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의 네 번째 문제를 다룬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역시 세상 문화의 익숙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것에 대한 문제다. 대표적으로 성적인 부도덕함이다. 힘 있는 사람들의 문화를 따라 만찬에 참여하여 먹고 마시며 방탕하고 음란한 짓을 행하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에 대한 일침이다.
앞서 다뤘던 근친상간과 간음과는 결이 다른 음행이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일이었다. 이것을 문화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꽤 일반화된 것이었다. 힘과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만찬을 베풀고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면서 그 자리에 창녀를 불러 음행하곤 했는데, 성도들 중에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런 자리에 참석하였다. 그리고서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며 어줍잖은 정당화를 하곤 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신만을 생각한 말과 행동이다. 식욕을 따라 자연스럽게 먹고 마시듯, 성욕을 따라 자연스럽게 창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런 기막힌 자기 합리화에 대해 바울은 단호하게 배척한다.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와 ‘몸’에 대한 오해(12~17절)
12절은 모든 행위는 마음속 생각에서 나옴을 지적한다. 지금까지 고린도 성도들의 불의한 행위에 대해 지적했던 바울은 이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려 한다. 특히 ‘모든 것이 가하다’라는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에 관해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한 표현이다. 이 표현은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세상적인 지혜를 자랑한 성도들이 헬라 철학적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하려 했음을 드러낸다. 단, 바울은 이 표현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배척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성도들이 자유의 교리를 남용하여 무절제하게 자신의 유익과 쾌락을 추구하고, 성도의 교제인 성만찬을 식탐을 채우는 기회로 활용했다. 또한 성적인 쾌락을 채우기 위해 문란한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이미 자유함이 아닌 더러운 악습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지만, 나는 아무것에도 노예처럼 사로잡히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고전 10:23~24). 그럼에도 고린도 성도들은 그것을 악용하였다.
13~14절에서 바울은 “음식은 배를 위하고 배는 음식을 위하지만, 하나님은 그 둘을 모두 폐하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주장에 대해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반박하며 심판받을 이 세상에 속한 음식과 배는 결국 폐해지겠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육체의 삶은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는 몸을 위하신다”라고 말함으로써 주께서 인간의 육체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한편 주님께서 우리 육체를 위한다는 증거가 무엇일까? 14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살리셨고 우리의 몸도 살리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체를 위하신다는 증거가 14절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살리셨고 우리의 몸도 살리실 것이다. 기독교의 부활은 구원을 영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했던 헬라적 영지주의적 구원관을 반대했다. 그스도인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스스로 영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육체의 가치를 폄하했고, 어차피 없어질 몸이라면 쾌락을 즐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은 복음이 아니라 복음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제 15절은 독자들에게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질문한다. 물론 이 질문은 독자들도 알고 있음을 전제한다. 추측하건데 세례와 성찬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했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들이 창기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의 몸을 위해 죽음에서 살리시니 우리도 주의 지체인 몸으로 주를 위해 살아야 할 것이다.
16~17절은 육체적인 연합과 영적인 연합을 별개의 것, 서로 다른 것으로 간주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영과 육이 결합하여 완전한 인간이 되듯, 영과 육을 따로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창기와 합하든, 그리스도와 연합하든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2. 음행은 죄이다(18절)
바울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음행에 빠져 있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다. “음행을 피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자기 몸 밖에 있는 것이지만, 음행을 하는 자는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새번역_18절)”
왜 이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할까? 먼저 우리의 몸은 음식과 음행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주님은 우리의 몸을 위하여 있다”고도 말한다.(새번역_13절) 또,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이다(15절). 이미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는데, 창녀와 관계를 맺어 창녀의 지체를 만들어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이미 한 몸되었고 하나의 영이 된 성도가 행하는 음행은 “죄”이다.
3.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19-20절)
성도의 몸은 성령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성도는 성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는 존재들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값을 치루셔서 사들인 존재들이다. 그러니 자신의 것도 아니다. 이미 하나님의 소유된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핏 값을 지불하고 사신 몸이 성도다. 성도가 제 마음대로 쓸 자유가 애초부터 없다. 하나님께서 본래 만드신 의도와 목적대로 성도가 몸을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다. 바울이 제시하는 현실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사는 구체적인 모습은 “음행을 피하라(18절)는 것이다. 이는 적극적인 명령이다.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값을 주고 산 존재들이기에 이 명령은 타협해서는 안된다.
음행은 자기 몸의 주인이 자기라는 확고한 자의식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하지만 성도의 몸은 하나님께서 아들의 피값으로 산 하나님의 것이다. 성도는 관리자이다. 하나님의 것을 잘 관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인 음행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어떻게 교회의 전체적인 문제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교회 밖에서 은밀하게 하는 행위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공공연하게 자신의 이런 음행들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의 영이 개인 뿐 아니라 모임 속에서도 함께 거하시기 때문에 개인의 음행의 죄는 개인 뿐 아니라 공동체의 거룩함을 훼손 시키기에 충분했다. 죄의 영향력은 실제적으로 공동체의 거룩성을 오염시킨다.
-특히나 힘 있는 자나 부유한 자들의 만찬에 참여하여 즐겼다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를 반증하는 것이므로 이를 자랑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개인에게 영광이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는 명예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에서나 이루어지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된 교회는 이런 세상 가치로 모임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의 나타남과 역사”로 모이는 곳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된 새로운 가치와 이치를 따라 살아가는 곳이어야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상의 이치를 따라 자랑하고 있었으니….
*묵상하면서 이런 자랑, 이런 음행의 문화속에 교회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교회는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선명하게 다르게 빛내야할 곳이다.
*교회인 내가 세상의 일상적인 문화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너무나 이질적이기에 세상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멸할 수도 비판하며 조롱하여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적당하게 세상속 6일동안은 세상처럼, 하루쯤은 그리스도인처럼 사는 것 자체가 곧 세상의 문화와 가치에 내 몸과 마음을 섞는 음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상에서 일상적인 것이라도 하나님 나라 백성은 고집스러울 만치 하나님의 뜻을 붙잡아야 할 것이다. 그 고집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향기를 발하게 할 것이다.
*세상의 문화도 즐기고 교회도 문화처럼 즐긴다면 이미 음행하는 자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즐거움에 푹 취해 살면 세상 문화는 구미가 당겨지지 않는다.
*성도의 몸은 나를 위한 몸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몸이고, 성도는 창녀와(세상과) 하나가 될 몸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할, 이미 하나님의 소유된 몸이다. 나를 소유 삼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내 몸에서 구현되는 날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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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근친상간이나 간음에는 침묵하면서 바울이 보기에 “작은 일”에는 세상 법정에 고발까지 했다는 것에 대해 한탄이 깊다. 짐작하건데 근친상간과 간음을 행한 자의 힘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어 침묵했지만, 이런 일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겨 진행한듯 하다. 세상 가치와 힘의 논리를 여전히 따르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첫 번째 문제였던 “분쟁”과 두 번째 문제인 “음행”, 그리고 세 번쨰 문제인 “다툼”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것이 있다. 바로 “세상 지혜, 세상 힘의 논리, 세상 이치”가 교회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 지혜로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곳, 세상 힘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거룩함의 논리가 있어야 할 곳, 세상 법적 이치에 맡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이치에 맞게 살아내야 할 곳인 교회 공동체가 철저히 “세상”의 가치와 논리에 휘둘리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나 여전히 세상 나라에 휘둘리는 교회, 지금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지 않을까? 그럼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여 가나가는 곳이 교회이여야 한다. 바울은 이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지금은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세상 이치에 휘둘리지만 점점 더 하나님 나라 이치에 따라 조정 되어 갈 교회를 바라본다.
세 번째 문제 다툼, 어떻게 해결할까?
1. 너희가 (~을) 알지 못하느냐?(2-4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면서 이미 이런 부분에 대해 가르쳤음을 상기 시킨다. “너희가 (~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표현을 통해 이전에 가르침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게 한다.
다툼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걸음은 이런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찾아 보는 것이다. 혹은 들었던 말씀을 생각해 내는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고린도 성도들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부하는 교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 알고 있다고 여겼으면서 “이런 작은 일”에서 조차 세상 법정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는가? 라는 의미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강력한 질책이다. 지금 그들이 스스로 지혜롭게 해결 한다고 여기며 시도한 일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는다.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겠거늘, 여러분이 아주 작은 사건 하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겠습니까? 우리가 천사들도 심판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러한데, 하물며 이 세상 일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새번역_2-3절)”
바울은 이미 성도란 예수로 인해 새 언약의 백성된 자들이며(고전 1:2), 주님께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실 때 그의 백성들이 함께 다스린다는 것을(계 22:5) 알고 있는 자들이라고 했다. 즉 성도가 세상을 판단한다는 의미(2절)가 이런 의미다. 그런데 스스로 영적으로 성숙하고 지혜 있다고 자부하는 고린도 성도들이 스스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달으라고 절절히 호소한다.
심지어 천사들도 이렇게 심판하는데…. 그러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4절)”
2. 왜 당해주고, 왜 속아주지 못하는가?!(5-8절)
이어지며 한탄하는 것은 먼저 이런 일을 해결해 줄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교회안에 한 사람도 없다는 것에 경악한다. 여기에서 다툼을 해결할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서로 분당하여 분쟁하기 정신이 없었기에 모든 성도들이 고개를 숙이며 그의 이야기에 경청할 만한 성숙된 사람이 없다는 의미이다. 세상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보다 더 컸던 탓이다.
한편 바울이 “차라리” 당해주고 속아주라고 강권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교회안의 다틈을 세상 법정에 의뢰하는 순간, “실패다!”라고 단언한다(7절). 또한 “불의”를 행한다고 외친다(8절)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 그런데 도리어 여러분 자신이 불의를 행하고 속여 빼앗고 있으며, 그것도 신도들에게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새번역_7-8절)” 무엇에 대한 실패이고 무엇에 대한 불의일까? 단지 교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실패이고, 이런 송사 속에 깃든 속이고 빼앗는 것이 불의일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문제라도 합리적이고 지혜롭게 분별하여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어떤 경우 “그 원칙”을 뛰어 넘는 사랑이 실패한 것을 의미한다. 은사가 있다한들, 지혜롭다고 스스로 여긴들, 이런 다툼 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은사나 지혜가 무슨 소용이며, 이런 다툼 속에 깃든 성도들을 속여 빼앗기 위한 그 ‘불의’한 마음에 전혀 영향력을 끼지치 못하는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능력은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당해주고, 속아주어 지체를 세워주는 것에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러셨고, 바울도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는 각오로 이렇게 순종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본 받고 바울을 본받아 사는 삶이라면 왜 당해주지 못하고, 속아주지 못하는가? 예수님도 그러셨고, 바울도 그리 했는데 나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3. 세상으로 끌고가는 다툼에 동조하지 말라(9-11절)
“불의’하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9절). 단지 교회 안의 다툼을 세상 법정으로 끌고가는 이들만 지칭하지 않는다. 음행, 우상 숭배, 간음, 여성 노릇, 동성애, 도둑질, 탐욕, 술 취함, 중상모략, 약탈하는 사람들도 역시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한다(9-10절).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대다수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님의 은혜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다(11절). 그러므로 이런 불의한 일에 동조하지 말라고 강권한다. 헬라철학의 이원론의 영향으로 ‘이미 구원 받았으니 어찌 살든 상관 없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다. 불의한 삶은 반드시 심판 당한다.
성도들이 구원 받기 이전에는 이런 삶 속에 있었으나 이제는 “씻겨졌고, 거룩하고 의롭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이전의 세상 삶의 방식을 포기하라는 거다. 혹 다툼이 일어났을 때 세상 법정을 통해 자기 이익과 권리를 지키려는 태도를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의 한 형제된 지체를 사랑하고 용납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내라는 의미다.
“세상 삶의 방식”에 동조 해서는 안되는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을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 삶의 방식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투는 것을 서슴치 않는 것이었지만,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은 사랑하기 위해 이익을 손해 보아야 하고 알면서도 속아주어야 한다. 결국 이런 사랑이 하나님 나라의 깊은 삶을 맛보게 한다. 결국 이런 사랑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겅혐하게 한다.
알면서도 당해주고 속아주는 사랑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다. 그저 아주 작은 순종일 뿐이다. 다툼을 만들지도 말고 다툼에 동조하지도 말고 다툼이 일어나도 당해주고 속아줄 때 하나님의 이름이 “달리” 드러난다. 그때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다.
나는?
-성도들 간의 이해관계를 세상 법정에서 해결 받으려는 태도는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모욕이다. 성도는 종말에 주님과 함께 불신 세상을 심판하는 일에 참여하며 심지어 악한 천사마저도 심판할 존재인데 불신자들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 더욱이 형제를 상대로 한 재판을 불의한 자에게 맡기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바울은 강조한다.
-이 문제의 핵심은 장차 세상을 판단할(마 19:28) 성도들이 형제 간의 사소한 분쟁 하나 조정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에 제소한 것을 책망한다(1~3절). 더욱이 형제를 상대로 한 재판을 정의롭지 못한 세속 법정(불의한 자들)에 맡겨 해결하려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모욕으로 여긴다. 주의할 것은 바울의 이런 태도는 세상 법정의 권위에 대한 부정이라기 보다는 성도의 어리석은 자기 모순에 대한 질책임을 놓치면 안된다.
-고린도 교회는 십자가의 지혜를 미련한 것으로 치부하고 자기 은사와 지도자를 자랑하며 우쭐거렸지만, 실상은 지체들 간의 갈등을 조정해줄 지햬 있는 자 하나 없는 ‘어린아이’ 교회였다. 바울은 사랑을 포기하고 형제에게 소송하기보다는 차라리 손해보고 속는 것이 낫다고 한다.
-성도들은 남다른 지혜와 은사가 있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형제 간의 작은 갈등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불신자들 앞에서 서로를 고발했다(4~6절). 음행(5장)에 안일하게 대처하던 그들이 소소한 이해관계에서 민감하게 반응하여 벙정 소송까지 끌고 간 것이다. 이는 ‘자기 부정’의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여겼기에 형제를 법정에 세워서라도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한 자기중심성, 자기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 다 아는 듯, 다 자란 듯 우쭐대지만, ‘십자가의 영성’이 아닌 ‘세속적 욕망’에 이끌린 삶이었던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형제 간의 다툼에 승리란 없다. 설령 승소하고 손실을 만회하더라도 세상 가운데 교회의 허물만 드러내고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며, 주님꼐 아픔을 드리는 부끄러운 패배일 뿐이다(7~8절). 그러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손해를 보는 편이 낫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십자가의 길이다. 하나님의 명예와 복음의 영광을 외면하면서꺼지 내가 꼭 지키고 붙잡아야 할 명분이 과연 있을까?
-세상 법정에 고소당한 불의한 형제는 세상 법정이 판결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자랑할 만한 은혜와 은사를 맛보았더라도 영적인 자긍심만 가득한 채 실제로는 음란, 간음, 남색, 도적질, 토색을 일삼고 마음에 욕심이 가득한 사람, 즉 십자가의 은혜와 도를 미련한 것으로 만드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 아무리 자랑할 만한 지식과 은사를 지녔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에게 요구되는 삶을 거부한다면 그들이 받을 하나님 나라의 유업은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만들고 욕망의 노예로 살면서도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모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영적인 안전은 회심의 순간을 기억하는 것에 달려 있기 보다는 우리가 맺는 열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연 이틀 부끄럽고 부끄러운 본문을 계속 묵상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이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당해주고 속아주는 삶이다. 바울이 펼친 사랑 이야기가 떠오른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5-7)”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을 바라며 견디는 사랑은 당해주고 속아주는 것이다. 내가 당해주고 속아주면 주님께서 갚아주시고 인정해 주신다. 이것이 의로운 하나님 나라 삶이다.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삶이다.
-분쟁하는 교회는 성도간 다틈이 일어나도 자정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서로 경쟁하여 마음이 분열 되어 있으니 당연한 이치다. 어느 누구의 말도 권위있게 받아 들이지 않는다. 오직 자신들이 추종하는 이의 말만 따를 뿐이다. 그러니 “영적인 어른”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아… 오늘날도 “영적 어른”의 부재를 심심치 않게 느낀다. 중심을 잡아주고 삶의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영향력있는 영적 어른의 역할이 분명 갈급한데…. 서로 분쟁하느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세상의 방식이 하나님 나라 방식보다 더 통하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세상 방식을 옳고 그름, 자신의 유익을 고수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법칙이 무너져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교회 안에서 서슴없이 다툼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그들도 너희 형제다”는 것이 도무지 통하지 않고 있음을 보며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되었든지 “형제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의 지표인 것을 안다면…. 사랑을 말로만 하는 울리는 꽹과리같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이 따라오는 “당해 주고 속아 주는” 사랑이 그립다. 나도 그 사랑으로 성장했고, 나로 인해 그 사랑을 받아야 할 성도들이 성장할 것이다.
-이런 저런 묵상이 오늘도 그때 그때 순간 순간 나의 생각과 마음을 주관해 주시기를 바라며, 오늘도 말씀으로! 사랑으로! 살아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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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낮아진 거룩의 지표(1-2절)
고린도 교회의 두 번째 문제는 충격적이게도 아버지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음행을 행한 당사자들이나, 이를 묵인하는 공동체나 모두 ‘거룩’을 상실했다.
고린도지역은 항구 도시였다. 이에 걸맞게 성적으로 매우 개방된 지역이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당시 로마법은 시민권자라도 근친상간이나 간음에 대하여 매우 엄격했다. 그렇기에 근친상간이나 간음은 교회 밖 세상에서도 잘 일어나지 않는 중범죄였다. 그런데 이 범죄가 교회안에 일어난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음행의 죄를 저지른 당사자는 오히려 공동체 앞에서 당당하게 이런 일을 드러내고 있고, 공동체는 이에 대하여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서로 싸우느라 정신 없었다. 그러니 만약 자신들의 문파에 한명이라도 아쉬운 상황이고, 더구나 만약 간음을 행한 당사자들이 교회 안에 유력한 자들이었다면 암묵적 침묵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결국 분쟁이나 음행이나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공동동체가 되어 버렸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세상을 이끄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교회가 되어 버렸으니 낮아질 대로 낮아진 거룩함이 민망할 따름이다. 오늘날 교회가 다를까? 세상이 더 많은 우려와 걱정어린 시선으로 비토 하는 지경이니 할말이 없다. 우리는 정말 이런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그런데도 여러분은 교만해져 있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그러한 현상을 통탄하고,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여러분 가운데서 제거했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새번역_2절)” 통탄해 하지 않고, 범죄한 자를 제거하지도 않는 고린도 교회나 통탄해 하지 않고, 범죄한 자를 제거하지도 않는 한국교회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도진개진’이다.
2. 그러나 이제부터라도(3-13절)
통탄하며 음행한 자에 대하여 지금까지 묵인하고 방관 했을지라도 이제라도 이렇게 하라고 가르친다.
먼저 판단하라(3-5절). 몸은 떨어져 있으나 영으로 이미 판단한 것처럼 너희도 나의 영과 함께 ‘주 예수의 이름으로’ 공동체 밖으로 내 보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보냄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다. 먼저 범죄한 이의 육신은 이렇게 판단 당할지라도 그의 영혼이 구원얻게 하기 위해서다(5절). 이것은 공동체가 그의 음행의 행동에 단호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그가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게하고 죄를 죄로 여기게 하여 그 죄에서 돌이킬 기회를 주라는 의미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2절)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한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공동체가 그렇게 해도 된다는 영적 방만함을 보여주었다는 의미다. 교인 하나를 잃는 것이 두려워 교인의 구원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 교회의 더 큰 죄가 될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또, 음행이 교회안에 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단호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6-8절). 음행은 고린도 지역의 오랜 문화였다. 물론 로마법에 의해 근친상간이나 간음은 가혹하게 다루어지는 범죄였지만,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기는 신전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음행의 문화는 그 지역사회의 문화였다. 어떻게 보면 이런 관능적인 사회였기에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성범죄들이 쉽게 일어날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교회는 달라야 한다. 이런 음행과 같은 “묵은 누룩”을 제거해야 한다. 구원 얻기 이전의 평범함 속에 깊이 깃들어져 있는 ‘문화’라는 포장지에 잘 포장된 “거룩”을 무너뜨리는 “묵은 누룩”은 하나님 나라 복음과 지혜 안에 깃들어져 있으면 안된다. 이 묵은 누룩이 조용히 그리고 광범위하게 퍼져 “하나님 나라가”가 세상 나라”와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누룩”이라는 예를 들어 음행을 자랑하는 자들의 언행에 대해 단호하게 처리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듯이 이런 죄에 대해 묵인하면 교회 공동체 전체가 물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더구나 교회는 “유월절 어린양 곧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 덩어리(반죽)이 되었기에, 이런 죄의 묵은 누룩들은 깨끗히 치워야 한다.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누룩이 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새번역_7절)”
묵은 누룩을 “악의와 악독”으로 비유하며 이것은 치우고 “성실과 진실”을 누룩으로 삼아 (묵은) 누룩 없이 빚은 빵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지키자고 말한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악독이라는 누룩을 넣은 빵으로 절기를 지키지 말고, 성실과 진실을 누룩으로 삼아 누룩 없이 빚은 빵으로 지킵시다(새번역_8절).”
그리고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가르친다(9-13절). 이에 대하여 이전에 썼던 편지를 통해 교회가 가지고 있던 오해를 먼저 교정한다. 음행하는 자를 내쫓으라는 명령(2, 5, 13절)과 관련하여 가질 수 있는 오해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명령하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단절하여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말이 아니라(10절), 교회 안의 음행하는 자들과 함께 먹지도 말라(성찬, 애찬)는 의미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단지 음행하는 자만 성찬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탐욕, 우상 숭배, 중상모략, 술 취함, 약탈도 이에 속한다. 즉, 음행한 자를 쫓아내라는 의미는 모든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찬을(함께 먹지도 말라) 포함하여 죄와 벗한 이들에게 단호한 죄에 대한 자세와 태도를 보이라는 의미다.
물론 이를 통해 그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이를 통해 성도와 교회가 그런 죄의 영향력으로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를 통해 범죄한 당사자가 자신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다.
음행하는 자와 사귀지 말라는 것은 세상의 음행자들과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의 음행 문화에 동조하지 않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라는 거다. 세상의 음행자는 세상 법과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되, 공동체 안의 음행자는 엄격하게 처리하는 자세와 태도를 보임으로 교회의 거룩함과 순결함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공동체 안의 음행, 용납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아내(추측하건대 과부가 된 계모)를 취하는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악행이다. 그런데 경악스럽게도 이 일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벌어졌으며, 더욱 심각한 것은 교회가 그것을 용납한 것이었다. 이같은 교회의 모습은 그들의 영적인 교만이 도덕적 해이로 이어진 것이다. 거룩과 성결함의 요구를 무시하는 오만함은 영적 우월감이 아니라 타락의 증거일뿐이다. 교회의 진정한 능력은 거대함이 아니라 거룩함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음행한 자를 공동체 밖으로 추방하여 사탄의 영역에서 징계를 받도록 명령한다. 이는 그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런 징계를 받도록 명령한다. 이는 그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런 징계를 통해 그가 회개하여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공동체는 음행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도리어 자랑하였다. 한 사람의 음행은 아주 작은 일로 보이지만 공동체 전체를 부정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욕되게 할 수 있는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성도는 세상 바깥의 음행한 자들까지 책임질 필요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세상 법에 맡길 뿐이지만, 공동체 안에 음행자들과는 시귀지 말고 쫓아내 공동체의 거룩과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
-참… 고개를 들 수 없는 묵상 본문이다. 이 범죄와 관련하여 한국교회는 매우 관대하거나 오히려 실제적인 계산방식에 따라 덮고 덮음으로 “음행”이 교회안에 판치고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목회자 뿐 아니라 교회안의 성추행과 성폭력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본문은 마음에 “탁”허니 걸린다. 하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르친 것을 단단히 마음에 새긴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낮아질대로 낮아진 거룩의 지표를 끌어 올려야 하리라. “악의와 악독”의 묵은 누룩과 같은 죄의 오염이 확산되지 않도록 내 마음과 나의 사랑하는 교회를 “성실과 진실”함으로 거룩에의 걸음을 다져 나가리라.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교회 공동체 안의 음행자들을 포함한 여러 반교회적인 죄에 대하여 단호하게 구별하리라. 그래야 범죄한 그도 살고, 나도 살며, 교회도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영혼을 살리기 위한 아픔을 주저하지 않으련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으로 죄에 깊이 함몰되어 죄의 심판을 받게 하지 않고, 은혜의 심판아래 서도록 지금 감내해야 할 아픔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으련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려내야 한다! 내가 살고 그가 살아나기 위해 “죄”의 악의와 악독함이 공동체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단호히 행해야 하리라.
*고린도 교회는 왜 음행한 당사자들을 묵인했을까? 그것은 세상에서도 영향력이 있고 교회 안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영향력이 재물이든, 권력이든, 혈통이든… 막강했을 것이다. 결국 묵인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세상적인 영향력이 “하나님의 지혜”의 영향력 보다 더 막강하게 역사(?)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바르게 구너면하고 징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 원리”가 지배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이를 가장 중요핟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음행의 문제 이면에는 세상 이치와 하나님 나라 이치의 충돌이 담겨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나의 삶이 여전히 세상 이치따라 움직인다면, 나조차도 음행을 구별하여 절제하지 못할 수 있다. 탐욕을 부릴 수도 있으며, 세상 이치라는 우상을 숭배할 수도 있다는 거다. 여전히 중상모략하며, 여전히 술 취하며, 여전히 폭력의 힘으로 살 수 있다는 거다.
*하나님 나라 백성 되었으면 하나님 나라 법으로 살아야지… 여전히 세상 이치로 살기를 고집한다면, 하나님 나라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히 하나님 나라 법의 심판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단호하게 세상과 다른 거룩함을 지켜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 아주 작은 말과 행동에서부터 세상적이지 않아야 한다. ‘악의와 악독’에 오염되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즐기는 문화에 익숙했던 옛적 관습으로 살지 않아야 한다. 하난미 나라의 새로운 법이 나를 주장하도록 늘 구별하고 구별해야 할 것이다.
*아.. 이런 면에서 부끄럽다… 참 많이 부끄럽다… 주님.. 한 몸된 교회가 더 이상 부끄럽지 않도록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지혜에, 하나님 나라 복음에 “성실과 진실”함의 한 걸음을 떼도록 도우소서….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바울은 분쟁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계속 제시한다. 이미 성전 답게(3:16-17), 세상과 다르게(3:18-4:5) 공동체를 이루어 갈 것을 부탁했다. 교회 분쟁의 원인을 세상 지혜에 대한 집착과 이에 따라 각각 원하는 성향의 지도자를 따르는 결과로 나타난 것에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이었다. 본문에서는 이 모든 원인과 결과의 중심에 깔려있는 핵심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왜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이들에게서 여전히 세상 지혜를 따르는 행동들이 나타나는가에 대한 바울의 진단이다.
1.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6-7절)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나와 아볼로에게 적용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기록된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라”는 격언의 뜻을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배워서, 어느 한 편을 편들어 다른 편을 얕보면서 뽐내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새번역_6절)”
고린도 교회 문제의 핵심은 “신분”이었다. 당시 사회는 신분에 따라 하는 일이 구분되어 있었다. 육체적인 노동은 주로 하층민이 담당하였고, 머리 쓰는 것은 상층민의 전유물처럼 여겼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교회를 개척하면서 천막 만드는 일을 함께 했었고, 고상한 헬라철학의 영향을 따라 아름다운 말들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전하고 가르쳤다면 바울의 이런 모습은 매력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받아들이게 하셨음으로 교회가 세워졌었다.
하지만 이렇게 세워진 교회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이 세상의 관습과 제도를 쉽게 뛰어넘지 못했다. 하층민으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새벽일찍부터 쉼 없이 일을 해야 했고, 지친 몸으로 돌아와 근근이 예배를 드리곤 했었다. 반면에 상층민들은 하루종일 여유롭게 지내다 오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속에서 신분과 계층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이 실제적인 문제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바울이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거론하며 가르친 말씀안에서 이를 지킬 것을 권면한다. 당시 헬라철학의 정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지혜가 다스리는 공동체를 지켜야 할 것을 점검시킨 것이다.
자신들(바울과 아볼로)을 직접 예로 들면서 결코 말씀의 경계를 넘지 않았음을 강조하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그렇게 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즉,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말씀이 말하지 않은데까지” 너무나도 쉽게 나갔다. 이로 인해 공동체 안에서 서로 구별하고 차별하는것을 스스럼없이 행한다. 자기 자신을 세우려고 서로를 대적한 것이다.
더구나 은혜로 받은 은사들을 자기 것인양 자랑하기도 했고, 구원이 완성된 줄로 착각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원리를 따라 이 땅에 살아가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지 못했다. 아쉽게도 바울과 아볼로가 그들에게 보인 말과 행동은 전혀 참고할 만한 것도 되지 못한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교만한 마음”이라 표현하며 안타까워 한다.
말씀을 들어도, 가르침을 받아도 여전히 세상 가치와 철학과 지혜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앞에 교만한 것이 틀림없다. 또한 이로 인해 일어나는 공동체 안의 부조화는 반드시 점검 되어야 할 영역이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서는 안된다!
2. 십자가의 삶을 본받으라(8-16절)
하나님께 맡은 바 되어 하늘의 지혜를 전하는 바울과 아볼로는 지금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장 위험한 곳에서, 가장 비천한 대접을 받으며, 가장 고통 가운데서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은 서로에게 왕 노릇 하고 있으니 이게 웬 말인가?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지적하기 위해 복음 전도자의 삶과 고린도 성도들의 삶을 비교하여 교만해질 대로 교만해진 그들을 지도한다.
풍요로운 고린도의 삶은 이미 왕과 같은 삶을 사는 것과 같은데, 자신은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의 구경거리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어 너희를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있는 사람 되게 하였다. 우리는 약하지만 너희는 강해졌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므로 천대를 받고 있으나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누리고 있다. 편지를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없이 떠돈다. 비방받으나 좋은 말로 응답하고, 사람들이 세상의 찌기나 쓰레기처럼 취급한다.
바울은 이 모든 수모를 당해도 결코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 지혜”와 맞바꾸지 않고 이에 따라 살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삶을 멸망당할 세상의 삶과 바꾸지 않는다. 아무리 세상의 가치와 삶의 열매가 달콤하게 보일지라도 결코 바꾸지 않았다.
이런 삶을 내가(바울이) 살고 있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담대히 말한 것이다.
3. 확실한 분쟁 해결 계획(17-21절)
바울은 실제적으로 지금의 분쟁과 분열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먼저 첫 번째로 디모데를 보내겠다고 한다. 이유는 확고하다. 지금까지 바울이 가르친 것을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나의 생활 방식을 여러분에게 되새겨 줄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모든 교회에서 내가 가르치는 그대로 말입니다.(새번역_17절)”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하나님의 지혜”이기에 전하는 자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다. 동일하다. 그러니 순회전도자로 부름받은 이들은 자기의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저런 세상 지혜에 가려지고 덮여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다시 되찾게 하고,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동일한 복음”을 이야기 해줄 디모데를 보냈다.
그렇다. 공동체 안에 분열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추는 하나님께서 이미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지혜”다. 즉 교회 문제를 세상의 잣대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곧 말씀’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근근이 들려오는 세상 지혜와 가치로 교회 공동체의 가치나 체계를 만들려는 이들의 노력이 안쓰럽기 짝이 없다. 하나님께서 분명 경계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확실한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해결책은 자신이 직접 가겠다는 것이다. 언제 갈지 정해 진 것은 없지만 반드시 갈 것이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속히 갈 것이다 라고 전한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여기고 교만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 대하여 직접 가서 그 말이 진정한 능력인지 확인해야 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교만하게 뱉는 말들이 하나님의 능력에서 오는 것인지 검증해야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심각하게 도전한다. 자신이 직접 고린도에 갈 때 매를 통한 징계를 기지고 갈까? 아니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갈까? 선택하라는 거다. 이것은 자신이 고린도에 직접 가기전에 빨리 돌이키라는 것이다.
이런 바울의 말(글)이 해결책이 될까? 적어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의 존재는 그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아버지의 권위는 매우 견고했다. 바울이 스승으로서 고린도 교회를 양육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품었다고 했지만, 때로 아버지는 단호한 가르침을 위해 입술을 꼭 깨문다. 그것을 알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휘두르는 매를 맞을건가? 아버지의 인자한 사랑을 누리겠는가?
나는?
-바울과 아볼로는 말씀을 벗어나지 않고 십자가의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을 보여주며 복음을 전했다(6절). 서로 판단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가르침과 삶이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고린도 성도들은 지도자를 추켜세우며 경쟁만 할 뿐(3:4), 그들의 삶을 본받지 못하고, 자신들의 잘남을 과시했다. 택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선물로 은혜와 은사를 받았으면서도 처음부터 자기 것인 양 교만하게 자랑하였다. 참 지도자와 성도는 육신적인 자랑거리를 갖춘 자들이 아니라 십자가의 지혜를 따라 겸손하게 섬기는 이들이 아니겠나!
-성도들이 은사에 취해 왕처럼 마음이 부풀어 있을 때, 그들이 떠받드는 바울은 죽기 위해 원형경기장으로 끌려가는 검투사처럼 갖은 고난과 수치를 당했다. 그들이 남들보다 충분히 지혜롭고, 능력 있고, 존귀한 자가 된 듯 여기고 있을 때, 바울은 아무 쓸모없는 때처럼 대접 받으면서도 바보같이 핍박을 참고, 미련하게 욕하는 자를 축복하며, 어리석게도 비방하는 자를 권면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인 십자가의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분쟁의 배후에 있는 성도들의 ‘교만’을 지적한다. 그들은 선물로 주신 은혜와 은사마저 처음부터 자기 것인 양 자랑하고, ‘이미’ 구원을 다 이룬 듯 십자가의 삶을 외면하며 영적 자만에 빠졌다(7~8절). ‘이미’와 ‘아직’ 사이의 영적 긴장이 사라지고, 차별 없이 주신 은혜(1:26~29)마저 망각했기 때문이다. 내 신앙과 삶의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과분하게 여겨야 한다.
-이미 왕 노릇하고 있던(8절) 성도들과 달리 바울은 “바로 이 시각까지”갖은 고난과 수치를 당하며 종의 행보를 이어갔다(9~13절). 그들이 자기만족에 취해 있을 때 바울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세상의 바보’가 되어 아무 쓸모없는 찌끼처럼 대접받으며서도 모욕당하면 축복하고 핍박받으면 참고 욕을 먹어도 친절로 응대하며 ‘십자가의 미련한 길’을 걸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었다(10절). 고난 없는 것을 축복이라고 부르는 거짓 복음이 무성한 때에,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복으로 여기며 은혜로 잘 인내해야 하리라.
-왕 노릇하던 성도들에게 자신의 종노릇을 피력한 이유는 그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만과 무지의 잠에서 깨어나도록 아비의 마음으로 훈계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의 길을 걷는 바울의 삶을 기억하라고 권면하여, 신실한 디모데를 산 모델로 보낸다(14~17절).
-바울은 영적 자녀들이 이제는 교만과 무지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그리스도를 본받아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면한다. 성도든, 지도자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말’로 자랑하고 ‘말’로 자신이 누군지 증명하지 않는다. 성령의 능력을 따라 십자가의 복음에 어울리게 사는 삶으로 증명한다.
-고린도 성도들은 구원을 말하면서도 삶은 세상과 다르지 않았다(18~21절). 바울이 가르치고 보여준 것처럼 현란한 말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십자가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열매 없는 죽은 믿음이었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바울의 외침이 참 깊게 내 마음을 울린다. 말씀 밖으로…. 이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내가 너무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세상에 기초한 생각과 관습을 자연스럽게 행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외면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나의 삶에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이다.
*또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는 것의 중요성을 당부했다.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자신을 높은 곳에 두는 삶이 아니다. 늘 배척당하고 무시당하는 자리라도, 형편없게 여기는 작업을 하고 있더라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끝까지 감당하신 것처럼 끝까지 감당하는 것이다. 끝까지 감당하며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인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삶의 핵심은 고통과 고난의 채찍을 늘 맞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순종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다!
*분쟁은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살지 않고 세상 지혜를 더 기대며 살때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분쟁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가르친다. ‘맡겨 주신대로 함께 지어가는(16-17절)’ 교회 공동체임을 상기시킨 바울은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성도)”임을 인식시키고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가르친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1. 성전 답게(16-17절)
특정 지도자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뭉쳐서 결국 분쟁으로까지 나타난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의 성전되었음과 성령이 그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질문한다. 분쟁하는 것 만으로도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집을 더럽히는 것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이를 멸하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파당을 만들고 분쟁을 일삼는 문제는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았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새번역_17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이라고 경고한다. 지금 벌이는 분쟁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거다.
어릴적 기억을 되짚어 보면 교회가 즐거운 곳만은 아니었다. 같은 동네 교회가 서로 그렇게 싸웠다. 어른들은 상대 교회를 비방했다. 얼마나 말씀을 몰랐는지… 자신들의 주장과 논리대로 헤쳐모여 반대 진영의 성도들과 견원지간처럼 지냈다. 나는 그것이 교회인줄 알았다.
그런데 차츰 성경에 눈을 뜨고 꾸준히 성경을 읽어가면서 그런 모습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어른들은 싸움이 취미인듯 했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의 평안함이 얼마나 기막힌 은혜인지 늘 실감한다. 더온누리교회가 늘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바라보고 평안한 걸음 걸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바울은 “거룩”을 힘있게 강조한다. 우리가 성전임을 이미 선포했다. 주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는 이미 성전 되었다. 성령께서 그 안에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이 땅의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도 거룩하다 여기듯, 성도된 나의 몸도 거룩하게 그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2. 세상과 다르게!(18-4:5절)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 땅에서 실제로 어떻게 드러내며 살까? 크게 교회에 대한 시각과 인식의 측면에서(18-23절)와 원치 않게 분쟁의 도구가 된 지도자에 대한 자세(2:1-5) 측면에서 살펴보자.
1). 세상 지혜로 성전을 관리하려 마라(18-23절)
자신을 속이지 말라 세상 지혜에는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것이 지혜다(18절). 주님께 있어 세상 지혜는 어리석은 것, 헛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자랑하지 말아라(19-21절). 그리고 교회 뿐 아니라 지도자들, 생명이나 사망 다 하나님의 것이다(22-23절). 즉 하나님의 것을 내 것처럼 경쟁하고 차지하기 위해 싸우지 말라는 의미다.
곰곰히 생각하며 반복하다보니, 결국 분쟁의 원인인 세상 지혜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쩌면 좋나! 교회를 세상 지혜로 바라보고 세상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이나 철학과 충돌될 때 이로 인해 힘들어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모습은 낯선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어쩌면 좋나! 하나님의 것이 분명한데, 세상 지혜, 제도, 상식의 기반하여 내 교회, 우리 교회로 여기는 강한 의식이 왜 이리 익숙할까!
2). 지도자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보라(4:1-5)
지도자들에 대한 시선을 이렇게 가지라고 직언한다. 인식을 교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세상 지혜의 철학자나 선생으로 보지 말고)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지혜, 복음)을 맡은 자로 여기라(1절). 이렇게 직언하면서 “마땅히(이와 같이)” 라고 조건을 단다. 세상 지혜를 말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비밀, 복음을 맡아 전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라는 것이다.
지도자들을 자기들이 듣고 싶은 철학, 학문을 알려주는 “세상 지혜의 책 읽어주는 남자”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비밀을 관리하는 자”로 여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을 관리하는 당사자는 “충성(신실함)”이 필요하지만, 성도들도 세상 지혜를 전하는 자로 보면 안되고 “하나님의 비밀”을 관리하는(전하고 가르치며 양육하는) 자로 보라는 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상당수는 지도자들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일정 부분 존재한다. 전적으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결과다. 성경에 이른대로 가르치지 못하니 선택청취하는 성도들에게 당연히 맺혀진 열매다. 한낱 교회의 관리인으로, 대신 전도하는 이로, 섬겨주는 이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생각과 자세로 지도자들을 대하는 무수한 성도들이 있다. 이런 생각과 자세가 가져오는 교회안의 파열음은 오늘도 하나님의 교회를 피멍들게 하고 있다.
교회,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의 공동체이니까. 세상 선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자로 여겨야 하니까.
나는?
-하나님은 우리를 종말의 하나님 백성으로 새 창조하셨다. 그리고 교회(성도)를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삼아주셨다. 구약에서 성전을 파괴하거나 더럽히는 행위를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셨듯이, 하나님의 새 성전인 교회의 기초(예수 그리스도)를 흔들고 하나 됨을 깨뜨리는 파벌적 행태 역시 멸망을 당할 일이다.
-은혜로 우리를 부르셔서 성령이 거하는 전으로 삼아주셨다(16~17절). 따라서 고린도 교회의 파당과 분쟁은 성전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는 일이며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해위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복음을 왜곡하여 교회의 기초를 흔들거나 교회의 하나 됨과 거룩함을 훼손하는 자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참 성전은 반목과 미움과 소외가 자리 잡을 틈을 허락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 샬롬과 일치를 이루어가는 공동체다.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와 정반대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하나님께는 가장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출세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는 도리어 세상의 눈에 가장 미련한 메시아였던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가장 온전하게 드러내는 길이다.
-사람을 둘러싼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세속적 지혜에 집착한 결과다. 세상 지혜를 내세워 다투고 갈라서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지독히 어리석을 뿐이다. 그들은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허망한지도 모른 채 스스로 지혜 있는 자로 자처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자기기만이자,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오만이다(18~20절). 하나님의 지혜에는 민감하고 세상의 헛된 지혜에는 둔감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며 화평을 이루는 ‘하늘의 지혜’를 추구하되, 다툼을 일으켜 공동체를 위협하는 세속적인 지혜에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 모두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섬기라고 보내신 성도들의 소유다. 그들은 교인들이 상전으로 모시고 시기하고 다투면서까지 자랑할 대상이 아니다. 더 나아가 지도자나 성도 모두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소유물로서 그분을 자랑하고 섬기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부름 받았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선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
-만물의 상속자인 교회가 세상 지혜와 사람에 기대어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것은 자기모순일 뿐이다. 사역자들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봉사하는 종(4:1)일 뿐, 성도들이 상전처럼 모시거나 시기하고 다투면서 자랑할 대상이 아니다(21~23절). 성도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사람을 존중하면서도 사람에게 종속되지 않는 자유롭고 지혜로운 백성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판단하실 때까지 모든 판단을 유보하고 맡겨진 일에 충성할 뿐이라고 말한다(4:1~5절). 그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사람의 판단에 개의치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념이나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은밀한 것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살피시는 주님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기나 성공이 아니라 소명과 충성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해야 할 일을 하고도 사람들의 인정이나 대가에 목말라한 적이 없는지 늘 돌아볼 일이다.
-교회 문제만 생각하면 참 마음이 아프고 또 아프다. 바울도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생각할 때마다 심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 바울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요즘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교회다움의 출발은 내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지금 내 안에 계신다는 “실제”다. 이 실제가 삶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 이 실제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 지혜로가 아니다.
-이 실제는 세상 선생을 따라 가려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으로 보낸 바울과 아볼로, 게바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세상 선생에게서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마라…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맡은 자들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진단과 회복 지침을 내리는 바울의 단호한 명령형들이 본문에 가득 차있다.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있어 세상 철학과 비교하여 선택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하나님의 지혜”를 명령한다.
-당시와 오늘날의 문화적인 차이가 분명하겠으나 바울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복음”, “지혜”에 대한 확고하고 선명한 가르침이 오늘날의 교회에도 필요하다. 오늘날은 지식이 없어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확신이 없어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가득한 수많은 주장들, 가르침들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따를 것인가의 문제는 의외로 “확신”의 문제일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미 확고한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 주님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세상 철학이 세상 선생이 이를 헷갈리게 한다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의 지혜로 이해하려는 어리석음에서 출발한다는 것…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며 이를 따르게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서 생기는 실제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인박힌 세상 관습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싸워야 할 대상이라는 의미다. 신앙 연수에 상관없이 이 싸움에 무지하다면 늘 세상 철학과 선생을 찾으며 하나님의 나라의 지혜를 구하여 분쟁의 씨앗이 된다. 또 여전히 세상 철학과 선생을 고집한다면 분쟁의 열매를 계속 맺히는 것이 된다.
-결국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기에 세상 나라를 떠나야 하는데, 여전히 떠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연약함이다. 그래서 구원은 변재되지 않지만 세상 나라 관습, 철학, 선생을 떠나지 못하면 불을 통과할 때 아무것도 남지 않고 불타 없어지는 것이다. 구원은 얻으나 남는 것이 없게 된 것이다.
*아….. 나에게는 아직도 포기하고 내려 놓아야 할 세상 철학, 관습… 여전히 많구나… 이런 나의 연약함이 교회의 근심이나 아픔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세상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가 교회를 온전히 주관 하시도록, 주님이 주님 되시도록 오늘도 세상 철학과 관습에 맞서 싸워야 겠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1. 책망 속의 희망(1-4절, 15절)
바울이 단호하게 분쟁이라는 아픔을 끄집어 낸다. 짚어 주어야 할 때 머뭇거림 없이 문제를 직접 다룬다. 분쟁의 당사자들은 성령의 은사도 경험했고 여러 지식에도 능했기에 아마도 스스로 신령한 자라고 생각했을터다. 하지만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 그것도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라고 직언한다. 왜냐하면 “분쟁”을 일삼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이루어 가는 공동체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취향과 선호하는 지식, 신분과 삶의 수준을 따라 자연스럽게 파당을 만들어 따로 따로 모이는 것 자체가 이를 증명한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 편이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 편이다” 한다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새번역_3-4절)”
주님께서 맡겨주신 대로 일을 한 자신이나 아볼로를 주님보다 더 따르는 것이 어린아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치 주인보다 주인이 보낸 종을 더 따르는 웃지 못한 모습 아니겠는가? 주님보다 주님이 주신 것을 더 따르는 것, 더 마음에 두는 것, 주님의 이름보다 사람의 이름을 따라 모이는 것… 허어… 이것 참…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을 품게 한다. 이렇게 당황스러운 교회와 성도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희망이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 이기에 하나씩 하나씩 가르치고, 그대로 살아내도록 도와주면 성장할테니까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교회안의 어려운 문제가 결코 좌절이나 절망으로 결론이 되면 안된다. 그 미숙함에서 시작하여 성숙함으로 변화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품에 품고 성숙케 하실테니 말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충분히 일깨우고 복음에 합당하도록 살아내는 능력을 ‘성령’께서 베풀어 주실테니 말이다.
또, 복음의 기초에 잘못 세운 건축(일)이라도 구원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구원해주심”에는 변함이 없다는 거다. 다만 부끄러울 뿐이다(15절). 이것이 희망이다.
2. 희망이 현실되게 하기(5-15절)
어리기만한 어린아이지만, 언제까지나 어린아이 일수 없다. 복음이라는 생명이 들어 있는 영혼은 ‘성령’께서 친히 성장과 성숙을 도우신다. 때로 가장 필요한 순간, 가장 적절하게 “원 포인트” 레슨의 기회가 생긴다. 바울의 편지는 원 포인트 레슨이었다. 직접 가보지 못하나 가장 해결첵이 필요한 부분에 가감없이 직설적으로 다룬다. 가르침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확하게 현 상황을 인지하고 이에 따른 적합한 처방이 이루어져야 한다.
1)이해(시각)조정(5-9절)
분쟁의 기반이 되었던 지도자들에 대한 이해를 재정립해 준다. 당시 헬라세계에서 통용되고 이해되었던 선생이나 철학자들에 대한 시각과 자세가 아닌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위치를 일깨워 준다.
각각 따르는 지도자들의 특징은 분명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특징은 각기 맡아 사명을 감당하는 방법의 차이일 뿐 그들이 전하고 가르치며 사역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하신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다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집사들)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새번역 5-6절)” 지금 우리 각각의 일은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며 자신들은 각각 맡겨주신대로 일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반면에 세상은 자신들의 모임을 부각시키려고 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려고 한다. 당시 세계도 마찬가지 없다. 자신들이 따르는 선생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시도를 끊임없이 행했다. 결국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 그렇게 육을 따라 행하면 육의 사람일 뿐이다.
2)그럼 어떻께? – 비교가 아니라 맡김을 받은 대로(6-15절)
분쟁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역자들 앞으로 헤쳐모여 하면서 시작되고 강화 되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누누히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을 분이라고 말한다. 농사와 건축을 예로 들면서 설명한다. 어떻게 감당하냐면
바울 자신은 씨를 뿌리는 역할을 맡겨 주셨다면, 아볼로는 물을 주는 역할을 맡기셨다는 거다. 농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다. 그저 자신들은 그 농사 현장에서 한 부분을 맡김받아 감당했을 뿐이라는 거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새번역_5하-6절).”
그래서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새번역_7-8절).”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농사를 지으시면서 각각 필요한 일만 맡은 것 뿐이다. “동역”한 것이다. 함께 하나님의 밭인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대로 감당한 것이다.
또, 건축하는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바울 자신은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들은 그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각각 건축을 맡은 사람들이 자신들 마음대로가 아니라 “어떻게” 지으라는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 짓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안의 각 구성원이 바울이나 아볼로가 닦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각각 맡은 대로 함께 지어가는 것이기에 “존중”하고 “협력”하여 “하나”가 되어야 한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문제는 바울이나 아볼로, 베드로와 같은 이들이 잘못 가르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성도들이 예수의 복음을 듣고 엉뚱하게 반응하고 살았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복음을 잘못 가르쳤다면 그 책임이 바울이나 아볼로, 베드로에게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 복음을 잘못 듣고 엉뚱하게 적용하며 살아가며 일어난 문제이기에 마지막 때 심판의 불 앞에 이런 잘못된 삶은 모두 사그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누가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그에 따라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든 작품이(‘세워 놓은 일’) 그대로 남으면, 그는 상을 받을 것이요, 어떤 사람의 ④작품(일)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불 속을 헤치고 나오듯 할 것입니다(새번역_12-15절)”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기초는 변함없다.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그 기초위에 성도를 세우셨으니 이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이해(시각)조정”, “맡겨 주신대로” 존중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면 된다.
나는?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은사를 풍성히 받은 것 때문에 스스로 영적인 자인 양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부정과 전적 순종이라는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한 채 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영적 초보자에 불과했다. 성령을 의지하여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는 자들이 아니라, 배제와 차별을 일삼으며 인간 사역자들을 경쟁적으로 추종하는 세속적인 사람들이었다.
-고린도 성도들의 풍족한 지식과 은사(1:5,6)는 그들에게 남다른 자부심을 갖게 했지만, 실제로는 ‘자기 부정’이라는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할 만큼 영적 어린아이들이었다(1~3절). 바울은, 시기와 분쟁으로 얼룩져 여전히 영적인 일들(5~9절)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육적’ 상태를 질책한다. 교회를 부지런히 드나들고 신앙 연수는 높아지는데 여전히 자기중심성을 버리지 못한 영적 초보에 머물러 있지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성도의 내적 성숙 없이 수적 성장만으로 교회의 부흥을 논하는 것은 하나님이 품으신 뜻과도 전혀 다른 태도다.
-교인들이 파당을 지어가며 추앙하는 지도자들은 교인들을 섬기라고 보내주신 하나님의 종이다. 그들의 다양한 가르침과 서로 다른 은사 모두 섬김의 수단일뿐 비교의 기준이나 경쟁의 도구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종들을 세워 교회를 섬기게 하시지만, 그것은 심고 물 주는 일 만큼이나 부차적인 것이고, 실제 교회가 자라게 하신 것은 하나님 소관이다.
-고린도 성도들이 지도자의 이름 아래 파벌을 형성한 것은 사역자의 역할을 오해했기 때문이다(4~5절).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7절)에 대한 영적 무지가 지도자에 대한 과대 평가로 이어진 것이다. 성도들이 추앙하는 지도자들은 사실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수종자’일 뿐이다. 사역자들의 다양한 역할이나 은사는 비교 대상이나 경쟁의 요소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섬김의 도구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도를 자라게 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밭(교회)을 경작하고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일의 모든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5~9절).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수고에 따라 대가를 받는 종일 뿐, 성도들의 믿음과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의 일을 감당할 때는 스스로 무엇을 이룬 것처럼 자만하거나, 당장 눈에보이는 열매가 없다고 해서 낙망하지 않아야 한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십자가 복음에 합당한 방식으로 교회를 세웠는지 시험하실 것이다. 지도자가 바뀌어도 이 터는 바꾸리 수 없으며, 십자가의 도라는 신앙과 사역 원리도 변질될 수 없다.
-교회는 십자가 복음에 합당한 방식으로 세워야 한다. 세상의 가치관을 뒤엎는 십자가의 원리를 따라 섬기고 베풀고 사랑하지 않으면, 화려한 건물과 많은 성도를 자랑하더라도 심판날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십자가의 복음이 살아 있다면 금과 은과 보석으로 세운 공동체로 인정받을 것이다.
-나와 연결된 목회자들은 경쟁 상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동역자”들임을 늘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부분을 오랫동안 간과했었다. 동역자로 보지 않고 경쟁관계로 보아왔으니 내 안에 얼마나 많은 복잡한 감정들이 있었겠나! 각각 맡겨주신 대로 충성하면 될 일인데… 나에게 맡긴 것이 아닌 다른 것에 더 신경을 쓰고 경쟁의식을 갖고서 스스로 힘들어 했던 시절이 생각나 참 멋쩍다!
-교회 안에 이런 모습이 얼마나 많겠는가…성도들 안에 동역보다 경쟁이 하나님 나라를 스스로 훼손시키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이 세상의 관습과 시각에서 오는 왜곡들… 그 왜곡의 결과로 나타나는 상처들과 문제들… 아.. 그래서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 보여주시는 것, 알게 해주시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그래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의 도우심이 이리 중요하구나…
-무엇보다…이리 나타난 문제들의 원인이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의 지혜”로 받아들인 결과라는 것에 정신이 번쩍 든다. 교회 안에 구원 받은 백성들 중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상태일까? 성령께서 보이시는(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의 지혜의 안목과 관습으로 보고 행하는 ‘어린아이’의 활보함을 하나님 나라의 성숙한 백성이 보듬고 어루만져 주었으면 좋겠다.
-교회는 문제가 없을 수 없다. 문제는 해결하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가치로 문제를 해결하면 안된다. 성령의 법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문제 해결의 첫 걸음은 “이해(시각)조정”, “맡겨 주신대로”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분주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으면 참 좋겠다만…. 아쉽게도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분주함이었다. 이런 저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 말씀이 참 은혜가 된다. 특히 “맡겨 주신대로”의 마음이 분쟁의 현장에서 동역의 현장으로 가는 중요한 가치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동역자”는 하나님께서 너무나 황송하게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겨 주신 자라는 의미다. 결코 “동역”이 어울지리 않는 죄많은 우리들이지만, 기꺼이 죄를 씨기시고 함께 동역의 길로 세우셨다. “맡겨 주심으로” 말이다.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 무엇일까 곰곰히 돌아보았다. 지금 나의 위치가 어떤 위치인지도 살펴 보았다. 눈물이 나왔다…. 아… 내가 무엇이라고… 이런 자리, 이런 직임을 맡겨 주셨을까…
*주님의 십자가의 견고한 터 위에서 불에 타 없어지지 않을 재료로 성실하게 감당해야지… 홀로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동역해야지… 어떤 일이든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세우라고 맡겨 주신 것이니… 잘 감당해야지…..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지도자… 함께 동역하여 지어가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 만들어가야지… 그리해야지… 경쟁이 아니라 동역으로… 내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겨 주심으로…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문제이고 교회의 문제이다. 왜 그럴까?
1.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1-5절)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 그들에게 어떻게 전했는지 먼저 밝힌다. 당시 사람들이 즐기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1절)이나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4절)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대한 것만 말했다(2절). 그리고 이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능력만 드러나도록 했다(4-5절).
바울은 헬라철학적 사고에 자연스러운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에게 익숙한 방법이나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현란한 말솜씨나, 논리적인 연설이 “복음”전도의 도구가 아니었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의지하며 감당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5절)
교회는 각양 각층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다양하다는 거다. 그런데 다양한 구성원으로 모인 공동체이기에 하나님의 복음으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하나 되는 것이 참으로 중요했다. 하지만 분쟁은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 말과 지혜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어떤 철학자나 학파가 어느 도시에 갔을 때, 그 도시의 여러 선생들이나 학파와 논쟁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를 즐겨 들으며 자신들의 지적인 욕구를 채웠다.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에게도 이런 부분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복음을 말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가르쳤다. 현란한 수사 언어에 기댄 복음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과 역사를 통해 드러낸 복음이었다.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가르칠 때는 이런 부분이 상관 없었다. 문제는 그가 떠난 후 차례로 방문하여 가르친 순회 전도자들었다. 아볼로는 당시 사람들의 구미에 딱 맞는 전도자였다. 말을 현란하게 잘 했다. 베드로는 어떻게 전했는지 모르지만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 “사도”였다. 하지만 순차적으로 이들의 가르침을 듣고 난 후 문제가 발생되고 말았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에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밀리고 만 것이다. 교회안에서 조차 당시 세계의 말의 현란함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에 물들고 만 것이다. 분쟁의 근본에 이것이 있었던 것이다.
2. 눈에 보이는 것에 감추인 비밀을 포기하다(6-16절)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다. 즉 귀로만 듣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마음에 반응이 문제다. 보고 들으며 마음이 동하는 것이 중요했다. 눈에 보이고, 귀가 즐겁고, 마음에 감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은 당시 사람들이 추구했던 그런 것은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들이 아름답게 여기는 소재의 이야기가 아닐 뿐더러, 더 나아가 가장 경멸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고상한 철학, 이것은 아름답게 포장하여 말하는 웅변술이나 수사적 기법에 담겨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다. 하지만 십자가는 중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그것도 최고형인 사형을 언도 받아 매달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경멸했다. 그런데 예수님 이야기가 십자가에 달린 이야기라니 인간적으로 이해가 될 수도 없고 굳이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이야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사람들이 반응했다. 신비였다. 바울은 이렇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은 것이 바로 신비 중의 신비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믿은 자들에게는 좀 더 깊은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온전한 자들(예수님과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믿은 사람들)’에게는 “지혜”를 말해 주었다. 이 지혜를 바울은 ‘감추인 것’,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표현했다.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준비해 놓으신 것이라는 거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달리신 십자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지혜 곧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감추어졌다. 그래서 이 세대의 통치자들은 한 사람도 이를 알지 못했다(8절). 자신들이 즐기고 선호하는 것으로 보여지지(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니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알지 못하니 눈으로도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며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9절).
하지만 “성령”께서는 이 “하나님의 지혜(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보여 주셨다(10절).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령은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신다(12절). 그러므로 바울도 ‘하나님의 지혜’를 눈에 보이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말했다(13절).
바울이 애끓는 마음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짚어주는 이 부분도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많은 교회들이 “복음”보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에 더 열광(?)한다. 마음을 찌르고, 아파하게 하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은 오히려 거부한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깊은 탄식과 아픔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거절한다. 교회에서만이라도 위로 받고 싶고, 교회에서만이라도 편안하고 싶다고 말하며 “듣고 싶은 말”, “자기 마음이 감동되는 말”를 찾는다.
나를 온전케 해주시는 성령께서, 나를 온전하게 하시려고 알려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따라 온전케 하기 위해 아파해야 할 시간조차 거절한다. 고통스러워하며 잘라내야 할 죄악을 애써 덮어놓고 그저 귀에 듣기에, 마음에 흡족한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만 찾는다. 여기에 하나님과의 화해, 하나됨은 없다. 갈라진 틈이 더욱 벌어질 뿐이고, 깨어진 관계의 어색함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 내가 눈에 보이고 마음에 직접 느끼는 세상적인 가치에 보이지 않으나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을 포기하는 것이다.
나는?
-바울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만 알기 원했다. 그래서 바울 자신에게 주목하지 않도록 지혜의 아름다운 것(화려한 웅변술,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바울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할 때 거절과 조롱받음을 두려워하며 떨었지만, 자기 능력을 과시할수록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성령께서 친히 능력으로 고린도 성도들을 믿음으로 이끄시도록 맡겼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급조된 임기응변의 지혜가 아니다. 만세 전부터 정하신 것을 ‘때가 차매’ 이루신 하나님의 지혜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영에 속한 일들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그 깊이와 넓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세상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십자가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음에 있어 거리낌이 없어야 할 것이다.
-바울이 참 대단하다. 바울의 글들을 읽으면 너무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르기를 한 두번 한 것이 아니다. 그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할 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놀라운 치밀한 수사능력과 그가 담고 있는 넘치고도 남을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의 관심은 자신의 명성이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에 있었고, 자기 영향력 확대가 아닌 복음의 확산과 하나님 나라 확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어떠한가?
-그는 오직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나타내 보이시는 은혜와 능력만을 의지하여 당시 말 좀 하는 철학자들, 선생들 사이에서 “말 참 못한다” 여김을 받아도 꿋꿋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못 박힌 십자가”만 전했다. 지루하리 만치 곧이 곧대로 전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할 때 세상 멸시와 조롱보다 말의 지혜로 전하는 것을 두려워 하며 떨었다. 그래서 더욱 성령께서 친히 성도들을 믿음으로 이끄시도록 맡겼다. 인간의 설득이나 감화가 아니라, 성령에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기초가 되게 한 것이다.
-구원은 성령의 역사다. 그렇기에 전도자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만 복음 증거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전도자의 능력이 열매의 많고 적음을 결정하지 않는다. 아! 이 진리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성령을 통해 성화된 지혜(6절)는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것(9절)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깨닫게 한다. 반면, 헛된 자랑으로 분쟁을 일삼던 고린도 성도들은 스스로 ‘영적’이라고 우쭐댔지만, 그들이 얼마나 주의 뜻과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미련한 자들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내가 남을 비교하며 자랑하는 것들도 모두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임을 깨달을 때 삶이 겸손해지지 않을까?
-설교를 준비하다 보면 내가 쮜어 짜낸 ‘이야.. 이런 문장이라니… 이런 것은 내가 읽고 들어도 감동이 된다’ 라는 것에 더 마음을 쏟고 유혹이 가는 것을 감출 수 없다. 성도들의 반응을 의식하여 뭔가 말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면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모습이 귀한 도전이 된다. 그리고 용기를 낼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의 지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포장해서 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담백하게 담담히 드러내는 것이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영혼을 소생 시키는 말씀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령께서 능력을 발휘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1년 6개월 동안 전한 말씀으로 세워진 고린도 교회이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다.
-또 바울이 “성령”의 도우심을 얼마나 의지했는지 깨닫게 하신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말들이 넘쳐나 사람들의 마음에 꽉 차있는데, 그 마음을 뚫고 들어가게 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로 가르친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가르쳐 나타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의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니 바울은 얼마나 가르침의 현장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사모하고 의지했을까?
-실제로 바울이 전도여행중에 교회들을 일으켜 세울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이적들이 함께 따라왔고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르칠 수 있는 계기가 마련 되었었다. 또 가르치는 도중에 성령께서 깨우쳐 주심으로 성도가 세워졌음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해야 할 매 순간 마다 성령께서 도와 주시기를 갈급하고 의지하며 확신하는 것이 매우 중요 했을 것이다.
-주님께서 약속하여 주신대로 임한 성령께서 이 모든 과정을 이끄신다.
*하나님 나라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며 즐기고 찾는 이 세상의 익숙한 가치로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담아내는 하나님 나라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이루어가는 걸음조차도 “오직 성령”께서 이끄신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이 당대 최고의 랍비 가말리엘의 제자였고 산헤드린 공회 회원이었던 그의 박학한 지식과 웅변술과 같은 지적 능력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드러나도록” 철저하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만 의지하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시도록, 자신의 이름이나 평판이 드러나지 않도록 마음을 다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눈에 보이는 가치에 감추인 하나님의 지혜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역사하시기에 나의 목회 걸음 걸음이 오직 성령으로 행하기를 사모할 뿐이다.
*고린도의 문제 곧 나의 문제다. 오늘 나에게 보여주신 문제는 ‘눈에 보이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여전히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명한 처방전이 이미 내게 주셨다.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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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7일 주보
♥호스트패밀리 – 호스트패밀리는 우리 지역으로 유학 온 학생들의 믿음의 가족이 되어 정서적 지지와 생활의 도움을 나누는 실제적인 일상의

2026년 5월 31일 주보
♥풍삶초 이끄미세미나 – 진공첫 1기에서 6기 수료한 성도 중에 ‘풍성한 살으로의 초대’ 이끄미 교육을 희망하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풍삶초

2026년 5월 24일 주보
♥호스트패밀리 모집 – 호스트패밀리는 유학생과 함께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공부하는 외국인 유학생의 믿음의 가족이 되어 정서적 지지와

더온누리교회 전임 및 파트 교역자 청빙 공고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갈 동역자를 기다립니다. 전주 더온누리교회(www.theonnuri.org)에서 함께

#더온누리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은혜를 함께 나눠요. instagram에서 "#더온누리교회"를 태그해 주세요:)
[주일 예배 안내]
신앙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앞에
나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말씀보다
경험을 앞세우고,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언제나 말씀 위에 세워집니다.
이번 주일,
고린도전서 4:6-21 말씀을 통해
말씀의 경계를 넘어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겸손히 말씀 앞에 서는
참된 제자의 삶을 함께 묵상합니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내 생각보다 말씀을,
내 주장보다 복음을,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신뢰하는 믿음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말씀 앞에서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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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하합니다! 🏅
지난 5월 30일,
호남권 어와나 교회들이 함께 모여
어와나 올림픽을 개최했습니다 🙌
말씀 안에서 함께 배우고,
함께 뛰며,
믿음의 우정을 쌓아가는 특별한 시간 ✨
더온누리교회 어린이들도 멋진 열정과 도전으로 참여하여
🥇 TNT팀 금메달 1개
🥈 TNT팀 은메달 1개
🥉 TNT팀 동메달 1개
그리고
🥉 Sparks팀 동메달 2개를 획득했습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
어와나는 어린이들이 말씀을 배우고 암송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훈련 공동체입니다 📖❤️
메달의 색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성장하고 함께 기뻐하는 믿음의 걸음입니다.
열심히 준비하고 참여한 모든 어린이들과
섬겨주신 교사, 부모님들께 감사드립니다 🙏
앞으로도 말씀 안에서 더욱 자라가는
더온누리교회 어와나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
#더온누리교회 #어와나 #어와나올림픽 #전주교회
#전주 #TNT #Sparks #다음세대
#말씀암송 #제자훈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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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삶이 여전히 애굽 같고,
현실이 여전히 광야 같아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은 멈추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장에서
요셉은 자신의 성공이나 업적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를 붙들었습니다.
아직 출애굽은 시작되지 않았고,
약속의 땅도 보이지 않았지만
요셉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50:15-26 말씀을 통해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언약을 더 신뢰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함께 묵상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돌보시리니”
세상에 익숙해지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순례자의 믿음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여기에 모인 우리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창세기
#하나님이반드시돌보시리니
#요셉
#하나님의언약
#약속의땅
#하나님나라
#믿음의여정
#여기에모인우리
#말씀묵상
#신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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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GodWillSurelyTakeCareOf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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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빛키! 😆✨
우연이 아닌 은혜 🙌
아이들을 위한 축제
더온누리 홀리빛키가
많은 성도님들의 기도와 후원 가운데
은혜롭게 마무리되었습니다 🤍
웃음이 가득했고
행복이 넘쳤던 하루
마음껏 뛰어놀고
함께 웃으며
사랑을 나누었던 그날의 모습을 전합니다 ✨
아이들의 웃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했던 시간 🫶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홀리빛키
#어린이축제 #다음세대 #은혜 #교회행사
#플리마켓 #키즈페스티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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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풍요의 중심이 아니라,
구별된 자리.
눈에 띄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 머무는 곳.
이번 주일,
창세기 46:28~47:12 말씀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정을
고센으로 이끄셨는지 함께 묵상합니다.
“왜 고센이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가장 안전하고,
가장 은혜로운 자리로
우리를 이끄고 계십니다.
적용찬양 : 은혜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고센땅
#하나님의인도하심
#은혜
#주일말씀
#신앙묵상
#Jesus
#SundayService
#Genesis
#Grace
#Faith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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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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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센으로 이끄셨는지 함께 묵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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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계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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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찬양 :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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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더 깊은 선교학교]
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삶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듯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세상을 향해
복을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
2026 더깊은 선교학교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배우고
선교의 비전을 함께 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
📖 2026 더깊은 선교학교
🗓 06.20 - 07.25 매주 토요일 (6주간)
📍 굿윌센터 2F
🎤 이효재 목사
🎤 주누가 선교사
🎤 김종홍 목사
✈ 단기선교
8월 1일(토) - 8월 4일(화), 일본
🎓 수료식
8월 23일(주일) 2부 예배
—
하나님이 찾으시는
복의 통로로 함께 세워지길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THE MISSION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더깊은선교학교
#선교 #더미션 #복의통로 #단기선교
#일본선교 #mis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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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성,
목자의 힘 🙏
사람을 세우는 힘은
화려함이 아니라
진심에서 시작됩니다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며
다시 붙드는
목장의 본질
주님이 맡기신 영혼을 위해
오늘도 걸어갑니다 🤍
—
더온누리교회
2026 목자수련회
“진정성, 목자의 힘, 목장의 본질”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목자수련회
#목장 #목자의삶 #공동체 #진정성
#리더십 #기도 🙏✨
진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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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함이 아니라
진심에서 시작됩니다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며
다시 붙드는
목장의 본질
주님이 맡기신 영혼을 위해
오늘도 걸어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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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온누리교회
2026 목자수련회
“진정성, 목자의 힘, 목장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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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낮아진 자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억울함과 외로움,
그리고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도
믿음은 시선을 다시 하늘로 향하게 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9:1-10 말씀을 통해
바닥 같은 인생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묵상합니다.
“바닥에서 하늘을 보다”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길을 여십니다.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요셉의믿음
#하나님을바라보다
#믿음의시선
#주일말씀
#신앙묵상
#Jesus
#SundayService
#Genesis
#FaithJourney
#TrustGod
[주일 예배 안내]
낮아진 자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억울함과 외로움,
그리고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도
믿음은 시선을 다시 하늘로 향하게 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9:1-10 말씀을 통해
바닥 같은 인생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묵상합니다.
“바닥에서 하늘을 보다”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길을 여십니다.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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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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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리에는
결국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분노와 상처,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선택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하나님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4:18-31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잊어버린 삶이
어디로 흘러가게 되는지 깊이 묵상합니다.
“잊혀진 하나님, 드러난 잔혹함”
어둠 속에서도
다시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깨어진 세상을 끌어안고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신앙의경고
#하나님없는삶
#회개의자리
#주일말씀
#깨어진세상을끌어안고
#Jesus
#SundayService
#Genesis
#Repentance
#FaithJourney
[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리에는
결국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분노와 상처,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선택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하나님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4:18-31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잊어버린 삶이
어디로 흘러가게 되는지 깊이 묵상합니다.
“잊혀진 하나님, 드러난 잔혹함”
어둠 속에서도
다시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깨어진 세상을 끌어안고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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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Service
#Genesis
#Repentance
#Faith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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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익숙함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때로
낯설고 어색한 길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떠나야 할 때를 알면서도
머물고 싶은 마음,
그러나 그 부르심 앞에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믿음.
창세기 31:1-16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운 길을 걷는 믿음을 묵상합니다.
“익숙함을 떠나
어색한 약속의 땅으로”
익숙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결단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믿음의걸음
#하나님의인도하심
#순종의삶
#주일말씀
#나는믿네
#Jesus
#SundayService
#Genesis
#FaithJourney
#TrustGod
[주일 예배 안내]
익숙함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때로
낯설고 어색한 길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떠나야 할 때를 알면서도
머물고 싶은 마음,
그러나 그 부르심 앞에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믿음.
창세기 31:1-16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운 길을 걷는 믿음을 묵상합니다.
“익숙함을 떠나
어색한 약속의 땅으로”
익숙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결단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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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stGod
...
지치고 힘들어요? 🥺
예수님 안에는
아픈 것도 없고
외로운 것도 없어요 🤍
우리 같이 가요!
소문의 낙원으로 ✨
—
더온누리교회
초등 2부 율동 🫶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초등부
#어린이예배 #율동 #소문의낙원
#예수님 #귀여움 #churchkids 🥺✨
지치고 힘들어요? 🥺
예수님 안에는
아픈 것도 없고
외로운 것도 없어요 🤍
우리 같이 가요!
소문의 낙원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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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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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로운 금요일 안내
하나님 앞에 서는 용기,
믿음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
이번 금요일,
다윗의 고백과 결단을 통해
우리의 삶에도
믿음의 용맹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다윗의 용맹”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나아갔던 다윗처럼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서는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 : 목사 장필조
찬양인도 : 목사 이홍기
—
📖 본문
사무엘상 17:28-40
—
🎶 Worship List
부흥의 세대
성령의 불타는 교회
부흥이 있으리라
무릎 꿇고 엎드리니
다시 한 번
나의 주 크고 놀라운 하나님
—
4월 24일 금요일 밤,
찬양과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을
함께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
#더온누리교회 #향기로운금요일 #금요예배 #찬양예배
#전주교회 #전주 #말씀 #예배 #부흥 #기도 #전주찬양팀 #전주집회 #찬양집회
@fragrant_worship
✨ 향기로운 금요일 안내
하나님 앞에 서는 용기,
믿음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
이번 금요일,
다윗의 고백과 결단을 통해
우리의 삶에도
믿음의 용맹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다윗의 용맹”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나아갔던 다윗처럼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서는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 : 목사 장필조
찬양인도 : 목사 이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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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사무엘상 17: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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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rship List
부흥의 세대
성령의 불타는 교회
부흥이 있으리라
무릎 꿇고 엎드리니
다시 한 번
나의 주 크고 놀라운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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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4일 금요일 밤,
찬양과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을
함께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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