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2:19-3:6 사울의 후손과 아말렉 아각 후손의 해후 _ 왕의 목숨을 구한 모르드개, 자신의 야망에 모든 신하의 경외를 받기 원하는 하만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민 자들을 고발하여 왕의 목숨을 구한 모르드개의 공적은 궁중 실록에 기록된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아각 사람 하만에게 절하라는 법규를 어겨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포함한 모든 유대인까지 멸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1. 왕의 목숨을 구한 모르드개(19~23절)
에스더가 왕후에 오른 때인 아하수에로 왕위 7년(2:16)부터 왕위 12년(3:7) 사이, 12년쯤에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지내고 있었다. 19절을 통해 모르드개는 에스더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살필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더라”라는 표현은 그가 왕의 관료임을 드러내 준다. 어떤 직위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에스더는 왕후가 된 이래 그녀의 출신이 유대인임을 절대로 밝히지 말라는 모르드개의 말을 그대로 잘 지키고 있다(2:10, 20절).
21~23절을 통해 모르드개가 왕의 암살 시도를 알아내 왕의 목숨을 구하는 공을 세운 것을 보여준다. 내시 박단과 데레스는 왕의 문지방을 지키는 자들로서 왕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자들이었으나, 왕에게 원한을 품고 암살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들의 모의는 모르드개에 의해 발각된다. 모르드개는 이 사랑을 에스더에게 알렸고,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이 사실을 왕에게 고발한다. 이 사건은 암살 사건에 대한 신고 처리 방법에 따라 처리가 이루어진다. 철저한 조사 과정을 거쳐 신고 내용대로 그들의 모의가 사실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두 암살 시도자는 마땅한 형벌을 선고받아 처형되었다. “나무에 매다는 관습(23절)”은 교수형에 처했다는 것보다, 9:13에서 설명이 되듯이 이미 처형된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모욕을 주고 대중에게 정의와 경고의 본으로 삼은 것을 가리킨다. 음모자들은 처형되었고 이 일이 궁중 실록에 기록되었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드개는 이에 합당한 상을 받지 못했다.
2.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모르드개(3장 1~3절)
3장을 시작하면서 모르드개가 왕 암살 시도를 막은 후 일어난 일을 기술하면서 “하만”을 등장시킨다. 하만은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1절)”이다. 아각은 사울 왕 당시 아말렉 왕의 이름(삼상 15:8)이었다. 사무엘상 15장에서 사울은 전쟁 중에 아각을 살려두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왕권을 잃게 된다. 아각도 잠시 생명을 얻는 듯했지만 결국 사무엘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삼상 15:1~35).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아말렉은 적대 관계였지만(출 17:8~9; 신 25:17~19), 이 사건을 통해 사울과 아각 집안 사이의 원한 관계가 더 악화하였을 것이다. 모르드개가 사울의 자손임을(2:5) 이미 밝혔기에 묘한 긴장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역사적으로 긴 악연 관계를 지닌 사울 자손 모르드개와 아각 자손 하만 사이에 일어날 일이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하만은 왕의 신임을 받아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다. 승진에 대한 문장이 세 번 반복되었다. “높이다, 올리다(승진시키다), 두다”라는 동사가 각각 사용되었다. 또한 왕은 하만에게 꿇어 절하여 예를 갖추라는 명령을 모든 신하에게 내린다. 즉시로 왕궁 문에서 일하는 모든 신하가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절하기는커녕 무릎도 꿇지 않았다. 이런 모르드개의 행동은 단순히 하만에 대한 불복종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명백한 왕명에 대한 거부이자 법을 어긴 행위였다.
3:4~6에서 모르드개로부터 마땅한 경의를 받지 못한 하만은 모르드개뿐 아니라 그의 민족까지 진멸하려는 엄청난 죄를 꾸미게 된다. 이 지경에 이른 모르드개의 행위는 그가 법을 인지하지 못해서 실수했거나 일시적인 감정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었다. 모르드개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절하지 않았다. 그를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들이 날마다 하만에게 절하라고 권했지만, 소용없었다. 모르드개는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힘으로써,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이유가 민족 관계에서 비롯됨을 암시했다. 그러자 동료들은 더 이상 그에게 하만에게 절하라고 권하지 않고, 태도를 바꿔 이 모든 일을 하만에게 보고한다. 동료들의 의도는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4절)” 에 드러나듯 모르드개의 불행을 바라고 있었다.
한편, 동료들의 고발을 듣기 전까지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임으로써 그에게 가득 찬 분노를 풀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유대인임을 알게 되자, 하만은 이제 더 이상 그를 죽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6절). 이렇게 하여 모르드개에 대한 사적인 분노를 그가 속한 민족 공동체 전체에 분풀이하려고 마음을 먹는다. 하만의 이런 마음은 매우 불량하다. 사적인 분노를 유대민족 전체에게 분풀이하려는 지나친 이기심과 야비함, 잔인함, 오만함 등이 하만을 사로잡고 있다.
모르드개와 유대민족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모르드개가 반란 음모를 사전에 알고 에스더와 협력하여 왕을 구한다. 모반에 가담한 박단과 데레스는 나무에 달려 죽게 된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한다. 단지 궁중 일기에 그의 공적이 기록되는 데 그친다.
-이 사건은 훗날 모르드개가 에스더와 함께 유대인들을 구원하고 하만을 나무에 달아 처형할 사건(7:10)을 미리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기억해야 한다. 선한 일이 곧장 포상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지금 이 자리에서 충성해야 한다. 사람은 기억하지 못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낱낱이 아시며 다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사울의 후손 모르드개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왕이 가장 높은 자리에 세운 하만에게 절하지 않는다. 이것은 왕에 대한 불복의 표시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만용도 아니다. 하만이 아말렉 왕 아각의 후손이었고, 아말렉은 하나님이 진멸하도록 명한 이스라엘(유대인)의 원수 중의 원수(3:10; 8:1; 9:10, 24)였기 때문이다. 신앙적으로 보면 하만은 단지 가문, 민족의 원수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원수였다(출 17:8~16; 민 24:7; 신 25:17; 삼상 15장; 삼하 1장). 사무엘상 15장에서 사울과 아말렉의 아각 왕이 싸웠던 그 전투의 재현과 다름이 없었다.
-세상 속에서 살면서 세상의 질서와 구조를 존중해야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대한 충성보다 앞서서는 안 될 것이다. 나아갈 때와 머물 때, 당당히 고백할 때와 침묵할 때를 잘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와스디의 불복종이 국가 전체 아내들에게 그 영향을 끼쳤듯이, 모르드개의 불복종이 유대인 전체에게 큰 위험을 안겨다 주었다. 아하수에로 왕이 자기 개인 가정 문제를 국가 전체로 확대한 것처럼, 하만도 개인의 명예와 적개심을 민족적 감정의 문제로 몰아가고 있다. 진멸해야 할 민족의 후손이 오히려 이스라엘을 진멸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이를 어찌할까.
*모르드개의 충절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쓸데없는 고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아니다. 좀 더 부드러웠으면 어땠을까? 강한 것이 쉬이 부러지기 마련인데, 절하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보란 듯이 완강하게 인사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은 참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모르드개의 이 지극히 개인적인 돌출 행동이 가져온 파장을 통해, 실제로 조력하시는 하나님을 확인할 수 있겠다. 귀환을 포기하고 이방 땅에 남아 있을지라도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사랑에는 제한이 없다.
*모르드개의 충성은 왕이 알아보지 못했다. 반면 하만의 승승장구는 이런 모르드개와 묘한 비교가 된다. 하만은 어찌 됐든 왕의 눈에 띄어 높은 자리에 올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의 행적이 하만의 오만하기 짝이 없는 포고령으로 접촉점이 생긴다.
*보상이 없어도 절망하지 않아야 한다. 결국 삶의 긴 호흡 속에서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충분히 갚고도 남게 보상해주신다. 에스더서의 하나님은 모르드개 개인의 보상을 유대민족의 구원이라는 보상으로, 더 나아가 하만의 자리를 모르드개에게 돌리는 보상으로 보여주신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는 우리에게 “지금, 당장, 빨리”의 응답보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것을 신뢰하며 성실하게 삶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바른 삶이리라.
*성실함과 충성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기억되기 때문이다.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시간은 세상의 시간과 분명 다르다.
*하만의 적개심은 모르드개 한 사람에게 멈추지 않는다. 유대인 전체를 향한 적개심을 표출한다. 아하수에로 왕이 부부간의 문제를 국가적 정책으로 탈바꿈시킨 것처럼 하만도 개인에 대한 앙심을 민족 감정으로 확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미 진멸 당해야 했을 아말렉 족속의 후손이 이제 이스라엘 민족을 말살하려고 마음을 굳혔다.
*왜 권력은 악인들에게 그리 잘 주어질까? 악인들은 잘만 잡는 권력을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전문가가 되어있는 인물들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그것이 죄로 인해 어그러진 세상의 모습이다. 죄를 짓는데 능력이 튼 인물이 더 높고 강력한 구너세를 휘두른다. 하지만 그것이 결론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악을 관용하지 않는다.
*무릎을 꿇지 않는 모르드개는 신앙의 본질을 따라 그렇게 결정하고 우직하게 유지했음을 보게 된다. 불의한 권력에 대한 항거일수도 있고, 민족감정에 따른 것일 수도 있겠다. 하나님께서 직접 원수라고 칭하신 아말렉의 후손이니 신앙을 따라 그리했을 가능성도 크다. 에스더를 신앙으로 양육한 것을 보면 모르드개는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내려고 절치부심의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세상은 종종 불의한 권력 앞에 고개를 숙이라고 종용하지만, 진정한 경배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임을 말이 아닌 실천으로 옮기는 배짱은 아무나 가질 수 없다. 적어도 모르드개는 그런 배짱이 두둑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도 세상과 타협하라는 무수한 유혹의 소리들 가운데 살아간다. 때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성실함과 충성됨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취급받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때가 이르러 반드시 나타내신다.
*하만의 분노는 개인을 넘어 유대 민족 전체를 향해 확대되었다. 악은 늘 이렇다. 결코 적다한 선에서 멈추는 법이 없다. 늘 확대하고 깊게 들어온다. 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에서 민족 전체를 진멸하려는 마음으로 나아간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했던 2차 세계대전의 망상은 이미 고대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주님, 조상들의 악연이 이어져 갈등이 도드라집니다. 한편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선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를 느낍니다. 모르드개의 고집도 만만치 않으나 절대 권력자가 휘두르는 횡포를 막아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오늘 실망하기보다 내일에 대한 소망으로 성실하고 충성되게 저의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