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성에 죽음이 오고 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에 대한 애가를 지어 부른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심판이 임하게 됨을 애곡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면서 하나님을 찾으라고 반복적으로 요청하는데, 여기에 부응하여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이 임하게 됨을 강력하게 제시한다. 16~17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될 것이기에 죽음에 대한 애곡이 넘치게 될 것임을 시적으로 표현한다.
1. 애가의 시작과 처참한 멸망(1~3절)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북이스라엘을 위한 애가를 지으신다. 애가는 장송곡으로 이스라엘에 심판이 이제 이르렀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노래다. 4장에서 하나님의 회개 요청을 거듭 거절한 이스라엘은 이제 심판을 직면해야 한다.
2~3절은 이스라엘을 “처녀 이스라엘”로 표현한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인격화하여 표현하는 의인화 기법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넘어져서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음 가운데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절은 이스라엘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 것임을 말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되리라(창 15:5)”라고 하셨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남은 자가 얼마 되지 못하리라고 하신 신명기 28:62의 말씀이 성취된다.
2.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4~15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요청하셨고, 지금도 요청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찾으라 그러면 살리라”라는 요청은 4절과 6절에 거듭 반복된다. 이는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면 기회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백성에게 벧엘, 길갈, 브엘세바로 가지 말라고 하신다. 벧엘과 길갈에 관한 내용은 이미 4:4에 이미 언급했다. 은혜의 장소였던 그곳들은 이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우상숭배의 장소가 되었고, 심판이 내려지는 대표적인 아픔의 장소가 되었다.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힐 것이라는 말은 지속적인 반복을 통해 긍정적인 의미에서 멸망의 아픔을 묘사하는 말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 하나님을 찾지 않을 때 하나님은 불같이 요셉의 집을 살라버리실 것을 경고한다. 불은 하나님의 신현의 상징이며 죄인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게 되면 그들을 불살라버리신다.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가 그렇다. 이미 아모스 1~2장에서 열방을 향한 심판 사이클에서도 “불을 궁궐에 보낼 것이다”라는 반복 어구를 통해 심판의 엄중함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정의를 쑥으로 바꾸고 공의를 땅에 던지므로 이제 하나님이 보내시는 불 심판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서게 되었다.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통치 원리이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결과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렇게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저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처절한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8절은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고 바닷물을 지면에 쏟으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낮을 밤으로 만드실 수도 있다. 그분 앞에서 백성은 순종과 겸손의 모습을 취해야 한다.
9~15절에서도 아모스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명확하게 지적한다. 이스라엘 중에 공의와 정의가 사라졌기 때문에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싫어하게 되었고 정직하게 말하는 자를 싫어하게 되었다. 이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더 이상 교훈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현실을 가리킨다. 그들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공의와 정의를 버려서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였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언약의 저주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다. 11절의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하지 못한다”라는 내용은 신명기 28장의 저주 목록에서 나온 저주로서 육법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게 된다는 의미다.
*이런 때 세상의 지혜자는 잠잠히 세상의 흐름에 맞춰서 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살 수 없다. 그래서 아모스는 14절에서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라고 하고 15절에서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정의를 세우라”고 권고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길로 걸으려 할 때 혹시나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새로운 기회를 주실 수도 있다고 말한다.
3. 이스라엘을 향한 애곡(16~17절)
이러한 하나님의 회개 요청을 거절한다면,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내려지게 된다. 16~17절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이 임하는 장면이다. “슬프도다 슬프도다”라는 구절은 장송곡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선언 구절이다. 이스라엘에 죽음이 임했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광장과 거리에서 울면서 “슬프도다”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장례식을 준비하고 집행하느라 바쁘게 된다. 심지어는 농사를 짓는 농부를 불러서 애곡하게 해야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또 “울음꾼”이 필요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죽음을 맞게 되는 큰 심판이 임할 것임을 말한다.
이런 애가가 울려 퍼지게 된 이유는 분명하다. 17절은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난다는 뜻이며, 보통 선지서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구원과 심판을 위한 궁극적인 임재”를 뜻한다. 의인은 상을 주시고, 악인은 벌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판단이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이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북이스라엘 가운데 지나가시면, 하나님께 죄를 범한 자들에게는 심판이 임하게 되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한 자들에게는 언약의 복이 임하게 된다.
현재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버렸고 회개의 요청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와의 궁극적인 임재가 나타나게 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뿐이다. 주님의 임재는 백성들에 대한 심판과 그들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아모스는 하나님을 찾고 악을 버리고 선을 추구할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고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고 절규하고 있다.
나는?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불의를 냉엄하게 고발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 방법도 확실하게 언급한다. 그것은 거짓 신앙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평화로운 이스라엘에 애가가 쏟아진다(1~3절, 16~17절). 애가는 죽음 앞에서 부르는 노래다. 살았으나 죽은 자 같은 이스라엘의 모습이기에 이스라엘은 애가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달리 이스라엘은 번성은 커녕 생존 자체가 위태로운 지경에 직면한다. 그들은 일어날 수도 없고 일으켜줄 사람도 없다. 거리마다 통곡 소리가 가득할 것이다. 생명의 하나님이 아닌 죽음의 하나님으로 그들 가운데로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때가 이르기 전에 입에 발린 축가를 멈추고 애가를 부르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공의롭지 못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때문에 약자들은 공의의 단맛을 보지 못하고 불의의 쓴맛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그들이 악랄하게 수탈한 것을 조금도 누리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누려도 늘 허기지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불의한 재물과 권력을 축복이라고 생각하지도, 부러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임박한 심판 중에도 마지막 출구를 마련하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이 사는 방법은 하나님을 찾고(신 20:15~16), 선을 구하는 것이다(4~6절, 14~15절). 종교적 허세를 버리고 선과 정의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다(미 6:8).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는 거룩한 성지가 아니라 배도의 온상일 뿐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일수록 신앙의 순수성은 퇴색되기 쉽다. 나의 신앙은 안전한가?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태도가 분명한가?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거절한 이스라엘은 전쟁 중에 유린당하고 길거리에 내버려질 것이다.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고 도움 줄 사람 하나 없어 고통 중에 죽어가는 처녀같이 될 것이다. 유월절엔 이스라엘 집을 지나가시고 구원하셨지만, 이번에는 애굽의 장자를 죽이듯이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지나가실 것이다. 참혹한 심판에 온 백성이 통곡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의 질서를 유지하시고 인간의 요새를 무력케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 위에 설 자는 아무도 없다(8~9절).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고 공의를 땅에 팽개친 자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가난하고 눌린 자들은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힘을 얻어야 한다. 실종된 정의를 제자리에 세우고 무너진 공의를 보수하실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정의가 더는 가동되지 않는 사회를 보시며 판단하신다. 만인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할 정의가 가진 자의 손에 넘어갔다. 성소만 나가면 무법자가 되는 사람들 때문에 자영농에서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노동 현장에는 분배 대신 착취만 남게 되었다(7, 10~13절). 이에 따라 피해자도 목격자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의 견고한 집도, 아름다운 포도원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완악한 이스라엘에게도 살길을 열어주신다. 그것은 사치스럽고 번잡한 예식도 아니고,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까지 찾아다니며 순례하는 열심도 아니다. 여호와를 찾으라 하신다. 선을 추구하라 하신다. 거룩하게 여기는 곳으로 거룩한 분을 대체할 수 없다. 거룩하게 보이는 의식들로 거룩한 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공의와 정의)을 추구하는 삶을 대신할 수는 없다.
*돌아오라는 요구를 거절한 이스라엘은 전쟁 중에 유린당하고 길거리에 버려질 것이다. 우상을 섬기듯이 하나님께 제사하던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는 구원의 장소가 아니라 심판의 장소가 될 것이다.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고 도움 줄 사람 하나 없어 고통 중에 죽어가는 처녀같이 될 것이다. 출애굽 때 유월절은 이스라엘 집을 지나가시고 구원하셨으나, 이번에는 애굽의 장자를 죽이듯이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찾아오실 것이다. 하나님의 참혹한 심판에 온 이스라엘이 통곡한다. 생명의 하나님께 버림받아 저주에 떨어지는 것만큼 더 애통한 일이 있을까?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공의롭지 못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때문에 약자들은 공의의 단맛을 보지 못하고 불의의 쓴맛을 보고 있었다. 재판은 뇌물로 왜곡되고 부당하게 재산을 갈취하여 세금을 징수하는데도 지혜자들은 알아서 침묵하고, 책망하는 입은 가로막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여 불편하게 하는 자는 철저하게 외면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악랄하게 수탈한 것을 조금도 누리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다듬은 돌로 건축하지만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다.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 타인의 수고를 짓밟았으니, 하나님도 그들의 부당한 재물을 거둬 가실 것이다. 설사 누린들 늘 허기질 것이다.
*이런 참담한 이스라엘에게 살 기회를 주신다. 금송아지가 있는 벧엘이나 길갈로 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기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묘성을 삼성으로,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실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하신다.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않고 정의를 세우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을 찾는 일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해 주실 것이다. 남은 자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다. 그러나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울음과 슬픔만 남을 것이다. 농부를 불러서 장송곡을 부르게 하고, 풍요와 번성, 기쁨의 잔치가 벌어질 포도원도 상갓집처럼 될 것이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의를 구하고 공의를 행하며 선을 구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 그것이 주임이 기대하시는 참다운 제사이다. 그것이 주님을 돌아오게 할 참다운 회개이다.
*부국강성한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아모스의 시각은 달랐다. 하나님 없는 부요함이 불러오는 위험에도 예민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시점에 벧엘로, 길갈로, 브엘세바로도 가지 말라고 하신다. 이스라엘은 벧엘로 가는 것은 하나님을 찾아 올라가는 것이고, 길갈로 향하는 것도 신앙적인 각성이며, 브엘세바로 나아가야 바른 믿음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그곳들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오늘날 벧엘, 길갈, 브엘세바는 교회로 치환됐다. 성도들은 교회를 차조, 교회를 중심으로 삶을 일구는 것을 마치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처럼 여긴다. 그런데 본문은 이를 철저하게 부정한다. 혹시 그럴수도 있겠으나 교회가 우상이 되고, 교회가 진리의 말씀을 왜곡하여 가르치게 되면, 신앙도 뒤틀려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주님을) 찾아라. 그러면 산다(4, 6절_새번역)”라고 강력하게 촉구하신다.
*하나님을 찾는 일이란 사마리아 성에 가득한 악함을 버리고 공의와 선을 사랑하며 사는 삶을 가리킨다. 악한 세상을 사는 하나님 백성의 일상은 선함과 공의로움의 삶으로 믿음을 드러낸다. 아모스와 같은 태도로 불의에 맞서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선포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종말의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의 앞에 침묵한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다르다. 연일 이어지는 12.3 내란과 12.78 국회폭거를 바라보면 이 땅의 국민들은 분연하게 외치고 있다. 일부 내란 부역자들의 냉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분연히 외치고 있다. 이 땅의 하나님 나라 백성도 공의와 정의의 외침을 힘껏 부르짖을 때이다. 나아가 삶으로 하나님의 선함과 공의로우심을 드러내 보여줘야 할 때다.
*주님, 지금 이곳에서 힘써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선을 행하게 하소서
*주님,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법정)에서 정의를 세우겠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