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1-25 에필로그 _ 세례 요한의 수태고지 이야기
누가복음은 데오빌로에게 헌정하는 서문으로 저술 배경과 목적을 밝히며 시작한다. 1:5~2:52까지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에 관한 긴 단락이 이어진다. 1~17절은 천사 가브리엘이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가랴에게 자녀의 탄생을 알린다. 18~25절은 자녀 출생에 관한 메시지 후에 사가랴와 천사의 대화가 이어지고,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한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고 엘리사벳은 천사의 말대로 잉태한다.
1. 누가복음 서문(1~4절)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을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된 자들’이 증언한다. 이렇게 소개하는 이유는 예수님과 동행하며 부활의 증인으로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참한 그들이 전해준 내력을 자기 의도와 목적을 갖고 엮으려고 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고 밝힌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이후 30 여년이 지나는 동안 기록과 구전으로 전해진 예수님 이야기를 일차 목격자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좀 더 정확한 형태인 기록으로 보존하려는 시도들이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사실 여부를 판단할 사도의 역할이 중요했다.
누가 역시 후원자인 데오빌로의 지원으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누가는 이 이야기(내력)를 쓰면서 자신의 각오를 선명하게 밝힌다. 누가는 내력에 관한 “모든 일”을 그 “근원부터” 기록한다. 예수님의 이야기 자료의 진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구전과 기록 형태로 남겨진 모든 것을 자세히 미루어 살핀 후 차례대로 써 내려갔다. 이렇게 한 목적은 “후원자 데오빌로가 알고 있는 바를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누가는 예수와 복음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위해서 (일차적으로 데오빌로에게, 이차적으로는 누가복음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복음을 기록하기 위해 집중했을 것이다.
2. 세례 요한을 탄생을 예고하는 천사 가브리엘(5~17절)
누가가 먼저 인용한 역사적 자료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담담하게 소개한다. 헤롯 왕이 통치할 때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있었다. 사가랴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는 기억하신다.”이다. 사가랴 부부는 하나님 앞에 의인들이었고, 모든 계명과 규례를 흠 없이 행했다(6절). 그러나 엘리사벳은 불임으로 자녀가 없었고, 부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가 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사가랴가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는 기회를 얻었다(8~9절). 그가 백성을 대신하여 기도를 뜻하는 분향을 하는 동안 백성은 기도로 동참했다(10절).
그렇게 사가랴가 분향하는 동안 주의 천사 가브리엘이 향단 우편에 섰다(11절). 가브리엘은 사가랴의 이름을 부르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고 그의 기도가 들렸다고 알린다(13절).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지만 자녀가 없는 사가랴는 자녀를 위해 수없이 기도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또한 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원과 속량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을 것이다. 천사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전한 기도의 응답은 엘리사벳이 아들 요한이 낳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의 탄생은 아버지의 기쁨일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기쁨이 될 것이다(14절).
제사장으로서 자녀가 없다는 것은 당시 복의 기준인 자녀가 많은 것과 비교하여 분명 낙심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의롭게” 살았다(6절). 일반적으로 규정해 놓은 복의 기준인 자녀를 얻지 못한 것은 두 사람의 죄 때문이 아니었다. 의로운 삶을 살고 있었지만 세상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복을 누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범죄하여 이렇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기도를 듣고 계셨다. 사가랴를 찾아 온 천사 가브리엘은 그들의 기도를 기억하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기도 응답의 때와 방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사가랴는 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의 속량을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은 침묵하실 때도 사가랴의 기도를 듣고 계셨고, 백성을 대표하는 제사장의 ㅣ기도를 통해 백성의 기도를 듣고 계셨다.
기도하던 사가랴에게 하나님의 계획이 전달되었다. 이 계획은 개인에게 복된 기도 응답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위한 응답임을 보여준다. 요한은 이스라엘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수행할 것이다.
15~17절은 아이의 미래에 대한 예고다. 요한은 주 앞에서 위대한 선지자가 될 것이다. “모태로부터”는 전형적인 선지자의 소명을 의미한다(갈 1:15). 요한은 선지자로서 포도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다(레 10:9). 술 대신 성령으로 채워지는 생애를 시작할 것이다(15절). 그리고 경건하게 살면서 백성을 돌이키게 하는 사명을 수행할 것이다. 이와 같은 요한의 사명은 말라기 4:5~6을 성취한다. 요한의 사역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가정과 이웃을 위하는 삶으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이 올 때까지 백성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며, 예수님은 백성을 회복하는 사역을 행하실 것이다
3. 천사 가브리엘의 약속에 대한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반응(18~25절)
천사의 예고를 들은 사가랴는 나이든 부부에게 어떻게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의심한다. 그러자 천사는 자신의 이름이 “가브리엘”임을 밝힌다(18절). 가브리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명령과 사명에 따라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왔다고 말한다. 이는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곧 기도의 응답을 의미하기에 사가랴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지만 천사가 전한 말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19절).
가브리엘은 믿지 못하는 사가랴에게 자신이 전한 말이 성취되기까지 말을 못하는 벌을 받는다. 한편 백성은 사가랴가 성전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자 이상하게 생각한다(20절). 왜냐하면 제사장이 하나님의 존전에 너무 가까이 그리고 너무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랜 시간 끝에 성전에서 나온 사가랴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성전에서 환상을 보고 놀란 줄로 생각한다.
사가랴는 직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고 엘리사벳은 약속대로 아들을 낳는다. 그녀는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25절)”라고 고백한다. “돌아보다(에페이덴)”는 하나님의 개입을 의미하고, “방문하다(에피스켑토마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기도를 듣고 기억하신 하나님이 드디어 개입하신 것이다. 그리고 개입하신 목적은 “수치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믿기 어려운 방법으로 개입하시고 하나님의 개입은 사회적 수치가 제거되는 결과로 나타난다. 창세기의 사라와 라헬처럼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수치를 제거 받은 여인의 신앙에 동참하게 된다. 때로 기도의 응답이 길어져서 근심되는 침묵이 이어질지라도 그 하나님의 침묵이 기도가 허공으로 날아갔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삶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을 가장 효과적으로(차례대로) 기술하여 이미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해줄 탄탄한 신앙의 근거를 제시한다. 참 진리는 역사에 뿌리내린 진리이고 역사 속에서 구현되는 진리이며, 참 신앙은 사변이나 감정에 머물지 않고 눈앞의 역사적 현실을 진리로 해석하고 온몸으로 참여하는 일이다.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을 한 사람(데오빌로)에게라도 전하고 가르칠 때, 이 모든 일을 근원부터 꼼꼼하고 자세하게 살피어 그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시작되어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완성 될지를 분명하게 가르치는 누가의 정성을 닮아야 하겠다. 나도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꼼꼼하게 가르치고 양육해야 하리라.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의인이요 흠 없이 말씀을 행하는 자였지만, 불임으로 큰 고통과 수치를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불임은 죄의 결과가 아니다. 영적 불임의 시대를 구원할 선지자가 불임의 가정에서 나게 하심으로써 인류의 수치를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다. 이로 보건데 신실한 신앙인의 고난이 누군가를 살리고 건지는 하나님의 역사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사가랴 부부에게 아들 요한의 탄생을 약속하신다. 이 아들은 부부에게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기쁨이 될 것이다. 요한을 통해 이루실 일을 이루신다. 요한은 영적 불임 가운데 있는 인류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전하여 주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악인이 의인의 길로 죄인이 생명의 길로 나아오는 것만큼 주님께 기쁨은 없다.
-요한의 탄생은 사가랴 부부의 생식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자녀를 소유하고픈 욕망의 결실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고 약속하신 대로 언약을 지키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결과이다. 사가랴는 자녀가 태어날 것이라는 “좋은 소식”을 들었지만 그것을 알릴 수 없는 “침묵”도 같이 받았다. 때로 나의 무능과 연약함이 주님의 능력과 복음이 가장 잘 역사할 수 있는 통로가 되며,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이 가장 또렷이 드러나는 배경이 된다.
*자손의 약속에 대하여 불신의 웃음으로 반응했던 노년의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사가랴 역시 하나님의 벅찬 계획을 듣고 믿지 못하고 징조를 구하고 만다. 자신의 일생에 다시 올 수 없는 성소 분향의 기회를 얻은 그때에, 환상을 통해 주의 약속까지 듣고도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 늙은 자신과 아내 엘리사벳만 생각한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이었다. 어쩌면 가브리엘이 들려준 좋은 소식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이 될 수 없는 그 자체로는 황당하지만 소식이었다. 즉,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절대 신뢰와 자격 없는 자신에게 임한 은혜에 대한 겸손한 믿음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믿기지 않는 복음이었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도 믿지 못한다.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어주었고, 그가 맡은 사명까지 일러주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천사 가브리엘은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사가랴가 말을 못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아이를 낳기까지 징조가 될 것이다. 이것은 긴 침묵을 끝내고 구약에서 약속하신 새 역사를 여시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반응이 “신뢰의 기다림”, “침묵 속에 드리는 찬양”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또한 이미 구약에서 약속되어 온 복음은 이토록 오랫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침묵되고 잊힌 상태에서 성취의 때를 만나도 있다는 뜻도 된다.
*한나가 성전에서 돌아온 후 아이가 생겼듯이(삼상 1:19-20), 엘리사벳도 사가랴가 집으로 돌아온 후 수태한다. 다섯 달 동안 이 사실을 숨기고, 귀가 멀고 입이 막힌 남편 일과 믿기지 않는 자신의 수태를 경험하면서, 엘리사벳은 서둘러 자랑하여 수치를 면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이 드러내실 때까지(36절) 입을 닫는다. *왜 하나님은 오랫동안 아이를 잉태하지 못하는 ‘불임 여성’들을 통하여 일하셨을까? 이사야는 이것을 “임신하지 못하고 아기를 낳지 못하는 너는 노래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겪어 본 적이 없는 너는 환성을 울리며 소리를 높여라. 아이를 못 낳아 버림받은 여인이 남편과 사는 여인보다 더 많은 자녀를 볼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새번역_사 54:1)”라는 예언을 통해 “고난 받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과 연결하였다. 고대 세계 자녀를 잉태하지 못하는 수치와 고통조차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는 통로로 사용하심으로 수치와 고통을 잊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능력과 감격이 “실제”임을 도드라지게 체감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토록 놀랍다.
*하나님은 사라처럼(창 21:1), 라헬처럼(창 30:23),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때에 아무런 소망도 품지 않았던 엘리사벳의 태를 여셔서 자식 없는 여인의 수치를 벗겨주셨다. 이것은 한 가정에게만 주신 복음이 아니었다. 새로운 소망과 위로가 가득한 종말의 시대를 여신 은혜의 손길이었다.
*주님, 기도했지만, 응답이 왔을 때 믿기지 못하는 사가랴의 모습이 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응답을 거두지 않으시고, 약속하신 대로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소망이 됩니다.
*주님, 가장 큰 기도 응답을 받았지만, 철저하게 침묵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신비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인간의 입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이 성실하게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 응답이 완성됨을 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늘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