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12절은 마소라 본문에 따르면 12장 1절이다. 호세아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1~3장, 4~11장, 12~14장), 이 단락들은 모두 언약 백성에 대한 비난과 책망과 심판을 다루며 희망적인 메시지로 종결되는 특징이 있다. 본문은 언약 백성에 대한 비난과 책망을 모호한 문장들과 야곱에 대한 발언을 통해 제시하여 해석상 모호한 부분이 분명하다. 옛적 야곱을 닮지 말아야 하는 이스라엘의 의미가 매우 역설적이다. 이는 자기 부정 없이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불의한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 경고가 아련하다.
호세아는 과거 역사를 돌아보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비난한다. 옛적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지 않았던 것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빗대어 고발한다. 호세아는 하나님이 그들을 법정에 세우시고 재판할 수밖에 없음을 통보하고 하나님이 백성에게서 받은 모욕을 되돌려주실 것이라도 경고한다.
1. 거짓된 이스라엘(11:12~12:2)
이스라엘은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 차 있음을 지적하고 호세아는 하나님의 고발을 이어받아 유다도 신실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거짓과 속임수는 곧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이를 두고 호세아는 에브라임이 바람을 먹고, 온종일 동풍을 따라다닌다고 꼬집는다(12:1). 이스라엘이 풀을 뜯는 소처럼 바람을 먹는 존재로 묘사다. “바람(루아흐)”은 “숨, 텅 빈 것”을 의미한다. 에브라임의 무익한 행위를 “바람”으로 표현한 것이다. 특히 동풍은 중동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뜨거운 태양 열기를 머금은 바람이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이렇게 표현하신다.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고 살며, 종일 열풍을 따라서 달리고, 거짓말만 하고 폭력만을 일삼는다. 앗시리아와 동맹을 맺고 이집트에는 기름을 조공으로 바친다(새번역_1절).” 이는 이스라엘이 어리석게 두 나라를 오가며 도움을 청하고 조약을 맺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는 앗수르와 종주 조약을 체결하였고(왕하 17:3), 애굽에 도움을 요청했다(왕하 17:4). 여호와의 나라 이스라엘은 겉만 화려한 종교의식을 행할 뿐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제국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만적인(속이는) 행동을 일삼은 것이다.
2. 하나님께로 돌아와 인내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그를 바라라(12:3~6절)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제국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언약을 파기하는 행위였다. 호세아는 언약 파기로 인한 소송의 기소 이유를 열거하고(3~4절),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촉구한다(5~6절). 특히 이스라엘을 고발한 이유를 그들의 조상 야곱에 관한 세 가지 일화를 든다(3~4절).
첫째, 야곱이 모태에서 자기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은 사건이다(3절 상). 창 25:19~26의 사건이다. “야곱”의 뜻은 “움켜잡는 자”다. 이름이 곧 그의 삶이었다. 그는 형 에서의 장자권을 움켜쥐려고 속임수를 썼고 그의 집념은 간교한 속임수로 이어져 장자권을 탈취했었다. 호세아는 이 사건을 소환하여 “야곱”이라는 이름을 통해 자기 이익을 위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자기중심성의 이스라엘을 비판한 것이다.
둘째,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도망하여 이십여 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다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힘을 겨룬 사건이다(3절 하~4절 상; 창 32:22~32). 야곱이 한밤중에 낯선 사람과 사투를 벌이는데, 그는 하나님의 천사였다. 야곱이 싸움에서 이긴 듯 보이지만,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내리쳐 환도뼈가 부러져 절뚝거리며 걸었다. 그리고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준다. 호세아는 이 부분에서 야곱이 통곡하면서 은혜를 간구했다고 언급한다. 만약 이것이 의도적이면 이스라엘을 향해 이처럼 회개하고 은혜를 간구하라는 권면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 울면서 그의 호의를 구하는(창 33:4) 겸손한 변화는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일어났다. 호세아는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
셋째, 야곱이 도망자가 되어 하란으로 도망가던 중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이다(4절 하~6절; 창 28:10~17). 도망자의 여정이 시작되었을 때 만나주신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돌아올 때까지 함께 하여 주겠다는 약속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에브라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그들에게 향하여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호세아는 에브라임의 조상 야곱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면서 자기 시대 사람들을 고발한다. 지금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서로 싸우고 배반하는 것은 그 조상 “야곱(움켜잡는 자) “때부터 기원하는 뿌리 깊은 죄라는 것이다. 원래 독립적이었던 야곱의 출생 이야기와 얍복 나루의 씨름 이야기를 결합해 야곱과 이스라엘의 성품과 본성을 보여준다. “모태에서부터 한창 힘을 쓸 때까지” 이웃과 불화하고 하나님과도 다툰 자였던 이가 바로 야곱이었다. 얍복 강에서 천사와 겨루어 이긴 야곱은 울면서 그에게 (축복을) 간구했고,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다. 창세기에서는 야곱의 긴 여정의 출발에 속하는 벧엘에서의 만남이 야곱 인생 후반으로 옮겨 예를 든다. 이는 호세아에게 벧엘에서 야곱과 하나님의 만남은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이해한 것이다. 또 4절 하반절의 동사 시제는 “미완료”형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화 상대로 “우리”가 등장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벧엘에서 그분께서 그를 만나시고 거기서 우리와 말씀하시리라”라는 야곱의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건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사건이라는 뜻이다. 벧엘이 지금은 송아지를 숭배하는 벧아웬이 되었으나 원래 벧엘은 싸움꾼이었던 야곱이 울며 간청하자 여호와께서 만나주셨던 곳이다. 에브라임이 배교했을지라도 울며 간청한다면 조상 야곱이 만났던 벧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호세아는 야곱의 이야기에서 야곱의 속임수를 통해 이스라엘의 반역을 꼬집는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조상 야곱이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듯이(창 32:28),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굴복하라는 뜻이다. 호세아는 야곱의 이름을 물려받은 그의 후손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말하며 돌아오기를 호소한다.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라고 선포한다(5절). “만군의 여호와”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3:15).
그러므로 야곱의 이야기는 출애굽과 모세를 부르신 사건에서 호세아 시대로, 그리고 지금 우리의 시대로 전승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출애굽의 하나님이 되셨고, 호세아 시대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과거 구원의 이야기는 새로운 현재와 미래를 열어간다. 그래서 호세아는 6절에서 간절하게 외치는 것이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헤세드)와 정의(미쉬파트)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기다리라)”
설령 하나님을 반역했다 하더라도 돌아오고 인애와 정의가 왜곡되는 현장에 던져지더라도 하나님을 단념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언약 백성이 사는 길이라는 것이다.
3. 속이는 상인들(12:7~10절)
호세아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 에브라임에게 호소한다(7~8절).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길을 찾으라는 예언자의 호소는 무시됐다. 에브라임은 손에 거짓 저울을 든 상인의 길을 택했다. “상인(케나안)”의 히브리어는 당시 무역이나 상거래로 이름을 떨친 “가나안” 족속의 이름과 발음이 같다. 그런데 에브라임이 거짓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이 되었다는 것은 바알과 여신들을 섬기는 도시 중심의 봉건 국가로서 착취가 만연한 가나안 족속과 다를 바 없는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비난이다. 그런 상인(케나안) 에브라임에게 인애와 정의는 사치였고 이웃은 없었다.
에브라임에게 더 중요한 것은 재물이다. 그들은 나는 부자라고 말하면서 불의한 방식으로 축적한 부와 재산을 자랑했다. 참담하게도 이렇게 축적한 부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낼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8절)” 이렇게 뻔뻔한 에브라임에게 출애굽의 하나님이 징벌을 선언하신다. “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기를 명절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9절)” 에브라임은 초막절을 지키는 것처럼 장막에 거주하게 될 것이다. 척박한 유목 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온갖 방법으로 애써 모은 재산을 다 빼앗기고, 그들의 거주지는 폐허가 된다. 엉겅퀴와 가시덤불로 덮인 폐허와 황량한 광야처럼 만들겠다는 선언이다.
한편 장막절(초막절)은 이스라엘에게는 기쁜 축제 중 하나이다. 이는 장막으로 돌아가리라는 심판 선언 속에는 역설적으로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도 베여있다. 반역에 대한 분노와 서글픔에 있지만, 하나님과 함께하였던 그 시절에 대한 하나님의 그리움이 더 크다. 그래서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이고 비유를 베푸셨다. 목적은 하나다. 다시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4. 불의한 이스라엘(11~14절)
그러나 에브라임은 ‘여러 선지자’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선지자들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회복 의지를 계시하셨으나, 이스라엘은 그의 말씀을 청종하기보다 형식적인 제의에 매달렸다.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인애와 정의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여호와께서 길르앗(악인들의 도시)을 멸망시켜 황소를 드리는 바알 제의를 심판하셨으나(11절) 이스라엘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길르앗은 황소 제사를 공개적으로 드리는 중심지였다. 길갈의 제단들은 여전히 많은 희생제물로 넘친다. 사람들은 양 대신 비싼 황소를 드리는 것으로 반응한다. 여호와께서는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시지만, 이스라엘은 제사와 번제로 하나님을 찾을 뿐이다(6:6). 제도화된 제의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하고 만다.
13절은 에서에게서 도망쳐서 아람에서 아내를 얻기 위해 종이 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여호와와 대조된다. 야곱은 아내를 얻기 위해 라반의 종이 되어 양 떼를 돌보았다. 야곱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누구의 종도 될 수 있고, 무엇이(누구)라도 섬길 수 있었다. 에브라임이 재물을 얻기 위해서라면 거짓 저울을 사용한 것처럼 말이다. 반면 여호와는 모세를 이방 땅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돌보셨다.
14절을 통해 여호와를 괴롭히며 이웃에게 피를 흘리게 하고 수치를 가한 에브라임에게 남은 유일한 것은 여호와의 진노뿐임을 나타낸다. 여호와께서 그 행위에 따라 그대로 갚으실 것이다. 에브라임은 자신의 악행에 책임을 지고 상응하는 징벌을 받아야 한다. “에브라임이 주님을 몹시 노엽게 하였으니 죽어 마땅하다. 주님께서 에브라임을 벌하시고, 받으신 수모를 에브라임에게 되돌려주실 것이다(새번역_14절).”
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이 얼마나 거짓되고, 야곱의 하나님이 얼마나 진실하신지를 알게 하신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은 “바람을 잡는 것(바람을 먹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강대국 사이를 오가며 그들을 의지한다(11:12~12:2).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애와 정의가 아닌 하나님을 기만하며 이방처럼 거짓과 포학으로 일관한다. 우리의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것은 바람이고 허상일 수 있다(전 2:11). 에브라임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닌 보이는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하려는 것은 “바람을 잡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내 마음이 허전하고 공허할 때가 있다면, 혹시 영원한 것이 아닌 헛된 것을 붙들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바람을 먹으며(바람을 잡으며)” 사는 삶이란 하나님 외에 헛된 것을 붙잡으려는 행동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강대국 사이를 오가며 기회주의적인 처신으로 일관한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면서 뒤로는 앗수르와 조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낸다. 이방 나라들처럼 인애와 정의(진실)가 아닌 기만과 거짓과 포악으로 행한다. 하나님을 상대로 거대한 사기극을 행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이 믿는 굳건한 동맹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허무할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모든 것은 바람을 잡으려는 허무한 몸부림일 뿐이다.
-하나님과도 힘겨루기한 야곱의 인생은 속고 속이며 뺏고 빼앗기는 다툼으로 가득 차 있다(3~6절). 이스라엘도 그 조상 야곱과 다를 바 없다. 조상이나 후손이나 거짓과 속임수에 능하다. “은혜를 입은 자” 이스라엘이 “속이는 자, 움켜쥔 자” 야곱의 삶을 좇고 있다. 하나님은 허물 많은 야곱처럼 내 힘과 자원으로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내게도 야곱에게 하셨듯 “은총의 싸움”을 걸어 오시며, 인애와 정의를 지키고 항상 그분만을 바라보기를 원하신다.
-자기 지혜와 힘을 의지하여 씨름꾼 인생을 산 야곱이 눈물 어린 간구를 하자 하나님은 벧엘의 은혜로 화답하셨다. 이제 야곱 이스라엘이 살길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분께 돌아와 언약의 약속을 따라 인애와 정의를 지키고 항상 그분만을 바라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눈물 어린 간구에 은혜로 화답하신다.
-스스로 죄 없다고 하는 것이 죄이다. 이스라엘은 거짓 저울로 장사하는(7절) 상인(케나안)과 다름없다. 온갖 술수와 편법으로 부자가 되었음에도 스스로 “나는 깨끗하다”라고 자랑한다(8절). 자신의 불의를 인정하지 않고 불의에 대하여 무감각하다. 거짓된 삶을 살고 거짓된 예배를 드리고도 그 불의를 깨닫지 못한다. 불법으로 세상에서 출세하고도 신앙으로 포장하는 이들이 있다. 내 수고는 물론 믿음마저 무위로 돌리는 거짓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전역(길르앗, 길갈)에 만연한 백성의 거짓과 불의를 지켜보셨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통해 거짓을 일삼는 그들에게 속박의 시절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 누누이 경고하셨다(9~14절).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구원(13절)에 뻔뻔스러운 반역으로 응수한다. 하나님을 기만하고 무시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무모한 일은 없다. 하나님은 다 아시고 낱낱이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구원에 이스라엘은 뻔뻔스러운 반역으로 응수하였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다양하게 자기 뜻을 알려주셨으나 이스라엘은 듣지 않았다. 그 대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형식적이고 자기만족의 제사에만 열을 올렸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것은 수치 가득한 심판뿐이다. 그들이 흘린 피와 그들이 가한 모욕을 돌려받게 하실 것이다.
-왜 바람을 잡으려는가? 야곱의 후손아!
*주님, 야곱(움켜잡는 자)이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되게 하신 하나님이 바람을 잡으려는 에브라임이 잊어버린 “만군의 여호와”를 일깨워 주십니다. 나의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