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속 하나님 나라 제자의 길 [눅 16:14-31]
 – 2025년 03월 28일
– 2025년 03월 28일 –
눅 16:14-31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속 하나님 나라 제자의 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웃는다. 14~18절은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들의 조소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으로 구약의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언급하신다. 19~31절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로 긍휼과 환대가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고, 성경의 본질임을 보여준다. 부자가 미래를 영민하게 준비하지 못한 점에서 비유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1~8절)와 연결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신앙적 위선과 재물을 사랑하는 태도를 비난하며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들려주신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 아브라함 품에 들어가지만 호화롭게 살았던 부자는 죽어 음부에 들어간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간청을 하지만 모두 거절된다. 율법과 선지자를 거절하는 자는 그 누구의 증언도 거부할 것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거절한 바리새인들의 불신앙을 꼬집으신다.
    
    
    
1. 율법 그리고 하나님 나라(14~18절)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표현은 “탐심에 사로잡힌 태도”를 지칭한다. 그들은 외적으로 경건한 모습을 보였지만, 내면은 탐심이 가득하였다. 또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다. 자기 의는 교만을 말하며, 교만은 부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와 해설을 듣고 나서 비웃는 표정으로 드러난다(14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지위와 가르침을 조소했다. 조롱과 멸시는 오만과 교만에 근거한다. 특히 그들은 배경도 좋지 않고 가난했던 예수를 조롱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조소는 경건한 신앙생활의 보상으로 부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드러나는 현상이다. 15절의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라는 표현은 바리새인들의 오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들의 오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직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태도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신다(15a절). “가증한 것”은 하나님 앞에 드려진 가증스러운 제물을 떠올린다. 즉, 바리새인들의 오만은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숭배와 같은 가증스러운 행위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임을 받으셔야 하는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치로 올렸으므로 오만은 우상숭배로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으나 사실상 부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점에서 우상 숭배자들이다.
    
16~17절에서 예수님은 비웃는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의 행위가 “율법과 선지자들”의 관점에서 타당한 사실을 입증하신다. 이를 위해 율법과 선지자들, 즉 구약의 불연속성(16절)과 연속성(17~18절)을 전제로 삼으신다. 구약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고하고 전한 요한의 때까지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16절). 요한의 활동 이후 예수님의 활동이 시작되면서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이끄는 복음에 해당한다. 오만과 자기 의로 가득 찬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복음을 조롱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에 처한다. 예수님의 활동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시작됐다면 구약은 권위와 효력이 상실되는가? 그렇지 않다. 율법의 한 획도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17절). 율법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이후에도 권위를 갖고 있다. 예수님은 이혼과 간음의 규례를 예로 들며 재혼을 반대함으로써 율법의 권위와 효력을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하는지 보여주신다(신 24:1~4).
    
    
    
2. 부자와 나사로 비유(19~31절)
이 비유는 부자와 거지를 옷과 음식과 거처의 대조로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19~21절). 이 세 가지는 고대 사회에서 사회적 신분을 알리는 기능을 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속옷을 입었다. 두로 지역의 자색으로 염색한 옷감은 대단히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자색은 랍비 문헌에서 왕들의 색상으로 언급되고,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의 색상이었다. 흰색 옷은 높은 지위에 속했음을 알린다. 또, 대문이 있는 집은 대지를 소유했거나 대문을 설치할 정도로 큰 저택이었음을 내포한다.
    
부자는 이런 옷을 입고 저택의 식탁에서 날마다 “사치스럽게” 연회를 즐겼다. 반면 나사로는 집이 없었고 부자의 대문 밖에 있었다. 옷 대신 상처를 입고 있었는데, 상처투성이라는 묘사는 그가 병을 얻어 버려졌을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거지 나사로는 사회의 소모품으로 재산도 없고 병도 얻어 버려졌을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버려진 거지의 상처를 개들이 핥는다. 나사로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도우신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름의 의미와 달리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개보다 못한 생활하고 있었다.
    
22~24절은 죽음으로 거지와 부자의 운명이 반전되는 모습을 묘사한다. 죽을 때도 거지는 그냥 죽은 것이고, 부자는 매장된 것으로 표현된다(22절). 그러나 죽은 후 거지는 천자들에게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다.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당한다. 부자가 눈을 들어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본다. 아브라함에게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다. 세례 요한의 경고대로 궁핍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은 부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하는 독사의 자식으로 불 가운데서 고통당한다(3:7~9).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신의 혀를 시원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부자는 생전에 나사로에게 절실했던 긍휼을 간청한다. 부자는 아직도 나사로를 심부름시키면 명령에 따르는 종으로 생각한다. 아브라함은 부자를 도와줄 수 없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부자는 살아 있을 때 좋은 것을 받았지만,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운명이 반전되어 거지는 위로를 받고 부자는 괴로움을 받는다. 둘째, 낙원과 음부의 틈 때문에 한 번 운명이 결정되고 나면 서로 다른 영역으로 넘어갈 수 없다. 회개의 기회는 지상에서 기회로 끝나는 것이므로 죽어서 두 번째로 주어지지 않는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 곧 다섯 영제에게 보내 고통받는 이곳에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청한다(27~28절). 아브라함은 이마저도 모세와 선지자들, 곧 성경이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29~31절). 부자는 죽은 자를 가족에게 보내야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자가 가서 말해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따라 죽음 이후의 운명이 결정된다.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누린 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궁핍과 억울함으로 고통당한다. 지상에서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부자의 무관심이 부자의 권리와 같았을 것이지만 그의 무관심은 가장 심각한 죄였다. 무관심에 상응하는 결과가 음부에서 고통당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자는 미래를 영민하게 준비하지 못했다(16:1~9). 또 긍휼은 구약(모세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이다. 죽은 부자는 아브라함을 세 차례에 걸쳐 “아버지(24, 27, 30절)”로 부르지만, 그는 결코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로서 맺어야 하는 회개의 열매인 긍휼과 환대가 그에게 없었기 때문이다(사 55:13; 60:17; 겔 17:24; 암 5:12, 15).
    
이런 점에서 부의 위험성을 경고한 예수님을 비웃는 바리새인들은 긍휼에서 멀고 부자의 운명에 가깝다. 결론적으로 이 비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까이 있는 궁핍한 자들을 향한 긍휼을 행하라고 요청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아브라함의 자녀이므로 긍휼을 행하는 것으로 신분을 입증받는다.
    
    
    
나는?
-돈을 좋아하고 말씀을 비웃는 이들에게 다른 기회는 없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에게는 주인에게 손해를 끼친 청지기가 칭찬받는 이야기가 우스웠을 것이다. 그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있고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실은 그 율법이 내내 보여주는 자비하신 하나님은 읽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자선과 구제의 의무를 다하는 율법의 껍데기는 잘 지켰지만, 모두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기 위한 위선에 불과했다. 예수님은 그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고 그 율법을 온전한 의미로 지키는 사랑의 사람을 창조하러 오셨다. 위선적인 껍데기 신앙으로는 그 주님을 만날 수도, 그 나라에 참여할 수도 없다. 돈만으로는 사랑을 살 수도 없고 의의 마음도 살 수 없다.
    
-바리새인들은 주인이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옳지 않은 청지기를 칭찬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웃는다. 그들은 관대하고 자비로운 주인이 되기보다는 냉혹해서라도 많은 돈의 주인이 되고 싶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는 구약의 율법을 계승할 뿐 아니라 성취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문자적인 준수에 그치지 않고 훨씬 더 성숙한 준수를 요구하신다. 그 율법을 제정하신 본래 취지를 따라 준수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현재의 배우자를 버리기 위해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느슨한 유대인들의 이혼 관행 속에 담긴 위선을 폭로하시고 율법의 본래 요구가 무엇인지를 환기시키셨다.
    
-가난한 자를 외면하는 부자에게 다른 기회는 없다. 가난한 자를 외면한 부자가 갈 하나님 나라는 없다. 살아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지 않은 그는 죽어서는 손가락에 물 한 방울을 찍어줄 친구도 만나지 못했다. 긍휼을 베풀기 위해 살아서 넘지 않은 문지방이 죽어서는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이 되었다. 나만 챙기기 위해 세상의 절반이 고통으로 죽어가는 현실을 외면하면서 대문을 걸어 잠근 사람과 같았다.
    
-말씀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다른 기회는 없다. 지금 율법(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또 그 말씀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께서 부활하여 나타나신다. 해도 믿지 않고 듣지 않을 것이다. 더 신비로운 경험을 구하기보다 더 신실하게 말씀에 귀 기울여 순종해야 한다. 비록 지금은 말씀이 쓰디쓰게 들릴지라도 그런 말씀을 들을 수 있을 때가 기회인 줄 알고 돌이켜야 한다. 재물에 사로잡혀 하나님 음성에 귀를 막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주님, 물질을 말씀보다 더 좋아하는 이들에게 다른 기회가 없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말씀을 준수하고자 한다면 자비와 긍휼의 삶이 따라옴도 깨닫습니다. 부디 말씀을 살아내는 삶이 되겠습니다.

댓글 남기기

매일성경 묵상

바벨론 강가에서 [시편 137:1-9]

시편 137:1-8 바벨론 강가에서    유다 멸망 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이 시온을 기억하며 통곡한다. 유다의 불순종으로 인해 포로 신세가 되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느헤미야의 개혁 2 [느 13:15-31]

느 13:15-31 느헤미야의 개혁 2    세 번째 개혁은 안식일 준수에 관한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 외곽에 사는 유대인들이 성내로 들어와 물건을 매매하는 것을 발견하고 안식일에는 모든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느헤미야의 개혁 1 [느 13:1-14]

느 13:1-14 느헤미야의 개혁 1    본 장은 느헤미야의 추가적인 개혁 다섯 가지를 소개한다. 지금까지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성벽을 재건하고 공동체 건설에 헌신했다. 잠시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예루살렘 성 봉헌식 [느 12:27-47]

느 12:27-47 예루살렘 성 봉헌식    느헤미야가 에스라와 함께 성벽을 봉헌한다. 본문은 성벽 봉헌을 성전 봉헌 버금가는 의식으로 소개한다. 이 일은 고레스 칙령이 명령한 일(하나님의 집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서약과 다짐 [느 10:1-39]

느 10:1-39 서약과 다짐 에스라의 율법 낭독과 레위인들의 기도에 감화를 받은 귀환자들은 언약에 인봉을 한다. 10장은 언약에 인친 자들의 명단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명단은 유다 총독 느헤미야의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