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129-144 위대하고 놀라운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위대하고 놀랍다. 그 말씀 안에 의와 성실함과 진리가 들어 있으며, 말씀 자체가 의롭고 변함없으며 참되다.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깨달음과 지혜를 준다.
시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다시 찬양하고 율법을 순종하겠다고 약속한다(129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해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지혜와 지침을 얻는다. 우둔한(또는 미성숙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철을 얻는다. 시인은 스스로 배우고 이해하려는 강력한 소망, 즉 인도가 필요하다는 것에서 나오는 소망을 표현한다(131절). 시인은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며, 자신을 압제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자신에게 분명히 해(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민 6:22–27의 제사장적 기도에 대한 분명한 암시) 달라고 하나님에게 간구한다. 시인은 주위를 둘러보고 율법을 무시하는 자들을 관찰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132–135절).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의로운 성품을 반영한다. 시편 기자는 위중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공표한다. 시편 기자는 율법을 고수함으로 말미암아 성공과 부보다는 어려움을 당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보상 때문이 아니라 율법이 참되어서 율법에 참여한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더 깊은 이해를 간구한다(137~144절).
1. 페(열일곱 번째 알파벳) _ 놀라운 하나님 말씀의 은혜와 가르침을 간구하다(129~136절)
129~131절은 하나님의 증거들이 놀랍다고 소개한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건과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었고,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이 수없이 기술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면 거기서 빛이 나와 지혜가 없는 자들에게 깨달음과 분별력을 준다. 시인은 직접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지식과 깨달음을 주는 것을 경험했다. 이에 따라 말씀을 주의 깊게 읽고 묵상하며 그대로 순종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시인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너무 사모한 나머지 입을 벌려 헐떡였다. 마치 시편 42편에서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정신없이 헤매는 모습과 같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132~134절에서 시인은 이토록 말씀을 사랑하지만, 현재 핍박을 받고 있으므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기 전에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임을 밝힌다. 하나님의 이름은 이름마다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함축한다.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에 나타난 다양하고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에게 얼굴을 향하여 주목하여 구원의 은혜 베푸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은혜가 종국적으로 나타나서 자신이 말씀의 반석 위에 서기를 고대한다. 굳건한 말씀의 바탕 위에 견고한 발걸음으로 인생길을 걷고, 그 여정을 갈 때 어떤 죄도 자신에게 영향력을 끼치지 못할 것을 기대한다. 특히 박해자들이 그를 핍박하고 있으므로 그들에게서 구해달라고 재차 간구한다(134절, 121~122절).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면 그때에도 시인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법도를 지킬 것을 약속드린다.
135~136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한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자신에게 비춰주시고 말씀 가르쳐주시기를 간구한다. 하나님의 얼굴이나 얼굴의 빛을 누군가에게 비추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과 호의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이 표현은 민수기 6장의 제사장에게 가르치신 축복기도를 통해 이미 알려주셨다. 시인은 이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율례를 배우는 것을 통해 더 구체화하기를 바랐다.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는 기쁨이 동행한다. 그 말씀을 배우고 지키면서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24, 77, 92, 143, 174절). 이를 통해 핍박을 받는 중에도 말씀에 대한 열정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보니 눈에서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러나온다(136절, 내 눈이 시냇물을 흘리나이다). 그들을 향한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낸다.
2. 짜데(열여덟 번째 알파벳) _ 의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음(137~144절).
137~138절은 하나님이 의로우시므로 그의 말씀도 의롭다고 고백한다.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137절)”의 “판단”은 하나님의 판단력이나 재판의 선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7, 13, 20, 30, 39, 52, 75절). 의롭고 옳다는 표현은 하나님 말씀의 정의로움, 공평함, 정직함, 완벽함 등을 강조한다. 여기에 하나님과 말씀의 의로움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성실하시므로, 그의 말씀도 성실하다고 선포한다(138절). “성실함”은 말씀의 변치 않음, 믿음직스러움, 신실함 등을 강조한다.
139~141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누군가에게는 잊힌 말씀이고 누군가에게는 잊히지 않는 말씀임을 강조한다. 시인의 대적들은 의롭고 성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렸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와 성실도 함께 잊었다. “잊었다”라는 의미는 기억을 못 했다는 뜻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찮게 여기고 무시했으며, 그 말씀을 어겼다는 뜻이다. 시인은 이를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라고 표현한다. “열정”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왕하 10:16), 어떤 일을 이룰 때의 열심(왕하 19:31), 남에 대한 질투(전 4:4), 남을 질투하여 괴롭힘(사 11:13) 등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삼켰다”라는 의미는 “침묵하게 한다.”, “소멸시키다”의 뜻이다. 시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이 있으므로, 대적들이 말씀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할 말을 잃었다.” 또는 “힘이 빠졌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인의 원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여 잊었지만, 시인은 하나님 말씀의 진가를 알므로 잊을 수 없다. 하나님 말씀은 지극히 순수하다(140절). “순수하다”라는 말은 “정련되다”라는 뜻이므로, 하나님 말씀이 광석을 용광로에 넣어 불순물을 다 녹인 후 얻게 된 순금 같은 순도가 있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의 순수성과 거룩성, 그 가치를 알기에 시인 앞에서는 적어도 수천, 수만의 금은보다 하나님의 율법이 나으며(72절), 금이나 순금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랑한다고 고백했다(127절; 시 19:10).
142~144절에서는 진리와 의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직전인 137~238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과 말씀의 의로움과 성실함을 찬양했다. 그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공의를 찬양하면서 그 의의 영원성을 부각시킨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수반되는 의는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실행된다. 그렇기에 시인은 그 의가 자기에게도 실현될 것을 기대한다. 하나님한테서 오는 공의와 진실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영되어 말씀을 사랑하여 잊지 않는 시인에게 의와 정직과 신실함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환난과 우환이 시인에게 닥쳤으나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기쁨을 찾는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의와 성실과 진실함이 녹아 있는 하나님 말씀을 계속 배워 깨닫기를 원한다.
나는?
-시인에게 말씀은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산 인격이다. 그러니 그 말씀에 놀라고 충격을 받고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느낀다. 말씀의 문이 열릴 때 빛이 새어 나와 어리석은 이들의 마음을 밝혀 주었다. 세상의 지혜와 명철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안목을 주었다. 말씀의 경이로움을 겪어보지 않고서 말씀을 경외할 수 없다. 세상을 이길 수도 고난을 인내할 수도 있다.
-하나님 말씀은 시인에게 당장 마시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간절한 한 모금의 물이다. 말씀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법이 지켜지지 않고 멸시받는 현실을 보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린다. 말씀을 잊은 대적들을 보면서 분노(열정)에 스스로 지쳤다.
-시인은 미지근한 사람이 아니다. 치열하고 정열적이다. 악을 미워하는데도, 선을 사랑하는 데도, 순종하는 데도, 불의에 분노하는 데도 시인은 확실했다. 말씀은 사색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대상이요, 생명의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하나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었고, 사모하는 말씀이었다.
-하나님이 권능이니 그분의 말씀에도 권능이 있다. 시인은 그 권능을 입증해달라고 간구한다. 말씀을 저버린 악인의 박해에서 구원하시고 말씀 위에 세워서 악인이 시인을 주관하지 못하도록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요청한다. 남은 일생 주의 말씀을 지키며 살겠으니, 이제는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신에게 돌아와 자비의 빛을 비춰달라고 호소한다.
-시인에게 말씀은 의롭다. 그것은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악인의 행사를 가만 놔둘 리 없고 의로운 자신의 곤경에도 눈감으실 리 없다. 그 의로운 말씀대로 자신을 구원하시고 그 의로운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의의 길을 따라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대적들은 말씀을 잊었지만, 시인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며, 심히 순수하고, 진리요, 영원히 의로우시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배우고 깨닫고 즐거워하며 지킨다. 시인의 고백과 각오가 계속 반복된다. 모든 성도가 시인처럼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시인처럼 할 수 있을까? 시편 119편에서 자주 고백되는 표현중 “가르치소서”가 열한 번 사용됐다. 그중에 아홉 번이 간구로, 두 번이 가르치시며, 가르치셨다로 표현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시인을 그렇게 가르치셨다는 의미다.
*주께서 나에게 가르쳐주셔야 시인의 고백처럼 살아낼 수 있다. 주께서 말씀하시고, 주께서 가르치셔야한다. 본문에는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라는 고백이 있는데, 이 고백에서 “열다”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온다. 주님께서 그 말씀을 깨달아 알도록 사람의 눈과 귀와 영혼을 “열어”주셔야 그 말씀을 이해하고 믿고 사랑하며 지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또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자신이 입을 열었다는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말씀을 열어 주시면, 내기 입을 열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주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말씀에 대한 이토록 열렬하고 사모하는 모습이 도전이 된다. 내가 열정저으로 입을 여는 것은 결국 주님께서 말씀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 더온누리공동체와 나에게 이런 은혜와 열정이 있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말씀을 열어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풍성하면 좋겠다. 또한 그렇게 열어주신 말씀에 입을 열어 열정적으로(헐떡이며) 말씀을 깨닫고 즐거워하며 순종하면 좋겠다. 그 모습이 건강하고 살아있는 공동체 아닐까?
*이렇게 열어주신 말씀이 곧 삶의 어둠을 충분히 몰아내는 빛된 말씀이고, 감동과 열정을 샘솟게 하는 말씀이며, 그 안에 거할 때 하나님의 안전을 누리지 않겠는가! 살아내게하는 살아있는 말씀 아니겠는가! 그 열어주실 그 말씀을 간절히 기대하고 사모하게 하는 아침이다.
*주님, 위대하고 놀라운 말씀을 잊지 않고 붙잡겠습니다.
*주님, 살아있는 말씀을 사모하고, 권능의 말씀, 의로운 말씀을 붙잡겠습니다.
*주님, 제게 말씀을 열어주십시오. 입을 열어 열렬히 사모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