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3:1-21 기회가 지나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보이지 않아도 굳게 붙잡아…
12:1~13:9은 종말의 위기에 깨어 있을 것을 주된 내용으로 삼는다. 1~5절은 최근에 일어난 비극적인 두 사건을 예로 들며 회개를 강조한다. 비극의 희생자들은 더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어지는 13:10~21은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여인이 안식일에 치유 받은 사건과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로 구성된다. 이 비유는 안식일에 치유받은 사건을 해석하기 위해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사탄의 속박 가운데 살아가던 한 여인의 치유같이 하나님 나라가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치유를 통해 확장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신다. 하나님 나라의 이런 특징은 작고 보이지 않는 겨자씨와 누룩의 속성과 잘 어울린다.
1. 최근에 일어난 두 사건(1~5절)
2~3절은 갈릴리 사람들이 겪은 비극을, 4절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겪은 비극을 다룬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최근에 일어난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해석을 요청한다(1절). 이 비극은 누가복음 외에 다른 복음서나 유대 문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총독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과 섞는 일이 일어났다. 평소 가이사랴에 머무는 총독이 유대의 명절이 되면 치안유지를 위해 예루살렘의 안토니아 요새에 머문다. 이 요새는 성전 뜰을 감시할 수 있었다. 제물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릴 수 있기에 유월절을 맞아 갈릴리에서 온 어떤 사람들이 성전 뜰에서 제물을 드리던 중 빌라도가 군인을 시켜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희생자들은 유월절의 희생제물로 바쳐진 짐승들처럼 살육을 당했다.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다른 곳도 아닌 성전에서 갑자기 살해당한 것이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에 예수님께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 해석을 요청한 것이다. 한편, 대부분의 유대인은 희생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죄를 많이 지었기에 그런 비극을 맞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과 다르게 해석하신다. 이 사건은 그들의 죄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2절). 예수님의 관심은 이 사건의 원인에 있지 않고 이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이 회개하는 데 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을 때 맞이할 심판을 경고하신다(3절). 3절과 5절은 예수님의 회개 촉구이다. 최근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활용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도록 강조하신다. 예수님은 네 번에 걸쳐 “모두(2, 3, 4, 5절)”를 언급하심으로써 회개하지 않을 때 누구든지 심판을 받게 됨을 알리신다. 갈릴리 사람이든 예루살렘 사람이든 상관없이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이 임할 것이다. 심판이 임하는 시기에 대해 불분명하지만 죽음이나 예수님의 재림보다 개인의 생애 가운데 갑자기 닥치는 심판을 의도하는 듯하다. 심판이 임하기 전에 결정적으로 회개해야 하고, 무화과나무가 지속적으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회개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날마다 관계를 회복하는 회개해야 할 것이다.
예루살렘에서의 비극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은 사건이다(4절). 이 사건 역시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 비극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도 단호하다. 자동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비극의 원인을 희생자에게서 찾는 작업을 중단해야 한다. 예수님은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5절)”라고 말씀하시며 이 사건을 회개해야 하는 근거로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이 두 사건을 통해 비극과 심판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신다. 첫째, 비극은 더 많은 죄의 결과가 아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희생자의 죄를 비극의 첫째 원인으로 해석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성전과 같은 특정 기관에서 일어난 비극의 경우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하기 쉽다. 자연재해를 당했거나, 인재를 당해도 그런 경향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원인이 분명히 있겠지만 희생자들의 죄가 사고를 당하지 않은 사람들 또는 생존한 사람들의 죄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면 안 된다. 특히 이 두 사건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경우는 어떤 점에서는 폭력과 인재에 의해 희생을 당한 것이고, 그들의 유가족은 더욱 위로와 지원을 받아야 했다. 둘째, 예수님은 죄와 비극은 무관하다는 논리 역시 거부하신다.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은 임한다. 희생자들이 비극을 겪은 것처럼 비극은 언제든 닥칠 수 있다. 그런데 그 어떤 비극보다 참담한 비극은 회개하지 않은 죄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이다. 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언젠가는 심판을 받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징계를 뜻하는 심판이 비켜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에서 회개는 늘 이어져야 한다.
2. 무화과나무의 비유(6~9절)
1~5절에서 회개를 강조하신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주어진 시간 동안 회개의 열매를 맺도록 경고하신다. 씨가 뿌려진 토양의 비유에서 좋은 땅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8:15) 회개는 열매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본문의 무화과나무 비유는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지만 3년 동안이나 열매를 얻지 못한다(6~7절). 3년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가리키는 숫자가 아니다. 충분한 기회와 시간을 상징한다. 주인은 나무에 대해 관대하다. 인내할 만큼 인내했으니, 나무를 제거하고 땅을 낭비할 필요 없다고 말한다. 주인의 말에 따르면 열매 맺지 못한 책임은 주인이나 포도원지기가 아니라 나무에 있다. 이 나무의 문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토양을 망치는 것이다. 무화과 없는 무화과나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는 잘라내는 것이 농부의 자연스러운 판단이다.
그런데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올해 한 번 더 기회를 줄 것을 부탁한다(8절). 열매를 요구하는 기회가 영원한 것은 아니다. 3년에 비해 1년은 짧은 기간이다. 포도원지기는 기간만 확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무 둘레의 땅을 파서 토질을 부드럽게 만들고 거름을 주는 노력을 기울여 열매 맺는 나무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관리를 했는데도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그때 나무를 제거해 달라고 부탁한다(9절). 소망의 기회가 주어지고 동시에 심판의 경고가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일시적으로는 징벌을 억제함으로써 긍휼을 행하실 것이지만, 심판의 지연은 무한정 주어지지 않는다. 갈릴리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겪은 두 비극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것과 달리 무화과나무 비유는 회개의 기회를 충분히 준다. 기회를 얻고도 의도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를 범하는 것이다. 회개의 열매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거나 회복하게 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즉, 회개는 예수님이 실현하신 것처럼 회개하는 자신과 타인의 회복을 위한 방편이다. 회개의 기회는 하나님의 관용과 인내를 대변한다.
3. 아브라함의 참 자녀와 거짓 자녀(10~17절)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그곳에, 귀신에게 18년 동안 얽매여 약하게 만들고 몸을 펴지 못 하게 된 여인이 있었다.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 오라고 지시한 회당장의 말에 따르면 여자는 예수님의 권능에 의지하여 회당에 나왔을 것이다(14절). 어느 사람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모두에게 부담을 주는 모습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회당 구석에 있었을지 모른다. 허리를 펼 수 없으니, 예수님을 바라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보라 여자가(이두 귀네_10. 11절)”, “보셨다 그녀를(이돈 아우텐)”이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불러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선언하셨다(12절). “네가 놓였다(아폴렐뤼사이, 네가 풀려났다)”는 완료형이다. 여자에게 병의 치유가 이미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말씀의 권위로도 치유되기 시작했지만, 예수님은 긍휼의 마음으로 손을 여자의 병든 몸에 얹으셨다. 예수님의 권능과 긍휼로 여자는 허리를 폈다(13절). 그런데 예수님은 이번에도 혈루증 여자의 경우처럼 여자를 앞으로 불러 사람들 가운데 세우신다. 이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무엇인지 목격하고 하시고 여자를 공동체로 회복시키기 위함이었다. 여자는 사람들의 외면과 무관심에 18년을 살았으나 이제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온전해진 모습을 보인다. 치유된 여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13절). 이 광경을 목격한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이유로 화를 낸다(14절). 일을 할 수 있는 역사가 있으니 병 치유를 원하는 사람은 평일에 와야 하고 안식일에는 치유하지 말라고 지시한다(15절).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보여주셨고 회당장은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침해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회당장은 “해야 한다”라는 표현으로 안식일에 치유받고 치유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당위성을 주장한다. 회당장은 여자가 18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있으므로 안식일에 치유해야 할 정도의 응급 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은 회당장의 말을 듣고 위선자들을 향해 책망하신다(15절). 안식일 규례를 사람과 짐승에게 차별적으로 적용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 끌고 가서 물을 먹였다. 그들은 가축을 위해 노동을 했다. 이는 가축에 대한 동정심에서 기인했다.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의 귀한 딸을 풀어주는 것은 비판한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가축이 당장 갑갑해서 죽는 것도 아닌데 왜 짐승을 풀어주느냐며 18년 동안 아브라함의 딸이 사탄의 속박 가운데 있다가 안식일에 매임에서 풀리는 것이 지극히 합당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신다(16절).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로서 안식일 규례의 의미를 정확히 해석하신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자 안식일 치유를 반대한 자들이 부끄러워하고 무리는 모두 예수님이 행하시는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했다(17절).
본문은 사람의 가치에 대한 반전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회당장과 당시의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딸을 짐승보다 못한 가치로 취급한 것을 심각하게 지적하신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위선자들로 질책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안식일 규례를 적용할 때 짐승은 동정심으로 배려했지만, 18년 동안 고통당한 병든 여성이 치유받은 것은 불법 시술과 같이 취급하고 경고했다. 예수님은 그녀를 아브라함의 딸로 보셨고 존엄성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셨다.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여 몸을 펴보지도 못한 여자를 치유하기에는 안식일보다 더 좋은 날이 없었다. 사회의 바닥에 있는 인생을 예수님이 존귀한 딸로 여기고 치유하신 사건은 하나님 나라 속성을 반영한다. 전통과 규례에 얽매여 귀한 영혼을 그림자 취급한 사람들은 멸시받던 여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워해야 한다(17절). 하나님 나라는 가난하고 갇힌 자들이 회복되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나라다. 약하고 작은 사람을 새롭게 창조돼야 할 아브라함의 자녀로 가치 있게 여기는 나라다.
4.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18~21절)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안식일의 치유를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은 질문하신다(18절).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그리고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로 대답하신다(19~21절). 왜 예수님은 작은 특징을 내포하는 겨자씨와 누룩을 예로 드시는가? 누구도 관심 두지 않은 병든 여자를 보고 치유하신 원리처럼 하나님 나라는 대중의 관심 속에서 웅장하고 화려하게 시작하고 확장하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어떤 사람이 채소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 같다(19절).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가지에 몰려든다(20절). 본문에서는 밭 대신 정원이 언급된다. 정원은 밭보다 더 수고해야 결실을 얻는 곳이다. 예수님의 노동은 반대 세력이 득실거리는 예루살렘에서도 열매를 맺을 것이다. 겨자씨는 나무가 된다.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될 것을 예고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부족하고 연약한 자들의 변화로 시작되고 확장되는 점을 겨자씨 비유로 설명하신다. 하나님 나라가 세상의 영광을 충족시키는 나라인 것을 강조하려 했다면 능력과 웅장함의 상징이었던 백향목의 비유를 사용하셨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어떤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넣어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21절). 밀가루 서 말(약 27kg)은 150여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이다. 누룩은 적은 양이라도 밀가루 반죽을 전부 부풀어 오르게 만든다. 작아서 간과하고 무시하고 쉽고 인지하지 못할 수 있는 일에서 하나님 나라는 시작한다. 하나님 나라는 일상의 삶에서 은밀히 자라는 것과 같다.
두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작게 시작했으나 크게 되는 속성과 처음부터 겸손을 특징으로 하여 자라는 속성을 강조한다. 하나님 나라는 예상과 달리 놀라울 정도로 자란다. 겉보기에 보잘것없는 활동처럼 여겨져도 실제로는 비유의 가르침처럼 놀랍게 확장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능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의 영웅담을 만들어주는 나라가 아니다. 18년 동안 사탄에 매여 고통당하다가 해방된 여자의 모습은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잘 반영한다. 하나님 나라는 사회의 주변부에 살고 있던 병든 여자를 회복시키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들이 살아나 예수님의 공동체에 참여한다. 성육신의 원리에 따라 곧 매일의 삶에서 겸손히 낮아지는 속성을 유지한다.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의 변화를 통해 긍휼이 확장된다.
나는?
-빌라도의 악한 통치 때문에 무고하게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특별히 악해서 그런 참변을 당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단지 악한 통치자에 의한 정치적 희생양이다. 정말 걱정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인 줄 알면서도 행하고, 죄를 지적받았는데도 회개하지 않는 자의 심판이다. 그 심판은 갈릴리 사람들의 불행보다 더 혹독할 것이다.
-빌라도에게 죽은 자들보다 하나님께 죽은 자들이 더 큰 비극이다. 매우 고통스러운 사건이지만, 주님은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경고하신다. 그만큼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는다면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이다.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시지만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고 영원한 죽음을 겪고 있는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더 큰 문제라고 말씀하신다.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무고한 죽임을 당했다. 망대를 부실하게 만들고 관리한 사람 때문에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불행을 당한 것이다. 그들이 남들보다 더 악해서 하나님이 그와 같은 방법으로 심판하신 것이 아니다. 인재든 천재든, 재앙으로 희생된 이들의 죽음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처럼 말하거나 혹은 그 사람의 죄악 때문인 것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보고서도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인 것을 믿지 않고,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들의 심판이 더 혹독할 것이다.
-사고로 죽음을 경험할 때 우리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며, 회개하지 않으면 언제든 심판이 이 재앙처럼 불현듯 임할 수 있음을 기억하게 하는 사건이다. 심판은 더 큰 죄인에게 먼저 임하는 것이 아니기에 타인의 재앙이나 불행에서 그들의 죄를 찾기보다는 나를 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을 거절하는 자들은 마치 포도원을 맡기고 간 주인에게 불충한 포도원지기와 같다. 주인이 열매를 요구할 때 내놓을 만한 것이 없었지만, 1년만 더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여 다시 기회를 얻었음에도 그 기회마저 걷어찬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이스라엘에게 주께서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선지자들을 보냈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까지 보내 구약에서 약속한 그 나라를 눈앞에 보여주고 있는데도 믿음의 열매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심판뿐이다.
-회개의 기회는 제한되어 있다. 3년을 기다려도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자 그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명령한 주인처럼, 주님은 장차 우리를 열매로 판단하실 것이다. 포도원지기가 1년을 더 요구한 것처럼 우리는 다시 얻은 기회의 시간인 이 “1년”을 사는 중이다. 내 삶에 열매가 맺히도록 두루 파고 거름을 주고 나의 삶에서 주께서 열매를 보실 수 있도록 해드리는 자만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
-예수님은 18년 동안 귀신 들려 꼬부라져 펴지 못하던 여인을 고쳐주신다. 귀신의 매임에서 해방하시고, 질병에서 해방하시고, 몸의 자유를 누리게 하신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굳이 이 만성병 환자를 안식일에 고치심으로써 의도적으로 유대교의 율례를 깨뜨리신다. 안식일을 주신 본연의 의도를 망각한 채 안식일이 안식을 주는 날이 아니라 안식을 빼앗는 날로 만든 것을 지적하시려는 뜻이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을 통해 언약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안식의 축복은 바로 메시아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 안에서 누릴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질병 치유가 아니라 사탄에게 매인 데서 자유롭게 하심으로써 안식을 주신 “구원 사건”이다. 이제 장차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인류에게 영적인 희년을 가져오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은 단지 영혼만 구원 얻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영혼 모두 온전케 되는 사건이다. 그 안식의 완성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 오겠지만, 오늘 우리는 전인격적으로 경험되는 이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누릴 뿐 아니라 나눠주는 일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안식일에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을 보고 회당장이 보인 반응은 분노였다. 그가 아는 안식일 준수 방법을 예수님께서 어겼다고 본 것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채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아니 오해하고 곡해할 것이다. 한 인간이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율법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일 리 있겠는가. 고나 나귀에게는 안식일에 안식을 주면서 사람이 안식을 누리는 것은 어찌 가로막을 수 있는가?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통해 기뻐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율법을 잘 안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자들은 부끄러워한다. 아…. 이런 완고한 사람들이라니…
-오직 문자적인 법령만 붙들고 있었고, 안식의 참 의미는 모르고 있었다. 짐승들의 안식에는 관대하면서도 사람의 안식에는 반대하는 모순덩어리요 위선자들이었다. 그들은 무지한 열심 때문에 오만과 자기 의에 사로잡힌 인생들이었다.
-혹시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이런 완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자꾸 생각된다. 어찌할까…
-예수님을 몰라본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을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럴 수 있다. 겉으로 보면 왕국이라고 할 만하지 않았다. 가시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뭐든 창조하는 로마제국에 비하면 아예 존재감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열혈 분파의 나비 날갯짓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겨자씨 한 알 같고 약간의 누룩 같다. 하지만 그 겨자씨는 큰 나무가 되고 그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다 부풀게 하듯이, 하나님 나라는 온 세상 나라를 압도할 영향력을 드러내고 존재감을 증명할 것이다. 잠시 있다 사라지는 나라와 달리 하나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성장한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처럼 미약해 보이지만,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가지에 깃들일 만큼 놀랍게 성장할 것이다. 그 나라는 적은 누룩이 가루 서 말 속에 스며들어 부풀게 하듯이, 강력한 침투력을 가지고 이 땅에서 확장될 것이다. 우리의 꾸준한 섬김과 증언을 통해서 주의 통치가 확장된다는 사실을 믿고 당장 기대한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당장에는 나의 연약함과 한계 때문에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전한 복음이 철저히 부정되고 외면받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추수는 하나님께만 속해 있음을 알면서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 기회가 남아 있을 때 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세우며 죄에 대하여 회개하면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아도 성장한다는 것이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내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 말씀으로 담대하게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법을 지키되 법칙에 함몰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기쁨 앞에 더욱 기뻐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