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끝내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아,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암 4:4-13]
 – 2024년 12월 08일
– 2024년 12월 08일 –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반복적인 제의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다고 했지만, 정작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을 향해 갖가지 언약적 저주를 내리시면서 호소하신다. 하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라는 무서운 선언을 듣는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회개를 요청하셨으나 이스라엘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복적인 사이클을 통해 보여준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잘못된 제사 행위에 대한 조롱으로(4~5절) 시작하고 그 후 이스라엘이 거듭된 하나님의 회개 요청을 거절하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6~11절).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하게 될 것을 예고한다. 하나님은 회개를 요구하셨으나 이스라엘은 거절하였다.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완고함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모세가 제시한 언약적 저주는 신명기 28장에 근거하여 전염병, 자연재해(메뚜기, 가문 등)와 기근, 전쟁에 의한 침략, 포로 등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예언서들이 선포하는 심판은 모두 이 언약적 저주에 기초하고 언약을 파기한 백성들에게 어김없이 이 언약적 저주가 내려진다. 아모스도 4:6~11에서 기근, 가뭄, 자연재해, 메뚜기, 전염병, 전쟁, 성읍의 파괴라는 일곱 가지 언약적 저주를 보여준다. 그 목적은 백성들을 돌이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스라엘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1. 잘못된 제사를 드리려는 열심에 대한 풍자(4~5절)
아모스는 4~5절을 통해 이스라엘의 잘못된 열심에 대해 풍자하며 조롱한다. 먼저 “벧엘에 가서 범죄하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벧엘에서 우상숭배를 계속하라는 조롱이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거룩한 곳이지만 북이스라엘 첫 왕인 여로보암이 금송아지 제단을 세운 후로는 우상숭배의 본거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라”라는 요청도 동일한 조롱의 의미가 있다. 길갈은 가나안 정복 전쟁의 기지였고 광야 2세대가 할례를 받았던 신앙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사울왕이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마음대로 제사를 드렸던 곳이기도 하다. 아모스는 백성에게 사울처럼 잘못된 제사를 드리라고 요구하며 조롱하고 있다. “삼 일마다 십일조를 드리라”라는 명령도 역시 조롱의 의미다. 신명기 28:14는 십일조를 삼 년마다 거두어서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돕는 데 사용할 것을 명령하셨다. 하지만 아모스는 그런 십일조를 삼 일마다 거두라고 명령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심 없는 겉으로만 종교 행위에 열심을 내는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수은제(감사제)에 누룩을 넣어 드리라”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조롱이다. 레위기 7:12은 감사제로 드리는 제물에는 누룩 넣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것도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는 제사 행위를 계속 드려보라는 조롱의 의미다. “낙헌제(자원제)를 소리내어 선포”한다는 것은 자신의 종교적 열심을 자랑한다는 것으로 역시 조롱의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자신의 종교적 열심과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행위들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타락한 종교 행위였을 뿐이다. 진정한 신앙의 모습은 절대 아니다.
    
    
    
2. 회개 요청을 거절한 이스라엘(6~11절)
이러한 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거듭 요청하셨다. 이 단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다섯 번의 기회가 묘사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다섯 번의 기회를 모두 거절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다섯 번의 고난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게 하려고 하셨다. 하지만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정형화된 사이클을 통해 묘사된다. 이 다섯 가지 고난은 신명기 28장에 나타난 시내산 언약의 저주와 깊은 관련이 있다.
    
신명기 28장의 저주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지 않아 언약 백성의 삶을 드러내지 못했기에 경험하게 되는 언약의 심판이다.
첫째, 이스라엘에게 양식이 떨어지게 하신다. 기근이 온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 먹을 것이 없는 정도로는 우상숭배의 죄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이방 우상들이 자신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다.
둘째는 이스라엘에게 비를 주지 않으신 것이다. 어떤 성읍에는 비를 주시고, 어떤 성읍에는 주지 않아 물이 없는 성읍 사람들이 물이 있는 성읍을 찾아 나서지만, 그럼에도 물의 양이 너무 적어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였지만, 이스라엘은 이번에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
셋째, 이스라엘의 농사가 흉년이 들게 하셨다.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메뚜기 떼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의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셨다. 메뚜기 재앙은 신명기 28장 42절뿐 아니라, 요엘 1장에서도 여호와의 날 심판의 도구로 묘사되고 있다. 또 메뚜기가 먹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는 언약의 축복을 상징하는 나무들이다. 이 나무들에 열매가 많이 열린다는 것은 율법을 순종하면서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지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귀한 결과들을 경험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런 나무들의 열매를 메뚜기가 먹었다는 것은 율법에 순종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저주가 내렸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메뚜기 재앙으로 강하게 쳤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는다.
넷째, 전염병을 보내셔서 청년들을 죽이셨고 말들이 전쟁에서 노력 당하게 하셨고 많은 시체로 진영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여 코를 찌르게 만드셨다. 이 재앙은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수많은 병사가 죽어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섯째,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의 성읍을 무너뜨려서 나머지 성읍들에 본보기가 되게 하려 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신 것처럼 멸하실 것인데, 이스라엘은 그 와중에 불길 속에 타고 있던 나무 중에서 겨우 빼낸 한 조각 나무처럼 보였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무 쓸모 없는 상태에 놓인 것을 말하며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사실상 상실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이러한 거듭된 회개 요청은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하나님 사랑의 마음이 담겨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했다. 계속해서 죄의 소굴에 거하면서 하나님 사랑이 담긴 회개 요청을 반복해서 물리치고 만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는 일뿐이다.
    
    
    
3. 하나님의 심판 예고(12~13절)
본문은 하나님의 거듭된 회개 요청을 거절한 이스라엘의 결국을 보여준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라고 요구한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은혜를 경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전 문맥처럼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는 것은 다가오는 심판을 기억하고 그 심판 앞에서 자기 모습을 돌이키라는 의미다.
    
13절은 이렇게 다가오시는 심판주 하나님의 모습을 몇 가지로 묘사한다. 첫째, 심판주는 창조주시다.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산과 바람을 지으신 분이다. 둘째, 심판주는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시는 분이시다. 자신의 경륜과 뜻을 보이고 이루시는 분이다. 이제 그 주님이 심판을 정하셨으므로 심판의 칼이 이스라엘을 덮치게 될 것이다. 셋째, 주님은 아침을 어둡게 하시는 분이시다. 아침이 어둡게 된다는 것은 창조 질서가 파괴된다는 의미일 수 있고, 혹은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덮어서 빛이 사라진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어떤 의미이든지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을 다스리시는 권세가 있음을 뜻한다. 넷째, 하나님은 땅의 높은 곳을 밟는 분이다. 땅의 높은 곳을 밟는다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의미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하여 전쟁을 선포하실 수 있고, 그 전쟁에서 항상 승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만나기를 예비해야 하는 하나님이다. 창조주이고 자기 뜻을 이루시며 이 세상을 운영하시고 악인들을 전쟁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 설 수는 없다.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면, 오직 심판의 결과가 따를 뿐이다.
    
    
    
나는?
-이스라엘은 종교적인 위선에 취해 끝까지 하나님을 거절한다. 아모스는 이런 이스라엘이 만날 하나님이 심판자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제사하는 속내를 아셨다. 이스라엘은 제사를 드릴수록 죄를 더하는 모순을 범한다. 그들의 예물과 제사가 대단해 보여도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역겨운 가식일 뿐이었다(4~5절). 이스라엘 백성은 거창한 제의로 자기 실체를 감추고 수많은 제물로 불의를 만회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 제의와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신다. *진정한 회심이 없는 종교적 열심보다 더 위선적인 일은 없다.
    
-이스라엘은 자기만족을 위해 예배를 드렸다. 그들에게 예배는 자기 의에 사로잡힌 “나” 중심의 종교 행위일 뿐이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그들만의 예배일 뿐이다. 죄에 대한 가책도, 의에 대한 목마름도, 겸손히 의지하는 마음도 없는 가식적인 예배다. 자칫하면 예배가 형식적인 신앙을 이어가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습관적인 예배로 죄의 습관만 쌓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죄를 멈추지 않은 채 드리는 종교 행위를 받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은 거창한 제의로 자기 실체를 감추고 자기 정당화만 강화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쁨이던 것이 하나님께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과시하고 인정받기 위해 성소를 밟고 중단하지 않은 불의를 만회하려고 제물을 드리는 것은 죄만 더하는 것에 불과했다. 말씀에 순종 없는 예배는 공허한 제의와 다름없다.
    
-죄에서 돌이켜 더 큰 심판을 자초하지 않도록 여러 재난을 허락하신다(6~11절). 하나님의 징벌은 자기 백성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랑의 호소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돌아오지 않는다. 성소를 찾았지만,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기근, 가뭄, 재해, 질병, 전쟁을 통한 하나님의 징계에도 고집스러운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으며 강퍅함의 무게만 더해갔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다(5회)”라는 하나님의 거듭된 외침을 의미심장하게 들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제사는 드렸지만, 하나님께 돌아오지는 않았다. 벧엘은 찾았으나 하나님은 찾지 않았다. 이에 하나님은 언약에 적시된 대로 불순종한 자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기근, 가뭄, 재해, 질병, 지진 같은 저주의 재앙을 보내셨는데도 완악한 마음을 꺾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의지할 재물이 있었고, 죄책감을 감출 종교적 제의들도 있었고, 신학적으로 위안을 삼을 만한 성전과 선민의식도 있었기 때문이다.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언약의 저주가 실현되는 것을 보면서도 끝내 돌아서지 않는(11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최후통첩이다(12~13절). 회개의 마지막 기회마저 저버린 그들을 기다리는 건 심판뿐이다.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고도 무사한 역사는 없었다. 영원히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온 천지를 창조하시며 주관하시는 왕 되신 하나님과 대면할 준비를 날마다 해야 할 것이다.
    
-심판하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고 명령하신다. 이제라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라는 명령이다. 하나님을 몰랐고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죄짓는 데 담대했고, 자신의 종교에 하나님을 가두었고, 숱한 재앙에도 마음을 고치지 않는 방자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 여러 차례 기회를 주시는 회개의 기회를 붙잡아, 다시 만날 주님과 기쁨으로 대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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