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잃은 양 한 마리, 잃은 드라크마 한 개를 찾은 기쁨 [눅 15:1-10]
 – 2025년 03월 25일
– 2025년 03월 25일 –
눅 15:1-10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잃은 양 한 마리, 잃은 드라크마 한 개를 찾은 기쁨
    
15장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세 대의 비유를 다룬다. 본문의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 비유는 잃은 것을 꼭 찾아내는 둘의 열심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찾은 결과를 두고 기뻐하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을 환대하고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불평한다(1~2절). 이어지는 두 비유(3~6, 8~9절)와 해설(7, 10절)은 이들의 질문과 불평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다. 즉, 예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을 환대하고 기뻐하는 이유를 논증한다.
    
    
    
1. 불평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1~2절)
1~2절은 예수님께서 왜 죄인들을 환대하고 함께 식사하는지 설명하게 된 배경이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가까이 왔다(1절). 이 장면을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린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2절).” “죄인들”은 1절의
세리들과 죄인들’을 가리킨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는 의인들과 죄인들을 엄격하게 분리하여 이스라엘이 부정한 자들에 의해 오염되지 않게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위해 설정한 경계 표시(안식일, 정결법 등)를 철저하게 지켰다. 예수님이 부정한 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과 안위를 위협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5:29~32; 7:36~50; 19:1~10).
    
‘누가’는 예수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불평했다(수군거려)”로 기록한다. 이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이스라엘의 광야 세대가 감사하지 않고 불평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환대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실현하신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알지 못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의 불평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방식에 불만을 제기하는 것과 같다. 그들이 보기에 죄인들은 의인들로부터 멀어져야 할 대상이지 긍휼과 구원이 필요한 자들이 아니었다.
    
한편, 놀라운 것은 이렇게 불평하며 무례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대화하신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도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2.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의 비유(3~7절)
3~7절은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4~7절)와 해설(7절)로 구성된다. 어떤 사람에게 백 마리의 양이 있었다. 목자는 한 마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4절). 양은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가축이어서 무리를 이탈한 양은 생존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목자는 한 마리를 찾으려고 아흔아홉 마리의 양 무리를 광야에 두고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 어찌 보면 비유에서 나머지 양 떼를 광야에 둔 채 급히 떠나는 목자가 어리석게 보일 수 있다. 이는 그만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한 목자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잘 느끼게 한다.
    
양 떼를 돌보는 목자의 이미지는 구약에서 종종 등장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한 목자시다(시 23; 80:1; 요 10:1~16). 비유를 듣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백성을 인도해야 할 목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에 가축은 배려해 주면서도 10년 동안 몸을 펴지 못한 여자(13:10~17)와 수종병으로 온몸이 부어오른 남자(14:1~6)의 치유를 매우 못마땅하게 받아들였다. 죄인들을 환대한 예수님을 비난했다. 그들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의인들의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가로막고 반대했다. 하지만 비유의 목자는 이들과 달리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게 집중한다. 드디어 양을 찾으면 목자는 즐거워하며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온다(5절). 집에 와서는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벌인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6절).” 목자는 찾은 자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잔치로 나눈다.
    
예수님은 비유의 의미를 설명하신다. 죄인 한 명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 명 때문에 기뻐하는 그것보다 더 기뻐한다(7절).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죄인과 동일시하신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부정한 자들로 정죄하고 멀리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잃어버린 자들로 이해하셨다. 그들과의 식사는 찾은 자의 기쁨을 누리는 자리였다. 6절과 7절을 연결해 보면 죄인들이 회개하는 것은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은 것과 같은 의미다. 목자가 먼저 죄인을 찾으러 나섰고 죄인은 회개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잔치를 망친 쪽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다.
    
    
    
3.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자의 비유(8~10절)
이 단락도 비유(8~9절)와 해설(10절)로 구성된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8절). 드라크마는 그리스 은전으로 시대와 장소에 따라 무게와 가치가 다르긴 했으나 1데나리온 혹은 1/4 세겔과 같은 가치로 하루치 품삯에 해당했다. 혹자는 결혼 예물로 열 개의 드라크마를 목걸이로 만든 기념 목걸이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열 개 중 한 개를 잃어버린 목걸이 드라크마는 의미가 없다.
    
돌과 진흙 벽돌로 지어진 팔레스타인의 주택에는 창문이 없어서 실내가 어두웠다. 바닥은 돌이 아니라 흙이어서 어두운 곳에서 동전을 찾는 일은 대단히 힘들었다. 그래도 여자는 등불을 켜고 바닥을 쓸며 열심히 찾았다. 드디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았다. 여자는 잔치를 준비하고 이웃을 불러 모은다(9절). 그런데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려면 잃었다가 찾은 돈보다 더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여자의 행동은 어리석다. 낭비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이 여자가 잔치를 준비한 이유가 무엇인가? “나와 함께 즐기자!” 찾은 기쁨이 컸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처럼 혼자 기뻐하기에는 기쁨이 너무 컸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의미를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0절).” 하나님의 천사들은 하늘에 하나님과 함께 있다. 7절의 해설과 마찬가지로 죄인의 회개는 하늘의 기쁨이라는 의미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것은 회개를 촉구하는 작업과 같고, 잃어버린 동전을 찾은 것은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온 그림과 같다. 한편, 비유와 10절을 연결하면 한 사람의 회개는 찾는 작업에 따른 결과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열심히 찾은 결과로 죄인들이 돌아온 것이다. 예수님께서 비난을 감수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으면서도 찾은 한 영혼 때문에 하늘의 존재들이 기뻐한다. 물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죄인들은 격리 대상이므로 희생적으로 찾는 것은 사랑의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영혼이 돌아온 기쁨을 가격으로 매길 수 없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자의 비유는 몇 가지 의미를 전달한다. 첫째,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환대하고 그들과 식사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세리들과 죄인들은 잃어버린 자들이다. 규범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 의인들과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 그들은 잃은 자를 찾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다. 예수님이 찾으신 결과로 죄인들이 회개로 반응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소식은 죄인이 회개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회개한 죄인들을 식사로 환대하시고 하늘에서는 이 기쁨에 참여한다.
    
둘째, 잃어버린 자를 찾는 과정과 찾은 결과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어리석고 낭비처럼 보인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 양 무리를 광야에 두고 떠난다. 여자는 드라크마 하나를 당장 찾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어두운 방의 바닥을 열심히 훑는다. 찾은 다음에는 찾은 것의 가치보다 더 큰 비용을 지불하여 잔치를 벌인다. 잃은 자를 회복하는 비용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낭비다. 그렇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낭비다. 영혼의 회복은 누군가의 낭비처럼 보이는 희생으로 가능하다. 찾는 자가 없으면 잃은 것이 발견되는 일은 없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드리기까지 찾는 희생을 보여주셨기에 회개하는 길이 열렸다. 회개한 자에 대한 하늘의 기쁨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까운 낭비란 없다.
    
셋째, 하나님의 공동체는 잃어버린 자가 돌아온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생각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들, 궁핍한 자들, 허물이 많은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기쁨에 교회 공동체도 당연히 참여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예수님은 말씀을 들으러 나아오는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식탁을 같이 하신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그 광경을 보고 수군거린다. 죄인을 불러 구원을 주려고 오신 예수님을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찾지 않으니, 그분께 영접받을 수도 없었다. 자격이 없는 자를 받아주시는 예수님의 상식 이상의 사랑을 수용하기에는 그들이 스스로 쌓아 올린 자기 의의 장벽이 너무 높았다. 그들은 사랑해야 할 대상과 사랑하지 않아도 될 대상을 임의로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에 스스로 자신들을 예수님의 사랑받을 자에서 배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시며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신다. 그릇된 자기 의는 정죄를 낳지만, 복음은 자유로움과 포용력을 갖게 해준다.
    
-주께 돌아온 죄인을 잃었다. 다시 찾은 양에 비유하신다.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한 마리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는 목자의 열정과 같다. 주님께 죄인 한 사람의 가치는 세상의 소유와 비교할 수 없고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할 때의 기쁨은 회개가 필요 없는 99명이 주는 기쁨보다 크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하는 자신의 마음을 한 마리 양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목자의 심정으로 묘사하신다. 양 아흔아홉 마리를 남겨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는 모든 양을 다 아끼고 사랑하시는 주님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의인과 죄인을 나누고 경계 밖의 양을 포기한다. 잃어버린 양에 대한 애정 자체가 없다. 차갑고 냉담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으려고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남겨둔 채 찾아 나선다. 이러한 상식에서 벗어나는 목자의 반응을 통해 길 잃은 양을 향한 목자의 큰 사랑을 강조한다. 동시에 길 잃은 양(세리와 죄인)에게 보이신 예수님의 환대를 비웃으며(1, 2절) 자신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안전한 의인이라고 착각한 아흔아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판하고 있다. 열 드라크마 중 은전 하나를 잃어버린 여인은 등불을 켜서 집을 쓸고 또 찾았다. 하나가 없이는 아홉 개가 있어도 목걸이 기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한 사람이 채워져야 주의 몸을 이룰 수 있기에 주께서 큰 희생 하시면서 부지런히 찾아와 구원해 주신 것이다. 익명의 다수를 원하기보다는 한 사람을 끝까지 기억해 주는 교회이어야 한다. 주님의 마음으로 사는 공동체는 바깥의 영혼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양 한 마리를 찾은 목자와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기뻐할 뿐 아니라, 찾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비하면서 이웃과 그 기쁨을 나누고 있다. 그것은 상식에도 벗어난 허비하는 잔치처럼 보인다. 하나님에게는 우리보다 값지고 가치 있는 것이 없다. 우리를 찾는 것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십자가에 내주시는 것으로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시지 않았는가?
    
 
*목자라면 누구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다. 여자라면 누구나 의미있는 드라크마 목걸이가 풀어져 그 중에 드라크마 한 개를 잃어버렸다면 당연히 찾고 또 찾는다. 이렇게 상식적인 행동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적인 시각으로 판단한 특정 사람들을 향하여 비상식적인 시각과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주님과 하나님은 율법의 기준으로 사람을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영혼으로 보시고 반드시 찾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보이신다. 그리고 찾으면 무엇보다 기뻐하신다. 지금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시선 아닌가?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바리새인처럼 율법에 기준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보고 있을 수 있다. 아니다. 주님의 마음과 시선을 잃지 않아야 한다. 우리도 잃어버린 바 되었지만 주님이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주셔서 하늘의 기쁨된 존재가 되었으니 말이다.
 
    
    
 
*주님, 한 영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공동체로 서겠습니다.
*주님, 한 영혼이 회개하는 기쁨이 공동체의 기쁨으로 누리기를 바랍니다.
*주님, 하늘 아버지의 마음과 시선으로 영혼을 찾아 나서기를 기뻐하겠습니다. 찾으면 무엇보다 기쁨을 누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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