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눅 8:40-56]
 – 2025년 03월 04일
– 2025년 03월 04일 –
눅 8:40-56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거라사 지방에 하나님 나라가 선포 되었다. ‘군대’ 귀신에게 억눌렸던 한 사람을 통해 거라사 지방에 ‘두려움’을 안기며 왕 노릇했던 귀신의 세력을 떠나가게 하고 그 한 사람과 지역을 자유하게 하셨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은 자유를 주신 예수님을 귀신보다 더 큰 두려움으로 배척하고 주님은 자유함을 얻은 그 한 사람에게 “네게 임한 하나님 나라”를 집으로 돌아가 전하라고 부탁하셨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동네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하나님 나라 복음의 역사를 전하였다. 예수님은 두려워서 떠나가시기를 간구했으나, 그 지방 사람이었던 그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방 땅 거라사인의 땅(데카폴리스)에 전해져 갔다.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 땅 뿐 아니라 이방 땅에도 계속 빛을 비추고 있다.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신 예수님을 무리들이 기뻐하며 맞이한다(40절). 누가는 사람들이 “기다렸다”고 증언한다. 하나님 나라 복음이 선포되고 치유와 자유함의 역사들이 일어난 곳에 “늘 말씀이신 주님”을 무리들이 기다렸다. 나도 다시오실 주님을 이처럼 기다리고 기다리다 “환영”하며 맞이해야지… 그런데 무리들이 기다린 이유가 이내 드러난다. 회당장 야이로가 죽어가는 딸아이로 인해 애타게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고(42절), 12년을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서 치유함을 얻고자(44, 47절) 오매불망 기다렸다. 이 두 사람은 왜 예수님을 기다렸나?
 
 
“고통의 문제”
회당장 야이로의 요청에 따라 그의 집으로 가는 길에 12년 째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가만히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에 더 자세하게 소개 되었는데 야이로의 집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 야이로의 딸을 고치는데 동행했었고 후에 마가가 베드로에게 이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었을 가능성이 많다.
 
무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으며 많은 의사를 찾아 다녔지만 오히려 많은 괴로움만 받은 여인… 어떻게 이 여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을까? 특히 이 고통은 남모를 고통이었다. 스스럼 없이 가까운 이들에게 이야기 하며 치료할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혈루증이라는 병 자체가 “부정한” 상태의 질병이기에 어느 누구에게 쉽게 이야기하며 고통을 나눌 수 없었다. 여인의 고통은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 할 고통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모든 재물을 탕진하고 오히려 많은 의사들로부터 절망의 소리만 들었어야 했다. 고쳐지지 않는 질병으로 인해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해가 거듭될 수록 절망만 쌓였을 것이다.
 
한편 야이로, 그는 회당장이었다. 지역 사회에서 꽤나 유력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참 신기하게도 그의 죽어가는 딸도 12세였다. 사회적 지위는 죽어가는 병에 걸린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이 안됐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도착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지체하지 않고 “주님의 발 앞에 가서 엎드렸다!” 죽어가는 고통속의 아이에게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절실하게 알고 있었다. 너무나 다행스럽게 예수님은 야이로와 동행 하셨다. 이제 됐다고 안심했을 것이다. 그런데 도중에 예수님이 머뭇 거리신다. 가만히 보니 수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어 이리 저리 밀리며 걷고 있던 차에 누군가 자기 옷자락을 만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권능이 빠져 나갔다며 시간을 지체하신다. 그리고 한 여인과 대화 하신다. 여인의 회복이 모두에게 큰 감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체된 시간, “예수님이 치유 받은 여인과 말씀하고 계실 때(49절)” 그만 딸 아이가 죽었다.  야이로가 절망의 고통에 빠졌다.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50절)”고 말씀하신다. 그러시고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와 함께 딸 아이의 집으로 들어가셨다. 모든 사람들이 슬픔에 잠겨 아이를 위해 울며 통곡한다. 그들에게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52절)” 하시는 예수님을 모두가 비웃었다. 자기들이 분명히 죽은 줄 알고 있다는 것이다(53절). 이미 죽은 아이인데, 아무리 병을 치유하시고 귀신을 제어하시는 예수님이라도 어떻게 살릴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죽음”이라는 장벽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고 드러내는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달리다굼(아이야 일어나라!)” 말씀 한 마디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되돌려 놓으셨다.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심을 여실히 드러내신 것이다. 누가는 아이가 살아났을 뿐 아니라 건강도 회복 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부모는 이 모든 일을 보면서 “놀랐다!” 마가는 이 장면에서 모두가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막 5:42)”이라고 기록한다.
 
 
 
나는?
-조심스러운 생각이지만, 12에 담긴 유대인의 인식, “12지파, 이스라엘” 이라는 이미지로 여인과 아이를 바라보면 “이스라엘이 지금 죽어간다. 끊임없는 고통 가운데 있다”라고 읽어도 되지 않을까? 그 고통 속에 죽어가는 이스라엘이 주님을 찾았고, 인간적 타이밍으로 죽은 이스라엘을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예수님이 살리실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히면 자포자기 하기 쉽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끝까지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다. 슬픔과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예수님에 대해 소문을 들었고, 알고 있으며, 그의 능력을 기대하면 “간절히 기다리고, 간청”할 수 있다. 그 믿음이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은혜 받기를 고대 하는 것 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예수님은 조용히 치유 받고자 했던 여인을 세상에 드러내셨고,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는 기적을 반대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왜 그러셨을까?
 
-사람은 누구나 기적 자체에만 열광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나 에수님과의 동행보다, 그저 지금 내가 간절히 해결 하고자 하는 “문제 해결”에 초점이 맞춰진다면, 그 기적은 주님과의 관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적을 맛보는 일보다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영혼의 온전한 자유함, 구원함”을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주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야이로의 딸이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어떻게 될까? 죽음의 문제 만큼 큰 단절의 고통과 절망이 또 있을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더 아우성을 칠 것이다. 기적만 바라며 주님을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기적만 베푸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려, 그래서 하나님과 온전한 인격적 관계를 인생들에게 회복 시키시려고 오셨다.
 
-기적만 갈급하는 신앙보다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와 동행의 신앙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야 한다. 인격적인 교제의 신앙은 말씀을 의지하며, 말씀을 통해 소통하고, 말씀을 의지해서 행동하는 것이어야 한다. “누구든지 아버지(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나의 가족과 같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병을 치유하고 죽음에서 회복 시키시는 놀라운 일을 반드시 일상으로 이어지게 하신다. 혈루증 여인에게 단지 병이 고쳐지는 개인의 기쁨의 차원을 넘어서 마을 사람들에게 그녀의 치유됨을 선포하고 그녀가 공동체의 일상으로 온전히 돌아가도록 격려하신다. 치유의 진정한 목적은 어그러지고 파괴된 일상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고통의 암초들이 삶의 걸음을 미끄러지게 했지만, 말씀으로 치유하여 주심으로 다시 건강한 일상을 누리도록 세워 주셨다.
 
-야이로의 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먹을 것을 주라”고 부모에게 말씀해 주신 것은 “죽음에서 돌아온 신비로운 존재”의 아이가 아니라, 아이를 책임지고 돌보는 부모이며 자신의 딸임을 확인 시켜 주시는 것이다. 부모에게 자식을 온전히 돌려 주셨다. 일상의 온전한 회복을 열어 주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절망을 통과하고 있더라도 충분히 소망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혈루증 여인에게, 아이와 부모에게 온전한 일상의 회복으로 이끄신 주님이시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주님께서 예비하신 평범한 일상으로 우리를 반드시 인도하실 것이다.
 
*야이로에게 해주신 주님의 말씀이 큰 은혜가 된다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고통속에 눌린 모든 이에게 주시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소식을 오늘 아침에도 들려 주신 주님을 찬양한다.
 
 
 
*주님, 믿음으로 살아내는 걸음에 이렇게 역동적인 역사가 있음을 봅니다. 단순하게 믿고 단순하게 말씀을 꼭 붙잡겠습니다.
*주님, 저의 걸음에도 주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하다는 믿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은혜를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댓글 남기기

매일성경 묵상

십자가 아래 새 하늘 가족 [요 19:17-27]

요 19:17-27 십자가 아래 새 하늘 가족 예수께서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지상에서 보면 이것은 유대 당국자들의 모함과 심약하고 비겁한 빌라도의 판결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빌라도의 심문과 선고 [요 18:39-19:16]

요 18:39-19:16 빌라도의 심문과 선고 빌라도의 계속된 심문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은 왕이시면서 사람이시고,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된다. 그러나 정작 유대인들은 그러한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요 18:28-38]

요 18:28-38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과 빌라도가 재판정에서 만난다. 첫 번째 심문을 통해 예수님은 세상 나라와 다른 하늘나라의 왕이시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 나라는 진리에 기초하는 나라다. “유대인의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기꺼이 잡혀 주시는 사랑 [요 18:1-11]

요 18:1-11 기꺼이 잡혀 주시는 사랑 요한은 예수님의 수난을 수치의 길이 아닌 영광과 승리의 길로 묘사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고뇌를 노출하며 모든 사람을 살릴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