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이야기 [눅 15:11-32]
 – 2025년 03월 26일
– 2025년 03월 26일 –
눅 15:11-32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이야기
    
연속되는 세 개의 비유(3~32절) 중 세 번째 비유로 앞의 두 비유와 마찬가지로 잃은 자를 찾은 기쁨을 주제로 다룬다. 앞의 두 비유와 달리 잃어버린 존재는 양이나 동전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자의 실존과 잃어버린 자를 찾은 기쁨은 극적으로 묘사된다. 이 비유는 아버지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고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이 집 밖으로 나간 상황을 비교하는 식으로 전개한다.
    
본문 비유의 배경인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떼어달라는 작은아들의 요구는 팔레스타인 문화권에서는 상당히 이질적인 요구였다. 전통적으로 자식들이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에 재산권을 요구할 수는 있었지만 실제로 그 재산권을 행사하고 처분할 수 있는 권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가능했다. 그러므로 명예와 수치 문화권에서 둘째 아들은 패역한 아들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그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는 고백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집에서 멀리 떠난 둘째 아들(11~16절)
아버지의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이 비참한 지경에 이르는 과정을 전개한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11절).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한다(12절). 아버지가 사망한 뒤에 유산을 나누는 것이 당시의 문화였고, 만일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자식이 유산을 요구했다면 가문의 수치였고 용인될 수 없었다. 이는 더 이상 가족과 가문 안에서 살지 않겠다고 공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당시 문화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은 아버지에게서도 보인다. 아버지는 재산을 두 아들에게 각각 상속했다. 둘째 아들은 며칠 만에 먼 나라로 갔다. 멀리 가려면 재산을 매각해야 하는데, 아버지의 생명 같은 재산을 한순간에 팔아버린 것이다.
    
명예와 수치의 문화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가족에 씻을 수 없는 수치심을 심었다. 또한 먼 나라로 나갔다는 것은 이방인들의 나라에 갔다는 뜻이다. 그는 그곳에서 재산을 금방 낭비해 버린다. 설상가상으로 흉년까지 든다. 생존 자체가 어렵게 된 둘째 아들은 어느 농가에서 돼지 치는 일을 했다(15절).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었다(레 11:7; 신 14:8). 너무 배가 고파 돼지의 사료인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 했으나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2. 집으로 돌아오는 둘째 아들(17~24절)
둘째 아들은 굶어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음을 자각한다. “죽어간다(아폴뤼미)”는 잃은 양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 비유에서 “잃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잃어버린 것은 아버지의 관점에서 본 아들의 상태다. 실제로 아버지는 잃었다가 찾은 아들이라고 말한다(24절). 이처럼 둘째 아들은 잃은 양과 동전과 같이 잃어버린 신세다. 배가 고파지고 나서야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생각한다. “내 아버지”의 집에서는 종들도 풍족하게 지낸다. 그러나 아들인 자신은 이방 나라에서 굶어 죽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17절).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유일한 생존의 길임을 깨닫는다. 그는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할 말을 연습한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18절).”
    
아들은 집을 떠날 때의 죄가 얼마나 큰지 인정한다. 아버지에게 지은 죄는 하나님께 지은 죄다. 엄청나게 큰 죄를 지었으니, 지금부터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여겨 주시도록 부탁하려 한다(19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종의 관계로 낮아질 것을 각오한다. 그것도 아버지가 호의를 베풀 때 가능하다. 아들은 드디어 아버지에게 돌아간다(20절).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았다. 불쌍히 여겼다.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환영했다. 아들은 오기 전에 연습했던 대로 말을 시작한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21절).” 그런데 품꾼으로 삼아달라는 말을 잇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들이 말하는 도중에 아버지가 종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고 신을 제공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22절).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즐기자고 말한다(23절). 왜냐하면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 때문이다(24절).
    
주인의 말을 들은 집안 사람들은 모두가 즐거워한다. 앞 단락의 두 비유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찾은 자의 기쁨이 강조된다. 찾은 자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즉각 성대한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돈을 쓴다. 한편, 비유 속의 아버지는 당시 문화에서 이해하기 힘든 반응을 한 것이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부자 지주가 아들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아들로 지위를 회복하고 성대한 잔치를 여는 것은 마을의 기강을 무시하는 처사로 비쳤을 가능성도 크다. 아버지가 아들을 거리로 달려가서 안아주는 것도 특이하다. 큰아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문제는 낭비다(27, 30절). 둘째 아들도 재산을 낭비했고 아버지도 재산을 낭비한다. 하지만 큰아들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낭비가 둘째 아들을 회복시키는 길이었다. 아들의 신분을 즉각 회복하게 된 이유도 사랑이다.
    
비유 속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준다. 이런 사랑 따라서 예수님은 죄인들을 찾고 식사로 환대하신 것이다. 또한 비유에서 아들이 스스로 찾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았다고 표현한다. “찾다(휴리스코)”라는 동사는 세 비유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한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여자는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았다. 아들이 마음을 돌이켰기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이 긍휼로 변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환대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아들은 돌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탕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이야기다.
    
    
    
3. 집 밖에서 불평하는 첫째 아들(25~32절)
이 단락은 첫째 아들의 반응과 아버지와 대화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서 잔치 음악과 노랫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지 묻는다(25절). 그는 열심히 일을 하고 돌아왔다. 한 종을 불러 상황을 묻는다. 종은 “당신의 동생”이 돌아와서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말한다(27절). 첫째 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28절). 그러나 아버지는 밖으로 나와 간청한다. 아버지의 모습은 집 나간 탕자를 찾아가서 집으로 돌아오도록 간청하는 종과 같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겼고 명령을 이긴 적이 없었는데도 자기에게는 친구들과 즐길 수 있도록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주지 않았다(29절). 그런데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들과 낭비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니 이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30절). 형은 동생과 자신의 관계를 전혀 거론하지 않는다. 큰아들은 그토록 심한 불명예를 안기고 떠난 동생을 영접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고 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이번 잔치가 정당한 이유를 설명한다. 첫째, 아들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고 아버지의 재산이 그의 것이다(31절). 그러나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아버지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으므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다(32절). 큰아들의 논리는 탄탄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논리로 이 일을 대하지 않는다. 큰아들의 항의에 대해 거론하거나 반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한 가지 이유만 설명한다.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2절).” 아버지의 입장은 단호하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기쁨을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큰아들도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해야 한다.
    
첫째 아들은 집 밖에서 아버지를 불평하는 탕자다. 아버지와 논쟁하고 형제 관계를 부정해 버린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낭비하는 사랑을 비판했지만,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랑의 수혜를 입은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아(12절) 현재 재산은 자신의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아버지의 보호 아래서 평안을 누리고 있다(31절). 그러므로 첫째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마음으로 동생의 회복을 기뻐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첫째 아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헌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반영한다. 비유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부류를 첫째 아들에 빗댄다. 하나님의 집에서 최선을 다해 봉사한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집 밖에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종의 관계로 살아간다. 의로운 신앙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낭비하는 사랑으로 낮은 자들을 환대하시는 예수님의 기쁨에 동참해야 한다.
    
    
    
나는?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 탕자…. 둘째 아들은 유산 상속과 상속 재산의 처분 권한을 요구한다. 이는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란다는 말과 같을 만큼 당시로서는 큰 불경이었다. 아들은 먼 나라에 가서 상속받은 재산을 헤프게 써서 모두 탕진하고 나서야 자기 죄를 보았고 아버지 집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재산을 갚아줄 마음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의 조건 없는 환대를 경험하고는 아버지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맡긴다.
    
-집 안에 있는 또 한 명의 탕자 큰아들…. 아버지가 잔치를 베푼 것을 알면서도 큰아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 장자의 도리대로 손님들을 접대하지 않는다. 아버지 집에 살면서도 아버지를 신뢰하지 못한 것이다. 돌아온 동생을 위해 배설한 잔치라는 말을 듣고 큰아들은 아버지의 지나친 사랑에 분노하여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문지방을 넘어서 설득하는 아버지마저 거절한다. 도리어 아버지를 자신에게 고된 일만 시키는 인색하고 고약한 고용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집 안에 있던 탕자였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베푼 사랑은 조건 없는 헤픈 사랑이었다. 초라하게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측은히 여겨 주고 먼저 달려가 맞아준다. 잔치를 통해 자격 없는 아들을 동네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회복해 준다. 방탕한 아들이 절대 갚을 수 없는 도에 넘치는 이 허비하는 사랑이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다. 또한 안식일에 죄인의 사죄를 냉소하던 종교 지도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사랑이다.
    
-아버지는 동생을 위해 베푼 잔치를 거절한 큰아들을 맞이하려고 문지방을 넘는다. 큰아들이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친히 손님을 맞이하지 않는 것만으로 이미 아버지로서 큰 수치를 당한 것이지만, 큰아들을 설득하러 문밖으로 나가면서 다시 한번 수치를 자청한다. 그는 아들을 크게 꾸짖고 벌하는 대신 간곡하게 설득한다. 이 모습이 우리를 살리려고 아들을 육신의 몸을 입혀 보내시고 십자가의 수치에 넘겨주신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겠는가!
    
    
*아버지 생전에 상속을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란다는 뜻이고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아버지는 재산을 나누어주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각각 자기 욕심을 구하며 제 뜻대로 살기를 추구한다. 하나님은 그런 그릇된 길을 가려는 우리를 그저 바라보시며 놔두실 때가 있다. 그저 바라보시는 것이 하나님의 허락이 아님을 알기에 혹시 우리가 걸어가는 걸음에서 스스로 속이지 않도록 말씀 안에서 성찰하고 점검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둘째 아들이 먼 나라로 가서 상속받은 재산을 탕진하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삶은 돈이 있든지 없든지 그 자체로 낭비하는 재앙과 같은 인생이며 세상의 사랑은 돈이 있을 때만 유효한 조건의 사랑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세상을 의지한다면 거짓 안전과 만족을 위해 돌려받지 못할 사랑을 하고 있다.
    
*둘째 아들은 가진 것을 다 잃었을 때 자기 죄를 보았고 아버지 집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더 나아가 아버지의 조건 없는 영접을 경험한 후에는 사랑을 받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는 추레하게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고 먼저 측은히 여겨 주고 먼저 달려가 맞아준다. 아들은 떠났지만, 아버지는 보내지 않았기에 돌아올 기약이 없던 아들을 아버지는 항상 기다릴 수 있었다. 남루한 차림이었지만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고, 체면을 팽개치고 달려갈 수 있었다. 우리가 돌아오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더 서둘러 우리를 받아주신다. 사랑은 먼저 달려가 맞아주는 것이다.
    
    
    
*주님, 유산을 탕진하여 추레하게 돌아온 아들을 지나치게 사랑해 주는 아버지의 사랑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이 사랑받음의 힘으로 오늘을 힘 있게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겉으로는 성실하였으나 아버지의 낭비되는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여 불평하는 큰아들의 모습에서 좀 더 사랑하지 못하고, 좀 더 용납하지 못하는 소심한 저의 모습을 봅니다. 하늘 아버지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도록 더 내면과 외연을 넓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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