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시편 106:32-48]
 – 2024년 08월 31일
– 2024년 08월 31일 –
본문은 106편의 결론부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의 성실성, 즉 인자하심에 대한 최종적인 메시지를 제공한다. 과거에 조상들에게 인자하심을 베푸신 여호와이시니 현재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인자하심을 베풀어주셔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시편 4권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간절한 기대와 신뢰를 드러내고 있다.
 
 
 
1. 므리바에서의 반역(32~33절)
금송아지 숭배 사건, 바알브올 사건에 이어 이스라엘이 므리바에서 하나님께 반역한 사건을 서술한다. 므리바 사건은 출애굽기 17장과 민수기 20장에 나타난다. 본문이 언급하는 것은 민수기 20장의 기록으로 모세가 반석을 두 번 내려침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하여 여호와께서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사건이다. 본문에 따르면 백성들이 여호와를 노하시게 했는데, 그로 인해서 재난이 모세에게까지 임하게 되었다. 백성들이 모세의 영혼을 분노하게 만들어 모세가 민수기 20:10에서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본문의 핵심은 백성들뿐 아니라 모세까지도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 있다. 모세는 19~23절의 금송아지 사건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언약을 다시 체결하는 중심인물이었다. 그러나그 모세조차도 부족하여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지도자와 백성을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하나님은 과연 모세를 포함한 이스라엘 민족 모두의 반역에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2. 사사시대의 우상숭배와 이방 압제의 역사(34~43절)
본 단락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한 역사를 상세하게 기술한다. 34~36절은 우상숭배 사건을 사사기 1~2장의 내용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방 백성의 영향으로 이스라엘은 결국 이방의 우상까지 섬기게 되었다. 37~39절은 이방 제사 방식을 받아들인 이스라엘 백성이 자녀를 죽여 제물로 바친 죄악상을 기술한다. 특히 38절은 “피가 땅을 더럽혔다”고 언급하며 하나님 나라의 기업인 가나안 땅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살인죄는 용납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39절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행위를 “음탕하다”고 규정한다. “음탕하다(자나)”는 “음란한 행위를 하다 혹은 간음하다”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를 함으로써 남편이자 주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로 떠나갔다는 죄악상을 명확하게 언급한 것이다.  
 
40~43절은 사사기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배역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서술한다. 하나님은 배역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돌이키시기 위해 이방 나라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압제하게 하셨다. 이를 40~41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업을 미워하셔서 이방 나라의 손에 넘기셨다고 표현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에서 원수들에게 복종하게 되는 수치를 경험하였다. 43절은 이러한 우상숭배와 열방 압제가 많이 일어났으며 사사기에서 말하듯 이스라엘의 배도는 계속 반복되었고 그 배역의 수준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3. 인자하심을 베푸신 여호와(44~46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의 손에 넘긴 것으로 끝내지 않으셨고, 구원의 손길을 베푸셨다. 본 단락은 구원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성품을 소개한다. 44절은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셨다”로, 45절은 여호와께서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인자하심을 베푸셨다고 선언한다. “인자하심”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고야 만다는 언약적인 성실성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이스라엘을 한 번 언약 백성으로 삼으셨기에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며, 결국 구원하고야 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백성의 범죄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지 않으며, 하나님 자신의 성실하심으로 인해서 반드시 성취된다.
 
 
 
4. 구원에 대한 요청과 송영(47~48절)
시편 106편의 전체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반역과 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내하면서 그들에게 인자하심을 베푸셨다는 데 핵심이 있다. 이렇게 과거에 행하신 인자하심의 역사의 서술이 가지는 목적은 분명하다. 과거 역사의 기술은 항상 현재를 향한 투영이 목적이다. 과거를 배움으로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 역사 서술의 목적이다.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말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행하실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47절은 이런 시인의 소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주, 우리의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여러 나라에 흩어진 우리를 모아 주십시오. 주님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십시오(새번역).” 과거에도 이스라엘은 범죄하하여 언약 관계가 깨졌었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해 회복되었으니, 그 인자하심의 은혜를 지금 다시 주셔서 깨어진 언약 관계가 회복될 수 있도록 동일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48절은 106편을 마무리하는 구절인 동시에 시편 4권 전체에 대한 송영이기도 하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영원할 것을 노래한다. 인자하심을 베푸시는 여호와는 영원하시고, 온 피조물 가운데 항상 계시는 왕이시며, 그 인자하심은 영원하다. 따라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도, 스스로는 연약하고 허물이 많지만,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의뢰할 때 다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에 대하여 모세가 성급히 분노하는 바람에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시인은 모세보다는 지도자를 넘어지게 한 이스라엘의 반역을 책망한다. 나도 되짚어 보아야 한다. 나의 탐욕과 불신은 공동체와 지도자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 나의 언행 하나하나가 공동체와 지도자들의 판단에 영향을 끼친다. 믿음의 언행은 용기와 담대함을 주지만, 불신앙의 언행은 성급함과 분노로 결정하게 한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민족을 진멸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할 수 없어서 못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었는데도 하지 않았다. 그들과 동거하였고, 그들의 문화를 수용했다. 결국 그들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동화되고 만다. 그들이 믿는 신을 섬겼고, 그 죽은 신들에게 자신들의 자녀들을 바치기까지 하였다. 하나님은 순종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함께 주신다. 불순종은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순종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이다. 어중간한 순종은 자신부터 넘어뜨린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은 유업을 멸시하니 하나님도 미워하셨다. 그들이 하나님을 미워하고 도움의 손을 뿌리치니 하나님도 도움의 손길을 거두시고 그들을 미워하는 이방의 손에 자기 백성을 넘기셨다. 여러 번 용서하고 구원하셨지만, 교묘하게 거역하여 스스로 원수의 압제와 굴종을 자초한 결과였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사랑은 죄악을 묵인하는 맹목적인 사랑은 아닌 것이다.
 
-악인들을 향한 심판이 하나님 나라 계획과 언약의 포기는 아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소리에 다시 언약을 기억하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끝이 어딘지 모른다. 항상 근신해야 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쉽게 포기해서도 안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곰곰이 되짚어 보면 사람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절망적인지 모르겠다. 므리바에서 백성은 하나님을 노하게 하고, 그 모습을 본 지도자 모세는 망령된 말을 여과없이 쏟아 냈다(32~33). 출애굽과 광야생할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돌보심을 매일 누리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만 생기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예삿일이었다.
 
*광야에서만 그랬나? 아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주신 가나안 땅에서도 그랬다.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 둘 거스리더니 급기야 우상을 숭배하고 심지어 자녀들을 제물로 던지기까지 했다(34~37)). 이 무슨 절망적인 일이란 말인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우상에 포로된 백성을 이방 나라의 포로가 되게하셨다(42~43). 개인적인 원망과 불평이 공동체의 절망을 불러오고, 절망의 포로까지 되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절망스런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백성들이 절 가운데 부르짖으니, 그들의 고통을 돌아보신다. 언약을 기억하고 긍휼을 베푸신다(44~46). 절망을 반전시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다. “그러나(44)”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언약을 기억하신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도 “부르짖을 때” 임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낮아져 도무지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처절하게 깨닫고 그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낮아짐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반응하셨다. 그리고 그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마다 고난을 살펴봐 주신다(44).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이 품을 수 있는 소망은 단연코, “부르짖을 때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부르짖음은 자신의 정말적인 상태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할 때 일어나는 은혜다. 늘 구하고 부르짖을 때 절망의 때를 살더라도 결코 절망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알려주고 계신다.
 
*지금 여기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고 있는 분명한 증거는 부르짖을때마다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일상에서 확인하고 누리고 있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님, 구구절절 반역의 역사속에서 주님만이 성실하게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 은혜로 제가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절망 속에서 부르짖을 때 긍휼과 인자하심으로 돌보아주시는 은혜로 오늘을 살고 있음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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