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5:27-39 하나님 나라 새로운 삶의 방식 _ 죄인을 부르시고 함께 잔치하는 나라
본 단락은 예수님 사역의 근원적인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죄인을 회개시켜,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셨다. 예수님의 복음은 율법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 나라 복음은 하나님의 새 백성이 사는 원리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은 구약의 율법이나 유대 전통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 원리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관점과 예수님의 주장이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유대인들은 정결과 거룩함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정결 음식법(신 14:3~21)을 엄격하게 준수할 뿐 아니라 이방인과의 식탁 교제를 꺼렸다(행 11:2~3; 갈 2:11~14). 바리새인들은 죄인과의 접촉을 엄격하게 금지했는데, 이는 자신들이 부정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금식하고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 세례 요한도 자기 제자들에게 금식과 기도를 가르친다(11:1).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기초로 새로운 생활의 원리를 제시하신다.
1. 레위를 부르시는 예수님(27~28절)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이다(27절). 레위는 통행세를 받기 위한 세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제법 괜찮은 직업이었지만, 로마 정부를 위해 일하기 때문에 유대 민족의 의사에 거슬러 일을 해야 했고, 당시는 세리가 세금을 과다하게 징수하여 남은 이익을 은닉하는 방법으로 백성을 속이고 착취했기에 그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이런 세리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다.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다(28절). 그동안 세리로서 가졌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는다. 그는 이때 부정하게 번 재물뿐 아니라, 민족을 배반하고 사람들을 속였던 자신의 탐욕도 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를 때, 무한한 자유를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를 때,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다른 것으로 채움을 얻기 위해서다. 그것은 복음의 말씀, 그리스도의 자유다. “따른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간다는 것이요,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다는 의미다.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와 명예를 버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간 것이다.
2.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29~32절)
예수님께 부름을 받은 레위는 무척 기뻐하며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벌였다(29절). 자기 친구 세리들과 많은 다른 사람들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인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추측건대 레위는 마음의 큰 짐을 내려놓고, 큰 자유함을 누렸던 것 같다.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곧잘 잔치에 비유된다는 것이다(14:15~24).
그런 때 이때,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잔치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한다(30절). 그것은 죄인들과 교제하는 제자들을 향한 비방이었다.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비난을 받았다고 하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비난한 것이다. 예수님이 왜 이러한 죄인들과 교제하느냐고 따지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환자와 의사의 예를 들어,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신다(31절). 병자에게는 그 병을 고칠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에게는 그 죄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신다(32절).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그 죄인이 회개하여 온전하게 되도록 하신다. 그렇다면 의인은 있을까? 의인은 있을 수 없다(롬 3:10).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따라서 여기서 의인은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예수님이 도무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 그 사람은 죄를 회개하여 온전하게 될 기회가 있다. 그러나 자신을 의인이라 주장하는 자는 회개할 기회를 잃고 도무지 온전하게 될 수 없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죄인들과의 접촉을 피하려 하였다. 죄인과 접촉하지 않으면 자신의 거룩함이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과 접촉하여 그 죄인들을 거룩하게 만들려 하셨다.
3. 금식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33~35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두 번째 이의제기한다. 첫 번째가 죄인과 교제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고, 두 번째 이의제기는 금식에 관한 것이다(33절). 경건한 제자라면 금식하고 기도하는 데 집중해야지, 왜 그렇게 잔치를 좋아하고, 먹고 마시느냐고 따진다. 바리새인들은 정기적인 금식과 기도를 가르쳤다. 세례 요한도 자신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듯하다(11:1).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은 잔치 기간이라서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다(34절). 혼인 잔치에서 신랑이 있는데, 어찌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지 않을 수 있냐고 반문하신다.
예수님은 메시아가 오셔서 함께 하시는 기쁨의 기간이기 때문에 슬퍼하며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다. 슬퍼하며 금식해야 할 때가 있으니, 그것은 신랑을 빼앗길 때다(35절).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킨다. “그날”은 헬라어 복수로 되어 있고, 직역하면 “그날들 동안에 금식할 것이니라”가 된다. 이 기간을 흔히 예수님의 부활 후부터 재림까지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이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 후부터는 기쁨의 기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시기는 성육신하신 주님이 함께하시고, 부활 후부터는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함께하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슬퍼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의 말씀 요지는 그의 함께하심을 믿고 기쁨으로 그것을 누리라는 것이다.
4.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36~39절)
새 옷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거나, 낡은 옷 조각을 새 옷에 붙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옷을 망치게 된다(36절). 마찬가지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37절). 새 포도주가 발효될 때, 부피가 팽창하여, 결국은 가죽 부대를 터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포도주도 망치고 가죽 부대도 망치게 된다.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유대 전통이라는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38절).
예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 복음은 새 시대,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고 해석해야 한다. 이는 결국 앞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판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다. 바리새인들의 율법 기준으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방식을 평가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죄인들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인들과 접촉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바리새인들은 즐겁게 먹고 마시는 것보다,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과 유대의 모든 전통이 재해석되어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방정식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묵은 포도주를 맛본 자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39절)는 것은 얼핏 옛것이 새것보다 더 탁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 포도주는 묵은 것이 더 좋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전체 문맥과 충돌한다. 본문은 옛것에 더 집착하는 사람의 습성을 지적한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새로운 하나님 나라 복음을 받아들이기보다, 자신들이 전통적으로 지켰던 율법의 가르침에 계속해서 집착한다는 것을 아이로니컬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놀랍다. 레위가 예수님을 찾아와 스승으로 삼고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관에 앉아 세무를 보고 있는 레위를 먼저 보고 부르신다. 레위의 반응도 놀랍다. 즉시 일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다.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열고 다른 죄인들이 예수를 만날 기회를 얻게 해준다. 하나님 나라와 구원은 언약의 약속을 몸소 지키신 하나님의 선제적 은혜와 급진적인 명령과 은혜의 명령을 향한 전격적인 환대의 믿음으로 현실이 되어간다.
-예수님은 먼저 찾아가시는 분이시다. 죄인이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이 먼저 죄인을 찾아 불러 주신다. 갈릴리 바닷가의 어부도 부르시지만 돈 많은 세리도 부르신다. 모두 그의 부와 권력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를 죄인 취급하며 따돌릴 때, 주님은 그를 불러 제자로 삼으신다. 주님의 부름과 영접이 그를 회개시킨 것이다.
-레위는 다 버리고 일어나 주를 좇았다. 부와 권력이 죄인의 굴레를 벗겨줄 수 없었지만, 예수님만이 참 자유를 회복해 주셨기 때문이다. 다 버리고 좇고 전적으로 맡기면 우리가 매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유를 얻는 원리가 복음의 원리, 십자가의 원리이다.
=예수님의 초청에 비길만한 초청은 세상에 없다. 자격과 조건을 갖춘 자를 골라서 은혜가 덜 필요한 자들에게 더 많은 특권을 주는 세상의 권력자와 달리 예수님은 가장 자격 없어서 가장 은혜가 필요하고 상태가 심각하여 가장 탁월한 의사가 필요한 사람을 불러서 감히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치유와 해방과 회복을 주신다. 누구도 스스로 얻어냈다고 말할 수 없는 은혜이자,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대가를 치를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신다. 죄인을 의인으로 부르시고,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부여하신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하셨다. 세리들과 식탁을 같이하심으로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자신이 베푼 사죄와 구원의 기쁨을 함께 누리셨다. 그것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연회가 아니라, 죄인으로 간주되었던 자들과 어울린다는 비난을 받을 만한 위태로운 결정이었고, 자신의 명예가 손상될 수 있는 만남이었다. 하지만 오늘도 주님은 세상이 가망 없다고 제친 이들을 두 팔을 벌려 초청하신다. 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어 그들을 환영하고 잔치를 벌이라 하신다.
-예수님은 새 시대를 열어 가신다. 죄인이었다가 회개한 자들과의 식탁을 결혼 잔치에 비유하신다. 이제 예수님이 우리의 신랑이 되어 회개한 백성을 신부 삼아 혼인과 같은 새 언약을 맺는 시대가 왔으니, 금식이 아니라 잔치를 벌여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새 시대에는 새 마음과 새 삶의 방식이 필요한데, 그것은 새 옷 조각을 헌 옷에 붙이지 않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 것과 같다. 익숙한 것에 취해 예수님과 함께 찾아온 은혜와 사죄의 시대를 외면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주님은 늘 새로운 감동으로 우리를 만나 교제하기를 원하시는데 나는 내게 익숙한 신념이나 교리나 전통에 매여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주님,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며 즐거움을 누리는 축제의 날들을 누리겠습니다.
*주님,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보다 여전히 세상의 방식을 연연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으로 사는 것을 누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