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41-52 예수님의 성장기
예수가 열두 살 때 온 가족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야기다. 절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올랐다가 아들이 없음을 깨닫고 3일 동안 찾다가 성전에서 예수를 발견한다. 예수는 그곳에서 율법 선생들의 토론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모두가 예수의 지혜에 탄복한다. 이 단락은 소년 예수의 말과 행동에 집중한다. 이제까지 예수는 탄생 예고와 탄생 장면에 수동적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능동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설명한다. 무엇보다 성전에서 보여준 예수의 모습과 누가복음에서 처음으로 기록된 예수의 말은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사역과 운명을 예고한다.
성전에 있는 예수님의 나이는 12세다. 12세에 대한 다양한 의미를 제시하지만, 본문의 초점은 예수님이 어린 나이에 사람들을 놀라게 한 지혜와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는 데 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소년(파이스)”로 묘사된다(43절). 그런데 마리아는 “아이(테크논)”으로 부른다(48절). 고대에 12세의 지혜와 통찰력은 예수님의 비범성을 알리는 표시일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고대 문헌들에 따르면 고대인들은 위대한 영웅이 12세에 이미 두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알려져 있다. 참고로 70인 역은 솔로몬은 12세에 그의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했다(다른 번역본은 21세이다).
1. 성전에서 듣고 대답하시는 예수님(41~47절)
예수님의 가족은 해마다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갔다(41절). 열두 살 때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부모와 동행한다(42절). 예수님의 부모는 일주일 동안의 유월절 절기를 모두 마치고 나사렛으로 돌아간다(43절). 그런데 예수님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당시에는 강도들의 위험이 도사린 길도 있었기 때문에 여행단(쉬노디아)을 이루어 함께 이동했는데, 부모는 당연히 아들 예수도 갈릴리로 내려가는 무리에 섞여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44절). 하지만 하룻길을 간 후에 아들이 동행하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된다(44절). 그래서 아들을 찾으려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간다(45절). 부모는 예루살렘을 떠난 지 3일 만에 아들을 성전에서 만나게 된다(46절). 부모가 아들을 찾았을 때 예수님은 선생들 가운데 앉아 그들의 가르침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질문도 하고 있었다(46절). 또 예수님이 말하기도 했는데, 그 말을 듣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통찰력과 대답에 놀란다(47절).
대부분의 학자는 성전에 있는 12세 예수님의 모습은 학생보다 교사에 가깝게 해석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학생들”은 “교사”의 발치에 앉아서 배운다.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서 배웠고(눅 10:39), 바울은 가말리엘의 발치에서 공부했다(행 22:3, 개역 개정은 ‘문하에서’로 번역). 하지만 누가의 묘사는 마치 예수님께 배우려고 선생들이 둘러앉은 것처럼, 예수님은 선생들 가운데 앉아 있다(46절). 적어도 예수님은 유대 교사들과 같은 수준에서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뿐 아니라 47절은 “듣는 자들”이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에 놀랐다는 표현도 등장하는데, 이는 학생이 훌륭한 가르침을 듣고 보이는 반응과 비슷하다. *무엇보다 이 장면은 앞으로 예수님의 주된 역할이 ‘가르치는 것’임을 예고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말씀뿐 아니라 행위와 사건을 통해서도 주어진다. 그래서 “놀라다(엑시스테미)”는 예수님의 치유 행위를 본 사람들의 반응을 표현할 때도 사용되었다(5:26; 8:56).
또한 예수님에게 “지혜와 통찰력”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그가 약속된 메시아임을 입증한다. “지혜(쉬네시스)”로 번역된 단어는 “지혜, 이해, 판단, 분별, 통찰”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단어는 예수님의 성장을 요약한 40절과 52절에 반복하여 사용된다. 이사야는 “통찰력과 지혜”를 메시아에게 임하는 속성으로 예고했다. “(사 11: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메시아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영은 지혜와 통찰력의 영이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1~2를 인용해 주의 영이 자신에게 임한 내용으로 시작한 메시아 취임 설교를 마치고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4:20~21).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은혜의 말씀”에 놀랄 것이다(4:22).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는 사람들의 반응이 모두 긍정적이지 않다.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계시를 놓칠 수밖에 없다.
2. 아버지 집에 있는 예수님(48~50절).
예수님의 말을 들은 사람들뿐 아니라 그의 부모도 놀란다(48절). 그런데 선생들이 놀란 것을 “엑시스테미(놀라다_47절)”를 사용하고, 부모가 놀란 것은 “에크플레쏘”를 사용했다. 의미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부모는 선생들과 다른 방식으로 반응을 한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의 지혜와 통찰력에 놀랐지만, 부모는 아들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성전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장을 보고 놀란 것이다. 곧, 실망하여 화를 내는 뉘앙스의 표현이다.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48절)”는 말은 성경에서 속았을 때 나오는 전형적인 표현이다(창 20:9; 26:10; 29:25; 출 14:11; 민 23:22; 삿 15:11). “이렇게(이와 같이_후토스)”는 부모에게 말도 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 성전에서 대화한 것을 가리킨다. 이어서 마리아는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고통스럽게(근심하여_오뒤나오)” 찾았다고 말한다. 마리아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은 아들 때문에 크게 실망하고 화를 낸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의 불효를 질책하고 있다. 이 모습은 시므온의 예언을 떠올리게 한다(35절). 예수님의 일생은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길을 가므로 마리아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어머니 마리아가 “왜?”라고 묻자, 예수님도 “왜?”라고 되묻는다. “왜 저를 찾고 다녔습니까?”라고 말하며 아들이 마땅히 아버지의 집, 곧 성전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리아가 요셉을 “네 아버지”(48절) 라고 하자, 예수님은 성전의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부른다(“내 아버지 집”_ 9절).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암시한다.
예수님이 어머니에게 말씀하신 내용은 무엇을 의도하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예수님의 정체성이다. 한편, 그리스 – 로마 사회에서 아버지는 권위의 상징이었으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데 우선권을 둔다. 예수님은 목숨을 버리는 순간까지 “아버지의 뜻(22:41)”에 순종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모는 아들의 말을, 예수님의 통찰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들의 정체와 역할에 대한 계시를 직접 들은 마리아가 이해하지 못하는 점은 특이하다. 마리아는 자신이 낳을 아기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천사로부터 들었다(1:32). 또한 천사는 태어날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1:35)”라고, 거듭 확인시켰다. 그러나 12년이 지난 시점에 마리아는 아들의 행동과 말을 자신이 받은 예언과 연결하지 못한다. 계시를 직접 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정체와 사명을 이해하기 위해 고민해야 했다면(51절)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3. 예수님의 소년 시절(51~52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서 부모의 아들이었다.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낸다. 마리아는 성전에서 아들이 했던 말의 의미를 두고 계속 고민한다(51절).
52절은 요한과 예수님의 성장에 관한 내용을 요약한 1:80(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2:40(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과 비슷하다. 한편. 사무엘의 성장을 언급한 것과도 내용이 비슷하다(삼상 2:26 _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소년 예수는 육체적으로 튼튼하게 자랐고, 지적 수준도 높은 지성인으로 자라났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사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요소는 “지혜”였다. 지혜는 구약 지혜서에 나타난 히브리적 요소(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와 지혜를 강조한 헬라 철학적 전통 요소를 포괄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들의 호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지혜임을 짐작하게 한다.
나는?
-예수님도 여느 아이처럼 성장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지혜가 있었고,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이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사랑을 받았으며,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율법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는 당연히 하나님이셨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반신반인으로 살지 않으셨다. 철저하게 인간으로서 우리와 같은 성정으로, 우리가 겪는 온갖 시험을 당하면서 사셨다. 그래서 우리의 근원이 될 수 있었다(히 5:9). 또한 시험받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었다(히 2:18).
-또한 예수님은 모든 언약과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기에, 태어날 때 할례를 받았고, 부모는 정결 의식을 치르며, 율법이 지시한 대로 제사를 드렸다.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관례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 머무셨다.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자신이 구원할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이 나라를 하나님 나라로, 이 백성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창조하실 것이다. 이 백성의 질고를 대신 지고 이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후, 그들 자신을 닮은 백성으로 지어가실 것이다. 우리도 그 예수님처럼, 더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삶의 목표가 우리가 사는 이유와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은 절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더 머물러 성전에서 선생들 가운데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다. 함께 있던 자들이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에 놀랄 만큼 그는 남다른 사유의 세계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예수님을 단지 영특한 아이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하늘의 지혜가 체화되어 가는 메시아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장 과정은 공적 사역으로 부름을 받기까지 그가 살아온 모든 삶과 일상이 그가 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사람과 역사를 이해하고 그들을 사랑할 줄 아는 메시아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고 같이 울어주실 수 있고 도우실 수 있는 분이 되신 것이다.
-성전에 머문 예수님의 행실이 육신의 부모에게는 잠시 걱정을 끼쳤지만, 이는 부모가 성전을 “내 아버지 집”으로 이해한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님은 여전히 부모님을 순종하여 받드는 아들로 신실하게 살았지만, 동시에 부모는 이제 언젠가 원래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적을 따라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게 될 것임을 인정해야 했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운 존재로 성장하셨다. 자녀들이 주님의 자녀로 주의 뜻을 따라 살도록 보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열두 살의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와 세상 부모와의 관계에 모두 충실하셨다. 지금은 예루살렘의 하늘 아버지 집에서 말씀을 듣고 배워야만 할 때인 것을 알고 순종하기 위해 부모와 귀향길에 동행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후에는 나사렛으로 함께 가서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고 받들었다. 그리고 머잖아 두 부모 가운데서 하늘 부모의 명령에 더 우선순위를 두고 사실 날이 올 것이다.
-누가복음은 한 부부(요셉과 마리아)가 유월절 후 고향으로 내려가다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을 알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사건으로 시작하여, 고향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부부)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예수님을 잃고 슬퍼하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눈이 열린 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사건으로 끝난다(눅 24:13~35). ‘누가’는 절묘하게 이 두 사건을 시작과 마지막에 배치하여 요셉과 마리아가 육신의 아들을 잃어버린 사건이 아니라, 수태고지에서 들었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참 정체를 잊어버린 사건으로 묘사한다. 그것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마리아가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 늘 곁에 있었지만, 그가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부모처럼, 예수님을 늘 입에 올리지만, 그분이 내게 어떤 분이며, 또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을 잃은 자이며,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슬퍼했던 제자들과 같은 자일 수 있다.
*주님, 언제나 함께하시는 주님의 이름만 부르지 않고 늘 실재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뿐 아니라 육신의 부모님과의 관계에도 늘 충실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