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2:35-48 다시 오실 주님, 그날을 기다리는 청지기(제자)
예수님은 계속해서 인자의 재림을 제자들이 지금 깨어 있어야 할 근거로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종들에게 깨어 있을 것(35~36절)과 청지기에게 지혜 있고 신실할 것을 촉구하고(41~44절), 주인이 오는 것을 준비한 정도에 대한 엄중한 평가(37~40, 45~48절)를 설명하신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받은 권위와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확실하게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평가가 차등하게 진행될 것을 묘사하셨다.
1. 섬김으로 깨어 준비하는 종들은 복되다(35~40절)
예수님은 35~38절에서 주인이 오는 것을 깨어 준비하도록 가르치면서, 경각심을 주기 위해 제자들이 잘 알고 있는 세 가지 모습을 언급하신다(35~36절). 첫째, 제자들(너희)은 허리를 동여매야 한다(35a절). 이는 언제든지 신속히 도망하기 위해 준비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첫 유월절에 허리를 동여매고 음식을 먹었다(출 12:11). 둘째, 제자들은 등불을 켜고 서 있어야 한다(35b절). 한밤중이라도 신속하게 출발하려면 등불을 켜야 하고, 앉거나 눕지 말고 서서 대기해야 한다. 셋째, 제자들은 주인이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즉각 열어줄 수 있도록 깨어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36절). 당시 종들에게는 업무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언제나 대기 상태로 있어야 했다. 주인은 아마 친구나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것이다. 주인이 돌아오는 것은 분명하지만 언제 도착할지 모르기 때문에 종들은 대기해야 한다.
37~38절은 깨어 있는 종을 위한 주인의 보상을 약속한다. 헬라어 문장은 “복되다 그 종들은”으로 시작하고 마침으로써 깨어 있는 종들이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지 강조한다. 가장 피곤한 시간(로마 시간으로는 밤 9~12시 또는 밤 12시~새벽 3시)에 주인이 오더라도 깨어 준비하는 종은 복되다. 주인은 종들과 만찬을 즐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묘사하는 식사 장면은 청중에게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주인이 허리를 동여매고 종들의 식사를 섬기기 때문이다(37절). 주인의 섬김을 받을 만큼 깨어 있는 종들은 복되다. 본문의 주인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비유어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을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22:27)”라고 말씀하시고, 재림 때 그런 모습을 실현하실 것이다. 특히 35절에서 “동여매다”로 번역되는 “페리조뉘마이”는 37절의 띠를 “띠다”와 같은 동사다. 제자들에게 준비하도록 명령하신 예수님이 직접 섬기시는 장면은 섬기는 종의 모습을 강화한다. 종들이 주인을 기다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위인데도(17:8) 주인은 종의 위치로 내려가 제자들을 보상하실 것이다.
39~40절에서 예수님은 주인을 “인자”, 곧 자신으로 바꾸어 재림을 깨어 준비하라고 강조하신다. 도둑은 예고 없이 닥친다. 인자의 오심도 이와 같다. 재림의 시간은 알 수 없으나 예수님은 반드시 오신다. 재림이 확실하므로 깨어 준비한 제자에 대한 보상도 확실하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을 강조함으로써 깨어 준비하라고 명령하시고 이렇게 준비하는 제자들에게 보상이 확실히 주어질 것을 약속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제자들이 편하게 식사를 즐기도록 섬기는 종의 모습을 보여 주실까? 그것은 땅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섬기는 것이 바로 깨어 준비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들을 섬기셨고 종말에도 섬기실 예수님의 태도를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 섬기는 행위로써 깨어 준비하는 삶은 다음 단락에서 청지기의 자세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2. 지혜 있고 신실한 청지기는 복되다(41~48절)
베드로는 예수님께 그분의 가르침이 제자들과 모든 사람 중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묻는다(41절).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가르치는 장면은 많은 경우 청중이 누구인지 모호하기 때문에 대상을 명확히 밝혀달라는 베드로의 질문은 자연스럽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답보다 두 종류의 청지기에 대한 비유를 이야기해 주신다. 예수님은 청지기 비유를 통해 일차적으로 성도들을 책임지는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설정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모든 이를 교훈의 대상으로 설정하신다. 왜냐하면 47~48절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평가를 말하기 때문이다.
42~48절에서 예수님은 주인의 부재 시에 청지기가 보이는 두 종류의 행동과 그런 행동에 상응하는 주인의 평가를 또 다른 비유로 설명하신다. 예수님은 청지기의 역할을 맡은 종을 예로 드신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는 주인이 맡긴 집의 종들을 위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준다(42절). 42절의 “진실한(피스토스)”은 “신실한, 또는 맡길 만한”을 의미한다. “지혜 있는(프로니모스)”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현명하게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의 자질을 가리킨다. 청지기의 임무는 돌봄의 일을 실행하는 사람들을 관리하고 이들의 필요를 신실하게 채워주는 것이다.
주인이 올 때까지 맡은 청지기 임무를 수행하는 종은 복되다(43절). 주인은 신실하고 책임성 있는 청지기에게 모든 소유를 맡긴다(44절). 그러나 청지기가 주인이 늦게 올 것으로 예상하여 종들을 학대하고 먹고 마시는 일에 빠져 살면 주인은 그를 징벌할 것이다(45~46절). 예수님은 46~47절에서 의도적으로 청지기를 “종”으로 칭하신다. 청지기도 주인에게는 종이다. 그럼에도 신실하지 않은 청지기는 종의 역할을 망각하고 권위를 남용하거나 직무유기를 행한다. 45절의 먹고 마시는 행위는 청지기의 책임을 망각한 채 동료 종들을 섬기지 않고 개인 욕심에 몰입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주인은 종을 생각하지 않은 날 갑자기 와서 종을 엄하게 때리고 신실하지 않은 자에게 가해지는 벌을 줄 것이다. 이때 종이 “주인의 뜻”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에 따라서 징벌의 수위가 달라진다(47~48절).
주인은 하나님을 상징하므로 하나님의 뜻은 누가복음 전체에서 나타나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로 전해진다. 특히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일(4:18~19)은 예수님의 사명인 동시에 예수님의 길을 가는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깨어 준비하지 않은 종은 많이 맞을 것이고(47절),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해서 맞을 행위를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48a절). 이처럼 주인은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하고 많이 맡은 자에게 많이 요구한다(48b절).
본문에서 청지기는 직접적으로 제자들을 가리키는 비유어다. 그런데 47~48절에서 하나님의 평가를 받을 대상에는 지도자들뿐 아니라 모든 신자가 포함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맡은 책임의 크기와 상관없이 주인의 뜻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책임을 많이 맡은 지도자들이 받을 평가의 기준은 더 높다. 회복의 사역을 위해 책임을 더 많이 맡은 사역자일수록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책임성 있게 실천해야 한다. 마지막 평가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정도와 맡은 책임에 따라 차등하게 내려진다. 구원의 길에는 차별이 없지만 삶에 대한 평가에는 차별이 있다. 맡은 책임이 클수록 평가 기준도 높아져 직무유기하면 더 많이 맞는다.
나는?
-첫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허리에 띠를 띠고 채비하였듯이(출 12:11), 예수님을 통해 새 출애굽을 고대하는 제자들도 영적으로 긴장하며 채비해야 한다. 등불을 켜서 주님 오실 길을 밝혀야 한다. 주인이 올 때까지 자지 않고 깨어 있어서 주인이 문을 두드릴 때 곧 열어주는 종은 복을 받을 것이다. 강도가 올 때를 알 수 없듯이 예수님이 오실 때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기에 깨어 예비하는 것만이 그 백성이 할 일이다. 생각하지 못한 때에 주님은 오신다고 하셨는데, 나는 그날을 다 알고 있는 사람마냥 너무 헤이해져 살고 있지는 않는가? 나의 삶의 질서를 잡아줄 정도의 긴장감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인이 올 때 자지 않고 깨어 맞이하는 종을 주인이 친히 자리에 앉히고 수종들 것이다. 비유 속 주인처럼 예수님도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기다린 종들을 섬기려고 오실 것이다. 고난 중에 인내하면서 충성과 정절을 지킨 종들을 대접해주실 것이다. 주님과 주님의 뜻을 아는 만큼, 받은 만큼 기대하시고 심판하실 것이다. 많이 받은 것에 감사하는데 그치지 말고 많이 드려야 한다. 시간이든 소유든 은사든, 나만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타인도 누리라고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제자들을 “청지기”로 여기신다. 제자는 그들의 말이 아니라 삶을 통해 평가받을 것이다. 주인이 없는 동안도 주인과 함께 있을 때처럼 충성하는 종에게는 영원히 그 나라를 맡기실 것이다. 하지만 눈에 뵈지 않는다 하여 주인을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이 여겨 맡은 소유를 남용하고 위임받은 권력을 오용하는 이들은 처벌하실 것이다. 돈과 힘을 쓰는 나의 태도를 하늘의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하실 지 늘 물으며 살아야 하겠다.
-더 많은 책임을 맡은 청지기일수록 더 많은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더 치밀할 것이다. 나에게 맡겨주신 더온누리 공동체를 맡은 책임을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맡은 것을 책임지기 위해 성령의 능력이 절실하다. 마지막 날에 나에게 물으실 책임을 떳떳하게 감당했노라 평가받을 수 있도록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회해야 겠다.
*주님의 섬김을 받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종이 되어야지… 반드시 오실 것을 알고 언제 오시든지 주님 맞을 준비 잘 해야지… 그 준비는 “주님의 뜻을 따라 섬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하나님 나라 복음의 은혜를 따라 사람들을 섬기고, 이 길을 함께 걸어가는 이들을 돕는 것이다.
*그저 개인적으로 종교생활 착실하게 하는 것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하는 삶이 아니다. 개인적인 준비, 언제든지 맞이할 수 있도록 등불을 켜서 허리를 동이며 서서 기다리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이와 함께 “성실하고 지혜롭게” 주님의 뜻을 펼쳐내는 삶을 살면서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이들을 “더욱 섬기고” “그들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며” 함께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이제껏 나만 잘 준비하면 되겠지. 라고 막연히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렸다. 하지만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 하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살도록 도와주며, 필요를 돌보는” 것이 곧 주님을 기다리는 청지기의 삶이라고… 즉, 함께 기다리도록 준비하고 준비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광야에서 홀로 수도사적인 삶을 살며 준비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소유의 욕심을 내려놓고 치열하게 하늘의 보물을 바라보며 “함께 기다리는” 공동체적 삶으로 기다리라는 것이다.
*홀로 기다리는 외로움보다, 함께 격려하며 기다리는 설렘이 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으면 좋겠다. 함께 기다리는 그 날은 반드시 온다!
*주님, 언제든지 오셔도 가장 먼저 주님을 맞이하며 문을 여는 사역자가 되겠습니다.
*주님, 맡겨주신 더온누리공동체를 주님의 뜻을 올바르게 전하고 가르치며 섬기고 살겠습니다. 그날에 부끄러움 당하지 않도록 지금 올바르게 행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