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9:1-17 예수님의 이름으로 증거된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누린 빈 들의 만찬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열두 제자에게 사명을 맡기기 시작하며, 사명을 위해 권능과 권위를 부여한다. 열두 제자는 예수님의 사역에 참여하면서 예수의 정체와 운명을 배운다. 헤롯은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부각된 예수님의 정체에 관심을 둔다.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는 사건에 열두 제자를 적극 참여시키신다.
1. 제자들의 첫 번째 사역과 보고(1~6절)
9장부터 열두 제자를 예수님의 사역에 본격적으로 참여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치유하도록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고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부여하신다(1절). 이것은 이사야 61:1~2의 실현이며,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자신의 사명이셨다(4:18~19). 이사야 61장은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은 종의 사역을 예고했는데, 종의 사역이 종들에게 위임된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수행할 수 없다. 예수님은 사명을 실현할 수 있는 권능(뒤나미스)과 권위(엑수시아)를 주셨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고, 부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권능과 권위를 의지하며 감당해야 한다.
3~5절은 사명을 수행하는 제자들의 태도에 대해 가르치신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사명을 맡았는지 알아야 하지만, 어떻게 사명을 수행할 것인지도 알아야 한다. 제자들은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구체적으로 여행을 위해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고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준비하지 말아야 한다(3절).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어야만 이 세상의 재물과 욕망에 눈길이 돌아가지 않게 된다(8:14).
이러한 제자들을 향한 요구는 철저하게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광야 길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여정과 맞닿아 있다(출 12:11). 하나님 나라의 해방을 경험한 사람들의 목표는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또한 복음을 소개받는 사람도 전파자의 태도, 즉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존하는 삶을 통해서도 복음을 본다. 제자는 어느 집에 들어가서 환대를 받으면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는 집으로 옮기지 말고 끝까지 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4절). 제자는 기본적으로 섬김 받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다. 제자는 환대를 받기도 하지만 배척당하기도 한다. 만일 어떤 마을이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으면 마을을 떠날 때 발에서 먼지를 떨어내야 한다(5절). 이는 복음을 거부한 책임이 그 마을에 있다는 의미다. 사명을 맡은 제자들은 여러 마을을 다녔고 모든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쳤다(6절).
“복음을 전하다(유앙겔리조마이)”와 “치유하다(쎄라퓨오)”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명을 요약하는 용어다.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기쁜 일이고, 하나님 나라는 회복을 특징으로 삼는다. 돈과 부를 통해 안정을 얻으려는 욕망은 생명을 질식시켜 버리고 만다. 제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최고의 기쁨과 치유책으로 전파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검소한 태도로 복음적인 삶을 보여야 한다.
2. 예수를 보기 원하는 헤롯(7~9절)
이 단락은 제자들에 대한 반대가 있을 것을 예고한다. 갈릴리 지역을 통치하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제자들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일을 듣고 매우 당황한다(7절). 열두 제자는 예수님의 사역을 수행했기에 백성들은 제자들의 활동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을 목격했다. 헤롯은 예수님에 대해 알고 싶었다. 헤롯이 보고받은 내용에 따르면, 백성은 예수님에 대해 세 가지로 이해했다. 사람들은 선지자 요한이 살아났다고도 하고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고 옛 선지자 중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했다(7~8절). 공통점은 예수님을 살아난 선지자로 이해하는 것이다. 헤롯은 자신이 요한을 참수형으로 죽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요한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헤롯은 도대체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한다. 들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보고 싶어 한다. 23:8은 헤롯이 예수를 통해 표적을 보고 싶어 하는 것으로 부연 설명한다. 헤롯의 관심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욕망이나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통해 보고 싶은 것을 획득하려는 태도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지 못한 것을 반증한다. 믿음과 순종의 태도로 예수님의 메시지를 들을 때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경험할 수 있다.
3. 빈 들에서 오천 명의 만찬(10~17절)
예수님이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온 사도들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보고한다(10절).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벳세다에 가신다. 무리가 경로를 파악하고 따라왔다. 예수님은 무리를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선포하고 병을 치유하신다(11절). 날이 저물어가자 제자들은 예수께 와서 무리를 보내 마을과 촌에서 식사를 해결하도록 지시하라고 요청한다(12절). 왜냐하면 무리가 모인 빈 들에는 먹을 음식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신다(13절). 이에 제자들은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 생선뿐이니 많은 무리를 위해서는 그만큼의 음식을 사야 할 정도라고 대답한다(13절). 그곳에 모인 무리는 남자만 오천 명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리를 오십 명씩 앉히라고 지시하신다(14절). 제자들이 지시대로 앉히자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들고 하늘을 향해 감사하고 제자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도록 하신다(15~16절).
빈 들에서 오천 명이 음식을 먹는 장면은 출애굽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사건이나(출 16:4~36) 엘리사가 무리를 먹이고도 음식이 남은 장면(왕하 4:38~44)이 떠올라진다.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여러 측면에서 해석되어진다.
먼저 첫째, 오병이어 사건은 메시아의 만찬이다. 광야 식사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 즉 주의 만찬을 예고한다. 두 사건 모두 빵을 취하고, 감사하고, 떼고, 주는 순서로 전개된다. 예수님은 광야에 온 사람들을 “앉게” 하셨고 주의 만찬에서도 그들과 함께 “앉으셨는데”, “앉다(카타클리노)” 동사는 만찬에 참여한 사람들이 비스듬히 기대는 자세를 가리키는 전형적인 동사다. 또한 오천 명의 식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식사나(24:36~43)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의 식사(24:13~32, 33~35)처럼 일상의 음식을 나누는 식사였다. 예수님은 일상의 식사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환대하신다. 그리고 빈 들에서의 만찬에는 정결 예식이 없다. 예수님이 부정하고 가난한 자들을 조건 없이 환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일상의 식탁을 통해 사회의 중심부에 들지 않은 자들을 언제나 환영하신다. 이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고 계시를 나누는 것이 그가 오신 목적이다. 화려한 건물 없는 곳에서도 예수님을 만나고 교제할 수 있다. 성도는 정형화된 예전을 통해서 뿐 아니라 일상의 소박한 만남을 통해 예수님과 교제하고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둘째, 오천 명이 먹은 사건은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진 기쁜 소식에 해당한다. 무리는 예수께서 제공하신 음식으로 배불렀다. 이는 예수님이 병을 치료할 뿐 아니라(11절) 배고픔도 해결하는 능력을 갖고 계시는 점을 강조한다(6:21). 마리아는 허기진 사람들이 배불리 먹게 될 것을 찬양했다(1:53).
셋째, 제자들은 식사를 섬기는 종이다. 예수님은 배고픈 사람들을 섬기는 책임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셨다.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진 기쁜 소식과도 연결된다. 부를 사용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는 누가복음에서 강조하는 제자도의 핵심중 하나다.
나는?
-제자들과 함께 있을 날이 많지 않음을 알고 있는(9:27, 5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한과 능력을 위임하고 “하나님 나라 선포”와 “병 고침”을 위해 보내신다. 병 고침은 사탄의 나라가 폐하고 하나님 나라가 출범했음을 보여주는 “눈에 보이는”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 대신에 말로 복음을 전했고, 눈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실현되었음을 경험하도록 치유와 축귀 사역을 대행한다. 제자는 작은 예수로서 성령 충만하여 갈등과 탐욕의 사람들을 희생과 섬김과 사랑의 하나님 나라 삶으로 초청하도록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 보냄을 받았다. 제자들은 온갖 권력을 다 거머쥔 이 세상이 보낸 권위적인 대사들과 달리 전하는 메시지와 전하는 방식이 일치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에만 철저하게 의존하는 “모험하는 믿음”이라는 사역 원리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주님을 의지할 여지가 없을 만큼 넉넉한 삶은 결코 축복일 수 없다.
-제자들을 통해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 소식이 모두에게 기쁨의 소식이 될 수 없었다. 자신의 부도덕을 질타한 세례 요한을 참수했던 헤롯에게는 제자들의 사역이 세례 요한의 영이 환생한 것으로 간주되어 두려움의 소식이 된 것이다. 세상이 주는 찬사를 외면하고, 세상이 주는 자유를 거절하며, 세상이 주는 위협에 두려워하지 않는 자를 세상은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헤롯이 탄식과 함께 묻는 “이 사람이 누군고”하는 왕의 물음은 허망한 권력에 사로잡힌 폭군의 혼잣말일 뿐이다. 내 나라를 포기하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환영할 수 있고 참 평안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한 역동적인 사역의 성공에 고취되어 들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진정 시키려고 무리와 격리시켜 건너편 벳세다로 함께 떠나셨지만, 무리가 알고 따라온다. 그들에게 먹을 것이 떨어지자 제자들은 더 늦기 전에 무리를 마을로 보내 먹을 것을 해결하도록 명하라고 예수님께 재촉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들의 양식을 챙겨주라고 하신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성공적인 사역이 자신들의 능력이 아닌 메시아 예수님의 능력으로 가능했듯, 양식을 챙겨주는 것도 자신의 능력을 따라 가능성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어야 했다. 비록 제자들은 믿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 같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먹고도 남을 만큼 풍성하게 양식을 주신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맛보았던 광야의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보다 늘 약한 자를 먼저 챙기셨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원하는 것만이 아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신다.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병든 자를 치유하여 주심으로 백성에게 실제적인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하셨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왔으나 저마다 양식은 준비하지 못했다. 말씀은 들었고 병은 치유되었지만, 그것만으로 살 수 없었다. 빈 들, 광야에서 배고픔의 문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제자들의 시선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곧 자신들이 전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매우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의미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회복의 영역의 구별이 분명했다. 병은 치유받을 수 있고, 귀신은 물러갈 수 있다고 믿었으나 배고픔의 문제 해결은 생각조차 못했다. 그저 평범한 생각과 논리로 가진 것에 비해 필요한 것이 너무 많음을 예수님께 환기 시킬 수 있을 뿐 메시아 잔치를 베푸실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그들이 머문 곳만 빈 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바라보지도, 믿지도 못하는 제자들의 심령이 빈 들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요구하셨던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직접 보여주신다. 제자들이 현실적인 계산을 하는 동안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공급하심을 믿고 의지하여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신다. 모자랄 것이라는 제자들의 생각과 달리 먹고 다 배불렀으며 열두 바구니나 남긴다. 역시나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믿음의 본은 예수님밖에 없다. 계산기를 두드리기 전에 하늘 아버지의 공급하심을 믿는 믿음을 발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증거된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누린 빈 들의 만찬…
*주님, 저의 사역의 현장인 이곳에도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음을 믿습니다. 주님의 권능만 의지하며 “모험적으로” 사역하겠습니다.
*주님, 현실적인 한계가 분명한 순간에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을 성급하게 내리기 전, 먼저 권능의 주님을 의지하여 의뢰하며 나아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