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형식이 아닌 본질을 따라 _ 사람 먼저, 사랑 먼저 [눅 14:1-14]
 – 2025년 03월 22일
– 2025년 03월 22일 –
눅 14:1-14 형식이 아닌 본질을 따라 _ 사람 먼저, 사랑 먼저
    
식사에 초대받은 예수님은 안식일에 수종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하신다(1~6절). 병으로 소망이 없는 환자를 소중한 존재로 대하신 것이다. 이어서 초대를 받을 때(7~11절)와 초대할 때(12~14절) 필요한 교훈을 가르치신다. 이 교훈에서도 사람의 가치와 환대의 의미를 강조하신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 두 끼의 식사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14:12)”에서 점심(토 아리스톤)은 하루 중 이른 시간인 아침의 식사를, 저녁(토 데이프논)은 주로 저녁 시간의 식사를 가리킨다. 그런데 안식일 식사는 세끼였다. 하루 전에 준비하고 주로 정오(제6시)에 식사를 시작한다. 순회 랍비들은 종종 지역 공동체의 예배에 이어서 열리는 안식일 식사에 초대를 받았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초대받은 식사(1절)가 이 정오의 식사인 것으로 보인다.
    
    
    
1. 안식일에 치유받은 수종병 환자(1~6절)
본문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안식일의 치유 중 세 번째다(6:6; 13:10).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지도자가 초대한 식사에 참석하신다(1절). 그는 바리새인들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사회, 종교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 바리새인의 집에는 수종병 환자가 있었다. 수종병은 특정 병명이 아닌 몸이 물로 붓는 상태를 가리킨다. 병이 중하여 몰골이 말이 아닌 상태의 환자가 정결법과 명예를 중시하는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있는 모습이 어색하기만 하다. 이는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3절)의 계략이었다.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수종병 환자를 이용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라고 묻는다(3절).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몸이 꼬부라진 여자를 치유하신 사건을 자연스레 상기하게 된다. 그때 회당장(바리새인)은 다른 날에는 몰라도 안식일에는 치유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3:14). 그와 마찬가지로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 역시 안식일에 치유하는 행위를 반대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선제적으로 물으셨고, 그들은 침묵한다. 동시에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는 데 실패하고 만다. 그럼에도 그들의 입을 닫게 만드신 예수님은 수종병 환자를 치유하신다(4절).
    
그리고서 안식일에 환자를 치유하는 것이 왜 정당한 것인지, 꼬부라진 여자가 치유된 사건과 같은 논리(13:15~16)로 논증하신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도 안식일에 그들의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당장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신다(5절). 이는 예수님이 꼬부라진 여자를 치유하고 나서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13:16)”라고 말씀하신 것과 비슷하다.
    
그들은 몸이 심하게 부어오르고 나머지 신체는 뼈만 남은 것과 같았을 환자를 소보다 낮은 가치로 생각했다. 규례와 전통에 얽매여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 된다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이다. 성경을 연구할수록 약한 자에 대한 긍휼과 책임감이 더욱 단단해져야 하지만 반대가 되면 비극이다. 예수님은 변함없이 안식일이어도 18년을 귀신에게 매여 꼬부라진 여자를 치유하신 것처럼 수종병 환자를 존귀하게 여기며 치유하셨다.
    
    
    
2. 초대받은 자들을 위한 교훈(7~11절)
바리새인들 지도자의 초대를 받고 와서 보니 초대받은 다른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선택하는 모습을 보신다. 그 모습을 보시면서 비유로 가르치신다(7절). 비유는 고대 유대와 헬라 사회에 있었던 “명예와 수치의 문화”를 전제로 한다. 고대 세계의 연회는 손님들의 사회적 지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무대였다. 그렇기에 식사 자리를 배열하는 것은 참석자의 사회적 명예를 위해 매우 중요했다. 주인과 얼마나 가까운 자리에 앉는지에 따라서 사회적 지위가 드러나기 때문에 당시 연회에서 가장 부러움을 사는 자리는 주인과 가장 가까운 자리였다. 반면 주인과 멀리 떨어진 구석 자리는 선호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 초대받을 때 높은 자리에 (스스로) 앉지 말라고 하신다(8절). 왜 그런가? 첫째 자리에 앉는 위험성은 더 높은 사람이 도착할 때 생긴다. 만일 더 높은 지위의 사람이 들어오면 초대자가 자리를 양보하도록 요구할 것이다(9절). 자리를 양보하는 손님은 수치심을 안고 끝자리로 가야 했다. 그러므로 초대받을 때 처음부터 끝자리에 앉는 것이 낫다(10절). 그러면 초대자가 와서 윗자리로 인도할 것이고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경고하시는 대상은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은 높은 곳에 앉아서 존중받는 것을 사랑했다. 예수님은 비유의 교훈을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절)”라고 요약하신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사회적 높음과 낮음에 대한 관례에 도전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새롭게 설정한다. 예수님은 사회적 지위나 재산으로 평가하지 않으신다. 학력이나 가족의 배경으로 가치를 규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물려받은 자산이나 능력으로 획득한 힘으로 높아졌다고 자신만만해하는 사람을 낮추실 것이다. 사회적 위치를 자랑하지 않고 겸손히 섬기는 사람을 높이실 것이다. 그러므로 업적이나 지위로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고 타인을 봐야 한다.
    
    
    
3. 초대자를 위한 교훈(12~14절)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조언하신다. 점심과 저녁을 위해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초대하지 말라고 하신다(12절). 친구나 가족이나 친척은 초대해 준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다시 바리새인을 초대해 줄 것이다. 부한 이웃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 반드시 초대로 보답할 것이다. 그 부잣집에 초대를 받게 되면 바리새인 지도자의 지위와 명예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당시 명예와 수치의 세계에서 한 사람의 명예는 그 사람이 상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예를 들어 식사에 초대한 사람이 높은 신분이면 초대자의 명예도 그만큼 높아졌다. 또한 호의를 받았으면 갚아야 하는 상호성의 윤리는 로마제국의 사회를 지탱하던 근본 체계였다. 선물 또는 호혜를 받으면 갚아야 하는 것이 상호성의 기본이었다.
    
그러므로 받으면 갚아야 하는 의무를 짊어지게 되므로 거저 받는 선물이란 없었다. 식사에 초대를 받으면 그것은 갚아야 하는 의무감으로 돌아왔다. 만일 가난한 사람이 부자의 초대를 받았다면 초청에 상응하는 수준에서 호의를 갚아야 하므로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는 부자나 높은 지위의 사람으로서도 궁핍한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부담이었는데, 다름 아닌 명예와 수치의 세계에서 사회적 약자를 초대하면 초대자의 명예가 손상되기 때문이다. 또한 초대해도 상대방이 보답해 줄 수 없어서 초대자는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된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약자를 초대하면 사회를 지탱하는 체계를 무너뜨리게 되므로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문화와 관례에 예수님께서 도전하신다.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초대하라고 조언하신다(13절). 자신에게 덕이 되지 않고 손해를 끼칠 사람들을 초대하라는 뜻이다. 이들에게 갚은 능력이 없어서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베푼 사람은 “갚음” 또는 “보상”을 돌려받는다는 상호성의 원리가 작동한다. 하나님은 대가를 기대하지 않은 채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고 섬긴 사람을 의인들의 부활 시에 갚아 주실 것이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사람의 가치를 등급화한 사회의 관례를 무너뜨리신다. 즉 효용가치로 사람을 분류하고 대하는 태도를 바꾸도록 요구하신다. 궁핍과 질병과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호의를 갚을 능력이 없다고 해서 낮은 가치의 사람들은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히 사회적 약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나 가족이나 친척으로 초대할 것을 원하신다. 공동체의 동등한 일원으로 환대하라는 뜻이다. 내게 도움이 되지 않고 부담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친구와 가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신다.
    
하나님 나라 제자는 어려운 사람들로부터 되받기를 기대하면서 호의를 베풀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그들이 환대를 되갚을 수 없으나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이다.
    
    
    
나는?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수종병 든 한 사람을 바리새인들 앞에 세우고 안식일의 참 의미를 설명하신다. 자신이 이미 안식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왔음을 보여주신다.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즉시 건지면서 만성병이라는 이유로 치유할 수 있는데도 이를 가로막는다면, 그들은 사람을 위해 주신 안식일의 참 의도를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는 이유로 사람의 안식을 빼앗고 간과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예수님을 모셔놓고도 예수님과 함께 쉼을 누리지 못했다. 그저 예수님의 흠을 찾는데 더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종교 권력자들에게 감시를 받는 것을 아시면서도, 안식일에 수종병 걸린 사람을 낫게 하심으로 다시 한번 안식일을 성취하여 영원한 영적 쉼을 주기 위해 자신이 왔음을 드러내신다. 또 안식일에 우물에 빠진 아들이나 소를 끌어내면서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끌어내는 것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 이들의 이중성을 폭로하셨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평강과 쉼은 없으며, 일관성 없는 자기중심적이고 편의적인 삶만 있을 뿐이다.
 
-당시 안식일 문제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계속 충돌한 문제였다. 안식일을 누릴 것인가 아니면 안식일에 눌릴 것인가의 충돌이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주신 쉼의 날이었지만, 온전한 쉼(?)을 위해 스스로 만들어 낸 고된 규칙을 지켜야 하는 아이러니가 인생사와 닮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만든 안식일 규례에 얽매이지 않으셨다. 규례에 저촉되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의 의미를 구현하고 살아내셨다. 규례에 얽매이지 않고 선과 의를 행하시는 것에 주저하지 않으셨다. 매우 단호하셨다. 나는 어떤가? 전통과 규례에 안주하는가? 말씀이 가르치는 선과 의를 행하는 것에 도전을 멈추지 않는가?
    
    
-하나님 나라는 스스로 남들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대접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사람들과는 상관없는 나라다. 그런 자들은 타인의 안식에 관심 없고 오직 자신이 권력을 누리는 것에만 관심 있으며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주님이 가져오신 나라는 자기를 높이는 오만한 자는 낮추시고 자기를 낮추어 타인을 섬기는 자는 높아지는 나라다.
    
-식탁의 상석을 갈망하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상석보다는 말석에 앉으라고 하신다. 진정한 영광은 스스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영광을 구하는 자는 모든 것을 잃고 수치를 당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격 없음과 가난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만을 주님이 높여 주실 것이다. 상석에 앉으려고 허비하는 인생을 살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주장할 “의로움”이 전혀 없음을 인정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대해야 한다.
    
-우리 공동체 안의 말석은 어디일까?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말석은 어디일까? 우리 자녀들에게 인생의 진로에 대해 가르치며 말석으로 가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곰곰히 생각해보면 상석에 앉고 싶은 사람의 자존감은 그리 높지 않을듯하다. 낮은 자리에 앉아도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 하찮은 사람이 자리를 탐한다. 내가 앉는 자리에 따라 평가되는 삶이 아니라 어디에 앉든지 영향받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는 대접을 받는 자들의 나라가 아니라 대접하는 자들의 나라다. 대접하더라도 돌려받을 것을 계산하며 하면 안 된다. 이미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람들에게서 받은 도움을 기억하면서 나도 돌려줄 가망이 없는 사람들, 내 대접이 아니면 생계 자체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 나라 사람들이다. 이 땅에서의 보상을 기대하기보다 부활 시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상을 기대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받은 대접을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갚을 수 없는 자들을 초청하여 베푸는 이들만 부활의 날에 갚아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먼저 나에게 갚을 수 없는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나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베풀라고 하신 것이다. 심지어 주님은 나를 위해 수치와 모욕까지 당하면서 사랑하셨는데, 나도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 손해 보는 사랑, 희생하는 사랑을 해야 할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부활의 때에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실 것이 없을 만큼 이 땅에서 상을 이미 다 받는, 타산적인 사랑, 계산적인 사랑이나 베풂을 지양해야 할 것이다.
    
    
*율법의 형식에 함몰되어 사람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편리하고 합리적인 상호성의 원리보다 하나님이 갚아 주실 믿음을 의지하며 그저 사랑하고, 그저 섬기는 하나님 나라 제자여야 하겠다.
    
    
*주님, 주님이 주신 안식을 내가 익숙한 전통과 관습으로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종교적인 형식에 매여 사람을 놓치지 않고 사람을 위해 주신 안식을 누리겠습니다.
*주님, 어디를 가든지 말석이 눈에 띄게 해주십시오. 그 자리에서 편히 누리겠습니다.
*주님, 부활의 주님이 갚아 주실 것을 이 땅에서 쌓겠습니다. 갚을 능력이 없는 연약한 자들을 위한 교회 공동체를 추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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