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여호와의 소리(말씀)을 청종 하지 않은 사울… [삼상 15:16-35]
 – 2022년 06월 01일
– 2022년 06월 01일 –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은 것에 대해 흥분하며 계속 핑계만 대는 사울에게 사무엘은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16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돌이킬 수 있는 회개의 기회를 주었지만, 멈추지 않는 핑계로만 일관하는 사울의 모습에 깊이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끝까지 자기명분과 체면을 구하는 사울에게 아각을 죽이는 영광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사무엘의 옷자락이라도 붙잡고 자기 의도대로 아말렉 전쟁을 마무리 하려는 사울에게 남은 것은 자기 영광이 아니라 사무엘의 “찢어진 옷자락”처럼 사무엘과 하나님과의 단절이었다. 하나님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


1.왜 이러나.. 사울….(17-21절)
하나님께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이유는 그가 ‘스스로를 작게 여겼기’ 때문이었다(17절). 그런데 아말렉을 진멸할때까지 싸우라고(18절) 내보낸 전쟁에서 어찌하여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 하지 아니하고 ‘탈취 하기만 급하여’ 하나님 앞에서 악하게 행하였는지(19절) 안타까워 했다. 사무엘의 호소에 사울은 오히려 자신은 하나님께 순종 하였다고 대답한다(20절). 하지만 백성이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끌고 온 것 뿐이라고 했다(21절).

*아말렉을 치는 전쟁은 하나님을 위한 전쟁이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명백하게 “진멸하라”는 명령을 “탄력적으로” 해석하여 아말렉 왕 아각과 가축 일부를 살려 두었다. 이는 길갈에서 아각은 공개처형으로 죽일 것이고, 가축들은 제물로 드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에 불순종하였다는 사무엘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는 명령보다 “탈취하기에만 급하여(새번역_약탈하는 데만 마음을 쏟으면서, 19절)”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음을 고발했다. 사울의 죄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순종의 사명에 실패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한 이유를 “약탈하는 데만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사울은 억울해 했다. 그가 사무엘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각의 생포를 언급하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 했다고 항변한다(20절). 이렇게 당당하게 말한 것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많은 백성들 앞에서 그를 공개 처형하면 자신의 위엄이 더 올라갈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간의 차이일 뿐 아각을 죽이는 것은 매한가지 이니 자신은 불순종 하지 않았다고 “탄력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아각을 죽이는 것은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시간차를 두고 백성들을 모아서 공개처형의 형식을 빌어 할 작정이었다. 사울은 망각하고 있었다. 이 전쟁은 자신의 왕권을 높이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치루어야 할 “하나님의 전쟁”이었다.

* 그리고 더 하지 말았어야 할 백성 핑계를 댄다. “다만 백성이 …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21절)” 이렇게 한 것이라는 것이다.



2.하나님보다 백성을 더 두려워하는 사울(22-24절)
사무엘은 하나님의 분노를 대언하였다.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만큼 하나님께서 번제와 제사를 기뻐하시겠습니까? 보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바른성경_22절).” 사울의 근본적인 죄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은 것”임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사울은 하나님의 목소리(말씀)을 “탄력적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행동했다. 이것이 죄다. 그리고 이런 불순종의 죄는 “점술이나 우상숭배와 같다(23절)”고 충격적으로 선언한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인 왕이 해서는 안될 죄가 우상숭배이다. 그 길은 멸망 뿐이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에 사울이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겼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이렇게 한 것은 “백성들을 두려워 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24절).

*사울이 왜 백성들을 두려워 했을까? 13장에서 사무엘이 떠난 후 많은 병사들이 도망쳤다. 14장에서 블레셋에 승리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명령에 영이 서지 못했다. 요나단을 죽이라는 명령에 백성들이 들어 일어나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들은 사울의 마음에 조바심을 갖게 했을 것이다. 아말렉과의 전투의 성과, 특히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아 백성들 앞에서 공개처형하는 것과 아말렉의 양과 소를 제물로 바치며 제사드리며 전쟁을 마무리 짓는 것은 자신의 왕권을 굳건하게 하기 위한 최적의 카드였을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보다 백성을 더 두려워 했다. 참담하기 그지없다…그러니 백성들의 마음을 사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니라 자신이 탄력적으로 해석한대로 행한 것이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꿰뚫고 계셨다.



3.사울, 도대체 너란 인간은….(25-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께 심판의 선언을 받는 것 보다 지금 자기 체면을 유지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사무엘에게 기가 찬 부탁을 한다. “제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나와 함께 가셔서, 내가 주님께 경배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새번역_25절).” 하나님의 감정과 상관없이 지금 자신의 입장에서 아말렉을 칠때부터 구상했을 “승전 감사 화목제”를 인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아… 사울이 얼마나 영적으로 우둔한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전투에서는 이겼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불순종으로 철저히 실패로 돌아간 것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각과 가축들을 살려둠으로서 “자기의 왕권을 높이기 위한 전쟁”으로 전락 시키며 취한 불순종의 열매들로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 것이다.

*본문은 사울이 제사 집례를 간청한 이유를 “…. 나의 백성 이스라엘과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제발 나의 체면을 세워 주시기 바랍니다. 나와 함께 가셔서, 내가,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새번역_30절).” 라고 분명히 밝힌다. 즉, 자신의 수치를 면하기 위해, 사무엘이 이 제사를 집례 하지 않으면 자신이 부끄러워 지기에 간청한 것이다.

*사무엘은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간청하는 사울에게서 옷자락이 찢어질 정도로 단호하게 돌아선다. 그리고 선포했다. “주님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이 옷자락처럼 찢어서 임금님에게서 빼앗아, 임금님보다 더 나은 다른 사람에게 주셨습니다(새번역_28절).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변개(뜻을 바꾸지) 하지 않을 것을 덧붙인다(29절). 이렇게 까지 했음에도 사울이 회개하고, 왕의 체면을 위해 제사를 집례해 줄 것을 간청하자 사무엘이 따라갔다(31절).

*난해하다. 왜 사무엘이 사울을 따라 갔을까? 이제까지 단호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옷자락을 찢기면서 까지 떠나려고 했던 그가 갑자기 왜 따라갔을까? 아말렉에서 가져온 불순종의 열매들로 제사를 드려야 했을 그 자리에 왜 따라갔을까?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31절)”라는 구절에서 “사울이 여호와께…”라는 기록이 제사를 집례 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그렇다면 왜 따라 들어갔을까?

*아각의 처형을 사울에게 허락하지 않기 위해서였다(32-33절). 제사를 마치고 사무엘이 아각을 끌어내라고 명령한다. 사무엘에게 끌려오는 아각은 개역개정은 “… 즐거이 오며 이르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라고
고백한 것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고대 근동의 “성전”의 관행인 “진멸하는 성전에서 생포된 왕은 제사 후에 신 앞에서 공개 처형 당한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어색하다. 사울도 헤렘 명령을 어기지 않았다고 탄력적으로 생각한 이유가 공개 처형을 고려 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칠십인역( LXX)은 “아각이 두려움으로 사무엘에게 나아왔다. 아각은 죽음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괴로운가라고 말했다.”라고 번역했다. 어쨌든 사무엘이 아각을 죽이므로서 하나님의 성전이 마무리되었다.

*사무엘은 사울이 아각을 죽이는 영광을 누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무엘은 라마로, 사울은 기브아로 돌아갔다(34절). 그리고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않았다. 하나님으로부터 왕위가 폐위된 사울을 왕으로서 가서 만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무엘은 폐위된 사울 왕 보다 “왕보다 더 나은 왕의 이웃(28절)”을 더 염두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35절).



나는?
-사울은 하나님의 헤렘(진멸) 명령을 “탄력적으로 해석하여 지켰다.” 자기 입장에서는 불순종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 고대 근동의 문화에서 “성전”은 의례히 이렇게 “왕의 공개처형과 제물로 드릴 가축들을 죽이지 않고 끌고 와서 승전 감사 제사를 드리고” 마무리하였다. 이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사울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명령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 문화, 관습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여 주신 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교훈한다.

-이것은 교회의 관행, 문화, 전통이라 하여 죄로 여기지 않는 모습이 여전한 교회가 뼈져리게 각성해야 할 부분이다.

-교회를 “개혁의 공동체”라고 일컫는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 매일 개혁하지 않는 교회(성도)는 타락할 수 밖에 없다”는 어느 신학자의 고언을 외면하면 안 된다.

*늘 말씀에 비추어 새롭게 되지 않으면 사울처럼 세상 관습과 문화에 따라 “탄력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해석, 생각, 사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길 밖에 없고 성령의 조명 아래 겸손히 귀를 열고 마음을 다지는 길 밖에 없다.

*오늘 나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탄력적으로”가 아니라 “주신 마음과 뜻을 따라(삼상 2:35)” 살아내야지…

*사울을 왕 되게 한 것은 “스스로를 작게 여기는 겸손함”이었다. 그런데 그를 왕의 자리에게 내려오게 한 것은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 하지 않는 교만” 때문이었다. 누구나 겸손과 교만을 함께 지니고 산다. 하나님의 소리(말씀)은 겸손하게, 온전하게 들어야 산다. “탄력적으로” 듣는 교만이 마음을 지배하면 하나님의 영이 떠나신다. 은혜가 메마른다.

*개혁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내 안에서 자꾸 나의 지식과 시선으로 “탄력적으로” 흐르려는 마음을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겸손함으로 끊임없이 조정하는 것이다. 날마다 말씀 묵상을 통해 내 마음의 주파수를 “FM”으로 붙잡아 놓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개혁이다. 잘 듣기 위해 잘 조정해야 한다.


**주님, 말씀을 나의 문화와 관습을 따라 탄력적으로 해석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구하며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주님, 전통, 관행, 관습에 얽매이기 보다, 끊임없이 진리의 말씀으로 개혁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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