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4:14-30 갈릴리 사역의 시작 _ 나사렛 회당에서 일어난 일
갈릴리 지역 사역을 성령의 능력으로 시작하셨다. 나사렛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장면을 다룬다.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며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을 밝히시지만,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하고 쫓아낸다. 본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선언과 함께, 복음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1.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14~15절)
예수께서 세례받으신 일,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신 일은 그의 공적 사역을 위한 예비 과정이었다. 이제부터 갈릴리 사역을 시작으로 그의 사역이 전개된다. 예수의 사역은 크게 갈릴리 사역(4:14~9:50),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9:51~19:44), 예루살렘 사역(19:45~21:38), 고난과 부활(22:1~24:53)로 나뉜다.
14~15절은 예수의 갈릴리 사역 전체를 포괄하는 진술이며, 14절은 갈릴리로 돌아간 예수에 관한 서술이다. “성령의 능력으로”라는 구절에서 “성령”과 “능력”이 나란히 나타난다(1:35).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한 임재로 인한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실 것이다. 15절은 예수의 사역에 관한 대략인데,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신다. 이 부분은 예수의 유년 시절에 관한 서술과 유사하다(2:52). 이를 통해 예수의 사역에 두 가지의 특징이 있음을 보여준다. 먼저 예수의 사역은 성령의 능력으로 실행된 사역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그의 능력으로 성취된다. 또한 예수의 사역은 가르치는 일에 초점을 맞춘 사역이다.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선포한다. 이렇게 하여 예수의 사역은 좋은 영향력이 드러나고 널리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2. 예수님의 회당 사역(16~21절)
본문은 예수의 첫 공식 사역으로 고향 나사렛에서의 회당 사역을 언급한다. 16절에서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라는 구절은 회당 예배의 순서를 담당하여 예언서를 읽는 것을 말한다. 18절은 이사야의 이사야 61:1~2의 인용이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였으니”라는 구절은 예수의 수세 시 성령 강림(3:22), 그리고 그 강림 후에 성령의 지속적인 충만한 임재(4:1, 14)와 연결된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다”라는 표현은 예수의 전체적인 사역을 포괄한다.
한편, 누가의 이사야 61장의 인용에 있어 차이가 있다. 이사야 원문에서는 ‘가난한 자’와 더불어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가 언급된다. 이것은 가난한 자는 이방 민족의 압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본문은 ‘가난한 자’는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와 더불어 언급되는데 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이다. ‘누가’는 소외된 사회 계층에 관한 관심과 배려를 강조한다. 이와 같은 맥락은 마리아의 찬양(1:52~53)에서 확실하게 나타난다. 예수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당시 세상 가치의 역전을 시사한다.
19절의 내용도 이사야 원문과 차이가 있다. 이사야 원문에서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라는 구절을 ‘누가’는 본문의 인용문에서 의도적으로 생략된다. 왜냐하면 이제 이방 민족의 심판의 날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는 예수를 향하여 나사렛 회당에 모인 백성들은 “주목하여 보더라(20절)”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시선이 고정되었음을 드러낸다. 그런 백성들을 향해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 듣는 데서 성취되었다(21절).”라고 선언하신다.
3. 예수님의 회당 설교(22~30절)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께서 이사야의 말씀을 봉독한 후 메시지를 선포하신다. 그런데 그 메시지를 주목하여 듣고 있던 청중이 분노에 가득 차 예수를 죽이려 한다. 22절이 청중의 반응인데, 매우 부정적이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것은 감탄이나 놀라움의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경멸과 비판의 반응이다.
23~27절은 이런 반응이 나온 후 예수의 회당설교 내용이다. 내용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먼저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것과 이 메시지를 예증하는 내용이다. 23절의 “의사야! 네 자신이나 고치라”는 속담이다. 이런 태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보며 조롱했던 관리들의 태도와 비슷하다(23:35). 이러한 태도는 결국 선지자를 윽박지르는 자세로 나타날 것이라고 예수께서 예견하신다.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새번역_23절 하반절).’ 그리고 24절에서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25~27절은 예수께서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이어진다. 엘리야 시대의 사렙다 과부, 엘리사 시대의 나아만을 예로 들어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듣는 태도를 예증한다. 공교롭게도 예로 인용하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이방인이다. ‘누가’는 복음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화해적 관계를 강조한다. 이방인을 빈번하게 언급하여 이를 시도하는데(물론 수신자를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칭찬한 믿음의 사람 백부장(7:9)과 강도 만난 자의 이웃으로 묘사된 사마리아인(10:29~37) 등이다. ‘누가’는 이방인을 복음의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았다. 복음은 온 세상에 미칠 좋은 소식(2:10)이고 구원은 만민 앞에 준비된 것이다(2:31). 메시아, 그리스도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고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선포된다.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오심은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예언의 성취이다(3:4~6, 참조 사 40:3~5). 따라서 복음의 보편성을 추구하여 복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임을 강조한다. 갈라디아서 3:29에서도 민족, 신분, 성별과 상관없이 예수 안에서 모두가 하나임을 역설한다.
28~30절은 회당에서 예수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다. “크게 화를 내다”는 분노나 놀라움 등의 강렬한 감정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을 뜻한다. 회당에 모인 나사렛 주민들은 예수의 메시지를 듣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고 나가서 낭떠러지에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 떠나셨다. 예수께서 어떻게 분노한 군중들을 헤치고 떠나셨는지 알 수 없다.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점점 더 냉담해지는 교회에 대한 세상의 태도 속에서 “그들 가운데”로 지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한다.
나는?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온 세상에 은혜의 해를 가져오는 사건임을 가르치시고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으로 가르치셨고, 그 결과 그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사방에 퍼졌으며, 뭇사람이 그를 칭송했다.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내다본 “주의 은혜의 해(사 61:1, 2; 58:7)”가 이미 도래했다고 선포하셨다. 이제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억눌린 자들은 참된 자유와 소망을 얻을 날이 온 것이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해방이나 독립이 아니라, 영의 눈이 밝아지고 영적 속박에서 풀려나는,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실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가난한 자, 눈먼 자, 포로된 자라고 인정하고 주의 능력을 신뢰한 사람만 구원하신다. 주님이 찾으시는 자는 선민으로 자처하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요, 이 세상에서 더 바랄 것이 없는 권세자나 부자도 아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많은 이스라엘 과부를 놔두고 이방 땅 시돈의 사렙다 과부를 찾게 하셨고, 엘리사 역시 이스라엘의 문둥이 대신에 수리아 사람 나아만의 문둥병만 고치게 하셨다. 지금도 은혜의 해를 선포하신 예수님은 기득권에 취해서 움켜쥔 것 놓지 않고 오직 이 세상만 쳐다보는 이들에게 쫓겨서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춥고 외로운 예수님을 알아볼 사람은 영이 가난한 사람이다.
-고향 나사렛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셨다. 고향 주민들은 회당설교를 은혜롭게 들었지만, 그들에게 예수는 너무 낯익은 목수 요셉의 아들에 불과했다. 이사야의 예언이 이미 성취되었다고 했지만, 현재 상황은 그들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생각과 성경에 대한 그릇된 확신 때문에 그들은 자기 눈앞에 계신 참 진리이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들의 인간적인 지식이 영적인 지식을 가린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몰랐고, 몰라도 되는 것은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너무 낯익고 익숙해서 낯선 세상을 가져오신 낯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임을 안다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놀라운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예수님을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없다. 성경의 이야기를 지식적으로,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치환할 수 잆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하고 회개하여 주님의 통치와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나아가지 못한다. 예수에 대한 익숙함과 그와 함께 했던 삶의 습관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알아가는데 장애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매번 예배에 참여하고,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해도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 신앙이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경험과 익숙한 습관이 하나님의 주권보다 더 앞서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매일 말씀 앞에 서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내 자신에게 너무나 익숙한 나의 삶을 말씀을 통해 낯설게 보기 위함이다. 그래서 어느새 왜곡되어 있을 수 있고,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부분을 진단하고 교정하기 위해서이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자신을 낯설게 보게 하는 말씀의 거울이 없다면 나사렛 회당에 모인 예수를 너무도 잘 알고 있어 예수님의 말씀을 경멸한 그들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주신 감동과 확신에 따라 순종하며 나아갸 함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주님,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는 나사렛 회당에 모인 주민들의 모습이 혹시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닌지 깊은 자괴감이 듭니다. 분노하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가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눈길조차 두지 않는 주님의 모습이 보여서입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는 삶을 살겠습니다.
*주님, 날마다 말씀의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낯설게 보겠습니다. 저의 눈을 열어 말씀을 통해 더 낯설게 보게 해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