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고문…’ 본문을 읽으면서 베데스다의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을 보고 생각이 났다. 또 그 중에서 ’38년 된 병자’는 희망고문 조차 사치스러운 절망 가운데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찾아 오셨다.
1.자비없는 자비의 집(1-5절)
유대인의 명절(1절)… 예루살렘이 온통 축제의 분위기로 왁자지껄 할 때,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는 지역이 있었다. 바로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에 있는 많은 병자들 이었다. 본래 ‘양문’은 성전에서 제물로 사용될 양들을 데리고 출입하는 문이었고, 그들이 누워 있는 베데스다는 그 성전 벽과 맞물려 있는 성전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이다. 하지만 가장 흥겨운 성전 한쪽 벽과 맞닿아 있던 베데스다는 그 절기의 흥겨움과 거리가 멀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도무지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이라도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 가장 먼저 그 물에 몸을 담그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며 죄 사함의 은총을 누리는 자유함이 있고, 한편으로는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기를 고대하며 가장 먼저 들어갈 수 있게 늘 초긴장의 시간들을 보내는 희망고문자들의 고통이 공존한다는 것이 말이다.
*더 기믹한 것은 많은 병자들이 오로지 언제일지 모르지만 물이 일렁이는 그 순간 들어가서 낫게 된다고 믿는 그 한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며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순 되게도 자비의 집은 경쟁의 집이었다. 자비는 없고 먼저 들어가려는 경쟁과 이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들의 상황에 따라 속상함 만이 넘치는 집이었다. 그 지독한 경쟁의 집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다. 병에 든지 38년인지, 베데스다에 누워 있은지 38년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그는 베데스다 연못의 일렁이는 물결을 늘 바라만 봐야 하는 절망적인 상태 였다.
2.자비없는 그곳에 자비의 예수님이 오셨다(6-9절)
38년을 괴롭히고 자신의 삶의 안식을 깨뜨린 질병 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물을 일렁이게 하고 그 물에 들어가게 하여”가 아니라 “말씀”으로 치유하셨다.
병이 오래된 그의 누운 곳에 찾아 오셔서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새번역_6절)” 병자는 전설을 기대어 대답했다. 낫고 싶은데 늘 먼저 내려가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7절). 병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다. 치유된 이후 그를 고쳐준 이가 누구인지를 모른다고 할 정도로 그는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었다. 아… 얼마나 고된 인생인가! 예수님의 표적이야기가 온 예루살렘과 유대땅, 갈릴리에 넘쳐나고 있을 때, 베데스다의 행각에 누워있던 병자들에게는 어느 누구도 그 “기쁜 소식, 주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여 주신다”는 그 소식을 전해 주지 않았다.
젊은 사내가 와서 “낫고 싶은가?”라고 물을 때, 그저 한숨 쉬며 “아무도 나를 못에 데려가 주지 않는다”며 한탄 할 뿐이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젊은이가 예수님인줄 정말 알지 못했던 것이다. 놀랍지 않는가! 예수님은 자신을 모르는 절망의 사람, 특히 어느 누구도 “당신도 예수님을 만나면 나을 수 있다”고 전하는 이가 없을 정도로 철저히 소외된 그에게 먼저 찾아 가신 것이다. 먼저 말을 건네시며 그에게 38년된 병에서 자유함을 주신 것이다. 이런 자비가 또 있을까?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인간을 묶고 있는 죄의 저주를 끊기 위해서였다. 누구든지 구원 받게 하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그것을 인간이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죽어야만 한다. 모든 인류의 죄값을 자신의 생명으로 치루어야 한다. 그것을 알고도 이 세상에 오셨다. 이런 자비가 또 있을까?
3.말씀(다바르)으로 치유하셨다. 그런데 안식일이었다(10-15절)
세상에 또 없는 자비로움으로 38년 된 병자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푸신다. 그런데 베데스다 연못에 던져 넣으시며가 아니라 “말씀” 하심으로 치유하신다.
“말씀(다바르)”은 곧 “실제”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있는 말씀이다(요 1:3). 38년 된 병자는 그 무수한 시간이 실패와 좌절,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다바르) 한 마디로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갔다!(8-9절)”
*사람이 만들어 낸(말하여 준) 전설(말)에 의지하여 늘 실패하고 절망으로 삶을 채웠지만, 세상에 또 없는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자신의 인생을 꽉 채우고 움켜 쥐고 있었던 절망이 물러갔다. 병은 물러가고 건강이 찾아왔다. “순전히 말씀으로 행하신 새 창조 이셨다!” 말씀이신 예수님만이(창조주 하나님 만이) 행하실 수 있는 창조 셨다.
*새로운 일을 창조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올바르게 반응해야 하겠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이니까! 말씀으로 충분히 치유하시니까! 가나에서 말씀하심으로만 가버나움의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치신 주님이시니까!
문제는 이 감격적이고 흥겨운 역사가 하필 “안식일”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었다. 소외 되었고 관심 밖이던 베데스다에서 한 손에 자리를 들고 걸어 나오는 한 사람의 기쁨과 감격 흥겨움, 자유함, 놀람은 보지 않고 그의 손에 들려진 자리와 그가 걷는 걸음 수를 유심히 지켜보다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그를 나무라고 책망했다.
*이런 세상, 이런 사람들이라니… 38년 된 병에서 회복된 기쁨을 함께 공감해주고 기뻐하며 축하 하지는 않고 율법의 규정만 거들먹 거린다. 이 속상한 상황이 오늘날 교회안의 모습에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종교적 규정만 들이대며 그의 삶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율법대로 했는가이다. 전통을 따르고 있는가 이다.
*자신들의 말(율법, 전통, 규례_미쉬나)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진정한 안식(38년의 병의 악압에서 해방된 안식)을 옳지 못하다 판단하고 정죄 한다. 그들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나 역시 어설픈 내가 이해하고 그저 무작정 전통으로 내려온 해석들을 성경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고 맹신 한적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까….
*한편으로 38년 된 병자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을 되짚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라 할 때 믿지 않는 다면 올바른 반응 자체를 할 수 없는 것이다. 38년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니 여전히 자리에 누워있지 않고 예수님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말씀을 붙잡아 믿고 일어선 그를 간과할 수 없다.
*나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올바르게 반응하여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는 음성에 반응해야 하겠다. 나의 지식과 전통에서 오는 규정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더 긴밀히 바라보고 바라 보아야지…
나는?
-베데스다(자비의 집)에 자비가 없다. 오히려 제일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이 되기 위한 냉혹한 경쟁만 있을 뿐이다. 그곳에 자비의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 그리고 경쟁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의 말씀으로 가장 절망적인 38년된 병자를 새롭게 창조하셨다. 말씀으로 새롭게 하셨다.
-38년된 병자는 오랜 시간 자신을 피곤하게 억압 했던 병에서 38년만에 진정한 안식을 경험한다. 안식일에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진정한 안식을 경험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38년만의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그를 정죄한다. 압박하여 누가 이런 일을 안식일에 행하게 하였는지 매몰차게 따진다. 축하받고 격려 받아야할 그에게 불안과 초조함으로 다시 안식에서 멀어지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날은 안식해야 할 안식일이었다.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 규정과 규례에 묶여 고통스러운 날이 되어 버렸다. 지키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안식이 무슨 안식일까!
-하나님께서 6일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7일째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창조의 기쁨을 누린 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안식의 가치라면, 예수님으로 인해 새롭게 창조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누려야 할 안식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안식은 지켜야할 율법의 조항이 아니라 누려야 할 하나님 안에서의 즐거움과 기쁨이다. 이런 의미에서 38년된 병자는 그의 삶에서 유일무이한 안식일을 누린 것이다.
*주님, 자비의 집에 자비가 없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아니길 바랍니다.
*주님, 자비의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에서, 그 말씀에 올바로 반응하여 진정한 안식을 누리겠습니다.
1.자비없는 자비의 집(1-5절)
유대인의 명절(1절)… 예루살렘이 온통 축제의 분위기로 왁자지껄 할 때,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는 지역이 있었다. 바로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에 있는 많은 병자들 이었다. 본래 ‘양문’은 성전에서 제물로 사용될 양들을 데리고 출입하는 문이었고, 그들이 누워 있는 베데스다는 그 성전 벽과 맞물려 있는 성전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이다. 하지만 가장 흥겨운 성전 한쪽 벽과 맞닿아 있던 베데스다는 그 절기의 흥겨움과 거리가 멀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도무지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이라도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 가장 먼저 그 물에 몸을 담그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며 죄 사함의 은총을 누리는 자유함이 있고, 한편으로는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기를 고대하며 가장 먼저 들어갈 수 있게 늘 초긴장의 시간들을 보내는 희망고문자들의 고통이 공존한다는 것이 말이다.
*더 기믹한 것은 많은 병자들이 오로지 언제일지 모르지만 물이 일렁이는 그 순간 들어가서 낫게 된다고 믿는 그 한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며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순 되게도 자비의 집은 경쟁의 집이었다. 자비는 없고 먼저 들어가려는 경쟁과 이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들의 상황에 따라 속상함 만이 넘치는 집이었다. 그 지독한 경쟁의 집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다. 병에 든지 38년인지, 베데스다에 누워 있은지 38년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그는 베데스다 연못의 일렁이는 물결을 늘 바라만 봐야 하는 절망적인 상태 였다.
2.자비없는 그곳에 자비의 예수님이 오셨다(6-9절)
38년을 괴롭히고 자신의 삶의 안식을 깨뜨린 질병 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물을 일렁이게 하고 그 물에 들어가게 하여”가 아니라 “말씀”으로 치유하셨다.
병이 오래된 그의 누운 곳에 찾아 오셔서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새번역_6절)” 병자는 전설을 기대어 대답했다. 낫고 싶은데 늘 먼저 내려가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7절). 병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다. 치유된 이후 그를 고쳐준 이가 누구인지를 모른다고 할 정도로 그는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었다. 아… 얼마나 고된 인생인가! 예수님의 표적이야기가 온 예루살렘과 유대땅, 갈릴리에 넘쳐나고 있을 때, 베데스다의 행각에 누워있던 병자들에게는 어느 누구도 그 “기쁜 소식, 주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여 주신다”는 그 소식을 전해 주지 않았다.
젊은 사내가 와서 “낫고 싶은가?”라고 물을 때, 그저 한숨 쉬며 “아무도 나를 못에 데려가 주지 않는다”며 한탄 할 뿐이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젊은이가 예수님인줄 정말 알지 못했던 것이다. 놀랍지 않는가! 예수님은 자신을 모르는 절망의 사람, 특히 어느 누구도 “당신도 예수님을 만나면 나을 수 있다”고 전하는 이가 없을 정도로 철저히 소외된 그에게 먼저 찾아 가신 것이다. 먼저 말을 건네시며 그에게 38년된 병에서 자유함을 주신 것이다. 이런 자비가 또 있을까?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인간을 묶고 있는 죄의 저주를 끊기 위해서였다. 누구든지 구원 받게 하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그것을 인간이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죽어야만 한다. 모든 인류의 죄값을 자신의 생명으로 치루어야 한다. 그것을 알고도 이 세상에 오셨다. 이런 자비가 또 있을까?
3.말씀(다바르)으로 치유하셨다. 그런데 안식일이었다(10-15절)
세상에 또 없는 자비로움으로 38년 된 병자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푸신다. 그런데 베데스다 연못에 던져 넣으시며가 아니라 “말씀” 하심으로 치유하신다.
“말씀(다바르)”은 곧 “실제”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있는 말씀이다(요 1:3). 38년 된 병자는 그 무수한 시간이 실패와 좌절,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다바르) 한 마디로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갔다!(8-9절)”
*사람이 만들어 낸(말하여 준) 전설(말)에 의지하여 늘 실패하고 절망으로 삶을 채웠지만, 세상에 또 없는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자신의 인생을 꽉 채우고 움켜 쥐고 있었던 절망이 물러갔다. 병은 물러가고 건강이 찾아왔다. “순전히 말씀으로 행하신 새 창조 이셨다!” 말씀이신 예수님만이(창조주 하나님 만이) 행하실 수 있는 창조 셨다.
*새로운 일을 창조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올바르게 반응해야 하겠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이니까! 말씀으로 충분히 치유하시니까! 가나에서 말씀하심으로만 가버나움의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치신 주님이시니까!
문제는 이 감격적이고 흥겨운 역사가 하필 “안식일”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었다. 소외 되었고 관심 밖이던 베데스다에서 한 손에 자리를 들고 걸어 나오는 한 사람의 기쁨과 감격 흥겨움, 자유함, 놀람은 보지 않고 그의 손에 들려진 자리와 그가 걷는 걸음 수를 유심히 지켜보다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그를 나무라고 책망했다.
*이런 세상, 이런 사람들이라니… 38년 된 병에서 회복된 기쁨을 함께 공감해주고 기뻐하며 축하 하지는 않고 율법의 규정만 거들먹 거린다. 이 속상한 상황이 오늘날 교회안의 모습에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종교적 규정만 들이대며 그의 삶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율법대로 했는가이다. 전통을 따르고 있는가 이다.
*자신들의 말(율법, 전통, 규례_미쉬나)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진정한 안식(38년의 병의 악압에서 해방된 안식)을 옳지 못하다 판단하고 정죄 한다. 그들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나 역시 어설픈 내가 이해하고 그저 무작정 전통으로 내려온 해석들을 성경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고 맹신 한적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까….
*한편으로 38년 된 병자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을 되짚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라 할 때 믿지 않는 다면 올바른 반응 자체를 할 수 없는 것이다. 38년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니 여전히 자리에 누워있지 않고 예수님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말씀을 붙잡아 믿고 일어선 그를 간과할 수 없다.
*나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올바르게 반응하여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는 음성에 반응해야 하겠다. 나의 지식과 전통에서 오는 규정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더 긴밀히 바라보고 바라 보아야지…
나는?
-베데스다(자비의 집)에 자비가 없다. 오히려 제일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이 되기 위한 냉혹한 경쟁만 있을 뿐이다. 그곳에 자비의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 그리고 경쟁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의 말씀으로 가장 절망적인 38년된 병자를 새롭게 창조하셨다. 말씀으로 새롭게 하셨다.
-38년된 병자는 오랜 시간 자신을 피곤하게 억압 했던 병에서 38년만에 진정한 안식을 경험한다. 안식일에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진정한 안식을 경험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38년만의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그를 정죄한다. 압박하여 누가 이런 일을 안식일에 행하게 하였는지 매몰차게 따진다. 축하받고 격려 받아야할 그에게 불안과 초조함으로 다시 안식에서 멀어지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날은 안식해야 할 안식일이었다.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 규정과 규례에 묶여 고통스러운 날이 되어 버렸다. 지키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안식이 무슨 안식일까!
-하나님께서 6일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7일째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창조의 기쁨을 누린 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안식의 가치라면, 예수님으로 인해 새롭게 창조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누려야 할 안식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안식은 지켜야할 율법의 조항이 아니라 누려야 할 하나님 안에서의 즐거움과 기쁨이다. 이런 의미에서 38년된 병자는 그의 삶에서 유일무이한 안식일을 누린 것이다.
*주님, 자비의 집에 자비가 없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아니길 바랍니다.
*주님, 자비의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에서, 그 말씀에 올바로 반응하여 진정한 안식을 누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