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에스더의 기다림, 그 지혜와 차분함이 도전된다 [에스더 6:14-7:10]
 – 2025년 05월 19일
– 2025년 05월 19일 –
에스더 6:14-7:10 에스더의 기다림, 그 지혜와 차분함이 도전된다.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이 악인 하만에게 내린다. 에스더는 왕 앞에서 자기의 민족 유다인을 도륙하려는 원수가 바로 하만임을 밝히며, 유다인의 생명을 구하라고 탄원한다. 하만은 그가 모르드개를 죽여 매달려고 준비한 나무에 오히려 자기가 매달리게 된다.
    
    
    
1. 에스더의 두 번째 잔치와 소청(6:14~7:4)
14절~7장 1절에서 에스더의 두 번째 잔치가 시작된다. 하만의 친구들과 그 아내가 하만에게 닥칠 불길한 예감을 말하고 있을 때(6:13), 왕의 내시들이 도착하여 에스더의 두 번째 잔치에 하만을 서둘러 데려간다. 내시들의 손에 이끌려 궁에 와서 왕과 함께 잔치 자리를 향하는 내내 하만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불안하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에게 인정할 수 없는 일들이 하루 사이에 일어났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하만은 왕으로부터 나라의 최고 자리로 올랐고, 눈엣가시 같던 모르드개와 그의 민족을 그의 민족을 진멸할 허락을 왕으로부터 받아냈다(3:1~15). 친구들과 아내에게 자신의 성공에 대해 떵떵거리며 자랑할 때가 어제가 아니던가(5:10~14). 이제 모르드개만 처치하면 근심 걱정이 다 사라질 찰나였다(5:13).
    
그런데 왕후 에스더의 첫 잔치에 다녀온 후 자신을 둘러싼 일들이 하나둘씩 꼬이기 시작했다. 전날 밤(혹은 이날 새벽?) 하만은 왕에게 모르드개의 처형을 허락받으러 궁에 갔다가 뜻하지 않게 모르드개를 왕처럼 떠받들게 되고 그를 위해 광장에서 행진하다가 돌아왔다(6:4~11). 모르드개와 백성으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한 하만은 매우 비통해하며 집으로 돌아왔고, 집에서조차 측근들에게 자신의 몰락을 예감하는 소리를 들었다(6:13). 이제 왕후의 두 번째 잔치가 시작되는데, 과연 무슨 일이 하만을 기다리고 있을까?
    
7장 2절~4절까지는 두 번째 잔치 중 왕과 왕후의 대화다. 왕은 에스더의 요청이 무엇인지 묻고 어떤 것이든,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약속한다. 에스더의 소청과 요구는 “내 생명과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로 요약된다(3절). 이 요청은 사실상 “유다인의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3~4절은 “유다 민족”이라는 단어는 절대 등장하지 않는다. 에스더는 끝까지 자기가 어느 민족인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마치 모르드개의 유다인임을 절대로 밝히지 말라는(2:10, 20) 명령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에스더의 소청 내용의 표현에서 하만의 조서 내용에 대하여 변론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민족을 “팔렸음”을 두 번 언급하며 강조한다(4절). 이는 은 일만 달란트나 되는 거금을 국고에 달아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유다인을 매수했고, 왕의 허락을 유도했음을 암시한다(3:9). 그리고 하만이 왕의 서기관들을 시켜 쓰게 한 유다인 진멸 조서의 내용, 즉 “모든 유다인을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라(3:13)는 순서를 그대로 인용했다. 왕후의 입에서 이 내용이 인용되었을 때 하만의 심장은 얼어붙었을 것이다. 에스더는 하만이 오로지 “죽이려고” 유다인을 돈으로 샀음을 강조함으로써 하만의 야비함과 잔인함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에스더는 유다인을 죽이거나 노비로 삼는 것이 결국은 왕에게 막대한 손실임을 지적한다. 여러 민족이 섞여 사는 나라에서 한 민족을 제거하는 것은 나머지 민족에게 왕에 대한 일시적인 두려움을 갖게 할 수 있으나, 결국은 반감과 반역을 키우는 불씨가 될 것이다. 설령 유다 민족 전체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노비로 팔려 구매자의 손에 넘어간다면, 그들은 구 구매자의 소유가 되어 그를 주인으로 섬기게 될 것이고 왕은 그만큼의 백성을 잃게 된다. 게다가 왕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인 면에서도 유다 민족에게서 얻을 모든 기회와 이득을 잃게 되어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2. 밝혀진 원수, 하만의 최후(7:5~10)
7장 5절~7절에서 왕은 분노한다.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라는 왕의 물음에 에스더는 “대적과 원수는 하만”임을 밝힌다(5절). 에스더는 하만에 대하여 “악한 하만(6절)”이라고 칭하며 그가 악인임과 그가 꾸민 것이 모두 악행임을 지적한다.
    
조마조마했던 하만은 왕후 에스더가 자신을 지목하자 왕과 에스더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하만은 왕후 에스더가 유다인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자기가 진멸하려고 했던 민족이 왕후의 민족일 줄이야. 한편, 왕은 하만의 정체가 밝혀지자 진노한다. 왕은 잔치 자리에서 일어나 후원으로 나감으로써 자신의 분노를 표출한다. 그런데 하만은 그렇게 나가는 왕을 쫓아가 변명하거나 빌지 않고 일어나 에스더에게로 가서 목숨을 구걸했다(7절).
    
7장 8절~10절은 후원으로 나갔던 왕이 잔치 자리로 되돌아왔다. 복잡했던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고,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마침 왕이 돌아왔을 때 자기 앞에 펼쳐진 광경은 마치 하만이 에스더가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려 있는 모습이었다.
    
하만은 에스더에게 구걸하는 것이었지만, 왕의 눈에는 왕후를 강간하려는 시도로 비쳤다. 이런 오해는 왕의 진노를 부추기고, 하만의 죄목을 늘렸으며, 하만의 심판을 앞당겼다. 그리고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라는 왕의 말에 신하들은 하만의 얼굴을 덮었다. 이 잔치에 오기 전에 하만은 수치와 비참함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고(6:12), 잔치에 온 후에는 다른 신하들이 자기 얼굴을 가린다. “얼굴을 덮었다”라는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 불확실하다. 하지만 이어지는 하만의 처형 내용을 감안하면 “처형”을 뜻하는 표현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시 하르보나는 하만이 왕의 목숨을 구해준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하만의 집에 오십 규빗(23m)의 나무를 세웠다(5:14)는 것을 귀뜸한다. 하르보나는 모르드개를 “왕을 위해 유익하게 말한 자(9절)”라고 표현함으로써 그가 왕의 생명을 구한 유익한 자임을 다시 상기시킨다. 왕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모르드개를 하만이 죽이려고 한 계획을 비로소 알게 된다. 이에 왕은 하만이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준비한 그 나무에 하만을 대신 달라고 명령한다. 하만을 그렇게 처벌하니 왕의 노가 누그러진다(10절).
    
    
    
나는?
-모든 것을 주도하고 조종하던 권력자 하만이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내시에게 이끌려 왕후의 잔치에 불려 간다. “서둘러” 모르드개를 높이고(10절), “서둘러” 집으로 와서(12절), “서둘러” 잔치에 나아간 것은 그의 추락이 시작되었고,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교회든 세상이든 하나님 없는 삶과 사회의 권력 내리막길은 너무도 가파르다.
    
-왕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라는 세 번째 다짐과 함께 소청과 요구를 말하라고 재촉하자, 에스더는 자기 생명을 달라는 소청과, 자기 민족을 달라는 요구를 말한다. 그러면서 노비로 팔리는 정도라면 왕이 그 값을 받을 것이니 왕을 번거롭게 해드리지 않을 텐데, 민족이 은 일만 달란트에 팔려서 진멸하게 되었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에스더는 유다인들과 자신이 같은 민족으로 한 운명 공동체임을 밝힘으로써, 왕이 끔찍이도 사랑하는 왕후가 노예로 팔려 가 잔인하게 도륙당하는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에스더는 자신과 민족 전체의 목숨이 걸린 상황이었지만, 변덕스러운 왕 앞에서 치밀하게 준비하여 왕에게 비참한 사실을 전하고 있었다.
    
-하만은 뛰어난 정치인이었다. 왕의 가려운 곳을 잘 알았고, 뇌물을 적절히 쓸 줄도 알았고, 자신의 처지가 위태로워지자 조금 전까지 정적이었던 에스더에게 비굴하게 매달릴 줄도 아는 탁월한 처신 능력과 감각을 가진 자였다.
    
-하지만 악에 길들어진 능숙함이 자기 함정이 되고 만다.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자기 집 마당에 세운 장대가 하만 자신의 몫이 되고 만다. 왜곡된 정보로 유다 민족을 진멸하려고 했던 자가 누명을 쓰고 죽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국의 이인자 자리에도 만족 못 한 탐욕 때문에 그는 수산궁이 다 내려다보이는 오십 규빗이나 되는 “높은 곳”에서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추락하기 위해 올라가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주께서 높여 주실 때까지 낮은 곳을 향하는 인생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에스더의 기다림이 인상깊다. 그 지혜로움과 차분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두번째 잔치에서 비로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한마님은 이미 지난 밤에 왕의 마음에 유다인 모르드개를 확실하게 심어 놓으셨다. 에스더의 차분함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마지막에 방점을 찍은 것이었다.
 
*나에게 맡겨 주신 목양사명을 이리해야 하지 않겠나! 지혜로움과 차분함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작은 점을 찍는 역할이어야 하지 않을까? 조급하게 서둘러서 생채기를 유발하는 어리석음이 잦아들고 하나님과 씨름하며(삼일 금식하듯) 주님의 때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지혜로운 차분함이 내게도 더욱 장착 되어야 하겠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익숙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경험하며 성장하며 성숙하기를 기대한다. 그 과정에서 신뢰하며 인내하는 것을 좀 더 갈고 닦아야 하고 자연스러워져야 한다. 지금 내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과정을 바라볼줄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의 물꼬를 트시는 것을 보며 그때 비로소 살짝 발을 내딛는 지혜로움 말이다.
 
*그러기 위해 에스더가 모르드개와 유다 민족에게 함께 감당하자고 요청했던 금식 기도도 필요하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안목도 필요하다. 사역 자체에 함몰되는 것 보다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아야 한다. 에스더의 지혜로움과 차분함이 깊이 묵상되는 아침이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목회 여정이 이랬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여 이루어 주시고 늘 숟가락 하나 놓았을 뿐이다. 신비하게도 숟가락 하나 엊는 타이밍까지 하나님은 내게 맞춰 주셨다.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이르렀다.
 
*에스더와 모르드개와 같은 초조함과 염려와 두려움이 왜 없었겠나…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기다림이라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배웠다. 기다림의 시간을 인내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반드시 보게 하셨다. 그 일하심에 숟가락 하나 얹어 하나님의 잔치에 동참하는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감동스러웠다. 그렇게 1995년 교육전도사 사역을 시작으로 지금 여기까지 와있다. 그러니 내가 했다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주님, 자기 오만과 교만의 덫에 걸려 악을 행하다가 나무에 매달리는 저주의 죽음을 맞이한 하만의 모습이 분명한 신앙의 경고가 되도록 우리 각 마음을 일깨워 주십시오.
*주님, 늘 숟가락만 얹게 하셔서 여기까지 사역의 역사를 남겨주신 인도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일하심을 더욱 겸손하게 기다리며 지혜롭게 분별하여 주님의 일하심의 흐름을 거르스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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