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1:20-47 다윗의 용사들
본문은 다윗 왕조에서 다윗과 함께 한 용사들의 명단이다. 첫 세 용사 명단에는 들지 못하였지만, 뛰어난 용사였던 아비새와 브나야에 대한 에피소드와 용사 마흔일곱 명의 이름이 그들의 출신지 혹은 가족 관계와 함께 소개되고 있다. 참고로 역대하 11:26~41a는 사무엘하 23:24~39과 동일하지만, 41b~47절에 나온 열여섯 명은 역대기에서만 나오는 이름들이다.
다윗의 용사 조직은 이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정확히 알기 어렵다. 사무엘하 23장과 본문을 따라 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맨 위에 세 명으로 구성된 최고 사령관 집단이 있고 이 중의 한 명이 우두머리로 총사령관이 된다. 그 밑에 다시 세 명의 사령관 집단이 있는데, 아비새가 여기에 속하며 이들의 우두머리다. 그 밑에 30명의 용사 집단이 있고, 그 밑으로 또 다른 용사 집단이 있었다. 이 서열은 대체로 그 사람의 전투력과 공로에 의해 정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1. 아비새와 브나야의 업적(20~25절)
아비새에 대한 것은 사무엘하 23:18~19과 거의 동일하다. 아비새는 요압의 아우로 소개되고, 사무엘하 23:18에서는 좀 더 정확하게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로 소개된다. 역대상 2:16도 이미 요압과 아비새와 이사헬이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로 언급되었다. 그는 형 요압과 더불어 다윗이 도망 다니던 초기 시절부터 다윗과 함께했다. 그는 다윗이 사울이 잠든 사이에 물병을 가져올 때 동행하면서 처음 등장하여(삼상 26장), 다윗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한 다윗의 마지막 전투(삼하 21장)까지 함께한 충성스러운 인물이다. 아비새는 다윗의 용사 중에서 두 번째 세 명의 용사 집단이 아닌 두 번째 세 명의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밝히는데, 그는 용사 중에서 네 번째 정도의 실력자일 것이다. 아비새가 이런 위치에 오게 된 것은 창으로 300명을 죽이는 업적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의 형 요압은 아비새처럼 처음부터 다윗과 함께하고 다윗 군대 사령관으로서 많은 업적을 쌓고 최고의 지위에 올랐지만, 다윗의 용사 명단에는 빠져 있는데, 그가 마지막 순간에 다윗이 선택한 솔로몬이 아닌 아도니야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22~25절에는 브나야가 소개된다. 그는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로 소개되는데, 갑스엘은 지역 이름으로 유다 지파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느헤미야 11:25에서는 여갑스엘로 불린다. 브나야는 다윗 시대에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으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했다(삼하 8:18; 20:23). 그는 아도니야의 반란 때도 솔로몬을 지지하며, 요압과 시므이와 아도니야를 죽여 솔로몬 시대에 군사령관이 되었다(왕상 2:35). 본문에서 언급된 브나야의 업적은 (모압에서 아주 유명한) 전사 둘을 죽인 것과 눈 오는 날 사자를 죽인 것이다. 브나야는 산이 미끄럽고 쉽게 움직이기 힘든 눈 오는 악천후에 사자 사냥을 나섰고, 사자를 몰아 구덩이에 빠뜨린 뒤에 직접 죽인다. 또한 매우 거대한 애굽의 전사를 죽였다(23절). 브나야가 죽인 애굽 전사는 키가 다섯 규빗(2m 30cm)이 넘고 그의 창은 베틀채 같이 굵었다. 이에 비해 브나야는 막대기만 가지고 상대했지만, 그의 창을 빼앗아 죽였다. 이 장면은 마치 거인 골리앗과 물매와 돌만 들고 싸우기 위해 나선 소년 다윗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이런 모습은 브나야가 다윗처럼 용감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브나야는 이런 업적을 통해 두 번째 세 용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런 브나야를 다윗은 사위로 삼는다. 한편 에스라가 브나야를 자세하게 다룬 것은 그가 용사들 중 가장 뛰어나거나 높은 지위에 있지 않았음에도 솔로몬이 왕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다윗-솔로몬의 계보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한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2. 그 외 다윗의 용사들 명단(26~47절)
이 단락은 다윗의 30인 용사와 그 외의 용사들에 대한 명단이다. 30인 용사의 명단은 지역적으로 베들레헴에서 시작해서 점점 더 온 이스라엘로 확장되어 마지막에는 이방인의 명단이 나온다. 사무엘하 23:24~39에서는 30명의 용사만 언급하고 끝나지만, 본문은 41~47절까지 16명의 용사의 이름을 더 소개한다.
26~41절은 “군사 중의 큰 용사”로 표현된 30명의 용사 명단이다. 사무엘서와 명단이 동일한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아사헬(26절)부터 후래(32절)까지는 대부분 베들레헴 근처 유다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다. 특징적인 것은 제일 먼저 소개된 아사헬은 요압의 아우로 발리 빠른 자였으나 아브넬을 쫓다가 죽임을 당했다. 일찍 죽었음에도 다윗의 30 용사 명단에 들었다. 스루야의 세 아들 중 아비새와 아사헬은 “다윗의 용사”로 기억되지만, 가장 많은 업적을 이루고 다윗이 왕이 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요압은 이 명단에서 빠져 있다. 그는 한편으로는 다윗에게 충성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분노와 욕심대로 행동하였고 불의한 짓도 많이 저질렀고, 결국 솔로몬이 아닌 아도니야를 왕으로 선택하며 다윗을 반역하고 만다. 성경은 끝까지 충성하는 자는 영웅으로 기억하지만, 자신의 욕심을 앞세운 사람은 영웅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33절부터는 이스라엘 전역과 이방에서부터 온 용사들의 명단이다. 이것은 다윗의 용사들이 다양한 지파와 종족들이 섞여 있는 열린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묵상하면서 진실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추구하며 나아가는 더온누리 공동체에 다양한 성도들이 모이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닫게 된다. 순혈주의에 함몰된 것이 아닌 누구라도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들오기 수월하도록 유연하게 열려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41절에 헷 사람 우리야의 이름이 눈에 띈다. 그는 다윗이 강간하여 임신시킨 후 그 범죄를 덮기 위해 죽인 밧세바의 남편이다. 에스라는 우리야의 이름을 남겨둠으로써 백성들이 충성된 우리야와 다윗의 범죄 사실을 기억하도록 유도한다.
41b~47절은 사무엘하 23장에는 없는 내용이다. 이 목록에 의해 다윗의 용사는 47명이 된다. 용사들의 출신과 지역이 더 확대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요단 동편의 르우벤과 므낫세 자손의 후손도(42~43절) 있고 44절의 아스드랏은 바산에 위치한 레위인 성읍이다. 46절 마하위는 마하나임으로 추정되고, 46절에서 모압 사람 이드마, 47절의 므소바는 아람 조바 왕국을 가리킨다. 이들이 모두 다윗을 지지하는 대표자들이다. 에스라는 다윗이 이렇게 온 이스라엘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왕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명단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 선택하신 사람에게는 그 일을 함께 이루어나갈 사람들을 보내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 나라 일은 개인의 출중한 능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서로 협력하여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한 개인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같은 유다 지파뿐 아니라 다양한 지파에서 다윗에게 충성한 용사들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들(38-41절)도 있다. 참 신기하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 다윗은 편협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인간관은 특정 지파, 특정 민족에 얽매여 있지 않았다. 충성된 사람이라면 이방인이라도 용사로, 지도자로 세웠다.
-이는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가는데 중요한 요소다. 함께 하는 하나님 나라의 용사들의 출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충성됨이 중요한 것이다. 다윗은 이를 잘 알았다. 사람을 바라보는데 배경(지역, 지파, 인종등)을 보지 않았다. 가치를 바라보았다. 함께 할 충분한 자세(충성심)이 있는가이다. 다윗의 세계는 유다에 국한 되지 않고 전 이스라엘을 넘어 주변 이방 민족들까지 열려 있었다. 이 부분은 특히 전임 왕이었던 사울과 비교된다. 사울은 철저히 베냐민 지파 우선이었다. 그의 집안이 먼저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보다는 자신의 권력이 먼저였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목양을 하면서 주님께서 분명하게 깨닫게 해 주신다. 함께 할 성도의 면면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다양한 성도들을 품을 수 있는 나의 그릇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다윗 리더십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함께 감당해 나가기 위해 인간적인 기준이 앞서는 선입견보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경계를 짓지 않고 받아들이는 다윗의 너른 혜량이 부럽다. 나의 목양의 현장에서 이와 같은 리더십이 성숙하게 발휘되기를 기대한다.
-이름이 기록된 이들은 “충성”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이들은 충성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어떻게 충성 했는가도 굉장히 중요하다. 역대상 11장은 이를 잘 드러낸다. 다윗에게 가장 충성했다 할 수 있는 요압은 “용사”의 칭호가 붙지 않았다. 그는 다윗의 뜻대로가 아닌 자신의 뜻과 방법대로 충성하였기 때문이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 다윗 앞에서 충성이라는 형식을 취했을 뿐이다. 그러나 “용사”들이라고 칭함을 받은 나머지 사람들은 다르다. 그야말로 우직하게 다윗의 뜻을 따라 살아갔다.
-이들이 어떻게 다윗에게 충성 할 수 있었을까? ‘브나야’가 힌트이다. 브나야의 기록을 곰곰이 곱씹으면 딱! 다윗이다. 다윗의 소년 시절이 딱 브나야의 용맹함 이야기이다. 사자를 죽인 것과 키 큰 애굽사람(230cm)을 죽이는 모습… 딱! 다윗이다. 충성은 따르는 리더를 닮아간다는 것이다. 다윗의 용사들은 다윗을 따르며 그를 닮아간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의 무엇을 닮아갔을까? 두말할 필요 없다. 다윗의 신앙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오는 용맹함이다. 목동시절 치던 양을 보호하기 위해 사자를 죽인 일, 골리앗을 상대할 때 그의 신앙고백,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얼마든지 기회가 되어 그를 죽일 수 있었어도 하나임을 경외함으로 절제한 것, 이방지역으로 도망 다녀도 결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하지 않았던 담대함, 이방 사람이라 하여 무시하지 않고 능력을 인정하고 품을 수 있는 대범함…. 이루 말할 수 없다.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에게 충성을 다한 것이다. 다윗을 따랐던 용사들은 그를 닮아 그처럼 그를 힘껏 도운 사람들이다.
*바울이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 예수님의 좋은 병사는 함께 고난을 받는 병사이다. 잘 싸우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의 좋은 병사는 예수님처럼 고난을 함께 받는 자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충성이다.
*주님을 위한 충성은 나를 만족 시키는 사역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처럼 닮아가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충성이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야 한다. 그것이 ‘충성’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주님 앞에 충성하는 것은 “요압”의 충성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위해 주님처럼 사는 것은 다윗을 다윗처럼 따른 “용사”들의 충성이다.
*다윗과 그의 용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목양이라는 항해를 하는 나에게 등대의 불빛처럼 길을 안내 받는다. 다윗처럼 열린 리더십, 그를 따른 용사들처럼 충성되이 감당하되, 나를 위한 충성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충성… 마땅히 걸아가야 할 하나님 나라의 제자된 삶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목양을 감당하다보면 인간적인 나를 위한 충성하는 기대의 유혹이 나를 심란하게 한다. 하지만 분명한 길을 깨우치신다. 충성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주님의 뜻, 주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 우리가 세운 계획대로가 아닌 주님께서 지도하시는 대로(잠 16:9) 기꺼이 받아들이며 나아가야 한다.
*주님 다시 이 땅에 오셔서 이름들을 호명할 때 나의 이름이 충성된 자로 불리기를 다짐하고 또 다짐해본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끝까지 순종하신 것처럼, 그 예수님처럼 끝까지 충성하고 또 충성하리라.
*주님, 다윗의 용사로 불리기까지 그들이 통과했어야 할 인고와 충성의 시간들을 짐작하게 됩니다. 그 과정이 다윗의 30용사로 기억되게 했습니다. 저도 주님을 위한 인고와 충성의 시간을 기꺼이 감당하며 주님의 사람으로 불림을 받고 싶습니다.
*주님, 다윗의 30용사들은 다양한 가문, 지파 출신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용사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출신과 배경, 혈연과 지연에 얽매이지 않고 철저히 능력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끝까지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내기를 결심합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 들어오려는 무수한 영혼들을 맞아들이는 유연하고 품이 너른 공동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