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세례 요한과 이 세대의 예수님에 대한 반응 [눅 7:18-35]
 – 2025년 02월 27일
– 2025년 02월 27일 –
눅 7:18-35 세례 요한과 이 세대의 예수님에 대한 반응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간접적인 만남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요한은 헤롯에게 체포된 후(3:19~20) 무대에서 사라졌다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두 제자를 예수님에게 보내는 장면에서 다시 등장한다(7:18~19). 예수님은 요한의 의구심에 자신이 바로 그가 기다린 “오실 그이”이심을 알리신다(20~23절). 무리를 향해 요한의 정체를 알리고(24~30절), 자신과 요한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대한 이 세대의 반응을 평가하신다(31~35절).
 
 
 
1.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요한의 반응(18~23절)
본문은 예수님의 정체를 의심하는 요한에게 메시아 사역을 보여주고 설명하는 것으로 자신이 “오실 그이”임을 입증하는 내용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가르친 말씀과 행하신 치유를 요한에게 알린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은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한대로 인데, 예수님은 그 설교에서 ‘주의 보복의 날’을 제외했고, 희년의 복음을 전할 때도 회복에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요한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심판이 ‘오실 그이’를 통해 집행될 것을 예고했었다(3:17). 요한은 예수의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지만, 심판을 집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 자신이 기다렸던 “오실 그이”가 맞는지 질문한 것이다(19~20절). 얼마나 중요했는지 두 번에 걸쳐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지 물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병과 고통을 치유하고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고 많은 평안을 치유한 장면을 보았다(21절).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요약하고 이 내용을 요한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하신다(22절). “맹인들이 눈을 뜨고 못 걷는 사람들이 걷고 나병환자들이 깨끗하게 되고 못 듣는 사람들이 듣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22절; 사 26:19; 29:18; 35:5~6; 42:18; 61:1). 예수님의 설명은 그가 수행한 사역은 치유, 즉 회복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이사야 61:1~2을 선포한 나사렛 회당에서 설교하신대로 실현하는 것이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이었다. 이는 예수님이 기쁜 소식(사 61:1~2)을 전하도록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인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 사역을 수행하는 것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마다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선언하신다(23절). 특히 이 경고는 예수를 통해 기대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향한다.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오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실족할 수 있다. 예수의 존재와 사역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요구에 예수님을 맞추기보다 예수님의 요구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
 
 
 
2.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24~30절)
요한이 보낸 제자들이 떠난 후에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무엇을 보러 나갔느냐?”라는 가상의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는 방식으로 요한의 정체를 설명하신다. 무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광야로 나간 것이 아니다(24절). 갈대를 구경하려고 멀고 거친 길을 걸어 광야까지 가는 사람은 없다.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고 광야로 간 것도 아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기 때문이다(25절). 광야의 요한은 최고로 청빈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높은 지위에 비싼 옷을 입은 고관대작을 보려면 왕궁에 가야 한다. 무리가 광야에 간 목적은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다(26절).
 
요한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종말에 보냄받을 것으로 예고된 선지자였다. 그런데 요한은 선지자보다 더 큰 자다. 엘리야와 같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출 23:20; 말 3:1)이기도 하다.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다. 어떤 인간보다 위대하다는 개념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계시하고 실행하는 점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뜻이다. 구원사의 관점에서 요한은 ‘주’로 오신 예수님의 전령이었으므로 어떤 선지자보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느 누구도 요한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게 가장 작은 자가 요한보다 더 위대하다(28절). 이는 옛 시대와 새 시대 사이의 차이가 매우 커서 새 시대에서 가장 작은 자가 요한보다 크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상반된 반응이 나오는 것은 요한의 세례에 대한 상반된 반응을 반영한다(29~30절). 1세기 당시 세례는 출애굽 사건에서 물을 건너 해방을 경험한 거처럼 이전의 삶을 돌이켜 구원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상징했다. 요한의 가르침과 세례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는 행위였으므로 그의 사역에 동참하는 일은 옳은 선택이다. 회개의 세례에 참여하는 사람은 요한이 예고한 “오실 그이”가 집행할 성령과 불의 세례를 받는다. 즉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에 참여한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고 한다(29절).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다(30절). 그들은 요한의 경고처럼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 독사의 후손이다(3:7). 요한의 세례를 거부하면, 그가 예고한 예수를 거부하고 결국 심판에 처해질 수밖에 없다. 
 
 
 
3. 이 세대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31~35절)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에 참여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 세대를 장터에서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비유로 설명하신다. 이 비유(31~32절) 역시 29~30절의 내용처럼 예수님과 요한의 사명을 하나로 연결한다. 이 세대는 시장에 앉아 결혼식과 장례식 놀이를 하는 아이들과 같다.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피리를 불면서 춤을 추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곡을 해도 울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곧 이어서 해설해주신다(33~34절).
 
이 세대는 요한에게 결혼식 놀이와 같이 좋은 반응을 요구했으나, 요한은 금식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요한이 귀신 들렸다고 비난했다. 예수께는 장례식 놀이도 요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개한 죄인들을 환대하고 식사 자리를 만들어 참여했다. 그러자 먹는 것을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고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라며 예수님을 비난했다.
 
예수님과 요한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정치-종교 놀이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신 것이다. 지도자뿐 아니라 당시 백성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세대는 예수님이 자신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대로 응답해주지 않자 예수님을 배척했다. 무시하고 비하하며 결국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몰았다.
 
당시의 악한 세대가 예수님을 통해 욕망을 채우기 원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 역시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킬 대상으로 예수님을 활용하려 한다. 이 세대의 사람들은 예수님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도 자신들이 원하는 바대로 행하기를 바란다. 자신들이 만든 종교-경제의 놀이터를 행복의 장으로 만들어주기 원한다.
 
그렇다면 이 세대가 예수님을 배척해버리면 예수님은 사명의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35절)”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 나라 복음에 반응하는 이들이 일어난다. 지혜서(문헌)에서 지혜는 전형적으로 하나님을 의인화한 용어이며(잠언 8장).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사역을 의인화 한다. “지혜의 자녀들”은 “이 세대”와 반대로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긍정적으로 반응함으로써 하나님의 목적을 따른 자들이다.
 
바리새인들과 율법 선생들은 예수께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이 세대에 속한 자들인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비난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삶은 지혜의 옳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이는 요한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것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29절).
 
 
 
나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오해했다. 요한은 예수가 구약의 약속을 이룬 메시아인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떤 메시아인지는 몰랐다. 메시아가 오시는 즉시 의인의 심판과 악인의 심판을 가져올 줄 았았다. 이에 예수님은 옥에 갇힌 세례 요한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축귀와 치유와 소생과 복음을 전하는 사역의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영적 희년을 성취하고 있고, 자유와 해방의 역사는 진행되고 있음을 보이신 것이다. 다만 악인의 최종적인 심판의 때는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실 것이다.
 
-세례 요한이 기대하고 기다린 메시아는 예수님과 달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구심과 정직하게 대면하고 예수님께 질문한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냐고… 세례 요한은 심판자와 정치적 구원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치유하고 병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는 메시아로 오셨다. 이를 통해 메시아가 가져올 새 언약의 시대, 새 이스라엘에 합당한 모습을 보여주신다. 하지만 요한이 기대한 심판(3:16~17)에 대해서는 침묵하신다.
 
-심판은 취소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때를 정하신다. 요한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보았으나 그 나라가 성령을 통해서 힘 있게 팔레스틴의 경계를 넘어 이방 땅으로 나아가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으로 악인들이 멸망하고 의인들이 몸으로 부활하는 완성은 보지 못했다.
 
-내가 그리는 메시아를 요구하여 스스로 실족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위해 이미 오신 메시아를 합당하게 영접해야 한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오해했다. 요한이 예수님을 오해했다면, 당대 사람들은 요한을 오해하였다. 무리가 광야에 나간 것은 갈대를 구경하거나 왕궁에서나 볼 수 있는 권력자를 기대해서가 아니다. 그렇다 . 선지자를 보려고 나갔다. 그럼 요한을 어떤 선지자로 알고 있는가? 무엇을 상상했든지 그 이상이다. 왜냐하면 요한 자체의 역량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사역하고 있는 시기와 그가 가리키는 대상 때문이다. 그는 옛 시대와 새 시대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하나님 나라를 맨 앞에서 전했지만, 그 나라가 온전히 이뤄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가장 큰 선지자였으나, 신약에서는 가장 작은 선지자다. 그러니 그의 말을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된다.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신 왕,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요한은 지금, 세상의 배척을 받아 감옥에 있지만, 특별한 선지자였다(말 3:1). 구약에서는 가장 큰자다. 하지만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메시아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할 것이기에 그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된다. 우리는 구약의 어떤 선지자나 왕, 제사장도 누리지 못한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들인 것이다. 세례 요한도 누리지 못한 그 성취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세례 요한은 부분적으로 오해했지만, 이 세대는 하나님 나라를 아예 거부한다. 이 세대는 예수님도, 세례 요한도 오해했다. 메시아에 대한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필요를 따라 메시아를 원했고, 팔레스틴 땅에 이스라엘이 재건되는 하나님 나라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대는 세례 요한에게는 결혼식 놀이를 요구했지만, 정작 장례식 놀이로 반응했고, 예수님에게는 장례식 놀이를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결혼식 놀이로 반응했다.
 
-메시아를 맞아들이기 위해 울어야 할 때 울면서 자기 죄를 회개햐야 하는데, 도리어 불의를 멈추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선포하는 요한을 배척했다(7:30). 메시아가 베푼 구원의 잔치가 시작되었는데도 그 흥겨움에 참여하지 않고(5:27~32) 도리어 그 메시아 예수님을 먹고 마시기만 탐하는 자라고 비난한다. 냉랭하기만 한 가슴으로 울 줄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르는 무표정의 시대는 오직 자기 탐닉으로 공허감과 권태 가운데 살고 있다. 자기 이익과 권리, 기득권을 지키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이 세대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각각 자신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대로 응답해주지 않자 배척한다. 무시하고 비하하며, 결국 참수형과 십자가형으로 처형하고 만다. 자신들을 위해 왔지만, 그들은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 끝내 세례 요한이 선포하고, 예수님이 열어주신 생명의 길을 외면하고 만 것이다.
 
 
 
*주님,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살면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나의 나라를 탐닉하여 지금 임한 하나님 나라를 볼 겨를 없는 비참한 인생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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