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9:18-27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오병이어 사건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난받는 그리스도로 밝히신다. 문답 형식으로 시작하는 본 단락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18~20절)을 듣고 나서 그리스도의 길을 드러내시고(21~22절), 그리스도의 길에 합당한 제자도를 가르치신다(23~26절). 예수님이 계시하는 그리스도의 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과 예루살렘에서 드러날 교훈과 사건의 바탕이 된다.
1.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18~20절)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대화로 자신의 정체(그리스도의 정체)를 밝히신다. 먼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은 제자들과 대화하기 전에 홀로 기도하고 계셨다는 점이다(18절). 누가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장면을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 늘 언급했었다. 본문의 내용이 매우 중요함을 암시한다. 기도를 하신 후 제자들에게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질문하신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 엘리야, 옛 선지자 중 한 명이 살아났다고 생각한다고 전한다(19절). 예수님의 질문과 제자들의 대답은 헤롯의 질문과 그가 받은 보고와 비슷하다.
백성들은 예수님은 선지자적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지자의 역할을 하셨지만, 이는 메시아 사역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이어서 질문하신다(20절).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대답한다. 베드로가 제자들의 대표로서 한 대답이기에 그의 대답은 제자들의 의견을 반영했다. 이제까지 천사들(1:31~35; 2:11), 귀신들(4:41)과 같이 초자연적인 존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언급했지만 제자들에게서 처음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칭하는 말이 나왔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2:26의 “주의 그리스도”와 같은 의미의 칭호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목적을 완수하는 그리스도의 역할을 내포하는 표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호기을 위해 하나님이 택하고 세우신 그리스도다.
예수님의 정체를 묘사할 때 변화산 사건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나의 택함을 받은 아들(9:35)”이라고 부르신다. 또 23:35에서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라고 묘사한다. 예수님의 정체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된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택하신 메시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지 못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택하신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2. 그리스도의 길_첫 번째 수난 예고(21~22절)
베드로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은 이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21절). 당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로 이해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고난의 의미가 빠진 그리스도로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백성의 구원자로 통치하실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를 향해 그리스도의 정체와 운명을 설명하신다(22절).
인자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배척당하고 죽임당해야 한다. 죽은 지 사흘 째 살아나야 한다. 예수님은 “~해야 한다(데이)”를 넣어서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임을 강조하신다.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나서 하늘에서 들린 음성에 따라 그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시 2:7)과 하나님의 종(사 42:1)으로 선언했다(3:22). 예수님은 이사야서에 예고된 고난받는 종(사 42장, 53장)으로서 고난의 길을 가기 위해 오셨다. 그의 고난은 많은 사람들의 속죄를 위한 길이므로 그리스도는 반드시 고난과 죽음의 운명을 맞이해야 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는 목적은 십자가에 달려 죄를 용서하는 길을 열기 위함이다.
3. 제자의 길(23~27절)
예수님의 정체를 아는 것은 제자의 삶으로 나타나야 하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운명과 제자도를 연결하신다. 첫째,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여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23절). 자기 부정은 자신의 욕망이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과정에 따라오는 고난이다.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이다. 당시 로마 사회의 배경에서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죄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 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셨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 십자가를 져야 한다.
둘째, 자기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을 것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자는 구원받게 될 것이다(24~25절). “목숨(프쉬케)”은 사람의 생명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에서 예수님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일이 생길 때가 있다. 26절처럼 예수님 때문에 수치를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 이때 예수님으로 인해 생기는 고난을 피함으로서 자기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목숨을 잃게 된다. 고난을 피하는 행위는 제자가 아님을 입증한다. 반대로 예수님 때문에 생기는 위기로부터 일시적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현명하고 목숨을 잃는 것이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계산법에 따라 이윤을 따져보면 정반대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신을 잃거나 빼앗기면 어떤 유익도 없고 온 세상을 얻었으나 자신의 목숨을 잃어버리면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25절). 24~25절에 반복되는 동사 “잃다(아폴뤼미)”는 예수님 때문에 고난과 수치를 당하게 될 때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익하고 현실적으로 현명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자신의 계획과 미래와 유익을 잃게 될 줄로 생각하면 예수를 따르지 않거나 십자가를 제외한 방식으로 따를 수 있다. 그러므로 제자는 무엇이 유익이고 현명한지 두려운 마음으로 판단하고 결단해야 할 것이다.
셋째, 예수님과 그의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다(26절). 이 구절은 제림과 연결하여 23~25절의 경고를 강화한다. 인자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오는 때는 재림이다(12:40; 17:22, 24, 26, 30; 18:8; 21:27, 36).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21:27).” 또, 12:8~9은 마지막 재판의 상황을 인자와 하나님의 천사들을 사용해 묘사한다. 예수님과 그의 말을 부끄러워하는 태도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23절) 자기 목숨을 구하는(24~25절) 행동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면 수치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인자가 올 때 심판대 앞에 서서 삶을 반드시 평가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다고 약속하신다(27절).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으로 이 땅에 왔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된 나라로 시작될 것이다. 몇 명의 제자들이 재림 때의 하나님 나라를 미리 볼 수 있는 사건은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를 목격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9:28~37). 변화산 사건은 고난의 길을 가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준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가는 제자들의 미래도 영광스럽게 될 것을 약속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생명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신원받게 될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늘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
나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백성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 따랐지만, 열두 제자들은 예수께서 메시아인 것을 이제 간신히 믿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과연 예수님을 어떤 메시아로 알고 있는가?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그 이후에 있을 부활을 예고하신다. “반드시 ~해야 한다(데이)”라는 조동사는 십자가 없는 메시아도 없고, 십자가 없는 부활의 영광도 없고, 하나님 나라도, 우리의 구원도 없음을 보여준다.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갈릴리의 예수만으로는 죄에 빠져 저주의 죽음을 당해 마땅한 인류의 죄를 구원할 메시아가 될 수 없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의 환호가 아니라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을 구원하고 살리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의 이 정체는 천사가 선포했고(2:21), 시므온이 찬양했으며(2:26), 귀신도 알았고(4:41), 예수님 자신이 말과 사역을 통해 암시했는데, 드디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거친 후 베드로의 입에서 공개적으로 고백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메시아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 부활하실 그리스도이시다.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하신 것은 당대 사람들이 기대하던 메시아(그리스도)의 길과 예수님이 가실 길이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의 환호가 아니라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을 구원하고 살리는 일이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제자들의 길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도 따라서 져야 하는 십자가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이기고,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죽음마저 무력화하는 믿음을 보이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할 때만 가능하다. 그때 예수님이 영광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겠지만, 천하를 위해, 내 목숨을 위해 예수를 버리면 천하도 잃고 영원한 목숨도 잃게 된다.
-주님이 가신 길은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이기도 한다. 제자는 죽기까지 순종했던 주님처럼 자신의 욕망을 부인하고 자신의 목숨까지 부인하면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 자기 나라를 포기하고 이 세상에 대해 변절하고 하나님 나라에 항복해야 한다. 인간적인 힘으로 내 안전을 지키려고 남의 안전을 위협하거나, 남의 자원을 빼앗거나, 탐욕스럽게 경쟁하거나, 전쟁을 일삼는 악을 멈춰야 한다. 어떤 환난과 시련속에서도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주와 주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지키는 자가 제자다. 잠깐 있다 사라질 이 땅의 명예와 영광을 움켜쥐려다 주께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살아내야지.
-하나님 나라를 볼 자도 있느니라! 이어지는 변화산 사건(28~36절)과 제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 목격할 부활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증명해줄 것이다. 그것으로 주와 주의 말씀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이 유일한 생명의 길임이 증명될 것이다. 반대로 주를 부인하여 얻은 잠깐의 영광이 영원한 패배이고 수치임이 드러날 것이다. 부활은 죽어야 살고, 버려야 얻고, 용서해야 용서를 받고, 낮아져야 높아지는 것이 진리임을 확증해 줄 것이다.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정신이 사라진 한국교회의 모습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도무지 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빙자하여 버젓히 행한다. 광장에서 외치는 소리나, 강단에서 외치는 소리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진 모습이 아니다. 자기 욕망과 자기 영광을 위해 어떤 언행도 불사하는 듯한 과격한 행동들은 이미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드러나야 할 공의와 정의의 모습과는 딴판이다. 코로나 시기에 이어, 지금까지 오히려 더 낮아지고, 더 섬겨야 할 교회의 모습은 온 간데 없고, 극히 일부의 모습이지만 폭력을 행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쌩떼를 쓰는 모습이 과연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는가…아무리 정당한 주장이라 강변하여도 이를 풀어내는 과정이 정당하지 못한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예수님의 길, 제자의 길을 묵상하는 오늘… 괴로움이 더 깊어진다. 나의 언행이 일상에서 하나님과 주님의 이름이 아릅답게 선전되도록 나의 욕심을 내려놓는 자기부인과 이 과정에서 직면하게 될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십자가를 지고 오늘을 살아내야 하겠다.
*나와 우리 공동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고 있는가? ….
*주님, 나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순종하며 따라가겠습니다.
*주님, 주님 다시 오실 그때까지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주님의 이름을 당당히 드러내며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삶을 살다 맞이하고 싶습니다. 늘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한국 교회가 심히 아픕니다. 이 아픔이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회복하는 고통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런 고통이라면 큰 고통이라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