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역전의 날 [에스더 9:1-19]
 – 2025년 05월 21일
– 2025년 05월 21일 –
에스더 9:1-19 역전의 날
    
유다인의 진멸의 때로 결정되었던 날에 유다인이 오히려 자기들을 진멸하려 한 자들을 처단하였다. 하나님의 섭리와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다인은 이날을 명절로 삼아 잔치를 베풀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즐거움을 나눴다.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대적을 진멸한 날은 아하수에로 왕 십이 년 열두째 달 십삼일, 양력으로 주전 473년 2/3월에 해당한다. 이 사건은 유다인을 진멸하라는 척 조서 내용(첫째 달 십삼 일, 3:12) 을 뒤엎고 유다인의 생명을 보호하고 원수를 진멸하라는 내용의 둘째 조서가 반포된(셋째 달 이십삼 일, 8:9) 지 약 9개월 후에 일어났다.
    
    
    
1. 백성의 두려움이 된 유다인(1~4절)
아하수에로 왕 십이 년 열두째 달 십삼 일(주전 473년 2/3월), 드디어 유다인 신원의 날이 되었다. 이날은 원래 하만의 조서가 실행되는 날이었다. 하만은 이미 처형당했으나 그가 첫째 달 십삼 일에 내린 조서(3:12~13)는 아직 유효하다. 그러므로 하만과 같은 유다인의 대적들은 각 지역의 유다인을 제압하길 원했다. 그러나 모르드개의 조서가 셋째 달 이십삼 일에 새로 전파되어(8:9~13), 이제는 유다인의 대적, 즉 유다인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압하는 날이 되었다. 이날에 유다인은 온 백성으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유다인은 조서에 적힌 지시(8:11)에 따라 각 지방과 가 지역에서 함께 모였다(2절). 모였다는 말은 자기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방어할 준비가 되었음과 그들의 대적을 죽일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8:11). 여기서 대적은 “자기들을 해치고자 한 자(유다인의 재앙(해)을 찾는 자들, 2절)”로 표현되어, 그들이 하만처럼 유다인 진멸하기를 원하는 자들임을 암시한다. 이런 대적들에 맞서려 하는 유다인 앞에 누구도 감히 설 수 없었다. 저자는 그 이유를 “모든 민족이 그들을 두려워하여(2절)”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모르드개의 조서가 온 나라에 반포되었을 때 나타난 현상이었다(8:17).
    
죽을 운명에 처한 유다인에게 극적 반전 상황이 생긴 것을 페르시아에 거주하는 많은 민족이 목격했다. 이에 따라 극심한 두려움이 온 백성에게 임했다. 이는 단순히 유다 민족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유다인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였다. 이 두려움 때문에 다수의 백성이 유다인 되기를 자청했고(8:17), 본문은 이 두려움이 온 백성의 기선을 제압했다. 한편, 백성에게는 유다 민족에 대한 공포가 내렸다면, 나라의 관료나 총독 등 지도층에 있는 자들에게는 모르드개 한 사람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르드개의 편에 서서 유다인을 지지했다. 이런 행동은 자신들의 생명과 지위나 권세를 잃지 않으려는 방편이었을 것이다.
    
모르드개는 이제 왕궁에서 막강한 자가 되었다. 그의 명성이 온 지방에 퍼졌고, 그는 점점 더 막강해졌다.
    
    
    
2. 유다인의 대적 진멸(5~10절)
유다인은 그들을 미워하는 모든 대적을 칼로 쳐서 진멸했다. 여기서 그들이 마음대로 행했다(5절)는 말은 유다인이 과도하게 또는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였다는 의미라기보다는 2~3절의 설명처럼 그들이 각 지방 권위자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심각한 통제나 방해를 받지 않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들은 도성 수산에서 오백 명을 진멸했고 하만의 열 아들도 다 처단했다. 하만은 모르드개와 모든 유다인을 죽이기 위해 제비를 뽑아 날을 정했지만(3:7), 아이러니하게도 하만은 그날이 돌아오기 전에 이미 죽임을 당했다(7:10). 그리고 유다인 진멸의 날에 하만의 아들들과 그의 무리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10절).
    
하만을 “유대인의 대적(10절, 3:10; 8:1; 9:24)”이라 지칭한 것은 하만이 이 모든 일의 원흉임을 확증한다. 또한 하지만 아들들의 처형에 대한 당위성을 보여준다. 7~9절에서 하만의 열 아들의 이름을 열거한 것은 하만과 연결된 자들을 확실히 제거했으며, 이에 따라 혈통을 통한 보복의 가능성이 끊겼음을 암시한다. 특이한 것은 유다인이 대적의 소유에 손을 대지 않았다. 하만의 조서나 모르드개의 조서에는 각각 유다인이나 대적의 재산 탈취에 대한 허락이 있었다. 하지만 유다인은 이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이러한 행동은 15~16절에도 반복되었다.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정확한 근거가 부족하나, 아브라함도 전쟁 후 전리품을 챙기지 않았으므로(창 14:23) 유다인이 이 관습을 좇은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가나안 정복 전쟁 이후의 예로 들면 신빙성이 부족하다. 또는 과거 아말렉 인의 노략물을 탈취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울의 죄(삼상 15:9, 23)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볼 수도 있다.
    
    
    
3. 에스더의 또 다른 요구(11~14절)
열두째 달 십삼 일에 왕은 도성 수산에서 죽임을 당한 숫자를 보고 받았다. 이 보고는 6~10절에 언급된 기록이 모두 정확한 사실임을 재확증해 준다. 그다음 “나머지 지방에서는 유다인이 무엇을 했겠느냐?”라는 왕의 질문(12절)은 그곳에서도 수산에서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을 예상하게 하는 발언이다. 이런 발언을 통해 에스더에게 모든 일이 모르드개의 조서대로 실행되고 있음을 재차 확인시켜 준다. 또한 이 질문은 다른 지방의 진멸 소식이 아직 왕에게 보고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왕은 계속해서 에스더에게 은혜를 베푼다. 에스더에게 아직도 더 남은 요구가 있는지를 또 묻고, 역시 그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왕이 에스더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이번이 무려 네 번째다(5:3, 6; 7:2; 9:12). 이는 단지 오아후에 대한 아하수에로 왕의 사랑만이 아니라 왕후 에스더가 왕의 눈에 은혜를 얻었음(2:17; 5:2)을 재차 보여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왕의 시선과 마음을 움직여 왕후 에스더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불어넣으셨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인자하신 보호하심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역사하고 계신다.
    
왕의 물음에 에스더는 마지막 요청으로 두 가지를 구한다. 첫째, 다음 날인 십사 일에도 수산에 사는 유다인이 모르드개의 조서대로 대적을 도륙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다. 둘째, 하만의 열 아들의 시신을 나무에 매달게 해달라는 요청이다. 왕은 에스더의 요청을 허락하고 수산에 조서를 반포한다. 이로써 하만과 마찬가지로(7:10) 그의 열 아들의 시신도 나무에 매달린다. 이로써 아각인(아말렉 족속)의 확실한 패배와 진멸이 성경의 기록대로 이루어진다. 또한 수산 성의 모든 백성과 유다인에게 아각 사람의 확실한 패배를 각인시킨다.
    
    
     
4. 대적 심판과 유다인의 신원의 날, 잔칫날(15~19절)
에스더의 요청으로 수산 성에는 유다인의 대적을 죽을 수 있는 기회가 하루 더 생겼다. 결과적으로 모르드개가 반포한 조서의 실행 과정은 도성 수산에서, 그리고 나머지 지방에서 약간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수산 성은 열두째 달 십삼 일과 십사 일에 도륙이 있었고, 십오 일에는 안식하며 잔치를 열고 즐거움의 날로 삼았다. 특히 십사 일에 수산의 유다인이 모여 삼백 명의 대적을 추가로 죽였다. 하지만 대적의 소유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수산 성을 제외한 나머지 지방에서는 십삼 일에만 도륙이 있었고 십사 일에는 안식하며 잔치를 베풀고 즐겼다. 각 지방의 유다인은 십삼 일에 함께 모여, 자기들의 생명을 위해 일어서서(16절,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자신들을 방어하면서 칠만 오천 명의 대적을 도륙하였다. 이 모든 과정은 8:11의 지시가 그대로 실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들도 역시 수산 성의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대적의 소유에는 손대지 않았다. 유다인들은 모두 대적자들에게서 쉼을 얻은(벗어나며로 번역) 것을 경축하여, 십사 일을 잔칫날과 즐거움의 날로 삼았다.
    
이처럼 유다인 진멸이 예고되었던 날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대적 심판의 날이 되었으며, 유다인에게는 신원의 날, 잔칫날이 되었다.
    
    
    
나는?
-조서를 이행하는 날이 되자 유다인들과 대적자들이 충돌한다. 모르드개를 두려워하는 관원과 대신과 방백과 왕의 사무를 보는 자들의 도움으로 유다인은 모든 민족이 두려워하고 막을 수 없는 민족이 되었다. 하나님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매달린 모르드개에게 명성과 권력을 주심으로 유다인들이 그를 힘입어 대적으로부터 자신을 잘 지킬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애통한 심령으로 나아가 순복하는 것은 영적 전투의 시작이자, 끝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자기 백성을 높이신다.
    
-하만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열 아들들이 죽임을 당했다. 하만을 따르던 수산 궁의 오백 명도 조서에 기록된 대로 멸절한다. 특별히 아들들의 이름을 낱낱이 열거한 것은 이 사건이 단지 개인적인 복수의 차원이 아니라 아말렉의 진멸을 예고한 모세 예언의 성취임을 강조한다(민 24:20).
    
-한편, 에스더는 왕에게 하루를 더 얻는다. 유다인의 대적들을 완전하게 제거하고 열 아들들의 시체를 높이 달게 하신 것 역시, 얼핏 매우 당연하게 보이고 싶겠지만, 유다인을 해하는 자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보여줌으로써 잠재적인 위험까지 근절하고 아말렉에 대한 철저한 영적 싸움이 얼마나 철저해야 하고 얼마나 약속에 의지하여 순종해야 하는 싸움인지를 잘 보여준다.
    
-조서대로 하면 대적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탈취할 수 있었지만(8:11), 유다인들은 자발적으로 재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 싸움이 사무엘상 15장 싸움의 연장선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조상 사울은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전리품을 취함으로써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버림받았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유다인들은 전리품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이 전쟁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전쟁이 되게 하였다. 수산 성뿐 아니라 제국의 각 도에서도 대적자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전투에서 유다인들은 무려 칠만 오천 명을 쳐서 죽인다. 그리고서 사망의 날이 될 뻔했던 그날이 생명과 축제와 안식의 날이 되었다. 출애굽의 하나님이 다시 유월절의 구원을 맛보도록 하신다.
    
-사울은 전리품을 취하므로 버림을 받았으나, 유다인들은 전리품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이 전쟁이 철저히 하나님의 전쟁임을 알게 하셨다. 이런 모습을 바라본 페르시아 사람들은 유다인과 모르드개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유다인의 오기, 한풀이가 아니라 유다인의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이었다.
 
 
*유다인을 제거하려던 날, 대적들이 오히려 죽임을 당한다.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 일로 인해 세상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을 거절하는 악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오히려 하나님 백성답게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내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은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는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유다인이 자기들을 죽이려는 대적들을 맞서 죽이며 원수를 갚는다. 이 장면은 단순한 보복이나 복수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 족속에 대해 내리신 오래된 심판의 완전한 성취다(민 24:20; 삼상 15:2~3). 유다인은 그들의 원수를 쳤으나 재산은 약탈하지 않는다(10, 15, 16절). 개인적인 탐욕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공의에 입각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싸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의 싸움이다(엡 6:12). 교회는 세상 권력과 영합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교회에서부터 실현되는 것을 보여주며, 절제와 거룩함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선거 기간에 특정 후보를 지지한다는 등의 발언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공의가 실현되기를 구하며, 정의롭게 살아내는 것이 먼저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 되는 곳이어야 한다.
 
*절망과 탄식을 소망과 기쁨으로 바꿔주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가 부림절이다. 그런데 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바꾸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다. 그러므로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이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기뻐하고”, “잔치(축제)”와 “나눔”의 삶을 누린다. 그것이 바로 주일예배다. 목장모임이며, 구제와 섬김이다. 이 귀한 가치를 삶에서 기쁨으로 누려야 할 것이다.
    
    
    
*주님, 오래전의 약속이지만 잊지 않고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시는 것을 분명하게 바라봅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새 힘이 솟습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을 지금 이곳에서 기억하고 누리는 예배가 축제가 되게 해주십오. 주일마다 기쁨의 잔치가 벌어지는 교회되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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