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3:1-14 세례 요한의 사역 _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다
3장부터 4:13은 예수님의 공적 사역,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준비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요한(3:1~20)과 예수님(3:21~4:13)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준비하는 이야기에서 주연으로 등장한다. 본문은 요한을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하는 선지자로 소개하고, 무엇이 회개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다.
1.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요한(1~6절)
이 단락은 사가랴가 아들 요한에 대해 예언한 내용(1:76; 참조 1:16~17)이 실현되는 것을 설명한다.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3절을 중심으로, 1~2절에서는 요한이 선지자로 등장했을 때의 사회-정치 상황을, 4~6절에서는 그의 사역이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을 설명한다. 요한이 선지자의 소명을 실행할 때는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 유대의 통치자 빌라도, 팔레스타인의 세 분봉왕, 예루살렘성전의 대제사장들이 패권을 차지하고 있었다(1절). 이들이 가장 화려한 공간에서 권세를 행사할 때 광야에서 지내던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2절).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의 소명과 권능을 받은 요한은 힘과 부가 지배하는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것을 예고한 선지자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말씀은 안나스와 가야바가 종교 권력을 행사하는 성전이 아니라, 광야에 있는 가난하고 경건한 요한에게 임했다.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종교 권력과 지위에 심취한 종교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성경을 사용하고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며 고독하게 살았던 요한처럼 하나님에게서 받은 소명에 사로잡혀 광야와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종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은 이런 사람의 소리를 귀담아들어야 한다. 또한 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나 로마제국과 팔레스타인이라는 사회 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구체적으로 헤롯 안티파스의 죄를 지적했고, 결국 참수형을 당하고 만다. 선지자적 소명은 공적인 영역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다.
요한은 요단강 근처에서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3절). 요한은 회복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선포한다. 여기서 죄 사함은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고, 세례는 해방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은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 해방을 맛보았다. 그러므로 물에 들어가는 세례는 새로운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예고하는 상징적 행위였다.
4~6절에서 ‘누가’는 요한의 선포를 이사야 40:3~5을 인용해서 입증한다. 요한은 광야에 있으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광야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즉 해방을 경험하기 시작한 공간이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백성을 구원하고 환영하기 위해 광야로 오셨던 것처럼 주(=예수)께서 광야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은 주의 오심을 준비해야 한다(1:17, 76; 3:4). 구약의 하나님이 행하셨던 일을 이제 예수님이 “주”로서 행하실 것이다(1:43, 76; 2:11). 그리고 ‘그의 길’, 곧 예수님의 길을 곧게 해야 한다(1:76, 79; 행 9:2; 19:9, 23; 22:4; 24:14, 22).
누가복음에서 주의 길을 준비하고 그의 오심을 곧게 하는 그것이 회개며,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는 것이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일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마다 구원을 경험하는 것으로 실현된다. 광야로 오시는 주, 곧 예수님께 돌이켜 그의 말씀을 영접하는 자가 이사야 40장에서 예고한 구원을 볼 것이다.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의 핵심은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져야 한다(타페이노오)”라는 동사는 ‘겸손’을 의미한다(1:52; 14:11; 18:14; 행 8:21; 13:10). 겸손히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
2.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요구하는 요한(7~14절)
요한은 세례받으러 나오는 무리를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며 다가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경고한다(7절).” 독사의 자식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향해 붙인 욕설이었으나, 요한은 이 표현을 유대인들에게 사용한다. 요한은 “누가 너희에게 장차 올 진노를 피할 방편을 보여주었느냐(7절 하반절)”라며 거짓 안전에 대한 약속을 떠올린다. 유대인들은 안전에 대한 거짓 약속에 속지 말아야 한다.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진정성 없는 회개는 지노로부터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회개는 합당한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8절). 회개의 열매가 없이는 선민이라는 자긍심도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 회개를 입증하는 구체적인 열매가 없이는 아브라함이 조상이라고 믿어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누가복음에서 아브라함은 구원받은 새로운 백성의 아버지다. 특히 아브라함의 가족에 포함되는 사람은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이다(13:16; 16:24; 19:9).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열방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음으로(창 18:14), 인종과 지위에 관계없이 회개하는 자는 누구나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 요한은 도끼 은유를 사용해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린다(9절).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13:7, 9) 썩은 나무가 찍혀 불태워지는 것은 당연하다(말 4:1). 그런데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기 때문에 즉시 회개해야 한다.
10~14절은 누가복음에만 있는 내용이다.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예를 열거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예를 열거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무리에게 요한은 옷과 음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도록 명령한다(10~11절; 12:23; 창 28:20; 신 10:18). 옷과 음식은 생필품이다. 이를 더 가난한 자들과 나누어야 한다(12:23; 창 28:20; 신 10:18). “옷(키톤)”은 피부에 직접 닿는 긴 속옷을 가리킨다(6:29; 9:3; 행 9:39). 이 속옷 위에 더 무거운 겉옷(히마티온)을 걸쳐 입었다. 속옷은 겉옷보다 덜 비싸지만, 그 정도의 생필품이 없어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먹을 음식도 궁핍한 사람들과 나눠야 한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나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고, 요한은 부과된 세금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지시한다(12~13절). 세리들은 세금을 거두기 전에 액수를 먼저 제시해서 지역을 할당받았으며, 주민들에게 갈취한 만큼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정직한 세리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세리는 사악하게 갈취하며 다녔을 것이다.
군인들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14절). 요단강 부근은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린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 구역이었다. 이들은 헤롯을 위해 일하는 군인들일 가능성이 높다. 무력과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기 이득을 위해 힘을 사용하기 쉽다. 그러므로 군인들은 폭력을 행사해 민간인의 재산을 빼앗지 말아야 하고, 거짓 혐의로 무고한 백성을 고발하지 말아야 하며, 받는 급료 외의 것을 탐내지 말아야 한다.
요한이 광야에서 외친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 회개는 상응하는 행위를 요구한다. 선민의식이 강하거나 신앙의 배경이 좋을수록 열매 없는 회개로 만족하기 쉽다. 행위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브라함의 자녀에게서는 합당한 행위가 나타나야 한다.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16:19~31)에서 부자는 죽어서도 “아버지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지만, 아브라함과 한 곳에 있지 못하지만,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다. 한편, 회개의 표현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소유의 절반을 기부한 삭개오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다(19:9).
둘째, 회개는 긍휼과 공정성으로 표현된다. 속옷과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회개의 행위가 긍휼임을 의미한다. 세리와 군인이 이기적 욕심을 위해 공권력을 사용하지 않고 공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공정성이 회개의 열매라는 것을 보여준다. 누가복음에는 인간의 탐욕이 가장 큰 문제로 강조되고, 타인에 관한 관심은 이런 탐욕의 회개를 뜻한다.
셋째, 요한은 직업을 버리도록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소속된 직장에서 윤리를 실천하도록 촉구했다. 세리도 마찬가지다. 회개는 일상생활과 직업 현장에서 공공의 선을 위한 방향으로 표현된다.
나는?
-태에서부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선지자로 예정된(1:76) 요한은 “고아야”에서 훈련과 연단의 시간을 보낸 후(1:80)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그에게 ‘광야’는 거처나 사역지,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요한의 광야 삶은 광야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 오신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성취하려는 순종의 선택이었다. 광야의 사람 요한의 사명은 황량한 광야 같은 사람들이 메시아 주님을 영접하기에 합당한 마음으로 살게 하는 것이었다. 심령에 죄의 장애물이 다 치워져서, 주님이 언제든 오셔서 나와 교제할 수 있도록 잘 닦인 첩경을 놓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궁이 아니라 광야에 임한다. 정치적으로 디베료가 황제로 있었고, 헤롯은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종교적으로는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었다. 그들이 세상을 호령하였고, 그들의 말이 법이고 상식이었다. 그들은 세상과 역사를 창조하는 자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성전도 아니고 궁전도 아닌 변방의 광야에서 살고 있는 요한에게 맡기셨다. 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은 세상 권력자들이 아니라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겸손과 순종이 있는 곳이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다.
-요한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메시아가 오실 길을 준비하는 역할을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을 모실 수 있는 마음으로 준비시키기 위해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했다. 내가 왕이었고 내 말이 법이었고 내 나라를 세우려고 이 세상 풍조를 좇았던 삶을 청산할 때, 주께서 왕으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으러 나온 이들이 모두 회개의 마음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마저도 종교적인 통과의례나 종교적인 자격증 정도로 이용하였다. 그것은 결코 메시아를 영접할 수 없는 마음이며, 그가 가져올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마음이다.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에게 회개의 열매가 맺힐 리 없고 열매 없는 이는 주님의 주권을 인정한 사람일 리 없다.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받으러 온 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형식적인 물세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악에서 떠나는 회개라고 가르친다. 물이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동반한 회개가 그들을 새롭게 해준다고 한다.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조건과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지 않는 자는 결코 그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지금은 “돌” 같은 마음을 가진 이방인들이라도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믿음으로 반응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회개는 세계관적인 전환이자, 욕망의 변화다. 자기 인생의 주권을 교체하는 사건이다. 기존에 자기 가치관이 전복되는 사건이며, 세상을 향하여 배반하고 변절하는 일이다. 따라서 세상이 당연하게 간주하여 특권처럼 행사했던 모든 유익을 다 무익하고 해로운 것으로 여기며 거절하고 단절하며 떠나야 한다. 더불어 너그러운 나눔, 정직한 세금 징수,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이제 대단한 결정이 아니라 당연한 삶의 방식이 되는 것이 회개다. 주님 나라의 질서와 리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회개다.
*주님, 세상 속에서 광야의 하나님을 따라 살겠습니다.
*주님, 구체적인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회개의 열매를 간과하지 않겠습니다. 열매 없는 이들에게 심판의 불을 내리시는 주님이심을 기억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