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묵상
매일의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오늘의 매일묵상
바울처럼 이런 목사가 되어야 하는데… [고전 7:25-40]
2026년 06월 12일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2026년 06월 12일
바울처럼 이런 목사가 되어야 하는데…
[고전 7:25-40]
결혼, 독신, 이혼에 대하여 권면한 후 “약혼한 사람이 결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과 과부에 대한 부분을 다룬다. 이제까지 연구된 자료들에 의하면 당시 고린도 지역은 어느 정도 지속된 기근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사회 전반에 걸친 여러 병리 현상들이 나타났는데, 7장 초반부 부부관계와 연관된 출산기피 현상이 일어났고 약혼한 사람들은 결혼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현상들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결혼을 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는 원론적인 제안을 했지만, 지속되는 환난(기근)으로 인해 애써 결혼을 장려하지는 않은 듯하다(26절).
정말 참신한 것은 이런 권면의 근거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명령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아끼는 바울의 마음 표현, 즉 개인적인 권면을 그대로 적었다는 것에 있다. 주님께서 직접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것이 없지만, 주님께 자비로 부르심을 받은 사도로서 권면한다고 했다. 즉 오늘날의 상황으로 이해하자면 목회자로서의 권면이다. 절대 진리가 아니라는 의미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 이 사회의 씁쓸한 단면으로 청년들이 푸념하는 “7포(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내집, 희망, 꿈) 세대”, “헬조선”의 밑바탕에 깔린, 청년 실업, 빚(대학 학자금) 잔치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상황이나, 각종 가계 부채 등의 현실이 어쩌면 상황은 다르지만, 기근으로 인해 심각한 곤란을 겪으며 이런 상황에서 출산, 결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었다. 이런 모습은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상황속에 있는 현 세대의 고민과 맞닿아 있는 실제적인 문제들이다. 이 시대의 전반적인 사회상황 속에서 결혼 포기와 같은 실제적인 고통의 문제에 목회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사도 바울의 고민을 통해 살펴보자.
1. 교리가 아니라 공감
삶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직면하며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고뇌에 대해 바울의 공감하는 답변이 두드러진다. 당시 지속되는 기근속에 있는 고린도 상황에 따른 어려워진 삶의 모습에 대한 주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은 없다. 하지만 어려워진 삶의 영향이 결혼과 출산이라는 하나님의 창조명령과 연관된 것이어서 이를 어떻게 적용할까는 성도들의 고민이 되기에 충분했다.
바울은 기근에 지쳐 결혼과 출산 조차도 포기하려는 당시 세상의 고민에 상당히 공감한다. 그래서 “주님의 명령”은 아니지만 주님의 자비로우심을 기대하며 고통에 반응하셨던 주님처럼 기근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굳이 결혼 하지 않아도 된다며 그들의 고민과 아픔을 함께 어루만진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권면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을 유익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지, 여러분에게 올가미를 씌우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품위 있게 살면서, 마음에 헛갈림이 없이, 오직 주님만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새번역_35절)”
바울의 이런 가르침의 핵심은 결혼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하게 사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바울은 현재 혼자인 사람들에게 그냥 지내라고 권한다(25~28절). 결혼 자체는 은사에 따라 각자가 선택할 사안이지만, 현재 지속되는 기근과 임박한 환난의 때가 되면 결혼한 사람들이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종말론은 경계해야 하지만, 종말론적인 시각은 성도가 추구해야 할 영원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이 땅의 모든 것(소유, 지위, 관계, 결혼 등)을 ‘상대화’하며 살게 한다.
어려운 기근의 시대를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품위있게 살면서, 실제적인 삶의 유익을 누리고 마음의 고민됨 없이 “주님을 섬기게”하려는 것이다. 삶과 동떨어진 현장감 없는 교리로 주님의 가르침을 화석화시키지 않고 고통의 현장에서 위로와 격려가 되는 공감으로 오히려 더욱 “주님만을 섬기며”살아가도록 돕는다. 바울의 공감 능력이 큰 도전이 된다.
성도는 현재를 살지만 늘 마지막 때를 의식하며 산다(29절). 그 때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예비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른 도래(재림)와 함께 자신의 이른 죽음(짧은 인생)도 인식하며 산다. 이런 삶의 태도는 성도에게 방종이 아닌 긴장을 품으며 살게 한다. 이 세상과 함께 지나가고 끝날 인생을 살고 있다면 어서 주의 뜻을 구하고 따르는 삶으로 돌아서야 한다.
성도는 ‘지나가고 사라질’ 이 세상에 연연하거나 얽매이지 말고 살아야 한다(30~31절). 세상에 대한 도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사물에 대한 관심이 지나쳐서 집착이 되고 욕구를 넘어 욕망이 되는 것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또한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사건을 영원의 관점(영적인 안목)에서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주님에게 속한 자유인(22절)으로서 이 세상이 전부인 듯 살지 않고 이 세상의 노예로 살지 않는 것이다.
2. 현실적인 대안 제시
이 세상의 자취와 함께 결혼 제도도 사라질 날이 올 것이다(32~39절). 바울은 결혼이 영원무궁한 지고의 가치도 아니고(막 12:25), 주를 향한 헌신에 걸림돌이 될 수 있기에 결혼 자체를 절대화할 수 없다고 말한다. 특히 바울이 독신의 유익을 말하는 이유는 성도들이 주님을 향한 헌신의 삶을 방해할 수 있는 생의 염려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결혼이든 재혼이든 독신이든 더 나은 것이 항상 더 옳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조건이 아니라 마음이다. ‘주 안에서(39절)’ 선택하고 ‘주를 위한(32절) 삶보다 더 가치 있고 고귀한 명분은 없다.
바울의 권고는 강요나 명령이 아니다(40절). 바울은 주의 명령과 자신의 사견을 구분하여 각자의 판단을 존중한다. 자신의 견해가 모든 경우에 절대적인 원칙으로 통용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나와 다른 견해를 틀린 것처럼 나눠서 공동체의 분열을 야기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태도와 상반된다. 이처럼 ‘성령의 인도’는 우리 자신의 신중한 고려를 해체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한편, 바울은 공감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지속되는 기근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며 대안을 제시한다. 본문의 전체적인 흐름을 정리하자면 대충 이렇다. 결혼은 삶의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결정과 이에 따른 책임감이다. 현실적인 기근의 어려움에 따라 결정한 어떤 것이든 이에 따른 책임을 지면 된다. 하지만 이를 결정할 때는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의 기준이어야 한다. 즉 주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고민과 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또 목회자로서 바울의 입장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는 모든 권면은 성도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거다. 비록 주님의 명령이 아닌 개인적인 권면이지만, 지속되는 기근의 상황에서 성도들이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거다. 주님과의 관계도 지속적으로 잘 이어가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성도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선택과 결정을 성도들이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사도이기에 충분히 결정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지만, 여러 가능성들을 설명해 줌으로서 성도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돕는다. 매우 현실적인 대안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돕는 것이다.
나는?
-종말의 때를 사는 우리는 인생에서 만나는 기쁜 일이나 슬픈 일 모두 상대화할 줄 알아야 한다. 무슨 일을 만나든 더 이상 희망이 남지 않은 사람처럼 슬퍼하지도 말고,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는 사람처럼 기뻐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누릴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벌써 소유하고 있고 또 언젠가 그 생명을 온전히 누리게 될 날이 올 것을 믿기 때문이다.
-자기 소유를 우상처럼 떠받들지 말고 상대화해야 한다. 돈이든 권력이든 때가 다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것들이 우리의 영원한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따라서 영에 속한 우리는 소비 능력이나 소유로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이 시대 풍조를 거슬러야 한다. 세상 속에서 불편을 감수하고 선을 행하고도 선한 대가로 돌려받지 못할 각오도 해야 할 것이다.
-결혼보다 중요한 것은 부르심에 충실한 것이다.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독신이나, 결혼, 재혼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 내가 기대했던 삶이 내 앞에 전개되지 않더라도 그 조건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는 자리임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종말을 사는 방법이다.
-바울의 목회자적인 모습이 큰 위로가 된다. 오랜 기근 가운데 고민하는 결혼과 출산… 고민되게 하는 세상 여건을 어떻게 하려는 것 보다 그 환경 속에서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를 고민하게 하는 바울이 도전이 된다. 무의미한 위로와 격려가 아닌 치열한 고민의 시간으로 이끌어가는 바울이 대단하다.
-주님의 가르침을 책 속에만 두지 않는다. 개인적인 권면임을 전제하고 기근으로 인해 고통 스럽고 고뇌하는 삶의 실제적인 문제 안에서 실제적인 권면을 주저하지 않는다. 실제적인 권면이라지만, 사실은 성도 스스로가 깨닫고 결정하도록 배려하고 이에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한다. 결국 살아내야 할 이는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교리에 천착하는 목회자가 아니라 상황과 여건에서 “오직 주님을 바라보도록” 공감하고 권면하는 목회자이기를 꿈꾼다.
-성도들의 영혼에 유익하게 하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품위있는 삶을 추구하며, 오직 주만 섬길 수 있도록 돕는 것…. 이것이 목회작의 사명이 아닌가… 교리가 먼저이기 보다 공감이 먼저인 목사, 세상을 살면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는 선택과 결정을 도와주는 목사, 성도의 아픔과 고뇌를 이해하고 피상적인 말씀이 아니라 현실적인 말씀으로 유익을 얻게하고 자신들의 선택과 결정을 꿋꿋하게 감당하며 나가도록 도와주는 목사… 오! 주님 … 이런 목사가 되면 좋겠습니다.
정말 참신한 것은 이런 권면의 근거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명령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아끼는 바울의 마음 표현, 즉 개인적인 권면을 그대로 적었다는 것에 있다. 주님께서 직접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것이 없지만, 주님께 자비로 부르심을 받은 사도로서 권면한다고 했다. 즉 오늘날의 상황으로 이해하자면 목회자로서의 권면이다. 절대 진리가 아니라는 의미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 이 사회의 씁쓸한 단면으로 청년들이 푸념하는 “7포(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내집, 희망, 꿈) 세대”, “헬조선”의 밑바탕에 깔린, 청년 실업, 빚(대학 학자금) 잔치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상황이나, 각종 가계 부채 등의 현실이 어쩌면 상황은 다르지만, 기근으로 인해 심각한 곤란을 겪으며 이런 상황에서 출산, 결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었다. 이런 모습은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상황속에 있는 현 세대의 고민과 맞닿아 있는 실제적인 문제들이다. 이 시대의 전반적인 사회상황 속에서 결혼 포기와 같은 실제적인 고통의 문제에 목회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사도 바울의 고민을 통해 살펴보자.
1. 교리가 아니라 공감
삶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직면하며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고뇌에 대해 바울의 공감하는 답변이 두드러진다. 당시 지속되는 기근속에 있는 고린도 상황에 따른 어려워진 삶의 모습에 대한 주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은 없다. 하지만 어려워진 삶의 영향이 결혼과 출산이라는 하나님의 창조명령과 연관된 것이어서 이를 어떻게 적용할까는 성도들의 고민이 되기에 충분했다.
바울은 기근에 지쳐 결혼과 출산 조차도 포기하려는 당시 세상의 고민에 상당히 공감한다. 그래서 “주님의 명령”은 아니지만 주님의 자비로우심을 기대하며 고통에 반응하셨던 주님처럼 기근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굳이 결혼 하지 않아도 된다며 그들의 고민과 아픔을 함께 어루만진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권면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을 유익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지, 여러분에게 올가미를 씌우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품위 있게 살면서, 마음에 헛갈림이 없이, 오직 주님만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새번역_35절)”
바울의 이런 가르침의 핵심은 결혼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하게 사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바울은 현재 혼자인 사람들에게 그냥 지내라고 권한다(25~28절). 결혼 자체는 은사에 따라 각자가 선택할 사안이지만, 현재 지속되는 기근과 임박한 환난의 때가 되면 결혼한 사람들이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종말론은 경계해야 하지만, 종말론적인 시각은 성도가 추구해야 할 영원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이 땅의 모든 것(소유, 지위, 관계, 결혼 등)을 ‘상대화’하며 살게 한다.
어려운 기근의 시대를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품위있게 살면서, 실제적인 삶의 유익을 누리고 마음의 고민됨 없이 “주님을 섬기게”하려는 것이다. 삶과 동떨어진 현장감 없는 교리로 주님의 가르침을 화석화시키지 않고 고통의 현장에서 위로와 격려가 되는 공감으로 오히려 더욱 “주님만을 섬기며”살아가도록 돕는다. 바울의 공감 능력이 큰 도전이 된다.
성도는 현재를 살지만 늘 마지막 때를 의식하며 산다(29절). 그 때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예비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른 도래(재림)와 함께 자신의 이른 죽음(짧은 인생)도 인식하며 산다. 이런 삶의 태도는 성도에게 방종이 아닌 긴장을 품으며 살게 한다. 이 세상과 함께 지나가고 끝날 인생을 살고 있다면 어서 주의 뜻을 구하고 따르는 삶으로 돌아서야 한다.
성도는 ‘지나가고 사라질’ 이 세상에 연연하거나 얽매이지 말고 살아야 한다(30~31절). 세상에 대한 도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사물에 대한 관심이 지나쳐서 집착이 되고 욕구를 넘어 욕망이 되는 것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또한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사건을 영원의 관점(영적인 안목)에서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주님에게 속한 자유인(22절)으로서 이 세상이 전부인 듯 살지 않고 이 세상의 노예로 살지 않는 것이다.
2. 현실적인 대안 제시
이 세상의 자취와 함께 결혼 제도도 사라질 날이 올 것이다(32~39절). 바울은 결혼이 영원무궁한 지고의 가치도 아니고(막 12:25), 주를 향한 헌신에 걸림돌이 될 수 있기에 결혼 자체를 절대화할 수 없다고 말한다. 특히 바울이 독신의 유익을 말하는 이유는 성도들이 주님을 향한 헌신의 삶을 방해할 수 있는 생의 염려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결혼이든 재혼이든 독신이든 더 나은 것이 항상 더 옳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조건이 아니라 마음이다. ‘주 안에서(39절)’ 선택하고 ‘주를 위한(32절) 삶보다 더 가치 있고 고귀한 명분은 없다.
바울의 권고는 강요나 명령이 아니다(40절). 바울은 주의 명령과 자신의 사견을 구분하여 각자의 판단을 존중한다. 자신의 견해가 모든 경우에 절대적인 원칙으로 통용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나와 다른 견해를 틀린 것처럼 나눠서 공동체의 분열을 야기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태도와 상반된다. 이처럼 ‘성령의 인도’는 우리 자신의 신중한 고려를 해체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한편, 바울은 공감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지속되는 기근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며 대안을 제시한다. 본문의 전체적인 흐름을 정리하자면 대충 이렇다. 결혼은 삶의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결정과 이에 따른 책임감이다. 현실적인 기근의 어려움에 따라 결정한 어떤 것이든 이에 따른 책임을 지면 된다. 하지만 이를 결정할 때는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의 기준이어야 한다. 즉 주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고민과 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또 목회자로서 바울의 입장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는 모든 권면은 성도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거다. 비록 주님의 명령이 아닌 개인적인 권면이지만, 지속되는 기근의 상황에서 성도들이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거다. 주님과의 관계도 지속적으로 잘 이어가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성도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선택과 결정을 성도들이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사도이기에 충분히 결정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지만, 여러 가능성들을 설명해 줌으로서 성도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돕는다. 매우 현실적인 대안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돕는 것이다.
나는?
-종말의 때를 사는 우리는 인생에서 만나는 기쁜 일이나 슬픈 일 모두 상대화할 줄 알아야 한다. 무슨 일을 만나든 더 이상 희망이 남지 않은 사람처럼 슬퍼하지도 말고,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는 사람처럼 기뻐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누릴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벌써 소유하고 있고 또 언젠가 그 생명을 온전히 누리게 될 날이 올 것을 믿기 때문이다.
-자기 소유를 우상처럼 떠받들지 말고 상대화해야 한다. 돈이든 권력이든 때가 다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것들이 우리의 영원한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따라서 영에 속한 우리는 소비 능력이나 소유로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이 시대 풍조를 거슬러야 한다. 세상 속에서 불편을 감수하고 선을 행하고도 선한 대가로 돌려받지 못할 각오도 해야 할 것이다.
-결혼보다 중요한 것은 부르심에 충실한 것이다.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독신이나, 결혼, 재혼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 내가 기대했던 삶이 내 앞에 전개되지 않더라도 그 조건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는 자리임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종말을 사는 방법이다.
-바울의 목회자적인 모습이 큰 위로가 된다. 오랜 기근 가운데 고민하는 결혼과 출산… 고민되게 하는 세상 여건을 어떻게 하려는 것 보다 그 환경 속에서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를 고민하게 하는 바울이 도전이 된다. 무의미한 위로와 격려가 아닌 치열한 고민의 시간으로 이끌어가는 바울이 대단하다.
-주님의 가르침을 책 속에만 두지 않는다. 개인적인 권면임을 전제하고 기근으로 인해 고통 스럽고 고뇌하는 삶의 실제적인 문제 안에서 실제적인 권면을 주저하지 않는다. 실제적인 권면이라지만, 사실은 성도 스스로가 깨닫고 결정하도록 배려하고 이에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한다. 결국 살아내야 할 이는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교리에 천착하는 목회자가 아니라 상황과 여건에서 “오직 주님을 바라보도록” 공감하고 권면하는 목회자이기를 꿈꾼다.
-성도들의 영혼에 유익하게 하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품위있는 삶을 추구하며, 오직 주만 섬길 수 있도록 돕는 것…. 이것이 목회작의 사명이 아닌가… 교리가 먼저이기 보다 공감이 먼저인 목사, 세상을 살면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는 선택과 결정을 도와주는 목사, 성도의 아픔과 고뇌를 이해하고 피상적인 말씀이 아니라 현실적인 말씀으로 유익을 얻게하고 자신들의 선택과 결정을 꿋꿋하게 감당하며 나가도록 도와주는 목사… 오! 주님 … 이런 목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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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11일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부르심을 따라
[고전 7:1-24]
7:1~16:12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질문한 사항들에 대한 답변이다(1절). 주로 결혼과 부부관계에 대한 여러 주제들을 짧게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늘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세상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다양하게 접근하고 의견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직면해야 할까?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가 보자.
1. 부부관계, 사탄에게 틈을 내주지 마라(1-5절)
“…..여러분이 절제하는 힘이 없는 틈을 타서 사탄이 여러분을 유혹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새번역_5절하)” 당시 고린도 지역에는 극단적인 쾌락주의와 금욕주의가 부부 관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쾌락주의는 말할 나위 없지만, 바울이 성도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금욕주의를 따르는 일부 성도들의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래서 부부관계에 충실할 것을 권면하며 “음행에 빠질 유혹 때문에(새번역_2절상)” 부부는 서로에게 의무를 다할 것을 말한다(2-3절). 특히 부부관계에 있어서는 자기 몸을 배우자가 주장하도록 가르치면서 예외적으로 기도하는 시간과 같은 때는 분방해도 되지만, 역시 “절제하는 힘이 없는 틈을 타서 사탄이 유혹할 수 있으니” 분방 기간은 짧게 가지라고 한다. 부부관계에 있어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를 위해 섬기는 것이 “음행에 빠질 유혹”이라는 틈을 타서 사탄이 유혹할 수 없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적인 방종과 극단적 금욕’이 공존하던 고린도에서 바울은 성(性)과 결혼에 대한 교인들의 그릇된 이해와 태도를 교정한다. 음행을 피하기 위해 결혼하되, 서로에게 성적인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한 몸’의 연합과 성결을 지키기 위해 서로의 성적 욕구를 존중하고 서로의 영적 필요에 민감하게 섬기는 사랑을 해야 한다.
2. 결혼과 독신, 이혼에 대하여 “화평케 하는 삶”이 중요하다(6-16절).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평화롭게 살게 하셨습니다.(새번역_15절)” 바울은 결혼에 대하여 “음행을 절제 할 수 있다면(이것을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은사라고 표현했다_7절)” 독신으로 살아도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욕이 불 같이 일어 음행을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해야 한다(8-9절). 결혼한 사람들에게는 서로 버리지 말라(이혼하지 말라_10-11절)고 한다. 이것은 주의 명령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는데, 배우자와 이혼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자세히 덧붙인다(12-14절). 하지만 이혼을 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제시한다(15절). 그러면서 이혼을 하지 않느냐, 하느냐에 구애받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화평”케 하는 삶의 의미다.
부부간의 배려와 섬김이 생생하면 이혼 할 일이 있겠는가! 하지만 살다보면 부부관계라도 어려움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특히 바울에게 보낸 질문의 배경은 함께 “믿지 않음”에서 오는 어려움인듯 하다. 그래서 금욕주의의 영향도 있고 , 홀로 믿는 신앙이 좀더 견고하여 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혼에 대한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울은 같은 믿음이 아니어도 배우자가 여전히 자신과 함께 살기를 좋아한다면 “이혼하지 말라”고 한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청년들이 단지 이것 때문에 이혼을 요구하지 말아야 할 근거로, 먼저 믿은 자신을 통해 일어나는 “거룩함”의 전염성 때문이고(14절), 더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이 이런 관계를 통해 일어 날지 누가 알겠는가?(16절)를 제시한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을 통해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 위해 구별되고(거룩하게 되고), 구원의 통로로 사용될 수 있음을 잘 알아야 한다, 어떤 관계 안에 있든지,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는 삶이고, 하나님과 세상의 화평을 가져오는 삶이다.
바울은 자신처럼 독신을 권하면서도 결혼과 독신 모두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기에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7~9절). 그렇기에 획일적인 모방이나 ‘옳고 그름, 좋고 나쁨’에 대한 독단적인 판단을 주의해야 한다. 특히 ‘절제의 은사’없는 독신을 고집하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결혼을 기피하는 현상은 성적 유혹에 취약한 젊은이들로 방종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편, 바울은 이혼에 관하여서는 서로 갈라서지 말라고 호소한다. 결혼 제도를 두신 하나님의 뜻(창 2:20~25)과 이혼을 금하신 그리스도의 명령(막 10:1~12)에 따른 권고다. 또한 이미 이혼한 경우에는 다시 합하거나 그대로 사는 것이 낫다고 한다. 이는 어느 한편에만 해당되는 명령이 아니라 모든 남녀에게 해당하는 명령이다. 성도에게 결혼의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그러니 장담하거나 방심하지 말고 늘 자신을 살피고 배우자를 지키며 주의 은혜를 구하여야 할 것이다.
배우자의 불신은 이혼 사유가 될 수 없다(12~16절). 불신자와 산다고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자의 거룩한 삶에 영향을 받아 배우자와 자녀도 하나님을 알고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 없는 배우자가 갈라서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이혼을 허용한다. 맹목적인 이혼 금지가 가져오는 배우자와 자녀의 삶에 끼치는 더 큰 해악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부르신 대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그와 함께 하는 것으로!(17~24절)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은 복잡했다. 디른 초대 교회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유대인과 비유대인으로, 자유인과 노예로 선명하게 구별된 신분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그 모습(신분)과 상황을 구태여 바꾸려고 하지 말라(17, 20, 24절)고 권면한다.
구원받은 자의 삶은 현실의 신분과 상황에 대한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19절)”,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24절)” 것이다. 할례와 무할례(유대인과 비유대인)가 중요하지 않다. 노예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느냐다.
할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종이다(18~19절). 할례의 유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소명에 장애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의 일차적인 관심은 할례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계명의 참뜻을 깨닫고 부르심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어야 한다. 형식적인 명분으로 불순종을 정당화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며, 주님께 받은 특권과 자격이 나의 불순종을 변호하지 못함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설명이 갖는 의미는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입은 세상의 신분(유대인/비유대인)이나 상황(종, 자유인_상태)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다는 것에 영향을 끼치면 안된다. 자기가 어떤 신분이나 상황에서 부르심을 받았든지 “하나님 나라 백성”된 것을 잊으면 안되고,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신분이나 상태(상황)이 세상을 갈아가는 삶의 질에 영향을 분명하게 주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변질 시킬 수 없고 시키도록 놔두어서도 안된다. 지금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백성은 유대인이든 아니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다.
나는?
-극단적 금욕주의자들은 결혼과 성적 관계를 부정하게 여겼다. 하지만 바울은 인간이 성적인 욕구가 있는 존재임을 인정할 뿐 아니라, 언제든 자제력을 잃고 성적인 유혹에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도 인정한다. 성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결혼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지만, 결혼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임을 환기시킨 것이다.
-또한 성적 권리에 있어서 부부는 평등함을 강조한다. 남편은 아내의 욕구를 존중하고 아내도 남편의 욕구를 충족시킬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 부부가 합의하여 한시적으로 금욕생활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절제하지 못하여 사탄의 시험에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분방하지 말라고 한다.
-어떤 형편에 있든 “부르심을 받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면 그것이 은혜이고 능력이다. 부부관계에 틈을 만들지 않아, 사탄이 이로 틈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음행”이라는 틈이 생기지 않도록 서로에게 “배려와 섬김”으로 사랑해야 한다.
-독신은 은사이다. 이혼도 선택할 수 있다. 성경의 원초적인 가르침은 남과 여, 둘이 한 몸을 이루라 하셨고,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셨지만, 바울은 사견임을 전제로 결혼과 이혼,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고 했다. 큰틀에서의 기준은 “음행”을 이길 수 있다면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되고 화평(신뢰, 사랑)을 깨뜨리는 것이라면 이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될 수만 있으면 이혼을 하지 않기를 권면하는데 “거룩의 전염성(14절)”과 “생명(구원)의 통로”로서 가정에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남편이나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런 일에 구애될(얽매일) 필요는 없다.지금은 성과 결혼에 대한 세상의 풍조를 성경에 비춰보며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신분이나 세상에서의 상황, 위치가 행복의 척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 안에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삶의 목적이자 의미”이다. 그러니 혈통과 같은 신분이나 노예나 자유인 같은 신분이 제약이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다양한 상황과 여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부르심을 받은대로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신분보다 중요한 것은 소명이라는 것이다(21~24절). 바울은 소명에 있어 사회적 신분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사회적으로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주님께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종’이기에, 이제 새로운 신분에 걸맞게 지금 그 자리에서 충성스럽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초월적인 부르심 속에서 지나갈 현 세상의 구조에 대해 초연하고 책임 있는 모습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더 근사한 자리를 찾기보다 새로운 신분에 걸맞는 자부시믕로 영적 품위를 갖추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를 반복하여 강조한다(20, 24절).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는 것은 세상의 신분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할례 받고 안 받고는 아무것도 아니다(19절)”,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 자유인이라도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이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살아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며 실체이다.
*하나님은 모든 교회의 각 사람을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부르셨다. 그리고 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은사를 주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할례 받은 유대인이든 무할례자인 이방인든, 종이든 자유자든 상관없다. 바꿀 수 없다면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일일 아니라면, 그 자리, 그 조건 속에 두신 하나님은 거기서 내가 가장 잘 섬길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다.
*사회적 신분이 종이든 자유인이든 중요하지 않다. 바꿀 기회가 있으면 선용해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유자나 종이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사탄의 지배에서 벗아난 해방된 자요, 둘 다 주께서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디서든 새로운 신분에 걸맞게 사람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 하나님과 함께 거해야 할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세상을 향해 영향력을 끼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부부관계에서부터 신분이나 상황에 상관 없이 말이다.
*부부관계에 사탄이 틈 타지 못하도록, 가정 안에 거룩을 전염시키고, 생명(구원)의 통로가 되도록,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안에 함께 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하나님 백성답게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부르심을 따라” 허락하신 삶의 상황에서 믿음으로 살아내야 할 것이다. 묵상하는 중에 교회 공동체 안의 많은 싱글 성도들이 생각이 났다. 이 묵상의 글이 위로와 도전이 되기를 기도했다. 어떤형편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각자 지금의 상황으로 인도하셨다면, 하나님께서 그 부르심을 따라 선하게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는다. 더욱 주님의 인도하심을 민감하게 간구하고, 분별하여 거룩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리라. “주 안에서” 더욱 “주 안에서” 살아내야 한다.
1. 부부관계, 사탄에게 틈을 내주지 마라(1-5절)
“…..여러분이 절제하는 힘이 없는 틈을 타서 사탄이 여러분을 유혹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새번역_5절하)” 당시 고린도 지역에는 극단적인 쾌락주의와 금욕주의가 부부 관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쾌락주의는 말할 나위 없지만, 바울이 성도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금욕주의를 따르는 일부 성도들의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래서 부부관계에 충실할 것을 권면하며 “음행에 빠질 유혹 때문에(새번역_2절상)” 부부는 서로에게 의무를 다할 것을 말한다(2-3절). 특히 부부관계에 있어서는 자기 몸을 배우자가 주장하도록 가르치면서 예외적으로 기도하는 시간과 같은 때는 분방해도 되지만, 역시 “절제하는 힘이 없는 틈을 타서 사탄이 유혹할 수 있으니” 분방 기간은 짧게 가지라고 한다. 부부관계에 있어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를 위해 섬기는 것이 “음행에 빠질 유혹”이라는 틈을 타서 사탄이 유혹할 수 없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적인 방종과 극단적 금욕’이 공존하던 고린도에서 바울은 성(性)과 결혼에 대한 교인들의 그릇된 이해와 태도를 교정한다. 음행을 피하기 위해 결혼하되, 서로에게 성적인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한 몸’의 연합과 성결을 지키기 위해 서로의 성적 욕구를 존중하고 서로의 영적 필요에 민감하게 섬기는 사랑을 해야 한다.
2. 결혼과 독신, 이혼에 대하여 “화평케 하는 삶”이 중요하다(6-16절).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평화롭게 살게 하셨습니다.(새번역_15절)” 바울은 결혼에 대하여 “음행을 절제 할 수 있다면(이것을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은사라고 표현했다_7절)” 독신으로 살아도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욕이 불 같이 일어 음행을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해야 한다(8-9절). 결혼한 사람들에게는 서로 버리지 말라(이혼하지 말라_10-11절)고 한다. 이것은 주의 명령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는데, 배우자와 이혼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자세히 덧붙인다(12-14절). 하지만 이혼을 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제시한다(15절). 그러면서 이혼을 하지 않느냐, 하느냐에 구애받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화평”케 하는 삶의 의미다.
부부간의 배려와 섬김이 생생하면 이혼 할 일이 있겠는가! 하지만 살다보면 부부관계라도 어려움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특히 바울에게 보낸 질문의 배경은 함께 “믿지 않음”에서 오는 어려움인듯 하다. 그래서 금욕주의의 영향도 있고 , 홀로 믿는 신앙이 좀더 견고하여 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혼에 대한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울은 같은 믿음이 아니어도 배우자가 여전히 자신과 함께 살기를 좋아한다면 “이혼하지 말라”고 한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청년들이 단지 이것 때문에 이혼을 요구하지 말아야 할 근거로, 먼저 믿은 자신을 통해 일어나는 “거룩함”의 전염성 때문이고(14절), 더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이 이런 관계를 통해 일어 날지 누가 알겠는가?(16절)를 제시한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을 통해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 위해 구별되고(거룩하게 되고), 구원의 통로로 사용될 수 있음을 잘 알아야 한다, 어떤 관계 안에 있든지,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는 삶이고, 하나님과 세상의 화평을 가져오는 삶이다.
바울은 자신처럼 독신을 권하면서도 결혼과 독신 모두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기에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7~9절). 그렇기에 획일적인 모방이나 ‘옳고 그름, 좋고 나쁨’에 대한 독단적인 판단을 주의해야 한다. 특히 ‘절제의 은사’없는 독신을 고집하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결혼을 기피하는 현상은 성적 유혹에 취약한 젊은이들로 방종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편, 바울은 이혼에 관하여서는 서로 갈라서지 말라고 호소한다. 결혼 제도를 두신 하나님의 뜻(창 2:20~25)과 이혼을 금하신 그리스도의 명령(막 10:1~12)에 따른 권고다. 또한 이미 이혼한 경우에는 다시 합하거나 그대로 사는 것이 낫다고 한다. 이는 어느 한편에만 해당되는 명령이 아니라 모든 남녀에게 해당하는 명령이다. 성도에게 결혼의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그러니 장담하거나 방심하지 말고 늘 자신을 살피고 배우자를 지키며 주의 은혜를 구하여야 할 것이다.
배우자의 불신은 이혼 사유가 될 수 없다(12~16절). 불신자와 산다고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자의 거룩한 삶에 영향을 받아 배우자와 자녀도 하나님을 알고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 없는 배우자가 갈라서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이혼을 허용한다. 맹목적인 이혼 금지가 가져오는 배우자와 자녀의 삶에 끼치는 더 큰 해악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부르신 대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그와 함께 하는 것으로!(17~24절)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은 복잡했다. 디른 초대 교회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유대인과 비유대인으로, 자유인과 노예로 선명하게 구별된 신분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그 모습(신분)과 상황을 구태여 바꾸려고 하지 말라(17, 20, 24절)고 권면한다.
구원받은 자의 삶은 현실의 신분과 상황에 대한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19절)”,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24절)” 것이다. 할례와 무할례(유대인과 비유대인)가 중요하지 않다. 노예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느냐다.
할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종이다(18~19절). 할례의 유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소명에 장애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의 일차적인 관심은 할례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계명의 참뜻을 깨닫고 부르심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어야 한다. 형식적인 명분으로 불순종을 정당화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며, 주님께 받은 특권과 자격이 나의 불순종을 변호하지 못함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설명이 갖는 의미는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입은 세상의 신분(유대인/비유대인)이나 상황(종, 자유인_상태)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다는 것에 영향을 끼치면 안된다. 자기가 어떤 신분이나 상황에서 부르심을 받았든지 “하나님 나라 백성”된 것을 잊으면 안되고,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신분이나 상태(상황)이 세상을 갈아가는 삶의 질에 영향을 분명하게 주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변질 시킬 수 없고 시키도록 놔두어서도 안된다. 지금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백성은 유대인이든 아니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다.
나는?
-극단적 금욕주의자들은 결혼과 성적 관계를 부정하게 여겼다. 하지만 바울은 인간이 성적인 욕구가 있는 존재임을 인정할 뿐 아니라, 언제든 자제력을 잃고 성적인 유혹에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도 인정한다. 성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결혼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지만, 결혼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임을 환기시킨 것이다.
-또한 성적 권리에 있어서 부부는 평등함을 강조한다. 남편은 아내의 욕구를 존중하고 아내도 남편의 욕구를 충족시킬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 부부가 합의하여 한시적으로 금욕생활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절제하지 못하여 사탄의 시험에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분방하지 말라고 한다.
-어떤 형편에 있든 “부르심을 받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면 그것이 은혜이고 능력이다. 부부관계에 틈을 만들지 않아, 사탄이 이로 틈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음행”이라는 틈이 생기지 않도록 서로에게 “배려와 섬김”으로 사랑해야 한다.
-독신은 은사이다. 이혼도 선택할 수 있다. 성경의 원초적인 가르침은 남과 여, 둘이 한 몸을 이루라 하셨고,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셨지만, 바울은 사견임을 전제로 결혼과 이혼,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고 했다. 큰틀에서의 기준은 “음행”을 이길 수 있다면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되고 화평(신뢰, 사랑)을 깨뜨리는 것이라면 이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될 수만 있으면 이혼을 하지 않기를 권면하는데 “거룩의 전염성(14절)”과 “생명(구원)의 통로”로서 가정에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남편이나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런 일에 구애될(얽매일) 필요는 없다.지금은 성과 결혼에 대한 세상의 풍조를 성경에 비춰보며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신분이나 세상에서의 상황, 위치가 행복의 척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 안에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삶의 목적이자 의미”이다. 그러니 혈통과 같은 신분이나 노예나 자유인 같은 신분이 제약이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다양한 상황과 여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부르심을 받은대로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신분보다 중요한 것은 소명이라는 것이다(21~24절). 바울은 소명에 있어 사회적 신분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사회적으로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주님께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종’이기에, 이제 새로운 신분에 걸맞게 지금 그 자리에서 충성스럽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초월적인 부르심 속에서 지나갈 현 세상의 구조에 대해 초연하고 책임 있는 모습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더 근사한 자리를 찾기보다 새로운 신분에 걸맞는 자부시믕로 영적 품위를 갖추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를 반복하여 강조한다(20, 24절).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는 것은 세상의 신분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할례 받고 안 받고는 아무것도 아니다(19절)”,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 자유인이라도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이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살아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며 실체이다.
*하나님은 모든 교회의 각 사람을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부르셨다. 그리고 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은사를 주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할례 받은 유대인이든 무할례자인 이방인든, 종이든 자유자든 상관없다. 바꿀 수 없다면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일일 아니라면, 그 자리, 그 조건 속에 두신 하나님은 거기서 내가 가장 잘 섬길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다.
*사회적 신분이 종이든 자유인이든 중요하지 않다. 바꿀 기회가 있으면 선용해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유자나 종이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사탄의 지배에서 벗아난 해방된 자요, 둘 다 주께서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디서든 새로운 신분에 걸맞게 사람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 하나님과 함께 거해야 할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세상을 향해 영향력을 끼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부부관계에서부터 신분이나 상황에 상관 없이 말이다.
*부부관계에 사탄이 틈 타지 못하도록, 가정 안에 거룩을 전염시키고, 생명(구원)의 통로가 되도록,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안에 함께 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하나님 백성답게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부르심을 따라” 허락하신 삶의 상황에서 믿음으로 살아내야 할 것이다. 묵상하는 중에 교회 공동체 안의 많은 싱글 성도들이 생각이 났다. 이 묵상의 글이 위로와 도전이 되기를 기도했다. 어떤형편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각자 지금의 상황으로 인도하셨다면, 하나님께서 그 부르심을 따라 선하게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는다. 더욱 주님의 인도하심을 민감하게 간구하고, 분별하여 거룩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리라. “주 안에서” 더욱 “주 안에서” 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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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10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음행을 피하라!
[고전 6:12-20]
헬라 철학은 영을 중요시하고 육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복음은 영과 육이 무도 구속함을 받은 거룩한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몸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면서 세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몸은 육체의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한 것이다. 둘째,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다. 셋째,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의 네 번째 문제를 다룬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역시 세상 문화의 익숙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것에 대한 문제다. 대표적으로 성적인 부도덕함이다. 힘 있는 사람들의 문화를 따라 만찬에 참여하여 먹고 마시며 방탕하고 음란한 짓을 행하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에 대한 일침이다.
앞서 다뤘던 근친상간과 간음과는 결이 다른 음행이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일이었다. 이것을 문화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꽤 일반화된 것이었다. 힘과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만찬을 베풀고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면서 그 자리에 창녀를 불러 음행하곤 했는데, 성도들 중에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런 자리에 참석하였다. 그리고서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며 어줍잖은 정당화를 하곤 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신만을 생각한 말과 행동이다. 식욕을 따라 자연스럽게 먹고 마시듯, 성욕을 따라 자연스럽게 창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런 기막힌 자기 합리화에 대해 바울은 단호하게 배척한다.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와 ‘몸’에 대한 오해(12~17절)
12절은 모든 행위는 마음속 생각에서 나옴을 지적한다. 지금까지 고린도 성도들의 불의한 행위에 대해 지적했던 바울은 이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려 한다. 특히 ‘모든 것이 가하다’라는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에 관해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한 표현이다. 이 표현은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세상적인 지혜를 자랑한 성도들이 헬라 철학적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하려 했음을 드러낸다. 단, 바울은 이 표현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배척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성도들이 자유의 교리를 남용하여 무절제하게 자신의 유익과 쾌락을 추구하고, 성도의 교제인 성만찬을 식탐을 채우는 기회로 활용했다. 또한 성적인 쾌락을 채우기 위해 문란한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이미 자유함이 아닌 더러운 악습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지만, 나는 아무것에도 노예처럼 사로잡히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고전 10:23~24). 그럼에도 고린도 성도들은 그것을 악용하였다.
13~14절에서 바울은 “음식은 배를 위하고 배는 음식을 위하지만, 하나님은 그 둘을 모두 폐하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주장에 대해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반박하며 심판받을 이 세상에 속한 음식과 배는 결국 폐해지겠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육체의 삶은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는 몸을 위하신다”라고 말함으로써 주께서 인간의 육체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한편 주님께서 우리 육체를 위한다는 증거가 무엇일까? 14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살리셨고 우리의 몸도 살리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체를 위하신다는 증거가 14절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살리셨고 우리의 몸도 살리실 것이다. 기독교의 부활은 구원을 영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했던 헬라적 영지주의적 구원관을 반대했다. 그스도인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스스로 영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육체의 가치를 폄하했고, 어차피 없어질 몸이라면 쾌락을 즐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은 복음이 아니라 복음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제 15절은 독자들에게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질문한다. 물론 이 질문은 독자들도 알고 있음을 전제한다. 추측하건데 세례와 성찬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했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들이 창기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의 몸을 위해 죽음에서 살리시니 우리도 주의 지체인 몸으로 주를 위해 살아야 할 것이다.
16~17절은 육체적인 연합과 영적인 연합을 별개의 것, 서로 다른 것으로 간주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영과 육이 결합하여 완전한 인간이 되듯, 영과 육을 따로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창기와 합하든, 그리스도와 연합하든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2. 음행은 죄이다(18절)
바울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음행에 빠져 있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다. “음행을 피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자기 몸 밖에 있는 것이지만, 음행을 하는 자는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새번역_18절)”
왜 이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할까? 먼저 우리의 몸은 음식과 음행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주님은 우리의 몸을 위하여 있다”고도 말한다.(새번역_13절) 또,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이다(15절). 이미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는데, 창녀와 관계를 맺어 창녀의 지체를 만들어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이미 한 몸되었고 하나의 영이 된 성도가 행하는 음행은 “죄”이다.
3.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19-20절)
성도의 몸은 성령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성도는 성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는 존재들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값을 치루셔서 사들인 존재들이다. 그러니 자신의 것도 아니다. 이미 하나님의 소유된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핏 값을 지불하고 사신 몸이 성도다. 성도가 제 마음대로 쓸 자유가 애초부터 없다. 하나님께서 본래 만드신 의도와 목적대로 성도가 몸을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다. 바울이 제시하는 현실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사는 구체적인 모습은 “음행을 피하라(18절)는 것이다. 이는 적극적인 명령이다.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값을 주고 산 존재들이기에 이 명령은 타협해서는 안된다.
음행은 자기 몸의 주인이 자기라는 확고한 자의식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하지만 성도의 몸은 하나님께서 아들의 피값으로 산 하나님의 것이다. 성도는 관리자이다. 하나님의 것을 잘 관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인 음행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어떻게 교회의 전체적인 문제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교회 밖에서 은밀하게 하는 행위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공공연하게 자신의 이런 음행들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의 영이 개인 뿐 아니라 모임 속에서도 함께 거하시기 때문에 개인의 음행의 죄는 개인 뿐 아니라 공동체의 거룩함을 훼손 시키기에 충분했다. 죄의 영향력은 실제적으로 공동체의 거룩성을 오염시킨다.
-특히나 힘 있는 자나 부유한 자들의 만찬에 참여하여 즐겼다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를 반증하는 것이므로 이를 자랑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개인에게 영광이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는 명예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에서나 이루어지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된 교회는 이런 세상 가치로 모임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의 나타남과 역사”로 모이는 곳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된 새로운 가치와 이치를 따라 살아가는 곳이어야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상의 이치를 따라 자랑하고 있었으니….
*묵상하면서 이런 자랑, 이런 음행의 문화속에 교회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교회는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선명하게 다르게 빛내야할 곳이다.
*교회인 내가 세상의 일상적인 문화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너무나 이질적이기에 세상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멸할 수도 비판하며 조롱하여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적당하게 세상속 6일동안은 세상처럼, 하루쯤은 그리스도인처럼 사는 것 자체가 곧 세상의 문화와 가치에 내 몸과 마음을 섞는 음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상에서 일상적인 것이라도 하나님 나라 백성은 고집스러울 만치 하나님의 뜻을 붙잡아야 할 것이다. 그 고집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향기를 발하게 할 것이다.
*세상의 문화도 즐기고 교회도 문화처럼 즐긴다면 이미 음행하는 자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즐거움에 푹 취해 살면 세상 문화는 구미가 당겨지지 않는다.
*성도의 몸은 나를 위한 몸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몸이고, 성도는 창녀와(세상과) 하나가 될 몸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할, 이미 하나님의 소유된 몸이다. 나를 소유 삼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내 몸에서 구현되는 날이기를 소망한다.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의 네 번째 문제를 다룬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역시 세상 문화의 익숙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것에 대한 문제다. 대표적으로 성적인 부도덕함이다. 힘 있는 사람들의 문화를 따라 만찬에 참여하여 먹고 마시며 방탕하고 음란한 짓을 행하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에 대한 일침이다.
앞서 다뤘던 근친상간과 간음과는 결이 다른 음행이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일이었다. 이것을 문화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꽤 일반화된 것이었다. 힘과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만찬을 베풀고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면서 그 자리에 창녀를 불러 음행하곤 했는데, 성도들 중에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런 자리에 참석하였다. 그리고서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며 어줍잖은 정당화를 하곤 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신만을 생각한 말과 행동이다. 식욕을 따라 자연스럽게 먹고 마시듯, 성욕을 따라 자연스럽게 창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런 기막힌 자기 합리화에 대해 바울은 단호하게 배척한다.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와 ‘몸’에 대한 오해(12~17절)
12절은 모든 행위는 마음속 생각에서 나옴을 지적한다. 지금까지 고린도 성도들의 불의한 행위에 대해 지적했던 바울은 이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려 한다. 특히 ‘모든 것이 가하다’라는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에 관해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한 표현이다. 이 표현은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세상적인 지혜를 자랑한 성도들이 헬라 철학적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하려 했음을 드러낸다. 단, 바울은 이 표현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배척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성도들이 자유의 교리를 남용하여 무절제하게 자신의 유익과 쾌락을 추구하고, 성도의 교제인 성만찬을 식탐을 채우는 기회로 활용했다. 또한 성적인 쾌락을 채우기 위해 문란한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이미 자유함이 아닌 더러운 악습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지만, 나는 아무것에도 노예처럼 사로잡히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고전 10:23~24). 그럼에도 고린도 성도들은 그것을 악용하였다.
13~14절에서 바울은 “음식은 배를 위하고 배는 음식을 위하지만, 하나님은 그 둘을 모두 폐하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주장에 대해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반박하며 심판받을 이 세상에 속한 음식과 배는 결국 폐해지겠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육체의 삶은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는 몸을 위하신다”라고 말함으로써 주께서 인간의 육체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한편 주님께서 우리 육체를 위한다는 증거가 무엇일까? 14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살리셨고 우리의 몸도 살리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체를 위하신다는 증거가 14절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살리셨고 우리의 몸도 살리실 것이다. 기독교의 부활은 구원을 영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했던 헬라적 영지주의적 구원관을 반대했다. 그스도인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스스로 영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육체의 가치를 폄하했고, 어차피 없어질 몸이라면 쾌락을 즐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은 복음이 아니라 복음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제 15절은 독자들에게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질문한다. 물론 이 질문은 독자들도 알고 있음을 전제한다. 추측하건데 세례와 성찬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했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들이 창기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의 몸을 위해 죽음에서 살리시니 우리도 주의 지체인 몸으로 주를 위해 살아야 할 것이다.
16~17절은 육체적인 연합과 영적인 연합을 별개의 것, 서로 다른 것으로 간주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영과 육이 결합하여 완전한 인간이 되듯, 영과 육을 따로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창기와 합하든, 그리스도와 연합하든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2. 음행은 죄이다(18절)
바울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음행에 빠져 있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다. “음행을 피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자기 몸 밖에 있는 것이지만, 음행을 하는 자는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새번역_18절)”
왜 이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할까? 먼저 우리의 몸은 음식과 음행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주님은 우리의 몸을 위하여 있다”고도 말한다.(새번역_13절) 또,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이다(15절). 이미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는데, 창녀와 관계를 맺어 창녀의 지체를 만들어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이미 한 몸되었고 하나의 영이 된 성도가 행하는 음행은 “죄”이다.
3.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19-20절)
성도의 몸은 성령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성도는 성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는 존재들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값을 치루셔서 사들인 존재들이다. 그러니 자신의 것도 아니다. 이미 하나님의 소유된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핏 값을 지불하고 사신 몸이 성도다. 성도가 제 마음대로 쓸 자유가 애초부터 없다. 하나님께서 본래 만드신 의도와 목적대로 성도가 몸을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다. 바울이 제시하는 현실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사는 구체적인 모습은 “음행을 피하라(18절)는 것이다. 이는 적극적인 명령이다.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값을 주고 산 존재들이기에 이 명령은 타협해서는 안된다.
음행은 자기 몸의 주인이 자기라는 확고한 자의식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하지만 성도의 몸은 하나님께서 아들의 피값으로 산 하나님의 것이다. 성도는 관리자이다. 하나님의 것을 잘 관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인 음행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어떻게 교회의 전체적인 문제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교회 밖에서 은밀하게 하는 행위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공공연하게 자신의 이런 음행들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의 영이 개인 뿐 아니라 모임 속에서도 함께 거하시기 때문에 개인의 음행의 죄는 개인 뿐 아니라 공동체의 거룩함을 훼손 시키기에 충분했다. 죄의 영향력은 실제적으로 공동체의 거룩성을 오염시킨다.
-특히나 힘 있는 자나 부유한 자들의 만찬에 참여하여 즐겼다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를 반증하는 것이므로 이를 자랑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개인에게 영광이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는 명예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에서나 이루어지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된 교회는 이런 세상 가치로 모임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의 나타남과 역사”로 모이는 곳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된 새로운 가치와 이치를 따라 살아가는 곳이어야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상의 이치를 따라 자랑하고 있었으니….
*묵상하면서 이런 자랑, 이런 음행의 문화속에 교회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교회는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선명하게 다르게 빛내야할 곳이다.
*교회인 내가 세상의 일상적인 문화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너무나 이질적이기에 세상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멸할 수도 비판하며 조롱하여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적당하게 세상속 6일동안은 세상처럼, 하루쯤은 그리스도인처럼 사는 것 자체가 곧 세상의 문화와 가치에 내 몸과 마음을 섞는 음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상에서 일상적인 것이라도 하나님 나라 백성은 고집스러울 만치 하나님의 뜻을 붙잡아야 할 것이다. 그 고집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향기를 발하게 할 것이다.
*세상의 문화도 즐기고 교회도 문화처럼 즐긴다면 이미 음행하는 자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즐거움에 푹 취해 살면 세상 문화는 구미가 당겨지지 않는다.
*성도의 몸은 나를 위한 몸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몸이고, 성도는 창녀와(세상과) 하나가 될 몸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할, 이미 하나님의 소유된 몸이다. 나를 소유 삼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내 몸에서 구현되는 날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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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09일
성도간의 다툼에 대하여
[고전 6:1-11]
고린도 교회의 세 번째 문제로 성도 간에 세상 법정에서 소송하며 다투는 것을 다룬다. 교회 안의 문제를 세상 불의한 자들에게 고발하여 결과적으로 세상이 교회를 경멸하게 하는 문제다. 외형적으로 이렇게 보이는 것이지만 교회 공동체의 위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삶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더구나 근친상간이나 간음에는 침묵하면서 바울이 보기에 “작은 일”에는 세상 법정에 고발까지 했다는 것에 대해 한탄이 깊다. 짐작하건데 근친상간과 간음을 행한 자의 힘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어 침묵했지만, 이런 일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겨 진행한듯 하다. 세상 가치와 힘의 논리를 여전히 따르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첫 번째 문제였던 “분쟁”과 두 번째 문제인 “음행”, 그리고 세 번쨰 문제인 “다툼”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것이 있다. 바로 “세상 지혜, 세상 힘의 논리, 세상 이치”가 교회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 지혜로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곳, 세상 힘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거룩함의 논리가 있어야 할 곳, 세상 법적 이치에 맡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이치에 맞게 살아내야 할 곳인 교회 공동체가 철저히 “세상”의 가치와 논리에 휘둘리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나 여전히 세상 나라에 휘둘리는 교회, 지금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지 않을까? 그럼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여 가나가는 곳이 교회이여야 한다. 바울은 이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지금은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세상 이치에 휘둘리지만 점점 더 하나님 나라 이치에 따라 조정 되어 갈 교회를 바라본다.
세 번째 문제 다툼, 어떻게 해결할까?
1. 너희가 (~을) 알지 못하느냐?(2-4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면서 이미 이런 부분에 대해 가르쳤음을 상기 시킨다. “너희가 (~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표현을 통해 이전에 가르침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게 한다.
다툼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걸음은 이런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찾아 보는 것이다. 혹은 들었던 말씀을 생각해 내는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고린도 성도들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부하는 교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 알고 있다고 여겼으면서 “이런 작은 일”에서 조차 세상 법정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는가? 라는 의미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강력한 질책이다. 지금 그들이 스스로 지혜롭게 해결 한다고 여기며 시도한 일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는다.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겠거늘, 여러분이 아주 작은 사건 하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겠습니까? 우리가 천사들도 심판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러한데, 하물며 이 세상 일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새번역_2-3절)”
바울은 이미 성도란 예수로 인해 새 언약의 백성된 자들이며(고전 1:2), 주님께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실 때 그의 백성들이 함께 다스린다는 것을(계 22:5) 알고 있는 자들이라고 했다. 즉 성도가 세상을 판단한다는 의미(2절)가 이런 의미다. 그런데 스스로 영적으로 성숙하고 지혜 있다고 자부하는 고린도 성도들이 스스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달으라고 절절히 호소한다.
심지어 천사들도 이렇게 심판하는데…. 그러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4절)”
2. 왜 당해주고, 왜 속아주지 못하는가?!(5-8절)
이어지며 한탄하는 것은 먼저 이런 일을 해결해 줄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교회안에 한 사람도 없다는 것에 경악한다. 여기에서 다툼을 해결할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서로 분당하여 분쟁하기 정신이 없었기에 모든 성도들이 고개를 숙이며 그의 이야기에 경청할 만한 성숙된 사람이 없다는 의미이다. 세상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보다 더 컸던 탓이다.
한편 바울이 “차라리” 당해주고 속아주라고 강권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교회안의 다틈을 세상 법정에 의뢰하는 순간, “실패다!”라고 단언한다(7절). 또한 “불의”를 행한다고 외친다(8절)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 그런데 도리어 여러분 자신이 불의를 행하고 속여 빼앗고 있으며, 그것도 신도들에게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새번역_7-8절)” 무엇에 대한 실패이고 무엇에 대한 불의일까? 단지 교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실패이고, 이런 송사 속에 깃든 속이고 빼앗는 것이 불의일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문제라도 합리적이고 지혜롭게 분별하여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어떤 경우 “그 원칙”을 뛰어 넘는 사랑이 실패한 것을 의미한다. 은사가 있다한들, 지혜롭다고 스스로 여긴들, 이런 다툼 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은사나 지혜가 무슨 소용이며, 이런 다툼 속에 깃든 성도들을 속여 빼앗기 위한 그 ‘불의’한 마음에 전혀 영향력을 끼지치 못하는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능력은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당해주고, 속아주어 지체를 세워주는 것에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러셨고, 바울도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는 각오로 이렇게 순종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본 받고 바울을 본받아 사는 삶이라면 왜 당해주지 못하고, 속아주지 못하는가? 예수님도 그러셨고, 바울도 그리 했는데 나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3. 세상으로 끌고가는 다툼에 동조하지 말라(9-11절)
“불의’하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9절). 단지 교회 안의 다툼을 세상 법정으로 끌고가는 이들만 지칭하지 않는다. 음행, 우상 숭배, 간음, 여성 노릇, 동성애, 도둑질, 탐욕, 술 취함, 중상모략, 약탈하는 사람들도 역시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한다(9-10절).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대다수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님의 은혜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다(11절). 그러므로 이런 불의한 일에 동조하지 말라고 강권한다. 헬라철학의 이원론의 영향으로 ‘이미 구원 받았으니 어찌 살든 상관 없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다. 불의한 삶은 반드시 심판 당한다.
성도들이 구원 받기 이전에는 이런 삶 속에 있었으나 이제는 “씻겨졌고, 거룩하고 의롭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이전의 세상 삶의 방식을 포기하라는 거다. 혹 다툼이 일어났을 때 세상 법정을 통해 자기 이익과 권리를 지키려는 태도를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의 한 형제된 지체를 사랑하고 용납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내라는 의미다.
“세상 삶의 방식”에 동조 해서는 안되는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을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 삶의 방식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투는 것을 서슴치 않는 것이었지만,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은 사랑하기 위해 이익을 손해 보아야 하고 알면서도 속아주어야 한다. 결국 이런 사랑이 하나님 나라의 깊은 삶을 맛보게 한다. 결국 이런 사랑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겅혐하게 한다.
알면서도 당해주고 속아주는 사랑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다. 그저 아주 작은 순종일 뿐이다. 다툼을 만들지도 말고 다툼에 동조하지도 말고 다툼이 일어나도 당해주고 속아줄 때 하나님의 이름이 “달리” 드러난다. 그때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다.
나는?
-성도들 간의 이해관계를 세상 법정에서 해결 받으려는 태도는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모욕이다. 성도는 종말에 주님과 함께 불신 세상을 심판하는 일에 참여하며 심지어 악한 천사마저도 심판할 존재인데 불신자들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 더욱이 형제를 상대로 한 재판을 불의한 자에게 맡기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바울은 강조한다.
-이 문제의 핵심은 장차 세상을 판단할(마 19:28) 성도들이 형제 간의 사소한 분쟁 하나 조정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에 제소한 것을 책망한다(1~3절). 더욱이 형제를 상대로 한 재판을 정의롭지 못한 세속 법정(불의한 자들)에 맡겨 해결하려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모욕으로 여긴다. 주의할 것은 바울의 이런 태도는 세상 법정의 권위에 대한 부정이라기 보다는 성도의 어리석은 자기 모순에 대한 질책임을 놓치면 안된다.
-고린도 교회는 십자가의 지혜를 미련한 것으로 치부하고 자기 은사와 지도자를 자랑하며 우쭐거렸지만, 실상은 지체들 간의 갈등을 조정해줄 지햬 있는 자 하나 없는 ‘어린아이’ 교회였다. 바울은 사랑을 포기하고 형제에게 소송하기보다는 차라리 손해보고 속는 것이 낫다고 한다.
-성도들은 남다른 지혜와 은사가 있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형제 간의 작은 갈등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불신자들 앞에서 서로를 고발했다(4~6절). 음행(5장)에 안일하게 대처하던 그들이 소소한 이해관계에서 민감하게 반응하여 벙정 소송까지 끌고 간 것이다. 이는 ‘자기 부정’의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여겼기에 형제를 법정에 세워서라도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한 자기중심성, 자기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 다 아는 듯, 다 자란 듯 우쭐대지만, ‘십자가의 영성’이 아닌 ‘세속적 욕망’에 이끌린 삶이었던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형제 간의 다툼에 승리란 없다. 설령 승소하고 손실을 만회하더라도 세상 가운데 교회의 허물만 드러내고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며, 주님꼐 아픔을 드리는 부끄러운 패배일 뿐이다(7~8절). 그러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손해를 보는 편이 낫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십자가의 길이다. 하나님의 명예와 복음의 영광을 외면하면서꺼지 내가 꼭 지키고 붙잡아야 할 명분이 과연 있을까?
-세상 법정에 고소당한 불의한 형제는 세상 법정이 판결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자랑할 만한 은혜와 은사를 맛보았더라도 영적인 자긍심만 가득한 채 실제로는 음란, 간음, 남색, 도적질, 토색을 일삼고 마음에 욕심이 가득한 사람, 즉 십자가의 은혜와 도를 미련한 것으로 만드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 아무리 자랑할 만한 지식과 은사를 지녔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에게 요구되는 삶을 거부한다면 그들이 받을 하나님 나라의 유업은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만들고 욕망의 노예로 살면서도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모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영적인 안전은 회심의 순간을 기억하는 것에 달려 있기 보다는 우리가 맺는 열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연 이틀 부끄럽고 부끄러운 본문을 계속 묵상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이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당해주고 속아주는 삶이다. 바울이 펼친 사랑 이야기가 떠오른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5-7)”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을 바라며 견디는 사랑은 당해주고 속아주는 것이다. 내가 당해주고 속아주면 주님께서 갚아주시고 인정해 주신다. 이것이 의로운 하나님 나라 삶이다.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삶이다.
-분쟁하는 교회는 성도간 다틈이 일어나도 자정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서로 경쟁하여 마음이 분열 되어 있으니 당연한 이치다. 어느 누구의 말도 권위있게 받아 들이지 않는다. 오직 자신들이 추종하는 이의 말만 따를 뿐이다. 그러니 “영적인 어른”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아… 오늘날도 “영적 어른”의 부재를 심심치 않게 느낀다. 중심을 잡아주고 삶의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영향력있는 영적 어른의 역할이 분명 갈급한데…. 서로 분쟁하느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세상의 방식이 하나님 나라 방식보다 더 통하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세상 방식을 옳고 그름, 자신의 유익을 고수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법칙이 무너져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교회 안에서 서슴없이 다툼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그들도 너희 형제다”는 것이 도무지 통하지 않고 있음을 보며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되었든지 “형제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의 지표인 것을 안다면…. 사랑을 말로만 하는 울리는 꽹과리같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이 따라오는 “당해 주고 속아 주는” 사랑이 그립다. 나도 그 사랑으로 성장했고, 나로 인해 그 사랑을 받아야 할 성도들이 성장할 것이다.
-이런 저런 묵상이 오늘도 그때 그때 순간 순간 나의 생각과 마음을 주관해 주시기를 바라며, 오늘도 말씀으로! 사랑으로! 살아내리라.
더구나 근친상간이나 간음에는 침묵하면서 바울이 보기에 “작은 일”에는 세상 법정에 고발까지 했다는 것에 대해 한탄이 깊다. 짐작하건데 근친상간과 간음을 행한 자의 힘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어 침묵했지만, 이런 일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겨 진행한듯 하다. 세상 가치와 힘의 논리를 여전히 따르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첫 번째 문제였던 “분쟁”과 두 번째 문제인 “음행”, 그리고 세 번쨰 문제인 “다툼”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것이 있다. 바로 “세상 지혜, 세상 힘의 논리, 세상 이치”가 교회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 지혜로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곳, 세상 힘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거룩함의 논리가 있어야 할 곳, 세상 법적 이치에 맡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이치에 맞게 살아내야 할 곳인 교회 공동체가 철저히 “세상”의 가치와 논리에 휘둘리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나 여전히 세상 나라에 휘둘리는 교회, 지금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지 않을까? 그럼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여 가나가는 곳이 교회이여야 한다. 바울은 이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지금은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세상 이치에 휘둘리지만 점점 더 하나님 나라 이치에 따라 조정 되어 갈 교회를 바라본다.
세 번째 문제 다툼, 어떻게 해결할까?
1. 너희가 (~을) 알지 못하느냐?(2-4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면서 이미 이런 부분에 대해 가르쳤음을 상기 시킨다. “너희가 (~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표현을 통해 이전에 가르침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게 한다.
다툼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걸음은 이런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찾아 보는 것이다. 혹은 들었던 말씀을 생각해 내는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고린도 성도들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부하는 교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 알고 있다고 여겼으면서 “이런 작은 일”에서 조차 세상 법정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는가? 라는 의미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강력한 질책이다. 지금 그들이 스스로 지혜롭게 해결 한다고 여기며 시도한 일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는다.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겠거늘, 여러분이 아주 작은 사건 하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겠습니까? 우리가 천사들도 심판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러한데, 하물며 이 세상 일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새번역_2-3절)”
바울은 이미 성도란 예수로 인해 새 언약의 백성된 자들이며(고전 1:2), 주님께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실 때 그의 백성들이 함께 다스린다는 것을(계 22:5) 알고 있는 자들이라고 했다. 즉 성도가 세상을 판단한다는 의미(2절)가 이런 의미다. 그런데 스스로 영적으로 성숙하고 지혜 있다고 자부하는 고린도 성도들이 스스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달으라고 절절히 호소한다.
심지어 천사들도 이렇게 심판하는데…. 그러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4절)”
2. 왜 당해주고, 왜 속아주지 못하는가?!(5-8절)
이어지며 한탄하는 것은 먼저 이런 일을 해결해 줄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교회안에 한 사람도 없다는 것에 경악한다. 여기에서 다툼을 해결할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서로 분당하여 분쟁하기 정신이 없었기에 모든 성도들이 고개를 숙이며 그의 이야기에 경청할 만한 성숙된 사람이 없다는 의미이다. 세상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보다 더 컸던 탓이다.
한편 바울이 “차라리” 당해주고 속아주라고 강권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교회안의 다틈을 세상 법정에 의뢰하는 순간, “실패다!”라고 단언한다(7절). 또한 “불의”를 행한다고 외친다(8절)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 그런데 도리어 여러분 자신이 불의를 행하고 속여 빼앗고 있으며, 그것도 신도들에게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새번역_7-8절)” 무엇에 대한 실패이고 무엇에 대한 불의일까? 단지 교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실패이고, 이런 송사 속에 깃든 속이고 빼앗는 것이 불의일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문제라도 합리적이고 지혜롭게 분별하여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어떤 경우 “그 원칙”을 뛰어 넘는 사랑이 실패한 것을 의미한다. 은사가 있다한들, 지혜롭다고 스스로 여긴들, 이런 다툼 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은사나 지혜가 무슨 소용이며, 이런 다툼 속에 깃든 성도들을 속여 빼앗기 위한 그 ‘불의’한 마음에 전혀 영향력을 끼지치 못하는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능력은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당해주고, 속아주어 지체를 세워주는 것에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러셨고, 바울도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는 각오로 이렇게 순종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본 받고 바울을 본받아 사는 삶이라면 왜 당해주지 못하고, 속아주지 못하는가? 예수님도 그러셨고, 바울도 그리 했는데 나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3. 세상으로 끌고가는 다툼에 동조하지 말라(9-11절)
“불의’하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9절). 단지 교회 안의 다툼을 세상 법정으로 끌고가는 이들만 지칭하지 않는다. 음행, 우상 숭배, 간음, 여성 노릇, 동성애, 도둑질, 탐욕, 술 취함, 중상모략, 약탈하는 사람들도 역시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한다(9-10절).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대다수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님의 은혜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다(11절). 그러므로 이런 불의한 일에 동조하지 말라고 강권한다. 헬라철학의 이원론의 영향으로 ‘이미 구원 받았으니 어찌 살든 상관 없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다. 불의한 삶은 반드시 심판 당한다.
성도들이 구원 받기 이전에는 이런 삶 속에 있었으나 이제는 “씻겨졌고, 거룩하고 의롭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이전의 세상 삶의 방식을 포기하라는 거다. 혹 다툼이 일어났을 때 세상 법정을 통해 자기 이익과 권리를 지키려는 태도를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의 한 형제된 지체를 사랑하고 용납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내라는 의미다.
“세상 삶의 방식”에 동조 해서는 안되는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을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 삶의 방식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투는 것을 서슴치 않는 것이었지만,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은 사랑하기 위해 이익을 손해 보아야 하고 알면서도 속아주어야 한다. 결국 이런 사랑이 하나님 나라의 깊은 삶을 맛보게 한다. 결국 이런 사랑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겅혐하게 한다.
알면서도 당해주고 속아주는 사랑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다. 그저 아주 작은 순종일 뿐이다. 다툼을 만들지도 말고 다툼에 동조하지도 말고 다툼이 일어나도 당해주고 속아줄 때 하나님의 이름이 “달리” 드러난다. 그때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다.
나는?
-성도들 간의 이해관계를 세상 법정에서 해결 받으려는 태도는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모욕이다. 성도는 종말에 주님과 함께 불신 세상을 심판하는 일에 참여하며 심지어 악한 천사마저도 심판할 존재인데 불신자들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 더욱이 형제를 상대로 한 재판을 불의한 자에게 맡기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바울은 강조한다.
-이 문제의 핵심은 장차 세상을 판단할(마 19:28) 성도들이 형제 간의 사소한 분쟁 하나 조정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에 제소한 것을 책망한다(1~3절). 더욱이 형제를 상대로 한 재판을 정의롭지 못한 세속 법정(불의한 자들)에 맡겨 해결하려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모욕으로 여긴다. 주의할 것은 바울의 이런 태도는 세상 법정의 권위에 대한 부정이라기 보다는 성도의 어리석은 자기 모순에 대한 질책임을 놓치면 안된다.
-고린도 교회는 십자가의 지혜를 미련한 것으로 치부하고 자기 은사와 지도자를 자랑하며 우쭐거렸지만, 실상은 지체들 간의 갈등을 조정해줄 지햬 있는 자 하나 없는 ‘어린아이’ 교회였다. 바울은 사랑을 포기하고 형제에게 소송하기보다는 차라리 손해보고 속는 것이 낫다고 한다.
-성도들은 남다른 지혜와 은사가 있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형제 간의 작은 갈등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불신자들 앞에서 서로를 고발했다(4~6절). 음행(5장)에 안일하게 대처하던 그들이 소소한 이해관계에서 민감하게 반응하여 벙정 소송까지 끌고 간 것이다. 이는 ‘자기 부정’의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여겼기에 형제를 법정에 세워서라도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한 자기중심성, 자기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 다 아는 듯, 다 자란 듯 우쭐대지만, ‘십자가의 영성’이 아닌 ‘세속적 욕망’에 이끌린 삶이었던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형제 간의 다툼에 승리란 없다. 설령 승소하고 손실을 만회하더라도 세상 가운데 교회의 허물만 드러내고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며, 주님꼐 아픔을 드리는 부끄러운 패배일 뿐이다(7~8절). 그러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손해를 보는 편이 낫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십자가의 길이다. 하나님의 명예와 복음의 영광을 외면하면서꺼지 내가 꼭 지키고 붙잡아야 할 명분이 과연 있을까?
-세상 법정에 고소당한 불의한 형제는 세상 법정이 판결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자랑할 만한 은혜와 은사를 맛보았더라도 영적인 자긍심만 가득한 채 실제로는 음란, 간음, 남색, 도적질, 토색을 일삼고 마음에 욕심이 가득한 사람, 즉 십자가의 은혜와 도를 미련한 것으로 만드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 아무리 자랑할 만한 지식과 은사를 지녔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에게 요구되는 삶을 거부한다면 그들이 받을 하나님 나라의 유업은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만들고 욕망의 노예로 살면서도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모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영적인 안전은 회심의 순간을 기억하는 것에 달려 있기 보다는 우리가 맺는 열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연 이틀 부끄럽고 부끄러운 본문을 계속 묵상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이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당해주고 속아주는 삶이다. 바울이 펼친 사랑 이야기가 떠오른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5-7)”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을 바라며 견디는 사랑은 당해주고 속아주는 것이다. 내가 당해주고 속아주면 주님께서 갚아주시고 인정해 주신다. 이것이 의로운 하나님 나라 삶이다.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삶이다.
-분쟁하는 교회는 성도간 다틈이 일어나도 자정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서로 경쟁하여 마음이 분열 되어 있으니 당연한 이치다. 어느 누구의 말도 권위있게 받아 들이지 않는다. 오직 자신들이 추종하는 이의 말만 따를 뿐이다. 그러니 “영적인 어른”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아… 오늘날도 “영적 어른”의 부재를 심심치 않게 느낀다. 중심을 잡아주고 삶의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영향력있는 영적 어른의 역할이 분명 갈급한데…. 서로 분쟁하느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세상의 방식이 하나님 나라 방식보다 더 통하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세상 방식을 옳고 그름, 자신의 유익을 고수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법칙이 무너져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교회 안에서 서슴없이 다툼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그들도 너희 형제다”는 것이 도무지 통하지 않고 있음을 보며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되었든지 “형제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의 지표인 것을 안다면…. 사랑을 말로만 하는 울리는 꽹과리같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이 따라오는 “당해 주고 속아 주는” 사랑이 그립다. 나도 그 사랑으로 성장했고, 나로 인해 그 사랑을 받아야 할 성도들이 성장할 것이다.
-이런 저런 묵상이 오늘도 그때 그때 순간 순간 나의 생각과 마음을 주관해 주시기를 바라며, 오늘도 말씀으로! 사랑으로! 살아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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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08일
거룩한 공동체를 위해 이제부터라도
[고전 5:1-13]
고린도 교회의 두 번째 문제를 다룬다. 충격적인 근친상간과 간음의 문제다. 매우 심각한 문제임에도 교회안에서 오히려 범죄한 자는 자랑까지하는 형편이고, 공동체 지체들은 침묵하고 있다. 세상의 힘의 논리에 굴복하여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 일을 행한 자는 자랑까지 한다. 자신의 범죄를 오히려 자랑하는 자의 교만함과 이에 대하여 어떤 소리도 내지 않는 교회의 모습이 참담하다.(1-2절) 음행의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1. 낮아진 거룩의 지표(1-2절)
고린도 교회의 두 번째 문제는 충격적이게도 아버지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음행을 행한 당사자들이나, 이를 묵인하는 공동체나 모두 ‘거룩’을 상실했다.
고린도지역은 항구 도시였다. 이에 걸맞게 성적으로 매우 개방된 지역이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당시 로마법은 시민권자라도 근친상간이나 간음에 대하여 매우 엄격했다. 그렇기에 근친상간이나 간음은 교회 밖 세상에서도 잘 일어나지 않는 중범죄였다. 그런데 이 범죄가 교회안에 일어난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음행의 죄를 저지른 당사자는 오히려 공동체 앞에서 당당하게 이런 일을 드러내고 있고, 공동체는 이에 대하여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서로 싸우느라 정신 없었다. 그러니 만약 자신들의 문파에 한명이라도 아쉬운 상황이고, 더구나 만약 간음을 행한 당사자들이 교회 안에 유력한 자들이었다면 암묵적 침묵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결국 분쟁이나 음행이나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공동동체가 되어 버렸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세상을 이끄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교회가 되어 버렸으니 낮아질 대로 낮아진 거룩함이 민망할 따름이다. 오늘날 교회가 다를까? 세상이 더 많은 우려와 걱정어린 시선으로 비토 하는 지경이니 할말이 없다. 우리는 정말 이런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그런데도 여러분은 교만해져 있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그러한 현상을 통탄하고,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여러분 가운데서 제거했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새번역_2절)” 통탄해 하지 않고, 범죄한 자를 제거하지도 않는 고린도 교회나 통탄해 하지 않고, 범죄한 자를 제거하지도 않는 한국교회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도진개진’이다.
2. 그러나 이제부터라도(3-13절)
통탄하며 음행한 자에 대하여 지금까지 묵인하고 방관 했을지라도 이제라도 이렇게 하라고 가르친다.
먼저 판단하라(3-5절). 몸은 떨어져 있으나 영으로 이미 판단한 것처럼 너희도 나의 영과 함께 ‘주 예수의 이름으로’ 공동체 밖으로 내 보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보냄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다. 먼저 범죄한 이의 육신은 이렇게 판단 당할지라도 그의 영혼이 구원얻게 하기 위해서다(5절). 이것은 공동체가 그의 음행의 행동에 단호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그가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게하고 죄를 죄로 여기게 하여 그 죄에서 돌이킬 기회를 주라는 의미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2절)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한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공동체가 그렇게 해도 된다는 영적 방만함을 보여주었다는 의미다. 교인 하나를 잃는 것이 두려워 교인의 구원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 교회의 더 큰 죄가 될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또, 음행이 교회안에 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단호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6-8절). 음행은 고린도 지역의 오랜 문화였다. 물론 로마법에 의해 근친상간이나 간음은 가혹하게 다루어지는 범죄였지만,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기는 신전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음행의 문화는 그 지역사회의 문화였다. 어떻게 보면 이런 관능적인 사회였기에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성범죄들이 쉽게 일어날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교회는 달라야 한다. 이런 음행과 같은 “묵은 누룩”을 제거해야 한다. 구원 얻기 이전의 평범함 속에 깊이 깃들어져 있는 ‘문화’라는 포장지에 잘 포장된 “거룩”을 무너뜨리는 “묵은 누룩”은 하나님 나라 복음과 지혜 안에 깃들어져 있으면 안된다. 이 묵은 누룩이 조용히 그리고 광범위하게 퍼져 “하나님 나라가”가 세상 나라”와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누룩”이라는 예를 들어 음행을 자랑하는 자들의 언행에 대해 단호하게 처리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듯이 이런 죄에 대해 묵인하면 교회 공동체 전체가 물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더구나 교회는 “유월절 어린양 곧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 덩어리(반죽)이 되었기에, 이런 죄의 묵은 누룩들은 깨끗히 치워야 한다.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누룩이 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새번역_7절)”
묵은 누룩을 “악의와 악독”으로 비유하며 이것은 치우고 “성실과 진실”을 누룩으로 삼아 (묵은) 누룩 없이 빚은 빵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지키자고 말한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악독이라는 누룩을 넣은 빵으로 절기를 지키지 말고, 성실과 진실을 누룩으로 삼아 누룩 없이 빚은 빵으로 지킵시다(새번역_8절).”
그리고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가르친다(9-13절). 이에 대하여 이전에 썼던 편지를 통해 교회가 가지고 있던 오해를 먼저 교정한다. 음행하는 자를 내쫓으라는 명령(2, 5, 13절)과 관련하여 가질 수 있는 오해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명령하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단절하여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말이 아니라(10절), 교회 안의 음행하는 자들과 함께 먹지도 말라(성찬, 애찬)는 의미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단지 음행하는 자만 성찬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탐욕, 우상 숭배, 중상모략, 술 취함, 약탈도 이에 속한다. 즉, 음행한 자를 쫓아내라는 의미는 모든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찬을(함께 먹지도 말라) 포함하여 죄와 벗한 이들에게 단호한 죄에 대한 자세와 태도를 보이라는 의미다.
물론 이를 통해 그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이를 통해 성도와 교회가 그런 죄의 영향력으로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를 통해 범죄한 당사자가 자신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다.
음행하는 자와 사귀지 말라는 것은 세상의 음행자들과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의 음행 문화에 동조하지 않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라는 거다. 세상의 음행자는 세상 법과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되, 공동체 안의 음행자는 엄격하게 처리하는 자세와 태도를 보임으로 교회의 거룩함과 순결함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공동체 안의 음행, 용납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아내(추측하건대 과부가 된 계모)를 취하는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악행이다. 그런데 경악스럽게도 이 일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벌어졌으며, 더욱 심각한 것은 교회가 그것을 용납한 것이었다. 이같은 교회의 모습은 그들의 영적인 교만이 도덕적 해이로 이어진 것이다. 거룩과 성결함의 요구를 무시하는 오만함은 영적 우월감이 아니라 타락의 증거일뿐이다. 교회의 진정한 능력은 거대함이 아니라 거룩함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음행한 자를 공동체 밖으로 추방하여 사탄의 영역에서 징계를 받도록 명령한다. 이는 그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런 징계를 받도록 명령한다. 이는 그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런 징계를 통해 그가 회개하여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공동체는 음행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도리어 자랑하였다. 한 사람의 음행은 아주 작은 일로 보이지만 공동체 전체를 부정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욕되게 할 수 있는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성도는 세상 바깥의 음행한 자들까지 책임질 필요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세상 법에 맡길 뿐이지만, 공동체 안에 음행자들과는 시귀지 말고 쫓아내 공동체의 거룩과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
-참… 고개를 들 수 없는 묵상 본문이다. 이 범죄와 관련하여 한국교회는 매우 관대하거나 오히려 실제적인 계산방식에 따라 덮고 덮음으로 “음행”이 교회안에 판치고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목회자 뿐 아니라 교회안의 성추행과 성폭력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본문은 마음에 “탁”허니 걸린다. 하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르친 것을 단단히 마음에 새긴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낮아질대로 낮아진 거룩의 지표를 끌어 올려야 하리라. “악의와 악독”의 묵은 누룩과 같은 죄의 오염이 확산되지 않도록 내 마음과 나의 사랑하는 교회를 “성실과 진실”함으로 거룩에의 걸음을 다져 나가리라.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교회 공동체 안의 음행자들을 포함한 여러 반교회적인 죄에 대하여 단호하게 구별하리라. 그래야 범죄한 그도 살고, 나도 살며, 교회도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영혼을 살리기 위한 아픔을 주저하지 않으련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으로 죄에 깊이 함몰되어 죄의 심판을 받게 하지 않고, 은혜의 심판아래 서도록 지금 감내해야 할 아픔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으련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려내야 한다! 내가 살고 그가 살아나기 위해 “죄”의 악의와 악독함이 공동체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단호히 행해야 하리라.
*고린도 교회는 왜 음행한 당사자들을 묵인했을까? 그것은 세상에서도 영향력이 있고 교회 안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영향력이 재물이든, 권력이든, 혈통이든… 막강했을 것이다. 결국 묵인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세상적인 영향력이 “하나님의 지혜”의 영향력 보다 더 막강하게 역사(?)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바르게 구너면하고 징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 원리”가 지배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이를 가장 중요핟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음행의 문제 이면에는 세상 이치와 하나님 나라 이치의 충돌이 담겨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나의 삶이 여전히 세상 이치따라 움직인다면, 나조차도 음행을 구별하여 절제하지 못할 수 있다. 탐욕을 부릴 수도 있으며, 세상 이치라는 우상을 숭배할 수도 있다는 거다. 여전히 중상모략하며, 여전히 술 취하며, 여전히 폭력의 힘으로 살 수 있다는 거다.
*하나님 나라 백성 되었으면 하나님 나라 법으로 살아야지… 여전히 세상 이치로 살기를 고집한다면, 하나님 나라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히 하나님 나라 법의 심판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단호하게 세상과 다른 거룩함을 지켜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 아주 작은 말과 행동에서부터 세상적이지 않아야 한다. ‘악의와 악독’에 오염되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즐기는 문화에 익숙했던 옛적 관습으로 살지 않아야 한다. 하난미 나라의 새로운 법이 나를 주장하도록 늘 구별하고 구별해야 할 것이다.
*아.. 이런 면에서 부끄럽다… 참 많이 부끄럽다… 주님.. 한 몸된 교회가 더 이상 부끄럽지 않도록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지혜에, 하나님 나라 복음에 “성실과 진실”함의 한 걸음을 떼도록 도우소서….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1. 낮아진 거룩의 지표(1-2절)
고린도 교회의 두 번째 문제는 충격적이게도 아버지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음행을 행한 당사자들이나, 이를 묵인하는 공동체나 모두 ‘거룩’을 상실했다.
고린도지역은 항구 도시였다. 이에 걸맞게 성적으로 매우 개방된 지역이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당시 로마법은 시민권자라도 근친상간이나 간음에 대하여 매우 엄격했다. 그렇기에 근친상간이나 간음은 교회 밖 세상에서도 잘 일어나지 않는 중범죄였다. 그런데 이 범죄가 교회안에 일어난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음행의 죄를 저지른 당사자는 오히려 공동체 앞에서 당당하게 이런 일을 드러내고 있고, 공동체는 이에 대하여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서로 싸우느라 정신 없었다. 그러니 만약 자신들의 문파에 한명이라도 아쉬운 상황이고, 더구나 만약 간음을 행한 당사자들이 교회 안에 유력한 자들이었다면 암묵적 침묵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결국 분쟁이나 음행이나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공동동체가 되어 버렸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세상을 이끄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교회가 되어 버렸으니 낮아질 대로 낮아진 거룩함이 민망할 따름이다. 오늘날 교회가 다를까? 세상이 더 많은 우려와 걱정어린 시선으로 비토 하는 지경이니 할말이 없다. 우리는 정말 이런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그런데도 여러분은 교만해져 있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그러한 현상을 통탄하고,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여러분 가운데서 제거했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새번역_2절)” 통탄해 하지 않고, 범죄한 자를 제거하지도 않는 고린도 교회나 통탄해 하지 않고, 범죄한 자를 제거하지도 않는 한국교회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도진개진’이다.
2. 그러나 이제부터라도(3-13절)
통탄하며 음행한 자에 대하여 지금까지 묵인하고 방관 했을지라도 이제라도 이렇게 하라고 가르친다.
먼저 판단하라(3-5절). 몸은 떨어져 있으나 영으로 이미 판단한 것처럼 너희도 나의 영과 함께 ‘주 예수의 이름으로’ 공동체 밖으로 내 보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보냄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다. 먼저 범죄한 이의 육신은 이렇게 판단 당할지라도 그의 영혼이 구원얻게 하기 위해서다(5절). 이것은 공동체가 그의 음행의 행동에 단호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그가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게하고 죄를 죄로 여기게 하여 그 죄에서 돌이킬 기회를 주라는 의미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2절)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한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공동체가 그렇게 해도 된다는 영적 방만함을 보여주었다는 의미다. 교인 하나를 잃는 것이 두려워 교인의 구원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 교회의 더 큰 죄가 될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또, 음행이 교회안에 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단호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6-8절). 음행은 고린도 지역의 오랜 문화였다. 물론 로마법에 의해 근친상간이나 간음은 가혹하게 다루어지는 범죄였지만,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기는 신전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음행의 문화는 그 지역사회의 문화였다. 어떻게 보면 이런 관능적인 사회였기에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성범죄들이 쉽게 일어날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교회는 달라야 한다. 이런 음행과 같은 “묵은 누룩”을 제거해야 한다. 구원 얻기 이전의 평범함 속에 깊이 깃들어져 있는 ‘문화’라는 포장지에 잘 포장된 “거룩”을 무너뜨리는 “묵은 누룩”은 하나님 나라 복음과 지혜 안에 깃들어져 있으면 안된다. 이 묵은 누룩이 조용히 그리고 광범위하게 퍼져 “하나님 나라가”가 세상 나라”와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누룩”이라는 예를 들어 음행을 자랑하는 자들의 언행에 대해 단호하게 처리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듯이 이런 죄에 대해 묵인하면 교회 공동체 전체가 물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더구나 교회는 “유월절 어린양 곧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 덩어리(반죽)이 되었기에, 이런 죄의 묵은 누룩들은 깨끗히 치워야 한다.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누룩이 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새번역_7절)”
묵은 누룩을 “악의와 악독”으로 비유하며 이것은 치우고 “성실과 진실”을 누룩으로 삼아 (묵은) 누룩 없이 빚은 빵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지키자고 말한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악독이라는 누룩을 넣은 빵으로 절기를 지키지 말고, 성실과 진실을 누룩으로 삼아 누룩 없이 빚은 빵으로 지킵시다(새번역_8절).”
그리고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가르친다(9-13절). 이에 대하여 이전에 썼던 편지를 통해 교회가 가지고 있던 오해를 먼저 교정한다. 음행하는 자를 내쫓으라는 명령(2, 5, 13절)과 관련하여 가질 수 있는 오해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명령하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단절하여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말이 아니라(10절), 교회 안의 음행하는 자들과 함께 먹지도 말라(성찬, 애찬)는 의미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단지 음행하는 자만 성찬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탐욕, 우상 숭배, 중상모략, 술 취함, 약탈도 이에 속한다. 즉, 음행한 자를 쫓아내라는 의미는 모든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찬을(함께 먹지도 말라) 포함하여 죄와 벗한 이들에게 단호한 죄에 대한 자세와 태도를 보이라는 의미다.
물론 이를 통해 그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이를 통해 성도와 교회가 그런 죄의 영향력으로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를 통해 범죄한 당사자가 자신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다.
음행하는 자와 사귀지 말라는 것은 세상의 음행자들과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의 음행 문화에 동조하지 않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라는 거다. 세상의 음행자는 세상 법과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되, 공동체 안의 음행자는 엄격하게 처리하는 자세와 태도를 보임으로 교회의 거룩함과 순결함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공동체 안의 음행, 용납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아내(추측하건대 과부가 된 계모)를 취하는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악행이다. 그런데 경악스럽게도 이 일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벌어졌으며, 더욱 심각한 것은 교회가 그것을 용납한 것이었다. 이같은 교회의 모습은 그들의 영적인 교만이 도덕적 해이로 이어진 것이다. 거룩과 성결함의 요구를 무시하는 오만함은 영적 우월감이 아니라 타락의 증거일뿐이다. 교회의 진정한 능력은 거대함이 아니라 거룩함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음행한 자를 공동체 밖으로 추방하여 사탄의 영역에서 징계를 받도록 명령한다. 이는 그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런 징계를 받도록 명령한다. 이는 그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런 징계를 통해 그가 회개하여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공동체는 음행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도리어 자랑하였다. 한 사람의 음행은 아주 작은 일로 보이지만 공동체 전체를 부정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욕되게 할 수 있는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성도는 세상 바깥의 음행한 자들까지 책임질 필요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세상 법에 맡길 뿐이지만, 공동체 안에 음행자들과는 시귀지 말고 쫓아내 공동체의 거룩과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
-참… 고개를 들 수 없는 묵상 본문이다. 이 범죄와 관련하여 한국교회는 매우 관대하거나 오히려 실제적인 계산방식에 따라 덮고 덮음으로 “음행”이 교회안에 판치고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목회자 뿐 아니라 교회안의 성추행과 성폭력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본문은 마음에 “탁”허니 걸린다. 하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르친 것을 단단히 마음에 새긴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낮아질대로 낮아진 거룩의 지표를 끌어 올려야 하리라. “악의와 악독”의 묵은 누룩과 같은 죄의 오염이 확산되지 않도록 내 마음과 나의 사랑하는 교회를 “성실과 진실”함으로 거룩에의 걸음을 다져 나가리라.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교회 공동체 안의 음행자들을 포함한 여러 반교회적인 죄에 대하여 단호하게 구별하리라. 그래야 범죄한 그도 살고, 나도 살며, 교회도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영혼을 살리기 위한 아픔을 주저하지 않으련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으로 죄에 깊이 함몰되어 죄의 심판을 받게 하지 않고, 은혜의 심판아래 서도록 지금 감내해야 할 아픔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으련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려내야 한다! 내가 살고 그가 살아나기 위해 “죄”의 악의와 악독함이 공동체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단호히 행해야 하리라.
*고린도 교회는 왜 음행한 당사자들을 묵인했을까? 그것은 세상에서도 영향력이 있고 교회 안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영향력이 재물이든, 권력이든, 혈통이든… 막강했을 것이다. 결국 묵인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세상적인 영향력이 “하나님의 지혜”의 영향력 보다 더 막강하게 역사(?)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바르게 구너면하고 징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 원리”가 지배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이를 가장 중요핟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음행의 문제 이면에는 세상 이치와 하나님 나라 이치의 충돌이 담겨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나의 삶이 여전히 세상 이치따라 움직인다면, 나조차도 음행을 구별하여 절제하지 못할 수 있다. 탐욕을 부릴 수도 있으며, 세상 이치라는 우상을 숭배할 수도 있다는 거다. 여전히 중상모략하며, 여전히 술 취하며, 여전히 폭력의 힘으로 살 수 있다는 거다.
*하나님 나라 백성 되었으면 하나님 나라 법으로 살아야지… 여전히 세상 이치로 살기를 고집한다면, 하나님 나라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히 하나님 나라 법의 심판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단호하게 세상과 다른 거룩함을 지켜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 아주 작은 말과 행동에서부터 세상적이지 않아야 한다. ‘악의와 악독’에 오염되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즐기는 문화에 익숙했던 옛적 관습으로 살지 않아야 한다. 하난미 나라의 새로운 법이 나를 주장하도록 늘 구별하고 구별해야 할 것이다.
*아.. 이런 면에서 부끄럽다… 참 많이 부끄럽다… 주님.. 한 몸된 교회가 더 이상 부끄럽지 않도록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지혜에, 하나님 나라 복음에 “성실과 진실”함의 한 걸음을 떼도록 도우소서….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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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07일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고전 4:6-21]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본받으라고 권면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사도적인 삶을 소개하며 그들이 본받아야 할 모습이 어떤 것인지 설명한다. 또한 바울은 권면을 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직접 나아가서 징벌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바울은 분쟁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계속 제시한다. 이미 성전 답게(3:16-17), 세상과 다르게(3:18-4:5) 공동체를 이루어 갈 것을 부탁했다. 교회 분쟁의 원인을 세상 지혜에 대한 집착과 이에 따라 각각 원하는 성향의 지도자를 따르는 결과로 나타난 것에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이었다. 본문에서는 이 모든 원인과 결과의 중심에 깔려있는 핵심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왜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이들에게서 여전히 세상 지혜를 따르는 행동들이 나타나는가에 대한 바울의 진단이다.
1.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6-7절)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나와 아볼로에게 적용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기록된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라”는 격언의 뜻을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배워서, 어느 한 편을 편들어 다른 편을 얕보면서 뽐내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새번역_6절)”
고린도 교회 문제의 핵심은 “신분”이었다. 당시 사회는 신분에 따라 하는 일이 구분되어 있었다. 육체적인 노동은 주로 하층민이 담당하였고, 머리 쓰는 것은 상층민의 전유물처럼 여겼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교회를 개척하면서 천막 만드는 일을 함께 했었고, 고상한 헬라철학의 영향을 따라 아름다운 말들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전하고 가르쳤다면 바울의 이런 모습은 매력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받아들이게 하셨음으로 교회가 세워졌었다.
하지만 이렇게 세워진 교회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이 세상의 관습과 제도를 쉽게 뛰어넘지 못했다. 하층민으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새벽일찍부터 쉼 없이 일을 해야 했고, 지친 몸으로 돌아와 근근이 예배를 드리곤 했었다. 반면에 상층민들은 하루종일 여유롭게 지내다 오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속에서 신분과 계층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이 실제적인 문제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바울이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거론하며 가르친 말씀안에서 이를 지킬 것을 권면한다. 당시 헬라철학의 정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지혜가 다스리는 공동체를 지켜야 할 것을 점검시킨 것이다.
자신들(바울과 아볼로)을 직접 예로 들면서 결코 말씀의 경계를 넘지 않았음을 강조하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그렇게 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즉,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말씀이 말하지 않은데까지” 너무나도 쉽게 나갔다. 이로 인해 공동체 안에서 서로 구별하고 차별하는것을 스스럼없이 행한다. 자기 자신을 세우려고 서로를 대적한 것이다.
더구나 은혜로 받은 은사들을 자기 것인양 자랑하기도 했고, 구원이 완성된 줄로 착각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원리를 따라 이 땅에 살아가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지 못했다. 아쉽게도 바울과 아볼로가 그들에게 보인 말과 행동은 전혀 참고할 만한 것도 되지 못한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교만한 마음”이라 표현하며 안타까워 한다.
말씀을 들어도, 가르침을 받아도 여전히 세상 가치와 철학과 지혜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앞에 교만한 것이 틀림없다. 또한 이로 인해 일어나는 공동체 안의 부조화는 반드시 점검 되어야 할 영역이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서는 안된다!
2. 십자가의 삶을 본받으라(8-16절)
하나님께 맡은 바 되어 하늘의 지혜를 전하는 바울과 아볼로는 지금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장 위험한 곳에서, 가장 비천한 대접을 받으며, 가장 고통 가운데서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은 서로에게 왕 노릇 하고 있으니 이게 웬 말인가?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지적하기 위해 복음 전도자의 삶과 고린도 성도들의 삶을 비교하여 교만해질 대로 교만해진 그들을 지도한다.
풍요로운 고린도의 삶은 이미 왕과 같은 삶을 사는 것과 같은데, 자신은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의 구경거리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어 너희를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있는 사람 되게 하였다. 우리는 약하지만 너희는 강해졌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므로 천대를 받고 있으나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누리고 있다. 편지를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없이 떠돈다. 비방받으나 좋은 말로 응답하고, 사람들이 세상의 찌기나 쓰레기처럼 취급한다.
바울은 이 모든 수모를 당해도 결코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 지혜”와 맞바꾸지 않고 이에 따라 살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삶을 멸망당할 세상의 삶과 바꾸지 않는다. 아무리 세상의 가치와 삶의 열매가 달콤하게 보일지라도 결코 바꾸지 않았다.
이런 삶을 내가(바울이) 살고 있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담대히 말한 것이다.
3. 확실한 분쟁 해결 계획(17-21절)
바울은 실제적으로 지금의 분쟁과 분열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먼저 첫 번째로 디모데를 보내겠다고 한다. 이유는 확고하다. 지금까지 바울이 가르친 것을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나의 생활 방식을 여러분에게 되새겨 줄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모든 교회에서 내가 가르치는 그대로 말입니다.(새번역_17절)”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하나님의 지혜”이기에 전하는 자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다. 동일하다. 그러니 순회전도자로 부름받은 이들은 자기의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저런 세상 지혜에 가려지고 덮여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다시 되찾게 하고,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동일한 복음”을 이야기 해줄 디모데를 보냈다.
그렇다. 공동체 안에 분열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추는 하나님께서 이미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지혜”다. 즉 교회 문제를 세상의 잣대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곧 말씀’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근근이 들려오는 세상 지혜와 가치로 교회 공동체의 가치나 체계를 만들려는 이들의 노력이 안쓰럽기 짝이 없다. 하나님께서 분명 경계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확실한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해결책은 자신이 직접 가겠다는 것이다. 언제 갈지 정해 진 것은 없지만 반드시 갈 것이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속히 갈 것이다 라고 전한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여기고 교만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 대하여 직접 가서 그 말이 진정한 능력인지 확인해야 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교만하게 뱉는 말들이 하나님의 능력에서 오는 것인지 검증해야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심각하게 도전한다. 자신이 직접 고린도에 갈 때 매를 통한 징계를 기지고 갈까? 아니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갈까? 선택하라는 거다. 이것은 자신이 고린도에 직접 가기전에 빨리 돌이키라는 것이다.
이런 바울의 말(글)이 해결책이 될까? 적어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의 존재는 그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아버지의 권위는 매우 견고했다. 바울이 스승으로서 고린도 교회를 양육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품었다고 했지만, 때로 아버지는 단호한 가르침을 위해 입술을 꼭 깨문다. 그것을 알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휘두르는 매를 맞을건가? 아버지의 인자한 사랑을 누리겠는가?
나는?
-바울과 아볼로는 말씀을 벗어나지 않고 십자가의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을 보여주며 복음을 전했다(6절). 서로 판단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가르침과 삶이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고린도 성도들은 지도자를 추켜세우며 경쟁만 할 뿐(3:4), 그들의 삶을 본받지 못하고, 자신들의 잘남을 과시했다. 택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선물로 은혜와 은사를 받았으면서도 처음부터 자기 것인 양 교만하게 자랑하였다. 참 지도자와 성도는 육신적인 자랑거리를 갖춘 자들이 아니라 십자가의 지혜를 따라 겸손하게 섬기는 이들이 아니겠나!
-성도들이 은사에 취해 왕처럼 마음이 부풀어 있을 때, 그들이 떠받드는 바울은 죽기 위해 원형경기장으로 끌려가는 검투사처럼 갖은 고난과 수치를 당했다. 그들이 남들보다 충분히 지혜롭고, 능력 있고, 존귀한 자가 된 듯 여기고 있을 때, 바울은 아무 쓸모없는 때처럼 대접 받으면서도 바보같이 핍박을 참고, 미련하게 욕하는 자를 축복하며, 어리석게도 비방하는 자를 권면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인 십자가의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분쟁의 배후에 있는 성도들의 ‘교만’을 지적한다. 그들은 선물로 주신 은혜와 은사마저 처음부터 자기 것인 양 자랑하고, ‘이미’ 구원을 다 이룬 듯 십자가의 삶을 외면하며 영적 자만에 빠졌다(7~8절). ‘이미’와 ‘아직’ 사이의 영적 긴장이 사라지고, 차별 없이 주신 은혜(1:26~29)마저 망각했기 때문이다. 내 신앙과 삶의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과분하게 여겨야 한다.
-이미 왕 노릇하고 있던(8절) 성도들과 달리 바울은 “바로 이 시각까지”갖은 고난과 수치를 당하며 종의 행보를 이어갔다(9~13절). 그들이 자기만족에 취해 있을 때 바울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세상의 바보’가 되어 아무 쓸모없는 찌끼처럼 대접받으며서도 모욕당하면 축복하고 핍박받으면 참고 욕을 먹어도 친절로 응대하며 ‘십자가의 미련한 길’을 걸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었다(10절). 고난 없는 것을 축복이라고 부르는 거짓 복음이 무성한 때에,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복으로 여기며 은혜로 잘 인내해야 하리라.
-왕 노릇하던 성도들에게 자신의 종노릇을 피력한 이유는 그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만과 무지의 잠에서 깨어나도록 아비의 마음으로 훈계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의 길을 걷는 바울의 삶을 기억하라고 권면하여, 신실한 디모데를 산 모델로 보낸다(14~17절).
-바울은 영적 자녀들이 이제는 교만과 무지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그리스도를 본받아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면한다. 성도든, 지도자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말’로 자랑하고 ‘말’로 자신이 누군지 증명하지 않는다. 성령의 능력을 따라 십자가의 복음에 어울리게 사는 삶으로 증명한다.
-고린도 성도들은 구원을 말하면서도 삶은 세상과 다르지 않았다(18~21절). 바울이 가르치고 보여준 것처럼 현란한 말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십자가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열매 없는 죽은 믿음이었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바울의 외침이 참 깊게 내 마음을 울린다. 말씀 밖으로…. 이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내가 너무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세상에 기초한 생각과 관습을 자연스럽게 행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외면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나의 삶에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이다.
*또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는 것의 중요성을 당부했다.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자신을 높은 곳에 두는 삶이 아니다. 늘 배척당하고 무시당하는 자리라도, 형편없게 여기는 작업을 하고 있더라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끝까지 감당하신 것처럼 끝까지 감당하는 것이다. 끝까지 감당하며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인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삶의 핵심은 고통과 고난의 채찍을 늘 맞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순종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다!
*분쟁은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살지 않고 세상 지혜를 더 기대며 살때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바울은 분쟁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계속 제시한다. 이미 성전 답게(3:16-17), 세상과 다르게(3:18-4:5) 공동체를 이루어 갈 것을 부탁했다. 교회 분쟁의 원인을 세상 지혜에 대한 집착과 이에 따라 각각 원하는 성향의 지도자를 따르는 결과로 나타난 것에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이었다. 본문에서는 이 모든 원인과 결과의 중심에 깔려있는 핵심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왜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이들에게서 여전히 세상 지혜를 따르는 행동들이 나타나는가에 대한 바울의 진단이다.
1.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6-7절)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나와 아볼로에게 적용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기록된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라”는 격언의 뜻을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배워서, 어느 한 편을 편들어 다른 편을 얕보면서 뽐내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새번역_6절)”
고린도 교회 문제의 핵심은 “신분”이었다. 당시 사회는 신분에 따라 하는 일이 구분되어 있었다. 육체적인 노동은 주로 하층민이 담당하였고, 머리 쓰는 것은 상층민의 전유물처럼 여겼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교회를 개척하면서 천막 만드는 일을 함께 했었고, 고상한 헬라철학의 영향을 따라 아름다운 말들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전하고 가르쳤다면 바울의 이런 모습은 매력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받아들이게 하셨음으로 교회가 세워졌었다.
하지만 이렇게 세워진 교회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이 세상의 관습과 제도를 쉽게 뛰어넘지 못했다. 하층민으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새벽일찍부터 쉼 없이 일을 해야 했고, 지친 몸으로 돌아와 근근이 예배를 드리곤 했었다. 반면에 상층민들은 하루종일 여유롭게 지내다 오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속에서 신분과 계층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이 실제적인 문제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바울이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거론하며 가르친 말씀안에서 이를 지킬 것을 권면한다. 당시 헬라철학의 정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지혜가 다스리는 공동체를 지켜야 할 것을 점검시킨 것이다.
자신들(바울과 아볼로)을 직접 예로 들면서 결코 말씀의 경계를 넘지 않았음을 강조하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그렇게 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즉,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말씀이 말하지 않은데까지” 너무나도 쉽게 나갔다. 이로 인해 공동체 안에서 서로 구별하고 차별하는것을 스스럼없이 행한다. 자기 자신을 세우려고 서로를 대적한 것이다.
더구나 은혜로 받은 은사들을 자기 것인양 자랑하기도 했고, 구원이 완성된 줄로 착각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원리를 따라 이 땅에 살아가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지 못했다. 아쉽게도 바울과 아볼로가 그들에게 보인 말과 행동은 전혀 참고할 만한 것도 되지 못한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교만한 마음”이라 표현하며 안타까워 한다.
말씀을 들어도, 가르침을 받아도 여전히 세상 가치와 철학과 지혜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앞에 교만한 것이 틀림없다. 또한 이로 인해 일어나는 공동체 안의 부조화는 반드시 점검 되어야 할 영역이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서는 안된다!
2. 십자가의 삶을 본받으라(8-16절)
하나님께 맡은 바 되어 하늘의 지혜를 전하는 바울과 아볼로는 지금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장 위험한 곳에서, 가장 비천한 대접을 받으며, 가장 고통 가운데서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은 서로에게 왕 노릇 하고 있으니 이게 웬 말인가?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지적하기 위해 복음 전도자의 삶과 고린도 성도들의 삶을 비교하여 교만해질 대로 교만해진 그들을 지도한다.
풍요로운 고린도의 삶은 이미 왕과 같은 삶을 사는 것과 같은데, 자신은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의 구경거리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어 너희를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있는 사람 되게 하였다. 우리는 약하지만 너희는 강해졌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므로 천대를 받고 있으나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누리고 있다. 편지를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없이 떠돈다. 비방받으나 좋은 말로 응답하고, 사람들이 세상의 찌기나 쓰레기처럼 취급한다.
바울은 이 모든 수모를 당해도 결코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 지혜”와 맞바꾸지 않고 이에 따라 살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삶을 멸망당할 세상의 삶과 바꾸지 않는다. 아무리 세상의 가치와 삶의 열매가 달콤하게 보일지라도 결코 바꾸지 않았다.
이런 삶을 내가(바울이) 살고 있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담대히 말한 것이다.
3. 확실한 분쟁 해결 계획(17-21절)
바울은 실제적으로 지금의 분쟁과 분열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먼저 첫 번째로 디모데를 보내겠다고 한다. 이유는 확고하다. 지금까지 바울이 가르친 것을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나의 생활 방식을 여러분에게 되새겨 줄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모든 교회에서 내가 가르치는 그대로 말입니다.(새번역_17절)”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하나님의 지혜”이기에 전하는 자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다. 동일하다. 그러니 순회전도자로 부름받은 이들은 자기의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저런 세상 지혜에 가려지고 덮여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다시 되찾게 하고,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동일한 복음”을 이야기 해줄 디모데를 보냈다.
그렇다. 공동체 안에 분열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추는 하나님께서 이미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지혜”다. 즉 교회 문제를 세상의 잣대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곧 말씀’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근근이 들려오는 세상 지혜와 가치로 교회 공동체의 가치나 체계를 만들려는 이들의 노력이 안쓰럽기 짝이 없다. 하나님께서 분명 경계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확실한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해결책은 자신이 직접 가겠다는 것이다. 언제 갈지 정해 진 것은 없지만 반드시 갈 것이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속히 갈 것이다 라고 전한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여기고 교만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 대하여 직접 가서 그 말이 진정한 능력인지 확인해야 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교만하게 뱉는 말들이 하나님의 능력에서 오는 것인지 검증해야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심각하게 도전한다. 자신이 직접 고린도에 갈 때 매를 통한 징계를 기지고 갈까? 아니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갈까? 선택하라는 거다. 이것은 자신이 고린도에 직접 가기전에 빨리 돌이키라는 것이다.
이런 바울의 말(글)이 해결책이 될까? 적어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의 존재는 그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아버지의 권위는 매우 견고했다. 바울이 스승으로서 고린도 교회를 양육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품었다고 했지만, 때로 아버지는 단호한 가르침을 위해 입술을 꼭 깨문다. 그것을 알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휘두르는 매를 맞을건가? 아버지의 인자한 사랑을 누리겠는가?
나는?
-바울과 아볼로는 말씀을 벗어나지 않고 십자가의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을 보여주며 복음을 전했다(6절). 서로 판단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가르침과 삶이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고린도 성도들은 지도자를 추켜세우며 경쟁만 할 뿐(3:4), 그들의 삶을 본받지 못하고, 자신들의 잘남을 과시했다. 택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선물로 은혜와 은사를 받았으면서도 처음부터 자기 것인 양 교만하게 자랑하였다. 참 지도자와 성도는 육신적인 자랑거리를 갖춘 자들이 아니라 십자가의 지혜를 따라 겸손하게 섬기는 이들이 아니겠나!
-성도들이 은사에 취해 왕처럼 마음이 부풀어 있을 때, 그들이 떠받드는 바울은 죽기 위해 원형경기장으로 끌려가는 검투사처럼 갖은 고난과 수치를 당했다. 그들이 남들보다 충분히 지혜롭고, 능력 있고, 존귀한 자가 된 듯 여기고 있을 때, 바울은 아무 쓸모없는 때처럼 대접 받으면서도 바보같이 핍박을 참고, 미련하게 욕하는 자를 축복하며, 어리석게도 비방하는 자를 권면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인 십자가의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분쟁의 배후에 있는 성도들의 ‘교만’을 지적한다. 그들은 선물로 주신 은혜와 은사마저 처음부터 자기 것인 양 자랑하고, ‘이미’ 구원을 다 이룬 듯 십자가의 삶을 외면하며 영적 자만에 빠졌다(7~8절). ‘이미’와 ‘아직’ 사이의 영적 긴장이 사라지고, 차별 없이 주신 은혜(1:26~29)마저 망각했기 때문이다. 내 신앙과 삶의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과분하게 여겨야 한다.
-이미 왕 노릇하고 있던(8절) 성도들과 달리 바울은 “바로 이 시각까지”갖은 고난과 수치를 당하며 종의 행보를 이어갔다(9~13절). 그들이 자기만족에 취해 있을 때 바울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세상의 바보’가 되어 아무 쓸모없는 찌끼처럼 대접받으며서도 모욕당하면 축복하고 핍박받으면 참고 욕을 먹어도 친절로 응대하며 ‘십자가의 미련한 길’을 걸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었다(10절). 고난 없는 것을 축복이라고 부르는 거짓 복음이 무성한 때에,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복으로 여기며 은혜로 잘 인내해야 하리라.
-왕 노릇하던 성도들에게 자신의 종노릇을 피력한 이유는 그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만과 무지의 잠에서 깨어나도록 아비의 마음으로 훈계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의 길을 걷는 바울의 삶을 기억하라고 권면하여, 신실한 디모데를 산 모델로 보낸다(14~17절).
-바울은 영적 자녀들이 이제는 교만과 무지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그리스도를 본받아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면한다. 성도든, 지도자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말’로 자랑하고 ‘말’로 자신이 누군지 증명하지 않는다. 성령의 능력을 따라 십자가의 복음에 어울리게 사는 삶으로 증명한다.
-고린도 성도들은 구원을 말하면서도 삶은 세상과 다르지 않았다(18~21절). 바울이 가르치고 보여준 것처럼 현란한 말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십자가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열매 없는 죽은 믿음이었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바울의 외침이 참 깊게 내 마음을 울린다. 말씀 밖으로…. 이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내가 너무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세상에 기초한 생각과 관습을 자연스럽게 행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외면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나의 삶에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이다.
*또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는 것의 중요성을 당부했다.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자신을 높은 곳에 두는 삶이 아니다. 늘 배척당하고 무시당하는 자리라도, 형편없게 여기는 작업을 하고 있더라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끝까지 감당하신 것처럼 끝까지 감당하는 것이다. 끝까지 감당하며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인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삶의 핵심은 고통과 고난의 채찍을 늘 맞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순종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다!
*분쟁은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살지 않고 세상 지혜를 더 기대며 살때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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