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6:27-38 하나님 나라 제자가 살아내야 할 삶_하나님의 사랑 방식으로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이나 유대 전통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치는 분으로 묘사되었다(5:38). 이 원리에 따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안식일도 재해석하셨다(6:1~11). 그리고 제자들 중 열두 사도를 세우시고, 평지에서 사역을 하시면서(6:12~19), 마침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신다(6:20~49). 본문은 본격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 대한 교훈이다. 예수님은 인자 때문에 받게 되는 핍박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가르치셨는데(6:22~23), 본문에서 이 주제를 확장하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순종하는 제자들이 미움과 박해를 받는 위치에 처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제시하고, 피해를 입은 처지에서도 긍휼의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근거를 말씀해 주신다.
1.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라(27~31절)
27~28절은 한 문장으로 “사랑하라”, “선을 행하라”, “축복하라”, “기도하라”라는 네 가지 명령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현재시제인 것은 이것이 영원히 실천해야 할 명령임을 보여준다. 첫 번째 명령인 “원수사랑”은 이어지는 세 명령으로 설명되고 확장된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를 선하게 대하고, 저주하는 자의 복을 빌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같은 의미다. 원수 사랑의 윤리(35절)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독특한 원리다. 매우 급진적일 뿐 아니라 유대교에 전례가 없다.
유대교는 원수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를 윤리의 원리로 삼은 적이 없다. 랍비 문헌에도 원수 사랑의 명령은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은 원수 사랑을 하나님의 속성에 일치하는 태도로 이해하신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급진적 윤리는 제자 공동체의 정체성을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 드러내는 데 있어서 핵심이 된다.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의 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인간 본성으로는 할 수 없는 급진적인 윤리이다. 29~30절의 네 가지 행위는 27~28의 네 가지 명령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급진적인 사랑이란 첫째, 이쪽 빰을 치는 자에게 저쪽 빰을 돌려 대는 것이다(폭력을 당하는 상황을 암시한다). 둘째,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마저 주는 것이다. 이는 강압적으로 빼앗기는 상태를 말한다. 셋째, 무엇을 구하는 자에게 주는 것이다. 넷째, 나의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돌려받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네 가지 명령과 실천 목록의 근거로 다른 사람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는 황금률을 제시하신다(31절).
황금률은 적극성을 강조한다. 제자들은 예수처럼 살아가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에 선한 행동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여러 문화권에서 한때 강자였다가 약자가 된 원수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은 관대함의 사례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강자의 위치에서 약자인 제자에게 해를 가하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원수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실천하기 불가능한 윤리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심으로써 친히 이 가르침을 실천하셨다(눅 23:34). 스데반은 예수님처럼 원수들을 위해 기도했다(행 7:59~60).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천하는 원수 사랑은 예수님과 초기 교회 때부터 세상에 충격을 던진 기독교의 독특하고 탁월한 윤리였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의 성품을 상속받았으므로(36절) 원수까지 용서할 수 있는 긍휼의 속성도 받았다. 예수님은 불가능한 윤리를 명령하신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시각에서 불가능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제자들을 부르셨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예수님을 보았기에(행 7:55)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다.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힘을 주시면 감히 원수들을 향해 선대할 수 있도록 은혜와 힘을 주신다. 예수님과 결속력이 강할수록 예수님이 가르치신 윤리를 실천할 힘을 얻게 된다.
2.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자비로운 자가 되라(32~38절)
32~35절은 제자들이 행해야 할 윤리를 세 번의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으로 강조한다. 만일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제자로서 칭찬받을 일이 아니다(32절). 왜냐하면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을 선대하는 자만 선대하는 것도 칭찬받을 일이 아니다(33절). 왜냐하면 죄인들도 그런 식으로 선대하기 때문이다. 만일 되받기를 기대하고 빌려주는 것은 칭찬 받을 일이 아니다(34절). 왜냐하면 죄인들도 되받기를 확신하고 죄인에게 빌려주기 때문이다. 이 단락에서 “죄인”이라는 표현은 종교적이거나 윤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외부인을 가리키는 용어다. “칭찬할 것이 무엇이냐?”라는 말은 받을 것을 기대하고 주는 “상호성(되받을 것을 예상하고 주는 것)”이 당시 시대 지중해 문화권의 관습이었음을 나타낸다. 이런 서술들은 받을 것을 확신하거나 기대하고 주는 것은 상식적인 행동이지 제자의 윤리적 탁월성을 보여주는 행위는 아님을 분명하게 밝힌다.
35절은 32~34절의 세 가지 행위를 언급하면서 선행을 행하는 제자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한다. 즉, 예수님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근거를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설명하신다. 제자들은 되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고 빌려주어야 한다(35절). 되받기를 기대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제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보상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윤리에서 선행이 보상을 받게 된다는 상호성의 원리는 그대로 작동하나, 다만 당시 문화에 내재했던 상호성의 원리와 달리 갚아주고 보상하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즉, 호의를 제공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행을 실천한 사람에게 보상하신다(12:33; 14:14).
제자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면서 희생이 사라지는 것 같아 좌절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상대방이 호의에 반응하지 않을 정도로 감사를 모르고 악하다고 해도 선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감사를 모르는 악한 자들에게도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되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는 영예를 얻게 된다. 하나님의 상속자인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긍휼의 성품을 상속받은 자로서 긍휼을 마땅히 베풀어야 한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는 자녀를 기억하시고 크게 갚아주신다.
사랑의 실천은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세 가지 문제에 적용된다(37절). 이 세 가지는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을 끼친다. 첫째,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비판하는 행위는 형제의 사소한 문제를 파내서 비판하는 태도에 가깝다. 비판하지 않으면 하나님에 의해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둘째,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정죄하는 것은 비판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다. 정죄하지 않으면 하나님에 의해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 셋째, 용서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에 의해 용서 받게 될 것이다.
이어 예수님은 이타심을 갖고 긍휼을 베푸는 제자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설명하신다(38절). 주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이다. 이 약속을 위해 예수님은 시장에서 볼 수 있는 그림을 활용하신다. 대단히 관대한 어떤 상인은 측량 그릇에 곡식을 꼭꼭 눌러서 담고, 그릇을 흔들어 빈 공간을 채우고, 넘칠 정도로 담아서 품에 안겨 준다(38절 상반절). 그만큼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는 제자를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이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38절)”는 유대 격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처럼 대우를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보상은 하나님이 하신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은 자녀의 희생에 응답하신다.
이와같은 제자의 윤리는 되받을 것을 기대하고 선을 행하는 상호성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에 근거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17: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성의 원리는 하나님이 선을 행한 자녀를 크게 보상하실 때 작동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버지의 성품을 따라 긍휼을 베풀고,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의 행위에 반드시 보답하실 것이다.
나는?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 즉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도 인자하시고 자비하시다(마 5:45). 윌가 사랑할 대상도 그러하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사랑이다. 나를 저주하고 모욕하며 뺨을 때리고 빼앗는 원수에게 그들이 받아야 할 마땅한 대가를 받게 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선대하는 것이 사랑이다. 세상은 사랑에서 제외될 대상을 정해서 악을 악으로 갚지만, 제자들은 사랑으로 싸우고,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부름 받았다.
-마땅히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는 것,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상식이다. 하나님 나라 제자가 해야 할 사랑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방식의 사랑이다. 이 세상에서는 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사랑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할 대상을 우리의 원수, 우리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자, 우리의 뺨을 치고 겉옷을 빼앗고 우리 소유를 가져가는 자라고 하신다. 미워하고 저주하고 정죄해도 시원찮을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사랑 말고는 허용된 것이 없다는 뜻이고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았다는 뜻이다.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제자의 길이다.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 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어떤 대접을 원하는가? 베푼 만큼 얻기를 바라지 않고 그 이상을 원한다. 당한 만큼 복수하려 하지 않고 그 이상으로 파괴하려 한다. 큰 잘못은 작게 여기거나 눈 감아주고 다시 기회 주기를 바라고 작은 선행은 크게 봐주기를 바란다. 섬김보다 권력의 자리를 바라고, 가난보다 부요함을 바란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타인도 원한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이웃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하게 될까? 죄인을 어떻게 대할 것이며, 나의 손이 필요한 약자는 어떻게 대할 것인가?
-우리가 본으로 삼아야 할 대상은 다른 형제가 아니다.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서 충분하지 못한 나의 사랑과 용서를 정당화 하면 안 된다. 자기 의에 사로잡혀 타인의 허물과 잘못을 지적하고 정죄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나에게 주시지 않았는가?
-하늘 백성은 허물이 있더라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고 도리어 넘치도록 후히 베푸는 사랑을 행하여야 한다. 불의에 침묵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잘못을 분별하여 지적하되, 그들을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지 말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타산에 근거한 상식 수준의 윤리를 넘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는 것을 가장 큰 보상으로 여기면서 이 땅에서는 사랑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제자의 사랑 방식이다.
*주님, 이런 사랑을 해야 하는데, 성령님의 도와주심이 확실히 필요합니다. 상식적인 것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사랑 방식에 순종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