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야곱과 요셉이 22년만에 상봉한다. 형들에게 심부름을 보낸지 22년만에 가나안이 아니라 애굽 땅 고센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늘 생각나는 장면은 ‘이산가족’이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이다. “…요셉이 아버지 이스라엘을 보고서, 목을 껴안고 한참 울다가는, 다시 꼭 껴안았다(새번역_29절).” 22년만의 상봉은 꼭 껴안고 한참 울다, 또 껴안고 울다가 그렇게 이루어졌다.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얼마나 기쁘면 저리 꼭 안은 손 풀지 않으려 또 안고 또 안았을까!
그렇게 재회의 기쁨을 누린 후 바로 접견 계획과 향후 정착 계획을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31-34절). 요셉은 가족들을 맞아 들이기 위해 치밀하게 생각하고 준비하였던 것이다. 요셉의 치밀한 준비는 이후 400년간 장기간 거류하게 될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교, 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게 하였다. “…. 이집트 사람은 목자라고 하면, 생각할 것도 없이 꺼리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새번역_34하)”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혈통을 순수하게 지키며 민족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요셉이 미리 일러둔 대로 바로를 접견하고 바로는 요셉에게 애굽에서 가장 좋은 땅에서 살도록 공식적으로 허락한다. 요셉이 계획한 대로 고센 땅에 거주하도록 이르고 형제들 중 자신의 짐승을 맡아 기르도록 명령한다(5-6절). 이어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따로 바로를 접견하도록 했다. 야곱은 바로를 접견하며 두 번의 축복(기도)를 해 준다. 야곱의 축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바로가 야곱에게 묻는다. “어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새번역_8절). 야곱이 대답한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새번역_9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12:3), 야곱 자신에게도 약속하셨던(28:14) ‘땅의 모든 족속이 그들과 그들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는 약속이 성취 되었다. 애굽과 온 땅이 아브라함과 야곱의 후손 요셉을 통해 심각한 기근으로부터 살아남게 된다.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실제하며 야곱은 생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렇다!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이 기막히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 만큼 짜릿한 것은 없다!
1.왜? 고센 땅일까?(34절)
요셉은 일관되게 야곱과 형제들에게 ‘고센땅’을 바로에게 고하도록 치밀하게 답변까지 미리 알려주며 준비했다. 왜 그랬을까?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집짐승을 길러온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이 다 그러합니다’ 하고 대답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형님들이 고센 땅에 정착하실 수 있습니다. 이집트 사람은 목자라고 하면, 생각할 것도 없이 꺼리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새번역_34절).” 이집트 사람들은 목자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꺼리고 가까이 하지 않기에 쉽게 애굽의 중심부에서 떨어진 고센땅을 허락할 것이다는 논리다. 요셉은 왜 이렇게 계획을 세웠을까?
22년간의 애굽에서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다. 하지만 요셉은 애굽의 종교와 문화, 사회, 정치 구조 속에서 그도 원치 않는 애굽의 문화, 격식에 맞춰야 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애굽 총리로서 애굽의 격식과 복장을 했기에 형제들이 알아채지 못한 점 등이다. 하나님을 믿는 삶의 체계가 애굽의 중심부에 함께 섞여 지내는 순간부터 겉잡을 수 없이 혼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나님이 없는 제국의 문명은 가나안 땅 시골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눈이 돌아가고 마음이 빼앗길 가능성이 충분했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가족이 하나님 없는 애굽처럼 동화 된다면 이처럼 심각한 결과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애굽 안에서 살아야 하나 애굽처럼 되지 않기 위해 하나님 없는 우상문화와 타락한 문화에 젖어 들지 않기 위해, 애굽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고센 땅은(실제로 이 땅의 위치는 가나안과 가장 근접한 애굽의 변방이다) 하나님 가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요셉의 배려였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이와같은 분별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세상속에 살지만 세상 문화와 구별되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중요한 정체성이다.
2.축복의 힘(권위)는 어디서 나오나?(9절)
야곱은 바로를 접견하며 처음과 끝, 두 번의 축복을 한다. 접견을 시작하며 왕국 규례에 걸맞지 않는 야곱의 축복은 결례가 될 수 있었겠으나 바로는 감명을 받은 듯하다. 야곱의 나이를 묻는 것은 그가 받은 축복에서 오묘하고도 신비한 뭔가를 느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야곱은 그 질문에 그저 나이만 밝히지 않았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_새번역)”이라고 첨언 한다. 하나님과 함께한 삶이 130년이라는 거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은 하나님 계신 곳으로 가기 위해 걸어온 햇수, 혹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 햇수로, 혹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세월로 읽어도 될 것이다.
즉,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연수(연륜)에서 나오는 축복의 깊이라는 의미다. 하나님 뜻대로 조각된 시간들에서 나오는 삶의 연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의미기도 하다. 입술의 가벼운 말로 표현되지만 하나님과 함께 한 세월이 깃든 음성은 ‘오묘하고도 신비한’ 깊이를 느끼게 할 것이다.
나도 하나님과 함께 한 세월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며 증거할 때 힘이 되고 연륜이 더 하여 질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나의 뜻을 꺽고 내려 놓는 시간들 속에서 다져지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무게가 나의 입술의 말과 마음의 행동으로 드러나기를 바란다. 영향력을 끼치는 삶이 되기를 고대한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하나님의 권위가 드러난다.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을 빌 때 권위(힘)가 드러난다.
나는?
-요셉의 치밀한 준비가 도전이 된다. 흔히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면 삶이 매우 비체계적, 비논리적이 될 수 있지만, 충분히 설득되는 논리적이고 치밀한 준비가 야곱의 가족들의 거주지를 무리없이 확정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주님께서 맡기신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세상 속에서 구별되게 이끌기 위해 요셉의 이런 면이 나에게 더욱 갈고 닦여지면 좋겠다. 좀 더 생각하고 좀 더 가다듬어 마음에 동의가 일어나게 하여 기꺼이 움직이도록 하는 그 치밀함이 나에게 더욱 필요하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길, 이루시는 일이지만, 요셉의 지혜로운 치밀함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돋보이게 한다. 나의 목회도 나의 지혜로운 치밀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돋보이도록 하고싶다. 나의 무지나, 지혜롭지 못함이나, 준비하지 못함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실망하게 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구별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요셉이 인간적인 마음으로 거주지를 정했다면 가나안의 순박한 삶을 살다온 이들에게 당시 세계의 중심부의 화려한 문화와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하고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나!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섞이지 않는 것이었다.
-신앙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세상 문명의 달콤함과 구별되고 믿음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각성해야 한다.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문명의 중심부에서 스스로 멀어졌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나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세상 문명의 중심부에서 스스로 멀어져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 속에 있으니 분발하여 굳세게 하나님 나라 가치를 지켜 나가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 온 사람이 빌어주는 축복은 급이 다르다! 흔히 영성, 혹은 영력이 있다고 하는 것이 이런 것을 가리킬 것이다.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 세상의 문명과 부대끼며, 정욕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기 위해 포기하고 내려놓고 빼앗기고 잃어버리는 시간들이 녹아져 연륜이 되는 것이다. 힘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럭 저럭, 대충 형식에 맞추어 아무리 오랜 시간을 흉내내며 살아온 들 그런 삶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권위가 상대방이 느끼지 못한다. 왕궁의 접견 양식조차 뛰어 넘는 돌출된 행동이었겠지만 바로가 순순히 받아들이며 감동을 받아 야곱과 좀더 내밀한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에 근거한다.
-나그네와 같은 험악한 인생의 시간 속에서 이를 충분히 견디고 이기게 한 하나님과의 은혜의 동행에서 삶의 힘이 나온다! 권위가 나온다. 나에게도 이 힘과 권위를 여전히 주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지금 내가 고뇌하며 근심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능히 견디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세상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힘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 하나님과 성실하게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도 하나님과 동행함이 나의 힘이다. 오늘도 나에게 깨닫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 말씀이 나의 힘이다.
*말씀이 힘(HIM)!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야곱이 드디어 애굽으로 일가족을 이끌고 출발했다. 아들 요셉이 살아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기쁨과 아브라함때부터 삶을 일구어 온 가나안을 떠나야 하는 두려움(막막함, 아쉬움 등등 여러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이 교차하였다. 무엇보다 매우 늙어서 이동하는 여정에 대한 부담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도전을 앞둔 야곱은 하나님과 어떻게 이 길을 시작했을까?
1. 하나님과 독대하다!(1-2절)
22년동안 자신의 삶을 깊은 어둠에 거하게 했던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 자체가 그의 영혼에 햇빛이 비친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온 가족이 “함께” 내려간다. 기쁨과 환희의 이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 자체가 삶의 중대한 변환점, 도전점 이었기에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야곱은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린다. 자기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의 ‘브엘세바’에서 ‘희생제사’를 드린다. 그리고 그 밤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뵙는다. “밤에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이스라엘을 부르셨다. 야곱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새번역_3-4절).”
야곱은 여러 번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즉 독대하였다. 형 에서의 살의를 피해 하란으로 내려가는 중 ‘벧엘’(‘브니엘’)에서, 그리고 온 가족과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 올 때 역시 ‘벧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제사를 받으신 후 밤중에 야곱을 부르신 것이다. 온 가족이 애굽으로 출발할 때 이미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면 자신이 살아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21장), 아버지 이삭이(26장) 거처를 옮길 때 제사 드렸던 것처럼 자신도 드렸을 가능성이 크다. 브엘세바는 야곱의 가족들의 중요 거점이기도 했고, 이곳은 남방 한계선 이었기에 여기를 지나면 광야가 시작되고 그 광야를 지나면 애굽이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이렇게 가나안에서의 자신의 마지막 제사(예배)를 드린 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야곱이 하나님과 독대한다. 삶을 마무리해야 할 나이임에도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는 그의 길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시작했다.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인생은 두려울 것 없다. 또한 여지껏(매번) 드러나지 않았을 지라도 하나님은 늘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다(3-4절)
“나는 하나님, 곧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거기에서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내가 반드시 너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새번역_3-4절).” 애굽으로 내려 가는 것에 대해 요셉을 만나는 기쁨도 있었지만 두려움도 분명히 있었음을 하나님은 아셨다.그래서 먼저 격려하신다. “나는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아라(2절)” 이후 분명한 약속을 주신다. ‘내가 거기서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3절)’ ‘나도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 간다!. 그리고 내가 “반드시” 너를 데리고 나온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4절)’
세 가지의 약속을 주셨다. 첫 번째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들려 주셨던 하나님의 계획, 민족을 이루게 하는 약속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겠다는 거다. 두 번째 약속도 마찬가지다. 민족을 이루어 가는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백성, 자녀들이 있는 곳에 나도 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들어갈 때도, 나올 때도 “내가(하나님께서)” 주관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약속은 야곱의 연로함으로 인해 여행의 고단함 때문에 혹시 내려가는 길에 잘못되어 요셉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와 같은 두려움을 가진 야곱을 어루만져 주시는 약속이다. 걱정마라, 요셉이 너의 죽음을 지킬 것이다.
특히 두번 째 약속은 야곱의 온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든든한 약속이다. 지금 내려가는 것에 함께 하실 뿐 아니라 돌아오는 것까지 함께 하신다는 이 약속은 400여년이 지난 훗날 후손들이 누리게 될 약속이기 때문이다. 지금 애굽에 있는 요셉에게만 있는 약속이 아니다. 애굽을 향해 내려가는 야곱에게만 약속된 것도 아니다.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은, 집짐승과 가나안에서 모은 재산을 챙겨서, 이집트를 바라보며 길을 떠났다. 이렇게 야곱은 자기 자녀들과 손자들과 손녀들 곧 모든 자손들을 다 거느리고 이집트로 갔다(새번역_6-7절).”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6절)….자기 자녀들과 손자들과 손녀들 곧 모든 자손들을 다 거느리고(7절)’ 라고 기록한 대로 “모두”에게 주신 약속이다. “함께” 살고 있었던 모든 가족 “모두”를 하나님께서 데리고 들어 가시고 민족으로 불어난 “모두”를 하나님께서 데리고 나오실 것이다.
3. “함께” 내려간 야곱의 가족들(8-27절)
레아와 실바의 후손들(8-18절), 라헬과 빌하의 후손들(19-27절)의 순서로 기록하였다. 모두 합한 가족 수는 70명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이래 벌써 70명이 된 것이다.
그런데 70명의 가족 인원은 정확한 총합이 아니다. 병행 본문인 민수기 26장이나 역대상 4장의 기록과 차이가 분명하다. 또, 요셉의 자손도 아들 둘만 두지 않았다. 사도행전의 스데반은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가족을 75명으로 명시한다. 이는 요셉의 아들을 9명으로 기록한 70인역에 따른 자연스러운 통계다. 즉 의도적으로 ’70’이라는 숫자에 맞추어 기록했다는 뜻이다. (창세기는 야곱의 가족 인원을 70명으로 기록했지만 먼저 노아 후손이 흩어져서 이룬 열국의 수도 70개로 기록했다. 이를 신학적으로 흩어진 70개의 열국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 70명을 대비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애굽으로 내려간지 4대(430년)만에 민족을 이룰 것이다 라고 약속해 주신 대로 출애굽 직후 이스라엘 후손의 숫자는 장정만 60만명이었다. “약속하신대로” 이루시며 야곱의 가족들 70명이 “함께” 애굽에 거주하는 4대 동안 늘 함께 하셨다.
야곱의 가족 70명이라는 표현은 애굽으로 내려간 정확한 인원수가 아니라, 아무도 배제되지 않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형제간의 살해, 유기라는 극악 범죄 가운데서, 또 극심한 기근 가운데서도 이 가족은 흩어지지 않았다. 문제 많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이끄신 “진실함”의 시험에서 범죄의 고백과 회개를 통해 용서와 화해를 이루었다. 이렇게 이끄신 후 비로소 “한 사람의 아들들”로 “함께”하는 이들을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함께” 애굽으로 이끄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문제 없는 인생, 가족이 어디있겠는가! 모두가 문제 투성이였지만 하나님은 ‘단 한명’도 배제하지 않으신다. “야곱의 가족 모두”를 애굽으로 “함께” 이끄신다. 개개인의 면면이 잘나고 완전해서 “모두 칠십명”에 포함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저 암묵적인 동의와 묵인으로 잔혹한 형제에 대한 범죄가 벌어지게 했던 잇사갈이나, 납달리, 스불론과 같은 형제들도, 이후 제 멋대로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여 방탕했던 유다도, 세겜성에서 잔혹함을 절제하지 못했던 르우벤이나 레위도, 모두 하나님의 가족에서 배제 되지 않았다. 모두 다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민족을 이루게 된다.
늘 하나님과 동행했다던 요셉, 회개의 확실한 변화를 보인 유다 정도만 구원의 계보, 민족의 계보에 기록하지 않으셨다. 모두 빠짐없이 기록하셨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조차도 하나님의 나라 백성 계보에 들어오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은혜 아니면 이 나라에 들어가 살아 갈 수 없다.
나는?
-인생의 막바지, 안정으로 마감해야 할 나이에 애굽 이민을 결정했다! 아무리 그 나라의 총리 빽이 있다하나 새로운 도전이 주는 막막함과 두려움을 감출 수 없다. 이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야곱과 독대하신다! 걱정마라! 이 모든 일은 나의 계획대로 되어지는 일이다. 애굽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 말아라! 내려갈 때부터 다시 올라올 때까지 내가 함께 한다! 가족 70명으로 내려가지만 민족이 되어 나올 것이다. 너의 죽음을 요셉이 지킬 것이다.
-애굽으로 내려가던 야곱은 브엘세바에 이르자 거기서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다. 이곳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언약을 갱신하신 곳이다(창 21:31~33). 야곱은 분명 약속의 땅을 떠나면서 하나님께 허락을 받기 위해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고, 또 기근을 피해 어쩔 수 없이 떠나는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에 옳다 싶으면 앞뒤 가리지 않았던 옛날의 야곱이 아니었다. 야곱처럼 환경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여주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청종하면서 대답을 들어야 한다.
-얼마나 놀라운가! 하나님이 이끄시는 인생은 이처럼 “약속”에 따라 움직이는 인생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시며 그에게 애굽행을 허락하신다. 그리고 혼자 보내지 않고 자신도 동행하겠다는 복된 약속도 주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니 애굽이라도 안전할 것이다. 애굽의 안전은 요셉이나 애굽 땅의 부요가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자손 번성의 약속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을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이 4대만에 번성케 하여 다시 약속의 따응로 친히 이끌고 나오실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4대 내내 이 백성의 안전을 책임져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애굽에서 안전하게 살면서도 늘 나그네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실제 애굽을 떠날 때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낳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대로 선민의 수가 장정만 70만명에 이르게 하셨다.
-한편 야곱의 족보에서 강조되는 것은 유다의 아들들과 라헬이 낳은 아들들이다. 유다는 베레스와 세라, 그리고 베레스의 아들 헤스론과 하물까지 기록하고 있고, 라헬에게만 유독 ‘야곱의 아내’라는 호칭을 불러서 강조한다. 야곱의 영적인 장자는 유다가, 육적인 장자는 라헬의 아들 요셉이 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셉은 70명의 이스라엘(가족)을 구원하고, 다른 한 사람 유다는 그 후손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야곱의 가족 명부에는 이례적으로 여러 여인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남성들만의 이야기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온 다섯 명의 여인도 이러한 정신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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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해와 달, 열 한별이 엎드리다(16-20절)
태양신의 아들, 자신이 곧 태양인 바로가 요셉의 형제들에게 이른 말은 왕이 내리는 명령(조서)와 같은 형식이지만 내용은 가족들에게 하듯 세밀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 인상을 준다. 요셉의 말이기는 하지만 창 45:8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셨다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본문을 이어 생각한다면 바로의 반응은 자신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모시는 상황으로 바라보면 지극히 자연스럽다.
바로의 선대는 왕이 신하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받드는 공경이 묻어 있다. 요셉이 해와 달,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 이렇게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형식적인 엎드림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엎드림으로 이루어졌다. “이집트에서 가장 좋은 땅을 드릴 터이니, 그 기름진 땅에서 나는 것을 누리면서….(새번역_18절)” “이집트 온 땅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땅이 그들의 것이 될 터이니…(새번역_20절)” 바로는 요셉의 가족들을 마음을 다해 ‘아버지의 가족’처럼 선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바로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새번역_8절)”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다. 요셉을 노예로 내몰아 애굽으로 내던져지게 한 이해 못 할 섭리다. 노예로 내던져졌으나 총리의 자리로 오르기까지 “하나님이” 섭리하신 놀라운 은혜다. 결국 꿈을 주신대로 이루시는 섭리다. 그 과정이 요셉이 원하는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완성된 섭리다.
흉년이 아직 다섯 해나 남은 시점에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을 안전히 보호하기에 충분한 여건을 미리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이를 위해 온 애굽이 요셉에게 큰 빚을 지게 하신 결과다. 하나님의 섭리는 예측불가지만 그의 뜻을 믿고 순종하며 성실하게 걷다보면 어느새 완성되어 누리게 하신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헛되이 붙잡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하루를 그저 하나님 뜻대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라는 고백처럼 의지하고 살 때 “때”가 되면 찬란하게 누리게 되는 은혜다.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꿈 꾸게 하신대로, 요셉은 그 놀라운 정점을 누리고 있다.
2.요셉의 여행 준비(21-24절)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정점을 누리는 순간에도 요셉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지키고 나누려고 세밀하게 반응한다.
먼저 형제들에게 바로가 명령한 대로 수레 여러 대를 내주고 여행길의 먹을 것도 내어 준다(21절). 이것은 바로의 궁에서 내온 것들일 것이다. 형제들에게는 새 옷 한 벌씩을 선물로 준비한다. 베냐민에게는 특히 용돈과 옷을 다섯벌이나 주었다(22절). 여기에 ‘아버지에게 드릴 또 다른 예물’을 마련한다. “…이집트에서 나는 귀한 물건을 수나귀 열 마리에 나누어 싣고, 아버지가 이집트로 오는 길에 필요한 곡식과 빵과 다른 먹거리는 암나귀 열 마리에 나누어 실었다(새번역_23절).” 분량 자체가 어마 어마하다.
요셉은 아끼지 않는다. 형제들을 만난 기쁨에 베풀고 베푼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이런 공동체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신 이 땅에서의 부와 명예, 권력은 이렇게 나누고 섬기도록 허락하셨음을 알고, 머리 속 지식에 머물게 하지 말고 행동하는 베풂이 기쁨을 배가 시킴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이보다 더 중요한 행간은 요셉의 용서와 화해는 진실하다는 것이다. 바로가 선대하니 나도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형식적인 베풂이 아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선물뿐 아니라 오가는 여정의 준비까지 완벽하게 준비한다. 온 가족이 내려와야 하기에 그에 걸맞는 치밀한 준비를 함께 배려한다. “이집트의 진귀한 물건은 수나귀 열 마리에…이집트로 오는 길에 필요한 곡식과 빵과 다른 먹거리는 암나귀 열마리에 나누어 실었다(새번역_23절)”
애굽과 가나안을 오가는 여정은 단순한 일정이 아니다. 가나안의 살림을 모두 정리하고 가축들도 함께 내려와야 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상당 기간 소요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선물과 곡식을 싣고 올라간 나귀들의 등에 다시 가족들의 짐을 싣고 내려 올 것이다. 그러나 굳이 수나귀, 암나귀 각 열마리씩 준비한 것은 그 기간에라도 자연스럽게 나귀들이 불어나도록 염두 한 것이 틀림없다. 또 여행중의 우유 공급도 염두한 듯 하고… 요셉은 이렇게 지혜롭고 치밀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시는 길에 서로들 탓하지 마십시오(새번역_24절)”라고 당부한다. 이것은 형제들이 여행 중에 갈등하지 말라는 의미로 대부분 받아들이지만,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는데 굳이 이런 다툼을 다시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와 관련된 유대 주석가들의 해석은 여행길에서 늘상 마주치는 노상강도를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귀중품과 물건을 싣고 가나안으로 돌려 보내는데 요셉이 어느 정도의 경호원을 함께 보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살아있는 것을 알릴 때 자신들의 과거 범죄의 책임 공방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찌 되었든, 요셉은 지금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은혜들에 이런 상황들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고하게 행동으로 보여준다.
충분히 정죄하고 판단할 수 있음에도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기에 그저 감사하며 용서와 화해를 이룬 마당에 과거의 행적에 얽매여 마음을 빼앗기고, 다시 그 선하지 못한 감정에 휘둘려서 이 기쁨의 여정이 훼손되지 않기를 최선을 다해 점검하는 모습으로 나에게는 비춰진다. 화해하여 아낌없이 선물을 베풀고 용서 했으니, 더 이상 과거의 책임 유무,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으며, 너무나 사랑하기에 가장 귀한 것, 오가는 모든 여행 물품을 넘치도록 여유롭게 준비하는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귀한 은혜를 지키며 누리려는 모습이 읽힌다. 나도 그리해야겠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지키기를 베풀고 나누며 누려야지. 말로도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 깨어 있어 노력해야 겠다.
3.내 아들 요셉이 살아있다니! 암, 가고 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25-28절)
상상해 보았다! 그 웅장한 수레 행렬이 야곱의 집에 도착하고, 형제들이 내려서 야곱의 장막으로 들어가 “오매불망” 애굽으로 내려간 베냐민을 기다리며 수심에 가득차 있던 그에게 아들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때, 야곱은 꿈 꾸는 것 같았을 것이다.
이것이 꿈이 아니라 생시인 것을 알아 차리게 한 것은 한껏 흥분하여 말하는 아들들의 아우성이 아니었다. 베냐민의 흥분된 목소리도 아니었다. “….이 말을 듣고서 야곱은 정신이 나간 듯 어리벙벙하여, 그 말을 곧이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요셉이 한 말을 아들들에게서 모두 전해 듣고, 또한 요셉이 자기를 데려오라고 보낸 그 수레들을 보고 나서야, 아버지 야곱은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새번역_26-27절).”
열한명의 아들들이 식량을 가지고 다시 돌아 온 것 만으로도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출발한 그 날부터 계속 ‘오매불망’ 바랬던 일이었을 것이다. 늘상 꿈 꾸었을 것이다. 아들들이 돌아온 그 날도 어쩌면 전날 밤 꿈을 꾸었든지, 낮잠을 자다 꿈을 꾸었든지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돌아왔다. 더구나 아들들이 전해 준 말은 그야말로 “꿈 같은” 이야기다. 죽은 줄 알고 그렇게 힘들었던 요셉이 살아있고 더구나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니… 그렇지! 이것은 꿈이다…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이 보낸 애굽의 수레들… 아마 이 수레는 평범한 수레가 아니었을 것이다. 왕궁에서 의전용으로 사용하는 매우 고급스러운, 아마도 야곱은 평생 보지도, 타보지도 못했을 화려한 수레였을 것이다. “그 수레들을 보고서야!”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 내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니! 암, 가고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 하고 이스라엘은 중얼거렸다(새번역_28절).” 하나님의 섭리가 이렇다.
요셉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임했던 “함께하심”의 형통이 22년만에 돌아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요셉의 살아돌아옴이,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형제들의 화해가, 친형을 다시 보리라고 생각조차하지 못했던 베냐민 등등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하나님이” 행하심으로 이루어졌다. 야곱이 바라는 대로가 아니었다. 형제들이 원하는 대로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형통이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죄에 대한 회개와 형제간의 화해가 이루어 지며 야곱의 가족 뿐 아니라 온 애굽 땅과 주변 세계까지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바로 그 ‘형통’이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는?
-요셉의 이야기의 행복한 클라이막스는 “하나님의 뜻”이 일상에서 행복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드러낸다. 이렇게 이루어지기 위해 2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요셉에게는 노예로서의 삶이, 형제들에게는 죄에 대한 자각과 고백과 회개가 이루어지기까지, 야곱에게는 아들을 잃어버리고 비탄에 잠기며 막내 아들도 애굽으로 내려 보내야 하는 결단이 이루어지기까지, 결국 시간이 필요했다. 삶의 모든 걸음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때가 필요하다.
-나의 삶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까지” 필요한 시간 속에 요셉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한다. 형들처럼 죄를 감추고, 속이는 시간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바로의 선대가 인상적이다. 얼마나 요셉을 신뢰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요셉의 요청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요셉을 위해 그렇게 베풀었다. 도전된다. 나의 삶도 나로 인해 공동체가 세상으로부터 선대 받을 수 있도록 올바르게 살아야겠다. 세상을 선함으로 대하며 살아야겠다.
-요셉은 자신을 악함으로 대한 애굽을 선대하였다. 충분히 노예의 신분을 안긴 애굽을 원망하고 대적할 수 있었으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성한다. 성실하게 일을 행한다. 그렇게 애굽을 선대했다. 더 나아가 극심할 7년 흉년을 대비하는 7년의 풍년 기간에 온 힘을 쏟아 준비하였다. 그 선대함이 바로의 선대함으로 돌아왔다.
-바로가 얼마나 요셉을 신뢰 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교회가 일상을 하나님의 선함으로 채워 나간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는 그 시간”에 세상의 선대도 나타나지 않을까? 까닭없는 조롱과 비난과 환난으로만 치부하지 말고 먼저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것이다. 이처럼 바로의 선대는 내 자신과 교회가 세상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일상에서 선함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삶이 하나님의 뜻을 어떤 상황에서도 순종할 수 있게 했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애굽이라는 나라를 살리고, 가족도 지킬 수 있는 역량을 구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형들을 이미 용서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의 실제가 이렇게 중요하다.
-결코 말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추상적일 수 없다. 말로만 고백하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곧 예상치 못한 삶의 환경이 닥치면 그 한계가 곧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난에 처해지면 처해지는대로, 성공하면 성공한대로 말뿐이 신뢰는 불평과 원망, 혹은 교만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오랜 시간 인격적인 관계를 다지고, 온 삶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것을 경험하며 이를 믿음으로 행사하며 뚜벅뚜벅 걷다보면,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의지가 생긴다.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살아온” 요셉으로 인해 형제들도 회복되고 특히 아버지 야곱도 회복된다. 즉 영향력을 끼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오늘 내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내 자신 뿐 아니라 형제들을, 공동체를 살린다는 의미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신뢰하며 인생의 걸음을 걷는 이들로 인해 공동체가 살아난다. 주위의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반응하게 된다. 주위의 환경이 어떠하든 오늘 내가 하나님을 신뢰함을 꿋꿋히 지키고 누리며 사는 것이 곧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사리며, 교회를 살리는 길이다.
*오늘 나는 “살리는” 삶을 살 것인가? “감추고, 속이며” 범죄하며 살 것인가? 오늘을 살리는 삶이 내일도 살린다. 내가 신뢰함으로 살아갈 때, 공동체도 신뢰가 살아난다. 요셉의 신실한 하나님과의 동행과 신뢰함이 온 애굽을 기근에서도 기쁨이 그치지 않게 했다. 요셉의 신실한 동행이 형제들을 회복시켰다. 요셉의 신실한 동행이 바로와 신하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요셉의 기쁨이 자신들의 기쁨이 되었다. 요셉의 신실한 동행이 야곱을 살려냈다! 나의 하나님과의 신실함 동행을 멈추지 말아야 할 분명한 이유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요셉이 드디어 자신을 밝힌다. 유다의 진실한 탄원을 듣고 더 이상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이 민족으로 태동하기 위한 요람을 준비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도단의 들에서 비극적인 생이별을 해야 했던 형제들이 22년만에 얼굴을 직면한다. 형들은 난감함과 당황스러움이, 요셉은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처음온 그때부터 지금까지 참고 억눌렀던 재회의 기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특히나 요셉은 “한 사람의 아들들”이 “함께”하는 형제들인가를 주시하며 점검했다. 그들이 말한대로 “한 사람의 아들들”임을 진실하게 증명하는 시험에 시험을 진행했다. 이 시험에 형제들은 그들의 ‘범죄’를 스스로 고백함으로, 시므온을 구하기 위해 돌아옴으로,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 은잔으로 도붇으로 몰릴 때 공동 연대의 책임을 표명함으로, 결정적으로 유다가 베냐민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간절히 간구함으로 “증명” 되었다.
형제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난 22년동안 암묵적으로 묻어 둔, 절대 꺼내지 말아야 할 도단 사건이 자연스레 소환되고 이에 대해 직면하는 시간들이었다. 22년동안 외면하고 속이며, 감추었던 그 범죄에 “진실”하게 직면함으로서 이 시험들을 통과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시험”은 진실함으로 인도하는 지렛대가 틀림없다. 스스로 진실에 대면할 수 없다. 예상치 못한 시험이 진실에 직면하게 했다. 시험이 진실을 직면할 기회가 되었다. 이 순간이 없었다면 여전히 그렇게 아버지와 서로를 속이며 뻔뻔스럽게 살아갔을 것이다. 믿음의 가족이라고 했으니 이렇게 속이면서도 예배도 드리고, 사역들도 했을 것이다.
요셉을 통해 형제들에게 던져진 이 시험은 그야말로 은혜였다. 형제들은 이 시험 속에서 자신들을 돌아보고, 아버지 야곱과 베냐민의 관계도 진지하게 목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거쳐 회복에 이르게 하셨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은혜다.
1.한참 동안 울었다(1-4절)
달리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22년동안의 세월이 담긴 통곡이었다. “한참 동안 울었다. 그 울음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으로 물러난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바로의 궁에도 들렸다(새번역_2절).” 그의 통곡소리가 총리 관저와 바로의 궁에 울려 퍼졌다. 22년만의 재회의 기쁨은 이렇게 우렁찼다.
반면 형제들은 놀랐다. 요셉의 통곡 소리 만큼이나 마음이 놀랐다! “….놀란 형제들은 어리둥절하여, 요셉 앞에서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새번역_3절 하).” 유구무언. 말문이 탁 막혔다! 어찌할 줄 모르는 형들을 일일히 안으며 한참을 운다. 막내 베냐민을 꼭 끌어 안고 한참을 운다. 형제들은 함께 달려들어 요셉을 끌어안아야 하지만, 22년전 도단에서 저지른 일이 그들의 마음을 붙잡는다. 그들은 말문도 막히고 몸도 굳어져 버렸다.
한참 동안 울고 있는 요셉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베냐민을 부둥켜 안고 우는 그 모습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을 일일이 부둥켜 안고 우는(15절) 요셉에게 어찌 할 바를 몰랐다.
2.똑같은 사건… 다른 해석…(5, 7, 8절)
형제들은 얼어붙었고, 요셉은 기쁨의 통곡이 터졌다. 22년만의 형제 상봉의 현장이 왜 이리 어색할까? 당연하다. 형제들은 22년전 그 사건을 늘 감추고, 덮으며 외면하고 살아왔다. 울며 불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동생 요셉을 뒤돌아 보지 않고 노예로 팔아버렸다. 그렇게 하고 아버지 야곱에게 들짐승에게 죽었다고 속이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런데 그 요셉이 살아있다! 더구나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니…. 요셉을 만난 지금 형제들에게 22년 도단의 들이 소환 되었다. 그 때의 일이 해결되지 않은 형들의 마음은 딱딱한 경직함이… 이미 이 일을 해결한 요셉은 기쁨의 통곡으로 형들을 끌어안는다.
요셉은 이 22년전 도단 들의 사건을 성숙하게 해석한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새번역_5절).” ”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새번역_7-8절)”
형들이 나를 팔아넘기긴 했지만 “하나님이” 앞서서 나를 보낸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앞서 나를 보낸신 것은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기 위하여, 자손들을 살아 남게 하시려고 그런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애굽으로 나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형제들에게 선언한다. 요셉은 도단 들에서 팔려 애굽에서 보낸 노예생활을 이렇게 해석한다.
단지 보내신 것 뿐 아니라 ‘바로의 아버지,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 어른,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새번역_8절)이라고 말한다. 태양신과 그의 아들 바로마저 자신에게 절하였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기막히다! 하나님 이끄신 삶이었다는 것이다. 이해가 안되는 일을 통해, 억울한 시간들이 쌓여서, 그 기나긴 시간들을 바라보며 관통하는 요셉 스스로의 해석은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이 이끌어 주신 시간, 하나님이 완성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내 인생의 시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요셉처럼 해석하는 믿음이 간절하다.
3.지체하지 말고 애굽으로 내려오시라(9-13절)
아직 흉년이 다섯해나 남았음을 상기 시키며(11절) 형제들에게 ’이제 곧’ 아버지 야곱에게 가서 지체하지 말고 애굽으로 내려 올 것을 당부한다(9절).
요셉의 당부에는 매우 구체적인 애굽 이주 계획이 담겨 있다. 온 땅을 휩쓸 심각한 다섯해 동안의 기근 속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지키시려는, 더 나아가 이미 말씀대로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계획이 담겼다(창 15:13-14).
요셉은 형제들에게 극심한 기근 속에서 살아남도록 살 땅을 이미 살 땅을 고센에 마련하고 온 가족이, 모든 재산을 가지고 내려 올 것을 요청한다. “아버지께서는 고센 지역에 사시면서, 저와 가까이 계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여러 아들과 손자를 거느리시고, 양과 소와 모든 재산을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흉년이 아직 다섯 해나 더 계속됩니다. 제가 여기에서 아버지를 모시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안과 아버지께 딸린 모든 식구가 아쉬운 것이 없도록 해 드리겠습니다’(새번역_10-11절)”
“지체하지 마시고(9절)…빨리 모시고 내려 오십시오(13절)”
지난 세월 동안을 억울함과 원통함과 분노의 시간으로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의 시간으로 성숙하게 해석하였다. 이런 요셉의 신앙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나! 똑같은 시간을 보내며 세상을 향한 원망과 불평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은혜로 바라보고 채우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곧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다!
나는?
-그렇다! 극적인 형제 상봉의 감동보다 더 극적인 것은 요셉의 지난 삶에 대한 해석이다. “하나님이… 다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를 이루신 것이다” 이를 통해 분노와 원망의 시선을 가뿐히 뛰어 넘고 화해와 용서에서 나오는 기쁨의 통곡을 터뜨릴 수 있었다.
-요셉의 통곡은 한 맺힌 통곡이 아니라 용서와 기쁨의 통곡이었다. 이미 한은 풀렸다. 노예에서 총리로, 총리로서 애굽 전역을 다니며 성실하게 사역하고 결혼하여 얻은 첫 째 아들을 낳으며 이 고백을 고스란히 이미 담았다.(므낫세-잊다)
-그리고 그 고백이 오늘 실제가 되었다. 아무리 고백하여 해결했다 하더라도 원수를 직면했다… 그러나 원수같은 형들을 바라보는 요셉의 눈은 이미 변해 있었다. “하나님이.. 이끄신 길”이었기에 기꺼이 용서할 수 있었다. 요셉임을 밝힌 그 자리에서 형들이 온 몸이 ‘얼어붙은 것’과 비교가 된다. 22년전 도단 들에서의 범죄를 고백하고 회개 했지만, 당사자 요셉 앞에서 정작 온 몸음 얼어 붙은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이미 “하니님이 하신 일”에 대해 고백과 삶이 실제가 되어 있었다. 기꺼이 형제들을 끌어안고 기쁨의 통곡을 흘릴 수 있었다.
-이는 이미 가족들의 이주 계획을 세우고 살 땅도 미리 정해 놓은 것을 보면 분명하다. 아마도 형들이 첫 번째 식량을 구하러 올 때, 아니 아들 므낫세를 낳고 에브라임을 낳으면서 이미 준비했을 것이다. 요셉의 신앙고백은 이처럼 실제적이었다.
-아… 나도 이처럼 실제적으로 말하고(고백하고) 행동하는 목사이기를 원한다. 입술의 고백과 삶의 행동이 이처럼 일치되어 함께 갔으면 좋겠다. 그래야지.. 암… 그래야지….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을 실제 하며 누리는 삶이 얼마나 축복된 삶 이겠나! 요셉은 기나긴 애굽에서의 22년동안 이를 실제 하며 누렸다. 주님으로 인해 구원 얻은 삶을 사는 오늘… 나도 역시 입술의 고백과 삶의 행동을 이리 일치하며 주님 안에서의 삶을 누리기를 간절히 원한다. “…..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나는 나에게 허락하신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똑같은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인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이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과 똑같이 해석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눈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을 마음으로 알고 보아야 하리라.
*특히 요셉이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 ‘하나님이 저를 이집트 온 나라의 주권자로 삼으셨습니다…(새번역_8-9절)” 라고 말한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기억하고 온전히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감동과 확신을 잊지 않고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을 분별하고 있는가? 인생의 어떤 사건들을 만날 때 과거 어느 때 말씀을 통해 각인해 주셨던 그 감동들이 현실이 되었음을 알아 챌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 긴밀하고 인격적인 관계가 유지 되는가?
*이것이 내가 말씀을 끈질기게 묵상하는 이유 중 하나다. “말씀으로 주신 감동…. 말씀을 통해 확인하게 하신다”
*목회를 하면 할 수록 분명한 목표가 있다… “말씀이 살아내게 한다”는 것을 날마다 증명하는 것이다. 여러 상황과 여건속에서 나를 굳건하게 붙잡는 것, 앞으로 달려 나가게 하는 것, 온전한 쉼을 쉴 수 있는 것… 그것은 “말씀이 나를 살아내도록 이끄심”을 믿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 맡겨주실 영혼들이 이것 하나로 각자의 삶을 꿋꿋하게 감당해 나가도록 돕는 것이 곧 나의 목사로서의 사명이다. 이를 위해 오늘도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정리한다. 요셉의 “하나님이…” 하셨습니다의 고백이 오늘 나의 고백이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1. 베냐민을 반드시 돌려보내야 할 이유(20, 23, 26, 29-31절)
먼저 막내 동생 베냐민을 반드시 고향으로 데려가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베냐민은 아버지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인데 이 아이와 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친형은 죽고, 홀로 남았기에 아버지의 사랑이 각별하다(20절)는 것과 고로 아버지의 생명이 막내와 연결되어 있다고 간절하게 설명한다. 이 아이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지 못하면 아버지는 의욕을 잃고 목숨을 내려놓을 것이고(23절), 그러니 베냐민은 꼭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에 시기와 질투로 요셉을 잔인하게 팔아 넘긴 유다의 모습은 온간데 없다. 요셉을 없애므로 야곱이 받을 고통과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유다가 이제 아버지가 감당해야 할 고통을 걱정하고 있다. 실제로 유다의 호소에서 ‘아버지’라는 단어는 17번 정도 등장한다. 베냐민을 반드시 고향으로 보내야 할 이유가 ‘아버지 야곱’ 때문임을 분명히 한다. 유다는 지금 아버지 야곱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편애하는 야곱은 정말 변하지 않고 있으나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22년전 태연하게 요셉을 팔아넘기자고 했고 야곱의 고통스러움을 안중에 두지 않았던 그는 지금 야곱이 겪어야 할 깊은 절망에 공감하며 이를 방지하고자 적극 직면하고 있다. 두 아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음을 당한 그 깊은 고통을 통과해서일까?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2.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32-34절)
유다는 아버지가 받을 고통을 생각하며 베냐민을 돌려보내 달라고 호소하면서, 그를 대신하여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자청한다(32-33절). 자신은 그런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고 간청한다.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고 죽이려던 형제들에게 몸값을 받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자고 하여 노예로 팔아버린 유다가 이제 자신이 ‘노예’가 되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을 애굽에 두고 온 것으로 인해 상심하고 영혼이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는 것 보다 차라리 여기에 남겠다는 것이다.
베냐민과 연결된 아버지 야곱의 생명을 구하려고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내어 놓는다. 동생 베냐민뿐 아니라 아버지 야곱에 대한 사랑이 실제다!. 아버지의 지독한 편애를 넘어선 “긍휼”이 기꺼이 자신을 종으로 내어 놓겠다고 호소한다. 그가 애굽으로 내려오기 전에 아버지 야곱에게 약속했듯 기꺼이 ‘담보’가 되겠다고 한 것이다.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3.더 나아가(33절)
유다가 이렇게 확실하게 변화된 것은 “그러니,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 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새번역_33절).” 이 고백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간청하는 모습에서 말이다.
은잔이 나온 막내가 자기 죄값을 치루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막내를 대신해 남겠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 형제들도 다 내려가고 ‘자신만’ 총리의 노예로 이 땅에 남겠다는 것이다.
유다는 애굽으로 떠나오기전 아버지 야곱에게 한 맹세 그대로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요셉에게 보인다. 22년전 동생 요셉을 상인에게 팔아넘긴 그 형이 아니다. 이후 ‘제 멋대로’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고, 아내가 죽은 후 거리의 창녀를 찾았던 그 유다가 아니다.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나는?
-22년동안 요셉을 노예로 팔아 넘긴 후 유다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제 멋대로”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여 낳은 세 아들 중 두 아들이 악함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죽음의 심판을 행하셨다. 후손을 이어야 할 문제로 인해 갈등도 있었다. 그 와중에 아내도 죽는다. 창녀를 거리낌 없이 찾을 정도로 그의 삶은 무절제 했다. 그런 그가 변했다.
-동생 베냐민을 보호하고 아버지 야곱을 위하는 마음이 각별하다. 가족들을 기근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뒤처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약속한 대로 지키려고 자신을 기꺼이 자신을 내어준다. 달리 무엇을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하나님의 주권에 간섭받는 인생은 이렇게 변한다. 22년동안 무던히도 변화되지 않았던 것이 순식간에 이리 바뀔 수 있다. 격한 감정의 말을 쏟아내는 것이 진정한 변화가 아니다. 자신과 자기의 가족조차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 야곱이 처하게 될 고통과 슬픔을 막기 위해 자신을 내던진다. 말뿐 아니라 행동이 거리낌이 없다.
*22년전에는 동생 요셉을 시기하여 서슴없이 노예로 팔아 넘겼지만, 지금은 아버지 야곱을 사랑함으로 자기를 희생하고 막내 베냐민을 반드시 돌려 보내려 한다.
*멈추지 않는 기근 때문에 위기에 처한 가족들을 위해 자신을 담보하여 아버지 야곱을 설득했고, 이제는 아버지 야곱을 위해 베냐민을 대신하여 스스로 대신 노예가 되겠다고 자처한다. 온 인류를 위해 대속의 제물로 오신 예수님이 오시는 가문의 조상다운 면모가 틀림없다. 이런 자기희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이후 넷째지만 영적 장자와 같은 자리로 우뚝 서게 했다.
*”제가 대신하게 하소서” 요셉이 보고자 했던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진실한 형제애가 구현되고 있다. 진실로 한 형제됨이 드러난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온 은잔을 탓하기 보다 “다 함께” 총리 관저로 다시 돌아와 “함께” 탄원하는 모습에서, 더 나아가 유다가 나서서 자신이 남을테니 동생 베냐민이 반드시 돌아가야 할 이유를 ‘아버지 야곱’에 대한 사랑의 모습을 보임으로 이 시험은 이미 통과 되었다.
*베냐민과 함께 애굽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43:8)”라고 말했던 유다가 이제는 “베냐민과 형제들은 다 돌아가고 내가 남겠습니다”, 즉 “다 살고 나는 죽으리다”고 외치는 것이다.
*유다의 이 말과 행동이 곧 예수님의 모습이 아닌가! “내가 죽어 다 살리이다!” 유다가 확실히 변했다.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여 형제들과 아버지 야곱을 살리려 한다! 나도 내가 확실히 죽고 죽어 공동체가 살아나도록 해야겠다. 지독한 내 입장, 주장을 죽여 공동체가 살아나도록 해야겠다. 거창한 희생을 꿈꾸는 망상보다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나의 이기적인 마음부터, 자기 중심적인 생활태도부터 버려야 겠다.
*오늘 내가 기꺼이 자처해야 할 그 무엇을 성령님께서 생각나게 하실 때 머뭇거리지 않으리라. 그래야 공동체가 산다! 유다도 확실히 변했음을 보는데, 나의 삶도 이렇게 확실한 변화를 포기하지 않으리라. 공동체의 확실한 변화를 포기하지 않으리라.
*유다가 확실히 변했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겉으로 일어난 상황은 첩자에 대한 진실 유무 지만, 이때부터 요셉은 형들이 과거에 행했던 “범죄”에 대한 진실함을 스스로 고백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을 의지가 있는지를 시험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형들은 자기들끼리 애굽 총리가 막내 베냐민의 소환을 요청할 때 요셉에 대해 저지른 범죄를 고백하고 괴로워 했다(창 42:21).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죄에 대해 이실직고 했지만 범죄의 당사자인 요셉과 아버지 야곱에게 직접 죄를 고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요셉 앞에 섰을 때 그들의 말의 진실함은 형식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형들이 요셉 앞에서 첩자가 아님을 변호하기 위해 자기들은 “다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고 말했었다(창 42:11). 베냐민을 데려 오면서 열 한명의 형제들이 함께 모여 형식적으로는 이를 증명했지만, 진정한 “한 사람의 아들들”을 입증해야 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시므온을 애굽에 볼모로 두고 다시 돌아온 시점이 두 번 왕복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 보기에 따라 오해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한 형제들’ 이라면서 시급을 다투지 않은 모습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늦게라도 돌아왔고 막내 베냐민을 데려왔으니 요셉의 입장에서는 나름 시험을 통과 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시험이 남았다. 정말 “한 사람의 아들들”인 이 형제들에게서 막내 베냐민을 갈라놓는다면? 형들의 반응, 태도가 궁금했다. 베냐민을 22년전(노예 13년, 풍년 7년, 흉년 2년째) 자신처럼 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진정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하나되어 행동할 것인가?
요셉은 형들의 죄에 대한 자백이 진실한 것인지, 제대로 시험을 걸어본다. 22년전 도단 들에서 자신은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었지만 하나같이 그렇게 여겨지지 않고 버려졌기 때문이다. 형들에게 요셉은 다른 어미의 아들이고 꿈 이야기하며 잘난체 하며, 아버지의 편애로 채색옷만 입는 밉상이었다. 도단 들에 자신들을 찾아오는 모습을 보며 ‘꿈 대로 되나 보자’며 어떤 방법이든 상관 없이 “살해”하려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구덩이에 던지고,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자신을 외면한 채 태연스럽게 밥을 먹은 형들이었다. 그리고 눈 하나 껌뻑이지 않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인신매매로 자신을 넘겼다. 형들에게 자신은 “한 사람의 아들들”이 아니었다.
막내 베냐민에 대한 형들의 마음은 어떨까? 요셉을 잃은 후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중 유일하게 남은 그를 요셉에게 한 것 이상으로 편애 했을 그 시간들 속에서 형들은 과연 베냐민을 “한 사람의 아들들”로 진정 받아들였을까? 요셉이 시험하고 싶은 대목이 이런 부분일 것이다. 형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1.이구동성, 한 마음으로…(9, 13, 16절)
요셉이 청지기를 통해 미리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감춰두고 청지기를 보내 자초지종을 말하며 나무랄 때, 형제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러자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그런말씀을 하십니까? 소인들 가운데는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새번역_7절)…… 소인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서라도 그것이 나오면, 그를 죽여도 좋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우리는 주인의 종이 되겠습니다(새번역_9절).” 은잔이 나온 그는 죽여도 좋고 우리는 주인의 종이 되겠습니다! 일단 “한 사람의 아들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한 사람의 아들들’의 끈끈함이 일단 보인다!.
청지기는 모두가 종이 될 필요는 없고 은잔이 나온 자만 종이 되면 된다고 했다(10절). 그런데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오고 말았다! 형제들은 “이것을 보자, 그들은 슬픔이 북받쳐서 옷을 찢고 울면서, 저마다 나귀에 짐을 다시 싣고, 성으로 되돌아갔다(새번역_13절).” “한 사람의 아들들”이 “함께” 고통스러워 하며 움직인다! 은잔이 나온 베냐민만 따로 총리의 집으로 보내지 않는다. “다같이” 움직인다!
그리고 질책하는 요셉 앞에 모두가 엎드린다(14절). 호통을 치는 요셉에게 유다가 말한다. “우리가 주인 어른께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우리의 죄없음을 밝힐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소인들의 죄를 들추어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을 가지고 간 아이가 모두 주인 어른의 종이 되겠습니다(새번역_16절).” 우리와 이 잔을 가지고 간 아이가 모두 종이 되겠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함께” 종이 되겠다고 자청들을 한다.
2.하나님이 소인들의 죄를 들추어내셨으니….(16절)
이렇게 “함께”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의 끈끈함, 책임의식, 연대감을 보이는 형제들의 모습은 “진실”했다. 그저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만일 형식적인 것이었다면… 22년전 도단 들에서의 형들의 모습이 나타났을 것이다. 은잔이 별견된 베냐민과 자신들을 분리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 형제라며 “다같이 노예가 되겠다”며 함께 요셉의 집으로 돌아왔다. 형들은 22년전 도단 들에서 한 짓을 재연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는 요셉을 팔 때처럼 베냐민을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 요셉을 배척하거나 손 댄 것처럼 막내 베냐민을 그렇게 하지 않고 형들이 보호할 것이다. 형들이 베냐민과 함께 할 것이다 라며 당연히 함께 움직인다.
유다가 요셉에게 고하는 말 가운데 “하나님이 소인들의 죄를 들추어 내셨으니…” 이 죄는 자신들도 모르게 감추어진 은잔을 들추어 내신 것으로 문맥상 표현하지만, 실상은 22년전 요셉에게 지은 죄를 들추어 내신 것으로 읽혀도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아들들”이 아니었던 그 때의 죄를 들추어 내셔서 지금 다시 “한 사람의 아들들”로 이 위기를 직면하게 하신 것으로 받아 들인다.
더구나 이 말을 하는 이는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버리자고 인신매매를 제안한 유다이다. 유다는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다시 내려올 때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생명을 걸고 베냐민을 지키겠다고 약속도 했다. 이것이 기근에서 도움을 받으려는 얄팍한 마음이 아니었고 “진실한” 마음이었음을 증명하는 듯 하다.
유다 뿐 아니라 형들은 처음 식량을 구하러 내려온 그때 첩자로 몰려 감옥에 갇힌 3일동안 ‘요셉에게 지은 죄’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루에 담긴 삭량 값을 확인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범죄함을 깨달아 두려워 하였다. 또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내려온 애굽에서 즐거운 점심을 함께 나눈 후 발견된 은잔 앞에서 유다는 22년전 요셉에게 행하였던 일을 다시 상기했다. 그리고 다시는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형제중 어느 누구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연함으로 “다같이 종이 되겠나이다!” 바짝 엎드린다.
나는?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 맞다. 베냐민과 함께 애굽에 도착하고 이어진 애굽 총리와의 즐거운 오찬으로 볼모로 잡혔던 시므온도 구했고, 첩자가 아님을 증명하여 식량을 구하고, 기근으로부터 가족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늘 이렇게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는데, 형들에게 또 시험이 기다린다.
-요셉은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진정한 형제애가 있는지 또 다른 시험을 준비했다. 그런데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지난 22년전 지은 죄에 대해 다루신다. 형제애가 있는지 보려 했던 시험을 직면하면서 유다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들추셨다’ 고백한다. 이 고백은 이중적임에 틀임없다. 어느 누구도 몰랐던 감추어진 은잔을 들춰 내신 하나님이 이를 통해 22년전 요셉에게 지은 죄를 계속 상기 시키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이렇게 철저하게 다루신다. 그러니 예수님이 오실 수 밖에… 대충 얼버무리고, 덮고 가는 것이 은혜가 아니다. 철저하게 드러내시되…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케 하시면서 해결하지 못한 죄를 떠올리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죄는 회개하여 해결받고 가는 것이 신상에 좋다. 그런데 그 해결은 단지 고백이나 자백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행동의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고백 이후 변화가 분명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단지 말 몇마디, 흘리는 몇방울의 눈물이 다가 아니다. 삶의 변화가 진정한 회개의 열매다.
-말 뿐인 “한 사람의 아들들”의 관계… 시기와 질투가 살인으로까지 이어진 명목상의 형제들이 아니라 진실한 “한 사람의 아들들” 형제애가 증명 되어야 한다. 그 실제적인 변화가 증명되야 시험이 끝난다. 지금 요셉 앞에 선 형들은 22년전 도단 들의 그들이 아니다. 베냐민과 공동 운명 되기를 기꺼이 자청하는 모습으로 확연하게 변화 되어있었다. 자기들 끼리의 도단 범죄에 대해 고백하던 입술에서, 발견된 은잔 앞에서 함께 통곡하고, 옷을 찢으며, 함께 다시 요셉의 집으로 돌아가는 형들이 되었다. 그리고 기꺼이 “함께 남아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22년전 도단 범죄를 재연 하지 않았다.
*묵상하며 나의 가족과 교회 공동체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연결된 하나된 공동체”이다. 형식적인 공동체일까? 함께 울고, 웃는 진정한 공동체일까? 맞다! 우리 공동체는 예수님과 하나된 공동체다! 시험의 연속인 삶의 현장에서 “한 형제”인 우리의 공동체는 “함께” 시험을 감당하고 책임을 지려고 기꺼이 함께 할까? 맞다! 우리 공동체는 기꺼이 함께 감당한다!
*나의 삶도 언제나 시험의 연속임을 안다. 요셉이 형들을 지켜보듯, 누군가 반드시 내 삶을 지켜보고 있음을 안다. 일상의 소소한 문제에서부터 공동체의 큰 문제까지 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볼 것이다. 내가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는지 꼼꼼하게 바라 볼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바라 볼 것이다. 나는 요셉의 형들처럼 시기와 질투에 취해 “한 사람의 아들들”이기를 포기한 결정의 도단 들에서 살지 않겠다. 은잔이 발견된 현장에서 함께 울고, 함께 달려와, 함께 엎드리는 그 현장과 같이 살겠다.
*묵상하며 문득 든 생각은 요셉의 치밀한 시험이다. 이만 하면 됐다에서 멈추지 않았다. 확실하게 확인하려고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한다. 단지 복수를 위한 시험이 아니라 변화를 확인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22년전 형들의 행동에 대하여는 이미 첫째 아들 므낫세를 낳으며 하나님 앞에서 정리했다. 그럼에도 형들을 어떤 지점까지 줄기차게 밀어부친다.
*놀랍다! 문득 공동체에서 사람에 대하여 너무나 가볍게(?) 믿는 경향이 떠올랐다. 특히 이런 경우와 상황으로 인해 공동체의 고통이 가중되는 경우를 꽤 보았기에.. 요셉의 치밀한 시험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싶다. “적어도 삶의 어떤 상황에서 그는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는지” 치밀하게 살펴보는 올바른 분별력은 정말 중요하다.
*이 세상은 험하고 인간은 악하다… 살펴보고 분별하여 판단해야 한다. 성도라고 무작정 믿으면 절 대 안 된다. 살펴볼 시간, 분별할 사건 등을 충분히 거치고 판단해야 한다. 그가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는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결정인지… 공동체를 위하는 결정인지… 분별하는 것이 곧 축복이다. 22년이 흐른 시간 속에서 형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요셉은 철저하게, 매몰차게 검증했다.
*이구동성… 우리도 세상의 시험을 직면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이구동성으로 고백하기를…
*함께… 문득 이런 말씀이 생각난다. “즐거워 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교회 공동체는 이래야 한다.
*나의 마음의 상태, 삶의 상황이 기준이 아니다. 말씀 앞에 무릎 꿇고 말씀에 하나되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이구동성의 고백과 행동이 삶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우선이다! 말씀 우선의 습관이 최소한 말씀이 나를 붙잡는 경험의 출입구다! 이 출입구가 없다면… 빨리 만들어야 한다. 뜬금없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본문 과도 상관 없다. 그런데 이 생각이 난다. 마치 전혀 연관성 없는 애굽 총리앞에서 22년전 도단 들 에서의 죄가 생각나는 유다와 형제들과 같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말씀 대로 살아가려는 몸부림의 출입구다. 이 출입구의 문지방이 닳아야 산다. 적어도 말씀을 다루는 목사라면 그래야 한다…. 내 마음을 헤집는 말씀을 경험해야하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고뇌하는 것이 일어나야 산다. 아픔이 있어야 성숙해 지듯, 말씀고민, 말씀직면, 말씀도전이 없는 목사가 어떻게 말씀으로 산다 할 수 있을까!….. 나의 삶이 이 말씀 고뇌가 끊이지 않는 삶 이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1.어리둥절… (16-22절)
애굽으로 내려가는 형제들의 발걸음은 “급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베냐민과 동행하니 “다 살고 죽지 아니할” 구원의 여정일 수 있겠지만, 벌써 두 번이나 왕복 했을 시간이 지났으니 애굽 총리의 마음에 자신들이 첩자임을 확신할 수도 있는 충분한 정황이었다. 볼모로 잡혀있는 형제가 있음에도 이렇게 감감무소식이니 이들은 틀림없이 첩자다 라고 여길 수 있는 정황이라는 거다.
무슨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애굽을 향한 급한 걸음의 형제들…그 두려움과 불안의 길 끝에… 애굽 총리 앞에 섰다. 요동 쳤을 그들의 마음이 쉽게 짐작이 간다. 그런데 한 애굽 사람이 오더니 그들을 총리의 집으로 안내한다. 그리고 그 집에는 점심 식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진심 예상치 못한 일에 ‘어리둥절’… 하지만 두려움을 더욱 커져 갔다. 뭔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일이 분명 잘못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총리가 요구한대로 ‘막내 동생’을 데리고 왔지만, 지난번 식량 구매 대금이 그대로 자루속에 들어있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빨리 그것부터 해명해야 했다. 말도 통하지 않을 총리에게 감히 직언 할 수 없으니 자신들을 안내하는 청지기에게 그 사정을 자세하게 말한다. 이야기를 다 들은 청지기의 반응이 형제들을 다시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세상에 애굽 사람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2.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23-24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23절)” 세상에 이게 무슨 말인가!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라니, 애굽에서 자신들이 집안에서 이야기하던 그 말을 애굽 사람의 입을 통해 듣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형제들은 아직 알지 못하지만 요셉은 이미 애굽으로 노예 생활을 하면서부터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살았다.
이를 보디발이 인정했고, 간수장이 인정했으며, 바로도 인정하였다. 그렇게 총리에 오른 후에도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바로에게 애굽의 이름을 하사 받았어도 자기 아들들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담긴 히브리 이름을 지어 주었다. 7년의 풍년을 지나면서 성실하게 자신의 직무를 감당하고 변치 않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았을 요셉이었다. 그런 그를 가장 가까이서 모신 청지기의 입에서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형제들이 어리둥절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들은 익숙한 ‘아버지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자신들이 먼저 고백하고 붙잡았던 것이 아니라 애굽 사람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또 이로 인해 자신들이 잊어 버리고 있었고, 지금껏 제대로 부르지 않았지만, 익숙하기 그지 없는 그 이름, “아버지의 하나님”을 우리는 왜 부르지 않았을까! 라는 마음의 꿈틀거림이 있었을 것이다.
아. 우리는 아버지의 하나님을 잊고 살았구나. 지금껏 “급히” 애굽을 내려 오면서도.. 아버지 야곱이 빌어준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14절)” 이 기도를 잊고 있었구나! 애굽 사람의 ‘너희의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 이 말이 형제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일깨운다!
3.꿈이 이루어졌다!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다(26절)
“요셉이 집으로 오니, 그들은 집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선물을 요셉 앞에 내놓고,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새번역_26절).” 요셉의 첫 번째 꾼 꿈, 열 한 곡식단이 자신에게 엎드려 절한 그 꿈이 이루어졌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한 것도 비로소 온전히 이루어 졌다. 이제 야곱의 가족이 이주하고 애굽에서 420년을 보내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요셉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을 이루신 하나님은 훨씬 이전 그의 증조부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하신 대로 차근 차근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가고 계신다.
나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형제들의 부분적인 변화들이 보였다. 늘 속이는 데 익숙했던 형제들이 기근이라는 위기와 시므온이 붙잡혀 있는 상황을 거치면서 점차 “정직함”을 회복하고 있다. 정황상 끝이라고 생각하는 지점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이실직고’하는 것일 수 있지만, 먼저 자신들의 자루속에 담긴 식량값의 자초지종을 솔직하게 청지기에게 이야기한다. “고난을 거치며 정직이 회복 되었다.”
-또 형제애가 점차 공고해져 가는 것을 본다. 엄밀하게는 ‘제멋대로’에서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점차 회복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유다”이다. 제멋대로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고 제멋대로 분가하여 살던 유다가 이 위기의 상황에서 ‘자원하여 희생’한다. 시므온도 살리고 가족들도 살리고, 베냐민을 끝까지 지켜 돌아오겠다며 맹세했다. 이 모든 모습은 오로지 기근에서 “우리 가족”이 다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형제들도 어떤 일이 기다릴 지 모르는 애굽으로 식량과 시므온을 구하기 위해 “함께” 떠난다. 20년전 요셉을 죽이고, 팔아넘기기 위해 하나되었던 형제들이 이제 “온 가족”을 기근에서 구하기 위해 “하나”가 되었다. 특히 자루속에 담겨진 식량값에 대하여 형제들 모두가 정직하게 연대하여 책임을 지려 한다. “하나님의 주권이 돌아온 야곱의 가족의 변화는 ‘정직’함부터 회복되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겉으로 보기에 정직함은 회복 되었다쳐도, 정말 중요한 것이 남았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의 회복이다. 길을 떠날 때 아버지 야곱의 축복을 형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을 수 있다. 여지껏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 형제들은 그 급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전적으로 매달리지 않았다. 사흘동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겨우 생각해 낸 것이 ‘하나님이 요셉의 일로 우리를 이 지경에 몰아 넣으신 것이다’였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매달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런 형제들의 마음과 귀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요셉의 청지기의 고백은 충분히 영적 충격을 받게 했을 것이다. 애굽사람의 입에서 나온 “너희의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23절).
-야곱도 형제들도 지난 20여년의 시간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보낸 시간이기보다, 속이고 속임 당하고 한탄하고 좌절하며, 스스로 고백한 것 처럼 ‘스올’에 파묻힌 세월이었다. 자기 자신밖에 보지 못한 세월이었다.
-애굽에 붙잡힌 시므온을 구하기 위해 급히 달려온 걸음 속에서도 건성으로 듣다시피 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라는 야곱의 축복은 신경도 쓰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너무나 부끄럽게도 자신들은 등한시한 하나님의 이름을 애굽의 청지기의 입을 통해 듣는다. 그것도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이다.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은 어느 정도 수긍하겠는데, ‘너희의 하나님’이라니… 너무나 낯부끄러웠을 것이다. 이와같은 영적 어리둥절함의 충격이 하나님의 이름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와 우리가 이런 당황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세상이 “너희의 하나님”의 정신을 오히려 교회에게 깨우치고 있는 형국이다. 하나님만 섬긴다는 교회와 하나님도 섬긴다는 세상이 오히려 교회보다 더 나은 품위를 보여주는 형국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이 말해주는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소리에 너무나 낯부끄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이 낯부끄러운 시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직하게 직면하게 할 것이다. 이 낯부끄러운 시간이 세상이 들려주는 ‘너희의 하나님’이 아니라 당당하게 외치는 ‘우리의 하나님’을 들려줄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사실 요셉의 청지기가 요셉에게 이와같은 영향력을 받았기에, ‘너희의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았겠나! 더온누리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당당하고 선명하게 ‘우리의 하나님’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공의와 정의, 성실함의 삶을 각자가 살아내어, 그 모습과 영향력을 받은 이들이 ‘너희의 하나님’을 자연스레 말하고 더 나아가 그들도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동체말이다.
*언제까지나 영적으로 어리둥절한 상황을 만나는 공동체가 아니라 어느 자리, 어떤 상황에 직면하든지 “우리 하나님”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꾸고 싶다. 그 꿈이 이루어질 날이 반드시 온다! 말씀해 주신대로, 이루어질 진다.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면서 반드시 이 즐거움을 누릴 때가 올 것이다. 영적 어리둥절함은 이제 그만 그치고 하나님 나라의 선한 영향력을 즐겁게 누려보자! 요셉과 형제들이 즐거운 오찬을 나누는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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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24일 주보
♥호스트패밀리 모집 – 호스트패밀리는 유학생과 함께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공부하는 외국인 유학생의 믿음의 가족이 되어 정서적 지지와

2026년 5월 17일 주보
♥축복 – 다음세대 양육을 감당하는 교사들을 축복합니다. 교사들의 수고와 헌신으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다음세대를 세워져 가는 것을 잊으면

2026년 5월 10일 주보
우리의 2026년은 “더 예수님처럼, 더욱더 하나님 나라”를 꿈꿉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하나님 나라 진실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더온누리교회 전임 및 파트 교역자 청빙 공고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갈 동역자를 기다립니다. 전주 더온누리교회(www.theonnuri.org)에서 함께

#더온누리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은혜를 함께 나눠요. instagram에서 "#더온누리교회"를 태그해 주세요:)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6월 26~28일 더원 공동체 여름수련회 함께해요🫶🏻💓
(사진의 내용은 수련회 일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더원 #더온누리교회 #전주 #청년부 #여름수련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6월 26~28일 더원 공동체 여름수련회 함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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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원 여름수련회를 위해서 모두가 힘써 수련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더온누리교회 #더원 #전주 #청년부 #여름수련회
더원 여름수련회를 위해서 모두가 힘써 수련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더온누리교회 #더원 #전주 #청년부 #여름수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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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빛키! 😆✨
우연이 아닌 은혜 🙌
아이들을 위한 축제
더온누리 홀리빛키가
많은 성도님들의 기도와 후원 가운데
은혜롭게 마무리되었습니다 🤍
웃음이 가득했고
행복이 넘쳤던 하루
마음껏 뛰어놀고
함께 웃으며
사랑을 나누었던 그날의 모습을 전합니다 ✨
아이들의 웃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했던 시간 🫶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홀리빛키
#어린이축제 #다음세대 #은혜 #교회행사
#플리마켓 #키즈페스티벌 😆✨
홀리빛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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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위한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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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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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풍요의 중심이 아니라,
구별된 자리.
눈에 띄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 머무는 곳.
이번 주일,
창세기 46:28~47:12 말씀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정을
고센으로 이끄셨는지 함께 묵상합니다.
“왜 고센이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가장 안전하고,
가장 은혜로운 자리로
우리를 이끄고 계십니다.
적용찬양 : 은혜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고센땅
#하나님의인도하심
#은혜
#주일말씀
#신앙묵상
#Jesus
#SundayService
#Genesis
#Grace
#FaithJourney
[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풍요의 중심이 아니라,
구별된 자리.
눈에 띄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 머무는 곳.
이번 주일,
창세기 46:28~47:12 말씀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정을
고센으로 이끄셨는지 함께 묵상합니다.
“왜 고센이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가장 안전하고,
가장 은혜로운 자리로
우리를 이끄고 계십니다.
적용찬양 : 은혜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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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더 깊은 선교학교]
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삶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듯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세상을 향해
복을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
2026 더깊은 선교학교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배우고
선교의 비전을 함께 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
📖 2026 더깊은 선교학교
🗓 06.20 - 07.25 매주 토요일 (6주간)
📍 굿윌센터 2F
🎤 이효재 목사
🎤 주누가 선교사
🎤 김종홍 목사
✈ 단기선교
8월 1일(토) - 8월 4일(화), 일본
🎓 수료식
8월 23일(주일) 2부 예배
—
하나님이 찾으시는
복의 통로로 함께 세워지길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THE MISSION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더깊은선교학교
#선교 #더미션 #복의통로 #단기선교
#일본선교 #mission 🙏✨
[2026 더 깊은 선교학교]
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삶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듯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세상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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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더깊은 선교학교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배우고
선교의 비전을 함께 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
📖 2026 더깊은 선교학교
🗓 06.20 - 07.25 매주 토요일 (6주간)
📍 굿윌센터 2F
🎤 이효재 목사
🎤 주누가 선교사
🎤 김종홍 목사
✈ 단기선교
8월 1일(토) - 8월 4일(화), 일본
🎓 수료식
8월 23일(주일) 2부 예배
—
하나님이 찾으시는
복의 통로로 함께 세워지길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THE MISSION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더깊은선교학교
#선교 #더미션 #복의통로 #단기선교
#일본선교 #mission 🙏✨
...
진정성,
목자의 힘 🙏
사람을 세우는 힘은
화려함이 아니라
진심에서 시작됩니다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며
다시 붙드는
목장의 본질
주님이 맡기신 영혼을 위해
오늘도 걸어갑니다 🤍
—
더온누리교회
2026 목자수련회
“진정성, 목자의 힘, 목장의 본질”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목자수련회
#목장 #목자의삶 #공동체 #진정성
#리더십 #기도 🙏✨
진정성,
목자의 힘 🙏
사람을 세우는 힘은
화려함이 아니라
진심에서 시작됩니다
함께 웃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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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붙드는
목장의 본질
주님이 맡기신 영혼을 위해
오늘도 걸어갑니다 🤍
—
더온누리교회
2026 목자수련회
“진정성, 목자의 힘, 목장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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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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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낮아진 자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억울함과 외로움,
그리고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도
믿음은 시선을 다시 하늘로 향하게 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9:1-10 말씀을 통해
바닥 같은 인생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묵상합니다.
“바닥에서 하늘을 보다”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길을 여십니다.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요셉의믿음
#하나님을바라보다
#믿음의시선
#주일말씀
#신앙묵상
#Jesus
#SundayService
#Genesis
#FaithJourney
#TrustGod
[주일 예배 안내]
낮아진 자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억울함과 외로움,
그리고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도
믿음은 시선을 다시 하늘로 향하게 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9:1-10 말씀을 통해
바닥 같은 인생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묵상합니다.
“바닥에서 하늘을 보다”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길을 여십니다.
이번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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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thJourney
#Trust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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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리에는
결국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분노와 상처,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선택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하나님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4:18-31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잊어버린 삶이
어디로 흘러가게 되는지 깊이 묵상합니다.
“잊혀진 하나님, 드러난 잔혹함”
어둠 속에서도
다시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깨어진 세상을 끌어안고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신앙의경고
#하나님없는삶
#회개의자리
#주일말씀
#깨어진세상을끌어안고
#Jesus
#SundayService
#Genesis
#Repentance
#FaithJourney
[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리에는
결국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분노와 상처,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선택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하나님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4:18-31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잊어버린 삶이
어디로 흘러가게 되는지 깊이 묵상합니다.
“잊혀진 하나님, 드러난 잔혹함”
어둠 속에서도
다시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깨어진 세상을 끌어안고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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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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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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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th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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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익숙함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때로
낯설고 어색한 길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떠나야 할 때를 알면서도
머물고 싶은 마음,
그러나 그 부르심 앞에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믿음.
창세기 31:1-16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운 길을 걷는 믿음을 묵상합니다.
“익숙함을 떠나
어색한 약속의 땅으로”
익숙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결단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믿음의걸음
#하나님의인도하심
#순종의삶
#주일말씀
#나는믿네
#Jesus
#SundayService
#Genesis
#FaithJourney
#TrustGod
[주일 예배 안내]
익숙함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때로
낯설고 어색한 길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떠나야 할 때를 알면서도
머물고 싶은 마음,
그러나 그 부르심 앞에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믿음.
창세기 31:1-16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운 길을 걷는 믿음을 묵상합니다.
“익숙함을 떠나
어색한 약속의 땅으로”
익숙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결단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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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stGod
...
지치고 힘들어요? 🥺
예수님 안에는
아픈 것도 없고
외로운 것도 없어요 🤍
우리 같이 가요!
소문의 낙원으로 ✨
—
더온누리교회
초등 2부 율동 🫶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초등부
#어린이예배 #율동 #소문의낙원
#예수님 #귀여움 #churchkids 🥺✨
지치고 힘들어요? 🥺
예수님 안에는
아픈 것도 없고
외로운 것도 없어요 🤍
우리 같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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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2부 율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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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로운 금요일 안내
하나님 앞에 서는 용기,
믿음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
이번 금요일,
다윗의 고백과 결단을 통해
우리의 삶에도
믿음의 용맹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다윗의 용맹”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나아갔던 다윗처럼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서는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 : 목사 장필조
찬양인도 : 목사 이홍기
—
📖 본문
사무엘상 17:28-40
—
🎶 Worship List
부흥의 세대
성령의 불타는 교회
부흥이 있으리라
무릎 꿇고 엎드리니
다시 한 번
나의 주 크고 놀라운 하나님
—
4월 24일 금요일 밤,
찬양과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을
함께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
#더온누리교회 #향기로운금요일 #금요예배 #찬양예배
#전주교회 #전주 #말씀 #예배 #부흥 #기도 #전주찬양팀 #전주집회 #찬양집회
@fragrant_worship
✨ 향기로운 금요일 안내
하나님 앞에 서는 용기,
믿음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
이번 금요일,
다윗의 고백과 결단을 통해
우리의 삶에도
믿음의 용맹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다윗의 용맹”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나아갔던 다윗처럼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서는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 : 목사 장필조
찬양인도 : 목사 이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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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사무엘상 17: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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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rship List
부흥의 세대
성령의 불타는 교회
부흥이 있으리라
무릎 꿇고 엎드리니
다시 한 번
나의 주 크고 놀라운 하나님
—
4월 24일 금요일 밤,
찬양과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을
함께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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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온누리교회 #향기로운금요일 #금요예배 #찬양예배
#전주교회 #전주 #말씀 #예배 #부흥 #기도 #전주찬양팀 #전주집회 #찬양집회
@fragrant_worship
...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서 더합니다 🤍
사랑을 더하고
마음을 나누고
공동체 안에서
하나 되어가는 시간
“연합”
더함공동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
—
2026 더함공동체 수련회
📍 서천 청소년 수련관
📅 5.23 - 5.24
함께여서 더 깊어지는 시간
이번엔 같이 가요 🙌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 #더함공동체 #공동체 #연합
#교회수련회 #전주교회 #전주
#사랑나눔 #함께 #churchfamily 🤍✨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서 더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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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안에서
하나 되어가는 시간
“연합”
더함공동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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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더함공동체 수련회
📍 서천 청소년 수련관
📅 5.23 - 5.24
함께여서 더 깊어지는 시간
이번엔 같이 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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