새번역_7-8절)”
형들이 나를 팔아넘기긴 했지만 “하나님이” 앞서서 나를 보낸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앞서 나를 보낸신 것은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기 위하여, 자손들을 살아 남게 하시려고 그런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애굽으로 나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형제들에게 선언한다. 요셉은 도단 들에서 팔려 애굽에서 보낸 노예생활을 이렇게 해석한다.
단지 보내신 것 뿐 아니라 ‘바로의 아버지,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 어른,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새번역_8절)이라고 말한다. 태양신과 그의 아들 바로마저 자신에게 절하였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기막히다! 하나님 이끄신 삶이었다는 것이다. 이해가 안되는 일을 통해, 억울한 시간들이 쌓여서, 그 기나긴 시간들을 바라보며 관통하는 요셉 스스로의 해석은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이 이끌어 주신 시간, 하나님이 완성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내 인생의 시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요셉처럼 해석하는 믿음이 간절하다.
3.지체하지 말고 애굽으로 내려오시라(9-13절)
아직 흉년이 다섯해나 남았음을 상기 시키며(11절) 형제들에게 ’이제 곧’ 아버지 야곱에게 가서 지체하지 말고 애굽으로 내려 올 것을 당부한다(9절).
요셉의 당부에는 매우 구체적인 애굽 이주 계획이 담겨 있다. 온 땅을 휩쓸 심각한 다섯해 동안의 기근 속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지키시려는, 더 나아가 이미 말씀대로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계획이 담겼다(창 15:13-14).
요셉은 형제들에게 극심한 기근 속에서 살아남도록 살 땅을 이미 살 땅을 고센에 마련하고 온 가족이, 모든 재산을 가지고 내려 올 것을 요청한다. “아버지께서는 고센 지역에 사시면서, 저와 가까이 계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여러 아들과 손자를 거느리시고, 양과 소와 모든 재산을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흉년이 아직 다섯 해나 더 계속됩니다. 제가 여기에서 아버지를 모시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안과 아버지께 딸린 모든 식구가 아쉬운 것이 없도록 해 드리겠습니다’(새번역_10-11절)”
“지체하지 마시고(9절)…빨리 모시고 내려 오십시오(13절)”
지난 세월 동안을 억울함과 원통함과 분노의 시간으로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의 시간으로 성숙하게 해석하였다. 이런 요셉의 신앙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나! 똑같은 시간을 보내며 세상을 향한 원망과 불평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은혜로 바라보고 채우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곧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다!
나는?
-그렇다! 극적인 형제 상봉의 감동보다 더 극적인 것은 요셉의 지난 삶에 대한 해석이다. “하나님이… 다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를 이루신 것이다” 이를 통해 분노와 원망의 시선을 가뿐히 뛰어 넘고 화해와 용서에서 나오는 기쁨의 통곡을 터뜨릴 수 있었다.
-요셉의 통곡은 한 맺힌 통곡이 아니라 용서와 기쁨의 통곡이었다. 이미 한은 풀렸다. 노예에서 총리로, 총리로서 애굽 전역을 다니며 성실하게 사역하고 결혼하여 얻은 첫 째 아들을 낳으며 이 고백을 고스란히 이미 담았다.(므낫세-잊다)
-그리고 그 고백이 오늘 실제가 되었다. 아무리 고백하여 해결했다 하더라도 원수를 직면했다… 그러나 원수같은 형들을 바라보는 요셉의 눈은 이미 변해 있었다. “하나님이.. 이끄신 길”이었기에 기꺼이 용서할 수 있었다. 요셉임을 밝힌 그 자리에서 형들이 온 몸이 ‘얼어붙은 것’과 비교가 된다. 22년전 도단 들에서의 범죄를 고백하고 회개 했지만, 당사자 요셉 앞에서 정작 온 몸음 얼어 붙은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이미 “하니님이 하신 일”에 대해 고백과 삶이 실제가 되어 있었다. 기꺼이 형제들을 끌어안고 기쁨의 통곡을 흘릴 수 있었다.
-이는 이미 가족들의 이주 계획을 세우고 살 땅도 미리 정해 놓은 것을 보면 분명하다. 아마도 형들이 첫 번째 식량을 구하러 올 때, 아니 아들 므낫세를 낳고 에브라임을 낳으면서 이미 준비했을 것이다. 요셉의 신앙고백은 이처럼 실제적이었다.
-아… 나도 이처럼 실제적으로 말하고(고백하고) 행동하는 목사이기를 원한다. 입술의 고백과 삶의 행동이 이처럼 일치되어 함께 갔으면 좋겠다. 그래야지.. 암… 그래야지….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을 실제 하며 누리는 삶이 얼마나 축복된 삶 이겠나! 요셉은 기나긴 애굽에서의 22년동안 이를 실제 하며 누렸다. 주님으로 인해 구원 얻은 삶을 사는 오늘… 나도 역시 입술의 고백과 삶의 행동을 이리 일치하며 주님 안에서의 삶을 누리기를 간절히 원한다. “…..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나는 나에게 허락하신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똑같은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인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이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과 똑같이 해석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눈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을 마음으로 알고 보아야 하리라.
*특히 요셉이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 ‘하나님이 저를 이집트 온 나라의 주권자로 삼으셨습니다…(새번역_8-9절)” 라고 말한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기억하고 온전히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감동과 확신을 잊지 않고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을 분별하고 있는가? 인생의 어떤 사건들을 만날 때 과거 어느 때 말씀을 통해 각인해 주셨던 그 감동들이 현실이 되었음을 알아 챌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 긴밀하고 인격적인 관계가 유지 되는가?
*이것이 내가 말씀을 끈질기게 묵상하는 이유 중 하나다. “말씀으로 주신 감동…. 말씀을 통해 확인하게 하신다”
*목회를 하면 할 수록 분명한 목표가 있다… “말씀이 살아내게 한다”는 것을 날마다 증명하는 것이다. 여러 상황과 여건속에서 나를 굳건하게 붙잡는 것, 앞으로 달려 나가게 하는 것, 온전한 쉼을 쉴 수 있는 것… 그것은 “말씀이 나를 살아내도록 이끄심”을 믿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 맡겨주실 영혼들이 이것 하나로 각자의 삶을 꿋꿋하게 감당해 나가도록 돕는 것이 곧 나의 목사로서의 사명이다. 이를 위해 오늘도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정리한다. 요셉의 “하나님이…” 하셨습니다의 고백이 오늘 나의 고백이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1. 베냐민을 반드시 돌려보내야 할 이유(20, 23, 26, 29-31절)
먼저 막내 동생 베냐민을 반드시 고향으로 데려가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베냐민은 아버지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인데 이 아이와 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친형은 죽고, 홀로 남았기에 아버지의 사랑이 각별하다(20절)는 것과 고로 아버지의 생명이 막내와 연결되어 있다고 간절하게 설명한다. 이 아이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지 못하면 아버지는 의욕을 잃고 목숨을 내려놓을 것이고(23절), 그러니 베냐민은 꼭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에 시기와 질투로 요셉을 잔인하게 팔아 넘긴 유다의 모습은 온간데 없다. 요셉을 없애므로 야곱이 받을 고통과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유다가 이제 아버지가 감당해야 할 고통을 걱정하고 있다. 실제로 유다의 호소에서 ‘아버지’라는 단어는 17번 정도 등장한다. 베냐민을 반드시 고향으로 보내야 할 이유가 ‘아버지 야곱’ 때문임을 분명히 한다. 유다는 지금 아버지 야곱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편애하는 야곱은 정말 변하지 않고 있으나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22년전 태연하게 요셉을 팔아넘기자고 했고 야곱의 고통스러움을 안중에 두지 않았던 그는 지금 야곱이 겪어야 할 깊은 절망에 공감하며 이를 방지하고자 적극 직면하고 있다. 두 아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음을 당한 그 깊은 고통을 통과해서일까?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2.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32-34절)
유다는 아버지가 받을 고통을 생각하며 베냐민을 돌려보내 달라고 호소하면서, 그를 대신하여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자청한다(32-33절). 자신은 그런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고 간청한다.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고 죽이려던 형제들에게 몸값을 받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자고 하여 노예로 팔아버린 유다가 이제 자신이 ‘노예’가 되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을 애굽에 두고 온 것으로 인해 상심하고 영혼이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는 것 보다 차라리 여기에 남겠다는 것이다.
베냐민과 연결된 아버지 야곱의 생명을 구하려고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내어 놓는다. 동생 베냐민뿐 아니라 아버지 야곱에 대한 사랑이 실제다!. 아버지의 지독한 편애를 넘어선 “긍휼”이 기꺼이 자신을 종으로 내어 놓겠다고 호소한다. 그가 애굽으로 내려오기 전에 아버지 야곱에게 약속했듯 기꺼이 ‘담보’가 되겠다고 한 것이다.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3.더 나아가(33절)
유다가 이렇게 확실하게 변화된 것은 “그러니,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 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새번역_33절).” 이 고백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간청하는 모습에서 말이다.
은잔이 나온 막내가 자기 죄값을 치루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막내를 대신해 남겠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 형제들도 다 내려가고 ‘자신만’ 총리의 노예로 이 땅에 남겠다는 것이다.
유다는 애굽으로 떠나오기전 아버지 야곱에게 한 맹세 그대로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요셉에게 보인다. 22년전 동생 요셉을 상인에게 팔아넘긴 그 형이 아니다. 이후 ‘제 멋대로’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고, 아내가 죽은 후 거리의 창녀를 찾았던 그 유다가 아니다.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나는?
-22년동안 요셉을 노예로 팔아 넘긴 후 유다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제 멋대로”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여 낳은 세 아들 중 두 아들이 악함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죽음의 심판을 행하셨다. 후손을 이어야 할 문제로 인해 갈등도 있었다. 그 와중에 아내도 죽는다. 창녀를 거리낌 없이 찾을 정도로 그의 삶은 무절제 했다. 그런 그가 변했다.
-동생 베냐민을 보호하고 아버지 야곱을 위하는 마음이 각별하다. 가족들을 기근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뒤처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약속한 대로 지키려고 자신을 기꺼이 자신을 내어준다. 달리 무엇을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하나님의 주권에 간섭받는 인생은 이렇게 변한다. 22년동안 무던히도 변화되지 않았던 것이 순식간에 이리 바뀔 수 있다. 격한 감정의 말을 쏟아내는 것이 진정한 변화가 아니다. 자신과 자기의 가족조차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 야곱이 처하게 될 고통과 슬픔을 막기 위해 자신을 내던진다. 말뿐 아니라 행동이 거리낌이 없다.
*22년전에는 동생 요셉을 시기하여 서슴없이 노예로 팔아 넘겼지만, 지금은 아버지 야곱을 사랑함으로 자기를 희생하고 막내 베냐민을 반드시 돌려 보내려 한다.
*멈추지 않는 기근 때문에 위기에 처한 가족들을 위해 자신을 담보하여 아버지 야곱을 설득했고, 이제는 아버지 야곱을 위해 베냐민을 대신하여 스스로 대신 노예가 되겠다고 자처한다. 온 인류를 위해 대속의 제물로 오신 예수님이 오시는 가문의 조상다운 면모가 틀림없다. 이런 자기희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이후 넷째지만 영적 장자와 같은 자리로 우뚝 서게 했다.
*”제가 대신하게 하소서” 요셉이 보고자 했던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진실한 형제애가 구현되고 있다. 진실로 한 형제됨이 드러난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온 은잔을 탓하기 보다 “다 함께” 총리 관저로 다시 돌아와 “함께” 탄원하는 모습에서, 더 나아가 유다가 나서서 자신이 남을테니 동생 베냐민이 반드시 돌아가야 할 이유를 ‘아버지 야곱’에 대한 사랑의 모습을 보임으로 이 시험은 이미 통과 되었다.
*베냐민과 함께 애굽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43:8)”라고 말했던 유다가 이제는 “베냐민과 형제들은 다 돌아가고 내가 남겠습니다”, 즉 “다 살고 나는 죽으리다”고 외치는 것이다.
*유다의 이 말과 행동이 곧 예수님의 모습이 아닌가! “내가 죽어 다 살리이다!” 유다가 확실히 변했다.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여 형제들과 아버지 야곱을 살리려 한다! 나도 내가 확실히 죽고 죽어 공동체가 살아나도록 해야겠다. 지독한 내 입장, 주장을 죽여 공동체가 살아나도록 해야겠다. 거창한 희생을 꿈꾸는 망상보다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나의 이기적인 마음부터, 자기 중심적인 생활태도부터 버려야 겠다.
*오늘 내가 기꺼이 자처해야 할 그 무엇을 성령님께서 생각나게 하실 때 머뭇거리지 않으리라. 그래야 공동체가 산다! 유다도 확실히 변했음을 보는데, 나의 삶도 이렇게 확실한 변화를 포기하지 않으리라. 공동체의 확실한 변화를 포기하지 않으리라.
*유다가 확실히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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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일어난 상황은 첩자에 대한 진실 유무 지만, 이때부터 요셉은 형들이 과거에 행했던 “범죄”에 대한 진실함을 스스로 고백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을 의지가 있는지를 시험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형들은 자기들끼리 애굽 총리가 막내 베냐민의 소환을 요청할 때 요셉에 대해 저지른 범죄를 고백하고 괴로워 했다(창 42:21).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죄에 대해 이실직고 했지만 범죄의 당사자인 요셉과 아버지 야곱에게 직접 죄를 고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요셉 앞에 섰을 때 그들의 말의 진실함은 형식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형들이 요셉 앞에서 첩자가 아님을 변호하기 위해 자기들은 “다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고 말했었다(창 42:11). 베냐민을 데려 오면서 열 한명의 형제들이 함께 모여 형식적으로는 이를 증명했지만, 진정한 “한 사람의 아들들”을 입증해야 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시므온을 애굽에 볼모로 두고 다시 돌아온 시점이 두 번 왕복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 보기에 따라 오해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한 형제들’ 이라면서 시급을 다투지 않은 모습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늦게라도 돌아왔고 막내 베냐민을 데려왔으니 요셉의 입장에서는 나름 시험을 통과 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시험이 남았다. 정말 “한 사람의 아들들”인 이 형제들에게서 막내 베냐민을 갈라놓는다면? 형들의 반응, 태도가 궁금했다. 베냐민을 22년전(노예 13년, 풍년 7년, 흉년 2년째) 자신처럼 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진정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하나되어 행동할 것인가?
요셉은 형들의 죄에 대한 자백이 진실한 것인지, 제대로 시험을 걸어본다. 22년전 도단 들에서 자신은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었지만 하나같이 그렇게 여겨지지 않고 버려졌기 때문이다. 형들에게 요셉은 다른 어미의 아들이고 꿈 이야기하며 잘난체 하며, 아버지의 편애로 채색옷만 입는 밉상이었다. 도단 들에 자신들을 찾아오는 모습을 보며 ‘꿈 대로 되나 보자’며 어떤 방법이든 상관 없이 “살해”하려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구덩이에 던지고,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자신을 외면한 채 태연스럽게 밥을 먹은 형들이었다. 그리고 눈 하나 껌뻑이지 않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인신매매로 자신을 넘겼다. 형들에게 자신은 “한 사람의 아들들”이 아니었다.
막내 베냐민에 대한 형들의 마음은 어떨까? 요셉을 잃은 후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중 유일하게 남은 그를 요셉에게 한 것 이상으로 편애 했을 그 시간들 속에서 형들은 과연 베냐민을 “한 사람의 아들들”로 진정 받아들였을까? 요셉이 시험하고 싶은 대목이 이런 부분일 것이다. 형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1.이구동성, 한 마음으로…(9, 13, 16절)
요셉이 청지기를 통해 미리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감춰두고 청지기를 보내 자초지종을 말하며 나무랄 때, 형제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러자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그런말씀을 하십니까? 소인들 가운데는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새번역_7절)…… 소인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서라도 그것이 나오면, 그를 죽여도 좋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우리는 주인의 종이 되겠습니다(새번역_9절).” 은잔이 나온 그는 죽여도 좋고 우리는 주인의 종이 되겠습니다! 일단 “한 사람의 아들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한 사람의 아들들’의 끈끈함이 일단 보인다!.
청지기는 모두가 종이 될 필요는 없고 은잔이 나온 자만 종이 되면 된다고 했다(10절). 그런데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오고 말았다! 형제들은 “이것을 보자, 그들은 슬픔이 북받쳐서 옷을 찢고 울면서, 저마다 나귀에 짐을 다시 싣고, 성으로 되돌아갔다(새번역_13절).” “한 사람의 아들들”이 “함께” 고통스러워 하며 움직인다! 은잔이 나온 베냐민만 따로 총리의 집으로 보내지 않는다. “다같이” 움직인다!
그리고 질책하는 요셉 앞에 모두가 엎드린다(14절). 호통을 치는 요셉에게 유다가 말한다. “우리가 주인 어른께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우리의 죄없음을 밝힐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소인들의 죄를 들추어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을 가지고 간 아이가 모두 주인 어른의 종이 되겠습니다(새번역_16절).” 우리와 이 잔을 가지고 간 아이가 모두 종이 되겠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함께” 종이 되겠다고 자청들을 한다.
2.하나님이 소인들의 죄를 들추어내셨으니….(16절)
이렇게 “함께”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의 끈끈함, 책임의식, 연대감을 보이는 형제들의 모습은 “진실”했다. 그저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만일 형식적인 것이었다면… 22년전 도단 들에서의 형들의 모습이 나타났을 것이다. 은잔이 별견된 베냐민과 자신들을 분리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 형제라며 “다같이 노예가 되겠다”며 함께 요셉의 집으로 돌아왔다. 형들은 22년전 도단 들에서 한 짓을 재연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는 요셉을 팔 때처럼 베냐민을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 요셉을 배척하거나 손 댄 것처럼 막내 베냐민을 그렇게 하지 않고 형들이 보호할 것이다. 형들이 베냐민과 함께 할 것이다 라며 당연히 함께 움직인다.
유다가 요셉에게 고하는 말 가운데 “하나님이 소인들의 죄를 들추어 내셨으니…” 이 죄는 자신들도 모르게 감추어진 은잔을 들추어 내신 것으로 문맥상 표현하지만, 실상은 22년전 요셉에게 지은 죄를 들추어 내신 것으로 읽혀도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아들들”이 아니었던 그 때의 죄를 들추어 내셔서 지금 다시 “한 사람의 아들들”로 이 위기를 직면하게 하신 것으로 받아 들인다.
더구나 이 말을 하는 이는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버리자고 인신매매를 제안한 유다이다. 유다는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다시 내려올 때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생명을 걸고 베냐민을 지키겠다고 약속도 했다. 이것이 기근에서 도움을 받으려는 얄팍한 마음이 아니었고 “진실한” 마음이었음을 증명하는 듯 하다.
유다 뿐 아니라 형들은 처음 식량을 구하러 내려온 그때 첩자로 몰려 감옥에 갇힌 3일동안 ‘요셉에게 지은 죄’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루에 담긴 삭량 값을 확인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범죄함을 깨달아 두려워 하였다. 또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내려온 애굽에서 즐거운 점심을 함께 나눈 후 발견된 은잔 앞에서 유다는 22년전 요셉에게 행하였던 일을 다시 상기했다. 그리고 다시는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형제중 어느 누구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연함으로 “다같이 종이 되겠나이다!” 바짝 엎드린다.
나는?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 맞다. 베냐민과 함께 애굽에 도착하고 이어진 애굽 총리와의 즐거운 오찬으로 볼모로 잡혔던 시므온도 구했고, 첩자가 아님을 증명하여 식량을 구하고, 기근으로부터 가족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늘 이렇게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는데, 형들에게 또 시험이 기다린다.
-요셉은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진정한 형제애가 있는지 또 다른 시험을 준비했다. 그런데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지난 22년전 지은 죄에 대해 다루신다. 형제애가 있는지 보려 했던 시험을 직면하면서 유다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들추셨다’ 고백한다. 이 고백은 이중적임에 틀임없다. 어느 누구도 몰랐던 감추어진 은잔을 들춰 내신 하나님이 이를 통해 22년전 요셉에게 지은 죄를 계속 상기 시키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이렇게 철저하게 다루신다. 그러니 예수님이 오실 수 밖에… 대충 얼버무리고, 덮고 가는 것이 은혜가 아니다. 철저하게 드러내시되…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케 하시면서 해결하지 못한 죄를 떠올리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죄는 회개하여 해결받고 가는 것이 신상에 좋다. 그런데 그 해결은 단지 고백이나 자백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행동의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고백 이후 변화가 분명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단지 말 몇마디, 흘리는 몇방울의 눈물이 다가 아니다. 삶의 변화가 진정한 회개의 열매다.
-말 뿐인 “한 사람의 아들들”의 관계… 시기와 질투가 살인으로까지 이어진 명목상의 형제들이 아니라 진실한 “한 사람의 아들들” 형제애가 증명 되어야 한다. 그 실제적인 변화가 증명되야 시험이 끝난다. 지금 요셉 앞에 선 형들은 22년전 도단 들의 그들이 아니다. 베냐민과 공동 운명 되기를 기꺼이 자청하는 모습으로 확연하게 변화 되어있었다. 자기들 끼리의 도단 범죄에 대해 고백하던 입술에서, 발견된 은잔 앞에서 함께 통곡하고, 옷을 찢으며, 함께 다시 요셉의 집으로 돌아가는 형들이 되었다. 그리고 기꺼이 “함께 남아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22년전 도단 범죄를 재연 하지 않았다.
*묵상하며 나의 가족과 교회 공동체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연결된 하나된 공동체”이다. 형식적인 공동체일까? 함께 울고, 웃는 진정한 공동체일까? 맞다! 우리 공동체는 예수님과 하나된 공동체다! 시험의 연속인 삶의 현장에서 “한 형제”인 우리의 공동체는 “함께” 시험을 감당하고 책임을 지려고 기꺼이 함께 할까? 맞다! 우리 공동체는 기꺼이 함께 감당한다!
*나의 삶도 언제나 시험의 연속임을 안다. 요셉이 형들을 지켜보듯, 누군가 반드시 내 삶을 지켜보고 있음을 안다. 일상의 소소한 문제에서부터 공동체의 큰 문제까지 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볼 것이다. 내가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는지 꼼꼼하게 바라 볼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바라 볼 것이다. 나는 요셉의 형들처럼 시기와 질투에 취해 “한 사람의 아들들”이기를 포기한 결정의 도단 들에서 살지 않겠다. 은잔이 발견된 현장에서 함께 울고, 함께 달려와, 함께 엎드리는 그 현장과 같이 살겠다.
*묵상하며 문득 든 생각은 요셉의 치밀한 시험이다. 이만 하면 됐다에서 멈추지 않았다. 확실하게 확인하려고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한다. 단지 복수를 위한 시험이 아니라 변화를 확인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22년전 형들의 행동에 대하여는 이미 첫째 아들 므낫세를 낳으며 하나님 앞에서 정리했다. 그럼에도 형들을 어떤 지점까지 줄기차게 밀어부친다.
*놀랍다! 문득 공동체에서 사람에 대하여 너무나 가볍게(?) 믿는 경향이 떠올랐다. 특히 이런 경우와 상황으로 인해 공동체의 고통이 가중되는 경우를 꽤 보았기에.. 요셉의 치밀한 시험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싶다. “적어도 삶의 어떤 상황에서 그는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는지” 치밀하게 살펴보는 올바른 분별력은 정말 중요하다.
*이 세상은 험하고 인간은 악하다… 살펴보고 분별하여 판단해야 한다. 성도라고 무작정 믿으면 절 대 안 된다. 살펴볼 시간, 분별할 사건 등을 충분히 거치고 판단해야 한다. 그가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는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결정인지… 공동체를 위하는 결정인지… 분별하는 것이 곧 축복이다. 22년이 흐른 시간 속에서 형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요셉은 철저하게, 매몰차게 검증했다.
*이구동성… 우리도 세상의 시험을 직면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이구동성으로 고백하기를…
*함께… 문득 이런 말씀이 생각난다. “즐거워 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교회 공동체는 이래야 한다.
*나의 마음의 상태, 삶의 상황이 기준이 아니다. 말씀 앞에 무릎 꿇고 말씀에 하나되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이구동성의 고백과 행동이 삶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우선이다! 말씀 우선의 습관이 최소한 말씀이 나를 붙잡는 경험의 출입구다! 이 출입구가 없다면… 빨리 만들어야 한다. 뜬금없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본문 과도 상관 없다. 그런데 이 생각이 난다. 마치 전혀 연관성 없는 애굽 총리앞에서 22년전 도단 들 에서의 죄가 생각나는 유다와 형제들과 같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말씀 대로 살아가려는 몸부림의 출입구다. 이 출입구의 문지방이 닳아야 산다. 적어도 말씀을 다루는 목사라면 그래야 한다…. 내 마음을 헤집는 말씀을 경험해야하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고뇌하는 것이 일어나야 산다. 아픔이 있어야 성숙해 지듯, 말씀고민, 말씀직면, 말씀도전이 없는 목사가 어떻게 말씀으로 산다 할 수 있을까!….. 나의 삶이 이 말씀 고뇌가 끊이지 않는 삶 이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1.어리둥절… (16-22절)
애굽으로 내려가는 형제들의 발걸음은 “급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베냐민과 동행하니 “다 살고 죽지 아니할” 구원의 여정일 수 있겠지만, 벌써 두 번이나 왕복 했을 시간이 지났으니 애굽 총리의 마음에 자신들이 첩자임을 확신할 수도 있는 충분한 정황이었다. 볼모로 잡혀있는 형제가 있음에도 이렇게 감감무소식이니 이들은 틀림없이 첩자다 라고 여길 수 있는 정황이라는 거다.
무슨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애굽을 향한 급한 걸음의 형제들…그 두려움과 불안의 길 끝에… 애굽 총리 앞에 섰다. 요동 쳤을 그들의 마음이 쉽게 짐작이 간다. 그런데 한 애굽 사람이 오더니 그들을 총리의 집으로 안내한다. 그리고 그 집에는 점심 식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진심 예상치 못한 일에 ‘어리둥절’… 하지만 두려움을 더욱 커져 갔다. 뭔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일이 분명 잘못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총리가 요구한대로 ‘막내 동생’을 데리고 왔지만, 지난번 식량 구매 대금이 그대로 자루속에 들어있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빨리 그것부터 해명해야 했다. 말도 통하지 않을 총리에게 감히 직언 할 수 없으니 자신들을 안내하는 청지기에게 그 사정을 자세하게 말한다. 이야기를 다 들은 청지기의 반응이 형제들을 다시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세상에 애굽 사람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2.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23-24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23절)” 세상에 이게 무슨 말인가!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라니, 애굽에서 자신들이 집안에서 이야기하던 그 말을 애굽 사람의 입을 통해 듣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형제들은 아직 알지 못하지만 요셉은 이미 애굽으로 노예 생활을 하면서부터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살았다.
이를 보디발이 인정했고, 간수장이 인정했으며, 바로도 인정하였다. 그렇게 총리에 오른 후에도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바로에게 애굽의 이름을 하사 받았어도 자기 아들들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담긴 히브리 이름을 지어 주었다. 7년의 풍년을 지나면서 성실하게 자신의 직무를 감당하고 변치 않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았을 요셉이었다. 그런 그를 가장 가까이서 모신 청지기의 입에서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형제들이 어리둥절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들은 익숙한 ‘아버지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자신들이 먼저 고백하고 붙잡았던 것이 아니라 애굽 사람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또 이로 인해 자신들이 잊어 버리고 있었고, 지금껏 제대로 부르지 않았지만, 익숙하기 그지 없는 그 이름, “아버지의 하나님”을 우리는 왜 부르지 않았을까! 라는 마음의 꿈틀거림이 있었을 것이다.
아. 우리는 아버지의 하나님을 잊고 살았구나. 지금껏 “급히” 애굽을 내려 오면서도.. 아버지 야곱이 빌어준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14절)” 이 기도를 잊고 있었구나! 애굽 사람의 ‘너희의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 이 말이 형제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일깨운다!
3.꿈이 이루어졌다!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다(26절)
“요셉이 집으로 오니, 그들은 집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선물을 요셉 앞에 내놓고,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새번역_26절).” 요셉의 첫 번째 꾼 꿈, 열 한 곡식단이 자신에게 엎드려 절한 그 꿈이 이루어졌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한 것도 비로소 온전히 이루어 졌다. 이제 야곱의 가족이 이주하고 애굽에서 420년을 보내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요셉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을 이루신 하나님은 훨씬 이전 그의 증조부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하신 대로 차근 차근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가고 계신다.
나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형제들의 부분적인 변화들이 보였다. 늘 속이는 데 익숙했던 형제들이 기근이라는 위기와 시므온이 붙잡혀 있는 상황을 거치면서 점차 “정직함”을 회복하고 있다. 정황상 끝이라고 생각하는 지점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이실직고’하는 것일 수 있지만, 먼저 자신들의 자루속에 담긴 식량값의 자초지종을 솔직하게 청지기에게 이야기한다. “고난을 거치며 정직이 회복 되었다.”
-또 형제애가 점차 공고해져 가는 것을 본다. 엄밀하게는 ‘제멋대로’에서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점차 회복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유다”이다. 제멋대로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고 제멋대로 분가하여 살던 유다가 이 위기의 상황에서 ‘자원하여 희생’한다. 시므온도 살리고 가족들도 살리고, 베냐민을 끝까지 지켜 돌아오겠다며 맹세했다. 이 모든 모습은 오로지 기근에서 “우리 가족”이 다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형제들도 어떤 일이 기다릴 지 모르는 애굽으로 식량과 시므온을 구하기 위해 “함께” 떠난다. 20년전 요셉을 죽이고, 팔아넘기기 위해 하나되었던 형제들이 이제 “온 가족”을 기근에서 구하기 위해 “하나”가 되었다. 특히 자루속에 담겨진 식량값에 대하여 형제들 모두가 정직하게 연대하여 책임을 지려 한다. “하나님의 주권이 돌아온 야곱의 가족의 변화는 ‘정직’함부터 회복되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겉으로 보기에 정직함은 회복 되었다쳐도, 정말 중요한 것이 남았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의 회복이다. 길을 떠날 때 아버지 야곱의 축복을 형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을 수 있다. 여지껏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 형제들은 그 급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전적으로 매달리지 않았다. 사흘동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겨우 생각해 낸 것이 ‘하나님이 요셉의 일로 우리를 이 지경에 몰아 넣으신 것이다’였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매달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런 형제들의 마음과 귀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요셉의 청지기의 고백은 충분히 영적 충격을 받게 했을 것이다. 애굽사람의 입에서 나온 “너희의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23절).
-야곱도 형제들도 지난 20여년의 시간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보낸 시간이기보다, 속이고 속임 당하고 한탄하고 좌절하며, 스스로 고백한 것 처럼 ‘스올’에 파묻힌 세월이었다. 자기 자신밖에 보지 못한 세월이었다.
-애굽에 붙잡힌 시므온을 구하기 위해 급히 달려온 걸음 속에서도 건성으로 듣다시피 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라는 야곱의 축복은 신경도 쓰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너무나 부끄럽게도 자신들은 등한시한 하나님의 이름을 애굽의 청지기의 입을 통해 듣는다. 그것도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이다.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은 어느 정도 수긍하겠는데, ‘너희의 하나님’이라니… 너무나 낯부끄러웠을 것이다. 이와같은 영적 어리둥절함의 충격이 하나님의 이름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와 우리가 이런 당황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세상이 “너희의 하나님”의 정신을 오히려 교회에게 깨우치고 있는 형국이다. 하나님만 섬긴다는 교회와 하나님도 섬긴다는 세상이 오히려 교회보다 더 나은 품위를 보여주는 형국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이 말해주는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소리에 너무나 낯부끄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이 낯부끄러운 시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직하게 직면하게 할 것이다. 이 낯부끄러운 시간이 세상이 들려주는 ‘너희의 하나님’이 아니라 당당하게 외치는 ‘우리의 하나님’을 들려줄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사실 요셉의 청지기가 요셉에게 이와같은 영향력을 받았기에, ‘너희의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았겠나! 더온누리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당당하고 선명하게 ‘우리의 하나님’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공의와 정의, 성실함의 삶을 각자가 살아내어, 그 모습과 영향력을 받은 이들이 ‘너희의 하나님’을 자연스레 말하고 더 나아가 그들도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동체말이다.
*언제까지나 영적으로 어리둥절한 상황을 만나는 공동체가 아니라 어느 자리, 어떤 상황에 직면하든지 “우리 하나님”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꾸고 싶다. 그 꿈이 이루어질 날이 반드시 온다! 말씀해 주신대로, 이루어질 진다.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면서 반드시 이 즐거움을 누릴 때가 올 것이다. 영적 어리둥절함은 이제 그만 그치고 하나님 나라의 선한 영향력을 즐겁게 누려보자! 요셉과 형제들이 즐거운 오찬을 나누는 것 처럼…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1. 다시 애굽으로 가야 하는 요셉의 형들(1~5절)
어느 새 한 해가 지났다. 가나안 땅의 가뭄은 더욱 심각해졌다. 야곱의 아들이 애굽에서 사온 식량도 축났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으로 다시 가서 식량을 조금 사오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형제들은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형제들이 붙들려 있는 시므온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절도범으로 몰린 처지에서 두려움이 앞섰을 것이다. 야곱도 목숨처럼 아끼는 베냐민을 그들과 함께 보내야 하는 문제를 피할 수 없었기에 식량이 축날 때까지 애굽으로 보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극심한 기근 속에서 시므온의 생환은 최우선 과제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유다가 형제들을 대표하여 야곱을 설득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다는 야곱 가문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유다는 르우벤과 레위와 함께 아버지의 총애를 받기 어려운 전력일 지닌 아들이었다. 부모의 뜻을 거슬러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고, 며느리 다말의 계략에 휘말려 부끄럽게 두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39장). 그럼에도 유다가 현재 위기의 해결사를 자처하는데, 최적의 적임자는 아닐지 몰라도 최상의 해결사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유다는 반드시 막내 베냐민을 데려가야 한다고 아버지를 설득한다(3절). 애굽 총리가 막내동생을 데려오지 않으면 접견이 불가하다며(내 얼굴을 보지못하리라) 으름장을 놨다고 말한다. 그래서 야곱을 필사적으로 설득한다. 유다의 논리와 명분은 뚜렸했다. 만약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총리를 접견할 수 없으니 전혀 식량을 살 수 없게 된다. 이는 식량이 동난 온 가족의 죽음을 의미한다. 야곱은 유다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2. 베냐민을 위해 희생을 각오하는 유다(6~10절)
야곱은 애굽 총리에게 베냐민의 존재를 알린 아들들을 원망한다(6절). 그들이 경솔하게 막내아들을 언급해서 자신이 이런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질책을 들은 뒤 유다가 아닌 아들들 모두가 아버지에게 항변한다. 자신들은 애굽 총리가 그런 요구를 할 줄은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7절). 애굽의 총리가 가족 관계를 꼬치꼬치 캐물었고, 그래서 아버지와 막내 동생의 존재를 상세히 답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유다는 계속해서 베냐민이 함께 가면 자신들이 밀정 협의를 벗고 식량을 구해 전 가족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야곱을 집요하게 설득한다(8절).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담보물로 내놓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다. 만일 베냐민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 일을 자신이 책임질 것이며평생 아버지 앞에서 죄인으로 살겠다고 약속한다(9절). 이 장면은 성경 전체 구속사의 중대한 장면의 하나다. 유다는 막내 동생과 가족 전체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물로 내놓는다. 유다는 다윗의 조상이며, 궁극적으로 유다의 뿌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다. 가족을 구하기 위한 그이 자발적인 희생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 희생을 당하신 그리스도가 엿보인다.
형제들의 마음은 다급했다. 식량은 고갈되었고, 시므온의 목숨이 위태롭다. 그래서 유다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며 망설이는 아버지를 재촉한다(10절)
3. 아들들을 다시 애굽으로 보내는 야곱(11~15절)
야곱이 마침내 아들들의 간청을 받아들인다. 야곱은 애굽 총리를 위한 특별한 선물을 ‘큰 통’에 담아 준비한다. 가나안 땅의 아름다운 소산물인 ‘유향, 꿀, 향품, 몰약, 유향나무 열매(피스타치오), 감복숭아(아몬드)다. 그리고 첫 번째 여행 때보다 두 배의 현금을 준비해서 보낸다. 갑절의 돈(12절)은 딸려온 돈에 새로운 식량 구입비를 더한 총액을 가리킨다(43:21~22).
야곱은 뭔가 일이 잘못되어 누군가의 실수로(미쉬게, 무심코 저지른 실수), 돈꾸러미들이 딸려 왔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두 번째 여행은 첫 번째 여행과 달리 식량을 사는 목적 외에 그 총리와의 특별한 접견을 위해 떠나야 했다. 더구나 시므온이 볼모로 잡혀있고, 거액의 돈 꾸러미가 딸려 와 범죄 혐의를 쓰고 있을 가능성이 커서 대단히 위험한 여행이었다.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의 특별한 은혜(라함)’를 구한다. ‘라함’은 연민에서 비롯된 자비심과 동정심을 가리킨다. 야곱의 절박함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표현된 것이다. 지금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을 필요한 시기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15절)’라는 그의 마지막 말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말이 연상된다. 설사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베냐민과 야곱 가족의 운명은 애굽 총리가 아닌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전적으로 표현하고 의지한 것이다.
나는?
-야곱이 베냐민에게 집착하는 동안 두 번이나 애굽에 다녀올 시간이 지났다. 기근이 그칠 줄 알았고, 그러면 시므온을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야곱의 생각과 달리 기근은 심해졌고, 양식은 바닥이 났다. 창세기 야곱의 서사는 ‘양식(팥죽)’을 볼모로 장자권을 빼앗던 그가 이제 ‘양식’ 때문에 가장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음을 보여준다. 어찌되었든 자기밖에 모르는 철부이 가장의 모습을 감출 수 없다. 도를 넘은 자식 편애가 그이 가족을 힘들게 하고 위기로 몰아간다.
-어떻게든 베냐민을 내놓지 않으려는 야곱과 지신을 희생시킬 각오까지 하는 유다가 자연스럽게 비교가 된다. 유다는 다른 가족과 자신의 어린 자녀들의 생명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아버지 야곱의 집착을 책망하듯 지적한다. 유다는 야곱에게 간절히 호소하며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설득한다. 심지어 자신이 담보가 되어서라도 베냐민의 안전은 책임지겠다고 나선다. 자기를 희생하는 유다의 이런 모습은 우리를 위해 담보가 되신 그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떠올리게 한다.
-야곱은 애굽 총리를 만족시킨 예물과 두 배의 돈과 함께 베냐민을 보내기로 작정한다. 이제야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이 아들 베냐민을 “잃으면 잃으리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하나님만 의지한 믿음은 아니다. 총리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가나안의 토산특산품들을 준비하고, 돈 도 두배로 준비하여 도둑 누명을 벗기려 한다.
-자기 부정만이 슬픔과 상실의 순환을 때뜨리고 배반과 속임수의 악순환을 그치게 한다. 하나님께 내 삶의 주도권을 넘길 때 상상도 못한 내일,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기이한 내일이 열린다. 하나님께서는 이 순간을 기다리셔다. 자기애를 포기할 때 전증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진심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야곱은 라헬에게서 낳은 두 아들 중 하나를 잃었고, 이제는 나머지 하나마저 내어주기 않으면 안 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다다랐다. 왜 베냐민의 존재를 말했는지 유다와 나머지 아들들을 원망해보아도 베냐민을 애굽으로 내려보내는 것 외에는 기근에서 가족들을 구할 다른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낸 야곱의 결단은 가족들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모르지만, 전에 더 큰 절망에 빠졌던 요셉을 살리신 하나님은 베냐민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모든 가족까지 살리실 생명의 길을 예비해놓고 계셨다(15절). 지금 눈에 보이는 상황이 나를 절망케 할 때 생명의 길로 옮기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야곱의 요지부동을 흔든 것은 본문에서만 보면 유다의 자기 희생이다. 자기 목숨을 담보로 결연하게 야곱의 마음을 흔들었다. 표면상으로는 그렇다. 이것을 폄하 해서는 안 된다. 유다는 이 일로 이후 형제들에게 영향력을 공고히 하게 된다. 장남 르우벤을 대체할 장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그리고 혈통으로는 이후 다윗과 예수님이 이 후손으로 나게 된다. 더구나 유다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고, 며느리 다말과의 일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유다가 결연하게 일어선 것을 모세는 의미있게 기록해 놓았다.
*앞뒤 좌우로 꽉 막힌 상황을 뚫는 활로는 결국 “자기희생”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떠밀려 했든, 자발적으로 했든 중요한 것은 “희생”이다. 하지만 본문의 유다는 순전히 자발적으로 나선다. 유다의 과거에 상관없이 가족들에 대한 자발적인 희생은 온 세상을 위한 예수님의 자발적인 희생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다고 유다에게만 초점이 맞춰져서는 곤란하다. 요셉이야기의 핵심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 희생이라는 초점으로만 본다면 르우벤이 자신의 두 아들을 담보로 애굽행을 촉구한 것은 자기희생이 아닌가? 그런데 야곱은 그런 르우벤의 모습에 꿈쩍하지도 않았다. 일단 식량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신대로 흉년은 7년동안 지속될 것인데, 그것도 첫 해부터 극심한 기근이었다. 야곱은 베냐민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일단 구해온 식량으로 견뎌보자는 심산이 더 컸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계획 하신대로 기근은 멈추지 않았다. 식량은 떨어졌다. 야곱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좌절과 뻔히 보이는 가족들의 굶주림 앞에 더 이상 ‘자기 집착’, ‘요지부동’을 고수 할 수 없었다. 모두가 죽을 집착, 요지부동의 고집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는 “섭리”앞에 내려 놓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야곱의 요지부동을 무너뜨린 것은 ‘결사각오’의 유다의 희생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다. 말씀하신대로, 기근을 이끌어가시고 이를 통해 가족이 민족이 되게 하는 요람인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실 계획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다의 모습에서 꽉 막힌 상황에서 리더가 해야 할 본분을 분명히 보여 준다. “자발적인 희생” 의 가치가 공동체의 활로를 열어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희생이 구원의 길을 여신 것처럼, 이 모습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일상속 가장 꽉 막힌 순간, 나의 목자되신 주님의 희생을 생각하며 그 길을 따라 가련다! 이 결심이 잊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야곱은 이렇게 내몰린 상황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가 이 상황을 주관 하실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간절히 해결해 주실 것을 기대한다. 드디어 야곱의 영적인 기근에 소나기가 왔다. 이제껏 찾아볼 수 없었던 하나님과의 오랜 기근에 단비가 내린다. 참 아이러니하다. 내몰리고 내몰린 한계점에서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런데 이 모습이 낯설지 않다.
*나도 이런 모습일 수 있다. 내가 집착하는 어떤 것에 요지부동하여 공동체에 근심을 던져줄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내 몬 한계에 이르러서야 두 손들고 항복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야곱의 이런 모습, 나에게 “반면교사”가 되기를 원한다. 무던히도 무감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한편 본문은 드디어 야곱이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요셉을 잃은 후, 아니 그 전부터 일수도 있겠다. 자기 삶을 철저하게 자기 힘으로 자기 방법으로 고집했던 야곱이었다. 이것이 베냐민에 대하여 특히 더 요지부동 삶의 방식에서 드디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감동시키셔서,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게 해주시기를 빌 뿐이다. 그가 거기에 남아 있는 아이와 베냐민도 너희와 함께 돌려 보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자식들을 잃게 되면 잃는 것이지, 난들 어떻게 하겠느냐?(새번역_14절)”
*결국 삶의 주권을 하나님에 내어 드리기 까지의 여정이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 백성의 삶에 지루하도록 계속 되는 싸움은 이 싸움이다. 결국 주도권 싸움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 삶 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면 내가 최선을 다해 준비한 것이 헛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고 또 의지할 때 나의 최선의 땀방울이 헛 되지 않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 없는 발버둥은 헛수고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삶이 최선, 최고이다.
*야곱의 집에 하나님의 주권이 돌아왔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요셉과 가족의 상봉을 다루는 본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본문은 기록 되지 않았지만 7년 흉년이 시작되면서 요셉은 언젠가 가족들이 식량을 구하러 올 것을 분명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7년의 풍년을 보내면서 이렇게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실제하며, 자기의 꿈이 어떻게 이루어지려는가에 대하여 한 순간이라도 생각을 하지 않았을리 없다. 애굽으로 팔려와 총리가 되기까지 고난과 고통의 기억이었던 지난 날이 므낫세를 낳고서 하나님의 큰 그림의 인도함이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의 상처에서도 회복이 되었다. 그리고 에브라임을 낳으면서 더욱 확신 할 수 있었다. 후에 형들에게 고백한 것처럼 자신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셔서 이 모든 환난을 준비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형들에 대한 마음의 상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게 하셔서” 이미 회복 되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형들과 야곱은 다르다. 요셉이 애굽에서 그 파란만장한 삶을 걷고 있을 때, 가나안의 야곱 가족은 짙은 암흑속의 길을 걷고 있었다. 형들은 요셉을 팔아 넘긴 후 지금껏 야곱을 속이기 위해 거짓된 삶을 살았어야 했다. 요셉에 관해서는 늘 야곱을 속이고 있었다. 야곱은 요셉을 들짐승에게 잃은 후(형들의 거짓 속임으로 늘 이렇게 생각했다), 아마도 꿈을 꾸어도 짐승에게 요셉이 찢기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이 모든 재앙의 시작은 자신이 요셉을 형들에게 보냈기 때문이라 생각해서 그 고통은 더 심해져 갔을 것이다. 이에 따른 결과는 라헬에게서 얻은 두 아들 중 남은 베냐민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편애였다. 어림잡아 족히 30세가 넘었을 베냐민을 여전히 보호하려고 한다. 만약 아직 이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아버지 야곱의 몫을 구하러 가기 위해 충분히 홀로라도 갈 수 있는 나이임에도 야곱은 베냐민만은 자신이 꼭 지켜야 한다고 고수하였다(42:4).
요셉을 잃은 후 야곱은 더욱 라헬에게서 얻은 자식에 대해 편애에 빠졌고, 그러면 그럴수록 나머지 형들의 마음은 아버지를 속이고 요셉을 팔아넘긴 것에 대하여 굳은 마음이 되었다. 형들과 아버지 야곱의 관계는 큰 간격이 존재했다. 그런데 20년이 넘도록 요지부동한 이런 관계에 균열이 일어난다.
1. 우리가 이제 괴로움을 당하는구나!(21-22절)
엉뚱하게도 첩자로 오해받아 사흘간 애굽의 감옥에 갇히고,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하려면 가나안에 남아있는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오라는 애굽 총리의 명령 앞에 20년전 자신들이 저질렀던 죄악이 소환된다.이 기간 동안 요셉에게 저질렀던 일은 철저히 감춰지고 잊혀진 것이었다는 의미다. 심지어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는 맥락이다.
하나님은 때로 죄인줄 자각조차 하지 못하거나 혹은 망각하고 있던 것을 의외의 사건을 통해 자각 시키실 때가 있다. 전혀 연결점이 없는데 마음을 요동 시키신다. 의식하지 않고 있지만 그 죄악은 무엇이든 연결되어 있어서 생뚱맞은 일이 계기가 되어 소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때 이렇게 먼저 시작하실 때가 있다.
형들의 깨달음… 르우벤의 절규… 이것은 요셉도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이었다. 통역을 세워 놓고 이야기 했기에 설마 애굽 총리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알아듣고 있으리라고 상상하지도 못한 채 20년전 요셉을 팔아넘길 때의 상황을 서로 소환 한 것이다. “그렇다! 아우의 일로 벌을 받는 것이 분명하다! 아우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에, 그가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가 아우의 애원을 들어 주지 않은 것 때문에, 우리가 이제 이런 괴로움을 당하는구나.”(새번역_21절) “….. 그러기에 내가 그 아이에게 못할 짓을 하는 죄를 짓지 말자고 하지 않더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가 그 아이의 피값을 치르게 되었다.”(새번역_22절) 요셉의 살려달라는 애원조차 20년의 세월속에 철저히 감추었던 형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깨뜨리셨다. 생각지도 못한 애굽에서의 3일 동안의 감옥생활은 “요지부동”했던 요셉에 대한 마음에 균열을 가져 왔다.
2.듣다 못한 요셉… 잠시 물러가 울었다(24절)
형들의 대화 속에서 20년동안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들었다. 형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자신을 철저하게 외면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르우벤 형이 자신을 변호하려고 했던 것은 처음 알았다. 그래서였을까?
요셉은 이미 장자로서의 권위를 잃어버린 르우벤도 아니고 그 뒤를 잇는 유다가 아니라 셋째 시므온을 볼모로 잡는다. 그것도 형들이 보는 앞에서 끈으로 묶는다(24절). 형들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20여년전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 넘길 때를 되살리는 데자뷔였다. 시므온이 묶이는 것을 보며 그들은 요셉을 자신들의 손으로 묶어 상인들에게 팔았던 기억이 소환 되었다. 그 “못할 짓(새번역_22절)”이 새록새록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요셉은 형들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이미 므낫세를 낳으며 치유 되었던 마음에다 위로를 얻었다. 아, 르우벤 형은 나를 도우려 했구나. 20년전 그렇게 매몰찼던 형들이 지금 그 일을 기억하며 두려워하고 있구나. 그리고 요셉의 마음은 더욱 확고해진다. 형들과 가나안에서 굶주리고 있을 아버지 야곱, 그리고 가족들을 생각하면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 시므온을 포로로 붙잡고 나머지는 막내 베냐민을 데리러 오라는 조건부를 달아 충분한 곡식과 여행 식량까지 챙겨서 돌려 보낸다. 그리고 형들은 모르게 곡식값을 곡식 자루에 넣어 주었다.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애달픈가!
형들의 대화를 들으며 잠시 방으로 들어와 흘린 눈물은 이미 용서한 형들에 대한 연민의 눈물이었다.
3.그러나 요지부동의 야곱(36-38절)
야곱은 아들들이 겪었던 애굽에서의 곤란함은 안중에도 없다. 자초지종을 들으며 이미 시므온을 잃어버린 아들로 단정한다(36절). 베냐민을 결코 보낼 수 없다는 의지로 읽힌다. 이런 지독한 편애라니, 이런 지독한 자기중심적 사고라니, 한편으로 요셉을 잃은 충격을 이해하나, 시므온도 자기 아들이다. 야곱의 현 수준은 자기 중심적인 어른아이나 다름없다.
야곱의 이런 투정(?)을 지켜보던 장남 르우벤이 자신의 두 아들이 생명을 걸고 베냐민을 잘 데리고 돌아오겠다며 맹세하지만(37절), 야곱은 요지부동이다. 형들의 요셉을 팔아넘긴 것에 대한 죄악의 요지부동은 애굽에서 크게 흔들리고 왔는데, 야곱의 편애는 오히려 더욱 요지부동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곧 흔들릴 것이다. 하나님의 간섭은 육신의 식량이 떨어져 고통당하고 이 문제만 해결하시고자 움직이신 것이 아님을 분명히 깨닫게 한다. 육적인 기근보다 영적 기근의 회복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강한 하나님의 도전이 일어났고 형들은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나, 야곱은 오히려 더욱 마음의 옷깃을 여민다. 하지만 곧 흔들릴 것이다. 육신의 배고픔, 기근을 해결하는 것보다 마음의 기근을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신의 고달픔을 통해 여지껏 해결하지 못하고 요지부동하게 굳어버린 영적인 기근에 은혜의 단비를 쏟으시고 의지하는 토대를 흔들어 해결하시려고 개입하신다. 이때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흔드심에 몸과 마음을 맡겨야 한다. 그래야 기근이 해결된다. 육적인 기근보다 더 심각한 영적인 기근…. 도무지 내려놓지 않는 자기고집, 집착이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나는?
-요셉의 형들이 20년동안의 외면하고 있었던 죄에 대한 요지부동한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야곱의 편애도 고달프게 다루고 있다. 이처럼 강하게 흔들려야 무너지는 요지부동이 내게 많을수록 삶이 많이 흔들릴 것이다. 하나님이 흔드시기 전에 지혜롭게 그의 뜻과 인도히심을 의지하며 나아가야 하겠다.
-나는 야곱과 같은 요지부동이 무엇이 있을까? 하나님과 상관 없이 내 마음대로 하는 영역, 한번도 이것을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서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고수하고 있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나의 요지부동이겠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흔들린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굳게 다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려 할 때 가장 먼저 흔들린다. 그것이 무너져 내려야 산다.
-이것이 빼앗기고 무너지면 내 자신이 죽을 것 같지만, 이것이 무너져야 내가 산다. 삶의 다음 쳅터로 넘어간다.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할 것을 미뤄두면 인생은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정체되는 것이다. 아니 퇴보한다. 야곱은 요셉을 잃어버린 그때부터 또 하나의 요셉을 만들어 더 집착하며 매달린다. 베냐민은 어른이 되어서도 이렇게 지독하게 편애하며 집착하는 아버지 야곱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야곱의 요지부동은 가족들에게 큰 상처임과 동시에 건널 수 없는 강과 같았다. 그의 고집으로 인해 형들과 야곱은 늘 서로 강 건너편에서 마주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르우벤이 애굽에서의 흔들림으로 인해 먼저 야곱에게 자신을 희생하며 다가섰다. 매우 급진적이지만 자신의 두 아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온 가족에게 일어난 이 난국을 정면돌파하려 한다. 적어도 형들은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하려고 발버둥 친다. 하지만 야곱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더 강하게 이 도전에 저항한다. 다른 아들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다. 가족들의 굶주림보다 베냐민을 보호하려는 것이 더 우선이다. 편애가 집착이 되고 쓸데없는 인생의 주인노릇이 과해졌다.
-한편 요셉의 가족을 챙기는 마음이 감동이다. 곡식값을 형들이 모르게 곡식자루 깊숙한 곳에 숨겨 돌려 보내고, 여행할 때의 식량까지 덤으로 챙겨준다. 형들은 지금 겪고 있는 상황 때문에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이런 와중에 꼼꼼히 가나안의 가족들을 챙기는 요셉의 마음이 애닮다!
-요셉이 가족들을 20년만에 만나고, 아버지 야곱의 전 가족이 이주하기까지의 드라마틱한 전개는 늘 감동이다. 읽으면서 나도 눈물이 날 지경이다. 감동이 멈추질 않는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벅찬 감격의 주인공인 요셉은 이를 잘 제어하며 하나님께서 “꿈 꾸게 하신 것”을 잊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꼭 붙잡는다.
-당장이라도 형들과 눈물의 상봉을 하고 싶지만, 집안 식구 모두가 애굽으로 내려 와야 한다.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씀 하신 것처럼 애굽으로 이주해야 한다. 이 일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요셉의 인내와, 절제가 얼마나 대단한가?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꿋꿋하게 절제하며 견디는 그의 모습이 큰 도전이다.
-또한 본문은 르우벤의 역할이 도드라진다. 형제들에게 요셉 앞에서의 모습이나,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두 아들의 생명을 맹세하여 베냐민을 책임 지겠다고 하는 모습은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을 엿보게 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이런 모습과 달리 형제들이나, 야곱에게 르우벤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은 듯 하다. 특히 야곱은 르우벤의 말에 일절 반응하지 않고 무시해 버린다. 르우벤은 디나 사건 이후로 장남이었으나 이미 장남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르우벤의 책임감 있는 행동, 희생은 분명 도전이 된다.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모른다. 형제들의 안정도, 아버지 야곱의 인정도 없었지만, 묵묵하게 장남으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감당하며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또 한 부분은 형들의 20여년전의 죄를 소환한 장면이다. 도무지 연결되지 않을 장면이지만 하나님께서 몰아넣은 감옥안에서 형들은 이구동성으로 요셉을 팔아버린 죄악에 대해 스스로 고백한다. 자신들이 가나안에서 온 첩자가 아님을 증명해야 할 그 순간, 전혀 연결되지 않는 이 상황에서 그동안 외면해 왔던 그들의 “범죄”를 직면한다. 그리고 정직하게 반응한다. 지난 20여년간의 부정직한 반응이 아니다. 애써 외면하고 함구하였던 그들이 아니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당시 당했던 요셉의 고통에 공감한다.
-요셉의 애걸과 괴로움을 금새 떠올린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이 요셉처럼 애걸하고 괴로워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직면하여 고백한다. “우리가 범죄하였다.” 그리고 요셉 앞에서 진실하게 반응한다. 또 돌아오는 길에서 발견한 곡식자루의 돈을 보고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시는가?”라며 탄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에 대한 진실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여기까지다. 요셉과 야곱 앞에서 이 죄악에 대하여 진실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죄를 이렇게 다루신다. 내가 해결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해결이 아니다. 하나님이 해결되었다 할 때 해결 되는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큰 그림이 이루어질 때까지 형들 앞에서 “요지부동”이다. 이런 요지부동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었다.
*형들은 지난 20여년간 요셉에 대하여 지은 죄에 대해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애굽에서의 투옥 3일만에 그 죄에 직면한다. 진실하게 그때 그 사건을 소환한다. 이런 요지부동은 하나님께서 무너뜨릴 것이다.
*야곱은 라헬의 아들들에 대한 편애가 아직도 “요지부동”이다. 르우벤이 아무리 자신의 두 아들을 담보까지 했어도 베냐민은 자신이 지켜야만 한다고 여긴다. 이 요지부동이 흔들리지 않으면 야곱의 가족에 희망은 없다. 이런 요지부동이 온 가족을 위기로 빠뜨린다.
*아무쪼록 나는 요셉과 같은 믿음의 요지부동이 확고하기 바라고, 형들이나 야곱과 같은 요지부동은 무너지기 원한다. 그래야 산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1.식량 기근보다 더 오래된 영적 기근(1-5절)
본문의 시작은 요셉이 애굽에서 고분분투하고 있던 약 20여년(노예생활 13년, 7년의 풍년 이후 기근이 시작 되었으므로) 시간 동안 야곱의 가족도 만만치 않은 시간을 보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먼저,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얘들아, 왜 서로 얼굴들만 쳐다보고 있느냐?(새번역_1절)’ 라고 한다.
생각해 보았다. 야곱만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까? 아니다 형들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형들이 먼저 애굽에 다녀오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일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요셉때문이다. 자신들이 발버둥치며 살려달고 애원했던 요셉을 구덩이에게 던지고 지나가는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버렸다. 그들은 애굽으로 내려가던 중이었다. 쉽사리 애굽에 내려가서 식량을 구해와야지 할수 없었던 머뭇거림은 이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20년동안 형들과 야곱은 요셉에 관한 문제에 있어 철저히 속이고 속임을 당하고 있었다. 그 속임에 자신들은 늘 마음 한구석에 해결되지 못한 짐이 있었고, 야곱은 깊은 슬픔의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영적 기근은 야곱의 가족에게 이미 20년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속이고 속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참함의 기근(그러나 알 수 없었던 영적 기근)이 무려 20년 이상 지속되고 있었다. 그 시간만큼이나 무디어진 마음도 어쩔수 없었으리라.
또 있다. 야곱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형들 10명을 보내면서 베냐민은 보내지 않는다. 그 이유가 분명하다. “야곱은 요셉의 아우 베냐민만은 형들에게 딸려 보내지 않았다. 베냐민을 같이 보냈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할까 보아, 겁이 났기 때문이다(새번역_4절).” 야곱의 편애는 요셉이 실종 된 후 더 심해졌음을 짐작케 한다. 야곱은 20여년전 요셉을 홀로 양을 치러 간 형들에게 보낸 것을 아마도 깊이 후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요셉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짐승에게 찢겨 죽지 않았을 것이다며 자책하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냈다. 한 순간도 형들에게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서는 요셉의 모습을 잊을 리 없었을 것이고 갈기 갈기 찢겨지고 피가 흥건히 묻혀져 돌아온 ‘채색옷’은 밤마다 야곱의 꿈속에서 그의 마음을 헤집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라헬에게서 태어난 막내 베냐민을 더욱 감쌌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더욱 심화된 베냐민에 대한 편애는 10명의 형들과 야곱과 베냐민 사이의 골을 더욱 깊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심각한 관계의 기근이 야곱의 가족에게 20여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이제 막 시작된 식량 기근도 문제지만 오랬 동안 지속된 야곱의 가족안의 관계 기근은 어찌할까?
2.형들을 두고 꾼 꿈을 기억하고…(9절)
형들은 요셉이 곡식을 파는 책임자가 되어 있는 사실을 모른 채 그 앞에 나와 엎드린다. 요셉은 형들을 단박에 알아본다(7절). 자신에게 절하는 형들을 보며 20여년도 족히 넘는 그때 꾼 꿈을 기억한다.
창 37장에서 요셉이 꾼 꿈을 소개했다. 두 개의 꿈을 꾸었는데, 첫 번째 꿈이 형들의 곡식단이 자신의 곡식단에게 절하는 꿈이었다. 요셉은 마음 속으로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그 꿈이 바로 이 장면이구나! “…. 요셉의 형들은 거기에 이르러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요셉에게 절을 하였다(새번역_6절 하).” 동시에 두 번째 꿈도 생각해 냈을 것이다. 하늘의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었다. 첫 번째 꿈이 이루어졌다면 두번 째 꿈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열명의 형들만 나에게 절하고 있다…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베냐민이 생각 났다. 그들은 아직 애굽에 오지 않았다. 아! 야곱은 꾸었던 꿈을 기억하는 것에서 그 꿈이 이루어 질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3.요셉의 큰 그림…(9-17절)
요셉은 형들을 ‘첩자’로 밀어부친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형들은 당황하며 항변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가족들에 대하여 소개한다. “…소인들은 형제들입니다. 모두 열둘입니다. 가나안 땅에 사는 한 아버지의 아들들입니다. 막내는 소인들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잃었습니다(새번역_13절).”
요셉은 더욱 더 몰아부친다. 첩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가나안 땅에 남겨둔 당신들의 막내 아우를 데려오라고 한다. 그러면서 한 사람만 보내어 데리고 와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형들을 사흘동안 감옥에 가둔다(15-16절). 확실하게 첩자로 여기고 있음을 형들에게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형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순간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 얼마나 통쾌할까! 그런데 요셉은 형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그 순간 통쾌한 복수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꾼 꿈”을 기억했다. 지금 당장 형들에게 “보시오! 나의 꿈 대로 지금 당신들이 나에게 절하고 있지 않소!”라며 통쾌하게 복수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먼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 것이다. 개인의 통쾌한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꿈이 이루어진 현장에서 나머지 이루어질 꿈을 기억해 낸 것이다. 추측이지만 요셉은 순간에라도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꿈을 기억해 내어 감정적인 행동을 억제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이런 것 아닐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순간 순간 내 정욕을 따라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기억(꿈, 뜻)을 따라 절제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더 큰 그림을 바라보며 인내하는 삶이다. 어쩌면 인간적으로 가장 통쾌하게 복수 할 수 있는 그 순간, 요셉은 하나님의 큰 그림에 자신의 마음을 절제 시킨다. 너는 과연 인간적인 복수의 통쾌함이 주는 짜릿함 앞에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그런 절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요셉이 참으로 대단하다.
나는?
-상상해 보았다. 요셉은 알았을 것이다. 기근이 시작되면 언젠가 형들도 식량을 구하러 애굽으로 올 것을 말이다. 그때를 어떻게 맞이할까 하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떤 생각으로 이 날을 준비 했을지는 본문이 힌트를 준다. 형들을 두고 꾼 꿈을 기억했다(새번역_9절). 형들이 절하는 순간 그 꿈을 기억해 냈다. 아니 하나님께서 기억나게 하셨다. 아니다. 그보다 더 확실한 정황은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절하는 형들 앞에서 첩자로 누명을 씌우고 막내를 데려 올 것까지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지난 20년의 시간 속에 사라지지 못했던,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의 야속하기만 했던 얼굴들이 자신 앞에서 절하는 순간 피끓는 복수의 마음으로 기억난 것이 아니라 “형들을 두고 꾼 꿈”이 기억 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순간 순간 일어나는 상황에 임기응변하며 사는 삶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를 꿈꾸며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보며 오늘을 사는 것이다. “하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기에 인내하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요셉의 큰 그림(꾼 꿈)을 따라가는 삶의 자세에서 이것을 배운다. 나의 삶에서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인생 역전의 순간은 나의 해묵은 감정을 시원하게 해소하는 시간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나라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살아야 한다.
*주님도 그러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향해 온갖 조롱으로 자극하던 대제사장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얼마든지 그 순간 그들을 벌하실 수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결심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말이다.
*가장 통괘한 순간은 지금이 아니다. 두 번째 꿈도 이루질 그 순간이 가장 환희의 순간이 될 것이다. 이를 바라본 요셉은 열명의 형들 앞에 철저히 자신을 감추고, 열한명의 형제들이 자신에게 절 할 그 순간을 기다린다. 지금은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
*살면서 이런 절제와 인내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 섣불리 터뜨린 샴페인이 얼마나 낯부끄러운 적이 많았던가! 급히 마신 김칫국 때문에 두고 두고 오랜 시간 동안 힘들었적도 있었다. 모든 것이 나의 마음가는대로여서 그랬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 말씀하신대로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순간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한편 요셉 만큼이나 고통의 시간을 보낸 야곱의 가족들이 안쓰럽다. 형들은 자신들의 속인 일로 인해 20여년의 삶은 온 가족이 모여도 편치 못했을 것이다. 그 일 이후 언제나 열한 형제는 변함 없었으나 한 명은 잃어버린(?) 형제로 남았다. 이로 인해 온 가족은 늘 보이지 않는 긴장관계가 이어졌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열명의 형들과 야곱은 콘크리트벽처럼 견고한 벽으로 가로 막혀 있었다. 야곱은 야곱대로 요셉의 빈자리를 베냐민을 더욱 감싸는 편애로 나타냈다. 그러면 그럴수록 형들의 마음은 더욱 차가워 졌을 것이다.
*야곱은 요셉은 지키지 못했지만, 베냐민은 꼭 자기 힘으로 지키겠다고 결심한 듯 하다. 애굽에 식량을 구하려 보내는 열명의 형들과도 구별 시켜 혹시 무슨 일을 당하지 않도록 남겨 두었다. 잃어버린 한 명의 요셉에 대한 트라우마는 똑같이 소중해야 할 열 명의 아들들의 마음에 더욱 깊은 골의 상처를 새기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하나님만이 온전히 우리를 지켜주실 수 있다. 야곱의 베냐민에 대한 집착은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영적 기근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요셉을 지켜주지 못했으니 나는 베냐민을 어떻게 해서라도 지킬거라는 마음으로 그랬을 수 있다. 야곱은 지금 심각한 영적침체에 있는 것이다. 요셉을 잃어버린 후 그 긴 시간을 하나님께 맡김보다 자기 힘으로 견뎌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야곱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기근이 혹시 나에게도 있지 않을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런 영적 기근이 심할 수록, 자기결정, 자기 변호가 견고해 짐을 야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나에게 나의 힘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하나님과의 관계 풍년이 풍성했으면 좋겠다. 육적 기근이 삶을 힘들게 할 때에도 성령충만함으로 넉넉히 인내하는 풍성한 영적 풍년의 삶이기를 소망한다. 오늘도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 가운데, 말씀대로 이루실 그때를 바라보며 인내하고 절제하는 순간 순간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여년 만의 형제 상봉은 형들은 알아채지 못했고, 요셉은 그 순간 “형들에 대하여 꾼 꿈”을 기억해내며 만났다. 형들은 기근으로 인해 마지못해 애굽으로 내려왔지만, 요셉은 이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20여년 만에 꿈 하나가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두 번째 꿈도 곧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꿈의 순간을 기다리며 오늘 이루어진 꿈을 기억하며 절제하는 요셉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큰 그림)을 따라 사는 인생을 배운다!
*기근은 애굽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온 땅’에,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덮쳤다. 그런데 야곱의 가족의 영적 기근은 20년동안 지속 되고 있었다. 요셉을 애굽으로 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기고, 그의 채색옷에 피를 흥건하게 묻히며 아버지 야곱을 속인 그 날부터 이미 영적 기근은 덮친 것이다. 그 오랜 시간동안 형제들은 요셉에 관해서는 늘 아버지 야곱에게 거짓말을 유지했고,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형들에게 심부름 보낸 것에 자책하며, 고통속에 울부짖었다. 막내 베냐민에 대한 과잉보호(편애)가 점점 더 도드라졌다.
*온 땅에 찾아온 기근은 20년 넘게 야곱의 집안을 묶고 있던 거짓과 편애의 사슬을 끊으려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어김없이 찾아온 것이다. 영적 기근을 깨뜨리시기 위해 기근을 부르셨다. 참으로 아이러니 아닌가. 영적 기근을 끝내시기 위해 온 세상의 기근을 불러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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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17일 주보
♥축복 – 다음세대 양육을 감당하는 교사들을 축복합니다. 교사들의 수고와 헌신으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다음세대를 세워져 가는 것을 잊으면

2026년 5월 10일 주보
우리의 2026년은 “더 예수님처럼, 더욱더 하나님 나라”를 꿈꿉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하나님 나라 진실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2026년 5월 3일 주보
♥홀리비키 플리마켓 물품 요청 – 5월 16일(토) 만성동 어린이들에게 즐거움을 선물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집에 고이 정리하여 보관하고 있는
#더온누리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은혜를 함께 나눠요. instagram에서 "#더온누리교회"를 태그해 주세요:)
샬롬❤️
5월 17일 더원공동체 예배풍경입니다!
나의 끝, 하나님의 시작 [창세기 43:8-15]
광고
💟 더원공동체 여름수련회
일정 : 6/26(금)-28(일)
장소 : 동신수양관
강사 : 양원규 목사
문의 : 유태양 팀장
💟 더함공동체 여름수련회
일정 : 5/23(토)-24(일)
장소 : 서천 청소년 수련관
강사 : 강은도 목사님
주제 : 연합
💟 예배안내
다음 주일(5/24) 더원공동체 예배는 3층 본당에서 드려집니다.
💟 축복
오늘은 다음 세대 양육을 감당하는 선생님들을 기억하는 주일로 보냅니다. 함께 기도와 응원의 마음으로 함께해요.
______________________
#더원 #더원공동체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청년부 #전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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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더 깊은 선교학교]
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삶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듯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세상을 향해
복을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
2026 더깊은 선교학교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배우고
선교의 비전을 함께 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
📖 2026 더깊은 선교학교
🗓 06.20 - 07.25 매주 토요일 (6주간)
📍 굿윌센터 2F
🎤 이효재 목사
🎤 주누가 선교사
🎤 김종홍 목사
✈ 단기선교
8월 1일(토) - 8월 4일(화), 일본
🎓 수료식
8월 23일(주일) 2부 예배
—
하나님이 찾으시는
복의 통로로 함께 세워지길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THE MISSION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더깊은선교학교
#선교 #더미션 #복의통로 #단기선교
#일본선교 #mis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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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성,
목자의 힘 🙏
사람을 세우는 힘은
화려함이 아니라
진심에서 시작됩니다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며
다시 붙드는
목장의 본질
주님이 맡기신 영혼을 위해
오늘도 걸어갑니다 🤍
—
더온누리교회
2026 목자수련회
“진정성, 목자의 힘, 목장의 본질”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목자수련회
#목장 #목자의삶 #공동체 #진정성
#리더십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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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낮아진 자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억울함과 외로움,
그리고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도
믿음은 시선을 다시 하늘로 향하게 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9:1-10 말씀을 통해
바닥 같은 인생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묵상합니다.
“바닥에서 하늘을 보다”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길을 여십니다.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요셉의믿음
#하나님을바라보다
#믿음의시선
#주일말씀
#신앙묵상
#Jesus
#SundayService
#Genesis
#FaithJourney
#TrustGod
[주일 예배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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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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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리에는
결국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분노와 상처,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선택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하나님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4:18-31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잊어버린 삶이
어디로 흘러가게 되는지 깊이 묵상합니다.
“잊혀진 하나님, 드러난 잔혹함”
어둠 속에서도
다시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깨어진 세상을 끌어안고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신앙의경고
#하나님없는삶
#회개의자리
#주일말씀
#깨어진세상을끌어안고
#Jesus
#SundayService
#Genesis
#Repentance
#FaithJourney
[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리에는
결국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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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선택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하나님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4:18-31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잊어버린 삶이
어디로 흘러가게 되는지 깊이 묵상합니다.
“잊혀진 하나님, 드러난 잔혹함”
어둠 속에서도
다시 하나님을 붙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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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찬양 : 깨어진 세상을 끌어안고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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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th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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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익숙함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때로
낯설고 어색한 길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떠나야 할 때를 알면서도
머물고 싶은 마음,
그러나 그 부르심 앞에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믿음.
창세기 31:1-16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운 길을 걷는 믿음을 묵상합니다.
“익숙함을 떠나
어색한 약속의 땅으로”
익숙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결단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믿음의걸음
#하나님의인도하심
#순종의삶
#주일말씀
#나는믿네
#Jesus
#SundayService
#Genesis
#FaithJourney
#Trust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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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때로
낯설고 어색한 길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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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고 싶은 마음,
그러나 그 부르심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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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치고 힘들어요? 🥺
예수님 안에는
아픈 것도 없고
외로운 것도 없어요 🤍
우리 같이 가요!
소문의 낙원으로 ✨
—
더온누리교회
초등 2부 율동 🫶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초등부
#어린이예배 #율동 #소문의낙원
#예수님 #귀여움 #churchkid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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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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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것도 없어요 🤍
우리 같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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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로운 금요일 안내
하나님 앞에 서는 용기,
믿음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
이번 금요일,
다윗의 고백과 결단을 통해
우리의 삶에도
믿음의 용맹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다윗의 용맹”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나아갔던 다윗처럼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서는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 : 목사 장필조
찬양인도 : 목사 이홍기
—
📖 본문
사무엘상 17:28-40
—
🎶 Worship List
부흥의 세대
성령의 불타는 교회
부흥이 있으리라
무릎 꿇고 엎드리니
다시 한 번
나의 주 크고 놀라운 하나님
—
4월 24일 금요일 밤,
찬양과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을
함께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
#더온누리교회 #향기로운금요일 #금요예배 #찬양예배
#전주교회 #전주 #말씀 #예배 #부흥 #기도 #전주찬양팀 #전주집회 #찬양집회
@fragrant_worship
✨ 향기로운 금요일 안내
하나님 앞에 서는 용기,
믿음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
이번 금요일,
다윗의 고백과 결단을 통해
우리의 삶에도
믿음의 용맹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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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나아갔던 다윗처럼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서는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 : 목사 장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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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불타는 교회
부흥이 있으리라
무릎 꿇고 엎드리니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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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4일 금요일 밤,
찬양과 말씀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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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서 더합니다 🤍
사랑을 더하고
마음을 나누고
공동체 안에서
하나 되어가는 시간
“연합”
더함공동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
—
2026 더함공동체 수련회
📍 서천 청소년 수련관
📅 5.23 - 5.24
함께여서 더 깊어지는 시간
이번엔 같이 가요 🙌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 #더함공동체 #공동체 #연합
#교회수련회 #전주교회 #전주
#사랑나눔 #함께 #churchfami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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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안에서
하나 되어가는 시간
“연합”
더함공동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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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3 -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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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완전 홀리빛키잖아?! 😆✨
세상의 운(Lucky)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
우리 아이들이
마음껏 웃고 뛰어노는 하루
—
🎈 2026 홀리빛키데이 🎈
📅 5월 16일 (토요일)
신나는 에어바운스
🎮 다양한 게임
🎨 내손으로 만드는 체험
🍿 먹거리까지!
그리고
함께 나누는 기쁨
🛍 플리마켓 OPEN
—
💛 물품 기부도 받습니다
아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 도서 / 👕 의류 / 🧸 장난감
📍 1층 사무실
🗓 5월 12일(화)까지
작은 나눔이
큰 기쁨이 됩니다 🤍
—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홀리빛키데이
#어린이행사 #플리마켓 #기부 #나눔
#교회행사 #키즈이벤트 😆✨
이거 완전 홀리빛키잖아?! 😆✨
세상의 운(Lucky)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
우리 아이들이
마음껏 웃고 뛰어노는 하루
—
🎈 2026 홀리빛키데이 🎈
📅 5월 16일 (토요일)
신나는 에어바운스
🎮 다양한 게임
🎨 내손으로 만드는 체험
🍿 먹거리까지!
그리고
함께 나누는 기쁨
🛍 플리마켓 OPEN
—
💛 물품 기부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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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 의류 / 🧸 장난감
📍 1층 사무실
🗓 5월 12일(화)까지
작은 나눔이
큰 기쁨이 됩니다 🤍
—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홀리빛키데이
#어린이행사 #플리마켓 #기부 #나눔
#교회행사 #키즈이벤트 😆✨
...
[향기로운 금요일 예배 안내]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를 채우시고,
그 은혜 안에서 찬양하게 하시는 하나님.
이번 금요일,
에베소서 1:3-14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광스러운 찬양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삶”
삶의 자리에서 드리는 고백이
단순한 노래를 넘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인도 : 배지완
—
Worship List
감사와 찬양드리며
나의 가장 낮은 마음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하나님의 부르심
나는 찬양하리라
날 자녀라 하시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위대하신 주
나의 하나님
예배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주의 손이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
금요일 밤,
찬양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을
함께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향기로운금요일
#금요예배
#찬양예배
[향기로운 금요일 예배 안내]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를 채우시고,
그 은혜 안에서 찬양하게 하시는 하나님.
이번 금요일,
에베소서 1:3-14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광스러운 찬양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삶”
삶의 자리에서 드리는 고백이
단순한 노래를 넘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인도 : 배지완
—
Worship List
감사와 찬양드리며
나의 가장 낮은 마음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하나님의 부르심
나는 찬양하리라
날 자녀라 하시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위대하신 주
나의 하나님
예배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주의 손이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
금요일 밤,
찬양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을
함께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향기로운금요일
#금요예배
#찬양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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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4. 17. 주일 예배 안내]
믿음의 가정이라 불리지만
그 안에도 연약함과 흔들림은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기보다
자신의 방법을 선택했던 순간들,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번 주일,
창세기 27:15-24 말씀을 통해
우리의 가정과 믿음을 돌아봅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일어난 믿음 없는 이야기”
부족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믿음의가정
신앙의성찰
하나님의은혜
주일말씀
가정신앙
Jesus
SundayService
Genesis
FaithReflection
Grace
[16. 4. 17. 주일 예배 안내]
믿음의 가정이라 불리지만
그 안에도 연약함과 흔들림은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기보다
자신의 방법을 선택했던 순간들,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번 주일,
창세기 27:15-24 말씀을 통해
우리의 가정과 믿음을 돌아봅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일어난 믿음 없는 이야기”
부족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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