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다윗은 신속하게 판단했다. “서둘러서 모두 여기에서 도망가자. 머뭇거리다가는 아무도 압살롬의 손에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어서 이 곳을 떠나가자. 그가 곧 와서 우리를 따라잡으면, 우리에게도 재앙을 입히고, 이 도성도 칼로 칠 것이다.”(새번역_14절)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의 소식을 듣고 첫번째로 반응한 첫 마디는 “일어나 도망가자(새번역_여기에서 도망가자)” 였다. 다윗은 자신의 무리들과 도성도 칼로 칠 것이 뻔하게 예상되는 압살롬의 행동에 주목했다. 불가피하게 압살롬과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면 예루살렘 성의 파괴 뿐 아니라 무고한 백성들이 희생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단 예루살렘 성에서 압살롬의 군대를 맞이하면 ‘피할 길’을 확보할 수 없었기에 압살롬이 이르기 전에 빨리 성을 벗어나고자 했다. 전장에서 뼈가 굵은 백전노장의 혜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지금 당장의 전투에서 지는 것보다 전쟁 자체를 승리하기 위한 포석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 불리하고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백성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다윗의 판단은 신속한 도피 결정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지도자들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과연 다윗처럼 백성들의 안위, 사람의 생명에 가치를 두고 결정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이런 가치를 지닌 지도자가 다윗이었다.
*또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압살롬의 군대를 정면으로 대면하기 보다 상황을 지켜보며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결정에 신속한 다윗을 보게 된다. 급하고 어려울 수록 그 일을 바라보는 시각은 좁혀 질대로 좁혀져서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 어렵다. 그런데 다윗은 이 함정에 빠지지 않고 차분하게 반역 사건을 다루고 있다. 경험 많은 통치자의 연륜이 느껴진다.
그런데 한편으로 급히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후궁 열 명을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하였다. 다윗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지만, 압살롬의 반역 소식을 듣고 성을 떠나기로 결정하면서 적어도 나단 선지자가 선포했던 하나님의 저주가 생각나지 않았을까? 칼이 집안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과 자신의 처들을 백주에 범하리라(삼하 12:10-11)는 말씀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급박한 순간이었지만 아쉽고 아쉽다.
다윗의 피난길은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처럼 여전히 죽기까지 충성을 다짐한 충신들이 함께 하였다. 압살롬은 “그저 따라가기만 한(11절)” 사람들이었다면, 다윗을 따르는 이들은 달랐다. 특히 다윗을 다르는 이들을 보면 “그렛 사람, 블렛 사람, 가드에서 온 모든 가드 사람 600명”(18절)이 다윗의 앞에서 행진을 하고 다윗의 뒤를 따라 ‘모든 백성과 모든 신하들'(17-18절)이 따라 나왔다.
*참으로 곤란하고 참담했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을 나와 유대 광야로 가는 것만 정했지,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나왔기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런 위기 상황 속의 다윗 어떻게 이 절망을 맞이하는가?
1.지극히 사람 중심,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14절)
다윗은 매우 현실 적이었고 그 판단은 이제껏 보았던 그 어떤 순간의 다윗보다 더 신속했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 “생명 존중”의 마음이 있었다. 속히 피하는 이유는 압살롬의 칼날로 부터 “한 사람이라도 피하지 못할까”하는 것이었다. 또 자신이 성에 머물므로 백성들의 피해가 일어날 것을 원치 않았다. 압살롬의 칼날이 성읍을 칠까(14절) 염려하였다.
어떻해서든지 백성들을 방패 막이 하여 시간을 벌려는 것 보다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이 먼저 성을 떠남으로 인명피해가 나지 않도록 결정한 것이다.
2.충성스러운 신하들과 함께(15, 18-22절)
압살롬의 반역 소식이 들려 오자 다윗은 신속하게 예루살렘 성을 떠나고자 했다. 그때 신하들이 함께 따라 나선다. 그러면서 “모든 일은 임금님께서 결정하신 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이 종들은 그대로 따르겠습니다.”(새번역_15절) 라고 말하며 광야로 나서는 다윗과 함께 한다.
뿐만 아니라 다윗을 호위하기 위해 그의 용병들도 역시 함께 한다. 대부분 블레셋 사람들이었다. 압살롬을 따르는 이들이 “그저” 따르는 사람들이었다는 것과 분명히 비교가 된다.
특히 따로 언급한 “가드 사람 잇대”의 충성심은 남다르다. 다윗의 표현으로 “이제 막 이민 왔으니 정처 없이 떠나는 자신을 따라올 필요 없다”고 할 때 잇대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이스라엘 백성다운 고백으로 충성을 서약한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시고, 임금님께서도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살든지 죽든지, 이 종도 따라가겠습니다.”(새번역_21절)
놀라운 것은 도피의 여정을 떠나는 다윗에게서도 들을 수 없던 신앙고백이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시고…” 대단한 신앙고백이다. 그는 다윗의 정처 없는 피난길에 함께 나서면서 분명한 신앙고백으로 동참한다. 이제 막 용병으로 부름받아 가드에서 예루살렘으로 정착하자 마자 이 사달이 났지만, 그는 자신을 부른 다윗 왕을 저버리지 않는다. 더 나아가 다윗 왕의 하나님을 다윗 왕 보다 더 선명하게 믿음으로 고백하며 다윗을 따라 나선다.
다윗은 이 상황에서 시편 3편의 믿음의 고백을 드렸다. 흥미로운 것은 사무엘서의 기록은 밧세바 사건 이후 영적으로 둔감해진 다윗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 시켰다. 13장 이후 다윗 집안의 다툼은 어쩌면 어쩡쩡한 다윗의 태도가 일조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다윗이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결정하기를 이렇게 신속하게 하고, 더구나 그렇게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오면서 시편 3편을 지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감히 상상력을 펼쳐 보자면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잇대의 이 놀라운 고백,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계시는데…”라는 이 고백이 다윗의 영성을 일깨우지 않았을까? 야성의 영성이 다시 돌아오도록 영향을 끼친 것은 잇대의 이 망설임 없는 고백이 아니었을까?
*진정 놀랍지 않는가!
*더 놀라운 것은 지금 도망하는 다윗을 호위하는 군사들은 유다 지파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니다. 이들은 모두 이방인들이다. 그것도 이스라엘이 원수처럼 여겼고, 다윗이 무너뜨렸던 블레셋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때 가장 적대적으로 맞섰던 이방인들이 지금은 다윗을 가장 가까이서 호위하고 있다. 수세에 몰렸고, 우군은 아무도 없는, 누구도 편들기를 거부할 때 끝까지 그의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이라니….
*진정 놀랍지 않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에게 그 마음이 넘어가는 기회주의자들임에 틀림없지만, 끝까지 다윗의 곁을 충성스럽게 지킨 이들은 우직한 이방인들이었다. 그렇다 이렇듯 나는 끝까지 주님의 뜻에 충성하고 싶다. 이리 저리 기회를 찾아 헤메는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잡는 걸음이기 원한다. 끝까지 주님과 주님의 뜻을 지키는 종이 되련다.
3.온 땅 사람이 울다!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다!(23절)
다윗의 삶에 쫓김과 도피가 다시 시작되었다. 자신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으로 선택한 길이었다. 그런데 다윗은 이 과정에서 어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사울 왕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실망하여 왕권을 옮기시겠다거나, 다윗의 통치에 제동을 거시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도 다윗은 도피의 길을 망설임 없이 선택하였다.
압살롬의 반란이 하나님의 뜻과 전혀 무관한 것임을 분명히 알았지만, 예루살렘 성을 사수 하기 위하여 신하들의 생명을 담보하지 않는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신하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왕으로서의 자존심,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무엇보다 모든 신하들과 가족들을 먼저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가게 하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기드론 시내를 건넜다고 기록한다(23절). 이 때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었다. *압살롬에게 이스라엘 민심이 돌아섰다고 했지만, 여전히 다윗을 위해 우는 백성들도 있었다.
심지어 도피하는 왕을 따라 사나 죽으나 어디든지 가겠다고 맹세하는 이들은 심지어 이방인들이었다. 압살롬이 민심을 등에 업고 반역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다윗을 따르는 백성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도피를 결정하다니… 그것은 순전히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과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다. 이런 다윗의 마음을 알았을까? 아니면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다시 광야 길로 향하는 무너진 마음이었을까?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었다.
나는?
-압살롬의 반란에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물론 나단 선지자를 통해 선언된 저주가 있지만, 구태여 압살롬이 스스로 그 칼이 될 필요는 없었다. 즉, 이 반란은 압살롬의 권력에 대한 야망이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다. 압살롬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일어서면서 “반역에 동참하는 백성들이 많아 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고 있다고 여기는 증거로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윗에게도 역시 그와 함께 하기 위해 기꺼이 광야로 함께 나가는 백성들이 있었고, 성을 떠나는 다윗을 위해 큰 소리로 울어줄 백성들도 있었다. 단지 “민심, 여론”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준이어서는 안 된다.
-아직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압살롬은 자신들에게 모여드는 많은 백성들을 의지하였고, 다윗은 백성들의 생명과 예루살렘 성의 안전을 위해 자신이 먼저 예루살렘 성을 비워주는 결정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는 것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되지 못했다. 또 다윗을 끝까지 따르겠다는 백성들과 신하는 압살롬에게 넘어간 백성들의 민심이 그들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민심, 여론이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불분명한 때에도 다윗은 적어도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을 따라 결정한다. 백성들의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결정이다.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의 생명만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들, 즉 압살롬을 따르는 백성들의 생명도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 예루살렘 성을 수성 하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발생하게 될 무수한 생명들의 희생을 먼저 고려한 것이다.
*자신을 위해 이익이 위는 것과 명분을 지키는 것보다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먼저였다. 다윗, 그는 참으로 왕 답다!
*이런 다윗에게 가드 사람 잇대와 같은 이들의 충성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 아닐까!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결정에 자신의 권위와 체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신속함을 보고 그의 모든 신하들이 당연히 잇대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큰 소리로 울며 광야 길로 함께 향할 결심을 한 것은 다윗의 이런 마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편 나도 언제나 잇대처럼 담대한 신앙고백과 행동의 사람이기를 바래 본다. 누구라도 할 것 없이 큰 소리로 통곡하고 슬퍼하는 그 현장에서 자신이 다윗과 함께 광야로 나서는 것은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계시고, 그 주님이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을 믿기에 광야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라면 개의치 않는다는 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 없는 도시 예루살렘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황량한 광야에 생명과 구원이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삶이기를 바란다.
*우리의 지도자들에게서 다윗과 같은 백성을 위하는 참 마음이 있기나 할까? 지금 우리의 문제는 지도자들에게 대한 이 신뢰가 무너졌다는 것에 있다. 정치 뿐일까? 교회 지도자들에게 대한 세상과 성도들의 시각은 어떨까? 자신만 생각한다는 불신과 실망이 역력하지 않는가? 참으로 서글픈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다윗의 결정과 행동에 감탄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다른 시각으로 보면 철저히 무능하다고 비판과 모함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행동이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위급하고 다급한 그 찰나의 선택과 결정을 자신을 위하여가 아닌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과 신하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신속하고 과감하게 내린다.
*나의 걸음에도 위기가 밀려와 찰나의 순간에 결정해야 할 때, 상황에 밀려서가 아니라,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하기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안전과 생명을 존중하는 결정을 내리기를 결심해 본다. 무엇보다 나의 만족을 위한 결정 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결정하기 위해 나의 명분과 체면을 기꺼이 내려 놓으리라!
*백성들이 서로 싸우게 될 현장을 지키는 왕 보다,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광야 길로 나서는 다윗의 용기를 본 받고 싶다.
*주님, 명분과 실리가 아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우선 순위었던, 다윗 왕의 결정을 본 받겠습니다.
*주님, 민심과 여론에 기대어 백성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왕권 마저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잠시 내려놓는 다윗의 선택과 결정이 신선합니다. 백성들을 이렇게 위하는 지도자를 이 시대에 볼 수 있을까요?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는 목사가 될 수 있을까요? 저부터 이런 마음을 부어 주십시오!
*주님, 어쩌면 다윗의 영성을 일깨웠을 수 있는 잇대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매일성경 묵상
백성들이 서로 싸우게 하지 않도록 선택한 광야 길…. [삼하 15:13-23]
– 2022년 10월 13일
– 2022년 10월 13일 –
압살롬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다윗은 신속하게 판단했다. “서둘러서 모두 여기에서 도망가자. 머뭇거리다가는 아무도 압살롬의 손에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어서 이 곳을 떠나가자. 그가 곧 와서 우리를 따라잡으면, 우리에게도 재앙을 입히고, 이 도성도 칼로 칠 것이다.”(새번역_14절)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의 소식을 듣고 첫번째로 반응한 첫 마디는 “일어나 도망가자(새번역_여기에서 도망가자)” 였다. 다윗은 자신의 무리들과 도성도 칼로 칠 것이 뻔하게 예상되는 압살롬의 행동에 주목했다. 불가피하게 압살롬과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면 예루살렘 성의 파괴 뿐 아니라 무고한 백성들이 희생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단 예루살렘 성에서 압살롬의 군대를 맞이하면 ‘피할 길’을 확보할 수 없었기에 압살롬이 이르기 전에 빨리 성을 벗어나고자 했다. 전장에서 뼈가 굵은 백전노장의 혜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지금 당장의 전투에서 지는 것보다 전쟁 자체를 승리하기 위한 포석일 수도 있다.”*자신에게 불리하고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백성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다윗의 판단은 신속한 도피 결정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지도자들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과연 다윗처럼 백성들의 안위, 사람의 생명에 가치를 두고 결정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이런 가치를 지닌 지도자가 다윗이었다.*또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압살롬의 군대를 정면으로 대면하기 보다 상황을 지켜보며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결정에 신속한 다윗을 보게 된다. 급하고 어려울 수록 그 일을 바라보는 시각은 좁혀 질대로 좁혀져서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 어렵다. 그런데 다윗은 이 함정에 빠지지 않고 차분하게 반역 사건을 다루고 있다. 경험 많은 통치자의 연륜이 느껴진다.그런데 한편으로 급히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후궁 열 명을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하였다. 다윗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지만, 압살롬의 반역 소식을 듣고 성을 떠나기로 결정하면서 적어도 나단 선지자가 선포했던 하나님의 저주가 생각나지 않았을까? 칼이 집안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과 자신의 처들을 백주에 범하리라(삼하 12:10-11)는 말씀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급박한 순간이었지만 아쉽고 아쉽다.다윗의 피난길은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처럼 여전히 죽기까지 충성을 다짐한 충신들이 함께 하였다. 압살롬은 “그저 따라가기만 한(11절)” 사람들이었다면, 다윗을 따르는 이들은 달랐다. 특히 다윗을 다르는 이들을 보면 “그렛 사람, 블렛 사람, 가드에서 온 모든 가드 사람 600명”(18절)이 다윗의 앞에서 행진을 하고 다윗의 뒤를 따라 ‘모든 백성과 모든 신하들'(17-18절)이 따라 나왔다.*참으로 곤란하고 참담했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을 나와 유대 광야로 가는 것만 정했지,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나왔기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런 위기 상황 속의 다윗 어떻게 이 절망을 맞이하는가?1.지극히 사람 중심,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14절)다윗은 매우 현실 적이었고 그 판단은 이제껏 보았던 그 어떤 순간의 다윗보다 더 신속했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 “생명 존중”의 마음이 있었다. 속히 피하는 이유는 압살롬의 칼날로 부터 “한 사람이라도 피하지 못할까”하는 것이었다. 또 자신이 성에 머물므로 백성들의 피해가 일어날 것을 원치 않았다. 압살롬의 칼날이 성읍을 칠까(14절) 염려하였다.어떻해서든지 백성들을 방패 막이 하여 시간을 벌려는 것 보다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이 먼저 성을 떠남으로 인명피해가 나지 않도록 결정한 것이다.2.충성스러운 신하들과 함께(15, 18-22절)압살롬의 반역 소식이 들려 오자 다윗은 신속하게 예루살렘 성을 떠나고자 했다. 그때 신하들이 함께 따라 나선다. 그러면서 “모든 일은 임금님께서 결정하신 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이 종들은 그대로 따르겠습니다.”(새번역_15절) 라고 말하며 광야로 나서는 다윗과 함께 한다.뿐만 아니라 다윗을 호위하기 위해 그의 용병들도 역시 함께 한다. 대부분 블레셋 사람들이었다. 압살롬을 따르는 이들이 “그저” 따르는 사람들이었다는 것과 분명히 비교가 된다.특히 따로 언급한 “가드 사람 잇대”의 충성심은 남다르다. 다윗의 표현으로 “이제 막 이민 왔으니 정처 없이 떠나는 자신을 따라올 필요 없다”고 할 때 잇대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이스라엘 백성다운 고백으로 충성을 서약한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시고, 임금님께서도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살든지 죽든지, 이 종도 따라가겠습니다.”(새번역_21절)놀라운 것은 도피의 여정을 떠나는 다윗에게서도 들을 수 없던 신앙고백이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시고…” 대단한 신앙고백이다. 그는 다윗의 정처 없는 피난길에 함께 나서면서 분명한 신앙고백으로 동참한다. 이제 막 용병으로 부름받아 가드에서 예루살렘으로 정착하자 마자 이 사달이 났지만, 그는 자신을 부른 다윗 왕을 저버리지 않는다. 더 나아가 다윗 왕의 하나님을 다윗 왕 보다 더 선명하게 믿음으로 고백하며 다윗을 따라 나선다.다윗은 이 상황에서 시편 3편의 믿음의 고백을 드렸다. 흥미로운 것은 사무엘서의 기록은 밧세바 사건 이후 영적으로 둔감해진 다윗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 시켰다. 13장 이후 다윗 집안의 다툼은 어쩌면 어쩡쩡한 다윗의 태도가 일조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다윗이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결정하기를 이렇게 신속하게 하고, 더구나 그렇게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오면서 시편 3편을 지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감히 상상력을 펼쳐 보자면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잇대의 이 놀라운 고백,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계시는데…”라는 이 고백이 다윗의 영성을 일깨우지 않았을까? 야성의 영성이 다시 돌아오도록 영향을 끼친 것은 잇대의 이 망설임 없는 고백이 아니었을까?*진정 놀랍지 않는가!*더 놀라운 것은 지금 도망하는 다윗을 호위하는 군사들은 유다 지파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니다. 이들은 모두 이방인들이다. 그것도 이스라엘이 원수처럼 여겼고, 다윗이 무너뜨렸던 블레셋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때 가장 적대적으로 맞섰던 이방인들이 지금은 다윗을 가장 가까이서 호위하고 있다. 수세에 몰렸고, 우군은 아무도 없는, 누구도 편들기를 거부할 때 끝까지 그의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이라니….*진정 놀랍지 않는가!*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에게 그 마음이 넘어가는 기회주의자들임에 틀림없지만, 끝까지 다윗의 곁을 충성스럽게 지킨 이들은 우직한 이방인들이었다. 그렇다 이렇듯 나는 끝까지 주님의 뜻에 충성하고 싶다. 이리 저리 기회를 찾아 헤메는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잡는 걸음이기 원한다. 끝까지 주님과 주님의 뜻을 지키는 종이 되련다.3.온 땅 사람이 울다!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다!(23절)다윗의 삶에 쫓김과 도피가 다시 시작되었다. 자신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으로 선택한 길이었다. 그런데 다윗은 이 과정에서 어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사울 왕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실망하여 왕권을 옮기시겠다거나, 다윗의 통치에 제동을 거시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도 다윗은 도피의 길을 망설임 없이 선택하였다.압살롬의 반란이 하나님의 뜻과 전혀 무관한 것임을 분명히 알았지만, 예루살렘 성을 사수 하기 위하여 신하들의 생명을 담보하지 않는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신하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왕으로서의 자존심,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무엇보다 모든 신하들과 가족들을 먼저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가게 하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기드론 시내를 건넜다고 기록한다(23절). 이 때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었다. *압살롬에게 이스라엘 민심이 돌아섰다고 했지만, 여전히 다윗을 위해 우는 백성들도 있었다.심지어 도피하는 왕을 따라 사나 죽으나 어디든지 가겠다고 맹세하는 이들은 심지어 이방인들이었다. 압살롬이 민심을 등에 업고 반역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다윗을 따르는 백성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도피를 결정하다니… 그것은 순전히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과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다. 이런 다윗의 마음을 알았을까? 아니면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다시 광야 길로 향하는 무너진 마음이었을까?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었다.나는?-압살롬의 반란에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물론 나단 선지자를 통해 선언된 저주가 있지만, 구태여 압살롬이 스스로 그 칼이 될 필요는 없었다. 즉, 이 반란은 압살롬의 권력에 대한 야망이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다. 압살롬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일어서면서 “반역에 동참하는 백성들이 많아 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고 있다고 여기는 증거로 믿었을 것이다.-그런데 다윗에게도 역시 그와 함께 하기 위해 기꺼이 광야로 함께 나가는 백성들이 있었고, 성을 떠나는 다윗을 위해 큰 소리로 울어줄 백성들도 있었다. 단지 “민심, 여론”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준이어서는 안 된다.-아직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압살롬은 자신들에게 모여드는 많은 백성들을 의지하였고, 다윗은 백성들의 생명과 예루살렘 성의 안전을 위해 자신이 먼저 예루살렘 성을 비워주는 결정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는 것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되지 못했다. 또 다윗을 끝까지 따르겠다는 백성들과 신하는 압살롬에게 넘어간 백성들의 민심이 그들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민심, 여론이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이런 불분명한 때에도 다윗은 적어도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을 따라 결정한다. 백성들의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결정이다.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의 생명만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들, 즉 압살롬을 따르는 백성들의 생명도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 예루살렘 성을 수성 하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발생하게 될 무수한 생명들의 희생을 먼저 고려한 것이다.*자신을 위해 이익이 위는 것과 명분을 지키는 것보다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먼저였다. 다윗, 그는 참으로 왕 답다!*이런 다윗에게 가드 사람 잇대와 같은 이들의 충성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 아닐까!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결정에 자신의 권위와 체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신속함을 보고 그의 모든 신하들이 당연히 잇대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큰 소리로 울며 광야 길로 함께 향할 결심을 한 것은 다윗의 이런 마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닐까….*한편 나도 언제나 잇대처럼 담대한 신앙고백과 행동의 사람이기를 바래 본다. 누구라도 할 것 없이 큰 소리로 통곡하고 슬퍼하는 그 현장에서 자신이 다윗과 함께 광야로 나서는 것은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계시고, 그 주님이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을 믿기에 광야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라면 개의치 않는다는 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하나님 없는 도시 예루살렘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황량한 광야에 생명과 구원이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삶이기를 바란다.*우리의 지도자들에게서 다윗과 같은 백성을 위하는 참 마음이 있기나 할까? 지금 우리의 문제는 지도자들에게 대한 이 신뢰가 무너졌다는 것에 있다. 정치 뿐일까? 교회 지도자들에게 대한 세상과 성도들의 시각은 어떨까? 자신만 생각한다는 불신과 실망이 역력하지 않는가? 참으로 서글픈 현실이다.*이와 같은 현실에서 다윗의 결정과 행동에 감탄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다른 시각으로 보면 철저히 무능하다고 비판과 모함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행동이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위급하고 다급한 그 찰나의 선택과 결정을 자신을 위하여가 아닌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과 신하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신속하고 과감하게 내린다.*나의 걸음에도 위기가 밀려와 찰나의 순간에 결정해야 할 때, 상황에 밀려서가 아니라,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하기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안전과 생명을 존중하는 결정을 내리기를 결심해 본다. 무엇보다 나의 만족을 위한 결정 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결정하기 위해 나의 명분과 체면을 기꺼이 내려 놓으리라!*백성들이 서로 싸우게 될 현장을 지키는 왕 보다,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광야 길로 나서는 다윗의 용기를 본 받고 싶다.
+ 기도제목
* 주님, 명분과 실리가 아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우선 순위었던, 다윗 왕의 결정을 본 받겠습니다.
* 주님, 민심과 여론에 기대어 백성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왕권 마저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잠시 내려놓는 다윗의 선택과 결정이 신선합니다. 백성들을 이렇게 위하는 지도자를 이 시대에 볼 수 있을까요?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는 목사가 될 수 있을까요? 저부터 이런 마음을 부어 주십시오!
* 주님, 어쩌면 다윗의 영성을 일깨웠을 수 있는 잇대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주님, 민심과 여론에 기대어 백성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왕권 마저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잠시 내려놓는 다윗의 선택과 결정이 신선합니다. 백성들을 이렇게 위하는 지도자를 이 시대에 볼 수 있을까요?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는 목사가 될 수 있을까요? 저부터 이런 마음을 부어 주십시오!
* 주님, 어쩌면 다윗의 영성을 일깨웠을 수 있는 잇대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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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03일
오직 주 안에서 십자가만 자랑하라
[고전 1:18-31 ]
분쟁의 원인은 전달받은 말씀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전달자를 따라 자신의 환경과 수준(?)에 따라 헤쳐 모인 결과였다. 그런데 이런 결과를 낳은 근본적인 것이 있었다. 말씀을 전하는 순회전도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복음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이해 기준으로만 보려고 한 결과였다. 이런 것은 전달자별로 헤쳐 모인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공동체내의 분열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분열, 주님과의 분열, 복음과의 분열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럴수 있다. 복음을 그 자체로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고, 시대정신으로 바라보거나, 대대로 이어온 고상하다고 여기는 지혜로운 철학으로 바라본다거나, 당시 사람들이 따르는 현자들의 눈으로 바라보거나…. 전해받은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익숙한 온갖 것으로 들여다보는 복음은 “각기 달리 보이고, 한없이 엉터리로 보이며, 도무지 말도 되지 않게” 보일 것이다. 세상의 수준보다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대로 붙잡을 이유가 하등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오직 복음”만 전했다. 그들이 원하는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시고 가르쳐 주신 그대로 그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오직 복음”만 전했다. 이렇게 전한 “오직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 오늘 나와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1. 미련하게(어리석게) 보였다(18절)
왜 미련하게 보였을까? 먼저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새번역_19절)” 이사야 29″14에서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구원은 세상의 지혜로 찾을 수도 볼 수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드러내 보여” 주셔야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
그런데 드러내 보여주신 “오직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린도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하게(어리석게)” 보였다. 왜 그랬을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새번역_22절)” 당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들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즉, 사람들이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찾지도 않았다. 더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당시 세계에서 철저히 저주였고, 어리석은 자, 죄악스러운 자의 최후로 여겨졌기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무모하고 또 무모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먼저 드러내셔서 오직 복음, 예수님의 십자가만 전달하게 하셨다. 그것도 그들이 듣기에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말이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증언한다.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그,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새번역_21절).” 사람들이 듣고 싶고 찾고 싶으며, 찾는 이 세상의 지혜로 예수님을 드러내시지 않으셨다. 현란한 수사법으로 사람들에게 듣는 즐거움으로 복음을 포장하지도 않으셨다.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 없도록 하나님의 지혜가 일하셨다.’
교회내에서 파당이 만들어지는 것이 순회전도자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방식, 말의 지혜, 화려하고 설득력있는 말”등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루어진듯한 모습이다. 즉, 내게 익숙하고, 듣기에 편하고, 듣고 있는 마음에 만족함의 따라 “말씀”에 반응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점차 말씀 그 자체에 집중하기 보다 말씀을 포장하여 내어 놓는 포장지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결국 “하나님과 관계에도 보이지 않는 분열”이 온 것이다. 모든 상황에 세상의 원리와 행동양식을 접목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온전하게 하나 될 수 있는 공동체가 각각의 상황과 여건, 신분출신, 삶의 양식과 이해 수준에 따라 ‘헤쳐모여’가 된 것이다.
예수님의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적인 사교모임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상태가 이렇게 되고 보면 자신의 이해 수준으로 보는 “오직 복음”이 복음과 함께 이것, 저것이 되기 시작할테고, 오직 복음을 고수하는 것이 어리석게 보일 수 밖에 없을테다. 시대의 흐름을 맞추지 못하는 답답한 것으로 보였을테다.
지금 한국교회와 온 열방에서 드러나는 반기독교 정서가 이와 같다. 할수만 있으면 균형잡힌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들이 보고싶은대로, 말하고 싶은대로 행한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교회는 어리석기 짝이 없고, 피해 유발자들의 모임일 뿐이다. 세상은 교회를 그렇게 바라보게 되어 있다. 한없이 어리석고 어리석은, 이리 미련할 수가 있을까 라는 식의 한탄으로 쳐다볼 것이다.
2.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능력과 지혜였다(24절)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새번역_24절).”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아! 기가 막히다! 서신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자신도,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도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고 했다. “오직 복음”으로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 지혜다! 라고 외친다. 자기가 듣고 보고싶은 것만 찾는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리석기 짝이 없게 보일지 모르지만,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 누가 되었든지, 유대인, 헬라인이나 상관 없이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능력”이다!
어떻게 능력이 될 수 있나?(27-28절) 하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세상의 지혜, 강함,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하고 폐하려 하셨다. 즉,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미련한 것, 약한 것, 천한 것, 멸시 받는 것들이 세상의 강한 것,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 것이다. “택하신 것”만으로도 하나님은 충분히 이렇게 하실 수 있다.
왜 이렇게 하시는가?(29절)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_29절)” 인간이 그토록 자랑하는 것들로 하나님의 복음이 드러나면 복음이 자랑이 아니라 복음을 드러낸 자신들의 지식과 지혜, 환경과 여건이 자랑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너무도 잘 아셨다.
3. 그 능력과 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30-31절)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_30-31절).”
어리석은 설교를 통해 믿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되신 예수를 바라보게 되었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다!. 이 또한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사랑하라”는 예레미야 9:23-24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 예수는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30절)이 되셨다.
바울은 분쟁하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고린도교회는 전달자들의 지혜와 성향, 출신과 상황에 따라 헤쳐 모였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 받은 성도는 “세상의 방식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예수를 통해 구원을 받았으니.. 세상 방식에 따른 경쟁과 분쟁을 멈추고 오직 주님께만 집중해야 하라는 것이다.
인간적인 경쟁의 원인인 세상 지혜와 지식의 추구를 멈추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하라. 가장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그 구원의 능력으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세상 지혜와 지식으로 분쟁하는 것이 웬 말인가!
분쟁은 사람을 보게한다. 자신이 따르는, 혹은 따르고자 하는 사람만 보는 것이다. 교회 분쟁이 이와 같지 않은가? 분쟁은 사람을 보고 사람을 따르기에 나타난다. 이를 해결하는 것은 “우리를 부르신 구원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십자가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고, 세상의 모든 지혜와 총명을 폐하는 하나님의 지혜다. 하나님, 메시아, 구원자가 죽다니… 그러고도 구원할 수 있다니…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이다. 자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는 오만한 이 세상은 도저히 자기 지혜로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 역사를 알 수도 없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하지만 부르심을 입은 자는 알 수 있기에, 하나님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아주 미련한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삼게 하신다.
-십자가는 세상의 능력을 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메시아에게서 출애굽을 능가할 행동을 기대했던 유대인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저주를 당한 패배자였고(신 21:23) 걸림돌이었으며, 지혜를 추구하던 헬라인에게도 미련하고 무모한 사람에 불과했다.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지혜에 철저히 절망한 자에게만 그것이 초월자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요 지혜가 된다. 끊임없이 네가 사랑받을 힘과 자원이 있고 절대 무시당해서는 안 될 만큼 강한 자임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의지하고 십자가의 원리로 살아서 하나님의 능력과 승리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힘으로 충분히 구원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들보다는 약하고 미련하고 천대 받던 이들을 당신의 자녀로 부르셨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취급받던 이들은 곤귀한 자로 창조하셨고, 자기 힘으로 존재했고 또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이들은 없는 것같이 만드셨다. 그러니 구원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는 있어도 자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세상이 약하고 미련하다고 천대하던 자들을 존귀한 자녀로 부르셔서 인간의 모든 자랑을 부끄럽게 하신다(26~29절). ‘조건 없는’ 부르심을 통해 이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학벌, 재력, 문벌 등)을 전복하신다. 강함을 추구하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십자가라는 약함의 역설을 통해 죄인을 구원하시고 영광을 드러내신다. 이 같은 하나님의 방식을 수용하고 따르는 것이 믿음이요 성도의 삶이다. 그러니 은혜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의 그 어떤 자격과 자랑도 가당치 않다. 우리가 부르심의 은혜를 기억할 때 공동체 안에 질시와 경쟁은 사라지고 감사와 평화가 깃들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은 우리를 지혜롭고 의롭고 거룩하게 구속하시는 구원이다(30~31절). 내 자랑이 바뀌고 내 주인이 바뀌고 내가 변하고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변하는 구원이다.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을 때 이 관계는 더 깊고 풍성해질 것이다.
-사람을 보지 말아야지… 내 안에도 사람을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는데,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분열이 시작된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따라 분쟁하는 열매로 나타난다. 내가 지혜롭게 보는 세상의 지혜가 분쟁을 만든다. 그리스도인은 지혜를 주신 하나님의 복음,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산다. 그래서 교회는 전달자에 집중하지 말아야 하고 내가 익숙하고 바라는 세상의 지혜나 방법이 하나님이 주신 “오직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넘어서지 않도록 분별해야 한다.
-이를 분별하고 경계하여야 분쟁이 예방된다. 분쟁은 분별하지 못해 나타나는 열매 인데,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분별하지 못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분별은 믿음이다. 나를 믿게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이다. 하나님께서 나타내 보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고, 세상의 지혜와 맞서 결코 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실제적인 삶이며, 이를 유지해 나가는 인내라는 거다.
*오늘도 이렇게 살아 보련다! 오직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이 세상의 지혜를 바꾸지 않으리라!
나도 그럴수 있다. 복음을 그 자체로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고, 시대정신으로 바라보거나, 대대로 이어온 고상하다고 여기는 지혜로운 철학으로 바라본다거나, 당시 사람들이 따르는 현자들의 눈으로 바라보거나…. 전해받은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익숙한 온갖 것으로 들여다보는 복음은 “각기 달리 보이고, 한없이 엉터리로 보이며, 도무지 말도 되지 않게” 보일 것이다. 세상의 수준보다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대로 붙잡을 이유가 하등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오직 복음”만 전했다. 그들이 원하는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시고 가르쳐 주신 그대로 그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오직 복음”만 전했다. 이렇게 전한 “오직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 오늘 나와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1. 미련하게(어리석게) 보였다(18절)
왜 미련하게 보였을까? 먼저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새번역_19절)” 이사야 29″14에서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구원은 세상의 지혜로 찾을 수도 볼 수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드러내 보여” 주셔야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
그런데 드러내 보여주신 “오직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린도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하게(어리석게)” 보였다. 왜 그랬을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새번역_22절)” 당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들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즉, 사람들이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찾지도 않았다. 더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당시 세계에서 철저히 저주였고, 어리석은 자, 죄악스러운 자의 최후로 여겨졌기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무모하고 또 무모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먼저 드러내셔서 오직 복음, 예수님의 십자가만 전달하게 하셨다. 그것도 그들이 듣기에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말이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증언한다.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그,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새번역_21절).” 사람들이 듣고 싶고 찾고 싶으며, 찾는 이 세상의 지혜로 예수님을 드러내시지 않으셨다. 현란한 수사법으로 사람들에게 듣는 즐거움으로 복음을 포장하지도 않으셨다.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 없도록 하나님의 지혜가 일하셨다.’
교회내에서 파당이 만들어지는 것이 순회전도자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방식, 말의 지혜, 화려하고 설득력있는 말”등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루어진듯한 모습이다. 즉, 내게 익숙하고, 듣기에 편하고, 듣고 있는 마음에 만족함의 따라 “말씀”에 반응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점차 말씀 그 자체에 집중하기 보다 말씀을 포장하여 내어 놓는 포장지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결국 “하나님과 관계에도 보이지 않는 분열”이 온 것이다. 모든 상황에 세상의 원리와 행동양식을 접목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온전하게 하나 될 수 있는 공동체가 각각의 상황과 여건, 신분출신, 삶의 양식과 이해 수준에 따라 ‘헤쳐모여’가 된 것이다.
예수님의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적인 사교모임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상태가 이렇게 되고 보면 자신의 이해 수준으로 보는 “오직 복음”이 복음과 함께 이것, 저것이 되기 시작할테고, 오직 복음을 고수하는 것이 어리석게 보일 수 밖에 없을테다. 시대의 흐름을 맞추지 못하는 답답한 것으로 보였을테다.
지금 한국교회와 온 열방에서 드러나는 반기독교 정서가 이와 같다. 할수만 있으면 균형잡힌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들이 보고싶은대로, 말하고 싶은대로 행한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교회는 어리석기 짝이 없고, 피해 유발자들의 모임일 뿐이다. 세상은 교회를 그렇게 바라보게 되어 있다. 한없이 어리석고 어리석은, 이리 미련할 수가 있을까 라는 식의 한탄으로 쳐다볼 것이다.
2.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능력과 지혜였다(24절)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새번역_24절).”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아! 기가 막히다! 서신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자신도,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도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고 했다. “오직 복음”으로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 지혜다! 라고 외친다. 자기가 듣고 보고싶은 것만 찾는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리석기 짝이 없게 보일지 모르지만,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 누가 되었든지, 유대인, 헬라인이나 상관 없이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능력”이다!
어떻게 능력이 될 수 있나?(27-28절) 하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세상의 지혜, 강함,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하고 폐하려 하셨다. 즉,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미련한 것, 약한 것, 천한 것, 멸시 받는 것들이 세상의 강한 것,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 것이다. “택하신 것”만으로도 하나님은 충분히 이렇게 하실 수 있다.
왜 이렇게 하시는가?(29절)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_29절)” 인간이 그토록 자랑하는 것들로 하나님의 복음이 드러나면 복음이 자랑이 아니라 복음을 드러낸 자신들의 지식과 지혜, 환경과 여건이 자랑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너무도 잘 아셨다.
3. 그 능력과 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30-31절)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_30-31절).”
어리석은 설교를 통해 믿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되신 예수를 바라보게 되었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다!. 이 또한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사랑하라”는 예레미야 9:23-24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 예수는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30절)이 되셨다.
바울은 분쟁하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고린도교회는 전달자들의 지혜와 성향, 출신과 상황에 따라 헤쳐 모였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 받은 성도는 “세상의 방식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예수를 통해 구원을 받았으니.. 세상 방식에 따른 경쟁과 분쟁을 멈추고 오직 주님께만 집중해야 하라는 것이다.
인간적인 경쟁의 원인인 세상 지혜와 지식의 추구를 멈추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하라. 가장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그 구원의 능력으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세상 지혜와 지식으로 분쟁하는 것이 웬 말인가!
분쟁은 사람을 보게한다. 자신이 따르는, 혹은 따르고자 하는 사람만 보는 것이다. 교회 분쟁이 이와 같지 않은가? 분쟁은 사람을 보고 사람을 따르기에 나타난다. 이를 해결하는 것은 “우리를 부르신 구원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십자가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고, 세상의 모든 지혜와 총명을 폐하는 하나님의 지혜다. 하나님, 메시아, 구원자가 죽다니… 그러고도 구원할 수 있다니…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이다. 자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는 오만한 이 세상은 도저히 자기 지혜로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 역사를 알 수도 없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하지만 부르심을 입은 자는 알 수 있기에, 하나님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아주 미련한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삼게 하신다.
-십자가는 세상의 능력을 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메시아에게서 출애굽을 능가할 행동을 기대했던 유대인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저주를 당한 패배자였고(신 21:23) 걸림돌이었으며, 지혜를 추구하던 헬라인에게도 미련하고 무모한 사람에 불과했다.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지혜에 철저히 절망한 자에게만 그것이 초월자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요 지혜가 된다. 끊임없이 네가 사랑받을 힘과 자원이 있고 절대 무시당해서는 안 될 만큼 강한 자임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의지하고 십자가의 원리로 살아서 하나님의 능력과 승리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힘으로 충분히 구원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들보다는 약하고 미련하고 천대 받던 이들을 당신의 자녀로 부르셨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취급받던 이들은 곤귀한 자로 창조하셨고, 자기 힘으로 존재했고 또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이들은 없는 것같이 만드셨다. 그러니 구원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는 있어도 자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세상이 약하고 미련하다고 천대하던 자들을 존귀한 자녀로 부르셔서 인간의 모든 자랑을 부끄럽게 하신다(26~29절). ‘조건 없는’ 부르심을 통해 이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학벌, 재력, 문벌 등)을 전복하신다. 강함을 추구하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십자가라는 약함의 역설을 통해 죄인을 구원하시고 영광을 드러내신다. 이 같은 하나님의 방식을 수용하고 따르는 것이 믿음이요 성도의 삶이다. 그러니 은혜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의 그 어떤 자격과 자랑도 가당치 않다. 우리가 부르심의 은혜를 기억할 때 공동체 안에 질시와 경쟁은 사라지고 감사와 평화가 깃들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은 우리를 지혜롭고 의롭고 거룩하게 구속하시는 구원이다(30~31절). 내 자랑이 바뀌고 내 주인이 바뀌고 내가 변하고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변하는 구원이다.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을 때 이 관계는 더 깊고 풍성해질 것이다.
-사람을 보지 말아야지… 내 안에도 사람을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는데,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분열이 시작된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따라 분쟁하는 열매로 나타난다. 내가 지혜롭게 보는 세상의 지혜가 분쟁을 만든다. 그리스도인은 지혜를 주신 하나님의 복음,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산다. 그래서 교회는 전달자에 집중하지 말아야 하고 내가 익숙하고 바라는 세상의 지혜나 방법이 하나님이 주신 “오직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넘어서지 않도록 분별해야 한다.
-이를 분별하고 경계하여야 분쟁이 예방된다. 분쟁은 분별하지 못해 나타나는 열매 인데,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분별하지 못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분별은 믿음이다. 나를 믿게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이다. 하나님께서 나타내 보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고, 세상의 지혜와 맞서 결코 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실제적인 삶이며, 이를 유지해 나가는 인내라는 거다.
*오늘도 이렇게 살아 보련다! 오직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이 세상의 지혜를 바꾸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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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02일
십자가의 복음으로 같은 말, 마음, 뜻을!
[고전 1:10-17 ]
하나님께서 은혜로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시는 교회에 문제가 있다.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알려준(11절) “분쟁”이라는 문제였다. 바울이 “분쟁”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살펴보면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는 분쟁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1. 분쟁의 원인(12절)
‘나는”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베드로)에게, ‘그리스도에게’….”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자기 사람들을 만들지 않았다. 즉, ‘나는’ 누구에게 속했다(편이다)라고 규정하는 것은 전하는 자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시작하여 일정기간 담당한 후 순회전도자들에 의해 말씀이 가르쳐지고 세례가 베풀어지는 형국이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가정교회” 형식의 소규모 모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처음 1년 6개월을 사역한 이후 아볼로가 뒤를 이어 고린도 교회에 말씀을 가르쳤고(행 18:24~19:1), 게바(베드로)도 아내와 함께 고린도를 방문해 말씀을 가르쳤다(9:5).
문제는 고린도 교회가 순회전도자들이 전하는 “말씀보다 그들의 사역태도(색깔)나 출신배경” 등에 따라 각각 이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임들이 생겼고, 이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계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즉, 각자가 선호하는 성향이나 선호도 등에 따라 “~에 속한 자(~를 따르는)”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안디옥 지역에서 얻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울을, 아볼로를, 게바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들이 전한 말씀을 따라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선호하는 것에 따라 이리 된 듯하다. 실제로 당시 순회전도자들은 각자가 말씀을 가르칠 때 분명한 특징이나 은사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바울은 키가 작고 말이 어눌하나 글쓰기에는 능했다. 예수님처럼 말씀을 전할 때 여러 능력도 나타났었다. 아볼로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참고하면 “말을 잘했다”. 수사적 능력이 뛰어났다. 당시 사람들이 즐기는 고급스러운 수사적 연설을 잘했다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기막힌 설교가였다. 게바는 ‘사도’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했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런 배경에 따라 자신들이 선호하는 성향대로 모임들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이런 개인적인 성향으로 모인 이들이 “경쟁”관계가 되었고 “분열”이라는 열매가 맺혀진 것이다. 당시 교회의 구성원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출신이 다양했다. 또 특정 가정을 중심으로 소규모로 모이기에 서로를 너무 잘 알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전해들은 말씀의 은혜가 이들의 복잡한 출신이나 성향을 능히 하나로 묶을 수 있음에도 그들이 선택한 것은 말씀의 가르침이 아니라 개인의 선호도였다. 안타깝게도 전해듣는 말씀이 아니라 전하는 자에게 더 호감을 갖고 “헤쳐” 모인 것이다.
2. 해결 권면(10, 17절)
13-16절은 17절을 강조하기 위해 설명하였다. 주님은 결코 교회가 나뉘어지는 것이 진리라고 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라고 하지 않으셨다. 인간적인 성향이나 출신이나 선호도로 헤쳐 모이라고도 하지 않으셨다.
특히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세례를 베푼 집례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한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순회 전도자들은 전달자일 뿐인데, 고린도 교회에 어느 순간 십자가의 복음이 아닌 바울의 복음, 아볼로의 복음, 게바의 복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전달자가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그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전달자를 바라보지 말고 그들이 전한 “오직 복음”을 바라보아야 한다. 어떤 전달자를 통해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해 들었기에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례를 누구에게 받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해 듣고 변화된 삶이 중요한 것이다. “세례 받음”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분명하게 선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_17절).”
순회전도자들은 “복음”을 전하라고 보냄을 받은 것이고, 그 복음을 듣고 확신하여 세례를 받았으니, 누가 전한 복음이 중요하거나 누구에게 세례를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은혜로 전해들은 “복음”이었기에 구원받음과 세례받음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달자별로 “헤쳐모여”는 말도 안된다!
바울이 전한 해결 권면은 “전달자 대로 헤쳐 모이지 말고, 복음 앞에 하나로 모이라!”는 거다. 바울은 분쟁의 내용을 먼저 이야기 하지 않고 해결방안을 먼저 던졌다.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도록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십시오(새번역_10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생각’으로 ‘온전히 합하라(뭉쳐라)고 방안을 제시했다. 바울의 말, 아볼로의 마음, 게바 생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 복음의 마음, 복음의 생각으로 똘똘 뭉치라는 것이다.
시대 흐름을 따라 마음에 착~ 감기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현란한 말이나, 시대 정신을 대변하는 듯 마음에 불을 지르는 감동적인 정신(마음)이나, 시대 상황을 선도하는 아이디어(생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말, 마음, 생각을 따라 온전하게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하는 전달자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복음 되시는 주님 안에 속한 자이다.
나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가 분쟁이다. 교회 바깥과의 갈등이 아니라 교회 안의 갈등이었다. 바울은 같은 말과 마음과 뜻을 품으라고 촉구한다. 획일성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뜻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향하게 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고린도 성도들은 교회를 개척한 바울, 교회를 양육해준 아볼로, 사도의 대표인 베드로를 각각 선호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인간 지도자 중심으로 배타적인 장벽을 쳤다. 이도 저도 아닌 자들은 ‘그리스도파’를 자처하였지만, 그들 역시 배타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분열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을 주목할 때 생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례를 받아서, 이젠 사탄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종들이다. 인간 지도자를 추종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자들이다. 바울은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부터 책망한다. 그의 관심은 자기 제자 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제자 만들기였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초대교회 때나, 오늘날이나 대동소이하다. 교회는 사람의 것이 아니기에, 자신이 따르고 의지하는 자도자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다. 교회가 어떤 특정 인물의 이름이 부각되고 강조될 때, 오늘날의 고린도교회 짝이 날 것은 분명하다.
*교회 분쟁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4장 21절까지 계속 된다. 그런데 가장 먼저 다룬 이 문제가 가장 많은 양을 할애했다. 그만큼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복음보다 전달자를 추종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어야 할 공동체가 분열했고, 더 나아가 분쟁까지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분립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선호도에 따라 확고한 경계가 생겼고, 이것이 복음진리보다 더 추종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고린도교회의 문제만일까? 아쉽게도 오늘날 교회도 이 문제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다. 선호하는 설교자나 자신이 따르는 가치나 성향에 따라 설교를 골라듣고, 이렇게 들은 것이라며 상충되는 견해가 행여나 마찰을 빚게될 때 발생하는 곤란함을 심심치 않게 보고 있지 않는가?
*자기들이 아는 전달자의 전달 능력이 말씀을 가리운 꼴이 되었다. 바울은 세례를 베풀기 위해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말의 지혜”를 빌리지 않았다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곧이 곧대로 전했다고 고백한다(17절)
*묵상을 하며 말씀을 온전히 드러내는 전달자만 되기를 간절히 구했다. 전달자가 말씀을 가리지 않게 되기를 구하고 또 구했다. 나는 전달자로 “말씀”을 확연하게 전달하라고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전달자가 전해준 말씀만 보면 된다. 그 말씀만 붙잡고 설 때 산다!
*그 말씀은 “오직 복음”이었다. 말씀이라는 포장지에 교묘히 감춰진 철학이나 감동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히 전달하고 가르치는 성실한 교사이어야 하리라!
*분쟁의 원인이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전해 들은 말씀보다 더 크고 강한 것임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말씀을 들을 때 나의 기호, 성향, 철학, 사조, 유행하는 분위기 등에 천착해서 받는다면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를 전하는 전달자가 내가 원하는 이런 성향들에 완벽히 들어 맞는다면?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전달자를 받아 들이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욱 경계하고 경계해야 한다. 어떤 전달자를 통해서 말씀을 주시든 전달자의 외모와 상황, 출신배경 등에 의해 말씀을 가려서 받지 않도록 분별하고 또 분별해야 할 것이다.
*분쟁의 원인은 결국 나에게 있다. 지독한 자기중심성이다. 나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추구하는 성향, 기호… 이런 것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해주셨기에, 어떤 전달자를 통해 듣는 진리이든지 그 진리가 나를 움직이도록 섬세한 분별력을 구해야 하겠다. 나의 인간적인 감정이 말씀(진리)를 구별하지 않도록 말이다.
*”분쟁”이라는 단어가 오늘 특히 무겁게 다가온다. 내가 사랑하는 더온누리교회 안에 이런 문제로 인해 “말씀”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구한다.
*”말씀”이 보이면 이로 인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을 수 있다. “오직 하나님 나라 복음”이 그것이다.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가르쳐주셨던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된다. 교회는 이런 곳이어야 한다. 나도 이런 교회를 꿈꾸어야겠다.
1. 분쟁의 원인(12절)
‘나는”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베드로)에게, ‘그리스도에게’….”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자기 사람들을 만들지 않았다. 즉, ‘나는’ 누구에게 속했다(편이다)라고 규정하는 것은 전하는 자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시작하여 일정기간 담당한 후 순회전도자들에 의해 말씀이 가르쳐지고 세례가 베풀어지는 형국이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가정교회” 형식의 소규모 모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처음 1년 6개월을 사역한 이후 아볼로가 뒤를 이어 고린도 교회에 말씀을 가르쳤고(행 18:24~19:1), 게바(베드로)도 아내와 함께 고린도를 방문해 말씀을 가르쳤다(9:5).
문제는 고린도 교회가 순회전도자들이 전하는 “말씀보다 그들의 사역태도(색깔)나 출신배경” 등에 따라 각각 이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임들이 생겼고, 이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계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즉, 각자가 선호하는 성향이나 선호도 등에 따라 “~에 속한 자(~를 따르는)”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안디옥 지역에서 얻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울을, 아볼로를, 게바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들이 전한 말씀을 따라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선호하는 것에 따라 이리 된 듯하다. 실제로 당시 순회전도자들은 각자가 말씀을 가르칠 때 분명한 특징이나 은사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바울은 키가 작고 말이 어눌하나 글쓰기에는 능했다. 예수님처럼 말씀을 전할 때 여러 능력도 나타났었다. 아볼로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참고하면 “말을 잘했다”. 수사적 능력이 뛰어났다. 당시 사람들이 즐기는 고급스러운 수사적 연설을 잘했다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기막힌 설교가였다. 게바는 ‘사도’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했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런 배경에 따라 자신들이 선호하는 성향대로 모임들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이런 개인적인 성향으로 모인 이들이 “경쟁”관계가 되었고 “분열”이라는 열매가 맺혀진 것이다. 당시 교회의 구성원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출신이 다양했다. 또 특정 가정을 중심으로 소규모로 모이기에 서로를 너무 잘 알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전해들은 말씀의 은혜가 이들의 복잡한 출신이나 성향을 능히 하나로 묶을 수 있음에도 그들이 선택한 것은 말씀의 가르침이 아니라 개인의 선호도였다. 안타깝게도 전해듣는 말씀이 아니라 전하는 자에게 더 호감을 갖고 “헤쳐” 모인 것이다.
2. 해결 권면(10, 17절)
13-16절은 17절을 강조하기 위해 설명하였다. 주님은 결코 교회가 나뉘어지는 것이 진리라고 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라고 하지 않으셨다. 인간적인 성향이나 출신이나 선호도로 헤쳐 모이라고도 하지 않으셨다.
특히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세례를 베푼 집례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한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순회 전도자들은 전달자일 뿐인데, 고린도 교회에 어느 순간 십자가의 복음이 아닌 바울의 복음, 아볼로의 복음, 게바의 복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전달자가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그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전달자를 바라보지 말고 그들이 전한 “오직 복음”을 바라보아야 한다. 어떤 전달자를 통해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해 들었기에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례를 누구에게 받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해 듣고 변화된 삶이 중요한 것이다. “세례 받음”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분명하게 선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_17절).”
순회전도자들은 “복음”을 전하라고 보냄을 받은 것이고, 그 복음을 듣고 확신하여 세례를 받았으니, 누가 전한 복음이 중요하거나 누구에게 세례를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은혜로 전해들은 “복음”이었기에 구원받음과 세례받음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달자별로 “헤쳐모여”는 말도 안된다!
바울이 전한 해결 권면은 “전달자 대로 헤쳐 모이지 말고, 복음 앞에 하나로 모이라!”는 거다. 바울은 분쟁의 내용을 먼저 이야기 하지 않고 해결방안을 먼저 던졌다.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도록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십시오(새번역_10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생각’으로 ‘온전히 합하라(뭉쳐라)고 방안을 제시했다. 바울의 말, 아볼로의 마음, 게바 생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 복음의 마음, 복음의 생각으로 똘똘 뭉치라는 것이다.
시대 흐름을 따라 마음에 착~ 감기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현란한 말이나, 시대 정신을 대변하는 듯 마음에 불을 지르는 감동적인 정신(마음)이나, 시대 상황을 선도하는 아이디어(생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말, 마음, 생각을 따라 온전하게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하는 전달자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복음 되시는 주님 안에 속한 자이다.
나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가 분쟁이다. 교회 바깥과의 갈등이 아니라 교회 안의 갈등이었다. 바울은 같은 말과 마음과 뜻을 품으라고 촉구한다. 획일성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뜻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향하게 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고린도 성도들은 교회를 개척한 바울, 교회를 양육해준 아볼로, 사도의 대표인 베드로를 각각 선호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인간 지도자 중심으로 배타적인 장벽을 쳤다. 이도 저도 아닌 자들은 ‘그리스도파’를 자처하였지만, 그들 역시 배타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분열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을 주목할 때 생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례를 받아서, 이젠 사탄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종들이다. 인간 지도자를 추종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자들이다. 바울은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부터 책망한다. 그의 관심은 자기 제자 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제자 만들기였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초대교회 때나, 오늘날이나 대동소이하다. 교회는 사람의 것이 아니기에, 자신이 따르고 의지하는 자도자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다. 교회가 어떤 특정 인물의 이름이 부각되고 강조될 때, 오늘날의 고린도교회 짝이 날 것은 분명하다.
*교회 분쟁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4장 21절까지 계속 된다. 그런데 가장 먼저 다룬 이 문제가 가장 많은 양을 할애했다. 그만큼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복음보다 전달자를 추종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어야 할 공동체가 분열했고, 더 나아가 분쟁까지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분립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선호도에 따라 확고한 경계가 생겼고, 이것이 복음진리보다 더 추종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고린도교회의 문제만일까? 아쉽게도 오늘날 교회도 이 문제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다. 선호하는 설교자나 자신이 따르는 가치나 성향에 따라 설교를 골라듣고, 이렇게 들은 것이라며 상충되는 견해가 행여나 마찰을 빚게될 때 발생하는 곤란함을 심심치 않게 보고 있지 않는가?
*자기들이 아는 전달자의 전달 능력이 말씀을 가리운 꼴이 되었다. 바울은 세례를 베풀기 위해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말의 지혜”를 빌리지 않았다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곧이 곧대로 전했다고 고백한다(17절)
*묵상을 하며 말씀을 온전히 드러내는 전달자만 되기를 간절히 구했다. 전달자가 말씀을 가리지 않게 되기를 구하고 또 구했다. 나는 전달자로 “말씀”을 확연하게 전달하라고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전달자가 전해준 말씀만 보면 된다. 그 말씀만 붙잡고 설 때 산다!
*그 말씀은 “오직 복음”이었다. 말씀이라는 포장지에 교묘히 감춰진 철학이나 감동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히 전달하고 가르치는 성실한 교사이어야 하리라!
*분쟁의 원인이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전해 들은 말씀보다 더 크고 강한 것임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말씀을 들을 때 나의 기호, 성향, 철학, 사조, 유행하는 분위기 등에 천착해서 받는다면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를 전하는 전달자가 내가 원하는 이런 성향들에 완벽히 들어 맞는다면?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전달자를 받아 들이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욱 경계하고 경계해야 한다. 어떤 전달자를 통해서 말씀을 주시든 전달자의 외모와 상황, 출신배경 등에 의해 말씀을 가려서 받지 않도록 분별하고 또 분별해야 할 것이다.
*분쟁의 원인은 결국 나에게 있다. 지독한 자기중심성이다. 나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추구하는 성향, 기호… 이런 것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해주셨기에, 어떤 전달자를 통해 듣는 진리이든지 그 진리가 나를 움직이도록 섬세한 분별력을 구해야 하겠다. 나의 인간적인 감정이 말씀(진리)를 구별하지 않도록 말이다.
*”분쟁”이라는 단어가 오늘 특히 무겁게 다가온다. 내가 사랑하는 더온누리교회 안에 이런 문제로 인해 “말씀”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구한다.
*”말씀”이 보이면 이로 인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을 수 있다. “오직 하나님 나라 복음”이 그것이다.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가르쳐주셨던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된다. 교회는 이런 곳이어야 한다. 나도 이런 교회를 꿈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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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01일
문제보다 은혜를 먼저 바라보는 교회
[고전 1:1-9 ]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때 약 1년 반 정도 머물며 세우고 사역한 교회다. 사도행전과 본문의 내용을 참고하면 바울이 떠난 후 교회에 여러 문제들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편지를 보내 가르치려 했으나 오히려 여러 오해와 질문들이 나오게 되었고 다시 바울에게 이에 대한 답변을 요청한다. 이때 또 다른 교회 문제들이 함께 전해졌다.
교회가 문제가 발생하였고 바울은 이에 대하여 질문에 대한 답변과 문제에 대한 권면을 글로 써서 보낸다. 이것이 고린도 전서이다. 편지를 시작하면서 문제에 대한 답변을 먼저 다루지 않고 자신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고린도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그 심정을 드러낸다.
1. 부르심을 받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의 모임(1-3절)
전형적인 당시 편지 형식에 따라 서신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모인 무리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1절), 고린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변화되어)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며(2절), 이들이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다”(2절하)
교회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도자와 역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들이 각각의 처소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임이다. 즉 예수님께 부름받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되시고 바울과 성도들(우리)의 “주님”이 되신다고 고백한다. 동일한 주님에게 부름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주님 되시기에 예수의 이름을 함께, 동일하게 부른다. 이것이 곧 교회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부름을 듣는 사람이 곧 교회이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본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양과 목자의 관계를 언급하시면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자기 양들을 다 불러낸 다음에, 그는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새번역_요 10:3-4).”
주님의 음성을 듣고(부르심을 듣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로 우리는 세워졌다. 주님의 이름만 부르지 않고 주님의 음성도 듣는 교회였으면 좋겠다.
2. 받은 은혜가 있는 모임(4-7절)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교회인 것을 감사했다(4절). ”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여러분의 일로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새번역_4절).”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받은 은혜와 성도들로 인해 “언제나” 감사드린다고 고백했다.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고린도 교회는 주님께서 주신 ‘은혜’들이 분명하게 보이는 교회였다. 적어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워가는 시간 뿐 아니라 떠나온 후에도 교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은혜들로 인해 “언제나” 감사하는 바울이었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 언제나 감사의 고백이 마르지 않는 은혜의 증거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은혜는 어떤 것들이었을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면에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곧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늘었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서 이렇게도 튼튼하게 자리잡았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에도 부족한 것이 없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새번역_5-7절).
고린도교회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풍족하여 진 것인데,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는데 요긴한 은사(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도 풍족하게 나타난 것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온갖 언변(로고스/말), 온갖 지식(그노시스/사고, 판단, 의견등)이 충분히 활용되도록 성령께서 깨닫게 하고 사용 가능하도록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 함께 나타나는 치유와 같은 은혜의 증거들도 ‘부족함이 없도록’ 함께 나타났다.
복음의 지식이 넘쳐나고, 이에 따른 복음 증언이 여러 은사와 함께 나타나 강력하게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교회였다는 것이다. 적어도 바울이 교회의 문제점들을 듣고 있는 현재도 이렇게 강력한 복음의 능력이 있는 교회였다는 것이다.
3.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교회(8-9절)
특히 8절은 주님께서 재림때까지 이 교회를 끝까지 붙잡아 주시는 교회임을 선언한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가 “복음의 증언”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복음의 능력”이 함께 나타나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이어지기를 축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이 아닌 주님과 더불어 늘 교제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날에 여러분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도록, 주님께서 여러분을 끝까지 튼튼히 세워주실 것입니다(새번역_8절).” 하나님께서 불러주심으로 시작된 이 교제는 그의 신실하심으로 시작하게 하시고 재림의 그때까지 이어지게 하신다. ”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게 하여 주셨습니다(새번역_9절).
교회는 이렇게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도록 불러 주신 곳이다. 그리고 이를 신실하게 지켜 주신다.
나는?
-자격 없는 박해자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름 받았으며, 가망 없는 죄인 고린도인들은 은혜로 구별되어 거룩한 성도로 불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주를 위한 사역의 근거이며, 하나님의 용서는 거룩하고 의로운 성도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된다.
-고린도 성도들은 풍성한 말과 지식의 은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곳은 감사의 이유이자 동시에 염려의 이유이기도 했다. 그 은사가 재림의 소망을 견고하게 붙들게 하는 데 쓰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높여 갈등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본질을 붙잡고 믿음을 따라 살 때 은사는 더욱 퐁성해 지고 그리스도는 더욱 온전히 증거된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 안에서 하나님 자신과 풍성한 교제를 누리게 하실 뿐 아니라, 심판 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하게 세워주실 것이다. 이미 시작된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가진 많은 은사가 아니라 오직 변치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만이 완성해줄 수 있다.
-고린도교회, 문제많은 교회다. 하지만 바울은 그 교회를 바라보며 문제점을 먼저 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들을 먼저 바라보고, 그 교회가 감당하는 복음전도와 이에 따라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은사)로 인해 감사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교회를 바라보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또한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감사가 먼저일까? 비판이 먼저일까? 교회가 지역사회에 존재함으로 인해 성도들조차 먼저 감사하는 교회일까? 비난하는 교회일까?
-문제점들이 나타나지만 기본적으로 교회는 “부르심”과 “부름”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곳이다. 주님의 부르심으로 사람들이 일어나며,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이로 인해 주님의 복음을 능력있게 증언한다. 말 뿐 아니라 능력도 나타난다. 그리고 이 은혜는 일시적이거나,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의 이름을 전하고, 은사가 나타나 능력있게 증거 하는 곳이 곧 교회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이 교회를 바라보며 감사한다(4절).
*교회는 하나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각 성도마다 분명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흔적이 있고, 각 성도마다 간절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각 성도가 담대하게 복음의 증인되어 증언할 때 하나님의 은사가 능력 되어 나타나는 곳이다.
*문제점도 있을 수 있으나 교회는 문제를 뛰어넘는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상상못할 죄의 모습들이 나타나도 교회를 쓰러뜨리지 못한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끝까지 견고하게(8절)”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서를 살펴보면서 평소 문제점들을 먼저 보았던 내가 사도 바울의 문제가 있기 전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세우시며 베푸셨던 “은혜”들을 보는 시각을 통해 큰 울림이 된다. 더구나 “끝까지 견고하게” 책망할 것 없는 자로 재림의 날까지 지키시겠다는 주님의 선언을 선포하는 바울을 통해 오늘날 내가 일상에서 어떻게 교회를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깨닫게 하셨다.
*특히 마 16:18의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I will build my church)….”는 말씀이 몇 년전 태국에서 들려 주셨던 동일한 음성과 함께 상기되면서 큰 은혜가 되었다. 그 시각으로 고린도전서 묵상하는데,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이 먼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채워 주셨고,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실 “하나님의 교회”임을 보게 해주셨다.
*문제가 있으나 은혜는 거두어지지 않는다. 잠시의 문제들이 은혜를 몰아내는 것 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끝까지 견고하게” 그곳에 있을 것이다. 다만 죄악을 선택하여 은혜를 보지 못할 뿐이다. 주님의 은혜는 “끝까지 견고하게” 교회를 지킨다.
*더온누리교회도 역시 문제점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문제보다 “은혜”가 비교할 수 없이 더 크다! 더 많다! 그러니 문제는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안에 이미 있다. 문제가 은혜를 보지 못하도록 내 마음을 내버려 두지 않겠다. 은혜에 집중하겠다. 또, 앞으로 살필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보며 날선 비판보다, 아픈 회개가 먼저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결국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에 문제점들은 “유비무환”의 요소만 되게 하실 것이다.
*문제점을 보고 문제를 만들지 않겠다. 오히려 은혜를 더욱 소망하되 문제들로 인해 일어날 회복의 역사를 바라보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와 평강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3절). 성도는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자들이지만, 더 깊고 충만한 인격적 관계로 성숙하기 위해서, 또 받은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지속적인 은혜와 평강이 필요하다. 어떤 조건과 환경에 있든지 이 은혜와 평강이 내 영혼과 삶을 지배하고, 가정과 공동체에 흘러 넘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신앙과 삶이 온전치 못해도 주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와 은사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다. 목적을 잃은 은사 사용으로 교회가 갈등을 겪어도 그 은사 자체는 그리스도의 증거요, 감사하게 받아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문제보다 은혜를 먼저 생각할 때 기대와 기도 속에서 늘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의 조건을 우리의 조건이나 상황이 아니라 변함없는 하나님께 두어야 하리라.
교회가 문제가 발생하였고 바울은 이에 대하여 질문에 대한 답변과 문제에 대한 권면을 글로 써서 보낸다. 이것이 고린도 전서이다. 편지를 시작하면서 문제에 대한 답변을 먼저 다루지 않고 자신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고린도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그 심정을 드러낸다.
1. 부르심을 받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의 모임(1-3절)
전형적인 당시 편지 형식에 따라 서신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모인 무리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1절), 고린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변화되어)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며(2절), 이들이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다”(2절하)
교회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도자와 역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들이 각각의 처소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임이다. 즉 예수님께 부름받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되시고 바울과 성도들(우리)의 “주님”이 되신다고 고백한다. 동일한 주님에게 부름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주님 되시기에 예수의 이름을 함께, 동일하게 부른다. 이것이 곧 교회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부름을 듣는 사람이 곧 교회이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본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양과 목자의 관계를 언급하시면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자기 양들을 다 불러낸 다음에, 그는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새번역_요 10:3-4).”
주님의 음성을 듣고(부르심을 듣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로 우리는 세워졌다. 주님의 이름만 부르지 않고 주님의 음성도 듣는 교회였으면 좋겠다.
2. 받은 은혜가 있는 모임(4-7절)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교회인 것을 감사했다(4절). ”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여러분의 일로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새번역_4절).”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받은 은혜와 성도들로 인해 “언제나” 감사드린다고 고백했다.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고린도 교회는 주님께서 주신 ‘은혜’들이 분명하게 보이는 교회였다. 적어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워가는 시간 뿐 아니라 떠나온 후에도 교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은혜들로 인해 “언제나” 감사하는 바울이었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 언제나 감사의 고백이 마르지 않는 은혜의 증거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은혜는 어떤 것들이었을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면에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곧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늘었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서 이렇게도 튼튼하게 자리잡았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에도 부족한 것이 없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새번역_5-7절).
고린도교회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풍족하여 진 것인데,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는데 요긴한 은사(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도 풍족하게 나타난 것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온갖 언변(로고스/말), 온갖 지식(그노시스/사고, 판단, 의견등)이 충분히 활용되도록 성령께서 깨닫게 하고 사용 가능하도록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 함께 나타나는 치유와 같은 은혜의 증거들도 ‘부족함이 없도록’ 함께 나타났다.
복음의 지식이 넘쳐나고, 이에 따른 복음 증언이 여러 은사와 함께 나타나 강력하게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교회였다는 것이다. 적어도 바울이 교회의 문제점들을 듣고 있는 현재도 이렇게 강력한 복음의 능력이 있는 교회였다는 것이다.
3.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교회(8-9절)
특히 8절은 주님께서 재림때까지 이 교회를 끝까지 붙잡아 주시는 교회임을 선언한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가 “복음의 증언”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복음의 능력”이 함께 나타나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이어지기를 축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이 아닌 주님과 더불어 늘 교제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날에 여러분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도록, 주님께서 여러분을 끝까지 튼튼히 세워주실 것입니다(새번역_8절).” 하나님께서 불러주심으로 시작된 이 교제는 그의 신실하심으로 시작하게 하시고 재림의 그때까지 이어지게 하신다. ”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게 하여 주셨습니다(새번역_9절).
교회는 이렇게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도록 불러 주신 곳이다. 그리고 이를 신실하게 지켜 주신다.
나는?
-자격 없는 박해자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름 받았으며, 가망 없는 죄인 고린도인들은 은혜로 구별되어 거룩한 성도로 불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주를 위한 사역의 근거이며, 하나님의 용서는 거룩하고 의로운 성도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된다.
-고린도 성도들은 풍성한 말과 지식의 은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곳은 감사의 이유이자 동시에 염려의 이유이기도 했다. 그 은사가 재림의 소망을 견고하게 붙들게 하는 데 쓰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높여 갈등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본질을 붙잡고 믿음을 따라 살 때 은사는 더욱 퐁성해 지고 그리스도는 더욱 온전히 증거된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 안에서 하나님 자신과 풍성한 교제를 누리게 하실 뿐 아니라, 심판 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하게 세워주실 것이다. 이미 시작된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가진 많은 은사가 아니라 오직 변치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만이 완성해줄 수 있다.
-고린도교회, 문제많은 교회다. 하지만 바울은 그 교회를 바라보며 문제점을 먼저 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들을 먼저 바라보고, 그 교회가 감당하는 복음전도와 이에 따라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은사)로 인해 감사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교회를 바라보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또한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감사가 먼저일까? 비판이 먼저일까? 교회가 지역사회에 존재함으로 인해 성도들조차 먼저 감사하는 교회일까? 비난하는 교회일까?
-문제점들이 나타나지만 기본적으로 교회는 “부르심”과 “부름”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곳이다. 주님의 부르심으로 사람들이 일어나며,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이로 인해 주님의 복음을 능력있게 증언한다. 말 뿐 아니라 능력도 나타난다. 그리고 이 은혜는 일시적이거나,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의 이름을 전하고, 은사가 나타나 능력있게 증거 하는 곳이 곧 교회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이 교회를 바라보며 감사한다(4절).
*교회는 하나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각 성도마다 분명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흔적이 있고, 각 성도마다 간절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각 성도가 담대하게 복음의 증인되어 증언할 때 하나님의 은사가 능력 되어 나타나는 곳이다.
*문제점도 있을 수 있으나 교회는 문제를 뛰어넘는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상상못할 죄의 모습들이 나타나도 교회를 쓰러뜨리지 못한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끝까지 견고하게(8절)”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서를 살펴보면서 평소 문제점들을 먼저 보았던 내가 사도 바울의 문제가 있기 전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세우시며 베푸셨던 “은혜”들을 보는 시각을 통해 큰 울림이 된다. 더구나 “끝까지 견고하게” 책망할 것 없는 자로 재림의 날까지 지키시겠다는 주님의 선언을 선포하는 바울을 통해 오늘날 내가 일상에서 어떻게 교회를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깨닫게 하셨다.
*특히 마 16:18의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I will build my church)….”는 말씀이 몇 년전 태국에서 들려 주셨던 동일한 음성과 함께 상기되면서 큰 은혜가 되었다. 그 시각으로 고린도전서 묵상하는데,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이 먼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채워 주셨고,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실 “하나님의 교회”임을 보게 해주셨다.
*문제가 있으나 은혜는 거두어지지 않는다. 잠시의 문제들이 은혜를 몰아내는 것 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끝까지 견고하게” 그곳에 있을 것이다. 다만 죄악을 선택하여 은혜를 보지 못할 뿐이다. 주님의 은혜는 “끝까지 견고하게” 교회를 지킨다.
*더온누리교회도 역시 문제점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문제보다 “은혜”가 비교할 수 없이 더 크다! 더 많다! 그러니 문제는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안에 이미 있다. 문제가 은혜를 보지 못하도록 내 마음을 내버려 두지 않겠다. 은혜에 집중하겠다. 또, 앞으로 살필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보며 날선 비판보다, 아픈 회개가 먼저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결국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에 문제점들은 “유비무환”의 요소만 되게 하실 것이다.
*문제점을 보고 문제를 만들지 않겠다. 오히려 은혜를 더욱 소망하되 문제들로 인해 일어날 회복의 역사를 바라보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와 평강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3절). 성도는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자들이지만, 더 깊고 충만한 인격적 관계로 성숙하기 위해서, 또 받은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지속적인 은혜와 평강이 필요하다. 어떤 조건과 환경에 있든지 이 은혜와 평강이 내 영혼과 삶을 지배하고, 가정과 공동체에 흘러 넘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신앙과 삶이 온전치 못해도 주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와 은사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다. 목적을 잃은 은사 사용으로 교회가 갈등을 겪어도 그 은사 자체는 그리스도의 증거요, 감사하게 받아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문제보다 은혜를 먼저 생각할 때 기대와 기도 속에서 늘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의 조건을 우리의 조건이나 상황이 아니라 변함없는 하나님께 두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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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31일
요셉의 진정한 용서와 하나님의 섭리
[창 50:15-26 ]
요셉의 지위는 애굽의 총리이자, 야곱으로부터 장자의 권리까지 부여 받았다. 이때 야곱의 부재가 가져올 변화는 상당했을 것이다. 형제들에게는 애굽에 들어온 지 무려 17년이 넘었어도 약 39년전 도단 들에서의 사건의 영향력이 다시 소환될 정도였다. 본문은 지난 17년 동안 요셉이 자신들의 죄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은 것은 야곱의 영향력이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동시에 요셉의 용서가 진정한 용서였고, 그것도 17년전에 이미 용서 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형들의 마음속 깊이 웅크리고 있었을 불안함이 측은하기까지 하다.
하나님의 용서가 이와같지 않을까? 이미 완전한 용서를 예수님을 통해 주셨지만, 이를 믿지 못해 늘 불안해 하고, 이를 누리지 못해 늘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듯 하다. 주님의 용서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함(요 10:10) 임에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불안과 결핍을 느낀다면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올곧이 바라 보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주님은 한없는 사랑으로 제한 없는 용서를 이미 베푸셨다.
1. 죽은 아버지를 의지하여 구하는 용서라도….(15-17절)
형들은 요셉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돌아가신 아버지를 의지한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용서를 구한 것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유언이 있습니다. 아우님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우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새번역_16-17절) 얼마나 불안했으면 그랬을까? 먼저 살펴볼 것은 이전 본문들에서 형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자기들이 요셉에게 행한 일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장면은 없다. 하지만 본문은 이 일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전제한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형들이 또 다른 거짓을 함께 모의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으로는 만일 이런 고백이 이루어졌다면 49장의 아들들에게 행하는 유언의 내용에 영향이 없었을까? 이런 미심쩍은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본문은 형제들에 의해 야곱의 용서는 이미 이루어진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실제 그랬다면, 그 즉시 야곱은 요셉과 형제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죽기 전에 화해를 했어야 옳다. 그게 상식이다. 죽음을 앞둔 아비의 마음은 형제들의 안녕과 화목이 우선 일테니까.
그런데 그런 기록이 없이 형제들의 전언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렇게 보고 싶지 않지만, 죽은 아버지의 이름을 의지해서 요셉에게 용서를 받고 싶어하는 형들의 생각인 것으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즉, 거짓말을 의지하여 해묵은 지난 날의 죄로 인한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라도 용서를 확인받고 마음 속 깊은 불안을 해소하여 평안하기를 구하는 형제들의 연약한 모습이 남의 모습 같지 않다. 나도 역시 이렇게 할 수 있다. 그만큼 범죄의 질긴 불안감과 두려움은 완전한 용서가 아니면 해소되지 않는 것이다. 요셉은 이미 일방적으로 용서했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고백했다. 문제는 형들이 직접 범죄를 요셉에게 말하고 용서를 구하지는 못하여 여전히 용서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비록 17년 전 요셉의 시험 앞에 진정한 회개의 모습과 더불어 자신들의 억울한 간첩 누명을 죄에 대한 징벌로 간주했고, 유다는 자기 희생을 자처하며 꼬인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사실 직접적으로 요셉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그저 두렵워 떨며, 독백하고, 서로 이야기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다. 그 상태로 질기고 질긴 불안의 꼬리가 17년간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 야곱이 죽었다. 장례도 다 마쳤다. 더 이상 이 불안을 끌고 갈 힘도, 감출 수 있는 아버지의 권위와 같은 방패도 사라졌다. 이제는 요셉이 장자권을 물려 받았기에 더더욱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용서를 구하는 것은 이래서 은혜의 힘이 필요한 것 같다. 스스로는 마음을 까발리고 입술을 열기가 이렇게 힘들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감동하시고 고백할 수 있는 힘을 불어 넣어 주실 그 때 담대하게 고백하고 사죄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깊고 큰 은혜인지, 이 은혜로 나의 주님 안에서의 오늘이 존재함이 감사할 따름이다.
2. 진심으로 용서하는 요셉(17하-21절)
형들의 간곡한 말에 요셉의 반응은 “울었더라(17절)… 위로하였더라(21절)”로 함축된다. 형들의 말과 행동, 특히 용서를 구하는 말을 전달하고 곧이어 나아와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18절)” 라며 엎드리는 그들에게 간곡하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새번역_19-21절)
하나님은 형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생명을 살리셨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이 오늘 우리 모두의 생명을 살리셨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악을 악으로 대하는 어리석음을 어찌 행하겠느냐는 것이다. 악을 선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가 살았다면 그때의 악조차 하나님의 개입의 은혜가 선함이 되어 오늘의 생명으로 나타난 것이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므로 이 일을 두려워하지 마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에 대한 진심을 담아 형들과 그 자녀들을 반드시 기르겠다고 약속한다. 책임 지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어 역사하셨듯, 나는 하나님의 선함을 따르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먼저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므로 인간의 감정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반응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앙금이 지워지지 않는다. 자꾸만 생각난다. 반복해서 정죄하고 심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하는 용서는 이렇게 말 뿐 아니라 행동까지 보증이 된다.
악을 행한 형들과 그의 자녀들까지 책임지겠다는 것은 이미 17년전 가족을 상봉할 때 진심으로 용서한 요셉은 야곱의 장례를 마치고 자기 앞에 엎드린 형들 앞에서 그들이 얽매였을 17년의 고통을 이해하며 울었다. 그 마음으로 가족들을 장자로서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약속하며 형들의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없앤다. 비로소 야곱의 아들들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용서의 완결을 이끌었다. 그 섭리에 순종하는 요셉의 마음은 이미 형들에 대한 아픔을 지웠다. 이제야 형들이 자신들의 마음에 남았던 범죄의 상흔이 지워진다.
진정한 용서를 구하는 죄의 고백과 진정한 용서의 하모니가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의 “하나됨”을 이루었다. 도단들에서부터 계산하자면 무려 32년만의 온전한 화해였다. 아니 그전 요셉이 태어나 야곱의 편애로부터 시작하자면 약 50여만에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은 결국 이렇게 하나됨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에게도 이렇게 하실 것이다. 고백과 용서는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온전함을 이루어 가신다.
3. 애굽은 아니다. 가나안이다(22-26절)
요셉은 110세를 살고 죽는다. 창세기 드라마가 완결됐다. 요셉은 에브라임의 자손 삼 대를 보았다. 므낫세 역시 마찬가지다(23절). 죽음의 순간,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환기 시킨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새번역_24절) 그러고서는 맹세를 시키면서 당부의 말을 남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날이 온다. 그 때에 너희는 나의 뼈를 이 곳에서 옮겨서, 그리로 가지고 가야 한다.”(새번역_25절) 그리고는 세상을 떠난다.
애굽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고 4대까지 자손을 보았지만 그의 본향은 애굽이 아니고 가나안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죽으면서 자손들이 남겨진 애굽땅을 바라보지 않고, 자손들이 돌아갈 가나안 땅을 바라 보았다. 야곱이 애굽에 살았지만 가나안에 묻혔듯이 요셉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출애굽의 날에 자신의 뼈를 함께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가줄 것을 당부한다.
애굽에 살지만 가나안을 잊지 않는 삶은 곧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붙잡는 삶을 의미한다. 아무리 애굽이 평안과 안정과 번영의 땅이라도 이 땅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땅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다. 요셉처럼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굳게 붙잡아야 겠다.
나는?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 한다. 그리고 형제이기를 포기하고 종이 되겠으니 목숨만은 보전해달라고 간청한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의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애굽에 들어온 이후 17년간 가슴 졸이면 살았을 형들을 생각하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요셉은 자신에게 용서할 자격이 없으며 오히려 가족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이 쓰임 받았을 뿐이라고 대답하며 형들을 안심시킨다. 비로소 형제간에 참된 연합이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요셉은 형제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한다. 요셉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형제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요셉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형제들을 대한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일로 받아들였기에 이미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대했다. 나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를 완전히 믿고 받아들이고 있을까? 혹시 죄책감으로 고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용서를 의심하며 불안해 하지 않는가?
-요셉도 죽는다. 형제들보다 빨리 죽는다. 자신이 죽더라도 하나님이 형제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말해준다. 또 자손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할 때 자신의 유골을 잊지 말고 가져가서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요청한다. 야곱의 신앙을 물려받은 것이다. 400년 후에나 될 일을 오늘 확신하고 있다. 요셉은 후손들에게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을 물려주고 떠나고 있다.
-요셉은 늙도록 하나님의 복을 누리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의 희생과 사랑이 절대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화평을 가져오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일까?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거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셨다. 요셉의 고난은 형제들의 시기심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야곱의 가족을 흉년에서 구원하여 약속하신대로 민족을 이루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한 사람의 희생과 복종으로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방법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창세기는 죽음의 이야기로 닫고 있지만, 약속과 희망을 간직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으면서 창세기가 마무리되지만, 죽음을 맞이한 족장들은 절망 속에서 숨을 거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장차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희망을 안고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하나님은 유일한 희망이고, 그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분이시다. 앞으로 이루어주실 하나님의 약속과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창세기 묵상이 마무리됐다. 개인적으로 서너 번 정도 묵상한 듯 하다. 그러나 꾸준히 기록으로 남긴 묵상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진즉에 이렇게 할 것인데… 단편적으로 남긴 메모들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자연스레 사라졌다. 하지만 마음에 남았다. 그때의 기억들이 기록하는 내내 소환 되었다. 기록이 이처럼 중요하다. 묵상 기록의 걸음을 결코 멈추지 말아야지.
-형제들이 범죄의 굴레에서 불안해 하는 모습, 그런데 이미 용서된 죄에 대해 자유하지 못하는 그 모습이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주님의 용서가 이미 완전하게 이루어 졌음에도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아래서 그 용서가 주는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모습이 영락없다.
-하지만 이런 연약함도 결국 때가 되면 완전한 용서의 피날레가 온다는 사실이다. 그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인간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용서와 화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용서와 화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용서와 화해의 은혜를 깨닫고 누리며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실감된다. 이미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평안한 걸음을 걷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모른다.
-또 요셉은 총리로서 애굽의 영화를 모두 누리고, 자녀들도 복을 받아 3대 손 까지 직접 받아 볼 정도로 안정된 삶을 살았으나, 가나안을 잊지 않는 삶을 산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요셉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민족이 모두 이동 될 것이다. 그 때 자신의 뼈도 함께 이동해 달라는 말은 죽어서라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함께 하기를 원하는 믿음이리라. 반드시 약속하신대로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다면 감히 공약할 수 없다. 요셉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시는 믿음이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믿는 믿음이 본질이다.
*요셉을 바라보며 그의 걸음을 주관하며 인도하신 하나님이 감사할 뿐이다. 결국 용서와 화해의 완전함은 하나님의 용서밖에 없음이 우리의 복음이다. 애굽을 바라보지 안고 가나안을 바라본 그의 일생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가 이와같지 않을까? 이미 완전한 용서를 예수님을 통해 주셨지만, 이를 믿지 못해 늘 불안해 하고, 이를 누리지 못해 늘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듯 하다. 주님의 용서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함(요 10:10) 임에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불안과 결핍을 느낀다면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올곧이 바라 보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주님은 한없는 사랑으로 제한 없는 용서를 이미 베푸셨다.
1. 죽은 아버지를 의지하여 구하는 용서라도….(15-17절)
형들은 요셉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돌아가신 아버지를 의지한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용서를 구한 것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유언이 있습니다. 아우님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우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새번역_16-17절) 얼마나 불안했으면 그랬을까? 먼저 살펴볼 것은 이전 본문들에서 형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자기들이 요셉에게 행한 일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장면은 없다. 하지만 본문은 이 일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전제한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형들이 또 다른 거짓을 함께 모의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으로는 만일 이런 고백이 이루어졌다면 49장의 아들들에게 행하는 유언의 내용에 영향이 없었을까? 이런 미심쩍은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본문은 형제들에 의해 야곱의 용서는 이미 이루어진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실제 그랬다면, 그 즉시 야곱은 요셉과 형제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죽기 전에 화해를 했어야 옳다. 그게 상식이다. 죽음을 앞둔 아비의 마음은 형제들의 안녕과 화목이 우선 일테니까.
그런데 그런 기록이 없이 형제들의 전언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렇게 보고 싶지 않지만, 죽은 아버지의 이름을 의지해서 요셉에게 용서를 받고 싶어하는 형들의 생각인 것으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즉, 거짓말을 의지하여 해묵은 지난 날의 죄로 인한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라도 용서를 확인받고 마음 속 깊은 불안을 해소하여 평안하기를 구하는 형제들의 연약한 모습이 남의 모습 같지 않다. 나도 역시 이렇게 할 수 있다. 그만큼 범죄의 질긴 불안감과 두려움은 완전한 용서가 아니면 해소되지 않는 것이다. 요셉은 이미 일방적으로 용서했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고백했다. 문제는 형들이 직접 범죄를 요셉에게 말하고 용서를 구하지는 못하여 여전히 용서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비록 17년 전 요셉의 시험 앞에 진정한 회개의 모습과 더불어 자신들의 억울한 간첩 누명을 죄에 대한 징벌로 간주했고, 유다는 자기 희생을 자처하며 꼬인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사실 직접적으로 요셉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그저 두렵워 떨며, 독백하고, 서로 이야기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다. 그 상태로 질기고 질긴 불안의 꼬리가 17년간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 야곱이 죽었다. 장례도 다 마쳤다. 더 이상 이 불안을 끌고 갈 힘도, 감출 수 있는 아버지의 권위와 같은 방패도 사라졌다. 이제는 요셉이 장자권을 물려 받았기에 더더욱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용서를 구하는 것은 이래서 은혜의 힘이 필요한 것 같다. 스스로는 마음을 까발리고 입술을 열기가 이렇게 힘들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감동하시고 고백할 수 있는 힘을 불어 넣어 주실 그 때 담대하게 고백하고 사죄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깊고 큰 은혜인지, 이 은혜로 나의 주님 안에서의 오늘이 존재함이 감사할 따름이다.
2. 진심으로 용서하는 요셉(17하-21절)
형들의 간곡한 말에 요셉의 반응은 “울었더라(17절)… 위로하였더라(21절)”로 함축된다. 형들의 말과 행동, 특히 용서를 구하는 말을 전달하고 곧이어 나아와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18절)” 라며 엎드리는 그들에게 간곡하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새번역_19-21절)
하나님은 형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생명을 살리셨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이 오늘 우리 모두의 생명을 살리셨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악을 악으로 대하는 어리석음을 어찌 행하겠느냐는 것이다. 악을 선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가 살았다면 그때의 악조차 하나님의 개입의 은혜가 선함이 되어 오늘의 생명으로 나타난 것이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므로 이 일을 두려워하지 마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에 대한 진심을 담아 형들과 그 자녀들을 반드시 기르겠다고 약속한다. 책임 지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어 역사하셨듯, 나는 하나님의 선함을 따르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먼저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므로 인간의 감정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반응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앙금이 지워지지 않는다. 자꾸만 생각난다. 반복해서 정죄하고 심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하는 용서는 이렇게 말 뿐 아니라 행동까지 보증이 된다.
악을 행한 형들과 그의 자녀들까지 책임지겠다는 것은 이미 17년전 가족을 상봉할 때 진심으로 용서한 요셉은 야곱의 장례를 마치고 자기 앞에 엎드린 형들 앞에서 그들이 얽매였을 17년의 고통을 이해하며 울었다. 그 마음으로 가족들을 장자로서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약속하며 형들의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없앤다. 비로소 야곱의 아들들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용서의 완결을 이끌었다. 그 섭리에 순종하는 요셉의 마음은 이미 형들에 대한 아픔을 지웠다. 이제야 형들이 자신들의 마음에 남았던 범죄의 상흔이 지워진다.
진정한 용서를 구하는 죄의 고백과 진정한 용서의 하모니가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의 “하나됨”을 이루었다. 도단들에서부터 계산하자면 무려 32년만의 온전한 화해였다. 아니 그전 요셉이 태어나 야곱의 편애로부터 시작하자면 약 50여만에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은 결국 이렇게 하나됨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에게도 이렇게 하실 것이다. 고백과 용서는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온전함을 이루어 가신다.
3. 애굽은 아니다. 가나안이다(22-26절)
요셉은 110세를 살고 죽는다. 창세기 드라마가 완결됐다. 요셉은 에브라임의 자손 삼 대를 보았다. 므낫세 역시 마찬가지다(23절). 죽음의 순간,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환기 시킨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새번역_24절) 그러고서는 맹세를 시키면서 당부의 말을 남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날이 온다. 그 때에 너희는 나의 뼈를 이 곳에서 옮겨서, 그리로 가지고 가야 한다.”(새번역_25절) 그리고는 세상을 떠난다.
애굽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고 4대까지 자손을 보았지만 그의 본향은 애굽이 아니고 가나안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죽으면서 자손들이 남겨진 애굽땅을 바라보지 않고, 자손들이 돌아갈 가나안 땅을 바라 보았다. 야곱이 애굽에 살았지만 가나안에 묻혔듯이 요셉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출애굽의 날에 자신의 뼈를 함께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가줄 것을 당부한다.
애굽에 살지만 가나안을 잊지 않는 삶은 곧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붙잡는 삶을 의미한다. 아무리 애굽이 평안과 안정과 번영의 땅이라도 이 땅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땅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다. 요셉처럼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굳게 붙잡아야 겠다.
나는?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 한다. 그리고 형제이기를 포기하고 종이 되겠으니 목숨만은 보전해달라고 간청한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의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애굽에 들어온 이후 17년간 가슴 졸이면 살았을 형들을 생각하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요셉은 자신에게 용서할 자격이 없으며 오히려 가족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이 쓰임 받았을 뿐이라고 대답하며 형들을 안심시킨다. 비로소 형제간에 참된 연합이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요셉은 형제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한다. 요셉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형제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요셉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형제들을 대한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일로 받아들였기에 이미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대했다. 나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를 완전히 믿고 받아들이고 있을까? 혹시 죄책감으로 고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용서를 의심하며 불안해 하지 않는가?
-요셉도 죽는다. 형제들보다 빨리 죽는다. 자신이 죽더라도 하나님이 형제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말해준다. 또 자손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할 때 자신의 유골을 잊지 말고 가져가서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요청한다. 야곱의 신앙을 물려받은 것이다. 400년 후에나 될 일을 오늘 확신하고 있다. 요셉은 후손들에게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을 물려주고 떠나고 있다.
-요셉은 늙도록 하나님의 복을 누리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의 희생과 사랑이 절대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화평을 가져오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일까?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거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셨다. 요셉의 고난은 형제들의 시기심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야곱의 가족을 흉년에서 구원하여 약속하신대로 민족을 이루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한 사람의 희생과 복종으로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방법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창세기는 죽음의 이야기로 닫고 있지만, 약속과 희망을 간직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으면서 창세기가 마무리되지만, 죽음을 맞이한 족장들은 절망 속에서 숨을 거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장차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희망을 안고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하나님은 유일한 희망이고, 그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분이시다. 앞으로 이루어주실 하나님의 약속과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창세기 묵상이 마무리됐다. 개인적으로 서너 번 정도 묵상한 듯 하다. 그러나 꾸준히 기록으로 남긴 묵상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진즉에 이렇게 할 것인데… 단편적으로 남긴 메모들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자연스레 사라졌다. 하지만 마음에 남았다. 그때의 기억들이 기록하는 내내 소환 되었다. 기록이 이처럼 중요하다. 묵상 기록의 걸음을 결코 멈추지 말아야지.
-형제들이 범죄의 굴레에서 불안해 하는 모습, 그런데 이미 용서된 죄에 대해 자유하지 못하는 그 모습이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주님의 용서가 이미 완전하게 이루어 졌음에도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아래서 그 용서가 주는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모습이 영락없다.
-하지만 이런 연약함도 결국 때가 되면 완전한 용서의 피날레가 온다는 사실이다. 그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인간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용서와 화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용서와 화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용서와 화해의 은혜를 깨닫고 누리며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실감된다. 이미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평안한 걸음을 걷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모른다.
-또 요셉은 총리로서 애굽의 영화를 모두 누리고, 자녀들도 복을 받아 3대 손 까지 직접 받아 볼 정도로 안정된 삶을 살았으나, 가나안을 잊지 않는 삶을 산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요셉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민족이 모두 이동 될 것이다. 그 때 자신의 뼈도 함께 이동해 달라는 말은 죽어서라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함께 하기를 원하는 믿음이리라. 반드시 약속하신대로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다면 감히 공약할 수 없다. 요셉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시는 믿음이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믿는 믿음이 본질이다.
*요셉을 바라보며 그의 걸음을 주관하며 인도하신 하나님이 감사할 뿐이다. 결국 용서와 화해의 완전함은 하나님의 용서밖에 없음이 우리의 복음이다. 애굽을 바라보지 안고 가나안을 바라본 그의 일생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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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30일
죽음의 자리에서 약속을 바라보다
[창 49:29-50:14]
야곱이 열 두 아들에 대한 예언을 마치고 마지막 유언을 한다. 자신을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는 것이다. 이에 요셉은 애굽에서의 장례를 마치고 조상들이 묻힌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야곱을 안치한다. 야곱은 스스로가 바로에게 밝힌 대로 ‘험악한 세월의 나그네 길’을 무사히 마친다.
1. 야곱의 유언(49:29-32절)
자신의 죽음을 “내 조상들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장례를 선조와 함께 묻는 것으로 표현한다. 매장지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땅값 400세겔을 주고 밭과 함께 사서 가족 매장지를 삼은 가나안 땅 헤브론 마므레 막벨라 굴이다(창 23장, 49:32, 50:13).
이렇게 유언한 이유는 그 굴에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레아가 묻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땅은 본문에서 두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듯 ‘합법적으로 값을 치르고 산 매장지’이다. 이에 대한 의도는 분명하다.
“약속의 땅에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이루면 그때 너희들도 오거라”는 의미다. 우리가 살아서 남겨야 할 마지막 유언은 “하나님의 품 안에 먼저 가 있을테니, 너희들도 오너라”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산 소망이 아니겠는가!
2. 야곱의 장례(50:1-14)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절이다. “요셉이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서, 울며 입을 맞추고….(새번역_50:1)” 또한 9절이다. “거기에다 병거와 기병까지 요셉을 호위하며 올라가니, 그 굉장한 상여 행렬이 볼 만하였다(새번역_9절).”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 브엘세바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친히 야곱에게 해주신 약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내가 반드시 너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새번역_46:4).”
하나님께서 함께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올라오는 행렬…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그의 아들들은 똑똑히 눈으로 보고 마음에 새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 행렬은 다시 400년 후에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민족인 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올라 오는 행렬이 된다.
“떼”로 번역된 9절의 장례행렬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진”로 번역된 히브리어와 동일하다(출 14:9). 또한, 장례 행렬이 가나안으로 향하는 길도 해안길이 아닌 사해 동편을 지나는 왕의 대로를 따라 요단강 동편에서 강을 건너 헤브론으로 진행하였는데, 400여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경로와 비슷하다.
이모로 저모로 야곱의 장례 행렬은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의 보증이었다. 이 행렬을 기억하여 애굽이 정착지가 아니라 경유지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 할 곳은 가나안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향하는 야곱의 시신은 절대 애굽의 안전과 번영 때문에 약속을 잊어버리지 말고 그들의 시선을 약속의 땅에 고정시켜 살라는 최후의 가르침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니다. 하나님의 품, 하나님께서 새롭게 이루실 영원한 도성이 우리의 안식처이다. 이것을 잊지 말고 이 세상의 풍요와 안락, 번영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그 나라에 이르기까지 “순례의 길”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약속하신대로 우리게 주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야곱이 죽는다. 이렇게 곡절 많은 인생이 또 있을까? 그런 야곱이 죽었다. 죽기 전에 막벨라 굴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한 번 더 남기며 죽는다. 꼭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곳이 본향이기 때문이다. 야곱이 영원히 기억되고 사는 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길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자신이 스스로 쟁취한 축복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약속)을 더 기대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요셉은 아버지를 여윈 슬픔 중에도 아버지 야곱이 남긴 유언을 묵묵히 수행한다. 바로의 허락을 받아 큰 장례 행렬이 막벨라 굴까지 미친다. 야곱의 장례는 야곱이 남긴 마지막 설교였다. 또한 요셉의 이러한 순종은 약속을 향한 아버지의 믿음을 자신도 이어받겠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요셉도 울고 형들도 울고 온 가족이 울었다. 이 울음 속에 “반드시 다시 돌아오라”는 다짐을 담았을 것이다. 사철 초지가 펼쳐지는 애굽이 아니어도, 먹고 살 수 있는 비옥한 땅의 고센이 아니어도 우리가 돌아올 곳은 아버지 야곱이 묻힌 이곳임을 새기고 또 새기는 울음이었을 것이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주심을 일상에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민족을 이루기까지 까마득하게 느껴질 야곱의 가족들이겠지만, 야곱의 죽음과 장례를 통해 다시 상기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인도하시는 의지를 확인했으리라. 나의 삶도 역시 일상에서 소소하게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보며 영원한 소망이 책 속에 갇힌 무미건조한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야곱의 삶은 자신이 표현한 대로 순탄치 않고 험악한 세월의 연속이었다. 147년을 살면서 130년이 그랬다. 그러나 생을 마무리하는 마지막은 달랐다. 마치 하나님의 위로와 같았다. 바로의 지극한 애굽 이주 환대… 이후 17년동안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즐거움… 그리고 죽음 이후도 자신이 직접 보지는 못했겠지만, 최상의 장례 절차와 기간… 그리고 남긴 유언대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되어 장례를 치루는 형제들… 정말 복받은 인생임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나그네 길의 막바지에 주시는 안정과 평안의 마무리였다.
-그런데도 야곱은 그 평안과 안정의 애굽 땅에 묻히기를 거부하고 가족들이 묻혀 있는 가나안 땅을 바라본다. 야곱은 이미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올 때 약속하여 주신 동행의 약속은 단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에만 해당되지 않았다. 무수한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민족을 이루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까지 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기에… “내가 먼저 가 있을테니, 너희들 꼭 뒤따라 오너라”는 의지를 몸소 보여 주기를 원했다.
-나는 어떨까? 하나님 나라를 살면서 완전히 이루어질 그 나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가? 이 땅에서 누리는 약간의 평안과 번영이 내 마음을 흔들지 않도록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살아 있을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지금 누리는 이 세상에서의 가치를 기꺼이 내려놓을 만큼 살아있을까?
-무엇보다 내가 죽을 때 나의 아들들에게 한 자리에서 이런 말을 남길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야곱의 죽음은 참 복된 죽음이었구나 실감한다.
-무엇보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남긴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하는 유언처럼, “애들아 나 먼저 주님 품에 있을 테니 너희들도 꼭 와야 한다!”라며 산 소망을 실감나게 전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있을까? 아버지의 믿음의 걸음이 훗날 마지막 유언에 권위를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오늘을 살아내야겠다!
*아. 야곱의 죽음이 참 도전이 된다. 아들들에게 하나님이 하실 일을 들려 줄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그가 부럽다. 숨을 거두기 직전 온 가족이 함께 있었던 그가 부럽다. 무엇보다 그 이별의 시간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진” 시간이었다는 것이 부럽고 부럽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올 때 이랬으면 참 좋겠다… 웃으면서 “나 먼저 주님께 가 있을테니… 뒤따라 오거라”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멋진 마무리를 소망하며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겠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내리라.
*죽음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 보았기에 야곱은 이렇게 유언 할 수 있었고, 장례 기간 동안 장례식을 치루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기에 굳이 가나안까지 왕복하는 장지 선택을 요셉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죽음의 현장이 약속을 확인하는 소망의 자리가 되었다. 나의 죽음의 현장도 그리 되기를 소망한다.
1. 야곱의 유언(49:29-32절)
자신의 죽음을 “내 조상들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장례를 선조와 함께 묻는 것으로 표현한다. 매장지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땅값 400세겔을 주고 밭과 함께 사서 가족 매장지를 삼은 가나안 땅 헤브론 마므레 막벨라 굴이다(창 23장, 49:32, 50:13).
이렇게 유언한 이유는 그 굴에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레아가 묻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땅은 본문에서 두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듯 ‘합법적으로 값을 치르고 산 매장지’이다. 이에 대한 의도는 분명하다.
“약속의 땅에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이루면 그때 너희들도 오거라”는 의미다. 우리가 살아서 남겨야 할 마지막 유언은 “하나님의 품 안에 먼저 가 있을테니, 너희들도 오너라”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산 소망이 아니겠는가!
2. 야곱의 장례(50:1-14)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절이다. “요셉이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서, 울며 입을 맞추고….(새번역_50:1)” 또한 9절이다. “거기에다 병거와 기병까지 요셉을 호위하며 올라가니, 그 굉장한 상여 행렬이 볼 만하였다(새번역_9절).”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 브엘세바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친히 야곱에게 해주신 약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내가 반드시 너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새번역_46:4).”
하나님께서 함께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올라오는 행렬…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그의 아들들은 똑똑히 눈으로 보고 마음에 새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 행렬은 다시 400년 후에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민족인 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올라 오는 행렬이 된다.
“떼”로 번역된 9절의 장례행렬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진”로 번역된 히브리어와 동일하다(출 14:9). 또한, 장례 행렬이 가나안으로 향하는 길도 해안길이 아닌 사해 동편을 지나는 왕의 대로를 따라 요단강 동편에서 강을 건너 헤브론으로 진행하였는데, 400여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경로와 비슷하다.
이모로 저모로 야곱의 장례 행렬은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의 보증이었다. 이 행렬을 기억하여 애굽이 정착지가 아니라 경유지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 할 곳은 가나안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향하는 야곱의 시신은 절대 애굽의 안전과 번영 때문에 약속을 잊어버리지 말고 그들의 시선을 약속의 땅에 고정시켜 살라는 최후의 가르침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니다. 하나님의 품, 하나님께서 새롭게 이루실 영원한 도성이 우리의 안식처이다. 이것을 잊지 말고 이 세상의 풍요와 안락, 번영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그 나라에 이르기까지 “순례의 길”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약속하신대로 우리게 주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야곱이 죽는다. 이렇게 곡절 많은 인생이 또 있을까? 그런 야곱이 죽었다. 죽기 전에 막벨라 굴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한 번 더 남기며 죽는다. 꼭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곳이 본향이기 때문이다. 야곱이 영원히 기억되고 사는 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길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자신이 스스로 쟁취한 축복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약속)을 더 기대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요셉은 아버지를 여윈 슬픔 중에도 아버지 야곱이 남긴 유언을 묵묵히 수행한다. 바로의 허락을 받아 큰 장례 행렬이 막벨라 굴까지 미친다. 야곱의 장례는 야곱이 남긴 마지막 설교였다. 또한 요셉의 이러한 순종은 약속을 향한 아버지의 믿음을 자신도 이어받겠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요셉도 울고 형들도 울고 온 가족이 울었다. 이 울음 속에 “반드시 다시 돌아오라”는 다짐을 담았을 것이다. 사철 초지가 펼쳐지는 애굽이 아니어도, 먹고 살 수 있는 비옥한 땅의 고센이 아니어도 우리가 돌아올 곳은 아버지 야곱이 묻힌 이곳임을 새기고 또 새기는 울음이었을 것이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주심을 일상에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민족을 이루기까지 까마득하게 느껴질 야곱의 가족들이겠지만, 야곱의 죽음과 장례를 통해 다시 상기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인도하시는 의지를 확인했으리라. 나의 삶도 역시 일상에서 소소하게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보며 영원한 소망이 책 속에 갇힌 무미건조한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야곱의 삶은 자신이 표현한 대로 순탄치 않고 험악한 세월의 연속이었다. 147년을 살면서 130년이 그랬다. 그러나 생을 마무리하는 마지막은 달랐다. 마치 하나님의 위로와 같았다. 바로의 지극한 애굽 이주 환대… 이후 17년동안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즐거움… 그리고 죽음 이후도 자신이 직접 보지는 못했겠지만, 최상의 장례 절차와 기간… 그리고 남긴 유언대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되어 장례를 치루는 형제들… 정말 복받은 인생임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나그네 길의 막바지에 주시는 안정과 평안의 마무리였다.
-그런데도 야곱은 그 평안과 안정의 애굽 땅에 묻히기를 거부하고 가족들이 묻혀 있는 가나안 땅을 바라본다. 야곱은 이미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올 때 약속하여 주신 동행의 약속은 단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에만 해당되지 않았다. 무수한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민족을 이루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까지 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기에… “내가 먼저 가 있을테니, 너희들 꼭 뒤따라 오너라”는 의지를 몸소 보여 주기를 원했다.
-나는 어떨까? 하나님 나라를 살면서 완전히 이루어질 그 나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가? 이 땅에서 누리는 약간의 평안과 번영이 내 마음을 흔들지 않도록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살아 있을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지금 누리는 이 세상에서의 가치를 기꺼이 내려놓을 만큼 살아있을까?
-무엇보다 내가 죽을 때 나의 아들들에게 한 자리에서 이런 말을 남길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야곱의 죽음은 참 복된 죽음이었구나 실감한다.
-무엇보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남긴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하는 유언처럼, “애들아 나 먼저 주님 품에 있을 테니 너희들도 꼭 와야 한다!”라며 산 소망을 실감나게 전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있을까? 아버지의 믿음의 걸음이 훗날 마지막 유언에 권위를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오늘을 살아내야겠다!
*아. 야곱의 죽음이 참 도전이 된다. 아들들에게 하나님이 하실 일을 들려 줄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그가 부럽다. 숨을 거두기 직전 온 가족이 함께 있었던 그가 부럽다. 무엇보다 그 이별의 시간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진” 시간이었다는 것이 부럽고 부럽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올 때 이랬으면 참 좋겠다… 웃으면서 “나 먼저 주님께 가 있을테니… 뒤따라 오거라”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멋진 마무리를 소망하며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겠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내리라.
*죽음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 보았기에 야곱은 이렇게 유언 할 수 있었고, 장례 기간 동안 장례식을 치루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기에 굳이 가나안까지 왕복하는 장지 선택을 요셉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죽음의 현장이 약속을 확인하는 소망의 자리가 되었다. 나의 죽음의 현장도 그리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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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9일
나머지 아들들에 대한 축복
[창 49:16~28]
야곱이 아들들에 대한 예언을 이어간다. 전체적인 내용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이루어질 일들이다. 열 두명의 아들들이 각기 다양한 삶을 살게 된다. 아들들 모두가 평안과 번영과 축복의 삶을 보장 받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살지만 각양 각색의 삶을 펼쳐간다는 것이다.
아들들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면 유다와 요셉을 제외하고는 모두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 그 자리에서 직접 듣는 아들들의 심정을 어떠했을까? 유언을 시작하면서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49:1)”이라고 했고,이야기하는 도중에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절)”라고 고백하며 이어갔다. 그리고선 마지막 베냐민에게 예언한 후에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새번역_아들 하나 하나에게 알맞게) ‘축복’하였다고 했다(28절).
어떤 시각으로 보면 야곱도 이런 이야기를 내뱉는 자신과 이런 이야기를 듣는 아들들에게 “여호와의 구원”이 필연적으로 필요함을 탄식하며 고백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즉, 유언을 통해 아들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야곱은 자기 시각대로 아들들의 지난 삶을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이들이 “후일에” 어떻게 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후일에 당할 일”이라고 시작하고 아들마다 각기 다른 삶을 이야기 하되 이들이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땅의 지형 특색에 맞게 말한다. 야곱이 각 지파별로 분배 받게 될 땅, 그 지리적인 특징을 어떻게 매칭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입을 통해 ‘아버지의 유언’처럼 들려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내용을 들려 주셨을까? 사실 야곱이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들려주는 말이라면, 우리의 생각에 이런 내용을 말해주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아버지라면 생의 마지막에 아들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인간적인 아버지는 결코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각각 다양한 삶을 살게 될 아들들의 “후일”의 삶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결정 되는 것이 아니라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는 것이다.
단, 갓, 아셀, 납달리, 요셉, 베냐민에게 연이어 선포한 축복은 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샛길의 독사가 말굽을 물어 탄자를 떨어지게 하는 것처럼 지파들 사이에서 심판자 처럼 살 것이고, 어떤 이는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학대를 딛고 무성한 샘곁 가지처럼 풍성한 축복을 받을 것이며, 어떤 이는 물어 뜯는 이리처럼 살 것이다.
다양한 삶이 아들들의 훗날에 펼쳐 질 것이고, 이 삶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펼쳐질 것이다. 하나님의 땅에서 이런 모습이 펼쳐 진다고?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이것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될 것이라는 거다. 그런데 요셉과 극적으로 화해하고 극심한 가뭄을 피해 애굽에 잠시 내려왔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으로 돌아가 살게 될 모습이 이런 모습이라고? 우리의 후손들이 이렇게 살게 될 것이라고? 이렇게 충분히 좌절감을 가질 수 있는 예언을 왜 했을까! 그 목적을 살필 수 있는 두 군데의 구절이 있다.
1.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절)
“주님, 제가 주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새번역_18절).” 야곱이 아들들에게 한참 이어가던 이야기를 멈추고 간절히 기도처럼 내뱉은 말이다. 아. 여기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읽는다. 아들들의 “훗날에” 나타날 삶이 이토록 파란만장하다면, 이들을 도울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각각 아들들에게 해준 말보다, 모두에게 가장 중요하게 들려준 말일 수도 있다. 열 두 아들들과 그들의 후손들 모두가 “주의 구원”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후손들은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을 알았다. 이들을 기다리는 삶은 레드카펫이 깔린 영광스러운 길이 아니다. 다양한 상황에 처하고 다양한 행동이 드러나며, 개중에는 폭력적으로 군림하고, 개중에는 철저히 약자가 되어 억압 당한다. 흔히들 말하는 실패와 성공, 패배와 승리들로 후손들의 훗날이 점철될 것이다. 그 어떠한 일들이 다양하게 후손들의 삶에 일어나더라도 변치 않고 바라보아야 할 것은 바로 “주의 구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고 또 바래야 한다.
결국 이들을 기다리는 가나안 땅의 삶은 완성된 구원의 평안한 삶이 아니라, 늘 구원을 바라고 또 바라야 하는 삶이어야 한다.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간구가 끊이지 않아야 한다. 너무도 연약하기에 그저 기도밖에 붙잡을 것이 없는 삶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때로 자신들의 힘 때문에 교만하여져 오만하게 행하여 파탄에 빠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훗날”이라는 거다.
그러니 아들들 모두는 “주의 구원”을 바랄 수 밖에 없다. 야곱이 쭉 이어서 아들들의 훗날의 삶을 이야기하며 스스로도 “주의 구원”을 바랄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아들들에게 너희들의 삶이 지금 어떻게 선포 되든지, 이것을 운명으로 결정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주의 구원”을 바라는 기도의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2.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이…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전능자로 말미암나니(24-25절)
요셉 또한 축복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수들이 잔인하게 활을 쏘며 달려들어도, 사수들이 적개심을 품고서 그를 과녁으로 삼아도(새번역_23절)” 이라고 시작했다. 그의 삶도 평탄치 않을 것임을 알려준 것이다. 원수들이 죽이려고 작정하여 잔인하게 달려 들 정도로 고난이 있을 것이라는 거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목자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그를 도울 것이라고 축복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잔인하게, 적개심을 품고 과녁을 삼아 활을 쏘며 달려드는 위급하고 다급한 상황에서도 “…..야곱이 섬기는 ‘전능하신 분’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시고, 목자이신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그와 함께 계시고,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너에게 복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위로 하늘에서 내리는 복과, 아래로 깊은 샘에서 솟아오르는 복과, 젖가슴에서 흐르는 복과, 태에서 잉태되는 복을 베푸실 것이다(새번역_24-25절).” 전능하신 하나님이 위기 속에서도 “함께 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복을 베푸실 것”이라는 것이다.
요셉에게만 이런 약속이 주어진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다른 형제들도 각기 자기의 상황에서 “주의 구원”을 바라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은 그들도 또한 “함께 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복을 베푸실 것”을 바라 라는 의미이다. 요셉을 봐라 그가 증거이지 않는가! 라는 의미일 것이다.
3. 단, 갓, 아셀, 요셉(16~26절)
단 지파(16~18절)는 계속 맹독을 가진 독사처럼 원수들에게 위협적이지만, 뱀이 홀로 살듯이 요단강 동편 최북단에 정착하여 멀리 떨어져 살게 될 것이다. 야곱이 연약한 단 지파의 생존을 위해 기도했듯이, 우리 주위에 있는 생존의 위협을 받는 연약한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갓과 아셀, 납달리에 대한 야곱의 축복(19~21절)은 그들은 요단 동편에 자리 잡고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를 것이고, 비옥한 갈릴리 해안에 자리 잡은 아셀은 왕의 수라상을 제공할 것이며, 납달리는 암사슴처럼 빠르고 아름다운 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들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장차 큰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축복(22~26절)은 샘 곁의 무성한 나무가지와 같은 것으로 축복한다. 평생 복을 추구하던 야곱은 이제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바라보면서 자신에게 임한 복이 요셉의 머리로 다가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야곱은 요셉을 보호하실 하나님을 ‘전능자’, ‘목자’, ‘반석’이라고 부른다. 요셉과 자손들은 참으로 대단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자리에 있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며주의 길을 따르는 자이다. 그에게 하나님은 축복을 한없이 부어주시는 분이시다.
나는?
-유다와 요셉을 제외한 형제들은 당장 야곱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들에 대한 예언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유다와 요셉도 자신들에게 들려지는 축복의 소리의 기쁨보다 형제들에게 선포되는 말들이 더 신경 쓰였을 것이다.
-각각 다른 다양한 삶들이 펼쳐 질 것은 분명하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상황에 직면 하든지 “주의 구원”을 바라는 믿음과 “함께 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잊으면 안 된다.
-나에게 주어진 말과 상황이 아무리 어려운 지경이라도 “주의 구원”을 잊지 않고 바라면, 어떤 구원의 역사보다 더 강력한 은혜의 각인이 나의 삶속에 새겨 지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형제들의 훗날의 면면을 이렇게 단편적으로 들려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이해된다. 이렇게 들려진 말이 너희 후손들의 족쇄가 아니라, 보험이다는 것이다. 언젠가 그런 날이 닥치더라도 분명한 보험카드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주의 구원”을 바라고 또 바라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이 분명히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야곱의 유언은 18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아들들의 훗날이 얼마나 당황 스럽겠는가? 자식들에게 닥치게 될 미래를 자신도 알게 된 이상 얼마나 참담하겠는가! 그러니 야곱은 분명히 더 간절하게 이 고백을 내 뱉었을 것이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나 역시 아들들에게 이런 마음이다. “주님, 아들들의 앞길에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들들이 훗날 어떤 모양으로 살든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가장 우선인 인생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아들들의 인생은 곧 나의 인생을 바라보며 형성될 것이 분명하다. 고로 나의 삶이 언제나 “주의 구원”을 겸손히 바라며, 주의 도우심을 감사히 누리는 삶을 아들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리라. 말과 행동이 주님을 부르는 동일한 모습이 언제나 노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없다. 이런 모습 보다는 인간적인 모습이 훨씬 많이 비춰 질 테니… 그래서 오늘 말씀 앞에 다시 결심하고 결심해 본다.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의 말과 행동이 함께 가는 삶 이기를….
*요셉에게 들려준 축복의 말보다 더 마음이 가는 것이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될 아들들의 후손들이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바라나이다”라고 고백했던 할아버지 야곱을 기억하기를 원하는 마음 일 것이다. 그 야곱의 마음이 오늘 내 마음에 꽂혔다!
*미래는 나의 시간이 아니다. 나의 능력의 범주가 아니다. 더더구나 후손의 삶도 나의 권한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한, 주권이기에 구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 은혜 밖에 없음을 절감하고 절감하는 아침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후손들의 삶을 이끄실 것이기에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구원, 도우심”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은 어떤 삶인지 이미 요셉을 통해 보았고,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도 볼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포기하지 말라!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 “요셉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포기하지 말아라!
*야곱의 생의 마지막, 애절한 외침이 귓가에 쟁쟁한 아침이다. 더 많은 축복이 아니라 우리 분량대로 받는 축복이 참 복이다. 나만을 위한 축복이 아니라 받은 만큼 감당할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축복은 타자를 위한 축복도 된다.
*아무리 막대한 재산을 받은 들 하나님을 소유하지 않으면 아무도 축복이 없다. 하나님이 전능자로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면 분명 축복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아들들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면 유다와 요셉을 제외하고는 모두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 그 자리에서 직접 듣는 아들들의 심정을 어떠했을까? 유언을 시작하면서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49:1)”이라고 했고,이야기하는 도중에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절)”라고 고백하며 이어갔다. 그리고선 마지막 베냐민에게 예언한 후에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새번역_아들 하나 하나에게 알맞게) ‘축복’하였다고 했다(28절).
어떤 시각으로 보면 야곱도 이런 이야기를 내뱉는 자신과 이런 이야기를 듣는 아들들에게 “여호와의 구원”이 필연적으로 필요함을 탄식하며 고백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즉, 유언을 통해 아들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야곱은 자기 시각대로 아들들의 지난 삶을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이들이 “후일에” 어떻게 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후일에 당할 일”이라고 시작하고 아들마다 각기 다른 삶을 이야기 하되 이들이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땅의 지형 특색에 맞게 말한다. 야곱이 각 지파별로 분배 받게 될 땅, 그 지리적인 특징을 어떻게 매칭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입을 통해 ‘아버지의 유언’처럼 들려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내용을 들려 주셨을까? 사실 야곱이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들려주는 말이라면, 우리의 생각에 이런 내용을 말해주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아버지라면 생의 마지막에 아들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인간적인 아버지는 결코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각각 다양한 삶을 살게 될 아들들의 “후일”의 삶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결정 되는 것이 아니라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는 것이다.
단, 갓, 아셀, 납달리, 요셉, 베냐민에게 연이어 선포한 축복은 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샛길의 독사가 말굽을 물어 탄자를 떨어지게 하는 것처럼 지파들 사이에서 심판자 처럼 살 것이고, 어떤 이는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학대를 딛고 무성한 샘곁 가지처럼 풍성한 축복을 받을 것이며, 어떤 이는 물어 뜯는 이리처럼 살 것이다.
다양한 삶이 아들들의 훗날에 펼쳐 질 것이고, 이 삶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펼쳐질 것이다. 하나님의 땅에서 이런 모습이 펼쳐 진다고?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이것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될 것이라는 거다. 그런데 요셉과 극적으로 화해하고 극심한 가뭄을 피해 애굽에 잠시 내려왔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으로 돌아가 살게 될 모습이 이런 모습이라고? 우리의 후손들이 이렇게 살게 될 것이라고? 이렇게 충분히 좌절감을 가질 수 있는 예언을 왜 했을까! 그 목적을 살필 수 있는 두 군데의 구절이 있다.
1.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절)
“주님, 제가 주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새번역_18절).” 야곱이 아들들에게 한참 이어가던 이야기를 멈추고 간절히 기도처럼 내뱉은 말이다. 아. 여기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읽는다. 아들들의 “훗날에” 나타날 삶이 이토록 파란만장하다면, 이들을 도울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각각 아들들에게 해준 말보다, 모두에게 가장 중요하게 들려준 말일 수도 있다. 열 두 아들들과 그들의 후손들 모두가 “주의 구원”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후손들은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을 알았다. 이들을 기다리는 삶은 레드카펫이 깔린 영광스러운 길이 아니다. 다양한 상황에 처하고 다양한 행동이 드러나며, 개중에는 폭력적으로 군림하고, 개중에는 철저히 약자가 되어 억압 당한다. 흔히들 말하는 실패와 성공, 패배와 승리들로 후손들의 훗날이 점철될 것이다. 그 어떠한 일들이 다양하게 후손들의 삶에 일어나더라도 변치 않고 바라보아야 할 것은 바로 “주의 구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고 또 바래야 한다.
결국 이들을 기다리는 가나안 땅의 삶은 완성된 구원의 평안한 삶이 아니라, 늘 구원을 바라고 또 바라야 하는 삶이어야 한다.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간구가 끊이지 않아야 한다. 너무도 연약하기에 그저 기도밖에 붙잡을 것이 없는 삶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때로 자신들의 힘 때문에 교만하여져 오만하게 행하여 파탄에 빠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훗날”이라는 거다.
그러니 아들들 모두는 “주의 구원”을 바랄 수 밖에 없다. 야곱이 쭉 이어서 아들들의 훗날의 삶을 이야기하며 스스로도 “주의 구원”을 바랄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아들들에게 너희들의 삶이 지금 어떻게 선포 되든지, 이것을 운명으로 결정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주의 구원”을 바라는 기도의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2.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이…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전능자로 말미암나니(24-25절)
요셉 또한 축복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수들이 잔인하게 활을 쏘며 달려들어도, 사수들이 적개심을 품고서 그를 과녁으로 삼아도(새번역_23절)” 이라고 시작했다. 그의 삶도 평탄치 않을 것임을 알려준 것이다. 원수들이 죽이려고 작정하여 잔인하게 달려 들 정도로 고난이 있을 것이라는 거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목자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그를 도울 것이라고 축복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잔인하게, 적개심을 품고 과녁을 삼아 활을 쏘며 달려드는 위급하고 다급한 상황에서도 “…..야곱이 섬기는 ‘전능하신 분’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시고, 목자이신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그와 함께 계시고,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너에게 복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위로 하늘에서 내리는 복과, 아래로 깊은 샘에서 솟아오르는 복과, 젖가슴에서 흐르는 복과, 태에서 잉태되는 복을 베푸실 것이다(새번역_24-25절).” 전능하신 하나님이 위기 속에서도 “함께 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복을 베푸실 것”이라는 것이다.
요셉에게만 이런 약속이 주어진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다른 형제들도 각기 자기의 상황에서 “주의 구원”을 바라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은 그들도 또한 “함께 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복을 베푸실 것”을 바라 라는 의미이다. 요셉을 봐라 그가 증거이지 않는가! 라는 의미일 것이다.
3. 단, 갓, 아셀, 요셉(16~26절)
단 지파(16~18절)는 계속 맹독을 가진 독사처럼 원수들에게 위협적이지만, 뱀이 홀로 살듯이 요단강 동편 최북단에 정착하여 멀리 떨어져 살게 될 것이다. 야곱이 연약한 단 지파의 생존을 위해 기도했듯이, 우리 주위에 있는 생존의 위협을 받는 연약한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갓과 아셀, 납달리에 대한 야곱의 축복(19~21절)은 그들은 요단 동편에 자리 잡고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를 것이고, 비옥한 갈릴리 해안에 자리 잡은 아셀은 왕의 수라상을 제공할 것이며, 납달리는 암사슴처럼 빠르고 아름다운 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들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장차 큰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축복(22~26절)은 샘 곁의 무성한 나무가지와 같은 것으로 축복한다. 평생 복을 추구하던 야곱은 이제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바라보면서 자신에게 임한 복이 요셉의 머리로 다가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야곱은 요셉을 보호하실 하나님을 ‘전능자’, ‘목자’, ‘반석’이라고 부른다. 요셉과 자손들은 참으로 대단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자리에 있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며주의 길을 따르는 자이다. 그에게 하나님은 축복을 한없이 부어주시는 분이시다.
나는?
-유다와 요셉을 제외한 형제들은 당장 야곱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들에 대한 예언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유다와 요셉도 자신들에게 들려지는 축복의 소리의 기쁨보다 형제들에게 선포되는 말들이 더 신경 쓰였을 것이다.
-각각 다른 다양한 삶들이 펼쳐 질 것은 분명하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상황에 직면 하든지 “주의 구원”을 바라는 믿음과 “함께 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잊으면 안 된다.
-나에게 주어진 말과 상황이 아무리 어려운 지경이라도 “주의 구원”을 잊지 않고 바라면, 어떤 구원의 역사보다 더 강력한 은혜의 각인이 나의 삶속에 새겨 지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형제들의 훗날의 면면을 이렇게 단편적으로 들려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이해된다. 이렇게 들려진 말이 너희 후손들의 족쇄가 아니라, 보험이다는 것이다. 언젠가 그런 날이 닥치더라도 분명한 보험카드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주의 구원”을 바라고 또 바라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이 분명히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야곱의 유언은 18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아들들의 훗날이 얼마나 당황 스럽겠는가? 자식들에게 닥치게 될 미래를 자신도 알게 된 이상 얼마나 참담하겠는가! 그러니 야곱은 분명히 더 간절하게 이 고백을 내 뱉었을 것이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나 역시 아들들에게 이런 마음이다. “주님, 아들들의 앞길에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들들이 훗날 어떤 모양으로 살든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가장 우선인 인생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아들들의 인생은 곧 나의 인생을 바라보며 형성될 것이 분명하다. 고로 나의 삶이 언제나 “주의 구원”을 겸손히 바라며, 주의 도우심을 감사히 누리는 삶을 아들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리라. 말과 행동이 주님을 부르는 동일한 모습이 언제나 노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없다. 이런 모습 보다는 인간적인 모습이 훨씬 많이 비춰 질 테니… 그래서 오늘 말씀 앞에 다시 결심하고 결심해 본다.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의 말과 행동이 함께 가는 삶 이기를….
*요셉에게 들려준 축복의 말보다 더 마음이 가는 것이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될 아들들의 후손들이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바라나이다”라고 고백했던 할아버지 야곱을 기억하기를 원하는 마음 일 것이다. 그 야곱의 마음이 오늘 내 마음에 꽂혔다!
*미래는 나의 시간이 아니다. 나의 능력의 범주가 아니다. 더더구나 후손의 삶도 나의 권한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한, 주권이기에 구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 은혜 밖에 없음을 절감하고 절감하는 아침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후손들의 삶을 이끄실 것이기에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구원, 도우심”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은 어떤 삶인지 이미 요셉을 통해 보았고,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도 볼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포기하지 말라!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 “요셉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포기하지 말아라!
*야곱의 생의 마지막, 애절한 외침이 귓가에 쟁쟁한 아침이다. 더 많은 축복이 아니라 우리 분량대로 받는 축복이 참 복이다. 나만을 위한 축복이 아니라 받은 만큼 감당할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축복은 타자를 위한 축복도 된다.
*아무리 막대한 재산을 받은 들 하나님을 소유하지 않으면 아무도 축복이 없다. 하나님이 전능자로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면 분명 축복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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