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위기 속에서 기도를 부탁하고, 기도하러 올라가는 히스기야 [왕하 19:1-19]
 – 2024년 10월 06일
– 2024년 10월 06일 –
히스기야는 랍사게를 통한 산헤립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사야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히스기야에게 전한다. 여전히 기세등등한 산헤립은 유다의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여호와도 그의 유다 백성을 건지지 못하고, 히스기야도 다른 왕들처럼 그 존재가 사라질 것이라고 위협한다. 이런 답답하고 막막한 가운데서 히스기야는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한다. 무엇보다 랍사게가 여호와 하나님을 무능한 하나님으로 외치는 소리에 가만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1. 히스기야가 이사야를 찾음(1~5절)
신하들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가린 후 여호와의 전에 들어간다.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는 행동은 커다란 재앙이 임했다는 상징으로 히스기야는 재앙이 임하자 여호와를 의지하기 위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알리고 여호와의 신탁을 받기 위해 랍사게의 말을 들은 엘리야김과 셉나와 제사장 중 연장자들에게 굵은 베로 몸을 가리게 한 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낸다.
 
이사야에게 간 이들은 온르은 환란과 징벌과 모욕의 날인데, 이는 아기들이 출구까지 왔는데 낳을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히스기야의 말을 그대로 전달한다. 이 말은 “아기가 자궁 입구까지 나왔으나 출산할 힘이 없다”는 속담은 재앙과 연결된 것으로 아기를 출산할 때 산모가 제대로 힘을 주지 않으면 아기와 산모가 모두 죽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히스기야는 랍사게가 하나님을 비방한 것에 대해 이사야에게 고발하고 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허무한 우상과 달리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시는 분이며, 그렇기 때문에 적들의 비방하는 말을 들으시고 옳고 그름을 판결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이사야에게 요청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부로 말한 앗수르를 심판해주실 것과 랍사게와 앗수르 왕의 위협에 떨고 있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것이다. “남아 있는 자”는 앗수르의 침략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예루살렘 사람을 의미한다. 히스기야와 신하들은 여호와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선지자 이사야를 찾아 간 것이다. *막막한 순간 하나님께 발걸음을 옮기는자가 복 되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여호와를 찾고 그의 말씀을 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구할 선지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아직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에 희망이 있음을 암시한다.
 
 
 
2. 이사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함(6~7절)
히스기야가 전한 말을 들으 이사야는 그들에게 앗수르의 신하들이 한 여호와의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랍사게의 말을 자시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한 말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그들의 말에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다. 그들이 하나님이 앗수르 왕보가 약하다고 하는 말은 여호와에 대한 시직 없이 전략적으로 내뱉은 말로 그런 말이 하나님께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여호와를 조롱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응하실 것이다.
 
7절에서 하나님은 그들 속에 거짓 소문을 퍼뜨려 본국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며, 또 앗수르 왕은 본국에서 칼에 죽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자신을 조롱하는 자에 대한 명백한 심판의 말씀이었다. 본문에서 그 속에 두시겠다는 영은 왕상 22:22에서도 나오는데, 하나님의 명령으로 거짓말을 하는 영이다. 그 영이 만든 소문은 거짓 소문들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헛되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조롱하던 인간들이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거짓말에 놀아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선포는 곧바로 성취된다. 8절이 시작되면서 “랍사게가 돌아가다가”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앗수르 진영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고 그로 인해 갑자기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를 풀고 앗수르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첫 번째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3. 앗수르 왕이 다시 히스기야를 협박함(8~13절)
랍사게는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앗수르 왕이 라기스를 정복하고 립나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앗수르 왕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립나로 방향을 돌린다. 그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되는 듯 하다가 중단된 것이다. 산헤립은 랍사게의 군대와 합류하여 립나를 함락하고 더 큰 규모으 ㅣ군대로 예루살렘을 다시 공격하려고 랍사게를 불러 들인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은 성취되지 못하고 오히려 다시 위협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 앗수르 왕은 자신과 싸우기 위해 구스 왕 디르하가 온다는 말을 듣고 히스기야를 다시 위협한다. 구스 왕 디르하가는 애굽의 바로로 앗수르와는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앗수르 왕 입장에서는 구스 왕의 등장은 예루살렘 정복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유다의 입장에서 보면 때마침 등장한 우군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앗수르의 산헤립은 다시 사자를 보내 앞서 랍사게를 통해 했던 협박을 반복한다. 구스 왕이 전쟁하러 왔다고 하여 혹시라도 구스와 유다가 협공하면 앗수르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히스기야가 앗수르와 전쟁하러 나올지 모른다고 예상한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한 앗수르 왕의 술책이다. 전쟁하러 나오면 모두 죽이겠다고 강하게 협박하고 있다.
 
 
 
4. 히스기야의 기도(14~19절)
히스기야는 이런 앗수르 왕의 서신을 받고 다시 기가 막혔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대로 랍사게가 예루살렘 포위를 풀고 앗수르로 돌아가는 것 같아 안심했는데,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헤립의 군대와 합류하여 더 큰 위협을 가하는 상황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헛된 것이었는가 하는 회의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가서 앗수르 왕의 편지를 하나님 보시라고 펴놓고 기도한다.
 
히스기야는 제일 먼저 여호와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시라는 것을 고백한다. 이는 우리 신앙의 근본으로 이런 하나님만이 세상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시며, 악한 자는 심판하시고, 의로운 주의 백성은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산헤립이 하나님을 비방한 말들에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눈을 뜨고 봐달라고 요청한다. 하나님께서 직접 들으시고이들의 무례함과 오만함을 직접 심판해달라는 암시가 들어있다.
 
앗수르 왕이 여러 나라를 점령하고 그들의 신을 불태워버렸지만, 그들은 신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12절에서 앗수르 왕이 자신이 정복한 나라의 신들이 아무도 구원하지 못했다고 말한 것에 대한 반박이다. 히스기야의 이런한 주장은 이사야 44장의 주장과 유사하다. 즉, 여호와만이 신이지 우상들은 단지 돌이고 나무일 뿐이다. 오직 여호와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기에, 귀로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으며,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스기야는 간절하게 여호와께서 자신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되면 천하 만민이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게 될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런 히스기야의 고백은 이전에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그리고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싸울 때 한 말과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자신의 이름으로 싸우는 자들을 지키시는 이유는, 여호와가 살아계신 참 하나니이시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우리의 명예와 이름과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기도할 때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싸울 때,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울 때,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싸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나는?
-절망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앗수르에 의해 여호와 하나님이 조롱과 멸시를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 전에 들어갔다. 이 수치를 하나님께서도 보시고 들으셨을 거라고 확신하며 이사야 선지자에게 지도자들을 보내 남은 자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우리보다 강한 세상의 압박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처음은 “기도”이다. 이런 행동은 내 명예보다 하나님의 명예를 먼저 생각하는 일이다. 이미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처분을 요청하는 일이다.
 
-일에 앞서, 일을 하면서, 일을 마치고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기도”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명예가 모욕 당하는 것을 마음 아파하며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했다(1~4절). 어떤 상황이든지 기도할 수 있다면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의 눈과 귀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 당할 때 누구에게 가서 기도를 부탁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인가?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일이든 먼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를 모욕하는 말에 두려워 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히스기야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말이 공허한 말, ‘입에 붙은 말(18:20)’이 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조롱하는 유다의 허약한 군사력에 전혀 기대지 않고, 오로지 “풍문(소문)”으로만 앗수르 왕을 죽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세상의 위협과 회유가 도리어 자신들을 죽이는 “풍문(소문)”이 되게 하실 줄 믿고 담대해야 할 것이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유창한 말이나 소문에 흔들리면 안된다. 그 모든 말들 위에 좌정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리라.
 
-가장 위태로울 때가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을 드러낼 때이다.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의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고발한다. 앗수르가 숱한 나라들을 이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나라의 신들은 사람이 만든 나무와 돌에 불과하고 유다의 하나님은 홀로 만국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고백한다. 히스기야에게는 지금 어느 시기보다 위태로운 때이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여호와만 홀로 하나님이심을 증명할 기회였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에게 받은 편지를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 그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 놓고 기도한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15절), 자신과 나라가 당하고 있는 곤경을 털어놓으며(16~18절), 긴급한 도움을 탄원한다(19절). 그러면서 히스기야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서 누가 과연 참 하나님인지를 세상 모든 열방이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기를 소망하는 기도를 드려본 적이 있는가?
 
-이것이 곧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가운데 “나라이 임하옵시며”가 아니겠는가! 나의 삶에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임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기를 오늘도 기도하는가?
 
*히스기야는 랍사게의 연설을 들으며 성전과 왕궁의 은금으로 앗수르 왕을 매수하려 했던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깨달았다. 의지할 것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절감했다. 그런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구원의 약속을 주신 것이다.
 
*앗수르 왕은 자신의 장래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데도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지금까지 고둔 성공들에 대해 오직 자신의 능력만을 과시할 뿐이다. 성공이든 실패든 모든 일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 아니겠는가!
 
 
 
*주님, 해결된 듯한 문제가 더 큰 근심으로 다가올 때 기도를 부탁하고 기도하러 올라가는 히스기야의 모습이 오늘 나의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주님,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세상 앞에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이 하실 일을 구하는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세상 가운데서 증거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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