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1. 사망이 끊어졌다(20-23절)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에게 속한 모든 성도에게 ‘부활의 보증’이 되신다. 예수님의 부활은 아담의 죄로 시작된 사망의 세력을 이기고 주님께 속한 모든 자에게 새 생명을 주신 사건이다. 모든 사람이 아담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부활은 필연적인 일이다.
아담 이후 지어진 죽음의 행렬이 예수님에게서 끊어졌다! 예외 없이 죽어간 인생들이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이 끊어졌다. 이제 죽음이 생명에게서 떨어졌다.죽음이 떨어진 내가 생명되신 예수께 붙어 있으면 나도 생명이 된다.
나에게서 사망이 끊어지고, 생명이 붙었다.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끊어내고 생명 되셨기 때문이다. 생명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된 삶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새번역_22-23절).”
내가 구원 받아 늘 그리스도 안에 속하여 부활의 열매가 될 것을 확신한다. 이제 부활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막연한 기대나 환상이 아니라 확실한 약속이자 소망이다.
2. 주권 회복(24-28절)
예수님은 사망을 멸하시기까지 하나님 나라에서 왕노릇 하실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오셔서 사탄의 모든 권세를 멸하고 하나님께 전리품으로 바치는 그날에,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산 자들이 부활의 몸을 입고 주를 영접할 것이다. 만물을 그 발아래 두실 때까지 대적하는 세력들이 있지만, 아무도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살아계셔서 지금도 말씀으로 통치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내가 사는 이유와 삶의 태도가 달라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죽음이라는 수단으로 생명을 다스린 사탄을 쫓아냈다. 주권 회복, 왕권 회복을 이루었다. 그리고 진정한 하나님 나라 왕이 되신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여전히 가짜 왕권을 휘두르며 몸부림치는 잔재세력(사탄, 대적하는 세력들)을 멸하시고 이들에게서 회복된 왕권을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 드릴 것이다. 사탄은 죄로 물든 이 땅의 환경을 볼모삼아 마지막 힘을 부리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의 부활로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
또한 주님께서도 하나님의 만유의 주 되심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께 굴복 당할 그 때에는, 아들까지도 모든 것을 자기에게 굴복시키신 분에게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유의 주님이 되실 것입니다(새번역_28절).”
이 모든 과정은 정하신대로 진행된 것이다. “성경대로”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주님의 부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부활, 세상 권세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져 이루어진다. 이 모든 일들을 틀림없이 이루실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예수님의 부활처럼 반드시 이루어지기에 구원의 확신 안에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며 믿음을 굳게 지키며 살 수 있다.
3. 삶의 의미를 찾아(29-34절)
29~32절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산 소망을 주셨기에 바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고, 극심한 박해애도 굴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부활을 확신한 성도는 모든 고난을 견뎌내고 죽음의 두려움조차 극복하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간다. 주님은 내가 영원한 부활에 참여하리라 믿으며 죽음 앞에 결코 타협하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바라신다.
바울은 부활로 인해 무엇이 생명다운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인지 분명하게 말한다. 부활이 없다면 죽음을 무릅쓰며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을 것이며, 오늘이 전부인양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당시 세계관에 함몰되어 그저 몸과 마음의 쾌락만 추구하며 살아가는 인생에서 주님의 부활을 믿고 바라보며 왕 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사는 것,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리는 가장 지혜로운 삶이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지금 누리며 살 수 있는 믿음과 용기는 부활하신 주님을 굳게 믿으며 그 안에 살 때 충분히 가능하다. 부활의 첫 열매되신 주님의 존재는 내가 지금 이곳에서 부활을 소망하며 굳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33~34절에서 바울은 거짓 교사에게 미혹되어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어서 깨어나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한다. 부활의 진리는 마치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이들을 향해 삶의 바른 이정표를 제시하고, 불의하고 느슨해진 삶과 현실에 질식되어버린 신앙을 일깨운다. 부활을 믿는다면 이 세상의 불의한 요구에 나의 생명을 넘겨줄 수는 없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부활을 기대하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곳에서 살아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삶인 복음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30절), 날마다 주님 때문에 나의 자아를 죽이며(31절), 이 땅의 삶의 방법을 거부하고(32절), 깨어 의를 행하므로 죄를 짓지 않는(33-34절) 삶을 추구하며 살아낼 수 있다. 부활의 주님이 계시기에…
나는?
-나의 사망이 주님의 부활로 끊어졌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그 후손에게 지워준 죽음의 운명을 뒤집는 사건이다. 아담의 불순종은 이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지만, 그리스도의 순종은 삶을 가져왔다. 첫 열매가 있으면 나머지 수확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여 첫 열매가 되셨으니 우리도 영원히 무덤에 있지 않고 분명히 부활의 옷을 입을 것이다.
-나에게 사망으로 왕 노릇하던 사탄의 영향력이 이제는 끊어졌다. 주님이 나의 왕 되셔서 나와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 나는 그 통치 안에 이미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낼 수 있다. 주님의 부활이 나를 그렇게 살게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망이 멸망당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하나님 나라 왕 노릇을 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사탄과 함께 대적하는 세력들을 멸하시고 이양 받은 왕권을 돌려드린 후 자신도 아버지께 복종하실 것이다. 여전히 사탄이 활개를 치고 사망이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부활의 첫 열매를 반드시 우리도 맛 볼 수 있다.
-내 안에 부활이 이미 들어와 있다. 여전히 세상방식에 유혹받고 세상 가치에 흔들릴 수 있으나 기필코 극복할 수 있다. 내 안에 있는 부활은 생명이기에 생각과 의지와 행동을 분명히 다스리셔서 주님 안에 살게 한다.
-주님의 오심으로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주님의 부활로 그 왕권의 완전한 회복을 드러내고 다시오실 그때 이를 완성하실 것이다. 주님의 부활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어 일상에서 그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을 꿋꿋히 견뎌내려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고난과 핍박을 충분히 견디게 하고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힘과 의지를 공급해 준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바울과 그 일행이 죽음을 무릅쓰면서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오늘이 전부인 듯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가장 지혜로웠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먹고 사는 일보다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하기 위해 묵묵히 시련을 인내하는 이들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세상의 미련한 자로 내버려 두지 않고 가장 지혜로운 자로 세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미혹을 이기고 깨어나야 한다.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에, 나도 부활의 대기순번을 받았다는 확고함에 굳게 믿음을 지키게 한다. 오늘도 부활 신앙으로 하나님 나라를 꿋꿋히 살아가련다. 이 세상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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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살펴보면서 그 저변에 있는 “세상방식과 지식, 그리고 경험”이 얼마나 믿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무력화 시키는지 모른다. 부활에 대한 자세도 그렇다. 앞서 바울은 “내가 전해 받아 믿었고, 전해 준 그 말(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을 때 이로 인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2절). 고린도교회는 지금 “세상 지식이 혼합된 헛된 믿음”이 “전한 말(복음)대로” 믿음 믿음을 훼손 시키고 있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라고 교회 안에서 공공연하게 이야기하여 전해 준 복음대로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으려는 성도들을 영적으로 혼란스럽게 하는 그들을 향한 바울의 “부활 변증”을 살펴보자.
1.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12~15절)
바울은 고린도 성도 중 일부가 부활이 없다고 한 것에 대해 부활의 필요성을 논증한다. 조건문을 통해 부활이 없는 상황에 대한 추론의 꼬리 물기 형식으로 설명한다. 부활이 없다면 바울이나 독자 모두 비참해진다. 심지어 하나님도 거짓말쟁이가 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부활은 있다.
12절은 1~11절에서 부활이 복음의 핵심 내용임을 설명한 후 교회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을 일부 성도가 믿지 않는 것을 지적하며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메시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파되었다면 왜 ‘너희 중에 어떤 이는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가?’ 라고 묻는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 철학에 의하면 몸은 영에 비해 열등하고 속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또한 여전히 복음의 증거보다 자기 생각과 세상의 사고를 더 우선시 했기 때문이다.
13절은 그런 일부 성도들의 생각이 적절치 않다는 사실을 조건문 형식으로 보여준다. ‘만일’ 그렇다면(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도 사람 몸으로 존재했고 십자가에서 죽었기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얘수의 부활 역시 없을 것이다. 바울은 이런 상황을 전제로 14~15절에서 그에 대한 논리적 결론을 보여준다.
세 가지 상황을 표현하는데, 첫째, 바울을 포함한 전도자(‘우리’)의 선포는 헛 것이 된다(14절). 메시아가 부활하지 않았는데 부활했다고 전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바울은 거짓말쟁이가 된다. 둘째, 성도들의 믿음도 헛 것이 된다(14절). 부활이 없는데 있다고 전한 거짓말을 믿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부활 뿐일까? 메시아의 부활도, 부활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도, 이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도 모두 헛 것이 된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교회 공동체가 붙드는 예수님을 통한 영생의 계시가 사실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즉, 부활하신 예수가 없는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 것이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구원을 보증할 수 있을까? 셋째, 바울을 포함한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거짓말한 것이 된다(15절).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고 선포했다. 그런데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어 메시아의 부활도 없다면,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바율은 하나님이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전한 것이 된다. 단순한 거짓말을 넘어 하나님을 기만하고 이용한 것이 된다.
이렇듯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것은 단지 생각이나 신념의 차원에서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복음과 관련하여 바울과 성도에게는 물론 하나님에게까지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모든 것이 거짓말이 된다.
2.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16~19절)
이 단락은 ‘왜냐하면(가르)’라는 표현을 통해 13~15절 내용은 부연 설명한다. 16~17a절은 13~14a절의 내용과 같다. 하지만 이후 14b~15절은 철저히 성도 상태에만 집중한다.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그들의 믿음은 쓸모없게 된다. 그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부활과 죄 사함의 관계에 대해 설명이 필요하다. 예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대신 받은 것이다. 심판의 결과인 죽음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활은 그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끝났고 더는 심판 받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그것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오직 회개와 믿음을 통해 얻게 되지만, 부활은 하나님의 심판이 끝났고 예수로 인한 죄 사함의 길이 열렸음을 확증한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4:25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위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만일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죄의 대속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고, 예수 믿는 성도들의 죄가 처리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즉, 부활이 없으면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황이라면 예수 안에서 자는 사람, 곧 죽은 사람들은 구원을 알 수 없는 채로 죽은 것이 된다(18절). 바울은 그러한 상태를 ‘멸망’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부활이 없다면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라는 말이 되는데, 모든 성도는 이 땅에서 온전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죽는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예수 믿지 않고 죽기 전에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이 더 낫다. 그렇기에 바울은 예수 안에 있으면서도 부활의 소망 없이 이 땅만을 소망한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19절)
3. 정리
바울의 변론에 의하면 죽은 자의 부활은 몇 가지 면에서 꼭 필요하다. 첫째, 바울의 증거가 거짓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 부활이 있다고 이미 전했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의 증거가 거짓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도 역시 부활을 말씀하셨고 이행하셨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의 메시아됨을 위해 필요하다.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의 죽음은 아무 의미 없다. 신자들의 죄를 용서하는 통로인지 알 수 없고, 죄 사함이 이루어졌는지도 알 수 없다. 더 나아가 예수가 메시아인지도 확실치 않을 수 있다. 설사 메시아가 맞다 하더라도 부활 없는 메시아의 사역은 실패다. 넷째, 신자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 부활 없는 복음은 죄 사함을 보증할 수 없다. 또한 이 땅에서의 삶을 넘어 영원한 생명도 확증할 수 없다. 그것 믿고 이 땅에서 다르게 사는 것은 인생 낭비다.
바울이 부활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논리적인 귀결이지만, 반대로 부활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바뀐다. 감사하게도 부활은 사실이다.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 보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 성도들 중 일부가 단순히 “부활”을 믿지 않거나 거부하는 것은 마치 “도미노”처럼 신앙의 핵심체계가 스르르 무너져 버리게 되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내 생각은 이렇다는 작은 왜곡이 불러올 헛된 믿음의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또, 구원 받은 삶이 의미가 없어진다. 모든 것이 다 거짓이 되어버리면 “부활의 생명을 소망하며 나그네처럼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불쌍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아주 사소한 한 가지에 대한 헛된 믿음이 결국 하나님 나라 복음이 도미노처럼 붕괴되게 한다.
왜 이렇게 믿을까?(12, 19절)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했으나, 고린도 성도 중의 일부는 그 중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13, 15, 16절)”하였다.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헬라철학의 영향이 몸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새번역_19절).”
일부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서만 해당하는 것을 바랬다는 거다. 당시 헬라 세계의 세계관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익숙하고, 거부감이 없으며, 심리적으로 합당하고, 보편적인 사고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것만 받아들였다는 것이 된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의 핵심이다. 어찌 고린도 교회 뿐이겠나? 오늘 나의 문제이며, 교회의 문제다.
나는?
-기막히다. ‘나는 부활을(이것만은) 믿지 않는다!’는 영향력이 교회안에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생활속에서 부딪히는 문제가 아니라 생활을 이끄는 핵심가치의 흔들림이다.
-더 기막힌 것은 이런 흔들림, 헛된 믿음의 추구가 헛된 믿음을 버리지 못해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헬라세계의 보편적인 삶과 죽음의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여,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세상방식의 믿음을 버리지 못하니 하나님 나라의 믿음이 헛되게 되어버린 것이다.
-단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이 하나님 나라 복음이 와르르 무너지게 되어 세상 가치와 다를 바 없는 이 땅에서의 삶에만 천착하는 종교집단이 되어 버렸다. 문제는 이것이 영향력을 끼쳐서 교회 안에 문제가 되었다.
-문제는 늘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더 문제다. 내 안의 많은 문제점이 있더라도 이것을 주장하지 않고 삭이며 해결해 주시는 성령님의 만져주심 안에 있다면 별 문제가 안되겠지만, 내 자아를 드러내고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것도 순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아닌 세상 방식을 따라 적절하게 섞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었으니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이다.
-결국 자기 이름, 자기 지식, 자기 방식, 세상 방식을 하나님 나라 가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세상 가치를 불변의 기준으로 삼았지만, 하나님 나라 가치는 선택사항이 된 것이다. 취사선택의 대상이 잘못됐다.
*고린도 교회 일부 성도는 자신들이 이해하고 따르는 삶의 사상 체계에 맞게 “복음을 수정하였다” 사실 이 문제는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의 가치관, 정치색, 행동양식에 따라 말씀의 가치를 부분적으로 교묘히 수정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왜곡된 말씀으로 익숙하게 살아간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말씀을 나의 가치관에 따라 수정하는 삶이 아니라 말씀에 나의 가치를 바꾸어 가는 삶이다.
*나도 역시 수정하고 왜곡하는 것에서 자유로울까? 결코 그렇지 않다!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얼마든지 수정하고 왜곡하고 싶은 상황이나 여건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전해 들은 대로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기 위해 몸부림 쳐야 한다. 그것은 나의 세계관(지식, 경험, 주관)과 하나님 나라 복음이 충돌(?)할 때 “전해 들은 대로”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기”위해 몸부림 쳐야 한다.
*나의 신앙을 스스로 도미노처럼 무너뜨리는 사소한 왜곡이 얼마나 위험한지 자각하는 것도 중요하겠다. 버리지 못하는 세상 방식과 세상 지식이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하나님 나라 복음, 나의 지식, 방식을 버리면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고집하면 나의 나라에 사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 나라 복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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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한 복음, 받은 복음(1-2절)
바울은 이 복음을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전한 그것을 “받아 그 가운데 서서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았으면” 복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을 것을 확고하게 전한다. 전한 복음을 받아서, 삶 속에 세워지고, 이를 굳게 지켜 스스로 헛되게 하지 않음으로 누리는 구원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이 복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헛되이 만들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다시 정확하게 다룬다(3-4절).
복음은 알게하려고 전하여 받은 것이다. 받은 복음에 가치를 두고 믿음으로 이를 지켜 나가면서 스스로 헛되게 만들지 않으면 ‘그 믿음이 구원의 통로가 된다.’ 구원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는 바울이 전한 복음은 무엇일까?
2. 복음(성경대로 이루어 죽음과 부활) 그리고 수많은 증인들(3~8절)
성경대로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과 장사 되신 후 사흘 만에 살아나신 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셨다. 인간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서, 또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이 놀라운 성경대로의 성취를 목격한 증인들이 있다. 게바, 열두 제자들, 오백여 형제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그리고 바울 자신에게까지 부활한 주님의 모습을 보이셨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진 십자가의 죽음과 사흘만의 부활, 이를 목격한 증인들의 증언이 오늘날 부활의 확고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부활은 바울이 스스로 고백했듯이, ‘받은 것을 전해 주었다’라는 표현을 통해 고린도 성도들이 이미 받은 것이며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다. 더구나 그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주님은 찾아오셨고,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을 통해 “복음”을 전해 들었다. 그 역시 ‘전해 들은’ 그대로 믿고 그 안에서 굳게 섰다.
성경대로 이루어진 일을 목격한 증인들의 확고한 증언을 ‘전해 들은’ 대로 믿고 또 자신도 그대로 전해 주었다. 이것이 부활의 복음을 고린도교회에게 전한 바울의 실상이다. 그도 역시 직접 보지 못했으나 직접 목격한 그들의 증언을 전해 듣고 그 복음 안에서 믿음을 굳게 지키고 더 나아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해 주었다.
복음은 “성경대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이것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신에게도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직접 보여주시고 증인들의 증언들을 통해 믿게 하신 것임을 묵묵히 들려준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바울은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3.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라(9-11절)
바울은 누구보다 확실한 증인이 바로 자신임을 스스로 밝힌다. 가장 강력한 반대자로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 선 그였기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 이후 수많은 역경을 감내하며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은, 이 부활이 확고한 사실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확실하게 만났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결코 “더 많이 수고하면서(10절)” 부활의 증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박해 하던 자에서 사도라 칭함 받은 것을, 부활의 증인되어 (나나 그들이나) 함께 증언하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라(10-11절) 절절히 고백한다.
나는?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의심하거나 부인하는 자들에게 그가 전한 복음을 상기시키고 부활의 증인들을 거론하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 확실함을 증언한다.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을 “다시” 기억나게 한다(1~2절). 바울이 전한 복음을 굳게 붙들지 못하고 죽은 자의 부활을 의심하여 요동하는 이들(12절)이 있기 때문이다. 전한 대로 받지 않고 헛되이 가르치고 헛되이 믿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복음을 바르게 알고 굳게 지키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구원에 대한 새로운 진리, 아무도 몰랐던 비밀스런 진리, 아무나 알 수 없는 특별한 진리가 있다는 말에 미혹되지 않아야 한다. 처음부터 들은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복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계시 받았으나,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도들이 전해준 것을 받아서 알게 되었고 그것을 전했다.
-복음은 ‘예수 사건’이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성경의 약속대로’ 성취된 사건이다(3~4절). 오직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 믿는 현실적인 세상에서,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소식(복음)은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릴 것이다. 그러니 이 성경의 진리를 마음 속 깊이 새기지 않는다면 무수한 은사와 영적 체험이 있더라도 우리 신앙은 쉽게 흔들리고 말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론이나 풍문이 아니다. 신자들의 신념도 아니고 꾸며낸 속임수도 아니다.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있고 거부할 수 없는 증인이 있다(5~8절). 바울은 성경의 증거(3~4절)와 함께 부활의 증인들로 열두 제자, 오백 여 형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그리고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을 소개한다. 지금도 세상은 갖은 방법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려고 황당한 가설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성경의 교회의 존재, 부활의 소망과 능력으로 세상과 다르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자체가 부활의 확실한 증거다.
-부활은 흔들 수 없는 증거가 있고 거부할 수 없는 증인이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믿는 자들의 자기 신념도 아니고 꾸며낸 속임수도 아니다. 바울은 부활의 증인 중에 ‘다수가 지금도 살아있다’고 하면서 필요하면 언제든 증인을 부를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어서 바울은 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자신이라고 고백한다(9~11절). 교회를 핍박하던 그가 예수의 증인이 되고 교회를 위한 사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오늘을 살 수도 없고, 내일을 보장할 수도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은혜를 아는 자에게 복음을 위한 수고는 짐이 아니라 기쁨이요 영광이다. 이 은혜를 안다면, 우리도 우리를 회유하고 위협하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할 수 있다.
-성경대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십가가의 죽음과 부활, 이를 목격한 수많은 증인들의 증언들… 바울도 그들의 증언을 듣고 동일하게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복음은 시대나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 변하고 각색되어진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전해 받은 대로…. 전해 들은 대로” 굳게 지키며 헛되이 믿지 않은 증인들에 의해 계속 증언(전파)되었다. 그 증언들이 나에게까지 들려지고, 나 역시 그 복음을 증언하는 삶을 살고 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성경대로 이루어진 이 복음을 전해 받은 그대로” 믿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15장을 통해 “부활”이라는 주제를 심도있게 다루는 가장 큰 이유는 “전해 듣고, 받은 대로 성경대로 이루어진 복음의 사건”을 믿지 않거나, 왜곡한 것에 있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시대와 상황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복음은 이미 완성되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적용되고 가미되는 부분이 아닌, “이미 완성된 복음”에 시대와 상황의 가변성 속에서 “전해 듣고 받은 대로”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런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전해 받은, 들은 대로”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어 시대와 상황을 빗대어 마음대로 조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대로, 이루신 대로 “전해 받고, 들은 대로” 굳게 지키며 살며, 역시 그대로 “전해 주는”것이 구원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거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분명히 고백한다. 그가 복음의 사도 된 것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도로서 수고한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그 은혜를 알기에 “자신이나 그들(증인들)이나 이 복음을 전파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도(지금의 우리들도) 그래서 믿은 것이다.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복음을 전하는 그들(증인)의 소리가 이찌 들릴 수 있었겠으며, 그들처럼 나도 소리를 내어 전할 수 있었겠나? 오히려 그들보다 더 수고하여 전할 수 있었게나?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나?
*묵상하면서 “전해 들은 복음, 전해 받은 복음,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음”을 당부하는 바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각인된다.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묵직한 믿음의 고백이 감동이 된다.
*성경대로 이루어진 복음, 이를 전해 들은 대로(내가 직접 보지 못했으니 증인들의 신실한 증언들을 통해 들려지는) 이 복음안에 굳게 나의 마음을 지키고 살리라. 헛되이 믿지 않으리라!
*특히 전해 들은 대로 전해주는 사명을 받은 나에게 사명따라 사는 삶을 굳게 지켜야지 라는 마음을 다시 확인한다. 누구보다 더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도록 마음을 다지고 또 다져야겠다. 그래서 나는 “전해 받은 대로” 성경대로 이루어진 복음을 “전해 주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다.
*나의 힘으로 하는 수고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느끼는 만족감 속에서 사역하고 싶다. “복음” 전하는 것이 이렇게 은혜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늘 누려야 하겠다.
*복음은 굳게 지키는 것, 헛되이 믿지 않는 것, 은혜 안에서 누리는 것임을 나의 삶이 증명했으면 좋겠다. 바울처럼, 예수님처럼, 더 예수님처럼…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신 은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바울이 애틋하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권면하는 소리를 들어보자.
1.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20절)
“형제자매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새번역_20절).” 여기에 사용된 단어가 “마음”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 개역 개정은 ‘지혜’로 혹은 새변역은 ‘생각하다’로 번역했지만 직역하면 ‘마음’이다. 당시 사람들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활동력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마음’을 인식했다. 다른 의미는 지식, 지력, 이해력을 의미하도 했다.
“마음(생각)에는 어른이 되라!”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어른 다운 이해력으로 은사에 대하여 넉넉하게 품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이것이 참 힘들다. 그러려니 하며 포기하는 것이 아닌, 참고 기다려주며 관계를 이어가야 할 측면에서 “어른”의 역할은 결코 녹록치 않다. 그럼에도 늘 “마음이 어른”이 되는 연습을 게을리 말아야겠다.
2. 질서는 배려다(26-35절)
바울은 예배 모임 가운데 구성되는 각각의 순서들을 질서있게 배치하면서(덕을 세우기 위해_26절) 이에 대해 질서있게 따르라고(차례를 따라_27절, 하나씩, 하나씩_31절) 권면한다.
특히 방언과 통역을 어떻게 예배때 세울 것인지, 예언은 어떻게 모임 가운데 선포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공통적으로 홀로, 마음대로가 아닌 ‘함께’ 말하라고 권면한다. 방언은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한 사람의 통역으로’, ‘통역자가 없으면 하지 말 것’을, 예언도 역시 ‘둘이나 셋이 말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화평’이시기 때문이다(33절). 화평은 다른 의미로 본다면 성령께서 두 세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예언 하도록 선물로 주실 때 예언을 하는 당사자는 그 다음 예언하는 자가 말을 시작하면 자신이 하는 말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내용의 보완이라는 측면보다 “중구난방”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모습을 통해 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대한 권위를 각각 다른 예언하는 자들이 먼저 보임으로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권위를 당사자들 뿐 아니라 성도들이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사를 받은 자들이 “자기흥분’에서 오는 ‘자기 목소리’를 질러 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마음과 소리에 귀를 기울여 순종하며 선포하다가, 다른 예언하는 자들에게도 임하시는 성령의 권위를 인정함으로 자연스레 하던 말을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들의 소리”를 내는 것의 유혹을 “하나님의 마음과 소리”에 민감하고 이를 전달하는 위치를 겸손하게 받아 들일 때 가능한 모습이다.
또, 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기에 우열을 논할 수 없는 대상임을 인식하고 오직 한 가지 원리인 “사랑으로”모든 것을 세워주기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꺼이 다른 이가 예언을 시작하면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권위를 인정하고 멈추야 하는 것이다.
또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의미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여자(원문직역은 ‘아내’)들이 교회 모임에서 무질서하게 질문하거나, 은사를 사용한 상황에 대하여, 혹은 예언의 은사와 관련하여 무분별한 질문을 하는 경우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행동들을 “잠잠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여자들이 ‘예언’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므로 예언을 은사로 받았다면 충분히 할 수 있다. “잠잠하라”는 의미는 방언과 예언과 관련되어 무질서하게 흐트러진 것을 막으라는 의미인 것이다. 일각에서 이 구절에 근거하여 말도 안되는 억측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3. 품위있게(적절하게)(39절)
적합하게, 예의 바르게 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은사는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흥해야 한다. 아예 금지해서도 안되고, 아예 방임해서도 안된다. “적절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덕을 세우는 성도들 각자가 받은 은사를 “자기 기준”이 아니라 “공동체의 덕”을 생각하며 질서있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언하기를 열심으로 구하고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 자유함과 성숙함이 공존하는 공동체.어떤 지체들도 방언을 하지 못함으로 상처가 되는 일 없고, 누구든 예언하는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인정하며 순종할 수 있는 성숙한 공동체가 바울이 바라는 고린도 교회였다. 나도 꿈꾸는 ‘더온누리교회’다!
그런데 어떻게 감당하는 것이 “품위있게(적절하게)” 각 은사를 통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일까? 그 힌트가 “성령께서 그 뜻대로’ 주시는 것에 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은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적절하다. 각 지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은혜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이런 역할을 위해 주님께서 보내주셨으니까.
그렇다면, 성령께서 주신 대로 “성령의 능력과 역할”을 행사하는 것이 곧 품위있게 행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굳이 여기에 세상방식을 덧입히지도, 새로운 사상이나 철학을 덧칠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 자체가 곧 “품위”로운 것이니까.
한편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가 곧 품위있는 것이라면, 이런 상식적인 시각만으로도 “분별”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하나님께로서 오는 것인지, 사탄에게 휘둘리는 것인지 그가 행하는 은사가 공동체를 분열시키거나, 물의를 일으키거나, 심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가 생긴다면 그것은 “품위”있는(적절한) 것이 아니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도 간단한가!
나는?
-은사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러나 목적은 하나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덕’을 세우는 일이다(26~28절). 은사에 차이는 있지만, 차등은 없다. 하나님은 다양한 은사를 통해 풍성한 예배가 이루어지고 서로를 도우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니 연약한 형제를 위해 자기 권리를 제한해야 하듯(10장), 신령한 은사가 있더라도 덕을 세우기 위해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은사를 인정하고 그 은사가 잘 발휘되도록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성숙한 교회를 이뤄가야 하리라.
-고린도 교회는 다양한 은사를이 어우러져 풍성한 예배를 드렸다. 찬송시, 가르침, 계시, 방언, 방언 통역, 예언 등 여러 은사를 발휘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성도의 덕을 세웠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이 화평과 질서의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사탄의 미혹을 받아 자기 자랑과 자기 과시로 교만해졌기 때문이었다.
-공예배에서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양할 때는 두세 명만, 차례대로, 통역을 하면서 해야 할 것을 권면한다. 통역이 없으면 집에 가서 혼자 하나님께 하라고 강권한다. 풍성한 예배 가운데 나타나는 다양한 은사라도 질서 있게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방언보다 더 사모해야 할 은사지만(1절), 예언도 적당한 순서를 따라 ‘질서 있게'(40절) 해야 한다. 서로 방해하며 혼란을 주어서는 안 된다(29~33절). 은사를 사심 없이 ‘질서 있게’ 사용하는 곳에 하나님의 평화가 있다. 또한 은사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잘 분별해야 한다. 먼저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일치하는지 잘 살펴야 한다. 예언이든 은사든 속임에 능한 사탄의 도구로 공동체를 깨트리는 데 이용당할 수 있으니, 늘 은사의 동기를 잘 살펴야 한다.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교회의 ‘완전함’이 아니라 교회의 ‘하나 됨’이다.
-공적 예배에서 여자의 침묵에 대해 강조한다(33~36절).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기도하고 예언할 수 있지만(11:2~16), 공적인 예배를 방해할 정도로 방언을 하거나 예언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경계한다. 여인들이 당시 문화나 관습(33절), 성경(율법)에 따라 지켜야 할 질서를 지키지 않아 교회가 무질서와 혼란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침묵’에 대한 강요는 아니다. 교회에서든, 가정에서든 ‘질서’에 대한 강조다.
-바울은 이 모든 경고가 개인 견해가 아니라 ‘주의 명령’이라고 말한다(37~40절). 이는 스스로 선지자나 신령한 자로 자처하며 주님이 세우신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고 그의 권면을 무시하던 교만한 자들(36, 37절)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누구든 이 경고를 무시하는 자는 ‘알지도 못하는 자’라고 단언한다. 그들만이 아니라 이 시대 교회와 성도를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은사는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에 서로 아우성치며 드러내는 난장판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사도 운동의 비성경적인 은사의 실체를 간단히 깨우칠 수 있다. 비인격적(동물울음소리을 내는 방언이나 자세등을 흉내내는 기이한 행동) 것으로 공동체의 덕을 흠집내지 않는다.
-은사는 공동체를 세우고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덕을 알리기 위해 주신 선물이다. 그러니 은사 때문에 공동체가 분열되어서도 안되고 우열을 가리기 위해 경쟁 해서도 안된다. 더구나 이것이 분열의 빌미가 되어서도 더욱 안된다. 이런 조화와 균형을 위해 필요한 것이 “마음이 어른”이다.
-무엇이든 넉넉하게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 넉넉한 성도가 필요하다. 극과 극이 부딪히는 분열의 대척점에서 양 편을 아우를 수 있는 스펀지가 곧 “마음이 어른”이다. 교회의 장로, 권사, 안수집사는 곧 “마음이 어른”이어야 한다. 영적으로 어린아이들이 볼 수 없는 것 까지 성령께서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심으로 지혜롭게 행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마음 어른”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간혹 “마음이 애기들”이 겉으로는 “마음이 어른”인척 하고 있어서 분열과 경쟁이 심화되고, 상처와 아픔이 양산되어 왔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는 결코 “마음이 애기”를 양산하지 않는다. 도리어 더 사랑하고 더 배려하며 더 질서를 존중하는 “마음이 어른”을 세우시고 세우신다.
-오늘 내가 마음 어른으로 더 곧게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감정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어른으로 반응해햐 할 것이다. 어떤 상황을 대처하기 위해 생각할 때도 “마음 애기”가 아니라 “마음 어른”의 넓은 시각을 추구해야 하리라.
*마음 어른이 배려를 보여 주어야 덕이 세워진다. 마음 어른이 먼저 무위있게 행하여야 공동체의 수준이 높아진다. 더온누리공동체에 “마음이 어른”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나부터서 “마음이 어른” 연습을 게을리 말아야지.
*’마음이 어른’은 성령님의 마음을 전적으로 순종하며 나갈 때 시작되고 진행된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깨우치고 가르쳐 주실 때, 믿음으로 순종하고 사랑으로 행동하면 마음 어른이 되어간다. 나의 방식, 세사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방식으로 변화되어 가기에 그렇다.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담아내고 순종하며 나가느냐가 곧 마음어른의 척도다! 오늘도 “마음이 어른”으로 채워보겠다. 성령께서 기꺼이 도와주시고 필요한 은혜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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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구하며 사모함(1절)
전체적인 문맥의 흐름에서는 주된 것은 아니지만 14장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강력하게 권면한다.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신령한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특히 예언하기를 열망하십시오.” 사랑을 추구하라. 신령한 것들에 열심을 내라(desire_kjv) 특히, 예언하려 하라고 전한다.
앞서 12장에서는 성령께서 그 뜻대로 필요한 은사를 주신다고 했는데, 어라? 이건 도대체? 왜? 은사를 추구하라고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게 된다. 하지만 12장부터 이어지는 문맥을 따라 읽으면 이는 어떤 특정 은사를 꼭 찝어서 달라고 졸라대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신 은사를 “사랑으로” 감당하여 덕을 세워 나가라는 의미다. 이를 열심을 내어, 성실하게 감당하라는 의미이다. 즉, 추구하며 사모한다는 표현은 삶에서 드러난다는 의미다. 그대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느껴지고 영향력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철학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지체들을 “실제”적으로 사랑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읽혀진다. 할 수만 있으면 예언을 사모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지체들과 공동체를 하나님 나라 복음과 말씀으로 세우기 위해 자신부터 더 말씀으로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 치는 것이다!
더온누리공동체가 이렇게 실제의 사랑하기를 몸부림 치고, 더욱 말씀으로 다져지기를 말씀 때문에 도전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가 된다.
2. 덕을 끼침(세움_4, 5, 12절)
사랑을 추구하고 예언(더 신령한 은혜)을 사모하는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로 세워 질까? 바로 “덕”을 끼치는 공동체로 세워진다. 예언의 은사를 추구할 때 나타나는 열매가 공동체 안에서 “덕”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럼 이렇게 세워지는 “덕”이 뭘까?
1) 분명한 하나님의 뜻에 확신함(6-9절). 방언처럼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어떻게 진리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예언이나 가르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성도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겠나? “알아 들을 수 있도록” 하여 “분명한 나팔소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즉, 전장에서 울려퍼지는 확실한 나팔 소리로 병력들을 지휘하는 것 처럼,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함으로 세워나가는 것이 바로 “덕”이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에 바로 세워져야 올바로 건강한 노릇을 할 수 있다.
2)소통(10-12절). 소통이 얼만나 중요한지 모른다.. 참 씁쓸한 말이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소통되는 것, 그러니 “은사(은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공동체에서 “예언”의 은사를 베풀어 주셔서 서로를 “하나님의 뜻”으로 소통 시키신다.
하나님의 소통 방법은 “사람”인 것이다. 그 사람에게 “예언”의 은혜를 주셔서 설교 하고 가르치도록 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신다.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안에서 세워져 갈 수 있는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소통되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덕을 세워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러나 나는, 방언으로 만 마디 말을 하기보다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하여 나의 깨친 마음으로 교회에서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합니다(새번역_19절).” 소통의 중요한 기초는 은사중심의 넘치는 소음과 같은 방언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에 따라, 성령께서 주신 말을 담담하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깨친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만으로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어 공동체의 덕을 세울 수 있는 “예언(가르침)”의 은혜가 나에게 더욱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3. 그럼 방언은 공동체의 덕을 세울 수 없을까?(13~19절)
방언은 그 자체는 축복이다. 축복 받은 사람이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자원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방언도 매우 중요한 은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공동체의 덕을 세워 가는데에 “알아들음”은 어떤 요소보다 중요하다. “알지(알아 듣지) 못하면” 아무리 신비한 하늘의 것을 이야기해도 공동체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신비한 언어로 지체를 축복해도 그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면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나? 믿음으로 ‘아멘’할 수 있을까?(16절).
그래서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했다. 신비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보다 신비한 언어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소통)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방언으로도 공동체의 덕을 세울 수 있다는 의미다. “통역”할 수 만 있다면…
“이와 같이 여러분도 성령의 은사를 갈구하는 사람들이니, 교회에 덕을 끼치도록, 그 은사를 더욱 넘치게 받기를 힘쓰십시오.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그것을 통역할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내 마음은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영으로 기도하고, 또 깨친 마음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영으로 찬미하고, 또 깨친 마음으로도 찬미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대가 영으로만 감사를 드리면, 갓 믿기 시작한 사람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듣지 못하므로, 어떻게 그 감사 기도에 “아멘”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훌륭하게 감사 기도를 드린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는 덕이 되지 않습니다(새번역_12-17절).”
다른 사람들에게도 방언으로 말하여 덕을 세우기를 바란다면 “통역”하기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차라리 방언을 구하는 것 보다 예언을 구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만큼 소통과 가르침의 분명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도 그렇고 타인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소리)에서 덕(유익)을 얻을 수 없다. 자신은 감사하고 자기 덕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방언 경함이 문외한이거나 초신자들은 방언으로 드리는 기도나 찬양에 “아멘”할 수 없다. 신아에 도움이 되질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모임으로 모여 함께 예배하는 의미가 퇴색되어지기에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다면 반드시 통역을 구해서 하나님의 신비한 인도하심을 “듣고 아멘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나는?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사랑이다(1절). 신령한 체험이든 지식이든 은사든, ‘가장 좋은 길(사랑)’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에 풍성하던 은사들은 다 불완전한 것으로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13:8). 하지만 사랑만은 완전한 것이요. 그 사랑이 교회를 세운다. 사랑을 구현하는 은사가 ‘더 크고 값진 은사(12:31)’다. 다양함을 인정하되 은사를 주신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공동체의 유익과 덕을 도모하며, 사랑으로 감당해야 한다.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알아들을 수 없기에 공동체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2, 5~6절). 방언이 설혹 천사의 언어라 해도 알아들을 수 없으면 꽹꽈리 소리보다 나을 것이 없다(13:1). 하지만 신령해 보이기 때문에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자랑하고(4절) 방언을 못하는 사람들과 갈등을 빚었다. 교회를 ‘세우라’고 주신 은사가 도리어 교회를 ‘허무는’ 일에 쓰인 것이다. ‘자기부정’이 없는 은사로는 공동체를 바로 세울 수 없다.
-방언보다 예언을 다 사모하라는 것은 자기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라는 의미다(3~6절, 12절). 방언은 자기 신앙에 도움이 되고 자랑하는 데 그치지만, 예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공동체를 세우고 격려하며 더 많은 영혼들을 사랑으로 직접 소통하며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도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되는 언어로 하나님 나라 비밀을 가르칠 때 공동체는 더욱 그 뜻안에 든든히 세워진다.
-특히나 예언의 은사는 말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면, 13장의 모든 은사는 사랑으로 행하라고 한 흐름을 이어받아 깨닫는 것이 “사랑으로 말하고 가르치는 것”의 중요성이다. 사랑으로 말하고 가르칠 때, 하나님의 나라의 덕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공동체가 유익을 얻는 다는 것이다. 건조한 지식만을 전달하는 말이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는 사랑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방언만 말하고 예언(말씀, 가르침)이 없다면 공동체는 아무 유익을 누리지 못한다. 예언이야말로 교회를 세우는 사랑의 은사다. 자기보다 공동체를 앞세우는 것이 사랑이다.
-오늘날 나의 목회에서 성경의 지식만을 앵무새처럼 떠벌리는 가르침이 아니라, 사랑을 깊이 담고, 사랑을 통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말씀을 전할 때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실어 전하는 사랑꾼 되리라.
-세상의 모든 소리에는 뜻이 있다. 그런데 만약 악기나 전쟁 나팔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7~11절). 마찬가지로 아무리 신령한 언어, 최고의 은사라고 할지라도 알아듣지 못하면, 소통하여 공감되지 못하면, 허공에 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소통이 부재하면 고통받는 세상 속에서 소통을 통해 참회복을 추구하는 교회의 정체성이 무너진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무의미한 ‘소음’이 아닌, 의미 있는 ‘소리(말씀)와 소통’을 통해 신앙이 자라도록 돕는다. 그렇기에 아무리 신령한 것이라고 스스로 자부하여도, 알아들을 수 없다면 공동체를 가득 채우는 소음덩어리에 불과하다. 알아들을 수 있는 단 한마디의 말씀이어도 공동체를 세워가기에 충분하다.
-방언은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기에 자신도 타인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13~17절). 특히 공적인 예배에서 통역해주지 않으면 방언으로 드리는 기도나 찬양을 다른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도 없고 화답할 수도 없다. 사랑이 없는 은사처럼, 소통할 수 없는 은사도 공동체에 무익할 뿐이다. 또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일지라도 내 욕심과 허영이 담겨 있다면 ‘아멘’의 화답은 기대할 수 없다.
-결국 은사를 통해 교회의 유익을 먼저 구해야 한다(18~19절). 누구보다 방언에 능한 바울도 자신을 위한 방언보다 남을 위한 예언이 더 유익하다고 말한다. 못 알아듣는 ‘알만 마디의 방언’보다, 성령의 깨달음으로 가르치는 ‘다섯 마디’의 말이 더 유익하다고 말한다.
-은사 사용의 중요한 원리는 ‘절제와 배려’다. 내게 있는 은사로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려는 성향을 경계해야 한다. 나를 드러내는 절제되지 못한 은사가 있는 곳에는 ‘아멘’의 화답이 일어나지 않는다.
*소싯적에 은사를 참 많이도 갈망 했던 적이 있었다. 방언도 그때 받았다. 태국의 밀림을 걸을 때는 예기치 않는 신유가 일어나 내 자신이 더 깜짝 놀랄 때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꼭 필요할 때 성령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 선물들이 오늘 나의 마음에 얼마나 유익이 되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 더욱 집중하게 하였고, 여러 은사보다 “가르치는 은사”에 더욱 목마르게 하여 집중하고 또 집중하게 하였다. 목사는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선포하고 가르쳐야 하니까….
*은사(은혜)는 유익을 받고 유익을 끼치는 것이다. 어떤 은사(은혜)든 성령님께서 주신 유익이 먼저 나에게 넘쳐나고 이것이 “사랑”이라는 귀한 그릇에 듬뿍 담겨 내 공동체의 덕(유익)을 끼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은사를 매우 사모하고, 성실하게 감당하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결국 그 은사들로 공동체가 든든하게 세워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은사를 가진 지체들과 동역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그 사역들을 감당했을지 막막해진다. 주님께서 사람을 보내셨고,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고, 모두에게 사랑을 더욱 부어주셔서 모두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은사”를 감당하였기에 공동체가 건강해 질 수 있었다.
*더온누리공동체도 역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이기에 이렇게 인도하실 줄 믿는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추구하며, 영적인 것들을 사모하는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 공동체는 어떤 것보다 이 은사(은혜)가 필요하다. “사랑을 추구하고 영적인 것을 사모하되…” “교회의 덕”을 함께 세워 가기 위하여 꼭 필요하다!
*일만 마디의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보다, 성령의 은혜로 깨달아 가르치는 ‘다섯 마디’의 말이 내게 더욱 필요하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11장부터 14장까지 이어지는 은사에 대하 가르침에서 13장을 배치한 이유가 모든 은사들은 사랑의 정신으로 이웃을 섬기고 공동체를 세워 올리기 위해 사용되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은사(Charisma)”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은혜(charis)”의 개별화되고 구체화된 형태, 그러므로 은사를 받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없다. 또 똑같은 한 가지 은사를 받는 것도 아니다. “제각기” 주어진다. 그리고 은사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주신다.
사랑(아가페) : 아가페라는 단어는 본래는 특색이 없는 말이다. 그런데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헬라어 단어를 고심하게 된다. 문제는 헬라어 중에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사랑, 택함 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지칭할 수 단어가 딱히 없었다. 당시는 “에로스”와 같은 헬라인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담긴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가 있었으나 “에로스”는 특색이 매우 강한 단어였다. 에로스는 어떤 가치를 가진 대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하는 구체적인 행위를 지칭한다. 그래서 지식을 사랑하는 것,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하는 것, 권력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주장적인 사랑의 의미를 내포한 단어였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를 구현하기에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드물게 쓰이고 특색이 없었던 “아가페”라는 단어를 채택하여 사용하게 되었고,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이 단어에 죄인들을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신 하나님의 행위를 표현하는 의미로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이라는 강한 뜻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가페는 원래 헬라어에서는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이라는 의미가 없었으나 성경의 언어 사용에서 그런 뜻으로 형성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성경의 의미가 깃든 언어 사용을 통해 고유한 의미가 입혀지게 된 것이다.
1. 사랑이 없으면 모든 은사들은 헛 것이다(1-3절).
1절 – 고린도 성도들 중에는 방언들을 천사들의 언어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신들이 성령을 받아 방언을 하게 된 것을 하늘의 천사들과 같이 되어서 하늘의 예배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4:8). 이런 이유로 ‘방언’의 은사를 특별히 중시 하였고, 자랑하고, 예배때마다 무절제하게 행사하여 혼란에 빠뜨렸다. 또한,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는 당시 헬라의 신비 종교들에서 광란의 의식 때 쓰이는 도구들이었다. 이는 고린도 성도들 중에 과거 헬라 신비 종교에서의 체험을 상기시켜, 사랑이 없이 방언들만 해대는 것은 그들의 과거 이방 종교의 예배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2절 – ‘비밀들과 지식’은 계시로 얻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지식이다. ‘믿음’은 구원을 얻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아닌 주를 신뢰하고 그의 힘을 빌려 이적을 행하는 은사를 말한다. 이런 은사들을 행한다 한들,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 생활 열심히 하고 전도도 열심히 하지만 사랑이 결핍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다.
3절 – 고대 헬라-로마 사회에서는 부자들이 한턱을 내는 일이 아주 중요했다. “이스미안 경기” 때마다 부자들이 한 턱 크게 쓰는 일은 매우 흔한 일들이었다. 지금도 흔히 발견되는 비문들 중 도시를 위해 크게 헌금하고 행사한 자들에 대한 칭송비가 참 많다. 명예나 권세를 얻기 위해서였다. 사랑없는 종교적 열성이 공동체를 얼마나 무섭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 경고한다.
2. 사랑의 본질, 혹은 특징(4-7절)
원문은 이 부분이 “사랑”을 주어로 사용한 열 다섯개의 동사들로 사랑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는지를 기술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그려낸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실함을 통해 이런 성품들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십자가의 도를 좇는 것이 참 사랑이라는 거다. 복수하지 않고(오래 참고), 악을 선으로 갚고(온유), 투기와 자기 과시와 교만을 버린 겸허한 마음이 사랑이다. 동시에 불의에 눈감지 않고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진리 편에 서는 것이 사랑이다. 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은사를 사용할 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그리스도의 샬롬과 안식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사랑의 특징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정에 나타는 분쟁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행동들이다. 은사를 아무리 풍성하게 가지고 있다해도 사랑을 통해 교회와 성도를 섬기지 않으면 아무것, 아무 소용도 없다.
3. 사랑의 영원성(8-13절)
예언, 방언, 지식은 고린도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은사들이다. 여기에서 교회의 문제들이 발생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은 이 은사 자체로는 좋은 성령의 은사들이지만, 종말의 완성 때(9-12절) 모두 끝나게 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다(13절).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 필요한 것들이다. 골 1:4-5; 살전 1:3; 5:8이나 히 10:22-24; 벧전 1:3-9등에서 함께 사용된 것을 보면 초대교회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인 신앙의 본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믿음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부활했음을 받아들이고 그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는 것, 사랑의 행위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갈 5:6),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구원의 완성을 소망하는 것이다.
종말의 완성때도 인간은 하나님을 믿고 바라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신성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때 사랑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들 상호간의 관계를 결정 하는 것으로 영원히 남을 뿐 아니라 완성 되는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셋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자 행위이기에 인간의 구원을 이루고 인간으로 하여금 믿음과 소망을 갖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이 없다면? 바울은 바른 은사 사용의 원리로 사랑을 제시하며, 사랑 없는 은사의 무익함, 사랑의 본질, 사랑의 영원성과 우월성을 소개한다.
-사랑 없는 은사는 무익하다(1~3절). 고린도 성도들이 최고의 은사라고 여기던 “방언”도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한 “소음”에 지나지 않다. 탁월한 지식과 대단한 믿음을 소유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 없다.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구제나 목숨을 내어주는 순교도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 은사를 은사되게 하는 것이 사랑이요, 은사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이다. 사랑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
-십자가의 도(1:18)는 결국 사랑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완성된다(4~7절). 그 사랑의 시작은 ‘오래 참음’이다. 사랑은 연약하고 부족한 나 자신과 공동체를 보며 오늘의 모습보다 주님께서 빚어가실 내일을 기대하며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나를 높이지 않고 남과 견주지 않으며, 불의에 눈감지 않고 진리 편에 서며, 성내거나 무례히 행하지 않고 온유하며,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완성하실 약속된 미래를 바라보며 참고 견디는 것이다.
-사랑의 특성 하나 하나를 읊조리다보면, 사랑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임을 깨닫게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랑의 가치에 대한 찬사나, 개념 정리가 아니다. 실천이다. 내 안에서 발견되는 사랑의 열매가 과연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고린도 성도들이 추구하던 각종 은사들은 ‘언젠가’ 그 역할을 다하면 사라지겠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8~11절). 끝까지 변치 않고 남는 것은 ‘사랑’뿐이다. 또 은사는 ‘부분적인 것’인데, 이런 부분적인 것을 온전한 것처럼 생각하고 자랑하는 것은 미숙한 어린아이의 모습과도 같다. 모든 은사를 온전하게 하고, 영적 미숙함을 성숙함으로 이끄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들을 좇다가 사랑을 놓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 우리가 사모해야 할 영원한 가치가 ‘사랑’임을 알게 될 것이다(12~13절). 모든 은사도 그 가치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믿음과 소망(7절)’을 견인하는 것도 사랑이다. 사죄의 은총 속에 사귐으로 부르시는 초청에 응하여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새 창조의 목표다.
*사랑이 없으면 은사는 그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방언도 이방 종교에서처럼 시끄럽고 의미 없는 소음에 그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비밀)에 대한 지식과 대단한 이적을 베풀 수 있는 믿음(막 11:23)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없다. 사랑 없는 구제나, 사랑 없는 종교적 열성도 물질 낭비며, 몸만 상하는 헛수고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십자가의 도를 좇는 것이다. 이것이 참 사랑이다. 복수하지 않고(오래 참고), 악을 선으로 갚고(온유), 투기와 자기 과시와 교만을 버린 겸허한 마음이 사랑이다. 인간에 대한 얘의를 지키고, 자기 이익을 앞세우지 않고, 악을 용서하고 더 큰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하지만 동시에 불의에 눈감지 않고 진리 편에 서는 것이 사랑이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사랑은 여전하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 등 고린도 교회가 유난히 중요하게 여기는 은사들도 그 역할을 다하면 사라질 것이다. 이 은사들이 가리키고 있는 모든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와서 주님과 얼굴을 마주하며 교제할 날에는 그 진상이 명백하게 들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를 향한 신뢰와 순종의 믿음, 주를 바라는 소망, 그리고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나도 이것을 믿는다.
*성숙의 시금석은 사랑이다. 개념 정리, 찬사에 머무는 사랑 예찬이 아니라, 지체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웃의 필요를 살피고 나누며 섬기려는 의지와 실천이다.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라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멈추지 않으리라.
*결국 사랑의 삶이라면,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내야 한다. 더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삶이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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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몸과 많은 지체들(12~14절)
한 몸과 많은 지체들에 대해 설명한다. ‘마치 ~처럼 ~하다’라는 비교 표현을 통해 사람의 몸과 메시아의 몸으로서 교회를 연결한다. 핵심은 다양성과 통일성이다. ‘마치’로 시작하는 종속절 구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의 몸과 관련해 12절은 두 개의 절로 구성된다. 하나는 한 몸을 주어로 많은 지체가 있음을 말하고, 또 다른 하나는 많은 지체를 주어로 한 몸이라고 말한다. “한 몸(주어) – 많은 지체 – 많은 지체(주어) – 한 몸”의 구조다. 마찬가지로 메시아의 몸인 교회도 하나이지만,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이후 바울은 ‘왜냐하면’이라는 두 개의 이유절로 12절을 부연하는데, 먼저 13절을 통해 어떻게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같은 다양한 사람들이 한 몸이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한 몸안으로 세례를 받고, 한 피를 마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례와 주의 만찬(성찬)을 통해 주님과 연합된 것을 표현한 것이다. 또 14절을 통해 한 몸에는 하나의 지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지체들이 있음을 밝힌다. 13절은 통일성에, 14절은 다양성에 초점을 맞추어 표현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비교와 열등감에 대해(15~20절)
15~16절은 열등감과 관련한 비유다. 다양성과 통일성을 근거로 비교 상황으로 인한 교회 문제를 실제로 다룬 것이다. 그것은 ‘열등감’이다. 바울은 사람 몸에 있는 여러 지체들을 의인화하여 그 문제를 소개한다. 발은 자기가 손이 아니니까 몸에 필요 없는 존재라고 말하고, 귀 역시 눈과 비교하여 그렇게 말한다. 교회 안에서 은사와 섬김을 통한 비교 의식으로 중요한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를 구별하거나, 차별하는 상황을 전제한다. 특별히 비교로 열등감을 느끼는 존재들의 예를 들어준다.
17~20절은 열등감과 관련한 비유를 설명한다. 다른 지체와의 차이는 비교와 열등감을 느낄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모든 몸이 하나의 지체만 있다면 몸은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눈만 있는 몸은 보는 것 외에 다른 기능이 없다. 코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한 지체만으로 구성된 것은 몸이 아니다. 한 몸에는 반드시 다양한 지체들이 서로 다른 기능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더 나아가 다양한 기능의 지체를 한 몸에 둔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다. 그렇기에 비교를 통한 열등감은 합당하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쓸모없는 자녀와 선물(은사)은 없다. 오히려 다양한 성도와 은사가 있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다른 지체의 부족함을 채워 온전한 몸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3. 비교와 우월감에 대해(21~26절)
비교로 인한 두 번째 문제는 ‘우월감’이다. 역시 사람 몸의 지체들을 의인화해 상황을 제시한다(21절). 눈이 손에게 보는 기능이 없으니 쓸데없다 하거나 머리가 발에게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15~16절과 반대 상황이다. 추측하건데 교회 안에서 은사와 섬김을 통하여 우쭐거리는 부류의 태도를 지적한 듯 하다.
22~26절은 우월감 문제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다. 바울은 사람 몸의 예와 교회안의 예를 섞어가면서 계시한다. 또, 우월감을 설명하기 위해 의인화한 몸의 지체들의 경우와 달리 실제 사람은 몸에서 더 약해 보이는 부분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덜 귀하게 여겨지는 것을 더 귀한 것으로 입혀준다. 본문의 “더 약해 보이는 지체”는 추측하기로 내부 장기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손이나 발보다는 약하기에 아주 중요한 기관이기에 여러 모습으로 보호한다. 22절에서는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다’라고 강조하는데, ‘요긴하다’는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생존에 필수적인’ 존재라는 의미다. 약하고 감추어져 있어 눈에 띄지 않지만, 생명 유지에 결정적인 장기들이 있듯, 교회 안에서 사회적으로 비천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성도들이야말로 사실 그리스도의 몸을 지탱하는 핵심적인 지체들이다.
24절은 이 신비로운 몸을 설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24절의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라는 표현을 통해 토기장이신 하나님께서 강한 자와 약한 자를 완벽한 비율로 섞어 조화롭게 배치하셨음을 의미한다. 그 섭리의 목적은 몸 안에 ‘분쟁’을 없애고,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려는 데 있다. 이 ‘돌봄’은 함께 몸을 이루고 생명을 공유하는 연합을 유지한다. 그러므로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느끼고 ,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함께’ 즐거워한다. 이곳이 곧 은사의 경상이 사라진 자리, 성령 안에서 언약 공동체의 영광스러운 자리다.
4. 교회의 질서와 가장 좋은 길(27~31절)
27절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언급하며 비유를 고린도 교회에 직접 적용한다. 이는 보편 교회뿐만 아니라 지역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몸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다양한 직분과 은사를 ‘세우셨음’을 밝힌다(28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라는 순서는 서열이 아닌, 교회가 세워지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순서를 의미한다. 사도가 교회를 개척하고, 선지자와 교사가 말씀을 통해 양육하는 기초가 놓인 후, 능력 행함이나 병 고침,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방언 등의 은사가 기능하게 된다. 특히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같은 섬김의 은사가 기적을 행하는 은사와 나란히 언급된 것은, 교회를 돌보는 것이 성령의 거룩한 사역임을 바라보게 한다.
이어지는 29~30절에서 바울은 “다 사도이겠느냐 …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라는 수사적 질문을 던진다. 문맥상 ‘아니오’라는 답변을 예상하게 하는 질문들이다. 모든 성도가 방언과 같은 은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던 고린도 교회의 은사주의를 단호히 거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31절의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너희는 (지금) 더 큰 은사들(지위나 명예를 주는 은사들)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라는 직설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그들의 헛된 야망을 지적한 뒤,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라고 말하며 논의를 바꾼다. 이 “가장 좋은 길”은 경쟁적 은사 추구를 넘어서는 ‘사랑(13장)’이다.
모든 사람이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가 될 수 없다. 다 병 고치는 은사나 방언을 말하거나 통역하는 은사를 가질 수도 없다. 다양한 섬김의 모습과 은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최고의 것일까? 바울은 성도(독자)에게 더 나은 은사를 추구하라고 명하고 최고의 길을 알려주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최고의 은사가 아니라 주어진 은사들이 최고가 되게 하는 방법이다.
나는?
-주 안에서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의 구분이 사라졌다(12~13절). 모든 경계의 벽과 차별의 담이 허물어지고 한 성령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었다. 교회는 사랑과 섬김으로 영적 연합과 일치를 이루어야 할 곳이다. 그러니 또 다른 벽과 담을 쌓아 반목과 분쟁을 일삼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다양한 지체를 가진 한 몸의 공동체다.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모두 기억해야 한다. 우선 교회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을 연합된 자들이다. 그 안에서는 인종, 성, 신분의 구별 없이 모두 하나다. 교회는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랑과 섬김의 일치를 통해 구별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 몸의 존재방식과 같은데, 동시에 우리 몸에는 다른 기능을 하겠다는 것이다, 획일화된 고백과 스타일을 요구하는 곳에서는 자유로운 성령이 역사와 건강한 몸이 형성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다툼이 주는 불편을 잘 수용할 수 있는 넓은 품이 필요하다.
-한 몸에 각각 기능과 역할이 다른 지체들을 두셨다(14~21절). 한 사람에게 모든 은사와 직분을 주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은사와 직분을 맡기지 않으셨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몸이 제대로 기능하는 것이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은사와 역할은 없다. 저마다 주신 이유가 있고 세우신 목적(18절)이 있다. 내 은사와 역할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해서 어려움을 낳고 있지는 않는가? 이 일에 아무도 소외되거나 배제되지 않고, 또 다름이 주는 불편도 잘 수용할 수 있는 성숙한 공동체가 되기를 꿈꾼다.
-교회에는 중요하지 않은 지체도, 은사도 없다. 교회 안에서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은사라도 멸시해서는 안 된다. 역설적으로 덜 귀해 보이고 덜 아름답게 보이는 지체일수록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 못할 만큼 존귀하고 요긴하게 쓰신다. 화려한 외관이 그 기능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몸은 서로 다투지 않고 서로 같이 걱정해주는 관계가 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수고를 보이는 수고만큼이나 귀하게 볼 줄 아는 공동체에 아름다운 일치와 조화가 찾아 올 것이다.
-우리 눈에 보기에 더 약해보이고 덜 귀해보이는 지체일수록 더욱 존귀하게 여기시고 요긴하게 쓰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부족한 지체에게 더 큰 영광을 주심으로 몸의 조화를 이루어가게 하신다(22~26절). 이를 통해 교회가 더 연약한 지체에게 관심을 두고 분쟁 없이 서로 돌아보게 하신다. ‘한 몸’이기에, 한 지체의 아픔을 통감하고 한 지체의 영광을 질시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우리 더온누리공동체는 은사와 직분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 돌아보며 아름답게 지어져 가고 있을까? 보이지 않는 지체들의 수고와 헌신에 감사와 격려를 보내야 하리라.
-교회는 한 운명 공동체다. 한 지체가 아플 때 공동체 전체가 자기 아픔으로 느끼고, 한 지체의 영광에 모든 공동체가 시기나 질투 없이 같이 기뻐할 때 살아있는 건강한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주셨다. 모든 은사가 다 요긴하지만, 초자연적인 은사보다는 복음을 선포하고 진리를 가르치는 은사가 교회를 세우는 데 더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은사를 사모하려면 자신에게만 유익한 은사보다는 더 많은 이들에게, 더 약한 이들에게 유익을 끼칠 더 큰 은사들(14장의 ‘예언’)을 사모하는 것이 좋다.
-바울은 은사의 올바른 사용으로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진리’와 ‘사랑’을 강조한다. ‘말씀의 지도’와 ‘사랑의 원리’를 떠난 무분별한 사용이 고린도 교회의 무질서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탁월한 지식, 더 극적인 체험, 더 나은 은사를 구하기 전에, 날마다 말씀에 귀 기울이고 사랑이 많은 사람 되기를 사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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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28일 주보
♥교육부 여름 행사 – 다음세대를 소중히 책임지는 교육부서 여름행사 일정을 참고하셔서 기도와 후원으로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시지요? 우리

2026년 6월 21일 주보
8월 캄보디아 선교 사역에 수건을 모아 전달하고자 합니다. “새 수건”이 집에서 쓰지 않거나 남은 것이 있으시면, 포장을 벗겨서

2026년 6월 14일 주보
♥풍성한 삶의 기초 따르미 모집 – 더가족세미나를 수료하신 분들 가운데 “풍성한 삶의 기초” 과정에 참여할 따르미를 모집합니다. 풍성한

더온누리교회 전임 및 파트 교역자 청빙 공고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갈 동역자를 기다립니다. 전주 더온누리교회(www.theonnuri.org)에서 함께

#더온누리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은혜를 함께 나눠요. instagram에서 "#더온누리교회"를 태그해 주세요:)
🏕️ 2026 더원공동체 수련회 START!
BUILD UP 🧱✨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가시는 주님.
에베소서 2장 20-22절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삼아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은 수련회의 첫 시작,
개회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마음을 올려드립니다. 🙏
말씀 : 김지훈 목사
이번 수련회가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을 세우고,
공동체를 더욱 견고하게 세워가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함께 기도해주세요! 🤍
더온누리교회 더원공동체
#더온누리교회 #더원공동체 #대학부 #수련회
#빌드업 에베소서 예배 공동체
전주 청년사역 🏕️✨
📌 유튜브 태그
더온누리교회, 더원공동체, 대학부, 수련회, 빌드업, 에베소서, 예배, 공동체, 전주교회, 청년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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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가시는 주님.
에베소서 2장 20-22절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삼아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은 수련회의 첫 시작,
개회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마음을 올려드립니다. 🙏
말씀 : 김지훈 목사
이번 수련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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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더욱 견고하게 세워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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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우리는 종종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때때로
내 권리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을 선택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누릴 수 있었던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일,
고린도전서 9:1-23 말씀을 통해
내 권리보다 복음을 앞세우는 삶이 무엇인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제자의 길을 함께 묵상합니다.
“권리보다 복음이 먼저!”
내 만족보다 하나님의 뜻을,
내 자유보다 복음의 유익을 선택하는
믿음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주님 말씀하시면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고린도전서
#권리보다복음이먼저
#복음의능력
#제자의삶
#사도바울
#주님말씀하시면
#말씀묵상
#하나님나라
#신앙생활
#SundayService
#FirstCorinthians
#GospelFirst
[주일 예배 안내]
우리는 종종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때때로
내 권리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을 선택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누릴 수 있었던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일,
고린도전서 9:1-23 말씀을 통해
내 권리보다 복음을 앞세우는 삶이 무엇인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제자의 길을 함께 묵상합니다.
“권리보다 복음이 먼저!”
내 만족보다 하나님의 뜻을,
내 자유보다 복음의 유익을 선택하는
믿음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주님 말씀하시면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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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신앙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앞에
나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말씀보다
경험을 앞세우고,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언제나 말씀 위에 세워집니다.
이번 주일,
고린도전서 4:6-21 말씀을 통해
말씀의 경계를 넘어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겸손히 말씀 앞에 서는
참된 제자의 삶을 함께 묵상합니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내 생각보다 말씀을,
내 주장보다 복음을,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신뢰하는 믿음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말씀 앞에서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고린도전서
#말씀밖으로넘어가지말라
#말씀앞에서
#말씀묵상
#성경적삶
#복음의능력
#제자도
#하나님의말씀
#신앙생활
#SundayService
#FirstCorinthians
#BibleStudy
[주일 예배 안내]
신앙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앞에
나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말씀보다
경험을 앞세우고,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언제나 말씀 위에 세워집니다.
이번 주일,
고린도전서 4:6-21 말씀을 통해
말씀의 경계를 넘어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겸손히 말씀 앞에 서는
참된 제자의 삶을 함께 묵상합니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내 생각보다 말씀을,
내 주장보다 복음을,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신뢰하는 믿음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말씀 앞에서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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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하합니다! 🏅
지난 5월 30일,
호남권 어와나 교회들이 함께 모여
어와나 올림픽을 개최했습니다 🙌
말씀 안에서 함께 배우고,
함께 뛰며,
믿음의 우정을 쌓아가는 특별한 시간 ✨
더온누리교회 어린이들도 멋진 열정과 도전으로 참여하여
🥇 TNT팀 금메달 1개
🥈 TNT팀 은메달 1개
🥉 TNT팀 동메달 1개
그리고
🥉 Sparks팀 동메달 2개를 획득했습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
어와나는 어린이들이 말씀을 배우고 암송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훈련 공동체입니다 📖❤️
메달의 색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성장하고 함께 기뻐하는 믿음의 걸음입니다.
열심히 준비하고 참여한 모든 어린이들과
섬겨주신 교사, 부모님들께 감사드립니다 🙏
앞으로도 말씀 안에서 더욱 자라가는
더온누리교회 어와나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
#더온누리교회 #어와나 #어와나올림픽 #전주교회
#전주 #TNT #Sparks #다음세대
#말씀암송 #제자훈련 🏅✨
🏅 축하합니다! 🏅
지난 5월 30일,
호남권 어와나 교회들이 함께 모여
어와나 올림픽을 개최했습니다 🙌
말씀 안에서 함께 배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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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rks팀 동메달 2개를 획득했습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
어와나는 어린이들이 말씀을 배우고 암송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훈련 공동체입니다 📖❤️
메달의 색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성장하고 함께 기뻐하는 믿음의 걸음입니다.
열심히 준비하고 참여한 모든 어린이들과
섬겨주신 교사, 부모님들께 감사드립니다 🙏
앞으로도 말씀 안에서 더욱 자라가는
더온누리교회 어와나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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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삶이 여전히 애굽 같고,
현실이 여전히 광야 같아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은 멈추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장에서
요셉은 자신의 성공이나 업적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를 붙들었습니다.
아직 출애굽은 시작되지 않았고,
약속의 땅도 보이지 않았지만
요셉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50:15-26 말씀을 통해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언약을 더 신뢰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함께 묵상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돌보시리니”
세상에 익숙해지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순례자의 믿음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여기에 모인 우리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창세기
#하나님이반드시돌보시리니
#요셉
#하나님의언약
#약속의땅
#하나님나라
#믿음의여정
#여기에모인우리
#말씀묵상
#신앙생활
#SundayService
#Genesis
#GodWillSurelyTakeCareOfYou
[주일 예배 안내]
삶이 여전히 애굽 같고,
현실이 여전히 광야 같아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은 멈추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장에서
요셉은 자신의 성공이나 업적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를 붙들었습니다.
아직 출애굽은 시작되지 않았고,
약속의 땅도 보이지 않았지만
요셉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50:15-26 말씀을 통해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언약을 더 신뢰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함께 묵상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돌보시리니”
세상에 익숙해지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순례자의 믿음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여기에 모인 우리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창세기
#하나님이반드시돌보시리니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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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GodWillSurelyTakeCareOfYou
...
홀리빛키! 😆✨
우연이 아닌 은혜 🙌
아이들을 위한 축제
더온누리 홀리빛키가
많은 성도님들의 기도와 후원 가운데
은혜롭게 마무리되었습니다 🤍
웃음이 가득했고
행복이 넘쳤던 하루
마음껏 뛰어놀고
함께 웃으며
사랑을 나누었던 그날의 모습을 전합니다 ✨
아이들의 웃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했던 시간 🫶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홀리빛키
#어린이축제 #다음세대 #은혜 #교회행사
#플리마켓 #키즈페스티벌 😆✨
홀리빛키! 😆✨
우연이 아닌 은혜 🙌
아이들을 위한 축제
더온누리 홀리빛키가
많은 성도님들의 기도와 후원 가운데
은혜롭게 마무리되었습니다 🤍
웃음이 가득했고
행복이 넘쳤던 하루
마음껏 뛰어놀고
함께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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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홀리빛키
#어린이축제 #다음세대 #은혜 #교회행사
#플리마켓 #키즈페스티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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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풍요의 중심이 아니라,
구별된 자리.
눈에 띄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 머무는 곳.
이번 주일,
창세기 46:28~47:12 말씀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정을
고센으로 이끄셨는지 함께 묵상합니다.
“왜 고센이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가장 안전하고,
가장 은혜로운 자리로
우리를 이끄고 계십니다.
적용찬양 : 은혜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고센땅
#하나님의인도하심
#은혜
#주일말씀
#신앙묵상
#Jesus
#SundayService
#Genesis
#Grace
#FaithJourney
[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풍요의 중심이 아니라,
구별된 자리.
눈에 띄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 머무는 곳.
이번 주일,
창세기 46:28~47:12 말씀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정을
고센으로 이끄셨는지 함께 묵상합니다.
“왜 고센이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가장 안전하고,
가장 은혜로운 자리로
우리를 이끄고 계십니다.
적용찬양 : 은혜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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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예배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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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고센땅
#하나님의인도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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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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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Service
#Genesis
#Grace
#Faith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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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더 깊은 선교학교]
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삶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듯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세상을 향해
복을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
2026 더깊은 선교학교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배우고
선교의 비전을 함께 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
📖 2026 더깊은 선교학교
🗓 06.20 - 07.25 매주 토요일 (6주간)
📍 굿윌센터 2F
🎤 이효재 목사
🎤 주누가 선교사
🎤 김종홍 목사
✈ 단기선교
8월 1일(토) - 8월 4일(화), 일본
🎓 수료식
8월 23일(주일) 2부 예배
—
하나님이 찾으시는
복의 통로로 함께 세워지길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THE MISSION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더깊은선교학교
#선교 #더미션 #복의통로 #단기선교
#일본선교 #mission 🙏✨
[2026 더 깊은 선교학교]
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삶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듯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세상을 향해
복을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
2026 더깊은 선교학교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배우고
선교의 비전을 함께 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
📖 2026 더깊은 선교학교
🗓 06.20 - 07.25 매주 토요일 (6주간)
📍 굿윌센터 2F
🎤 이효재 목사
🎤 주누가 선교사
🎤 김종홍 목사
✈ 단기선교
8월 1일(토) - 8월 4일(화), 일본
🎓 수료식
8월 23일(주일) 2부 예배
—
하나님이 찾으시는
복의 통로로 함께 세워지길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THE MISSION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더깊은선교학교
#선교 #더미션 #복의통로 #단기선교
#일본선교 #mission 🙏✨
...
진정성,
목자의 힘 🙏
사람을 세우는 힘은
화려함이 아니라
진심에서 시작됩니다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며
다시 붙드는
목장의 본질
주님이 맡기신 영혼을 위해
오늘도 걸어갑니다 🤍
—
더온누리교회
2026 목자수련회
“진정성, 목자의 힘, 목장의 본질”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목자수련회
#목장 #목자의삶 #공동체 #진정성
#리더십 #기도 🙏✨
진정성,
목자의 힘 🙏
사람을 세우는 힘은
화려함이 아니라
진심에서 시작됩니다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며
다시 붙드는
목장의 본질
주님이 맡기신 영혼을 위해
오늘도 걸어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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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온누리교회
2026 목자수련회
“진정성, 목자의 힘, 목장의 본질”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목자수련회
#목장 #목자의삶 #공동체 #진정성
#리더십 #기도 🙏✨
...
[주일 예배 안내]
낮아진 자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억울함과 외로움,
그리고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도
믿음은 시선을 다시 하늘로 향하게 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9:1-10 말씀을 통해
바닥 같은 인생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묵상합니다.
“바닥에서 하늘을 보다”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길을 여십니다.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요셉의믿음
#하나님을바라보다
#믿음의시선
#주일말씀
#신앙묵상
#Jesus
#SundayService
#Genesis
#FaithJourney
#TrustGod
[주일 예배 안내]
낮아진 자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억울함과 외로움,
그리고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도
믿음은 시선을 다시 하늘로 향하게 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9:1-10 말씀을 통해
바닥 같은 인생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묵상합니다.
“바닥에서 하늘을 보다”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길을 여십니다.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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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SundayService
#Genesis
#FaithJourney
#TrustGod
...
[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리에는
결국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분노와 상처,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선택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하나님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4:18-31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잊어버린 삶이
어디로 흘러가게 되는지 깊이 묵상합니다.
“잊혀진 하나님, 드러난 잔혹함”
어둠 속에서도
다시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깨어진 세상을 끌어안고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신앙의경고
#하나님없는삶
#회개의자리
#주일말씀
#깨어진세상을끌어안고
#Jesus
#SundayService
#Genesis
#Repentance
#FaithJourney
[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리에는
결국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분노와 상처,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선택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하나님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4:18-31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잊어버린 삶이
어디로 흘러가게 되는지 깊이 묵상합니다.
“잊혀진 하나님, 드러난 잔혹함”
어둠 속에서도
다시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깨어진 세상을 끌어안고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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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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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entance
#Faith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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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익숙함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때로
낯설고 어색한 길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떠나야 할 때를 알면서도
머물고 싶은 마음,
그러나 그 부르심 앞에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믿음.
창세기 31:1-16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운 길을 걷는 믿음을 묵상합니다.
“익숙함을 떠나
어색한 약속의 땅으로”
익숙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결단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믿음의걸음
#하나님의인도하심
#순종의삶
#주일말씀
#나는믿네
#Jesus
#SundayService
#Genesis
#FaithJourney
#TrustGod
[주일 예배 안내]
익숙함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때로
낯설고 어색한 길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떠나야 할 때를 알면서도
머물고 싶은 마음,
그러나 그 부르심 앞에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믿음.
창세기 31:1-16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운 길을 걷는 믿음을 묵상합니다.
“익숙함을 떠나
어색한 약속의 땅으로”
익숙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결단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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