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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어떤 자세로 해야 할까? 때론 겸손하게, 때론 긍휼을 구하는 자세로, 때론 울고 가슴을 치면서 해야 하겠지만, 자신감을 가지고 담대하게 기도해야 할 때도 있다. 언제 자신 있게 기도해야 하며 자신 있게 기도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할까?
1. 억울한 일을 당하다
시편 17편은 다윗의 기도다. 다윗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을 때 쓴 시인 듯한데, 아마 사울왕에게 쫓겨 다닐 때 쓴 것으로 추정된다.
(시 17:2-3, 새번역) [2] 주님, 친히 “너는 죄가 없다”고 판결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눈으로 공평하게 살펴보아 주십시오. [3] 주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시험하여 보시고, 밤새도록 심문하시며 샅샅이 캐어 보셨지만 내 잘못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내 입에서 무슨 잘못을 발견하셨습니까?
자신 있는 기도의 첫 번째 비결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다. 이 기도에 대해서 다윗이 삶의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깨끗하거나 온전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사울로부터 쫓겨 다니는 그 상황에 대해서 다윗은 억울했던 것이다. 그렇게 쫓겨 다닐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주님께 자신의 무죄함을 호소했다.
다윗이 이렇게 자신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사울과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윗은 자신의 의도와 실제 삶에서 전혀 악을 행한 적이 없고 탐욕을 따른 적도 없고 무엇보다 사울을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일부러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황당하게 쫓기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억울한 그 상태에 대해서 스스로 보복함으로 억울함이 없어지도록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억울함을 당하고 억울한 그 상태를 상대를 공격함으로 상쇄시켜 버린다면 자신 있는 기도를 할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억울함을 품고 하는 기도가 자신 있는 기도가 된다.
즉 상대는 자신에게 피해를 입혔고 앞으로도 피해를 입히고자 하는데 자신은 그에 대해서 보복하지 않고 피해를 겪고 입을 때 자신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다.
2. 기도의 중요성을 알아야
다윗은 기도의 중요성을 알았다. ‘기도’란 주술적인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다. 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받는 행위도 아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다.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있는 그대로 호소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답변을 듣는 것이 기도다.
당연히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자신의 말을 듣는 분이심을, 하나님이 자신의 억울함에 대해 공감하시는 분이심을, 그리고 하나님이 공의에 따라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분이심을 확신하고서야 기도가 가능하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소통을 평소에도 계속 해왔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다윗은 이렇게 자신 있는 기도를 할 수 있었다.
기도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리고 평소에 주님과 인격적인 소통을 하지 않고서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기도가 나오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다른 방향으로 폭발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평소에 이어가고 있음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자신 있고 담대한 기도를 할 수 있는 비결이 될 것이다.
3. 참된 만족의 근거가 남과 다름
다윗이 자신의 존재와 삶 자체가 흔들리는 그토록 억울한 상황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에 힘을 쏟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상황이 역전되어서 사울은 망하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그 상황을 가정하고 상상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다윗이 그런 의도로 기도했다면 다윗은 결코 아름다운 신앙인이 아닐 것이다. 다윗의 가장 큰 관심은 왕위가 아니라, 패배한 상황에서 돌이켜 큰 성공을 거두는 것도 아니라, 오직 주의 얼굴이었다.
(시 17:15, 새번역) 나는 떳떳하게 주님의 얼굴을 뵙겠습니다. 깨어나서 주님의 모습 뵈올 때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떳떳하게 뵙는 것, 그래서 잠에서 깰 때에 자신의 죄로 인해 어둡고 절망스럽고 찝찝한 마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는 자신의 삶이 되는 것이 다윗이 가장 중요하게 소망하는 것이었다. 다윗의 만족이 오직 주의 얼굴이었고, 주님 안에 머물고 거하는 것이었고, 주님 앞에 섰을 때 떳떳한 것이었기에 다윗은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주께 보복을 맡기고 담대하고 자신 있게 기도할 수 있었다.
참되고 진실하고 자신 있는 기도의 비결을 요약하면, 자신의 힘으로 다 보복하지 않아서 억울함이 있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고, 깰 때에 주님 앞에 떳떳한 마음을 갖는 것이 삶의 가장 큰 소망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시인은 쏟아지는 부당한 비방에 대해 하나님께 무죄를 입증해달라고 호소한다. 과거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애굽 군대를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특별한 사랑으로 지켜주신 것처럼 자신을 보호하고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한다.
-다윗은 무죄를 호소한다. 그가 위기에 빠진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순종 때문이었다. 다윗은 자신이 겪는 위기와 관련하여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일을 겪을 만한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호소한다(2~5절, 14절). 이런 다윗의 모습처럼 나도 역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판단해달라고 아뢸 만큼 떳떳하게 행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호소를 들으시는 분이시다. 사냥하는 사자와 같은 이들에게 둘러싸인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처절하게 아뢴다(1, 6절).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들으소서, 주의하소서, 기울이소서, 지키소서, 구원하소서’ 등은 다윗의 절박함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다윗은 기도를 경청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이야기에 근거하여 호소한다. 지금도 변함없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자.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와 대적하신다. 홍해에서 애굽을 심판하셨던 기이한 역사를 다윗을 위해 재현하신다. 원수를 심판하는 동시에, 누구도 돕지 않는 다윗을 안전하게 보호하신다(7, 8, 13절).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에서 비롯된다.
-다윗은 하나님만 충성스럽게 섬겼는데도 모함과 질시를 받는다. 자신을 감시하며 비방거리를 찾는 이들 때문에 견딜 수 없어 죽을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들의 악행을 낱낱이 일러바친다. 그들이 어떤 이들인지 숨기지 않고 아뢴다. 사람과 세상은 우리 억울함을 경청하지 않을뿐더러 억울함을 해결해줄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대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한다.
*시인인 다윗이 당차다. 자기는 의로우니 마땅히 구원받아야 한다고 외친다. 거짓되지 않은 입술로 구하니 응답하셔야 한다고 말한다. 당돌하다. 시험해보라고 요구한다. 당차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올까? 그는 단 한 걸음도 주의 말씀이 가리키는 곳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솔직히 이런 다윗의 모습이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부럽다.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사람만큼 강한 사람은 없다. 진정한 용기는 하나님께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는 마음에서 나오지 않을까?
*다윗은 의인인데도 고난을 당한다. 말씀을 따라 살았는데도 어려움이 닥친다. 정직하게 살았는데도 거짓에게 당한다. 모든 고난은 죄의 결과는 아니다. 그러니 무조건 회개부터 해야 하는 것은 잘못이다. 시인은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보호를 요청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호소하여 구원을 호소한다.
*우리는 값싸고 판에 박힌 회개 기도, 혹은 억지로 죄를 들추어내는 기도로 긍휼을 얻어내려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오직 주님만 신뢰하고 확신하고 있으니 꼭 기도를 들어달라고 요청할 만큼 주님 앞에서 그만큼 투명하고 신실하게 살아보고 싶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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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담’의 뜻을 정확하게 해석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개역개정도 ‘믹탐’을 그저 ‘믹담’으로 음역하여 처리했다. 그러나 칠십인역을 비롯한 고대 역본들은 ‘믹탐’을 ‘비명(碑銘, 비석에 새긴 글)’으로 번역한다. 곧 다윗이 죽음을 앞두고 영원한 생명의 확신을 돌에 새겨 남긴 글, 혹은 인생의 어떤 특별한 사건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여 비석에 새긴 시로 이해한 것이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이러한 풍습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시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의 이방 제의나 헬라 시대의 혼합주의적 우상숭배라는 강력한 유혹에 직면했던 포로기 이후 시기(주전 5~2세기경)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불렀던 고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다윗의 믹담은 어떤 내용일까? 내 삶에 새길 내용은 무엇이 될까?
시인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그 순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구원을 간구한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철저히 헌신했고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고백하고 찬양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구원을 간청한다. 그의 고백과 찬양은 후반으로 갈수록 다음과 같이 구체화되고 내면화된다. ‘우상을 섬기는 무리와 비교한 고백’, ‘이스라엘에게 주신 기업의 은유를 통한 고백’, ‘자신의 멘토가 되어 주신 하나님과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자신의 관계를 통한 고백’,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생명을 누리며 사는 관계를 통한 고백’이다.
1. 나의 보호자(1~4절)
다윗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는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1절)라고 외친다. 하나님은 형상에 불과한 우상이 아니라 실제로 “피할” 수 있는 살아 계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피할 만한 다른 곳이나 사람도 많았겠지만, 다윗은 “주 밖에는” 자신의 복이 없다고 고백한다(2절).
하나님만이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능히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는 고백이다. 고백뿐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다윗은 늘 하나님께 가장 먼저 피했다(나아갔다). 하나님을 가장 확실하게 신뢰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나더러 주님에 대해 말하라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내게 행복이 없다’ 하겠습니다.(새번역_16:2)”라고 할 정도였다.
다윗의 인생에서 보호자는 진정 “하나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백성이 자신의 기쁨이 되었다(3절). 그러니 다른 신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4절).
2. 나의 힘(5~8절) 하나님은 나의 “산업”과 “잔의 소득”이시며, 나의 “분깃”을 지키신다(5절). 나에게 아름다운 기업(땅)을 주셨다(6절). 또한 나를 “훈계”하시고, 밤마다 내 양심을 통해 “교훈”하신다(7절). 다윗은 그 하나님을 “항상 내 앞에 모셨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외친다(8절).
산업과 분깃과 기업을 주시는 하나님을 항상 앞에 모시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늘 채워 주시니까!
그런데 “훈계(조언, 권면)와 교훈”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송축)한다니…
아! 다윗은 물질을 공급하시는 하나님뿐 아니라 훈계하시고 충고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삶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물질이 채워져서가 아니라 마음이 채워져서다. 마음이 “주의 교훈과 훈계”(엡 6:4)로 가득 채워져야 흔들리지 않는다.
마음이 “주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곧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신 것”이다. 마음속에서 “주의 말씀”이라는 나침반이 작동하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주의 말씀이 힘이다!
3. 나의 기쁨(9~11절)
“이러므로” 삶에 기쁨이 넘친다. 삶의 안전함을 누린다(9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않으시고 책임지시기 때문이다(10절). 베드로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말씀으로 인용하기도 했다(행 2:25~31). 그래서 주께서 내게 생명의 길을 보이시니, 주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11절). 결국 주의 말씀으로 가득한 삶은 기쁘다! 그것도 넘친다(충만하다). 영원하다(지속된다).
인생의 믹담.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경험한 그 감격과 기쁨을 고스란히 새겼다.
누구나 위기를 만난다. 그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확실하게 드러난 구원 경험의 짜릿함을 잊지 않으려고 비문을 새긴다. 위기의 순간을 넘긴 직후뿐 아니라 돌 위에 한 자 한 자 새길 때마다 온몸을 흐르는 감사와 감동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위기를 만날 때 아로새겨진 믹담은 소망이 되었을 게다. 지워지지 않는 돌에 새겨진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에, 위기는 고통이 아니라 기쁨을 기대하게 하는 소망이 되었을 게다. 이미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확실한 구원하심의 흔적(믹담)은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시인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한다. 그는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죽음을 걱정할 만큼 큰 고난 가운데 빠져 있다(10~11절).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거나 예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을 살려 줄 유일한 주님이심을 고백하며(1~2절)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확신하고 찬양한다. 하나님은 어려울 때 나 몰라라 하는 세상의 다른 주인들과 달리, 내가 다급한 일을 당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할 때 피하고, 숨고, 안길 수 있는 분이시다. 나는 내 삶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마주할 때 시인처럼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가?
*시인은 주님을 피난처로 삼을 만큼 세상에서 쫓겨 다니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은 복이 있다고 고백한다. 오직 주님과 주님을 신뢰하는 성도들이 시인의 복이었다(2~3절). 그들이 있기에 고난 중에도 즐거움이 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모시는 공동체가 된다면, 이 험한 세상도 살아 볼 만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런 공동체마저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디서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시인은 대적자들에게 쫓겨 방황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 기업이 있다고 믿는다. 여호와께서 그의 산업과 잔의 소득이 되시고 분깃을 지키신다(5절). 그분이 자격도 없는 이들에게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셨으니, 지금은 비록 쫓겨 다닐지라도 주님의 때가 되면 언젠가 그 땅을 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시인은 믿음을 지켰다. 그는 하나님과 이방 신에게 동시에 도움을 청하는 혼합주의 신앙의 유혹을 뿌리치고, 오직 하나님만을 한 주인으로 인정하며 간구한다(4~9절).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고통에 빠뜨린다. 그들이 흘린 피로 즐거워하고, 그것을 신에게 예물로 드린다. 그 신들이 그런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잠시 기쁠지 모르나 텅 빈 쾌락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람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괴롭히지 않고, 남을 살리기 위해 나를 희생한다. 그것이 생명의 길이고, 생명으로 가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나의 ‘복’이시다.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가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이든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내게 기업을 주실 뿐 아니라 풍성하게 하신다(5~8절). 하나님이 내게 주신 온갖 복을 세어 보라. 그리고 앞으로 주실 복을 기대하며, 복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시인은 생각을 지킨다(7~8절). 숨이 넘어갈 듯 고달픈 상황에 처하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게 된다. 그런 생각은 마침내 나의 전부를 집어삼킨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을 온전히 다스리자 죽음의 그늘이 사라지고 생명의 길이 보인다. 말씀으로 내 생각을 지키라.
*시인은 기뻐할 수 없는 환경에서 기뻐했고, 불안한 조건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훈계하시는 말씀을 들었고, 주께서 인도하시는 생명의 길을 따라 걷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쁨은 역사의 흔적에서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과거의 흔적이 현재의 고난 속에서 미래를 바라보게 한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내 삶의 기쁨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이런 의미에서 내 삶의 믹담은 이미 믿음의 선조들의 기록을 통해 내게 주어졌다. 이것이 미래 세대에게도 훼손하지 않고 물려주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의 역사가 오늘의 힘이 되고 내일의 소망이 된다. 오늘도 열심히 묵상 기록을 남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나의 보호자, 나의 힘, 나의 기쁨… 어디 이뿐이겠는가? 삶의 굽이굽이마다 내 마음에 아로새겨진 수많은 단어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오늘도 그 하나님을 마음에 새긴다! 오늘도 나의 믹담을 새긴다!
-누구나 일생에 한두 번쯤은 숨넘어갈 듯한 위기를 경험한다. 달리 피할 곳도, 마땅한 방도도 없고, 감당하기 버거워 쩔쩔맨다. 이런 상황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시인도 그랬다. 그도 안절부절못하다가 마침내 주께 피한다. 그리고 위기를 돌파했을 뿐 아니라 살아났고, 주의 길을 걸어 마침내 주님의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린다.
-힘든 상황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한다. 도움이 될 만한 것이면 무엇이라도 붙잡으려 한다. 다급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지푸라기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헛된 희망일 뿐이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붙들수록 남는 것은 허탈감뿐이다. 시인은 결심한다. 다른 신에게 예물이나 예배를 드리지 않겠다고 스스로 굳게 다짐한다(4절). 이런 고백과 결심 자체가 그 역시 흔들렸다는 방증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우상에게 바치는 예물과 피의 전제는 재산만 축낼 뿐이다. 살리는 것이 아니라 실컷 이용만 당하는 것이다. 참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것이나, 아무 사람이 아닌, 살아 계신 나의 주님께 나아가야 하리라.
-거짓 신은 인간에게 희생 제물을 요구하나, 참 신은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신다. 탕자의 유일한 해결책이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이었듯이(눅 15:18~20), 하나님이 내 삶의 전부이고 ‘복 중의 복’임을 알기에 그것이 주님께 돌아가야 할 단 하나의 이유이리라.
-시인은 헛된 신과 꿈을 좇던 삶에서 돌이켜 주님께 피했다. 이제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다. 특히 두 가지를 결심한다. 내적으로는 자기 생각을 지키고(7~8절), 외적으로는 이웃의 삶을 지켜 준다(3~4절). 말씀 묵상의 삶이 이런 삶을 가다듬어 준다. 위기에 처했을 때는 불안과 무력감, 미움과 분노가 가득했으나, 이제는 나를 가르치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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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난당할 때, 즐거워할 때(13절)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새번역_5:13)”
고난과 즐거움은 삶의 어떤 순간에든 찾아온다. 극심한 고난도, 최고의 기쁨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살다 보면’ 누구나 직면하게 되는 고통과 기쁨이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일상의 모든 순간에 세상에 속한 이들과 달리, 고통과 기쁨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기도와 찬송을 하라고 권면한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의식하며 살라는 의미겠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일들을 만날 때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말과 행동으로 보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고난과 기쁨의 상황에서 세상처럼 사람이나 제도에 하소연하거나 환호성을 지르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내어놓아야 한다. 삶의 모든 정황을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기도는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고난에 맞설 힘을 구하는 겸손이고, 찬송은 기쁨이 넘치고 넘칠 때 기쁨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는 기도와 찬송이 늘 먼저여야 한다.
2. 병들었을 때(14~18절)
육신의 병이 찾아올 때 절망과 외로움, 당혹감 같은 마음의 불청객도 함께 찾아온다. 사실 이런 마음이 육신의 질병보다 더 큰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육신의 질병과 함께 어느새 마음을 잠식한 불안과 염려, 절망과 외로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먼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권면한다(14절). ‘장로’로 번역된 단어(프레스뷔테로스)에는 “연장자, 연륜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직분상의 ‘장로’라기보다 공동체 안에서 영육 간에 연륜이 있는 “어른”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낫다. 15절의 “믿음의 기도”와 16절의 “간절히 비는 기도”가 지닌 능력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이들을 “기도의 용사”, “믿음의 용사”로 이해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주목되는 것은 “청하라(부르라)”는 말이다. 믿음의 방법, 믿음의 시도를 먼저 하라는 것이다. 용한 의원을 찾도록 도와주라거나 신박한 약재를 구해 주라는 식의 권면이 아니라, “믿음으로 함께 기도해 줄 공동체의 어른”을 찾으라는 것이다. 당시에 기름은 상처와 병을 다스리는 일반적인 치료제였다(눅 10:34). 그런 일반적인 의술과 약재를 사용하는 것(기름을 바르고, 14절)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주의 이름으로… 그를 위하여 기도할” 사람을 찾으라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믿으라는 의미다. 세상의 방법보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믿음의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할 구체적인 근거로 “엘리야의 기도”를 예로 든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인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하자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자 하늘이 해갈의 단비를 내렸음을 상기시킨다(17~18절; 왕상 17:1, 18:42~45).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새번역_5:16)” “서로” 공감하고 이해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서로”… 한국 교회에는 이와 관련해 매우 부적절한 모습이 있다. 병이 나면 “죄의 결과”로 생긴 것이라며 당사자에게 과도하게 “회개”를 촉구하는 모습이다. 발병의 원인을 그의 죄로 단정하고 “회개하면” 치유해 주실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병이 낫는 은혜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 임하는 것이지 “회개의 기도”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면 결코 치유될 수 없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기도에는, 혹시 죄를 범하였더라도 사죄의 은혜가 베풀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15절). 이를 보면 무조건 회개의 기도만이 치유의 열쇠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기도”다.
하나님의 치유하심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공동체의 장로들을 청할 수 있고, “간절히 비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여기에 그 병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을 “서로” 공감하고 어루만지며 “서로를 위하여” 기도할 때 낫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병들었을 때는 어떤 기도보다 “믿음의 기도”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의 기도는 기도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이고,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이다. 또한 서로 마음을 나누고 소통하며 함께 드리는 기도이기도 하다.
3. 공동체(지체)를 포기하지 않는(19~20절)
공동체 안에서 “진리”를 떠난 지체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도 구체적인 믿음의 행동이다. 하나님은 지체를 포기하지 않는 그를 극찬하신다. “…누구든지 그를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이 사실을 알아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새번역_5:19하~20)”
두말해서 무엇하겠나…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 고난 중에 혹 신앙을 저버릴 수 있다.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는 연약함이 그를 잠시 떠나게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연약해진 이들이 다시 용기를 내어 주의 진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스스로 그 길을 찾고 용기를 내어 다시 문을 두드리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힘든 일이다. 먼저 문을 열어 주고, 들어오도록 손을 잡아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그 어떤 믿음의 행동에도 뒤처지지 않는 가치 있는 행동이다.
나는?
-무조건 기도하라는 명령인 듯하지만, 곱씹어 볼수록 소통과 공감,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행하라는 명령이다.
-고난을 만날 때나 즐거워할 인생의 순간에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라는 것이다.
-병듦에 지친 영혼과 고통을 나누고 공감하는 최고의 방법은 함께 듣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최고, 최선의 소통과 공감은 나눔과 기도이다.
-1세기 성도들의 삶은 곤고하기 짝이 없었다. 여러 해 이어진 흉년(행 11:28)으로 늘 배고팠고, 유대인들의 핍박은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로마 제국 아래에서 신생 종교로서 늘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핍박은 점점 노골화되어 갔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겨도 사회와 제도, 정부가 그 억울함을 지켜 주지 않았다. 세상의 눈에 그리스도인들은 이단아였기에 당해도 싸다고 여겨졌다.
-세상은 그렇게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을 조리돌림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끝까지 함께하셨다. 친히 함께 조리돌림당하셨다. 그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기대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전적 의지”였다. 기도와 찬송은 전적 의지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나의 일상에서도 이런 “전적 의지”의 열매가 사그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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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이런 성도들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들을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있을까? 믿음의 삶을 응원해 주고 싶은데 무엇이 좋을까? 그 고민들이 야고보서에 담겨 있다.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말씀으로 권면한다. 무조건 믿고 기다리라 하지 않고 “믿음의 행동, 사랑의 실천”을 권면한다. “말씀”이라는 생명의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우기 마련이니 “기다리라”고 한다. 본문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애잔하게 다가온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며” 살아가야 할까?
1. 열매를 바라보며 “길이 참아” 기다려라(7~8절)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은 나의 시간표에 따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시는 그때를(마 24:36)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 인내의 동기와 에너지는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 5:7)”
교회 공동체 안팎에서 “여러 가지 시험”과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외부에서 오는 “핍박”뿐 아니라 내부의 “차별”로 인한 분열의 문제도 있었다. 이런 갑갑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바라보며 길이 참고 인내해야 한다. 마치 농부가 수확의 열매를 바라보며 인내로 농사를 짓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이와 같이 다시 오실 주님과 함께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성실하게 인내해야 한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8절)” 두 절 안에서 “길이 참음”을 세 번이나 반복하는 것은 인내의 상황이 계속될 것을 암시한다.
*신앙은 길이 참음의 시간들로 채워지는 듯하다.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재깍재깍 이루어지기보다, 믿음이 거듭 확인되고 나서야 누리게 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한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현실감이 세상 속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것이 두렵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마음이 희미해질수록 신앙이 메말라 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길이 참고 기다리는” 신앙은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과 함께 간다. 나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사모하는 마음이 메말라 가지 않기를 소망한다.
2. 서로 원망하지 말라(9~10절)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서로 원망하고 책임을 묻는 일이 비일비재해질 것이다. 스스로 책임지기보다 할 수만 있다면 떠넘기고 외면하는 풍조가 거세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런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아야 한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9절)”
“원망하다(스테나조)”는 본래 “탄식하다, 신음하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돌리며 계속해서 불평과 불만을 쏟아낸다”는 의미로 쓰였다.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린다”는 뉘앙스도 함께 담겨 있다.
교회 안에 차별의 문제뿐 아니라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불평과 불만을 쏟아 내는 일이 있다는 것은, 교회가 그만큼 분열되어 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는 믿음을 지키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 시작은 “서로 원망하지 않는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새번역_5:10)”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예언을 듣고 돌을 던지며 무시하고 외면하는 이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바라보았기에 백성들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처럼 흔들리는 믿음의 위기 속에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굳게 바라보며, “원망(불평과 불만)”하지 않고 “길이 참아” 기다리자…
3.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보라(11절)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11절)”
끝까지 인내한 욥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알고 있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빌 2:8)을 보고 믿었기에, 하나님 나라 백성도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해야 한다.
욥이 고난당할 때 외면하지 않으시고, 길이 참고 기다린 그에게 갑절로 회복시켜 주신(욥 42:10)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욥과 선지자들에게 앞서 이런 삶을 살게 하셨음을 상기시키면서, 이제 우리도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응원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먼저 살아간 선진들이 있다. 히브리서는 그들을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 12:1)”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주어진 삶도 믿음의 후손들에게 남겨질 것이다. 그때 “증인”으로 남아야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믿고, 오늘을 “길이 참고 원망하지 않으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지… 인내하는 자가 복되다!
나는?
-“기다림”… 삶을 살다 보면 무수한 기다림을 경험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때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어땠을까?” 하고 후회하는 순간이 꽤 많다. 이런 이불킥할 만한 상황은 놀랍게도 대부분 “나의 성급함” 때문에 일어났다. 좋게 말하면 “결단력”이지만, 그 대가가 꽤 오래가는 경우도 있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기다림”은 어떨까? 오히려 너무 안이하다 싶을 정도로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의식하지 않으니 “기다림”의 믿음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더구나 이단들의 단골 메뉴가 “계시록, 재림” 같은 것이다 보니 되레 더 무감각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부끄럽게도 주님의 강림보다 이 세상에서 더 간절히 기다리는 것들이 많다. “성공, 명예, 재물, 취업, 승진, 성취…” 주님의 재림보다 이런 것들을 더 간절히 기다린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고 여겨 성취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커질수록, 주님의 다시 오심을 망각하는 지수는 더 높아진다. 말씀이 경고하는 그대로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새번역_요일 2:15, 17)”
-기다릴 만한 것을 “길이 참으며” 제대로 기다려야지… 이 세상에서 잠깐 지나갈 욕망을 기다리다가 정작 기다려야 할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되지… 그럼, 그렇고말고…
-믿음의 길에서 곤고함에 지친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는 사라질 세상의 허상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야 함을 다짐해 본다.
-한편으로는 성급함이 신앙을 망치는 경우도 있음이 생각난다. 나 자신부터 “지긋한 기다림”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는 삶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실상 그렇지 못한 부분을 감출 수 없다. 성도들이 거쳐야 할 “성숙해 가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섣불리 개입하고 어리석은 가르침을 앞세우다가, 되레 부담을 주어 믿음의 생명이 꺼져 버리게 한 경우가 왜 없었을까? 메주를 만들자마자 장을 담그는 격이다.
-나의 성급함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생명의 호흡을 막고 있지는 않은지… 기다림이 없으면 성숙할 수 없음을 늘 기억해야 하겠다. 좋은 장맛을 내려면 충분한 발효에 꼭 필요한 시간을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이 좋은 장맛을 가져온다. 기다림이 성숙한 신앙을 영글게 한다.
-나의 성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을 더 신뢰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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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하기 그지없는 생각은 늘 솟아난다. 야고보는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 “허망한 자랑”에 빠지지 않는 삶임을 밝힌다. “내일 일”도 알지 못하는 인생이 어떻게 일 년 동안 자신을 위해 이익을 낼 것을 그토록 확신할 수 있을까?(13~14절) 건강과 재물에 대한 ‘허망한 자랑’의 담대함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이어지는 “하늘의 지혜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1. 허망한 자랑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4:13~17)
야고보는 이런 자세와 태도를 악한 자랑이라고 경고한다(16절). “시간이 나의 것이 아닌데도 마치 자신이 소유하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어리석은 생각은 인생을 허망하게, 그리고 악하게 만든다.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사는 삶은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자신의 일도 겸손하게 받아들인다(15절). 또 시간이 나의 것이 아니기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시간을 “선한 일”에 사용해야 함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안다(17절).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랑하고 싶어 한다. 자기에게 있는 자랑거리를 감추는 사람은 드물다. 자신의 형편을 적당히 나누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상황과 여건에 맞지 않는 “자기 자랑”이 문제다. 본문에서 야고보가 예로 든 자랑은 “건강과 재물”이다. “들으십시오. “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 하는 사람들이여.(새번역_4:13)” 그러나 “건강과 재물”이 언제나 나와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맞다. 여기저기 경고등이 켜진 건강, 지금 내가 소유한 재물, 혹은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며 수입을 예상하는 모습에서 느끼는 불안감은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건강하다가도 한순간에 쇠약해질 수 있고, 많은 재물을 누리다가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새번역_4:14)” 그러니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
*화려한 삶인 듯하지만 안개처럼 홀연히,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이것을 깨우치는 하늘의 지혜가 있다면 “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새번역_4:15)”라는 말씀처럼 고백하게 된다.
*”주의 뜻”(개역개정)에 담긴 의미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허망한 자랑을 일삼는 삶이 아니라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사는 삶은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추구하고, 순종하며, 행하는 삶이다. 아! 그렇다면 내가 살아야 할 삶이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 분명하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어야 한다. 온전한 믿음과 행함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채운다.
2. 부자들에 대한 경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소망(5:1~6)
땅의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부자들의 모습을 야고보가 단호하게, 탄식하며 묘사하는 대목은 놀랍기 그지없다. “비참한 일들이 닥쳐올 것이니 울며 부르짖으라(1절). 재물은 썩었고 옷은 좀먹었다(2절). 금과 은은 녹슬었고, 그 녹이 부자들을 고발할 것이다(3절).” 썩은 재물, 좀먹은 옷, 녹슨 금과 은… 이것은 무엇을 비유하는 것일까?
이는 “말세에 재물을 쌓고(3절), 일꾼들의 품삯을 가로채며(4절), 사치와 쾌락을 즐기고(5절), 의인을 정죄하고 죽인 것(6절)”을 가리킨다. 이들에게 착취와 갈취를 당한 이들이 주님께 부르짖는다. 부자들은 묵묵히 당하기만 하는 선량한 이들을 끝내 정죄하고 죽인다.
*야고보는 부자들에게는 강력한 경고를, 약자들에게는 인내를 동시에 선포한다. 억압하고 착취하는 부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그들의 억압과 착취에 고통당하는 이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5:7~8). 1장에서 강조한 “여러 가지 시험”에 대하여 “온전한 믿음으로 인내하라”는 권면이 다시 강조된다. 참고 견디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린다(1:12).
*이는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모든 고난은 반드시 보상받음을 강조한 것이다. 시험이 깊어질수록 인내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힘은 바로 이 소망에서 나온다.
*부자라고 해서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가 고통받고 힘들어할 때에도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재물을 축적하는 부자, 일꾼들(약자들)의 품삯을 가로채는(주지 않거나 체불하는) 부자, 사치와 쾌락을 즐기는 부자, 무엇보다 자기 욕심을 위해 선량하고 의롭게 사는 이들에게 악을 행하는(죽이는) 부자… 그들은 예외 없이 주님의 심판을 받는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기억하고 계신다.
나는?
-내일 일도 모르는 사람이 1년 후의 일을 장담하는 것은 자기의 한계와 인생의 참 주인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본문의 사람은 할 일(장사)도 있고, 투자할 곳(도시)도 정했으며, 투자 기간(1년)도 신중하게 결정했다. 계획을 세우는 것은 당연하고 꼭 필요하다. 하지만 그가 잊은 것이 있었다. 사람의 목숨은 해가 뜨면 곧 사라지는 아침 안개와 같아서 내일이라도 당장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돈의 힘은 사람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막강하다.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신자와 교회 역시 그 힘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에게 돈은 늘 위협과 유혹의 대상이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바알과 하나님 중에서(왕상 18:21), 신약에서는 맘몬과 하나님 중에서(마 6:24) 섬길 주인을 선택하도록 요구받는다. 교회와 성도에게 세상의 부는 억압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동경의 대상일 수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본문은 결국 부자 이야기다. 부자들의 자랑은 자신이 가진 재물, 그 재물을 끌어모으는 수완, 완벽한 계획을 통한 최대 이익의 추구와 달성 등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얻은 것처럼 재물을 자랑하고,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제어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이익과 축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부를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보시고 기억하시는 그들의 행동이 있다. 하나님은 이를 반드시 심판하신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맨 먼저 주님의 뜻을 구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모든 계획은 허탄한 자랑일 뿐이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멋진 청사진이나 성공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행하는 선행이다. 그것이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계획을 관철하는 데만 몰두하는 것은 정욕에서 나온 죄다(17절).
-‘돈’이 큰 시험거리라는 것을 기억하는가? 돈 때문에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고(2:1~4), 돈이 주는 권력으로 함부로 형제를 판단하기도 하며(4:11), 돈을 벌려는 계획을 떠벌리기도 한다(4:13). 부자의 눈에는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지금은 기뻐할 때가 아니라 울고 통곡할 때다. 그들은 썩은 재물과 좀먹은 옷으로 치장하고 있다. 그것들이 나중에 심판의 증거물이 될 것이다.
-착복한 돈과 착취당한 자들의 신음이 그들을 고소할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슬퍼하고, 울고, 통회하며, 손을 깨끗이 해야 하는 이 종말의 때에(4:7~9) 그들은 심판을 앞당기는 악행을 쌓고 있다. 의인을 정죄하고 죽임으로써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자라 사망을 낳는(1:15) 세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허망한 자랑에 대한 유혹이 없을까?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평판에 참 신경을 쓴다.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고 좋은 말만 듣고 싶다. 슈퍼맨에게도 안티가 있는데, 나는 안티 없는 인생을 꿈꾸는 것이다. 아니다. 오히려 허망한 자랑에 대해 안티가 되어야 한다. 자기 욕심과 탐욕에서 오는 부정 축재에 안티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나 감탄할 만한 삶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의미가 있다. 계획 없이 사업하는 것은 오히려 무모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그리고 더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일이다. 내 생명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음을 알 때(4:14), 비로소 내 계획보다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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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단락에서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 시기, 비방과 판단에 대해 경고한다. 싸움과 다툼은 정욕에서 나온다.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과 욕심이 발현된 것이다. 야고보는 성도가 바른 동기를 가진 기도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성도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며 그분을 가까이해야 한다. 형제를 비방하지 말고 주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출 때, 주께서 높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깨우친다.
하늘에서 온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참 경건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1. 욕심에 이끌리지 않는다(1~3절)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이 “정욕”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정욕(헤도네)”은 직역하면 ‘쾌락’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욕심을 내고, 심지어 살인하며, 시기한다(2절). 그런데 “능히 취하지 못하기에” 결국 다투고 싸운다.
싸움(폴레모스), 다툼(마케), 싸우는(스트라튜오마이)… 이 단어들은 모두 참혹한 전쟁을 가리킨다. ‘싸움’은 큰 전쟁을, ‘다툼’은 무기를 들고 서로 싸우는 것을, ‘싸우는 정욕’은 군사가 전쟁을 치르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욕심이 공동체를 이토록 직접적으로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일 게다.
욕심과 정욕은 땅에 속한 지혜에서 나오기에 그 결과는 반드시 싸움과 다툼이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간절히 구하는 것을 욕심내어 구하여도 얻지 못하니, 그 갈급함이 다툼과 싸움으로 번진다.
기도하여도 하나님께 얻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욕심만 추구하고 자기 즐거움, 곧 쾌락만을 위해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3절).
2. 세상과 벗하지 않는다(4~6절)
공자가 제자인 증자에게 “그 사람을 모르겠거든 그 친구를 보라”라고 가르쳤다. 한 사람을 알고자 할 때 그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그가 어떤 이들과 가까이 지내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긍정적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긍정적으로 되고, 매사에 불평하는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그 역시 불평하게 된다. 내가 가까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일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은 늘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새번역_4절)”
“벗하다”는 말에는 “필리아(우정, 사랑)”가 사용되었다. 이 말은 우정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유쾌한 관계나 호의’를 뜻하지만, 사랑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뜻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세상과 벗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친구 사이의 우정을 나누는 관계일 뿐 아니라 “세상과 결혼했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간음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먼저 사용하였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 고멜이 생각난다. 그녀는 남편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들을 따라간 음란한 여인이었다(호 1:2; 3:1). 이처럼 세상과 벗하는 자는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결혼한 자이며, 이는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구원해 주신 참 신랑 예수님을 버리는 것과 같다.
*영적인 간음… 세상과 친구가 되어 나의 신랑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 즐거움을 바라보며 자기 욕심과 결혼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을 가까이한다(7~10절)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벗하지 않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새번역_8절)”
“하나님을 가까이한다(엥기조)”는 “접근하다, 하나님께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는 의미가 있다. 이전에는 짐승을 드리는 희생 제사를 통해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와 보혈을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10:19-22).
그렇기에 “두 마음”(세상과 벗하려는 마음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마음)을 품는 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가까이하는 성결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백성이어야 한다.
*세상 속에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장 큰 도전은 세상과 섞이지 않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는 길은 세상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이다.
4.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11~12절)
정욕과 욕심(1~3절), 그리고 주 앞에서의 겸손(10절)과 연결되는 말씀이다. 정욕과 욕심을 따라 사는 이의 또 다른 모습은 그가 비방하는 자, 판단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런 비방과 판단이 곧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라 재판관이 되는 것인데,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으시다(11~12절).
비방하고 판단하는 너는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판단, 재판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12절) 율법은 겉으로 보기에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율법의 으뜸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약 2:8; 마 22:37-40). 그러므로 우리는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화평하며 살아가도록 그 권위 앞에 우리의 삶을 복종시켜야 한다.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는 이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도 잊어서는 안 된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나는?
-이전 단락에서 참 지혜와 총명은 화평하게 하고 의의 열매를 맺게 한다고 밝힌 야고보는(3:13-18), 본 단락을 시작하며 정욕과 욕심이 싸움과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야고보는 성도가 서로 다투고 시기하거나 비방하지 말고, 바른 동기로 하나님께 구하며 세상의 벗이 아닌 하나님의 벗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친다. 슬퍼하고 애통하라는 야고보의 회개 선언(9절)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습 속에 세상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게 한다.
-인간은 세상의 지혜와 정욕의 지배를 받는 ‘욕심’에 이끌려 싸움과 다툼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행도 서슴지 않는다. 기도마저 욕망 추구의 도구로 악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참된 만족도, 응답도, 삶의 변화도 없다. 자기 탐닉과 세상 사랑에 흠뻑 취해 있는 우리와 달리, 성령은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5절). 성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우리 안에 성령을 두시고, 그 마음과 뜻이 담긴 성경을 주신 것 모두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증거다. 하나님은 주를 향한 정절을 버리고 세상과 벗이 되어 간음의 길로 치닫는 이들을 향해, 이 은혜와 말씀을 기억하고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너희 중에 싸움과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1절)라는 물음이 뼈아프다. 주님은 평화이시다. 이기고 지는 싸움을 붙이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죽여’ 이룰 나라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죽어’ 이루실 나라를 위해 오셨다. 평화는 죽음의 열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싸움이 하늘로부터 날 리 없다. 싸움은 정욕으로부터 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못한 자아, 그 이기적 욕망이 싸움을 부추긴다. 욕망의 수렁은 무저갱이어서 아무리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정욕을 심으면 죽음을 거둔다(1:15). ‘정욕에서 난’ 싸움을 싸울 게 아니라 ‘정욕과’ 싸울 일이다.
-정욕에 이끌려 사는 자는 영적으로 간음한 자들이며, 세상과 벗이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들이 세상 지혜, 귀신의 지혜(3:15)를 따라 시험에 넘어지는 자들이다. 이는 시기하실 만큼 간절한 성령의 사랑을 외면하는 것이며, 이런 교만함은 마침내 심판을 불러온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히 하늘의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임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6절). 세상 지혜와 정욕을 따라 간음의 길을 고집하는 이들은 물리치시지만, 그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든지 큰 은혜를 베푸신다. 이미 늦었다는 마귀의 속임에 넘어가지 말고 믿음으로 돌아서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3:17)와 은혜(6절)를 따라 하나님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다. 마귀를 대적하고, 죄를 멀리하고, 교만과 위선을 버려야 한다(7~10절). 겸손과 성결이야말로 주님과 변함없이 동행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자기 기준으로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오만이며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고, 형제 사랑을 말하는 율법을 범하는 죄다. 율법은 남을 ‘판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지키라’고 주신 것이며, 형제와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지 비방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고 용서할 일밖에 없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신다. 잘잘못을 가리더라도 가망 없는 사람인 양 정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하듯이(2:1-4), 형제를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악이다. 판단은 하나님이 율법을 따라 하실 것이니, 내가 임의로 판단하면 스스로 율법의 입법자와 재판관을 자처하는 셈이 된다.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고서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을까? 무엇이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사는 겸손한 삶일까? 그것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세상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일에 우리는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어야 한다(9절). 주님을 높이고 나를 낮추어야 한다. 그러면 마귀가 물러가고 주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것이다(7~8절). 주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 것이다(10절). 우리가 십자가를 선택할 때 그분이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이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아무나 선생 되려 하지 말고, 선생이 되려는 자는 말과 혀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강조한 야고보는 이제 ‘지혜’에 대하여 말한다. 큰 틀에서 보면 선생은 ‘지혜로운 자’여야 한다. 본질과 정체를 꿰뚫어 보는 혜안과 분별력, 그리고 그에 따른 바른 결정은 공동체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데 꼭 필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야고보가 일깨워 주는, 선생 된 자(그리스도인 된 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지혜란 무엇인가? 그 지혜가 가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1. 행함으로 드러나야 할 지혜(13절)
야고보는 먼저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고 묻는다.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누구일까? 우선 지도자들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사람들도 그렇게 여기고, 스스로도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3:1은 말에 대한 경고를 ‘선생 된 우리’에게 먼저 적용했다. 같은 맥락이라면, 지혜와 총명을 가진 자에게 주는 야고보의 교훈은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먼저 해당된다. 이어지는 교훈과 가르침을 지도자들이 먼저 유념하여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가르침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며 이런저런 말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성도가 들어야 할 말씀이다.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여기는 지도자를 비롯한 모든 성도에게 야고보가 주는 교훈은 첫째, ‘합당한 행함’이다. 지혜와 총명은 행함, 특히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 경고는 어쩌면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행함의 열매는 없이 말만 만들어 내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오히려 문제를 더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가? 야고보가 특히 ‘선행’을 강조하는 이유는, 선한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지혜와 총명은 유익이 없고, 본질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지혜와 총명인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이라면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행위, 즉 선행으로 자신을 입증한다.
둘째, ‘지혜의 온유함으로’를 주목해야 한다. 지혜와 총명을 가진 자가 공동체 안에서 이를 드러낼 때는 “온유함 또는 겸손함”이 특징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참 지혜와 총명은 교만이나 독단적 행동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행동은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행동을 하는 자에게 참 지혜가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야고보는 ‘지혜의 온유함으로’라는 말에서 ‘지혜의’라는 소유격을 사용함으로써 온유함과 겸손함의 기원을 암시한다. 지혜가 온유함을 낳는다.
기억해야 한다.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교만과 악행으로 인해 공동체는 언제든지 분열되고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2. 땅의 지혜(14-16절)
“여러분의 마음 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표준새번역_14절)” 세상 사람들이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인생을 곤란하고 피곤하게 만든다. 결국 멸망으로 끌고 가는 지혜다. 시기와 경쟁, 자기 자랑, 진리를 거스르는(왜곡하는) 지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한 지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내 안의 욕심과 허영, 명예와 부를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이런 모습을 지혜롭다고 여긴다. 야고보는 이런 지혜를 “이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 악마에게 속한 것입니다.(표준새번역_15절)”라고 정의한다.
땅에 속하고 육신에 속하며 악마(귀신)에게 속한 지혜이기에,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습니다.(표준새번역_16절)” 시기심과 경쟁심(질투)이 있는 세상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을 뿐이다. 지혜로 여겼던 것들이 세상을 더욱 혼란스럽고 악한 행동이 난무하는 곳으로 이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다 삶을 멸망으로 이끄는 세상적인 지혜를 분별하여 배척해야 하겠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적 지혜가 가지는 특징은 무엇일까? 어떤 것이 세상적인 지혜일까? 14절과 16절에서 반복되는 단어가 “시기와 다툼”이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내 생각과 다른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다툼에 빠지도록 이끄는 것이 바로 세상적인 지혜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부와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것, 마음에 일어나는 이기적인 욕망을 고상한 표현으로 적절히 포장하는 것,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결국 끝까지 내 욕심을 놓지 않기 위해 불사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바로 세상의 지혜다. 이런 세상의 지혜는 결국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불러온다(16절). 이기적인 욕심을 실현하기 위해 지식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면 혼란은 가중되고, 각자의 이기적인 방어가 맞물려 멈추지 않는 혼란이 양산될 뿐이다… 아…
*자신만을 위한 지혜는 (독한) 시기와 다툼(경쟁심)을 가져오고, 그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일어난다.
*지금 한국의 교육이 이런 지혜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듯하여 마음이 답답하다.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 “성적” 때문에 ‘시기와 경쟁심’만 몸에 익히고 나온 사회는, 배려와 관용이 사라진 채 자신의 성공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는 완고함이 크고 작은 인간관계의 혼란을 만연하게 한다. 자칫 분별력을 놓치면 악한 일의 한가운데 빠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 세상은 그래서 혼란스럽다. 늘 다툰다.
*공동체를 지키는 길은 자신의 생각과 방법뿐인 것처럼,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싸우기에 여념이 없다. 아무리 교육 체계를 개혁하고 선진화한들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까? 세상의 지혜는 늘 이렇다… 오늘 최선이며 최고라고 여겼던 지식이 내일은 철저히 무시당하고 버려진다. 이 세상에 평화는 없다.
*세상의 지혜가 가꾸는 삶에는 시기와 경쟁(다툼), 혼란과 악한 행동의 열매가 맺힌다.
3. 하늘로부터 온 지혜(13, 17-18절)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행동을 하여 그의 행실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그 일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표준새번역_13절)” 먼저,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착한 행실로 증명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다. 온유함으로 잘 받들기로 결심하고 행동으로 증명해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새번역_17절)”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세상에서 난 지혜와 확연히 구별된다. 혼란, 다툼, 악함이 아니라 평화, 친절, 온순, 자비, 선함이 있고, 편견과 위선이 없다.
마치 성령의 열매를 읽는 듯하다. 맞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령님과 함께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마음으로 순종하고 행하면, 주님께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가져오신 것처럼 공동체에도 평화가 찾아온다. 가정과 공동체에 평화를 세우는 지혜가 하늘로부터 온 지혜다. 잠언이 가르치는 것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다.
야고보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요청한다. 바로 “그 지혜로 행하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선행(13절)”이라 번역된 말은 “선한 삶의 양식에 근거하여 행하라”는 가르침이다. 선한 삶의 양식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우리는 잘난 체하거나 서로 노엽게 하거나 질투하거나 하지 않도록 합시다.(새번역_갈 5:22-23, 25-26)”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태도이다. 이런 삶의 태도가 평화와 친절과 온순함과 자비로 삶을 채운다. 이런 모습이 “선한 삶의 양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늘의 지혜로 사는 사람은 주님처럼 사람을 세우는 삶을 살게 된다. 나와 함께 부대끼며 사는 이들은 시기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평화와 친절의 대상이 된다.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가야 할 동료가 된다.
*하늘의 지혜가 가꾸는 삶은 나의 온유함에서 오는 평화다!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 그리스도인은 행함으로 지혜를 보이는 사람이다. ‘말’로만 지혜와 총명을 자랑하는 이들을 향해 야고보는 선행으로 보이되, 지혜의 온유함으로 보이라고 한다. 참 지혜는 말로만 자랑하지 않는다. 참 지혜는 환경이 어떠하든 성내지 않고 마음을 지키며, 유약하고 소심해 보일지라도 참된 실체를 볼 수 있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시류에 휩쓸리는 처세술과는 다르다. 혀가 아니라 실천하는 삶으로 지혜를 드러낸다. 무법하고 혼란하고 뒤틀린 삶 속에서 사랑과 자유의 질서를 만들어 낸다. 지혜는 단순한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는 우리 마음에 온유함 대신 독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경쟁심(다툼)을 심는다. 그런 자들의 지혜 자랑은 진리를 가로막고 조롱하는 속임수이자 자기기만이다. 그런 말은 세우기보다 무너뜨리고, 모으기보다 흩고, 치유하기보다 상처를 낸다. 말로만 그런 지혜를 떠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요란함과 악한 일만 무성할 것이다. 으뜸 되려는 사람들만 많고 섬기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빼앗고 죽이고 넘어뜨려서라도 하나라도 더 차지하고, 일 초라도 더 빨리 오르려는 사람들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즐비한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다. 요란과 다툼을 일으키기보다 화평하게 한다. 시기하거나 고집 부리는 대신 관용하고 양순하게 대한다. 성령의 마음을 가졌으니 긍휼과 선한 열매를 한아름 맺는다. 속이고 차별하는 세상 지혜와 달리 치우침도 위선도 없이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따뜻하다. 이 지혜가 속에 가득할 때 성도의 입은 사람을 살리고 고치고 세우는 요긴한 도구가 될 것이다.
-따라서 정욕적인 욕심이 지배하는 곳에는 시기와 다툼과 갈등이 있지만, 위로부터 난 하늘 지혜를 따라 자기를 부인하는 곳에는 화평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곳에는 의의 열매가 맺힌다. 행동하는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듯이, 하늘의 지혜를 실천하는 의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의의 열매’를 거둔다.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과 화평하며 살아가도록 하늘의 지혜를 구해야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삶을 추구해야지…
-나를 알고 나와 관계 맺는 이들이 나와 함께하기에 행복하다고 느끼도록 섬겨야지… 그들은 시기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평화를 누리는” 복된 존재들임을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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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1일 주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합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백성답게 빚어주는 거룩한 습관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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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로운 금요일 | 10월 16일 금요예배 다시보기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 평범한 일상의 자리에도 찾아오시는 예수님. 우리가 서 있는 그곳이 주님을 만나는 예배의 자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과 말씀 가운데 나누었던 은혜를 다시 묵상하며, 우리의 삶에서도 주님의 더 큰 일을 기대합니다. 📖 창세기 28:12 · 요한복음 1:43~51 🎙 말씀 | 김지훈 목사 #향기로운금요일 #향기로운제물 #금요예배 #예배다시보기 #더온누리교회 레위의장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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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8일 더원함공동체 주일 4부 예배 ✨ 복합위기의 시대, 어떻게 살까? - 김형국 목사님 기도 : 조수민 리더 🎂 블레싱 생일 : 18일 박기원 20일 김세영, 최윤지 21일 박서진,이동혁,김용균 22일 강민지 결혼 : 서은택&박지명 10/24(토) 오전10:30분 더웨스턴헤라컨벤션 로얄그레이스가든홀 임채항&이승주 10/24(토) 오후1:10분 남원 참조은 웨딩컨벤션 2층 펠리체홀 🎉 광고 [더함 공동체 가을야외예배 안내] 일시: 2026.10.25(주일) 오후 3시 장소: 점점더(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중앙반길 13) 함께 모여 예배하고 가을의 기쁨을 나누는 따뜻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해요! [더함 성탄 데코TF모집안내]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함께 성탄의 공간을 꾸밀 공동체원을 모집합니다. 꾸미기와 장식 좋아하시는분,아이디어를 나누며 함께 하고싶은분,작은 손길로 기쁨을 더하고 싶은분,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함께 성탄의 기쁨을 만들어가보실까요? 문의 및 신청: 디렉터 [더말씀으로 가을 사경회] 오늘부터 수요일까지 김형국 목사 (하나복 대표)가 ”복합 위기의 시대, 어떻게 살까?“라는 주제로 요엘서를 강해합니다.김형국목사님이사역하신 요엘서 본문을 교회홈페이지와 교회앱을 통해 묵상하실 수 있습니다 사경회 전에 미리 묵상해보기를 권면드립니다. [LOVE is ONE 콘서트] 월드비전과 더온누리교회에서 함께 주관하는 ’조혜련의 LOVE is ONE 콘서트‘ 10월 23일(금) 저녁 8시에 더온누리 교회에서 열립니다. 여니엘, 리노, 이지훈, 폴송 사역자께서 함께 참여합니다. QR코드를 통해 참여신청을 해주시기바랍니다 [단기선교 신청] 2027년 2월에 캄보디아 깜퐁스프와 깜퐁츠낭(스쿤 포함)을 차례로 방문해 의료·미용·어린이 사역으로 섬깁니다. 현지 교회가 세워지고 공동체가 자라는 데 도움이 되는 선교를 목표로 합니다. 신청기간은 11월 30일 까지입니다. 큐알코드를 이용해서 신청해주세요. 일정 – 전일정 참가: 2/3(수) 출발~2/10(수) 귀국, 목요일 도착 – 1진(깜퐁스프): 2/3(수) 출발~2/8(월) 귀국, 화요일 도착 – 2진: 2/6(토) 출발~2/10(수) 귀국, 목요일 도착 – 안과팀: 2/4(목) 출발~2/8(월) 귀국, 화요일 도착 문의 – 이홍기 목사 [세례 신청] 11월 1일 주일에 세례식이 있습니다. 아래의 문답 교육 시간에 꼭 참석 바랍니다. 신청은 3층 로비에서 신청서를 작성하여 신청해주세요. [청장년 : 세례 / 입교 / 학습] 1회차 – 10/22(목) 저녁 7시 30분 2회차 – 10/29(목) 저녁 7시 30분 [청소년 : 세례 / 입교 / 학습] 1회차 – 10/24(토) 오후 3시 2회차 – 10/31(토) 오후 3시 [유아 세례] 교육 – 10/31(토) 오후 3시 * 문답식은 10월 31일(토) 오후 5시부터 세례식 참석자를 대상으로 진행됩니다 [선교사 선물보내기] 연말 성탄절에 맞춰서 우리공동체가 동역하는 25개국 54명의 선교사와 현지교역자들에게 선물을 보내려고 합니다. 함께 동참해주시겠어요? 보내드리고싶은용품(유통기한이충분한)이나 물질을 모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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