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백부장의 믿음과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 [눅 7:1-17]
 – 2025년 02월 26일
– 2025년 02월 26일 –
눅 7:1-17 백부장의 믿음과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
 
7~8장은 예수님의 치유와 구원 사역을 담고 있다. 본문은 백부장의 종이 치유받는 장면(1~10절)과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사건(11~17절)을 다룬다. 백부장의 종이 치유받는 장면은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한 그의 겸손과 믿음을 강조한다.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사건은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이 실현되는 장면을 담아낸다. 특히 예수님은 경계를 허무는 일을 하시는데, 이방인의 간청에 응답하시고 시체가 있는 관에 손을 대신다.
 
이방인 백부장의 요청을 받은 유대 장로들이 예수님을 찾아간 장면은 당시의 후원 문화를 배경으로 삼는다. 그리스-로마 문화의 후원 체계(후견인-피보호자 관계)는 상호성에 기반을 두는 것으로 피보호자가 후견인으로부터 호혜를 입는 순간부터 은인에게 빚을 갚아야 하는 의무를 짊어지게 된다. 즉, 상호성이란 평등성이 아니라 후견인과 피보호자 간의 차별과 불평등에 근거한 의무 수행의 관계를 말한다. 로마의 백부장들은 대체로 부자였고 민중을 위한 봉사와 의무는 진급에 있어서도 중요했다. 백부장들이 지역민을 위해 은덕을 베푼 기록도 남아 있다. 장로들은 유대 민족을 존중하고 회당까지 지어준 로마 백부장을 후견자로 생각하고 빚을 갚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예수께 “합당하다”는 용어를 사용해 의무를 다하도록 요구한다. 흥미롭게도 유대 장로들과 달리 백부장은 후원 윤리에 따라 치유를 요청하지 않았다. 그는 치유를 예수님이 유대인의 대표로서 갚아야 할 빚이나 의무가 아니라 긍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집으로 오시는 예수님에게 친구들을 보내 예수님을 만날 자격이 없다고 고백한다.
 
 
 
1. 백부장의 종을 치유(1~10절)
예수님은 모든 말씀을 마치고서 가버나움에 가셨다(1절). 어떤 백부장이 소중히 여긴 종이 중병에 걸렸다(2절). 종의 병을 위해 예수님을 찾을 정도로 백부장은 종을 존중하고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치유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3절), 유대 문화를 존중하는 백부장은 이방인으로 유대인 예수님을 직접 찾아가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몇몇 유대인 장로들을 보내 종을 고쳐줄 것을 요청하게 한다(3절). 그들은 의인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합당한’일이라고 주장한다(4절). 그는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회당을 지은 자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5절). 장로들은 백부장의 혜택을 받았으니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예수님께 요청한다.
 
예수님은 장로들과 함께 백부장의 집으로 가신다(6절). 그리고 백부장의 집에 이미 가까이 이르자 백부장은 친구들을 예수께 보낸다. 그들을 통해 백부장은 예수님이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한다(6절). 자신이 이방인이기 때문에 예수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뿐 아니라, 장교와 주인으로서 명령을 받고, 내리는 경험에 근거하여 예수님이 명령하시면 말의 능력이 즉각 나타날 것을 믿는다(8절).
 
예수님은 백부장의 반응에 놀라신다. 이제까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놀랐는데, 처음으로 예수님이 사람에 대해 놀라신다. 그러고는 이스라엘 중에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칭찬하신다(9절). 백부장이 보낸 사람들이 집에 들어가 보니 이미 종의 병이 나았다(10절).
 
 
 
2.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11~15절)
나인성은 나사렛에서 남동쪽으로 약 10km 정도 떨어진 마을이다. 예수님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했다(11절). 이때 예수님은 독자를 잃은 과부와 그 장례 행렬과 마주치신다(12절). 유대 사회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었다는 것은 자식을 잃은 정서적 슬픔을 뛰어 넘는다. 왜냐하면 남성 중심의 고대 사회에서,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는 과부는 경제적 활동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모든 재산의 상속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부는 이제 경제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철저히 고립된 가장 소외된 자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과부에게 독자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남편을 잃고 여러 슬픔과 괴로움 속에 있었지만, 아들로 인해 위로를 받았을 터이다. 또한 아들에 대한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희망도 있었을 것이다. 이 아들이 남편의 뒤를 이어 가정을 일으키고, 가문을 번성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 독자가 죽었고 망연자실하여 장례를 치르고 있었고 그 와중에 예수님의 행렬과 마주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녀를 “불쌍히” 여기셨다(13절). 예수님의 이러한 동정은 복음서에 자주 나타난다(마 9:36; 14:14; 15:32; 막 1:41; 6:34). 누가는 나중에 돌아온 탄자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눅 15:20). 즉 예수님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 과부를 측은히 여기셨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사회적, 경제적 소외에 한없이 낮아진 이 과부를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마침내 그 아들의 관에 손을 대시고, 아들을 살리신다(14~15절).
 
율법에서 시체에 손을 대는 것은 제의적 부정을 가져오는 대표적인 사례다(민 19:11, 16). 하지만 예수님은 부정한 것에 영향을 받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한 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바로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앞서 세리와 죄인들의 잔치에 참여하시면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예수님은 죄인을 의인으로, 부정한 자를 정결한 자로 만드셨다.
 
 
 
3. 예수님의 기적의 결과(16~17절)
예수님이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자, 세 가지 결과가 나온다. 첫째로,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16절). 이는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음을 보게 되었기 떄문이다.
 
둘째, 예수님을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선지자로 여긴 듯하다(16절). 하나님께서 선지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자기 백성을 살리셨다고 믿었다. 이로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오셨다고 믿었다는 뜻이다. 이는 이미 사가랴의 예언을 통해 암시되었다(1:68, 78).
 
셋째,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광범위하게 이스라엘 전역에 퍼졌다(17절).
 
 
 
나는?
-예수님은 말씀을 몸소 실천하신다. “소외된 자들”을 위한 구원(4:18, 19)과 원수사랑(6:27)을 몸소 실천하셨다. 유대인의 원수 이방인 백부장의 종을 치유하시고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살리신다. 자신의 사명과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이행하시고 실천하셨다. 지식만을 가르치는 것과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것으로 “순종”과 “참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참 지식을 얻지 못한다. 소외된 자에게 손을 내밀고 자격 없는 이웃을 용서하고 수용할 때, 차가운 나의 사랑의 언어와 지식에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복음은 머리로 이해하거나 가슴으로 느끼는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예배당이나 주일만을 위한 복음도 아니고, 믿는 자들만을 위한 삶을 요청하는 복음도 아니다. 모든 시간, 모든 공간,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이 임하도록 온 몸을 움직여 나타내고 살아내고 보여주어야 하는 복음이다.
 
-예수님을 놀라게 한 백부장의 믿음이다. 병든 종을 향한 백부장의 마음과 압제받는 민족을 향한 호의와 존중, 거기다가 주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맡김, 이런 백부장의 인격과 처신은 예수님을 놀라게 하였다. 그것은 가식적인 것이 아니라 종에게 치유를 선물할 만큼 진실한 마음이었고, 피지배자인 유대인 장로들도 인정할 정도로 일관성이 있었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그는 실천으로 열매 맺는 산 신앙(6:43~49)의 모범이 되었다. 예수님은 믿음을 보실 뿐 외모를 보시지 않았다.
 
-아들을 잃은 과부를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자비하신 아버지(6:36)의 아들로서 과부를 불쌍히 여겨 그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다. 이를 통해 사렙다 과부의 아이를 살린 엘리야(왕상17장)나 수넴 성 여인의 아이를 살린 엘리사(왕하 4장)보다 “더 큰 선지자”임을 보이신다. 그리고 죽음으 ㅣ시대가 가고 생명의 시대, 안식과 샬롬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셨다. 사가랴의 예언대로(눅 1:68) 종말에 하나님이 백성을 ‘돌아보시고’ 속량하시려고 자신을 보내셨음을 증명하셨다.
 
 
 
*주님, 주님의 하나님되심이 더욱 더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가르치신 말씀대로 실천하시며 선포된 하나님 나라 복음이 일상이 되게 하십니다. 지금, 여기에서도 그리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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