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17:7-18 므낫세 지파의 실패, 요셉 자손의 불평
므낫세 지파의 절반은 이미 모세를 통해 요단 동편을 기업으로 받았다(수 13:29~33). 남은 므낫세 반 지파가 받은 요단 서편 땅 경계에 대한 소개와 므낫세 지파의 기업 분배 후 요셉 자손이 한 분깃만 받은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고 이에 따른 여호수아의 반응이 이어진다.
1. 므낫세 지파의 경계에 대한 묘사(7~11절)
므낫세 지파의 경계와 주요 성읍들을 언급한다. 남쪽 경계는 아셀(아셀 지파가 아니라 남부 성읍 이름) 에서 시작한다(7절). 아셀에서부터 세겜 앞 믹므다를 거쳐 엔답부아 경계에 이른다. 믹므다는 에브라임 지파 북쪽 경계선으로 이미 언급되었다(16:6). 그리고 역시 에브라임 지파 북쪽 경계의 성읍인 가나 시내 남쪽으로 이어진다(9a절). 이처럼 므낫세 지파의 남쪽 경계는 곧 에브라임 지파의 북쪽 경계와 맞닿는다. 이 때문에 므낫세 경내에 있는 답부아와 가나 시내 남쪽의 성읍들이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다(16:9). 이것은 두 지파 간에 형성된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향후 지파의 영토가 확정된 후에 약간의 재조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0절은 므낫세 지파의 영토 경계를 요약하는데, 남쪽으로는 에브라임 지파와 영토를 접하고 북쪽으로는 아셀과 잇사갈 지파의 영토와 접한다.
11절은 잇사갈 지파와 아셀 지파 내에 있는 므낫세의 성읍들을 언급한다. 벧 스안, 이블르암, 엔돌, 다아낙, 므깃도가 이에 해당한다. 이 성읍들과 주위의 촌락들도 포함된다. 에브라임 지파가 므낫세 지파의 기업 내에서 성읍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유사하게 므낫세 지파 역시 잇사갈과 아셀의 영토에서 여섯 개의 성읍을 갖게 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지파와 지파 사이의 경계선이 형성되었으나 이처럼 예외적인 경우들이 생긴 듯하다. 이러한 예외가 발생하게 된 구체적인 배경은 알 수 없으나 이 같은 경우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연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2. 므낫세 지파의 실패담(12~13절)
역시 앞선 유다와 에브라임 지파와 마찬가지로 므낫세 지파의 실패를 언급한다. 므낫세도 가나안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여 가나안 사람들이 그 이후로 므낫세 지파와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에브라임 지파와 엇비슷하게 므낫세 지파는 강성하였지만, 가나안의 주민들에게 노역만 시키고 쫓아내지 않았다. 이것이 결국 사사 시대 므낫세 지파의 실패로 이어진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를 멀리할 것과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의 위험성을 반복적으로 경고했다(신 12:29~31).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신명기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3. 요셉 자손의 불만과 여호수아의 제안(14~18절)
요셉 자손의 기업 분배가 마무리된 직후, 그들이 여호수아를 찾아와 땅 분배와 관련하여 불만을 토로한다(14절). 그들이 실제로 두 지파임에도 불구하고 한 분깃만 받았다는 것이다(14절_”큰 민족이거늘… 한 분깃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까?). 요셉 자손 중 므낫세에 비해 장자권을 지닌 에브라임에게는 상대적으로 작은 땅이 주어진 관계로 주된 불만은 에브라임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15절에서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산지가 너희에게 좁다’라는 말을 통해 추론의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에브라임의 인구는 민수기에서 2차 계수할 때는 32,500명으로 시므온 다음으로 가장 적은 인구였다. 므낫세도 52,700으로 평균 수준이었다. 게다가 에브라임은 1차 계수 인구 40,500명보다 더 줄어 있었다. 오히려 므낫세가 1차 32,200명보다 늘어났다. 참고로 인접한 유다 지파의 인구는 76,500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렇다면 왜 요셉 자손은 “내가 더 큰 민족이다”라며 땅을 더 달라고 과도한 요구했을까? 일단 여호수아가 15절과 17절에서 “너희는 큰 민족”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볼 때 과도한 요구를 했다고 볼 수 없다. 본문의 상황은 1차 땅 분배 이후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로 추론할 수 있다. 여호수아의 노년기에 에브라임의 불만이 터지면서 일어난 사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추론이 타당하다면 2차 인구 계수를 한 뒤 30년쯤 흐른 뒤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의 나이도 110세에 가까워져 온 때이다. 여호수아는 갈렙과 비슷한 80세에 가나안 땅에 들어와 110세에 사망했다(24:30). 30년 세월 동안 요셉 자손 특히 에브라임 지파의 인구가 급격히 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신명기 모세의 임종 예언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큰 복을 받을 것인데, 그 후손은 ‘에브라임은 만만이요 므낫세는 천천이 될 것이다(신 33:17)’라고 예언 하였다. 므낫세는 요단 동편 땅까지 할당받아 매우 큰 땅을 갖게 되었으니, 불만의 소지는 없었다. 하지만 에브라임은 므낫세와 유다에 비해 땅이 매우 작은 편이기에 만일 인구가 많이 늘어났다면 불만을 품을 만했을 것이다.
그렇다치더라도 요셉 자손의 문제 제기는 매우 성숙하지 못했다. 자칫 이스라엘 공동체의 균열을 가져올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받은 땅은 제비뽑기로 하나님이 결정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단호하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새로운 땅, 인근의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을 정복하라고 권면한 것이다(15절). 그 땅은 넓은 이스르엘 평원을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셉 자손은 그들은 거인족에다가 철 병거를 가진 강력한 세력이라고 말하면서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여호수아의 권면은 여태껏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복해야 할 땅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요셉 자손의 반응은 상당히 실망스럽다. 그 땅은 넉넉한 땅도 아니고, 그 주민들에게는 철 병거가 있어 정복하기에 어려운 땅이라는 것이다(16절). 풀이하자면 좀 더 풍요롭고 차지하기 쉬운 땅을 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재차 도전한다. 자신들이 말한 대로 요셉 자손은 큰 민족이기 때문에 가나안의 철 병거를 쫓아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18절). 이런 도전을 통해 여호수아는 요셉 자손이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를 일깨운다. 즉, 가나안의 철 병거를 보지 말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유다, 에브라임 지파에 이어 므낫세 지파도 자신들에게 할당된 이 성읍들을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한다. 그런데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다. 그들을 종으로 삼아 노역을 시켰기 때문이다(13절). 사 1:27에서도 동일하게 언급한다. 이만하면 됐다. 설마 그렇게 될까? 라는 안일한 영적 느슨함을 틈타 죄는 선명하게 물든다. 철저하게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나안 전쟁이 종전되지 않았음에도 지파들 사이에 하나님 명령에 대한 느슨함이 공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 느슨함이 머잖아 공동체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불평하는 요셉 자손의 모습이 마뜩잖다. 그 모습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가장 험한 지역을 먼저 요구한 갈렙의 모습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둘 다 산지를 유업으로 받았고, 강한 가나안 사람들과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이다.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믿음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갈렙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실 승리를 바라본다면, 요셉 자손은 이스라엘이 군사력으로는 결코 상대할 수 없는 거인족속과 철 병거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보느냐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한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지도자다. 하지만 자신에게 찾아온 요셉 자손을 대할 때 혈연적인 이유로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사사로운 감정이나 정에 이끌리지 않는 공명정대한 지도력을 행사한다. 그들에게 이미 두 몫이 주어진 것만으로 축복임을 알게 해주고, 산지가 주는 장점도 알려서 설득한다. 가나안의 철 병거가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 하게 하고, 우리가 믿음으로 철 병거를 상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요셉 자손의 불평을 진노로 다스리지 않으시고 여호수아를 통해 믿음으로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다. 하나님은 두려움에서 오는 실패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다만 돌이킬 기회와 능력을 주신다. 돌이킬 믿음의 도전을 놓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두려움 때문에 실패한 무수한 신앙의 선조들이 있었다. 하지만 돌이킬 은혜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거목으로 성장하고 성숙했다.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가, 두려움 때문에 부활의 주님을 감추고 대제사장들의 칼날을 피해 문 뒤에 숨어 있던 제자들이, 사도 바울과의 전도여행을 중도 하차했던 마가 요한이 그랬다. 오늘날 우리가 그럴 것이다.
-누구나 두려움이 있고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실패가 과정이 되어야 한다. 결론이 되면 곤란하다. 요셉 자손의 이야기는 과정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정죄하지 않으시는 주님은 실패의 과정을 판단하지 않으신다. 고의적인 실패가 아닌 실수는 하나님의 긍휼의 통로이다.
*주님, 유다, 에브라임, 므낫세 지파가 연이어 가나안 거민들을 쫓아내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유익과 편리함을 위해 그들을 종 삼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존중받지 못하고 타협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혹시 나는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겠습니다.
*주님, 요셉 자손의 불평이 어린아이가 떼쓰는 듯합니다. 개척하라는 여호수아의 권면에 거인 족속, 철 병거 핑계만 댑니다. 저의 모습은 어떨까요?
*주님, 그럼에도 요셉 자손의 실패를 어루만져 주시는 긍휼을 봅니다. 그 긍휼로 저도 이끌고 계심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