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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본 단락에서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 시기, 비방과 판단에 대해 경고한다. 싸움과 다툼은 정욕에서 나온다.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과 욕심이 발현된 것이다. 야고보는 성도가 바른 동기를 가진 기도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성도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며 그분을 가까이해야 한다. 형제를 비방하지 말고 주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출 때, 주께서 높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깨우친다.
하늘에서 온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참 경건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1. 욕심에 이끌리지 않는다(1~3절)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이 “정욕”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정욕(헤도네)”은 직역하면 ‘쾌락’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욕심을 내고, 심지어 살인하며, 시기한다(2절). 그런데 “능히 취하지 못하기에” 결국 다투고 싸운다.
싸움(폴레모스), 다툼(마케), 싸우는(스트라튜오마이)… 이 단어들은 모두 참혹한 전쟁을 가리킨다. ‘싸움’은 큰 전쟁을, ‘다툼’은 무기를 들고 서로 싸우는 것을, ‘싸우는 정욕’은 군사가 전쟁을 치르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욕심이 공동체를 이토록 직접적으로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일 게다.
욕심과 정욕은 땅에 속한 지혜에서 나오기에 그 결과는 반드시 싸움과 다툼이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간절히 구하는 것을 욕심내어 구하여도 얻지 못하니, 그 갈급함이 다툼과 싸움으로 번진다.
기도하여도 하나님께 얻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욕심만 추구하고 자기 즐거움, 곧 쾌락만을 위해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3절).
2. 세상과 벗하지 않는다(4~6절)
공자가 제자인 증자에게 “그 사람을 모르겠거든 그 친구를 보라”라고 가르쳤다. 한 사람을 알고자 할 때 그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그가 어떤 이들과 가까이 지내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긍정적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긍정적으로 되고, 매사에 불평하는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그 역시 불평하게 된다. 내가 가까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일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은 늘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새번역_4절)”
“벗하다”는 말에는 “필리아(우정, 사랑)”가 사용되었다. 이 말은 우정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유쾌한 관계나 호의’를 뜻하지만, 사랑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뜻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세상과 벗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친구 사이의 우정을 나누는 관계일 뿐 아니라 “세상과 결혼했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간음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먼저 사용하였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 고멜이 생각난다. 그녀는 남편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들을 따라간 음란한 여인이었다(호 1:2; 3:1). 이처럼 세상과 벗하는 자는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결혼한 자이며, 이는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구원해 주신 참 신랑 예수님을 버리는 것과 같다.
*영적인 간음… 세상과 친구가 되어 나의 신랑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 즐거움을 바라보며 자기 욕심과 결혼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을 가까이한다(7~10절)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벗하지 않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새번역_8절)”
“하나님을 가까이한다(엥기조)”는 “접근하다, 하나님께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는 의미가 있다. 이전에는 짐승을 드리는 희생 제사를 통해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와 보혈을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10:19-22).
그렇기에 “두 마음”(세상과 벗하려는 마음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마음)을 품는 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가까이하는 성결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백성이어야 한다.
*세상 속에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장 큰 도전은 세상과 섞이지 않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는 길은 세상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이다.
4.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11~12절)
정욕과 욕심(1~3절), 그리고 주 앞에서의 겸손(10절)과 연결되는 말씀이다. 정욕과 욕심을 따라 사는 이의 또 다른 모습은 그가 비방하는 자, 판단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런 비방과 판단이 곧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라 재판관이 되는 것인데,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으시다(11~12절).
비방하고 판단하는 너는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판단, 재판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12절) 율법은 겉으로 보기에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율법의 으뜸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약 2:8; 마 22:37-40). 그러므로 우리는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화평하며 살아가도록 그 권위 앞에 우리의 삶을 복종시켜야 한다.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는 이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도 잊어서는 안 된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나는?
-이전 단락에서 참 지혜와 총명은 화평하게 하고 의의 열매를 맺게 한다고 밝힌 야고보는(3:13-18), 본 단락을 시작하며 정욕과 욕심이 싸움과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야고보는 성도가 서로 다투고 시기하거나 비방하지 말고, 바른 동기로 하나님께 구하며 세상의 벗이 아닌 하나님의 벗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친다. 슬퍼하고 애통하라는 야고보의 회개 선언(9절)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습 속에 세상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게 한다.
-인간은 세상의 지혜와 정욕의 지배를 받는 ‘욕심’에 이끌려 싸움과 다툼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행도 서슴지 않는다. 기도마저 욕망 추구의 도구로 악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참된 만족도, 응답도, 삶의 변화도 없다. 자기 탐닉과 세상 사랑에 흠뻑 취해 있는 우리와 달리, 성령은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5절). 성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우리 안에 성령을 두시고, 그 마음과 뜻이 담긴 성경을 주신 것 모두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증거다. 하나님은 주를 향한 정절을 버리고 세상과 벗이 되어 간음의 길로 치닫는 이들을 향해, 이 은혜와 말씀을 기억하고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너희 중에 싸움과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1절)라는 물음이 뼈아프다. 주님은 평화이시다. 이기고 지는 싸움을 붙이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죽여’ 이룰 나라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죽어’ 이루실 나라를 위해 오셨다. 평화는 죽음의 열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싸움이 하늘로부터 날 리 없다. 싸움은 정욕으로부터 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못한 자아, 그 이기적 욕망이 싸움을 부추긴다. 욕망의 수렁은 무저갱이어서 아무리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정욕을 심으면 죽음을 거둔다(1:15). ‘정욕에서 난’ 싸움을 싸울 게 아니라 ‘정욕과’ 싸울 일이다.
-정욕에 이끌려 사는 자는 영적으로 간음한 자들이며, 세상과 벗이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들이 세상 지혜, 귀신의 지혜(3:15)를 따라 시험에 넘어지는 자들이다. 이는 시기하실 만큼 간절한 성령의 사랑을 외면하는 것이며, 이런 교만함은 마침내 심판을 불러온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히 하늘의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임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6절). 세상 지혜와 정욕을 따라 간음의 길을 고집하는 이들은 물리치시지만, 그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든지 큰 은혜를 베푸신다. 이미 늦었다는 마귀의 속임에 넘어가지 말고 믿음으로 돌아서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3:17)와 은혜(6절)를 따라 하나님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다. 마귀를 대적하고, 죄를 멀리하고, 교만과 위선을 버려야 한다(7~10절). 겸손과 성결이야말로 주님과 변함없이 동행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자기 기준으로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오만이며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고, 형제 사랑을 말하는 율법을 범하는 죄다. 율법은 남을 ‘판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지키라’고 주신 것이며, 형제와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지 비방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고 용서할 일밖에 없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신다. 잘잘못을 가리더라도 가망 없는 사람인 양 정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하듯이(2:1-4), 형제를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악이다. 판단은 하나님이 율법을 따라 하실 것이니, 내가 임의로 판단하면 스스로 율법의 입법자와 재판관을 자처하는 셈이 된다.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고서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을까? 무엇이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사는 겸손한 삶일까? 그것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세상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일에 우리는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어야 한다(9절). 주님을 높이고 나를 낮추어야 한다. 그러면 마귀가 물러가고 주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것이다(7~8절). 주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 것이다(10절). 우리가 십자가를 선택할 때 그분이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이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아무나 선생 되려 하지 말고, 선생이 되려는 자는 말과 혀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강조한 야고보는 이제 ‘지혜’에 대하여 말한다. 큰 틀에서 보면 선생은 ‘지혜로운 자’여야 한다. 본질과 정체를 꿰뚫어 보는 혜안과 분별력, 그리고 그에 따른 바른 결정은 공동체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데 꼭 필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야고보가 일깨워 주는, 선생 된 자(그리스도인 된 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지혜란 무엇인가? 그 지혜가 가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1. 행함으로 드러나야 할 지혜(13절)
야고보는 먼저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고 묻는다.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누구일까? 우선 지도자들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사람들도 그렇게 여기고, 스스로도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3:1은 말에 대한 경고를 ‘선생 된 우리’에게 먼저 적용했다. 같은 맥락이라면, 지혜와 총명을 가진 자에게 주는 야고보의 교훈은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먼저 해당된다. 이어지는 교훈과 가르침을 지도자들이 먼저 유념하여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가르침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며 이런저런 말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성도가 들어야 할 말씀이다.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여기는 지도자를 비롯한 모든 성도에게 야고보가 주는 교훈은 첫째, ‘합당한 행함’이다. 지혜와 총명은 행함, 특히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 경고는 어쩌면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행함의 열매는 없이 말만 만들어 내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오히려 문제를 더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가? 야고보가 특히 ‘선행’을 강조하는 이유는, 선한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지혜와 총명은 유익이 없고, 본질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지혜와 총명인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이라면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행위, 즉 선행으로 자신을 입증한다.
둘째, ‘지혜의 온유함으로’를 주목해야 한다. 지혜와 총명을 가진 자가 공동체 안에서 이를 드러낼 때는 “온유함 또는 겸손함”이 특징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참 지혜와 총명은 교만이나 독단적 행동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행동은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행동을 하는 자에게 참 지혜가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야고보는 ‘지혜의 온유함으로’라는 말에서 ‘지혜의’라는 소유격을 사용함으로써 온유함과 겸손함의 기원을 암시한다. 지혜가 온유함을 낳는다.
기억해야 한다.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교만과 악행으로 인해 공동체는 언제든지 분열되고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2. 땅의 지혜(14-16절)
“여러분의 마음 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표준새번역_14절)” 세상 사람들이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인생을 곤란하고 피곤하게 만든다. 결국 멸망으로 끌고 가는 지혜다. 시기와 경쟁, 자기 자랑, 진리를 거스르는(왜곡하는) 지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한 지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내 안의 욕심과 허영, 명예와 부를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이런 모습을 지혜롭다고 여긴다. 야고보는 이런 지혜를 “이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 악마에게 속한 것입니다.(표준새번역_15절)”라고 정의한다.
땅에 속하고 육신에 속하며 악마(귀신)에게 속한 지혜이기에,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습니다.(표준새번역_16절)” 시기심과 경쟁심(질투)이 있는 세상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을 뿐이다. 지혜로 여겼던 것들이 세상을 더욱 혼란스럽고 악한 행동이 난무하는 곳으로 이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다 삶을 멸망으로 이끄는 세상적인 지혜를 분별하여 배척해야 하겠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적 지혜가 가지는 특징은 무엇일까? 어떤 것이 세상적인 지혜일까? 14절과 16절에서 반복되는 단어가 “시기와 다툼”이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내 생각과 다른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다툼에 빠지도록 이끄는 것이 바로 세상적인 지혜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부와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것, 마음에 일어나는 이기적인 욕망을 고상한 표현으로 적절히 포장하는 것,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결국 끝까지 내 욕심을 놓지 않기 위해 불사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바로 세상의 지혜다. 이런 세상의 지혜는 결국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불러온다(16절). 이기적인 욕심을 실현하기 위해 지식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면 혼란은 가중되고, 각자의 이기적인 방어가 맞물려 멈추지 않는 혼란이 양산될 뿐이다… 아…
*자신만을 위한 지혜는 (독한) 시기와 다툼(경쟁심)을 가져오고, 그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일어난다.
*지금 한국의 교육이 이런 지혜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듯하여 마음이 답답하다.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 “성적” 때문에 ‘시기와 경쟁심’만 몸에 익히고 나온 사회는, 배려와 관용이 사라진 채 자신의 성공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는 완고함이 크고 작은 인간관계의 혼란을 만연하게 한다. 자칫 분별력을 놓치면 악한 일의 한가운데 빠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 세상은 그래서 혼란스럽다. 늘 다툰다.
*공동체를 지키는 길은 자신의 생각과 방법뿐인 것처럼,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싸우기에 여념이 없다. 아무리 교육 체계를 개혁하고 선진화한들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까? 세상의 지혜는 늘 이렇다… 오늘 최선이며 최고라고 여겼던 지식이 내일은 철저히 무시당하고 버려진다. 이 세상에 평화는 없다.
*세상의 지혜가 가꾸는 삶에는 시기와 경쟁(다툼), 혼란과 악한 행동의 열매가 맺힌다.
3. 하늘로부터 온 지혜(13, 17-18절)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행동을 하여 그의 행실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그 일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표준새번역_13절)” 먼저,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착한 행실로 증명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다. 온유함으로 잘 받들기로 결심하고 행동으로 증명해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새번역_17절)”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세상에서 난 지혜와 확연히 구별된다. 혼란, 다툼, 악함이 아니라 평화, 친절, 온순, 자비, 선함이 있고, 편견과 위선이 없다.
마치 성령의 열매를 읽는 듯하다. 맞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령님과 함께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마음으로 순종하고 행하면, 주님께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가져오신 것처럼 공동체에도 평화가 찾아온다. 가정과 공동체에 평화를 세우는 지혜가 하늘로부터 온 지혜다. 잠언이 가르치는 것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다.
야고보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요청한다. 바로 “그 지혜로 행하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선행(13절)”이라 번역된 말은 “선한 삶의 양식에 근거하여 행하라”는 가르침이다. 선한 삶의 양식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우리는 잘난 체하거나 서로 노엽게 하거나 질투하거나 하지 않도록 합시다.(새번역_갈 5:22-23, 25-26)”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태도이다. 이런 삶의 태도가 평화와 친절과 온순함과 자비로 삶을 채운다. 이런 모습이 “선한 삶의 양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늘의 지혜로 사는 사람은 주님처럼 사람을 세우는 삶을 살게 된다. 나와 함께 부대끼며 사는 이들은 시기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평화와 친절의 대상이 된다.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가야 할 동료가 된다.
*하늘의 지혜가 가꾸는 삶은 나의 온유함에서 오는 평화다!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 그리스도인은 행함으로 지혜를 보이는 사람이다. ‘말’로만 지혜와 총명을 자랑하는 이들을 향해 야고보는 선행으로 보이되, 지혜의 온유함으로 보이라고 한다. 참 지혜는 말로만 자랑하지 않는다. 참 지혜는 환경이 어떠하든 성내지 않고 마음을 지키며, 유약하고 소심해 보일지라도 참된 실체를 볼 수 있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시류에 휩쓸리는 처세술과는 다르다. 혀가 아니라 실천하는 삶으로 지혜를 드러낸다. 무법하고 혼란하고 뒤틀린 삶 속에서 사랑과 자유의 질서를 만들어 낸다. 지혜는 단순한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는 우리 마음에 온유함 대신 독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경쟁심(다툼)을 심는다. 그런 자들의 지혜 자랑은 진리를 가로막고 조롱하는 속임수이자 자기기만이다. 그런 말은 세우기보다 무너뜨리고, 모으기보다 흩고, 치유하기보다 상처를 낸다. 말로만 그런 지혜를 떠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요란함과 악한 일만 무성할 것이다. 으뜸 되려는 사람들만 많고 섬기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빼앗고 죽이고 넘어뜨려서라도 하나라도 더 차지하고, 일 초라도 더 빨리 오르려는 사람들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즐비한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다. 요란과 다툼을 일으키기보다 화평하게 한다. 시기하거나 고집 부리는 대신 관용하고 양순하게 대한다. 성령의 마음을 가졌으니 긍휼과 선한 열매를 한아름 맺는다. 속이고 차별하는 세상 지혜와 달리 치우침도 위선도 없이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따뜻하다. 이 지혜가 속에 가득할 때 성도의 입은 사람을 살리고 고치고 세우는 요긴한 도구가 될 것이다.
-따라서 정욕적인 욕심이 지배하는 곳에는 시기와 다툼과 갈등이 있지만, 위로부터 난 하늘 지혜를 따라 자기를 부인하는 곳에는 화평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곳에는 의의 열매가 맺힌다. 행동하는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듯이, 하늘의 지혜를 실천하는 의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의의 열매’를 거둔다.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과 화평하며 살아가도록 하늘의 지혜를 구해야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삶을 추구해야지…
-나를 알고 나와 관계 맺는 이들이 나와 함께하기에 행복하다고 느끼도록 섬겨야지… 그들은 시기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평화를 누리는” 복된 존재들임을 잊지 말아야지…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본문은 선생 됨의 위험과 혀의 영향력을 강조한다. 혀는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삶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혀를 다스릴 수 있는 이가 온전한 사람이다. 인생에 화가 될 수도 있는, 내 안에서 나오는 위험 인자인 “혀와 말”에 관한 야고보의 가르침을 들어 보자.
1. 선생 됨의 위험(1절)
야고보는 ‘선생 된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이 선생의 입장에서 신자들을 가르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야고보는 자신을 포함한 선생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기에, 신자들도 이를 알기 원한다. 특히 선생들은 말로 가르치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말실수를 할 가능성이 월등히 높다. 남을 말로 가르치는 자는 자신이 가르친 대로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도 있다. 말실수뿐 아니라 말한 대로 행하지 않는 선생의 모습은 그의 가르침을 받는 이들에게 큰 상처와 위험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야고보는 선생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많은 사람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권면한다. 선생은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도덕성을 갖추고 언행에 있어 모범이 되어야 한다. 물론 야고보는 우리 모두가 실수가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2절). 선생이라고 완전한 것은 아니다. 실수가 많은 자임을 인정하고 늘 조심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많이 할 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실수를 한다. 야고보는 그중에서 ‘말실수’에 주목한다. 무엇보다 말은 통제하기가 쉽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더 나아가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사람이라고까지 표현한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몸의 다른 부분도 능히 굴레 씌울 수 있을 것이다(2절). 그만큼 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1절은 독립된 짧은 구절처럼 여겨지지만, 혀의 영향력과 연관 지으면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가르치는 일은 결국 주로 말과 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남보다 앞서거나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것을 부러워할 때가 많다. 하지만 자칫 그 자리는 심판의 자리가 될 수 있다. 남을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은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이다(롬 2:21). 그래서 야고보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표준새번역_1절)”라고 했다.
*나는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잘하라고 가르친 숱한 것들이 심판의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그러니 선생의 자리보다 섬기는 자리, 뒤따르는 자리를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이다.
*신앙의 경험과 연수가 앞선다고 하여 함부로 지적하거나 비난하는 데 익숙해지면 곤란하다. 그 지적과 비난이 심판 날에 고스란히 나를 향해 돌아올 것이다.
*위험하다!
2. 혀의 위험성(권세, 3~8절)
3~5절은 혀의 위력을 설명한다. 혀는 신체 중 작은 부분이다. 야고보는 이 작은 혀의 위력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작은 재갈과 작은 키를 예로 든다. 재갈은 작지만 말의 입에 물리면 큰 말의 온몸을 제어하고, 큰 말을 순종하게 만든다(3절). 또 키는 작지만 큰 배를 사공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한다(4절). 야고보는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배라는 표현을 통해 배를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음을 나타낸다. 지극히 작은 키가 사공의 뜻을 전달하여, 광풍에 흔들리는 커다란 배의 방향을 정하고 배를 인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큰 것을 자랑한다(5절). 큰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재갈이 큰 말을 움직이고 키가 큰 배를 운행하듯, 혀가 비록 작지만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뜻이다. 영향력은 반드시 크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작다고 무시할 수도, 함부로 할 수도 없다. 혀는 큰 영향력이 있는데, 특히 파괴적 영향력이 대단하다. 야고보는 작은 불이 큰 숲을 태운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작은 혀의 영향력과 파괴력을 다시 한번 드러낸다. 불도 크기와 상관없이 파괴력이 크다. 이처럼 혀는 비록 작지만, 잘못 사용될 때 커다란 화를 불러올 수 있다.
야고보는 작은 것들의 위력을 나타내기 위해 고대에 흔히 사용되던 재갈, 키, 불의 예를 든다. 재갈과 키를 잘 사용하여 말과 배를 통제하듯, 혀를 잘 사용하면 의사소통의 중요한 도구가 되고 공동체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도구가 된다. 하지만 혀를 잘못 사용하면 많은 나무를 태우는 불처럼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6절은 혀의 파괴적인 위력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혀는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지체이자 가장 위험한 지체다. 큰 배가 키 하나에 좌지우지되듯이, 내 몸도 혀를 어떻게 놀리느냐에 따라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 혀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나의 인격과 삶을 결정하는 경우를 만난다. 말해 놓고 후회한 경험은 부지기수다. 이런 측면에서 혀는 ‘불의의 세계'(6절)로서 온갖 불의의 근원이 되며 불의를 드러낸다.
세상의 불의한 것들이 혀를 통해 전해지고 조성된다. 혀는 몸의 여러 지체 중에서 작은 지체이지만, 온몸을 더럽히고 죄에 빠뜨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는다. 인격 전체가 혀 위에 올려져 있는 셈이다. 주님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다(마 15:18-20). 야고보도 이와 유사하게 혀를 불로 묘사하며, 그 불이 지옥 불에서 나온다고 말한다(6절). 따라서 혀는 삶 전체, 존재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다. 삶의 과정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인생 전체를 불태울 수도 있는 혀에 대한 이 묘사는 경각심을 일깨운다.
7~8절은 이 혀를 길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창조 후에 인간에게 피조 세계를 다스리게 하셨다(창 1:28). 그래서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사람이 길들이며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혀는 인간이 길들일 수 없다고 야고보는 말한다. ‘길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통제 아래에서 의도한 대로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혀는 길들일 수 없다. 이 말은 순간순간 긴장해야 함을 암시한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 어제 혀를 잘 사용했더라도 오늘도 그러리라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8절)”
*나도 모르게 훅~ 내뱉은 말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빼고, 감추고 싶던 속마음을 드러내는 말이 튀어나왔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이란 참…. 그러니 혀의 위험을 늘 상기해야 한다.
*위험하다!
3. 혀의 이중성(9~12절)
9~10절은 혀의 이중적 사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성도는 혀를 주 아버지를 찬송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야고보는 혀를 합당하지 않게 사용하는 예로 사람을 저주하는 경우를 든다. 야고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저주의 대상으로 언급하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밝힘으로써 사람을 저주하는 일이 하나님과도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성경은 도리어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말한다(눅 6:28; 롬 12:14).
11~12절은 샘과 나무의 예를 들어 언어 사용의 이중성을 경계한다. 한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나올 수 없고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할 수는 없다. 성도는 경건하지 못한 말, 상처를 주는 농담이나 조롱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러한 글도 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도는 불신자들과 다른 언어생활을 통해 참된 경건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혀가 길들여지기란 참 어렵다. 악하고 독한 말이 습관이 되면 듣는 이는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정작 그런 말을 내뱉는 자신은 잘 모른다. 그래서 혀를 길들이기가 참 어려운가 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되레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경우도 많다. 혀를 잘못 놀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험담, 원망, 좌절시키는 부정적인 말 등이 내 혀에서 맴돌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하겠다.
*나의 혀에 익숙한 말들은 어떤 말일까? 가르치는 말보다 공감하는 말, 험담하고 원망하며 좌절시키는 말보다 격려하고 소망을 말하며 용기를 주는 말에 익숙한 혀라면 좋겠다. 무엇보다 감사하고 감사하며 또 감사하는 말에 익숙한 혀였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은 말들을 만들어 내는 혀라면 위험하다!
*위험하다!
나는?
-가르치는 자가 자신의 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다루었다. 큰 배를 움직이는 것이 작은 키이고(4절), 지극히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는 것처럼(5절), 혀는 자칫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를 수 있다(6절). 문제는 각종 짐승은 길들일 수 있어도 혀를 능숙하게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데 있다. 오죽하면 야고보는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걷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새번역_8절)”라고 했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혀의 절제와 신중한 언어 사용이 꼭 필요하다. 우리는 늘 크고 작은 실수를 하며 살지만, 말의 실수는 그 범위와 강도에 있어 나와 타인에게 유독 큰 영향을 끼치며, 따라서 큰 책임도 따른다. 내가 하는 말이 곧 나다. 하나님은 ‘말의 실수’뿐 아니라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않는 ‘삶의 모순(위선)’까지 살피시고 판단(심판)하신다. 그러므로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말과 삶이 온전하도록 더욱 깨어 있어야 한다.
-“길들이다”라는 말은 “(의지에 따라 원하는 방향과 표현대로) 제어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혀와 말’은 제어하기 힘들다. 바울은 “혀와 말”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우리 삶 속에 “성령의 열매”에 따른 변화가 있음을 분명하게 말한다(갈 5:22-23).
-나의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오는 당혹스러운 모습은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을 통해 “제어”할 수 있다. 나의 의지와 능력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말과 혀를 충분히 “제어”하신다.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하는 나의 말과 혀를 성령의 도우심에 맡겨야지… 나의 힘과 경험으로는 도무지 제어할 수 없지만,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라면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함께 나올 수 없고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올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에게 저주를 쏟아 내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 찬양이 참된 찬양일 리 없다. 내가 무슨 기도를 드리고 무슨 찬양을 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이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황, 상대방에 따라 말을 바꿀 수는 있어도, 마음의 허위는 감출 수 없고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다. 현란하고 종교적인 언어 뒤에 자신을 감추려 해서는 안 된다. 정직하고 진실한 말과 삶은 하나님 경외와 이웃 사랑의 진정한 열매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믿음과 행위… 본문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님을 단호하게 가르친다. 오죽하면 그런 행함 없는 믿음은 귀신도 가지고 있다며, 이런 헛된 믿음에서 깨어나라고 촉구한다.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신학의 오랜 주제였다. 루터는 이 본문이 이신칭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과 표면적으로 다르다는 이유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했고, 1522년 독일어 신약 번역에서는 히브리서, 유다서, 요한계시록과 함께 맨 뒤에 따로 배치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정말 다를까? 아니다. 본문의 배경은 죄 사함과 새 언약 관계를 얻는 이신칭의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새 언약 관계 안에 있는 신자들의 충실함, 곧 의로움에 관한 것이다. 특히 말씀 순종의 의무와 관계 유지에 초점이 있다. 바울의 가르침과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관계의 요소들에 대한 초점과 강조점이 다를 뿐이다.
1. 두말할 필요 없이…(14~17절)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새번역_17절)”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구원이 혈통과 율법 준수로 당연히 주어진 것이라고 여겼다. 바울은 이들의 오만한 구원관을 뒤흔드는 “이신칭의”를 전하며, 구원은 혈통이나 율법의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고 반박했다(롬 3:28; 갈 2:16). 율법의 틀에 갇힌 그들에게는 “은혜”를, 율법적인 행위에 집착하는 그들에게는 “믿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저 ‘믿음’으로 구원만 받으면 된다며, 삶에서 행위가 배제된 교리화된 믿음만 추구하게 된 것이다. 속칭 “신앙은 있는데 생활은 빠져 버린” 우스운 모습이 되었고, 균형 잡힌 신앙생활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예배는 철저하게 지키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도무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기도하면서도 그저 기도해 주는 것만으로 이웃 사랑이 충분하다고 착각한다. 언제부터인가 종교 생활이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도덕적인 삶을 대신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종교 생활을 잘하는 것을 믿음이 좋은 것으로 스스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야고보는 이런 모습에 주저 없이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새번역_16절)”
*두말할 필요 없이 믿음은 행위로 입증되어야 한다. 세상의 소금과 빛 된 존재(마 5:13-14)가 세상의 윤리 수준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라면, 지금 우리의 믿음은 죽어 있는 것이 확실하다.
*교회의 윤리 의식이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고 교회의 도덕 지수가 사회를 이끌지 못한다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스스로 착각하여 “이신칭의”에 함몰된 채 행함 없이 살아왔음을 지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아직 희망은 있다. 건강한 믿음, 곧 행함과 믿음이 균형을 이루는 순종을 지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
2. 지금 우리는…(20~26절)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라합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는지 일깨운다.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새번역_20절)”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순종한 것(21절; 창 22장)이나 라합이 정탐꾼들을 탈출시킨 행동(25절; 수 2장)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독자였지만 수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아들을 번제단으로 이끌 수 있었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음을 믿었기에(수 2:9) 정탐꾼들을 숨겨 줄 수 있었고, 자기 집 창문으로 줄을 내려 그들을 탈출시킬 수 있었다(수 2:15). 아브라함과 라합은 “믿음”이 있었기에 “행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단호하게 말한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새번역_26절)” 믿음이 있다면 행함으로 나 자신(영혼)을 살려라. 믿음이 있다면 (구제하고 섬기며 필요를 채워 주는) 행함으로 이웃을 살려라.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을 공허한 신앙고백과 공허한 기도로 돕는다는 ‘기가 막힌’ 믿음의 허울을 깨뜨리고, 작은 행동부터 시작해야지… 오죽하면 주님께서 친히 그 본을 보여 주시지 않았던가! 벳새다 들녘(눅 9:10)에서 말씀을 듣는 데 빠져 허기졌을 백성들을 그냥 보내지 않으시고,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 14:16)” 하지 않으셨던가!
*차별하지 말라(1~13절)는 말씀과 굶주린 이들을 구체적인 행위로 도우라(16절)는 말씀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행함 있는 믿음”이란 차별하고 외면하는 인간의 완악한 현실에 저항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헛된 것, 헛심 쓰는 것이다.
*행동하는 믿음이 생동하는 믿음이다.
나는?
-행함 없는 믿음은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 아무런 유익이 없다. 도리어 우리를 점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해악을 끼친다. 거짓 경건으로 자신의 참모습을 감추게 하기 때문이다. 거짓 경건은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며, 결국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참 믿음은 실천을 동반한 믿음이다. 열매로 나무를 알듯이(마 7:20) 마음의 진실은 오직 행위로만 증명된다. 숨 쉬지 않는 몸이 죽은 몸이듯, 행함 없이 지적인 동의에만 그치는 믿음은 뜬구름 잡는 것이며, 실상 아무도 살리지 못하는 죽은 믿음이다. 믿음은 언약의 조건인 토라에 신실한 것을 의미하기에, 진정한 믿음은 전인격적인 반응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행함 없는 믿음은 공허하다. 속이 텅 빈 과실과 같다. 우리의 참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실천하는 참 행실뿐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신앙고백은 귀신도 한다. 귀신은 머리와 입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며, 그 존재를 알기에 두려워 떨기까지 한다(19절). 하지만 귀신은 결코 하나님께 굴복하거나 복종하지 않는다. 그 존재 목적은 늘 하나님의 길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속이는 것뿐이다. 이렇듯 행함 없는 믿음은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헛된 믿음일 뿐이다.
-아무리 입술의 고백이 바르다 할지라도 형제를 외적 조건으로 판단하고, 내 이익의 수단으로 삼고, 약자의 고통을 외면한 채 내 배만 채우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새 언약에 따라 예수님을 왕으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께 구원의 자비를 구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악행이다(13절). 나눌 수 있는데도 나누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곤궁한 자를 도와주시기를 구하는 위선적인 기도는 아무 유익이 없다. 나 자신이 먼저 기도 응답의 통로가 되기를 구하지 않는 기도는 믿음의 기도가 아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죽은 태에서도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실 수 있음을 믿었다(롬 4:19-21). 그것이 살아 있는 믿음이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애굽을 이기시고 요단강 동편 땅을 정복하게 하셨음을 믿었고, 가나안도 정복하게 하실 것임을 믿었다(수 2:10-11). 그 믿음으로 라합은 자기 목숨을 걸고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다. 참 믿음은 목숨을 거는 믿음이고, 죽음에서 생명을 창조하실 수 있는 분에 대한 믿음이다. 자기 생명을 걸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결국 믿음이 아니다.
-이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은 그 아들마저 죽음에 넘겨주라는 요구에도 주저 없이 순종함으로써 그 믿음이 참임을 증명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수도, 가져가실 수도 있으며,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실 수도 있음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히 11:17-19).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린 ‘하나님의 벗'(23절)이었다.
-외모로 보면 라합은 아브라함과 너무나 달랐다. 여자이고, 이방인이고, 게다가 기생이었다. 하지만 라합은 눈에 보이는 거대한 성 여리고와 그 군사력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의 바로를 심판하시고 그 군대를 바다에 수장시키신 상천하지의 유일하신 참 하나님 편에 섰다(수 2:11). 옳다고 믿은 것을 실천에 옮긴, 목숨을 건 믿음이었다.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믿음에 부요한 자녀였다(5절).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1. 형제 차별과 믿음의 삶(1~4절)
본 단락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과 믿음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다룬다. 이어지는 2:14~26의 믿음과 행함 논의로 연결되는 중요한 단락이다. 새로운 주제이지만, 본문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앞부분과 연결하여 읽는 것이 좋다.
먼저 사람을 외모로 대하는 태도, 특히 가난한 자를 대하는 태도는 신자의 참 경건에 속하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1:27)과 대조된다. 또한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것은 믿지 않는 부자들(6~7절)과 다름없는 태도로, 세속에 물들지 말라는 명령(1:27)과도 어긋난다. 그리고 신자는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신 자들이며(1:18), 믿음의 형제자매들이다(1:19; 2:1).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볼 때, 본 단락은 율법의 핵심 정신과 대조되는 모습을 지적하여 새 언약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합당한 삶을 살도록 권하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저자는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새 언약 안에 들어가는 입문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자를 대하는 모습을 통해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외모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차별하지 말라는 것은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요청이다.
차별의 예는 2~4절에서 소개된다. 본문은 조건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상황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들어올 때 ‘너희’가 말로 다르게 응대하는 모습을 지적하며 시작한다(2~3절). 금반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가 들어오면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지만,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자가 들어오면 거기 서 있든지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고 말한다.
4절은 이 상황에서 주목해야 할 세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너희끼리’라는 표현을 통해 언급된 모든 사람이 신자임을 밝힌다. 둘째, ‘판단하는 자(심판자)’라는 표현은 외모로 하나님의 자녀를 차별하는 것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임을 뜻한다. 이는 이웃 사랑의 계명뿐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계명까지 어긴 것임을 시사한다. 셋째, 수사적 질문으로 독자의 대답을 유도하여, 독자 스스로 사람을 차별하고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었음을 시인하게 한다.
2. 부자와 가난한 자들에 대해(5~7절)
5절은 하나님과 가난한 자들의 관계를 언급한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그분을 경외하며, 그 아름다운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자들이다(7절). 그런데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가난한 자를 차별하여 업신여기고 수치스럽게 했다.
여기서 부자는 세상의 믿지 않는 자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들은 신자들을 억압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이며, 신자들이 귀하게 여기는 주님의 이름을 비방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야고보는 가난한 자를 차별하여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 세상의 믿지 않는 부자들의 악행에 동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하지 않은 일임을 깨닫게 한다.
3. 형제 차별과 율법 순종의 연관성(8~11절)
이 단락은 외모로 사람을 대하는 것과 믿음에 합당한 의로운 삶의 관계를 율법 순종의 차원에서 부연한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는 서로에 대한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언약의 상대인 사람을 사랑하시고 언약 관계를 신실하게 지키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의무에 충실하시다. 문제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계시한 율법을 주셨고, 사람이 그 법을 지키는 것이 언약의 의무다. 율법은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통로, 곧 가르침이다. 그래서 헬라어 번역이 ‘노모스'(법)로 옮긴 것과 달리, 히브리어로는 방향과 가르침을 뜻하는 ‘토라’라고 부른다.
율법의 핵심은 수직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신 6:5)과 수평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레 19:18)이다. 사람이 율법을 통해 주어진 이 두 가르침에 순종하면 언약 관계가 유지되며, 그 상태를 ‘의’라고 부른다(신 6:25). 그러므로 믿음에 합당한 의로운 삶은 율법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다.
그렇다면 외모로 사람을 대하는 것과 율법에 순종하는 의로운 삶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야고보는 8~9절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외모로 사람을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며, 율법이 그를 범법자로 정죄한다. 가난한 자에 대한 차별은 단순히 사회적 관습의 문제가 아니다. 언약 백성이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냐의 문제, 곧 순종의 문제다. 차별은 언약의 의무를 저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행위이며,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그 행위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어서 야고보는 10~11절에서 설명을 더한다.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하나에 걸려 넘어지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간음과 살인을 모두 금하셨기에(출 20:13~14), 간음하지 않았더라도 살인을 했다면 율법을 범한 것이다. 당연한 논리다. 율법은 전체로서 통일성을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신자의 삶에 통일성과 일관성을 기대하시기 때문이다.
참된 경건과 의로움이 마음과, 그 마음을 표현하는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듯이(1:26~27), 율법의 두 가지 핵심 정신도 신자의 마음과 모든 행위에 담겨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람을 외모로 대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의 삶에 전혀 합당하지 않다.
4. 결론적 명령(12~13절)
야고보는 ‘그러므로’ 자유의 율법으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하고 행하라고 명령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지만,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
신자에게는 율법이 필요 없고 심판도 없을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종종 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를 믿는 자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킨 것은 맞지만(갈 3:13; 롬 8:3),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율법의 기능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어 언약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므로 새 언약에서도 유효하다(롬 13:8~10). 또한 율법의 핵심 정신은 모든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므로 신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벧전 1:17). 이런 상황에서 사람을 외모로 대하는 것은 긍휼을 행하지 않는 것이며 율법의 정신에 위배된다. 당연히 그에 대한 평가가 있을 것이다. 반대로 긍휼을 베풀면 심판을 이기게 될 것이다.
결국 야고보의 결론은 세 가지다. 첫째, 율법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로운 삶을 살라. 둘째, 믿음의 고백과 일치하는 행위로 의로움을 드러내라. 셋째, 가난한 자를 외모로 대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나는?
-바울이 서신에서 이방 교회 성도들에게 강조한 ‘이신칭의’는 초대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구원을 얻는 데 어떤 행위도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오해하여 ‘믿음 안에서 마땅히 드러나야 할 변화된 행위’를 가볍게 여기는 이들에게 야고보서는 좋은 균형을 제공한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임을 강조하며, 믿음은 반드시 삶의 행함으로 드러나야 함을 일깨운다.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1절)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차별하지 않는 행동을 하나로 묶는다. 이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강조한 구약(신 10:17~19)과 바울의 가르침(롬 2:10~11)과도 통한다. 외모를 보고 차별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임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다. 야고보는 왜 이렇게 했을까?
-당시 초대교회 안에 차별이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주님을 예배하러 모이는 자리에서, 성도들을 맞이하는 이들에게서 공공연히 드러났다(2~4절). 이에 야고보는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택하여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신 분이심을 분명히 가르친다(5절). 그리고 외모를 보고 우대하던 부자들의 악행을 고발한다(6~7절). 이어서 교회 안에서 회복해야 할 ‘이웃 사랑’을 ‘차별하지 말라’는 명령에 구체적으로 순종함으로 실천하라고 요청한다. 이토록 거듭 강조하는 이유는 결국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심판대 앞에서 ‘차별 없는 긍휼과 사랑의 법(율법)’을 잘 지켜 심판을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긍휼의 삶에 순종하며 살아온 이들에게 심판을 이기게 하신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이라는 최고의 율법을 구체적으로 지키는 일은 공동체 안의 ‘차별’을 없애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람이 가진 외적인 조건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의적인 기준으로 사랑할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을 임의로 나누는 악한 태도다. 그런 태도는 형제 사랑이 아니며, 하나님이 나를 대하시는 방식도 아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는지 보라. 세상에서 가난한 자인가, 부한 자인가? 하나님의 기준은 돈인가, 사랑인가?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으셨다. 그런데 신자가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 주님의 이름을 비방하는 자를 두둔한다면, 그것은 차별 없는 사랑을 받은 자의 도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은 이웃 사랑을 최고의 법으로 여긴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한다면, 그는 율법을 범하는 범법자가 된다. 다른 모든 법을 잘 지키더라도 이웃을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하면 율법 전체를 어긴 자가 된다.
-심판받을 때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율법’이다. 내 자유만 주장하며 긍휼 없이 냉정하게 타인을 대하는 자에게 돌아갈 긍휼은 없다. 이기적인 우리가 심판을 이기고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은 긍휼 어린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세상 속에서 ‘다름’으로 살아야 한다. 세상 속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지 않고 세상과 똑같은 가치와 자세, 말과 행동을 따른다면 어찌 하나님 나라 백성답다 할 수 있겠는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다름’으로 사는 것은 크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웃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는 데서부터가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외모로 차별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신분과 계급의 구별이 당연했던 그 시대에 이런 모습은 분명 ‘다름’이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세상 속에서 이런 ‘다름’을 살아내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련다. 차별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련다. 외모에 치중하지 않도록 정욕을 다스리련다. 내 기준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차별부터 고쳐 보련다. 영적인 수준의 차이를 견디지 못하는 ‘다름’이 아니라, 그 차이를 신앙이 살아 있다는 생명력으로 바라보는 ‘다름’으로 살아 보련다. 살아 있으니 차이가 있고, 살아 있으니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련다.
-하나님 나라와 다른 이 세상에서, 세상의 방식과 ‘다름’으로 살아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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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불리 화를 내지 말고,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 심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받아 그 말씀을 따라 실천할 때 시험을 이길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혀를 다스리고 진실하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기를 지키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다운 경건한 삶은 어떤 삶일까?
1. 노하기도 더디 하라(19-21절)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표새_19절)” 경건하게 살려면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먼저 해야 한다. 성급하게 말하기보다 충분히 듣고 말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당부하는 것이 “노하기도(개역_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것이다. ‘더디 한다(브라뒤스)’는 ‘반응이 느리다’는 뜻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경건하지 않은 사람은 말하기는 빨리(많이) 하고, 듣기는 더디 하며, 노하기는 빨리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복음(말씀)에는 반응이 빠르고, 노하는 데에는 반응이 느리다. 이 말은 노하는 것에 더디 반응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의 복음(말씀)에 확실히 반응하며 그 말씀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야고보는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사람의 성냄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표새_20절)” 아무리 정당해 보이는 분노라도 사람의 성냄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을까? “그러므로 온갖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버리고,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표새_21절)” 성냄의 자리를 비우고, 이미 우리 안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이 우리를 살리고 다스린다.
*노하기를 더디 하라는 것은 화를 참으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바탕에 말씀(복음)에 먼저 반응하는 태도가 있음을 보여준다. 말씀에 빨리 반응하는 성도는 노할 만한 상황 속에서도 말씀을 찾고 말씀으로 분노를 이겨내려고 노력하기에, 분노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자신이 붙드는 말씀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내 마음이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에 가장 먼저 반응하여, 그 말씀 때문에 밀려오는 노기에는 더디 반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말씀은 질풍처럼 밀려오는 노기를 제어하는 훌륭한 브레이크다!
*결정해야 할 무언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 요동친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에 더 맞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왜 그랬을까 안타까워 마음이 끓는다. 아! 무엇이 말씀의 뜻에 더 맞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성령께서 속히 깨닫게(들리게) 해 주시기를 구할 뿐이다.
2. 말씀을 행하라(22-25절)
그렇다면 말씀(듣기)에 빨리 반응한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킬까? 이는 행함과 관련이 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표새_22절)” ‘행하는 자(포이에타이)’는 ‘만드는 자, 실행하는 자’라는 뜻이다. 말씀을 행한다는 것은 손과 발로 직접 움직이는 것이다. 말씀 듣는 것에 빨리 반응한다는 것은 듣고 나서 손과 발로 직접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경건은 말씀으로 손과 발이 움직이는 것이다.
야고보는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일깨우며, 이는 마치 거울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기만 하고 자기 모습을 곧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고(23-24절) 말한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진정으로 들여다보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행(실천)하는 자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25절).
“말씀을 행하는 것”은 경건한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한 것이다.
*말씀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에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나 자신에게도 그렇고, 공동체에 대해서도 그렇다… 상황을 살피고 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자칫 합리화할 수 있고, 세워져야 할 말씀의 뜻이 상황의 안타까움으로 포장될 수 있다…
3. 세속에 물들지 마라(26-27절)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은 먼저 ‘혀’를 다스리며 ‘마음’을 진실하게 가꾸는 것이다. ‘마음’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감동을 주시고 결정하게 하신 일에 순종하는 행동이 경건이다. 경건은 의식에 얽매여 절차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다. 성전과 회당 안에서 입술로만 부르짖는 외적인 형태도 아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경건, 곧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아 주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다(27절). “세속(코스모스)”은 흔히 세상이나 우주를 나타내지만, 본문에서는 신앙적이고 거룩한 것의 반대 개념임이 틀림없다. 곧 세상적이고 육신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고아와 과부(약자들)를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의무였다. 말씀의 뜻을 행하는 일은 섬김과 나눔, 희생을 수반한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고집스럽게 홀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더 간절히 필요한 이들에게 선선히 흘려보내는 것은, 구원의 은혜를 거저 받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 그리고 전하는 과정에서의 대가 없는 섬김과 나눔은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의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소소한 것들이다. 하늘의 큰 은혜를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말씀의 지식이 삶을 움직이는 힘이 되어, 도움 없이는 제대로 설 수 없는 그들을 위해 기꺼이 말씀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섬기는 삶이 곧 경건이다.
나는?
*믿음의 사람은 속히 듣고 더디 말하도록 힘써야 한다. 지혜 없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든 사람과의 관계에서든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려고 한다. 너무 속단하며,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급히 화를 낸다. 그는 하나님보다 더 똑똑한 사람인 듯 행세하는 오만한 사람이며,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른다. 그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의는 없다. 그는 시험에 빠진 사람이다.
*야고보는 당시의 격언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뜻을 살피기 전에 성급히 시련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탓하고 성내는 것은 그 시련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의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했다. 내게 닥친 시련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조급하고 성급하게 내가 그 의미를 정하려 하지 말고, 그 의미가 드러날 때까지 말씀에서 귀를 떼지 말아야 한다.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아야 한다.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말씀이 온전히 들리려면 내 마음속에 있는 더럽고 추악한 동기와 목적을 걷어내야 한다. 세속적인 영향을 점검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를 낳으실(구원하실) 때 심어두신 진리의 말씀(1:18)을 삶 속에 적용해야 한다. 그때 필요한 태도가 지독한 자기중심성을 벗은 ‘온유함’이다. 이것이 시험을 이기는 지혜다.
*말씀을 순전하게 받으려면 버려야 할 것과 준비할 것이 있다.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은 버리고, 온유한 마음 밭을 준비해야 한다. 그때 우리 영혼을 구원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그분의 뜻이 깨달아지며, 경솔하게 하나님께 성내지 않을 수 있다. 말씀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어수선해서 어렵게 들리는 것이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가난한 마음, 간절하고 곡진한 마음이면 말씀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깊고 풍성한 의미를 보여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말씀을 정보로만 소유하지 말고 그 말씀이 나를 새롭게 빚어 가도록 허용해야 한다. 그 말씀이 가리키는 대로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욕망을 재조정하고,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을 따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어져 간다.
*말씀을 실천하는 삶은 물질로 사람을 평가하려는 유혹을 이길 수 있다. 삶은 없으면서 오만하게 자기 경건을 말로 자랑하려는 유혹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실천적으로 돌봄으로써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세속 문화를 거스르며 사는 것이다. 말로 치장하여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말씀은 죽은 정보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격적인 말씀이기에, 청종과 순종과 실천으로 그 말씀에 참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의 참뜻과 의도를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실천하지 않고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은 말씀의 내용일 뿐,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아닐 때가 많다. 토를 달지 않고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할 때 진리가 주는 자유가 찾아오며, 주님께서 동행하시는 복이 하는 일마다 임할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참된 묵상은 머리와 마음의 묵상에서 더 나아가 손과 발의 묵상, 곧 전인격적인 묵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에 순종한 결과가 경건이다. 경건은 자신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평가하신다. 그것은 절제된 말과 약자를 돌보는 실천적인 섬김과 세속에 물들지 않는 거룩한 삶을 통해 드러난다. 저자는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인 행위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율법을 알고 고백하는 것보다 시험당한(환난 중에 있는)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율법을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며, 말보다 삶을 앞세우는 것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정결하고 더러움 없는 경건이다.
*본문을 크게 나누어 묵상하면 “들음”과 “행함”이다. 말씀을 들었다면 말씀이 가리키는 것을 행하여야 한다. 특히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이에 대하여 23절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표새_23절)”라고 했다. 거울을 보고서도 자기 모습을 정비하지 않는 사람, 거울을 왜 보는지 모르는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말씀을 왜 들을까?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듣는 것이다. 말씀의 거울이 내 삶에서 고쳐야 할 매무새를 보여주면 털어내고, 가지런히 하고, 단정하게 정비하면 된다. 거울을 보기만 하고 말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나를 비춰 보며 말씀의 뜻을 따라 그렇게 행하면 될 일이다.
*말씀이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보여주면 닦으면 되고,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음을 보여주면 단정하게 고쳐 입으면 된다. 그런데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배우면서도 말씀이 보여주는 것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그저 거울만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체 거울은 왜 보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말씀을 귀로 듣고 입으로 잘 시인하는데도(소위 ‘아멘, 아멘’은 잘 하는데…)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지식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행함으로는 도무지 제자리걸음에 머물러 있는 경우 말이다.
*신앙(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구체화되는 것, 그것이 곧 참된 경건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삶 속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 그것이 경건이다.
*미가 선지자의 외침이 생각난다.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너 이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새번역_미가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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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야고보 뿐 아니라 베드로도 주님의 이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라(벧전 3:14)” 야고보나 베드로나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들의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동일한 말씀으로 “여러 가지 시험”속에 있는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변화를 낳고 변화된 이들이 또 다른 이들을 말씀으로 권면하고 있다. 말씀이 사람을 변화 시키고, 세상을 변화 시킨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이 이렇게 변화 된 것은 아니었다.
1. 오해….(12-15절)
야고보서가 기록될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유례없는 가뭄과 기근이 지속되고 있었다. 오죽하면 바울도 기근과 박해의 위험에 처해 있는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 복음이 전해져 세워진 교회들마다 구제 헌금을 요청하고 있었다.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은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 주변으로 흩어진 유대인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의 삶의 곤고함, 궁핍함은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가뭄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치열한 몸부림이 계속 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부한 자들에게 대한 부러움과 부자가 되려는 갈망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9-11절의 부에 대한 자랑을 하지 말라는 권면은 이런 배경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야고보는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새번역_12절)”이라고 먼저 격려하고 본문을 이어간다.
*시험은 생명의 면류관을 주기 위해 허락된 것인데, ‘여러 가지 시험’에 처해 있는 이들 가운데 ‘우리를 죽이려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헛된 마음을 품는 이들이 있었다.
*오죽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한편으로 당시 세상이 섬기던 우상들은 하나같이 엄격하고 무서운 신으로 여기고 이런 신들의 노여움을 푸는 것을 신앙행위임을 강조하였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하나님도 노여움에 시험을 주는 것이라는 오해를 쉽게 할 수 있었다. “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 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새번역_13절)”
*가뭄과 기근이라는 자연현상에다, 당시 종교문화의 인식이 더해져 “하나님도 세상 신과 다름 없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여긴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발현이 가뭄과 기근이며, 여기에 “여러 가지 시험”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나라도 이런 유혹이 없을까….얼마나 힘들었으면….
*야고보는 이런 왜곡된 하나님에 대한 시선을 먼저 바로 잡는다. 외부적인 삶의 환경이 악화 되는 상황이 지속되면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나올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바른 지식이 없어서라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르친다. “하나님은 악에게도, 악으로 시험받거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시험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성도가 시험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새번역_14절)”라고 말한다. “욕심”은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다. 어떤 학자들은 욕심을 일종의 “자기애(自己愛)”라고 했다. 자기 욕심대로 되지 않음을 하나님께서 시험 주신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야고보의 권면은 더 직접적이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새번역_15절)” 욕심을 분별하지 못하고 죄에 이르면 죄로 인해 죽는다는 것이다.
2. 속지 말라(16-18절)
자기애, 욕심에 이끌리면 하나님을 얼마든지 오해하고 그것 때문에 시험(temptation_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 ”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새번역_17절)” 이 말씀을 믿어야 한다. 예레미야는 절망적인 예루살렘의 패망을 선포하면서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하나님은 평안과 미래, 희망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오고 오는 세대에 펼치시려고 분명한 증거를 보여 주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죄로 인해 영원한 형벌의 저주 아래 있는 인생들을 구원하시려 오신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를 (구원자로) 믿기만 하면” 사망, 저주, 고통이 아닌 생명, 평안의 자리로 옮겨 주신다. 지금 야고보의 편지를 받고 있는 성도들이 증거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성도들이 살아가는 지역, 환경, 상황등에 의해 누릴 때와 누리지 못하는 때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분명히 말한다. “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새번역_18절)”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의와 평강과 미래와 희망을 주신 것이다.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구원하여 주셨다. 그런데 이 구원의 은혜가 어찌 자연현상이나,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을까?
나는?
-믿음은 “견디는 것”이다. 또한 믿음은 삶과 나뉠 수 없어서 믿음이 곧 삶이고, 삶이 곧 믿음이다. 삶이 믿음이라 할 때 그 삶은 신실한 삶, 견디는 삶을 뜻한다. 믿음이 견디는 믿음인 것처럼 인생도 견디는 인생이다. 교회를 오래 다니다 보면 교회도 역시 견디는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사역을 맡든,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견디는 힘’이다. 일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일 자체로도 지치고 때로는 사람 때문에 지치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는 그 자체로 견디는 교회다. 견디는 믿음이 이기는 믿음이 된다(약 1:12).
-또한 믿음은 시험받는 일이다. 시험이 견딤으로 통과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 면류관을 준비해 두신다. 그런데 시험이 다 하나님께로 난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시험이 ‘자기/나’로부터 온다. 나로부터 난 시험은 욕심의 시험이다. 욕심은 함정이고 수렁이다. 빠지면 헤어나오기 어렵다. 욕심의 수렁이다. 자기가 수렁을 만들고 그 수렁에 자기가 빠진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왜 나를 시험하느냐고 따져 묻는다. 하나님의 시험은 수렁이 아니다. 샘물과 같아서 견디는 자들을 살아나게 하는 시험이다. 욕심의 시험은 견딜 수가 없다. 견딜 힘이 없다. 견뎌도 면류관이 없다. 외려 죄를 낳고 결국 사망에 이른다.
-끝까지 시험을 참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복이 주어진다. 그것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서(4절) 주와 교제하며 영생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모든 시험은 사랑의 시험이다. 시험을 참게 하는 힘은 사랑에서 나오며, 동시에 시험을 참았을 때 형성되는 성품이 사랑이다.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가능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시험에서 승리하는 비결이라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욕심이 시험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다. 그는 심지어 하나님이 악에게 시험을 받아 자신을 유혹한 것이라고 핑계하겠지만, 실상은 자기 욕심의 노예가 되어 죄를 짓고,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여 결국 제 발로 사망에 이르는 길을 간 것이다. 자기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 밖에서 이유와 핑계거리를 찾으려는 시도는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을 만날 때 찾아가 지혜를 구할 분이다. 그에게 핑계할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을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 하늘에 속한 은사와 선물을 지금도 공급하고 계신다. 어둠에서 빛을 이끌어주시는 분이다. 상황과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그 은혜와 보살핌으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신 분이 어찌 우리를 유혹하여 악에 빠지게 하겠는가?
-시험(test)은 내게 주신 믿음으로 인내하며 이기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욕심이 반응하는 시험(temptation)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temptation)을 이기신 주님의 방법으로 이겨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이었다(마 4:1-11). 말씀으로 시험(temptation)을 이길 수 있다.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오해하며 스스로 시험에 든다. 지나고 보면 나의 욕심 때문에 일어난 서운함의 마음이었다. 그러니 시험(temptation)은 깨어 있어 분별하여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요즘 나의 욕심과 하나님의 마음 사이에 갈등이 내 마음에 있다. 여러 상황 속에서 나의 욕심대로 되어지지 않음에서 오는 서운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내게 은혜가 된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새번역_17절)”
-온갖 좋은, 완전한 선물을 주시는 빛의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그 빛을 비추어 주실 것을 갈망한다. 변함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믿기에 눈 앞으로 다가온 일들이 어두움이 아니라 빛 안에 있음을 믿음으로 선포한다.
-과정과 순간에 따라 마음이 좌불안석하는 나의 연약하기 그지 없는 마음이 주님의 변함없는 빛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은혜가 된다. 감사가 된다.
-앞으로 나에게 올 시험이 temptation(유혹)이 되지 않고 검증(test)이 되도록 “욕심”을 버려야 한다. “자기애”를 버려야 한다. 쑤욱 쑤욱 올라오는 욕심과 자기애의 싹들을 늘 벌초 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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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8일 주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합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백성답게 빚어주는 거룩한 습관이기도
2026년 10월 11일 주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합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백성답게 빚어주는 거룩한 습관이기도
2026년 10월 4일 주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합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백성답게 빚어주는 거룩한 습관이기도



더온누리교회 전임 및 파트 교역자 청빙 공고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갈 동역자를 기다립니다. 전주 더온누리교회(www.theonnuri.org)에서 함께
#더온누리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은혜를 함께 나눠요. instagram에서 "#더온누리교회"를 태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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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로운 금요일 | 10월 16일 금요예배 다시보기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 평범한 일상의 자리에도 찾아오시는 예수님. 우리가 서 있는 그곳이 주님을 만나는 예배의 자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과 말씀 가운데 나누었던 은혜를 다시 묵상하며, 우리의 삶에서도 주님의 더 큰 일을 기대합니다. 📖 창세기 28:12 · 요한복음 1:43~51 🎙 말씀 | 김지훈 목사 #향기로운금요일 #향기로운제물 #금요예배 #예배다시보기 #더온누리교회 레위의장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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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8일 더원함공동체 주일 4부 예배 ✨ 복합위기의 시대, 어떻게 살까? - 김형국 목사님 기도 : 조수민 리더 🎂 블레싱 생일 : 18일 박기원 20일 김세영, 최윤지 21일 박서진,이동혁,김용균 22일 강민지 결혼 : 서은택&박지명 10/24(토) 오전10:30분 더웨스턴헤라컨벤션 로얄그레이스가든홀 임채항&이승주 10/24(토) 오후1:10분 남원 참조은 웨딩컨벤션 2층 펠리체홀 🎉 광고 [더함 공동체 가을야외예배 안내] 일시: 2026.10.25(주일) 오후 3시 장소: 점점더(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중앙반길 13) 함께 모여 예배하고 가을의 기쁨을 나누는 따뜻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해요! [더함 성탄 데코TF모집안내]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함께 성탄의 공간을 꾸밀 공동체원을 모집합니다. 꾸미기와 장식 좋아하시는분,아이디어를 나누며 함께 하고싶은분,작은 손길로 기쁨을 더하고 싶은분,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함께 성탄의 기쁨을 만들어가보실까요? 문의 및 신청: 디렉터 [더말씀으로 가을 사경회] 오늘부터 수요일까지 김형국 목사 (하나복 대표)가 ”복합 위기의 시대, 어떻게 살까?“라는 주제로 요엘서를 강해합니다.김형국목사님이사역하신 요엘서 본문을 교회홈페이지와 교회앱을 통해 묵상하실 수 있습니다 사경회 전에 미리 묵상해보기를 권면드립니다. [LOVE is ONE 콘서트] 월드비전과 더온누리교회에서 함께 주관하는 ’조혜련의 LOVE is ONE 콘서트‘ 10월 23일(금) 저녁 8시에 더온누리 교회에서 열립니다. 여니엘, 리노, 이지훈, 폴송 사역자께서 함께 참여합니다. QR코드를 통해 참여신청을 해주시기바랍니다 [단기선교 신청] 2027년 2월에 캄보디아 깜퐁스프와 깜퐁츠낭(스쿤 포함)을 차례로 방문해 의료·미용·어린이 사역으로 섬깁니다. 현지 교회가 세워지고 공동체가 자라는 데 도움이 되는 선교를 목표로 합니다. 신청기간은 11월 30일 까지입니다. 큐알코드를 이용해서 신청해주세요. 일정 – 전일정 참가: 2/3(수) 출발~2/10(수) 귀국, 목요일 도착 – 1진(깜퐁스프): 2/3(수) 출발~2/8(월) 귀국, 화요일 도착 – 2진: 2/6(토) 출발~2/10(수) 귀국, 목요일 도착 – 안과팀: 2/4(목) 출발~2/8(월) 귀국, 화요일 도착 문의 – 이홍기 목사 [세례 신청] 11월 1일 주일에 세례식이 있습니다. 아래의 문답 교육 시간에 꼭 참석 바랍니다. 신청은 3층 로비에서 신청서를 작성하여 신청해주세요. [청장년 : 세례 / 입교 / 학습] 1회차 – 10/22(목) 저녁 7시 30분 2회차 – 10/29(목) 저녁 7시 30분 [청소년 : 세례 / 입교 / 학습] 1회차 – 10/24(토) 오후 3시 2회차 – 10/31(토) 오후 3시 [유아 세례] 교육 – 10/31(토) 오후 3시 * 문답식은 10월 31일(토) 오후 5시부터 세례식 참석자를 대상으로 진행됩니다 [선교사 선물보내기] 연말 성탄절에 맞춰서 우리공동체가 동역하는 25개국 54명의 선교사와 현지교역자들에게 선물을 보내려고 합니다. 함께 동참해주시겠어요? 보내드리고싶은용품(유통기한이충분한)이나 물질을 모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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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윌센터 도즈문화교실. 사진반 수업중. photo by April . . . #굿윌센터 #더온누리교회 #사진반 #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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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10월 18일 더원함공동체 예배풍경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괜찮은가? [요엘 1:1-20] 더원의 모든 형제자매 여러분! 이번주 기도모임은 쉬어가며, 대신 말씀 사경회 3일차의 자리로 함께 모입니다~! 시간 : 저녁 7시 20분 장소 : 3층 레위의 장막 사경회를 마친 후 김형국 목사님과 더원함공동체 전체 모임이 사무엘의소리에서 진행되오니, 마음과 시간을 내어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이따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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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로운 금요일 | 10월 16일 금요예배 다시보기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 평범한 일상의 자리에도 찾아오시는 예수님. 우리가 서 있는 그곳이 주님을 만나는 예배의 자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과 말씀 가운데 나누었던 은혜를 다시 묵상하며, 우리의 삶에서도 주님의 더 큰 일을 기대합니다. 📖 창세기 28:12 · 요한복음 1:43~51 🎙 말씀 | 김지훈 목사 #향기로운금요일 #향기로운제물 #금요예배 #예배다시보기 #더온누리교회 #레위의장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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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금요일은 월드비전 주관 특별 찬양 콘서트로 함께합니다! 🎶 조혜련의 LOVE IS ONE CONCERT 조혜련, 여니엘, 이지훈, 드러머 리노, 폴송과 함께하는 특별한 찬양의 밤! 찬양으로 하나 되고, 음악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은혜로운 시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10월 23일(금) 오후 7시 30분 📍 더온누리교회 (전주시 만성동로 84-9) ⏰ 이번 주에 한해 오후 7시 30분에 시작합니다! 평소 금요예배보다 30분 일찍 시작하니 꼭 확인해 주세요. 📝 참가 신청 아래 링크를 통해 신청해 주세요.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eEJ5J15lsW9vyeGiNrBYL6JCginHmWP2WZIsY64-Ktz4ElZQ/viewform 함께 찬양하고 사랑을 나누는 금요일 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 #향기로운금요일 #향기로운제물 #월드비전 #LOVEISONE #조혜련 #찬양콘서트 #더온누리교회 #금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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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9일 향기로운금요일 예배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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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9일 향기로운금요일 예배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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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입교·학습 신청 안내 믿음의 고백을 준비하는 시간. 11월 1일(주일), 더온누리교회에서 세례식이 있습니다. 세례·입교·학습을 준비하시는 분들은 3층 로비에서 신청서를 작성해 주시고, 해당 문답 교육 일정에 꼭 참석해 주세요. 🤍 📖 문답 교육 안내 ▪️ 청장년 | 세례·입교·학습 1회차: 10월 22일(목) 저녁 7시 30분 2회차: 10월 29일(목) 저녁 7시 30분 ▪️ 청소년 | 세례·입교·학습 1회차: 10월 24일(토) 오후 3시 2회차: 10월 31일(토) 오후 3시 ▪️ 유아 세례 교육 10월 31일(토) 오후 3시 🕊 문답식 10월 31일(토) 오후 5시부터 세례식 참석자를 대상으로 진행됩니다. 📅 세례식: 2026년 11월 1일(주일) 📝 신청: 교회 3층 로비에서 신청서 작성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의 고백을 함께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더온누리교회 #세례신청 #세례식 #입교 #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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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워십데이 찬양집회 RE:WORSHIP DAY 다시, 예배의 자리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향하는 시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10월 25일 주일 3부 예배는 리워십 찬양팀과 김지혜 전도사님이 함께하는 찬양집회로 드립니다. 함께 마음을 모아 찬양하고, 말씀과 간증을 통해 은혜를 나누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 📅 2026년 10월 25일(주일) 🕧 낮 12시 30분 · 주일 3부 예배 📍 더온누리교회 🎙 찬양 인도·간증: 김지혜 전도사 (현 힐스워십팀 예배인도자) 🎶 리워십 찬양팀과 함께 소중한 분들과 함께 오셔서 하나님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시길 바랍니다. #더온누리교회 #리워십데이 #김지혜전도사 #찬양집회 #다시예배의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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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비기닝 선교학교 2주차. 더온누리교회의 단기선교 - 김종홍 목사. . . . #더온누리교회 #더비기닝선교학교 #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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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10월 11일 더원공동체 예배풍경입니다! 망하는 지름길, 팀킬 [사사기 20:19-28] #더원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청년부 #더원공동체 #전주청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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