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9:1-34 보이는 자리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성실하게 순종하여
9장은 1~8장까지 나온 목록들을 정리하고 포로에서 돌아온 공동체의 명단으로 넘어간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에 살았던 레위인들과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의 명단이 언급된다. 특히 제사장과 성전에서 봉사했던 레위인의 명단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본문의 족보는 느헤미야 11장의 명단과 연결된다.
1.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1~9절)
1절 상반절은 1~8장까지 족보의 결론으로 모든 목록들이 모두 이스라엘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다. 현재 이 책의 존재는 알 수 없다. 다만 역대하 27:7과 35:27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라고 밝히고 있으므로 이런 책들이 역대기 족보 자료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절 하반절부터는 포로에서 돌아와 유다 땅, 특히 예루살렘에 거주한 가문의 목록이다. 먼저 포로로 잡혀간 것과 돌아온 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에스라는 열왕기 저자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망하여 포로로 끌려가게 된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는 신학적 해석을 하고 있다. 3~34절은 이들 중에서 특히 예루살렘에 거주한 명단이며, 느 11:3에서는 이들을 ‘지도자’라고 부르고 있다.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예루살렘에 거주한다는 것은 자신이 원래 받은 기업과 거기서 나오는 소득을 포기한다는 의미다. 당시 예루살렘은 거의 폐허 상태에서 간신히 복원된 성읍인데, 이들이 황폐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은 예루살렘성과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느헤미야 11:2에서 백성들은 이들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며 특별히 복을 빌어 주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건설하고 회복하는데, 헌신된 사람들이었다. 3절은 특이하게도 유다와 베냐민 자손뿐 아니라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에브라임과 므난세 자손도 언급한다. 이는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가 남유다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까지 포함한 온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자손은 베레스 가문의 우대와 셀라(실로) 가문의 이사야와 그의 아들들, 세라 가문의 여우엘과 형제 690명이다. 셀라는 유다의 막내 아들이고 세라는 베레스의 쌍둥이 형제다. 이는 유다 가문의 형제 이름이 다 언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느헤미야 11:6에서는 베레스 가문만 언급하면서 468명이 머물렀다고 한다. 베냐민 자손 중에서는 핫수누아 가문의 살루와 여로함 가문의 이브느야와 미그리 가문의 엘라와 이브니야 가문의 무술람과 그의 형제들로 956명이 예루살렘에 머문다. 이 숫자는 느헤미야 11:8의 928명과 비슷하다.
2. 제사장들(10~16절)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한 제사장의 명단은 10절에서 제사장인 여다야와 여호야립과 야긴이 언급되고 11절에서 대제사장인 아사랴가 언급되면서, 다시 12절에서 제사장인 아다야와 마아새가 언급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인물은 포로에서 돌아온 공동체의 대제사장인 아사랴로 그는 아히둡의 오대손으로 소개된다. 예루살렘에 거주한 제사장 가문의 숫자는 1,760명이다. 제사장 가문의 사람이 다른 지파 사람들보다 많은 것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가장 큰 목적이 성전을 유지하고 봉사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14~16절은 제사장 가문 외에 레위인들 명단으로, 므라리 가문의 스마야와 아삽 가문의 박갈과 헤르스와 갈랄과 맛다냐이고 여두둔 가문의 오바댜와 엘가나 가문의 베레갸이다. 느헤미야 11:17에 따르면 아삽 가문과 여두둔 가문의 사람들은 기도할 때 감사의 찬양을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3. 문지기들(17~27절)
이 단락은 문지기들의 명단으로 9장에서 가장 긴 명단이다. 문지기는 성전의 거룩성을 유지하고 성전의 치안을 담당하는 등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역대기 저자는 살룸과 악굽과 달몬과 아히만과 그의 형제들이 문지기라는 것을 소개한다. 이들이 이전에 왕의 문 동쪽 곧 레위 자손 진영의 문지기였다고도 밝힌다. 이들의 선조는 포로기 이전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의 문지기였고, 심지어 광야 시대에도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의 지휘 아래 문지기로서 성막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현재의 문지기를 맡은 사람들은 그들의 후손들이다. 여기서 다른 직분에 비해 문지기 가문의 충성심과 성실함을 강조하는 것은 성전의 거룩성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에는 큰 책임감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23~27절은 문지기들의 임무를 나열했다. 문지기들의 핵심적인 역할은 성전이나 성막의 문을 지키는 것이다(23절). 그들은 성전의 동서남북 모든 방향의 문을 지켰다(24절). 문지기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내에 거주한 것이 아니라 근방에 있는 자신의 거주지에 있다가 순번이 오면 예루살렘으로 가서 일주일 동안 임무를 수행하고 다시 자신의 거주지로 돌아왔다. 문지기 중 특별히 신실한 네 명의 우두머리는 제물과 보물을 쌓아두는 곳간을 지키게 하였다. 문지기의 마지막 역할은 성문을 열고 닫는 것처럼 아침에 성전 문을 열고 밤에는 성전 문을 닫는 일을 하였다.
이렇게 문지기의 역할을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첫째, 현재 지어진 성전에서도 예전처럼 문지기들이 자신의 역할을 질서 있고 엄격하게 잘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둘째, 수비가 취약한 현재의 예루살렘 상황에서도 성전에 대한 경비는 엄격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에스라는 다른 무엇보다 성전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였는데, 여호와의 성전과 여호와께 대한 신앙이 돌아온 귀환 공동체의 구심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앙으로 다시 이스라엘을 모으고 회복하기 위해 사라진 왕정 대신 성전을 구심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4. 성전 봉사자들(30~34절)
이 단락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들을 자세히 기록한다. 이들이 담당하는 일은 성전 기구 관리, 향품과 제물 관리, 향품과 향기름 제조, 전병 굽기, 떡 진설 등이며 이 일들에 모두 담당이 정해져 있다. 특히 전병은 고라 자손 살룸의 아들 맛디댜가 담당하고 그핫 자손이 안식일마다 진설할 전병을 맡았다. 33절은 찬송하는 사람에 대해 말하며 이들이 레위 가문의 지도자로서 골방에서 주야로 이 일에 매진하였다고 기록한다.
문지기와 성전 봉사자들의 역할과 그들이 직무에 충실했다고 말하는 것은 포로에서 돌아온 예루살렘 공동체가 다시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이방신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귀환 공동체는 온전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헌신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해주시기를 기대한 것이다.
나는?
-포로에서 돌아온 명단과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이들과 성전 문지기와 봉사자들로 섬기는 이들의 목록은 귀환한 이스라엘이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바라보게 한다. “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우상숭배의 허망함(왕하 17:15, 20)에 빠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징계와 징벌을 받았다. 성전 예배와 기도, 절기 준수 등 외적인 종교 행위에서는 남다른 열심을 보였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의 거짓된 실상과 허위를 감추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들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했고, 위선적인 죄와 이중적인 삶을 떠나지도 않았다(사 1:13~17; 렘 7:2~7).
-그래서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고 또 절실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진실한 예배, 거룩한 삶”의 회복이었다. 역대기 족보에서 성전 예배를 책임지는 레위 지파에 대한 큰 비중을 두는 것은 이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페르시아의 안정적으로 정착된 생활을 떠나 폐허가 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기 위해 하나님의 감동하심(뜻)에 반응했다(스 1:5). 무엇보다 이 일에 지도자들(9절)이 먼저 본을 보였다. 내가 원치 않아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가야 할 곳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다.
-진정 복된 길은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형통하고 복된 길이다.
-성막 문지기의 직무는 출애굽과 광야 시절(19, 20절)에 시작되어 사무엘과 다윗 시대에 와서 재정비된다. 그들은 “대를 이어”, “질서를 따라”, “밤낮으로” 그 직무에 충실했다. 방심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았고, 나태하지도 않았다. 성전(공동체)의 거룩함을 위해 밤낮으로 성전 문들을 지키는 문지기들이 있는가 하면, 또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거룩한 소통을 위해 골방에서 밤낮으로 자기 직분에 전념하는 이들도 있었다. 눈에 보이는 곳이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나 동일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자키를 충성스럽게 지켰다.
-이들은 남의 일과 비교하지 않았고, 모든 일을 혼자 하려고 과욕을 부리지도 않았으며, 오직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먼저 충실했고 끝까지 충성했다.
*오늘날 교회공동체가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하나님나라와 같은 공동체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건물을 크고 높게 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사명감일 높게 드는 것이다. 문지기에서부터 찬송하는 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아” 세움받은 그 자리를 꿋꿋하게 감당하며 나갈 때 교회는 교회답게 될 것이다.
*보이지 않고, 평소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자리, 눈에 띄지 않는 자리, 예배답게 드려지기 위해 먼저 힘써 나와 준비해야 하는 자리, 끝난 후에도 책임을 지고 사용된 집기들을 관리하는 자리, 사전 준비물을 늘 준비해주어야 하는 자리… 이런 자리들은 드러나지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자리들인데 사실 드러나지 않고 반드시 원활하게 돌아가야 할 자리가 흔들리면 교회는 교회답지 못하게 된다.
*특히나 이런 자리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그 뜻에 순종하는 사명의 믿음이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자리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감당할 만한 은사(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은혜로운 마음으로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맡은 청지기 처럼 감당하라고 부탁하셨다(벧전 4:10).
*하나님 나라의 제자는 “감당하는 자”이다. 어떤 감당을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실지 알 수 없으나 감당된 그 사역을 주님의 마음으로 감당할 때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드러난다. 보잘 것 없다고 여겨지는 곳일수록 주님이 감당하기 원하신다면 꿋꿋이 감당하기를 원한다. 무엇을 하든 그것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라면 소홀히 여김이 없어야 하리라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문지기라도?가 아니다! 문지기여도! 이다.
*오늘날의 성전은 내 자신이다. 내 마음이다. 내 마음안에 출입문에서부터 수많은 방들, 모든 생각들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합하여 나의 가치, 나의 시선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모두 내어 드려야 한다. 나를 지키기 위한 마음의 성전이 아니라 나를 지키시는 마음의 성전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도 성령님께 충성해야지… 성령님께서 나를 지키시기 위한 모든 간섭과 보호와 성실하게 일하시는 시간에 나도 성령님께 충실해야지… 성령님께 충성하는 그것이 곧 성전을 성전 답게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인간이 지킨 성전은 결국 다시 무너졌다. 그것도 돌 위에 돌 하나 남김없이… 이제 성전을 성령님께서 지키신다. 나는 그 지키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집중하며 그저 순종하며 따를수밖에…그것이 나를 주님의 성전답게 지켜지는 것이리라….
*주님, 더온누리 공동체를 감당하라고 불러주신 부르심에 순종하여 문지기와 성전 봉사자들의 성실과 충성을 기억하며 목양의 자리에서 구현해 내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