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4:10-23 복음에 합당한 삶은 자신감이 아니라 자족함으로
바울은 마지막으로 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선물에 대해 감사의 말을 한다. 단지 선물을 받아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울을 생각하고 복음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이 생긴 것을 보고서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곧 빌립보 교회가 복음을 위해 올바르게 행동한 것으로 인하여 기뻐한 것이다. 바울 자신은 어떠한 처지에 있더라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문안과 축원으로 편지를 마친다.
1.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전달받은 선물에 대한 감사(10~20절)
바울이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 이유는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위해 생각하던 것이 다시 싹이 났기 때문이다. 곧 그동안은 마음은 있었으나 도울 기회를 차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자신을 돕게 된 것을 보고서 기뻐하였다. 바울은 자신에게 필요한 선교헌금이 채워진 것 때문에 기뻐한 것이 아니다. 성도들이 선교헌금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더 기뻐하고 있다. 성도들의 헌금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기 전에 헌금을 한 성도들에게 유익한 일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이기 때문이다.
11~12절을 통해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밝힌다. 자신이 궁핍하여 선물을 바랐기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고백한다. 형편이 좋아야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현재 처한 그 상황에서 만족하기를 배웠다고 한다. 이 자족은 당시 철학에서(스토아 철학) 높게 평가하는 가치의 의미인 신이 지워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든지 인간 속 욕망을 제거하는 절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자족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 만족”이었다. 원하는 마음을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충분히 만족하는 것이었다.
13절은 모든 역경을 이기고 성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많이 설교 되지만, 정작 바울이 말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당할 수 있는 의미다. 곧 옥에 갇혀 있더라도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의 번역은 “나를 능하게 하시는 자”가 더 정확하다. 내가 능력을 받아서 무엇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셔서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만족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족은 상황이 변해서 누리는 것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변화되어 누리는 덕목이다. 이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라는 권면처럼 주께서 이 모든 상황의 주인 되신다는 인식으로 모든 상황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복음 중심으로 해석할 때 가능하다. 즉, 철저한 자기 무능을 인정하는 겸손한 자기 부정에서 자족은 시작된다. 하지만, 이 구절을 대부분 주님의 힘을 빌려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식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근거 구절로 사용되는 안타까운 아이러니는 어떻게 할까….
14~16절은 바울을 돕는데 열심인 빌립보 교회를 설명한다. 그들은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물품들을 보내주었다. 바울은 이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 전하는 사업에 동참한 것임을 분명히 알려준다.
17~18절은 바울이 자신은 선물(선교헌금)을 받아서 좋아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그보다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서 선한 일에 힘씀으로 하나님 앞에 의의 열매가 풍성해진 것을 기뻐한 것이다. “풍성한 열매”로 번역한 것은 의역에 가깝다. 새번역은 “나는 여러분의 장부에 유익한 열매가 늘어가기를 바랍니다”로 번역했다. 바울은 투자한 자산이 늘어가듯, 이 땅에서 복음 전파에 동참한 것이 하늘의 이익 배당을 증가시킨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선행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다. 바울은 선교헌금은 자신이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라고 생각하였다.
19~20절은 바울의 필요를 채워준 빌립보 성도들에게 바울이 줄 수 있는 것은 기도의 선물임을 밝힌다. 바울이 기도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쓸 것을 하나님께서 공급해달라는 기도였다. 그들은 늘 필요한 것이 있을 만큼 넉넉한 교회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바울에게 선교헌금을 보내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어울리게 채우실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에 어울리게(영광 가운데) 채우실 것이다.
2. 문안 인사와 축도(21~23절)
“가이사의 집 사람들”은 로마 황제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종이거나 종에서 해방된 자유인들일 것이다. 어찌 됐든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서 바울과 함께하고 있다. 그들이 편지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문안한다. 이 문안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상당히 놀랍고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황제 직할 도시인 빌립보에서 예수를 믿은 그들은 황제의 도시 로마에서 예수를 믿고 문안 인사를 해온 그들의 존재에 매우 큰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황제가 아닌 주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살기로 결심한 또 다른 동지였기 때문이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빌립보 성도들의 모든 영 안에 가득하기를 원하는 축도로 편지를 마무리한다.
나는?
-바울은 보내준 헌금이나 그로 인한 궁핍의 해결보다 자신을 늘 염려하며 도울 기회를 찾고 이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성도들의 마음을 더 기뻐한다. 동시에 그들의 자발적인 섬김을 통해 자신을 세밀하게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주 안에서) 기쁨도 컸다. 헌금이 하나님과 바울,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을 연결하는 사랑과 은혜의 선물이 되었다. 또한 하나님께는 빌립보 성도들이 바친 향기로운 제물이요, 바울에게는 사랑의 징표였다. 물질로 표현된(담긴 사랑을 받으며 감격해하는 순수한 모습이 감동이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은 모든 것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모든 형편에서의 “자족함”이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데서 오는 자족함이요, 이 땅의 소유를 우상처럼 받들지 않고 상대화할 수 있는 자족함이다. 형편에 따라 울고 웃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든 그 삶의 조건 속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수용하고 감사할 수 있는 자족함이다. 주 안에서 자족하는 삶이 탐욕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더욱 요청되는 “복음에 합당한 삶”이 아닐까?
-만족을 이루는 길이 있을까? 그 길은 단 하나다. “주 안에서”이다.
-주의 은혜는 기쁨과 감사의 이유와 원천이고, 어떤 형편에서든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이며,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상 속에서도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다. 그 은혜가 우리 심령에 임하고 또 머물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랑은 넉넉히 쓰고 남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가장 먼저 드리고, 가장 좋은 것을 드리며, 내 것을 희생하며 드리는 것이다. 나중에 쓰려고 모아두는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장 쓸 것이 없는 이들을 돕는 긍휼에 급한 마음이 아닐까?
*빌립보서는 “나의 하나님(1:3)”으로 시작하여 “나의 하나님(4:19)”으로 끝나는 서신이다. 바울의 “나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얼마나 굳건한지 감옥 안에서도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간직할 수 있었다. 나에게도 그리스도 안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늘 간구한다. 나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성실하게 내 삶을 채우도록 살아가리라.
*하나님이 주신 능력은 모든 일에 “자신감”을 갖는 것보다 모든 형편에서의 “자족함”이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는 데서 나오는 자족함, 소유를 우상처럼 받들지 않고 상대화할 수 있는 자족함, 형편에 따라 울고 웃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조건 속에서 두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수용하고 감사할 수 있는 자족함이다.
*하나님이 주신 자족함이 탐욕의 시대를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더욱 요청되는 “복음에 합당한 삶”일 것이다.
*주님, 나의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며 주어진 모든 삶 속에서 주 안에서 자족함을 누리겠습니다. 탐욕의 유혹에 반응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넉넉하지 않은 중에 기꺼이 드린 빌립보 성도들의 헌금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더온누리의 헌금도 이와 같은 줄 압니다. 더욱 감사함으로, 더욱 투명하게, 더욱 주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