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인과율의 외골수가 친구를 악인으로 바라보게 하다 [욥 15:17-35]
 – 2023년 11월 20일
– 2023년 11월 20일 –
엘리바스는 고난당하는 욥과의 대화를 “누가 더 지혜로운가?”의 대결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1~16절에서 욥의 지혜를 깎아내린 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지혜를 뽐낸다. 아마도 그 지혜는 자신이 속한 특별한 그룹에서만 전수된 신비로운 지혜인 듯하다. 지혜자들 안에서만 온전하게 구전됐지만 외부인들에게는 누설된 적이 없는 지혜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그 내용이 그 정도로 특별할까?
 
또한 1~16절에서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욥을 죄인이라고 규정한 다음 악인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할 것인지 자신이 전해 받은 지혜 전통을 따라 욥에게 전하고 있다. 엘리바스는 욥이 더 버틴다면 매우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논증하며 욥을 설득한다.
 
 
 
1. 지혜자의 말을 들으라(17~19절).
엘리바스는 다시 한번 자신이 본 것과 오랜 시간 동안 지혜자들이 전해준 지혜를 알려주겠으니 잘 들으라고 말한다. 자기 말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자기 말은 자신이 본 것일(17절) 뿐 아니라 조상들 때부터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며 현재의 공동체가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라는 것을(18절) 강조한다. 또한 ‘자신들의 땅에는 이방인들이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조상들로부터 받은 지혜는 이방 사상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순수하고 전통적인 지혜’라고(19절) 강변한다. 이렇게 엘리바스는 전통에 의지하여 자신의 지혜가 훨씬 옳고 권위가 있음을 강조한다.
 
 
 
2. 악인에 대한 심판의 날이 정해져 있다(20~24절).
먼저 엘리바스는 20~35절의 내용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욥에게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의미에서 악인의 심판에 대하여 말한다. 곧 “악인의 심판은 정해져 있다”라는 것과 “악인이 심판받는 이유”, “심판의 결과”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먼저 악인이 그 인생의 날 동안 살아서 평안한 삶을 살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사는 날 전체가 다 고통이다(20절). 엘리바스는 ‘포악자’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만큼 욥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에 대해 격분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사는 동안 포악자는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으며 평안하다고 안심할 때도 갑자기 멸망하는 자가 나타나 그를 두렵게 하는 것이다. 또한 칼날이 그를 치려고 언제나 겨누고 있어서 그는 어둠에 숨어서 나올 엄두도 내지 못한다(22절). 그는 헤매며 음식을 구걸하러 다녀야 할 정도로 나락에 떨어졌다(23절). 환난과 역경이 결국은 그를 완전히 압도할 것이다(24절). 악인의 삶은 결국 심판의 날을 피할 수 없다. 심판은 악인에게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3. 심판을 받는 이유(25~26절)
악인이 받을 수밖에 없는 환란과 역경의 심판 날은 왜 그에게 임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이다(25절).”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의 모습을 전쟁의 상황으로 묘사한다. 악인의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손을 뻗고 힘을 과시한다. 또한 교만하게 목을 쳐들고 두꺼운 방패를 들고 하나님을 이기겠다고 전속력으로 돌진하고 있다(26절).
 
무모하기 짝이 없다. 엘리바스는 욥이 이와 다름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욥이 포악자까지는 아니지만, 자신이 욥에게 들려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를 거부하고 틀렸다고 말하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욥의 모습을 포악자로 비교하는 것과 같다. 한편으로 욥 자기 모습이 이렇게 하나님께 죽자고 덤비는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보라는 의미이다.
 
 
 
4. 심판의 결과(27~35절)
이렇게 하나님께서 무모하게 대항한 결과는 잠시의 풍요와 번영은 누리겠지만(27절), 이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황폐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성이 다 무너져 돌무더기가 된 곳에 거주하게 될 것'(28절)이라고 말한다. 재산을 순식간에 잃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부를 쌓지 못한다(29절),
 
또한 늘 두려워 어두운 곳을 떠날 엄두도 내지 못하고 혹시 용기를 내어 나오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불꽃으로 새싹을 말리시듯 모든 희망을 꺾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입김에 악인은 다시 어둠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30절).
 
31~35절은 심판의 결과로 오는 악인의 허무한 종말을 여러 개의 상징을 통해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누구도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기대하게 해서는 안 된다. 회복에 대한 기대는 허망할 뿐이다(31절). 새싹은 푸르지도 못하고 포도 열매는 익기도 전에 떨어져 버리고 올리브 나무의 꽃은 열매도 맺기 전에 져버리는 것처럼, 경건하지 못한 자들은 자녀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악인의 죄악 때문이다. (35절).
 
엘리바스는 분명하게 짚는다. 악인에게 주어진 고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삶은 악인 스스로 초래한 결과이다. 욥이 지금 고난을 목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잉태하고 낳은 악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이다.
 
 
 
나는?
-여러 가지 지식과 지혜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수도 있다. 엘리바스는 욥이 지혜자들의 가르침을 수용하지 않는 교만함이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교만한 사람은 그였다. 그는 자신의 지혜를 전통 가운데 확립된 권위 있는 지혜임을 확신하며 욥을 가르친다. 그러나 설령 내가 가진 지식이 옳다고 하여도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다. *하나님 나라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가 아니라 어린아이 같은 자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나라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마 11:25).
 
-인격적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인과법칙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다양하다. 엘리바스는 전통적인 인과법칙을 따라 악인들이 형벌을 받고 고통과 두려움 속에 살게 된다고 말한다. 이런 원리를 따라 욥이 당하는 고통도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을 행한 결과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엘리바스의 말은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더욱 절망케 한다. 무엇보다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하나님은 인간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사랑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를 돌이키시는 인격적인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웃의 고난을 쉽게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엘리바스는 지금 당장 악인들이 잘사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이 결국 심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지극히 타당하다. 현재 잘살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니다. 또한 지금 고통받는 모든 사람이 벌을 받는 악인도 아니다.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현재의 고난은 장차 있을 영광을 위한(롬 8:18) 예비 단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고난 겪는 자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권리가 아니다. 우리는 다만 그들을 위로하고 섬겨야 할 것이다.
 
 
*엘리바스가 자신이 본 것(4장)은 지혜로운 자들이 그들의 선조들에게서 받아서 전해 내려온 지혜와 같다고 변호한다. 엘리바스는 이런 전통의 이름으로 친구인 욥을 정죄하고 욥의 운명에 대해 저주하는 셈이다. 나도 혹시 전통적인 신학과 지혜의 이름으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정죄하고 있지는 않을까?
 
*엘리바스는 자신을 진정한 지혜자라고 자랑하면서 정작 그 지혜로 욥을 돕기보다는 더욱 고통 속에 몰아넣고 있다. 친구를 서슴없이 악인과 포악자로 부르면서 그런 자들에게 임할 무서운 고통을 나열한다. 엘리바스는 욥이 지금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전통적인 지혜인 인과응보의 원리를 욥의 상황에 기계적으로 적용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 없는 지혜는 이처럼 고통에 빠진 사람을 돕기보다 더욱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다. 내가 자랑하는 지혜로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한다.
 
*엘리바스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욥에게 적용했다. 하지만 욥은 인과응보의 원리에서 벗어난 고통 가운데 있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과 의견을 앞세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주님, 엘리바스의 외골수가 친구를 포악자로 여기는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친구의 아픔의 몸부림을 그저 지식과 경험과 전통으로 해석하는 시선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혹시 제가 그러지는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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