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마지막 때 예루살렘에서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여호와의 왕권은 사람들의 힘에 의해 성취되는 사건이 아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인간의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신적 개입으로 시작하는 초자연적인 전환이다. 세상 사람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오는 예루살렘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다(계 21:2).
1. 시온 산으로 순례 오는 민족들(1~5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역사에 개입하시는 ‘말일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은 모든 산보다 높아지고(시 48:3; 78:69), 세상 모든 민족이 그곳으로 순례를 온다(2절). 시온의 ‘높임받음’은 여호와의 계시 장소로서 갖게 될 압도적인 지위를 보여준다. 그리고 민족들이 서로 격려하며 시온으로 올라오는 목적은 하나님의 율법(가르침)과 말씀을 듣기 위해서다(3절). 마지막 때 우상을 숭배하던 민족들이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된다. 공정하게 판단하고 재판하시는 여호와의 통치 아래 살아가기에, 민족들이 다시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무력에 의지하지 않는다(4절). 이들은 칼과 창 같은 쓸모 없게 된 전쟁 무기를 녹여 보습과 낫 같은 농기구로 만든다. 힘과 폭력과 전쟁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 곧 그분의 정의와 공의가 온 땅을 지배한다. 이렇게 환상중에 민족들이 야곱의 하나님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순례 오는 모습을 보는 예언자가 야곱 족속을 향해 그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확실히 깨닫고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고 권면한다(5절).
2. 우상과 제 힘을 의존하는 이스라엘을 고발하다(6~9절)
그런데 야곱 족속은 이사야의 권면(5절)을 거절한다. 하나님께서는 야곱 족속을 더 이상 돌보시지 않고 그들을 불순종에 방치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는 이유는 세 가지로 제시된다(6~8절). 먼저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의 제의적 풍습에 깊이 물들어 버렸다. 여호와의 백성임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이방 풍습을 따라 점쟁이나 요술쟁이를 찾았다. 율법은 이러한 이교적 관습을 엄격하게 금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민간 신앙에서는 이 관습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은과 금과 보화와 군마와 병거가 땅에 가득했다. 야곱 족속은 자기의 경제력을 자랑하고 자기의 안전을 군사력에 의존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마지막으로 우상들이 야곱 족속의 땅에 가득했다. 우상이란 섬기는 자들을 도와줄 능력이 없는 거짓 존재지만, 이스라엘은 능력의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람의 손으로 만든 허망한 우상에게 도움을 구했다.
이사야의 시선은 이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서 민족들의 우상 숭배로 옮겨진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땅 위의 모든 사람이 우상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을 천하고 낮게 만들었다(9a절). 우상에게 엎드려 자신을 비천하게 만드는 행위가 이미 여호와의 심판에 속했다. 이사야는 행위와 그 결과의 내적 관계가 여호와의 개입에 의해 단절될 수도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의 정의가 분명하게 드러나기를 간구한다(‘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9b절). 자기 신을 위해 자기 손으로 만든 우상을 경배하는 자들은 반드시 상응하는 징계를 받는다.
3. 여호와의 날, 심판 선언과 권면(10~22절)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께서 직접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 이날은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의 교만이 땅에 떨어지고 우상의 무능력이 폭로되는 날이다. 여호와의 주권이 유감없이 과시되는 날로, 여호와만 높임을 받는다. 경제적 부와 군사적 힘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교만과 거만과 자만은 징벌을 받아 산산조각이 난다.
여호와의 진노의 대상으로 먼저 거대 건축물에 사용되는 나무들을 언급한다(13절). 레바논의 백향목은 높이 30미터 이상 자라는 나무로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 건축에 사용되었다. 참고로 스가랴 11:1~2을 통해 레바논 백향목과 더불어 바산의 상수리 나무도 목재로 유명했다. 백향목을 수식하는 “높고 높은”은 12절의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와 히브리어가 동일하다. 여호와의 날에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만든 것들 위에도 여호와의 진노가 임한다(14~16절). 어떤 지형이든, 견고한 성벽이든 여호와의 날에는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진노하신 여호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다시스의 모든 배로 표현된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는 원양선단의 경이로움도 여호와의 진노의 바람 앞에서는 파선을 피할 수 없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 인간의 거만과 교만이 꺾이고 오직 여호와만 높임을 받으신다. 이와같은 선포들은 여호와의 날에는 누가 진정으로 높은 자인지를 보여주는 날임을 일깨운다.
18절은 8절을 이어받아 우상의 멸망을 다시 선포한다. 여호와께서 높임을 받으실 때 이스라엘이 무릎을 꿇고 경배드린 모든 우상이 사라질 것이다. 우상과 우상숭배자들이 모두 멸절한다. 여호와께서 왕의 위엄과 영광으로 세상을 심판하려고 일어나실 때 온 세상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19절). 이와같은 영광스러운 여호와의 나타나심은 그분의 말씀과 의지를 무시하고 악을 행한 자들에게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는 심판의 시간이 된다.
한편 여호와께서 역사에 개입하시는 날,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우상의 헛됨을 참담하게 깨닫는다. 이들이 의존하던 우상은 환난을 피해 도망하는 데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도움은 커녕 짐이 되는 우상을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져버리고 서둘러 숨을 곳을 찾아 바위틈에서 살길을 찾는다(20~21절).
22절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교만을 심판하는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이사야가 권면으로 마무리하는 부분이다. 여호와의 진노를 피할 길이 전혀 없지 않다는 것이다. 사멸적 존재에 불과한 인간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코로 호흡하는 동안만 생명이 유지되는 제한적 피조물일 뿐이다,. 이런 인간이 이룩한 업적은 결국 사멸할 수밖에 없다. 그 업적에 의존하는 자도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사람을 생명체가 되게 하신(창 2:7)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나는?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의 왕권이 서는 날이다. 그날에 열방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임재 앞으로 나아올 것이다. 그날에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베우고 그대로 살고자 할 것이고, 그분의 뜻대로 모든 무기를 농기구로 바꾸어 평화롭게 살 것이다. 성경은 늘 강조한다. 여호와의 주권 앞에 복종하는 곳에 참된 안식과 샬롬이 임한다.
-여호와의 날은 예루살렘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날이다. 즉, 온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기 위해 모여들 날이다(슥 14:17). 열방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할 것이다. 주의 통치가 확립되는 그날에 더는 전쟁이 없고 샬롬이 임할 것이다(1~4절). 바벨탑에서는 하나님의 통치에 반발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여호와의 날에는 만민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존중하여 그 아래서 하나가 될 것이다. 이 놀라운 여호와의 날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의 골고다에서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감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 복음을 땅끝까지 전함으로 이 약속의 실현에 동참하게 하셨다(마 28:19~20; 행 1:8). 그리고 그 은혜로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서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날에 더는 혈통적인 이스라엘 야곱은 의미없다. 우상을 숭배하고 이방 나라들의 풍속을 좇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업신여긴 이들은 소용없다. 그들이 믿고 따른 그 우상의 운명과 같이 될 것이다. 그들이 언약한 이방 나라들의 결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은 다른 어떤 것과 조금이라도 나뉠 수 없다.
-여호와의 날은 회복 이전에 심판이 있을 것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열방에게서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는 권면을 들을만큼 어두웠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은혜를 입었고 말씀을 가졌음에도 그들 안에는 주의 통치와 임재가 가득한 것이 아니라, 보화와 병거와 우상이 가득했다. 귀천을 무론하고 하나님보다는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고 의지했다. 절대 용서 받을 수 없는 상태라고 여긴 선지자가 심판을 간청할 정도였다(5~9절). 야곱의 후손이라는 혈통보다 말씀으로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이 “주의 날(여호와의 날)”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게 함을 기억해야 한다.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은 주를 인정하지 않고 높은 데 거하는 교만한 자를 기어이 굴복시킬 것이다. 하나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그날에 철저하게 낮추실 것이다. 또한 그들이 의지하던 모든 것들도 함께 멸망하게 하여 그들이 기대지 말아야 할 것을 기대고 있었음을 알게 하실 것이다. 그날은 어디로든 숨고 피하고 도망해야 할 날이다. 그들이 무시한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과 능력 앞에서 두려워 떨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이 심판하기 위하여 임재하실 때 피하여 숨을 곳이 없을 것이다(10~21절). 큰 성읍과 왕궁에서 기세등등하던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하지 못해 바위 틈에 들어가고 진토에 숨을 것이다(계 6:15~17). 그날에는 눈이 높고 교만한 자들은 모두 낮아질 것이다. 세상에 부와 권력과 자부심을 가져다 준 망대, 성벽, 배, 아름다운 조각물들도 하찮게 될 것이다. 여호와만이 홀로 높임을 받으시는 곳이 곧 하나님 나라다. 그분만 높이고 그분의 영광만을 찬양하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될 것이다.
-여호와의 날에 이스라엘이 살길은 어둠의 자리에서 나와 여호와의 빛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이 조명해주는 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 말고 다른 유한한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죽어 사라질 것들에 헛된 가치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살길이다.
-이사야는 이 모든 경고와 함께 인생(인간)을 의지하지 말라고 권면한다(22절). 인생(인간)은 코 하나 막히면 숨이 끊어지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한순간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대체할 것을 만들고, 최첨단 무기를 개발하고, 위대한 건축과 과학과 예술을 이루었다고 자만하는 인생을 더욱 분별하여 신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 예수님 통치의 특징은 “샬롬”이다. 평화가 하나님과 백성,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피조물 사이에 임하는 것이다. 그 평화를 만드는 자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내가 있는 모든 곳에서 내가 있기에 샬롬이 깃들고 있는가?
*신앙은 우상과의 싸움을 통해 형성된다. 인생을 의지하느냐, 인생을 지으신 분을 의지하느냐의 싸움이다. 여전히 나의 마음을 빼앗고 있는 우상이 있는지 늘 기민하게 살피고 또 살려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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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찌하여…(21-23절)
신실하던 성읍… 정의가 충만했던 그 곳… 공의가 가득하던 곳(21절)이 예루살렘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창기가 되었고, 살인자들이 판을 친다. 불순물이 가득한 은처럼 되었고, 가장 좋다는 포도주에 물이 섞였다!(21-22절)
지도자들은 반역자, 도둑의 짝이다. 모두 뇌물을 좋아하고 보수를 쫓아 다닌다. 고아와 과부의 송사나 하소연은 귓전으로 흘린다(23절).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할 예루살렘이 다른 이방신을 섬겼다는 거다. 정의의 가치가 무너져 내렸고, 살인자들이 판을 친다. 올바름(공의)이 무너져서 도둑질, 뇌물이 판을 치고 약자에 대한 배려가 사라졌다.
신앙 공동체 안에 정의가 부재하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헌신의 결과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서지 못하고 또한 지도자들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2. 슬프다! 하지만…(24-27절)
예루살렘을 보며 분노가 일어난다! 그 분노를 나의 대적들에게… 나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한을 풀겠다(24절). 너(예루살렘)를 때려서라도… 잿물로 찌끼를 씻어내듯 모든 불순물을 없애겠다(25절). 사사들을 다시 세우고, 처음에 그런것 처럼 슬기로운(모사, 지혜로운) 지도자를 보내 주겠다(26절). 시온(예루살렘)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회개한 백성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을 것이다(27절).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원수, 대적으로 표현하신다. 겉모습은 하나님께 열심으로 제사하는 백성들이었지만 실상은 대적이고 원수였다는 것이다. 원수와 대적을 상대하시듯, 가차없이 찌꺼기를 제거하고 창기들을 쫓아내시며 살인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확고한 심판을 통해서야만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으로 다시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 그런 다음에야 너를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이라고 부르겠다(새번역_26절).” 그런데 확고한 심판 이후 하나님께서 회복을 위해 하시는 것이 있다. “옛날처럼 (내가) 사사들을 (너에게) 다시 세우고, 처음에 한 것처럼 슬기로운 지도자들을 (너에게) 보내” 준 이후에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는 거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가르치며, 이끌어가는 지도자를 통해 “의로움”, “신실함”을 회복 시키겠다는 것이다. 사사들과 같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대로 슬기롭게 정치하는 지도자들의 핵심 소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하나님의 의가 열매 맺는 의로움의 삶, 하나님의 뜻이 곧이 곧대로 스며들게 하는 신실한 삶의 향방은 지도자, 사람에게 달려 있다.
신앙공동체를 불행하게 만드는 자들이 하나님의 대적이다. 이들은 지은 죄에 합당한 보응과 보복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보응을 행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공동체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회복과 구속을 누리려면 먼저, 시온 곧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무릴적 귀환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죄를 고백하고 마음을 돌이키는 회심을 보여야 한다. 이는 여호와께 나아오지 않고 죄에서 돌이킴이 없다면 회복과 구속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그러나 죄인들은(28-31절)
“그러나” 패역한 자(거역한 자)”와 죄인은 모두 패망한다. 또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한다. 삶의 의지와 기쁨으로 삼았던 상수리 나무와 동산(우상들)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29절). 마치 잎사귀 마른 상수리 나무, 물 없는 동산이 같을 것이다(30절). 여전히 우상을 섬기는 너희는 “삼오라기(삼 부스러기나 오라기_전혀 쓸모 없다는 뜻)”와 같을 것이고, 그가 한 일이 불씨가 되어 부타게 되는데, 꺼 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완전한 심판_30-31절)
하나님의 분노가 일어 날 때 여전히 죄악 가운데 있어 돌이키지 않는 자들은 대적, 원수가 되어 그들 스스로 심판의 불씨되어 타오르게 하며 꺼줄 이도 없게 된다. 하나님의 원수처럼 조악 가운데 길을 가다가도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의 구속을 받게 되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져든 이들은 돌이키지 않아 결국 있을 곳이 없게 된다. 우상으로 인해 누리는 풍요는 메마를 것이고, 명예는 수치가 되며, 강성함은 불살라 질 것이다. 우상을 섬겼던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 그들이 가장 먼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움이 여기에 있다.
현실적으로 또한 가시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들을 의지하고 숭배하며 하나님꼐로 돌아오지 않는 자는 곧 그분을 버린 자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택한 것들로 인해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많은 제사와 모임과 기도가 있던 나라에 살인자들이 가득하다. 정의와 공의는 찾아볼 수 없다. 은에 찌꺼기를 넣고 포도주에 물을 섞었다. 관료들은 하나님보다 뇌물을 사랑했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보다 도둑과 짝했다(21~22절). 약자들을 보호해야 할 그들이 앞장서 약탈했고, 재판은 왜곡되었다. 거룩한 주님의 신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음란한 창기와 다름 없었다. 우리도 각성해야 한다. 돈과 권력이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곳에서 하나님은 기억되지 않고 말씀은 침묵을 강요받는다. 그러고도 하나님 나라라고 부르며, 언약적 은혜를 기대할 수 있을까? 정의와 공의를 실천한느 것이 참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순종해야 함을 곱씹고 곱씹는다.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긍휼을 잃지 않으신다. 심판의 고난을 거치면서 자녀들이 죄를 벗고 단호하게 청결해지기를 바라셨다.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섞이지 말고 단호하게 선택하기를 원하셨다. 이스라엘이 예전의 의와 신실함을 회복하는 나라가 되고, 정의와 공의가 넘실거리는 땅이 되기를 바라셨다. 백성들과 지도자 모두 하나님만을 참 통치자로 모시고 말씀을 청종하는 데로 돌아오기를 기대하셨다(25~27절). 지금 성도 개인이나 교회 공동체나, 한국교회나 국가적으로 시련의 때를 지나고 있다고 판단되거든 재난이 지나가기만을 구하지 말고 지금 내가 벗어나야 할 것, 떠나야 할 것, 회복해야 할 가치를 구하며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백성이 대적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원수가 되고 말았다. 패역한 자가 되어 여호와를 버렸다. 하나님께 제사하면서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부끄러운 짓을 했다. 하나님은 그들이 저지른 악을 보응하고 보복하실 것이다. 패망하고 멸망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이 섬기던 우상과 함께 불에 탈 것이고 약속의 땅은 물 없는 황막한 광야가 될 것이다(24, 28~31절). 긴장하며 되돌아 보아야 한다. 내 자신이 하나님의 불심판을 견디지 못할 만큼 바싹 메마른 신앙은 아닌지, 우상과 하나님을 같이 섬기면서 거짓 안전에 취하여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은 일상속에서 사람들을 향한 태도로 드러난다. 정의와 공의를 향한 노력을 그치며 기득권에 안주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심판이 나를 바꾸시는 마지막 방법이 될 수 있다. 지금 말씀을 통해 들리는 경고를 듣고 죄를 떠나 정결해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의롭고 신실한 고을이 되기를 바라신다. 내가 속한 가정, 직장, 학교, 교회가 그런 곳이 되려면 어떤 역할을 구체적으로 해야할 지 경건한 고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분노, 슬픔이 보복으로 이어지나 놀랍게도 회복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분노의 심판 앞에 멸망만을 남겨두지 않으시고 회복이라는 길도 예비해 주신다. 슬픔, 분노가 회복의 출발이 된다.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의미다. 슬픔과 분노가 없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것이며, 죄로 인해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거다. 그래서 하나님의 슬픔과 분노가 차마 감사하고 감사하다!
*여전히 “그럼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거니까! 포기하지 않으셨으니 이 땅에 가득한 죄를 기어코 쓸어 버리시겠다는 거니까! 그렇다. 죄에 대하여 둔감하면 슬픔, 분노도 없다. -하나님의 마음에 민감하지 않으면 주위에 널린 상수리나무, 동산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삶도 황폐해진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된 교회는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선명하게 들러나되, 하나님의 뜻대로 드러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움, 하나님의 신실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곳에는 정의가 넘치고 공의로움이 굳게 서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로움이 사라진 교회는 하나님뿐 아니라 다른 무수한 신들이 마음을 빼앗으려고 활개친다. 물질이라는 신이, 명예라는 신이 활개치며 마음을 빼앗아간다. 자기 홀로 빠지지 않고 물고 늘어져 함께 죽어가자고 한다. “영적” 살인자들이 무수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순전하게 드러나야 할 곳에 이것 저것 잡다한 불순물들이 섞인 은들과 가장 좋은 포도주라고 여기는 것까지 이미 물이 섞여 버린 참담한 지경이 되어 버렸다. 정의과 공의가 사라지니 삶 속에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랑과 배려도 함께 자취를 감춘다.
*그런 교회는 아무리 예배(제사)를 무수히 드려도, 드리는 헌금(제물)이 넘쳐나도 역겹다 하시며 “분노와 슬픔”을 쏟아 내실 것이다. 그 분노와 슬픔의 심판을 통해 “처음과 같이”, “본래와 같이”, 의의 성읍, 신실한 고을로 다시 불릴 것이다.
*지금 겪고 있는 유례없는 교회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은 한국 교회들에게 하시는 분명한 하나님의 “슬픔과 분노”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이 슬픔과 분노의 시간이 우리에게 담금질의 시간이 될 것을 소망으로 바라본다. 우리에게 묻혀진 찌꺼기들을 녹여 청결하게 하시는, 진짜와 가짜가 섞여있어 어느것이 진짜인지 구별이 어려운 이 때 하나님의 신비하신 심판이 “혼합물을 다 제하시는” 그런 시간이 지금의 시간임을 소망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런 귀한 시간을 보내며 “그럼에도” 여전히 상수리나무들과 동산를 기웃거리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지금 통과하고 있는 고통의 시간은 메말라 황폐해져서 약하디 약한 바람에도 흩날려 사라져 버릴 심판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시간이 심판의 시간이기는 하나 회복의 시간이 될 것인가? 그럼에도 지금의 시간이 심판의 시간으로 결말되어 끝날 것인가? 하나님의 마음은 교회의 교회답지 못함으로 인해 슬픔과 분노의 심판을 행하시는 것임에도 이 시간이 회복을 위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처음과 같이, 본래와 같이, 의의 성읍, 신실한 고을”되게 하시려는 슬픔의 시간이어야 한다.
*나의 죄악이 가져온 심판의 불이 면전에 활활 타오르고 있어도 “회복의 소망”을 먼저 버리지 않기 위해 뿜어내는 죄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하나님과 같이 나 자신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에게도 일어나기를 갈망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때, 회개하지 않는 자는 영원히 멸망하지만, 회개하는 자는 더 좋은 상태로 회복됨을 꿈꾸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멸망이 아니라 정화와 회복을 위한 것이다. 그 심판 중에라도 회개하는 자는 구속을 통해 회복된다.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한다면, 공동체가 죄악으로 인해 심판의 자리에 있음을 자각한다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더 좋은 더 신령한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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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반역을 신랄하게 고발한다. 이스라엘은 배은망덕한 자식이요 소와 나귀보다 못한 자들이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죄악의 백성이 됐다. 멀리해야 할 죄가 이스라엘의 본성과 성품의 중심에 주인처럼 자리잡고 말았다.
이사야는 이처럼 패륜적인 행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다를 강하게 비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유다는 완전히 멸망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회개와 순종으로써 회복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음을 명확히 알린다.
1. 이스라엘을 고발하시는 하나님(1~3절)
이사야는 주전 8세기 중반부터 7세기로 넘어가는 어간까지, 어림잡아 40년 동안(학자에 따라 주전 740~686년경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이에 따르면 50~60여년 동안) 예언자로 활동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는 민족들의 신탁을 포함해 이사야에 수집된 모든 말씀은 그가 본 하나님의 계시(환상)이고, 그 내용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과 관련되었음을 알려준다.
2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관한 증인으로 가장 확실한 ‘하늘과 땅’을 불러 세우신다. 땅은 피 흘림과 황폐함을 초래한(7절) 이스라엘의 죄악을 직접 경험한 증인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배반을 두 개의 잘 알려진 비유를 통해 고발하신다. 첫 번째는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다. 이스라엘은 키워주고 돌봐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배반한 파렴치한 아들이다. 신 21:18~21에 따르면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아들은 죽음에 처해진다. 여호와를 배반한 이스라엘의 행태는 아버지를 거역한 아들의 패역과 같기에 멸망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두 번째는 주인과 주인이 키우는 짐승의 비유다. 소나 나귀도 먹을 것을 주고 키워준 주인을 알아보고 따르는데,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3절).
“내가 기르고 키운 자식이 나를 거역했다(2절)” “소, 나귀도 주인을 알아보는데, 이스라엘은 나를 알지 못한다! 깨닫지 못한다!(3절)” 하나님의 마음에 깊은 한탄이 베어있다.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는 것 만큼 낙심되는 상황은 드물 것이다. 가축들도 알아보는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스라엘이 기가 막힐 것이다!.
2.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심판 구형(4~17절)
4-9절은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4절)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상태를 부연한다. 중요한 것은 이미 심판을 받았으나 깨닫지 못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심판 받았던 소돔과 고모라처럼 될 뻔 했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이마저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라 하신다(9절).
“범죄한 나라, 허물진 백성, 행악의 종자, 행위가 부패한 자식”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업신여기며 등을 돌렸다(4절). 여기서 멈추지 않고 패역을 거듭하여 온통 상처투성이고 속은 골병이 들었다(5절). 성한 곳이 한 곳도 없으나, 치료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6절). 철저하게 “황폐해진 땅(7절)”이 되었고 도성은 오두막처럼 서 있다(8절).
이어서 10-17절은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측면에서 상세하게 다루며 황폐해진 이유를 설명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는 관심없고 종교적인 제의만 열심이다. 어느 정도였냐면, “너희들이 가져오는 제물 지겹다” “너희들이 바치는 피도 싫다” “나에게 보이러만 오는 것 다 쓸모없다!” “분향도 역겹다!” “절기 지키는 것, 참을 수 없다! 견딜 수 없다! 싫다!” “그런 것들은 나에게 짐만 된다! 나는 지쳤다!” “기도?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듣지 않겠다!” 왜냐하면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저지른 수많은 악행을 덮고자 “더 많은 제물들”을 가져와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한 것을 직시하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단지 제물들의 피를 드림으로 자신들이 흘리게한 사람들의 피는 가증스럽게 외면했다. 그러니 기도하여도 응답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황폐함”이 온 땅에 드리웠다!
삶의 황폐함은 우연히,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죄악의 향기를 맡고 멀리서부터 살며시 엄습해 온다.
3. 그러나 살아날 길이 있다(18-20절)
불쑥 뒤덮은 황폐함이 결말일까? 결코 아니다. 살아날 길이 있다. 선택하면 된다. 이미 황폐함이 몰려 올 때 그 징조를 보여 주셨다.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얼마라도 살아 남게 하시지 않으셨다면…..(새번역_9절)” 원두막 같이 남아있는 도성도 없어졌을 것이다. 또한 손에 가득한 피를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새번역_16-17절).”라고 명령하신다.
황폐함 속에 썩어질 심판이 결정된 백성이라면 굳이 이런 명령을 하실 이유가 없다. 살리시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고 죄악의 위선이 역겹고 견딜 수 없이 지쳤을 지라도 끝까지 심판이 아니라 살리시고 싶으신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싶으신 것이다. 지금까지 역겹고 역겨운 죄악의 피내음 가득한 삶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신다. “씻어라!”, “버려라!”, “그쳐라!”, “배워라!”, “찾아라!”, “도우라!”, “변호하라!”라고 쉴새없이 촉구하신다. 그 쉼 없는 촉구속에 담긴 살아날 길이 있다.
그것은 변론과 순종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새번역_18절)” 변론은 직역하면 “결정하다, 판단하다, 입증하자, 꾸짖다, 징계하다”라는 의미들이 있다. 본문은 “논증해 보자!”라는 의미다. 자기들 마음대로 행하는 제의들에 대하여 회개하도록 촉구하면서 이런 것들이 얼마나 큰 죄인지 서로 논증해 보자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말씀)을 매우 잘 알아야 ‘논증’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제되어야 서로 논증하며 자신들을 감싸고 있는 죄악의 꺼풀들을 벗겨낼 수 있다. 그래야 주홍같은 죄를 바라보고 발견하여 벗겨내고 눈과 같이 회복되는 길을 깨우칠 수 있다. 그래야 산다.
또, 순종하면 산다고 하신다. 그런데 순종도 그냥 순종이 아니다. “즐겨 순종하면” 이다.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이다.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새번역_19절).”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이것 역시 “기꺼이 혹은 적극적으로” 순종하려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매우 신뢰하는 것 뿐 아니라 해박하고도 올바르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되어야 한다.
잘 알아야 기꺼이 순종할 수 있다. 지식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잘 알고 있어야 기꺼이 순종하며 살 수 있다. 적어도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땅에서 “가장 좋은 소산”을 얻어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의 능력임을 알고 “기꺼이” 그 뜻에 순종해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그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다.
반면, 황폐함 속에 더 완전한 진멸로 빠질 길도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역(거절)과 배반이다. 이 길은 그들이 경험했던(히스기야 시대, 앗수르 군대의 예루살렘 포위) 칼의 춤사위에 던져 지는 것이다. 결코 물려지지 않을 칼춤이 벌어지는 길이 “거역과 배반”이다.
이 두 가지 길중에서 선택하라 하신다. 살아날 길과 칼춤이 벌어질 길 중에서 살아날 길을 제발 선택해다오! 이스라엘아! 라고 간절히 염원하시는듯 하다.
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이자 거룩한 백성이며 자식으로서(출 19:6) 언약의 특권을 남용하였다. 주인과 구유를 알아보는 고집 센 소와 나귀보다 못하게, 사랑으로 자식을 양육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말았다(1~4절). 거룩하신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등을 돌렸다.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신 새 언약의 은총에 합당하게 살아내야 한다.
-이에 하나님은 사랑의 매를 드신다.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성한 곳 없고 마음까지 멍이 들었다. 백약이 무효일 만큼 심각했다. 그런데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 큰 매를 부른 것이다. 토지가 황폐하고 성읍은 불타고 포도원에는 사람이 없고 무너진 망대만 황량하게 남을 것이다(5~8절). 혹시 지금 하나님께 사랑의 매를 맞고 있다는 마음이 든다면 아버지의 더 아픈 마음을 헤아리고 돌아서야 한다. 이 땅의 교회가 더 큰 매를 맞기 전에 멈추고 돌아서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기 위하여 성도가 돌이켜야 할 과오들이 있다. 먼저 하나님이 베푸셨던 은혜를 잊고 주님의 법을 무시하는 배은망덕한 과오일 것이다. 그리고 선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 내면에 뿌리박힌 죄의 성향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죄에 대한 징계를 받았을 때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감각이다. 나는 어떤가? 곱씹고 곱씹어 보자.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법을 떠난 자들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다. 그들이 지키는 성일과 모이는 성회를 견딜 수 없는 짐으로 여기신다. 피 묻은 손을 들어 드리는 기도를 아무리 간절하게 많이 드리더라도 듣지 않으실 것이다. 먼저 죄에서 돌아서서 깨끗해지고 율법의 요구에 따라 정의를 구하고 약자들을 선대하고 편들어줄 때에야 주님은 예배를 받아 주실 것이다(10~17절). 오늘 우리 공동체의 예배는 과연 어떨까? 주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자 시도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마당만 밟고 떠나지는 않는가?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자녀로 서지 못하는 것은 왜곡된 영성을 경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시적이고 형식적인 종교 행위가 그것이다. 또한 예배의 외형과 헌금의 물량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심각한 착각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일상에서 윤리적으로 악한 행위를 종교적인 행위로 상쇄하려는 악한 마음과 행실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의도를 담은 종교적 행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이사야는 잘못된 영성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함께 제시한다. 먼저 스스로 결단하여 악행을 버리고 실제로 선을 배우고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패륜과 악행 그리고 잘못된 영성도 용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악인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속죄의 은혜에 대한 신뢰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노력의 중요한 동기가 된다.
*이사야 묵상이 시작되면서 공교롭게도 ‘제사가 역겹다, 기도를 듣지 않겠다, 너희들이 지키는 절기가 지겹다’하시는 하나님의 노함 앞에 직면했다. 하필 한국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바닥으로 떨어진 시기다. 소름이 끼친다! 지금 나에게, 우리들에게, 한국교회에게 외치시는 절규처럼 들려진다. 그래서 몇 번이고 두드리던 자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아침에 몇 번이고 멈추고 멈추는 자판 앞에 오늘 이 날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억하고 새기기 위해 꾸역 꾸역 자판을 두드리고서야 묵상이 마무리되어 간다.
*지겹다!, 싫다!, 쓸모없다!, 역겹다!,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다!, 싫다!, 짐만 된다!, 지쳤다!, 보지 않겠다!, 듣지 않겠다!고 외치시는 하나님의 노한 음성이 나의 예배를 향해,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향해, 한국교회를 향해 쏟아진다.
*반면 그럼에도 한줄기 살아날 희망을 분명하게 보이신다. 짙고 짙은 어둠과 같은 상태이기에 가늘디 가는 한 줄기 빛이라도 강렬하다! 씻어라!, 버려라!, 그쳐라!, 배워라!, 찾아라!, 도우라!, 변호하라! 무엇보다 나와 논증해보자! 그리고 깨닫게 되어 기꺼이 순종해보라! 그러면 살아날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이 너무 너무 감사하다! 이미 말씀해 주신 말씀들을 하나씩 하나씩 논증해 가며 깨우치고 또 깨우치도록 도와주시므로, 하나님이 아니면 살아날 수 없구나! 기꺼이 깨달아 순종하면 살아날 수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지금 교회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청원도 해야 한다. 씻고, 버리고, 그치고, 배우고, 찾고, 돕고 변호하는 것도 물론 해야 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변론하는 것이다! 변론이 살아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이를 위해 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더 하나님의 뜻과 말씀들이 실제가 되도록 깨우쳐 져야 한다. 그러면 “기꺼이 순종” 할 수 있다. 그러면! 살아날 수 있다!
*말씀이 깨우쳐지도록 하나님과 씨름해야 한다는 거다! 지식담론을 논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나기 위해 하나님의 영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깨우쳐지기를 바라며 깨우쳐 주신대로 기꺼이 순종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서로 변론(논증)하자”고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 선명한 집중, 기꺼운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향방을 알지 못하고, 의미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꼭두각시처럼, 주문처럼 읊조리기만 하는 기도, 말씀구절이 아니라 영혼이 깨우쳐지고, 그 깨우쳐진 말씀에 “기꺼이 온 삶을 걸어” 순종함으로 하나님 살아계신 실제를 누리는 “참된 실제”, “참된 임마누엘”의 실제 은혜 말이다!
*이것이 살아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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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질문과 간단하나 긴 대답으로 이루어진 시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자의 삶은 어떤 삶인지를 질문한다. “머무를 자, 사는 자”라는 표현을 통해 예배자의 자세 뿐 아니라 일상에서의 자세를 포함하여 질문한다. 특이한 것은 질문을 하나님께 드렸는데, 마치 신앙고백처럼 자신이 대답하는 “자문자답”의 형식이라는 점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삶의 윤리를 잘 알고 이해하고 있으며 이것이 삶 속에서 조화롭게 일어나야 할 것을 알고 있는 질문과 답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것에 머물지 않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하는 것이 예배(제사)와 같은 특별한 시간에 이루어지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이라는 것을 스스로 대답하는 것이다.
더구나 매우 신앙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일상의 ‘윤리’라는 것에 더 주목이 된다. 종교적인 질문에 종교적인 대답, 예를 들어 주일 성수, 십일조 잘 하는 것, 예배 시간 잘 지키는 것, 예배는 이렇게 드리는 것 등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거다. “일상”에서 살아내야 할 것들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일상에서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그런 삶이 주는 유익은 무엇일까?
1. 어떻게 살아낼까?(2-5a절)
새번역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내야 할 삶을 이렇게 번역했다. 깨끗한 삶(정직), 정의(공의), 진실한 삶(2절), 혀를 놀려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친구에세 해를 끼치지 않는,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3절),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에 대한 경멸과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을 분별하여 행하는, 맹세를 꼭 지키는(4절), 고리대를 하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는(5a절) 사람….
예배당에서의 삶 뿐 아니라 일상에서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서 이미 가르쳐 주신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즉 삶의 예배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새번역_고전 10:3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은 성전(예배당)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정직하고 정의로우며 진실한 삶의 가치가 드러나야 한다.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고 해를 끼치지 않으며 모역하지 도 않는다. 한편으로 하나님을 업신 여기는 이들에 대하여 ‘거룩한 분노’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을 만나면 존경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맹세를 허투루 하지 않을 뿐더러 끝까지 지키는 신의도 있어야 한다. 나의 유익만을 위해 공동체가 허물어 지는 고리대와 같은 악덕 상술을 펼치지 않고, 정의로운 판결을 위해 뇌물도 받지 않는다.
어느 것 하나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 요청되는 것 아니겠나?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것이 곧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결코 “비난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의당 이래야 한다.
허나 실상은 한참 못미친다. 참 머시기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윗은 계속 노래했다. 하나님 백성은 이렇게 살겠노라고, 이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신대로 살아가겠노라고, 그 말씀 기억하며 살아내겠노라고 노래하고 또 노래한다.
그러니 인생은 이미 행하고 있는 것 뿐 아니라 아직 한참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것을 향해 포지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리라! 또 노래하고 또 노래하는 것이리라. 지금은 연약하여 이리 살지 못하나 반드시 이렇게 살아보겠노라고 노래하고 노래한다. 어쩌면 현실에서 이루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보다 노래로 부르는 것이 훨씬 많을 지라도…
노래라도 부르면서 잊지 않고 기억하여 추구하고 또 추구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나! 그래서 다윗의 노래는 결론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약속을 바라본다. 자꾸 실패하여도 이렇게 살아가는 법을 잊지 않겠노라고
2. 이런 삶은?(5b절)
“이러한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새번역_5절)” 완벽한 하나님 백성의 삶을 살지 못해도 노래하며 끊임없이 추구하고 또 추구하는 이러한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삶의 다양한 문제들 앞에 수많은 변수들이 위기를 가져와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고 노래하고 또 노래하기(투쟁하고 투쟁하기) 때문이다. 깨끗하지 못해도 깨끗하기 위해, 정의롭지 못해도 정의롭기 위해, 진실하지 못해도 진실하기 위해,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영혼을 향해 끊임없이 노래하며 환기시킨다. 실패해도 쉬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노래하며 붙잡는다. 이미 다 이룬 것도 아니지만 여러 변수들 속에서 묵묵히 다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내기 위해 이를 악문다. 쓰러진 몸과 마음을 자시 일으켜 세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삶은 흔들려고 무너지지 않는다.
나는?
-다윗은 하나님께 성전에 들어가도 되는지 묻는다(1절).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신앙에 회의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성전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의 집에 거하게 하신 은혜가 ‘황송’해서 ‘나 같은 사람이 이 거룩한 곳에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하고 묻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 오늘날 우리도 이렇게 가끔 고백한다. ‘주님, 저 같은 사람이 아버지 집에 있다니요. 그래도 되는 거지요?’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원하신다(2절). 주의 장막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다. 그곳에서 숱한 찬양과 기도, 헌금으로 드리는 예배보다 사랑과 자비의 삶을 원하신다(호 6:6).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이웃에게 공의롭고, 자신에게 진실한 삶이 진정한 예배다. 하나님은 정직과 공의와 진실에 없는 예배는 기뻐하지 않으신다. 나는 과연 매 주일, 정해진 예배 시간을 어떻게 드리고 있는가?
-말로 다른 사람을 습관적으로 아프게 하면서 주의 집에 거할 수 없다(3절). 입으로 하나님을 노래하고, 기도를 드려도, 그 입으로 그분이 사랑하는 이웃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업신여기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의 마음에 계신 하나님의 집을 황폐하게 만든다. 나는 말로 하나님의 집과 다른 성도의 삶을 세우고 있는가?
-돈의 사용에 불의하면 주의 집에 거할 수 없다. 지나치게 많은 이자를 받거나 부당한 뇌물을 받는 것은 그 자체로 잘못된 일이며,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친다(5절). 누군가의 삶을 마구 뒤흔들면서 내 삶은 전혀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여기면 그야말로 착각이다. 남을 흔들면 나 또한 흔들린다. 불의한 이익을 취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재물로 이웃의 생활을 돕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일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만한 거룩한 공간이 되는 일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서 그분과 교제할 만한 수준의 파트너를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건축물이 아니다. 그것은 인격이다. 사람의 전 존재다. 내가 변하지 않는 구원은 의미 없다. 특정 공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독점하지 않는다. 공간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영을 모신 자들이 거룩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심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들이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진리의 사람들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그 자격을 결정한다. 정직하고 공의를 실천하고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이웃을 비방하지 않고 악을 행하지 않고 망령된 자를 멸시하여 그들의 삶을 따르지 않을 때, 주님 전에 나아갈 수 있다. 이자를 받지 않고 꾸어주고, 뇌물을 받지 않아야 한다. 힘 있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를 존대하는 자가 합당하다.
-하나님의 전에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제와 인격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몸만 나오고 마음은 준비되지 못한 채, 주님께로 나아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어떻게 살아낼까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신뢰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구체적인 순종의 태도를 결정할 것이다.
-주의해야 한다. 앎의 만족감이 순종의 실제로 전진하는 것을 막을수도 있으며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앎”으로 삶의 다양한 문제가 문제거리가 되지 않고 가르침대로 순종하며 살아내게 하는 능력이 될 수도 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또 중요한 것은 다윗의 질문이다! “주의 장막과 성산에 누가 머무를까?, 어떻게 살까? ” 삶 속에서 늘 던져야 할 질문이다. “머무름과 삶”을 주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살기 위해 늘 질문과 대답을 주고 받은 다윗이다. 그만큼 삶 속에서 치열하게 투쟁할 뿐 아니라 자기 성찰이 함께 이루어 졌다는 의미다.
*하나님 안에 머물고 살아가기 위한 치열함과 자기성찰이 늘 노래하게 하였다. 가르쳐주신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노래하였다. 머무름과 삶을 돌아보기 위해 노래하였다. 하나님 백성답게,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노래하였다. 비록 실패와 실수가 있었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지 않는 그 노래는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안에서의 머무름과 삶을 살게 한다. 이것이 오늘도 계속 “노래”해야 할 이유일 것이다! 오늘도 실패해도 다시 “치열한 순종”을 해야 할 이유다!
*교회당 안에 갇힌 하나님이 아니라 내 삶 속에 함께 계신 하나님이시기에, 장막에 거할 자 누구냐? 성산에서 어떻게 살까?라고 노래하는(치열하게 순종하는) 자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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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3편과 거의 똑같다. 또, 1-3절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음을 논증하며 사용한 구절이다(롬 3:9, 10-12). 인간이 어떤 상태이고, 그들이 사는 세상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정직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이런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노래한다.
1. 어리석고 악하다(1, 3, 4, 6절)
어리석다의 사전적 의미는 “슬기롭지 못하고 둔하다”이다. 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들을 통칭한다. 다윗은 이들의 말과 행실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결국 “선을 행하지 않는다”로 결론을 짓는다(1절).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과 “좋은 행실”은 함께 간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은 ‘부패함’과 ‘가증한 행실’을 낳는다. 어리석다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무신론적 사고”와 악한 삶의 방식이 함께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악을 행하는 자가 “다” 무지한가?” 반문하시며,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는다”고 하신다(4절). 악을 그만큼 즐긴다는 의미다. 그러니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었다고 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노래한다(3절).
노아의 시대가 생각이 나고, 소돔과 고모라도 생각이 난다. 북이스라엘의 멸망때도, 남 유다의 멸망도 상기된다. 무엇보다 주님께서도 이 세대가 악하다고 하셨다. 그러니 본문의 시대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또한 어리석은 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계획을 “늘” 좌절 시킨다(6절). 이런 표현으로 본다면 어리석은 자는 지도자들, 힘있는 권력층, 부유한 자들을 지칭하는 듯하다. “내 백성을 먹어 치운다(4절)”라는 표현도 이를 뒷받침한다.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보호해야 하나, 오히려 좌절시킨다. 황폐함으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악함은 근절되지 않는다. 아. 안타까운 세상이여.
2. 그런데 하나님은?(2, 5, 6, 7절)
어리석은 자들을 “굽어 살피신다” 이유는 단 하나다. 그들 중에 그나마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보려 하시기 때문이다(2절). “굽어 살피신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없다며 철저하게 하나님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말과 악한 행실과 분명한 비교가 된다. 이 단어는 파수꾼이 성벽 위에서 멀리 바라보는 것이 아닌 머리를 내밀어 허리를 굽히고 성벽 아래까지도 자세하게 살피는 형상을 표현한 것이다. 그만큼 자세하게 찾으신다. 혹시 한 명이라도 찾을까 포기하지 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나타낸다. 그런데 하나도 없다. 다 치우쳐서 악을 행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서 ‘자기를 찾는 자’를 찾으신다.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 그만큼 하나님이 없다고 소리치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고발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의인의 편에 계심을 분명하게 노래한다. 어리석은 자들이 두려워 하고 두려워 할 정도로 분명하게 하나님의 존재감을 의인의 삶을 통해 드러내신다(5절). 어떤 상황에서 드러내실까? 이어지는 6절은 어리석은 자들이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부리는 횡포와 억압, 폭력의 자리에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증언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 힘과 계획으로 “가난한 자들”의 삶을 부끄럽게(조소하고 조롱) 하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심을 분명하게 보이신다.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인생들은 철저하게 부패하고 가증한 행실을 여지 없이 드러낸다. 어쩌면 이리도 정확할까! 유독 기독교를 향하여 안티를 외치는 자들의 삶의 면면이 예나 지금이나 추하고 부패하며 가증스러운 것을 감출 수가 없다.
-인간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생각은 부패하고 행실은 악해진다(1, 4, 5절).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회의 대표적인 사상과 문화현상들이 무엇일까? 무신론자들처럼 드러내놓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아닌지 심각하게 돌아볼 일이다.
-하늘에서 모든 인생을 굽어보시며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땅을 살피시는 하나님이시다(2~3절). 혹시라도 누군가 깨달아 하나님을 찾을까 기대하시며 인생들을 살피시지만, 하나같이 말씀을 등지고 사는 결과만을 목격하셨다. 하나님을 찾는 자란 단지 외형적,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깨달은 만큼 말씀을 살아내려는 자를 말한다. 오늘도 주님은 간절히 말씀을 사모하는 자를 찾고 계신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와 우리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 혹시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찾고 있지는 않는가?
-어리석은 사람들이 떡 먹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삼키고 괴롭혀도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승리하고 구원의 기쁨을 누린다(4, 7절). 그러므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조롱과 억압에 지나치게 신경쓰거나 두려워하지 말자. 세상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부럽게 만드신다. 십자가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우리응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두들러지게 드러난 사회지표가 하나 있다. 바로 AIDS의 급증이다. 전 세계적으로 감소 추세인 이 병이 유독 우리의 조국에서, 특히 남성들에게서, 유독 청소년층에서 급증했다. 원인은 분명한데, 성소수자 보호라는 미명하에 이 추악한 진실을 애써 덮었다!. 이미 질병관리본부에서는 무분별한 동성애, 특히 남성 동성애의 부분별한 생활이 원인일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언론은 이를 성소수자 보도준칙에 따라 밝히지 않고 알리지 않았다. 정치가들은 유독 “성소수자”, 혹은 ‘인권’이라는 헤게모니를 이용해 사회가 부패하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자신들의 목적만 취하고 있는 실정이다. 로마제국의 멸망은 동성애와 같은 무분별한 성문화의 타락이 가져온 “저출산”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이미 역사적 교훈으로 분석되었다.
-이렇게 치우치고 다 치우신 어리석은 자들의 추악한 행실들을 하나씩 드러내신다. 사회적 신뢰도 추락과 투명해진 사회의 영향으로 인해 우리의 감추어졌고 무지하였던 추악함들이 하나씩 그 진실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들이 “두려워 하고 두려워 하는”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5절).
-진정으로 어리석은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거부하고 창조주의 죽음을 말하고 그분의 역사 개입을 부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모든 증거들에 눈감는 일이요, 논리의 숨통을 끊어놓는 일이며 지적 자살을 감행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들의 부패하고 자기 파괴적인 삶이 그들 말의 허위를 증명한다.
-기이하게도 하나님을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지혜로운 자보다 많다. 조금 많은 것이 아니라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를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들이 소수의 남은 자 하나님의 백성들을 떡 먹듯이 먹는다.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고난이다. 고난과 불편함이 없는 삶은 이 세상 문화에 동화된 삶일 수 있다.
-한편으로 가장 감동이 되는 말씀은 이토록 추악하고 부패한 자들을 향해 “굽어 살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거다(2~3절).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는 가만히 계셔도 다 아신다. 그런데 다윗은 분명히 노래하며 강조한다.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어버린 그들에게서 결코 시선을 떼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이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는” 그들에게서 선함을 찾으시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말이다.
-더 나아가 그들 가운데서 선한 행실로 살아가는 의인을 “돋보이게(드러나게)” 하셔서 악행을 일삼는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하나님이시다(6절). 악행을 일상으로 저지르며(떡 먹듯이_4절)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폭압하는 그들이 의인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하셔서 “두렵고 두려워” 하게 하시는 분이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들이 아무리 하나님이 없다고 떠들고,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 하여도 그들이 조소하고 조롱하며 폭력으로 억압하는 “가난한 자들”, “의인”들의 삶 속에 함께 계심을 “드러내시며 그들을 두렵게 하신다. “가난한 자”들과 “의인”들의 “피난처”이심을 분명하게 보이시고, 그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모습을 증거하셔서 어리석은 자들의 오만함을 꺾으신다.
-그러니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얼마나 중요한 사명이겠는가! 그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소소하게 드러내는 그 담대함이 하나님이 없다며 오만하게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들을 향해 얼마나 중요한 사명인지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피난처가 되신다(6절).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의인들의 계획을 사사건건 방해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주님은 피할 길을 내어주시고 결국 기쁨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지금 내가 어떤 어려움과 방해에 처해 있든지 피난처이신 하나님께 나아가리라.
-이러석은 사람들이 떡 먹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삼키고 괴롭혀도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승리하고 구원의 기쁨을 누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조롱과 억압에 지나치게 신경쓰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어리석은 자의 ‘하나님이 없다’는 무지한 생각과 말에서 나오는 부패하고 썩은 악한 행실과 비교하여 선을 행하는 그리스도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기에, 생각과 말에서 “예수님처럼” 추구해야 한다. 그렇기에, 행실에서 “더 예수님처럼”이 드러나야 한다.
-그러므로 이 사회의 오만함과 추악함, 썩고 냄새나는 죄악의 단상들이 드러날 때, 온갖 정죄와 판단, 심판자로서의 언행보다, 죄인들의 친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진면목을 행실로써 드러내야 한다. 지금 이 시대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도무지 한계가 없는 그 크신 사랑을 분명히 알려야 할 시대임에 틀림없다면, 지식으로서 알림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어 체감하게 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삶을 살아내야 한다.
-어느 시대든지 몸을 던져 사회와 이웃을 섬겼던 교회 공동체들의 역사가 던지는 “사랑과 희생, 나눔과 헌신”의 유산을 지금 교회가 “더” 고스란히 이어가야 하지 않겠나! 모두가 다 악에 치우쳐 사는 그 속에서 나를 찾아 내신 하나님의 “굽어 살피신”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 내가 이 세상을 항해 “굽어 살펴” 살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의당 그래야 한다. 한 영혼이라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어느 때까지’가 5회나 반복된다(새번역/개역개정은 4회). 그만큼 다윗은 고통스럽다. 아프다. 어떤 고통인지, 무슨 고난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문제는 그것이 “오래 되었다”는 것이다.
오래 지속되는 고통, 아픔이 인생에서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누구나 직면할 수 있다. 문제는 지속된 고통, 고난에서 오는 상처난 마음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느냐다. 과연 상처가 오래되어 깊은 상흔이 남은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 다윗의 노래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1. 하나님께 아룀(1-4절)
다윗은 아픔을 하나님께 호소했다. 특히 아픔에 대한 상황 설명보다 아픔으로 인한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주로 고백한다. ‘어느 때까지(언제 까지)’, ‘나를 잊으시나이까?’, ‘얼굴을 숨기십니까?’, ‘번민, 근심을 언제까지’, ‘원수를 언제까지 봐야 하나요?’…(1-2절)
이 모든 고백을 자세하게 하나님께 아뢴다. 자신의 고통을 건강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이게 참 중요하다. 아픔과 고통이 없는 인생이 없기에 불현듯, 혹은 오래도록 지속되는 고통을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중요한데, 다윗은 이 처리를 하나님께 맡긴다.
자기 혼자 꾹꾹 눌러 마음에 담고 있다 정신이 파탄날 수도 있겠고, 혹은 주위 사람들에게 쏟아부어 기피 대상이 되기 쉬운데, 다윗은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또 혼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 감정들을 해결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의도치 않게 ‘염세적’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고, 주위의 사람들이나 세상은 필요치 않고 오히려 방해만 된다고 느끼게 되면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토로하는 다윗의 모습이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된다. 아픔과 고통을 해소하는 측면이나, 이렇게 아뢴 이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 기대하게 되는 믿음의 측면이나,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가 지속됨으로 삶 속에 선명한 하나님의 임재의 흔적이 남게 된다. 고통이 하나님의 임재의 흔적이 된다. 이 흔적이 선명할 수록 다가오는 또 다른 고통의 문제가 더 이상 근심거리가 되지 않는다. 이미 한번 가본 길, 더욱 자신감(?) 있게 믿음의 걸음 내딛을 수 있다. 하나님 신뢰의 언행이 쉽게 고백되고 행동된다. 다윗이 그렇지 않았던가!
2. 고통(절망)보다 더 중요한 것(3-4절)
‘나를 생각해 주십시오.’ ‘나의 눈을 밝혀 주십시오.’ 왜냐하면,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렵고, 원수가 자신만만하여 득세할 때, “내가 흔들릴까” 두렵습니다. 고통이 하나님을 가리울까, 원수(악인)들의 오만한 득세에 자신의 신앙이 흔들릴까 두려워 한다. 문제 해결보다 문제로 인해 자신이 오염될까 두려워 하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과 삶이 오염될까 두려워 한다.
고통과 절망이 두렵기 보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할까…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흔들릴까 두려워 했다. 나의 흔들림으로 인해 원수들이 ‘그럴줄 알았다’며 비웃을까 두려운 것이다.
3. 그러니…(5-6절)
다윗은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그 때에, 나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너그럽게 대하여 주셔서, 내가 주님께 찬송을 드리겠습니다(새번역_5-6절).”
부럽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리도 튼튼하다. 이리도 깊다! ‘한결같은 사랑’, ‘주의 구원의 기쁨’, ‘너그러우신 주님’… 긴 고통(절망) 속에서도 오히려 단단해져 가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고백한다. 절망중에 오히려 주님께 더 아뢰며 나감으로 새겨진 믿음이 또 다른 절망을 만날 때 빛을 발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이런 것 아닐까? 당장 떡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당장 문제 해결의 카드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신뢰”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분명한 키가 된다. 오랜 절망과 고통이 때로 불평과 원망, 탄식의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오히려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와 보호하심의 증거가 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다윗처럼 고통(절망)중에서도 찬송할 수 밖에 없다! “주께서 내게 베푸신 은덕”으로 인해 “찬송” 할수 밖에 없다!(6절)
나는?
-다윗은 영원히 고통이 지속될 것 같은 두려움과 절망 앞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한다. 언제까지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는 것을 보고 있어야 하는지 괴로워하며 ‘어느 때까지’를 네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원수 때문에 당하는 고통의 무게가 큼을 보여주는 반응이다(1~2절). 어려움은 계속되는데,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 않을 때 나도 똑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고비에서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주의 사랑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을 놓치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침묵으로 다윗이 번민과 근심에 휩싸인 것이다. 하나님의 침묵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포기인지, 하나님의 부재인지, 하나님의 무능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부르짖음은 그가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믿었다는 증거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구원을 호소하며 공의로운 심판을 요청한다. 다윗은 이런 모습이 하나님이 성품에 어울리는 하나님의 의무임을 알지만, 다만 그 때가 언제인지 인간은 모를 뿐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때를 앞당겨서 자신의 고통을 감소시켜달라는 요구뿐이다.
-깊은 절망에 빠진 다윗은 하나님은 붙들었다. 극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 내 하나님’이라는 밧줄을 굳게 붙잡으면 결코 사망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3~4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물음에 응답하실 것을 믿었다. 또한 단지 ‘살려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내 눈을 밝혀달라’고 요구한다. 죽고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아는 소망에 눈을 뜨기를 바라는 것이다.
-원수가 내리치는 상황에서도 다윗의 마음은 주님의 구원을 기뻐한다. ‘내 눈을 밝혀달라’는 소망과 ‘사망의 잠을 자는’ 두려움이 교차하는 가운데서도 다윗은 끝까지 백성을 돌보시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에 의존한다(5~6절). 다윗에게는 결코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 삶이 힘들고 어려운가? 여전히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긴 어둠의 터널을 건너는 것 같은가? 하나님이 우리를 이 어려움의 상태로 두신 것은 그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너무나도 고집 센 나를 한 발자국 더 하나님께 가까이 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이며 전략이다. 고통의 짐을 가지고 하나님께 더 한 발자국 가까이 나아가야 하리라.
-지금 생각해 보니 어차피 삶은 어려웠다. 가난한 어린 시절은 말할 나위 없고, 목사의 길을 걸으면 어느 순간 문제가 없는 날이 없었다. 고통투성이었다. 그런데 고통 투성이였던 그 길이 지금 뒤돌아 보면 고통의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 기막힌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만 보인다.
-그래서 힘든 기억보다 감격스러운 기억이 더 많다. 이것이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덕”이 아니고 무엇일까! 인생의 가장 힘들었을 때가 가장 깊은 은혜의 때였다!
-특히 오늘 말씀 중에서 더욱 깊이 마음에 각인이 되는 말씀이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이다. 새번역은 “나를 굽어살펴 주십시오. 나에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로 번역했다. 여전히 나는 하나님의 굽어 살펴주심이 필요하고, 기도드린 것에 응답을 기다리며, 죽음의 길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맞다! 내 눈을 밝혀 주셔야 고통을 고통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 사랑으로 볼 수 있다. 악인들의 도발에 거룩한 분노를 행할 수 있고 세상의 고통에 참담한 긍휼의 동의를 할 수 있다. 나에게로 집중된 눈을 밝히 뜨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하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 그들의 고통에 마음으로 반응할 수 있다.
-“내 눈을 밝게”해 주셔야 제대로 보고 느끼며 확신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내 눈이 밝아져야” 하나님이 모든 순간에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안계신 곳이 없는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있다. 성경안의 기적의 현장에만 계시지 않고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심을 볼 수 있다. 부르짖는 나의 소리를 가장 먼저 들으신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나의 눈을 밝히소서” 주님…
*점점 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난감해지는 사회 속에 우리가 산다. 이런 때 일수록 나의 눈을 밝혀 주심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뜻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시기여야 겠다. 휩쓸리는 여론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밝히 보아야” 겠다. 주님… “나의 눈을 밝히소서!”
*다윗이 오랜 고통중에서 구한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었다. “나의 눈을 밝혀 주소서”였다. 지금 당장 문제가 해결되어 잠시 마음의 감동을 누리는 것도 은혜이지만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오히려 손해다. 고통의 시간에 고통만 보는 것은 더 고통이다. 그러나 고통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밝히” 볼 수만 있다면, 더 이상 고통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 고통중에 베푸시는 “은덕”이 보일 것이다.
*고틍의 삶이 고통으로만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채워지는 순간이 “눈을 밝히 떠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다. 오늘도 “내 눈을 밝게 떠 주시는 은혜”가 주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님과 깊은 교제의 하루가 되게 하실 것을 믿고 바라고 바란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다윗은 악인들의 언어를 통한 폭행에서 경건한 자들을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하며, 흠 없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 말씀과 약속을 확신한다. 다윗은 사람들 중에 의인이 점점 없어지고 악인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음을 한탄하면서, 하나님께 특히 악인들의 입으로 행하는 죄를 심판하시고 악인의 악행으로 탄식하는 경건한 무리들을 구원해주시기를 탄원한다. 또한 죄짓는 말과 고통의 신음소리와 대조하여 고결하고 정제된 하나님 말씀과 그의 약속을 되새기며 찬양한다.
본 시편은 전반적으로 다윗의 절박한 부르짖음이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사라지고 있음을(1절), 반면 비열함이 인생중에 높임을 받고, 악인들은 곳곳에서 날뛰고 있음을 호소한다(8절).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경건한” 성도가 사라지고 있다. 더하여 “확고한” 믿음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내는 삶이 사라지고 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1. 거짓과 아첨, 두 마음(2-4절)
다윗은 사람들이 서로 거짓말을 하고,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한다고(2절) 증거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혀는 우리의 힘, 입술은 우리의 재산(보습),누가 우리를 이기겠는가!(4절)”이라고 말한다. 철저한 “자기확신”이다. “거짓말로 충분히 살 수 있어… 아첨하며 속여서 얼마든지 살 수 있지…”라며 서슴치 않고 일말의 주저함 없이 거짓과 아첨의 말을 쏟아낸다.
‘이웃에게(서로 서로_2절)’ 거짓과 아첨을 쏟아낸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혀와 입술의 능력을 자신한다. 자신들의 “두 마음”에서 나오는 거짓과 아첨의 힘을 누가 제어할 수 있겠냐며 “거짓말과 아첨”의 능력으로 살아가려 한다.
다윗의 탄식은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한 이런 “거짓과 어첨”이 이미 난무하여 “서로에게” 악영향을 끼치며, 점점 “경건하고 충실한” 자들이 사라지고 있음을 탄식하는 것이다.
2. 하지만 하나님은(5-7절)
그들의 거짓과 아첨으로 “눌림과 탄식”하는 가련하고 궁핌한 자들을 위해 “일어나신다!” 그리고 “안전한 지대”로 옮기신다(5절). 그리고 “지켜시고… 보존하신다(7절).”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은 순결하기가 도가니에게 일곱 번 걸러 낸 ‘순은’같기 때문이다. 즉 악인들의 난무하는 가치없는 거짓말과 겉만 번드르한 아첨의 말, 두 마음을 품은 자들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게 순결함을 고백하는 것이다. 일봅 번이나 정련한 은처럼 흠 없고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가 베푸시는 구원을 확신하는 것이다.
거짓과 아첨, 두 마음의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그의 순전한 말씀앞에서의 삶을 비웃고 멸시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완전하고 순결한 말씀의 약속을 신뢰할 때, “일어나.. 안전 지대에 두시고…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거짓과 아첨, 두 마음의 악인들 가운데서)… 보존(구원) 하신다! 영원토록!…”
나는?
-악인들은 두 마음으로 아첨과 거짓을 말한다. 하지만 다윗은 오직 한 마음으로 여호와께 도움을 구한다. 이에 하나님은 도가니에서 일곱 번 단련한 은 같이 말씀에 기대어 사는 한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영원히 보존하는 은혜를 베푸신다.
-다윗은 거짓과 아첨을 말하는 자들로 인해 경건한 자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현실 앞에서 주님께 도와달라고 호소한다(1~4절).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 말씀을 붙들지 않으면 악인들의 불순한 말과 감언이설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내게 가장 영향을 끼치는 말은 누구의 말일까? 그 악한 유혹의 말에 내 귀와 마음을 여미어야 하겠다. 또한 내 입에서는 어떤 말들이 나올까? 선한 말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선한 입술이기를 늘 추구하리라.
-하나님은 고난받는 의인들의 신음을 저버리지 않으신다. 안전한 피난처로 인도하신다. 고통 가운데서도 한결같이 하나님께 기댄 자들에게 견고한 성을 세우시고 문을 열어 안전지대로 초청하신다(5절). 힘들고 지치더라도 하나님께서 안전지대를 준비하신다면 지금 당하는 고통의 무게를 충분히 견딜 수 있다. 반드시 안전한 처소로 인도하실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오늘도 고난의 현장에서 끝까지 인내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불순물이 섞여 있지 않은 순수한 은과 같다(6절). 악의 입술은 조급하게 말을 뱉음으로 거짓과 아첨을 내지만(2절), 말씀은 찌꺼기를 일곱 번 걸러낸 후에 토해내는 정제된 것이기에 순결한 삶으로 이글어간다. 조급하게 하루를 시작하기보다 순결한 말씀 앞에서 삶의 불순물을 가려내고 자신을 먼저 정제해야 한다.
-의인이 고난받는 가운데 비열한 자들이 창궐한다(8절). 의인은 말씀의 도가니에 들어가 일곱 번 걸러내는 인내의 시간을 거치는 동안 악한 자들은 곳곳에서 더러운 일들을 성취하게 위해서 거리를 거침없이 활개치고 다닌다. 위리가 사는 세상은 진리의 말씀이 조금만 흐려져도 금방 악으로 뒤덮인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결코 악에 제압당하지 않는 견고한 진리의 말씀지기로 세워져야 할 것이다.
-말은 그냥 말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의 무기다. 대적은 거짓의 말, 아첨의 말,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부정하는 말,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돌봄의 성품을 왜곡하는 말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떼어놓으려 한다. 하나님의 백성 자격이 없는 것으로 만든다. 다수가 그 말에 동조하고 경건하고 충실한 삶에서 떠나간다. 그것이 세상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정한 기준이고 권능이시다. 세상은 그분의 말을 무력화시키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말의 힘에 의해 억압받는 이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시고, 그 말씀대로 실현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만이 믿을 만하고, 또 모두 무릎을 그 앞에 꿇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실 것이다. 그 말은 일곱 번 단련한 은처럼 순전하고 진실하며, 반드시 역사가 되고 사건이 되게 하실 만큼 능력이 있다. 악인은 끊으시겠지만, 그를 의지하는 자는 영원히 보존하실 수 있다.
-묵상하는 중에 자신의 목적을 위해 너무나 쉽게 “거짓말”을 만들어 내어 사람들을 억누르고, 거짓 세력을 만드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의 거짓으로 인해 사회가 혼란해지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주저함 없다. 악인들이다.
-또 아첨하는 말로 번지르하고 간사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 고통을 주는 사람들도 악인들임에 틀림없다. 비록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지만 “말”로 이웃의 삶을 어지럽히고 파괴하는 사람들이다. 거짓이 진실로 포장되어 정의와 공의를 묵살시켜 버리는 행태들이 ‘난무”하고 있다. 참으로 답답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모습이 다윗의 시대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난무”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하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을 ‘길이 참고’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인내다. 이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 인것을 아시기에 그 가운데서 “끈질기게” 경건한 자”, “충실한 자”를 기필코 “보존(구원)”하시는 하나님이 대단하시다.
*한편으로… 이런 거짓말과 아첨, 두 마음에서 나오는 말들이 사회에서만 난무할까? 교회 공동체는 어떨까? 사회의 거짓 뉴스에 선동되어 정의과 공의를 지키고 단단히 중심을 지켜야 할 교회공동체가 오히려 선동의 자리에 앞장서는 모습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한편에서는 진리 편에서 투쟁한다고 하고 한편에서는 이런 모습이 안타까워 다윗처럼 하나님께 울부짖는데…. 아… 고통스럽고 안타깝다!
*거짓과 번지르한 아첨(속임)의 말은 분명한 유통기한이 있다. 이 기한이 다 차면 이 거짓에 기반을 두었던 삶은 반드시 무너진다. 스스로 자기들의 말에 확신을 갖고 자신들의 거짓과 아첨의 말로 충분히 이긴다며 떠드는 그들은 처참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오늘 나의 삶이 거짓말과 아첨, 두 마음을 철저하게 경계하며 살아내야 할 이유다!
*말은 그냥 말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의 도구다. 하나님이 역사 개입을 부정하는 말,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돌봄의 성품을 왜곡하는 말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떼어놓으려 한다. 하나님의 백성 자격이 없는 것으로 만든다. 다수가 그 말에 동조하고 경건하고 충실한 삶에서 떠나간다. 그것이 세상이다.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신뢰하는 믿음으로 거짓말과의 싸움을 이겨내야 한다.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순전하기 그지 없는 말씀으로 힘으로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내는 존재다. 자기를 위해 자기 입술의 거짓과 아첨, 두 마음을 품고 얼마든지 살아낼 수 있다는 세상의 소리에 흔들려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순전한 백성들을 찾아 “일어나시고.. 안전 지대로 두시고…지키시며…거짓의 세상으로 부터… 보존(구원)하신다!” 하나님의 일어나심이 나를 위한 일어섬이기를….하나님의 지켜 주심이 나를 위한 지켜주심이기를…. 간절히 확신한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정한 기준이고 권능이시다. 세상은 그분의 말을 무려화시키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말의 힘에 의해 억압받는 이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시고, 그 말씀대로 실현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만이 믿을 만하고, 또 모두 무릎을 그 앞에 꿇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실 것이다. 그 말은 일곱 번 단련한 은처럼 순전하고 진실하며, 반드시 역사가 되고 사건이 되게 하실 만큼 능력이 있다. 악인은 끊으시겠지만, 그를 의지하는 자는 영원히 보존하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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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19일 주보
♥평안과 기쁨 – 본격적인 휴가철을 앞두고 있지요? 분주한 삶에 쉼을 주는 귀한 시간이니 가족들과 마음껏 누리고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2026년 7월 12일 주보
♥여름행사 – 7월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음세대를 소중히 책임지는 교육부서 여름행사 일정을 참고하셔서 기도와 후원으로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시지요? 우리

2026년 7월 5일 주보
♥여름행사 – 7월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음세대를 소중히 책임지는 교육부서 여름행사 일정을 참고하셔서 기도와 후원으로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시지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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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우리가 붙들고 있는 믿음은
막연한 희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승리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이 됩니다.
세상은 우리의 수고를 잊을지라도
주님 안에서 드리는 삶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이번 주일,
고린도전서 15:50-58 말씀을 통해
부활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과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무엇인지 함께 묵상합니다.
“부활 신앙,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믿음 안에 굳게 서서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살아계신 주(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고린도전서
#부활신앙
#결코헛되지않습니다
#부활의소망
#살아계신주
#예수그리스도
#주일말씀
#말씀묵상
#신앙생활
#SundayService
#FirstCorinthians
#ResurrectionHope
[주일 예배 안내]
우리가 붙들고 있는 믿음은
막연한 희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승리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이 됩니다.
세상은 우리의 수고를 잊을지라도
주님 안에서 드리는 삶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이번 주일,
고린도전서 15:50-58 말씀을 통해
부활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과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무엇인지 함께 묵상합니다.
“부활 신앙,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믿음 안에 굳게 서서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살아계신 주(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이번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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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더원공동체 수련회 START!
BUILD UP 🧱✨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가시는 주님.
에베소서 2장 20-22절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삼아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은 수련회의 첫 시작,
개회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마음을 올려드립니다. 🙏
말씀 : 김지훈 목사
이번 수련회가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을 세우고,
공동체를 더욱 견고하게 세워가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함께 기도해주세요! 🤍
더온누리교회 더원공동체
#더온누리교회 #더원공동체 #대학부 #수련회
#빌드업 에베소서 예배 공동체
전주 청년사역 🏕️✨
📌 유튜브 태그
더온누리교회, 더원공동체, 대학부, 수련회, 빌드업, 에베소서, 예배, 공동체, 전주교회, 청년사역
🏕️ 2026 더원공동체 수련회 START!
BUILD UP 🧱✨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가시는 주님.
에베소서 2장 20-22절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삼아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은 수련회의 첫 시작,
개회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마음을 올려드립니다. 🙏
말씀 : 김지훈 목사
이번 수련회가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을 세우고,
공동체를 더욱 견고하게 세워가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함께 기도해주세요! 🤍
더온누리교회 더원공동체
#더온누리교회 #더원공동체 #대학부 #수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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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우리는 종종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때때로
내 권리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을 선택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누릴 수 있었던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일,
고린도전서 9:1-23 말씀을 통해
내 권리보다 복음을 앞세우는 삶이 무엇인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제자의 길을 함께 묵상합니다.
“권리보다 복음이 먼저!”
내 만족보다 하나님의 뜻을,
내 자유보다 복음의 유익을 선택하는
믿음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주님 말씀하시면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고린도전서
#권리보다복음이먼저
#복음의능력
#제자의삶
#사도바울
#주님말씀하시면
#말씀묵상
#하나님나라
#신앙생활
#SundayService
#FirstCorinthians
#GospelFirst
[주일 예배 안내]
우리는 종종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때때로
내 권리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을 선택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누릴 수 있었던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일,
고린도전서 9:1-23 말씀을 통해
내 권리보다 복음을 앞세우는 삶이 무엇인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제자의 길을 함께 묵상합니다.
“권리보다 복음이 먼저!”
내 만족보다 하나님의 뜻을,
내 자유보다 복음의 유익을 선택하는
믿음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주님 말씀하시면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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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
#신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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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pel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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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신앙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앞에
나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말씀보다
경험을 앞세우고,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언제나 말씀 위에 세워집니다.
이번 주일,
고린도전서 4:6-21 말씀을 통해
말씀의 경계를 넘어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겸손히 말씀 앞에 서는
참된 제자의 삶을 함께 묵상합니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내 생각보다 말씀을,
내 주장보다 복음을,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신뢰하는 믿음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말씀 앞에서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고린도전서
#말씀밖으로넘어가지말라
#말씀앞에서
#말씀묵상
#성경적삶
#복음의능력
#제자도
#하나님의말씀
#신앙생활
#SundayService
#FirstCorinthians
#BibleStudy
[주일 예배 안내]
신앙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앞에
나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말씀보다
경험을 앞세우고,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언제나 말씀 위에 세워집니다.
이번 주일,
고린도전서 4:6-21 말씀을 통해
말씀의 경계를 넘어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겸손히 말씀 앞에 서는
참된 제자의 삶을 함께 묵상합니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내 생각보다 말씀을,
내 주장보다 복음을,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신뢰하는 믿음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말씀 앞에서
이번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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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Sunday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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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하합니다! 🏅
지난 5월 30일,
호남권 어와나 교회들이 함께 모여
어와나 올림픽을 개최했습니다 🙌
말씀 안에서 함께 배우고,
함께 뛰며,
믿음의 우정을 쌓아가는 특별한 시간 ✨
더온누리교회 어린이들도 멋진 열정과 도전으로 참여하여
🥇 TNT팀 금메달 1개
🥈 TNT팀 은메달 1개
🥉 TNT팀 동메달 1개
그리고
🥉 Sparks팀 동메달 2개를 획득했습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
어와나는 어린이들이 말씀을 배우고 암송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훈련 공동체입니다 📖❤️
메달의 색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성장하고 함께 기뻐하는 믿음의 걸음입니다.
열심히 준비하고 참여한 모든 어린이들과
섬겨주신 교사, 부모님들께 감사드립니다 🙏
앞으로도 말씀 안에서 더욱 자라가는
더온누리교회 어와나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
#더온누리교회 #어와나 #어와나올림픽 #전주교회
#전주 #TNT #Sparks #다음세대
#말씀암송 #제자훈련 🏅✨
🏅 축하합니다! 🏅
지난 5월 30일,
호남권 어와나 교회들이 함께 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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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안에서 성장하고 함께 기뻐하는 믿음의 걸음입니다.
열심히 준비하고 참여한 모든 어린이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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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말씀 안에서 더욱 자라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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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삶이 여전히 애굽 같고,
현실이 여전히 광야 같아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은 멈추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장에서
요셉은 자신의 성공이나 업적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를 붙들었습니다.
아직 출애굽은 시작되지 않았고,
약속의 땅도 보이지 않았지만
요셉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50:15-26 말씀을 통해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언약을 더 신뢰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함께 묵상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돌보시리니”
세상에 익숙해지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순례자의 믿음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여기에 모인 우리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창세기
#하나님이반드시돌보시리니
#요셉
#하나님의언약
#약속의땅
#하나님나라
#믿음의여정
#여기에모인우리
#말씀묵상
#신앙생활
#SundayService
#Genesis
#GodWillSurelyTakeCareOfYou
[주일 예배 안내]
삶이 여전히 애굽 같고,
현실이 여전히 광야 같아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은 멈추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장에서
요셉은 자신의 성공이나 업적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를 붙들었습니다.
아직 출애굽은 시작되지 않았고,
약속의 땅도 보이지 않았지만
요셉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50:15-26 말씀을 통해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언약을 더 신뢰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함께 묵상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돌보시리니”
세상에 익숙해지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순례자의 믿음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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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가득했고
행복이 넘쳤던 하루
마음껏 뛰어놀고
함께 웃으며
사랑을 나누었던 그날의 모습을 전합니다 ✨
아이들의 웃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했던 시간 🫶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홀리빛키
#어린이축제 #다음세대 #은혜 #교회행사
#플리마켓 #키즈페스티벌 😆✨
홀리빛키! 😆✨
우연이 아닌 은혜 🙌
아이들을 위한 축제
더온누리 홀리빛키가
많은 성도님들의 기도와 후원 가운데
은혜롭게 마무리되었습니다 🤍
웃음이 가득했고
행복이 넘쳤던 하루
마음껏 뛰어놀고
함께 웃으며
사랑을 나누었던 그날의 모습을 전합니다 ✨
아이들의 웃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했던 시간 🫶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홀리빛키
#어린이축제 #다음세대 #은혜 #교회행사
#플리마켓 #키즈페스티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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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풍요의 중심이 아니라,
구별된 자리.
눈에 띄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 머무는 곳.
이번 주일,
창세기 46:28~47:12 말씀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정을
고센으로 이끄셨는지 함께 묵상합니다.
“왜 고센이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가장 안전하고,
가장 은혜로운 자리로
우리를 이끄고 계십니다.
적용찬양 : 은혜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고센땅
#하나님의인도하심
#은혜
#주일말씀
#신앙묵상
#Jesus
#SundayService
#Genesis
#Grace
#FaithJourney
[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풍요의 중심이 아니라,
구별된 자리.
눈에 띄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 머무는 곳.
이번 주일,
창세기 46:28~47:12 말씀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정을
고센으로 이끄셨는지 함께 묵상합니다.
“왜 고센이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가장 안전하고,
가장 은혜로운 자리로
우리를 이끄고 계십니다.
적용찬양 : 은혜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고센땅
#하나님의인도하심
#은혜
#주일말씀
#신앙묵상
#Jesus
#SundayService
#Genesis
#Grace
#Faith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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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더 깊은 선교학교]
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삶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듯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세상을 향해
복을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
2026 더깊은 선교학교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배우고
선교의 비전을 함께 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
📖 2026 더깊은 선교학교
🗓 06.20 - 07.25 매주 토요일 (6주간)
📍 굿윌센터 2F
🎤 이효재 목사
🎤 주누가 선교사
🎤 김종홍 목사
✈ 단기선교
8월 1일(토) - 8월 4일(화), 일본
🎓 수료식
8월 23일(주일) 2부 예배
—
하나님이 찾으시는
복의 통로로 함께 세워지길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THE MISSION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더깊은선교학교
#선교 #더미션 #복의통로 #단기선교
#일본선교 #mission 🙏✨
[2026 더 깊은 선교학교]
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삶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듯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세상을 향해
복을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
2026 더깊은 선교학교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배우고
선교의 비전을 함께 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
📖 2026 더깊은 선교학교
🗓 06.20 - 07.25 매주 토요일 (6주간)
📍 굿윌센터 2F
🎤 이효재 목사
🎤 주누가 선교사
🎤 김종홍 목사
✈ 단기선교
8월 1일(토) - 8월 4일(화), 일본
🎓 수료식
8월 23일(주일) 2부 예배
—
하나님이 찾으시는
복의 통로로 함께 세워지길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THE MISSION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더깊은선교학교
#선교 #더미션 #복의통로 #단기선교
#일본선교 #mis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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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
목자의 힘 🙏
사람을 세우는 힘은
화려함이 아니라
진심에서 시작됩니다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며
다시 붙드는
목장의 본질
주님이 맡기신 영혼을 위해
오늘도 걸어갑니다 🤍
—
더온누리교회
2026 목자수련회
“진정성, 목자의 힘, 목장의 본질”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목자수련회
#목장 #목자의삶 #공동체 #진정성
#리더십 #기도 🙏✨
진정성,
목자의 힘 🙏
사람을 세우는 힘은
화려함이 아니라
진심에서 시작됩니다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며
다시 붙드는
목장의 본질
주님이 맡기신 영혼을 위해
오늘도 걸어갑니다 🤍
—
더온누리교회
2026 목자수련회
“진정성, 목자의 힘, 목장의 본질”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목자수련회
#목장 #목자의삶 #공동체 #진정성
#리더십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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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낮아진 자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억울함과 외로움,
그리고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도
믿음은 시선을 다시 하늘로 향하게 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9:1-10 말씀을 통해
바닥 같은 인생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묵상합니다.
“바닥에서 하늘을 보다”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길을 여십니다.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요셉의믿음
#하나님을바라보다
#믿음의시선
#주일말씀
#신앙묵상
#Jesus
#SundayService
#Genesis
#FaithJourney
#TrustGod
[주일 예배 안내]
낮아진 자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억울함과 외로움,
그리고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도
믿음은 시선을 다시 하늘로 향하게 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9:1-10 말씀을 통해
바닥 같은 인생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묵상합니다.
“바닥에서 하늘을 보다”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길을 여십니다.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요셉의믿음
#하나님을바라보다
#믿음의시선
#주일말씀
#신앙묵상
#Jesus
#SundayService
#Genesis
#FaithJourney
#Trust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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