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엘리사의 시대가 시작되다 [왕하 2:15-25]
 – 2024년 09월 04일
– 2024년 09월 04일 –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엘리사와 50명의 선지자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사라진다. 엘라사는 엘리야의 외투로 요단강을 가름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인정하셨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엘리야의 승천에 대한 예고를 들었던 선지자의 제자들은 그의 승천을 믿 못하고 엘리야의 시신을 찾겠다고 나선다.
 
 
 
1. 엘리야의 시체를 찾는 선지자의 제자들(15~18절)
엘리야가 승천할 때 요단 건너편에 있던 제자들은 엘리사가 엘리야와 동일하게 외투로 물을 가르고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는 엘리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이 엘리사에게 임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러자 그들은 엘리사 앞에서 엎드리고 경배하며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이로써 50명의 제자들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확실한 후계자라는 것을 증언해줄 증인이 되었다.
 
그런데 16절은 그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시체를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이들은 강 건너편에서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흽쓸려 올라가는 것을 보았으나 하늘로 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호와의 영이 하늘로 올렸다가 엘리야를 중간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선지자의 제자들이었고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보여주신 마지막 기적을 믿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살아 있는 상태로 하늘에 올리신 이유가 어쩌면 이런 믿음 없는 세대에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또, 선지자의 제자들의 이런 모습 자체가 엘리야와 엘리사가 살았던 시대가 믿음을 잃어버린 시대였음을 잘 보여준다.
 
이들의 믿음 없는 요청에 엘리사는 사람들을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자들은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고 엘리사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강하게 요청하였고, 엘리사는 할 수 없이 허락한다. 하지만, 결국 이들이 보낸 50명이 3일 동안 찾을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수색했지만 엘리야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역설적으로 엘리야의 승천을 증명해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엘리사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듣지 않은 것에 대해 책망한다. 이 역시 무리가 엘리사가 진정한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진실한 말을 하는 선지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당시 영적으로 어두웠던 시대 하나님의 등불 역할을 하고 있었던 선지자의 제자들의 영적 상태(수준)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뜻을 품고 전하는 사역자들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믿음과 수준이 이 정도였다. 우리는 어떨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섭리에 대해 믿음의 정도가 어느 수준일까?
 
 
 
2. 나쁜 물을 고친 엘리사(19~22절)
하루는 여리고 성읍(18절)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성읍의 위치는 좋지만, 물이 나빠 땅이 소산을 내지 못한다고 하소연한다. 이에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서 가져오라고 명령한다. “새 그릇”은 부정한 것을 접하지 않은 정결한 그릇을 의미하고, 소금은 부패와 발효를 막는 기능이 있기에 죄를 막거나 저주를 제거하는 기능이 있다고 당시 사람들은 여겼다.
 
엘리사는 이 새 그릇에 담긴 소금을 가지고 물의 근원으로 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한다. 엘리사는 여기에서 여호와의 영이 임한 후 처음으로 여호와의 신탁을 전한다. 여호와께서 물을 고쳐주셨고,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 때 여리고에 내리셨던 죽음의 저주에서 해방시키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의 능력을 믿고 그에게 나아가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하는 이들에게 여호와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그곳에 내렸던 저주를 풀어주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겸손히 나아오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말씀으로 성읍 하나를 살리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신다. 이 기적은 모세가 나뭇가지를 던져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꾼 기적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 이적은 특정 순간에만 효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고쳤다. 저자는 “엘리사의 말처럼 고쳐졌고 오늘까지 이르렀다”라고 말한다. 이 기적 역시 엘리사가 참 선지자라는 것을 화자가 인정한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면 그는 참 선지자로 인정된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엘리사가 참 선지자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이 기적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엘리야의 뒤를 어어 선지자로 선 엘리사에 대한 영적 권위를 세우는 계기가 된 기적이었다. 즉, 백성들에게 검증을 받은 것이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영적 전쟁을 벌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리하여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명했었고 자신이 그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인식시켰다. 3년 반동안의 가뭄도 마찬가지였다. 여리고의 물 근원을 깨끗하게 한 것은 엘리사도 그와같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선지자로 알려지게(인정받게) 되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3. 자신을 대머리라고 놀린 아이들을 죽인 엘리사(23~25절)
엘리사는 여리고를 떠나 벧엘로 가는데, 이 길은 엘리야와 함께 왔던 길을 거슬러 가는 길이다. 벧엘에 거의 다왔을 때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엘리사를 향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하면서 조롱했다. 엘리사는 엘리야와 달리 머리숱이 없는 대머리였던것 같다. 신명기에서는 머리를 미는 것이 금지했기 때문에 엘리사는 원래 대머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엘리사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가부장 문화가 엄격한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린아이들이 외모 때문에 어른을 조롱하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도덕과 윤리가 얼마나 헤이해진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겠다. 더구나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에게 반말하고 모욕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였고, 곧바로 수풀에서 암곰 두 마리가 나와 아이들 중 42명을 찢어 죽이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아이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요즘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당시 고대 세계에서 철저한 가부장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즉 아이들이 부모와 어른들을 존중하며 철저하게 복종해야 하는 것을 당연시하던 시대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또 이스라엘에서는 신명기를 통해 부모에게 패역한 자식은 장로들 앞에서 재판을 받게 하고 죽일 수도 있었던 사회임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시대에 어른이자 선지자를 놀린 것은 심각한 도덕적, 영적 해이를 보여준다. 이 사건은 열왕기하 1장에서 엘리야를 강압적으로 데리러 온 오십부장과 50명의 군사들이 죽은 것과 유사하다.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경고하기 위해 무서운 처벌을 내리시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많은 아이들이 죽었기에 현대의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이겠지만, 본문은 엘리사의 이런 행동에 부정적인 뉘앙스가 없음도 참고해야 한다.
 
또, 이 사건은 여리고 사건과 비교할 수 있는데, 엘리사가 여리고에서 여호와께서 내린 죽음의 저주를 없애는 일을 했지만, 벧엘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를 내려 죽음이 오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대조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오는 자들은 생명을 얻지만,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자들에겐 죽음이 엄습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벧엘의 비극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전혀 없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자신이 보낸 선지자를 두려움 없이 놀리는 아이들에게 암곰 2마리를 보내 죽게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은 이스라엘의 부모들에 대한 심판이었다.
 
 
 
나는?
-엘리야처럼 요단 강물을 가르고 건너오는 엘리사를 본 선지자의 제자들은 그에게 선지자직이 계승된 것을 인정하고 주저없이 그의 권위 앞에 엎드린다. 엘리야라는 위대한 선지자의 공백을 우려하고나 과거의 기억에 얽매이거나 그리워하지 않고, 엘리야의 성령이 엘리사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여신 것을 확인한 것이다. 영적 권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과거의 권위자에게 얽매여 새로운 선지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되면 혼란만 있을 뿐이다.
 
-한국교회가 직면한 문제가 이 지점이다. 탁월했던 목회자의 은퇴이후 권위의 이임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인해오는 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런 권위의 문제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제자들(성도들)의 태도도 중요함을 보여준다. 요단강을 가르며 건너오는 엘리사의 모습에서 엘리야를 이은 후계 선지자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진정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선지자의 제자들은 승천한 엘리야의 시신을 찾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엘리사가 이를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찾아나선다. 엘리사의 권위를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은듯한 모습이다. 자기 주장과 계획이 먼저인것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결국 사흘만에 포기하고 돌아온다. 믿음이 없고 강팍한 세대는 눈에 보이는 권능을 구하지만 주님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복되다고 하셨다.
 
-한편 제자들이 엘리야의 시신을 찾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에 대해 엘리사는 의연하게 대처한다. 찾지 못할 것을 다 알면서도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기보다 실수할 기회를 준다. 그리고 끝까지 침착하게 인내하며 대처한다. 엘리사의 온유함은 제자들이 실수를 통해서 지도자를 신뢰하는 법을 배워가도록 기꺼이 관용을 베풀었다. 제자들은 스스로 민망할만큼 자기 열심으로 인해 실패함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진정한 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배운다.
 
-엘리야의 종(2:2)이었던 엘리사가 선지자가 되어 행한 첫 사역은 저주의 성 여리고의 물을 고치는 일이었다. 물이 좋지 않아 결실이 부실한 여리고의 사정을 듣고 물 근원에 “정결”의 상징(레 2:13)인 소금을 뿌려 고친다. 마라의 쓴 물을 고쳐서 참 선지자로 인정받은 모세처럼(출 15:22~26), 말씀의 능력으로(21절) 저주와 불임, 유산의 도시를 생명의 도시로 변모시킨 것이다.
 
-여리고는 오아시스가 있고 종려나무 숲을 이루며 날씨는 연중 쾌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로 여리고 성의 물은 좋지 못했다(수 6:26). 이 저주는 아합 왕 시대에 이미 이루어졌다(오아상 16:34). 그러나 하나님이 이런 여리고에 은혜를 베푸사 새롭게 하시고 회복시키셨다.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축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또, 하나님을 높이고 존중하는 자에게도 마찬가지다. 나의 삶에 하나님을 높이고 존중하며 그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유지되기를 소망한다.
 
-엘리사는 벧엘로 올라가는 길에 자신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젊은 아이들을 저주한다. 이는 그의 인격을 모독한 것에 대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금송아지를 섬기는 자들이 하나님의 종을 모독한 것에 대한 저주였다. 아이들이 선지자를 조롱한 것은 여호와의 선지자를 거부하는 벧엘의 영적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벧엘은 북이스라엘 왕의 예배처소가 있는 종교적 중심지로 그 당시 시대 정신을 대표하는 곳이었다. 이에 대하여 엘리사는 언약에 합당한 심판을 선언한 것이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은 곧 저주에 직면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이들의 비극의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가르치지 않은 다음 세대는 하나님과 상관 없는 다른 세대가 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행하는 언행에 경외함이 있을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다음 세대의 모습을 벧엘 아이들의 비극을 통해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엘리사의 사역은 이처럼 복과 생명의 사역이면서 동시에 저주와 사망을 가져오는 사역임을 보여준다.
 
 
 
 
*주님, 엘리사의 선지자로서의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맡은 나의 걸음이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따름입니다.
*주님, 선지자의 제자들의 수준이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도 별반 차이가 없을듯 합니다. “부끄러운 정도로 강권”하는 무지가 나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겠습니다.
*주님, 여리고와 벧엘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권위가 드러납니다. 여리고는 생명과 회복의 권위로 벧엘은 저주와 심판의 권위로 드러납니다. 부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를 소통하고 인식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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