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3:1-14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을 통해 배우는 교훈
다윗은 기랏여야림에 오래 방치된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길 계획을 세운다. 지도자들과 백성도 이에 동의한다. 매우 치밀하게 준비하여 성대하게 궤를 옮기지만, 궤 이송 준비와 과정이 철저히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을 놓쳐 이송 축제의 자리에 큰 슬픔이 찾아온다. 결국 궤는 예루살렘이 아닌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머물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그의 집에 임한다.
13~16장은 한 단락으로 다윗이 언약궤를 들여오는 이야기다. 본 장은 첫 번째 언약궤 이송 실패 이야기이고, 14장은 다윗 성 건설과 예루살렘에서 얻은 자녀들 명단 소개, 15장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무사히 가져오는 이야기, 16장은 언약궤를 다윗 성에 두는 행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다룬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상징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정착한 후로 하나님이 택하신 곳(신 12장)에 두어 언약 백성의 삶과 예배의 중심이 되었다. 다윗 당시 성막은 기브온에 있었고 궤는 아비나답의 집에 따로 보관된 상태였다. 성막은 가나안 정착 아래 사무엘 때까지 대부분 실로에 있었다(수 18:1; 삼상 3:21). 언약궤는 종종 승전을 위해 전쟁터로 옮겨졌는데(삿 20:27; 삼상 4:3; 14:18; 삼하 11:11), 사무엘 당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빼앗기고 만다(삼상 4:22). 궤는 일곱 달 동안 블레셋에 있을 동안 재앙이 내리면서 몇몇 도시로 이동했다가, 마침내 이스라엘의 기랏여아림으로 옮겼졌다(삼상 5:~7:2). 기랏여야림은 유다 땅의 바알라로서 유다의 북쪽 경계 부근이며, 기브온 서남쪽 8km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기랏여아림 사람들은 언약궤를 받아서 아비나답의 집에 두었고 다윗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다윗이 언약궤를 옮기려 한 이유는 자신의 지도력이 하나님의 통치와 함께 한다는 것을 공인받는 한편 백성들에게 언약의 축복을 가져다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언약궤를 운반하는 데 이방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쓰라린 좌절을 맛본다.
1.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길 계획을 세움(1~4절)
다윗은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기 위하여 지휘관들과 백성들과 의논한다. 1절은 천부장과 백부장 등 산하들과 의논하고, 2절은 온 회중을 설득하는 장면이다. 다윗은 상당히 조심스러운 표현을 통해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이라는 말을 통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겠다고 말한다. 첫째, 백성들과 신하들의 동의와 둘째, 여호와 하나님의 허락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함께 참여할 백성들의 동의를 먼저 얻겠다는 것이고, 여호와의 것인 언약궤를 옮기는 것이므로 여호와의 허락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3절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와야 할 이유를 “사울 때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라는 표현을 통해 밝힌다. 사울 시대에는 여호와께 대한 제대로 된 예배도 없고 신앙도 없어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역대상 10:13~14에서 에스라는 사울이 망한 이유를 여호와를 찾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윗의 말에 모든 백성은 그의 말대로 언약궤를 가져오기로 동의한다(4절). 이 부분은 사무엘하 6장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에스라는 다윗이 정치적인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 언약궤를 가져온 것이 아닌, 백성들의 동의하에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언약궤를 가져왔음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냈다.
2.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 옮김(5~8절)
5절은 언약궤를 가져오기 위해 온 이스라엘 백성을 모은다. “애굽의 시홀부터 하맛 어귀까지”라고 이스라엘의 경계를 표현하는데, 에스라는 당시 실제 다윗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 아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땅을 이스라엘 땅으로 여기고 있음을 드러낸다. 6절은 하나님의 궤에 대한 설명인데 이는 하나님의 궤가 무엇인지 모르는 세대를 위한 배려다. 역대기는 포로에서 돌아온 후 주전 450년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바벨론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7~8절은 언약궤를 가져오는 장면이다.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싣고 다윗과 온 이스라엘은 온갖 악기를 연주하고 춤추며 즐거운 축제의 행렬을 이루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언약궤 앞에서”라는 뜻이지만, 백성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가 여호와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면서 여호와의 실존을 기억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항상 그들과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며 더 큰 복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소가 끄는 새 수레에 싣고 오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이 벧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으로 하나님의 궤를 보낼 때 사용한 방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는 레위인이 어깨에 메고 옮기라고 명령하셨는데, 다윗과 신하들은 언약궤를 옮기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원래 옮기는 방법을 기억하지 못하고, 이전에 이방인들이 궤를 옮긴 방식을 따라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고 만 것이다.
3.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둠(9~14절)
언약궤를 실은 수레가 기돈의 타작마당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소들이 궤를 떨어뜨렸고, 수레를 몰던 웃사는 다급한 마음에 궤가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손으로 붙잡는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법궤를 손으로 잡은 웃사에게 진노하시고 그를 쳐서 죽이신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기쁨의 축제가 갑자기 공포의 장으로 바뀌고 만다.
하나님께서 웃사를 죽이신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레위기에서 법궤는 가장 거룩한 것으로 대제사장만이 접근할 수 있고, 제사장만이 멜 수 있으며, 절대 다른 사람이 만지거나 다른 방식으로 운반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웃사는 법궤를 보호하려는 급한 마음에 법궤를 만짐으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해하고 만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까이 계시고 우리를 지키는 보호자이시지만, 한편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높으심과 거룩하심을 인정하는 거리를 두어야 하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다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위대하신 존재다.
11절에서 다윗은 이것에 대해 분노하는데, 10절의 하나님의 진노를 대변한 분노였다. 눈앞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실감한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법궤를 자신의 집에 가져가는 일을 꺼리게 된다. 다윗은 법궤를 통해 자신과 자신의 왕조가 더욱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법궤 때문에 오히려 재앙을 받을 수도 있음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임했다. 우리 삶 속에서 갑자기 만나는 재앙이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의 크심을 발견하듯이 승승장구하던 다윗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더욱 단단히 자리 잡게 된다.
다윗은 법궤를 두려워한 나머지 원래 예루살렘의 다윗 성으로 옮기려는 계획을 틀어 오벧에돔의 집에 임시로 두게 된다. 석 달 동안 오벧에돔의 집에 법궤가 있었고, 그동안 하나님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분만도, 복 주기만 하는 분만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말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면 가까이하시며 복을 주시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성을 함부로 침해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면 멀어지고 재앙을 내리시는 분이시다.
에스라는 다윗의 약한 부분이나 부정적인 부분을 거의 드러내지 않지만, 본문에서는 사무엘하 6장의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옴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두려움을 숨기지 않는다. 이는 에스라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긍정적인 모습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다윗의 통치관이 확실히 드러난다. 길고 긴 도망자와 광야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긴밀한 동행하심을 경험했을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된 이후 더욱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구하며 통치하기 위해 실천에 옮긴다. 다윗은 늘 하나님께 묻고 싶었다. 이는 ‘사울의 때에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다(3절)’는 그가 궤를 옮기려는 명분을 곁들이며 분명하게 드러낸다. 하나님을 늘 찾기 위해 다윗이 나섰다(3-4절).
*다윗의 마음이 참 기특하다. 묵상하면서 마음의 감동이 절로 온다. 통치를 막 시작하면서 그가 온통 마음에 두었던 것은 경제, 외교 정책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던 10여년의 시간,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 7년 반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늘 함께 하여 주신 하나님이 가장 우선되는 관심사였다. 평소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자세가 분명하게 통치력에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을 찾고 그에게 구하는 것이 그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하나님이 최고의 관심사라니 세상에 이런 왕이 없다.
*다윗의 리더십이 다시 한 번 주목을 끈다. 아무리 좋은 의도의 계획이라도 일방적이 아니라 소통과 공감을 이끌어 내어 함께 동참하도록 이끈다. 법궤를 운반하는 일이 전 이스라엘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기에 더욱 ‘온 이스라엘이 함께’하기를 원했고 이스라엘도 기꺼이 이 일을 좋게 여겨 함께 한다. 아무리 하나님의 감동으로 어떤 사역을 시작하더라고 백성이 좋게 여기고, 또 하나님께로 말미암아야 한다는 그의 리더십이 도전을 준다. 목사로서 개인의 감동이 곧 하나님의 감동이니 교회와 성도들은 그저 따라주면 된다는 막무가내식이 아니다. 충분히 성도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마음을 다독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한다.” 지금 딱! 나의 상황에 어울리는 말이다. 말씀의 가치로 성도들의 마음을 다독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고 누리게 하는 것이다. 주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기대한다.
*또한 아무리 선한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모두가 하나 되어 진행하는 축제의 일이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살피지 않는다면 아무리 큰 성과를 이룬다 한들 그것은 비극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결과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나는 잘 안다. 이 사건을 통해 분명하게 깨닫는다. 모든 의도와 목적, 그것을 이루기 위한 합의, 이후 힘을 다한 열정을 바쳤더라도 단번에 수포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가장 기본중의 기본인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살피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선한 의도로 시작하였더라도 더욱 말씀안에서 방법을 찾고 또 점검했어야 했다. 법궤를 옮기는 축제는 하나님을 위한 축제였으나 결국 하나님이 없는 축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을 늘 찾기 위해 의욕적으로 나선 길,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소외 시켜버렸다. 내 삶속에 일어 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말씀을 늘 살피는 것이 실제적으로 행하는 삶의 많은 방법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선한 의도로 하나님을 위해 당차게 시작하였더라도 말씀 안에서 늘 나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 나의 기쁨과 축제가 아닌 하나님의 기쁨과 축제가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나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한 대로 감당할 때 주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기쁨이 변하여 슬픔이 된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은혜는 나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역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길은 나의 기쁨이 주님의 기쁨인 것이 되기를 늘 주님의 말씀으로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도 빛이 되어 주신 말씀의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을 찾되 감정과 계획, 목적으로 찾지 않고 말씀안에서 찾아야 겠다. 나의 목적에 주님의 일을 끼워 맞추지 않고 말씀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목적을 먼저 찾아야 하겠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사역이라고 하지만 실제 하나님이 없는 사역이 얼마나 많을까? 그렇기에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안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에 집중해야 하겠다. 사람들의 합의보다, 하나님 앞에 지켜야 할 선을 먼저 지키는 사역이어야 하겠다.
*주님, 다윗의 리더십이 눈에 띕니다. 명령만 해도 충분할 것이지만, 지휘관들과 신하들 백성들과 직접 소통하며 그들의 마음을 얻는 모습이 감동입니다. 저에게도, 이 나라의 새로운 지도자도 이런 자세가 중요할 듯 합니다. 늘 두루 살피며 사역하겠습니다.
*주님, 아무리 선하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위한 일을 할지라도 주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의 절대성을 잊지 않겠습니다. 늘 주의하겠습니다.







