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6:1-13 불의한 청지기 비유
16장은 부와 제자도의 관계를 다룬다. 부와 관련된 두 비유가 16장의 시작과 끝이다. 비유 사이에는 부에 대한 교훈이 배열된다(10~13, 14~18절). 1~13절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1~9절)와 해석(10~13절)으로 구성된다. 예수님은 진실하지 않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영민한 청지기의 태도를 칭찬함으로써 유한하고 불의한 부로 영원하고 참된 미래의 가치를 준비하는 데 영민하도록 가르치신다.
1. 불의한 청지기 비유(1~9절)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로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비유에는 두 명의 주요 등장인물이 나온다. 부자와 청지기다. 부자 주인은 청지기가 자신의 소유를 낭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1절). 로마 문화에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주인을 대리해 행정을 책임지고 다른 종들을 관리하고 감독했다. 노예나 자유인 신분인 청지기는 능력을 인정받아야 부자의 재산을 관리할 수 있었다.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 “설명하라”고 한다. 청지기는 속으로 말한다. 주인이 해고를 결정한 것을 알고 있다. 능력 외에도 책임감과 신뢰성이 청지기의 기본 자질이기에 이번에 직장을 잃으면 살아갈 일이 막막하다. 노동으로 먹고 살 만큼 튼튼하지도 못하고 구걸하기도 부끄럽다. 혼자 생각하던 청지기는 위기를 돌파할 방법을 찾았다(4절). 청지기는 주인의 채무자들을 불러 정확한 빚을 묻는다(5절). 그리고 빚 문서를 조작하여 빚의 일부를 탕감한다. 기름 100 말은 노동자의 500~600일 치 임금에 해당하는 가치다. 청지기는 문서를 조작해서 이를 절반으로 줄인다. 당시 밀 한 석은 25~30데나리온(노동자 하루 품삯) 이었으므로 100석은 2,500~3,000일 치 임금에 해당한다. 청지기가 문서 조작으로 삭감해 준 5분의 1은 약 500일 치 임금의 가치였다.
빚을 진 사람들은 주인의 과도한 이자로 불만이 많았을 수 있다.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의 호의로 그들은 예상하지 못한 덕을 입었다. 당시 문화는 호의 또는 호혜를 제공받은 사람은 은혜를 갚아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된다. 채무자들이 받은 호혜에 대한 의무를 실행하기 때문에 청지기는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의 계획은 주인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청지기는 주인의 부로 자신의 미래를 완벽하게 준비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주인은 자기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문서까지 조작한 “옳지 않은 청지기”를 칭찬한다(8a절). 왜 그랬을까? 청지기는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점에서만큼은 영민했기 때문이다. 주인은 청지기의 도덕적인 태도가 아니라 내일의 안전을 위해 어떻게 부를 사용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8b~9절은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설이다. 예수님은 ‘이 시대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을 대조하면서 옳지 못한 청지기의 영민함을 이 시대의 자녀들에게서 나타나는 영민함으로 이해하신다. 이 시대의 자녀들은 미래를 준비하는 점에서 빛의 자녀들보다 더 영민하다. 미래를 위해 부를 훨씬 더 영민하게 사용한다는 뜻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불의한 재물로 영원한 처소로 인도할 친구들을 만들라고 가르치신다(9절). 재물 또는 부는 사람들에게 거짓 확신을 심고 숭배하도록 유도하는 속성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정직하지 못하다(9절). 비록 부가 불의하지만 선하게 사용하는 제자들은 친구들의 환영을 받고 영원한 청소로 인도받는다. 이곳은 이어지는 비유(16:19~30)에서 거지 나사로가 ‘천사들’의 인도로 들어가는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할 수 있다.
빛의 자녀들에게 미래는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을 집행하시는 때, 곧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킨다. 이 시대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부를 사용하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길이다. 영민하고 지혜로운 제자는 불의하고 유한한 재물로 영원한 처소를 준비한다. 빛의 자녀들은 당시 “명예와 수치의 문화”에서 당연한 되돌려 받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요구하지 않고 궁핍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 사람은 갚지 못해도 미래에 하나님이 갚아주신다. 영주할 처소에서 천사들의 환영을 받고 하나님이 보상하실 것이다.
2. 부에 대한 교훈(10~13절)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와 해설을 통해 제자들에게 부에 대한 교훈을 이어가신다. ‘작은 것’에 신실한 자는 ‘큰 것’에도 신실하다.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10절). 11절은 비슷한 용어로 10절의 의미를 강화하는데, 제자들이 불의한 재물에 신실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참된 것’을 맡길 사람이 없다. “참된 것”은 참되신 하나님께 속한 것을 가리킨다. ‘작은 것’은 ‘불의한 재물’이고 ‘큰 것’은 ‘참된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눈에는 재물이 가장 크게 보인다. 하지만 영원한 세계에서 보면 재물은 작은 것이다. 반면 하나님이 오는 세상에 준비하신 부가 큰 것이고 참된 것이다. 즉, ‘참된 것’은 다가올 시대의 영원한 것이며,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지는 것은 참된 것이 아니다.
12절도 10절과 평행관계에 있는데, 제자들이 ‘남의 것’에 신실하지 않으면, ‘너희의 것’을 제자들에게 맡기지 않는다. 12절의 ‘남의 것’은 10절의 ‘작은 것’, 11절의 ‘불의한 재물’이다. 다른 사람의 재산이고 앞의 비유에서는 불의한 재물(부)이다. ‘너희의 것’은 ‘큰 것’과 ‘참된 것'(10절)이고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오는 세상에 준비하신 것으로 “너희의 것”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10~12절은 부에 대한 두 가지 태도와 교훈을 대조 방식으로 설명한다.
부에 신실하지 않은 태도는 이기적으로 부를 사용하는 것이다. 부에 대해 신실한 사람은 궁핍한 사람을 도우며 되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우지 않고 섬긴다. ‘작은 것’과 ‘불의한 재물’과 ‘남의 것’에 신실한 사람은 앞의 비유에 묘사된 것처럼 빛의 자녀들이 행해야 하는 삶이고 영주할 처소로 환대를 받는다(9절). 이는 곧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준비하는 삶이다(12:33).
예수님은 10~12절에서 설명한 부에 대한 태도를 하나님에 대한 태도로 연결하신다. 인간은 부와 하나님을 동시에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말이다. 이쪽 주인을 가볍게 여기면 저쪽 주인을 무겁게 여기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부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중립적이지 않다. 부는 인간에게 주인의 위치에 서려고 한다. 부는 인간을 자신의 청지기로 삼으려 하는 힘을 갖고 있다. 부와 하나님은 청지기에게 요구하는 목적을 다르게 설정하기 때문에 인간은 부와 하나님을 동시에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 본문을 1~9절의 비유와 연결해 보면 불의한 청지기는 부를 주인으로 섬겼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의 임무를 맡기셨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청지기는 자신에게 있는 부가 많으나 적으나 상관없이 더 궁핍하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
나는?
-돈의 노예에서 돈의 주인이 된 청지기의 모습에 주목해진다. 돈의 노예가 되어 주님의 소유를 허비한 청지기가 해고 통보를 받는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기회로 빚진 자들의 빚을 감면해 준다. 돈을 향한 주인의 기대에 어울리게 행동함으로써 그는 지혜로운 자로 인정받는다. 그는 돈에 이끌려 영생을 판 자가 아니라 돈을 부려서 영생을 얻은 사람이다. 돈의 주인이 되어 그 돈을 하나님께 복종시킬 수 있을 때 제자로 살 수 있다. 제자는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
-청지기의 이러한 행동은 주인에게 해고당하더라도 덕을 본 자들은 자신에게 호의를 갚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주인은 그 행위가 괘씸하게 여겨졌지만, 청지기의 영악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돈에 쩔쩔매는 자가 아니라 돈을 사용하여 장래를 도모할 줄 아는 자였다. 그에게 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을 뿐이다. 곰곰이 되짚어 보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내가 베푼 물질적인 호의로 인해 하나님 나라에서 나를 영접할 친구들은 몇 명이나 될까? 나 역시 돈을 위해 살지 않고 돈을 통해서 그 무엇인가를 위해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재물(지극히 작은 것)에 대한 나의 태도를 보면, 하나님 나라의 참된 가치를 잘 감당할 수 있을지를 알 수 있다. 나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많든 적든 재물에 대한 태도가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인류에게 눈에 보이는 ‘물질’이 우상이 아니었던 적은 없는 듯하다. 그렇기에 우리도 재물에 초연할 수 있다는 식의 자신감은 금물이다. 그래야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자들과 재물 때문에 고통받는 이웃을 이해하고 나눔의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재물이 없으면 못 살 것처럼 쩔쩔매지도 말아야 한다. 그래야 주님보다 재물을 경외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여 지극히 큰 것을 얻은 청지기를 발견한다. 돈은 하나님 나라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것이다. 소유의 가치를 생명과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소유에 기대어 생명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돈을 지극히 작은 것으로 간주하여 모든 소유권을 하나님께 양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맘몬신의 하수인들이 되고 만다. 돈은 가치중립적이라고 폄훼할 만큼 하찮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만큼 가공할 만한 세력을 그 배후에 두고 있다. 돈인가? 하나님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받을 만큼 신앙의 대상도 될 수 있다.
-예수님은 재물을 향한 태도로 제자 여부를 정하신다. 심판 날에 주님은 우리에게 맡기신 재물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셈하실 것이다. 심판의 결과는 소유를 향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내 것’이라는 생각으로 한 것이면 또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 일이 아니면, 자선 사업에 썼든지 교회에 썼든지 단 한 푼도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나를 위해 쓰든지 남을 위해 쓰든지 종교 영역에 쓰든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라는 생각으로 써야 인정하실 것이다. 원래 하나님의 것인데 사람들에게서 “희생과 헌신”이란 찬사를 받으면 하늘에서 주님께 받을 칭찬이 없을 것이다.
*주님,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모든 것의 주인 되신 주님을 더욱 의지하겠습니다.
*주님,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여 지극히 큰 것을 얻는 지혜로운 청지기의 삶을 살아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