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사람을 위한 안식일,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 [눅 6:1-11]
 – 2025년 02월 22일
– 2025년 02월 22일 –
눅 6:1-11 사람을 위한 안식일,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에 반대하는 자들과의 충돌을 기록한 5:1~6:11의 마지막 단락이다. 예수님에 대한 반대가 정점에 이른 것을 묘사하고 있다. 1~5절과 6~11절의 이야기는 각각 안식일을 배경으로 일어나서 이른바 “안식일 논쟁”이라고도 불린다. 안식일의 의미와 정신을 정확히 해석하는 권위가 누구에게 있는지, 또한 안식일을 두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실현하는지 보여준다.
    
할례와 음식 규례와 더불어 안식일 준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을 했다. 안식일 준수의 중요성은 구약에도 강조되었으나 제2성전기에 훨씬 더 강화되었고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안식일 준수는 공동체의 결속력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후대에 안식일 규례가 추가되었고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안식일 관련 규례를 해석하는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었다.
    
    
    
1. 안식일의 주인(1~5절)
안식일에 예수님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다(1절). ‘누가’는 이 사건이 “안식일”에 일어난 것을 강조한다. 제자들의 행위를 본 바리새인들은 “너희들”이 안식일에 금지된 일을 행한다고 비난했다(2절). 제자들은 율법에 따라 농부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둔 곡식의 이삭을 잘라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레 23:22). 신명기 규례는 다른 사람의 밀 이삭 자르는 것을 허락하기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른 것은 절도가 아니었다(레 23:25). 그런데 문제는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 제자들이 안식일 전통을 어긴 것으로 본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는 추수, 탈곡, 까부르는 것, 가는 것에 해당할 수 있었다. 이삭을 자른 행위를 바리새인들이 추수로 해석한 것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후대 유대교가 추가한 규례에 따른 것이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다윗의 이야기(삼상 21:1~6)를 근거로 대답하며 제자들을 변호하신다(3~4절). “다윗이 자기와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질문하신다(3절).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바리새인들의 오해를 지적하신 것이다. 본문의 초점은 해석의 권위를 가진 예수님이 안식일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는 데 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다윗의 이야기를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정작 그 사건의 정확한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신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레 24:5~9)을 먹고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에게도 주었다(4절). 다윗이 먹을 것을 찾으러 간 곳은 하나님의 집, 곧 성막이었다. 성막에는 안식일에 제사장들을 위해 준비해 둔 열두 개의 빵이 있었다(출 40:23; 레 24:5~9). 다윗과 일행은 제사장들에게만 허용된 규례를 ‘안식일’에 침범했다.
    
다윗과 일행이 안식일에 진설병을 먹은 사건이 어떤 점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는가? 대답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5절)”에 나온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규례로 구속하고 심지어 생명을 악용하기도 한다(6~7절).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퀴리오스)로서 안식일 규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대변하신다. 5절의 “인자(단 7:13)”에 근거하는 예수님의 자기 호칭은 죄 용서의 권위를 주장할 때 이미 등장한 바 있으며(5:24), 여기서도 안식일에 대한 주권을 명시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다윗과 일행은 목숨을 잃을 정도로 배가 고팠고, 다윗은 안식일 규례가 배고픔의 문제에는 탄력성 있게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로서 다윗보다 훨씬 높은 권위로 안식일을 해석하신다.
    
제자들은 다윗 일행처럼 허기진 상태였을 것이다. 안식일은 선(6:9)과 자유(13:16)와 치유(14:3)의 날이므로, 안식일에 배고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안식의 의미에 맞는다. 이미 구약에서 배고픔과 같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안식일 규례도 유연성을 보였다. 예수님의 나사렛 선언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고 희년의 복음이 안식일에도 실행되고 있다(4:18). 안식일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이 굶으면서 고통 가운데 보내는 날이 아니다. 희년의 복음이 실현되는 날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을 속박하는 날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날이다(4:18~19, 21).
    
이처럼 예수님은 안식일에 무엇을 하는 것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안식일의 주로서 제자들의 행위가 안식일 규례를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맛본 것으로 변호하신다. 교회의 역사에서 규정되고 추가되는 규례와 전통은 안식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시각에서 항상 해석돼야 하고 복음의 관점에서 점검받아야 하는 것이다. 인생의 어려움과 눈물보다 규례를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면, 그것은 희년의 복음에서 멀리 이탈한 판단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궁핍을 긍휼의 마음으로 이해 하셨고,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지는 기쁜 소식을 유대교의 전통이 막을 수 없다고 해석하신 것이다.
    
    
    
2. 안식일의 치유(6~11절)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한 손 마른 장애인을,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로 확보하기 위해 이용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을 변호한 행위와 더불어 안식일에 금지한 치유를 증거 삼으려고 했다. 예수님은 물론 그들의 의도를 알고 계셨다(2:35; 5:22; 9:47; 24:38).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한가운데에 세우셨다. 사람들의 초점이 장애인에게 집중된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신다(9절).
    
당시 유대교 전통에서 안식일에는 응급 처치만 가능했고 실제적인 치료는 안식일이 지나야 가능했다. 이런 전통의 시각은 한 손 마른 장애는 안식일에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응급 처치가 아니다. 하지만 안식일의 주가 되는 주님의 시각에서 치유는 안식일에도 일어나야 하고, 생명이 살아나는 것은 안식일의 본래 의미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선이며, 선을 행해야 하는데도 행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안식일에 악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타인에게 의존해 살 수밖에 없는 장애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회복하지 않고 도구로 악용했다. 사회에서 약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는 행위 자체가 악이다. 또한 염탐꾼처럼 덫을 설치하고 엿보는 모습은 이미 선생의 자세가 아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장애가 있는 손을 내밀라고 하신다. 일반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의 경우 손을 숨기게 마련이지만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손 마른 사람은 예수에 대한 신뢰가 생겼는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치부를 내민다. 예수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치유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말씀에 순종하여 손을 내밀자 곧 회복된다(10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문제가 아닌 경우 안식일이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해석했다. 그들의 판단에는 손 마른 사람의 치유가 안식일 법보다 우선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는 신체의 문제를 해결 받는 날에서 안식일이 제외되지 않는다.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갇히고 눌린 자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 복음이다. 빈궁한 인생에게 치유로 안식을 선사하는 것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다. 오늘이 안식일이라고 해서 생명을 살리고 회복하는 일을 내일로 미룰 이유가 없다. 복음의 혜택을 누리는 “오늘(4:21)”에서 안식일이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예수의 치유는 나사렛 회당에서 선언한 희년의 복음이 실현된 사건이다(4:18~19).
    
현장을 목격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분노하면서 예수님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의논하기 시작한다(11절). 안식일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공동체에 실현해야 할 신앙의 선생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로막는 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상황을 보고 분노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오해를 유발하는 자기도취적 분노는 선의의 피해자를 만드는 비극으로 귀결된다.
    
예수님의 긍휼은 손 마른 사람을 회복시켰으나 이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긍휼은 반드시 희생을 동반한다. 희생 없는 긍휼은 진정한 회복을 일으킬 수 없다.
    
    
    
나는?
-사람을 살리는 안식일이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하는데도 제자들은 나그네와 약자들을 위해 추수하지 않고 남겨둔 밀 이삭을 즉석에서 손으로 비벼 알곡을 먹어야 할 만큼 넉넉하지 못했고 배고팠다. 안식일을 아는 바리새인이라면 자기 것을 내줌으로 그들의 허기를 채워 안식을 누리게 해주어야 마땅했다. 다윗이 안식일에 하나님의 전에 있는 제사장의 진설병을 허기진 군사들에게 준 것이나,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셨듯이 말이다. 안식일은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 배부름과 기쁨을 주기 위해 주신 축제의 날이기 때문이다.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의 참 의미를 몰랐기에 안식일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했다. 이제 금식의 시대가 가고 잔치의 시대가 왔으며, 안식일의 그림자 시대는 가고 그 실체이자 주인이신 예수님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리며 ‘먹는’ 날이 온 것이다. 이젠 ‘주일’만이 아니라 주 안에 거하고 주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모든 날이 참 안식이 실현되는 날이 되게 하셨다. 안식일은 ‘날’을 지키도록 주신 것이 아니라 ‘나를’ 자유롭게 하려고 주신 날이다.
    
-즐거이 순종하고 기쁘게 구원과 축복을 누리도록 주신 안식일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감시와 정죄를 일삼았다.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기 위해 형제를 시험하였으며, 결국엔 안식일의 주인이신 ‘인자’ 예수를 죽일 모의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안식일의 참 의미를 감추고 지우며, 왜곡하여 망가뜨렸다. 기쁨과 해방의 날을 신음과 짐과 의무의 날로 변질시켰다. 모두가 누리는 날이 아니라 율법을 해석할 권한을 가진 소수만 독점적으로 지키는 날이 되게 만들었다. 되려 그들은 안식일 준수자가 아닌 파괴자였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자를 말씀으로 고치심으로써 그에게 안식을 주셨다. 이로써 자신이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셨음을 증명해 보이셨다. 주님은 손 마른 자와 접촉하지 않고 말씀으로만 낫게 하심으로써 바리새인의 전통마저 어기지 않으시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는 예리한 질문을 던져 그들이 안식일의 본래 정신과 의도를 훼손하고 껍데기뿐인 전통만 붙잡고 있음을 드러내셨다. 손 마른 자의 치유는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안식의 나라요, 생명의 나라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더는 안식일이 “날” 준수의 문제가 아니라 한 인격, 예수님과의 관계의 문제가 되었다. 예수님 안에서 왜곡되어 온 안식일의 본래 의미가 살아났고, 누리지 못했던 온전한 축복이 향유되기 시작했다. 안식일은 선을 행하는 날이고 생명을 살리는 날이다. 굶주린 자가 배불러야 하는 날이고 손 마른 자가 일어나야 하는 날이다. 그리하여 유대교에 의해 말라비틀어져 핏기 없던 말씀에 화색이 돌고 생기가 넘치게 하는 날이다. 예수님 안에 거하며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으로 기뻐하고 예배하는 날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가 되고 눌린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는 구원의 날(4:18), 즉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주의 은혜의 날’을 안식일 치유를 통해 맛보게 하셨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그 안식일을 성취하시는 메시아의 자비로운 역사를 보고도 생명이 회복되는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도리어 생명을 죽일 모의를 한다. 안식을 배우고 가르쳤지만,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음을 스스로 드러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사망의 세상을 뒤집고 뒤엎는 생명의 나라가 아니라 힘 있는 자가 득세하는 또 하나의 로마였다.
    
    
    
*주님,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의 살리고 회복하여 기쁨의 잔치를 누리는 날로 우리의 예배의 날이 풍성하여 지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는 주님의 날이어야 할 우리의 주일이 주님 덕분에 즐겁고 행복한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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