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하나님 나라 제자의 윤리, 하나님의 종이 가져야 할 자세 [눅 17:1-10]
 – 2025년 03월 29일
– 2025년 03월 29일 –
눅 17:1-10 하나님 나라 제자의 윤리, 하나님의 종이 가져야 할 자세
    
본 단락은 13:10부터 시작된 긴 흐름의 결론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소자들을 실족시키지 말고 형제들을 용서하도록 경고하신다(1~4절). 그들이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1~4절의 명령을 실천할 수 있다(5~6절).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이 그런 선한 일을 실천했다고 해서 자랑하거나 보상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7~10절)고 당부하신다.
    
실족은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따른 수많은 유대인의 안타까운 운명의 결과다. 실족의 주 대상은 가난한 자들과 사회적으로 고립된 자들이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과 달리 그런 자들을 환대하는 일로 부름을 받았다. 예수님은 겨자씨와 종의 비유를 짧게 곁들이며 제자들의 믿음과 종으로서의 사명이 마땅함을 강조하신다.
    
    
    
1. 제자도_실족시키지 말고 용서하라(1~4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 이어서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신다(17:1~19). 제자들의 인생에서 타인을 실족시키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을 회복시키는 도구로 부름을 받았으나 도리어 문제를 일으키는 흠이 생길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다고 해서 윤리적으로 완전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불가피하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불가피성이 합리화되지 않는다. 애초에 제자는 높은 수준의 윤리의식으로 섬기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실족(스칸달론)’으로 번역된 단어는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가두어버리는 덫이나 함정을 가리킨다. 이런 실족의 상황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기에 실족시키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1절). 불가피성이 인정되더라도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행위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논리가 제자들에게 더 엄격하게 적용된다. 특히 작은 자 한 명을 실족시키면 연자 맷돌에 목이 매달린 채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2절). “연자 맷돌”은 밀을 갈기 위해 노새나 나귀로 돌리는 거대한 맷돌에 사용된 덮개돌을 가리킨다.
    
또 “작은(미크로스)”은 사회적 개념으로, 어린아이에게 국한되는 용어가 약자 전체를 가리킨다. 사회적 약자는 어디든지 존재한다. 제자공동체 안에도 약자는 있기 마련이다. 약자를 실족하게 하는 일은 흔히 일어난다. 문제는 이런 일이 일어나도 강한 자의 처지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겨지는 것이다. 특히 제자들은 선과 악의 대결에 관심을 두다 보니 악의 목록에 들어가지 않는 행위일 경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쉽다. 하지만 실족은 선한 일을 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에 의해 더욱 빈번하게 일어나곤 한다. 예수님은 큰 자와 작은 자의 갈등이나 관계에서 생기는 실족의 문제를 다루신다. 아무리 선한 목적을 위해 헌신한다고 해도 크고 강한 위치에 서게 되면 실족시키는 일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작고 약한 자들 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은 이들을 실족시키는 자를 주목하신다.
    
작은 자를 실족 시키는 행위는 엄청나게 큰 죄다. 피해자가 작은 자이기에 가해자가 받을 벌도 크다. 말이나 나귀의 힘으로 곡식을 으깨고 빻을 때 사용하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단 채 바다에 던져야 하는 정도의 벌을 받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바다 아래에 “무저갱(심연)”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목에 걸린 맷돌의 무게 때문에 바다 아래로 급속히 빨려 들어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매우 끔찍한 것이었다. 그런데 실족의 영역에서 직접 가해를 입힌 경우만이 아니라 “무관심이나 무정함” 때문에 작은 자가 실족하는 예도 생각해야 한다. 실제로 예수님은 여러 비유와 사건에서 무관심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셨다. 무관심이나 무정함은 인생의 “작은” 요소라고 생각할 수 있어서 실제의 삶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심한지 신경 쓰지 않은 채 생활하기 쉽다. 현실에서 공동체와 사회의 무관심, 특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무정함 때문에 작은 자들이 이곳저곳에서 실족한다.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할 사람, 궁핍하거나 소외된 상태에 있는 작은 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순식간에 실족할 수 있다.
    
1~2절이 작은 자를 실족시킬 위험성에 경고했다면, 3~4절은 반대로 타인에 의해 피해를 보게 되는 상황을 다룬다.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처지에서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처지로 바뀐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3절).” 공동체의 결속력을 무너뜨리는 행위를 한 경우가 발생했다. 그런데 가해자가 손해를 끼친 대상이 본문에는 특정되지 않았다. 이는 공동체 전체에 해가 되는 행동을 했을 경우일 것이다. 이때 제자는 두 가지로 반응해야 한다. 먼저, 경고해야 한다. “경고하다(에피티마오)”는 행동을 바로잡고 돌이키도록 책망하고 꾸짖는 행동을 말한다. 그리고 책망을 듣고 회개하면 용서해야 한다. 심각한 문제는 동일한 가해자가 하루 동안 “내게”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회개하는 경우라도 제자는 용서해야 한다(4절). 제한을 두지 말고 용서하라는 것이다.
    
    
    
2. 겨자씨만한 믿음이 필요하다(5~6절).
문제는 1~4절의 가르침을 순종하여 실천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실족시키지 않는 것이나 죄를 꾸짖는 것이나 회개한 사람을 무한대로 용서하는 일 중 쉬운 것이 없다. 그래서 사도들은 현재 자신들의 믿음으로는 이런 가르침을 실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도”라고 부르신 것은 사도와 같이 신앙공동체를 섬기는 위치의 지도자에게는 이런 믿음이 절실하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어도 뽕나무를 명령해서 바다에 던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겨자씨는 점이나 먼지처럼 너무 작아서 씨가 있는지도 식별하기 어렵다. 입김으로도 날아가 버리는 무게다. 반면 뽕나무는 뿌리가 깊고 넓게 뻗어 있어서 뿌리를 뽑기는 어렵다. 원어는 “쉬카미노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뽕나무에도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뽕나무보다 훨씬 크게 자라고 뿌리를 뽑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시카모어 나무를 가리킬 가능성이 더 높다. 시카모어 나무는 크기와 뿌리의 견고함에 있어서 겨자씨와 정반대에 해당한다.
    
이렇게 제자들의 믿음과 믿음의 능력을 겨자씨와 뽕나무를 뽑는 것으로 묘사하는 비유는 과장법이지만 논지는 명확하다. 비록 사도들의 믿음이 작은 상태인 것은 사실이지만 1~4절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니다. 실족시키지 않거나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큰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만한 믿음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도 아니다. 해결책은 행하는 여부에 달려 있다. 작은 믿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급진적인 수준의 윤리를 실천할 수 있다.
    
    
    
3. 무익한 종의 태도로 의무를 행해야 한다(7~10절).
작은 믿음으로 1~4절의 일을 실천한다면 칭찬 받을만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인을 섬기는 종의 비유로 선한 행위를 한 제자가 겸손한 태도를 보여야 함을 강조한다. 비유에는 종과 지주인 주인이 등장한다. 종은 여러 가지 바깥일과 집안일을 한다. 큰 규모의 토지라면 이런 일을 종들이 분담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유에는 한 명의 졸이 집 안팎의 대소사를 동시에 처리한다. 종이 밭을 갈거나 양을 관리하고 돌아온다고 해서 주인이 앉아서 먹으라고 하지 않는다(7절). 오히려 수고한 종이 주인의 먹을 것을 준비해야 하고 주인이 먹을 동안 수종 들어야 한다(8절). 종의 당연한 의무이므로 주인은 종에게 감사하지 않는다. 이 모든 일을 섬기고 나서 종은 먹고 마실 수 있다. 종 역시 주인의 집에 와서 주인의 보상을 받을 줄로 기대하지 않는다. 주인을 섬기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생각한다. 모든 명령을 다 수행한 후에는 도리어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10절)”라고 말한다.
    
“무익한(아크레이오스)”은 “쓸모없는, 가치가 없는” 등의 뜻이다. 이 종은 주인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고 모든 일 처리를 성실히 수행했는데도 가치 없는 존재로 비하한다. 고대 사회에서는 전혀 이상한 모습이 아니다. 당시 종들은 보상을 기대하거나 예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분이 종이기 때문에 주인의 일을 행하는데 모든 관심을 쏟아야 했다. 예수의 제자, 특히 책임을 많이 맡은 지도자는 하나님의 종이다. 관심을 기울이고 관용을 베푸는 행위는 종의 마땅한 의무다. 그런 행위로 공동체에서 명예가 높아지는 것이나 별도의 보상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일상에서 관용의 윤리를 체화해서 의무감이 삶이 돼야 할 것이다.
    
    
    
나는?
-제자는 형제를 실족하지 않는 자다. 특히 형제 중에서도 작은 자를 향하여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여기 “작은 자”는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하여 찾아온 약한 자들, 낮은 자들, 상처받기 쉬운 자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신중하지 않으면 알게 모르게 자본의 논리로, 힘의 논리로, 종교의 이름으로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한 것이 예수께 한 것이니 무서운 심판이 기다릴 것이다.
    
-죄인들 사이의 사랑은 8할이 용서다. 한두 번 용서해서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나도 누군가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용서를 받아왔음을 기억하고 심지어 진정성이 없는 사죄라도 받아주어야 한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내 안에서 되풀이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회개한 후에야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용서를 받아야 진정한 회개에 이를 수 있다. 제자는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 무자격자를 향한 사랑과 기대를 본받는 자다.
    
-죄는 지적해야 하고 꾸짖어야 하지만 죄를 회개하고 돌아온 자는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내가 그 피해자일지라도 용서해야 하고, 그 회개의 진정성을 증명하라고 요구하지도 말아야 한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믿음이 아니라 작더라도 참된 믿음이다. 지금은 믿음을 더할 때가 아니라 그 믿음을 행사할 때다. 중요한 것은 내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내가 믿는 하나님의 크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만 확실하다면, 크든 작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다. 내 믿음이 내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언제나 충분하다고 믿고 일단 순종해야 한다.
    
-종은 농사와 양치기, 식사 준비와 식사 수종 드는 일까지 시키는 대로 다 순종했지만, 주인은 조그마한 감사의 표현조차 하지 않았고, 그래도 종은 할 일을 했다고 여길 뿐 주인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작은 자를 섬기고, 용서하고, 죄를 경계하는 일은 이미 큰 은혜를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해야 할 일을 잘 못하면서 자기 것만 챙기느라 시간과 건강을 허비하는 일이 많지 않은가? 무익한 종이 아니라 유익한 종으로 인정받느라 마음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많은 성도들이 용서를 의지적으로 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물론 미루지 않고 결행하는 의지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용서하기가 된다면, 세상에 원수지간은 웬만하면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의지조차도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주님은 용서를 믿음의 영역으로 말씀하신다. 오죽하면 비유로 말씀해주시기를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뽕나무처럼 뿌리가 깊게 박힌 나무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을까!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아주 작은 겨자씨만한 용서하고자하는 의지만 있어도 그와 비교할 수 없는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용서하여 주신 은혜의 가치를 깊이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에게도 용서의 의지가 있음을 믿음으로 붙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이 명령은 하나님 나라에서 “사도”로 부름을 받은 제자들에게 유독 강조하신 말씀이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고 살아내는 삶에서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는 의지가 그만큼 중요하고, 용서하고 실족하게 하지 않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보복하지 않는 태도는 당시 세계관과 뚜렷하게 차별되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특히 이런 삶을 모범적으로 살아내야 할 것을 당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렇다면 이 명령이 이천년전에 머무는 말씀일까? 당연히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제자의 삶을 추구하는 성도에게도 분명히 지켜 살아내야 할 의무로 주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된 성도는 예수님께서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가르침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보여주신 것을 바라보며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예수님처럼 용감하게 믿음의 도전을 해야 한다. 거창한 과업이 아니라 가까운 인간관계에서부터 용서하고 사랑하며 실족하게 하지 않는 삶을 종이 주인에게 하듯 당연하게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 관계에서부터 구현되는 것이다. 실족하게 하지 않고, 용서의 용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자신이 베푼 선함을 드러내지 않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순종해야 하겠다.
 
*나이가 들수록 용서해야 할 것보다 용서받아야 할 것이 더 많이 생각난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그리되어 버렸다.   
    
    
    
*주님, 용서하는 순종에도 믿음이 필요한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깊은 뿌리를 내리고 넓게 퍼져 있는 뽕나무와 같은 죄로 용서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용서가 어렵지만, 믿음으로 순종의 시도를 해보겠습니다.
*주님, 마땅히 하나님 나라 사명을 기쁘게 감당하여 주님께 유익한 종이 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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