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거라사 광인 해방 이야기 [눅 8:26-39]
 – 2025년 03월 03일
– 2025년 03월 03일 –
눅 8:26-39 거라사 광인 해방 이야기
 
앞 단락에서 예수님은 자연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묘사되었는데(8:22~25), 이제 귀신을 다스리는 분으로 묘사된다. 누가복음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능력은 이미 여러 차례 설명되었다(4:36, 41; 8:2). 그러나 이 단락에 나오는 귀신은 그 이름이 “군대”라 할 만큼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악령이었다.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귀신들은 예수님을 향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28절)” 이라고 소리친다. 본문은 갈릴리 호수에서 폭풍을 만난 제자들이 예수님이 권능을 목격하고 나서 “그는 누구인가?(8:25)” 라는 질문을 서로에게 던진 장면과 함께 사람이 제어할 수 없는 자연과 악의 세력을 제어하시는 예수님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1. 부정한 땅의 더러운 귀신 들린 부정한 사람(26~29절)
갈릴리 맞은 편 거라사인의 땅(26절)은 데가볼리의 한 지역일 것으로 추정한다. 데가볼리는 헬라 문화가 발달한 도시들의 연합이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이 지역은 매우 부정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지역을 피하지 않으시고 적극적으로 건너 가셔서 사역하신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은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도 향하는 것이다.
 
이방인 지역에서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를 만나신다(27절). 이 사람은 옷을 입지 않고, 집에 머물지 않으며, 무덤 사이에 거주했다. 죽은 시체들 사이에 거주하는 것은 제의적으로 매우 부정한 것이었다(민 19:11, 14, 16). 누가는 이 사람에게 들린 귀신을 “더러운” 귀신이라고 표현했다. 부정한 지역, 부정한 장소에 사는 매우 부정한 더러운 귀신 들린 부장한 사람을 예수님께서 만나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부정하고 더러운 것에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오히려 부정한 것을 거룩하게 한다. 이방 지역을 복음으로 새롭게 하시고 귀신 들린 부정한 사람을 깨끗케 하신다.
 
그런데 그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가리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들(28절)”이라고 소리친다. 앞 단락에서 제자들은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을 보고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25절)” 하고 질문했다. 이 질문에 대답이라고 하듯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귀신은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도, 따르지도 않는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심판의 대상일 뿐이다. 반면, 예수님은 제자들인 믿음이 부족할지라도 인내로 열매 맺기를 격려하신다.
 
귀신은 예수님께 자신을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한다(28절). 예수님이 이미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29절). 이 지역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사람을 억제하기 위해 그를 묶어두었으나 허사였다. 그는 맨 것을 끊고 광야로 도망쳤다. 귀신들린 사람의 비참한 모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옷은 입지도 않고, 무덤으로 광야로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 속에 존귀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렇게 더러운 귀신에 붙잡혀 부정한 곳을 돌아다니며 미친 사람처럼 사는 비참한 한 남자를 예수님께서 만나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치유하려 하신다.
 
 
 
2.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시다(30~33절)
예수님이 이름을 묻자 귀신은 자기 이름을 “군대(레기온)”라고 대답한다(30절). 레기온은 로마 군대의 천 명 이상으로 구성된 편제 단위를 일컫는 단어이다. 그만큼 이 남자를 붙들고 있는 귀신이 많다는 의미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귀신들도 예수님을 당해낼 수는 없다. 예수님이 명령하시자 그 귀신들은 자신들을 무저갱으로 보내지 말아달라고 간청한다(31절). 무저갱은 마귀와 그의 사자들이 갇히는 장소다(계 20:3). 그리고 근처에 있는 돼지 떼에 들어가기를 간구했고 예수님은 이를 허락하셨다(32절). 아무리 많고 강한 귀신들이라도 예수님의 허락이 있어야 돼지 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귀신들은 돼지들에게 들어갔고 돼지들은 곧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였다(33절). 돼지는 율법에서 부정한 동물로 여겨졌다(레 11:7; 신 14:8). 더러운 귀신들이 부정한 동물들에게 들어간 것이다. 이 사건에서는 온통 부정한 것의 연속이다. 부정한 지역의 부정한 장소, 부정한 귀신, 부정한 짐승,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부정한 곳에서 거룩한 일을 행하신다. 부정한 사람을 건강하고 정결한 사람으로 바꾸신 것이다. 
 
 
 
3.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34~37절)
돼지 떼를 치던 자들이 일어난 일들을 보고 마을로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알렸다(34절). 이에 사람들이 이 일을 직접 보기 위해 예수님께 왔다(35절). 그들은 귀신 들려 옷을 벗고 다녔던 사람이 이제 정신이 온전해져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이제는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남자의 미친 증상이 사라지고 온전해진 모습을 직접 확인한 것이다. 주민들은 두려워한다. 이 반응은 매우 부정적인데, 앞선 본문들에서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데 반해 본문의 두려움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주민들은 두려워할 뿐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이 놓임을 얻고 또 그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 돼지가 몰살한 모든 상황을 주민들이 듣게 된다(36절). 그러자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그 지역에서 떠나시도록 예수께 요청한다(37절). 왜 그랬을까? 추측하기로 이들은 경제적 손실에 충격을 받은듯 하다. 누가복음은 그 수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지만, 마가복음에서는 돼지가 이천 마리나 되었다(막 5:13)라고 밝힌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보면서도 눈 앞의 경제적 이익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은 결국 그 지역을 떠나신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는 곳에 좀처럼 역사하지 않으신다. 자신을 계시하실 때 믿고 반응하는 사람에게 역사하신다.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에게는 능력을 행하지 않으신다(마 13:58). 따라서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4.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귀신 들렸던 사람의 반응(38~39절)
귀신이 나간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요청한다(38절). 이 요청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예수님에 의해 고침을 받았으니 그를 따르는 제자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요청을 거절하시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신다(39절).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이어지는 본문은 그에게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한 일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따라 하나님의 계획과 능력에 의해 된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증언하라고 하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방 지역에 널리 퍼지기를 기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하나님 중심의 태도는 다른 사역의 현장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마침내 귀신에게 놓임을 얻은 사람은 자신의 도시로 돌아가 하나님의 큰 일을 널리 전파한다.
 
둘째, 그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방인을 차별하기보다는 효과적인 유대 지역 전도를 위해 예수님은 유대인으로만 구성된 제자들을 이미 구성하셨다.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도에도 분명한 모범을 보여 주셨지만, 구체적으로 이방 지역이 복음화되는 것은 오순절 이후 제자들에 의해서다. 혹, 귀신이 나간 이방인이 이 사람이 함께 동행하더라도 이방인이라는 것으로 인해 유대인과 유대지역에서 불러일으키게 될 분란은 뻔한 것이었다.
 
 
 
나는?
-데가볼리의 거라사 광인은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야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황폐한 광야 같고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불임의 태와 같다. 죄와 사망의 사슬에 매여 있었고, 사탄에 매여 하나님의 형상이 철저하게 파괴된 존재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한 모습,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 자체다.
 
-예수님은 고립되어 소외된 채 짐승처럼 살던 한 사람을 구원하시고 회복해주셨다. 쇠사슬과 쇠고랑만이 그를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철저하게 인간됨을 상실한 사람을 주의 발 아래로 앉는 자로 온전케 하셨다. 메시아의 사명을 따라 매인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살았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 없던 이에게 새 새명을 주신 것이다(4:18, 19).
 
-지금도 사탄은 불의한 제도와 문화와 가치관을 통해 인간이 인간을 학살하고 유린하며 착취하게 만든다. 이런 세상 속에 있는 교회는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이 세상에 해방과 안식을 선포하고 주님께서 행하신 길을 따라 한땀한땀 차근차근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귀신의 찬양(?)을 거절하신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며 시험했던 귀신(4:3)이 이번에도 광야(29절)의 남자를 통해 또다시 예수님을 시험하려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인간을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시킨 귀신의 칭송을 거절하신다. 한편 회복된 거라사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성내에 전파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를 통한 찬양은 받으신 것이다.
 
-무저갱에 가두지 말아달라는 군대 귀신을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허락하신다. 하지만 귀신이 들어가자마자 돼지 떼는 호수로 내달려 몰사하고 만다. 이것은 귀신을 용서하신 사건이 아니라 심판하신 사건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호수 아래의 무저갱에 귀신을 가두신 것이다. 이로써 주님은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영적 세력도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또 증거하신다. 
 
-귀신들이 떠나간 기적을 보고도 거라사 지방의 백성은 예수님께 떠나라고 요청한다. 한 영혼이 온전해진 것에 기뻐해야 마땅하나, 돼지를 잃은 손실에 더 마음을 썼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 지역의 돼지 산업은 당시 데가볼리 지역에 주둔한 로마 군대의 보급 역할을 했기에 이에 따른 경제적 손실이 확실했음을 언급한다. 당장의 경제적 손실이 영혼의 가치보다 더 크게 보이는 현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본다고 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것은 아니다(8:10, 14). 그러나 거라사의 그 사람은 귀신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베드로의 장모처럼(4:39), 일곱 귀신 들렸다 나은 마리아처럼(8:2) 순종한다. 하나님 나라 비밀을 맛본 후 등불을 감추지 않고 비춘 사람처럼(16~17절), 말씀을 듣고 지킨 사람처럼(15, 21절), 예수님이 하신 그대로(8:1), 그리고 명령하신 그대로, 자신이 경험한 큰 구원을 선포하였다. 말씀이 열매를 맺는 귀한 순간이다.
 
-거라사 광인의 정신을 온전케 하셔서 예수의 발치에 앉아 주의 말씀을 청종하게 하시고, 그가 집으로 돌아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성내에 전파하게 하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거라사인의 땅 모든 백성은 정작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이의 생명보다, 자신들의 소유를 더 중하게 여기면서 모든 만물의 주 되신 예수님을 거절한다. 자신들의 생명을 온전케 해줄 수 없는 헛된 소유를 얻기 위해 예수님을 쫓아낸 것이다.
 
-광인은 회복되어 증인이 되었다. 그는 온전한 해방과 치유를 온 성내에 전파하는 증인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자유하다고 생각하는 주민들은 무질과 사망과 무지의 사슬에 매여 진정 자유롭지 못한 이들임을 깨닫게 한다. 살아있으나 증인이 아닌 손익을 따지며 주님의 기대와 뜻이 충분히 전달되었음에도 눈과 귀를 닫고 부질없는 것들을 따라 가는 마을 사람들과 같은 선택을 하지 말아야 하리라.
 
-거라사 광인에게 예수님은 무덤에서 집으로, 소외에서 소통으로, 광인에서 증인으로 새롭게 변화된 삶을 열어 주신 분이다. 나도 마찬가지 아닌가? 예수님이 아니라면 지금 나의 걷는 걸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의 삶 속에 예수님이 드러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걸음을 쉬지 않으리라.
 
 
 
*주님, 군대 귀신에 얽매인 이방인 한 사람을 위해 바다를 건너시고, 해방의 기쁨을 보여주신 그 모습에서 오늘 내가 선포해야 할 하나님 나라 복음의 감동을 봅니다. 저에게도 이 감동을 누리고, 전하여 , 세상에 증거하는 은혜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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