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깊은 탄식, 멈추지 않는 애통이 다윗을 감싸고 있다. 삶을 살다보면 이런 상황에 처할 때가 있다. 깊은 병에 걸렸든지, 어떤 범죄로 인해 큰 두려움에 빠지든지, 이유를 분명히 파악할 수 없는 고통이 엄습할 때가 있다. 그래서 다윗의 노래가 공감이 된다. 특정한 상황만을 묘사하기 보다 어떤 일로 인해 깊은 탄식과 애통에 빠져 있다. 슬픔과 고통이 한없이 짖누르는 시기를 누구나 경험하기에 다윗의 노래가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깊은 탄식과 멈추지 않는 애통 가운데 있을까?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사무친 울화로, 내 눈은 시력까지 흐려지고, 대적들 등쌀에 하도 울어서 눈이 침침합니다(새번역_7절).” ‘사무친 울화(근심으로 쇠하고)’, ‘대적들 등쌀에…’ 대적들의 등쌀에 울화가 사무쳤다는 것이다. 이것을 “주의 분노”, “주의 진노”로 여기고 있다(1절). 어떤 일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대적’들의 등쌀은 다윗을 ‘사무친 울화’가 치밀게 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내 뼈가 마디마다 떨립니다. 주님, 나를 고쳐 주십시오.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립니다….(새번역_2-3절)” 였다. 뼈 마디가 다 떨리며, 마음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떨었다. 극심한 고통일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온 몸과 마음이 고통중에 떨었다. 그리고 “나는 탄식만 하다가 지치고 말았습니다. 밤마다 짓는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내 잠자리를 적십니다(새번역_6절)”라고 쇠약한 고백도 이어진다.
이 와중에도 다윗은 하나님을 찾고 또 찾은 것이다.
1. 여호와여!
‘여호와여….’ 고통중에 그 이름을 잊지 않고 부른다. “떨리고 떨리며” 아파하는 그 와중에 다윗의 입술은 ‘울화통’치미는 대적들을 저주하기보다, 그 상황을 되뇌이는 것 보다 “여호와’의 이름을 거푸 부른다. 쉴 새 없이 부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께다. 그만큼 신뢰하고 바라는 이름이 ‘여호와’였다.
지금 겪는 고통 때문에 더 멀어 질 수 있는 하나님과의 거리감이 오히려 더욱 가까워 졌다. 아픔이 깊을 수록 불평과 원망, 자기능력과 계획으로 하나님의 이름 보다 현실적인 대응방안이 더 많이 중얼 거려 질 수 있는데, 다윗의 입술과 마음을 그렇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많이 부르고 불렀다! “여호와여!”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부르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밖에 해결 할 수 있는 분이 없다는 강한 신뢰로 부르는 이름이었다. 차선, 차차선으로 부르는 이름이 아니었다. “오직” 여호와밖에 없음을 간절히 인정하고 부르고 불렀다. “돌아와 주십시오, 주님. 내 생명을 건져 주십시오. 주님의 자비로우심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새번역_4절).”
내가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에는 이 진정스러움이 있을까?!
2. 들으셨도다! 받으셨도다! 물러가리로다!(8-10절)
다윗의 노래에서 느껴지는 놀라운 점이 있다. 바로 “솔직함”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꾸미지 않는다. ‘책망하지 마십시오’, ‘꾸짖지 마십시오’ ‘언제까지 지체하시렵니까?’… 하나님을 향한 표현이 진솔하다. 있는 감정을 그대로 쏟아낸다.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소통에 있어 “진솔함”이 가장 두드러진 방법이었다.
나는 어떠할까? 진솔한 하나님과의 소통… 진솔하지 못할 때 그것이 바로 외식 아닌가! 인간관계는 진솔하면 어색해 지는 경우가 있다. 트히 감정적인 상태일때가 그렇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진솔하면 진솔할 수록 관계의 단단함이 더해진다. 어느 정도이냐면 하나님의 응답하심에 대한 확고한 확신이다.
“…..들으셨도다!(들어 주셨다! 8절)”
“…..받으시리로다!(받아 주셨다! 9절)”
“…..물러가리로다!(물러가는구나! 10절)”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악한 일을 하는 자들아, 모두 다 내게서 물러가거라._새번역 8절)” 라고 외친 후 들으셨다! 받으셨다! 물러갔다!고 거듭 외친다! 깊은 탄식, 멈추지 않는 애통속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진솔하게 부르며 기도한 다윗은 응답 조차도 이미 이루어 진 것임을 선언한다. 어떻게 이리 할 수 있을까?
자신을 깊은 탄식과 애통 속에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그의 믿음이다. “돌아와 주십시오, 주님. 내 생명을 건져 주십시오. 주님의 자비로우심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죽어서는, 아무도 주님을 찬양하지 못합니다. 스올(무덤, 죽음)에서, 누가 주님께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새번역_4-5절)” 죽으면 아무도 주님을 찬양하지 못하니… 자신을 살려달라는 것이다. 허어 이런 믿음이라니… 나는 늘 주님을 찬양하기에 나를 살려 달라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살아나면 자신만큼 여호와를 찬양하는 사람도 없다는 강한 믿음의 확신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깊은 탄식과 애통에서 구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이 “들으셨도다!”, “받으시리로다!”, “물러가리로다!”를 선포할 수 있게 했다.
나는?
-다윗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다윗이 떨었던 것은 참기 힘든 질고나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대적들의 조롱과 비난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아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1~3절).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고통이 죄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도는 모든 고난을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는 은혜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 어떤 시련을 만났든지 어저 ‘끝나게’ 해달라고 구하기 전에, 어서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다윗은 자기에게 닥친 고통 속에서 주의 분노로 징계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않는다. 삶의 모든 경험을 하나님에 대한 경험으로 받아들인다. 하나님이 진노와 심판으로 그에게 임하신 것에 대해 회피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그는 더 맞닥뜨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간다. 기도는 고통, 슬픔, 두려움, 외로움, 죄악 됨, 심지어 보복의 마음까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전적으로 자신을 의탁하는 자들의 삶의 방식이다.
-다윗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다윗은 자기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상실하는 것보다 더 큰 상실과 고통은 없다고 간곡하게 호소한다(4~5절). 그는 다 잃어도 좋지만, 하나님만은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하나님이 아니면’ 오늘의 나도, 오늘을 살아갈 수도, 내일을 보장할 수도 없다는 고백이 여전히 내 입술에서 고백되고 있는가?
-시인은 극심한 고통 중에서 간신히 기운을 내 자신의 절박한 사정을 하나님께 아뢴다(6~7절). 하나님을 향한 그의 탄식은 가장 정직한 신뢰의 고백일 수 밖에 없다. 해명할 수 없는 시련 앞에서, 때로 간절히 기도하기도 하고, 때로 모질게 원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윗처럼 고난의 시간이 길어지고 내 기도에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라도, 하나님은 듣고 보고 다 알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나의 낙심이 주님에 대한 무지와 오해와 의심에서 오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이 이미 자기의 기도를 들으셨고, 앞으로도 들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8~10절). 그래서 그의 탄식은 허공을 치는 절규가 아니라 믿음의 노래였다. 이제 다윗의 떨림과 수모는 환희와 영광으로 바뀌고, 악담하던 대적들은 큰 수욕을 당한 채 황급히 물러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돌아오시면 모든 것이 역전된다!
-진솔한 하나님께 대한 고백들을 사모하게 되는 아침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 처한 상황대로 하나님께 아뢰리라. 이미 들으셨고, 받으셨으며, 물러간(해결된) 상황을 믿음으로 선포하리라.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이 떨리는 울화를 견디고 견디며 진솔하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주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 떨었던 내 몸과 마음처럼 대적들이 “떨게” 된다(10절). 아! 이 얼마나 탄식과 애통중의 북음이란 말인가!
-아무리 고통스러울때일지라도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더욱 진솔해야 한다. 진솔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가며 그 이름을 찬양하고자 하면, 찬양하도록 도우신다. 이 탄식과 애통중의 복음을 잊지 말아야 겠다. 나의 삶에서 작동되어야 하겠다.
-탄식과 애통은 고통이다. 하지만 이 고통이 통로가 되어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고 ‘들으시고, 받으시며, 해결하시는’하나님을 보게 된다면 그것이 곧 복음이다. 고통중에 하나님의 복을 바랄 이유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탄식과 애통의 터널을 지나는 여정인지 모른다. 이 걸음을 그저 나의 힘과 지략과 노력으로만 이겨내려고 하면 자칫 미궁에 빠질 수있다. 하지만 더욱 진솔하게 하나님과 소통하며 그의 구원하심을 구할 때 ”갑자기(황급히)” 물러간다!(10절).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구할 때, 진솔하게 소통할 때,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물러가게 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언제든, 어느때고 탄식과 애통의 복음의 때를 지날 수 있다. 그럴 때 더욱 하나님께 진솔하게 더욱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또 집중하는 삶이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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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시편은 위협적인 거짓 고소, 적대적인 박해 상황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탄식의 기도다. 하지만 시인의 탄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악인들이 심판 받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된다. 그렇게 이 시는 시인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의인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주실 기쁨을 확신한다.
거듭 이어지는 다윗의 기도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지만 이미 다윗은 이러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기도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1. 호소(1-2절)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나의 신음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나의 탄식 소리를 귀 담아 들어 주십시오'(새번역_1-2절) 시인은 주체할 수 없는 마음 속 괴로움을 품고 하나님 앞에 나온다. 시인은 3개의 명령형 동사를 병행하여 하나님께 간구한다.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심정을 헤아려 주시고’,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달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뿐 아니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마음속엣 터져나오는 탄식소리를 헤아려주시고 부르짖음을 들어주시기를 간구한다.
이때, 시인은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또한 고대사회에서 왕이 재판장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의롭게 심판하실 것에 대한 화신의 표현이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의롭게 재판하실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 자기 사정을 아뢴 것이다.
기도의 시작이 늘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호소에서 시작한다. 미사여구는 없다. 직진이다. 굳이 형식적인 어휘를 나열 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의미다. 관계가 형식적일 수록 먼저 구비하여 빠짐없이 구성해주어야 할 형식을 중요시 여긴다. 하지만 실제적인 관계는 형식보다 “진심”이다. 마음의 진실함을 애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접” 고백하며 토로한다. 다윗의 기도가 그렇다.
그런데 일방적인 호소에 그치지 않았다. 다윗의 기도에는 확실한 다름이 있었다.
2. 나의 호소보다 주님의 뜻(3절)
“주님, 새벽에 드리는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새벽에 내가 주님께 나의 사정을 아뢰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겠습니다.(새번역_3절)” 시인은 아침에 주께서 내 기도를 들으실 것이므로 아침에 기도하겠다고 한다. ‘아침’이라는 표현이 아침 제사 시간이거나 구원을 간구하는 시인의 열렬함에 대한 표현일 수 있으나, 아마도 어두운 고통의 시간이 물러가고 구원의 빛이 밝아오는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시간에 그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을 기대하며 시인은 주를 기다린다.
자신의 형편과 사정을 분명히 아뢰지만 역시자신이 바라는 해결책을 매달리지 않는다. “주님의 뜻”을 기다린다. 다른 번역본들은 “주의 응답”, “주께서 대답해 주시기를”, “주께 바란다” 등으로 표현했다. 의미는 동일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해결하시는 것을 마땅히 기다리겠다는 고백이다.
기도가 나만의 호소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다윗의 기도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고 보니 이 표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하신 기도와 판박이다. 다윗처럼 호소하고 이 고난의 십자가에 대하여 자신의 고통을 솔직하게 호소하였으나 결국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라고 고백하지 않으셨던가!
그렇다면 나의 기도도 역시 호소에 치중하기 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며 기다리는 것이어야 겠다. 기도는 드리면 드릴 수록 성령께서 이렇게 조율하실 것이다. 감정과 호소와 절박함으로 시작하나 평안과 기쁨으로 마무리될 수 있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해서가 아니라 결국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질 것을 바라보게 하시기 때문이다.
기도중의 평안은 “나의 호소”에 대한 “하나님의 뜻대로”의 반응임에 틀림없다.
3. 나의 탄식보다 하나님 찬양(4-12절)
시인은 1~3절에서 기도를 들어달라고 간구하다가, 4절에서 갑자기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닙니다’라고 선언한다. 원문에는 ‘왜냐하면(키)’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가 간청 드리는 하나님, 그의 상황을 판결해주실 재판장이시며 왕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상기하며 기도 응답에 대한 단단한 초석을 놓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락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초점을 맞추면서 ‘~이 아니다’ 또는 ‘~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관점(4~5a절)과 능동적 관점(5b~6절)으로 표현한다.
부정적인 관점은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지 않고,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한다. 능동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님은 행악자를 미워하시고,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며 피흘리는 자와 속이는 자들을 싫어하신다. 특히 죄악에 대하여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미워하시고’, ‘싫어하신다’는 3개의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표현을 통해 악을 전적으로 거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강조한다. 따라서 햇빛에 눈이 곧바로 녹아버리듯 악은 거룩하신 주님과 잠시라도 공존할 수 없다. 4절의 ‘머물다(구르)’는 유목민들이 돌아다니며 한 장소에 임시적으로 머무는 것을 가리킨다. 잠시라도 악이 주와 함께 공존할 수 없기에 자기 자랑이 가득한 오만한 자들, 행악자들, 거짓말하는 자들, 피 흘리기를 서슴치 않는 폭력적인 자들, 속이는 자들은 주의 거룩한 임재 앞에 설 수 없다. 주께서 아들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시며 반드시 멸망시키실 것이다(6절).
7~8절에서 하나님은 악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행악자들을 미워허시는 반면, 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풍성한 사랑을 배푸시고, 그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따라서 악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머물 수 없는 것과 대조적으로 시인은 성전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기를 갈망하며 기도한다. ‘성전을 향하여 예배한다’는 것은 주님의 가장 친밀한 임재의 장소인 지성소를 향한다는 것이므로 예배의 대상이 지성소가 아니라 지성소에 임재하신 주님이시다.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의와 선행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죄악을 기뻐하시지 않는 하나님,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시 130:3). 따라서 시인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언약적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 예배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원수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기도한다. 원수들은 시인을 지켜보며그를 해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만, 시인은 주의 의로 인도해주시고 ㅈ의 길을 곧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
다윗의 기도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자신의 절박한 상황의 호소보다 더 풍성하다는 것이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여러 상황들… 하지만 그 상황을 분명히 통제하고 계시는 하니님에 대한 지식이 분명하다는 의미다.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기도할지 막막한 경우가 꽤 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지?” 이렇다. 그러다 보면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하 장탄식만 하게 된다. 그리고 관전이 나의 고통, 아픔, 환난 이런 상황에 함몰되기 때문에 주님께 드리는 기도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나의 “희망가”에 머무르는 경우가 흔하다. 왜 그럴까?
나의 삶의 탄식을 바라보시는(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정작 이 상황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상황만 중얼거리다 끝난다.하나님을 잘 모르기 떄문이다. 그런데 다윗의 기도에는 자신의 상황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너무나 확신 가운데 고백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단하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들이 쏟아진다.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삶 속에서 이를 이미 경험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생생하게 삶을 관통했기에” 주저하지 않고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 노래한다. ‘죄악을 좋아하지 않으시는…(4절)’, ‘교만한 자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자들을 미워하시는…(5절)’, ‘거짓말쟁이들, 싸움쟁이들, 사기꾼들을 몹시도 싫어하시는…(6절)’ 그래서 “주님, 주님께서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그들을 은혜로 지켜 주십니다(새번역_12절).”라고 담대히 찬양하며 선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다윗의 기도는 철저히 말씀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여 선포한다. 그가 구구절절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들은 이미 하나님계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이미 알려주신 것들이었다. 다윗은 그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말씀대로” 이루실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확신했다. 지나온 삶을 통해 검증되었기도 했으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이루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다윗의 기도에는 넘쳐난다.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자신이 처한 곤고한 상황에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크신 은혜를 힘입어 주님의 집으로 나아갑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성전 바라보며, 주님께 꿇어 엎드립니다(새번역_7절).”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그러나”이다. 억울한 심정을을 호소하는 것은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 억울함에 시선을 맞추지 않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맞추겠다는 믿음의 확고함이다. 억울함보다 억울함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억울함의 덫을 놓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심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담대히 고백한다. “주님, 나를 대적하는 원수를 보시고, 주님의 공의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내 앞에 주님의 길을 환히 열어 주십시오(새번역_8절).” 억울함과 그 덫을 놓은 원수들은 자신의 앞에 주의 길을 더욱 환히 열게 하는 통로라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억울한 상황에 내몰려도 흔들리지 않게 한다.
다윗은 기도를 늘 이렇게 드렸다!
나는?
-절규하듯 부르짖는 기도뿐 아니라 그 마음의 신음까지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애타는 그의 심사를 깊이 헤아려 살피신다(1~3절).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나를 지으시고 구원하시 분이 오늘 내 형편을 통해 나를 온전히 빚고 계심을,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더 깊음을 신뢰하리라. 지금은 한 숨 쉴 때가 아니라 큰 숨을 몰아쉬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가 아닐까?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어떤 죄악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의인의 피를 흘리며 거짓과 교만과 행악을 일삼는 자들을 미워하시고 심판하신다(4~6절). 그러므로 어쩌다 잘 넘어간 죄악이 하나님의 용인은 아니기에 지금이라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 혹 부당한 평가와 오해, 조소와 비난 가운데 있는가? 하나님은 내 허물과 억울함뿐 아니라 그들의 속임과 악함까지도 다 아신다. 그러므로 끝까지 신뢰하며 주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다윗은 큰 곤경 중에도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만은 의심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사랑을 힘입어, 우너수들의 숱한 훼방에도 ‘주의 집’에 들어가 예배하고 끝까지 ‘주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기를 소망했다(7~8절).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모든 것이 그분의 인자하심의 결과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상황이 나를 절망으로 몰아가더라도 주를 겨외하고 경배하는 마음만은 생채기 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다윗은 의인의 길을 막고 주를 배역하는 악인들이 자기 꾀에 빠져 쫓겨나도록 탄원한다. 반면 주의 이름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의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한다(10~12절). 그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의 거룩한 성품(4~6절)과 풍성한 인자(7절)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이 시편은 아침에 드리는 기도로 알려져 있다. 하루를 시작하며 어떤 상황이 펼쳐 질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자는 믿음의 고백일 것이다. 하루를 열며 나의 근심걱정, 탄식이 여전히 나를 짖누르며 시작할 지라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신뢰하며 시작하는 다윗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어야 하리라!
-다윗의 기도는 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더 풍성하다. 상황에 대한 탄식보다 역사하실 하나님을 더 노래한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노래다. 오늘 나의 노래도 이런 노래가 되어야지!
-가장 은혜가 되는 말씀은 “그러나 주님께로 피신하는 사람은 누구나 기뻐하고, 길이길이 즐거워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주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그들을 은혜로 지켜 주십니다(새번역_11-12절).” 이다. 주님께 피신한 사람은 “누구나”, “길이길이” 기쁨을 누리도록 지켜주신다”,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푸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은혜로 지켜주신다”
-그렇게 살아왔기에 확신 가운데 선포하는 다윗의 모습에 도전된다. 비록 삶의 중간 중간 잠시 죄에 미끄러졌어도 다시 주님 앞에 서서 끈질기게 살아온 삶의 저력이 인간적인 능력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로 드러난 것이다.
-주님께서 지켜주시는 삶을 이렇게 살아왔노라. 노래하는 다윗의 노래가 나의 노래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을 부르며 노래가 시작된다.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과 들어주심을 구하며 현재의 상황을 토로하며 하나님 도우심을 구한다. 혹독한 곤란 중에 하나님께 도움읊 구하다. 그리고 자신을 대적하는 세력들을 향해 호통을 치며 침묵과 회개를 촉구한다. 당당히 대적들에게 맞서고 차분하게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곤란 중에(1절)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일까?
1. 부를 때에 … 들으시리로다(1, 3절)
곤란(곤궁)한 일을 당했을 때 다윗은 그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라 구하는(1절) 그에게 ‘들어주실 것’을 확신하는 은혜를 베푸신다. ‘은혜를 베푸사….부를 때에 들으시리로다’ 확신한다. 기도를 들으심…이 확신은 곤궁함에 빠졌을 때 어떤 것보다 큰 힘이 된다. 그렇다면 들어주심의 근거가 무엇일까? 다윗은 무슨 근거로 ‘들어주시리로다’ 라고 확신할까?
그것은 ‘곤란 중에’….’너그럽게 하셨음’을 알았고, ‘의의 제사(올바른 제사)를 드리고 주님의 의지하여’ 살아갈 때 확신할 수 있다. 즉 평소 하나님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곤란에 처할 때도 특별하지 않다. 그저 하나님 안에서 일상일 뿐이다.
삶에서 바람(강풍)이 불 수도 있다. 폭풍우가 올 수도 있겠다. 메마를 수도 있겠고 홍수가 밀려올 수도 있겠지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이런 곤란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상이라면 ‘올 수도’ 있는 별일 아니다. 이런 위기가 오면 그저 평소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들어주시니까…’
내가 부를 때에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이것이 은혜다!
2. 은혜 증거(2-5절)
다윗이 안타까워 하며 노래하는 말들에게서 은혜를 누리는 증거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내 삶에 은혜가 있다면 이런 증거(모습)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 헛된 일을 좋아 하지 않는다. 거짓 신을 섬기지 않는다(2절). 경건하다(헌신한다_3절). 분노하며 죄짓지 않는다(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회개한다(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하다_4절). 올바른 제사(의의 제사), 주를 의지함(5절)이다.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다면 이런 모습들이 자연스레 나타난다. 이런 삶이 일상이라면 곤궁함을 만났을 때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것도 가장 먼저…. 이것이 은혜다.
그렇다면 은혜는 감정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다. 치열한 삶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다. 그 싸움의 승리가 “어떤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가장 먼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3. 은혜의 열매(6-7절)
이 은혜가 맺는 열매가 “기쁨”, “평안”이다. 다윗이 이 노래를 지을 때의 상황을 안다면, ‘이게 가능한가?’ 라며 도전 받을 수 밖에 없다. 본문은 시편 3편의 후속시로도 알려져 있다. 즉 아들의 반역으로 급히 도망 다니는 삶속에서 하루 종일 ‘대적’들의 위협, 추격의 곤궁함 속에서 밤을 맞이하며 잠자리에 들기 전에 고백한 노래이다.
어떻게 이런 믿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수많은 대적들이 죽이겠다며 쫓아오고, 마음은 아들의 반역으로 인해 갈기 갈기 찢어졌다. 이런 상황에 ‘기쁨’, ‘평안’이라니… 그런데 다윗은 담대히 고백한다. 상황과 여건에 반응하는 인간은 결코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기쁨이 햇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크단다! 더 가관인 것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그 밤에…’평안’히 눕고 자겠다는 거다. 이 평안이 자기최면, 주문에서 오는 감정이 아니라 “나를 안전하게 살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이란다. 다윗의 기쁨과 평안은 도무지 기뻐할 수 없고 평안할 수 없는 중에서 이를 누린다고 노래한다. 이것이 은혜다.
진정한 은혜는 무엇일까? 삶의 기쁨과 평안이라는 것이 나의 노력, 수고의 열매가 아니라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안겨 주신)” 것이며 “안전을 책임 지시는(구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택하여 기름부은 자를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일상의 역설로 나타났다. 곤궁(곤란)하나 기쁘다. 쭟기나 평안하다.
이것은 구원하신 자들에게 “안겨 주신” 것이다. 내가 찾고 구하고 애써 수고하여 만들어간 것이 아니다. “주신” 것이다. 이를 누리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말이다.
나는?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곤란에 처했을 때, 그의 기도에 응답하여 운신의 폭을 넓혀(“너그럽게”) 주셨다(1절). 그래서 고난이 옥죄어와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의 마음까지 묶지 못했다. 더는 해볼 도리가 없거든 긍휼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은혜를 기다리리라. 고난은 불평하라고 주신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라고 주신 조건이기에…
-대적들(“인생들아”)은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아래 누리던 지위와 영광을 얄팍한 술수로 빼앗았다(2~3절). 하지만 다윗은 그들의 부당하고 불의한 역모를 ‘허사’와 ‘궤휼’이라고 규정하고 도리어 그들에게 호통을 친다. 의의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실 줄 굳게 믿었기에, 대적들 앞에서도 당당하고 담대할 수 있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지금 겪고 있는 곤경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래본다.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을 절대 두려워해선 안 된다.
-다윗은 자신을 공박하고 헛된 일을 꾸미며 거짓을 좇는 자들에게 그 일이 과연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정당한 일인지를 돌아보라고 충고한다(4~5절). 잠잠하고 더 이상 죄 짓지 말며, 세상 권모술수가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의의 제사”)으로 돌아서라고 권고한다. 혹시 나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정당하지 못한 일을 추구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현실은 바뀌지 않았지만, 다윗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은혜로 호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쁨과 평안을 누렸다(6~8절). 숨통을 조여 오는 곤경 중에 있다면, 삶의 의욕이 없고 불안과 염려에 잠을 못 이루고 있다면, 시인의 고백을 따라 주님을 피난처와 안식처로 삼으리라
-사탄은 속이는 자다. 그 역시 창조자인데,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아닌 것을 그런 것으로 만들고, 그 반대도 한다. 그래서 파괴자다. 거짓된 말로 진실한 삶을 파괴하고, 비난과 조롱으로 인격을 파괴한다. 거짓의 힘은 진실의 힘만큼 강하다. 예수님이 자신을 버려서 자기 말의 진실성을 증명해야 할 정도로 강하다.
-시인은 이런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세상속에서 거짓이 쳐놓은 그물에서 벗어나는 길은 참과 거짓의 기준을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라고 외친다. 선과 악, 의와 불의의 기준은 하나님이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최종적인 판단자가 되실 수 있다. 영광이 수치가 되고 거짓이 진실로 둔갑한 상황이 고통스럽지만, 의의 하나님이 그 얼굴을 비추시는 날 모든 상황은 역전될 것이고 악의 잔상은 낱낱이 드러날 것이다.
-의는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여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속에 있는 것을 말한다. 그는 하나님만을 피난처요, 안전의 근거로 삼는다. 곡식과 새포도주의 풍성함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다. 그들의 기쁨은 물질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그런 자들만이 고난 중에서도 두 발 뻗고 편히 안식할 수 있다.
-기도에 대한 오해가 있다. 곤란한 일이 닥치면 나의 해결책을 구하는 것을 기도라고 여긴다. 그런데 다윗은 곤란한 하루를 보내고 마무리하는 저녁에 기도하며 자신의 해결책을 구하지 않는다. 주께서 “안겨 주실” 것을 기대한다. 내가 원하는 ‘해결책’을 조르지 않는다!
-기쁨과 평안은 오직 안전히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다! 기도의 응답이다. 내 삶도 그랬다. 곤란한 일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해결책을 펼치지 않으셨다. 그저 내 마음에 일고 있는 격한 불안, 불만, 초조, 염려, 근심, 걱정의 놀을 잠재우시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확신과 평안을 먼저 주셨다. 그러면 알수 없는 기쁨이 밀려 올라오곤 했다.
-그런데 다윗은 평소, 일상에서 이미 이것을 알았다. 그래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장탄식으로 시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하실 일을 먼저 고백하고 선포하며 “이미 자기 마음에 두신” 확신을 선포하고 누렸다! 아…. 이런 다윗이라니…..
-일상이 마음에 두신 기쁨과 평안으로 인해 곤란함이 큰 파도를 이루어 덮쳐와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곤란함은 다윗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확신하는 시간이 될 뿐이었다. 그런 다윗에게 밤은 두려움이 아니라 편히 쉬는 쉼과 평안이었다.
-전 세계가 몇몇 지역의 전쟁과 소위 강대국들의 이기주의와 맞물려 고통당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교회와 성도가 고백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인생의 길에서 갑자기 곤란함을 만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구하고 매달리는 평안과 안전이 아니라, 이미 “내 마음에 두신” 평안을 누리는 것이 바로 은혜다. 이렇게 은혜 안에 사는 자는 경건한 자요, 범죄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삶을 산다! 그러니 또 경제적으로 곤란에 빠지면 어떻하지? 또 근심되는 사건이 일어나면? 등등 걱정하며 근심하는 것보다. “이미 내 마음에 두신” “기쁨”, “평안”, “안전”을 누리자!
-진정한 안전과 평안은 “이미 내 마음에 두셨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어쩌면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암흑기중의 하나일 수 있겠다. 사울에게 쫓길 때나, 밧세바와의 사건이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충격과 고통이 넘칠 시기였겠다. 아들의 반역은 어떤 배신보다도 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아들의 반역을 따르는 ‘수’도 많았다. 도망치는 자신을 따르는 ‘수’는 극히 적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의 판단은 끝났다. 세상은 압살롬의 손을 들어 준 것 같다. 더구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왈가왈부한다. 다윗을 따르는 ‘수’가 적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버렸다는 말을 주저없이 해 댄다.
사면초가… 이 상황에 딱히 이 말 외에는 표현할 글이 생각나지 않는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다윗은 어떻게 했나? 나도 혹시 모를 이 위기가 닥칠 때 다윗처럼 어떻게 해야 할까?
1. 이리도 많습니까?(1-2절)
자신이 처한 상황에 솔직하게 직면한다. ‘아니야 아닐꺼야 이럴리 없어’가 아니다. 직면한 현실을 애둘러 외면하지 않고 직시한다. 그들의 반역이 소수의 반정이 아니라 ‘민심’까지 돌아선 상황(삼하 15:13)이라는 사실을 굳이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할까 이런 상황이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자신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 이제 자신을 ‘대적’한다. 그 대적은 물리적인 대적보다 더 치명적인 “마음의 대적”이다. “다윗왕을 하나님이 버렸다. 그러니까 아들이 반역한 거지.”, “하나님께서 뭔가 심판하신거야.. 우리가 모르는 심각한 죄가 있겠지.”,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아들 압살롬을 들어 다윗을 치실까?” 대충 이런 반응들이었을 것이다.
다윗의 고통은 아들이 배신했다는 것 뿐 아니라 그보다, 그 아들을 따르는 무리가 “어찌 그리 많은가!” 서로 나를 죽이려고 “일어나 치는 자가 많구나!”였다. 더욱 괴롭게 한 “하나님이 버렸다(구원받지 못한다_2절)”는 말들 이었다.
이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 고통과 아픔을 하나님께 직고한다. “여호와여!” 직면하고 직시하여 직고하는 다윗. 이 깊은 고통의 현실과 시간, 이 상황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버렸다고 토로하며 “여호와”께 달려갔다. 누가 뭐라 그런들 다윗에게 여호와는 “외쳐 부르고 찾을” 최선(가장 먼저), 최고(어떤 대상보다), 최후(유일한)의 하나님이셨다!
한편 곰곰히 생각되어 지는 것은 평소 하나님에 대한 신뢰,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이 상황에서 과연 하나님을 먼저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다윗이 대단하다!
2. 탄식보다 신뢰!(3-7절)
여호와께 달려가 탄식하나 탄식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굳게 신뢰함을 더 많이 고백하고 드러낸다! 방패, 영광, 나의 머리를 드시는자(승리하게 하는 하나님), 응답, 붙드심, 구원은 여호와께 등등 흔들림 없는 고백이 이어진다.
오늘날 직면하고 직시하여 직고할 때 다윗처럼 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직면, 직시하는 것도 참 대단한 것이지만 직고는 더 놀라운 것이다. 더구나 그 내용이 탄식, 불평은 잠시일 뿐, 오히려 이전보다 더 깊은 신뢰의 고백들로 부르짖는다. 진정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할 부르짖음이 울려 퍼진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방패’되시는 하나님. 반역의 무리들 앞에서 나의 머리를 ‘들게’ 하시는 하나님. 재정비한 군사력보다 ‘힘껏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마음의 평안’이 쫓기는 어수선함의 한복판에서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 사방에서 시시각각 조여오는 위협 속에도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 결국 하나님께서는 친히 원수의 뺨을 치시고 함부로 이야기하는 이들의 입을 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 시고 구원을 나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
이것이 “수많은 대적들”이 쫓아오는 피난의 길에 울려 퍼진 다윗의 부르짖음이었다. 이 부르짖음은 불평이 아니라 신뢰였다!
나는?
-함께하던 이들의 배신과 아들 압살롬의 반란보다 다윗에게 더 큰 고통은 준 것은 ‘그가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대적들의 조소였다(1~2절). 그것은 신앙의 근간을 흔들고 와해시키는 비수와도 같았다. 지금 이 순간 곤경에 처한 하나님의 자녀를 더 깊은 ‘불신’과 절망의 늪으로 빠뜨리려는 악한 세력들이 있다. 고난의 때일수록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기 마음을 지켜야 하겠다.
-다윗은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는 든든한 방패요, 지금의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어주실 분이요, 왕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주실 분임을 신뢰했기 때문이다(3~4절). 지금 내가 처함 상황이 아무리 기막힐지라도 하나님마저 무력하고 무정한 분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상황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더라도, 믿음과 소망을 꺽지 않는 한 하나님의 침묵은 응답으로, 현재의 암담한 형편은 구원의 현장으로 바뀔 것이다.
-다윗은 그래서 확신 중에 평안함을 누렸다. 대적들에게 쫓기고 사방으로 포위된 상황에서도 편히 잘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자기를 붙들어 주신 하나님을 확신했기 때문이다(5~6절). 기도의 응답(4절)은 탄탄대로가 아니라 험난한 길이라도 근심하지 않고 주와 함께하며 담대히 걷게 된다. 주의 능하신 손에 나의 삶을 맡기리라.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그래서 다윗은 숱한 대적들이 일어나 치려 할 때에도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였다. 또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대적들의 조롱에도 하나님을 향해 담데히 기도할 수 있었다(7~8절). 숨 막힐 듯 막막한 현실에 서 있다면, 그 현장에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니을 신뢰해야 한다. 내일을 맞이하기도 두려웠던 시간은 가고 은총의 아침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5절). 주님께서 이렁서시면 모든 것이 역전된다.
-감히 가늠 할 수 없는 일을 다윗은 만났다. 절대 권력의 자리에서 한 순간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그를 죽이려는 자는 아들이다! 이제껏 충성을 맹세하던 신하들이었다!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이 배신감과 좌절의 깊이를 말이다. 그래서 선뜻 공감이 되질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배신감의 충격도 큰데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의 배신감은 어쩌겠나! 겨우 이정도로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더 좌절스러운 것은 “너의 하나님이 없다!”라는 말들이다. 이런 상황을 봐라! 하나님이 너를 버리신 것이 분명하다! 상황을 보며 하나님의 구원까지 판단하는 ‘수’많은 대적들의 ‘수’많은 말들이다.
-그러나 다윗은 ‘수’많은 대적들의 ‘수’많은 정죄와 판단에 자신의 마음을 맡기지 않았다! 급히 도망치는 그 길에서 가장 먼저 “여호와여!” 부르짖는다! 사람들은 이 상황을 보고 하나님이 그를 버렸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는 하나님부터 찾는다! 아! 이것이 신앙의 정수 아닐까!
-내가 처한 상황을 보며 사람들은 쉽게 정죄와 판단을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평가와 판단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간섭하지 못했다. 오히려 사람들이 버렸다고 아우성치는 그 하나님을 찾고 또 찾는다! 그리고서 잠깐의 탄식 뒤에 넘치는 “신뢰”의 고백을 멈추지 않는다. 확신의 고백과 행동을 아끼지 않는다! 이래서 다윗이 대단한가 보다.
-상황에 휘둘리고, 감정에 발목 잡히고, 자기 생각과 계산에 함몰되어 쉽게 하나님을 찾지 못할 수 있는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래서 다윗을 닮고 싶다! 그의 직면하는 솔직함을, 그의 직고하는 단단한 믿음을, 그의 믿음에서 나오는 담대한 평안함을 말이다.
-무엇보다 “여호와여!” 가장 먼저 찾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 절망속에서 절박하게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을, 그 단단한 신뢰를 닮고 싶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 왕권을 통해 인간 왕권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 관계를 묘사한다. 시인은 이와같은 묘사를 통해 지상의 열방과 통치자들의 행복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통치를 즐거워하는 것에 근거함을 보여준다. 또한 ‘나의 왕’과 ‘나의 아들’의 호칭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종말론적 메시아 개념으로 확장한다.
1. ‘어찌하여’ 메시아 왕권에 대적하는가?(1~3절)
이 단락은 ‘어찌하여’로 묶이는 시행들의 집합이다. 시인은 매우 격정적으로 질문하며 의분을 드러낸다. ‘어찌하여’로 시작하는 질문은 뭇 민족들의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강렬하게 개탄한다. 그들이 전쟁을 위하여 요란하게 움직이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작전과 음모 꾸미는 것을 질타하려는 의도다.
먼저 시인은 이방 나라들이 소동을 피우고 법석을 떨며 소동을 일으키는 행위를 비난한다(1절). 또한 어찌하여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 곧 통치자들이 일어나 함께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를 향해 대적하느냐 라고 외친다(2절). 시인은 하나님의 왕권과 그가 세우신 왕에 대항하여 반기를 든 열방과, 폭력과 위협과 음모로 가득한 세상을 고발하듯 표현한다. 열방의 왕들이 내거는 구호를 반박이라도 하듯 그대로 인용하여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3절)’고 외친다. ‘맨 것’과 ‘결박’은 일종의 은유이고 통치와 통제를 의미한다.
즉, 열방의 왕들은 하나님이 ‘그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를 통해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의도가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시온에 왕(메시아)을 세우시다(4~9절)
이 단락은 뭇 민족들과 열방의 통치자들의 음모와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다. 먼저, 하늘에 앉으신 자, 곧 주님이 그들을 비웃는다(4절). 그리고 분노하시며 그들을 향해 말씀하시는데, 타오르는 진노로 호령하신다(5절). 시인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대언하며 지상의 통치자들을 두렵게 하신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6절)’. ‘나의 왕은 누구일까?’ 하나님이 다윗 왕의 후손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신 후(삼하 7:16) 예언자들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 세워지는 새로운 왕을 예언했다. 또, ‘시온’ 즉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거처는 어디일까? 본래 시온산은 다윗성을 일컫지만(삼하 5:7), 시간이 흐를수록 이 의미가 확대되어 예루살렘과 솔로몬의 성전이 있는 서 있는 언덕이 된다. 즉, 시온산은 하나님이 구별하신 산으로서 주님이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장소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로 시작하는 7절은 왕의 선언과 왕이 인용한 하나님 말씀이다. 새롭게 왕이 된 사람이 기름 부음을 받고 왕좌에 앉은 후 하나님이 공식적으로 선포하신 말씀이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라는 이 말은 왕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부여하는 하나님 말씀이다. 그러면 누가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인가? 당연하게도 다윗의 왕권을 잇는 후손들이다(삼하 7:14). 그렇기에 다윗 가문의 영원한 왕권에 대한 약속이 재천명되고 갱신된 선포로서 기능한다. 또,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는 비유적인 표현은 즉위식으로 세워지는 왕의 신성함과 새로운 출생을 나타낸다.
이렇게 선포한 후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이 된 자에게 하나님이 ‘네게 구하라(8절)’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운 왕에게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주고, 왕의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를 것을 약속하신다(8절). 고대 근동 나라들의 왕은 신적 권력을 가졌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인간적인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열방을 ‘쇠 지팡이로 깨뜨리고 질그릇처럼 부수는’ 힘과 권세를 부여 받는다(9절). 매우 강하고 견고한 통치권의 상징인 ‘쇠 지팡이’와 그 반대 묘사인 ‘질그릇’이 대비되어 철저하고 완전한 파괴의 실행을 상상하게 한다.
곧 다윗 혈통의 왕이 실행하는 강력한 통치권이 ‘질그릇’ 같은 땅의 군주들을 철저하게 파괴하여 범세계적인 통치가 실현됨을 그려주고 있다. 물론 이 권세는 반역적이고 오만한 나라들을(2:1~3) 향해 행사하는 힘과 권세다. 그 권세는 왕의 인간적인 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권세에 기초한 것이다.
3. 열방의 왕들에게 하는 권면(10~12절)
시온, 곧 예루살렘 왕이 등극했다. 시인은 오만한 지상의 왕들과 권력자들을(2:1~3) 향해 경고하고 권면한다. 시인의 의도가 정확히 드러나는데, 군왕들에게는 지혜를 얻고, 재판관들에게는 교훈을 받으라고(10절) 경고한다. ‘지혜를 얻으라’는 말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통찰력을 얻으라는 권면이지만, ‘교훈을 받으라’는 말은 좀 더 엄격한 표현으로 징계를 받고 이치에 맞게 자기를 수정할 줄 알라는 말이다. 세상의 왕들과 재판관들을 향한 조언이 계속 이어진다. ‘여호와를 두려워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라(11절)고 한다. 이스라엘의 지혜 신앙 진통에서 ‘여호와 경외’는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다(밤 1:7; 9:10).
마지막으로 시인은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12a절)’고 한다. 이는 여호와가 분노하여 길에서 멸망하지 않도록, 그분이 진노가 일순간 확 불타오르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12bc절). 입맞춤은 경의와 겸손과 복종의 표시다. 시인의 마지막 고백이 의미심장한데,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자는 행복하다(12d절)’이다. 경고 이후 제시된 초대다.
시인은 시온에 세우신 하나님의 아들인 왕의 통치를 받도록 경고했고, 이제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피하여 행복을 누리라고 권면했다. 시인은 왜 이런 의도가 담긴 시편을 시작하는 처음에 배치했을까? 그것은 사람이든지, 민족과 나라든지 삶의 행복이 무엇에 기초를 두는지, 시편의 언어로 역설하기 위함이다. 또, 통치자들의 행복은 어디로부터 시작되는지를 제시하기 위함이다. 행복한 사람, 또는 복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읊조리며 깊은 묵상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인 것처럼(1:1~2),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 무거운 책임감을 가질 왕들과 통치자들의 행복의 기초와 근원이 무엇인가를 경고함으로 권면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시편 1~2편은 각 사람에서부터 나라의 권력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가르침과 통치권을 겸손히 받들고, 그 보호 아래 있는 것이 행복임을 역설한다.
나는?
-표현이 다르지만 1편과 비슷한 주제다. 악인과 의인, 복과 멸망을 대조를 이룬다. ‘기름 부음 받은 자’와 그의 나라, ‘세상의 군왕들(관원들, 재판관들)’과 그들의 나라가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나라와 나라, 왕과 왕의 관계가 아니라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와 그의 통치를 거부하는 ‘세상의 군왕들’이 대립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들의 대립을 노래하는 것도 아니다. 장소만 ‘시온’으로 언급 했을 뿐, 하나님께서 세우신 ‘메시아(기름 부음 받은 자)’와 이방 나라들의 대립을 노래한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대립을 묘사하는 것이다.
-인간은 늘 그래왔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자기 나라들을 통치했다. 자기 나라를 하나님과 상관 없이 통치 하기에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고, 관계된 모든 것을 끊어 버린다. 자기 잘남으로 살고자 한다. 하나님은 필요 없다고 한다. 어쩌면 이 시대와 이리 판박이인가! 하지만 이런 인간들의 도모는 하나님께 헛된 것일 뿐이다. 그의 변치 않는 권세와 권능(철장, 쇠 지팡이_9절)은 이런 인간들의 도모를 질그릇을 깨뜨리는 것 같이 부숴 버리신다. 군왕들의 강함은 하나님 앞에 약하디 약한 질그릇 같다! 어찌 그것을 모를까?
-복된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세우시는 나라이다(6절).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왕, 메시아가 선 나라이다. 그 나라는 세상 군왕들, 관원들, 재판장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이룩한 나라처럼 ‘서로’ 헛된 일을 꾸미고 꾀를 내어 세우는 나라가 아니다. “나의 왕”을 나의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워 이룩한 나라이다. 자기들의 꾀와 헛될 일에 힘을 모으는 이방나라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실 나라의 유업이다(8절). 하나님께서 주신 “철장(쇠 막대기)”으로 그 이방나라들의 분노와 헛된 일과 꾀들을 깨뜨리신다(9절). 질그릇을 깨뜨리듯 철저하게 부수신다.
-시편 1편에서도 “하나님의 가르침(율법, 토라)”을 주야로 묵상하며(읊조리며) 즐거워하는 자가 복 있는 삶이라 노래 했다. 역시 본문에서도 복된 나라는 “그의 교훈을 받는” 나라임을 노래한다(10절). 이 나라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 하는 나라이다(11절)”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의 교훈을 받고, 경외하며 섬기고, 떨며 즐거워 하는 나라가 복된 나라이다. 결국 왕의 힘으로 존속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훈(토라)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들 두려워(떨며) 하나 즐거워함으로 사는 나라가 “복된 나라”이다.
-개인의 복도 하나님의 가르침(토라)을 즐거워하여 사는 삶이라고 노래하고(시편 1편), 나라의 권력자들의 복도 하나님의 가르침(토라)과 통치를 경외함으로 섬기며, 그 아래 있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참된 복임을 노래한다(시편 2편).
-그렇다면 헛된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그런 나라는 악인의 삶처럼 이방나라들도 서로 헛된 일을 꾸미고, 서로 꾀를 내어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고, 통치(맨 것, 결박)를 거절한다.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대적”하겠다는 것이며, 또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이 대적을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군왕들, 관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겠다며 “분내어(흥분하여) 서로 힘을 합하여 전략을 낸다. 자기가 유일한 통치자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왕은 자신이 “신”이 되고자 했다.
-고대의 왕들이 다 그랬지 않았던가! 자신을 곧 신과 동일시하여 얼마나 많은 폭력과 억압을 행사하며 개인의 영달을 누렸는지 몰느다. 이런 특권(?)을 간섭받고, 지적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도 ‘신’이 되어 더욱 “신 처럼” 행동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나라들의 행동을 하나님은 “웃으신다”, “비웃으신다” 에고… 쯧쯧쯧 이라는 거다!(4절) 하지만 그저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분과 진노”를 유발한다(5절).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며 대적하는 왕과 나라들에게 반드시 심판하신다. 그것도 “급하게(반드시, 속히_12절)” 망하게 하신다. 하나님과 그의 기름부은 받은 자를 대적하는 나라와 왕들, 관원들, 재판장들은 반드시 자신들이 가는 길에서 망한다!(12절) 망할 길을 가는데 그들은 알지 못한다…
*행복한 나라가 나의 나라이기를 소망한다. 헛된 나라를 발버둥치며 세우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기를 기대한다. 이런 나라의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이다. 이 통치를 거부하거나 대적하는 것은 헛된 나라, 이 통치를 기꺼이 받아 들이되, 경외함의 떨림과 기꺼이 섬기는 즐거움으로 이를 누리는 것이 복된 나라다! 나의 삶이 복된 길, 복된 나라이어야 하리라!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부지중에가 아니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것이었다! 이것이 통치에 대한 거역이다. 그래서 에덴동산은 더 이상 그들의 나라가 되지 못했다.
*요즘 시대가 이런 시대다. 내가 나를 완전히 다스리고 싶어한다. 내 인생 내가 마음대로 할거야! 라고 아주 당연하게 외친다. 함부로 행한다. 나에 대하여 자신 외에 어느 누구의 다스림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타인은 나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허 그것 참… 자기 자신은 자기의 말만 들어야 하고 다른 사람도 나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이런 억지가 어디있을까?
*이런 모습이 결국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이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제 마음껏” 반드시 망하는 헛된 길, 헛된 나라다. 그런데 이만큼 달콤한 것은 없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즐거울까! 하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진정한 즐거움이다. 그를 경외하여 떨림으로 함께 하는 “즐거움”! 이 의외의 역설이 인생을 복되게 한다. 내가 왕은 아니지만 왕처럼 살도록 누리게 하신다. 나의 말대로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교훈따라 살면 그 길이 형통하다! 형통을 경험하면 즐겁다! 이 진정한 즐거움을 누리며 그 안에 거하는 것이 복 되다!
*행복한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나라! 반면, 헛된 나라! 자기 통치가 난무하는 나라! 우리 공동체가 행한 나라이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내고 그 통치를 즐거워 하는 공동체! 그 공동체가 바로 더온누리공동체다! 더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하나님 나라 진실한 공동체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시편 1편과 2편은 표제어 없이 ‘행복(아슈레)’으로 시작하고 끝맺는다. 두 시편을 이해하는 열쇠가 ‘행복’이다. 1편은 시편의 세계로 안내하며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의 문을 연다. 행복의 밑바탕은 하나님의 가르침, 곧 ‘토라(율법)’를 읊조리는 묵상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는 공적인 예배의 배경보다 구약의 지혜사상을 반영하면서 각 사람의 삶의 여정을 위한 교훈적인 성격이 짙다. 무엇보다 토라를 묵상하는 의인은 고대 사회의 신적인 복과 낙원을 누리고 하나님 임재의 상징물인 ‘나무’처럼(참조. 겔 41:18) 번성한다. 반면 악인은 바람에 흩어지는 ‘겨’로 형상화되어 의인과 대조적으로 스스로 망하는 ‘길’로 귀착한다.
1. 행복한 사람의 특징과 결과(1~3절)
1절은 행복한 사람의 길을 노래한다. 시편 전체와 1편을 시작하는 첫 마디는 ‘복 있는 사람’ 곧 ‘행복한 사람’이다. ‘복 있는’으로 번역된 형용사 ‘아슈레’는 ‘행복하다’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행복은 물질적인 소유의 넘침이나 세속적인 성공의 여부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와 관련이 있다. 시인은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복의 개념이 아닌 행복한 사람을 묘사한다. 행복한 사람은 악인의 꾀(음모),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피한다. 악인-죄인-오만한 자 모두 동의적인 차원에서 연결되고, 이들의 행위와 존재를 특정하는 꾀-길-자리가 순차적으로 나열된다. 즉, 행복한 사람은 악인과 어울려 걷지 않고, 서지 않고, 앉지 않는 사람이다. 곧 악인-죄인-오만한 자아 반대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행복이다. 악인들의 음습한 음모, 죄인들이 매우 그럴듯하고 매끄럽게 다져놓은 길, 경건을 비웃는 거만한 자의 자리를 기웃거리지 않는 사람이 행복하다.
2절에서는 악하고 반역적이며 오만한 행위를 피하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라고 노래하는 1절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길을 노래한다. 행복은 악한 무언가를 피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다른 무엇을 받아들일 때 충만해진다. 행복한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 곧 여호와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읊조리며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율법’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토라’는 ‘가르침’, ‘교훈’을 의미한다. 이는 곧 삶의 방침이며 지침이다. 여호와의 율법을 버거운 짐과 의무로만 한정할 수 없다. ‘토라’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을 위해 바람직한 삶의 길을 안내하는 하나님의 애정어린 가르침이다. 길 없는 광야에서 살아갈 방향을 설정하도록 주신 지침이다. 온종일 낮은 목소리로 여호와의 가르침을 읊조리며 건져 올린 깊은 성찰이 행복이다. 하나님의 교훈을 즐거워함이 악인과 오만한 자들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이다.
3절은 그 의인을 시냇가의 나무와 같다고 노래한다. ‘악인-죄인-오만한 자’의 길을 피하고, 여호와의 가르침을 온종일 읊조리며 깊이 새기는 사람의 행복은 “삶의 충만”으로 귀결된다. 그는 비가 오지 않는 계절에도 물줄기가 끊이지 않는 강가에 심긴 나무가 된다.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나무처럼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다(3절). 악을 떠난 행복한 사람은 생명의 활기로 충만하여 열매 맺고 번성하는 나무처럼 안전하다(겔 47:12). 나무가 계절에 맞게 정해진 때에 열매 맺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 질서와 시간표에 따라 사는 삶이다. 순리에 맞는 삶이다. 그러니 서두르거나 조급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하나님의 질서와 때에 따라 안전한 삶을 누리는 행복한 사람이 의인인 셈이다.
2. 악인의 특징과 결과(4~6절)
4절에서 그러나 악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시인은 3절과 대조하여 악인의 삶은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겨’와 같다고 했다. 이 직유적 표현은 악인을 가볍고 무익한 텅 빈 껍데기 같은 존재로 그려낸다. 더군다나 ‘겨(모츠)’와 3절의 ‘나무(에츠)’ 비교는 의도적으로 비슷한 음가를 활용한 언어유희처럼 보여 악인의 운명을 암묵적으로 비웃는다. 주목할 것은 ‘겨’에 대한 비유인데, 이는 예언서의 종말론적인 심판 문맥에서 주로 발견된다(사 17:13; 41:15; 호 13:3; 습 2:2). 반면, 겨와 대조되는 ‘나무(3절)’는 태초의 에덴동산을 적시는 강가에 심겨 생명이 약동하는 ‘생명나무(창 2:9)’를 상상하게 한다.
5절에서는 악인들의 최후를 묘사한다. 악인들이 끝내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죄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함께 할 수 없다. 하나님이 마침내 행동하신다. 4절의 악인들이 ‘겨’와 같다는 종말론적인 심판 문맥과 연결된 것처럼, 악인의 최후 심판 장면이 묘사된다. ‘심판’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공평과 정의로 악을 판결하시는 법정 소송에 불려나온 악인들을 연상시킨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어떤 중재나 변호도 받을 수 없기에 자기의 권리 주장을 위해 일어설 수 없다. 이는 공평한 판결을 통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의인들의 모임에 끼어들 수 없다는 뜻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들과 악인들의 분리를 기정 사실화한다. 그러니 의인들이 누리는 행복을 악인들은 결코 맛볼 수 없다. 분리 자체가 심판이다.
6절 마지막 시행에서 의인들의 길과 악인들의 길이 더 분명하게 대조된다. 시인은 의인들의 길을 여호와가 ‘인정하시지만’ 악인들의 길은 멸망한다는 확신에 차 있다. ‘인정하다’는 말은 본래 ‘알다’라는 뜻으로 앎(지식)에 관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정보 차원의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이 의인의 삶에 꼼꼼히 보고 개입하시는 구체적인 앎을 통한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의미한다. 본 구절은 시편 전체의 문을 열면서 삶의 두 갈래 길을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로 제시한다. 이를 통해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어느 길에 설 것인가?를 선택하도록 설득한다. 시편 26:12의 “의인의 평탄함”과 시편 35:6에서 “악인의 미끄러운 길”을 묘사하며 양 갈래 길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안내한다. 시인은 명령과 설명이 아닌 시적인 묘사를 통해 삶의 진리와 진실을 밝힌다.
3.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악인-죄인-오만한 자와 어울려 한 길 걷지 않고 서지 않는 사람이다(1절). 그는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움으로 삼고 온종일 읊조리며 삶을 반성한다(2절). 이것이 매일 습관으로 내면화할 때 의인의 삶이 된다. 끝내 여호와가 ‘의인들의 길’을 아신다(6절).
눈여겨볼 것은, 악인들이 사악한 중범죄자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인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과 악인들을 같은 범주의 사람으로 묶고 이들이 길을 잃어 멸망하는 것이 자명한 이치인 것처럼 노래한다.
시편 1편은 ‘행복한 사람’과 ‘의인’의 삶의 존재 방식을 하나로 노래했다. ‘여호와의 율법’, 곧 ‘여호와의 가르침’에 뿌리 내린 삶이다. 이와 함께 시인이 말하는 ‘의인들의 길’과 ‘악인들의 길’로 대조되는 두 갈래 길은 구약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 전통의 흐름과 조화를 이룬다(잠 4:18, 19; 15:9). 잠언의 지혜도 의인의 길은 생명의 길(12:8), 악인의 길은 파멸과 죽음의 길이라고 교훈한다(14:12). 이후 예수님도 고대 이스라엘의 시인과 지혜자처럼 두 갈래 길을 말씀하신다. ‘파멸이 이르는 넓은 길’과 ‘생명에 이르는 좁은 길’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마 7:13~14).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촉촉하게 생명력을 유지하며 제 삶을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의인이다. 그런 사람은 주 하나님이 정하신 ‘방향’을 따라 ‘걷고’, ‘서고’, ‘앉는’ 사람이다.
나는?
-행복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행복의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것, 그 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고 창조되어가는 것 그것이 생명이다. 그것이 생명을 누리는 길이며, 생명력을 더 풍성하게 하는 길이며, 진정한 기쁨의 길이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는 행복 없는 자이며 그것은 화(禍)요 죽음이다. 시인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자를 악인, 죄인, 오만한 자로 부른다. 행복이 없는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 백성의 신분을 택할지 아니면 악인의 권모술수와 죄인의 삶의 방식과 하나님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한 자들의 모임을 택할지를 정하라고 요구한다. 둘 사이에 걸쳐 있을 곳은 없다. 죄는 관계이기에 주께로 돌아서지 않으면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로 가다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된다(약 1:15). 나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가?
-행복한 자와 악인의 결과가 얼마나 다른가? 당장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고, 때로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더 나아 보일 때도 있으나, 그것은 허상이고 실상은 그렇지 않다. 행복한 사람은 시냇가 옆에 든든히 서서 제철을 맞아 열매를 내놓는 나무 같지만, 행복이 없는 자는 열매는 고사하고 잔바람에도 온데간데없이 날아가는 겨와 같다. 열매 없는 자는 심판에 멸망하겠지만, 열매 있는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누릴 것이다. 즉, 형통할 것이다.
-행복 있는 삶은 언약 관계에 신실한 의로운 삶이다. 하나님은 그 삶의 진실을 알아주신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충성하는 자녀의 발자취를 아버지께서 모르실 리 없다. 반면에 말씀을 외면하고 자기 길을 가는 악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멸망의 길로 가게 하신다.
-성경이 말하는 행복은 세상이 말하는 복과 다르다. 행복한 사람의 반대는 행복 없는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악인과 죄인이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성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말씀으로 그분과 교제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삶의 방식이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의지하기도 한다. 그분은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자신의 통치를 실현하시는 도구가 말씀이다. 그 말씀에 따라서 다스림을 받는 백성에게만 그 나라 백성의 혜택이 주어진다. 그것이 복이다. 나무에게 물이 필요하듯이, 사람에게는 말씀이 필요하다. 그 말씀으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행복의 길은 생명의 길이다. 말씀이 바로 생명의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 길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 그 길에 동행하신다. 거기에 영생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으면 죄인과 악인과 교만한 자와 함께하게 되고, 그들의 유혹을 이겨낼 수 없다. 진정한 복은 물질의 복이 아니라 인격의 복인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숱한 시련 속에서도 변함없이 말씀을 따라 살아온 의인의 길(인생)을 인정해주신다(1~2, 6절). 말씀을 통해 특별한 교제와 동행을 함께 한 자기 백성을 하나님이 모르실 리 없다. 성도는 세상의 부러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살고, 또 그것을 기쁨과 소명으로 아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몰라주고 세상이 외면해도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니, 오늘도 믿음의 여정을 늦추지 말고 묵상의 즐거움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기쁨이 ‘행복’이다(1절). 죄는 그 기쁨을 빼앗고 관계를 파괴한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 욕망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내가 뿌리쳐야 할 악인의 길은 무엇일까? 불황과 호황에 일희일비하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말씀을 ‘즐거워 할 때’ 비로소 주야(종일, 평생)의 묵상이 가능해진다(2절). 미련하다 싶을 만큼 진득하게 말씀을 묵상하면 그 말씀이 우리를 오래도록 지켜주지만, 말씀을 저버리면 주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맛을 잃은 소금 되어 세상의 냉소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 묵상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된 의무’인가? 아니면 ‘하지 않을 수 없는 즐거움’인가?
*악인의 형통과 세상의 증오에 의연해야 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 맺고 참된 형통을 누리는 의인과 달리 악인은 하나님 말씀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시류에 휩쓸리는 가여운 인생이다. 때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더 나아 보여도 그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부질없고 허망한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 또 지금은 의인인 듯 행세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도 못할 것이다.
*행복은 어디에서 올까? 진정한 행복은 어떻게 얻고, 누릴까? 그것은 말씀 묵상에서 온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즐거워할 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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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이렇게 명령하며 당부하는 부탁이 무엇일까?
1. 흔들리지 않는 믿음, 모든 일에 사랑함으로(13,22절)
바울의 고린도교회를 향한 마음이 느껴진다. 굳이 요약하자면 “굳게 서서 용감하게 믿어라, 그러나 사랑하라” 라고 할 수 있겠다. 그때나 지금이나 용감한 믿음으로 사는 것,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특히나 당시 고난과 핍박의 시기를 지나는 교회들은 더더욱 그랬다.
하나님 나라 복음이 노골적으로 무시 받고 핍박 받는 시대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용감하게 사는 것”과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서로 격려하여 견디어 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그때 살아내 주셔서 지금 내가 안전하게 믿음을 누릴 수 있다. 그 세대가 용감하게 믿음으로 살아내서 다음세대가 평안 가운데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소유한 살아내야 할 길은 분명하다. 어느 시대보다도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권위가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의 힘이 커지는 상황 가운데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용감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집단화, 세력화보다 내 자신이 이렇게 굳게 서서 용감하게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온 간데 없이 집단화와 세력화만 추구하여 가장 조롱받는 이익집단처럼 되어버린 교회가 다시 회복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다. 내가 선 곳 바로 그곳에서부터 “믿음에 굳게 서서 용감하게 살아가되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하며 사는 것은 지체,공동체, 사회를 사랑하는 것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사랑, 바로 주님을 사랑하며 살기를 당부한다. 오죽하면 저주 선언까지 곁들이며 주님을 사랑하라고까지 한다.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으라!……(새번역_22절)”
모든 일에 사랑하는 삶은 주님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낼 수 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기에 그 사랑을 따라 모든 일(관계)를 사랑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2. 마라나타의 소망으로(22절)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마라나타!(22절_우리 주여 오시옵소서!)”이다.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며 ‘모든 일에 사랑으로 행하며’ 용감하게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 소망이 믿음에 굳게 서서 사랑하며 살게 한다.
3. 공동체들와 함께(15-21절)
그러나 홀로 “굳게 선 믿음과 사랑안에서” 살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늘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가치를 상기시킨다. “문안하라”는 것이다. 즉 공동체안에서 사랑으로 행하는 것의 지표는 서로의 안부를 마음을 다해 묻고 축복하는 것이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아굴라와 브리스가가, 모든 형제들이, 그리고 나 바울도 “문안”한다고 격려한다.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으로 생각한다는 거다. 늘 생각하던 존재들이니 편지라는 형식이라도 빠짐없이 안부를 묻는 것을 빼놓지 않는다. 이것이 공동체다.
또한 교회를 섬기는 이들, 수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순종함으로 그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고 그들을 알아주라고 권면한다(15-18절)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스데바나의 집 사람들은 상당히 먼 거리를 달려와 바울에게 교회의 편지를 전달하고 교회의 상황을 알려준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수고를 알아주기를 부탁한다.
당시 가정교회의 지도자들은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와 재력을 가지고 있어서 늘 섬기 받는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를 섬기기로 작정하고 기꺼이 수고와 헌신을 마다하지 않았다. 지체들을 위해 섬기고 있으니 이제 지체들이 그들을 섬겨주라는 의미이다. 공동체안에서 신앙이 일구어 지기에 서로 섬기는 “모든 일에 사랑으로” 행할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지막 권면은 분명하고도 단호하다. “깨어 있으라, 믿음에 굳게 서라, 용감하게행동하라,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권면이다(13~14절). 마지막을 기다리는 성도는 영적인 무방비 상테로 있지 않고 늘 깨어 근신하며살아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왜곡하고 교회와 신앙을 흔드는 그 어떤 가르침이나 사상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또 부활 소망이 확실하기에, 자기만 위해 살지 않고 타인을 위해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환난 중에 인내하여 세상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담대히 살아가야 한다.
-깨어 있으라는 분명하고도 단호한 당부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늘 깨어 있어, 십자가의 도를 부정하는 거짓 복음에 미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진리(믿음) 위에 굳게 서서, 어떤 시련과 유혹에도 굴하지 말라는 거다. 그리하여 담대하게 극복하라는 당부였다.
-바울은 아가야 지방의 첫 회심자이자 자신이 세례를 준(1:16) 스데바나와고린도 교회의 사절단으로 바울을 찾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를 지도자로 천거한다. 교회와 성도를 위한 그들의 남다른 수고와 헌신을 소개하며 그들을 존중하고 자발적인 마음으로 순종하기를 요청한다(15~18절). 지도자는 내외적인 자격 요건도 갖추어야 하겠지만, 동시에 ‘성도들을 섬기려고 자원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지도자의 권위는 ‘주장’하여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마음으로부터 ‘부여’되는 것이다.
-바울은 결국 은사를 자랑하고 인간 지도자를 중심으로 파당을 형성하고 형제를 고소하던 고린도 교회를 향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라”고 간곡하게 부탁한다. 이는 곧 성령을 의지하여 십자가의 원리를 깨달아 자기를 버리는 사랑으로, 선물로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 공동체를 세워가라는 명령이었다.
-바울은 아시아 교회들의 문안에 이어 고린도에서 함께 사역했던 아굴라 부부와 에베소 교회의 모든 햐ㅕㅇ제들의 문안을 전한다(19~21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1:2)은 한 형제요 한 지체다. 교회는 주를 믿음으로 한 가족을 이루고 형제의 친밀함을 나누는 교제 공동체요,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을 나누는 사랑 공동체다.
-그런 사랑의 공동체에게 바울은 격려(13~14절)와 함께 준엄한 경고로 편지를 마무리한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포한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님의 오심’이 두려운 일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거짓 위안을 심어주기 보다는 영적 교만과 허세의 자리에서 내려와 주를 사랑하는 데 이르기를 바라는 아비의 심정(4:15)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우리 공동체도 주님과 지도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고 후회 없이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고 요청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고린도 전서 긴 묵상이 마무리되었다. 16장을 30회에 나누어 묵상하였다. 결국 정리되는 것은 “사랑”이다. “모든 일에 사랑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사랑함으로”…. 교회의 모든 문제가 사랑으로 행하지 않음으로 인해 일어난 문제들이었다. “사랑”,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덧입었지만, 세상 가치, 방식, 지식으로 이를 믿지도, 누리지도 못하여 일어난 문제들이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이 나의 방식과 가치과 지식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해 일어나는 문제들이다.
-그래서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명령한다. “깨어 있어라”, “믿음에 굳게 서라”, “남자답게 강건하라(용감하라)”,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무엇보다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라!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 앞에서 어떤 문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는다.
*요즘 우리 공동체에게 주시는 확연한 말씀이다. “모든 일에 사랑으로 행하라”
*문제가 없는 교회는 없다. 의인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문제는 당연히 있다. 차고 넘친다. 하지만 이런 교회를 사람들은 문제투성이로 보지 않고 “사랑이 넘치는” 그 곳으로 본다는 것이 문제다. 실제 사랑이 넘쳐나는 곳이 교회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세워진 교회가 완전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기에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 분쟁과 여러 문제가 발목을 잡고 힘들게 할 수 있다.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사랑에의 순종”이 늘 요청된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은 명령했다! 선택하는 것도, 권면하는 것도 될 수 없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명령이다.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그 끝까지 살아내야 할 명령이다.
*믿음으로 용감하게,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삼고, 모든 일에 사랑으로 행하는 구체적인 첫 걸음, 지표들이 바로 이끄는 이들에게 순종, 그들의 수고를 알아주고 격려함, 모든 공동체와 지체들이 서로 ‘문안’함 등으로 나타나는 “공동체성”이다. 주님 안에서 공동체된 우리들에게서 마땅히 나타나야 할 것이라는 의미다.
*고린도전서를 묵상하며 문제없는 교회가 없음을 다시 확인했다. 그 문제들은 2천년전 교회들만의 문제가 아닌 지금 여기 이곳에 속한 교회들의 문제였다. 하지만 문제들이 넘쳐남에도 결국 교회는 “모든 일에 사랑으로 행하는” 용감한 믿음이 있고,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는 찬란한 소망이 있기에 굳게 설 수 있었다. 어떤 핍박과 박해,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다음 세대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전수했다.
*오늘 나와 교회공동체도 어떤 상황에서도 다음세대에게 “믿음, 소망, 사랑”을 전수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백성의 의무이다. 내가 먼저 “용감한 믿음으로”, 내가 먼저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한 소망으로”, 내가 먼저 “모든 일에 사랑으로” 행하여 믿음이 굳게 서게 하겠다.
*용감한 믿음, 재림의 소망, 모든 일에 사랑…. 특히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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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5일
♥여름행사 – 7월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음세대를 소중히 책임지는 교육부서 여름행사 일정을 참고하셔서 기도와 후원으로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시지요? 우리

2026년 6월 28일 주보
♥교육부 여름 행사 – 다음세대를 소중히 책임지는 교육부서 여름행사 일정을 참고하셔서 기도와 후원으로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시지요? 우리

2026년 6월 21일 주보
8월 캄보디아 선교 사역에 수건을 모아 전달하고자 합니다. “새 수건”이 집에서 쓰지 않거나 남은 것이 있으시면, 포장을 벗겨서

더온누리교회 전임 및 파트 교역자 청빙 공고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갈 동역자를 기다립니다. 전주 더온누리교회(www.theonnuri.org)에서 함께

#더온누리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은혜를 함께 나눠요. instagram에서 "#더온누리교회"를 태그해 주세요:)
🌿 향기로운 금요일 예배 안내 🌿
🗓 7월 10일(금) 저녁 8시
📍 더온누리교회 3층 본당 레위의 장막
📖 말씀 | 김지훈 목사
🎶 찬양인도 | 이홍기 목사
🙌 찬양 리스트
• 내 주 같은 분 없네
• 나 주 앞에 서서
• 좋으신 하나님
• Praise
• 주 앞에
• Holy forever
•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주님만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모여
생명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며,
삶을 온전히 드리는 예배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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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우리가 붙들고 있는 믿음은
막연한 희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승리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이 됩니다.
세상은 우리의 수고를 잊을지라도
주님 안에서 드리는 삶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이번 주일,
고린도전서 15:50-58 말씀을 통해
부활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과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무엇인지 함께 묵상합니다.
“부활 신앙,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믿음 안에 굳게 서서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살아계신 주(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고린도전서
#부활신앙
#결코헛되지않습니다
#부활의소망
#살아계신주
#예수그리스도
#주일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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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Service
#FirstCorinthians
#ResurrectionHope
[주일 예배 안내]
우리가 붙들고 있는 믿음은
막연한 희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승리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이 됩니다.
세상은 우리의 수고를 잊을지라도
주님 안에서 드리는 삶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이번 주일,
고린도전서 15:50-58 말씀을 통해
부활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과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무엇인지 함께 묵상합니다.
“부활 신앙,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믿음 안에 굳게 서서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살아계신 주(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이번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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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더원공동체 수련회 START!
BUILD UP 🧱✨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가시는 주님.
에베소서 2장 20-22절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삼아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은 수련회의 첫 시작,
개회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마음을 올려드립니다. 🙏
말씀 : 김지훈 목사
이번 수련회가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을 세우고,
공동체를 더욱 견고하게 세워가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함께 기도해주세요! 🤍
더온누리교회 더원공동체
#더온누리교회 #더원공동체 #대학부 #수련회
#빌드업 에베소서 예배 공동체
전주 청년사역 🏕️✨
📌 유튜브 태그
더온누리교회, 더원공동체, 대학부, 수련회, 빌드업, 에베소서, 예배, 공동체, 전주교회, 청년사역
🏕️ 2026 더원공동체 수련회 ST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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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가시는 주님.
에베소서 2장 20-22절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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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수련회의 첫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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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김지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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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우리는 종종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때때로
내 권리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을 선택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누릴 수 있었던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일,
고린도전서 9:1-23 말씀을 통해
내 권리보다 복음을 앞세우는 삶이 무엇인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제자의 길을 함께 묵상합니다.
“권리보다 복음이 먼저!”
내 만족보다 하나님의 뜻을,
내 자유보다 복음의 유익을 선택하는
믿음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주님 말씀하시면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고린도전서
#권리보다복음이먼저
#복음의능력
#제자의삶
#사도바울
#주님말씀하시면
#말씀묵상
#하나님나라
#신앙생활
#SundayService
#FirstCorinthians
#Gospel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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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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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을 선택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누릴 수 있었던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일,
고린도전서 9:1-23 말씀을 통해
내 권리보다 복음을 앞세우는 삶이 무엇인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제자의 길을 함께 묵상합니다.
“권리보다 복음이 먼저!”
내 만족보다 하나님의 뜻을,
내 자유보다 복음의 유익을 선택하는
믿음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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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신앙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앞에
나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말씀보다
경험을 앞세우고,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언제나 말씀 위에 세워집니다.
이번 주일,
고린도전서 4:6-21 말씀을 통해
말씀의 경계를 넘어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겸손히 말씀 앞에 서는
참된 제자의 삶을 함께 묵상합니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내 생각보다 말씀을,
내 주장보다 복음을,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신뢰하는 믿음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말씀 앞에서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고린도전서
#말씀밖으로넘어가지말라
#말씀앞에서
#말씀묵상
#성경적삶
#복음의능력
#제자도
#하나님의말씀
#신앙생활
#SundayService
#FirstCorinthians
#BibleStudy
[주일 예배 안내]
신앙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앞에
나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말씀보다
경험을 앞세우고,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언제나 말씀 위에 세워집니다.
이번 주일,
고린도전서 4:6-21 말씀을 통해
말씀의 경계를 넘어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겸손히 말씀 앞에 서는
참된 제자의 삶을 함께 묵상합니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내 생각보다 말씀을,
내 주장보다 복음을,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신뢰하는 믿음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말씀 앞에서
이번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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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하합니다! 🏅
지난 5월 30일,
호남권 어와나 교회들이 함께 모여
어와나 올림픽을 개최했습니다 🙌
말씀 안에서 함께 배우고,
함께 뛰며,
믿음의 우정을 쌓아가는 특별한 시간 ✨
더온누리교회 어린이들도 멋진 열정과 도전으로 참여하여
🥇 TNT팀 금메달 1개
🥈 TNT팀 은메달 1개
🥉 TNT팀 동메달 1개
그리고
🥉 Sparks팀 동메달 2개를 획득했습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
어와나는 어린이들이 말씀을 배우고 암송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훈련 공동체입니다 📖❤️
메달의 색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성장하고 함께 기뻐하는 믿음의 걸음입니다.
열심히 준비하고 참여한 모든 어린이들과
섬겨주신 교사, 부모님들께 감사드립니다 🙏
앞으로도 말씀 안에서 더욱 자라가는
더온누리교회 어와나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
#더온누리교회 #어와나 #어와나올림픽 #전주교회
#전주 #TNT #Sparks #다음세대
#말씀암송 #제자훈련 🏅✨
🏅 축하합니다! 🏅
지난 5월 30일,
호남권 어와나 교회들이 함께 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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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안에서 성장하고 함께 기뻐하는 믿음의 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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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삶이 여전히 애굽 같고,
현실이 여전히 광야 같아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은 멈추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장에서
요셉은 자신의 성공이나 업적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를 붙들었습니다.
아직 출애굽은 시작되지 않았고,
약속의 땅도 보이지 않았지만
요셉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50:15-26 말씀을 통해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언약을 더 신뢰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함께 묵상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돌보시리니”
세상에 익숙해지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순례자의 믿음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여기에 모인 우리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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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자신의 성공이나 업적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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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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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익숙해지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순례자의 믿음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여기에 모인 우리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창세기
#하나님이반드시돌보시리니
#요셉
#하나님의언약
#약속의땅
#하나님나라
#믿음의여정
#여기에모인우리
#말씀묵상
#신앙생활
#SundayService
#Genesis
#GodWillSurelyTakeCareOfYou
...
홀리빛키! 😆✨
우연이 아닌 은혜 🙌
아이들을 위한 축제
더온누리 홀리빛키가
많은 성도님들의 기도와 후원 가운데
은혜롭게 마무리되었습니다 🤍
웃음이 가득했고
행복이 넘쳤던 하루
마음껏 뛰어놀고
함께 웃으며
사랑을 나누었던 그날의 모습을 전합니다 ✨
아이들의 웃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했던 시간 🫶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홀리빛키
#어린이축제 #다음세대 #은혜 #교회행사
#플리마켓 #키즈페스티벌 😆✨
홀리빛키! 😆✨
우연이 아닌 은혜 🙌
아이들을 위한 축제
더온누리 홀리빛키가
많은 성도님들의 기도와 후원 가운데
은혜롭게 마무리되었습니다 🤍
웃음이 가득했고
행복이 넘쳤던 하루
마음껏 뛰어놀고
함께 웃으며
사랑을 나누었던 그날의 모습을 전합니다 ✨
아이들의 웃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했던 시간 🫶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홀리빛키
#어린이축제 #다음세대 #은혜 #교회행사
#플리마켓 #키즈페스티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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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풍요의 중심이 아니라,
구별된 자리.
눈에 띄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 머무는 곳.
이번 주일,
창세기 46:28~47:12 말씀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정을
고센으로 이끄셨는지 함께 묵상합니다.
“왜 고센이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가장 안전하고,
가장 은혜로운 자리로
우리를 이끄고 계십니다.
적용찬양 : 은혜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고센땅
#하나님의인도하심
#은혜
#주일말씀
#신앙묵상
#Jesus
#SundayService
#Genesis
#Grace
#FaithJourney
[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풍요의 중심이 아니라,
구별된 자리.
눈에 띄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 머무는 곳.
이번 주일,
창세기 46:28~47:12 말씀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정을
고센으로 이끄셨는지 함께 묵상합니다.
“왜 고센이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가장 안전하고,
가장 은혜로운 자리로
우리를 이끄고 계십니다.
적용찬양 : 은혜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고센땅
#하나님의인도하심
#은혜
#주일말씀
#신앙묵상
#Jesus
#SundayService
#Genesis
#Grace
#Faith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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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더 깊은 선교학교]
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삶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듯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세상을 향해
복을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
2026 더깊은 선교학교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배우고
선교의 비전을 함께 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
📖 2026 더깊은 선교학교
🗓 06.20 - 07.25 매주 토요일 (6주간)
📍 굿윌센터 2F
🎤 이효재 목사
🎤 주누가 선교사
🎤 김종홍 목사
✈ 단기선교
8월 1일(토) - 8월 4일(화), 일본
🎓 수료식
8월 23일(주일) 2부 예배
—
하나님이 찾으시는
복의 통로로 함께 세워지길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THE MISSION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더깊은선교학교
#선교 #더미션 #복의통로 #단기선교
#일본선교 #mission 🙏✨
[2026 더 깊은 선교학교]
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삶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듯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세상을 향해
복을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
2026 더깊은 선교학교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배우고
선교의 비전을 함께 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
📖 2026 더깊은 선교학교
🗓 06.20 - 07.25 매주 토요일 (6주간)
📍 굿윌센터 2F
🎤 이효재 목사
🎤 주누가 선교사
🎤 김종홍 목사
✈ 단기선교
8월 1일(토) - 8월 4일(화), 일본
🎓 수료식
8월 23일(주일) 2부 예배
—
하나님이 찾으시는
복의 통로로 함께 세워지길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THE MISSION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더깊은선교학교
#선교 #더미션 #복의통로 #단기선교
#일본선교 #mission 🙏✨
...
진정성,
목자의 힘 🙏
사람을 세우는 힘은
화려함이 아니라
진심에서 시작됩니다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며
다시 붙드는
목장의 본질
주님이 맡기신 영혼을 위해
오늘도 걸어갑니다 🤍
—
더온누리교회
2026 목자수련회
“진정성, 목자의 힘, 목장의 본질”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목자수련회
#목장 #목자의삶 #공동체 #진정성
#리더십 #기도 🙏✨
진정성,
목자의 힘 🙏
사람을 세우는 힘은
화려함이 아니라
진심에서 시작됩니다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며
다시 붙드는
목장의 본질
주님이 맡기신 영혼을 위해
오늘도 걸어갑니다 🤍
—
더온누리교회
2026 목자수련회
“진정성, 목자의 힘, 목장의 본질”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목자수련회
#목장 #목자의삶 #공동체 #진정성
#리더십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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