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3:44-56 운명하실 때 하늘과 사람들의 반응들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일어난 현상(44~46절)과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사람의 반응을 기록한다.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반응으로 어둠이 온 땅에 임하고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신 예수님은 아버지께 영혼을 맡기신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은 목격자들에게 신앙고백과 담대한 신앙을 불러일으킨다.
1. 십자가에서 죽음과 하나님과 예수님의 반응(44~46절)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하늘과 하나님의 반응을 설명하고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한다. 제6시(정오)가 되자 해가 빛을 잃기 시작했고, 제9시(오후 3시)까지 지속됐다(41절).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하늘의 반응은 온 땅을 향했다. 이 어둠은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나, 주의 날에 종말의 사건들이 일어날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묘사된다. 특히 요엘서에 예고된 주의 날을 상기시킨다(욜 2:10, 30~31; 3:15; 습 1:15). 어둠은 불의한 손으로 죄 없는 아들을 처형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아들의 죽음으로 온 땅에 구원의 길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무죄한 아들을 죽인 행위에 분노하시고 동시에 아들의 죽음을 통해 온 땅을 구원하는 길을 여셨다.
또, 성소의 휘장 한 가운데가 찢어졌다(45절). “찢어졌다”라는 수동태 동사가 사용된 것은 휘장이 하나님에 의해 찢어진 것을 의미한다. 휘장의 두께와 크기는 사람이 찢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더구나 유대 문화에서는 성전의 휘장을 찢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구원 역사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먼저 이 사건은 하나님이 휘장을 찢고 지성소와 성전 밖으로 나오시는 것을 상징한다. 이는 성전이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을 만나는 곳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지 않는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전 제사를 통해서 그의 백성을 만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휘장은 하늘의 궁창을 상징하므로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하늘에 감춰진 진리가 계시된 것을 의미한다. 궁창 너머의 세계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가 감춰져 있었고 이제 무대의 휘장과 같이 찢어짐으로, 이 진리가 온 땅에 계시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놀라운 하늘의 계시를 처음으로 깨닫게 된 목격자는 로마의 백부장(이방인)으로, 그는 예수님을 “의인”으로 고백한다(47절). 드러난 예수님에 대한 계시는 제자들에 의해 온 땅에 전파될 것이다(행 1:8). 하나님이 휘장을 찢고 나오셨기에 하나님의 진리는 온 땅으로 계시된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는 길은 시온의 성전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땅끝으로 구원의 복음이 퍼져 나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구심력이 아닌 원심력으로 바꾸신 것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고 운명하셨다(46절). 예수님은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을 친근함과 신뢰심을 뜻하는 “아버지”로 부르신다. 이 간구는 시편 31:5을 인용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고통과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목표인 십자가 고난을 통과하셨다. 사명을 모두 마치고 생명을 아버지께 맡기셨다.
2.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47~56절)
먼저 백부장은 일어난 일을 보고 예수님을 의인으로 고백한다(47절). ‘누가’는 “보았다”를 문장 맨 앞에 배열함으로써 백부장을 “일어난 것”의 목격자로 강조한다. “일어난 것”은 백부장이 직접 목격한 십자가 사건을 가리킨다. 로마인에게 십자가형은 반란자에게 내려진 형벌인데도 이 형벌을 집행한 책임자인 백부장은 이 과정 전체를 정확히 관찰한 끝에 예수님을 “참으로, 진정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고백한다. “의롭다”라는 무죄하다는 의미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행위와 기도, 죄수에게 약속한 내용을 목격하면서 의로운 자로 인정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방인 군대의 장교가 외면과 저주를 상징하는 십자가 처형을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백부장의 고백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을 드러낸다. 고난받는 종은 의로운 종이고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기 위해 고통을 겪어야 했다(사 53:11~12). 자신을 구원하지 않은 예수님의 고난은 이방인이 신앙을 고백하는 열매를 맺게 했다.
마태와 마가는 백부장의 고백을 누가와는 조금 달리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마 27:57, 막 15:39)”이라고 고백했다고 기록했다. 백부장이 고백한 것이 의인이든, 하나님의 아들이든 중요한 것은 주님의 죽음으로 하나님 나라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암시해 준다. 비록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서 이방인이었지만, 주님의 십자가형을 구경하러 모인 무수한 무리들 앞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백부장의 마음에서는 새로 태어나신 것이다. 그 안에 주님을 향한 믿음이 싹이 텄다.
그리고 예수님의 처형과 죽음을 보러 온 무리는 현장을 목격하고 모두 가슴을 치고 돌아갔다(48절). 가슴을 친 행위는 “비탄과 회개”를 암시한다. 이들 중에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는 의미다. 또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에서 ‘일’은 단수이다. 즉, 백부장은 골고다에서의 일만 본 것이다. 반면에 무리들이 “그 된 일을 보고”의 “일”은 원문에는 “일들”, 즉 복수형이다. 그 무리 중에서는 빌라도의 법정에서부터 주님이 당하는 고난과 죽음을 구경하기 위해 따라온 이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이다. 호기롭게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쳤던 그들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을 구경하다, “가슴을 치며” 골고다 언덕을 내려간 것이다. 비탄과 회개의 행동을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지금 어떤 행동을 했는지…. 깊고 깊은 두려움이 그들을 덮었다.
한편, 예수님을 아는 자들과 갈릴리에서부터 따른 여자들(8:1~3)은 예수님의 죽음과 매장과 부활을 모두 목격한 증인들이다. 다 멀찍이 서서 이 일을 지켜보았다. (새번역_49절)”. 주님을 아는 이들,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여인들은 그저 “멀찍이 서서 지켜볼 따름이었다.” 3시간 동안의 짙은 어둠(흑암)이, 백부장의 고백과 무리들의 가슴을 치는 행동들을 보고 들으면서 “그저 멀찍이 서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아…. 그것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자신들이 목격한 진리를 증언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장례를 치렀다(50절). 그는 불의한 모습을 보인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이었음에도 선하고 의로웠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이기도 했다(51절). 주목할 것은 누가복음에서 “선한 사람(아가쏘스)”으로 불린 사람은 예수님과 아리마대 사람 요셉, 둘뿐이다.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요구했다(52절). 이로 보건대 요셉은 유대 지도자들의 결정에 맞섰을 뿐 아니라 로마 총독의 반응도 개의치 않고 요구한다. 이로써 예수님의 시체가 군인들에 의해 악하게 취급당하고 훼손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한다. 그리고 세마포에 싸서 누구도 장사 된 적 없는 새로운 무덤에 넣어두었다(53절). 주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자신이 소유한 명예와 권위가 순식간에 잃을 수도 있기에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님의 시신”을 달라는 요청을 머뭇거리지 않는다. 자신의 공회 회원의 지위가 한순간에 박탈될 수 있는 민감한 일을 주저하지 않고 행동한다. 마가는 요셉의 이 행동을 기록하면서 “당돌하게(막 15:43)” 시체를 요구했다고 언급했다. 그의 행동에 주저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주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감히 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자신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밝히는 행동이었기에 그의 모습이 놀랍기만 하다. 이것은 대제사장의 뜰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고,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의 자리에서 자취를 감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행동과 선명하게 비교가 된다. 살아가면서 이런 용기가 발휘되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물러섬 없이 용기를 발휘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은혜를 부어 주실 것을 믿는다.
다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했던 여자들은 무덤을 찾아왔다(54~56절). 여자들이 무덤을 찾아온 날은 준비일이고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이었다(54절). 그녀들은 장사하는 요셉의 뒤를 따라가 무덤과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 봐 두었다. (55절). 그리고 돌아가서 부패를 지연시키고 냄새를 제거하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 예를 다하기 위해 향품과 향유를 준비했다. 그리고 안식일 계명에 따라 안식일에 쉬었다(56절).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여러 반응은 신앙고백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백부장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경우처럼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실현됐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탄과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이기에 십자가를 통한 신앙은 담대함과 용기를 가져다준다.
나는?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인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묵묵히 순종의 길을 걸어오셨다. 아버지의 때를 이루면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면서, 아버지의 손을 의지하면서 사셨고 또 죽으셨다. 인자이신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며, 우리가 평생 따라가야 할 길이다.
-죽은 예수님을 의인으로 인정하는 로마 군대 백부장의 모습이 인상 깊다. 유대 백성과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매도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이방인 백부장은 그를 의인으로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원수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에, 십자가의 강도처럼, 하나님께 응답하신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빌라도가 공언한 세 번의 무죄 판결, 백부장의 고백, 의로운 요셉의 무덤에 장사 된 일은 예수님의 무죄를 증명하고 그분이 세상을 구원하고 다스릴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자이심을 보여준다. 이제 곧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그 아들의 이름 앞에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고 주로 시인하게 하실 것이다(빌 2:10, 11). 예수를 죽인 자의 입에서 십자가 위의 예수가 무죄라는 고백이 나오게 하신 것은 이미 그 승리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던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여 준비해 둔 자신의 무덤에 장사한다.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요셉에게 이 요구는 불온한 인물 예수와 같은 부류로 오해받을 수 있는 위험을 불사한 용기 있는 요구였다. 그가 예수님을 단죄한 공회에 참석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은 행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갈릴리에서부터 무덤까지 예수님을 한결같이 따르는 여인들의 모습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여인들은 시신에 부을 향품과 향유를 준비한다. 말로만 호언장담하며 높은 자리만 탐내던 남자 제자들은 온데간데없었지만, 주목받지 않았던 이 여인들은 끝까지 주님 곁을 지킨다. 말없이 주를 따르며, 주목받지 못해도 변함없이 주를 섬기는 사람, 그가 참 제자가 아니겠나!
-죽음은 절망을 몰고 온다. 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절망감을 쉬이 감출 수 없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슬픔, 남겨진 이들의 휑한 마음…. 죽음은 늘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온다. 하지만 주님의 죽음은 사뭇 달랐다. 절망이라는 감정은 여전했지만, 그 절망 속에서 새로운 믿음의 싹이 텄다. 감춰져 있던 믿음이 드러났다.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위한 일을 멈추지 않는 성실함도 드러났다.
-죽음의 현장에 제자들은 없었다.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여인들, 예수를 아는 자들이 멀찍이 서서 지켜볼 따름이었다. 이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바라보며 자신들에게 닥쳐올 고난을 직감하고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을 뿐이었다. 주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용기 없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제자들처럼 주님을 열렬히 따랐다가, 어느 순간 홀연히 종적을 감추는 것이 나의 모습이 아니겠나!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똑바로 쳐다도 보지 못하는 이가 곧 내가 아닌가! 위기가 닥쳐오니 주님에게서 다 도망치고 그 곁을 떠나는 것이 곧 나의 모습이지 않은가!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들을 드러내셨다. 주님의 십자가형을 집행한 로마 군대의 백부장, 주님의 십자가형을 결정하고 빌라도가 선고하도록 부추긴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 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보게 하신다. 자신이 직접 못 박은 죄인을 향해 진정 “의인”이었다고 고백한 백부장, 산헤드린 공회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않고 그저 숨어 있다, 주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한 요셉…. 주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으나 이제 막 주님을 인정하고 따르기 시작한 백부장, 숨겨 왔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따르는 이임을 드러내어 자기 삶의 입지가 흔들릴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요셉….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오늘도 세워져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주님을 믿고 있는 자리에서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여인들처럼 내가 주님을 위해 감당해야 할 것을 묵묵히 감당하며 살아내기를 결심해 본다. “다 이루었다”라고 십자가에서 외치신 후 운명하신 예수님처럼 나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할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함으로 살아내기를 결심해 본다.
-비록 절망 속에서라도 주님을 위한 것을 머뭇거리지 않기를 결심해 본다. 그래야 다시 오실 주님의 영광을 가장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제대로 치르지 못한 장례 절차를 보완하기 위해 달려간 무덤 앞에서 가장 먼저 부활하신 주님의 소식을 들은 것처럼, 가장 큰 기쁨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절망이 쏟아지는 현장에서 주님을 향한 고백과 행동을 멈추지 않아야지…. 나의 용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되어진 일을 보고”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해야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노라고 말한 스피노자의 말처럼 내가 원하지 않던 절망이 실제가 되어 현실을 덮을 때라도 나의 믿음 굳게 드러내며 주님 향해 고백하고, 주님을 위한 맡겨진 사역 성실하게 감당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리라.
*이렇게 절망의 바다와 같은 세상에서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는 희망의 항해를 오늘도 이어가리라. 절망의 바다에서 희망의 항해를 이어가리라!
*주님, 주님의 죽음의 순간에 주님의 주님 되심이 드러나기 시작했음을 봅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 나라라는 희망임을 봅니다. 희망되신 주님을 꼭 붙잡고 나아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