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이 아들들에 대한 예언을 이어간다. 전체적인 내용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이루어질 일들이다. 열 두명의 아들들이 각기 다양한 삶을 살게 된다. 아들들 모두가 평안과 번영과 축복의 삶을 보장 받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살지만 각양 각색의 삶을 펼쳐간다는 것이다.
아들들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면 유다와 요셉을 제외하고는 모두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 그 자리에서 직접 듣는 아들들의 심정을 어떠했을까? 유언을 시작하면서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49:1)”이라고 했고,이야기하는 도중에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절)”라고 고백하며 이어갔다. 그리고선 마지막 베냐민에게 예언한 후에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새번역_아들 하나 하나에게 알맞게) ‘축복’하였다고 했다(28절).
어떤 시각으로 보면 야곱도 이런 이야기를 내뱉는 자신과 이런 이야기를 듣는 아들들에게 “여호와의 구원”이 필연적으로 필요함을 탄식하며 고백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즉, 유언을 통해 아들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야곱은 자기 시각대로 아들들의 지난 삶을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이들이 “후일에” 어떻게 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후일에 당할 일”이라고 시작하고 아들마다 각기 다른 삶을 이야기 하되 이들이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땅의 지형 특색에 맞게 말한다. 야곱이 각 지파별로 분배 받게 될 땅, 그 지리적인 특징을 어떻게 매칭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입을 통해 ‘아버지의 유언’처럼 들려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내용을 들려 주셨을까? 사실 야곱이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들려주는 말이라면, 우리의 생각에 이런 내용을 말해주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아버지라면 생의 마지막에 아들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인간적인 아버지는 결코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각각 다양한 삶을 살게 될 아들들의 “후일”의 삶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결정 되는 것이 아니라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는 것이다.
단, 갓, 아셀, 납달리, 요셉, 베냐민에게 연이어 선포한 축복은 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샛길의 독사가 말굽을 물어 탄자를 떨어지게 하는 것처럼 지파들 사이에서 심판자 처럼 살 것이고, 어떤 이는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학대를 딛고 무성한 샘곁 가지처럼 풍성한 축복을 받을 것이며, 어떤 이는 물어 뜯는 이리처럼 살 것이다.
다양한 삶이 아들들의 훗날에 펼쳐 질 것이고, 이 삶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펼쳐질 것이다. 하나님의 땅에서 이런 모습이 펼쳐 진다고?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이것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될 것이라는 거다. 그런데 요셉과 극적으로 화해하고 극심한 가뭄을 피해 애굽에 잠시 내려왔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으로 돌아가 살게 될 모습이 이런 모습이라고? 우리의 후손들이 이렇게 살게 될 것이라고? 이렇게 충분히 좌절감을 가질 수 있는 예언을 왜 했을까! 그 목적을 살필 수 있는 두 군데의 구절이 있다.
1.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절)
“주님, 제가 주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새번역_18절).” 야곱이 아들들에게 한참 이어가던 이야기를 멈추고 간절히 기도처럼 내뱉은 말이다. 아. 여기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읽는다. 아들들의 “훗날에” 나타날 삶이 이토록 파란만장하다면, 이들을 도울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각각 아들들에게 해준 말보다, 모두에게 가장 중요하게 들려준 말일 수도 있다. 열 두 아들들과 그들의 후손들 모두가 “주의 구원”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후손들은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을 알았다. 이들을 기다리는 삶은 레드카펫이 깔린 영광스러운 길이 아니다. 다양한 상황에 처하고 다양한 행동이 드러나며, 개중에는 폭력적으로 군림하고, 개중에는 철저히 약자가 되어 억압 당한다. 흔히들 말하는 실패와 성공, 패배와 승리들로 후손들의 훗날이 점철될 것이다. 그 어떠한 일들이 다양하게 후손들의 삶에 일어나더라도 변치 않고 바라보아야 할 것은 바로 “주의 구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고 또 바래야 한다.
결국 이들을 기다리는 가나안 땅의 삶은 완성된 구원의 평안한 삶이 아니라, 늘 구원을 바라고 또 바라야 하는 삶이어야 한다.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간구가 끊이지 않아야 한다. 너무도 연약하기에 그저 기도밖에 붙잡을 것이 없는 삶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때로 자신들의 힘 때문에 교만하여져 오만하게 행하여 파탄에 빠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훗날”이라는 거다.
그러니 아들들 모두는 “주의 구원”을 바랄 수 밖에 없다. 야곱이 쭉 이어서 아들들의 훗날의 삶을 이야기하며 스스로도 “주의 구원”을 바랄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아들들에게 너희들의 삶이 지금 어떻게 선포 되든지, 이것을 운명으로 결정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주의 구원”을 바라는 기도의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2.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이…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전능자로 말미암나니(24-25절)
요셉 또한 축복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수들이 잔인하게 활을 쏘며 달려들어도, 사수들이 적개심을 품고서 그를 과녁으로 삼아도(새번역_23절)” 이라고 시작했다. 그의 삶도 평탄치 않을 것임을 알려준 것이다. 원수들이 죽이려고 작정하여 잔인하게 달려 들 정도로 고난이 있을 것이라는 거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목자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그를 도울 것이라고 축복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잔인하게, 적개심을 품고 과녁을 삼아 활을 쏘며 달려드는 위급하고 다급한 상황에서도 “…..야곱이 섬기는 ‘전능하신 분’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시고, 목자이신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그와 함께 계시고,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너에게 복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위로 하늘에서 내리는 복과, 아래로 깊은 샘에서 솟아오르는 복과, 젖가슴에서 흐르는 복과, 태에서 잉태되는 복을 베푸실 것이다(새번역_24-25절).” 전능하신 하나님이 위기 속에서도 “함께 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복을 베푸실 것”이라는 것이다.
요셉에게만 이런 약속이 주어진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다른 형제들도 각기 자기의 상황에서 “주의 구원”을 바라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은 그들도 또한 “함께 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복을 베푸실 것”을 바라 라는 의미이다. 요셉을 봐라 그가 증거이지 않는가! 라는 의미일 것이다.
3. 단, 갓, 아셀, 요셉(16~26절)
단 지파(16~18절)는 계속 맹독을 가진 독사처럼 원수들에게 위협적이지만, 뱀이 홀로 살듯이 요단강 동편 최북단에 정착하여 멀리 떨어져 살게 될 것이다. 야곱이 연약한 단 지파의 생존을 위해 기도했듯이, 우리 주위에 있는 생존의 위협을 받는 연약한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갓과 아셀, 납달리에 대한 야곱의 축복(19~21절)은 그들은 요단 동편에 자리 잡고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를 것이고, 비옥한 갈릴리 해안에 자리 잡은 아셀은 왕의 수라상을 제공할 것이며, 납달리는 암사슴처럼 빠르고 아름다운 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들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장차 큰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축복(22~26절)은 샘 곁의 무성한 나무가지와 같은 것으로 축복한다. 평생 복을 추구하던 야곱은 이제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바라보면서 자신에게 임한 복이 요셉의 머리로 다가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야곱은 요셉을 보호하실 하나님을 ‘전능자’, ‘목자’, ‘반석’이라고 부른다. 요셉과 자손들은 참으로 대단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자리에 있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며주의 길을 따르는 자이다. 그에게 하나님은 축복을 한없이 부어주시는 분이시다.
나는?
-유다와 요셉을 제외한 형제들은 당장 야곱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들에 대한 예언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유다와 요셉도 자신들에게 들려지는 축복의 소리의 기쁨보다 형제들에게 선포되는 말들이 더 신경 쓰였을 것이다.
-각각 다른 다양한 삶들이 펼쳐 질 것은 분명하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상황에 직면 하든지 “주의 구원”을 바라는 믿음과 “함께 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잊으면 안 된다.
-나에게 주어진 말과 상황이 아무리 어려운 지경이라도 “주의 구원”을 잊지 않고 바라면, 어떤 구원의 역사보다 더 강력한 은혜의 각인이 나의 삶속에 새겨 지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형제들의 훗날의 면면을 이렇게 단편적으로 들려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이해된다. 이렇게 들려진 말이 너희 후손들의 족쇄가 아니라, 보험이다는 것이다. 언젠가 그런 날이 닥치더라도 분명한 보험카드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주의 구원”을 바라고 또 바라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이 분명히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야곱의 유언은 18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아들들의 훗날이 얼마나 당황 스럽겠는가? 자식들에게 닥치게 될 미래를 자신도 알게 된 이상 얼마나 참담하겠는가! 그러니 야곱은 분명히 더 간절하게 이 고백을 내 뱉었을 것이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나 역시 아들들에게 이런 마음이다. “주님, 아들들의 앞길에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들들이 훗날 어떤 모양으로 살든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가장 우선인 인생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아들들의 인생은 곧 나의 인생을 바라보며 형성될 것이 분명하다. 고로 나의 삶이 언제나 “주의 구원”을 겸손히 바라며, 주의 도우심을 감사히 누리는 삶을 아들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리라. 말과 행동이 주님을 부르는 동일한 모습이 언제나 노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없다. 이런 모습 보다는 인간적인 모습이 훨씬 많이 비춰 질 테니… 그래서 오늘 말씀 앞에 다시 결심하고 결심해 본다.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의 말과 행동이 함께 가는 삶 이기를….
*요셉에게 들려준 축복의 말보다 더 마음이 가는 것이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될 아들들의 후손들이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바라나이다”라고 고백했던 할아버지 야곱을 기억하기를 원하는 마음 일 것이다. 그 야곱의 마음이 오늘 내 마음에 꽂혔다!
*미래는 나의 시간이 아니다. 나의 능력의 범주가 아니다. 더더구나 후손의 삶도 나의 권한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한, 주권이기에 구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 은혜 밖에 없음을 절감하고 절감하는 아침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후손들의 삶을 이끄실 것이기에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구원, 도우심”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은 어떤 삶인지 이미 요셉을 통해 보았고,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도 볼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포기하지 말라!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 “요셉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포기하지 말아라!
*야곱의 생의 마지막, 애절한 외침이 귓가에 쟁쟁한 아침이다. 더 많은 축복이 아니라 우리 분량대로 받는 축복이 참 복이다. 나만을 위한 축복이 아니라 받은 만큼 감당할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축복은 타자를 위한 축복도 된다.
*아무리 막대한 재산을 받은 들 하나님을 소유하지 않으면 아무도 축복이 없다. 하나님이 전능자로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면 분명 축복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아들들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면 유다와 요셉을 제외하고는 모두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 그 자리에서 직접 듣는 아들들의 심정을 어떠했을까? 유언을 시작하면서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49:1)”이라고 했고,이야기하는 도중에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절)”라고 고백하며 이어갔다. 그리고선 마지막 베냐민에게 예언한 후에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새번역_아들 하나 하나에게 알맞게) ‘축복’하였다고 했다(28절).
어떤 시각으로 보면 야곱도 이런 이야기를 내뱉는 자신과 이런 이야기를 듣는 아들들에게 “여호와의 구원”이 필연적으로 필요함을 탄식하며 고백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즉, 유언을 통해 아들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야곱은 자기 시각대로 아들들의 지난 삶을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이들이 “후일에” 어떻게 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후일에 당할 일”이라고 시작하고 아들마다 각기 다른 삶을 이야기 하되 이들이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땅의 지형 특색에 맞게 말한다. 야곱이 각 지파별로 분배 받게 될 땅, 그 지리적인 특징을 어떻게 매칭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입을 통해 ‘아버지의 유언’처럼 들려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내용을 들려 주셨을까? 사실 야곱이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들려주는 말이라면, 우리의 생각에 이런 내용을 말해주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아버지라면 생의 마지막에 아들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인간적인 아버지는 결코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각각 다양한 삶을 살게 될 아들들의 “후일”의 삶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결정 되는 것이 아니라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는 것이다.
단, 갓, 아셀, 납달리, 요셉, 베냐민에게 연이어 선포한 축복은 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샛길의 독사가 말굽을 물어 탄자를 떨어지게 하는 것처럼 지파들 사이에서 심판자 처럼 살 것이고, 어떤 이는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학대를 딛고 무성한 샘곁 가지처럼 풍성한 축복을 받을 것이며, 어떤 이는 물어 뜯는 이리처럼 살 것이다.
다양한 삶이 아들들의 훗날에 펼쳐 질 것이고, 이 삶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펼쳐질 것이다. 하나님의 땅에서 이런 모습이 펼쳐 진다고?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이것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될 것이라는 거다. 그런데 요셉과 극적으로 화해하고 극심한 가뭄을 피해 애굽에 잠시 내려왔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으로 돌아가 살게 될 모습이 이런 모습이라고? 우리의 후손들이 이렇게 살게 될 것이라고? 이렇게 충분히 좌절감을 가질 수 있는 예언을 왜 했을까! 그 목적을 살필 수 있는 두 군데의 구절이 있다.
1.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절)
“주님, 제가 주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새번역_18절).” 야곱이 아들들에게 한참 이어가던 이야기를 멈추고 간절히 기도처럼 내뱉은 말이다. 아. 여기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읽는다. 아들들의 “훗날에” 나타날 삶이 이토록 파란만장하다면, 이들을 도울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각각 아들들에게 해준 말보다, 모두에게 가장 중요하게 들려준 말일 수도 있다. 열 두 아들들과 그들의 후손들 모두가 “주의 구원”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후손들은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을 알았다. 이들을 기다리는 삶은 레드카펫이 깔린 영광스러운 길이 아니다. 다양한 상황에 처하고 다양한 행동이 드러나며, 개중에는 폭력적으로 군림하고, 개중에는 철저히 약자가 되어 억압 당한다. 흔히들 말하는 실패와 성공, 패배와 승리들로 후손들의 훗날이 점철될 것이다. 그 어떠한 일들이 다양하게 후손들의 삶에 일어나더라도 변치 않고 바라보아야 할 것은 바로 “주의 구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고 또 바래야 한다.
결국 이들을 기다리는 가나안 땅의 삶은 완성된 구원의 평안한 삶이 아니라, 늘 구원을 바라고 또 바라야 하는 삶이어야 한다.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간구가 끊이지 않아야 한다. 너무도 연약하기에 그저 기도밖에 붙잡을 것이 없는 삶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때로 자신들의 힘 때문에 교만하여져 오만하게 행하여 파탄에 빠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훗날”이라는 거다.
그러니 아들들 모두는 “주의 구원”을 바랄 수 밖에 없다. 야곱이 쭉 이어서 아들들의 훗날의 삶을 이야기하며 스스로도 “주의 구원”을 바랄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아들들에게 너희들의 삶이 지금 어떻게 선포 되든지, 이것을 운명으로 결정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주의 구원”을 바라는 기도의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2.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이…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전능자로 말미암나니(24-25절)
요셉 또한 축복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수들이 잔인하게 활을 쏘며 달려들어도, 사수들이 적개심을 품고서 그를 과녁으로 삼아도(새번역_23절)” 이라고 시작했다. 그의 삶도 평탄치 않을 것임을 알려준 것이다. 원수들이 죽이려고 작정하여 잔인하게 달려 들 정도로 고난이 있을 것이라는 거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목자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그를 도울 것이라고 축복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잔인하게, 적개심을 품고 과녁을 삼아 활을 쏘며 달려드는 위급하고 다급한 상황에서도 “…..야곱이 섬기는 ‘전능하신 분’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시고, 목자이신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그와 함께 계시고,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너에게 복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위로 하늘에서 내리는 복과, 아래로 깊은 샘에서 솟아오르는 복과, 젖가슴에서 흐르는 복과, 태에서 잉태되는 복을 베푸실 것이다(새번역_24-25절).” 전능하신 하나님이 위기 속에서도 “함께 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복을 베푸실 것”이라는 것이다.
요셉에게만 이런 약속이 주어진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다른 형제들도 각기 자기의 상황에서 “주의 구원”을 바라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은 그들도 또한 “함께 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복을 베푸실 것”을 바라 라는 의미이다. 요셉을 봐라 그가 증거이지 않는가! 라는 의미일 것이다.
3. 단, 갓, 아셀, 요셉(16~26절)
단 지파(16~18절)는 계속 맹독을 가진 독사처럼 원수들에게 위협적이지만, 뱀이 홀로 살듯이 요단강 동편 최북단에 정착하여 멀리 떨어져 살게 될 것이다. 야곱이 연약한 단 지파의 생존을 위해 기도했듯이, 우리 주위에 있는 생존의 위협을 받는 연약한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갓과 아셀, 납달리에 대한 야곱의 축복(19~21절)은 그들은 요단 동편에 자리 잡고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를 것이고, 비옥한 갈릴리 해안에 자리 잡은 아셀은 왕의 수라상을 제공할 것이며, 납달리는 암사슴처럼 빠르고 아름다운 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들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장차 큰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축복(22~26절)은 샘 곁의 무성한 나무가지와 같은 것으로 축복한다. 평생 복을 추구하던 야곱은 이제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바라보면서 자신에게 임한 복이 요셉의 머리로 다가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야곱은 요셉을 보호하실 하나님을 ‘전능자’, ‘목자’, ‘반석’이라고 부른다. 요셉과 자손들은 참으로 대단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자리에 있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며주의 길을 따르는 자이다. 그에게 하나님은 축복을 한없이 부어주시는 분이시다.
나는?
-유다와 요셉을 제외한 형제들은 당장 야곱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들에 대한 예언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유다와 요셉도 자신들에게 들려지는 축복의 소리의 기쁨보다 형제들에게 선포되는 말들이 더 신경 쓰였을 것이다.
-각각 다른 다양한 삶들이 펼쳐 질 것은 분명하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상황에 직면 하든지 “주의 구원”을 바라는 믿음과 “함께 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잊으면 안 된다.
-나에게 주어진 말과 상황이 아무리 어려운 지경이라도 “주의 구원”을 잊지 않고 바라면, 어떤 구원의 역사보다 더 강력한 은혜의 각인이 나의 삶속에 새겨 지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형제들의 훗날의 면면을 이렇게 단편적으로 들려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이해된다. 이렇게 들려진 말이 너희 후손들의 족쇄가 아니라, 보험이다는 것이다. 언젠가 그런 날이 닥치더라도 분명한 보험카드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주의 구원”을 바라고 또 바라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이 분명히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야곱의 유언은 18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아들들의 훗날이 얼마나 당황 스럽겠는가? 자식들에게 닥치게 될 미래를 자신도 알게 된 이상 얼마나 참담하겠는가! 그러니 야곱은 분명히 더 간절하게 이 고백을 내 뱉었을 것이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나 역시 아들들에게 이런 마음이다. “주님, 아들들의 앞길에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들들이 훗날 어떤 모양으로 살든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가장 우선인 인생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아들들의 인생은 곧 나의 인생을 바라보며 형성될 것이 분명하다. 고로 나의 삶이 언제나 “주의 구원”을 겸손히 바라며, 주의 도우심을 감사히 누리는 삶을 아들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리라. 말과 행동이 주님을 부르는 동일한 모습이 언제나 노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없다. 이런 모습 보다는 인간적인 모습이 훨씬 많이 비춰 질 테니… 그래서 오늘 말씀 앞에 다시 결심하고 결심해 본다.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의 말과 행동이 함께 가는 삶 이기를….
*요셉에게 들려준 축복의 말보다 더 마음이 가는 것이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될 아들들의 후손들이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바라나이다”라고 고백했던 할아버지 야곱을 기억하기를 원하는 마음 일 것이다. 그 야곱의 마음이 오늘 내 마음에 꽂혔다!
*미래는 나의 시간이 아니다. 나의 능력의 범주가 아니다. 더더구나 후손의 삶도 나의 권한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한, 주권이기에 구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 은혜 밖에 없음을 절감하고 절감하는 아침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후손들의 삶을 이끄실 것이기에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구원, 도우심”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은 어떤 삶인지 이미 요셉을 통해 보았고,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도 볼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포기하지 말라!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 “요셉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포기하지 말아라!
*야곱의 생의 마지막, 애절한 외침이 귓가에 쟁쟁한 아침이다. 더 많은 축복이 아니라 우리 분량대로 받는 축복이 참 복이다. 나만을 위한 축복이 아니라 받은 만큼 감당할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축복은 타자를 위한 축복도 된다.
*아무리 막대한 재산을 받은 들 하나님을 소유하지 않으면 아무도 축복이 없다. 하나님이 전능자로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면 분명 축복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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