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여호와의 경고, 분명히 알라 분명히 알지니라 [렘 42:15-22]
 – 2024년 08월 01일
– 2024년 08월 01일 –
여호와께서 유다에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기에 가나안에 머물라는 권면의 말씀(10~12절)에 이어 경고의 말씀(13~22절)이 길게 나온다. 여호와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간다면 이들은 그곳에서 다시 한번 여호와의 심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본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4장의 두 무화과 광주리의 이상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이상에 따르면 주전 597년의 제1차 바벨론 유배민들이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들)”이다. 하나님 백성의 미래가 가나안에서 바벨론으로 옮겨진다. 이와 같은 이상을 배경으로 42장을 보면 가나안에 남은 자들이 어떻게 구원 기회를 상실했는지를 알 수 있다. 여호와의 결정은 벗어버릴 수 없는 운명의 굴레가 아니다. 42장은 멸망의 시대를 사는 자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권면의 말씀과 멸망으로 끝나는 경고의 말씀이 함께 주어진다. 곧 이들 앞에 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이 함께 주어진다. 이들이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가 될 수도 있고 버림받은 자가 될 수도 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권면에 따라 유다에 남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하고 만다. 이 잘못된 결정이 자신들을 하나님 백성 위치에서 탈락시켜 버린다.
    
    
    
1. 경고의 말씀(15~18절)
거의 일 년 반 동안 계속된 바벨론의 공격으로 전쟁의 두려움과 굶주림의 고통을 뼛속까지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전쟁과 나팔 소리와 굶주림이 없는 곳을(14절) 동경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애굽이 이들의 기대에 부합한 곳이냐이다. 애굽은 사실상 근동의 패권을 장악한 바벨론의 최종 목표였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애굽 침략은 사실상 시간문제였다. 그렇기에 요하난을 비롯해 그를 따르는 이들의 유다의 멸망과 가나안 땅의 신학적 이해 부족이 본질적인 문제였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 생각을 합리화하며 애굽만이 유일한 해결책인 것으로 이미 마음이 채워져 있었다.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자들의 눈에는 유다 땅이 폐허와 혼란만 가득하게 보였겠지만, 가나안 땅은 여호와께서 이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었다. 버려야 할 곳이 아니라 재건해야 할 땅이었다. 더 궁극적으로는 유다의 파국적 재앙의 근본 원인에 대한 깨달음이 전혀 없었다. 특히나 “모든 군대의 지휘관”에게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다의 멸망은 약소국의 비극적인 운명밖에 안 됐다. 예레미야의 예언자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여호와의 신탁을 청탁했으나 그가 이전에 선포했던 말씀에서 새로운 출발의 토대가 될 신학적인 교훈을 끌어내지 못했다. 땅의 전통과 멸망의 근본 원인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부재가 이들이 떠나야 할 애굽으로 내려가게 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겠다고 굳게 맹세한 자들(5~6절)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명령하신다(15절). 주목할 만한 표현인 “유다의 남은 백성”은 40:15에서 요하난이 그다랴에게 이스마엘을 죽이게 해달라고 간청할 때 그가 사용한 표현이다. 즉, 유다의 남은 자들의 멸망을 막겠다고 나선 요하난이 이제 유다의 남은 자를 멸망으로 이끄는 것이다.
    
경고의 말씀에 앞서 15절 하반절은 다시 한번 조건문이 등장한다. 내용상 14절의 반복이다. 이는 요하난 일행이 애굽으로 내려가 머물기로 했음을 시사한다. 그들은 전쟁과 나팔 소리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려 하지만 애굽은 전쟁과 기근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 “너희가 두려워하는 전쟁이 거기 이집트 땅으로 너희를 쫓아갈 것이며, 너희가 무서워하는 기근이 거기 이집트에서 너희에게 붙어 다닐 것이다. 너희는 거기에서 죽을 것이다(새번역_16절).”
    
칼이 두려워 안전한 애굽으로 도망하지만, 거기에서 칼에 따라 잡히고, 굶주림이 두려워 양식이 풍부한 애굽으로 내려가지만, 거기에서 굶주림과 함께 살게 된다. 유다 땅에 머문다면 “두려워하는 바벨론 왕”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지만(11절), 칼과 기근이 두려워서 애굽으로 내려간다면 거기서 칼과 기근에 죽게 된다. 17절은 내용상 16절의 반복이다.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에 머물러 살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은 심판의 철저성, 특히 전쟁에 의한 완전한 멸망을 상징한다. 전쟁 중에 칼에 맞아 죽고, 전쟁에서 살아남았더라도 양식이 없어 굶주려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는다. 무엇보다 이 재난을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것이기에 “벗어나서 남을 자(17절)”가 없다.
    
18절은 “유다의 남은 자”가 이미 혹독하게 경험한 예루살렘의 멸망에 비교해서 엄중하게 경고한다. 이들이 애굽으로 들어가면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노여움과 분”을 부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분을 이들에게 부어 “가증함과 놀람과 저주와 치욕 거리”가 되게 하실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미 29:18에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주민들을 민족들 가운데로 흩어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이 되게 하실 것을 선포했다.
    
요하난 일행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여호와의 분노 결과였음을 인정하고 그분 말씀에 순종해서 살길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루살렘 주민의 파국적인 운명이 이들의 운명이 된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다시 가나안 땅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바벨론 유배민들과 달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여호와의 권면과 경고의 말씀을 무시한 자들이기에 귀향이 허락되지 않는다.
    
    
    
2. 예레미야의 경고(19~22절)
여호와의 말씀에 이어 예레미야의 경고가 선포된다. 이 경고는 유다의 남은 자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갈 것을 전제하며 이들의 자기 기만적인 불순종을 고발한다. 문맥상 예레미야의 경고는 이들의 불순종을 되돌려보려는 마지막 시도로 읽을 수 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굳어진 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해서든 깨보려고 예레미야는 이들의 잘못을 신랄하게 지적한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용하는 “너희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13~18절의 요약이다. 애굽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여호와의 의지이다. 이들의 불순종을 이미 알았던 예레미야는 이들에게 분명하게 경고한다(19절). 애굽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내리는 재난(17절)”을 알고도 내려간 자들이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자기에게 한 약속(2~3절, 5~6절) 앞에 세우고 이들의 자기 기만적 행태를 고발한다.
    
“여러분은 나를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보내면서, 나에게 간구하였습니다. ‘주 우리의 하나님께 우리를 위하여 기도를 드려 주십시오. 그리고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알려 주십시오. 우리가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 하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일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새번역_20절).”
    
이들은 먼저 예레미야에게 찾아와서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순종을 확약했었다. 자진하여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할 것(6절)이라고 거듭 약속했었다. 어떤 경우에도 순종할 것을 자발적으로 약속한 자들이었기에 이들의 불순종은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악했다.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는 “너희 목숨을 내놓아야 할 잘못을 저질렀다”는 의미다. 즉, 이들은 예레미야를 속였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여호와까지도 기만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알려달라 해서 “오늘” 알려주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된 모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21절). 이들은 들어가서 머물고 싶어 했던 바로 그곳에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을 것이다(22절).
    
이러한 예레미야의 심판 예고는 사실상 17절의 요약이다. 예레미야의 경고는 “너희는 분명히 알라”로 시작해서 “분명히 알지니라”로 끝난다. 그런데도 요하난과 유다의 남은 자들이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거절하고 거기로 내려가 정착하기를 원한다면,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순종 없는 기도는 없다. 말로는 좋든지 나쁘든지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겠다고 했지만, 백성들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서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고 촉구한다. 선지자의 절박함이 묻어난다. 여호와께서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고 순종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애굽으로 내려가서 살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으면서 아무리 선지자를 동원하여 기도하고 큰 말로 맹세한다 해도 살길은 없다.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는 기도는 하면 할수록 내 신념만 강화하고 내 욕심만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것이다.
    
-눈앞의 어려움을 피하겠다고 불의한 방법이나, 세상의 방법을 구하고 있지 않는가? 이번 한 번만이라고 핑계대지말고 힘들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택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순종 없는 안전은 없다. 전쟁과 궁핍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할 마음을 품고 있던 요하난과 남은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지켜주겠으니 이 땅에 남으라는 명령을 거절하면 거기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그들이 피하고 싶었던 칼과 기근과 전염병일 것이라고 하신다. 전쟁과 굶주림과 질병이 기어이 애굽까지 “뒤쫓아서. 따라잡아” 애굽의 보호 아래 살아남겠다던 자들을 삼킬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 어디에 안전하고 평화로운 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 말아야 한다.
    
    
-순종 없이 구원도 없다. 예레미야는 남은 백성이 마음에도 없으면서 순종의 맹세를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순종할 자들이 아니라 자기 계획을 뒷받침해 주는 말이 나올 때까지는 아무 말도 듣지 않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알아야 했다. 하나님의 분노를 피하지 못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간 대다수 백성처럼, 불순종하는 그들에게 칼과 기근과 전염병의 재난이 꼭 임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구하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보시고 행하신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나은 자들이 “마음을 속인 채” 기도를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나치게 강한 순종의 결의는 오히려 그들의 불안한 마음만 드러낼 뿐이었다. 인간적인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가리고 나의 뜻을 관철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계속 고집을 부리면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 “분명히 알라”, “분명히 알지니라”라고 경고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마음을 속인 채” 하나님을 부르지 않겠습니다. 늘 진실하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겠습니다.
*주님, 순종 없는 기도도 없고, 순종 없는 안전도 없으며, 순종 없는 구원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주님의 음성이 더 무겁게 들리는 아침입니다.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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