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야곱의 예언은 “결정된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종 선고’가 아니다. 아들들의 삶을 기반으로 ‘중간 결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예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하여 미래를 변화 시키라”는 의미일 것이다.
가장 불편한 것은 감추고 싶었던 것을 들추어 낼 때다. 좋은 일이었다면 ‘영광’을 누리지만, 범죄의 기억을 들추어 내는 것은 ‘수치’이다. 그런데 야곱은 아들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 각각 출생 순서로 이 과거의 일을 들추어 낸다. 형제들끼리는 서로 불문율처럼 감추었던 그 “죄”를 들추어 낸다. 자신들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이 드러날 때 분명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그 시간이 없으면 오히려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고 오만해 져서 뻔뻔스러운 교만이 그 삶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혹은 해결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스스로 자학하거나 파탄에 빠지게 될 것이다. 죄는 결코 선한 영향력을 낳지 않는다.
1. 르우벤(3-4절)
야곱에게 르우벤은 힘과 정력의 첫 열매였다. 이로 인해 그 영예가 드높고, 힘이 드셌다(새번역_3절). 하지만 르우벤은 이 힘과 영예를 스스로 더럽혔다. 꺽었다. “거친 파도와 같은 그의 힘은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는 죄를 범하므로” 으뜸 되지 못할 것이다(새번역_4절)”고 예언한다.
르우벤은 통제 되지 못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탁월한 힘과 능력이 있었을 지라도 이를 통제하지 못하면 소용없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통간했다(창 35:22). 이것은 아버지를 이미 죽은 자로 보는 중대한 범죄였다. 연약한 아버지의 권위를 짖뭉겨서 자신의 힘을 과시한 죄였다. 이로 인해 르우벤은 장자의 권리를 잃게 된다.
이 부분은 이미 요셉을 팔아 넘기는 장면에서 형제들에게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모습과 요셉을 다시 만나는 과정에서 역시 야곱의 신임을 받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났다. 이 후 그의 후손에게서 어떤 예언자, 사사, 제사장, 혹은 왕이 나오지 못한다.
당연하게 주어지는 권위는 없다. 출생한 순서가 첫째여서 당연하게 장자의 권리와 권위를 성취할 수 없다. 특히나 르우벤의 경우를 통해 그렇게라도 주어진 권위를 “정욕”을 위해 남용할 때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억하시고 거두어 가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야곱이 아들들을 모아 놓고 첫째 르우벤에게 하는 말이지만, 모든 형제들이 새겨 들어야 할 말이었다.
2. 시므온과 레위(5~7절)
이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미래를 예언한다. 역시 그들의 과거의 삶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다.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를 강간한 세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할례”를 도용하였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징표를 행하는 틈을 타 살육한 것이다.
이것은 맹렬한 분노를 제어하지 못한 결과였다. 분노의 노예가 되어 세겜 사람들을 살육하고, 그들의 소의 힘줄을 끊어 버렸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 살육이 아버지 야곱의 뜻과 상관 없이 자신들의 “분노대로” 행하였다는 점이다. 선을 넘어버린 분노와 폭력은 그 댓가를 받을 것이다. 세겜에서 의기투합했던(단짝 형제_새번역_5절) 시므온과 레위는 이제 더 이상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민수기 25장의 바알브올 사건 때 레위의 후손 비느하스가 시므온 지파 지도자를 처형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분배 받을 때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영역 내에 더부살이 하는 방식으로 땅을 할당 받는다(수 9장). 이후 남북으로 이스라엘 분리될 때 북 이스라엘로 흡수되어 흩어지게 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신명기 33장의 모세의 유언에 시므온 지파는 아예 거론 되지 않는다. 레위 자손은 땅을 분배 받지 못하고 대신 48개 도성을 받는다. 하지만 시내산 금송아지 사건의 주동자를 주도적으로 처단한 공로로 성소의 직무를 맡는 지파가 된다.
분노의 노예가 된 댓가는 참혹했다.
3. 유다(8~12절)
요셉의 시험으로 야곱 가족의 시험 때, 자기 희생을 자처한 유다는 형제들 가운데 가장 강한 자가 될 것이다. 사자처럼 용맹하여 원수를 이기고, 왕이 되어 다스릴 것이다. 장자의 축복은 요셉이 받았으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룰 메시아가 유다 지파를 통해 나게 하신다.
유다의 후손 다윗 왕이 이를 성취 하였고,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
이 부분에서 역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난다. 야곱이 사랑한 라헬이 아니라, 야곱이 외면한 레아와의 후손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신다. 오직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루어 가신 것이다. 전통, 관습은 허락하셨으나 이에 얽매이지 않으신다. 오직 스스로 결정하시고 야곱이 생각한 후손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후손을 통해 이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
4. 스불론, 잇사갈(13~15절)
스불론(13절)에 대한 ‘축복’은 그의 정착 지역과 관련된다. 스불론은 단과 아셀과 함께 해양적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세 지파 중 하나로 분류된다. 하지만 스불론은 13절의 언급처럼 지중해를 점령했다거나 시돈(페니키아를 가리키는 상징어)을 차지하지 못한다. 스불론 지파는 본래 베들레헴 주변의 당을 분배받았지만 후에 시도 가까이에 있는 북쪽 바닷가로 옮겨 정착한 정황을 보여주는 말이 된다(수 19:10~15). 본문은 스불론 지파에 대한 저주나 심판이 아니라 스불론 지파가 차지하게 될 땅에 대한 약속과 찬양이다.
잇사갈(14~15절)은 본래 산악 내륙지역에 거주하였으나(삿 10:11), 이후 서쪽 평지로 옮겨간 것으로로 보인다. 그런데 이 이주는 패착이 되고 만다.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하고 가나안인들의 지배를 받으며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나귀처럼 쉬기를 좋아하고 땅을 보고 땅을 차지하려 하나 결국 압제를 받아 남을 섬기는 신세가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나는?
-야곱의 예언은 아들들이 살아온 삶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의 행위가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 행위가 어찌 돼었든 현재의 상태(17년동안 함께 모여 살고 있는)가 야곱의 판단 기준이 아니었다. 야곱이 아들들을 바라보고 그들이 행하였던 행동들을 기억하여 말한 것이다. 그 당시 아들들이 행한 일들에 대하여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을 지라도 생을 마감하면서 그 일들에 대해 정확하게 소환한다. 이 일들은 아들들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근심이었다.
-장자 르우벤은 병든 아버지를 대놓고 무시하고 빌하를 범하므로 스스로 장자권을 세우려 했다. 하나님께서 이어받게 하실 것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아직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은 자처럼 여겼다. 그 오만한 강함이 결국 후손들을 약하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오늘의 힘을 대놓고 휘둘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하신다. 받은 은혜, 누리는 힘이 크고 강할 수록 더욱 이 은혜와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행하여야 한다. 힘은 과시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시므온과 레위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할례’라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결’의 예식을 통해, 특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인다는 그 형식을 발판 삼아 분노를 폭발시켰다는 것은 역시 시므온과 레위에게 살아오면서 늘 악몽에 시달리게 하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 기막힌 폭력의 댓가를 후손들이 감당해야 한다. 의기투합했던 단짝 형제가 갈라지게 될 것이고 시므온은 장차 소멸된다.
-하지만 레위 지파는 반전을 이룬다. 비록 “야곱 자손 사이에 분산시키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흩어 버릴 것이다(새번역_7절)”는 예언대로 가나안 땅을 분배 받지 못하고 48개 도성만 받았지만, 성소의 직무를 맡게 된다. 율법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아… 그렇다면 야곱의 이 예언은 “운명을 결정짓는 예언”이 아니다.
-지금껏 이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현재의 판단인 것이다. 야곱은 곧 죽는다. 하지만 아들들은 더 살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생을 마감하면서 이들을 예언하지만 그가 죽은 후 아들들의 삶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야곱이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올무가 되었다고 확정하며 이런 말을 했을까? 특히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했을까?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살아갈 아들들의 인생을 유언이라는 형식을 통해 운명을 결정 짓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그 반대다. 유언이라는 형식을 통해 무겁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비록 그 죄진 삶의 댓가로 받게 될 미래의 심판이 있을 수 있으나 더 이상 그 죄에 얽매지는 삶을 살지 않도록 “훈계”하시는 것이다. 거스를 수 없는 “유언”을 통해 반드시 변화된 삶을 살아라고 계기를 주시는 것이다.
-이 기회를 르우벤과 시므온의 후손은 깨닫지 못해 잡지 못했고, 레위의 후손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자신들의 힘을 집중함으로 잡았다.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되었다. 모세는 레위 후손이지만 출애굽을 이끌었고, 시내산에서 금송아지 사건 때 세겜에서 폭발했던 그 분노의 폭발이 하나님을 위해 발산되었다. 가나안 땅 진입 직전 모압에서의 바알브올 사건 때도 마찬가지 였다. 이런 레위 자손에게 하나님의 성소의 직무와 율법을 가르치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비록 땅을 분배 받지 못하고 48개 도성으로 흩어졌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직무를 맡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의 예언은 저주가 아니라 기회였다. 자신들이 애써 외면하고 덮어 왔던 과거의 죄에 직면하고 다시 그런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담긴 것이었다. 그래야 이들의 후손이 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 수치러운 이 순간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변화된 삶을 살 때 후손들도 산다.
-르우벤처럼 주어진 힘을 정욕으로 사용하지 않아야 산다. 시므온과 레위처럼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면 도리어 분노의 대상이 된다. 맹렬한 분노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것 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면 미래를 망친다.
-유다는 자기 희생을 통해 흠도 많았던 자신의 삶을 상쇄 받는다. 차마 입에 꺼내기도 부끄러운 며느리와의 동침을 통해 후손이 이어가지만, 야곱은 이 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 희생을 자처하는 모습을 주목하여 그런 마음을 가진 왕들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형제들은 이런 자기 희생의 유다를 찬송할 것이다.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고 아들을 둘이나 잃고 며느리 다말과의 사건을 통해 혹독한 아픔을 거친 그는 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희생을 마다 하지 않을 만큼 성숙해져 있었다. 각각의 사건을 거치며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은 르우벤이나 시므온, 레위와 달랐다. 야곱은 그 회개와 성숙을 본 것이다. 그 변화된 자기희생의 마음이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나오게 할 것이다. 궁극적인 메시아가 그의 후손을 통해 올 것이라는 놀라운 축복을 받는다.
-스불론은 바다의 풍성함을 누릴 것이며, 잇사갈은 비옥하고 아름다운 곳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야곱의 예언처럼 잇사갈 지파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하지 못하여 오히려 왕성해진 가나안 사람들의 압제 아래 놓이게 된다. 혹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누리지 못하는 축복은 없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야곱의 예언이 보여준다. 계시록에서도 언급하는 것 처럼,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받는 심판의 기준은 “행실”이다(계 20:12, 13). 오늘 내게 주어진 힘(은사)를 남용하지 않고, 분노를 다스리며, 자기희생의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련다.
*오늘을 살아낸 흔적이 과거가 되고, 그 과거의 열매가 오늘이 되어 미래를 열어 간다는 것을 잊지 안아야 한다.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내는 선한 행실로 다져서 구원의 삶이 더욱 완전해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오늘 나의 삶의 행실은 지워질 수 없고, 이 행실이 나와 후손들의 미래로 가는 표지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미 해답은 나와있다!
*더욱 말씀을 따라,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러내는 하루이어라!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미리 정하심으로” 뛰어 넘으셨다. 상황과 여건에 따라 적응하신 것이 아니다. ‘적자생존의 원리’는 더더욱 아니다. 철저하게 나기 전부터 정하신대로 이끄셨다. 야곱이 장자의 반열에 오른 것은 그의 속임수나 탐욕이 아니었다.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결정이셨다. 만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결정을 에서와 야곱에게 어릴 적부터 잘 설명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사회의 관습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이라면 이를 어릴 때부터 잘 훈계하고 양육하였다면? 과연 어땠을까?
본문도 역시 혈통이나 관습과 관련하여 중요한 주제가 함축되어 있다. 요셉은 애굽 여인과 결혼했다. 그것도 애굽의 신을 섬기는 대제사장의 딸이다. 그녀와의 관계에서 두 아들을 낳았다. 요셉의 아들이기도 했지만, 애굽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두 아들을 야곱이 양자 삼았다. “내가 너를 보려고 여기 이집트로 오기 전에 네가 이집트 땅에서 낳은 두 아이는, 내가 낳은 아들로 삼고 싶다. 르우벤과 시므온이 나의 아들이듯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나의 아들이다(새번역_5절).” 애굽의 아들이 아니라 야곱의 아들 된 것이다. 혈통으로는 애굽의 피가 섞였지만 야곱은 자신의 아들로 삼는다. 혈통의 상식을 뛰어 넘는다. 오늘 본문은 양자 삼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공식적으로 아들 삼는 입적 절차다.
1.하나님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8, 11, 15-16, 20, 21절)
요셉과 야곱이 동일하게 고백하는 삶의 태도가 있다. 요셉은 지금껏 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이는 이미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바로까지도 이를 인정했다. 요셉의 철두철미한 믿음의 고백은 애굽 여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일 지라도 분명하게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9절)”이라고 고백한다.
이렇게 확고한 고백을 하며 살았지만, 사실 그의 마음에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섞인 애굽의 피는 전통적인 관습과 혈통 인식에 따라 ‘자신의 두 아들이 하나님의 백성, 자녀들의 반열에 들지 못하면?…’ 이라는 관습에 따른 불안감이 왜 없었겠나? 이 불안감을 야곱은 일거에 해결한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들로 입양을 한 것이다. 그리고서 축복을 해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요셉은 태어난 출생 순서에 따라 장자와 차자의 축복을 받게 하려 했다(12-13절). 야곱이 나이가 많이 들어 눈이 어두어 졌기 때문에 혹시 축복하는 손의 위치를 다르게 할까 싶어 야곱의 기준으로 두 아들을 그 앞에 세운 것이다. 하지만 야곱은 팔을 엇바꿔 축복한다(14-16절). 이에 요셉은 “못마땅히 여겨(새번역_17절)” 혈통으로 장자인 므낫세에게 얹은 야곱의 손의 위치를 바꾸려 했다. “아닙니다, 아버지! 이 아이가 맏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오른손을 큰 아이의 머리에 얹으셔야 합니다(새번역_18절).”
하지만 야곱은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므낫세가 한 겨레를 이루고 크게 되겠지만, 그 아우가 형보다 더 크게 되고, 아우의 자손에게서 여러 겨레가 갈라져 나올 것이다(새번역_19절).”라며 에브라임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므낫세는 한 큰 족속이 될 것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선포한다. “그 날, 야곱은 이렇게 그들을 축복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너희의 이름으로 축복할 것이니 ‘하나님이 너를 에브라임과 같고 므낫세와 같게 하시기를 빈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야곱은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다(새번역_20절)”
요셉이나 야곱이나 혈통, 관습의 굴레에 속해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했을 때 기꺼이 이를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삶에서 혈통과 관습의 한계를 뛰어 넘는다. 야곱이 “눈이 어두워” 자신이 입양한 아들들의 장자과 차자의 순서를 헷갈린 것이 아니다. 야곱은 분명히 말한다. “나도 안다!” 이것을 두 번이나 강조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이다. 늙어 눈이 어두워져서 한 실수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인간의 출생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 먼저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 관습에 얽매이지 말아야 할 분명한 모습이다. 하지만 순서의 차이가 곧 배제나 누락, 혹은 추방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야곱은 더욱 힘있게 이렇게 축복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축복할 때 “하나님이 너는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와 같게 하시기를 바란다”라고 축복하게 될 것이라는 거다.
이들은 장자와 차자의 순서는 뒤바꼈을 뿐, 둘 다 “축복의 기준”이 된다. 즉,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복의 질은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둘 다 후손들이 하나님께 받은 복, 앞으로 받을 복을 회자하고 선언할 때 똑같이 예로 들 정도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의 모델이 된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당연한 것들이 있다…. 혈통의 순서, 학연, 지연….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당연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 뿐이다. 살아가는데 있어 인습의 당연한 것은 없다!”
2.하나님이… 요셉에게…(21-22절)
입양한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한 후 야곱은 요셉을 축복한다. 마치 유언과도 같다! 아니 유언이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너희를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네 형제들 위에 군림할 너에게는, 세겜을 더 준다. 세겜은 내가 칼과 활로 아모리 사람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다(새번역_21-22절).”
개역개정 번역에는 나타나 있지 않는 번역이 눈에 띈다. “… 그리고 네 형제들 위에 군림할 너에게는….”이라는 부분이다. 아버지 야곱의 입으로 요셉이 꿈꾸었던 꿈 대로 이어질 것을 선언한 것이다.
또, “…세겜 땅을 더 준다.”고 유언한다. 결국 이 유언은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이 세겜 지역을 분배 받음으로 성취된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요셉은 애굽에서 죽는데 왜 이런 선언을 했을까? 라고 당연하게 의문이 떠오른다. 하지만 야곱은 요셉에게 최고 유산을 선언한 셈이다.
그것은 “장차 들어갈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믿음이다.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받을 땅, 그곳에 있는 나의 땅, 후손들의 땅… 이 믿음을 심겨 준 것이다. 부동산이 유산이 아니라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믿음이 유산이다.
나는?
-야곱은 늙어서 눈이 어두웠다. 젊었을 때 그는 눈이 어두운 이삭을 속여 자기 욕심을 채울 만큼 영혼의 눈이 어두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는 요셉의 장자 므낫세가 아니라 차자 에브라임이 더 큰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에 더 가까운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육신의 눈은 어두워져 갔지만, 영적인 눈은 더 밝아진 야곱이었다.
-눈이 어두운 이삭은 야곱에게 속아서 작은 아들에게 장자의 복을 빌어주었으나, 야곱은 눈이 어두웠어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비록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육신의 눈은 어두워지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은 점점 밝아지고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면서 오른손을 둘째인 에브라임 위에 왼손은 첫째인 므낫세 위에 얹는다. 요셉이 “그리 마옵소서”하고 만류하지만, 야곱은 다 알면서 그렇게 했다고 대답한다. 에서보다 야곱을 선택하신 것처럼, 에브라임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 세상의 질서를 역전시키면서 자기 주권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따른 것이다.
-하나님 앞에 인간의 관습, 혈통, 제도는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다. 정말 당연하게 인정되고 나타나야 할 것은 “하나님의 주권”밖에 없다. 인간 사회 너무나 당연하다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든지 뛰어 넘을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나라라는 교회 안에 당연하게 여겼던 것조차 하나님의 주권 앞에 뒤바껴야 한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당연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하시겠다 하면 인간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연연하면 안된다. 믿음의 행동은 이성적이고 보편적이며 합리적인 것 보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주권)에 당연하게 반응하는 순종인 것이다.
-요셉에게 당연한 것은 므낫세가 장자, 에브라임은 차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뜻)은 에브라임이 장자, 므낫세가 차자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둘에게 베푸시는 축복은 차이가 없다. 더 나아가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기준이 된다.
-인간에게 당연한 순서보다 하나님의 결정이 우선이며, 하나님은 순서의 차이만 있을 뿐 베푸시는 복은 차이가 없으시다. “에브라임과 같고 므낫세 같아라……”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고 요셉에게 이르기까지 곰곰히 생각해 보니 출생 순서에 따라 장자권이 이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따라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서가 그대로 순종되고 존중되는 삶이 곧 그의 백성의 삶이다.
-야곱은 그렇게 요셉의 두 자녀를 축복한다. 특별히 요셉에게 ‘세겜 땅’을 준다. 하지만 당장 그 땅을 차지할 수 없고 나중에 400년 후에 하나님께서 조상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 현실이 될 것이다. 그들은 땅을 선물 받은 것이 아니라 약속을 선물 받은 것이다. 믿음이 아니면 전혀 기쁘지 않은 복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당연히 내가 교회 다녀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교회 다니면 다 구원 받는거야 라는 당연구원의 심리가 팽배한 요즘, 구원은 교회를 다님으로 당연히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임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면 지금 내가 누리는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을 받아 누리고 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받은 자격이 있는 당연한 자는 없다. 그저 은혜로 받은 것이다. 이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하나님 나라에 당연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 밖에 없다. 이 주권 앞에 순종하는 걸음이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며, 교회를 살릴 것이다. 공동체를 일으킬 것이다. 순종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반드시 역사할 것이다.
-부동산을 유산으로 남겨 준 것이 아니다.믿음을 유산으로 남겨 준 것이다. 지금 요셉은 애굽에 있고, 그는 애굽에서 죽을 것이다. 하지만 야곱은 요셉에게 세겜 땅을 물려준다. 자신이 형들에게 버림받고 애굽에 노예로 팔렸던 도단 들이 있는 그 곳을 물려 받는다. 애굽이 정착지가 아니라 돌아갈 네 땅이 있다고 분명히 알려 주는 것이다. 애굽 총리가 너의 자리가 아니라 세겜 땅이 너의 자리임을 상기 시킨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유산을 남길까? 야곱을 통해 확고하게 결심하게 된 것은 “주님이 친히 예비하신 처소”를 바라보게 하는 유산을 남겨야 겠다는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뿌리박는 삶이 아니라 주님 예비한 곳을 바라보게 하여 기꺼이 “나그네 길”을 살게 하겠다!
-날 때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우리를 돌보시고 지키시는 분이시다(15~16절). 야곱은 자신의 고백처럼 험악한 세월(47:9)을 보냈다. 형을 피해 집을 떠난 때부터 속고 속이는 삶이 이어졌다. 자기 손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아보려는 노력으로 가족을 속이고, 그를 이용하려는 외삼촌에게 속임을 당하고, 그의 몸에서 난 아들들도 그를 속였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야곱을 믿음의 사람으로 길러주셨고 모든 위기와 환난에서 건져주셨다. 이처럼 지난 삶에서 나를 돌보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야곱은 믿음으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였다. 므낫세는 큰 족속을 이룰 것이지만 그의 아우 에브라임은 여로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말로 두 아들을 축복하였다. 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야곱은 작은 자를, 그리고 어린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두 아들에게 축복한다. 세상의 지혜는 높은 자와 강한 자를 높이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낮은 자와 약한 자를 향한다.
-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장차 그의 후손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내다본다. 야곱은 과거 자신이 애굽의 노예로 팔렸던 도단 들이 있는 세겜 땅을 요셉에게 물려준다. 이 믿음대로 하나님은 모든 일을 완전하게 성취하셨으며 요셉은 아버지에게 받은 세겜 땅에 매장된다(수 24:32).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약속에 대한 확신이 분명해져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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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센이 아니라 가나안이다.(47:27-31)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와 정착한 곳은 고센 땅이었다. 이곳에 정착한지 벌써 17년이 지났다. 야곱은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요셉을 불러 약속하고 맹세하게 한다. “…. “네가 이 아버지에게 효도를 할 생각이 있으면, 너의 손을 나의 다리 사이에 넣고, 네가 인애와 성심으로 나의 뜻을 받들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여라. 나를 이집트에 묻지 말아라. 내가 눈을 감고,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면, 나를 이집트에서 옮겨서, 조상들께서 누우신 그 곳에 나를 묻어다오.”…..”(새번역_29-30절).
고센 땅이 자신의 매장지, 즉 영원히 안식할 땅이 아니라는 의미다. 자신이 누울 땅은 가나안 땅이라는 거다. 이곳에서 재산도 불어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27절)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이 아니다. 반드시 돌아가야 할 땅으로 자신을 보내 달라는 거다.
한편으로 애굽으로 내려올 때 “함께 내려가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고센 땅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의 땅이 되었다(27절, 46:3). 하지만 “함께 데리고 나오겠다”고 약속하신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46:4). 야곱은 고센 땅에서의 17년의 시간 동안 이것을 잊지 않았다.
생의 마지막이 가까이 오는 것을 직감한 야곱은 요셉에게 자신이 고센 땅에 영원히 눕지 않고 조상들 곁에 눕게 해줄 것을 약속받고 맹세하게 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에 반응하며 노년의 삶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을 통해 굳건히 지켜주신 약속들이 자신에게도 이루어지기를 믿음으로 바라며 요셉에게 자신의 “출애굽”을 약속하게 한다. 이렇게 야곱에게서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에 대한 확고한 시선을 깨달은 요셉도 훗날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분명하게 유언한다. 출애굽할 때 나의 뼈를 가져다가 가나안 땅에 묻어다오…..
약속따라 사는 인생은 죽음이 방해가 되지 않는다. 죽음이라도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를 사모한다.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한다. “…. 이스라엘이 침상 맡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였다(새번역_31절).”
“고센 땅은 우리의 땅이 아니다.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주실 땅이다.”
2. 잊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다(48:3-4)
이 결연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태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드러난다. 애굽으로 들어온 이후 한 순간도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아 왔음을 보여 준다. 늘 하나님께서 들려 주셨던 약속을 기억하며 살았다.
“…..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나안 땅 루스에서 나에게 나타나셔서, 거기에서 나에게 복을 허락하시면서,나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에게 수많은 자손을 주고, 그 수가 불어나게 하겠다. 내가 너에게서 여러 백성이 나오게 하고, 이 땅을 너의 자손에게 주어서,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겠다’ 하셨다(새번역_3-4절).”
삶을 마무리 하면서 야곱은 이를 회상한다. ‘수많은 자손들과 이들이 살아가도록 주실 영원한 소유될 가나안 땅”… 이 약속을 애굽 고센 땅에서 굳게 붙잡고 살아왔다. 잠시 가나안을 떠나 자리잡은 이곳은 “생육하고 번성하여(47:17) 민족을 이루어 나가는 민족태동의 요람은 될 수 있지만, 영원한 터전, 기업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드시 돌아가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고백한다.
어떤 상황과 환경에 처해지든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붙잡아 사는 삶은 중심을 잃지 않는다. 축복의 땅 이기는 하나 나그네 땅임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고센 땅을 정착지로 삼고 살지 않는다. 나는 이 땅을 정착지로 여기며 이 땅에 중심을 두고 모든 것을 쏟으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비록 이 땅에서 축복을 누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지만 영원한 거처는 되지 않음을 깨닫고 살고 있을까?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이 땅이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고 세상 나라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처럼 살아가야 할 분명한 의지가 약속의 말씀에서 나오는가?
3.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다(48:5-7)
야곱은 자신을 찾은 요셉과 그의 두 아들에게 담담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간증하고서 갑자기 요셉의 두 아들을 양자로 삼는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의 의미는 요셉에게 두 지파의 분깃을 주어 그에게 장자권을 주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후 야곱의 유언을 통해 장자에게 주어지는 두배의 재산 상속이 두 아들이 양자가 되어 요셉에게 자연스레 주어진다.
장자 르우벤은 아비의 침상을 더렵혀서 자격을 상실하였고(49:3-4) 그 뒤를 잇는 레위와 시므온은 세겜에서의 범죄로 인해 승계 자격이 박탈 되었다(49:5-6). 요셉의 경우 혹독한 기근에서 온 가족을 살린 것 만으로도 이미 형들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단순히 장자의 권리가 주어진 것에 이 선언의 의미가 멈추면 안 된다. 요셉의 첫 번째 꿈의 진정한 실현, 화룡점정이 여기에서 일어난다. 열 한 곡식단과 열 한 별이 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은 단지 애굽 총리로서 받은 엎드림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셉이 형제들의 장자로서 가족이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통로가 된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민족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야곱은 요셉을 편애하며 요셉이 형제들에게 받을 따돌림의 원인을 제공하여 하나님의 뜻에 실패했고, 형제들은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나 보자며 악독함으로 죽이려하여 실패 하였지만, 하나님은 요셉이 꾼 꿈을 끝까지 살려 내셔서 기어이 요셉을 통해 이루신 것이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인간은 실패하나, 하나님은 성공하셨다. 요셉이 꿈을 꾼지 약 40여년(노예 13년, 7년 풍년과 7년 기근중 2년이 지나 시작된 애굽 이주 후 17년… 어림잡아 이 정도 되지 않을까?)만에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은 일생의 시간이 가꾸는 시간이며, 하나님께서 정한 시간에 반드시 열매를 맺히며 이루어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읽고 듣고 생각하며 나의 약속으로 붙잡고 성실하게 믿음의 걸음을 걷다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행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어주신다.” 이 믿음으로 오늘도 살련다.
나는?
-하나님은 고센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삼아주셨다. 그곳에서 자기 백성이 안전하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다. 아담에게 주신 복,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자손의 번성을 안전하게 이룰 수 있는 조건으로 자기 백성의 임시 둥지를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들은 장차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되겠지만, 나그네로 살고 있는 애굽에서도 하나님의 돌보심은 계속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사는 우리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
-하나님은 자신과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가신다. 야곱에 요셉에게 요구한 인애와 성실함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생애 동안 보여주신 것이기도 하다. 야곱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끝까지 붙들어 주신 것을 전 생애를 통해 경험했다. 이와같은 말씀을 통해 지금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나를 신실하게 붙드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찬양하리라.
-하지만 이렇게 고센 땅이 아무리 좋아도 그 땅은 ‘우거(寓居, 임시로 다른 곳에 머물러 살다)’하는 땅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애굽 고센 땅을 정착민이 아니라 나그네로 살아야 한다. 야곱은 유언을 통해 이를 고백한다.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애굽에 장사하지 말고 조상의 묘지, 즉 막벨라 굴에 묻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400년 후에 반드시 이뤄질 것을 믿었던 것이다.
-요셉에게는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면서 그들을 자신의 아들이 되게 하겠다고 한다. 즉, 요셉에게 두 지파의 분깃을 주어 그에게 장자권을 주겠다는 의미다. 이는 요셉이 꿈에서 본 대로 얻은 영광이었다. 야곱은 자신의 편애로 이루려했지만 실패했고, 사람들은 그 꿈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꿈을 살리셔서 기어이 이루신 것이다.
-야곱이 삶을 마무리하며 되짚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땅에 대한 약속을 따라 인생을 정리하기를 원했다. 나도 역시 그래야 겠다. 나의 삶의 걸음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 따라 진행하고 정리하여야지..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을 다시 되짚는다.
-또 야곱이 되짚은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꿈의 완성”이었다. 요셉이 꾼 꿈을 의식해서 의도적으로 그의 두 아들을 입양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양식을 구하러 온 자리에서 형제들이 요셉에게 엎드린 것은 진정한 엎드림이 아니였다. “호구지책”의 엎드림이었다.
-가족안에서 진정한 엎드림은 아버지 야곱이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양자 삼고 재산을 분배 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요셉에게 장자에게 주어지는 권리처럼 두 배의 재산이 상속되게 한 것이 진정한 엎드림의 완성이었다.
-하나님은 계획하신대로 끝까지 완성하시는 분이심을 실감한다. 나의 시각과 마음으로 이만하면 됐다에서 멈추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주권대로 계획하신 대까지 완전하게 마무리하신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주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심으로 확실하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믿고 지금 나의 삶이 하나님 나라안에 있음을 믿고 누리며 살아가다 보면,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다.
-고센땅에서 재산도 얻고 생육하고 번성하기도 하듯, 지금 누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취하고 누리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는 “약속하신 대로, 말씀하신 대로” 다시 오실 주님으로 완성 되고 완전하게 실현 될 것이다.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내야 하겠다.
*아무리 예상치 못한 상황을 지나더라도 결국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은 실제이기 때문에 충분히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음을 바라본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소식과, 이에 따른 혼란으로 인한 개인, 교회, 나라와 민족, 온 세계 열방의 상황이 하나님께 주권이 있음을 인정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내하리라. 결국 하나님의 주권(능력)이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하신대로 이루실 것 이기에….
*나에게 이 사실이 조급하지 않는 “믿음의 여유”안에서 이 상황을 견디게 하실 줄 믿는다. 조급함에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지 않도록, 선하신 인도하심을 외면하지 않도록 날 선 분별력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게 맡기신 모든 사역이 나의 계획과 뜻에 따른 성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고 성령께서 인도하심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걸음”에 나의 걸음을 맞추어야 함을 절절히 깨닫는다. 결국 고센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돌아갈 이스라엘처럼,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끄심을 신뢰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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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관리능력
이 과정에서 발휘된 요셉의 능력은 “관리”로 압축할 수 있다. 철두철미한 7년 풍년의 풍성함을 관리하지 못하면 흥청망청 낭비될 식량들이었다. 결코 7년의 흉년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7년의 풍년 동안 넘치는 식량을 관리하면서 7년의 흉년을 충분히 견딜수 있다.
요셉의 관리의 핵심은 “중앙 관리”였다. “자치 관리”가 아니다. 자신의 수고와 땀의 결실이 넘치는 생산량으로 나타나면서 백성들이 알아서 자신들의 식량을 모은 것이 아니라 국가의 지침에 따라 “각 성에 저장하기 위해” 모았다.
차고 넘치는 7년의 풍년을 얼마든지 흥청망청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바로를 통해 보여주신 뜻을 분명히 깨달은 요셉은 풍년을 관리했고, 흉년을 관리했다. 잘 나갈때나, 막힐때나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삶을 관리하고 제어했다. 그 관리능력이 애굽과 온 땅의 생명을 기근에서 살린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관리능력이 어느 때보다 발휘 되어야 할 시기를 지나고 있다. 한국사회 신뢰도 꼴찌라는 충격적인 지표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를 강하게 리모델링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발버둥칠수록 하나님의 이름이 더 먹칠되고 있다. 지금은 그저 하나님께서 펼치신 이 상황에서 교회의 본질인 공동체의 가치를 지혜롭게 돌아보고 세워가야할 관리와 양육의 시기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선한 감동에 순종하는 이들의 말씀을 따라 감당하는 성실한 관리가 험난한 시기를 지나는 한국교회가 새롭게 세워지는 “관리”가 이루어지게 하셔서 선선히 이 때를 지나게 하실 줄 믿는다.
2.성실함, 이런 성실한 충성이라니(20절)
그렇게 모은 식량을 흉년이 시작되면서 백성들이 “돈”을 주고 샀고, 이후 가축과 땅을 차례로 지불하며 식량을 구입했다. 이로 인해 애굽의 모든 땅은 바로의 소유가 되었다. 대단하다. 요셉은 이 과정에서 축재를 하지 않는다. 성실하고 올곧게 백성들이 식량 값으로 지불한 ‘돈’, ‘가축’, ‘땅’을 그대로 바로에게 올린다(20절).
모든 식량 판매의 수입을 바로에게 온전히 바친다. 대단하지 않는가? 요셉은 보디발에게, 그리고 간수장에게 그렇게 했듯, 바로에게도 충성을 성실하게 감당한다. 그 성실한 충성이 애굽을 기근에서 관리하는 초석이 된다. 그렇다. 성실이 요셉을 살렸고, 성실이 애굽을 살렸고, 성실이 온 땅을 살렸다! 한 사람의 성실이 세상을 살린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변화 시킨다!
3.준비된 계획대로(21, 24, 26절)
이와 함께 “이집트 이 끝에서 저 끝까지를 여러 성읍으로 나누고, 이집트 전 지역에 사는 백성을 옮겨서 살게 하였다(새번역_21절).” 단, 제사장들의 토지는 건들지 않았다. “…..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정기적으로 녹을 받고 있고, 바로가 그들에게 주는 녹 가운데는 먹거리가 넉넉하였으므로, 그들은 땅을 팔 필요가 없었다(새번역_22절).”
그리고는 씨앗을 나누어 주고 소출의 1/5을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 4/5는 각각의 소유가 되게 하였다(24절). 7년 기근 동안 이루어진 일종의 토지개혁으로 인해 애굽의 모든 땅은 바로의 소유가 되고 백성들은 소작인이 되었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 백성들이 말하였다. “어른께서 우리의 목숨을 건져 주셨습니다. 어른께서 우리를 어여삐 보시면, 우리는 기꺼이 바로의 종이 되겠습니다.(새번역_25절)” 라고 하였다.
요셉에게는 단지 관리능력이나 성실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치밀한 계획을 미리 수립한 것이 틀림없다. ‘돈’으로 식량을 사는 것은 누구나 예상 가능하다. 그러나 기근이 길어지면 돈은 반드시 고갈될 것이고 그 다음 대책이 필요하다. 7년의 기근은 충분히 삶의 격변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기존의 상식, 보편적이 체계로는 이 기근을 견딜 수 없다. 이런 부분을 충분히 예상한 대책이 필요 했으리라.
7년 기근 이라는 시간을 세밀히 고찰하고 그때 그때 맞는 대책을 진행해야 하는 최고 결정권자의 혜안과 결단력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시행 대책도 필요했을 것이다.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은 그리 간단한 것이 분명 아니다.
요셉은 계획을 준비했고 차분히 실행했다. 백성들의 돈이 떨어지니, 그들의 가축을 식량 대금으로 받아주었고, 이마저도 떨어지니 그들이 가진 땅을 식량 대금으로 받았다. 시간이 흘러 대부분의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행정개혁을 시작했다. ‘애굽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여러 성읍으로 나누고…전 지역에 사는 백성들을 옮겼다(21절). 즉 계획에 따라 이주 시켰다는 의미다. 그리고 종자들을 나누어 주고 농사를 지어 소출의 오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 오분의 사는 개인 소득이 되게 하였다(24절). 즉, 국가의 땅을 소작하게 했다는 것이다. 극심한 기근을 지나는 백성들은 이를 상당히 기쁘게 받아들였다(25절).
이런 정책의 시행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의 전환이 자연스럽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수가 많은 고대 시대에 순발력있게 대처할 수 있는 국가의 틀을 확립했다는 의미다. 또, 백성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오분의 일만 내면 됐는데, 이 부과 기준은 이미 시행하고 있는 과세 기준에 따라 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바로의 종이 된 후 이전보다 오히려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모든 토지가 국가 소유이기에 공평한 분배와 경작이 이루어져 고대시대에 상상할 수 없는 ‘평등’의 개념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복잡한 계급사회, 혹은 불평등한 구조에 따른 억압사회가 아니라 삶의 기본 체계가 철저히 균등한 배분에 기초한 공정사회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모든 토지는 480년후 하나님의 것임을 선포하며 가나안 땅을 분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원리와 비슷하다. 요셉의 통치를 통해 그 나라의 토지 개념을 미리 맛보게 하신다. 땅의 소유로 인한 다툼, 분쟁이 사라지고 오직 분배 받은 대로 경작하고 삶을 영위하는 그 원리를 말이다. 7년의 흉년이 철저히 불평등의 사회였던 애굽을 적어도 삶의 기반 만큼은 모두가 바로의 땅에서 농사하며 세금내고 살아가는 평등사회로 전환된 것이다.
코로나 이후, 그리고 예상치 못한 현재의 각자 도생, 전쟁의 시대가 우리를 어떻게 변모 시킬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예상치 못한 격변들을 지나며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심을 각성 시키신다. 교만하기 그지 없는 인간의 오만을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존재 앞에 겸손하도록 교정하신다. 그리고 그 고통의 시간을 정신없이 통과하고 나니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우리의 삶을 채우게 하신다.
애굽에 기근이라는 고통이 없었다면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평등이 훌쩍 들어왔다. 이전보다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졌다.
나는?
-애굽의 7년 기근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준비한 요셉을 통해 극복하게 하시듯,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을 통해 시시각각 도전해 오는 삶의 문제들을 극복하게 하신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권위 아래 순종하면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향력이 이 세상을 유지 시킨다. 요셉처럼 말이다.
-그 영향력은 단지 입에 발린 선언이 아니다. 구체적인 계획과 그 계획을 실행하는 능력이 수반된다. 치밀하게 계획하지 않으면 순발력있게 대응하지 못한다. 그 관리능력이 애굽을 살렸고, 온 세상을 살렸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영향력은 이와 같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뜻대로 순종하는 그 걸음을 통해 공동체를 살리고 지역을 살리며 나라를 살릴 것이다.
-요셉은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다. 축재도 임의로 하지 않는다. 오직 바로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 결국 온 나라가 바로의 것이 되게 한다. 그런데 이것의 분명한 목적이 이내 드러난다. 억압과 속박이 아니다. 오히려 균등과 평등이다. 계층에 상관없이 균형있게 배분하고 배치하여 어떤 백성도 소득에 있어 불평등한 차이를 두지 않게 하였다. 누구라도 바로의 땅을 경작하면 예외 없이 오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자신이 하기에 따라 오분의 사의 양이 충분히 자신들의 삶의 토대가 되도록 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바로에게 모든 것이 집중된 것처럼 보이나 결국 이것이 백성들이 평등하게 사는 묘수였다. 기근에서만 견디어 살아내게 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기근 이후를 바라본 정책이었다. 7년 기근 이후는 모두가 고통 분담하여 견디고 살아낸 보상을 공평하게 누리도록 한 것이다. 기근 전보다 오히려 더 공정한 사회가 되게 한 것이다. 이런 묘수가 있나! 이런 이상적인 사회가 아이러니하게도 극심한 기근이라는 환경에서 피어났다.
-요셉이 이렇게 되게하기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계획을 수립했을까?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을까!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요셉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기억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요셉이 늘 “하나님과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나님의 동행은 이처럼 실제적이다. 반드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고난만 견디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한 이후에는 이전과 다른 삶이 시작되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 나라 완성으로 나아간다!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를 넘어 근심거리가 된 이 시대… 그럼에도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이 교회를 통해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분별하고 깨우쳐서 그 뜻대로 순종하면 된다. 순종 하기를 성실하게 감당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난 후 변모된 교회를 보게 되리라. 지금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며 하나님과 깊은 동행을 멈추지 않으면 이루어 지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열심만 충만한 한국교회에 강제 안식년을 선언하신 듯 하다. 갈수록 위축되는 교회, 사회가 인식과 실상의 격차가 날로 더 벌어지는 세태속에서도 더욱 하나님과 친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중하고 집중하면, 기근 뒤에 개혁이 뒤따랐듯, 곤란과 곤경 이후 바른 교회가 서 있을 것이다.
*요셉의 관리능력, 성실, 충성, 치밀한 계획의 수립과 실행 등등,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나타나 애굽을 살렸다. 온 땅을 살렸다. 하나님의 이름이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이는 기근의 때만 살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근 이후의 삶이 이전과 확연히 다른 나라 되게 하였다.
*고통의 순간만 임기응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고통 이후의 삶을 함께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기에 현상만 극복하려 하지 말자. 각종 반성경적 세태의 세상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된 교회를 꿈꿔보자. 달라져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요셉의 통치를 통해 바라보는 것이 무리일까?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야곱과 요셉이 22년만에 상봉한다. 형들에게 심부름을 보낸지 22년만에 가나안이 아니라 애굽 땅 고센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늘 생각나는 장면은 ‘이산가족’이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이다. “…요셉이 아버지 이스라엘을 보고서, 목을 껴안고 한참 울다가는, 다시 꼭 껴안았다(새번역_29절).” 22년만의 상봉은 꼭 껴안고 한참 울다, 또 껴안고 울다가 그렇게 이루어졌다.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얼마나 기쁘면 저리 꼭 안은 손 풀지 않으려 또 안고 또 안았을까!
그렇게 재회의 기쁨을 누린 후 바로 접견 계획과 향후 정착 계획을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31-34절). 요셉은 가족들을 맞아 들이기 위해 치밀하게 생각하고 준비하였던 것이다. 요셉의 치밀한 준비는 이후 400년간 장기간 거류하게 될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교, 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게 하였다. “…. 이집트 사람은 목자라고 하면, 생각할 것도 없이 꺼리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새번역_34하)”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혈통을 순수하게 지키며 민족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요셉이 미리 일러둔 대로 바로를 접견하고 바로는 요셉에게 애굽에서 가장 좋은 땅에서 살도록 공식적으로 허락한다. 요셉이 계획한 대로 고센 땅에 거주하도록 이르고 형제들 중 자신의 짐승을 맡아 기르도록 명령한다(5-6절). 이어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따로 바로를 접견하도록 했다. 야곱은 바로를 접견하며 두 번의 축복(기도)를 해 준다. 야곱의 축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바로가 야곱에게 묻는다. “어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새번역_8절). 야곱이 대답한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새번역_9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12:3), 야곱 자신에게도 약속하셨던(28:14) ‘땅의 모든 족속이 그들과 그들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는 약속이 성취 되었다. 애굽과 온 땅이 아브라함과 야곱의 후손 요셉을 통해 심각한 기근으로부터 살아남게 된다.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실제하며 야곱은 생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렇다!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이 기막히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 만큼 짜릿한 것은 없다!
1.왜? 고센 땅일까?(34절)
요셉은 일관되게 야곱과 형제들에게 ‘고센땅’을 바로에게 고하도록 치밀하게 답변까지 미리 알려주며 준비했다. 왜 그랬을까?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집짐승을 길러온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이 다 그러합니다’ 하고 대답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형님들이 고센 땅에 정착하실 수 있습니다. 이집트 사람은 목자라고 하면, 생각할 것도 없이 꺼리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새번역_34절).” 이집트 사람들은 목자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꺼리고 가까이 하지 않기에 쉽게 애굽의 중심부에서 떨어진 고센땅을 허락할 것이다는 논리다. 요셉은 왜 이렇게 계획을 세웠을까?
22년간의 애굽에서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다. 하지만 요셉은 애굽의 종교와 문화, 사회, 정치 구조 속에서 그도 원치 않는 애굽의 문화, 격식에 맞춰야 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애굽 총리로서 애굽의 격식과 복장을 했기에 형제들이 알아채지 못한 점 등이다. 하나님을 믿는 삶의 체계가 애굽의 중심부에 함께 섞여 지내는 순간부터 겉잡을 수 없이 혼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나님이 없는 제국의 문명은 가나안 땅 시골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눈이 돌아가고 마음이 빼앗길 가능성이 충분했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가족이 하나님 없는 애굽처럼 동화 된다면 이처럼 심각한 결과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애굽 안에서 살아야 하나 애굽처럼 되지 않기 위해 하나님 없는 우상문화와 타락한 문화에 젖어 들지 않기 위해, 애굽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고센 땅은(실제로 이 땅의 위치는 가나안과 가장 근접한 애굽의 변방이다) 하나님 가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요셉의 배려였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이와같은 분별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세상속에 살지만 세상 문화와 구별되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중요한 정체성이다.
2.축복의 힘(권위)는 어디서 나오나?(9절)
야곱은 바로를 접견하며 처음과 끝, 두 번의 축복을 한다. 접견을 시작하며 왕국 규례에 걸맞지 않는 야곱의 축복은 결례가 될 수 있었겠으나 바로는 감명을 받은 듯하다. 야곱의 나이를 묻는 것은 그가 받은 축복에서 오묘하고도 신비한 뭔가를 느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야곱은 그 질문에 그저 나이만 밝히지 않았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_새번역)”이라고 첨언 한다. 하나님과 함께한 삶이 130년이라는 거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은 하나님 계신 곳으로 가기 위해 걸어온 햇수, 혹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 햇수로, 혹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세월로 읽어도 될 것이다.
즉,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연수(연륜)에서 나오는 축복의 깊이라는 의미다. 하나님 뜻대로 조각된 시간들에서 나오는 삶의 연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의미기도 하다. 입술의 가벼운 말로 표현되지만 하나님과 함께 한 세월이 깃든 음성은 ‘오묘하고도 신비한’ 깊이를 느끼게 할 것이다.
나도 하나님과 함께 한 세월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며 증거할 때 힘이 되고 연륜이 더 하여 질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나의 뜻을 꺽고 내려 놓는 시간들 속에서 다져지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무게가 나의 입술의 말과 마음의 행동으로 드러나기를 바란다. 영향력을 끼치는 삶이 되기를 고대한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하나님의 권위가 드러난다.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을 빌 때 권위(힘)가 드러난다.
나는?
-요셉의 치밀한 준비가 도전이 된다. 흔히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면 삶이 매우 비체계적, 비논리적이 될 수 있지만, 충분히 설득되는 논리적이고 치밀한 준비가 야곱의 가족들의 거주지를 무리없이 확정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주님께서 맡기신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세상 속에서 구별되게 이끌기 위해 요셉의 이런 면이 나에게 더욱 갈고 닦여지면 좋겠다. 좀 더 생각하고 좀 더 가다듬어 마음에 동의가 일어나게 하여 기꺼이 움직이도록 하는 그 치밀함이 나에게 더욱 필요하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길, 이루시는 일이지만, 요셉의 지혜로운 치밀함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돋보이게 한다. 나의 목회도 나의 지혜로운 치밀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돋보이도록 하고싶다. 나의 무지나, 지혜롭지 못함이나, 준비하지 못함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실망하게 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구별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요셉이 인간적인 마음으로 거주지를 정했다면 가나안의 순박한 삶을 살다온 이들에게 당시 세계의 중심부의 화려한 문화와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하고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나!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섞이지 않는 것이었다.
-신앙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세상 문명의 달콤함과 구별되고 믿음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각성해야 한다.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문명의 중심부에서 스스로 멀어졌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나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세상 문명의 중심부에서 스스로 멀어져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 속에 있으니 분발하여 굳세게 하나님 나라 가치를 지켜 나가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 온 사람이 빌어주는 축복은 급이 다르다! 흔히 영성, 혹은 영력이 있다고 하는 것이 이런 것을 가리킬 것이다.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 세상의 문명과 부대끼며, 정욕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기 위해 포기하고 내려놓고 빼앗기고 잃어버리는 시간들이 녹아져 연륜이 되는 것이다. 힘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럭 저럭, 대충 형식에 맞추어 아무리 오랜 시간을 흉내내며 살아온 들 그런 삶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권위가 상대방이 느끼지 못한다. 왕궁의 접견 양식조차 뛰어 넘는 돌출된 행동이었겠지만 바로가 순순히 받아들이며 감동을 받아 야곱과 좀더 내밀한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에 근거한다.
-나그네와 같은 험악한 인생의 시간 속에서 이를 충분히 견디고 이기게 한 하나님과의 은혜의 동행에서 삶의 힘이 나온다! 권위가 나온다. 나에게도 이 힘과 권위를 여전히 주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지금 내가 고뇌하며 근심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능히 견디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세상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힘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 하나님과 성실하게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도 하나님과 동행함이 나의 힘이다. 오늘도 나에게 깨닫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 말씀이 나의 힘이다.
*말씀이 힘(HIM)!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야곱이 드디어 애굽으로 일가족을 이끌고 출발했다. 아들 요셉이 살아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기쁨과 아브라함때부터 삶을 일구어 온 가나안을 떠나야 하는 두려움(막막함, 아쉬움 등등 여러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이 교차하였다. 무엇보다 매우 늙어서 이동하는 여정에 대한 부담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도전을 앞둔 야곱은 하나님과 어떻게 이 길을 시작했을까?
1. 하나님과 독대하다!(1-2절)
22년동안 자신의 삶을 깊은 어둠에 거하게 했던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 자체가 그의 영혼에 햇빛이 비친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온 가족이 “함께” 내려간다. 기쁨과 환희의 이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 자체가 삶의 중대한 변환점, 도전점 이었기에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야곱은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린다. 자기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의 ‘브엘세바’에서 ‘희생제사’를 드린다. 그리고 그 밤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뵙는다. “밤에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이스라엘을 부르셨다. 야곱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새번역_3-4절).”
야곱은 여러 번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즉 독대하였다. 형 에서의 살의를 피해 하란으로 내려가는 중 ‘벧엘’(‘브니엘’)에서, 그리고 온 가족과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 올 때 역시 ‘벧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제사를 받으신 후 밤중에 야곱을 부르신 것이다. 온 가족이 애굽으로 출발할 때 이미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면 자신이 살아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21장), 아버지 이삭이(26장) 거처를 옮길 때 제사 드렸던 것처럼 자신도 드렸을 가능성이 크다. 브엘세바는 야곱의 가족들의 중요 거점이기도 했고, 이곳은 남방 한계선 이었기에 여기를 지나면 광야가 시작되고 그 광야를 지나면 애굽이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이렇게 가나안에서의 자신의 마지막 제사(예배)를 드린 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야곱이 하나님과 독대한다. 삶을 마무리해야 할 나이임에도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는 그의 길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시작했다.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인생은 두려울 것 없다. 또한 여지껏(매번) 드러나지 않았을 지라도 하나님은 늘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다(3-4절)
“나는 하나님, 곧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거기에서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내가 반드시 너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새번역_3-4절).” 애굽으로 내려 가는 것에 대해 요셉을 만나는 기쁨도 있었지만 두려움도 분명히 있었음을 하나님은 아셨다.그래서 먼저 격려하신다. “나는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아라(2절)” 이후 분명한 약속을 주신다. ‘내가 거기서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3절)’ ‘나도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 간다!. 그리고 내가 “반드시” 너를 데리고 나온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4절)’
세 가지의 약속을 주셨다. 첫 번째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들려 주셨던 하나님의 계획, 민족을 이루게 하는 약속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겠다는 거다. 두 번째 약속도 마찬가지다. 민족을 이루어 가는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백성, 자녀들이 있는 곳에 나도 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들어갈 때도, 나올 때도 “내가(하나님께서)” 주관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약속은 야곱의 연로함으로 인해 여행의 고단함 때문에 혹시 내려가는 길에 잘못되어 요셉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와 같은 두려움을 가진 야곱을 어루만져 주시는 약속이다. 걱정마라, 요셉이 너의 죽음을 지킬 것이다.
특히 두번 째 약속은 야곱의 온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든든한 약속이다. 지금 내려가는 것에 함께 하실 뿐 아니라 돌아오는 것까지 함께 하신다는 이 약속은 400여년이 지난 훗날 후손들이 누리게 될 약속이기 때문이다. 지금 애굽에 있는 요셉에게만 있는 약속이 아니다. 애굽을 향해 내려가는 야곱에게만 약속된 것도 아니다.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은, 집짐승과 가나안에서 모은 재산을 챙겨서, 이집트를 바라보며 길을 떠났다. 이렇게 야곱은 자기 자녀들과 손자들과 손녀들 곧 모든 자손들을 다 거느리고 이집트로 갔다(새번역_6-7절).”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6절)….자기 자녀들과 손자들과 손녀들 곧 모든 자손들을 다 거느리고(7절)’ 라고 기록한 대로 “모두”에게 주신 약속이다. “함께” 살고 있었던 모든 가족 “모두”를 하나님께서 데리고 들어 가시고 민족으로 불어난 “모두”를 하나님께서 데리고 나오실 것이다.
3. “함께” 내려간 야곱의 가족들(8-27절)
레아와 실바의 후손들(8-18절), 라헬과 빌하의 후손들(19-27절)의 순서로 기록하였다. 모두 합한 가족 수는 70명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이래 벌써 70명이 된 것이다.
그런데 70명의 가족 인원은 정확한 총합이 아니다. 병행 본문인 민수기 26장이나 역대상 4장의 기록과 차이가 분명하다. 또, 요셉의 자손도 아들 둘만 두지 않았다. 사도행전의 스데반은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가족을 75명으로 명시한다. 이는 요셉의 아들을 9명으로 기록한 70인역에 따른 자연스러운 통계다. 즉 의도적으로 ’70’이라는 숫자에 맞추어 기록했다는 뜻이다. (창세기는 야곱의 가족 인원을 70명으로 기록했지만 먼저 노아 후손이 흩어져서 이룬 열국의 수도 70개로 기록했다. 이를 신학적으로 흩어진 70개의 열국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 70명을 대비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애굽으로 내려간지 4대(430년)만에 민족을 이룰 것이다 라고 약속해 주신 대로 출애굽 직후 이스라엘 후손의 숫자는 장정만 60만명이었다. “약속하신대로” 이루시며 야곱의 가족들 70명이 “함께” 애굽에 거주하는 4대 동안 늘 함께 하셨다.
야곱의 가족 70명이라는 표현은 애굽으로 내려간 정확한 인원수가 아니라, 아무도 배제되지 않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형제간의 살해, 유기라는 극악 범죄 가운데서, 또 극심한 기근 가운데서도 이 가족은 흩어지지 않았다. 문제 많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이끄신 “진실함”의 시험에서 범죄의 고백과 회개를 통해 용서와 화해를 이루었다. 이렇게 이끄신 후 비로소 “한 사람의 아들들”로 “함께”하는 이들을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함께” 애굽으로 이끄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문제 없는 인생, 가족이 어디있겠는가! 모두가 문제 투성이였지만 하나님은 ‘단 한명’도 배제하지 않으신다. “야곱의 가족 모두”를 애굽으로 “함께” 이끄신다. 개개인의 면면이 잘나고 완전해서 “모두 칠십명”에 포함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저 암묵적인 동의와 묵인으로 잔혹한 형제에 대한 범죄가 벌어지게 했던 잇사갈이나, 납달리, 스불론과 같은 형제들도, 이후 제 멋대로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여 방탕했던 유다도, 세겜성에서 잔혹함을 절제하지 못했던 르우벤이나 레위도, 모두 하나님의 가족에서 배제 되지 않았다. 모두 다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민족을 이루게 된다.
늘 하나님과 동행했다던 요셉, 회개의 확실한 변화를 보인 유다 정도만 구원의 계보, 민족의 계보에 기록하지 않으셨다. 모두 빠짐없이 기록하셨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조차도 하나님의 나라 백성 계보에 들어오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은혜 아니면 이 나라에 들어가 살아 갈 수 없다.
나는?
-인생의 막바지, 안정으로 마감해야 할 나이에 애굽 이민을 결정했다! 아무리 그 나라의 총리 빽이 있다하나 새로운 도전이 주는 막막함과 두려움을 감출 수 없다. 이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야곱과 독대하신다! 걱정마라! 이 모든 일은 나의 계획대로 되어지는 일이다. 애굽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 말아라! 내려갈 때부터 다시 올라올 때까지 내가 함께 한다! 가족 70명으로 내려가지만 민족이 되어 나올 것이다. 너의 죽음을 요셉이 지킬 것이다.
-애굽으로 내려가던 야곱은 브엘세바에 이르자 거기서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다. 이곳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언약을 갱신하신 곳이다(창 21:31~33). 야곱은 분명 약속의 땅을 떠나면서 하나님께 허락을 받기 위해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고, 또 기근을 피해 어쩔 수 없이 떠나는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에 옳다 싶으면 앞뒤 가리지 않았던 옛날의 야곱이 아니었다. 야곱처럼 환경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여주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청종하면서 대답을 들어야 한다.
-얼마나 놀라운가! 하나님이 이끄시는 인생은 이처럼 “약속”에 따라 움직이는 인생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시며 그에게 애굽행을 허락하신다. 그리고 혼자 보내지 않고 자신도 동행하겠다는 복된 약속도 주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니 애굽이라도 안전할 것이다. 애굽의 안전은 요셉이나 애굽 땅의 부요가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자손 번성의 약속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을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이 4대만에 번성케 하여 다시 약속의 따응로 친히 이끌고 나오실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4대 내내 이 백성의 안전을 책임져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애굽에서 안전하게 살면서도 늘 나그네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실제 애굽을 떠날 때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낳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대로 선민의 수가 장정만 70만명에 이르게 하셨다.
-한편 야곱의 족보에서 강조되는 것은 유다의 아들들과 라헬이 낳은 아들들이다. 유다는 베레스와 세라, 그리고 베레스의 아들 헤스론과 하물까지 기록하고 있고, 라헬에게만 유독 ‘야곱의 아내’라는 호칭을 불러서 강조한다. 야곱의 영적인 장자는 유다가, 육적인 장자는 라헬의 아들 요셉이 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셉은 70명의 이스라엘(가족)을 구원하고, 다른 한 사람 유다는 그 후손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야곱의 가족 명부에는 이례적으로 여러 여인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남성들만의 이야기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온 다섯 명의 여인도 이러한 정신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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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해와 달, 열 한별이 엎드리다(16-20절)
태양신의 아들, 자신이 곧 태양인 바로가 요셉의 형제들에게 이른 말은 왕이 내리는 명령(조서)와 같은 형식이지만 내용은 가족들에게 하듯 세밀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 인상을 준다. 요셉의 말이기는 하지만 창 45:8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셨다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본문을 이어 생각한다면 바로의 반응은 자신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모시는 상황으로 바라보면 지극히 자연스럽다.
바로의 선대는 왕이 신하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받드는 공경이 묻어 있다. 요셉이 해와 달,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 이렇게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형식적인 엎드림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엎드림으로 이루어졌다. “이집트에서 가장 좋은 땅을 드릴 터이니, 그 기름진 땅에서 나는 것을 누리면서….(새번역_18절)” “이집트 온 땅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땅이 그들의 것이 될 터이니…(새번역_20절)” 바로는 요셉의 가족들을 마음을 다해 ‘아버지의 가족’처럼 선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바로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새번역_8절)”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다. 요셉을 노예로 내몰아 애굽으로 내던져지게 한 이해 못 할 섭리다. 노예로 내던져졌으나 총리의 자리로 오르기까지 “하나님이” 섭리하신 놀라운 은혜다. 결국 꿈을 주신대로 이루시는 섭리다. 그 과정이 요셉이 원하는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완성된 섭리다.
흉년이 아직 다섯 해나 남은 시점에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을 안전히 보호하기에 충분한 여건을 미리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이를 위해 온 애굽이 요셉에게 큰 빚을 지게 하신 결과다. 하나님의 섭리는 예측불가지만 그의 뜻을 믿고 순종하며 성실하게 걷다보면 어느새 완성되어 누리게 하신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헛되이 붙잡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하루를 그저 하나님 뜻대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라는 고백처럼 의지하고 살 때 “때”가 되면 찬란하게 누리게 되는 은혜다.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꿈 꾸게 하신대로, 요셉은 그 놀라운 정점을 누리고 있다.
2.요셉의 여행 준비(21-24절)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정점을 누리는 순간에도 요셉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지키고 나누려고 세밀하게 반응한다.
먼저 형제들에게 바로가 명령한 대로 수레 여러 대를 내주고 여행길의 먹을 것도 내어 준다(21절). 이것은 바로의 궁에서 내온 것들일 것이다. 형제들에게는 새 옷 한 벌씩을 선물로 준비한다. 베냐민에게는 특히 용돈과 옷을 다섯벌이나 주었다(22절). 여기에 ‘아버지에게 드릴 또 다른 예물’을 마련한다. “…이집트에서 나는 귀한 물건을 수나귀 열 마리에 나누어 싣고, 아버지가 이집트로 오는 길에 필요한 곡식과 빵과 다른 먹거리는 암나귀 열 마리에 나누어 실었다(새번역_23절).” 분량 자체가 어마 어마하다.
요셉은 아끼지 않는다. 형제들을 만난 기쁨에 베풀고 베푼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이런 공동체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신 이 땅에서의 부와 명예, 권력은 이렇게 나누고 섬기도록 허락하셨음을 알고, 머리 속 지식에 머물게 하지 말고 행동하는 베풂이 기쁨을 배가 시킴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이보다 더 중요한 행간은 요셉의 용서와 화해는 진실하다는 것이다. 바로가 선대하니 나도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형식적인 베풂이 아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선물뿐 아니라 오가는 여정의 준비까지 완벽하게 준비한다. 온 가족이 내려와야 하기에 그에 걸맞는 치밀한 준비를 함께 배려한다. “이집트의 진귀한 물건은 수나귀 열 마리에…이집트로 오는 길에 필요한 곡식과 빵과 다른 먹거리는 암나귀 열마리에 나누어 실었다(새번역_23절)”
애굽과 가나안을 오가는 여정은 단순한 일정이 아니다. 가나안의 살림을 모두 정리하고 가축들도 함께 내려와야 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상당 기간 소요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선물과 곡식을 싣고 올라간 나귀들의 등에 다시 가족들의 짐을 싣고 내려 올 것이다. 그러나 굳이 수나귀, 암나귀 각 열마리씩 준비한 것은 그 기간에라도 자연스럽게 나귀들이 불어나도록 염두 한 것이 틀림없다. 또 여행중의 우유 공급도 염두한 듯 하고… 요셉은 이렇게 지혜롭고 치밀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시는 길에 서로들 탓하지 마십시오(새번역_24절)”라고 당부한다. 이것은 형제들이 여행 중에 갈등하지 말라는 의미로 대부분 받아들이지만,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는데 굳이 이런 다툼을 다시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와 관련된 유대 주석가들의 해석은 여행길에서 늘상 마주치는 노상강도를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귀중품과 물건을 싣고 가나안으로 돌려 보내는데 요셉이 어느 정도의 경호원을 함께 보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살아있는 것을 알릴 때 자신들의 과거 범죄의 책임 공방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찌 되었든, 요셉은 지금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은혜들에 이런 상황들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고하게 행동으로 보여준다.
충분히 정죄하고 판단할 수 있음에도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기에 그저 감사하며 용서와 화해를 이룬 마당에 과거의 행적에 얽매여 마음을 빼앗기고, 다시 그 선하지 못한 감정에 휘둘려서 이 기쁨의 여정이 훼손되지 않기를 최선을 다해 점검하는 모습으로 나에게는 비춰진다. 화해하여 아낌없이 선물을 베풀고 용서 했으니, 더 이상 과거의 책임 유무,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으며, 너무나 사랑하기에 가장 귀한 것, 오가는 모든 여행 물품을 넘치도록 여유롭게 준비하는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귀한 은혜를 지키며 누리려는 모습이 읽힌다. 나도 그리해야겠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지키기를 베풀고 나누며 누려야지. 말로도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 깨어 있어 노력해야 겠다.
3.내 아들 요셉이 살아있다니! 암, 가고 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25-28절)
상상해 보았다! 그 웅장한 수레 행렬이 야곱의 집에 도착하고, 형제들이 내려서 야곱의 장막으로 들어가 “오매불망” 애굽으로 내려간 베냐민을 기다리며 수심에 가득차 있던 그에게 아들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때, 야곱은 꿈 꾸는 것 같았을 것이다.
이것이 꿈이 아니라 생시인 것을 알아 차리게 한 것은 한껏 흥분하여 말하는 아들들의 아우성이 아니었다. 베냐민의 흥분된 목소리도 아니었다. “….이 말을 듣고서 야곱은 정신이 나간 듯 어리벙벙하여, 그 말을 곧이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요셉이 한 말을 아들들에게서 모두 전해 듣고, 또한 요셉이 자기를 데려오라고 보낸 그 수레들을 보고 나서야, 아버지 야곱은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새번역_26-27절).”
열한명의 아들들이 식량을 가지고 다시 돌아 온 것 만으로도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출발한 그 날부터 계속 ‘오매불망’ 바랬던 일이었을 것이다. 늘상 꿈 꾸었을 것이다. 아들들이 돌아온 그 날도 어쩌면 전날 밤 꿈을 꾸었든지, 낮잠을 자다 꿈을 꾸었든지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돌아왔다. 더구나 아들들이 전해 준 말은 그야말로 “꿈 같은” 이야기다. 죽은 줄 알고 그렇게 힘들었던 요셉이 살아있고 더구나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니… 그렇지! 이것은 꿈이다…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이 보낸 애굽의 수레들… 아마 이 수레는 평범한 수레가 아니었을 것이다. 왕궁에서 의전용으로 사용하는 매우 고급스러운, 아마도 야곱은 평생 보지도, 타보지도 못했을 화려한 수레였을 것이다. “그 수레들을 보고서야!”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 내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니! 암, 가고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 하고 이스라엘은 중얼거렸다(새번역_28절).” 하나님의 섭리가 이렇다.
요셉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임했던 “함께하심”의 형통이 22년만에 돌아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요셉의 살아돌아옴이,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형제들의 화해가, 친형을 다시 보리라고 생각조차하지 못했던 베냐민 등등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하나님이” 행하심으로 이루어졌다. 야곱이 바라는 대로가 아니었다. 형제들이 원하는 대로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형통이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죄에 대한 회개와 형제간의 화해가 이루어 지며 야곱의 가족 뿐 아니라 온 애굽 땅과 주변 세계까지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바로 그 ‘형통’이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는?
-요셉의 이야기의 행복한 클라이막스는 “하나님의 뜻”이 일상에서 행복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드러낸다. 이렇게 이루어지기 위해 2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요셉에게는 노예로서의 삶이, 형제들에게는 죄에 대한 자각과 고백과 회개가 이루어지기까지, 야곱에게는 아들을 잃어버리고 비탄에 잠기며 막내 아들도 애굽으로 내려 보내야 하는 결단이 이루어지기까지, 결국 시간이 필요했다. 삶의 모든 걸음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때가 필요하다.
-나의 삶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까지” 필요한 시간 속에 요셉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한다. 형들처럼 죄를 감추고, 속이는 시간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바로의 선대가 인상적이다. 얼마나 요셉을 신뢰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요셉의 요청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요셉을 위해 그렇게 베풀었다. 도전된다. 나의 삶도 나로 인해 공동체가 세상으로부터 선대 받을 수 있도록 올바르게 살아야겠다. 세상을 선함으로 대하며 살아야겠다.
-요셉은 자신을 악함으로 대한 애굽을 선대하였다. 충분히 노예의 신분을 안긴 애굽을 원망하고 대적할 수 있었으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성한다. 성실하게 일을 행한다. 그렇게 애굽을 선대했다. 더 나아가 극심할 7년 흉년을 대비하는 7년의 풍년 기간에 온 힘을 쏟아 준비하였다. 그 선대함이 바로의 선대함으로 돌아왔다.
-바로가 얼마나 요셉을 신뢰 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교회가 일상을 하나님의 선함으로 채워 나간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는 그 시간”에 세상의 선대도 나타나지 않을까? 까닭없는 조롱과 비난과 환난으로만 치부하지 말고 먼저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것이다. 이처럼 바로의 선대는 내 자신과 교회가 세상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일상에서 선함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삶이 하나님의 뜻을 어떤 상황에서도 순종할 수 있게 했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애굽이라는 나라를 살리고, 가족도 지킬 수 있는 역량을 구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형들을 이미 용서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의 실제가 이렇게 중요하다.
-결코 말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추상적일 수 없다. 말로만 고백하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곧 예상치 못한 삶의 환경이 닥치면 그 한계가 곧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난에 처해지면 처해지는대로, 성공하면 성공한대로 말뿐이 신뢰는 불평과 원망, 혹은 교만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오랜 시간 인격적인 관계를 다지고, 온 삶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것을 경험하며 이를 믿음으로 행사하며 뚜벅뚜벅 걷다보면,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의지가 생긴다.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살아온” 요셉으로 인해 형제들도 회복되고 특히 아버지 야곱도 회복된다. 즉 영향력을 끼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오늘 내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내 자신 뿐 아니라 형제들을, 공동체를 살린다는 의미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신뢰하며 인생의 걸음을 걷는 이들로 인해 공동체가 살아난다. 주위의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반응하게 된다. 주위의 환경이 어떠하든 오늘 내가 하나님을 신뢰함을 꿋꿋히 지키고 누리며 사는 것이 곧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사리며, 교회를 살리는 길이다.
*오늘 나는 “살리는” 삶을 살 것인가? “감추고, 속이며” 범죄하며 살 것인가? 오늘을 살리는 삶이 내일도 살린다. 내가 신뢰함으로 살아갈 때, 공동체도 신뢰가 살아난다. 요셉의 신실한 하나님과의 동행과 신뢰함이 온 애굽을 기근에서도 기쁨이 그치지 않게 했다. 요셉의 신실한 동행이 형제들을 회복시켰다. 요셉의 신실한 동행이 바로와 신하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요셉의 기쁨이 자신들의 기쁨이 되었다. 요셉의 신실한 동행이 야곱을 살려냈다! 나의 하나님과의 신실함 동행을 멈추지 말아야 할 분명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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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24일 주보
♥호스트패밀리 모집 – 호스트패밀리는 유학생과 함께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공부하는 외국인 유학생의 믿음의 가족이 되어 정서적 지지와

2026년 5월 17일 주보
♥축복 – 다음세대 양육을 감당하는 교사들을 축복합니다. 교사들의 수고와 헌신으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다음세대를 세워져 가는 것을 잊으면

2026년 5월 10일 주보
우리의 2026년은 “더 예수님처럼, 더욱더 하나님 나라”를 꿈꿉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하나님 나라 진실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더온누리교회 전임 및 파트 교역자 청빙 공고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갈 동역자를 기다립니다. 전주 더온누리교회(www.theonnuri.org)에서 함께

#더온누리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은혜를 함께 나눠요. instagram에서 "#더온누리교회"를 태그해 주세요:)
홀리빛키! 😆✨
우연이 아닌 은혜 🙌
아이들을 위한 축제
더온누리 홀리빛키가
많은 성도님들의 기도와 후원 가운데
은혜롭게 마무리되었습니다 🤍
웃음이 가득했고
행복이 넘쳤던 하루
마음껏 뛰어놀고
함께 웃으며
사랑을 나누었던 그날의 모습을 전합니다 ✨
아이들의 웃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했던 시간 🫶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홀리빛키
#어린이축제 #다음세대 #은혜 #교회행사
#플리마켓 #키즈페스티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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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풍요의 중심이 아니라,
구별된 자리.
눈에 띄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 머무는 곳.
이번 주일,
창세기 46:28~47:12 말씀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정을
고센으로 이끄셨는지 함께 묵상합니다.
“왜 고센이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가장 안전하고,
가장 은혜로운 자리로
우리를 이끄고 계십니다.
적용찬양 : 은혜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고센땅
#하나님의인도하심
#은혜
#주일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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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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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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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더 깊은 선교학교]
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삶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듯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세상을 향해
복을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
2026 더깊은 선교학교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배우고
선교의 비전을 함께 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
📖 2026 더깊은 선교학교
🗓 06.20 - 07.25 매주 토요일 (6주간)
📍 굿윌센터 2F
🎤 이효재 목사
🎤 주누가 선교사
🎤 김종홍 목사
✈ 단기선교
8월 1일(토) - 8월 4일(화), 일본
🎓 수료식
8월 23일(주일) 2부 예배
—
하나님이 찾으시는
복의 통로로 함께 세워지길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THE MISSION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더깊은선교학교
#선교 #더미션 #복의통로 #단기선교
#일본선교 #mis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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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성,
목자의 힘 🙏
사람을 세우는 힘은
화려함이 아니라
진심에서 시작됩니다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며
다시 붙드는
목장의 본질
주님이 맡기신 영혼을 위해
오늘도 걸어갑니다 🤍
—
더온누리교회
2026 목자수련회
“진정성, 목자의 힘, 목장의 본질”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목자수련회
#목장 #목자의삶 #공동체 #진정성
#리더십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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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낮아진 자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억울함과 외로움,
그리고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도
믿음은 시선을 다시 하늘로 향하게 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9:1-10 말씀을 통해
바닥 같은 인생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묵상합니다.
“바닥에서 하늘을 보다”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길을 여십니다.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요셉의믿음
#하나님을바라보다
#믿음의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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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리에는
결국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분노와 상처,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선택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하나님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번 주일,
창세기 34:18-31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잊어버린 삶이
어디로 흘러가게 되는지 깊이 묵상합니다.
“잊혀진 하나님, 드러난 잔혹함”
어둠 속에서도
다시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적용찬양 : 깨어진 세상을 끌어안고
이번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말씀나눔
#창세기
#신앙의경고
#하나님없는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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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익숙함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때로
낯설고 어색한 길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떠나야 할 때를 알면서도
머물고 싶은 마음,
그러나 그 부르심 앞에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믿음.
창세기 31:1-16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운 길을 걷는 믿음을 묵상합니다.
“익숙함을 떠나
어색한 약속의 땅으로”
익숙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결단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만나요.
—
#더온누리교회
#주일예배
#예배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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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믿음의걸음
#하나님의인도하심
#순종의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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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온누리교회
초등 2부 율동 🫶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초등부
#어린이예배 #율동 #소문의낙원
#예수님 #귀여움 #churchkids 🥺✨
지치고 힘들어요? 🥺
예수님 안에는
아픈 것도 없고
외로운 것도 없어요 🤍
우리 같이 가요!
소문의 낙원으로 ✨
—
더온누리교회
초등 2부 율동 🫶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초등부
#어린이예배 #율동 #소문의낙원
#예수님 #귀여움 #churchkids 🥺✨
...
✨ 향기로운 금요일 안내
하나님 앞에 서는 용기,
믿음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
이번 금요일,
다윗의 고백과 결단을 통해
우리의 삶에도
믿음의 용맹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다윗의 용맹”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나아갔던 다윗처럼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서는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 : 목사 장필조
찬양인도 : 목사 이홍기
—
📖 본문
사무엘상 17:28-40
—
🎶 Worship List
부흥의 세대
성령의 불타는 교회
부흥이 있으리라
무릎 꿇고 엎드리니
다시 한 번
나의 주 크고 놀라운 하나님
—
4월 24일 금요일 밤,
찬양과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을
함께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
#더온누리교회 #향기로운금요일 #금요예배 #찬양예배
#전주교회 #전주 #말씀 #예배 #부흥 #기도 #전주찬양팀 #전주집회 #찬양집회
@fragrant_worship
✨ 향기로운 금요일 안내
하나님 앞에 서는 용기,
믿음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
이번 금요일,
다윗의 고백과 결단을 통해
우리의 삶에도
믿음의 용맹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다윗의 용맹”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나아갔던 다윗처럼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서는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 : 목사 장필조
찬양인도 : 목사 이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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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사무엘상 17: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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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rship List
부흥의 세대
성령의 불타는 교회
부흥이 있으리라
무릎 꿇고 엎드리니
다시 한 번
나의 주 크고 놀라운 하나님
—
4월 24일 금요일 밤,
찬양과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을
함께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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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온누리교회 #향기로운금요일 #금요예배 #찬양예배
#전주교회 #전주 #말씀 #예배 #부흥 #기도 #전주찬양팀 #전주집회 #찬양집회
@fragrant_worship
...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서 더합니다 🤍
사랑을 더하고
마음을 나누고
공동체 안에서
하나 되어가는 시간
“연합”
더함공동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
—
2026 더함공동체 수련회
📍 서천 청소년 수련관
📅 5.23 - 5.24
함께여서 더 깊어지는 시간
이번엔 같이 가요 🙌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 #더함공동체 #공동체 #연합
#교회수련회 #전주교회 #전주
#사랑나눔 #함께 #churchfamily 🤍✨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서 더합니다 🤍
사랑을 더하고
마음을 나누고
공동체 안에서
하나 되어가는 시간
“연합”
더함공동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
—
2026 더함공동체 수련회
📍 서천 청소년 수련관
📅 5.23 - 5.24
함께여서 더 깊어지는 시간
이번엔 같이 가요 🙌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 #더함공동체 #공동체 #연합
#교회수련회 #전주교회 #전주
#사랑나눔 #함께 #churchfamily 🤍✨
...
이거 완전 홀리빛키잖아?! 😆✨
세상의 운(Lucky)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
우리 아이들이
마음껏 웃고 뛰어노는 하루
—
🎈 2026 홀리빛키데이 🎈
📅 5월 16일 (토요일)
신나는 에어바운스
🎮 다양한 게임
🎨 내손으로 만드는 체험
🍿 먹거리까지!
그리고
함께 나누는 기쁨
🛍 플리마켓 OPEN
—
💛 물품 기부도 받습니다
아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 도서 / 👕 의류 / 🧸 장난감
📍 1층 사무실
🗓 5월 12일(화)까지
작은 나눔이
큰 기쁨이 됩니다 🤍
—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홀리빛키데이
#어린이행사 #플리마켓 #기부 #나눔
#교회행사 #키즈이벤트 😆✨
이거 완전 홀리빛키잖아?! 😆✨
세상의 운(Lucky)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
우리 아이들이
마음껏 웃고 뛰어노는 하루
—
🎈 2026 홀리빛키데이 🎈
📅 5월 16일 (토요일)
신나는 에어바운스
🎮 다양한 게임
🎨 내손으로 만드는 체험
🍿 먹거리까지!
그리고
함께 나누는 기쁨
🛍 플리마켓 OPEN
—
💛 물품 기부도 받습니다
아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 도서 / 👕 의류 / 🧸 장난감
📍 1층 사무실
🗓 5월 12일(화)까지
작은 나눔이
큰 기쁨이 됩니다 🤍
—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 #전주교회 #전주 #홀리빛키데이
#어린이행사 #플리마켓 #기부 #나눔
#교회행사 #키즈이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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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금요일 예배 안내]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를 채우시고,
그 은혜 안에서 찬양하게 하시는 하나님.
이번 금요일,
에베소서 1:3-14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광스러운 찬양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삶”
삶의 자리에서 드리는 고백이
단순한 노래를 넘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인도 : 배지완
—
Worship List
감사와 찬양드리며
나의 가장 낮은 마음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하나님의 부르심
나는 찬양하리라
날 자녀라 하시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위대하신 주
나의 하나님
예배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주의 손이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
금요일 밤,
찬양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을
함께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향기로운금요일
#금요예배
#찬양예배
[향기로운 금요일 예배 안내]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를 채우시고,
그 은혜 안에서 찬양하게 하시는 하나님.
이번 금요일,
에베소서 1:3-14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광스러운 찬양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삶”
삶의 자리에서 드리는 고백이
단순한 노래를 넘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인도 : 배지완
—
Worship List
감사와 찬양드리며
나의 가장 낮은 마음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하나님의 부르심
나는 찬양하리라
날 자녀라 하시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위대하신 주
나의 하나님
예배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주의 손이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
금요일 밤,
찬양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을
함께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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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온누리교회
#향기로운금요일
#금요예배
#찬양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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