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5:12-26 나병과 중풍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예수님이 나병환자와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이다. 단순히 육체적인 질병만 고치시는 그것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접근을 하신다. 나병환자에게는 제사장에게 나은 몸을 보며,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잘 돌아가게 하신다. 중풍 병자에게는 죄 용서를 선포하셔서, 그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신다. 예수님의 위대한 능력뿐만 아니라 그의 친절하시면서도 세밀한 도우심이 빛나는 장면이다.
앞선 치유 사건에서는 예수님이 능력 있게 귀신을 쫓아내며, 사람들의 병을 치유하셨다는 언급만 있었다. 그러나 이 단락에 나오는 예수님은 사람들의 좀 더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하신다. 나병환자를 고치시면서, 예수님은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이 치유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라고 하신다. 그의 몸을 치유할 뿐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의 예배 공동체 속에 다시 잘 돌아가도록 안내하신다. 또한 중풍 병자를 고치면서, 예수님은 그의 죄 용서를 먼저 선포하신다. 몸을 회복시키는 것보다 죄 용서라는 더 근원적인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1.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12~16절)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신을 고쳐 달라고 애원한다(12절). 나병 때문에 그는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심한 사회적 종교적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율법에서 제의적으로 부정하다 선언되었기 때문에, 그는 성전 제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레 13:8). 공동체에서 격리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었다(레 13:45~46). 따라서 육체적, 사회적, 종교적 고통 가운데 있었던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찾아와, 치료를 요청한다. 병자들을 치료하시며, 기적을 행하신다는 소식을 그도 들었던 것 같다. ‘원하시면’이라는 말은 치유의 주도권을 예수님께 드리는 겸손의 표시다. 예수를 보고 엎드리는 자세와 요청하는 표현에서 그가 얼마나 예수님 앞에 겸손하면서도 간절했는지를 보여준다.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시며,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하셨고, 병자는 곧 치유되었다(13절). 나병환자를 만지는 것이 어떤 부정한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율법에 정확한 설명은 없다. 다만 그를 격리하라고 하는 것을 볼 때 이 부정한 자와 가까이하는 것은 제의적으로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환자에게 손을 대시고, 고치시고, 깨끗하게 하신다. 아무리 부정하고, 아무리 추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손을 대시면, 깨끗해지고 거룩해진다.
예수님은 왜 그에게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셨을까? (14절) 아마도 사람들이 그가 전하는 하나님 말씀보다, 단순히 질병의 치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또한 이 치유 소문이 필요 이상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적당한 때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예물을 드려’는 나병환자가 공식적으로 정결하게 되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다시 들어오는 방법을 가리킨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육체적 치유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그가 종교적, 사회적 소외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예수님의 복음은 한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공동체적 회복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소문이 퍼져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다(15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셨다(16절). ‘한적한 곳’은 광야를 뜻한다. 예수님은 광야로 물러가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계속 가지셨다. 이는 인기나 명예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2.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17~20절)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 앞에서 예수님이 중풍 병자를 고치신다(17절). “주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는데, 성령의 역사와 관계가 있다. 이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병자를 치유하는 사역을 하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중풍 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갈 수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뜻이다(18절). 그들은 지붕을 뚫고 병자의 침상을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린다(19절). 이 병자를 예수님 앞에 꼭 데리고 가겠다는 그들의 믿음과 열정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20절)”는 환자 자신의 믿음과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예수께서 보셨다는 말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중풍 병자를 보시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0절)”라고 말씀하셨다.
중풍 병자 친구를, 지붕을 뚫고 그의 침상을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린 친구들도 놀랍지만, 이어진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사람의 죄 용서를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더구나 완료시제를 사용하여 죄 용서가 완벽하게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셨다.
3. 죄를 용서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21~24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단번에 예수님의 죄 용서 선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21절). 예수님의 선언을, 하나님을 욕되게 한 신성모독으로 간주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여러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는 것까지는 보고 있었지만, 죄 용서를 선언하시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자신들의 기준으로 볼 때,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죄 용서를 선언하는 것이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보다 더 쉽지만, 인자의 죄 용서의 권세를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하였노라고 말씀하신다(23~24절). 죄 용서와 관련하여 예수님은 “인자”라는 제목을 사용하신다. 누가복음에서 ‘인자’는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과 관련된다. 예수님은 죄 용서를 단순히 선포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 용서를 위해 친히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모습으로 나온다. 또한 인자는 마지막 날에 권능으로 임하실 예수님을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한다. 따라서 죄 용서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은 다시 오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
4. 중풍 병자와 몸을 치유하시는 예수님(24~26절)
죄 용서의 선언과 관련하여 바리새인과 논쟁한 후에 예수님은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선언하신다(24절). 그는 예수께로 올 때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꼼짝할 수 없었던 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당당하게 자신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걸어서 돌아간다(25절). “곧”이라는 말은 “즉시”라는 뜻인데, 본문의 헬라어 문장에서는 앞부분에 기록이 되어 있다. 즉, 예수님의 명령과 함께 병자가 즉각적으로 치유되었음을 암시한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를 통해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확실하게 강조한다.
자신의 병을 고침 받은 후 중풍 병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25절).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26절).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는 표현은 누가복음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는 누가가 예수님의 전 인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사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모든 삶과 사역은 하나님이 주관하신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합당한 영광이 돌려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자기 사역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사역의 현장에 늘 밝히셨다는 의미다.
나는?
-예수님은 주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음을 믿고 구한 나병환자를 고쳐 주셨다. 말만 하셔도 나을 수 있었을 텐데, 예수님은 그 부정한 사람을 친히 “만져서” 낫게 하신다. 부정한 자로 간주하여 아무도 가까이할 수 없었고, 외진 곳에 격리되어 지내던 버려진 인생에게, 주님의 손길은 따스한 위로와 새 생명을 주는 사랑과 치유의 접촉이었다. 지금 손을 내밀어 주님의 손길처럼 따뜻한 위를 전할 수 있는 삶이어야 하리라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얻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신 치유였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는 모든 차별과 소외의 경계가 예수님 안에서 사라지고, 모두가 하나가 되고 한 가족이 되는 곳이다.
-나병환자는 격리되어야 할 부정한 자였다. 그가 예수님께 나온 것 자체가 부정의 경계를 허문 것이다. 또 하나님만이 낫게 하실 수 있는 병을 예수께서 낫게 하실 수 있다고 믿은 것 역시 경계를 넘는 믿음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병을 치유하시면서 그가 제사장에게 완치 확인을 받은 후 모세의 율법대로 예물을 드리라고 명령하심으로 경계를 지키는 듯한 모습을 보이신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심으로 경계를 파괴하신 것이 아니라 경계를 넘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는 모든 차별과 소외의 경계가 사라지고 모두 하나 되고 한 가족이 되는 나라이다.
-중풍 병자를 메고 온 친구들은 예수님 주위로 운집한 무리 때문에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평평한 집 위로 올라가 흙으로 된 지붕을 걷어내고 환자가 누워 있는 침상을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다. 어떤 사회적 비난도, 경제적 손실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을 만큼 이들은 환자를 사랑했다. 그의 건강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았다. 또한 예수께서 그를 고칠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중풍 병자와 친구들의 믿음은 상식을 뛰어넘을 만큼의 열정과 사랑과 믿음이 견고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이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바친 후 제사장의 사죄 선포로 죄 사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다(1:77). 예수님은 중풍 병자 자신은 물론이고 지붕을 뜯고 그 병자를 주님 앞에 달아 내린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만으로 그를 일어나 걷게 하셨다. 병이 낫고 싶어 찾아온 자에게 영원한 사망까지 이기고 돌아가게 하셨다. 죄와 사망의 증상을 눈앞에서 없앰으로써 죄를 용서하시는 자신의 권세를 입증해 보이셨다. 죄 아래 있던 자들을 해방하러 오셨음을 선명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나병환자 치유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말씀 듣고 병 고침을 받기 위해 몰려왔지만, 주님은 또다시 광야(한적한 곳, 4:42)로 물러나신다. 아무리 중요한 일도 하나님과의 교제보다 앞서지 않게 하셨고,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보다 주의 뜻을 묻는 것을 더 우선으로 삼으셨다. 예수님에게 따로 기도하는 시간은 성공적인 사역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순종이고 마땅한 도리였다. 자신이 영관을 받기보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할 때가 되게 하는 길은 이렇게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깊이 교제하며 기도한 것에서 왔다.
*주님, 나병환자를 만져 주시는 따스한 손길과 중풍 병자와 친구들의 믿음에 화답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감동입니다. 경계를 넘어서고, 상식과 예절을 넘어선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믿음을 외면하지 않고 역사해 주시는 긍휼과 사랑의 마음이 저에게도 있음을 알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