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주의 말씀이 이기다 [행 19:8-20]
 – 2024년 06월 11일
– 2024년 06월 11일 –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여 에베소로 다시 돌아온 바울은 비교적 오랫동안 회당과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전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바울과 함께하셨을 뿐 아니라 그를 사용하셔서 놀라운 능력을 행하시게 하신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바울의 능력 행함을 흉내 내려 했으나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했다.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많은 에베소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다.

 

1, 2차 전도 여행과 3차 전도 여행이 다른 점은 바울이 한 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사역했다는 점에 있다. 대표적으로 에베소에서 최소 2년 3개월을 머문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도시들에서 머문 기간은 각각 달랐다. 주의하여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체류 기간의 차이는 사람들의 반응에서 차이를 두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선교지를 자주 옮겨 다지니 않았다. 오히려 바울은 좀 더 오래 머물면서 성도들을 돌보기를 원했지만, 복음에 대적하는 무리로 인해 자주 선교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베소에서는 회당에서만 3개월 동안 하나님 나라를 전했고, 회당에서의 복음 전파가 여의찮아지자, 바울은 두란노 서원을 세워서 말씀을 전했다. 그 기간이 2년에 이른다.

 

‘누가’는 바울의 3년여 에베소 사역을 두 가지 중요한 사건으로 압축하여서 들려준다. 누가가 두 사건을 선택한 까닭은 연관된 주제가 당시 에베소의 중심 세계관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법과 아데미 신전”인데, 본 단락은 첫 번째 주제인 마법과 관련된 사건을 다룬다. 마법에 사로잡혀 살던 이들이 예수 이름과 말씀의 능력 앞에 자복했고 곧바로 삶의 기준과 방식을 돌이키는 구체적인 행동을 취한다. 회심은 총체적이다. 자복과 고백을 통한 “내면의 회개”와 행동을 일으키는 “삶의 회개”가 함께 일어나야 한다.

 

 

 

  1. 두란노 서원을 세우다(8~10절).

2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잠시 들렀던 에베소에서 경건한 유대인들과 함께 보낼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바울은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예루살렘으로 떠났었다(행 18:19~20).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에베소로 돌아왔다. 지난 만남에서 복음에 관심을 보였던 에베소 사람들과 충분히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나눌 수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의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한다. 그런데 ‘누가’는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한 기간을 3개월이라고 소개하였다. 데살로니가에서 겨우 3주 동안 설교할 기회를 얻었던 것에 비하면 에베소에서는 거의 네 배의 시간을 전할 수 있었다. 사역 초기에는 강력한 반대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 바울은 단순히 말씀을 강론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권면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말씀을 받아들이라고 강하게 도전하는 것을 의미하며 강력한 도전을 함의하는 표현이다. ‘권면하다”는 표현은 또한 바울이 구약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때 흔히 사용했던 방법이었다(행 17:1, 17; 18:4, 19). 이론적인 것을 나열하고 설명한다는 것보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행동을 아우르는 표현이었다. 또한 ‘누가’는 바울이 “담대히” 가르쳤다고 강조한다. 두란노 서원에서는 매일 가르쳤다는 기록을 보아 회당에서는 안식일마다 가르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바울의 적극적인 가르침에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바울과 그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 마음을 열지 못했다. 도리어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를 통해 밝히듯이 복음을 비방하는 유대인들도 있었다. “마음이 굳어(스크레리노)”와 “순종하지 않고(아페이쎄오)”라는 미완료 시제를 통해 그들의 적대적인 상태가 상당 기간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유대인들의 비방은 바울이 전하는 가르침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지속해서 비방하는 것이었다.

 

결국 바울은 회당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웠고 두란노 서원이라는 곳으로 갔다. 거기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다(9절). ‘누가’는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무려 2년에 걸쳐 말씀을 전했다고 기록한다. 그 결과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10절).” 두란노는 건물의 소유자 이름이거나 이 건물에서 가르치는 사람의 이름일 것이다. 바울은 이곳에서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오랫동안 열과 성을 다하였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집중적으로 강의한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다. 한편 바울은 에베소에서도 자비량 사역을 하였는데(행 20:34), 소위 “휴식 시간(siesta)”이라고 불리는 시간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것이다.

 

 

 

  1. 마술사들과 대결한다(11~19절).

이 단락은 에베소에서의 사역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믿기지 않는 초자연적인 역사는 심지어 바울이 자기 몸에 있던 손수건과 앞치마를 통해 치유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 물건들은 바울이 천막을 만들거나 가죽을 다룰 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치유 기적은 예수님의 겉옷을 만짐으로 여인이 치유받은 사건과 흡사하다(막 5:27~34, 6:56). 또 베드로의 그림자에 닿기만 하여도 치유가 이루어진 사건도 상기된다(행 5:15). 그런데 ‘누가’는 11절을 통해 이런 기적이 일상적인 것이 아님을 “놀라운”이라고 번역된 형용사를 통해 드러낸다. 이 단어는 “예외적인”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는 인간이 행할 수 있고 흉내 낼 수 있는 마술의 영역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이는 잘 증명해 준다. 바울을 통해 나타난 초자연적인 기적은 마술사 그룹들에 금새 알려졌을 것이다. 13절은 누가가 유대인 마술사들이 바울을 흉내 내었다고 기록한다. 이들의 시도가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하지만 그들 중 한 부류는 분명히 부끄러움을 당했다. 유대인 마술사들과 동일하게 예수의 이름을 오용했던 사람들이 악귀에게 짓눌림을 당했다.

 

이 사건은 에베소의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심각한 영적 도전을 가져다주었다. 에베소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의 이름을 높이는 변화가 일어났다. 1세기 강력한 우상 중 하나였던 아데미 여신을 섬기던 에베소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를 위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회심을 경험하고 그들의 죄를 스스로 고백하며 회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술을 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마술을 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일도 일어났다. 결단의 표시로 그들은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30억에 달하는 마술책들을 불사르게 된다(19절). 에베소의 영적 부흥이 참된 회개를 동반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1. 주의 말씀이 힘을 얻다(20절)

20절은 에베소에 일어난 기적과 이적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누가가 기대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기적과 이적이 필요한 이유는 말씀이 힘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바울과 관련된 기적 이야기(11~12절), 스게와의 일곱 아들 이야기(13~16절)와 그로 인한 에베소 사람들의 영적 변화에 대한 에피소드(17~19절)는 모두 20절을 통해 요약된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큰 능력이 나타난 것은 주의 말씀 때문임을 강조한다.

또한 사도행전 6:7과 12:24에서 사용된 “더하다(플레시노)”라는 표현 대신에, “세력을 얻다(이스키오)”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귀신 들린 사람이 스게와의 일곱 아들 위에 뛰어올라 덮친 행동을 묘사할 때 “이기다(이스키오)” 동사와 같은 단어이다.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귀신이 일곱 아들을 이긴 사건을 주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역전시켰다는 뜻이다.

 

귀신은 한 번 승리했지만, 주님의 말씀은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을 비교한다.

 

 

 

나는?

-말씀이 권능을 일으켰다. 바울은 에베소 회당에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 담대히 전하고 권면하였다. 세속문화와 우상이 지배하는 도시에서 예수만이 왕이라고 선포하고 그분의 통치에 복종하라고 권면했다. 하지만 자기 왕국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이 왕의 소식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자 바울은 “두란노”라는 사람의 사설 학원으로 옮겨 날마다 무려 2년 동안 강론하였다.

 

-처음에는 제자 양육으로 시작되었으나 아시아의 모든 유대인과 헬라인 들을 망라한 대중 사역으로 변모되었다. 당시 바울의 손을 통해 나타난 권능은 그가 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사탄을 이기고 결박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확증해 주었다.

 

-말씀이 이긴 마술. 마술하는 유대인이 바울을 모방하려다가 큰 수모를 당한다. 예수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를 빙자하여 악귀에게 명령하였지만, 악귀가 그를 비웃고 악귀 들린 사람이 그를 상하게 하니, 그가 벗은 몸으로 도망해야 했다. 예수를 의지하려 하기보다, 예수를 사용하려는 “유사 기독교인들”로는 결코 사탄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릴 수 없다. 도리어 크게 패하여 세상 앞에서 수치와 낭패를 당할 것이다.

 

-악귀(세상)는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예수의 사람으로 알아볼 것인가?

 

-에베소에서 주의 말씀은 악을 이기고 하나님 나라를 창조하는 권능의 도구였다. 그 권능을 보고 회개하는 이들이 생겼고 직업으로 마술하던 이들이 직업까지 버리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였다. 에베소에서 복음은 개인뿐 아니라 거룩한 사회변혁까지 이뤄낸 것이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먼저 말씀의 권위를 인정할 때 세상도 교회의 말을 두려워하기 시작할 것이다.

 

*바울이 석 달 동안이나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를 담대히 전하였으나 유대인들은 줄곧 마음 문을 닫고 오히려 그 도를 비난하였다(8~9절). 옳고 그름을 따져 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혹시 내 안에 깊이 자리 잡은 편견이나 선입관이 나를 더 깊은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지는 않을까 돌아볼 일이다.

 

*석 달 후 바울은 두란노 서원으로 옮겨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제자들만 따로 세워 2년 동안 가르친다. 그 결과 에베소뿐만 아니라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두루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9~10절). 회당의 유대인만 고집하였다면 기대하기 어려웠을 결과이다. 혹시 고집스럽게 고수하고 있는 것 때문에 더 많은 변화가 더디 오고 있는 것은 없을까?

 

*사도들의 손을 통해(5:12), 베드로의 그림자를 통해(5:15~16) 이적을 행하신 하나님이 이제 그 능력을 바울에게도 주셔서 그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진정성을 확증해 주셨다(11~12절). 사망의 증상인 질병들을 고쳐주심으로써 예수를 통해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죄와 사망에서 놓임 받는 참된 치유와 회복의 나라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만 이용하려던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큰 수치를 당한다(13~16절). 주여 주여를 주문처럼 외며 모방하는 종교 행위가 순종하는 믿음을 대신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속지 않으신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는 종교 행위에 목매는 것이 아니라 순종의 믿음을 살아내는 역동적인 공동체이기를 바래본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한 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명명백백하게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17~19절). 이 일을 아는 이들은 다 거룩한 두려움에 떨며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였고,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계와 직결된 모든 책을 다 불살랐다. 참된 회개는 양심의 가책에만 머물지 않고 죄를 중단하고 죄의 혜택들을 모두 불사르는 결단을 동반한다.

 

*에베소의 부흥은 이적이나 표적의 승리가 아니라 말씀의 승리였다. 우리 공동체도 말씀의 승리가 증명되는 공동체이기를 바란다. 말씀이 승리하는 증거들을 오롯이 드러내는 삶과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하리라.

 

 

 

*주님, 말씀이 승리하는 삶이기에 오롯이 말씀을 순종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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