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충만한 것을 발견하면서 주님을 찬양한다. 거대한 피조 세계 가운데, 작고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왕적 권위를 위임하셔서 모든 만물을 통치하는 왕적 존귀와 영광과 통치권을 주심을 노래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다.
박종호씨가 부른 시편 8편 찬양이 생각난다. 그 웅장한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머리속에 자연스레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천지만물이 상상되곤 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만물에 깃들어져 있는 창조주의 이름이 아름다운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더 도드라지는 것은 시편 3-7편까지 악과 악인이 득세하는 세상에 대한 깊은 탄식이 이어졌는데, 그런 세상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고백한다는 것이다. 모두 다윗이 노래한 시편들인데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무고히 당했던 억울함과 답답함의 세상속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다니 참으로 반전이다. 참으로 기막히다.
악인이 기세를 떨치는 세상, 그 악의 기운을 잠재우는 창조주 하나님, 그 하나님을 찬양이 악하여 추하게 보일 세상을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의 감탄되게 한다. 다윗이 감탄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어떤 곳인가?
1. 온 땅에(1, 9절)
온 땅에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었다! 그러니 아름답고 아릅답다! 특히나 창조하신 만물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감탄스럽게 영광을 받으신다. 천지 만물은 원래 그런 곳이었다! 어느 한곳도 예외는 없다. “하늘을” 덮었으니 제외되고 버려진 곳은 아무곳도 없다!
그러니 인간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나님의 영광 아래 사는데 영광을 드러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악인이 활개친다! 아름다운 만물이 고통이 되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영광은 그것조차도 다 덮었다! 하나님의 세상이다!
2. 그의 권능을 보이시는 세상(2절)
악인들과 대적들의 강성함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감출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어할 수 없다. 오죽하면 세상의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그들 앞에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말) 만으로도” 권능을 충분히 세우신다고 하실까!
약하디 약한 어린 아이들, 젖먹이들의 입을 통해 “원수들과 보복자들의 (입을) 잠잠케 하시려” 하신다. 훨씬 더 막강하고 강력한 방법을 충분히 사용하실 수 있지만, 겨우(?)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악인들의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감을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충분히 드러내시고도 남는다! 세상은 하나님의 이름이 분명히 드러나는 곳이다! 드러나고야 마는 곳이다!
3. 하나님이 보이는 세상(3-8절)
온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피조물들 중에서 유독 사람에게 더 큰 사랑을 베푸셨다(3~5절). 하늘과 땅은 하나님의 위엄를 드러내는 도구(1절)지만, 사람은 특별히 위엄을 입는 수혜자로 삼아주셨다. 다윗은 이 사랑과 배려에 목이 매여 ‘이렇게까지’를 반복해서 표현한다. 밤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을 보면서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나올 수밖에 없지만 그 감탄의 강도가 하나님이 빚으신 사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보이신 사랑은 참으로 성실한 사랑이다. 단지 도구로만 쓰이는 존재가 아닌 매사에 생각해주고 돌보아주시는, 배려 깊은 사랑으로 익어사는 농도 깊은 존재다.
세상에 속한 모든 창조물들을 다스리도록 사람에게 권한을 주셨다(6~8절). 사람이 기르는 창조물에서부터(7절) 먼 데 있는 창조물(8절)까지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는다. 하나님은 원래 첫 창조 때에 모든 창조물들을 만들고 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표현 하셨지만, 유독 여섯째 날 마지막 창조물인 사람을 짓고 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시며 기뻐하셨다. 다른 피조물들과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고 날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소통하는 창조물로 지어진 사람 앞에서는 너무나도 즐거워 하셨던 것이다. 사람에게 땅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땅을 다스려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땅의 노예가 되고, 이로 인해 고통받는 인간의 신음 소리가 온 천지에 울려 퍼지고 있다. 땅을 얻고자 하면 노예가 되지만, 땅을 버리는 나그네의 길을 택하면 오늘도 땅의 주인으로 우뚝 설 것이다.
특히 감동되는 부분이 바로 “보오니”이다.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새번역_3절).” 내가 봅니다…. 그냥 보이는 것이 아니다. 보아야 보인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악인들, 대적들, 원수들은 보지 못하는 세상이다.
사람이 보인다. 억압과 폭력의 대상이 아닌 영화와 존귀의 사람이(4절)… 주의 손과 손가락이 만드신 것을 다스리는 사람이(예수 그리스도, 6절)… 그가 다스리는 모든 것이 보인다(7절). 예수님이 보이면 그의 세상이 보인다! 하나님이 그 세상에서 드러난다!
나는?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만드셨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대로 창조되었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나서는 만물의 본질과 의미, 목적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각 속성을 가진 수많은 종류의 만물들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서 상생하도록, 즉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유지하도록 자연 만물을 만드셨다.
-자연을 관찰하고 묵상한 사람은 그 거대함과 다양함과 오묘한 조화로 인해 놀람과 경이로움을 감출 수 없다. 자연 만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창조주를 떠나 자연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신격화하는 것은 어리석다. 자연의 위대함은 그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표시다.
-인간은 거대한 창조 세계 속에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다. 하지만 하나님은 특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인간에게 놀라운 뜻과 목적을 부여하셨다.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간에게 위임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에 대해 사랑으로 돌보는 특권을 갖게 된 것이다.
-다윗은 땅과 하늘에 충만히 임한 하나님의 위엄을 찬양한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되 특별히 사람을 다른 피조물보다 영광과 존귀로 높여주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도록 책임을 부여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영광과 위엄으로 덮고 계신다. 다윗은 하나님의 위엄을 표현하기 위해 시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한다. 나는 자연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서도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의식하며 찬양하고 있을까?
-만물을 바라보며 나는 “무엇이 보일까?” 온갖 악, 부조리, 병폐, 고통, 아픔. 슬픔…. 이런 것 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위축되고 고통스럽기 그지 없을거다. 그러나 이런 “악함”이 세상에 넘쳐나도 그 세상을 덮는 하나님을 본다면 지금 겪는 고통이 그 영광 아래 일어나는 것임을 보게된다.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다.
-그러니 “어떻게 보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마음과 믿음이 없는 바라봄은 현상만 보고 판단하여 영혼을 피폐하게 하지만, 이 세상을 덮고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달라진다. 황량한 사막에서 넘쳐 흐르는 강물을 보게된다. 폭풍우 치는 바다 한 가운데서 따사로운 햇살과 콧등을 간지럽히는 잔잔한 바람이 보인다.
-“내가 보오니….”
-하나님의 영광을 보오니…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보오니…. 하나님의 권능을 보오니….. 악함과 대적과 원수들이 하찮게 보인다. 그들의 위협과 폭력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그들의 만용과 오만이 긍휼을 불러 일으킨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장마철, 높은 습도는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들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내가 보며” 따사로운 하나님을 보는 상쾌한 하루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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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에 따르면 이 시편은 다윗이 지었으며, 베냐민 사람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부른 노래다. 그러나 베냐민인 구시가 정확히 누구인지, 어떤 말을 했는지 파악할 수 없다. 사울, 사울 주변 인물, 베냐민 사람 미스이나 세바 등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시편의 내용에 근거하면 구시가 다윗을 모함했을 가능성이 보인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당한 억울한 고발에 대해 하나님께 무죄를 호소한다. 이에 따르면 이 시편은 애가 형식을 띤 개인 탄식시이자 무죄 탄원시로 불린다.
살다 보면 상상도 하지 못할 모함을 받을 때가 있다. 자존심처럼 지켜온 삶의 태도와 가치들이 폄훼 당하고, 모함 당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온 몸과 마음이 깊은 좌절과 고통으로 빠져든다. 특히 한 개인을 향한 조직적인 모함이나 계략으로 인해 평생 정죄 당하고 여론에 의해 매장 당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밝혀지곤 한다. 어떤 형태이든지 이런 경우를 만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너무나 슬며시, 혹은 자신도 모른 채 크고 작게 이미 이런 일들은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다. 죄가 만연하니 죄의 크고 작은 열매가 맺히는 것은 당연하다. 성도는 이런 위기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다윗이 들려주는 노래를 들어보자!
1. 내가 주께 피하오니…(1-2절)
다윗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 자기를 추적하는 모든 자들로부터 구원해주시기를 간청한다. 이때 ‘내가 당신께 피합니다(1A절)’라는 말은 추격당하면서도 자기를 도와주실 분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고백이자 절절한 호소다. 원수들로부터 억울한 고발을 당한 사람의 고백이다. “구원하다(야샤)”라는 말과 동의적인 의미로 사용된 “구출하다(나찰)”라는 말은 “와락 붙잡거나 낚아채고 움켜쥐는” 행동과 관련이 있다. 긴급한 마음과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과 개입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다.
역시 피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다. 아니 하나님께 가장 먼저 피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대적들이 사자처럼 달려들어 나를 찢어 발기어도 목숨을 구해 줄 이는 ‘여호와 내 하나님’밖에 없다. 크고 작은 일들….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거센 계략들에게서 피할 곳은 “하나님 밖에 없다.
2. 나의 삶을 아시오니(3-13절)
다윗은 여호와 이름만 부르지 않고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른다. 친밀한 언약의 이름 여호와뿐만 아니라 우주의 창조자이며 주권자이자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호명하여 다윗 자신과 밀착을 시킨다. 다윗은 신속한 구원을 요청했지만(2절) 충분하지 않다. 그는 최고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개입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일관되게 ‘만일 ~ 내가 이러이러한 일을 행했다면’을 세 번 반복한다(3~5절). 다윗의 마음은 자기 자신이 이러이러하다면 원수가 자기 생명을 땅에 짓밟고 자기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해도 괜찮다(5절)는 항변이었다. 그만큼 다윗은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3절)’,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4절)’, ‘땅에 짓밟히고 명예를 잃어도(5절)’ 묵묵히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다윗의 이런 언행은 고대 사회에서 무죄를 맹세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이와 같은 정황은 다윗의 원수들이 베냐민 지파인 사울 왕과 관련된 거짓 증거로 다윗을 옭아매려 했던 상황을 생각나게 한다.
그들이 모략한 것이 사실이 아님을 하나님이 아시오니… 이다. 그래서 담대하게 외친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만일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벌을 내려 주십시오(새번역_3절)” 그들의 모함처럼 내가 살았다면 마땅히 벌을 받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담대하다.
6~9절은 자신의 무죄 맹세 후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정당한 판결을 요청하는 장면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세 개의 명령어를 내세워 직접 간청한다(6절). ‘당신의 진노로, 대적들의 격분’에 맞서 일어나도록 청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미 판결하신 듯이 ‘당신이 심판을 명하셨습니다(6절 하)’라며 정리한다. 그리고 난 후 하나님께서 재판장되심을 상상하며 중재와 재판을 요청한다. ‘높은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십시오,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판결하십시오(7~8절), 악인을 끊어주십시오, 의인을 세워주십시오’라고 고백한 후에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신다고 고백한다(9절).
“…..내 의와 내 성실함을 따라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새번역_8절).” “하나님은…..마음이 올바른 사람에게 승리를 안겨 주시는 분이시다(새번역_10절).” 평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음을 하나님이 가장 잘 아신다는 것이다. 이 당당함! 얼마나 멋진가! 아무리 모함하여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마음을 어지럽게 하여도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만은 분명히 아시기에 “내가 주께 피할 수” 있고 “만일 모함이 사실이면 나를 벌하십시오!”라고 외친 것이다.
10~13절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을 더욱 간구한다. 다윗은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가 항나님이시라고 선언한다(10절). 무엇보다 ‘하나님은 나의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고백한 것은 11절의 ‘매일 분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선포와 연결된다. 그렇기에 다윗은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칼을 가시며, 활을 당시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고 확신한다(12절). 또한 하나님을 전사(용사)처럼 묘사하여 불타는 화살(13절)을 준비하신 분으로 표현한다. 고대 사회에서 불호살은 포위된 도시를 불대우는 무기다. 이런 묘사들은 악인들이 심판받을 시간이 임박했음을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아시기에 두려워 나아가지 못한 삶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아시기에 담대하게 나아가 “탄원”하는 삶이었다! 대적들을 심판해 주시라고 담대히 외치는 그 탄원 속에 자신도 심판 받을 각오를 하는 기도를 드리는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3. 말한대로 거둘 인생(14-17절)
악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가? 다윗은 ‘보라 악을 잉태한 자는 분쟁(재앙)을 임신하고 거짓을 출산했다(14절)’라고 말한다. 이는 악의 끊을 수 없는 파괴적인 생산성을 묘사한듯하다. 또, 악을 잉태한 자는 남을 넘어뜨리기 위해 웅덩이를 판 사람과 연결시킨다(15a절). 짐승을 잡기 위해 구덩이를 파는 사람으로 묘사되나 곧 자기가 만든 함정에 빠지고 만다(15b절). 이러한 악인의 결말은 ‘재앙이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린다(16절)’의 표현으로 악인에 대한 심판의 철저함을 보여준다.
17절을 통해 자기의 무죄를 항변하며 정의로운 재판장 하나님께 악인의 심판을 청구한 다윗이 하나님께 찬미와 간절한 기도로 마무리한다.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의 마음을 고백하고 찬양한다. 가장 높으신 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며 마무리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잘 알았다. 그것도 ‘올바로 잘’ 알았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시는지도 너무도 잘 알았다. 반드시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신실함을 알기에 담대하게 선포한다. “(보라!) 악인은 악을 잉태하여 재앙과 거짓을 낳는구나. 함정을 깊이 파지만, 그가 만든 구덩이에 그가 빠진다. 남에게 준 고통이 그에게로 돌아가고, 남에게 휘두른 폭력도 그의 정수리로 돌아간다(새번역_14-16절).” 순간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기만하여 모함하는 인생을 간과하지 않으신다. “재앙과 거짓”이 그의 인생에 임한다. 자신이 퍼뜨린 거짓말의 깊은 함정에 자기가 빠진다. 자신의 거짓된 행동으로 인해 고통이 일어나지만 결국 자신이 그것을 다 받는다. 자신이 행사한 폭력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사는 인생도 이와같다! “심는대로 거둔다”는 보편적인 원칙을 왜 이리 망각할까? 답답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도 그럴 수 있다. 잠깐의 이익을 위해 순간의 모략을 참지 못할 수 있다. 순간의 거짓의 유혹이 너무나 강력하여 어이없게 걸려들 수 있다. 그러니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외친 “정직과 성실”이 놀랍다!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정직과 성실로 인생의 밭을 일구지만 거짓과 모함의 가라지들은 언제나 우후죽순처럼 일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직과 성실’의 열매는 반드시 맺힌다. 하나님께서 이를 보장하신다.
“나는 주님의 의로우심을 찬송하고 가장 높으신 주님의 이름을 노래하련다(새번역_17절)”
나는?
-다윗은 엄중한 맹세로 자기 무죄를 밝히며, 지기를 무고하게 추격하는 대적들로부터 전져주시기를 간청한다(1~5절). 참된 믿음은 아무리 위태롭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고, 그 신뢰에 자기의 안위를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신뢰하며 드린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꼭 응답하신다.
-또, 다윗은 하나님이 진노 가운데 일어나셔서 악한 대적들의 노를 잠재우시기를 간청한다(6~7절). 이것은 만민 앞에서 자기의 무죄를 입증해달라는 호소이자, 악이 득세하고 공의가 무너진 시대에 주님의 의로운 통치가 편만해지기를 바라는 기도다. 우리의 기도가 개인적 필요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의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함을 다윗을 통해 도전을 받는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와 마음의 동기까지 살펴 공정하게 판결하시는 의로운 재판장이시다(8~10절). 이를 통해 악인이 더는 기승부리지 못하도록 근절하시고, 무고한 고소와 악의적 비난으로부터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여 이 땅에 정의를 세우신다. 나라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위임 받은 권세를 주의 뜻에 맞게 사용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악에 대해 분노하시고, 회개하지 않는 자를 향해 심판의 칼을 드신다(11~13절). 심판의 지연이 죄에 대한 용인은 아니다. 진심으로 돌이키지 않고도 무탈한 인생은 없기에, 오래도록 품어온 악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청산해야 할 습관과 관계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무고한 자를 음해하던 악인들의 죄악은 부메랑이 되어 그들을 정죄하고 파멸할 것이다(14~17절). 이것이 의로운 하나님의 보응이다. 언젠가 스스로 추수해야 할 악의 씨앗을 심지 말고, 날마다 의와 진실과 정직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다윗과 관련되어 그를 대적하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 중에 “베냐민 사람 구시”는 없다. 베냐민 지파 사람이라는 데서 사울왕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 중의 하나였을 수 있겠다 싶지만 성경에서 그 사건을 소개하지 않으니 알 수 없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다윗은 이런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마다 그것을 당사자나, 사람들을 통해 해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상황이 그럴수도 없었겠지만 그 답답함을 그대로 하나님께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훗날 시로 노래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 고통을 노래하는 다윗의 모습이 내가 닮아야 할 모습이겠다. 수많은 오해들이 발생하고, 모함들이 난무 할 수 있는 목회의 일상에서 “가장 먼저, 오직 유일하게” 이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하며 기도의 노래를 부르는 다윗의 모습이 나의 목양 모습이어야 하겠다.
-나의 무고함과 결백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노래할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의로우신 하나님,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을 낱낱이 살피시는 분이십니다(새번역_9절)’이라고 고백하기에 자신의 허물도 낱낱이 드러날 삶을 애초에 걷지 않는 목양이어야 하겠다. 그러면 어쩌다 이런 상황을 만날 때 담대하게 노래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주께 피하오니(1절)” 노래할 수 있는 주님 앞에서의 삶이 되도록 간구할 뿐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에 세상 법정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오판이 없으시다. 당장의 억울함의 답답함을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인내한다면, “하나님께서 재판하셔서 갚아주신다” 이 믿음이 오늘의 억울함에도 몸과 마음을 꿋꿋하게 지켜나가게 할 것이다.
-이 믿음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재판 하실(이루실) 것이니까!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도 하나님을 알고 계신다. 악을 계획하고 행하는 자들, 특히 거짓을 행하는 자들은 항상 모든 것을 은폐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기 그지없다.
-함정을 만든 자는 자기가 만든 함정에 빠지고 자신이 행한 재앙과 포악이 자신에게 돌아간다. 심는 대로 거둔다. 악을 심는 자는 악을 거두고 의를 심는 자는 의를 거둔다. 악인은 자신이 행한 대로 반드시 돌려 받는다. 이와같이 악을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감사하다.
*목회가 참 변수가 많다! 어제도 그런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일을 만났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이 힘이 된다! 결국 “의로우신 재판장” 되신 주님 앞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서게 될 것이니 그때 주님의 선명한 재판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속마음을 알 수 없고 그 의도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어 답답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을 수 있지만 반드시 드러난다! 그때 부끄러움이 없는 하루를 살면 된다. 그때 판단 당하는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오늘 하지 않으면 된다. 주여 지켜주옵소서
*이런 변수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겠지? 그런데 두렵지는 않다. 은근한 담대함이 일어났다.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 확실하다! 다만 한 공동체 안에서 이리 다른 말을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하는 것이 두렵다. “하나님 앞에서” 경외함과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씁쓸하고 안타깝다!
*내가 그런 자리에, 그런 말들을 만들어 내지는 말아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해 보는 아침이다! 오늘도 주님이 도우실 것이다. 잘 분별하며 말하고 행해하리라. “내가 주께 피하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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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탄식, 멈추지 않는 애통이 다윗을 감싸고 있다. 삶을 살다보면 이런 상황에 처할 때가 있다. 깊은 병에 걸렸든지, 어떤 범죄로 인해 큰 두려움에 빠지든지, 이유를 분명히 파악할 수 없는 고통이 엄습할 때가 있다. 그래서 다윗의 노래가 공감이 된다. 특정한 상황만을 묘사하기 보다 어떤 일로 인해 깊은 탄식과 애통에 빠져 있다. 슬픔과 고통이 한없이 짖누르는 시기를 누구나 경험하기에 다윗의 노래가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깊은 탄식과 멈추지 않는 애통 가운데 있을까?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사무친 울화로, 내 눈은 시력까지 흐려지고, 대적들 등쌀에 하도 울어서 눈이 침침합니다(새번역_7절).” ‘사무친 울화(근심으로 쇠하고)’, ‘대적들 등쌀에…’ 대적들의 등쌀에 울화가 사무쳤다는 것이다. 이것을 “주의 분노”, “주의 진노”로 여기고 있다(1절). 어떤 일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대적’들의 등쌀은 다윗을 ‘사무친 울화’가 치밀게 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내 뼈가 마디마다 떨립니다. 주님, 나를 고쳐 주십시오.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립니다….(새번역_2-3절)” 였다. 뼈 마디가 다 떨리며, 마음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떨었다. 극심한 고통일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온 몸과 마음이 고통중에 떨었다. 그리고 “나는 탄식만 하다가 지치고 말았습니다. 밤마다 짓는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내 잠자리를 적십니다(새번역_6절)”라고 쇠약한 고백도 이어진다.
이 와중에도 다윗은 하나님을 찾고 또 찾은 것이다.
1. 여호와여!
‘여호와여….’ 고통중에 그 이름을 잊지 않고 부른다. “떨리고 떨리며” 아파하는 그 와중에 다윗의 입술은 ‘울화통’치미는 대적들을 저주하기보다, 그 상황을 되뇌이는 것 보다 “여호와’의 이름을 거푸 부른다. 쉴 새 없이 부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께다. 그만큼 신뢰하고 바라는 이름이 ‘여호와’였다.
지금 겪는 고통 때문에 더 멀어 질 수 있는 하나님과의 거리감이 오히려 더욱 가까워 졌다. 아픔이 깊을 수록 불평과 원망, 자기능력과 계획으로 하나님의 이름 보다 현실적인 대응방안이 더 많이 중얼 거려 질 수 있는데, 다윗의 입술과 마음을 그렇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많이 부르고 불렀다! “여호와여!”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부르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밖에 해결 할 수 있는 분이 없다는 강한 신뢰로 부르는 이름이었다. 차선, 차차선으로 부르는 이름이 아니었다. “오직” 여호와밖에 없음을 간절히 인정하고 부르고 불렀다. “돌아와 주십시오, 주님. 내 생명을 건져 주십시오. 주님의 자비로우심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새번역_4절).”
내가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에는 이 진정스러움이 있을까?!
2. 들으셨도다! 받으셨도다! 물러가리로다!(8-10절)
다윗의 노래에서 느껴지는 놀라운 점이 있다. 바로 “솔직함”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꾸미지 않는다. ‘책망하지 마십시오’, ‘꾸짖지 마십시오’ ‘언제까지 지체하시렵니까?’… 하나님을 향한 표현이 진솔하다. 있는 감정을 그대로 쏟아낸다.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소통에 있어 “진솔함”이 가장 두드러진 방법이었다.
나는 어떠할까? 진솔한 하나님과의 소통… 진솔하지 못할 때 그것이 바로 외식 아닌가! 인간관계는 진솔하면 어색해 지는 경우가 있다. 트히 감정적인 상태일때가 그렇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진솔하면 진솔할 수록 관계의 단단함이 더해진다. 어느 정도이냐면 하나님의 응답하심에 대한 확고한 확신이다.
“…..들으셨도다!(들어 주셨다! 8절)”
“…..받으시리로다!(받아 주셨다! 9절)”
“…..물러가리로다!(물러가는구나! 10절)”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악한 일을 하는 자들아, 모두 다 내게서 물러가거라._새번역 8절)” 라고 외친 후 들으셨다! 받으셨다! 물러갔다!고 거듭 외친다! 깊은 탄식, 멈추지 않는 애통속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진솔하게 부르며 기도한 다윗은 응답 조차도 이미 이루어 진 것임을 선언한다. 어떻게 이리 할 수 있을까?
자신을 깊은 탄식과 애통 속에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그의 믿음이다. “돌아와 주십시오, 주님. 내 생명을 건져 주십시오. 주님의 자비로우심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죽어서는, 아무도 주님을 찬양하지 못합니다. 스올(무덤, 죽음)에서, 누가 주님께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새번역_4-5절)” 죽으면 아무도 주님을 찬양하지 못하니… 자신을 살려달라는 것이다. 허어 이런 믿음이라니… 나는 늘 주님을 찬양하기에 나를 살려 달라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살아나면 자신만큼 여호와를 찬양하는 사람도 없다는 강한 믿음의 확신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깊은 탄식과 애통에서 구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이 “들으셨도다!”, “받으시리로다!”, “물러가리로다!”를 선포할 수 있게 했다.
나는?
-다윗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다윗이 떨었던 것은 참기 힘든 질고나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대적들의 조롱과 비난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아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1~3절).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고통이 죄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도는 모든 고난을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는 은혜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 어떤 시련을 만났든지 어저 ‘끝나게’ 해달라고 구하기 전에, 어서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다윗은 자기에게 닥친 고통 속에서 주의 분노로 징계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않는다. 삶의 모든 경험을 하나님에 대한 경험으로 받아들인다. 하나님이 진노와 심판으로 그에게 임하신 것에 대해 회피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그는 더 맞닥뜨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간다. 기도는 고통, 슬픔, 두려움, 외로움, 죄악 됨, 심지어 보복의 마음까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전적으로 자신을 의탁하는 자들의 삶의 방식이다.
-다윗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다윗은 자기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상실하는 것보다 더 큰 상실과 고통은 없다고 간곡하게 호소한다(4~5절). 그는 다 잃어도 좋지만, 하나님만은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하나님이 아니면’ 오늘의 나도, 오늘을 살아갈 수도, 내일을 보장할 수도 없다는 고백이 여전히 내 입술에서 고백되고 있는가?
-시인은 극심한 고통 중에서 간신히 기운을 내 자신의 절박한 사정을 하나님께 아뢴다(6~7절). 하나님을 향한 그의 탄식은 가장 정직한 신뢰의 고백일 수 밖에 없다. 해명할 수 없는 시련 앞에서, 때로 간절히 기도하기도 하고, 때로 모질게 원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윗처럼 고난의 시간이 길어지고 내 기도에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라도, 하나님은 듣고 보고 다 알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나의 낙심이 주님에 대한 무지와 오해와 의심에서 오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이 이미 자기의 기도를 들으셨고, 앞으로도 들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8~10절). 그래서 그의 탄식은 허공을 치는 절규가 아니라 믿음의 노래였다. 이제 다윗의 떨림과 수모는 환희와 영광으로 바뀌고, 악담하던 대적들은 큰 수욕을 당한 채 황급히 물러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돌아오시면 모든 것이 역전된다!
-진솔한 하나님께 대한 고백들을 사모하게 되는 아침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 처한 상황대로 하나님께 아뢰리라. 이미 들으셨고, 받으셨으며, 물러간(해결된) 상황을 믿음으로 선포하리라.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이 떨리는 울화를 견디고 견디며 진솔하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주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 떨었던 내 몸과 마음처럼 대적들이 “떨게” 된다(10절). 아! 이 얼마나 탄식과 애통중의 북음이란 말인가!
-아무리 고통스러울때일지라도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더욱 진솔해야 한다. 진솔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가며 그 이름을 찬양하고자 하면, 찬양하도록 도우신다. 이 탄식과 애통중의 복음을 잊지 말아야 겠다. 나의 삶에서 작동되어야 하겠다.
-탄식과 애통은 고통이다. 하지만 이 고통이 통로가 되어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고 ‘들으시고, 받으시며, 해결하시는’하나님을 보게 된다면 그것이 곧 복음이다. 고통중에 하나님의 복을 바랄 이유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탄식과 애통의 터널을 지나는 여정인지 모른다. 이 걸음을 그저 나의 힘과 지략과 노력으로만 이겨내려고 하면 자칫 미궁에 빠질 수있다. 하지만 더욱 진솔하게 하나님과 소통하며 그의 구원하심을 구할 때 ”갑자기(황급히)” 물러간다!(10절).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구할 때, 진솔하게 소통할 때,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물러가게 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언제든, 어느때고 탄식과 애통의 복음의 때를 지날 수 있다. 그럴 때 더욱 하나님께 진솔하게 더욱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또 집중하는 삶이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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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시편은 위협적인 거짓 고소, 적대적인 박해 상황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탄식의 기도다. 하지만 시인의 탄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악인들이 심판 받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된다. 그렇게 이 시는 시인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의인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주실 기쁨을 확신한다.
거듭 이어지는 다윗의 기도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지만 이미 다윗은 이러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기도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1. 호소(1-2절)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나의 신음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나의 탄식 소리를 귀 담아 들어 주십시오'(새번역_1-2절) 시인은 주체할 수 없는 마음 속 괴로움을 품고 하나님 앞에 나온다. 시인은 3개의 명령형 동사를 병행하여 하나님께 간구한다.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심정을 헤아려 주시고’,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달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뿐 아니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마음속엣 터져나오는 탄식소리를 헤아려주시고 부르짖음을 들어주시기를 간구한다.
이때, 시인은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또한 고대사회에서 왕이 재판장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의롭게 심판하실 것에 대한 화신의 표현이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의롭게 재판하실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 자기 사정을 아뢴 것이다.
기도의 시작이 늘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호소에서 시작한다. 미사여구는 없다. 직진이다. 굳이 형식적인 어휘를 나열 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의미다. 관계가 형식적일 수록 먼저 구비하여 빠짐없이 구성해주어야 할 형식을 중요시 여긴다. 하지만 실제적인 관계는 형식보다 “진심”이다. 마음의 진실함을 애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접” 고백하며 토로한다. 다윗의 기도가 그렇다.
그런데 일방적인 호소에 그치지 않았다. 다윗의 기도에는 확실한 다름이 있었다.
2. 나의 호소보다 주님의 뜻(3절)
“주님, 새벽에 드리는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새벽에 내가 주님께 나의 사정을 아뢰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겠습니다.(새번역_3절)” 시인은 아침에 주께서 내 기도를 들으실 것이므로 아침에 기도하겠다고 한다. ‘아침’이라는 표현이 아침 제사 시간이거나 구원을 간구하는 시인의 열렬함에 대한 표현일 수 있으나, 아마도 어두운 고통의 시간이 물러가고 구원의 빛이 밝아오는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시간에 그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을 기대하며 시인은 주를 기다린다.
자신의 형편과 사정을 분명히 아뢰지만 역시자신이 바라는 해결책을 매달리지 않는다. “주님의 뜻”을 기다린다. 다른 번역본들은 “주의 응답”, “주께서 대답해 주시기를”, “주께 바란다” 등으로 표현했다. 의미는 동일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해결하시는 것을 마땅히 기다리겠다는 고백이다.
기도가 나만의 호소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다윗의 기도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고 보니 이 표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하신 기도와 판박이다. 다윗처럼 호소하고 이 고난의 십자가에 대하여 자신의 고통을 솔직하게 호소하였으나 결국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라고 고백하지 않으셨던가!
그렇다면 나의 기도도 역시 호소에 치중하기 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며 기다리는 것이어야 겠다. 기도는 드리면 드릴 수록 성령께서 이렇게 조율하실 것이다. 감정과 호소와 절박함으로 시작하나 평안과 기쁨으로 마무리될 수 있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해서가 아니라 결국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질 것을 바라보게 하시기 때문이다.
기도중의 평안은 “나의 호소”에 대한 “하나님의 뜻대로”의 반응임에 틀림없다.
3. 나의 탄식보다 하나님 찬양(4-12절)
시인은 1~3절에서 기도를 들어달라고 간구하다가, 4절에서 갑자기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닙니다’라고 선언한다. 원문에는 ‘왜냐하면(키)’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가 간청 드리는 하나님, 그의 상황을 판결해주실 재판장이시며 왕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상기하며 기도 응답에 대한 단단한 초석을 놓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락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초점을 맞추면서 ‘~이 아니다’ 또는 ‘~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관점(4~5a절)과 능동적 관점(5b~6절)으로 표현한다.
부정적인 관점은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지 않고,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한다. 능동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님은 행악자를 미워하시고,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며 피흘리는 자와 속이는 자들을 싫어하신다. 특히 죄악에 대하여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미워하시고’, ‘싫어하신다’는 3개의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표현을 통해 악을 전적으로 거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강조한다. 따라서 햇빛에 눈이 곧바로 녹아버리듯 악은 거룩하신 주님과 잠시라도 공존할 수 없다. 4절의 ‘머물다(구르)’는 유목민들이 돌아다니며 한 장소에 임시적으로 머무는 것을 가리킨다. 잠시라도 악이 주와 함께 공존할 수 없기에 자기 자랑이 가득한 오만한 자들, 행악자들, 거짓말하는 자들, 피 흘리기를 서슴치 않는 폭력적인 자들, 속이는 자들은 주의 거룩한 임재 앞에 설 수 없다. 주께서 아들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시며 반드시 멸망시키실 것이다(6절).
7~8절에서 하나님은 악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행악자들을 미워허시는 반면, 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풍성한 사랑을 배푸시고, 그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따라서 악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머물 수 없는 것과 대조적으로 시인은 성전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기를 갈망하며 기도한다. ‘성전을 향하여 예배한다’는 것은 주님의 가장 친밀한 임재의 장소인 지성소를 향한다는 것이므로 예배의 대상이 지성소가 아니라 지성소에 임재하신 주님이시다.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의와 선행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죄악을 기뻐하시지 않는 하나님,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시 130:3). 따라서 시인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언약적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 예배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원수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기도한다. 원수들은 시인을 지켜보며그를 해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만, 시인은 주의 의로 인도해주시고 ㅈ의 길을 곧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
다윗의 기도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자신의 절박한 상황의 호소보다 더 풍성하다는 것이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여러 상황들… 하지만 그 상황을 분명히 통제하고 계시는 하니님에 대한 지식이 분명하다는 의미다.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기도할지 막막한 경우가 꽤 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지?” 이렇다. 그러다 보면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하 장탄식만 하게 된다. 그리고 관전이 나의 고통, 아픔, 환난 이런 상황에 함몰되기 때문에 주님께 드리는 기도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나의 “희망가”에 머무르는 경우가 흔하다. 왜 그럴까?
나의 삶의 탄식을 바라보시는(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정작 이 상황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상황만 중얼거리다 끝난다.하나님을 잘 모르기 떄문이다. 그런데 다윗의 기도에는 자신의 상황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너무나 확신 가운데 고백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단하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들이 쏟아진다.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삶 속에서 이를 이미 경험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생생하게 삶을 관통했기에” 주저하지 않고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 노래한다. ‘죄악을 좋아하지 않으시는…(4절)’, ‘교만한 자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자들을 미워하시는…(5절)’, ‘거짓말쟁이들, 싸움쟁이들, 사기꾼들을 몹시도 싫어하시는…(6절)’ 그래서 “주님, 주님께서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그들을 은혜로 지켜 주십니다(새번역_12절).”라고 담대히 찬양하며 선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다윗의 기도는 철저히 말씀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여 선포한다. 그가 구구절절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들은 이미 하나님계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이미 알려주신 것들이었다. 다윗은 그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말씀대로” 이루실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확신했다. 지나온 삶을 통해 검증되었기도 했으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이루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다윗의 기도에는 넘쳐난다.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자신이 처한 곤고한 상황에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크신 은혜를 힘입어 주님의 집으로 나아갑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성전 바라보며, 주님께 꿇어 엎드립니다(새번역_7절).”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그러나”이다. 억울한 심정을을 호소하는 것은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 억울함에 시선을 맞추지 않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맞추겠다는 믿음의 확고함이다. 억울함보다 억울함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억울함의 덫을 놓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심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담대히 고백한다. “주님, 나를 대적하는 원수를 보시고, 주님의 공의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내 앞에 주님의 길을 환히 열어 주십시오(새번역_8절).” 억울함과 그 덫을 놓은 원수들은 자신의 앞에 주의 길을 더욱 환히 열게 하는 통로라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억울한 상황에 내몰려도 흔들리지 않게 한다.
다윗은 기도를 늘 이렇게 드렸다!
나는?
-절규하듯 부르짖는 기도뿐 아니라 그 마음의 신음까지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애타는 그의 심사를 깊이 헤아려 살피신다(1~3절).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나를 지으시고 구원하시 분이 오늘 내 형편을 통해 나를 온전히 빚고 계심을,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더 깊음을 신뢰하리라. 지금은 한 숨 쉴 때가 아니라 큰 숨을 몰아쉬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가 아닐까?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어떤 죄악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의인의 피를 흘리며 거짓과 교만과 행악을 일삼는 자들을 미워하시고 심판하신다(4~6절). 그러므로 어쩌다 잘 넘어간 죄악이 하나님의 용인은 아니기에 지금이라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 혹 부당한 평가와 오해, 조소와 비난 가운데 있는가? 하나님은 내 허물과 억울함뿐 아니라 그들의 속임과 악함까지도 다 아신다. 그러므로 끝까지 신뢰하며 주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다윗은 큰 곤경 중에도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만은 의심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사랑을 힘입어, 우너수들의 숱한 훼방에도 ‘주의 집’에 들어가 예배하고 끝까지 ‘주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기를 소망했다(7~8절).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모든 것이 그분의 인자하심의 결과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상황이 나를 절망으로 몰아가더라도 주를 겨외하고 경배하는 마음만은 생채기 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다윗은 의인의 길을 막고 주를 배역하는 악인들이 자기 꾀에 빠져 쫓겨나도록 탄원한다. 반면 주의 이름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의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한다(10~12절). 그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의 거룩한 성품(4~6절)과 풍성한 인자(7절)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이 시편은 아침에 드리는 기도로 알려져 있다. 하루를 시작하며 어떤 상황이 펼쳐 질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자는 믿음의 고백일 것이다. 하루를 열며 나의 근심걱정, 탄식이 여전히 나를 짖누르며 시작할 지라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신뢰하며 시작하는 다윗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어야 하리라!
-다윗의 기도는 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더 풍성하다. 상황에 대한 탄식보다 역사하실 하나님을 더 노래한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노래다. 오늘 나의 노래도 이런 노래가 되어야지!
-가장 은혜가 되는 말씀은 “그러나 주님께로 피신하는 사람은 누구나 기뻐하고, 길이길이 즐거워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주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그들을 은혜로 지켜 주십니다(새번역_11-12절).” 이다. 주님께 피신한 사람은 “누구나”, “길이길이” 기쁨을 누리도록 지켜주신다”,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푸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은혜로 지켜주신다”
-그렇게 살아왔기에 확신 가운데 선포하는 다윗의 모습에 도전된다. 비록 삶의 중간 중간 잠시 죄에 미끄러졌어도 다시 주님 앞에 서서 끈질기게 살아온 삶의 저력이 인간적인 능력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로 드러난 것이다.
-주님께서 지켜주시는 삶을 이렇게 살아왔노라. 노래하는 다윗의 노래가 나의 노래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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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우신 나의 하나님’을 부르며 노래가 시작된다.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과 들어주심을 구하며 현재의 상황을 토로하며 하나님 도우심을 구한다. 혹독한 곤란 중에 하나님께 도움읊 구하다. 그리고 자신을 대적하는 세력들을 향해 호통을 치며 침묵과 회개를 촉구한다. 당당히 대적들에게 맞서고 차분하게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곤란 중에(1절)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일까?
1. 부를 때에 … 들으시리로다(1, 3절)
곤란(곤궁)한 일을 당했을 때 다윗은 그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라 구하는(1절) 그에게 ‘들어주실 것’을 확신하는 은혜를 베푸신다. ‘은혜를 베푸사….부를 때에 들으시리로다’ 확신한다. 기도를 들으심…이 확신은 곤궁함에 빠졌을 때 어떤 것보다 큰 힘이 된다. 그렇다면 들어주심의 근거가 무엇일까? 다윗은 무슨 근거로 ‘들어주시리로다’ 라고 확신할까?
그것은 ‘곤란 중에’….’너그럽게 하셨음’을 알았고, ‘의의 제사(올바른 제사)를 드리고 주님의 의지하여’ 살아갈 때 확신할 수 있다. 즉 평소 하나님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곤란에 처할 때도 특별하지 않다. 그저 하나님 안에서 일상일 뿐이다.
삶에서 바람(강풍)이 불 수도 있다. 폭풍우가 올 수도 있겠다. 메마를 수도 있겠고 홍수가 밀려올 수도 있겠지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이런 곤란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상이라면 ‘올 수도’ 있는 별일 아니다. 이런 위기가 오면 그저 평소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들어주시니까…’
내가 부를 때에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이것이 은혜다!
2. 은혜 증거(2-5절)
다윗이 안타까워 하며 노래하는 말들에게서 은혜를 누리는 증거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내 삶에 은혜가 있다면 이런 증거(모습)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 헛된 일을 좋아 하지 않는다. 거짓 신을 섬기지 않는다(2절). 경건하다(헌신한다_3절). 분노하며 죄짓지 않는다(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회개한다(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하다_4절). 올바른 제사(의의 제사), 주를 의지함(5절)이다.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다면 이런 모습들이 자연스레 나타난다. 이런 삶이 일상이라면 곤궁함을 만났을 때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것도 가장 먼저…. 이것이 은혜다.
그렇다면 은혜는 감정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다. 치열한 삶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다. 그 싸움의 승리가 “어떤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가장 먼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3. 은혜의 열매(6-7절)
이 은혜가 맺는 열매가 “기쁨”, “평안”이다. 다윗이 이 노래를 지을 때의 상황을 안다면, ‘이게 가능한가?’ 라며 도전 받을 수 밖에 없다. 본문은 시편 3편의 후속시로도 알려져 있다. 즉 아들의 반역으로 급히 도망 다니는 삶속에서 하루 종일 ‘대적’들의 위협, 추격의 곤궁함 속에서 밤을 맞이하며 잠자리에 들기 전에 고백한 노래이다.
어떻게 이런 믿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수많은 대적들이 죽이겠다며 쫓아오고, 마음은 아들의 반역으로 인해 갈기 갈기 찢어졌다. 이런 상황에 ‘기쁨’, ‘평안’이라니… 그런데 다윗은 담대히 고백한다. 상황과 여건에 반응하는 인간은 결코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기쁨이 햇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크단다! 더 가관인 것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그 밤에…’평안’히 눕고 자겠다는 거다. 이 평안이 자기최면, 주문에서 오는 감정이 아니라 “나를 안전하게 살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이란다. 다윗의 기쁨과 평안은 도무지 기뻐할 수 없고 평안할 수 없는 중에서 이를 누린다고 노래한다. 이것이 은혜다.
진정한 은혜는 무엇일까? 삶의 기쁨과 평안이라는 것이 나의 노력, 수고의 열매가 아니라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안겨 주신)” 것이며 “안전을 책임 지시는(구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택하여 기름부은 자를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일상의 역설로 나타났다. 곤궁(곤란)하나 기쁘다. 쭟기나 평안하다.
이것은 구원하신 자들에게 “안겨 주신” 것이다. 내가 찾고 구하고 애써 수고하여 만들어간 것이 아니다. “주신” 것이다. 이를 누리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말이다.
나는?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곤란에 처했을 때, 그의 기도에 응답하여 운신의 폭을 넓혀(“너그럽게”) 주셨다(1절). 그래서 고난이 옥죄어와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의 마음까지 묶지 못했다. 더는 해볼 도리가 없거든 긍휼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은혜를 기다리리라. 고난은 불평하라고 주신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라고 주신 조건이기에…
-대적들(“인생들아”)은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아래 누리던 지위와 영광을 얄팍한 술수로 빼앗았다(2~3절). 하지만 다윗은 그들의 부당하고 불의한 역모를 ‘허사’와 ‘궤휼’이라고 규정하고 도리어 그들에게 호통을 친다. 의의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실 줄 굳게 믿었기에, 대적들 앞에서도 당당하고 담대할 수 있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지금 겪고 있는 곤경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래본다.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을 절대 두려워해선 안 된다.
-다윗은 자신을 공박하고 헛된 일을 꾸미며 거짓을 좇는 자들에게 그 일이 과연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정당한 일인지를 돌아보라고 충고한다(4~5절). 잠잠하고 더 이상 죄 짓지 말며, 세상 권모술수가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의의 제사”)으로 돌아서라고 권고한다. 혹시 나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정당하지 못한 일을 추구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현실은 바뀌지 않았지만, 다윗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은혜로 호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쁨과 평안을 누렸다(6~8절). 숨통을 조여 오는 곤경 중에 있다면, 삶의 의욕이 없고 불안과 염려에 잠을 못 이루고 있다면, 시인의 고백을 따라 주님을 피난처와 안식처로 삼으리라
-사탄은 속이는 자다. 그 역시 창조자인데,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아닌 것을 그런 것으로 만들고, 그 반대도 한다. 그래서 파괴자다. 거짓된 말로 진실한 삶을 파괴하고, 비난과 조롱으로 인격을 파괴한다. 거짓의 힘은 진실의 힘만큼 강하다. 예수님이 자신을 버려서 자기 말의 진실성을 증명해야 할 정도로 강하다.
-시인은 이런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세상속에서 거짓이 쳐놓은 그물에서 벗어나는 길은 참과 거짓의 기준을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라고 외친다. 선과 악, 의와 불의의 기준은 하나님이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최종적인 판단자가 되실 수 있다. 영광이 수치가 되고 거짓이 진실로 둔갑한 상황이 고통스럽지만, 의의 하나님이 그 얼굴을 비추시는 날 모든 상황은 역전될 것이고 악의 잔상은 낱낱이 드러날 것이다.
-의는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여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속에 있는 것을 말한다. 그는 하나님만을 피난처요, 안전의 근거로 삼는다. 곡식과 새포도주의 풍성함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다. 그들의 기쁨은 물질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그런 자들만이 고난 중에서도 두 발 뻗고 편히 안식할 수 있다.
-기도에 대한 오해가 있다. 곤란한 일이 닥치면 나의 해결책을 구하는 것을 기도라고 여긴다. 그런데 다윗은 곤란한 하루를 보내고 마무리하는 저녁에 기도하며 자신의 해결책을 구하지 않는다. 주께서 “안겨 주실” 것을 기대한다. 내가 원하는 ‘해결책’을 조르지 않는다!
-기쁨과 평안은 오직 안전히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다! 기도의 응답이다. 내 삶도 그랬다. 곤란한 일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해결책을 펼치지 않으셨다. 그저 내 마음에 일고 있는 격한 불안, 불만, 초조, 염려, 근심, 걱정의 놀을 잠재우시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확신과 평안을 먼저 주셨다. 그러면 알수 없는 기쁨이 밀려 올라오곤 했다.
-그런데 다윗은 평소, 일상에서 이미 이것을 알았다. 그래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장탄식으로 시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하실 일을 먼저 고백하고 선포하며 “이미 자기 마음에 두신” 확신을 선포하고 누렸다! 아…. 이런 다윗이라니…..
-일상이 마음에 두신 기쁨과 평안으로 인해 곤란함이 큰 파도를 이루어 덮쳐와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곤란함은 다윗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확신하는 시간이 될 뿐이었다. 그런 다윗에게 밤은 두려움이 아니라 편히 쉬는 쉼과 평안이었다.
-전 세계가 몇몇 지역의 전쟁과 소위 강대국들의 이기주의와 맞물려 고통당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교회와 성도가 고백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인생의 길에서 갑자기 곤란함을 만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구하고 매달리는 평안과 안전이 아니라, 이미 “내 마음에 두신” 평안을 누리는 것이 바로 은혜다. 이렇게 은혜 안에 사는 자는 경건한 자요, 범죄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삶을 산다! 그러니 또 경제적으로 곤란에 빠지면 어떻하지? 또 근심되는 사건이 일어나면? 등등 걱정하며 근심하는 것보다. “이미 내 마음에 두신” “기쁨”, “평안”, “안전”을 누리자!
-진정한 안전과 평안은 “이미 내 마음에 두셨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어쩌면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암흑기중의 하나일 수 있겠다. 사울에게 쫓길 때나, 밧세바와의 사건이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충격과 고통이 넘칠 시기였겠다. 아들의 반역은 어떤 배신보다도 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아들의 반역을 따르는 ‘수’도 많았다. 도망치는 자신을 따르는 ‘수’는 극히 적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의 판단은 끝났다. 세상은 압살롬의 손을 들어 준 것 같다. 더구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왈가왈부한다. 다윗을 따르는 ‘수’가 적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버렸다는 말을 주저없이 해 댄다.
사면초가… 이 상황에 딱히 이 말 외에는 표현할 글이 생각나지 않는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다윗은 어떻게 했나? 나도 혹시 모를 이 위기가 닥칠 때 다윗처럼 어떻게 해야 할까?
1. 이리도 많습니까?(1-2절)
자신이 처한 상황에 솔직하게 직면한다. ‘아니야 아닐꺼야 이럴리 없어’가 아니다. 직면한 현실을 애둘러 외면하지 않고 직시한다. 그들의 반역이 소수의 반정이 아니라 ‘민심’까지 돌아선 상황(삼하 15:13)이라는 사실을 굳이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할까 이런 상황이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자신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 이제 자신을 ‘대적’한다. 그 대적은 물리적인 대적보다 더 치명적인 “마음의 대적”이다. “다윗왕을 하나님이 버렸다. 그러니까 아들이 반역한 거지.”, “하나님께서 뭔가 심판하신거야.. 우리가 모르는 심각한 죄가 있겠지.”,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아들 압살롬을 들어 다윗을 치실까?” 대충 이런 반응들이었을 것이다.
다윗의 고통은 아들이 배신했다는 것 뿐 아니라 그보다, 그 아들을 따르는 무리가 “어찌 그리 많은가!” 서로 나를 죽이려고 “일어나 치는 자가 많구나!”였다. 더욱 괴롭게 한 “하나님이 버렸다(구원받지 못한다_2절)”는 말들 이었다.
이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 고통과 아픔을 하나님께 직고한다. “여호와여!” 직면하고 직시하여 직고하는 다윗. 이 깊은 고통의 현실과 시간, 이 상황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버렸다고 토로하며 “여호와”께 달려갔다. 누가 뭐라 그런들 다윗에게 여호와는 “외쳐 부르고 찾을” 최선(가장 먼저), 최고(어떤 대상보다), 최후(유일한)의 하나님이셨다!
한편 곰곰히 생각되어 지는 것은 평소 하나님에 대한 신뢰,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이 상황에서 과연 하나님을 먼저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다윗이 대단하다!
2. 탄식보다 신뢰!(3-7절)
여호와께 달려가 탄식하나 탄식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굳게 신뢰함을 더 많이 고백하고 드러낸다! 방패, 영광, 나의 머리를 드시는자(승리하게 하는 하나님), 응답, 붙드심, 구원은 여호와께 등등 흔들림 없는 고백이 이어진다.
오늘날 직면하고 직시하여 직고할 때 다윗처럼 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직면, 직시하는 것도 참 대단한 것이지만 직고는 더 놀라운 것이다. 더구나 그 내용이 탄식, 불평은 잠시일 뿐, 오히려 이전보다 더 깊은 신뢰의 고백들로 부르짖는다. 진정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할 부르짖음이 울려 퍼진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방패’되시는 하나님. 반역의 무리들 앞에서 나의 머리를 ‘들게’ 하시는 하나님. 재정비한 군사력보다 ‘힘껏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마음의 평안’이 쫓기는 어수선함의 한복판에서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 사방에서 시시각각 조여오는 위협 속에도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 결국 하나님께서는 친히 원수의 뺨을 치시고 함부로 이야기하는 이들의 입을 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 시고 구원을 나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
이것이 “수많은 대적들”이 쫓아오는 피난의 길에 울려 퍼진 다윗의 부르짖음이었다. 이 부르짖음은 불평이 아니라 신뢰였다!
나는?
-함께하던 이들의 배신과 아들 압살롬의 반란보다 다윗에게 더 큰 고통은 준 것은 ‘그가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대적들의 조소였다(1~2절). 그것은 신앙의 근간을 흔들고 와해시키는 비수와도 같았다. 지금 이 순간 곤경에 처한 하나님의 자녀를 더 깊은 ‘불신’과 절망의 늪으로 빠뜨리려는 악한 세력들이 있다. 고난의 때일수록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기 마음을 지켜야 하겠다.
-다윗은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는 든든한 방패요, 지금의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어주실 분이요, 왕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주실 분임을 신뢰했기 때문이다(3~4절). 지금 내가 처함 상황이 아무리 기막힐지라도 하나님마저 무력하고 무정한 분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상황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더라도, 믿음과 소망을 꺽지 않는 한 하나님의 침묵은 응답으로, 현재의 암담한 형편은 구원의 현장으로 바뀔 것이다.
-다윗은 그래서 확신 중에 평안함을 누렸다. 대적들에게 쫓기고 사방으로 포위된 상황에서도 편히 잘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자기를 붙들어 주신 하나님을 확신했기 때문이다(5~6절). 기도의 응답(4절)은 탄탄대로가 아니라 험난한 길이라도 근심하지 않고 주와 함께하며 담대히 걷게 된다. 주의 능하신 손에 나의 삶을 맡기리라.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그래서 다윗은 숱한 대적들이 일어나 치려 할 때에도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였다. 또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대적들의 조롱에도 하나님을 향해 담데히 기도할 수 있었다(7~8절). 숨 막힐 듯 막막한 현실에 서 있다면, 그 현장에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니을 신뢰해야 한다. 내일을 맞이하기도 두려웠던 시간은 가고 은총의 아침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5절). 주님께서 이렁서시면 모든 것이 역전된다.
-감히 가늠 할 수 없는 일을 다윗은 만났다. 절대 권력의 자리에서 한 순간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그를 죽이려는 자는 아들이다! 이제껏 충성을 맹세하던 신하들이었다!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이 배신감과 좌절의 깊이를 말이다. 그래서 선뜻 공감이 되질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배신감의 충격도 큰데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의 배신감은 어쩌겠나! 겨우 이정도로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더 좌절스러운 것은 “너의 하나님이 없다!”라는 말들이다. 이런 상황을 봐라! 하나님이 너를 버리신 것이 분명하다! 상황을 보며 하나님의 구원까지 판단하는 ‘수’많은 대적들의 ‘수’많은 말들이다.
-그러나 다윗은 ‘수’많은 대적들의 ‘수’많은 정죄와 판단에 자신의 마음을 맡기지 않았다! 급히 도망치는 그 길에서 가장 먼저 “여호와여!” 부르짖는다! 사람들은 이 상황을 보고 하나님이 그를 버렸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는 하나님부터 찾는다! 아! 이것이 신앙의 정수 아닐까!
-내가 처한 상황을 보며 사람들은 쉽게 정죄와 판단을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평가와 판단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간섭하지 못했다. 오히려 사람들이 버렸다고 아우성치는 그 하나님을 찾고 또 찾는다! 그리고서 잠깐의 탄식 뒤에 넘치는 “신뢰”의 고백을 멈추지 않는다. 확신의 고백과 행동을 아끼지 않는다! 이래서 다윗이 대단한가 보다.
-상황에 휘둘리고, 감정에 발목 잡히고, 자기 생각과 계산에 함몰되어 쉽게 하나님을 찾지 못할 수 있는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래서 다윗을 닮고 싶다! 그의 직면하는 솔직함을, 그의 직고하는 단단한 믿음을, 그의 믿음에서 나오는 담대한 평안함을 말이다.
-무엇보다 “여호와여!” 가장 먼저 찾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 절망속에서 절박하게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을, 그 단단한 신뢰를 닮고 싶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 왕권을 통해 인간 왕권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 관계를 묘사한다. 시인은 이와같은 묘사를 통해 지상의 열방과 통치자들의 행복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통치를 즐거워하는 것에 근거함을 보여준다. 또한 ‘나의 왕’과 ‘나의 아들’의 호칭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종말론적 메시아 개념으로 확장한다.
1. ‘어찌하여’ 메시아 왕권에 대적하는가?(1~3절)
이 단락은 ‘어찌하여’로 묶이는 시행들의 집합이다. 시인은 매우 격정적으로 질문하며 의분을 드러낸다. ‘어찌하여’로 시작하는 질문은 뭇 민족들의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강렬하게 개탄한다. 그들이 전쟁을 위하여 요란하게 움직이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작전과 음모 꾸미는 것을 질타하려는 의도다.
먼저 시인은 이방 나라들이 소동을 피우고 법석을 떨며 소동을 일으키는 행위를 비난한다(1절). 또한 어찌하여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 곧 통치자들이 일어나 함께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를 향해 대적하느냐 라고 외친다(2절). 시인은 하나님의 왕권과 그가 세우신 왕에 대항하여 반기를 든 열방과, 폭력과 위협과 음모로 가득한 세상을 고발하듯 표현한다. 열방의 왕들이 내거는 구호를 반박이라도 하듯 그대로 인용하여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3절)’고 외친다. ‘맨 것’과 ‘결박’은 일종의 은유이고 통치와 통제를 의미한다.
즉, 열방의 왕들은 하나님이 ‘그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를 통해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의도가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시온에 왕(메시아)을 세우시다(4~9절)
이 단락은 뭇 민족들과 열방의 통치자들의 음모와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다. 먼저, 하늘에 앉으신 자, 곧 주님이 그들을 비웃는다(4절). 그리고 분노하시며 그들을 향해 말씀하시는데, 타오르는 진노로 호령하신다(5절). 시인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대언하며 지상의 통치자들을 두렵게 하신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6절)’. ‘나의 왕은 누구일까?’ 하나님이 다윗 왕의 후손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신 후(삼하 7:16) 예언자들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 세워지는 새로운 왕을 예언했다. 또, ‘시온’ 즉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거처는 어디일까? 본래 시온산은 다윗성을 일컫지만(삼하 5:7), 시간이 흐를수록 이 의미가 확대되어 예루살렘과 솔로몬의 성전이 있는 서 있는 언덕이 된다. 즉, 시온산은 하나님이 구별하신 산으로서 주님이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장소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로 시작하는 7절은 왕의 선언과 왕이 인용한 하나님 말씀이다. 새롭게 왕이 된 사람이 기름 부음을 받고 왕좌에 앉은 후 하나님이 공식적으로 선포하신 말씀이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라는 이 말은 왕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부여하는 하나님 말씀이다. 그러면 누가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인가? 당연하게도 다윗의 왕권을 잇는 후손들이다(삼하 7:14). 그렇기에 다윗 가문의 영원한 왕권에 대한 약속이 재천명되고 갱신된 선포로서 기능한다. 또,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는 비유적인 표현은 즉위식으로 세워지는 왕의 신성함과 새로운 출생을 나타낸다.
이렇게 선포한 후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이 된 자에게 하나님이 ‘네게 구하라(8절)’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운 왕에게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주고, 왕의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를 것을 약속하신다(8절). 고대 근동 나라들의 왕은 신적 권력을 가졌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인간적인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열방을 ‘쇠 지팡이로 깨뜨리고 질그릇처럼 부수는’ 힘과 권세를 부여 받는다(9절). 매우 강하고 견고한 통치권의 상징인 ‘쇠 지팡이’와 그 반대 묘사인 ‘질그릇’이 대비되어 철저하고 완전한 파괴의 실행을 상상하게 한다.
곧 다윗 혈통의 왕이 실행하는 강력한 통치권이 ‘질그릇’ 같은 땅의 군주들을 철저하게 파괴하여 범세계적인 통치가 실현됨을 그려주고 있다. 물론 이 권세는 반역적이고 오만한 나라들을(2:1~3) 향해 행사하는 힘과 권세다. 그 권세는 왕의 인간적인 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권세에 기초한 것이다.
3. 열방의 왕들에게 하는 권면(10~12절)
시온, 곧 예루살렘 왕이 등극했다. 시인은 오만한 지상의 왕들과 권력자들을(2:1~3) 향해 경고하고 권면한다. 시인의 의도가 정확히 드러나는데, 군왕들에게는 지혜를 얻고, 재판관들에게는 교훈을 받으라고(10절) 경고한다. ‘지혜를 얻으라’는 말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통찰력을 얻으라는 권면이지만, ‘교훈을 받으라’는 말은 좀 더 엄격한 표현으로 징계를 받고 이치에 맞게 자기를 수정할 줄 알라는 말이다. 세상의 왕들과 재판관들을 향한 조언이 계속 이어진다. ‘여호와를 두려워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라(11절)고 한다. 이스라엘의 지혜 신앙 진통에서 ‘여호와 경외’는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다(밤 1:7; 9:10).
마지막으로 시인은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12a절)’고 한다. 이는 여호와가 분노하여 길에서 멸망하지 않도록, 그분이 진노가 일순간 확 불타오르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12bc절). 입맞춤은 경의와 겸손과 복종의 표시다. 시인의 마지막 고백이 의미심장한데,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자는 행복하다(12d절)’이다. 경고 이후 제시된 초대다.
시인은 시온에 세우신 하나님의 아들인 왕의 통치를 받도록 경고했고, 이제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피하여 행복을 누리라고 권면했다. 시인은 왜 이런 의도가 담긴 시편을 시작하는 처음에 배치했을까? 그것은 사람이든지, 민족과 나라든지 삶의 행복이 무엇에 기초를 두는지, 시편의 언어로 역설하기 위함이다. 또, 통치자들의 행복은 어디로부터 시작되는지를 제시하기 위함이다. 행복한 사람, 또는 복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읊조리며 깊은 묵상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인 것처럼(1:1~2),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 무거운 책임감을 가질 왕들과 통치자들의 행복의 기초와 근원이 무엇인가를 경고함으로 권면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시편 1~2편은 각 사람에서부터 나라의 권력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가르침과 통치권을 겸손히 받들고, 그 보호 아래 있는 것이 행복임을 역설한다.
나는?
-표현이 다르지만 1편과 비슷한 주제다. 악인과 의인, 복과 멸망을 대조를 이룬다. ‘기름 부음 받은 자’와 그의 나라, ‘세상의 군왕들(관원들, 재판관들)’과 그들의 나라가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나라와 나라, 왕과 왕의 관계가 아니라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와 그의 통치를 거부하는 ‘세상의 군왕들’이 대립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들의 대립을 노래하는 것도 아니다. 장소만 ‘시온’으로 언급 했을 뿐, 하나님께서 세우신 ‘메시아(기름 부음 받은 자)’와 이방 나라들의 대립을 노래한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대립을 묘사하는 것이다.
-인간은 늘 그래왔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자기 나라들을 통치했다. 자기 나라를 하나님과 상관 없이 통치 하기에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고, 관계된 모든 것을 끊어 버린다. 자기 잘남으로 살고자 한다. 하나님은 필요 없다고 한다. 어쩌면 이 시대와 이리 판박이인가! 하지만 이런 인간들의 도모는 하나님께 헛된 것일 뿐이다. 그의 변치 않는 권세와 권능(철장, 쇠 지팡이_9절)은 이런 인간들의 도모를 질그릇을 깨뜨리는 것 같이 부숴 버리신다. 군왕들의 강함은 하나님 앞에 약하디 약한 질그릇 같다! 어찌 그것을 모를까?
-복된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세우시는 나라이다(6절).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왕, 메시아가 선 나라이다. 그 나라는 세상 군왕들, 관원들, 재판장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이룩한 나라처럼 ‘서로’ 헛된 일을 꾸미고 꾀를 내어 세우는 나라가 아니다. “나의 왕”을 나의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워 이룩한 나라이다. 자기들의 꾀와 헛될 일에 힘을 모으는 이방나라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실 나라의 유업이다(8절). 하나님께서 주신 “철장(쇠 막대기)”으로 그 이방나라들의 분노와 헛된 일과 꾀들을 깨뜨리신다(9절). 질그릇을 깨뜨리듯 철저하게 부수신다.
-시편 1편에서도 “하나님의 가르침(율법, 토라)”을 주야로 묵상하며(읊조리며) 즐거워하는 자가 복 있는 삶이라 노래 했다. 역시 본문에서도 복된 나라는 “그의 교훈을 받는” 나라임을 노래한다(10절). 이 나라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 하는 나라이다(11절)”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의 교훈을 받고, 경외하며 섬기고, 떨며 즐거워 하는 나라가 복된 나라이다. 결국 왕의 힘으로 존속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훈(토라)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들 두려워(떨며) 하나 즐거워함으로 사는 나라가 “복된 나라”이다.
-개인의 복도 하나님의 가르침(토라)을 즐거워하여 사는 삶이라고 노래하고(시편 1편), 나라의 권력자들의 복도 하나님의 가르침(토라)과 통치를 경외함으로 섬기며, 그 아래 있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참된 복임을 노래한다(시편 2편).
-그렇다면 헛된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그런 나라는 악인의 삶처럼 이방나라들도 서로 헛된 일을 꾸미고, 서로 꾀를 내어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고, 통치(맨 것, 결박)를 거절한다.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대적”하겠다는 것이며, 또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이 대적을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군왕들, 관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겠다며 “분내어(흥분하여) 서로 힘을 합하여 전략을 낸다. 자기가 유일한 통치자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왕은 자신이 “신”이 되고자 했다.
-고대의 왕들이 다 그랬지 않았던가! 자신을 곧 신과 동일시하여 얼마나 많은 폭력과 억압을 행사하며 개인의 영달을 누렸는지 몰느다. 이런 특권(?)을 간섭받고, 지적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도 ‘신’이 되어 더욱 “신 처럼” 행동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나라들의 행동을 하나님은 “웃으신다”, “비웃으신다” 에고… 쯧쯧쯧 이라는 거다!(4절) 하지만 그저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분과 진노”를 유발한다(5절).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며 대적하는 왕과 나라들에게 반드시 심판하신다. 그것도 “급하게(반드시, 속히_12절)” 망하게 하신다. 하나님과 그의 기름부은 받은 자를 대적하는 나라와 왕들, 관원들, 재판장들은 반드시 자신들이 가는 길에서 망한다!(12절) 망할 길을 가는데 그들은 알지 못한다…
*행복한 나라가 나의 나라이기를 소망한다. 헛된 나라를 발버둥치며 세우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기를 기대한다. 이런 나라의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이다. 이 통치를 거부하거나 대적하는 것은 헛된 나라, 이 통치를 기꺼이 받아 들이되, 경외함의 떨림과 기꺼이 섬기는 즐거움으로 이를 누리는 것이 복된 나라다! 나의 삶이 복된 길, 복된 나라이어야 하리라!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부지중에가 아니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것이었다! 이것이 통치에 대한 거역이다. 그래서 에덴동산은 더 이상 그들의 나라가 되지 못했다.
*요즘 시대가 이런 시대다. 내가 나를 완전히 다스리고 싶어한다. 내 인생 내가 마음대로 할거야! 라고 아주 당연하게 외친다. 함부로 행한다. 나에 대하여 자신 외에 어느 누구의 다스림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타인은 나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허 그것 참… 자기 자신은 자기의 말만 들어야 하고 다른 사람도 나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이런 억지가 어디있을까?
*이런 모습이 결국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이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제 마음껏” 반드시 망하는 헛된 길, 헛된 나라다. 그런데 이만큼 달콤한 것은 없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즐거울까! 하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진정한 즐거움이다. 그를 경외하여 떨림으로 함께 하는 “즐거움”! 이 의외의 역설이 인생을 복되게 한다. 내가 왕은 아니지만 왕처럼 살도록 누리게 하신다. 나의 말대로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교훈따라 살면 그 길이 형통하다! 형통을 경험하면 즐겁다! 이 진정한 즐거움을 누리며 그 안에 거하는 것이 복 되다!
*행복한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나라! 반면, 헛된 나라! 자기 통치가 난무하는 나라! 우리 공동체가 행한 나라이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내고 그 통치를 즐거워 하는 공동체! 그 공동체가 바로 더온누리공동체다! 더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하나님 나라 진실한 공동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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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5일
♥여름행사 – 7월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음세대를 소중히 책임지는 교육부서 여름행사 일정을 참고하셔서 기도와 후원으로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시지요? 우리

2026년 6월 28일 주보
♥교육부 여름 행사 – 다음세대를 소중히 책임지는 교육부서 여름행사 일정을 참고하셔서 기도와 후원으로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시지요? 우리

2026년 6월 21일 주보
8월 캄보디아 선교 사역에 수건을 모아 전달하고자 합니다. “새 수건”이 집에서 쓰지 않거나 남은 것이 있으시면, 포장을 벗겨서

더온누리교회 전임 및 파트 교역자 청빙 공고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갈 동역자를 기다립니다. 전주 더온누리교회(www.theonnuri.org)에서 함께

#더온누리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은혜를 함께 나눠요. instagram에서 "#더온누리교회"를 태그해 주세요:)
빌드업🌲(마무리)
사랑하는 더원공동체에게☺️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더원공동체 모두의 하루와 삶에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더원공동체#더원#더온누리교회#청년부#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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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10)
2026 더원공동체가 빌드업이라는 주제로 여름수련회를 함께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더욱 하나가 되는 더원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엡2:22
#더온누리교회 #더원 #청년부 #여름수련회 #전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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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제물 팀별 교제 💪🏻❤
향기로운제물은 더 건강한 공동체를 세워가기 위해
세션팀, 싱어팀, 미디어팀으로 나누어 교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함께 식사하고, 웃고, 삶을 나누며
예배를 준비하는 동역자에서
서로를 더욱 알아가는 가족이 되어가는 시간이었습니다.
무대 위에서의 예배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 함께하는 교제가 모여
더 깊은 예배를 만들어갑니다.
앞으로도 한마음으로 주님을 예배하며
맡겨주신 자리에서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
향기로운제물 팀별 교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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