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기드온의 황금 에봇과 이스라엘의 영적 망각 [사사기 8:22-35]
이스라엘을 미디안에서 구원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금세 망각해 버린다. 그리고 기드온에게 자신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한다. 기드온은 당연히 거절했지만, 황금 에봇을 만들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다시 배교의 길로 들어선다. 7년간의 미디안 압제에서 해방되어 평화가 찾아왔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위협은 이미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1. 그때에(22-27절)…… 이와 같이 하여(28절)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완전한 승리를 선언한 그때에 일어난 일이다. 승전 축하의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의 집안이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한다(22절). 기막힌 일이다. 7년 동안의 미디안의 압제가 끝난 그때,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야 하는데, 또다시 사람(기드온)의 통치를 요청하다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어두움이 매우 심각하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를 완곡히 거절한다. 자신의 집안이 다스리지 않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23절)”라고 선언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드온의 분별력이 고맙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두워진 마음과 눈이 마음에 걸린다. 7년 동안의 미디안의 압제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망쳐 놓은 듯하다. 승리로 완결된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기드온에게 찬사를 보낸다. 두고두고 아쉽다.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영적 무감각이 이토록 몰지각하다.
한편 기드온은 왕(통치자)의 자리는 거절했지만, 적어도 이 전쟁의 승리를 기념할 물건을 만들 생각은 있었나 보다. 왕으로서 통치하지는 않을 테니, 전리품 중에서 귀고리를 달라고 요청한다(24절). 백성들은 기꺼이(즐거이) 드리겠다며 겉옷을 펴고 탈취한 귀고리를 그 위에 던졌다(그런데 마치 왕에게 드리는 예물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해서 모인 금의 양은 자그마치 약 20kg(금 1,700세겔)이나 되었다. 뿐만 아니라 초승달 장식들, 패물, 미디안 왕들의 자색 옷들, 낙타 목 장식품 등이 기드온에게 모였다(25-26절). 기드온은 모인 금 귀고리로 “황금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 오브라에 두었다. 하지만 이것이 기드온과 그 집안의 올무가 되어 버렸다(27절).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까지만 좋았다. 딱 여기까지였다. 탈취한 귀고리를 요청하고 그 금으로 제사장의 의복인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에 두었는데, 이것이 가져올 또 하나의 우상숭배, 곧 보이지 않는 영적 배교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 그 에봇을 음란하게 위하였다. 즉 우상으로 숭배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형상이면 무엇이든 만들어 섬겨 버리는 우상 지향적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개역개정에는 “이와 같이 하여”라는 표현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새번역은 28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이와 같이 하여 미디안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복종하게 되었고,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은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나에게는 이 구절이 이렇게 읽힌다. “이와 같이 만든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이스라엘 땅에,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일까? 에봇을 의지한 평화가 아닐까?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온 이스라엘이 그곳에서 그것을 음란하게 섬겨서_새번역)” 누린 평화였다. 이것이 진정한 “여호와 샬롬”일까? 여호와 하나님 없이 황금 에봇을 의지하는 평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을 섬기겠노라며 만든 물건이 도리어 하나님이 되어 버린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나에게도 “하나님처럼” 섬기는 오늘날의 황금 에봇이 과연 없을까?
*가장 큰 영광과 찬송을 드려야 할 승전 축하의 날에 하나님의 이름은 쏙 들어가고, 황금 에봇에 눈길이 가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1~3계명을 어기는 것인 줄 정녕 깨닫지 못했을까? 단 한 사람도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아쉽고 아쉽기만 하다!
2. 기드온의 삶(29-32절)
승전하고 돌아온 기드온을 사사기 저자는 “여룹바알”이라고 부른다(29절). 뭔가 의미심장하다. 저자는 기드온의 삶을 소개하면서, “바알과 싸우는 사람”인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감히 바알을 따르지 못했지만,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바알들을 따라 음행하며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다고 기록한다(33절). “바알브릿”은 “언약의 주”라는 뜻이다. 세겜 지역에서는 “엘브릿(언약의 하나님)”으로까지 불렸다! 언약의 하나님과 비슷한 이름의 신을 자신들이 따르는 “바알들” 중 하나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저자는 이렇게 된 원인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은 것”(34절)과 기드온이 자신들을 위해 베푼 은혜를 아무도 기억하지도, 갚지도 않은 것(35절)을 지적한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세우셨던 기드온도 잊혔다. 기드온에게 받았던 은혜를 아무도 갚지 않았다.
*기드온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30절이다. “그런데 기드온은 아내가 많아, 친아들이 일흔 명이나 되었다(새번역_30절).” 당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승리를 이끈 사람이었으니, 에봇을 만들고 많은 아내를 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일까? 아쉽고 아쉽기만 하다.
*가장 잘나갈 때 가장 절제했더라면 어땠을까? 최대의 승리 이후 자신을 절제하지 못한 기드온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승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의 백지수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이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경거망동과 교만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기가 찰 노릇이다.
3. “또”…… 망각이 망국의 시작이다(33-35절)
기드온과 미디안의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굉장한 자신감을 주었다. 그러나 이 과도한 자신감은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기념비적인 450:1의 승리 이후에는 승리에 도취하는 것보다 그 승리가 의미 있도록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진정한 승리의 삶은 “승리의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겨우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 그리고 목소리만으로 전쟁에 임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승리는 앞서 행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해야 했다. 하지만 이 중요한 사실은 전쟁이 끝난 승리의 현장에서부터 “망각”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위의 모든 적으로부터 자기들을 건져 내신 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새번역_34절).”
*당연히 하나님께 승리의 전리품들을 올려 드리며 영광과 찬양을 드려야 했다. 하지만 “그때” 승리의 현장에는, 승리에 도취되어 자기들만의 기쁨에 휩싸인 채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를 망각한 백성들만 있을 뿐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장면이 없다. 하나님의 이름은 쏙 뺀 채 기드온과 그의 아들, 손자가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하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백성들은 마치 기드온이 승리의 영웅(왕)인 것처럼, 겉옷을 펴고 그 위에 예물을 드리듯 귀고리들과 전리품들을 모아 기드온에게 주었다. 기드온은 말로만 왕위를 거절했을 뿐, 행동으로는 이미 왕의 권위를 누리며 군림하고 있다.
*승리의 현장,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그곳에서 정작 하나님은 잊혔다. 450:1의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끄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망각”의 망령이 겉으로 찾아온 “평화의 시간” 속에서 망국의 길을 닦고 있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22절). 보복과 처형의 과정을 지켜보며(13-21절) 이제는 미디안보다 기드온이 더 두려워졌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입술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감사 대신 기드온에 대한 찬사만 가득하다. 이전에 헛된 우상을 숭배하던 그들이 이제는 인간 기드온을 추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또다시 다른 압제와 공멸로 가는 길인 줄은 몰랐을 것이다.
-기드온은 승리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총 대신 자기 공적을 내세우며 백성에게 자기 몫을 요구한다(22-26절). 그가 진정으로 의지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이런 행동은 결코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기드온처럼 나도 여전히 ‘무시 못 할 존재’이며 대접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려고 안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한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입술과 행함이 일치하도록 절치부심해야 한다.
-왕이 되어 달라는 이스라엘의 요구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실 것이라며 거절했지만, 진심이 아니었다. 왕위는 거절했어도 왕이 아니면 요구할 수도, 누릴 수도 없는 막대한 부는 요구한다.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옷을 받아 입음으로써 그 욕망을 숨기지 못한다. 겉으로는 왕이 아니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왕이었다. 이미 권력욕에 빠져 버린 것이다.
-추앙받던 기드온이 한순간에 추락한다. 전리품으로 만든 승전 기념물인 ‘에봇’은 이스라엘의 올무가 되고 화근이 된다(27-28절). 그는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에 두었다. 에봇은 대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옷이었다. 대제사장만 입던 것을 음란한 방식으로 섬기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그를 따라 배교하는 길을 열어 주고 만다. 아버지 집의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없애면서 시작한 기드온의 사역이, 자기 집에 우상을 세우고 자신과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우상숭배의 죄를 저지르게 하면서 끝나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성공은 가장 치명적인 실패를 가져온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 다스리신다며 왕이 되기를 거부했으나, 행동으로는 자신이 다스리려는 모습을 보였고, 실제로는 우상(에봇)이 다스렸다. 시종일관(始終一貫)이 이토록 어렵다.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무성한 고백이 교회 안에서만 넘쳐나고, 정작 일상에서는 내가 만든 에봇이 나를 장악하여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기드온은 말과 행동이 철저히 달랐다. 왕위를 사양했으나 왕과 다를 바 없는 호사를 누린다. 이방 왕들처럼 많은 아내를 두고 많은 자녀를 낳는다. 특히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내 아버지는 왕이시다)’이라고 지을 만큼 왕이 되고 싶은 자기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29-32절).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데는 철저히 실패한다. 이 같은 이율배반적인 삶은 그의 선언(23절)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런데 기드온과 같은 모습은 유별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모두가 힘을 숭상하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그 힘이 지닌 위험성에 주목하여 경계하는 이들은 드물다. 유능한 지도자나 특정 인물이 모든 상황을 바꿔 주리라는 환상을 경계해야 한다. 주님께서 왕이 되지 않으시면 어디에도 참된 희망은 없다.
-기드온이 죽은 후, 이스라엘 자손은 숱한 대적들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고 다시 이방 우상들을 섬긴다(33-34절). 그들은 기드온처럼(6:13)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으니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선택한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했는지도 모른다(22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도움이 안 되면 언제든 폐기 처분할 수 있는 우상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도 혹시 내게 득이 되어야 하나님을 대접하겠다는 불경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나라가 아니면 많은 자손과 비옥한 땅, 풍요와 번영이 결코 자신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더 나은 삶의 조건을 구하기 전에, 내 삶에 주님을 왕으로 모실 마음의 환경을 마련하는 일이 가장 우선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기드온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기드온의 공적을 기억하지도,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않는다. 그의 죽음은 그들이 그토록 추앙하던 대상이 얼마나 미덥지 못하고 허망한 존재인지를 확인하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장차 다윗과 같은 참된 통치자의 도래를 기대하게 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세상의 모든 지도자와 인생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기드온, 그는 왕관 없는 왕으로 살았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왕이 되어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기드온은 많은 아내와 이방인 첩, 그리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일흔 명이나 되는 아들들을 두었다. 모두 타락한 왕들이 자행하던 일이었다. 완전한 권력과 힘을 행사하는 삶을 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삶에는 하나님이 없다. 자기 자신의 왕 됨을 누리는 이에게는 진정한 왕 되신 하나님을 모실 마음의 공간 자체가 없다.
-그런 기드온이 죽는다. 초기에 용맹하고 지혜로웠던 사사가 죽었다. 그는 왕이 되고 싶었지만 왕은 될 수 없었고, 사실상 왕 노릇을 하다 죽었다. 나라를 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나라를 우상숭배에 빠지게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사사로서 실패의 흔적을 남기고 모든 인생이 가야 할 길로 갔다.
-기드온의 죽음과 함께 여호와 신앙도 죽는다. 아니, 이미 죽어 있었다. 이스라엘이 이제 또다시 여호와를 떠나 바알을 따라 음행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을 기억하지 않고, 심지어 기드온의 집안이 이스라엘에게 베푼 은혜마저 무시한다. 이렇게 잊혀 가는 기드온의 운명이 씁쓸하나, 자초한 일이었다. 그가 우상숭배의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감사할 줄도, 기억할 줄도 모르는 백성을 낳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평화가 꼭 육신의 편안함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평화는 치열한 격전의 현장에서 더 깊이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앞서가시며 해결하시는 모습을 보면 상황은 긴박해도 마음은 잔잔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저 육신이 편안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 오히려 저주다!
-이스라엘이 “또” 망국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고 선언한 기드온의 말과 그의 40년간의 삶이 일치했다면 과연 그랬을까? 세겜 첩에게서 난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내 아버지는 왕이시다)”이라고 지을 정도로 말과 행동이 달랐던 사사 기드온이 “또” 이스라엘을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백성들도 할 말이 없다. 기드온이 승전 기념으로 만든(만들어서는 안 되는) 황금 에봇을 마치 눈에 보이는 하나님처럼 섬기는 영적 음란을 기꺼이 행하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온 이스라엘(27절)”이 그러했다. 미디안 연합군을 상대로 기막힌 승리를 경험했지만, 정작 그 기막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고작 눈에 보이는 황금 에봇과 바꿔 버렸다. 이런 무지함이라니……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이 무지가 결국 “또” 망각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망국으로 치닫는 줄도 모른 채 황금 에봇이 주는 평화에 취했다. 무려 40년 동안 그리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1. 그때에(22-27절)…… 이와 같이 하여(28절)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완전한 승리를 선언한 그때에 일어난 일이다. 승전 축하의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의 집안이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한다(22절). 기막힌 일이다. 7년 동안의 미디안의 압제가 끝난 그때,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야 하는데, 또다시 사람(기드온)의 통치를 요청하다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어두움이 매우 심각하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를 완곡히 거절한다. 자신의 집안이 다스리지 않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23절)”라고 선언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드온의 분별력이 고맙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두워진 마음과 눈이 마음에 걸린다. 7년 동안의 미디안의 압제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망쳐 놓은 듯하다. 승리로 완결된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기드온에게 찬사를 보낸다. 두고두고 아쉽다.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영적 무감각이 이토록 몰지각하다.
한편 기드온은 왕(통치자)의 자리는 거절했지만, 적어도 이 전쟁의 승리를 기념할 물건을 만들 생각은 있었나 보다. 왕으로서 통치하지는 않을 테니, 전리품 중에서 귀고리를 달라고 요청한다(24절). 백성들은 기꺼이(즐거이) 드리겠다며 겉옷을 펴고 탈취한 귀고리를 그 위에 던졌다(그런데 마치 왕에게 드리는 예물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해서 모인 금의 양은 자그마치 약 20kg(금 1,700세겔)이나 되었다. 뿐만 아니라 초승달 장식들, 패물, 미디안 왕들의 자색 옷들, 낙타 목 장식품 등이 기드온에게 모였다(25-26절). 기드온은 모인 금 귀고리로 “황금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 오브라에 두었다. 하지만 이것이 기드온과 그 집안의 올무가 되어 버렸다(27절).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까지만 좋았다. 딱 여기까지였다. 탈취한 귀고리를 요청하고 그 금으로 제사장의 의복인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에 두었는데, 이것이 가져올 또 하나의 우상숭배, 곧 보이지 않는 영적 배교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 그 에봇을 음란하게 위하였다. 즉 우상으로 숭배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형상이면 무엇이든 만들어 섬겨 버리는 우상 지향적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개역개정에는 “이와 같이 하여”라는 표현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새번역은 28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이와 같이 하여 미디안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복종하게 되었고,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은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나에게는 이 구절이 이렇게 읽힌다. “이와 같이 만든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이스라엘 땅에,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일까? 에봇을 의지한 평화가 아닐까?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온 이스라엘이 그곳에서 그것을 음란하게 섬겨서_새번역)” 누린 평화였다. 이것이 진정한 “여호와 샬롬”일까? 여호와 하나님 없이 황금 에봇을 의지하는 평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을 섬기겠노라며 만든 물건이 도리어 하나님이 되어 버린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나에게도 “하나님처럼” 섬기는 오늘날의 황금 에봇이 과연 없을까?
*가장 큰 영광과 찬송을 드려야 할 승전 축하의 날에 하나님의 이름은 쏙 들어가고, 황금 에봇에 눈길이 가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1~3계명을 어기는 것인 줄 정녕 깨닫지 못했을까? 단 한 사람도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아쉽고 아쉽기만 하다!
2. 기드온의 삶(29-32절)
승전하고 돌아온 기드온을 사사기 저자는 “여룹바알”이라고 부른다(29절). 뭔가 의미심장하다. 저자는 기드온의 삶을 소개하면서, “바알과 싸우는 사람”인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감히 바알을 따르지 못했지만,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바알들을 따라 음행하며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다고 기록한다(33절). “바알브릿”은 “언약의 주”라는 뜻이다. 세겜 지역에서는 “엘브릿(언약의 하나님)”으로까지 불렸다! 언약의 하나님과 비슷한 이름의 신을 자신들이 따르는 “바알들” 중 하나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저자는 이렇게 된 원인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은 것”(34절)과 기드온이 자신들을 위해 베푼 은혜를 아무도 기억하지도, 갚지도 않은 것(35절)을 지적한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세우셨던 기드온도 잊혔다. 기드온에게 받았던 은혜를 아무도 갚지 않았다.
*기드온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30절이다. “그런데 기드온은 아내가 많아, 친아들이 일흔 명이나 되었다(새번역_30절).” 당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승리를 이끈 사람이었으니, 에봇을 만들고 많은 아내를 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일까? 아쉽고 아쉽기만 하다.
*가장 잘나갈 때 가장 절제했더라면 어땠을까? 최대의 승리 이후 자신을 절제하지 못한 기드온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승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의 백지수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이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경거망동과 교만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기가 찰 노릇이다.
3. “또”…… 망각이 망국의 시작이다(33-35절)
기드온과 미디안의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굉장한 자신감을 주었다. 그러나 이 과도한 자신감은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기념비적인 450:1의 승리 이후에는 승리에 도취하는 것보다 그 승리가 의미 있도록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진정한 승리의 삶은 “승리의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겨우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 그리고 목소리만으로 전쟁에 임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승리는 앞서 행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해야 했다. 하지만 이 중요한 사실은 전쟁이 끝난 승리의 현장에서부터 “망각”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위의 모든 적으로부터 자기들을 건져 내신 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새번역_34절).”
*당연히 하나님께 승리의 전리품들을 올려 드리며 영광과 찬양을 드려야 했다. 하지만 “그때” 승리의 현장에는, 승리에 도취되어 자기들만의 기쁨에 휩싸인 채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를 망각한 백성들만 있을 뿐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장면이 없다. 하나님의 이름은 쏙 뺀 채 기드온과 그의 아들, 손자가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하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백성들은 마치 기드온이 승리의 영웅(왕)인 것처럼, 겉옷을 펴고 그 위에 예물을 드리듯 귀고리들과 전리품들을 모아 기드온에게 주었다. 기드온은 말로만 왕위를 거절했을 뿐, 행동으로는 이미 왕의 권위를 누리며 군림하고 있다.
*승리의 현장,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그곳에서 정작 하나님은 잊혔다. 450:1의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끄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망각”의 망령이 겉으로 찾아온 “평화의 시간” 속에서 망국의 길을 닦고 있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22절). 보복과 처형의 과정을 지켜보며(13-21절) 이제는 미디안보다 기드온이 더 두려워졌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입술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감사 대신 기드온에 대한 찬사만 가득하다. 이전에 헛된 우상을 숭배하던 그들이 이제는 인간 기드온을 추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또다시 다른 압제와 공멸로 가는 길인 줄은 몰랐을 것이다.
-기드온은 승리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총 대신 자기 공적을 내세우며 백성에게 자기 몫을 요구한다(22-26절). 그가 진정으로 의지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이런 행동은 결코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기드온처럼 나도 여전히 ‘무시 못 할 존재’이며 대접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려고 안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한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입술과 행함이 일치하도록 절치부심해야 한다.
-왕이 되어 달라는 이스라엘의 요구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실 것이라며 거절했지만, 진심이 아니었다. 왕위는 거절했어도 왕이 아니면 요구할 수도, 누릴 수도 없는 막대한 부는 요구한다.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옷을 받아 입음으로써 그 욕망을 숨기지 못한다. 겉으로는 왕이 아니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왕이었다. 이미 권력욕에 빠져 버린 것이다.
-추앙받던 기드온이 한순간에 추락한다. 전리품으로 만든 승전 기념물인 ‘에봇’은 이스라엘의 올무가 되고 화근이 된다(27-28절). 그는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에 두었다. 에봇은 대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옷이었다. 대제사장만 입던 것을 음란한 방식으로 섬기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그를 따라 배교하는 길을 열어 주고 만다. 아버지 집의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없애면서 시작한 기드온의 사역이, 자기 집에 우상을 세우고 자신과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우상숭배의 죄를 저지르게 하면서 끝나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성공은 가장 치명적인 실패를 가져온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 다스리신다며 왕이 되기를 거부했으나, 행동으로는 자신이 다스리려는 모습을 보였고, 실제로는 우상(에봇)이 다스렸다. 시종일관(始終一貫)이 이토록 어렵다.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무성한 고백이 교회 안에서만 넘쳐나고, 정작 일상에서는 내가 만든 에봇이 나를 장악하여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기드온은 말과 행동이 철저히 달랐다. 왕위를 사양했으나 왕과 다를 바 없는 호사를 누린다. 이방 왕들처럼 많은 아내를 두고 많은 자녀를 낳는다. 특히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내 아버지는 왕이시다)’이라고 지을 만큼 왕이 되고 싶은 자기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29-32절).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데는 철저히 실패한다. 이 같은 이율배반적인 삶은 그의 선언(23절)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런데 기드온과 같은 모습은 유별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모두가 힘을 숭상하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그 힘이 지닌 위험성에 주목하여 경계하는 이들은 드물다. 유능한 지도자나 특정 인물이 모든 상황을 바꿔 주리라는 환상을 경계해야 한다. 주님께서 왕이 되지 않으시면 어디에도 참된 희망은 없다.
-기드온이 죽은 후, 이스라엘 자손은 숱한 대적들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고 다시 이방 우상들을 섬긴다(33-34절). 그들은 기드온처럼(6:13)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으니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선택한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했는지도 모른다(22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도움이 안 되면 언제든 폐기 처분할 수 있는 우상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도 혹시 내게 득이 되어야 하나님을 대접하겠다는 불경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나라가 아니면 많은 자손과 비옥한 땅, 풍요와 번영이 결코 자신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더 나은 삶의 조건을 구하기 전에, 내 삶에 주님을 왕으로 모실 마음의 환경을 마련하는 일이 가장 우선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기드온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기드온의 공적을 기억하지도,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않는다. 그의 죽음은 그들이 그토록 추앙하던 대상이 얼마나 미덥지 못하고 허망한 존재인지를 확인하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장차 다윗과 같은 참된 통치자의 도래를 기대하게 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세상의 모든 지도자와 인생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기드온, 그는 왕관 없는 왕으로 살았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왕이 되어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기드온은 많은 아내와 이방인 첩, 그리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일흔 명이나 되는 아들들을 두었다. 모두 타락한 왕들이 자행하던 일이었다. 완전한 권력과 힘을 행사하는 삶을 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삶에는 하나님이 없다. 자기 자신의 왕 됨을 누리는 이에게는 진정한 왕 되신 하나님을 모실 마음의 공간 자체가 없다.
-그런 기드온이 죽는다. 초기에 용맹하고 지혜로웠던 사사가 죽었다. 그는 왕이 되고 싶었지만 왕은 될 수 없었고, 사실상 왕 노릇을 하다 죽었다. 나라를 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나라를 우상숭배에 빠지게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사사로서 실패의 흔적을 남기고 모든 인생이 가야 할 길로 갔다.
-기드온의 죽음과 함께 여호와 신앙도 죽는다. 아니, 이미 죽어 있었다. 이스라엘이 이제 또다시 여호와를 떠나 바알을 따라 음행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을 기억하지 않고, 심지어 기드온의 집안이 이스라엘에게 베푼 은혜마저 무시한다. 이렇게 잊혀 가는 기드온의 운명이 씁쓸하나, 자초한 일이었다. 그가 우상숭배의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감사할 줄도, 기억할 줄도 모르는 백성을 낳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평화가 꼭 육신의 편안함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평화는 치열한 격전의 현장에서 더 깊이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앞서가시며 해결하시는 모습을 보면 상황은 긴박해도 마음은 잔잔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저 육신이 편안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 오히려 저주다!
-이스라엘이 “또” 망국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고 선언한 기드온의 말과 그의 40년간의 삶이 일치했다면 과연 그랬을까? 세겜 첩에게서 난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내 아버지는 왕이시다)”이라고 지을 정도로 말과 행동이 달랐던 사사 기드온이 “또” 이스라엘을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백성들도 할 말이 없다. 기드온이 승전 기념으로 만든(만들어서는 안 되는) 황금 에봇을 마치 눈에 보이는 하나님처럼 섬기는 영적 음란을 기꺼이 행하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온 이스라엘(27절)”이 그러했다. 미디안 연합군을 상대로 기막힌 승리를 경험했지만, 정작 그 기막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고작 눈에 보이는 황금 에봇과 바꿔 버렸다. 이런 무지함이라니……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이 무지가 결국 “또” 망각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망국으로 치닫는 줄도 모른 채 황금 에봇이 주는 평화에 취했다. 무려 40년 동안 그리했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기드온의 이중성과 요단 동편 정벌의 그림자 [사사기 8:1-21]
에브라임이 자신들을 늦게 불렀다고 불평하였지만, 기드온은 지혜롭게 양보하며 넘어간다. 하지만 전쟁이 요단 동편으로 넘어가면서, 기드온은 자신을 돕지 않은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무사히 돌아올 때 그들을 징계하겠다고 맹세한다. 그리고 갈골까지 쫓아가 마침내 미디안 왕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가지고 온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기드온과 크게 다툰다. 전쟁 막바지에 동참한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의 장자인 자신들이 전쟁을 주도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거센 항의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의 현장에서 논공행상을 따지는 꼴이다. 전쟁 초기부터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자칫 승리하자마자 분열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기드온은 지혜로운 말로 이 상황을 잘 극복한다(1-3절). 그런데 정말 지혜로워서일까?
또 기드온에게 대패하여 도망하는 미디안 군대의 세바와 살문나를 쫓아 요단강을 건넌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는, 피곤한 몸으로 숙곳에 이르러 갓 지파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요청했다. 얍복강 가의 브누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거절하며 기드온을 조롱했다. 이에 기드온은 미디안의 세바와 살문나를 붙잡아 그들 앞에 세운 뒤 죽이고,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를 조롱했던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을 징벌한다(4-21절). 에브라임에게 보인 모습과 왜 이리 다를까?
1. 에브라임의 어깃장, 기드온의 소심함(1-3절)
참, 이런 지파라니……. 한심하다.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도 않았는데, 시작할 때 먼저 부르지 않았다고 “크게 다툰 것”이다. 에브라임은 왜 어깃장을 놓고 있을까?
본문은 그 원인을 직접 밝히지 않지만, 드보라는 에브라임에 대하여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들(5:14)”이라고 했다. 이것은 매우 치욕스러운 비유다. 출애굽 직후 시내산으로 행군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후미에 처진 이들을 비겁하게 공격한 아말렉의 치졸함을 에브라임이 닮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은 전쟁 끝 무렵에 참전하여 오렙과 스엡을 처리하기는 했지만, 300명 군사의 활약에 비하면 그 공이 미미하다. 그래서 전리품을 더 얻을 목적으로 이렇게 어깃장을 놓는 것이다. 그 속이 훤히 보인다. 문제는 이런 비겁한 모습을 보인 것이 이번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후 사사 ‘입다’도 에브라임에 대하여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12:1)”라고 말한다. 훗날 다윗의 찬양대장 ‘아삽’은 그가 지은 시편에서 “에브라임 자손은 무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율법 준행을 거절하며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시 78:9-11)”라고 노래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브라임 지파는 이런 이미지였다.
이런 이미지는 가나안 땅 정복 전쟁과 사사 시대의 혼란한 전쟁들을 거치면서 형성된 듯하다. 드보라가 시스라와 철 병거 900대에 맞서기 위해 불어 소집한 나팔 소리에도 에브라임은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 에브라임은 장자 지파의 위치에 있었지만, 장자로서 이스라엘 지파들을 돕지 않았다. 도리어 결정적인 전쟁에서 비겁하게 소집 나팔에 응하지 않고 있다가, 패주하는 미디안이 자기네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요단 나루터를 장악해 달라는 기드온의 요청을 받아들여 손쉽게 나루터를 장악하고 미디안 군사들을 죽였다. 그리고 두 장수를 쫓아가 죽이고 그 머리를 들고 요단강을 건너와 생색을 낸 것이다.
*민족의 전투에서 장자의 자리에 걸맞게 적극적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장자 지파로서의 의무는 감당하지 않으면서 장자 지파의 영광만 얻으려는 것이다. 비겁하고 얄밉다.
*하지만 기드온의 반응이 정말 놀랍다. 그는 “자신과 자기 지파는 한없이 낮추고, 에브라임의 존재감은 더욱 인정한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기드온의 가문)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2절)”,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3절)”, 이 두 문장으로 에브라임의 어깃장을 잠재운다. 그야말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은” 셈이다. 파렴치한 에브라임의 어깃장을 기드온은 겸손한(?) 말로 잠재웠다. 에브라임은 심하게 다툴 기세로 강하게 압박해 왔지만, 기드온은 그들과 다투지 않고 오히려 치하하며 높여 주었다. 그러자 에브라임의 노여움이 풀렸다.
*언뜻 보면 참 너그러운 지도자로구나 싶지만, 그렇지 않다. 요단 동편에서 보인 모습을 보면, 그는 강한 지파인 에브라임 앞에서는 약하고 약한 동족들 앞에서는 강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기드온은 소인배다.
2.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의 저주를 자초한 말, 기드온의 찜찜한 말(4-21절)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는 요단강을 건너 도망하는 미디안 왕들을 추격한다. 그 와중에 숙곳과 브누엘 두 마을에 음식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유인즉 “미디안 왕들을 사로잡은 것을 보기 전에는 기드온에게 협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5-9절).
*이 일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 담긴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해칠 수 있는 일에는 협조하지 않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진리와 정의와 평화보다 언제나 자기 안전과 이익이 우선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숙곳과 브누엘은 기드온이 세바와 살문나를 생포하여 돌아오자 그가 말한 대로 징벌을 받는다. 기드온은 숙곳의 장로들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징벌했고(16절), 브누엘 망대를 헐고 그 성읍 사람들을 죽였다(17절). 그리고 세바와 살문나에게는 그들이 다볼에서 자기 형제들을 죽인 것에 대한 복수를 행한다. “그들은 나의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들이다.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너희가 그들을 살려 주기만 하였더라도 내가 너희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새번역_19절).” 형제들을 “살려 주기만 하였더라도” 세바와 살문나를 살려 주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매우 우려스러운 장면이다. 기드온이 요단 동편으로 건너와 세바와 살문나가 이끄는 15,000명의 패잔병을 평정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동족인 숙곳의 장로들과 브누엘 주민들을 죽인 이유가 “개인의 원한을 갚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구원자로서의 책임을 자신의 복수에 사용한 것이다. 그는 개인의 복수를 위해 300명의 군사를 이용했고, 그 와중에 여호와를 앞세워 보복의 명분을 세웠다(19절). 또 자신의 복수를 위해 숙곳과 브누엘에 거주하던 동족인 갓 지파 사람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처단한다(7, 13-17절).
*이스라엘 공동체가 무너진 것이 확연하게 보인다. 동족의 전쟁에 참여하여 돕지 않는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 제대로 응하지도 않고 공로만 차지하려는 에브라임……. 하나님의 승리를 믿지 않았던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여호와의 전쟁을 개인의 원한을 갚는 복수 전쟁으로” 전락시킨 기드온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시려던 전쟁이 개인의 원한을 갚는 일로 마무리된다.
나는?
-요단 나루터에서 큰 공을 세운(7:24-25) 에브라임 지파는 처음부터 자신들을 미디안 전쟁에서 배제한 것에 대해 크게 불평한다(1절). 그들은 전쟁 끝 무렵에 참전하여 오렙과 스엡을 처리했다. 그리고 그 후에 처음부터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며 기드온에게 시비를 건다.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전리품을 더 얻기를 원한 것이다. 그래서 기드온이 에브라임이 마지막에 한 일을 높이 평가하며 넉넉한 전리품을 약속하는 듯한 말을 하자, 의도된 분노를 누그러뜨린다. 승리의 영예를 서로 차지하려는 그들의 다툼은 이 전쟁이 ‘누구’의 전쟁이고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를 되묻게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무엇에 기뻐하고 분노하는지를 보면, 내가 무엇을 가장 열망하는지가 드러난다. 하나님 나라보다 내 명예와 유익, 내 교회와 내 교파를 앞세우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리라.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치기 어린 불평에, 일단 자신이 세운 공적보다 미디안의 두 방백을 죽인 에브라임의 공적을 추켜세우며 불화를 누그러뜨린다(2-3절). 자칫 ‘한 지파의 불만’으로 야기될 수 있는 ‘지파 간의 내분’까지 미연에 차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혜로운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승리를 독점하지 않고 함께한 모든 지체와 영광을 나누는 모습으로 보아도 기드온의 처세는 현명하다. 시기와 경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불평이라도 경청하고 존중해 주어 내분으로 번지지 않게 하는 기드온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숙곳과 브누엘에 대한 그의 대처는 사뭇 다르다. 불평하는 에브라임 지파를 뒤로하고 미디안의 두 왕을 추격하는 이스라엘 군대는 피곤에 지쳐 있는 상태였다. 이 와중에 숙곳과 브누엘 주민들은 기드온과 군사들을 냉담하기 짝이 없게 대한다. 기드온은 그럼에도 미디안의 두 왕을 사로잡기 위해 직접 나서고, 도움 요청에 불응한 그들을 응징한다(4-9절). 이런 모습은 동족들 앞에서 자신을 ‘왕’과 동일시한다는 인상을 충분히 풍긴다. 믿음이 부패하면 인간의 지위와 권력은 언제든 교만을 낳는다. 그리고 이 교만한 힘은 사회적 불의와 혼란을 만들어 낸다. 어떤 형태의 지위나 힘이든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기 위해 맡은 것임을 기억할 때, 그 힘에 나 자신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한편 요단 동편의 사람들은 기드온의 요청을 거절할 만큼 그의 원정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6, 8, 10-12절). 이는 그들의 무심하고 불충한 모습일 수도 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 내재된 분열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후의 행적을 보면, 이때 기드온의 원정은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비전과 야망, 헌신과 혹사, 순종과 추종 사이의 경계를 잘 분별하는 것이 주님의 의도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삶을 사는 지혜가 아닐까? 혹시 지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즉시 돌이켜야 한다.
-한편 세바와 살문나는 남은 군사 15,000명을 모아 갈골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과 맞섰다. 불과 15,000명만 남았다가 그마저 전멸한 것이다. 게다가 기드온은 그가 따라오지 않으리라 여기며 안심하고 있던 그들을 쳐서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온 진영을 격파하였다.
-기드온은 미디안의 보복이 두려워 피곤한 군대에게 마른 떡 한 조각도 주지 않은 숙곳 사람들의 비겁함과 비정함을 ‘질책하며’ 잔혹하게 징벌한다(13-17절). 하지만 동족을 향한 필요 이상의 분노와 징벌은 ‘공의로운 보응’이 아니라 ‘사적 감정에 치우친 보복’으로 보인다. 두려워하던 기드온이 ‘군림하는 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보복자’가 된 것이다. 우리도 사적인 감정이나 이익에 치우쳐 공평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부분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또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크고 작은 다툼이 ‘나의 탐욕’에서 시작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적장들을 처형하는 과정에서 기드온은 ‘왕처럼’ 행세한다. 적장들의 눈에도 기드온의 형제들은 ‘왕자’처럼 보였고, 기드온은 장자에게 적국의 왕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여 자신과 아들의 위상을 높이려 한다(18-21절). 우리도 얼마든지 믿음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데 관심을 둘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자기의 흔적을 남기려는 의도로 시작한 일을 통해서는 영광받지 않으신다.
-8장의 요단 동편 정벌에서는 하나님의 개입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기드온은 가장 은혜로운 기적의 승리 직후에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개인의 원수를 갚는 일에 매진했다. 가장 은혜로운 시간 속에서 자기 공로를 내세우고 자기 원한을 갚는 일에 사사의 직분을 사용한 것이다.
*나도 언제든지 이 유혹에 노출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절정에 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얹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래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그 분위기에 휩쓸려 더욱 박차를 가해 진행할 수도 있다. 기드온처럼 말이다.
*개인의 원한을 갚는 과정에서 결국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소심하고 비겁한 모습이 그대로 노출된다. 미디안의 눈을 피해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그 소심함이,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한 절정의 순간에 드러나고 만 것이다.
*이런 기드온의 모습이 나의 모습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에 감춰져 있던 나의 나약한 모습이 언제든 표면에 드러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어떻게 은혜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계속 드러나도록 할 수 있겠는가!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도무지 불가능하다.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직후 나선 요단 동편 정벌에 하나님이 없다! 기드온의 혈기와 교만만 드러났다!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가지고 온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기드온과 크게 다툰다. 전쟁 막바지에 동참한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의 장자인 자신들이 전쟁을 주도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거센 항의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의 현장에서 논공행상을 따지는 꼴이다. 전쟁 초기부터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자칫 승리하자마자 분열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기드온은 지혜로운 말로 이 상황을 잘 극복한다(1-3절). 그런데 정말 지혜로워서일까?
또 기드온에게 대패하여 도망하는 미디안 군대의 세바와 살문나를 쫓아 요단강을 건넌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는, 피곤한 몸으로 숙곳에 이르러 갓 지파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요청했다. 얍복강 가의 브누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거절하며 기드온을 조롱했다. 이에 기드온은 미디안의 세바와 살문나를 붙잡아 그들 앞에 세운 뒤 죽이고,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를 조롱했던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을 징벌한다(4-21절). 에브라임에게 보인 모습과 왜 이리 다를까?
1. 에브라임의 어깃장, 기드온의 소심함(1-3절)
참, 이런 지파라니……. 한심하다.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도 않았는데, 시작할 때 먼저 부르지 않았다고 “크게 다툰 것”이다. 에브라임은 왜 어깃장을 놓고 있을까?
본문은 그 원인을 직접 밝히지 않지만, 드보라는 에브라임에 대하여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들(5:14)”이라고 했다. 이것은 매우 치욕스러운 비유다. 출애굽 직후 시내산으로 행군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후미에 처진 이들을 비겁하게 공격한 아말렉의 치졸함을 에브라임이 닮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은 전쟁 끝 무렵에 참전하여 오렙과 스엡을 처리하기는 했지만, 300명 군사의 활약에 비하면 그 공이 미미하다. 그래서 전리품을 더 얻을 목적으로 이렇게 어깃장을 놓는 것이다. 그 속이 훤히 보인다. 문제는 이런 비겁한 모습을 보인 것이 이번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후 사사 ‘입다’도 에브라임에 대하여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12:1)”라고 말한다. 훗날 다윗의 찬양대장 ‘아삽’은 그가 지은 시편에서 “에브라임 자손은 무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율법 준행을 거절하며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시 78:9-11)”라고 노래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브라임 지파는 이런 이미지였다.
이런 이미지는 가나안 땅 정복 전쟁과 사사 시대의 혼란한 전쟁들을 거치면서 형성된 듯하다. 드보라가 시스라와 철 병거 900대에 맞서기 위해 불어 소집한 나팔 소리에도 에브라임은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 에브라임은 장자 지파의 위치에 있었지만, 장자로서 이스라엘 지파들을 돕지 않았다. 도리어 결정적인 전쟁에서 비겁하게 소집 나팔에 응하지 않고 있다가, 패주하는 미디안이 자기네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요단 나루터를 장악해 달라는 기드온의 요청을 받아들여 손쉽게 나루터를 장악하고 미디안 군사들을 죽였다. 그리고 두 장수를 쫓아가 죽이고 그 머리를 들고 요단강을 건너와 생색을 낸 것이다.
*민족의 전투에서 장자의 자리에 걸맞게 적극적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장자 지파로서의 의무는 감당하지 않으면서 장자 지파의 영광만 얻으려는 것이다. 비겁하고 얄밉다.
*하지만 기드온의 반응이 정말 놀랍다. 그는 “자신과 자기 지파는 한없이 낮추고, 에브라임의 존재감은 더욱 인정한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기드온의 가문)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2절)”,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3절)”, 이 두 문장으로 에브라임의 어깃장을 잠재운다. 그야말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은” 셈이다. 파렴치한 에브라임의 어깃장을 기드온은 겸손한(?) 말로 잠재웠다. 에브라임은 심하게 다툴 기세로 강하게 압박해 왔지만, 기드온은 그들과 다투지 않고 오히려 치하하며 높여 주었다. 그러자 에브라임의 노여움이 풀렸다.
*언뜻 보면 참 너그러운 지도자로구나 싶지만, 그렇지 않다. 요단 동편에서 보인 모습을 보면, 그는 강한 지파인 에브라임 앞에서는 약하고 약한 동족들 앞에서는 강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기드온은 소인배다.
2.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의 저주를 자초한 말, 기드온의 찜찜한 말(4-21절)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는 요단강을 건너 도망하는 미디안 왕들을 추격한다. 그 와중에 숙곳과 브누엘 두 마을에 음식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유인즉 “미디안 왕들을 사로잡은 것을 보기 전에는 기드온에게 협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5-9절).
*이 일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 담긴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해칠 수 있는 일에는 협조하지 않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진리와 정의와 평화보다 언제나 자기 안전과 이익이 우선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숙곳과 브누엘은 기드온이 세바와 살문나를 생포하여 돌아오자 그가 말한 대로 징벌을 받는다. 기드온은 숙곳의 장로들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징벌했고(16절), 브누엘 망대를 헐고 그 성읍 사람들을 죽였다(17절). 그리고 세바와 살문나에게는 그들이 다볼에서 자기 형제들을 죽인 것에 대한 복수를 행한다. “그들은 나의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들이다.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너희가 그들을 살려 주기만 하였더라도 내가 너희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새번역_19절).” 형제들을 “살려 주기만 하였더라도” 세바와 살문나를 살려 주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매우 우려스러운 장면이다. 기드온이 요단 동편으로 건너와 세바와 살문나가 이끄는 15,000명의 패잔병을 평정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동족인 숙곳의 장로들과 브누엘 주민들을 죽인 이유가 “개인의 원한을 갚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구원자로서의 책임을 자신의 복수에 사용한 것이다. 그는 개인의 복수를 위해 300명의 군사를 이용했고, 그 와중에 여호와를 앞세워 보복의 명분을 세웠다(19절). 또 자신의 복수를 위해 숙곳과 브누엘에 거주하던 동족인 갓 지파 사람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처단한다(7, 13-17절).
*이스라엘 공동체가 무너진 것이 확연하게 보인다. 동족의 전쟁에 참여하여 돕지 않는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 제대로 응하지도 않고 공로만 차지하려는 에브라임……. 하나님의 승리를 믿지 않았던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여호와의 전쟁을 개인의 원한을 갚는 복수 전쟁으로” 전락시킨 기드온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시려던 전쟁이 개인의 원한을 갚는 일로 마무리된다.
나는?
-요단 나루터에서 큰 공을 세운(7:24-25) 에브라임 지파는 처음부터 자신들을 미디안 전쟁에서 배제한 것에 대해 크게 불평한다(1절). 그들은 전쟁 끝 무렵에 참전하여 오렙과 스엡을 처리했다. 그리고 그 후에 처음부터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며 기드온에게 시비를 건다.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전리품을 더 얻기를 원한 것이다. 그래서 기드온이 에브라임이 마지막에 한 일을 높이 평가하며 넉넉한 전리품을 약속하는 듯한 말을 하자, 의도된 분노를 누그러뜨린다. 승리의 영예를 서로 차지하려는 그들의 다툼은 이 전쟁이 ‘누구’의 전쟁이고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를 되묻게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무엇에 기뻐하고 분노하는지를 보면, 내가 무엇을 가장 열망하는지가 드러난다. 하나님 나라보다 내 명예와 유익, 내 교회와 내 교파를 앞세우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리라.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치기 어린 불평에, 일단 자신이 세운 공적보다 미디안의 두 방백을 죽인 에브라임의 공적을 추켜세우며 불화를 누그러뜨린다(2-3절). 자칫 ‘한 지파의 불만’으로 야기될 수 있는 ‘지파 간의 내분’까지 미연에 차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혜로운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승리를 독점하지 않고 함께한 모든 지체와 영광을 나누는 모습으로 보아도 기드온의 처세는 현명하다. 시기와 경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불평이라도 경청하고 존중해 주어 내분으로 번지지 않게 하는 기드온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숙곳과 브누엘에 대한 그의 대처는 사뭇 다르다. 불평하는 에브라임 지파를 뒤로하고 미디안의 두 왕을 추격하는 이스라엘 군대는 피곤에 지쳐 있는 상태였다. 이 와중에 숙곳과 브누엘 주민들은 기드온과 군사들을 냉담하기 짝이 없게 대한다. 기드온은 그럼에도 미디안의 두 왕을 사로잡기 위해 직접 나서고, 도움 요청에 불응한 그들을 응징한다(4-9절). 이런 모습은 동족들 앞에서 자신을 ‘왕’과 동일시한다는 인상을 충분히 풍긴다. 믿음이 부패하면 인간의 지위와 권력은 언제든 교만을 낳는다. 그리고 이 교만한 힘은 사회적 불의와 혼란을 만들어 낸다. 어떤 형태의 지위나 힘이든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기 위해 맡은 것임을 기억할 때, 그 힘에 나 자신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한편 요단 동편의 사람들은 기드온의 요청을 거절할 만큼 그의 원정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6, 8, 10-12절). 이는 그들의 무심하고 불충한 모습일 수도 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 내재된 분열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후의 행적을 보면, 이때 기드온의 원정은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비전과 야망, 헌신과 혹사, 순종과 추종 사이의 경계를 잘 분별하는 것이 주님의 의도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삶을 사는 지혜가 아닐까? 혹시 지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즉시 돌이켜야 한다.
-한편 세바와 살문나는 남은 군사 15,000명을 모아 갈골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과 맞섰다. 불과 15,000명만 남았다가 그마저 전멸한 것이다. 게다가 기드온은 그가 따라오지 않으리라 여기며 안심하고 있던 그들을 쳐서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온 진영을 격파하였다.
-기드온은 미디안의 보복이 두려워 피곤한 군대에게 마른 떡 한 조각도 주지 않은 숙곳 사람들의 비겁함과 비정함을 ‘질책하며’ 잔혹하게 징벌한다(13-17절). 하지만 동족을 향한 필요 이상의 분노와 징벌은 ‘공의로운 보응’이 아니라 ‘사적 감정에 치우친 보복’으로 보인다. 두려워하던 기드온이 ‘군림하는 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보복자’가 된 것이다. 우리도 사적인 감정이나 이익에 치우쳐 공평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부분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또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크고 작은 다툼이 ‘나의 탐욕’에서 시작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적장들을 처형하는 과정에서 기드온은 ‘왕처럼’ 행세한다. 적장들의 눈에도 기드온의 형제들은 ‘왕자’처럼 보였고, 기드온은 장자에게 적국의 왕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여 자신과 아들의 위상을 높이려 한다(18-21절). 우리도 얼마든지 믿음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데 관심을 둘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자기의 흔적을 남기려는 의도로 시작한 일을 통해서는 영광받지 않으신다.
-8장의 요단 동편 정벌에서는 하나님의 개입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기드온은 가장 은혜로운 기적의 승리 직후에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개인의 원수를 갚는 일에 매진했다. 가장 은혜로운 시간 속에서 자기 공로를 내세우고 자기 원한을 갚는 일에 사사의 직분을 사용한 것이다.
*나도 언제든지 이 유혹에 노출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절정에 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얹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래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그 분위기에 휩쓸려 더욱 박차를 가해 진행할 수도 있다. 기드온처럼 말이다.
*개인의 원한을 갚는 과정에서 결국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소심하고 비겁한 모습이 그대로 노출된다. 미디안의 눈을 피해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그 소심함이,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한 절정의 순간에 드러나고 만 것이다.
*이런 기드온의 모습이 나의 모습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에 감춰져 있던 나의 나약한 모습이 언제든 표면에 드러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어떻게 은혜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계속 드러나도록 할 수 있겠는가!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도무지 불가능하다.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직후 나선 요단 동편 정벌에 하나님이 없다! 기드온의 혈기와 교만만 드러났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 [사사기 7:15-25]
미디안 보초병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한 기드온이 담대하게 공격하여 미디안 군대가 흩어진다. 이에 다른 지파들을 소집하여 추격전에 나서고, 에브라임 지파까지 참전한 끝에 전쟁은 승리로 끝난다. 7년간 이어진 미디안의 폭압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다.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는 어떤 것일까?
1. 칼과 창이 없다?! 하지만!!(15~18절)
황당하고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 무기 자체가 없는 군대, 거기에 횃불과 빈 항아리 전술이라니…… 세계 전쟁사에서 이런 유례를 찾아볼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충분한 병력이나 첨단 무기, 손자도 생각하지 못할 탁월한 전략과 전술에 의지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능력을 발휘하신다. 전쟁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싸우는 것이다. 이렇게 승리한 기적의 전쟁이었다.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가장 큰 특징은 황당하리만치 적은 병력, 그리고 그에 이은 “무기 없는 군대”이다. 기드온은 이들과 함께 미디안 급습을 준비하며 100명씩 세 대로 나누었다. 그들의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 그리고 횃불을 들려 감추게 하고 조용히 이동했다. 빈 항아리 속에서 횃불은 계속 타올라야 하면서도 불빛은 새어 나가지 않아야 했기에 만만치 않은 급습이었다. 하지만 더 황당한 것은 무기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철저히 “기도비닉”을 유지하고 암호를 숙지시켜 일제히 급습할 수 있게 준비했다. 무엇보다 서로 떨어진 곳에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려야 했다. 그것도 이경 초(고대의 시간 구분에 따르면 밤 10시에서 12시 사이이니, 이경 초는 밤 10시경)에 개시해야 하는 작전이었다. 오늘날처럼 전기 조명이 아예 없던 시대였기에 상당히 깊은 밤이었다.
*칼과 창 없는 야간 급습…… 300명이지만 호흡을 맞추어 일제히 급습해야 하는 조직력이 이제 막 소집된 군사들에게 가당키나 했겠는가…… 그럼에도 기드온은 미디안 보초병들의 대화에서 확신을 얻고 지체하지 않고 결행한다.
*300명의 군사들의 손에는 무기 대신 “나팔, 빈 항아리, 횃불”이 들려 있다. 하나님의 군사는 지금 자기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과 함께한다면 전투의 현장이 이미 승리의 현장이 되었음을 믿음으로 확신하며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최신 무기 대신 손에 든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은 하나님의 훌륭한 승리의 도구가 되었다.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앞서 이끄신 전쟁이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말도 되지 않는 상황,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믿음이라는 비상식적인 확신만 손에 쥐고 있다. 그런데도 인생의 전장에서 승리한다. 바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의 바로 등 뒤에서 안전하게 이 전장을 누비고 있기 때문이다.
2. 자중지란, 아비규환, 멈춤 없는 후퇴(19~25절)
마치 가나안 땅에 처음 발을 내디디며 치렀던 여리고성 전투가 생각난다. 그때의 이스라엘도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나팔과 외침’뿐이었다. 기드온은 밤 이경 초(10~12시), 파수꾼들이 막 교대를 끝낸 그때 일제히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서로 부딪쳐 깨뜨리며 고함을 질렀다. 무엇보다 기드온과 300명은 “각기 제자리에서” 그저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리며,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흔들며 소리를 질렀을 뿐이었다.
그런데 미디안 군대가 “자중지란”에 빠지고 말았다. 곧이어 자기편끼리 칼을 빼어 서로 싸우고 죽이는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들은 그저 각각 “제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그들은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이미 이긴 전쟁을 참관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전쟁을 지켜볼 뿐이었다.
미디안은 자신들의 군사력, 곧 숫자만 의지했다. 삿 8:10에 따르면 13만 5천 명의 군사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급습한 군사가 겨우 300명이었다는 사실을, 서로 칼로 치고 죽어 가면서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의 상대가, 자신들의 신인 바알이나 아세라는 그저 나무 땔감에 불과함을 깨우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간과하였다. 전쟁은 규모나 무기, 전략과 전술이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편에 섰느냐 서지 않았느냐가 승리를 판가름한다.
*아쉽게도 세상은 여전히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분명한 역사적 교훈으로 남겨 기록해 놓았는데도, 하나님을 외면하는 이들에게는 그저 판타지 소설이나 신화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에게는 더 비이성적인 방법도 용납하며 자기 욕망과 자기 능력, 자기 세력을 의지한다. 하나님 편에 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궁극적인 승리를 맛볼 수 없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인생의 전장에서, 오히려 자신들이 의지하던 것에 뒤통수를 맞고, 자중지란이 언제든 일어나며, 아비규환과 같은 고통이 멈추지 않는 것은 결국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임을 기드온의 이야기가 분명하게 깨우쳐 주고 있다.
3. 그런데!
기드온의 자세가 불안하다! 보초병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하나님보다 자신의 이름이 더 도드라지게 행동하는 듯한 모습이 불안하다.
하나님만을 위하여 싸워야 할 싸움에 자신의 이름을 살짝 얹는다. “너희는 나를 보고 있다가, 내가 하는 대로 하여라. 내가 적진의 끝으로 가서 하는 대로 따라 하여라. 나와 우리 부대가 함께 나팔을 불면, 너희도 적진의 사방에서 나팔을 불면서 ‘주님 만세! 기드온 만세!’ 하고 외쳐라”(새번역 17~18절).
기드온의 미묘한 변화가 꺼림칙하다.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전쟁에서 기드온 자신의 행동에 무게를 두고 집중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이런 행동이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삿 8:22에서는 사사의 직을 세습하게 해 달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결정적인 오해로 나타난다. “그 뒤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말하였다. ‘장군께서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 주셨으니, 장군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대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새번역). 또 9장 17절에서는,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이복형제들을 몰살하는 현장에서 살아남은 요담의 항변 속에 담긴 고백으로 나타난다. “나의 아버지가 여러분을 살리려고 싸웠으며, 생명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분을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서 구하여 내지 않았습니까?”(새번역)
가장 긴박한 순간, 결정적인 한마디에 자신의 이름을 부각시킨 일의 영향이 이토록 커질 줄 기드온이 알았을까? 300명으로 나팔과 빈 항아리, 횃불 작전을 주도한 탁월한 영웅으로만 인식하는 후손들에게서, 하나님께서 승리를 이끄셨다는 고백은 찾아볼 수 없다.
*오늘 내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삶의 전장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분명한 교훈을 준다. 불가능한 상황일수록, 비상식적인 상황일수록 나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분명하게 선언되고 드러나도록 늘 주의해야겠다.
*특히 목회의 현장이 그렇다! 나의 이름을 끼워 넣고 싶은 유혹이 늘 있다. 내가 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저 “말씀하신 대로”, “감동 주셔서 인도하신 대로”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이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내가 한 것인 양 포장하려는 유혹을 늘 분별하고, 나의 이름을 높이려는 공명심을 경계해야겠다.
나는?
*기드온은 이 전쟁을 그의 손에 붙이신(14절) 하나님께 ‘경배’하고 진격을 명령한다. 이제 두려움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출정 준비를 마친 것이다. 승리의 유일한 조건은 ‘군대의 역량’이 아니라 ‘믿음의 역량’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그에게 상식을 넘어선 상상력(창의적 전술)을 불러일으키고, 막강한 전력의 틈을 보게 한다. 어떤 싸움이든 눈에 보이는 ‘전력’을 비교하는 것이 필요한 절차일 수 있으나,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는 자기 ‘믿음’을 점검하는 것이 가장 먼저다.
*기드온은 미디안 병사들의 꿈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전쟁 준비를 명령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지나치게 “나”, 즉 기드온 자신을 여호와보다 앞세운다. 자기 말만 따르면 된다는 식이다. 우려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에게는 여호와께서만 온전히 영광을 받으신다는 생각이 없고, 자신도 얼마간은 영광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긴 듯하다. “기드온을 위하라”고 외치라는 그에게 전쟁은 “오직 여호와께 속한 것”이 아닌 듯하다.
*군사들에게 주어진 무기는 ‘항아리, 횃불, 나팔’이 전부였다. 신호가 떨어지면 항아리를 깨고 횃불을 흔들며 나팔을 부는 것이 전술의 전부다(15~18절). ‘무기’치고는 너무 엉뚱하고, ‘작전’치고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고, 이 전쟁이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잊지 않았다. 수적 열세가 확실했으나 그들의 믿음만은 밀리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 직면하든지 정말 근심해야 할 것은 불리한 조건이나 상황이 아니라 연약한 ‘믿음’이 아닐까…… 한편 기드온은 단지 제자리에 서서 이 명령만 했을 뿐인데, 적들은 혼란에 빠지고 그들 스스로 자기 동족을 친다. 대적들의 월등한 군사력이 도리어 자신들을 자멸시킨다. 이 어찌 기드온이 예측이나 한 일이었겠는가? 그런데도 ‘기드온을 위하여’라니……
*미디안 연합군을 자멸하게 한 것은 ‘기드온의 칼(군대)’이 아니라 ‘여호와의 칼'(20절)이었다. 기드온과 그의 군대는 적진 주변에 ‘서서’ 진을 ‘에워싸고’ 나팔만 ‘불었을’ 뿐, 적군이 서로 칼을 겨누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19~23절). 수적 열세인지 전략적 우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 대신 의지하는 것은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 뿐, 위경에 처한 우리를 건져 내지 못한다. 인생의 수많은 변수 속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상수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호와의 전쟁이 또 다른 전쟁(기드온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제 여호와가 아니라 기드온이 전쟁을 주도한다(23~25절). 이미 해산된 지파의 군사들(6:35)이 다시 돌아오고, 기드온이 ‘사자를 보내’ 에브라임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의도하신 전쟁'(2~4절)과 동떨어져 보인다. 이는 에브라임 지파가 전쟁의 승리를 자신들의 공으로 내세우는 모습(8:1~3)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의 우려(2절)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로 미디안 군사들은 패주하기 시작한다. 이에 기드온은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급히 전령을 보내 잔당을 추격하여 섬멸해 줄 것을 요청한다. 납달리와 아셀, 므낫세 지파의 군사들이 이에 응답하여 그들을 뒤쫓는다.
*아마도 300명에서 제외된 군사들이 즉각 응답했을 것이다. 특히 납달리, 아셀, 므낫세라고 특정하여 곧바로 응했다고 한 것은, 이들이 전장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주력 선봉대에 선발되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전장 근처를 지킨 이들에게 대미를 장식하는 기회가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300명의 군사들은 정말 한 것이 없구나!
*또 기드온은 미디안의 패잔병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건너야 할 벧 바라와 요단강에 이르는 물길(요단 나루터)을 에브라임 지파에게 부탁하여 먼저 차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려는 패잔병들을 남김없이 처단하였다. 더 나아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동편까지 쫓아가서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까마귀)과 스엡(늑대)을 처단하여 전쟁을 마무리한다.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 곧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끄셔서 이미 승리가 결정된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를 누릴 뿐이었다. 칼과 창이 없어도, 군사적 전술이나 행동이 변변치 않아도, 심지어 기드온이 없어도 하나님은 승리하실 수 있다. 기드온은 순종했고,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하나님의 영광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지는 못했다. 기드온의 모습 속에서,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여기는 함정이 보인다. 나의 순종으로 빛나는 것이 나 자신이라면, 순종의 의미는 퇴색하고 승리는 반쪽짜리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는 어떤 것일까?
1. 칼과 창이 없다?! 하지만!!(15~18절)
황당하고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 무기 자체가 없는 군대, 거기에 횃불과 빈 항아리 전술이라니…… 세계 전쟁사에서 이런 유례를 찾아볼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충분한 병력이나 첨단 무기, 손자도 생각하지 못할 탁월한 전략과 전술에 의지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능력을 발휘하신다. 전쟁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싸우는 것이다. 이렇게 승리한 기적의 전쟁이었다.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가장 큰 특징은 황당하리만치 적은 병력, 그리고 그에 이은 “무기 없는 군대”이다. 기드온은 이들과 함께 미디안 급습을 준비하며 100명씩 세 대로 나누었다. 그들의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 그리고 횃불을 들려 감추게 하고 조용히 이동했다. 빈 항아리 속에서 횃불은 계속 타올라야 하면서도 불빛은 새어 나가지 않아야 했기에 만만치 않은 급습이었다. 하지만 더 황당한 것은 무기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철저히 “기도비닉”을 유지하고 암호를 숙지시켜 일제히 급습할 수 있게 준비했다. 무엇보다 서로 떨어진 곳에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려야 했다. 그것도 이경 초(고대의 시간 구분에 따르면 밤 10시에서 12시 사이이니, 이경 초는 밤 10시경)에 개시해야 하는 작전이었다. 오늘날처럼 전기 조명이 아예 없던 시대였기에 상당히 깊은 밤이었다.
*칼과 창 없는 야간 급습…… 300명이지만 호흡을 맞추어 일제히 급습해야 하는 조직력이 이제 막 소집된 군사들에게 가당키나 했겠는가…… 그럼에도 기드온은 미디안 보초병들의 대화에서 확신을 얻고 지체하지 않고 결행한다.
*300명의 군사들의 손에는 무기 대신 “나팔, 빈 항아리, 횃불”이 들려 있다. 하나님의 군사는 지금 자기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과 함께한다면 전투의 현장이 이미 승리의 현장이 되었음을 믿음으로 확신하며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최신 무기 대신 손에 든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은 하나님의 훌륭한 승리의 도구가 되었다.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앞서 이끄신 전쟁이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말도 되지 않는 상황,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믿음이라는 비상식적인 확신만 손에 쥐고 있다. 그런데도 인생의 전장에서 승리한다. 바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의 바로 등 뒤에서 안전하게 이 전장을 누비고 있기 때문이다.
2. 자중지란, 아비규환, 멈춤 없는 후퇴(19~25절)
마치 가나안 땅에 처음 발을 내디디며 치렀던 여리고성 전투가 생각난다. 그때의 이스라엘도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나팔과 외침’뿐이었다. 기드온은 밤 이경 초(10~12시), 파수꾼들이 막 교대를 끝낸 그때 일제히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서로 부딪쳐 깨뜨리며 고함을 질렀다. 무엇보다 기드온과 300명은 “각기 제자리에서” 그저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리며,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흔들며 소리를 질렀을 뿐이었다.
그런데 미디안 군대가 “자중지란”에 빠지고 말았다. 곧이어 자기편끼리 칼을 빼어 서로 싸우고 죽이는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들은 그저 각각 “제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그들은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이미 이긴 전쟁을 참관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전쟁을 지켜볼 뿐이었다.
미디안은 자신들의 군사력, 곧 숫자만 의지했다. 삿 8:10에 따르면 13만 5천 명의 군사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급습한 군사가 겨우 300명이었다는 사실을, 서로 칼로 치고 죽어 가면서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의 상대가, 자신들의 신인 바알이나 아세라는 그저 나무 땔감에 불과함을 깨우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간과하였다. 전쟁은 규모나 무기, 전략과 전술이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편에 섰느냐 서지 않았느냐가 승리를 판가름한다.
*아쉽게도 세상은 여전히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분명한 역사적 교훈으로 남겨 기록해 놓았는데도, 하나님을 외면하는 이들에게는 그저 판타지 소설이나 신화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에게는 더 비이성적인 방법도 용납하며 자기 욕망과 자기 능력, 자기 세력을 의지한다. 하나님 편에 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궁극적인 승리를 맛볼 수 없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인생의 전장에서, 오히려 자신들이 의지하던 것에 뒤통수를 맞고, 자중지란이 언제든 일어나며, 아비규환과 같은 고통이 멈추지 않는 것은 결국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임을 기드온의 이야기가 분명하게 깨우쳐 주고 있다.
3. 그런데!
기드온의 자세가 불안하다! 보초병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하나님보다 자신의 이름이 더 도드라지게 행동하는 듯한 모습이 불안하다.
하나님만을 위하여 싸워야 할 싸움에 자신의 이름을 살짝 얹는다. “너희는 나를 보고 있다가, 내가 하는 대로 하여라. 내가 적진의 끝으로 가서 하는 대로 따라 하여라. 나와 우리 부대가 함께 나팔을 불면, 너희도 적진의 사방에서 나팔을 불면서 ‘주님 만세! 기드온 만세!’ 하고 외쳐라”(새번역 17~18절).
기드온의 미묘한 변화가 꺼림칙하다.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전쟁에서 기드온 자신의 행동에 무게를 두고 집중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이런 행동이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삿 8:22에서는 사사의 직을 세습하게 해 달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결정적인 오해로 나타난다. “그 뒤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말하였다. ‘장군께서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 주셨으니, 장군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대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새번역). 또 9장 17절에서는,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이복형제들을 몰살하는 현장에서 살아남은 요담의 항변 속에 담긴 고백으로 나타난다. “나의 아버지가 여러분을 살리려고 싸웠으며, 생명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분을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서 구하여 내지 않았습니까?”(새번역)
가장 긴박한 순간, 결정적인 한마디에 자신의 이름을 부각시킨 일의 영향이 이토록 커질 줄 기드온이 알았을까? 300명으로 나팔과 빈 항아리, 횃불 작전을 주도한 탁월한 영웅으로만 인식하는 후손들에게서, 하나님께서 승리를 이끄셨다는 고백은 찾아볼 수 없다.
*오늘 내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삶의 전장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분명한 교훈을 준다. 불가능한 상황일수록, 비상식적인 상황일수록 나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분명하게 선언되고 드러나도록 늘 주의해야겠다.
*특히 목회의 현장이 그렇다! 나의 이름을 끼워 넣고 싶은 유혹이 늘 있다. 내가 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저 “말씀하신 대로”, “감동 주셔서 인도하신 대로”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이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내가 한 것인 양 포장하려는 유혹을 늘 분별하고, 나의 이름을 높이려는 공명심을 경계해야겠다.
나는?
*기드온은 이 전쟁을 그의 손에 붙이신(14절) 하나님께 ‘경배’하고 진격을 명령한다. 이제 두려움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출정 준비를 마친 것이다. 승리의 유일한 조건은 ‘군대의 역량’이 아니라 ‘믿음의 역량’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그에게 상식을 넘어선 상상력(창의적 전술)을 불러일으키고, 막강한 전력의 틈을 보게 한다. 어떤 싸움이든 눈에 보이는 ‘전력’을 비교하는 것이 필요한 절차일 수 있으나,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는 자기 ‘믿음’을 점검하는 것이 가장 먼저다.
*기드온은 미디안 병사들의 꿈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전쟁 준비를 명령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지나치게 “나”, 즉 기드온 자신을 여호와보다 앞세운다. 자기 말만 따르면 된다는 식이다. 우려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에게는 여호와께서만 온전히 영광을 받으신다는 생각이 없고, 자신도 얼마간은 영광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긴 듯하다. “기드온을 위하라”고 외치라는 그에게 전쟁은 “오직 여호와께 속한 것”이 아닌 듯하다.
*군사들에게 주어진 무기는 ‘항아리, 횃불, 나팔’이 전부였다. 신호가 떨어지면 항아리를 깨고 횃불을 흔들며 나팔을 부는 것이 전술의 전부다(15~18절). ‘무기’치고는 너무 엉뚱하고, ‘작전’치고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고, 이 전쟁이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잊지 않았다. 수적 열세가 확실했으나 그들의 믿음만은 밀리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 직면하든지 정말 근심해야 할 것은 불리한 조건이나 상황이 아니라 연약한 ‘믿음’이 아닐까…… 한편 기드온은 단지 제자리에 서서 이 명령만 했을 뿐인데, 적들은 혼란에 빠지고 그들 스스로 자기 동족을 친다. 대적들의 월등한 군사력이 도리어 자신들을 자멸시킨다. 이 어찌 기드온이 예측이나 한 일이었겠는가? 그런데도 ‘기드온을 위하여’라니……
*미디안 연합군을 자멸하게 한 것은 ‘기드온의 칼(군대)’이 아니라 ‘여호와의 칼'(20절)이었다. 기드온과 그의 군대는 적진 주변에 ‘서서’ 진을 ‘에워싸고’ 나팔만 ‘불었을’ 뿐, 적군이 서로 칼을 겨누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19~23절). 수적 열세인지 전략적 우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 대신 의지하는 것은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 뿐, 위경에 처한 우리를 건져 내지 못한다. 인생의 수많은 변수 속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상수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호와의 전쟁이 또 다른 전쟁(기드온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제 여호와가 아니라 기드온이 전쟁을 주도한다(23~25절). 이미 해산된 지파의 군사들(6:35)이 다시 돌아오고, 기드온이 ‘사자를 보내’ 에브라임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의도하신 전쟁'(2~4절)과 동떨어져 보인다. 이는 에브라임 지파가 전쟁의 승리를 자신들의 공으로 내세우는 모습(8:1~3)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의 우려(2절)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로 미디안 군사들은 패주하기 시작한다. 이에 기드온은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급히 전령을 보내 잔당을 추격하여 섬멸해 줄 것을 요청한다. 납달리와 아셀, 므낫세 지파의 군사들이 이에 응답하여 그들을 뒤쫓는다.
*아마도 300명에서 제외된 군사들이 즉각 응답했을 것이다. 특히 납달리, 아셀, 므낫세라고 특정하여 곧바로 응했다고 한 것은, 이들이 전장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주력 선봉대에 선발되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전장 근처를 지킨 이들에게 대미를 장식하는 기회가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300명의 군사들은 정말 한 것이 없구나!
*또 기드온은 미디안의 패잔병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건너야 할 벧 바라와 요단강에 이르는 물길(요단 나루터)을 에브라임 지파에게 부탁하여 먼저 차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려는 패잔병들을 남김없이 처단하였다. 더 나아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동편까지 쫓아가서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까마귀)과 스엡(늑대)을 처단하여 전쟁을 마무리한다.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 곧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끄셔서 이미 승리가 결정된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를 누릴 뿐이었다. 칼과 창이 없어도, 군사적 전술이나 행동이 변변치 않아도, 심지어 기드온이 없어도 하나님은 승리하실 수 있다. 기드온은 순종했고,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하나님의 영광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지는 못했다. 기드온의 모습 속에서,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여기는 함정이 보인다. 나의 순종으로 빛나는 것이 나 자신이라면, 순종의 의미는 퇴색하고 승리는 반쪽짜리가 될 것이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비상식적이고 초라하며 황당한 숫자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다! [사사기 7:1-14]
양털 시험 끝에 기드온과 3만 2천의 군사들은 하롯 샘 곁에 진을 친다. 미디안은 북서쪽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으니, 그들은 요단강 쪽으로 퇴로가 막힌 형세가 되었다. 즉, 퇴로를 확보하지 않은 채 진을 친 것이다. 이스라엘을 얕잡아 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군사의 수를 3만 2천 명에서 100분의 1 수준인 300명으로 줄이신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
1. 숫자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1~8절)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기드온은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길보아 산기슭에 있는 하롯 샘에 진을 친다. 미디안은 반대편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진을 쳤다. 미디안이 북쪽 이스르엘 골짜기까지 왔다는 것은, 남쪽 지역인 가사 지역부터 점점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마침내 북쪽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진을 친 ‘하롯 샘’은 ‘떨림의 샘’이라는 뜻이다. 전쟁에 임하는 이스라엘의 두려운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렇게 전쟁을 준비한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적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지 않겠다고 하신다. 그 이유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스스로 자랑할까 봐”(2절)라고 밝히신다. 이는 6장 36절에서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이라고 한 말에 대한 응답이다. 기드온과 그 백성이 자신의 손으로 승리하였다고 여기고,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에게 돌릴까 봐 이렇게 시험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1~3절을 통해 먼저 두려워하는 자들을 돌려보내셨고, 4~8절을 통해 남은 자들 중에서 300명만 남기셨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므낫세와 아셀, 스불론과 납달리에서 모인 군대가 3만 2천 명이었으니 꽤 많이 모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의기양양할 만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달랐다. “그들이 너무 많다”(2절) 그리고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고 하시니 2만 2천 명이 빠져나간다. 1만 명이 남았지만 그 또한 많다고 하시면서, 하롯 샘으로 데리고 가서 물 마시는 태도를 보고 더 줄이라고 하셨다.
개가 핥는 것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 무릎을 꿇고 입으로 물을 마시는 자,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로 나눈 후,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아 먹는 자를 구별하셨다. 이렇게 구별하신 이유는 단순하다. 숫자가 가장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 숫자가 300명이었다. 왜 이들 300명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있다. 그중에서 전통적으로, 머리를 굽히거나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 전사로서 좋은 자세이기에 선택되었다는 견해가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본문은 그들의 자질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들이 더 좋은 전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메뚜기 같고 바다의 모래 같은 미디안 연합군에 비하면 이기기에 턱없이 부족한 수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들 300명을 남기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소수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너무 많아 줄이신 것이다. 좋은 전사를 선발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이렇게 삼만 이천 명의 약 백분의 일에 해당하는 300명이 남겨졌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전쟁은 사람 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기를 원하신 것이다.
*하나님께는 300명으로 충분했다. 세상은 숫자에 더 중심을 둔다. 기드온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미디안 족속이 메뚜기 떼같이 밀려왔다고 표현했다(6:5). 이번에 올라온 미디안도 다르지 않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6:33) 올라왔다고 했다. 그들에 비하면 300명은 전쟁하기에 턱없는 숫자였다.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숫자”가 필요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된다. 사람들은 숫자의 힘을 맹신한다. 규모의 경제를 더 신뢰한다. 그래서인지 세상은 자기 세력을 더 많이 불리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다르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자.
2. 하나님과 함께이기에!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3절) 하시니 2만 2천 명이 돌아갔다. 이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7년간의 미디안의 압제는 두려움을 쉬이 떨쳐 내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력했고, 자신들은 약하고 초라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두려워하는 이들은 전장에서 돌려보내야 했다. 두려움이 팽배해진 군대는 백전백패다. 그런데 이런 용기만으로는 전쟁에 나설 수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겨우 남은 300명……. 미디안의 군대 숫자와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한 병력이 거대한 군대와 대치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300명에게 하나님의 군대로서 사기를 진작시키시려고, 기드온과 그의 부하 부라를 몰래 미디안 군영에 보내 보초 서는 자의 말을 엿듣게 하신다. 놀라운 대화가 오갔는데, 결국 미디안 군대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드온이 그곳에 이르렀을 때에, 마침 한 병사가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친구에게 하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보리빵 한 덩이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 장막에 이르러서 그 장막을 쳐서 뒤엎으니, 그만 장막이 쓰러지고 말았다네’ 하고 말하니까, 꿈 이야기를 들은 그 친구가 말하였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인 기드온의 칼이 틀림없네.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을 그의 손에 넘기신다는 것일세'”(새번역 13~14절).
두려움에 떤 군대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미디안 군대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겨우 300명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심으로 이미 전쟁의 결론이 나 있는 상태였다. 미디안은 이미 싸워 보기도 전에 패배하였다.
*하나님과 함께이기에 이길 수 있다. 우리가 갖춘 숫자가 많으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3. 승리보다 중요한 것!(9~14절)
미디안의 압제, 우상 숭배에 물든 민족…….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시대였지만, 하나님의 부름에 3만 2천 명이 응답했다. 물론 미디안 연합군에 비하면 턱없는 숫자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백성이 너무 많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이번 전쟁의 핵심은 승리보다 “어떻게 이기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규모, 무기, 전략, 전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전쟁,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싶으셨다. 그래서 “네가 거느린 군대의 수가 너무 많다. 이대로는 내가 미디안 사람들을 네가 거느린 군대의 손에 넘겨주지 않겠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제쳐놓고서, 제가 힘이 세어서 이긴 줄 알고 스스로 자랑할까 염려된다”(새번역 2절)라고 하신 것이다.
전쟁의 승리가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기를 원하셨다. 7년 동안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백성들에게,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며 느끼고 동행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 깨닫게 해 주고 싶으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리 강력하게 여겨지는 미디안의 연합군이라도, 하나님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리시는 것이 이번 전쟁의 목적이었다. 기드온이 하나님에게서 “여호와 샬롬”의 은혜를 경험하고, 집안의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찍어 내고’, 양털 시험을 거쳐 출정한 전쟁에서 정작 자기 힘으로 이룬 것으로 여기고, 백성들은 자기들의 힘과 기드온의 능력으로 된 것으로 여겨 오히려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될 것을 차단하신다.
*오직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비상식적인 소수만 남기셨다. 아예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소수만 남기셨다. 또, 이런 소수를 선발하여 훈련시킨 자들로 세우지도 않으셨다. 조금이라도 자기 힘을 과신할 여지 자체를 없애고, 오직 하나님께서 승리로 이끄신 전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황당한 소수”까지 줄이셨다.
*혹자는 물을 마시는 방법(태도)을 가지고 준비된 자를 선발하셨다고 하지만 아니다. 오직 “비상식적이고 초라하며 황당한” 숫자까지 그저 걸러 내신 것이다. 무릎을 꿇고 손으로 떠서 핥는 자가 가장 적은 300명이어서 그들만 남기신 것이 분명하다. 더 적은 숫자를 선택하신 것뿐이다.
*또한 “준비된 용사가 되자”라는 말은 본문과 맞지 않는다. “준비된”에 초점을 맞추면 나팔을 불 때 올라온 3만 2천 명이어야 한다. 준비가 되었어도 개전 직전에 두렵고 떨리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기드온에게 남은 인원은 300명이다. 처음 소집에 응한 3만 2천 명 중에서 “두려워 떠는 자”는 다 돌려보내라고 하셨을 때, 기드온은 두렵고 떨지 않았다. 하지만 300명이 남았을 때 기드온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300명만 남은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야밤 기습을 명하신다(9절). 그런데 이어지는 10절은 이렇다. “네가 쳐내려가기가 두려우면, 너의 부하 부라와 함께 먼저 적진으로 내려가 보아라”(새번역 10절). 이제는 기드온이 두려운 것이다. 3만 2천 명은 사기가 출중할 숫자였다.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할 숫자였다. 그런데 300명까지 줄이신 하나님 앞에서, 기드온은 하나님보다 “비상식적이고 초라하며 황당한 숫자”에 먼저 사로잡혀 두려워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부하 부라와 함께 미디안 진영에서 들은 말은 그를 “숫자 강박”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했다. 오히려 더욱 용기를 내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인 기드온의 칼이 틀림없네.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을 그의 손에 넘기신다는 것일세”(새번역 14절).
-기드온은 보초병들의 말을 듣고서야 “비상식적이고 황당하며 초라한 숫자”까지 줄이신 하나님의 권능을 비로소 깨닫는다. “기드온의 칼”을 쥔 자신이 아니라, “기드온의 칼”을 쥐어 주신 하나님을 확신하게 된다. 두렵고 떨리는 자신의 손에 하나님께서 권능의 칼을 쥐어 주신 것을 알았다.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하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절실히 깨닫고 확신하게 하시려고 “비상식적이고 초라하며 황당한 숫자(상황)”로 인도하신 적이 꽤 있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용기를 잃을 수도 있었던 나에게, 하나님의 권능의 은혜들을 부어 주신 것을 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선하게 인도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오늘 나의 삶을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성장 과정이 그랬고, 사역의 현장에서 큰 위기를 경험했던 청년 시절도 그랬다. 세상 기준으로 한없이 부족함에도 오늘 이 자리에 세우신 것도 그렇다. 내가 의지하려 했던 숫자(상황, 규모, 여건, 재정 등등)를 맥없이 무너뜨리시고 나서야 하나님의 권능의 은혜가 보였다.
*숫자(여건, 재정, 관계 등)는 내가 의지하는 것이지만, 이것으로 승리를 이루어 낼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다. 내가 미련스럽게 의지하던 “숫자”를 버리니 하나님의 권능, 은혜, 사랑, 긍휼이 보였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권능, 그것이 승리를 가져올 뿐이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붙드실 때 승리를 누릴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손이 늘 나를 붙잡아 주시기만 바라고 바랄 뿐이다.
*숫자가 줄어드니 하나님의 은혜의 손이 더 커(풍성해)졌다! 내 힘과 의지의 한계가 드러나니 무한하신 하나님의 권능이 보이기 시작했다!
1. 숫자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1~8절)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기드온은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길보아 산기슭에 있는 하롯 샘에 진을 친다. 미디안은 반대편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진을 쳤다. 미디안이 북쪽 이스르엘 골짜기까지 왔다는 것은, 남쪽 지역인 가사 지역부터 점점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마침내 북쪽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진을 친 ‘하롯 샘’은 ‘떨림의 샘’이라는 뜻이다. 전쟁에 임하는 이스라엘의 두려운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렇게 전쟁을 준비한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적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지 않겠다고 하신다. 그 이유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스스로 자랑할까 봐”(2절)라고 밝히신다. 이는 6장 36절에서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이라고 한 말에 대한 응답이다. 기드온과 그 백성이 자신의 손으로 승리하였다고 여기고,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에게 돌릴까 봐 이렇게 시험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1~3절을 통해 먼저 두려워하는 자들을 돌려보내셨고, 4~8절을 통해 남은 자들 중에서 300명만 남기셨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므낫세와 아셀, 스불론과 납달리에서 모인 군대가 3만 2천 명이었으니 꽤 많이 모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의기양양할 만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달랐다. “그들이 너무 많다”(2절) 그리고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고 하시니 2만 2천 명이 빠져나간다. 1만 명이 남았지만 그 또한 많다고 하시면서, 하롯 샘으로 데리고 가서 물 마시는 태도를 보고 더 줄이라고 하셨다.
개가 핥는 것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 무릎을 꿇고 입으로 물을 마시는 자,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로 나눈 후,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아 먹는 자를 구별하셨다. 이렇게 구별하신 이유는 단순하다. 숫자가 가장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 숫자가 300명이었다. 왜 이들 300명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있다. 그중에서 전통적으로, 머리를 굽히거나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 전사로서 좋은 자세이기에 선택되었다는 견해가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본문은 그들의 자질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들이 더 좋은 전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메뚜기 같고 바다의 모래 같은 미디안 연합군에 비하면 이기기에 턱없이 부족한 수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들 300명을 남기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소수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너무 많아 줄이신 것이다. 좋은 전사를 선발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이렇게 삼만 이천 명의 약 백분의 일에 해당하는 300명이 남겨졌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전쟁은 사람 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기를 원하신 것이다.
*하나님께는 300명으로 충분했다. 세상은 숫자에 더 중심을 둔다. 기드온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미디안 족속이 메뚜기 떼같이 밀려왔다고 표현했다(6:5). 이번에 올라온 미디안도 다르지 않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6:33) 올라왔다고 했다. 그들에 비하면 300명은 전쟁하기에 턱없는 숫자였다.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숫자”가 필요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된다. 사람들은 숫자의 힘을 맹신한다. 규모의 경제를 더 신뢰한다. 그래서인지 세상은 자기 세력을 더 많이 불리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다르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자.
2. 하나님과 함께이기에!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3절) 하시니 2만 2천 명이 돌아갔다. 이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7년간의 미디안의 압제는 두려움을 쉬이 떨쳐 내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력했고, 자신들은 약하고 초라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두려워하는 이들은 전장에서 돌려보내야 했다. 두려움이 팽배해진 군대는 백전백패다. 그런데 이런 용기만으로는 전쟁에 나설 수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겨우 남은 300명……. 미디안의 군대 숫자와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한 병력이 거대한 군대와 대치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300명에게 하나님의 군대로서 사기를 진작시키시려고, 기드온과 그의 부하 부라를 몰래 미디안 군영에 보내 보초 서는 자의 말을 엿듣게 하신다. 놀라운 대화가 오갔는데, 결국 미디안 군대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드온이 그곳에 이르렀을 때에, 마침 한 병사가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친구에게 하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보리빵 한 덩이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 장막에 이르러서 그 장막을 쳐서 뒤엎으니, 그만 장막이 쓰러지고 말았다네’ 하고 말하니까, 꿈 이야기를 들은 그 친구가 말하였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인 기드온의 칼이 틀림없네.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을 그의 손에 넘기신다는 것일세'”(새번역 13~14절).
두려움에 떤 군대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미디안 군대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겨우 300명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심으로 이미 전쟁의 결론이 나 있는 상태였다. 미디안은 이미 싸워 보기도 전에 패배하였다.
*하나님과 함께이기에 이길 수 있다. 우리가 갖춘 숫자가 많으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3. 승리보다 중요한 것!(9~14절)
미디안의 압제, 우상 숭배에 물든 민족…….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시대였지만, 하나님의 부름에 3만 2천 명이 응답했다. 물론 미디안 연합군에 비하면 턱없는 숫자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백성이 너무 많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이번 전쟁의 핵심은 승리보다 “어떻게 이기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규모, 무기, 전략, 전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전쟁,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싶으셨다. 그래서 “네가 거느린 군대의 수가 너무 많다. 이대로는 내가 미디안 사람들을 네가 거느린 군대의 손에 넘겨주지 않겠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제쳐놓고서, 제가 힘이 세어서 이긴 줄 알고 스스로 자랑할까 염려된다”(새번역 2절)라고 하신 것이다.
전쟁의 승리가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기를 원하셨다. 7년 동안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백성들에게,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며 느끼고 동행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 깨닫게 해 주고 싶으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리 강력하게 여겨지는 미디안의 연합군이라도, 하나님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리시는 것이 이번 전쟁의 목적이었다. 기드온이 하나님에게서 “여호와 샬롬”의 은혜를 경험하고, 집안의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찍어 내고’, 양털 시험을 거쳐 출정한 전쟁에서 정작 자기 힘으로 이룬 것으로 여기고, 백성들은 자기들의 힘과 기드온의 능력으로 된 것으로 여겨 오히려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될 것을 차단하신다.
*오직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비상식적인 소수만 남기셨다. 아예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소수만 남기셨다. 또, 이런 소수를 선발하여 훈련시킨 자들로 세우지도 않으셨다. 조금이라도 자기 힘을 과신할 여지 자체를 없애고, 오직 하나님께서 승리로 이끄신 전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황당한 소수”까지 줄이셨다.
*혹자는 물을 마시는 방법(태도)을 가지고 준비된 자를 선발하셨다고 하지만 아니다. 오직 “비상식적이고 초라하며 황당한” 숫자까지 그저 걸러 내신 것이다. 무릎을 꿇고 손으로 떠서 핥는 자가 가장 적은 300명이어서 그들만 남기신 것이 분명하다. 더 적은 숫자를 선택하신 것뿐이다.
*또한 “준비된 용사가 되자”라는 말은 본문과 맞지 않는다. “준비된”에 초점을 맞추면 나팔을 불 때 올라온 3만 2천 명이어야 한다. 준비가 되었어도 개전 직전에 두렵고 떨리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기드온에게 남은 인원은 300명이다. 처음 소집에 응한 3만 2천 명 중에서 “두려워 떠는 자”는 다 돌려보내라고 하셨을 때, 기드온은 두렵고 떨지 않았다. 하지만 300명이 남았을 때 기드온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300명만 남은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야밤 기습을 명하신다(9절). 그런데 이어지는 10절은 이렇다. “네가 쳐내려가기가 두려우면, 너의 부하 부라와 함께 먼저 적진으로 내려가 보아라”(새번역 10절). 이제는 기드온이 두려운 것이다. 3만 2천 명은 사기가 출중할 숫자였다.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할 숫자였다. 그런데 300명까지 줄이신 하나님 앞에서, 기드온은 하나님보다 “비상식적이고 초라하며 황당한 숫자”에 먼저 사로잡혀 두려워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부하 부라와 함께 미디안 진영에서 들은 말은 그를 “숫자 강박”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했다. 오히려 더욱 용기를 내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인 기드온의 칼이 틀림없네.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을 그의 손에 넘기신다는 것일세”(새번역 14절).
-기드온은 보초병들의 말을 듣고서야 “비상식적이고 황당하며 초라한 숫자”까지 줄이신 하나님의 권능을 비로소 깨닫는다. “기드온의 칼”을 쥔 자신이 아니라, “기드온의 칼”을 쥐어 주신 하나님을 확신하게 된다. 두렵고 떨리는 자신의 손에 하나님께서 권능의 칼을 쥐어 주신 것을 알았다.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하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절실히 깨닫고 확신하게 하시려고 “비상식적이고 초라하며 황당한 숫자(상황)”로 인도하신 적이 꽤 있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용기를 잃을 수도 있었던 나에게, 하나님의 권능의 은혜들을 부어 주신 것을 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선하게 인도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오늘 나의 삶을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성장 과정이 그랬고, 사역의 현장에서 큰 위기를 경험했던 청년 시절도 그랬다. 세상 기준으로 한없이 부족함에도 오늘 이 자리에 세우신 것도 그렇다. 내가 의지하려 했던 숫자(상황, 규모, 여건, 재정 등등)를 맥없이 무너뜨리시고 나서야 하나님의 권능의 은혜가 보였다.
*숫자(여건, 재정, 관계 등)는 내가 의지하는 것이지만, 이것으로 승리를 이루어 낼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다. 내가 미련스럽게 의지하던 “숫자”를 버리니 하나님의 권능, 은혜, 사랑, 긍휼이 보였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권능, 그것이 승리를 가져올 뿐이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붙드실 때 승리를 누릴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손이 늘 나를 붙잡아 주시기만 바라고 바랄 뿐이다.
*숫자가 줄어드니 하나님의 은혜의 손이 더 커(풍성해)졌다! 내 힘과 의지의 한계가 드러나니 무한하신 하나님의 권능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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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의 밤중 순종과 우상 파괴, 그리고 양털 시험 [사사기 6:25-40]
기드온이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고 “여호와 샬롬”의 제단을 쌓은 그날 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요아스의 집에 있는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고 와서, 아버지의 집에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고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제단을 쌓고 둘째 수소를 잡아 그 찍은 아세라 상 나무로 번제를 드리라는 명령이었다(25~26절). 그런데 기드온은 이 일을 대낮에 행하지 못한다. 온 동네와 아버지를 거스를 수 없었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낮에 하지 못하고 밤중에 나아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을 자기 이름의 뜻대로 “찍어 냈다.”
*지금 행해야 할 일을 도무지 거역할 수 없는 명령으로 받아들여, 아무리 많은 도전과 위협과 압박이 밀려와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이제 막 여호와의 샬롬을 경험한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 내며, 미디안 연합군에 맞설 순종의 용기를 발휘해야 하는데…….
1. 밤중에 순종(25~32절)
마을 사람들과 아버지 요아스가 두려워 한밤중에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을 찍어 내어 버린 기드온……. 그리고 새로 쌓은 단 위에 둘째 수소를 드렸다. 하지만 아침이 되니 얼마 가지 못하고 들통나고 만다.
동네 주민들은 노발대발하며 이런 일을 행한 자를 색출하였고, 급기야 기드온의 소행임을 알게 된다. 성읍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기드온을 죽이려 한다. 그러자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담대하게 선포한다.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하여 다툴 것이니라.”(31절) 이렇게 위기를 넘긴 기드온을 사람들은 “여룹바알(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다)”이라 불렀다.
*바알과 아세라가 살아 있는 신이라면 기드온의 행위를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한 대로 그 찍어 냄을 당하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들은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드온의 순종이 눈물겹다. “…… 밤에 행하니라.”(27절) 집안사람들도 무서웠고, 동네 주민들도 무서웠다. 하지만 여호와 샬롬의 은혜의 힘이 주저하던 그를 결행하게 했다. 낮이 아닌 밤에…….
*기드온이 낮에 명령을 준행하지 않았다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밤에라도 순종한 것이 대견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현실의 장벽이 너무나 강력한데도 순종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감사하고 대견스럽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 낸다는 것이 갈수록 어려운 시대이지만, 낮에 하지 못하면 밤에라도 순종하는 기드온이 고맙다. 나도 그리할 수 있겠다!
2.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니(33~40절)
기드온은 밤에 순종한 후 마을 주민들의 거센 도전을 받는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 요아스는 침착하다. 오히려 바알의 단을 허물었으니 바알이 판단하겠지 하며 주민들의 분노를 잠재운다. 그렇게 사사로 세움을 받고 첫 관문을 통과한 기드온에게 미디안 연합군의 침략 소식이 들려오고(33절), 이어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였다”(34절). 그리고 나팔을 불었는데, 집안사람들(아비에셀 족속)이 반응하여 나온다.
참 희한하다! 집안의 바알의 단을 허무는 사고를 친 아들의 나팔 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이 가족이다. “여호와의 영”이 임한 결과다! 기드온의 말과 행동에서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고 반응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팔을 부니 므낫세와 아셀, 스불론과 납달리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무려 3만 2천 명이었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렇게 모여든 군사를 이끌고 곧장 전장으로 나가지 않는다. “양털 시험”을 진행한다. 여호와 샬롬까지 경험했고 바알과 아세라 신상까지 찍어 내어 버렸는데, 출정은 미룬다. 그러고는 하나님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겠는지 다시 증거를 구한 것이다.
*사실 기드온처럼 하나님께 표적을 구하고 나서 사사로 세움을 받은 이는 없다. 다른 사사들은 그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사사가 되었다. 그런데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날 때도 미적거리더니, 이번에도 미적거린다. 양털 시험의 목적은 “증표”를 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 원하는 대로 증표를 주셨다. 그만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변함이 없다. 인간의 불평과 불순종이라는 변수도 그 계획을 막아 낼 수 없다.
*기드온의 소심한 마음이 여전히 온전한 순종, 곧 즉각적인 순종을 어렵게 하지만, 어찌 됐든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시는 것이 맞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즉, 순종하고 싶어서 시험한 것이다. 두려움 없이 즉시, 머뭇거리지 않고 나아가 순종하는 것이 참 보기에도 좋겠지만, 기드온은 스스로를 확신하기에는 너무 경험이 적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즉시 받들어 순종하기에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 설익었고, 맞서야 할 도전은 너무나 막강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제발 순종할 수 있도록 “증거”를 보여 주시기를 구한 것이다.
*순종하기 위한 기드온의 마음가짐이 남다르다. 나도 그래야 한다!
나는?
-기드온은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아버지 밑에서 살았다. 그도 우상 숭배에 참여했을 것이 당연하다. 사사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전에, 또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우상을 꼭 제거해야 했다. 땔감밖에 안 되는 나무를 우상으로 섬긴 것이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오브라 성읍 높은 곳에서 칠 년 된 수소로 제사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밤에 한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도 두려워했지만, 사람들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은 그날 밤(24절),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명하신다(25~27절). 이 땅의 주인이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우상으로 얼룩진 이 땅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상 숭배의 허망함을 드러내어,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있는 이스라엘에게 경각심을 주신다. 우상의 허위를 폭로하고 우상이 주는 혜택을 거부하며 우상을 파괴하는 일은 ‘예배의 회복(24절)’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현현을 대면한 기드온이었지만, 오랫동안 믿어 온 바알의 단을 허무는 일은 두려웠을 것이다. 훼파된 바알의 단을 보고 분노한 사람들은 그의 목숨을 요구한다(27~30절). 그들은 ‘왜’보다 ‘누가’ 이 일을 행했는지만 추궁한다. 압제의 고통을 초래한 자신들의 패역은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다. ‘우상 척결’의 주범은 찾아냈지만, 정작 자신들이 ‘우상 숭배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몰랐다. 그렇다. 눈에 보이는 우상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영적 기만이다.
-기드온의 우상 제거 사실을 확인한 백성들은 그를 죽이려 한다. 하나님보다 아모리 사람들의 신, 곧 우상을 더 두려워한 것이다. 이에 기드온의 아버지이자 우상 숭배자인 요아스는 바알이 알아서 심판할 것이니 백성들이 나서지 말아야 한다고 만류한다. 그런데 이 발언이 스스로 자기 신을 조롱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가 자기 동족까지 조롱하는 말이 될 줄은 몰랐다.
-바알의 ‘무능’이 폭로된다. 자신을 위해 변론할 수도, 스스로 구원할 수도 없는 거짓 신임이 드러난다(31~32절). 지금도 우상과 그 세력이 늘 우세할 것 같고, 이미 우세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더 우상에 기대고 싶은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시’이자 ‘착각’일 뿐이다. 우상은 철저히 무능하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한다.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여 그는 사사로 부름받는다. 그러나 기드온은 또 주저한다. 두 번의 시험을 통해, 꼭 자신이 가야 한다면 확증해 달라고 요청한다. 자기 자신도 무례하다는 것을 알면서 하는 시험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묵묵히 들어주신다. 이처럼 기드온을 용맹하게 만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인내였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기드온이 거듭 군대를 소집한다(33~35절).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은데도, 자기 힘(‘내 손’)을 의지하려는 불신앙으로 보인다. 하지만 두 번의 징집은 결국 두 번의 해산(7:2, 4)으로 끝나고 만다. 내게도 하나님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인간적인 힘을 모으는 데 몰두한 적은 없었을까? 겸손하게 돌아볼 일이다.
-기드온은 거듭 요청한다. 앞서 바알과 쟁론하더니 이제는 하나님을 시험한다(3:1). 시험의 의도는 감춘 채 자신이 원하는 결과만 기다린다(36~40절). 내 신중함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불순종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오늘 말씀이 감사하다. 밤에라도 순종해야지……. 증거를 구하더라도 순종을 포기하지 말아야지……. 순종하고 싶어서 확신을 더 구해야지…….
*지금 행해야 할 일을 도무지 거역할 수 없는 명령으로 받아들여, 아무리 많은 도전과 위협과 압박이 밀려와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이제 막 여호와의 샬롬을 경험한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 내며, 미디안 연합군에 맞설 순종의 용기를 발휘해야 하는데…….
1. 밤중에 순종(25~32절)
마을 사람들과 아버지 요아스가 두려워 한밤중에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을 찍어 내어 버린 기드온……. 그리고 새로 쌓은 단 위에 둘째 수소를 드렸다. 하지만 아침이 되니 얼마 가지 못하고 들통나고 만다.
동네 주민들은 노발대발하며 이런 일을 행한 자를 색출하였고, 급기야 기드온의 소행임을 알게 된다. 성읍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기드온을 죽이려 한다. 그러자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담대하게 선포한다.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하여 다툴 것이니라.”(31절) 이렇게 위기를 넘긴 기드온을 사람들은 “여룹바알(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다)”이라 불렀다.
*바알과 아세라가 살아 있는 신이라면 기드온의 행위를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한 대로 그 찍어 냄을 당하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들은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드온의 순종이 눈물겹다. “…… 밤에 행하니라.”(27절) 집안사람들도 무서웠고, 동네 주민들도 무서웠다. 하지만 여호와 샬롬의 은혜의 힘이 주저하던 그를 결행하게 했다. 낮이 아닌 밤에…….
*기드온이 낮에 명령을 준행하지 않았다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밤에라도 순종한 것이 대견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현실의 장벽이 너무나 강력한데도 순종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감사하고 대견스럽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 낸다는 것이 갈수록 어려운 시대이지만, 낮에 하지 못하면 밤에라도 순종하는 기드온이 고맙다. 나도 그리할 수 있겠다!
2.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니(33~40절)
기드온은 밤에 순종한 후 마을 주민들의 거센 도전을 받는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 요아스는 침착하다. 오히려 바알의 단을 허물었으니 바알이 판단하겠지 하며 주민들의 분노를 잠재운다. 그렇게 사사로 세움을 받고 첫 관문을 통과한 기드온에게 미디안 연합군의 침략 소식이 들려오고(33절), 이어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였다”(34절). 그리고 나팔을 불었는데, 집안사람들(아비에셀 족속)이 반응하여 나온다.
참 희한하다! 집안의 바알의 단을 허무는 사고를 친 아들의 나팔 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이 가족이다. “여호와의 영”이 임한 결과다! 기드온의 말과 행동에서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고 반응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팔을 부니 므낫세와 아셀, 스불론과 납달리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무려 3만 2천 명이었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렇게 모여든 군사를 이끌고 곧장 전장으로 나가지 않는다. “양털 시험”을 진행한다. 여호와 샬롬까지 경험했고 바알과 아세라 신상까지 찍어 내어 버렸는데, 출정은 미룬다. 그러고는 하나님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겠는지 다시 증거를 구한 것이다.
*사실 기드온처럼 하나님께 표적을 구하고 나서 사사로 세움을 받은 이는 없다. 다른 사사들은 그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사사가 되었다. 그런데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날 때도 미적거리더니, 이번에도 미적거린다. 양털 시험의 목적은 “증표”를 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 원하는 대로 증표를 주셨다. 그만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변함이 없다. 인간의 불평과 불순종이라는 변수도 그 계획을 막아 낼 수 없다.
*기드온의 소심한 마음이 여전히 온전한 순종, 곧 즉각적인 순종을 어렵게 하지만, 어찌 됐든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시는 것이 맞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즉, 순종하고 싶어서 시험한 것이다. 두려움 없이 즉시, 머뭇거리지 않고 나아가 순종하는 것이 참 보기에도 좋겠지만, 기드온은 스스로를 확신하기에는 너무 경험이 적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즉시 받들어 순종하기에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 설익었고, 맞서야 할 도전은 너무나 막강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제발 순종할 수 있도록 “증거”를 보여 주시기를 구한 것이다.
*순종하기 위한 기드온의 마음가짐이 남다르다. 나도 그래야 한다!
나는?
-기드온은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아버지 밑에서 살았다. 그도 우상 숭배에 참여했을 것이 당연하다. 사사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전에, 또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우상을 꼭 제거해야 했다. 땔감밖에 안 되는 나무를 우상으로 섬긴 것이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오브라 성읍 높은 곳에서 칠 년 된 수소로 제사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밤에 한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도 두려워했지만, 사람들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은 그날 밤(24절),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명하신다(25~27절). 이 땅의 주인이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우상으로 얼룩진 이 땅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상 숭배의 허망함을 드러내어,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있는 이스라엘에게 경각심을 주신다. 우상의 허위를 폭로하고 우상이 주는 혜택을 거부하며 우상을 파괴하는 일은 ‘예배의 회복(24절)’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현현을 대면한 기드온이었지만, 오랫동안 믿어 온 바알의 단을 허무는 일은 두려웠을 것이다. 훼파된 바알의 단을 보고 분노한 사람들은 그의 목숨을 요구한다(27~30절). 그들은 ‘왜’보다 ‘누가’ 이 일을 행했는지만 추궁한다. 압제의 고통을 초래한 자신들의 패역은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다. ‘우상 척결’의 주범은 찾아냈지만, 정작 자신들이 ‘우상 숭배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몰랐다. 그렇다. 눈에 보이는 우상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영적 기만이다.
-기드온의 우상 제거 사실을 확인한 백성들은 그를 죽이려 한다. 하나님보다 아모리 사람들의 신, 곧 우상을 더 두려워한 것이다. 이에 기드온의 아버지이자 우상 숭배자인 요아스는 바알이 알아서 심판할 것이니 백성들이 나서지 말아야 한다고 만류한다. 그런데 이 발언이 스스로 자기 신을 조롱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가 자기 동족까지 조롱하는 말이 될 줄은 몰랐다.
-바알의 ‘무능’이 폭로된다. 자신을 위해 변론할 수도, 스스로 구원할 수도 없는 거짓 신임이 드러난다(31~32절). 지금도 우상과 그 세력이 늘 우세할 것 같고, 이미 우세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더 우상에 기대고 싶은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시’이자 ‘착각’일 뿐이다. 우상은 철저히 무능하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한다.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여 그는 사사로 부름받는다. 그러나 기드온은 또 주저한다. 두 번의 시험을 통해, 꼭 자신이 가야 한다면 확증해 달라고 요청한다. 자기 자신도 무례하다는 것을 알면서 하는 시험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묵묵히 들어주신다. 이처럼 기드온을 용맹하게 만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인내였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기드온이 거듭 군대를 소집한다(33~35절).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은데도, 자기 힘(‘내 손’)을 의지하려는 불신앙으로 보인다. 하지만 두 번의 징집은 결국 두 번의 해산(7:2, 4)으로 끝나고 만다. 내게도 하나님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인간적인 힘을 모으는 데 몰두한 적은 없었을까? 겸손하게 돌아볼 일이다.
-기드온은 거듭 요청한다. 앞서 바알과 쟁론하더니 이제는 하나님을 시험한다(3:1). 시험의 의도는 감춘 채 자신이 원하는 결과만 기다린다(36~40절). 내 신중함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불순종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오늘 말씀이 감사하다. 밤에라도 순종해야지……. 증거를 구하더라도 순종을 포기하지 말아야지……. 순종하고 싶어서 확신을 더 구해야지…….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큰 용사 기드온 [사사기 6:11-24]
한 선지자의 외침이 웅덩이와 굴과 산성에 칩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울려 퍼졌다. 이윽고 울부짖는 백성들의 음성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할 사사 기드온을 부르신다. 하나님의 사자(천사)는 기드온을 찾아와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명령한다. 기드온은 믿기지 않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외면하려 하고 표적을 구한다. 하지만 결국 “여호와 샬롬”의 고백이 터져 나온다.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가 사사로 등장할 때는 그 과정이 매우 짧게 언급되었다. “한 구원자(사사)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시는 과정은 매우 자세하게 소개된다. 아마도 다른 사사들 역시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흔쾌히 사사로 나서는 이가 과연 있을까? 사명에 대한 부담과 불안이 확신과 담대함으로 변화되기까지 기드온에게 나타나는 이 과정이 모든 사사에게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쉽게 세워지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신 끝에 출현하는 것이다. 기드온과 대화하시고, 반문하는 그의 말에 대답하시며, 때로 표징도 보이신다. 지난한 설득의 과정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쉽게 세워지지 않는다. 기드온을 통해서 보니, 지금껏 세워진 거의 모든 사사를 이렇게 세우셨을 것이다.
1. 기드온은 누구인가?(11절)
이스라엘은 메뚜기 떼처럼 몰려온 미디안 족속에게 7년 동안 압제를 받았다(1절). 이런 압제 속에서 그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산지에 굴을 파고 계곡 사이에 숨어서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던 이스라엘을 위해, 여호와의 사자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던 “기드온”에게 나타나신다.
기드온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의 아들이다(11절). 그는 므낫세 지파였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처음 만난 장소는 그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던 곳이었다(11절). 밀을 타작하는 곳은 탁 트인 타작마당이어야 했다. 하지만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포도주를 짜는 틀에서 조금씩 가만가만 타작했다는 것이다. 미디안 사람이 두려워서, 때가 때인지라 포도주를 밟는 구덩이에서 가만가만 타작해야 했다(11절). 이런 기드온이 과연 이스라엘의 사사가 될 수 있을까?
2. 큰 용사여(12절)
여호와께서는 한 선지자를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잊어버린(순종하지 않은) “말씀”을 상기시키셨다. 그리고 기드온을 찾아오신 것이다. 말씀을 선포하신 후에 사명자를 찾아오셨다는 것은, 기드온 역시 그 한 선지자의 말씀에 반응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명을 맡기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듣게 하신 후, 맡기실 사명을 선언하셨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12절)
히브리어 어순은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하신다, 큰 용사여”다. 미디안의 폭거에 숨죽이며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는 기드온에게 어떤 탁월한 능력과 힘이 숨겨져 있어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기에” “큰 용사”인 것이다.
“큰 용사(기보르 헤하일)”를 직역하면 “그 군대의 영웅”이라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하나님 나라 군대의 영웅이 된다. 사람의 능력으로 “큰 용사”를 가늠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심”이 곧 큰 용사 됨의 척도다.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는 겁쟁이를 큰 용사라고 하다니 이치에 맞지 않는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이치에 맞지 않아도” 큰 용사라고 선언하신다. 겉으로 보기에는 미디안 족속 앞에서 한없이 초라한 기드온이었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터이니 이보다 더 큰 용사는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선언의 연속이다. 출애굽 때 애굽에게 보이셨던 하나님이 그러셨고, 광야 40년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행하시며 백성들을 지키셨다. 가나안의 왕들을 물리친 것도 역시 말도 안 되는,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들이 모두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었다.
*인간 세상의 이치를 초월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상식이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다. 이것이 곧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믿음”이라는 세계의 모습이다. 기드온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의 선언은 하나님의 마음(뜻)을 따라 선언된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세상 이치의 굴레를 뛰어넘어 “큰 용사(그 군대의 영웅)”로 세움 받는다. 그가 아무리 “므낫세 지파(동과 서로 나뉜 약한 지파)”에 속했고 자신은 아버지 집에서 제일 작은 사람(보잘것없는 영향력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가장 큰 용사다.
3. 밀당 끝에 여호와 샬롬(12~24절)
기드온은 자신을 큰 용사라고 부르는 여호와의 사자에게 먼저 솔직하게 고백한다. 한 선지자를 통해 하셨던 말씀들(8~10절)을 복기하면서, 그런 하나님이 왜 자신들을 미디안의 손에 버리셨냐고 항변한다(새번역 13절). (한 선지자의 외침을 꼼꼼히 들으며 기억했던 것이다.) 기드온은 이미 한 선지자가 선포하는 말씀을 들으며 마음에 강한 불평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미디안에게 버리셨습니까?”
*통상적으로 선지자의 신랄한 회개의 외침을 들었다면 회개하기 마련인데, 기드온은 도리어 화를 낸다. 특히 지금 이 상황의 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임을 분명히 알려 주었는데도, 회개가 아니라 강한 불평이다. 하나님께 사사로 부름을 받는 이의 반응치고는 상당히 예상에 못 미친다. 회개가 아니고 반항이라니……
*하지만 하나님의 사자는 그런 기드온에게 분명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선언하신다. 여호와의 사자는 친히 너를 세워 그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새번역 14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쯤에서 무릎을 꿇고 받아들일 법도 한데, 기드온은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직접적으로(핑계하며, 혹은 따져) 묻는다. 자신이 속한 가문(므낫세)과 상황(가장 약함),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의 형제 중 가장 약한데(새번역 15절) 어떻게 하겠냐는 것이다. 용사의 조건에 맞지도 않는 자신은 그 일을 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네가 미디안 사람들을 마치 한 사람을 쳐부수듯 쳐부술 것이다”(새번역 16절)라고 약속하신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구한다(17절). 그러면서 막연하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 올리는 제물을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 후, 집으로 돌아가 제물을 준비하여 돌아왔다. 사자는 제물을 바위 위에 진설하게 한 후, 그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 끝을 내밀어 불을 내어 제물을 태웠다. 동시에 사자가 사라진다(17~21절). 그러자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음을 깨닫고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에게 맡기실 사사의 사명을 생각하기보다 지금 하나님의 사자를 대면했으니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기드온의 불안한 마음을 어루만지시면서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죽지 않는다”(새번역 23절)라는 삼중의 말씀으로 안전을 확증해 주신다. 이 말씀을 들은 기드온은 그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 샬롬”이라고 부른다.
나는?
-대적의 눈을 피해 포도즙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소심한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큰 용사(사사)’로 부르신다(11~12절). 지금 그의 행동에서는 결코 용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에게서 큰 용사의 얼굴을 그려내신다. 어떤가? 오늘의 내 모습보다 주님께서 빚어 가실 나의 내일을 기대하며 소명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내리라.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나도, 우리가 체념한 그 사람도 주님은 달리 보고 계실지 모른다. 순종할 때 헛된 두려움도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기드온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에 흥분하기보다, 이스라엘의 참담한 상황을 알리며 울분을 토한다. 그는 미디안의 압제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증거라고 속단하고, 그 책임을 백성(10절)이 아닌 하나님께 묻는다(13~14절). 뼈아픈 현실은 인지했으나 그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자신이 그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대안(응답)’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자신의 자격 없음(미약함)을 내세워 거절하는 기드온에게 동행과 승리를 약속하신다. 주저하는 기드온 앞에는 ‘하나님의 동행’이 아니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과, 또 이룰 수 없는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15~16절). 부족하다고 물러서는 소극성이 항상 믿음은 아니다. 힘겨운 싸움이 기다릴지라도, 부르시고 맡기시고 보내신 분이 주님이시기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다른 어떤 자격 요건보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기드온은 거듭되는 약속(12, 16절)에도 눈에 보이는 표징 없이는 믿을 수 없다며 뒷걸음친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랜 기다림과 함께 그의 제물에 ‘불’로 응답하셔서 그를 설복하시고 ‘평안’을 주신다. 이에 화답하여 기드온은 우상을 숭배하던 자리에 여호와를 위한 단을 쌓는다(17~24절). 믿음의 길을 걸으며 가시적인 증거들을 찾기보다, 성경 갈피갈피마다 새겨 두신 신실한 동행의 약속에 주목하여 순종을 회피하지 말고 짙은 의심도 걷어내야 한다. 혹시 주님의 뜻이 분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싫어서 주저하는 것은 아닌가?
*기드온은 끊임없이 “증거, 증표” 등을 구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가 이랬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세월이 오래되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기록된 말씀을 따라 확신하는 것보다 온몸으로 느껴야 더 확신이 된다. 기드온이나 우리나 매한가지다. 말씀에서 멀어져 있을수록 표징을 더 찾기 마련이다. 기록된 말씀, 들려지는 말씀을 신뢰하기보다 기적을 더 바란다. 기드온이나 나나 다를 바 없다.
*기드온의 질문은 단순한 불평불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와 함께하시는가?”, “우리를 버리신 것 아닌가?”,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배경도 능력도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표징을 보여 주지 않으면 못 믿겠다!”는 식으로 개선(?)되어 간다. 급기야 이런 모든 회의와 의심, 반문의 결론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였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다! 이렇게 깨닫고 난 후에는 “여호와 샬롬”, “여호와께서 평안을 이루신다”는 고백을 마침내 드렸다.
*하나님께 불평하고 그분의 말씀에 비아냥거렸지만, 그 모든 과정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앙이 되살아났다.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면 죽는다는 조상들의 가르침이 생각난 것이다. 즉, 말씀이 되살아났다!
*말씀이 되살아나니 “샬롬”이 찾아왔다. 그의 마음에 가득하던 불평과 불만, 의심과 반항의 어수선함과 격동, 7년 동안 미디안의 폭거로 쌓인 “화”가 물러가고 “하나님의 평화”가 스며든다.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 진정한 평화다.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세우실 때 이렇게 하셨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으시고, 무디어지고 무디어진 하나님에 대한 감각들을 일깨우시고, 잊혔던 말씀들이 실제가 되게 하시며, 마침내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거룩한 용기가 솟아나게 하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오히려 지금 이스라엘의 삶에 가득 찬 분노와 고통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려고 자신에게 나타나셨음을 깨달아, “평화와 소망”, “용기”로 무장하고 하나님의 부름에 반응하여 일어서게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나에게 말씀을 통해 주시는 감동에 순종하며 반응하기를 결심한다. 이렇게 설득하시고, 기다리시며, 보여 주시고, 증명(증거)하여 자원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나를 그렇게 지금 이 자리에 세워 주신 것이다.
*새파랗던 고등학교 2학년 무더운 여름, 고흥 녹동의 바닷가에서 하나님께 철없이 부르짖으며 드렸던 철부지의 약속을 이루어 주시려고, 기드온에게 하셨던 것처럼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셨다. 무엇보다 “늘 함께하여 주셨다.”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할 사명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지난한 밀당의 시간을 받아 주시며 세워 주신 것이다. 내가 잘났고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잘하도록 능력을 부어 주시며, 무엇보다 “여기까지 함께하여 주셨기에, 앞으로도 함께하여 주실 것이기에”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기드온의 한없이 철없는 밀당을 받아 주신 것은, 그가 하나님과 함께 있어 “큰 용사”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그림이었다. 기드온이 하나님을 향해 밀당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뜻 안에서 밀당을 하신 것이다. “큰 용사”는 세상이 인정하는 조건이 채워진 사람이 아니라, 한없이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큰 용사임을 세세하게 깨닫게 하신다.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가 사사로 등장할 때는 그 과정이 매우 짧게 언급되었다. “한 구원자(사사)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시는 과정은 매우 자세하게 소개된다. 아마도 다른 사사들 역시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흔쾌히 사사로 나서는 이가 과연 있을까? 사명에 대한 부담과 불안이 확신과 담대함으로 변화되기까지 기드온에게 나타나는 이 과정이 모든 사사에게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쉽게 세워지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신 끝에 출현하는 것이다. 기드온과 대화하시고, 반문하는 그의 말에 대답하시며, 때로 표징도 보이신다. 지난한 설득의 과정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쉽게 세워지지 않는다. 기드온을 통해서 보니, 지금껏 세워진 거의 모든 사사를 이렇게 세우셨을 것이다.
1. 기드온은 누구인가?(11절)
이스라엘은 메뚜기 떼처럼 몰려온 미디안 족속에게 7년 동안 압제를 받았다(1절). 이런 압제 속에서 그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산지에 굴을 파고 계곡 사이에 숨어서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던 이스라엘을 위해, 여호와의 사자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던 “기드온”에게 나타나신다.
기드온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의 아들이다(11절). 그는 므낫세 지파였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처음 만난 장소는 그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던 곳이었다(11절). 밀을 타작하는 곳은 탁 트인 타작마당이어야 했다. 하지만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포도주를 짜는 틀에서 조금씩 가만가만 타작했다는 것이다. 미디안 사람이 두려워서, 때가 때인지라 포도주를 밟는 구덩이에서 가만가만 타작해야 했다(11절). 이런 기드온이 과연 이스라엘의 사사가 될 수 있을까?
2. 큰 용사여(12절)
여호와께서는 한 선지자를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잊어버린(순종하지 않은) “말씀”을 상기시키셨다. 그리고 기드온을 찾아오신 것이다. 말씀을 선포하신 후에 사명자를 찾아오셨다는 것은, 기드온 역시 그 한 선지자의 말씀에 반응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명을 맡기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듣게 하신 후, 맡기실 사명을 선언하셨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12절)
히브리어 어순은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하신다, 큰 용사여”다. 미디안의 폭거에 숨죽이며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는 기드온에게 어떤 탁월한 능력과 힘이 숨겨져 있어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기에” “큰 용사”인 것이다.
“큰 용사(기보르 헤하일)”를 직역하면 “그 군대의 영웅”이라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하나님 나라 군대의 영웅이 된다. 사람의 능력으로 “큰 용사”를 가늠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심”이 곧 큰 용사 됨의 척도다.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는 겁쟁이를 큰 용사라고 하다니 이치에 맞지 않는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이치에 맞지 않아도” 큰 용사라고 선언하신다. 겉으로 보기에는 미디안 족속 앞에서 한없이 초라한 기드온이었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터이니 이보다 더 큰 용사는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선언의 연속이다. 출애굽 때 애굽에게 보이셨던 하나님이 그러셨고, 광야 40년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행하시며 백성들을 지키셨다. 가나안의 왕들을 물리친 것도 역시 말도 안 되는,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들이 모두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었다.
*인간 세상의 이치를 초월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상식이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다. 이것이 곧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믿음”이라는 세계의 모습이다. 기드온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의 선언은 하나님의 마음(뜻)을 따라 선언된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세상 이치의 굴레를 뛰어넘어 “큰 용사(그 군대의 영웅)”로 세움 받는다. 그가 아무리 “므낫세 지파(동과 서로 나뉜 약한 지파)”에 속했고 자신은 아버지 집에서 제일 작은 사람(보잘것없는 영향력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가장 큰 용사다.
3. 밀당 끝에 여호와 샬롬(12~24절)
기드온은 자신을 큰 용사라고 부르는 여호와의 사자에게 먼저 솔직하게 고백한다. 한 선지자를 통해 하셨던 말씀들(8~10절)을 복기하면서, 그런 하나님이 왜 자신들을 미디안의 손에 버리셨냐고 항변한다(새번역 13절). (한 선지자의 외침을 꼼꼼히 들으며 기억했던 것이다.) 기드온은 이미 한 선지자가 선포하는 말씀을 들으며 마음에 강한 불평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미디안에게 버리셨습니까?”
*통상적으로 선지자의 신랄한 회개의 외침을 들었다면 회개하기 마련인데, 기드온은 도리어 화를 낸다. 특히 지금 이 상황의 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임을 분명히 알려 주었는데도, 회개가 아니라 강한 불평이다. 하나님께 사사로 부름을 받는 이의 반응치고는 상당히 예상에 못 미친다. 회개가 아니고 반항이라니……
*하지만 하나님의 사자는 그런 기드온에게 분명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선언하신다. 여호와의 사자는 친히 너를 세워 그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새번역 14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쯤에서 무릎을 꿇고 받아들일 법도 한데, 기드온은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직접적으로(핑계하며, 혹은 따져) 묻는다. 자신이 속한 가문(므낫세)과 상황(가장 약함),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의 형제 중 가장 약한데(새번역 15절) 어떻게 하겠냐는 것이다. 용사의 조건에 맞지도 않는 자신은 그 일을 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네가 미디안 사람들을 마치 한 사람을 쳐부수듯 쳐부술 것이다”(새번역 16절)라고 약속하신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구한다(17절). 그러면서 막연하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 올리는 제물을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 후, 집으로 돌아가 제물을 준비하여 돌아왔다. 사자는 제물을 바위 위에 진설하게 한 후, 그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 끝을 내밀어 불을 내어 제물을 태웠다. 동시에 사자가 사라진다(17~21절). 그러자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음을 깨닫고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에게 맡기실 사사의 사명을 생각하기보다 지금 하나님의 사자를 대면했으니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기드온의 불안한 마음을 어루만지시면서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죽지 않는다”(새번역 23절)라는 삼중의 말씀으로 안전을 확증해 주신다. 이 말씀을 들은 기드온은 그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 샬롬”이라고 부른다.
나는?
-대적의 눈을 피해 포도즙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소심한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큰 용사(사사)’로 부르신다(11~12절). 지금 그의 행동에서는 결코 용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에게서 큰 용사의 얼굴을 그려내신다. 어떤가? 오늘의 내 모습보다 주님께서 빚어 가실 나의 내일을 기대하며 소명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내리라.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나도, 우리가 체념한 그 사람도 주님은 달리 보고 계실지 모른다. 순종할 때 헛된 두려움도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기드온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에 흥분하기보다, 이스라엘의 참담한 상황을 알리며 울분을 토한다. 그는 미디안의 압제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증거라고 속단하고, 그 책임을 백성(10절)이 아닌 하나님께 묻는다(13~14절). 뼈아픈 현실은 인지했으나 그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자신이 그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대안(응답)’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자신의 자격 없음(미약함)을 내세워 거절하는 기드온에게 동행과 승리를 약속하신다. 주저하는 기드온 앞에는 ‘하나님의 동행’이 아니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과, 또 이룰 수 없는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15~16절). 부족하다고 물러서는 소극성이 항상 믿음은 아니다. 힘겨운 싸움이 기다릴지라도, 부르시고 맡기시고 보내신 분이 주님이시기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다른 어떤 자격 요건보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기드온은 거듭되는 약속(12, 16절)에도 눈에 보이는 표징 없이는 믿을 수 없다며 뒷걸음친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랜 기다림과 함께 그의 제물에 ‘불’로 응답하셔서 그를 설복하시고 ‘평안’을 주신다. 이에 화답하여 기드온은 우상을 숭배하던 자리에 여호와를 위한 단을 쌓는다(17~24절). 믿음의 길을 걸으며 가시적인 증거들을 찾기보다, 성경 갈피갈피마다 새겨 두신 신실한 동행의 약속에 주목하여 순종을 회피하지 말고 짙은 의심도 걷어내야 한다. 혹시 주님의 뜻이 분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싫어서 주저하는 것은 아닌가?
*기드온은 끊임없이 “증거, 증표” 등을 구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가 이랬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세월이 오래되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기록된 말씀을 따라 확신하는 것보다 온몸으로 느껴야 더 확신이 된다. 기드온이나 우리나 매한가지다. 말씀에서 멀어져 있을수록 표징을 더 찾기 마련이다. 기록된 말씀, 들려지는 말씀을 신뢰하기보다 기적을 더 바란다. 기드온이나 나나 다를 바 없다.
*기드온의 질문은 단순한 불평불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와 함께하시는가?”, “우리를 버리신 것 아닌가?”,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배경도 능력도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표징을 보여 주지 않으면 못 믿겠다!”는 식으로 개선(?)되어 간다. 급기야 이런 모든 회의와 의심, 반문의 결론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였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다! 이렇게 깨닫고 난 후에는 “여호와 샬롬”, “여호와께서 평안을 이루신다”는 고백을 마침내 드렸다.
*하나님께 불평하고 그분의 말씀에 비아냥거렸지만, 그 모든 과정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앙이 되살아났다.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면 죽는다는 조상들의 가르침이 생각난 것이다. 즉, 말씀이 되살아났다!
*말씀이 되살아나니 “샬롬”이 찾아왔다. 그의 마음에 가득하던 불평과 불만, 의심과 반항의 어수선함과 격동, 7년 동안 미디안의 폭거로 쌓인 “화”가 물러가고 “하나님의 평화”가 스며든다.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 진정한 평화다.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세우실 때 이렇게 하셨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으시고, 무디어지고 무디어진 하나님에 대한 감각들을 일깨우시고, 잊혔던 말씀들이 실제가 되게 하시며, 마침내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거룩한 용기가 솟아나게 하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오히려 지금 이스라엘의 삶에 가득 찬 분노와 고통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려고 자신에게 나타나셨음을 깨달아, “평화와 소망”, “용기”로 무장하고 하나님의 부름에 반응하여 일어서게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나에게 말씀을 통해 주시는 감동에 순종하며 반응하기를 결심한다. 이렇게 설득하시고, 기다리시며, 보여 주시고, 증명(증거)하여 자원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나를 그렇게 지금 이 자리에 세워 주신 것이다.
*새파랗던 고등학교 2학년 무더운 여름, 고흥 녹동의 바닷가에서 하나님께 철없이 부르짖으며 드렸던 철부지의 약속을 이루어 주시려고, 기드온에게 하셨던 것처럼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셨다. 무엇보다 “늘 함께하여 주셨다.”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할 사명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지난한 밀당의 시간을 받아 주시며 세워 주신 것이다. 내가 잘났고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잘하도록 능력을 부어 주시며, 무엇보다 “여기까지 함께하여 주셨기에, 앞으로도 함께하여 주실 것이기에”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기드온의 한없이 철없는 밀당을 받아 주신 것은, 그가 하나님과 함께 있어 “큰 용사”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그림이었다. 기드온이 하나님을 향해 밀당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뜻 안에서 밀당을 하신 것이다. “큰 용사”는 세상이 인정하는 조건이 채워진 사람이 아니라, 한없이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큰 용사임을 세세하게 깨닫게 하신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벌써 다섯 번째 “또”, 이번에는 말씀을 먼저 주시는 하나님 [사사기 6:1-10]
기드온 이야기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8장까지 이어지고, 아들 아비멜렉의 이야기까지 합하면 9장까지 쭉 이어진다. 사사들의 이야기 중 가장 많은 분량이다. 그만큼 기드온의 이야기에는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역시나 “또”이다. 사사 드보라 이후 평안의 시대를 지나,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1절) 고통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지독한 “또”의 망령은 왜 이리 질긴 것일까? 이것이 인간을 깊이 오염시킨 죄의 본성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앞에서 범죄한 “또”가 고통의 시대라는 “또”를 다시 불러왔다.
1. 미디안은 누구?
미디안은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은 후에 후처로 맞이한 그두라를 통해 낳은 여섯 명의 자녀 중 넷째 아들이다(창 25:1-2). 아브라함은 그두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이 훗날 이삭과 심각한 갈등을 빚을 것을 우려하여, 이들에게 재산을 떼어 주며 모두 요단강 동쪽 땅으로 보냈다. 혈통을 따진다면 이스라엘과 미디안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이렇게 싸우기보다 서로 협력해야 하는데, 미디안은 아말렉, 동방 사람들과까지 연대하여 침략한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사건뿐 아니라, 미디안은 출애굽 시대에도 이스라엘을 큰 곤경에 빠뜨린 적이 있었다. 가나안 땅 진입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백성을, 그때에도 모압과 연대하여 발람을 통해 저주하려 했고(민 22:4), 싯딤에서는 “음행과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다(민 25장). 이로 인해 괴롭힘을 당한 이스라엘은 미디안을 응징하여 씨를 말리기까지 했다(민 31:1-18). 미디안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반드시 보복해야 할 원수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통쾌하게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들은 주로 요단강 동편 남부에 거주하며, 시내 반도에서 요단강 동편 북부를 오가는 반유목 생활과 대상(장사)을 하던 부족이다. 한편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미디안 족속이었고, 사사 옷니엘과 드보라 시대에 미디안 족속이던 겐 사람의 자손들이 정착한 일(삿 1장)과 시스라를 죽인 야엘의 이야기(삿 4-5장)도 기억할 수 있다. 이처럼 일부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 함께 생활하였지만, 대부분의 미디안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빼앗긴 삶의 터전 일부를 회복하기 위해 힘을 키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시간이 흘러 미디안의 후손은, 그때 진멸당했던 것이 무색하리만치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밀고 들어왔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은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 그 복을 누리던 중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 대적이 더 많은 무리를 이루어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터에서 그들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한 조상을 가졌다는 것보다, 민족의 수가 많고 적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안에서 늘 순종하며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압제하는 미디안이 아니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이다.
*오늘날 위드 코로나를 지나면서, 정부와 세상이 교회를 자신들의 삶의 연대로부터 자꾸 밀어내려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절제 없는 태도로 압박하고 있다. 지금은 확실히 영적으로 사사 시대가 맞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압박하는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문제라고 하시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목전에서”, 아니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악을 행하는 것”을 과연 묵과하시겠는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리하실 수 없다.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교회다! 나 자신이다!
2. “또”(1~6절)
드보라 사사 다음으로 등장하는 사사는 기드온이다. 본문은 6~8장에 걸쳐 이어지는 기드온 서사의 프롤로그로, 사사기의 반복적인 상황 패턴이 재현된다. 이스라엘 자손은 또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고,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기셨다.
2~5절은 이스라엘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다른 사사들의 서사에 비해 상당히 길고 상세하게 소개한다. 미디안은 본래 요단 동편 남쪽에 거주하였지만, 요단 서편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들은 살고 있던 비옥한 평야에서 밀려나 산지로 쫓기게 되었고, 그곳에서 굴을 파고 산성을 만들어 미디안의 침입에 대비하며 사는 비참한 상황에 놓였음을 드러낸다. 게다가 미디안 사람들뿐 아니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까지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데 합세한다.
이들의 모습을 5절에서는 “메뚜기 떼”와 같다고 묘사한다. 이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수확물뿐 아니라 양과 소와 나귀 등 가축들까지 모두 가져가, 이스라엘은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게 된다. 이는 경제적 기반이 무너져 급격히 쇠락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좀 더 배부르게 잘 살기 위해 가나안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여호와를 버렸지만, 그 신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재앙과 배고픔과 비참함을 가져다주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배고픔으로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게 되었다.
이렇게 “또” 여호와를 떠난 이스라엘이 “또다시” 억압과 배고픔에 직면했는데, 이 상황에서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염치없고 부끄러울지라도 “여호와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런데 아쉬움이 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 때문에 전혀 기를 펴지 못하게 되자,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울부짖었다.”(새번역, 6절) 부르짖기는 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혹은 어쩔 수 없이 부르짖은 것처럼 기록했다. 개역개정이 “궁핍함(달랄)”으로 번역한 이 단어는 “고갈되다”라는 뜻뿐 아니라 “낮아지다, 천하다(보잘것없게 되다)”라는 뜻도 함께 지닌다. 육체적인 굶주림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졌음을 드러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고통의 원인을 “미디안으로 말미암아”(7절)라고 하여 미디안에게 돌렸다. 그래서 6~7절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은 회개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이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해결해 달라는 아우성이었다. “회개 없는 부르짖음”이 애처롭다. 고통 속에서 아우성치는 그들의 모습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2절) 산(하르: 산지, 산, 언덕)에서 웅덩이(민하라: 깊은 계곡, 갈라진 틈)와 굴(메하라: 동굴)과 산성(메차드: 요새, 성채, 보루)을 만들었다고 기록한다. 빈번한 침입으로 가나안 땅의 평원을 빼앗긴 채 눈치를 봐 가며 겨우겨우 농사를 짓다가, 이마저도 수확물을 빼앗기기를 무려 7년이나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파종할 때”(3절) 침입했다고 기록하는데, 이스라엘은 건기가 지나 이른 비가 내리는 10, 11월에 파종하고, 우기를 지나 3, 4월에 겨울 보리 수확을 시작한다. 미디안이 유목민임을 고려한다면, 파종할 때 침입했다는 것은 곡식이 싹을 틔워 새순이 자라나는 시기에 자신들의 짐승들을 밭에 풀어 놓았다는 의미다. 아주 악랄하다. 이와 함께 창고에 저장해 두었던 양식도 약탈했을 것이다. 유목민들이었기에 장막을 치고 오래 머물면서 지속적으로 약탈했다는 것이다. 지중해 연안의 가사(블레셋 성읍)에까지 이를 정도로 광범위하게 괴롭혔다.
*”또”가 반복될수록 “또”의 고통은 더 광범위해지고, 평화의 기간은 점점 줄어든다. 문제는 고통의 환경이 아니라 고통이 찾아온 원인이다. 사사기는 이것을 통찰하라고 도전한다.
*무엇보다 “메뚜기 떼 같이 많이” 올라왔다는 기록은, 미디안의 침략이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그대로 임한 것임을 보게 한다. “…… 집을 지어도 그 집에서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어도 그것을 따먹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들의 소를 당신들이 눈 앞에서 잡아도 당신들이 먹지 못할 것이요, 당신들의 나귀가 당신들의 눈 앞에서 강탈을 당해도 도로 찾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들의 양 떼를 당신들의 원수에게 빼앗겨도 당신들을 도와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땅에서 거둔 곡식과 당신들의 노력으로 얻은 모든 것을,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백성이 다 먹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사는 날 동안 압제를 받으며, 짓밟히기만 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눈으로 보는 일 때문에 미치고 말 것입니다.”(신 28:30-31, 33-34)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이 생각나야 했다! 그래서 더 절박하게 회개의 부르짖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고통스러운 삶을 토로하는 데 그친다. 아, 이 백성을 어찌할까!
3. 하나님의 반응(7~10절)
앞선 네 명의 사사(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때에는 이스라엘이 부르짖는 즉시 사사를 보내 주셨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사사부터 세워 주지 않으신다. “한 선지자”를 먼저 보내신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일깨워 주신 말씀이 압권이다. “……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10절)
선지자는 남북 분열 왕국 때부터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드보라를 여선지자로 칭했다. 이스라엘에게서 출애굽과 가나안 땅 정복 때의 승리의 기운이 이미 마를 대로 말라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여 전하는 선지자의 출현은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었는지에 대한 방증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말씀이 들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에게는 늘 말씀이 들리고 있을까?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서 일어난 고통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해결하시기 전에 먼저 “말씀”을 들려주신다. 상황의 호전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호전임을 일깨우시는 것이다. 여전히 죄를 짓는 나에게 날마다, 아침마다 말씀을 주시는 은혜가 어쩌면 이들에게 “한 선지자”를 주신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말씀이 죄에 젖어 있는 삶을 타격하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죄를 타격할 때, 고통스러운 상황 이전에 하나님과의 고통스러운 관계를 깨닫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행하시기 전에 “말씀”을 주신 것은, 고통에 울부짖기보다 죄에 울부짖어야 함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내 삶 속에서 여전히 나를 지배하는 범죄의 타성을 말씀으로 타격하시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증거다. 상황과 여건을 해결하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이 먼저가 아니다. 말씀을 알아듣고 기억하며 따라가는 “말씀 회복”이 먼저다!
나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또다시 악을 행하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디안의 압제 아래 두신다(1~2절).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언약에 충실하지 않은(10절) 그들의 패역에 대한 보응이었다. 하나님은 은혜와 진리를 망각하고 죄와 세상에 흠뻑 취해 있는 나를 일깨우기 위해 때로 강한 채찍을 드신다. 내 삶의 방식과 목적을 바꾸지 않는 한, 이 악순환은 계속된다.
-이스라엘은 평안할 때 악을 즐기다가 곤경에 처하자 다급하게 하나님께 울부짖는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회개-용서’라는 틀 안에 하나님을 가두고, 양심의 가책을 달래며 압제에서 벗어나려고만 한다(1, 6, 7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인생의 주권자가 아니라 아쉬울 때만 찾는 편의적인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와 공동체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오늘 흘리는 회개의 눈물은 진실할까? 진실한 회개의 눈물은 내일의 두려움과 통곡을 막아 줄 것이다.
-한때 승리의 노래(5장)를 부르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대적들 때문에 샛길(5:6)로도 다니지 못하고 산에 숨어 사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만다. 대적들은 ‘메뚜기 떼와 같이’ 몰려와 토지 소산을 약탈하여 생계를 위협한다(2~6절). 이 참혹한 곤궁은 죄악과 말씀을 ‘가볍게’ 여긴 결과였다(10절). 즉 하나님과의 관계의 위기가 인생의 위기, 공동체의 위기로 이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예전처럼 ‘즉시’ 사사를 세워 구원하지 않으신다. ‘먼저’ 선지자를 보내 하나님의 뜻을 전하신다. ‘압제의 고통’에서 건지시기 전에 ‘압제의 원인’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7~10절).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보다 가나안 신들을 더 두려워하고 가나안 사람들을 부러워하다가, 구원의 역사와 사명을 망각한 그들을 일깨우신다. 그들에게 죄의 자백과 함께 ‘자각’이 필요했듯이, 나 역시 징계의 시간이 어서 ‘끝나게’ 해 달라고 구하기 전에 어서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함을 확신하게 된다. 이런 자세가 내 삶 속의 “영적 악순환을 영적 선순환으로” 바꾸는 길일 것이다.
*이스라엘만 “또”일까? 답답하고 짜증이 나려는 순간, 그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또”를 얼마나 반복하는지 모른다. 그러니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없어서 입술을 굳게 깨물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또” 시작된 고통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전까지는 자신들이 분배받아 삶의 터를 일구던 곳에서 압제를 받아 괴로움을 당했다면, 이제는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2절) 만들어 피할 정도다. 아니, 쫓겨난 것이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편리함과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쫓아내라”에 불순종하여, “쫓아내지 않고” 함께 거주한 민족들에게 핍박과 고통을 당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히려 “미디안 족속”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쫓겨난 것”이다.
*사사기 저자는 미디안 족속의 만행을 고발하면서 “파종할 때면……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가사(블레셋 성 중의 하나)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이는…… 멸하려 하니”(3~5절)라는 표현들로 그 심각성을 드러낸다.
*미디안 족속은 이렇게 하기 위해 주변 민족들(아말렉과 동방 사람)과 연합하고, 남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블레셋 족속의 성읍 가사 근처까지 “진을 넓게 쳐서” 아예 점령한 것이다. 그들의 약탈은 마치 후일을 기약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스라엘 가운데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않았고 가축들도 남김없이 약탈하였다”라고 기록한다. 무엇보다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5절)라고 했다. 아예 정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진멸하려 한 것이 분명했다.
*결국 고통 때문에 울부짖더라도, 그 울부짖음이 있어야 “말씀”이 비로소 들림을 깨닫는다. 내 삶에 고통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 늘 울 수밖에 없는 것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이다! 아! 고통과 울음이 은혜의 시작이요 통로로구나!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들려야 산다! 그래야 울음(통곡)이 물러가고 웃음이 함께 찾아온다.
*벌써 다섯 번째이다. 한 사사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어김없이 “또”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진노도 “또” 임하고, 고통도 “또” 시작된다. 지금 내가 “또”를 끊지 못하면 “또”, “또”, “또”가 이어진다. 하나님의 진노가 “또” 임할 것을 알면서도 죄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진노하실 것을 알면서도 패역의 길을 끊지 못했다. 인간의 한계다. 이것이 인간의 본모습이다. 알면서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여 저지르는 것이 인간이다.
*또 돌아선 이스라엘, 또 당하는 이스라엘, 그러나 또 구원하신 하나님…… 그것 참……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하나님은 주님을 또 떠난 이스라엘을 고난에 넘겨 고통받게 하시고, 그들이 고통 중에 하나님을 찾게 하시며, 하나님을 찾은 그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현상을 개선하기보다 원인을 바라보게 하셔서 진정한 회개(돌이킴)를 기대하시는 분이다.
*고통을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바울은 환난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라고 했다(롬 5:3).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길러 가시는 방편이다(히 12:7). 고난으로 연단받는 자는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그 고난이 “또” 하나님을 떠나 자처한 꼴의 고난이라면 곤란하다. 신실하게 약속의 말씀 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다 받는 세상의 질시와 무시, 곤란과 억압이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자처하는 고난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기에 세상이 주는 고난이라면 받기를 주저하지 않겠다. 그 고난의 현장을 꿋꿋이 견디고 이겨 낼 수 있는 말씀의 은혜를 주실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1. 미디안은 누구?
미디안은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은 후에 후처로 맞이한 그두라를 통해 낳은 여섯 명의 자녀 중 넷째 아들이다(창 25:1-2). 아브라함은 그두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이 훗날 이삭과 심각한 갈등을 빚을 것을 우려하여, 이들에게 재산을 떼어 주며 모두 요단강 동쪽 땅으로 보냈다. 혈통을 따진다면 이스라엘과 미디안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이렇게 싸우기보다 서로 협력해야 하는데, 미디안은 아말렉, 동방 사람들과까지 연대하여 침략한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사건뿐 아니라, 미디안은 출애굽 시대에도 이스라엘을 큰 곤경에 빠뜨린 적이 있었다. 가나안 땅 진입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백성을, 그때에도 모압과 연대하여 발람을 통해 저주하려 했고(민 22:4), 싯딤에서는 “음행과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다(민 25장). 이로 인해 괴롭힘을 당한 이스라엘은 미디안을 응징하여 씨를 말리기까지 했다(민 31:1-18). 미디안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반드시 보복해야 할 원수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통쾌하게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들은 주로 요단강 동편 남부에 거주하며, 시내 반도에서 요단강 동편 북부를 오가는 반유목 생활과 대상(장사)을 하던 부족이다. 한편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미디안 족속이었고, 사사 옷니엘과 드보라 시대에 미디안 족속이던 겐 사람의 자손들이 정착한 일(삿 1장)과 시스라를 죽인 야엘의 이야기(삿 4-5장)도 기억할 수 있다. 이처럼 일부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 함께 생활하였지만, 대부분의 미디안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빼앗긴 삶의 터전 일부를 회복하기 위해 힘을 키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시간이 흘러 미디안의 후손은, 그때 진멸당했던 것이 무색하리만치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밀고 들어왔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은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 그 복을 누리던 중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 대적이 더 많은 무리를 이루어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터에서 그들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한 조상을 가졌다는 것보다, 민족의 수가 많고 적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안에서 늘 순종하며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압제하는 미디안이 아니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이다.
*오늘날 위드 코로나를 지나면서, 정부와 세상이 교회를 자신들의 삶의 연대로부터 자꾸 밀어내려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절제 없는 태도로 압박하고 있다. 지금은 확실히 영적으로 사사 시대가 맞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압박하는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문제라고 하시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목전에서”, 아니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악을 행하는 것”을 과연 묵과하시겠는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리하실 수 없다.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교회다! 나 자신이다!
2. “또”(1~6절)
드보라 사사 다음으로 등장하는 사사는 기드온이다. 본문은 6~8장에 걸쳐 이어지는 기드온 서사의 프롤로그로, 사사기의 반복적인 상황 패턴이 재현된다. 이스라엘 자손은 또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고,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기셨다.
2~5절은 이스라엘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다른 사사들의 서사에 비해 상당히 길고 상세하게 소개한다. 미디안은 본래 요단 동편 남쪽에 거주하였지만, 요단 서편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들은 살고 있던 비옥한 평야에서 밀려나 산지로 쫓기게 되었고, 그곳에서 굴을 파고 산성을 만들어 미디안의 침입에 대비하며 사는 비참한 상황에 놓였음을 드러낸다. 게다가 미디안 사람들뿐 아니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까지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데 합세한다.
이들의 모습을 5절에서는 “메뚜기 떼”와 같다고 묘사한다. 이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수확물뿐 아니라 양과 소와 나귀 등 가축들까지 모두 가져가, 이스라엘은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게 된다. 이는 경제적 기반이 무너져 급격히 쇠락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좀 더 배부르게 잘 살기 위해 가나안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여호와를 버렸지만, 그 신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재앙과 배고픔과 비참함을 가져다주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배고픔으로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게 되었다.
이렇게 “또” 여호와를 떠난 이스라엘이 “또다시” 억압과 배고픔에 직면했는데, 이 상황에서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염치없고 부끄러울지라도 “여호와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런데 아쉬움이 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 때문에 전혀 기를 펴지 못하게 되자,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울부짖었다.”(새번역, 6절) 부르짖기는 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혹은 어쩔 수 없이 부르짖은 것처럼 기록했다. 개역개정이 “궁핍함(달랄)”으로 번역한 이 단어는 “고갈되다”라는 뜻뿐 아니라 “낮아지다, 천하다(보잘것없게 되다)”라는 뜻도 함께 지닌다. 육체적인 굶주림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졌음을 드러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고통의 원인을 “미디안으로 말미암아”(7절)라고 하여 미디안에게 돌렸다. 그래서 6~7절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은 회개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이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해결해 달라는 아우성이었다. “회개 없는 부르짖음”이 애처롭다. 고통 속에서 아우성치는 그들의 모습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2절) 산(하르: 산지, 산, 언덕)에서 웅덩이(민하라: 깊은 계곡, 갈라진 틈)와 굴(메하라: 동굴)과 산성(메차드: 요새, 성채, 보루)을 만들었다고 기록한다. 빈번한 침입으로 가나안 땅의 평원을 빼앗긴 채 눈치를 봐 가며 겨우겨우 농사를 짓다가, 이마저도 수확물을 빼앗기기를 무려 7년이나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파종할 때”(3절) 침입했다고 기록하는데, 이스라엘은 건기가 지나 이른 비가 내리는 10, 11월에 파종하고, 우기를 지나 3, 4월에 겨울 보리 수확을 시작한다. 미디안이 유목민임을 고려한다면, 파종할 때 침입했다는 것은 곡식이 싹을 틔워 새순이 자라나는 시기에 자신들의 짐승들을 밭에 풀어 놓았다는 의미다. 아주 악랄하다. 이와 함께 창고에 저장해 두었던 양식도 약탈했을 것이다. 유목민들이었기에 장막을 치고 오래 머물면서 지속적으로 약탈했다는 것이다. 지중해 연안의 가사(블레셋 성읍)에까지 이를 정도로 광범위하게 괴롭혔다.
*”또”가 반복될수록 “또”의 고통은 더 광범위해지고, 평화의 기간은 점점 줄어든다. 문제는 고통의 환경이 아니라 고통이 찾아온 원인이다. 사사기는 이것을 통찰하라고 도전한다.
*무엇보다 “메뚜기 떼 같이 많이” 올라왔다는 기록은, 미디안의 침략이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그대로 임한 것임을 보게 한다. “…… 집을 지어도 그 집에서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어도 그것을 따먹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들의 소를 당신들이 눈 앞에서 잡아도 당신들이 먹지 못할 것이요, 당신들의 나귀가 당신들의 눈 앞에서 강탈을 당해도 도로 찾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들의 양 떼를 당신들의 원수에게 빼앗겨도 당신들을 도와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땅에서 거둔 곡식과 당신들의 노력으로 얻은 모든 것을,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백성이 다 먹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사는 날 동안 압제를 받으며, 짓밟히기만 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눈으로 보는 일 때문에 미치고 말 것입니다.”(신 28:30-31, 33-34)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이 생각나야 했다! 그래서 더 절박하게 회개의 부르짖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고통스러운 삶을 토로하는 데 그친다. 아, 이 백성을 어찌할까!
3. 하나님의 반응(7~10절)
앞선 네 명의 사사(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때에는 이스라엘이 부르짖는 즉시 사사를 보내 주셨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사사부터 세워 주지 않으신다. “한 선지자”를 먼저 보내신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일깨워 주신 말씀이 압권이다. “……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10절)
선지자는 남북 분열 왕국 때부터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드보라를 여선지자로 칭했다. 이스라엘에게서 출애굽과 가나안 땅 정복 때의 승리의 기운이 이미 마를 대로 말라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여 전하는 선지자의 출현은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었는지에 대한 방증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말씀이 들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에게는 늘 말씀이 들리고 있을까?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서 일어난 고통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해결하시기 전에 먼저 “말씀”을 들려주신다. 상황의 호전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호전임을 일깨우시는 것이다. 여전히 죄를 짓는 나에게 날마다, 아침마다 말씀을 주시는 은혜가 어쩌면 이들에게 “한 선지자”를 주신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말씀이 죄에 젖어 있는 삶을 타격하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죄를 타격할 때, 고통스러운 상황 이전에 하나님과의 고통스러운 관계를 깨닫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행하시기 전에 “말씀”을 주신 것은, 고통에 울부짖기보다 죄에 울부짖어야 함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내 삶 속에서 여전히 나를 지배하는 범죄의 타성을 말씀으로 타격하시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증거다. 상황과 여건을 해결하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이 먼저가 아니다. 말씀을 알아듣고 기억하며 따라가는 “말씀 회복”이 먼저다!
나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또다시 악을 행하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디안의 압제 아래 두신다(1~2절).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언약에 충실하지 않은(10절) 그들의 패역에 대한 보응이었다. 하나님은 은혜와 진리를 망각하고 죄와 세상에 흠뻑 취해 있는 나를 일깨우기 위해 때로 강한 채찍을 드신다. 내 삶의 방식과 목적을 바꾸지 않는 한, 이 악순환은 계속된다.
-이스라엘은 평안할 때 악을 즐기다가 곤경에 처하자 다급하게 하나님께 울부짖는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회개-용서’라는 틀 안에 하나님을 가두고, 양심의 가책을 달래며 압제에서 벗어나려고만 한다(1, 6, 7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인생의 주권자가 아니라 아쉬울 때만 찾는 편의적인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와 공동체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오늘 흘리는 회개의 눈물은 진실할까? 진실한 회개의 눈물은 내일의 두려움과 통곡을 막아 줄 것이다.
-한때 승리의 노래(5장)를 부르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대적들 때문에 샛길(5:6)로도 다니지 못하고 산에 숨어 사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만다. 대적들은 ‘메뚜기 떼와 같이’ 몰려와 토지 소산을 약탈하여 생계를 위협한다(2~6절). 이 참혹한 곤궁은 죄악과 말씀을 ‘가볍게’ 여긴 결과였다(10절). 즉 하나님과의 관계의 위기가 인생의 위기, 공동체의 위기로 이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예전처럼 ‘즉시’ 사사를 세워 구원하지 않으신다. ‘먼저’ 선지자를 보내 하나님의 뜻을 전하신다. ‘압제의 고통’에서 건지시기 전에 ‘압제의 원인’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7~10절).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보다 가나안 신들을 더 두려워하고 가나안 사람들을 부러워하다가, 구원의 역사와 사명을 망각한 그들을 일깨우신다. 그들에게 죄의 자백과 함께 ‘자각’이 필요했듯이, 나 역시 징계의 시간이 어서 ‘끝나게’ 해 달라고 구하기 전에 어서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함을 확신하게 된다. 이런 자세가 내 삶 속의 “영적 악순환을 영적 선순환으로” 바꾸는 길일 것이다.
*이스라엘만 “또”일까? 답답하고 짜증이 나려는 순간, 그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또”를 얼마나 반복하는지 모른다. 그러니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없어서 입술을 굳게 깨물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또” 시작된 고통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전까지는 자신들이 분배받아 삶의 터를 일구던 곳에서 압제를 받아 괴로움을 당했다면, 이제는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2절) 만들어 피할 정도다. 아니, 쫓겨난 것이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편리함과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쫓아내라”에 불순종하여, “쫓아내지 않고” 함께 거주한 민족들에게 핍박과 고통을 당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히려 “미디안 족속”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쫓겨난 것”이다.
*사사기 저자는 미디안 족속의 만행을 고발하면서 “파종할 때면……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가사(블레셋 성 중의 하나)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이는…… 멸하려 하니”(3~5절)라는 표현들로 그 심각성을 드러낸다.
*미디안 족속은 이렇게 하기 위해 주변 민족들(아말렉과 동방 사람)과 연합하고, 남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블레셋 족속의 성읍 가사 근처까지 “진을 넓게 쳐서” 아예 점령한 것이다. 그들의 약탈은 마치 후일을 기약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스라엘 가운데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않았고 가축들도 남김없이 약탈하였다”라고 기록한다. 무엇보다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5절)라고 했다. 아예 정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진멸하려 한 것이 분명했다.
*결국 고통 때문에 울부짖더라도, 그 울부짖음이 있어야 “말씀”이 비로소 들림을 깨닫는다. 내 삶에 고통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 늘 울 수밖에 없는 것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이다! 아! 고통과 울음이 은혜의 시작이요 통로로구나!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들려야 산다! 그래야 울음(통곡)이 물러가고 웃음이 함께 찾아온다.
*벌써 다섯 번째이다. 한 사사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어김없이 “또”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진노도 “또” 임하고, 고통도 “또” 시작된다. 지금 내가 “또”를 끊지 못하면 “또”, “또”, “또”가 이어진다. 하나님의 진노가 “또” 임할 것을 알면서도 죄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진노하실 것을 알면서도 패역의 길을 끊지 못했다. 인간의 한계다. 이것이 인간의 본모습이다. 알면서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여 저지르는 것이 인간이다.
*또 돌아선 이스라엘, 또 당하는 이스라엘, 그러나 또 구원하신 하나님…… 그것 참……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하나님은 주님을 또 떠난 이스라엘을 고난에 넘겨 고통받게 하시고, 그들이 고통 중에 하나님을 찾게 하시며, 하나님을 찾은 그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현상을 개선하기보다 원인을 바라보게 하셔서 진정한 회개(돌이킴)를 기대하시는 분이다.
*고통을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바울은 환난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라고 했다(롬 5:3).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길러 가시는 방편이다(히 12:7). 고난으로 연단받는 자는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그 고난이 “또” 하나님을 떠나 자처한 꼴의 고난이라면 곤란하다. 신실하게 약속의 말씀 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다 받는 세상의 질시와 무시, 곤란과 억압이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자처하는 고난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기에 세상이 주는 고난이라면 받기를 주저하지 않겠다. 그 고난의 현장을 꿋꿋이 견디고 이겨 낼 수 있는 말씀의 은혜를 주실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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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온누리교회 전임 및 파트 교역자 청빙 공고
2026년 05월 23일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갈 동역자를 기다립니다. 전주 더온누리교회(www.theonnuri.org)에서 함께
#더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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